[ 저주를 풀 방법은 당신과의 접촉뿐 ]


#01
“그동안 남자들을 만나고 다녔던 게 저주를 풀기 위해서라는 거군.”
“아, 네. 그렇…….”
“남편인 나를 두고.”
“……네?”
“남편인 나를 두고 다른 새끼랑 그 저주라는 걸 풀 셈이었다는 거잖아.”
그야 네가 손끝 하나 못 대게 했으니까.
“……저, 디아르트?”
난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무언가 생각하듯 입을 꾹 다문 디아르트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졌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튀자.’
슬쩍 문을 힐끔거리던 그때였다.
“괜찮아.”
전혀 안 괜찮은 목소리로 디아르트가 입을 열었다.
“다신 그럴 일 없을 테니까. 그렇지?”
그동안 내게 납작 엎드리던 모습만 보았던 터라 잊고 있었다. 그가 원래는 어떤 사람인지.
“하지만 애초에 그럴 일이 없도록 만드는 게 좋겠군. 남편으로서 저주에 걸린 아내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빙긋 웃는 얼굴이 이렇게 무섭기 있니?
“아니, 괜찮…….”
“걱정 마, 로에니. 내가 그 빌어먹을 저주를 확실히 풀어 줄 테니.”
천천히 다가오는 디아르트에게 밀린 난 뒷걸음질을 쳤다.
“디, 디아르트……”
나를 직시하며 톡톡 단추를 푸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얘 눈이 돌았는데?!’
엄마야!
침대에 무릎이 걸린 난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기울어지는 시야로 낯익은 침대 천장이 들어오자 지난날들이 빠르게 되감아지기 시작했다.
* * *
어? 나 분명 죽었는데? 눈이 감기면서 귓가로 삐- 하고 심장이 멈추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얼음이 맺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곤 가만히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온갖 아르바이트에 단련되어 뼈마디가 굵었던 손가락이 물 한 방울 안 묻혀 본 사람처럼 하얗고 가늘었다.
거기에 TV에서나 본 듯한, 과장을 조금 보태서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백금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하지만 나를 경악하게 만든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내 손이 닿고 있는 피부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근육이 단단하게 잡힌 가슴을 지나 날이 선 강인한 턱선까지 눈을 들어 올리던 나는 그대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 잘 빚어진 콧대와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까지.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이었다.
넋을 놓고 한참을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나는 다음 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지만 결 좋은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황금빛 금안이 나를 형형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그의 입술이 한쪽으로 비틀렸다.
“잠자는 사람을 덮치는 취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나는 그제야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나는 지금 침대에 누워 있는 잘생긴 남자를 깔고 앉아 앞섶을 벌린 채로 침을 흘리고 있었다.
“비켜.”
“헉!”
그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나는 얼른 그의 탄탄한 가슴을 짚고 있던 손을 치우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그만 중심을 잃는 바람에 꼴사납게도 뒤로 발라당 넘어가고 말았다. 몸을 반쯤 일으켜 앉은 남자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푹신한 침대에 대자로 누워서 정교하게 조각된 침대의 천장을 보며 눈만 깜박이던 나는 순간 멍청한 생각을 했다. 여기는…….
‘천국인가?’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됐다. 분명 죽었던 내가 이 호화롭기 그지없는 방에 말도 안 되게 잘생긴 남자랑 누워 있는 건 전생에 너무 힘들게 살았던 나를 위해 신이 세팅해 놓은 거야!
‘이왕이면 다정한 남자로 붙여 주시지.’
잘생기기만 했지 싸가지라고는 쥐뿔도 없어 보이는 이런 남자보다는 수줍음 많은 살가운 남자가 취향이었던 나는 입맛을 쩝 다셨다. 그래도 신이 있기는 있구나. 생전 믿지 않았던 신의 존재에 대한 신앙심이 막 치솟았다.
“하다 하다 이제 몸으로 들이미는 모양인데, 난 조금도 동하지 않으니까 당장 내 방에서 나가, 로에니 휘턴.”
나를 내려다보는 금안에 짜증이 깃들었다.
‘어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익숙한 이름인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남자의 필터 없는 말투에 빈정이 상해 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근데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싸가지를 밥 말아 먹었어?’
남자에게 한마디 쏘아붙일 요량으로 몸을 일으키던 그때였다.
“시종들에게 질질 끌려 나가고 싶은 모양이군.”
싸가지로 인해 잘생김이 약 십 프로 정도 하락한 남자가 살벌하게 이죽거렸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종으로 향하는 그의 기다란 팔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나는 순간 뒤통수를 강하게 때리고 지나가는 자각에 숨을 들이켰다.
본능적으로 남자의 팔을 붙잡자 그가 신경질적으로 뿌리쳤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조금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나는 지금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은발.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 저 재수 없는 말투!’
남자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본 나는 내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다가 아까부터 시야 끝에서 찰랑거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확 움켜쥐어 내려다보았다.
‘보라색이야…….’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로에니 휘턴. 나는 그제야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나는! 믿을 수 없게도 내가 가장 좋아하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의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는 저 남자는 분명 로에니 휘턴의 남편. 그러니까 이제 내 남편인 디아르트 휘턴 공작이었다.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오 쉣!
내가 정말 로에니 휘턴에 빙의했다면 나는 곧 이 재수 없는 놈한테 죽을 운명이었다. 그것도 이놈이 좋아하는 여주를 질투해서 죽이려고 했다는 수치스러운 죄목으로!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와중에 하나는 확실했다.
‘망했네.’
그러나 나는 곧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적응할 틈도 없이 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때까지만 해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 * *
“확실히 꿈은 아니야.”
몇 번이고 꼬집어 봐도 똑같다. 오랜 병상 생활로 푸석했던 피부는 매끈매끈하니 탄력이 넘쳤고 또 무척이나 아팠다.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많은 로판 소설들이 현실에 살던 여주인공이 책 속으로 빙의하면서 시작된다. 나도 몇 번이나 소설 속에 빙의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진짜로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차라리 아델리아로 빙의시켜 주지.’
밝은 성격으로 어렸을 때부터 주위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는 아델리아를 나도 사랑했다. 이왕이면 아델리아로 빙의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내가 그렇게 욕을 하며 저 이물질 좀 빨리 치워 달라고 댓글까지 달았던 로에니라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고.
여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곧 고개를 바로 들었다.
“아니지, 아니지.”
아델리아 맥그리거. 나중에 내가 얼마나 그녀를 안타까워했던가. 그녀는 참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지만 안타깝게도 남자 보는 눈이 없었다. 그녀 옆에 있는 수많은 남자들 중에서 하필이면 고른다고 고른 게 그 디아르트 휘턴이었으니까.
디아르트 휘턴. 그 새, 아니 그놈은 그냥 미친놈이다. 고작 여주와 춤을 췄다는 이유로 웃으며 사람 목을 뎅강 자르는 게 정상은 아니지. 그 말도 못 할 집착과 잔혹함에 나는 그 새, 아니 그놈이 진짜 여주를 사랑하는 게 맞는지조차 의심됐고, 결국 정중하게 댓글까지 달았다.
「작가님, 남주 좀 바꿔 주시면 안 될까요? 아델리아가 너무 불쌍해요. 흑흑.」
어젯밤 결국 시종을 불러 나를 질질 끌고 나가게 만들었던 얼굴이 떠오르자 절로 이가 갈렸다. 거봐, 역시 그놈은 못 써!
한참 디아르트를 향해 욕을 내뱉던 나는 자세를 바로잡아 앉았다. 생각해 보니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나…… 살아 있잖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일단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 게 어디야.
게다가 그냥 살기만 한 것도 아니다. 로에니 휘턴은 결혼 전엔 공작가의 영애였고 지금은 돈 많은 공작가의 마님이다. 디아르트에게 죽을 운명만 피한다면 내 구질구질하던 인생도 핀다는 소리였다.
디아르트에게 죽을 운명을 피하는 방법? 그거야 쉽지.
‘이혼하면 되잖아!’
그놈은 내가 이혼하자고만 하면 덥석 물 테니 이혼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혼자 살아가려면 돈이 많을수록 좋으니까 이혼이 성립될 때까지 돈이나 좀 모으면서 디아르트를 피해 다니면…… 아니, 잠깐만. 디아르트랑 아델리아가 벌써 만난 건 아니겠지?
“저기, 황태자 전하의 생일이 언제야?”
난 내 옆에 쥐 죽은 듯이 서 있는 갈색 머리의 어린 하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갑작스럽게 질문을 받은 하녀가 어깨를 파들 떨었다.
“네, 네?”
뭘 물었다고 저렇게 겁에 질린 눈동자를 하나 싶었는데 이내 원작 속 로에니의 불같은 성미를 떠올린 난 납득할 수 있었다.
‘평소의 로에니라면 무서워할 만하지.’
하지만 난 진짜 로에니가 아니었고 그녀를 흉내 내어 이 아이를 겁줄 생각도 없었다. 난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황태자 전하의 생일 말이야. 얼마나 남았어?”
“아…… 사, 삼 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던 하녀가 퍼뜩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삼 개월이라…….”
좀 빠듯하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디아르트와 아델리아는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처음 만나게 될 것이다.
그로부터 반년 후 반란을 일으킨 디아르트가 나를 죽일 테니 나에겐 약 9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전에만 어떻게든 이 휘턴가를 벗어나면 되는 거야.
좋아, 일단 내일 당장 이혼 서류부터 가지러 가자.
“오케이.”
소설에 빙의했다는 비현실적인 사실은 더 이상 내 머릿속에 없었다. 난 이제 로에니 휘턴이니까!


#02
내게 닥친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마음도 먹었겠다, 한동안 살게 된 공작저의 구조를 익히겠답시고 호기를 부린 것이 사달이었다.
망할 놈의 저택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었고 어느새 내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온다고 할 때 놔둘걸.”
뒤를 따르겠다고 한 하녀를 두고 온 것이 이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다.
“아 도저히 안 되겠다. 어디라도 좀 쉬었다 가야지.”
익숙하지 않은 구두 때문에 종아리가 터질 것 같던 난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마호가니 문을 열었다. 엄청 육중해 보여서 힘을 꽤 주어야 할 것 같았는데 문은 생각보다 부드럽게 밀렸다.
제발 소파가 있었으면 좋겠다. 침대가 있는 방이면 더 좋고.
기대를 갖고 문을 활짝 여니 쿰쿰하니 오래된 책 냄새가 확 풍겨 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건 고개를 한껏 꺾어야 맨 위에 있는 책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키 높은 책장들이었다. 어릴 적에 보았던 동화 애니메이션 속 서재와 꼭 닮은 풍경에 난 숨을 들이켰다.
“우와…….”
2층까지 빼곡하게 차 있는 책들을 보고 있으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그때 내 시야에 투명한 돔 뚜껑에 덮인 채 책장에 놓여 있는 장미꽃 한 송이가 보였다.
“저게 뭐지?”
책으로 빼곡히 들어찬 서재에 딱 한 송이의 장미가 유리 돔 뚜껑에 덮여서 놓여 있는 게 이질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그 장미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옅은 안개 같기도 하고 햇빛이 굴절되어 반짝이는 무지개 같기도 한 그것은 기묘하게 시선을 빼앗았다.
난 2층과 연결되어 있는 계단을 오르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그 장미꽃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의식하지 못했다.
가까이서 마주한 장미꽃은 비현실적으로 신비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하긴 나 지금 소설 속이지?”
그것도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이다. 이런 것쯤 이 세계에선 그렇게 특이할 것도 없겠지. 나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사람 심리가 그렇잖아? 이렇게 만지지 말라는 듯이 뚜껑까지 닫아 놓으면 괜히 한번 건드려 보고 싶은 거.
난 잠시 고민했다. 이걸 한 번 건드려 봐, 말아?
“왜 이렇게 만져 보고 싶지?”
평소 같으면 별 시선도 안 갔을 꽃 따위가 왜 이렇게 유혹적으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나 좀 만져 달라는 듯이 빛을 뿜뿜 해 대는 게 너무나 탐스러웠다.
함부로 건들면 안 될 것 같은데 머리 한쪽에서 누군가 자꾸만 만져 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래, 살짝만 만져 보자.’
난 지체 없이 유리 돔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장미꽃이 더욱 진한 빛을 내뿜었다. 난 코끝을 찌르는 장미 향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일단 난 맹세코 절대 우악스럽게 장미꽃을 잡아채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냥 톡, 툭도 아니고 톡 하고 내 여리고 가는 손가락을 살짝만 대었을 뿐인데.
“이, 이게 왜 떨어져?”
장미꽃이 통째로 툭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난 잠시 말을 잃었다.
꽃잎 하나 떨어졌으면 이렇게까지 당황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뭘 했다고 목이 꺾인 양 송이째 떨어지냐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난 말썽 부린 강아지가 범죄 현장을 은폐하듯이 돔 뚜껑부터 탁 닫았다. 하지만 뚜껑은 투명했고, 대가리가 떨어진 줄기만 화병에 담겨 있는 처참한 모습은 너무나 잘 보였다.
더욱이 방금까지만 해도 돔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신비한 빛마저 사라진 상태였다.
망했다는 생각이 뒤통수를 치고 가면서 한 가지 무서운 궁금증이 솟았다.
“이거…… 비쌀까?”
비싸겠지. 그러니까 유리 돔 안에 고이 넣어 두기까지 했겠지. 아니, 그런 걸 왜 그렇게 아무 데나 놔두냐고. 책이라도 꺼내다가 떨어트리면 어쩌려고!
아무리 자기 합리화를 하려고 해 봐도 결국 모든 건 애초에 함부로 건드린 내 잘못이라는 생각을 도무지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도망치듯 서재를 빠져나와 내 방으로 돌아온 난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혼 전에 돈 왕창 끌어모아서 행복한 꽃길을 걷겠다고 희망찬 결심을 한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이런 시련이 닥치는 건지 모르겠다.
‘빚이라면 지긋지긋한데…….’
이제 믿을 건 세 가지였다. 첫째, 로에니 휘턴에게 이미 돈이 넘치고도 남을 만큼 있다. 둘째, 빛나는 장미꽃 따위는 100송이도 우습게 살 수 있을 만큼 휘턴가에 돈이 넘치게 많다. 셋째, 사실 겁나 흔한 장미꽃이라 얼마 안 한다.
……셋 중 하나라도 맞았으면 좋겠다.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토해 내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두 손에 묻은 얼굴을 들지 않은 채 힘없이 들어오라고 말했다.
“저, 마님…….”
아까 본 그 어린 하녀가 쭈뼛거리며 들어와서는 내 눈치를 살폈다.
“지금 주인님께서 연무장에 계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싸가지 없는 새, 아니 놈이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든 말을 타고 춤을 추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가뜩이나 싱숭생숭한데 그놈 얼굴까지 떠오르니 더욱 기분이 가라앉은 난 마뜩잖게 대꾸했다.
그러자 하녀가 당황한 얼굴로 우물쭈물했다.
“보고드릴 시간이라…….”
“무슨 보고?”
“마님께서 주인님의 동선을 매시간 보고하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로에니 휘턴…… 디아르트를 스토킹하는 건 알았지만 이런 짓까지 했었니? 갑자기 더할 수 없는 공감성 수치가 몰려온 난 정말이지 손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름이 뭐야?”
“네?”
“네 이름 말이야. 내가 요즘 깜빡깜빡하네.”
“리, 릴리입니다.”
“그래, 릴리. 앞으로는 그럴 필요 없어.”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 노, 디아르트가 어디 있는지 안 알려 줘도 된다고, 이제.”
“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이 화등잔만 해진 릴리를 보며 난 쓰게 웃었다. 내가 그동안 그렇게 디아르트한테 집착 쩔었니?
“그보다 너 혹시 서재에 있는 장미꽃에 대해 아는 거 있어?”
제발 싼 거라고 말해 줘. 이 세계에선 흔하디흔한 장미꽃 한 송이일 뿐이라고 말해 줘. 나의 간절한 눈빛을 받은 릴리는 다소 부담스러워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서재에 있는 장미꽃이라 함은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왜 그 유리 돔으로 덮여 있는 거.”
“유리 돔이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릴리가 이내 탄성을 내뱉었다.
“아, 혹시 동쪽 서재에 있는 유리 돔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동쪽 서재?”
뭐, 그럼 남쪽 서재나 서쪽 서재도 있단 말이니? 갑자기 빛나는 장미꽃 따위는 100송이도 우습게 살 수 있을 만큼 휘턴가에 돈이 넘치게 많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샘솟았다.
“그거라면 마님도 아시겠지만 굉장히 귀하지요.”
오 망할.
릴리는 순진하고 착한 얼굴로 단번에 내 희망을 짓밟았다.
“굉장히…라면 얼마나……?”
“제가 알기론 선선대의 선선선대. 그러니까 처음 휘턴가를 일구신 시조 어른 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가보니까요. 감히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하겠지요.”
가보까지?
그럼 내가 지금 적어도 몇백 년은 소중하게 물려 내려온 걸 한순간에 망가트렸다는 거잖아.
……망했네.
말문이 막힌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걸 대체 어떻게 수습하지?
“그런데 정말 그 안에 장미꽃이 있긴 하군요. 저희 눈에는 보이지 않아서 사실 그냥 전설 같은 건 줄 알았어요. 그럼 저주에 걸린 장미라는 것도 진짠가…….”
릴리의 눈에는 장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차치하더라도, 나는 여기서 도무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단어를 캐치하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저주?”
“네. 시조 어른의 부인께서 장미꽃에 저주를 걸어 놓으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저 내려오는 말일 뿐일 거예요.”
릴리가 처음으로 살짝 웃었다.
“정말 저주에 걸린 장미라면 주인님께서 그렇게 방치하실 리 없잖아요. 그래도 저희들은 괜히 찜찜해서 절대 건드리진 않지만요.”
나도 찜찜하다. 그 저주에 걸린 가보를 내 손으로 뎅강해 버렸으니까.
릴리의 말처럼 설마 저주에 걸렸을까 싶다가도 이 세계가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이 소설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부터가 설명할 수 없는 판타지였으니까.
‘아니, 근데 이 책에 그런 설정이 있었던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그런 설정이 있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릴리에게 물었다.
“무슨 저주인데?”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주인님께선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아마 릴리는 내가 이걸 핑계로 디아르트에게 달려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른 알 만한 사람은 없어?”
“네? 그, 글쎄요.”
예상과 다른 나의 행동에 당황하던 릴리는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대대로 휘턴 가문의 역사를 적어 놓은 책이 있어요. 그리고 전대 공작 각하들이 남겨 놓으신 일기장도 있고요. 고대어라 저흰 읽을 수 없지만 마님께서는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책? 어디에 있는데?”
“가보가 있는 동쪽 서재에 있다고 들었어요.”
“그것들 말곤 알 만한 사람은 없는 거야?”
“네, 아마도…….”
릴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말 난처한 것은 바로 나였다. 빙의한 지 24시간도 채 안 된 내가 고대어로 쓰여 있다는 책을 읽을 수 있겠냐고.
망할…….


#03
디아르트에게 물어봤자 제대로 알려 줄 리 없으니 일단 못해도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동쪽 서재를 찾았다.
나도 모르게 꼬부랑거리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니 어쩌면 글자도 알아서 맞춤 설정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판단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서재에 들어가자마자 아무 책이나 골라 펼쳤는데 분명 낯선 문자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내용인지 술술 읽혔던 것이다.
나는 내적 환호를 뒤로 하고 릴리가 말한 휘턴가의 역사를 담은 책과 더불어 대대로 가주였던 자들의 일기를 찾기 위해 서재를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나는 완전히 지치고 말았다.
“아니, 뭔 놈의 책이 이렇게 많아!”
수 만권은 될 듯한 책들을 뒤집어엎느라 곱게 차려입은 드레스와 머리는 어느새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 많은 책들을 다 읽긴 하는 거야?”
내 기억에 디아르트 휘턴은 책하고 거리가 멀었다. 소설 속에 묘사된 그의 일과는 하루 종일 연무장에서 기사들과 뒹굴다가 시간이 되면 집무실에 들어가 서류를 보는 정도였다. 그러다 아델리아를 만나게 된 후로는 그녀에게 집착하느라 하루를 다 소비하지만.
그런 놈이 왜 이렇게 쓸데없이 책을 모아 놓은 거야.
기진맥진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책장에 머리를 기댔다.
“언제 찾냐, 진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아침에 가볍게 수프와 빵을 먹고 벌써 몇 시간 째 아무것도 입에 넣지 않고 책만 뒤지고 있어서인지 배가 너무 고팠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뭐라도 먹고 올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저만치에 꽂혀 있는 책 한 권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나는 홀린 듯이 서재 2층 맨 끝 쪽에 꽂혀 있는 책으로 향했다.
무척이나 두껍고 무거운 책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듯 몹시 낡아 있었다. 나는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주저앉았다.
가죽으로 만든 것 같은 짙은 고동색의 표지를 슬슬 쓰다듬다가 천천히 펼친 난 당황했다. 지금까지 본 글자들과는 전혀 다른 생경한 문자였기 때문이다. 근데 더 당황스러운 건 그게 술술 읽혔다는 것이다.
‘빙의 버프인가?’
하긴 원래 로판 소설에 빙의한 여주들은 뭐 하나씩 능력을 갖게 되곤 하니까. 난 그게 언어 능력인 모양이지.
“이왕이면 더 좋은 능력을 주지. 문과는 하등 쓸모가 없어요. 돈을 못 번단 말이야.”
왜 마법을 쓰게 된다거나, 신성 능력을 갖게 된다거나, 하다못해 재봉 기술 같은 거라도 좋잖아.
생전에 문과에 진학했던 일을 매우 후회했던 난 탄식을 내뱉으며 책장을 넘겼다.
“오오오! 이거구나!”
벨릭 제국의 개국 공신인 비스트 휘턴의 업적에 대한 설명을 본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관심 없는 그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빠르게 넘기며 저주에 관한 정보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얼마 후 원하던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
[벨릭 제국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비스트 휘턴 공작에겐 수많은 청혼서가 쏟아졌다. 그중에는 우슬라라고 하는 사악한 요정이 있었는데…….]
우슬라? 사악한 요정? 여기서 난 한번 멈칫했다.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었다.
[심지가 곧고 강직했지만 여자 보는 눈이 없었던 비스트 휘턴은 아름다운 우슬라에게 반해 그녀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 바쁜 나머지 가정을 돌볼 시간이 부족했다. 외로워진 우슬라는 정원에 피어 있는 장미꽃 한 송이에 저주 마법을 걸어 그에게 주었다. 저주의 내용은…….]
내용은? 아주 끊는 게 아침 드라마 급이다. 난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책장을 넘겼고, 이내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장미를 만진 사람은 점점 사지가 마비되다가 반년 후엔 심장이 굳어 죽게 되는 것이었다.]
……죽어? 죽는다고?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뭔데? 그게 뭔데! 난 다급히 다음 문장을 읽었다.
[바로 ‘사랑’이다. 이성과의 접촉이 저주를 점점 중화시키고 종국엔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기꺼이 저주를 받아들인 비스트가 그 핑계로 황실에 휴직 신청을 하고 하루 종일 우슬라와 쿵짝거렸다는 별로 궁금하지 않은 얘기는 뇌리에서 지웠다.
그러니까 이 책의 내용에 따르면 나는 반년 동안 남자와 꾸준히 접촉해야만 살 수 있는, 어디 내놓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저주에 걸렸다는 거구나.
“아니 그런 망측한 걸 왜 그렇게 아무 데나 놔두는 건데!”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고이 모셔 놨어야 할 거 아냐!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책을 내던지려고 한 나는 다시 고스란히 내려놓으며 숨을 골랐다.
혹시 이거 그냥 창조 신화 같은 거 아닐까? 왜 어떤 나라든 그런 허무맹랑한 신화 하나쯤은 갖고 있잖아.
나는 희망을 가지고 다시 책을 천천히 정독했고, 맨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그 희망은 완전히 박살 났다.
“그러니까…… 저주는 진짜라는 거네.”
몇 시간 동안 샅샅이 뒤져 본 책은 저주가 진짜라는 말을 반복했고, 저주에 대한 얘기 말고 나머지는 전부 진지한 역사책과 다를 바 없는 내용들뿐이었기에 나는 이 책의 신빙성에 대해 의심할 수 없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거면 어떻게 갚기라도 하지. 뭐 이런 그지 같은…….”
죽었다가 책 속에 빙의해서 겨우 다시 희망을 가진 나를 또 죽이려고 들어? 남편한테 죽을 운명인 거야 그렇다 치고 이런 민망한 저주까지 걸다니. 이중 트랩이야, 뭐야!
그렇게 날 죽이고 싶냐? 야 이……!
나는 인정머리 없는 신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아냐, 이런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니잖아.”
한참 욕을 하며 씩씩대던 난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생전 갖가지 알바를 전전하며 적응력 만렙을 찍었던 나답게 빠르게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갈 방법들을 고민해 보았다.
일단 저 대가리 꺾인 장미는 아무 장미나 가져와서 교체해 놓자. 릴리도 말했고 책에도 나와 있듯 저 장미는 휘턴 가문에 속한 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모양이니까.
여기서 나는 이를 으득 갈았다. 어쩐지 평소와 달리 이상하게 만져 보고 싶더라니, 장미를 본 사람은 만지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기운이 깃들어 있던 것이다.
휘턴가의 부인으로 빙의한 지 하루도 안 되어 집안의 저주에 휘말리게 된 나로선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아니지, 애초에 이 방에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그래, 내 잘못이다, 내 잘못. 난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몰아쉬었다.
“문제는 저주를 푸는 건데…….”
비스트 휘턴은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으니 쉽게 저주를 풀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자기 아내가 그런 저주를 걸 생각을 못 하게 잘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이게 웬 민폐야?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휘턴가의 시조에 대해 욕을 하던 난 내 처지를 되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로에니 휘턴에게도 남편이 있긴 하지. 디아르트 휘턴이라고 잘생겼지만 재수 없는 놈.
그 디아르트에게 스킨십을 한다?
난 잠시 머릿속으로 그와의 다정한 한때를 상상해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나를 벌레 보듯이 보는 남자인데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어젯밤 제 가슴에 올려진 내 손목을 잘라 버리고 싶다는 얼굴을 하던 디아르트를 떠올린 난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디아르트 휘턴은 얼마 후 나를 죽일 남자였다. 얜 텄어.
“그럼 남은 방법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건데…….”
문제는 내가 아직 유부녀라는 것이다. 물론 곧 디아르트와 이혼할 생각이지만 확실히 서류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몹시도 찜찜했다. 말 그대로 바람이잖아. 바람!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이십여 년을 넘게 살아온 나에게 바람이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신의를 저버린 일이었다.
암만 내가 진짜 로에니 휘턴이 아니라고 해도 내 신실한 도덕성으론 도무지 용납되지 않았다.
‘아, 어떡하지?’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하는 그때 누군가 서재를 열고 들어왔다.
“저…… 마님? 혹시 여기 계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난 2층 난간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날 발견한 릴리가 안심한 얼굴로 말했다.
“저녁 식사하실 시간이에요. 주인님께선 벌써 다이닝 룸에서 기다리고 계셔요.”
“저녁?”
저주에 대한 충격으로 시간 가는 것도, 배가 고픈 것도 잊고 있던 난 고개를 돌렸다. 환하게 햇볕이 내리쬐던 창문에 어느새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문득 소설 속 설정이 떠올랐다. 휘턴가엔 저녁 식사 때 온 가족이 모여야 한다는 가풍이 있었다. 그래서 디아르트도 끔찍이 싫어하는 로에니와 꼬박꼬박 저녁을 함께했었다.
하지만 지금 난 도무지 그놈하고 얼굴 맞대고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냥 여기로…….”
갖다주면 안 돼? 라고 말을 하려던 난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한국 속담에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했다.
다소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 디아르트가 내겐 딱 감으로 느껴졌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찔러나 보자.’
어차피 그놈에게 난 지긋지긋한 스토킹녀였다. 몇 번 더 들이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바가 없었다.
빠르게 결정을 내린 난 벌떡 일어섰다.
“지금 갈게!”


#04
드레스에 묻은 먼지만 대강 툭툭 털고 다이닝 룸으로 향하는 동안 난 내가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디아르트를 찔러보겠다고 결심을 하긴 했지만 어떻게 찔러봐야 할지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여중, 여고, 여대의 안타까운 루트를 밟은 내게 남자는 랜선에서 만날 수 있는 아이돌이 전부였기에 경험치가 거의 전무했다.
내가 한숨을 쉬자 나를 따라오고 있던 하녀들의 어깨가 움칫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거기에 신경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나는 뒤에 있던 릴리를 불렀다.
“릴리, 잠시만.”
“예, 마님.”
긴장한 얼굴로 내 옆에 선 릴리를 바라보던 난 잠시 주저하다가 작게 속삭였다.
“내가 그동안 그 새, 아니 디아르트에게 어떻게 들이댔더라?”
“……예?”
릴리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어벙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나는 그녀의 팔뚝을 쿡쿡 찌르며 대답을 채근했다.
“내가 어떻게 그 노, 디아르트에게 집적댔냐고.”
“그, 그게…….”
곤란한 질문을 받은 릴리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녀가 가감 없이 솔직하게 말하기 힘드리란 건 이해한다.
하지만 책에는 로에니의 스토킹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얼마나 거머리같이 들러붙었는지 묘사되어 있지 않은걸. 난 눈 딱 감고 로에니 휘턴처럼 굴어 볼 생각이란 말이야.
디아르트 휘턴이 내 저주를 풀어줄 거라는 기대는 조금도 없었다. 다만 로판 독자로서 쌓아 온 데이터에 따르면 디아르트와의 이혼 절차는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이다.
‘일단 귀족의 이혼은 황제의 허락이 있어야 하잖아?’
디아르트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작위를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제 힘으로 젊은 나이에 공작 작위를 하사받은 인물이었다.
그만큼 황제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얻고 있었고, 제국 내에서 가장 큰 영지를 소유하고 있을 만큼 영향력이 막강한 인물이었다. 나중에 여자 때문에 나라까지 몰락시킬 만큼 말이지.
물론 지금도 황제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이때의 그는 아직 여주에게 미치기 전이기 때문에 충직한 귀족이었다. 그러니 다른 귀족들의 눈치를 본 황제가 절차를 지키려고 한다면 순순히 따를 것이다.
‘게다가 황제한테 허락을 받는다고 끝도 아니고 말이야.’
황제를 넘으면 그다음은 신전에서 신관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그러고 나서야 시청에 이혼 서류를 넣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절차가 겁나 복잡했기에 내가 지금 당장 디아르트에게 이혼 서류를 들이민다고 해도 도무지 황실 무도회가 열리는 삼 개월 안에 이혼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저주는 열흘 이후부터 발현된다고 했어.’
책에 따르면 열흘의 유예 기간 후 본격적으로 저주가 발현되기 시작하면 천천히 사지가 굳어 간다고 했다. 죽지는 않지만 간헐적인 통증이 찾아올 것이고 그 고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해진다고 적혀 있었다.
통증을 완화 시킬 방법은 이성과의 접촉뿐인데, 유부녀인 지금 내 처지에 남자라고는 재수는 없지만 얼굴은 볼만한 놈 하나뿐이었다. 그러니까 난 어떻게든 얘랑 얽혀야만 살 수 있었다.
삼 개월. 딱! 삼 개월만 로에니처럼 굴어 보자. 디아르트가 아델리아를 만나기 직전까지만 미친 척 들러붙어 있으면서 다른 대책이 있는지 강구해 보는 게 지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어젯밤 나를 노려보던 디아르트의 경멸 어린 표정이 떠오른 난 몹시 억울해졌다.
내 얼굴이 살벌해졌는지 릴리가 움찔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서둘러 입을 뗐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듯 입술만 뻐끔거렸다.
그 입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난 다이닝 룸 앞에 도착해 있었다.
“문을 열겠습니다.”
릴리가 살았다는 얼굴로 얼른 나서서 문을 열었다.
다이닝 룸으로 한 발짝 들어선 난 탄성을 삼켰다. 저택이 웅장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이닝 룸까지 이렇게 화려할 줄은 몰랐다.
사방에 비싸 보이는 액자들이 걸려 있고, 한쪽엔 장작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벽난로가 있었다. 황금빛으로 칠해진 돔 형식의 천장은 정교하게 조각되었는데 그 가운데에 길게 매달려 있는 호화로운 샹들리에가 테이블을 밝혔다.
그래, 내가 탄성을 내뱉은 이유는 바로 그 테이블 때문이었다.
‘이거…… 뭐냐?’
난 내가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묵묵히 식사하고 있는 디아르트를 지나 자리에 앉았다.
내 앞에 놓인 꼴랑 석화 두 개가 담긴 접시보다 당황스러운 건 나와 디아르트 사이의 거리감이었다.
내가 쟤한테 느끼는 심적 거리감이 아니라 진짜 물리적 거리감 말이다.
우리가 마주 앉은 테이블은 그 위로 사람이 몇 명 누워도 될 만큼 길쭉했다. 게다가 조명마저 조도가 낮은 탓에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도무지 포크로는 떨어지지 않는 굴을 손으로 들어 후룩 마시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 저택에 가족이라곤 저랑 나랑 딱 둘뿐인데 왜이렇게 쓸데없이 긴 식탁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로에니처럼 미친 척 들이대 보려고 했건만 이래서야 실수로라도 손가락 한 번 스쳐 보지 못하겠다.
‘일단 가벼운 대화로 간을 좀 볼까?’
순식간에 석화를 클리어한 나는 어떤 화제를 꺼낼지 고심했다.
책에는 로에니가 끊이지 않는 수다로 그를 질리게 만들었다고 쓰여 있을 뿐이라 나는 그녀가 했을 법한 얘기들을 생각해 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 짜냈다.
“오늘도 얼굴에서 빛이 나시네요, 공작님.”
무시당했다.
“아까 연무장에서 검술 수련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디 다치신 덴 없나요?”
또 무시당했다.
“오늘따라 음식이 참 맛있는 것 같아요. 역시 공작님과 함께하기 때문이겠죠?”
이후로도 계속 생글생글 웃으며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디아르트는 나를 한 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마 릴리가 먹기 좋게 발라 주는 메추라기 구이가 아니었으면 더럽고 치사한 걸 참지 못해 포크를 내던졌을지도 모르겠다.
식사를 마친 듯 커트러리를 내려놓은 디아르트가 물 잔을 기울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박차고 나가고 싶지만 모든 가족이 식사를 끝마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집안의 규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앉아 있다는 기운을 풀풀 풍기면서.
나는 메추라기 구이를 내 앞에 앉아 있는 놈이라고 생각하며 잘근잘근 씹었다.
그때 문득 릴리가 저만치에 치워 둔 석화 껍데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입 안에 든 고기를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공작님, 굴 좋아하세요? 전 무척이나 좋아한답니다.”
당연하게도 답이 없었다. 나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공작님 얼‘굴’!”
“…….”
아이돌 팬카페에서 열심히 주접부렸던 경험치를 한껏 끌어올린 덕일까. 처음으로 디아르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물론 멀리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서늘한 표정이었다. 미간이 못마땅하게 좁혀진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전 가끔 공작님께 벽이 느껴진답니다. ……완‘벽’!”
“…….”
“공작님, 신을 믿으세요? 전 믿어요. ……바로 당‘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디아르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응이 있다는 생각에 신나서 떠들던 나는 그만 입을 딱 다물었다. 나를 노려보는 그의 눈빛에 멸시가 어려 있다는 걸 모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못 들어 주겠군.”
냉랭하게 일갈한 디아르트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이닝 룸을 나가 버렸다. 나는 하마터면 그가 나간 문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릴 뻔했다.
‘가풍도 어길 만큼 내 주접이 그렇게 듣기 싫었냐?’
이거 우리 오빠들한테 써먹으면 백퍼 먹히거든? 아주 꺄르르 넘어간다고! 콧대만 높았지 유머 감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
나는 혀를 차며 포크로 빈 접시를 콱콱 내리찍었다. 그러자 릴리가 얼른 살만 바른 고기를 덜어 주었다.
“이 식탁은 대체 왜 이렇게 쓸데없이 긴 거야?”
신경 쓸 놈도 없겠다 마음 놓고 배를 채우던 난 불퉁하게 물었다.
그러자 정신없이 메추라기 살을 바르고 있던 릴리를 포함한 사용인들 모두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난 그들의 난처한 표정에서 ‘그걸 몰라서 묻니?’라는 아우성을 읽고 말았다.
난 릴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랫입술을 꾹꾹 씹던 릴리는 어서 말을 하라는 듯한 나의 무언의 재촉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저번에 마님께서…….”
내가 뭐? 성질 급한 나는 얼른 얘기하라는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들겼다.
“마님께서 앉아 계신 주인님의 종아리를 발로 쓸어 올리셨잖아요!”
릴리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내가?”
“주인님께서 다음 날 당장 이 테이블을 들여놓으셨고요.”
그때 아마 로에니로부터 호되게 분풀이라도 당했는지 사용인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네가 한 짓을 기억 못 해서 묻는 거냐고 내 귀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랬다고…….”
릴리는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그것만으로도 B급 영화에서나 볼법한 철 지난 유혹 장면을 떠올리게 된 난 손으로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아 쪽팔려…….


#05
이 세계에도 B급 영화가 있나. 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로에니 이 기집애야. 난 거울을 노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불쑥불쑥 튀어 나가 팔짱을 끼는 것 정도는 이해한다. 하지만 노골적인 드레스를 입고 책상 위에 다리를 꼬고 앉는다거나 술에 취한 척 엉겨서 귓가에 입바람을 후 불어 넣는 등등…….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스러운 그녀의 행각들을 릴리를 통해 하나하나 들을 때마다 내 낯이 다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디아르트가 질색하는 것도 이해가 돼. 관심 없는 사람이 그렇게 들이대는데 누가 좋아하겠냐고.’
로에니의 말도 안 되는 유혹에 대해 알게 된 난 계획을 철회했다. 빙의 전까진 평범한 사람이었던 내게 그 정도로 얼굴에 철판을 깔 자신은 없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 봐?”
이 말하기도 민망한 저주는 휘턴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것이었으니 디아르트는 응당 내 저주를 푸는 데 일조를 해야 하는 게 사람으로서의 도리고 인지상정이 아닐까.
“아냐. 그놈이 내가 해 달라는 대로 해 줄 리가 없지.”
씨알도 안 먹힐 거라는 데 내 손모가지를 걸 수 있었다.
“베스트는 디아르트와 친해지는 건데…….”
이미 호감도가 바닥을 찍다 못해 반대쪽을 뚫고 나간 상황에서 터무니없는 소리긴 하지만 나는 진짜 로에니가 아니었다.
진짜 로에니는 낯 뜨거운 스토킹으로 디아르트를 질리게 만들었지만 나는 저주만 아니라면 그놈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 상황을 잘만 풀어내면 내가 정 급할 때 새끼손가락 하나 정도는 기꺼이 내줄 수 있는 사이가 되지 않을까?
바람을 피지 않는 한 이혼 전까진 어떻게든 디아르트와 접촉을 해야 했고, 그러려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유리하니까.
게다가 저주뿐만이 아니라 그와 친분을 쌓아 두는 게 앞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디아르트는 아델리아를 사이에 둔 황태자와의 삼각관계에서 그녀를 갖기 위해 나라까지 작살내는 미친놈이었다.
그리고 제가 황위에 오른 후에는 나의 가문인 페이셔 공작 가를 멸문시켰다.
그러니 지금 사이를 풀어 두지 않으면 나중에 나한테 어떤 화가 끼칠지 모른다.
“근데 그놈이 페이셔 가문을 왜 멸문시켰더라?”
단지 로에니 때문이라면 그녀를 죽일 당시에 멸문시켜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한참 후에 그런 걸로 봐선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꼼꼼하게 읽을걸.
그래,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알아봐야지.
일단 내일 당장 수도부터 가야겠다. 로에니와 디아르트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으니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잘못 꿴 단추를 풀어내는 일이다. 그게 뭐냐고?
이혼이지, 뭐야.
* * *
봄이 그렇게 좋냐?
계절은 한순간이고 너희도 한순간이야.
‘망해라, 이것들아.’
나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쌍쌍들을 노려보며 시니컬하게 중얼거렸다.
누군 연애는커녕 결혼식도 못 올려 보고 이혼부터 하게 생겼는데 저렇게 좋다고 붙어 다니는 커플들을 보고 있자니 정말.
“좋겠다.”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고 있던 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눈앞에서 팔랑팔랑 춤을 추고 있는 벚꽃잎을 손으로 휘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너도 앉아.”
“……네?”
옆에 서 있던 릴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가 어떻게 감히 마님과 동석을…….”
“나 이거 혼자 다 못 먹어.”
나는 내 앞에 가득 차려진 갖가지 케이크와 쿠키, 파이 등을 가리켰다. 반쯤 화풀이로 카페 안에 있는 모든 메뉴를 시켰더니 테이블 하나로는 부족해 두 개를 붙여 놓고도 자리가 모자랐다.
“얼른.”
재촉에 릴리가 머뭇거리다가 내 앞에 앉았다. 익숙지 않은 상황에 당황한 듯 눈동자만 굴리는 그녀 앞으로 딸기 생크림 파이를 밀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곧바로 수도로 나온 나를 따르느라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나 파이를 내려다보는 릴리의 눈빛이 반짝였다. 정말로 먹어도 되냐는 듯 보기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조심스레 포크를 움직였다.
파이의 귀퉁이를 잘라 입에 넣은 릴리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맛있어요!”
“그치?”
귀여워라. 꼭 조그마한 몰티즈 같은 릴리의 모습에 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난 점차 빠르게 포크를 움직이는 릴리를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릴리.”
“네?”
막 초콜릿 무스를 입에 넣고 있던 릴리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저만치에 있는 낡은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건물, 얼마면 살 수 있을까?”
내가 가리키는 건물을 본 릴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유를 알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저 건물은…… 너무 낡지 않았나요?”
“그치? 그래도 목이 좋잖아.”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걸요. 저 정도면 1만 골드면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1만 골드면 10억 정도 되는 건가?’
동쪽 서재에서 휘턴가의 역사책을 찾던 중 경제 관련 책을 읽게 된 나는 이 세계의 화폐 가치에 대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싸네?”
“많이 쳐준 거예요. 저렇게 다 기울어져 가는 건물이 수도 안에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릴리, 저 건물은 곧 값이 천정부지로 뛸 거야. 왜냐면 여주가 이 거리를 마음에 들어 할 거거든.
그래서 남주 놈이 황위에 오른 후 이 거리에서 아름답지 않은 것들은 하나하나 무 뽑듯이 뽑아내서 새로 짓지. 오로지 아델리아를 위해서.
정말이지 정신이 헤까닥 돌아 있는 미친놈다운 행동이었다.
나는 그런 디아르트에게 혀를 차면서도 아델리아를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검소하고 소박하기만 해서 디아르트가 보석이며 드레스를 갖다 바쳐도 늘 수수한 차림만 고수했다.
평생을 미친놈한테 저당 잡혔는데 사치 좀 부리고 여기저기에 돈지랄이라도 하면서 살아!
볼 때마다 주먹으로 가슴을 쳤던 기억이 떠오른 나는 얼음이 동동 떠 있는 레모네이드를 단숨에 들이켰다.
‘남주 놈을 실제로 보니까 더 아까워, 우리 아델리아!’
이제라도 남주가 황태자로 바뀔 가능성은 없겠지? 아냐, 그랬다간 더 미쳐 버린 디아르트가 뭔 짓을 할 줄 몰라.
원작은 건드리면 안 되지. 난 고개를 내저으며 빈 잔을 내려놓았다.
“저 건물을 사시게요?”
“응.”
난 산뜻하게 대답했다. 저 건물뿐 아니라 그 옆 옆 건물하고 저쪽에 방치되어 있는 작은 공원도 살 거다.
디아르트 놈이 이 거리를 갈아엎을 때 싹 다 팔아서 한몫 단단히 챙길 생각이니까.
그러고 나면 다른 나라로 튈 거다. 원작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특히 디아르트 놈이랑은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을 평화롭고 따뜻한 나라로 떠나 행복하게 살아야지. 아델리아와 다르게 돈을 펑펑 쓰면서.
물론 그 전에 저주부터 풀어야겠지만. 망할.
“이거만 먹고 바로 살 거야.”
저주 생각에 당이 떨어진 난 금가루가 솔솔 뿌려진 슈를 집어 입에 쏙 넣었다. 아 달다. 역시 자본의 맛.
흡족하게 웃던 난 다음 순간 얼빠진 얼굴로 그대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쨍그랑!
“꺅! 마님!”
놀란 릴리가 포크까지 내팽개치고 벌떡 일어섰다. 난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릴리에게서 시선을 돌려 굳어 있는 점원과 그 뒤에서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쳐다보고 있는 한 커플을 차례차례 응시했다.
그리곤 머리부터 드레스까지 잔뜩 젖어 있는 내 몰골을 내려다보며 축축한 뺨을 손으로 느릿하게 훑었다.
“죄, 죄송합니다, 부인.”
갑자기 벌어진 일에 상황 파악이 되지 않던 난 고개를 숙이는 점원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마님?”
어느새 내 옆으로 달려온 릴리가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과 머리를 닦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걸 어떡해.”
릴리와 점원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멀뚱히 서 있던 커플이 그대로 지나쳤다.
그제야 난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했다.
그러니까, 저 커플이 내 옆을 지나가던 점원과 부딪치는 바람에 그녀가 들고 있던 아이스티를 내가 몽땅 뒤집어쓰게 되었다는 거잖아. 그래 놓고 사과 한마디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테이블에 앉아?
관자놀이에 힘줄이 빠직 서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내 젖은 드레스를 닦는 데 열중하고 있는 릴리와 점원의 손을 조용히 밀어냈다.
잘못한 이들은 따로 있는데 엄한 사람들이 죄지은 양 사과하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마님?”
“부, 부인?”
자리에서 일어난 난 아이스티가 뚝뚝 떨어지는 드레스를 한 손으로 움켜쥔 채 걸음을 옮겼다.
주위의 시선들이 모여드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 난 분노로 보이는 게 없었다.
내가 앞에 서자 젊은 여인과 남자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자신들은 이 상황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관망하는 눈동자를 보자 뒷골이 찌르르 울렸다.
“저기요.”
난 바들거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웃었다.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네?”
“사과하셔야죠.”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커플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저희가 뭘 어쨌다고 사과를 해요?”
“당신들이 점원과 부딪치는 바람에 제가 이렇게 됐잖아요.”
“어머, 그게 왜 저희 잘못이에요?”
여자가 일어서며 쏘아붙였다. 동시에 남자도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따라 일어섰다. 나는 거대한 몸을 위협하듯 들이미는 남자를 향해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뭐, 그렇게 노려보면 내가 쫄 줄 알아?


#06
“여보.”
여자가 남자의 팔짱을 끼며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너 남편 있어서 좋겠다?’
나도 남편 있거든? 물론 1도 소용없는 놈이긴 하지만.
“마, 마님…….”
어느새 뒤에 다가와 있던 릴리가 내 드레스 자락을 소심하게 잡아당겼다. 이 상황이 무척 두려운 모양이었다.
난 걱정하지 말라는 듯 릴리에게 미소 지었다. 혹시 이 남자가 제게 손이라도 올리면 곧바로 신고할 생각이었다. 가게 안에 있는 손님들이 증인이 될 테니 증거도 충분했다.
슬쩍 쳐다본 창문가에서 봄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흠……. 깽값 받기 좋은 날씨군.
“이봐, 어느 댁 부인인진 모르겠지만 말이 심하군. 음료를 엎은 건 저 점원인데 왜 우리한테 시비를 거는 거지?”
“네?”
뭐? 시비?
“사람이 지나가는데 비키지 않은 건 저 점원 아닌가. 직원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가게에 따질 일이지 엄한 사람에게 이런 수모를 주다니. 당장 사과하게.”
“하.”
너무 당당한 태도에 나도 모르게 어이없는 헛웃음이 나왔다.
“제가 실수했네요. 두 분께 따질 일이 아니라 두 분을 제대로 교육 못 시킨 두 분 가문에 따질 일이었는데.”
“뭐야?!”
내 빈정거림에 남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사납게 얼굴을 구긴 남자가 당장이라도 내 따귀를 올려붙일 듯이 손을 들어 올렸다.
“감히 우리 가문을 모욕해?”
“이봐요! 당신, 우리가 누군지 알아요?”
여자도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쏘아붙였다.
“어느 가문인지 말씀해 주시면 당장 편지 쓰죠. 집안 교육을 똑바로 하라고.”
“이… 이……!”
남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는 당신은 어느 가문 사람이죠? 저희야말로 당장 서신을 보내겠어요!”
여자가 소리 질렀다. 그러자 뒤에 있던 릴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 이분은 휘턴 공작 부인이세요!”
“헉!”
남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숨을 들이켰다. 여자도 놀란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휘, 휘턴 공작 부인께 인사드립니다.”
들고 있던 손을 황급히 내린 남자가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아!’
나는 그제야 내가 지금 로에니 휘턴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휘턴 가문은 제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인데다 그 세력이 황가 못지않아 웬만한 귀족들은 명함도 못 내밀었다.
그러니 내 정체를 알게 된 남자의 태도가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작은 깨달음에 잠시 멈칫한 사이, 남자가 슬쩍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빛엔 ‘정말 휘턴 공작 부인이 맞나?’하는 의심이 깃들어 있었다.
탐색하는 듯한 기색에 난 표정을 지우고 등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턱을 치켜올린 채 자작을 내려다보며 목소리를 깔았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노, 노만 웨스턴 자작입니다.”
흠칫 어깨를 떤 웨스턴 자작이 얼른 눈을 내리떴다.
“아, 웨스턴 공. 저도 사과를 해야겠군요. 엄한 사람을 잡았으니까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웨스턴 자작이 고개를 물론 양손까지 필사적으로 저었다.
“저희가 무지해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던 웨스턴 자작이 납작 엎드렸다. 내가 휘턴 공작 부인이라는 걸 알자마자 그렇게나 듣기 어렵던 사과 역시 술술 쏟아 내고 있었다.
“그럼 두 분의 실수를 인정하시는 건가요?”
“네. 저희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해 부인께 곤욕을 치르게 해 드렸습니다. 모두 저희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자작 부인도 아까와는 전혀 딴판인 공손한 태도로 사과했다. 내 심기를 어떻게든 풀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난 겨우 이런 진심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은 사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더욱이 내가 휘턴 공작 부인이 아니라 평민이었거나 저들보다 지위가 약한 귀족이었으면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몹시도 아니꼬웠다.
난 뒤에 서 있는 릴리의 팔을 잡아 앞으로 끌었다.
“우리 릴리도 많이 놀란 모양이에요. 친동생처럼 아끼는 아이가 이렇게 사색이 된 걸 보니 마음이 안 좋네요.”
내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웨스턴 자작 부부가 머뭇거렸다. 평민인 릴리에게 사과를 하는 게 마뜩잖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옆에 버티고 선 나로 인해 그들은 하릴없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구나.”
이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네. 난 웃음을 삼키며 이쪽을 황망하게 바라보고 있는 점원을 불렀다.
“이분에게도 사과를 해야죠.”
“네?”
자작과 부인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사실 제일 놀란 분이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부딪친 곳은 괜찮아요?”
어버버거리며 눈만 깜빡이던 점원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괘, 괜찮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병원에 가 보는 게 좋겠어요. 세상에 심장 뛰는 소리 좀 봐. 많이 놀랐네요.”
나의 압박에 자작 부부가 입술을 꼭 깨물더니 사과했다.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
점원이 당황해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나는 속으로 흐뭇하게 웃으며 손으로 드레스를 들어 올렸다.
“그나저나 공작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직.접. 선물해 주신 드레스인데 이렇게 망가져 버렸으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개뻥이다. 디아르트는 내가 이런 드레스가 있는 줄도 모를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자작의 얼굴은 그야말로 처참해졌다.
“소, 송구합니다. 제가 어떻게든 똑같은 걸 구해 드리겠습니다.”
“맞춤 제작인데 똑같은 걸 구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같은 옷을 구한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그대로 담을 순 없겠죠. 공작님께서 직.접. 손.수. 고르신 단 하나뿐인 드레스인데.”
“그, 그럼…….”
“뭐,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으니 공작님께는 잘 말씀드릴게요.”
나는 크게 선심 쓰는 척하며 말을 꺼냈다.
“그치만 이렇게 젖어서 돌아가면 공작님께서 분명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실 텐데…….”
“괜찮으시다면 이 앞에 있는 레메디아 양장점을 한번 들러 보심이 어떠실지요. 이번에 좋은 신상이 많이 들어왔다고 하던데 제가 부인께 한 벌 꼭 선물해 드리고 싶습니다.”
자작이 제발 그래 주십사, 하는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휘턴가에 밉보였다가 받게 될 불이익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웨스턴 공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 이런. 머리도 다 젖었네…….”
“야, 양장점 옆에 있는 미용점의 실력이 좋다고 하니 그곳도 한번 방문하시지요.”
“참, 우리 릴리 드레스에도 아이스티가 몇 방울 튀었는데…….”
“그럼 이 아이의 의복도 하나 더 구입하지요.”
“아, 여기 점원분의 구두도 끈적거리겠는데요.”
“점원의 구두도 같이 사겠습니다.”
“디저트들이 몽땅 젖어 버려서… 몇 입 먹지도 못했는데 아쉽네요.”
“제가 새 걸로 다시 주문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때문에 카페에 계신 손님들께도 민폐를 끼쳤군요.”
“여기 있는 모든 테이블을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그러실래요?”
나는 싱긋 웃었다. 자작은 드디어 끝이 났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덧붙였다.
“바닥이며 의자에 아이스티가 잔뜩 스며들었던데, 가게에 끼친 피해도 보상해 주시는 거죠?”
인생은 실전이다, 이 새끼야.
* * *
“죄송해요, 마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차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난 릴리의 작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응? 뭐가?”
자작을 엿 먹였다는 흥분으로 상기된 나와 달리 릴리는 잔뜩 풀 죽은 얼굴이었다.
“제가 먼저 나섰어야 했는데 당황한 나머지 그럴 생각을 못 했어요. 제 불찰로 마님께서 곤욕을 치르시게 했어요. 죄송해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애초에 사람 봐 가며 갑질하려던 자작 부부 잘못이니 신경 쓸 필요 없어.”
“하지만 배행인으로서 마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는걸요.”
난 이제 겨우 열일곱 정도밖에 안 되었을 릴리를 보며 쓰게 웃었다. 한창 친구들하고 뛰어놀 나이에 벌써 이렇게 윗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 쓰였다.
“괜찮다니까. 그보단 새 드레스를 어디에 입고 갈지 고민이나 하렴.”
릴리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드레스 상자를 눈짓하며 말하자 그녀가 상자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무언가 얘기하고 싶은 듯 한참 입술을 달싹이던 릴리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요 며칠, 마님이 좀 낯설어요.”
“응?”
“제가 그간 봬 온 마님 같지 않아서요.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달까.”
쿨럭. 마른 사레가 걸린 난 여기서 기침하면 제 발 저리는 것 같아 필사적으로 참아 냈다. 릴리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 큼, 왜, 뭐, 뭐가?”
“아까 카페에서 전 당연히 점원에게 화를 내실 줄 알았어요. 한데 마님께선 자작 내외분을 혼내셨죠. 그리곤 저와 점원에게 사과하도록 시키셨어요. 심지어 점원에게 존대까지 쓰셨고요.”
“그, 그게 왜.”
“평소의 마님이었다면 절대 그러지 않으셨을 거예요. 마님은 그러니까…….”
릴리는 잠시 입을 다물곤 말을 골랐다.
“위계에 민감하시니까요.”
……한마디로 자작 부부랑 다를 바 없었다는 거지?
“게다가 카페에서 나올 때 주인에게 점원을 해고하지 말라고 언질도 주셨죠.”
‘점원이 친절한 데다 차를 잘 따라 마음에 드니 다음에도 봤으면 좋겠다’는 나의 말을 카페 주인뿐 아니라 릴리도 알아들었던 모양이다.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절 혼내지도 않으셨어요. 불과 며칠 전에는 비슷한 일로 경을 치셨는데…….”
“그건…….”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사람이 바뀌었다고 이상하게 의심받으면 어쩌지?
“정말 다른 사람이 되신 것 같아요.”
벌벌 떠는 몰티즈 같은 게 의외로 눈치가 빠르구나, 너.
나는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튕겼다.
“나도 이제 스무 살이잖아. 철들 때도 되었지.”
“……스물두 살이신데.”
아, 그랬니. 나이까지 기억할 정도로 로에니에게 애정이 없던 난 얼른 정정했다.
“그래, 스물두 살. 말이 잠깐 헛나왔지 뭐야. 아무튼, 이제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좀 달라져 볼까 해.”
릴리는 잠시 말없이 드레스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이 아이가 무슨 말을 할지 조마조마했다. 잠시 후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에 신뢰가 어렸다.
“전 지금의 마님이 훨씬 좋아요. 무척 다정하시니까요.”
그녀의 표정엔 나를 향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내가 뭘 그렇게 다정했나 싶지만 일단 안심했다.
나는 나를 보며 활짝 웃는 릴리에게 마주 웃어 보였다.


#07
내게 마음을 연 건지 늘 위축되어 있던 릴리가 조잘조잘 늘어놓는 수다를 듣다 보니 어느새 저택에 도착했다. 집사 고든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린 난 디아르트의 행방부터 물었다.
“공작님은 지금 어디 있어요?”
“그게…….”
고든이 난처한 얼굴로 우물쭈물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릴리가 끼어들었다.
“지금쯤 승마장에 계실 거예요. 오늘 아침에 승마 코트 챙기시는 걸 봤거든요.”
역시 그동안 로에니의 CCTV 역할을 해 온 짬밥이 있구나. 난 릴리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저, 마님. 오늘 주인님의 심기가 많이 불편하십니다.”
“그 노…… 공작님의 심기가 안 불편한 적이 있던가요?”
“…….”
내 물음에 염려 어린 표정을 하고 있던 고든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릴리, 마차 안에 있는 디저트들 모두와 나눠 먹어.”
난 마차 안에서 작은 케이크 상자를 꺼내 들며 덧붙였다.
“난 이거면 충분해.”
“제가 승마장까지 모실게요.”
“괜찮아. 나 혼자 가도 돼.”
나는 거추장스럽게 누가 따라오지 않도록 손을 들어 보이곤 등을 돌렸다. 그리고 정확히 반 시간 후 처절하게 후회했다.
“아 망할. 왜 이렇게 쓰잘데기없이 넓은 건데!”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휘턴가 저택이 얼마나 넓은지 잊고 있던 난 또다시 길을 잃었다. 지난번엔 저택 안이라 어디 들어가 쉴 곳이라도 있었지, 지금 눈에 보이는 거라곤 널따란 들판과 우거진 나무들뿐이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구두를 벗어 던졌다. 체면이고 나발이고 좀 쉴 생각으로 걸리적거리는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들추었다.
그때 멀리서부터 다그닥, 다그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땅이 점점 요란스레 울리기 시작했다.
“뭐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저만치에서 모래바람과 함께 무언가가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게 말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헉!”
난 내 쪽으로 돌진하고 있는 커다란 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숨을 들이켰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도무지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저 말 위에 앉은 은발의 사내가 부디 고삐를 틀어 주길 바랄 뿐.
‘설마 쟤 이대로 날 치려는 건 아니겠지?’
디아르트 휘턴은 아델리아를 만나서 미친 집착남으로 변모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전에 미친놈이 아니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여주를 만나기 전이 그냥 미친놈이라면 만나고 나서는 TOP를 찍었다는 차이뿐.
그런데 아무래도 소설 속 묘사가 약했던 거 같은데?
난 나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 디아르트를 보며 생각했다. 저 자식은 이미 TOP야!
‘친다!’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움츠린 난 다가올 충돌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고 도리어 요란하던 말발굽 소리가 조용해졌다.
난 슬쩍 실눈을 뜨고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푸르르 투레질하며 고개를 거칠게 휘젓는 말의 모습에 놀라 한 발짝 물러섰다가 무감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디아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마님?”
뒤늦게 말을 멈춘 기사들이 나를 의아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디아르트가 눈을 돌리며 발로 말의 배를 찼다.
“앗! 잠깐만요!”
난 그대로 나를 지나쳐 달려 나가는 디아르트의 뒤에 대고 다급하게 외쳤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러나 디아르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야, 이대로 날 두고 가려고? 이 허허벌판에서 저택까지 어떻게 걸어가라고!
“말할 게 있다니까요?!”
나는 매정한 놈의 등 뒤에 대고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러나 놈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마님, 제가 저택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
“저게 사람을 개무시해?”
“……네?”
어느새 말에서 내려 내게 다가와 있던 젊은 기사가 어리벙벙한 얼굴로 눈을 끔벅였다. 그러다 내가 고개를 홱 돌리자 숨을 들이켜며 한걸음 물러섰다. 난 그를 지나쳐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기사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마, 마님?”
나는 기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들이 세워 둔 말 위로 올라탔다. 놀란 눈동자들이 따라붙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의 배를 걷어찼다.
“헛!”
소싯적에 말똥 치우는 알바를 하며 슬쩍 익혀 두었던 승마를 이렇게 써먹는구나.
나는 디아르트 놈이 달려간 방향으로 빠르게 말을 몰았다. 당황한 기사들이 서둘러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눈에 불을 켜고 쫓은 끝에 저만치 앞에서 휘날리는 은발을 발견했다. 난 고삐를 쥐고 말을 더욱 빠르게 몰았다. 그리고 마침내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따라잡았다.
흘깃 뒤를 돌아본 디아르트가 눈썹을 까딱였다. 그러더니 무어라 말을 걸기도 전에 더욱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벌어지는 거리에 난 이를 악물었다.
“이럇!”
쫓아가다 보니 승부욕이 생긴 난 악착같이 말을 몰았지만 전장에서 뼈가 굵은 사람을 이길 수는 없었다.
디아르트는 거리가 좁아질라치면 손쉽게 치고 나갔고, 끝내 한 번도 추월해 보지 못한 채 승마장에 도착했다.
말에서 내린 난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버티며 숨을 몰아쉬었다. 거의 숨이 넘어가는 나와 달리 디아르트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저 바람에 헝클어진 은발을 가볍게 쓸어 넘겼을 뿐.
‘괴물 같은 놈.’
난 놈을 노려보며 씨근거렸다.
‘사람이 괴물을 어떻게 이겨.’
뭔가 진 듯한 기분을 애써 위로한 난 거친 숨소리를 가다듬었다.
“오랜만에 말을 몰아서 그런가 힘드네요. 제가 뒤에서 계속 불렀는데 못 들으셨어요?”
못 들었을 리가 없지. 그렇게 큰 소리로 불렀는데! 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디아르트 놈은 그저 서늘하게 날 훑어보더니 한다는 소리가 고작.
“엉망이네.”
이따위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나는 이마에 힘줄이 돋는 걸 애써 누르며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했다. 억지로 웃는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디아르트가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투레질하는 말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을 탈 줄 알았나?”
“당연하죠. 어릴 때부터 말 타는 걸 좋아했는걸요.”
“바람에 머리 망가지는 게 싫다고 근처에도 안 가더니.”
“……사실 내숭이었답니다.”
승마는 귀족의 기본 소양이니 공작가의 영애인 로에니도 당연히 말을 잘 탈 줄 알았던 난 아차 했다.
“그렇게 말하면 공작님께서 뒤에 태워 주실 줄 알았거든요.”
아무렇게나 지껄였더니 디아르트의 시선이 단박에 돌아갔다.
“전원 연무장 스무 바퀴.”
“네에?!”
기사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 경악한 표정을 본 디아르트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바꿨다.
“서른 바퀴.”
“지, 지금 가겠습니다!”
기사들이 허둥지둥 말 위로 올라탔다. 내게 말을 빼앗긴 기사가 쭈뼛거리며 다가오자 디아르트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넌 열 바퀴 추가.”
“앗… 네에…….”
억울함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도 차마 뭐라고 대꾸하지 못한 기사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말고삐를 잡았다.
나는 나를 두고 가려는 디아르트의 팔을 얼른 잡았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거세게 떨구어 냈다. 그 행태에 분노보다 먼저 드는 생각은.
‘별 느낌 없네?’
분명 책에는 접촉과 동시에 기묘한 기운이 흘러 들어오는 걸 느낄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옷 위로 만져서 그런가? 맨살에 닿아야 하는 건가?’
나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디아르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꽁꽁도 싸맨 승마 코트에서 유일하게 피부가 드러난 곳은 얼굴뿐이었다.
‘미친 척하고 덥석 잡아 봐?’
“왜 노려보는 거지?”
디아르트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흠흠,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난 힘이 들어간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말했다. 디아르트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등을 돌렸다. 등자에 발을 올린 그가 기다란 다리를 휙 넘겨 안장 위에 앉았다.
“중요한 말이에요!”
이게 또 날 무시하고 가려고? 난 고삐를 잡는 그를 노려보며 힘껏 소리쳤다.
“우리 이혼해요!”
* * *
나쁜 놈.
나는 내 앞에 앉아 태연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는 디아르트를 노려보았다. 말에 태워 주지 않은 이놈 때문에 저택까지 걸어와야 했던 난 아까보다 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창문에 비친 몰골을 보니 저택으로 돌아온 나를 보고 기함하던 사용인들의 얼굴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열불이 치솟은 난 릴리에게 얼음물을 부탁했다. 방 안에 둘만 남게 되자 옆에 놔둔 케이크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오전에 수도에 나갔다가 우연히 카페에 들렀는데 디저트들이 무척이나 달콤하더라고요. 맛있는 걸 먹으니 공작님 생각이 나서 제일 맛있는 걸로 포장해 왔답니다.”
실은 진상한테 뜯어낸 것 중에 아무거나 하나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나온 거지만 디아르트에게 바라는 게 있는 난 비굴하게 웃었다.
“아까 한 얘기는 뭐지?”
디아르트가 의자에 등을 깊게 묻으며 다리를 꼬았다.
“이혼을 해 달라?”
“아, 네. 말씀드린 대로예요.”
난 케이크 상자를 묶은 리본에 끼워 두었던 이혼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공작님만 사인해 주시면 바로 제출할게요.”
시선만 살짝 내려 이혼 서류를 바라보던 디아르트가 느릿하게 팔을 뻗었다.
난 시청에서 이혼 서류를 받자마자 바로 사인을 휘갈긴 터라 남은 건 디아르트의 서명뿐이었다. 이혼 서류를 찬찬히 읽던 금안이 나를 탐색하듯 주시했다.
나는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죄인처럼 진심을 다해 회개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간 제가 공작님께 못 할 짓을 많이 했던 거 알아요.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공작님을 흠모하는 마음에 저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제 정신을 차렸답니다.”
구연동화 알바를 했던 경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애들도 깜빡 넘어간 연기력에 디아르트의 얼굴에도 미묘한 변화가 어렸다.
“사실 우리 결혼은 처음부터 잘못된 거잖아요. 제가 부모님께 떼를 써서 억지로 한…… 공작님의 의사는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결혼이었죠. 돌이켜 보면 그저 부끄러울 뿐이랍니다. 저는 이제라도 공작님을 편하게 해 드리고 싶어요.”
나는 이쯤에서 나지도 않은 눈물을 소매로 슬쩍 닦으며 그의 눈치를 흘깃 살폈다.
“진심인가?”
“네. 공작님께서 진정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답니다.”
나를 가만 바라보던 디아르트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08
“연기가 많이 늘었군.”
“네?”
원만한 이혼을 위해 머릿속으로 정리해 둔 말을 늘어놓고 있던 난 디아르트의 빈정거림에 입을 다물었다. 테이블 위로 이혼 서류를 툭 던진 디아르트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상대해 주기도 지치는군.”
“꿍꿍이 같은 거 절대 없는데요…….”
사실 있다.
“불과 열흘 전에 합방 안 해 주면 죽겠다고 소동을 부리던 여자가 갑자기 이혼을 하자는데 믿으란 얘긴가?”
“…아 제가…… 그랬었죠.”
내 뒷골. 나는 드라마 속 재벌 회장님들처럼 뒷목을 잡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로에니, 이 멍청아! 겨우 남자 때문에 죽을 생각을 해? 세상에 남자는 널리고 널렸지만 목숨은 하나뿐인 걸 왜 몰라?
물론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 봤을 때 진짜 죽을 셈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살고 싶었음에도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려야 했던 난 목숨을 가볍게 여긴 로에니에게 분노가 솟구쳤다.
“그리고 바로 이틀 전엔 잠자는 내 방에 몰래 들어와 날 덮치려고도 했었지.”
“…….”
난 왜 하필이면 로에니가 디아르트를 덮치려고 했던 순간에 빙의를 한 걸까. 마치 내 스스로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그의 방에 쳐들어간 것 같아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래도 그때 손바닥에 닿는 가슴근육이 꽤 탄탄했었지…….
나도 모르게 시선이 디아르트의 가슴으로 향했다. 딱 달라붙는 승마 코트를 입고 있는 그의 가슴은 오늘도 굉장히 탐스러웠다.
너무 빤히 쳐다봤는지 내 눈길을 따라 시선을 내린 디아르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뭘 보는 거지?”
“아.”
흠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난 모른 척 찻잔을 들었다.
“다른 뜻은 전혀 없어요. 말씀드렸다시피 그동안 제 행동에 대해 많이 반성했답니다. 앞으로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탐하는 시선이 내 얼굴을 샅샅이 훑는 게 느껴졌다.
‘의심 많은 놈.’
나는 시청에서 이혼 서류를 떼며 미리 알아 둔 정보를 토대로 그의 신뢰를 얻기 위해 말을 이었다.
“그 서류는 공작님께 맡길게요. 아시겠지만 한번 제출한 이혼 서류를 철회하기 위해서는 부부 양쪽의 합의가 필요하죠. 혹 제가 딴 뜻을 품었거나 아니면 나중에 생각이 바뀌어서 이혼을 무르겠다고 해도 공작님이 원치 않으시면 반려되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새 좀 식은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에게도 연락을 드릴 생각이에요. 제국의 법도에 따라 귀족이 이혼을 하려면 직계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니까요.”
다 큰 성인이 이혼하겠다는데 부모님의 동의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여기 법이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버님께는 공작님이 연통 넣어 주세요.”
“진심인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디아르트도 내 진심을 믿는 것 같았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만 나를 응시하던 디아르트가 미미하게 눈썹을 까딱이며 팔짱을 꼈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진 모르겠지만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철이 든 거죠.”
나는 슬쩍 디아르트의 눈치를 살피곤 진짜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우리 사이 말인데요.”
디아르트는 ‘우리 사이?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불릴 만한 사이가 되긴 한가?’라는 표정이었다.
한마디로 재수 털리는 얼굴이었지만 잘생긴 외모 덕에 중화가 되었다. 얼굴도 못생겼으면 진짜 표정 관리 못 할 뻔했다.
“그간 많이 소원해졌지만 원래 우린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였잖아요. 무려 이십여 년이 넘는데 그 세월이 보통은 아니죠. 이제 저도 정신을 차렸으니 예전처럼 친하게 지내는 게 어떨까요?”
물론 둘이 친하게 지낸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최대한 다정하게 웃었다.
하지만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디아르트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나와의 인연을 이어 갈 마음이 조금도 없는 모양이었다.
“이혼하고 나서도 친구로 지내면 좋잖아요. 서로에게 도움 될 일도 있을 거고요.”
디아르트의 일자로 다물린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네가 내게 도움이 된다고?’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부들거리는 입꼬리를 유지하며 손을 뻗었다.
“앞으로 지난 일은 모두 잊고 새 출발 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악수 한 번 할까요?”
디아르트는 말없이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잡아! 잡아! 잡아!’
나는 팔짱을 끼고 있는 디아르트의 손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속으로 외쳤다. 디아르트가 천천히 팔을 풀자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기묘한 기운’이 어떤 건지 궁금했던 난 그가 제발 내 손을 잡아 주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디아르트는 내 손을 무시한 채 그 아래에 있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의사는 확실히 알았으니 이 서류는 내가 제출하도록 하지.”
“네?”
그리곤 뒤도 안 돌아보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난 퍼뜩 소리쳤다.
“아, 이거. 케이크 가져가세요!”
내가 너한테 잘 보이려고 죽어라 걷는 중에도 소중하게 들고 다녔단 말이다!
“그 안에 수면제라도 탔나?”
걸음을 멈춘 디아르트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약 같은 거 안 드니까 헛수고는 그만해.”
……로에니 너, 이놈한테 약 먹이려고 한 적도 있구나?
나는 속으로 이마를 짚었다. 디아르트나 로에니나 부부가 쌍으로 당 떨어지게 만드는 덴 뭐가 있다.
“이상한 거 안 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뭘 믿고?”
냉랭한 목소리로 싹둑 자른 디아르트가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아오 저 싸가지!”
어차피 약도 안 든다면서 뭐가 그렇게 의심이 많아, 그냥 먹지! 난 씩씩거리며 거칠게 상자 리본을 풀었다.
“얼마나 맛있는데. 너 이거 안 먹어 본 거 후회할……!”
나는 내 몰골만큼이나 처참하게 망가진 케이크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하얀 생크림 위에 아무렇게나 일그러진, 아마도 장미 모양이었을 핑크색 크림이 애처로웠다.
이건 분명 저 싸가지 때문에 놀랐을 때 망가진 게 틀림없었다. 깊은 빡침이 올라온 난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꺅.”
마침 방으로 들어오던 릴리가 작게 소리 질렀다. 내 험악한 기세에 놀란 그녀가 서둘러 다가왔다.
“마, 마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
난 릴리의 손에 들린 트레이에서 물 잔을 낚아채 단숨에 비워 냈다. 차가운 얼음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열통이 좀 가라앉았다.
빈 물잔을 내려놓은 난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찌그러진 케이크의 모양새가 꼭 디아르트와 나의 결혼 같았다.
‘그래, 망가진 케이크는 되돌릴 수 없는 거야.’
어차피 난 진짜 로에니도 아니고. 저주를 풀 때까지만 붙어 있다가 다 해결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자. 지금은 그것만 생각해, 김도…… 아니 로에니 휘턴!
‘친구는 개뿔!’
입 안 가득 케이크 조각을 욱여넣은 난 이를 갈았다.
* * *
집무실로 돌아온 디아르트는 책상 위에 이혼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 로에니 휘턴이 먼저 이혼하자고 할 줄은 몰랐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혹시 위조 서류인가 다시 살펴봤지만 시청의 인장은 명백히 진짜였다.
“무슨 수작이지?”
이십여 년을 괴롭히던 여자가 갑자기 태도를 싹 바꾸는 게 수상했다. 더욱이 이혼을 말하는 얼굴은 진심이었지만 짙은 보라색 눈동자는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나와 이혼을 하겠다고?
그간 로에니를 질리게 겪어 온 그로서는 이제 정신을 차렸다는 그녀의 말을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확실히 요 며칠 동안의 로에니는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뭔가 달라진 것 같다고 느낀 건 이틀 전부터였다. 자는 동안 침실에 몰래 기어 들어온 건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다만 자신을 내려다보던 눈빛. 그건 마치 타인을 보고 있는 듯한 낯선 시선이었다.
게다가 그 나뭇잎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머리며 엉망인 몰골도 늘 완벽한 모습을 추구하던 그녀답지 않았다.
‘공작님께서 진정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요.’
공작님이라……. 언제부터 저를 그렇게 불렀다고.
‘디아르트, 디아르트 같이 가요! 디아르트!’
손등에 턱을 괴고 있던 디아르트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뭐 상관없지.”
그녀의 말대로 철이 들었든 정신을 차렸든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점점 참아 주기 힘들었는데 잘된 일이다. 펜 통에서 깃펜을 꺼낸 디아르트가 이혼 서류에 단숨에 사인했다.
그 조그마한 머리통을 어떻게 굴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대로 이혼 서류는 한번 제출하면 양쪽의 동의 없이는 철회되지 않는 게 법도였다. 나중에 로에니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디아르트는 절대 합의해 줄 생각이 없었다.
종을 흔들자 곧 고든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디아르트가 허리를 숙인 고든에게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무엇인지 모르고 받아 든 고든은 서류를 훑어보곤 놀란 눈으로 디아르트를 바라보았다.
“이건…….”
“내일 법원에 제출해.”
“마님께서 직접 사인하신 겁니까?”
“그래.”
고든은 그 마님이 순순히 이혼 서류에 사인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능숙한 집사답게 곧 표정을 숨기고 읍했다.
“예.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고든이 나가자 디아르트는 밀린 서류를 꺼냈다. 찬찬히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그의 금안은 무언가 개운치 않은 듯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09
“릴리, 남자는 외모가 다가 아니야.”
목욕 후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내가 입을 열자 릴리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난 손에 들린 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남자란 자고로 조신하고 다정한 게 최고라고. 특히 결혼할 상대면 더더욱.”
아무래도 이 세계 여자들은 전반적으로 남자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다. 로에니나 아델리아나 그 무뚝뚝하고 싸가지 없는 디아르트놈이 뭐가 좋다는 거지?
순진한 어린 양 같은 릴리를 보니 어디서 호랑말코 같은 남자를 만나 맘고생 할까 봐 걱정되었다. 넌 나중에 나처럼 되지 말렴.
“잘생기고 말 잘하는 남자들은 보기 좋은 쿠키 같은 거야. 어차피 똑같은 재료로 만든 똑같은 과자들인데 비싸기만 한 거지. 그보단 생긴 건 좀 투박해도 진국인 남자들이 훨씬 나아. 넌 나중에 꼭 그런 남자 만나서 결혼하렴.”
내 한숨 섞인 말에 잠시 생각하던 릴리가 입을 열었다.
“그치만 마님, 보기 좋은 쿠키가 먹기도 좋지 않을까요?”
“응?”
“음식은 입으로 먹기 전에 눈으로 먹는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예쁜 접시도 쓰고 장식도 하는 거죠.”
“그건 그렇지.”
“저희 할머니 말씀이 잘생기면 얼굴값 못생기면 꼴값이라고 했거든요. 똑같은 짓을 하더라도 잘생기면 좀 더 쉽게 용서가 되지 않을까요? 저는 성격이 좀 모나도 잘생긴 남자를 만나 보고 싶어요.”
릴리가 예의 그 몰티즈 같은 웃음을 지었다. 난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물었다.
“그럼 디아르트 같은 남자는 어떠니?”
미소 띤 얼굴로 차를 따르던 릴리의 손이 살짝 멈칫했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말을 고르는 것 같던 릴리는 이내 티가 나게 말을 돌렸다.
“한데 누구에게 편지를 쓰시는 거예요?”
릴리는 내가 펜을 잡고 있는 게 생소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넌 나처럼 살진 않겠다.’
난 갑자기 똑 부러져 보이는 릴리를 보다가 아직 한 글자도 적지 못한 빈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아버지한테.”
“마님의 아버지라면 페이셔 공작님께요?”
“응.”
디아르트와 이혼을 하고 싶으니 승낙해 달라는 서신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뭐라고 시작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서 아까부터 단 한 글자도 적지 못하고 있었다.
‘가족한테 편지를 써 봤어야지.’
원수나 다름없었던 전생의 가족들을 떠올린 난 서둘러 고개를 저어 그들을 떨쳐 냈다.
‘로에니는 가족들이랑 사이가 원만했나?’
애초에 로에니에게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인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릴리는 휘턴 가문의 사람이니 물어봤자 잘 모를 것 같고…….
고민하던 난 드디어 펜을 움직였다.
[친애하는 아버지께.]
로에니에 관한 원작의 내용들은 대부분 디아르트와 관련이 있는 데다 비중이 그리 크지도 않았다. 초반에 죽을 한낱 엑스트라에게 복잡한 설정을 부여했을 리 없으니 평범하게 보내면 될 것이다.
‘그런데 평범하게 어떻게?’
난 펜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다 문득 디아르트의 가족 관계가 궁금해졌다.
나의 오랜 독자 경력으로 미루어 봤을 때 보통 이런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들은 마음속에 상처 하나쯤은 지니고 있는 법이었다.
그걸 위로하고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건 여주들의 몫이겠지만 지금은 내가 그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디아르트와의 관계 개선을 노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릴리, 아버님, 어머님은 어떤 분들이셨지?”
영원한 클리셰가 바로 출생의 비밀 아니겠어? 사실 계부나 계모 밑에서 무시와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거나…….
“무척 좋은 분들이셨어요. 금술도 아주 좋으셨고요.”
“혹시 두 분이 재혼이시던가?”
“네?”
릴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며칠 전에 친구한테 편지를 받았는데 글쎄 자기 시아버님한테 숨겨진 자식이 있어서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는 거야. 그게 갑자기 생각나서 물어보는 거야.”
날 이상하게 바라보는 릴리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어째 릴리의 표정이 내게 친구도 있었냐는 듯 더 의심스러워져서 기분이 미묘해졌지만 모른 척 시선을 피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큰 주인님께선 아직도 매일 큰 마님의 묘를 찾으신다고 하는걸요.”
“그래…….”
“……정말 이상하시네요.”
릴리가 순하게 생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뭐, 뭐가?”
“저보다 마님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공작가에 자주 오셨으니까요.”
“그게…… 릴리,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거니까 비밀 지켜 줘. 나 사실…… 기억을 잃었어.”
“네?!”
“며칠 전에 복도에서 넘어져서 조각상에 머리를 부딪친 후로 기억이 드문드문 날아가 버렸어. 방 앞에 있는 말 대가리 조각상 알지?”
“마, 마님!”
세상에 어쩐지! 경악한 릴리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더는 변명으로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아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였는데 잘 먹혀든 모양이다. 순진한 눈망울을 보니 살짝 양심이 찔리지만 어쩔 수 없지.
“당장 의사를 불러올게요!”
“아니! 아니야, 릴리! 난 괜찮아.”
“하지만…….”
릴리의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그렁거렸다. 마치 내가 중병에라도 걸렸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기억이 조금 사라진 것 말고는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마. 대신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비밀로 해 줄래? 다른 사람들에게 내 약점에 대해 알리고 싶지 않아.”
“네. 마님 말씀대로 할게요.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을 거예요.”
릴리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른 데 아프신 건 아니죠?”
“응, 멀쩡해.”
“기억도 금방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릴게요. 뭐든 저한테 물어보세요.”
릴리가 저만 믿으라는 듯 주먹으로 가슴을 콩콩 쳤다.
“그래, 너만 믿을게. 그럼 릴리, 디아르트가 혹시 어릴 때 부모님께… 음, 그러니까…… 많이 구박을 당했다거나 했나?”
차마 대놓고 혹 학대를 당했냐고 물어볼 수 없어 말을 빙빙 돌렸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릴리는 개떡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큰 주인님께서 좀 엄하시긴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어요. 큰 마님도 공작님을 매우 예뻐하셨는걸요. 어머니는 이상적인 가족이었다고 늘 그리워하세요.”
“그래…….”
그럼 걘 성격이 왜 그렇게 삐뚤어진 거야? 이쯤 되면 진짜 궁금해진다.
“혹 아카데미 다닐 때 교우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예를 들면 괴롭힘을 당했다거나….”
“마님.”
“응?”
“주인님께서 어디 괴롭힘을 당하실 분이신가요?”
“아…….”
그래, 하긴 겨우 스물네 살밖에 안 된 나이에 오롯이 제 능력으로 공작 작위까지 받아낸 전쟁귀가 누구한테 맞고 다녔을 리는 없겠지. 아, 그렇지 전쟁!
“그럼 디아르트가 밤에 잠은 잘 자?”
혹시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괴로워하고 있다거나…….
“그럼요. 매일 제시간에 주무시는걸요.”
“그러니? 잘 잔다니 다행이네…….”
하긴 그 미친놈이 트라우마로 괴로워하고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아 맞다. 그럼 좋아하던 여자는? 없어?”
왜, 남자들은 못 이룬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 하나씩은 있다던데.
“마님이 있으신데 주인님께 여자가 있을 리 없죠. 마님이… 어 그러니까…….”
“됐어. 말하지 않아도 돼.”
릴리는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이었다.
하긴 내가, 아니 아니, 로에니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디아르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길 틈이 있을 리 없었겠지.
이상적인 가정에서 자라면서 교우관계도 (아마도 본인은) 원만했고,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도 없고, 첫사랑도 없으면, 디아르트의 인생은 장애물 하나 없는 평탄 그 자체였다는 말이네. 복도 많은 놈.
그럼 그 싸가지는 타고난 건가?
‘아 모르겠다. 편지나 쓰자.’
고개를 저으며 편지지를 내려다보던 난 곧 다시 릴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 집안이랑 휘턴 가문은 사이가 어때?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랑 아버님 말이야.”
퍼뜩 디아르트가 페이셔 가문을 멸문시키는 이유가 혹 두 집안 사이의 불화 때문인가 싶어 물어보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둘도 없는 친우시죠. 지금도 두 분이 자주 만나신다고 들었어요.”
“그럼 디아르트도 우리 가문이랑 사이가 좋나?”
“글쎄요…… 주인님께서는 예전부터 그다지 교류를 안 하셔서.”
그럼 아직까진 두 가문 사이에 별일이 없다는 거네.
아무래도 키를 쥔 건 페이셔 공작, 그러니까 내 아버지인 것 같다.
잠시 고민하던 난 이내 편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지금 난 늪지대를 건너는 한 마리의 악어가 되었다는 생각으로 풀숲을 기어가고 있었다.
“앗!”
뒤에서 나를 따라오고 있던 릴리의 작은 비명 소리에 난 얼른 고개를 돌려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쉿!
“마님,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릴리가 울먹이는 눈으로 뺨에 튄 진흙을 닦아 냈다.
“그러니까 따라오지 말랬잖니.”
“그치만 마님께서 또 길을 잃고 어제처럼 엉망으로 돌아오실까 봐 걱정되는걸요.”
“릴리…….”
“근데 대체 왜 이렇게 숨어서 기어가는 거예요?”
“그야 디아르트한테 들키고 싶지 않아서지.”
“네? 왜요?”
릴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기야 그간 대놓고 스토킹 하던 내가 이제 와 몰래 이러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난 지금 디아르트를 쫓아가는 게 아니었다. 내 목표는 휘턴가의 기사단이었다.
밤새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디아르트만 믿고 있을 순 없었다. 병원에도 급할 때 찾아가는 응급실이라는 게 있는 건데 비상시를 위한 대비책 정도는 마련해 두어야 했다.
어제 디아르트 놈의 언행을 봤을 때 관계가 좀 유해지기 전까진 새끼손가락은커녕 발가락도 안 내어 줄 것 같으니까.
‘아무 남자나 붙잡고 손 좀 잡아 달라고 하면 미친년 같을 테고 그렇다고 바람피우는 건 너무 꺼림칙하잖아.’
그러니 남은 건 저택 내 사용인들뿐이다. 그들에겐 종종 에스코트 받을 일이 있을 테니 그때를 노리자 싶었다.
개중에서도 특히 기사단! 언제 어느 때나 연무장에 모여 있으니 급할 때 달려가기 딱 좋았다.
그를 위해 탐색할 겸 찾아가 보려는데 디아르트가 걸렸다. 내가 연무장에 가면 그놈은 뻔할 뻔 자 자신을 찾아왔다고 생각할 테고, 그럼 관계 개선에 악영향을 미칠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난 지금 요 모양으로 몰래 기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찾아가면 싫어할 테니까.”
릴리의 눈은 ‘이제 와서?’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부터라도 디아르트가 싫어할 일은 하고 싶지 않거든.”
“그치만 이렇게 몰래 찾아가는 것도 싫어하시지 않을까요?”
릴리가 조심스레 반문했다.
“그러니까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지.”
난 어깨를 으쓱했다. 도와줄 거지?
“네. 조심할게요.”
릴리는 이해가 잘 안 되는 얼굴이었지만 순순히 끄덕였다.
고개를 돌린 난 시야를 방해하는 수풀들을 손으로 헤치며 열심히 앞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곧 목적한 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


#10
‘다들 저기 있군.’
연무장에 가득 모인 기사들이 저마다 몸을 풀고 있었다.
어제는 잠깐 마주친데다 디아르트 때문에 열이 올라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기사들은 모두 꽤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체격도 크고 어깨도 듬직하니 하나같이 반반한 훈남들이었다.
릴리의 말대로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다고 비상약들이 훤칠하기까지 하니 괜히 흡족했다.
다만 장갑을 끼고 있다는 게 옥의 티인데…….
이 저택 사용인들은 왜 죄다 쓸데없이 장갑을 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러면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기니 아무래도 방책을 강구해 봐야겠다.
‘아, 맞다. 디아르트는 어디에 있지?’
들키면 안 되는데.
빠르게 눈을 돌리던 난 저만치에 서서 햇빛에 검을 비춰 보고 있는 디아르트를 발견했다.
“진짜 얼굴 하난 끝내준다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퍽 잘생겨 보이던 기사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디아르트의 모습은 비현실적이었다.
딱 맞게 재단된 훈련복이 근육이 잡힌 날렵한 몸매를 보기 좋게 드러냈고, 땀에 젖어 목덜미에 달라붙은 은발이 야릇한 분위기를 더했다.
게다가 곧은 자세며 여기서도 느껴질 정도로 매서운 금안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어떤 기묘한 힘이 있었다.
정말이지 외모 하나만큼은 로에니가 왜 그렇게 매달렸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고개를 저은 난 여기까지 온 목적도 잊은 채 디아르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 넋을 놓고 있던 난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내가 디아르트의 외모나 감상하자고 여기까지 고생해서 온 게 아니었다. 살기 위해 약국을 찾아온 난 영양가 없는 놈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 보자…….”
저쪽에 수다를 떨고 있는 남자. 어깨도 넓고 얼굴도 화사하니 잘생겼네.
“릴리.”
“네.”
“저 사람은 누구야?”
기억을 잃었다고 약도 쳤겠다. 난 만나는 사람마다 릴리에게 이름을 물어보았다. 처음엔 하급 하녀들의 이름까지 하나하나 물어보는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릴리는 이내 기쁘게 웃으며 알려 주었다.
“알렉스 랜들 경이네요.”
“결혼했나?”
“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릴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난 동그란 눈에 스민 일말의 의심에 얼른 변명했다.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주려고. 혼기가 찬 거 같은데 매일 이렇게 훈련만 하니 여성분을 만날 시간도 부족할 것 아니니.”
“아아.”
어쩜 이렇게 사려 깊으실까. 릴리가 감동한 눈을 반짝였다.
“저분은 결혼하신 지 얼마 안 됐어요.”
“아 그래…….”
난 실망감을 애써 누르며 다른 기사를 가리켰다.
“저 사람은?”
“필립 토트 경인데 한 달 후에 결혼한다고 하더라고요.”
“…….”
괜찮은 남자는 이미 누가 다 채 갔다더니, 지목하는 기사들마다 결혼을 했거나 연인이 있었다.
아무리 저주 때문이라지만 연인이 있는 사람은 양심적으로 피하고 싶었다.
‘바쁜 와중에도 다들 연애는 잘만 하나 보네.’
한숨을 쉬며 다른 기사들을 물색하던 내 눈에 꽤 귀엽게 생긴 남자가 보였다.
지금껏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건지 웃는 얼굴이 시원한 게 딱 내 스타일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나한테 말을 빼앗겼던 그 기사구나.
“저 남자는 이름이 뭐야?”
“밀토 브리먼 경이에요. 기사단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걸로 알고 있어요.”
“저이도 연인이 있으려나.”
반쯤 포기하고 물었는데 릴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예요. 얼마 전에 외롭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거든요.”
나이스!
나는 쾌재를 부르고 싶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밀토 브리먼, 앞으로 내 에스코트는 너에게 맡기마.
드디어 얻은 수확에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또 다른 비상약을 물색하던 그때였다.
디아르트가 연무장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짧은 휴식을 끝낸 기사들이 각자 검을 집어 들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따라간 릴리가 이번에도 시원하게 대답했다.
“램버트 하디 님이세요.”
“디아르트랑 친해 보이네?”
“주인님과 모든 전장을 함께 하신 분이니까요. 지금은 기사단장을 맡고 계시죠.”
“아하.”
디아르트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던 짙은 갈색 머리의 램버트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둘은 함께 연무장 가운데의 동그란 타일 위로 올라섰다. 그러자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던 기사들의 시선이 모두 모여들었다.
“뭐 하려는 거지?”
“대련을 하실 모양이에요.”
“대련?”
“네. 제국 내에서 주인님과 검을 겨룰 만한 사람은 램버트 님 정도니까요.”
릴리의 말대로 간격을 두고 선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검을 꺼냈다. 이내 두 사람의 검이 쨍,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흠…… 위험한데?”
“네? 뭐가요?”
대련을 지켜보던 내가 중얼거리자 릴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누가 봐도 디아르트의 기세가 우세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내가 위험하다고 한 건 디아르트의 안위 따위가 아니었다.
‘내가 위험하다고, 내가.’
가만히 서 있을 때는 그저 몸선을 잘 드러내는 정도로만 느껴졌던 훈련복이 디아르트의 격한 움직임에 따라 생동감 넘치는 근육들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넓은 어깨 뒤로 도드라지는 날개뼈라든가 근육이 꽉 잡힌 탄탄한 허벅지라든가. 일견 잘록해 보이지만 상대의 공격을 유려하게 피하는 유연한 허리라든가…….
‘이래서 잘생긴 놈들은 조심해야 한다니까.’
하마터면 홀릴 뻔했다. 괜히 저 외모에 현혹돼서 콩깍지라도 씌었다간 원작의 로에니처럼 데드 플래그로 이어지는 거지.
남자 보는 안목이고 나발이고 수준을 넘어선 외모에는 소용이 없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양 뺨을 찰싹 내리쳤다. 옆에서 흠칫 어깨를 떠는 릴리가 느껴졌다.
‘정신 차려, 로에니 휘턴. 저놈의 재수 없는 성격을 떠올려 보라고.’
난 나를 수렁에서 구해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놈이 그간 했던 언행들을 떠올렸다.
어제 저녁 식사 자리에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을 거는 날 무시로 일관하던 디아르트가 생각나자 절로 인상이 써졌다.
어느새 디아르트의 뒤에서 빛나던 후광이 반쯤 사그라져 있었다.
* * *
챙!
날카로운 굉음이 귓가를 울리고 상대의 거친 숨소리가 후끈하게 달아오른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디아르트는 매섭게 공격해 들어오는 검을 본능적으로 쳐 내며 도리어 그 힘을 역이용해 상대의 빈틈을 찔렀다.
제가 상대가 되겠냐며 살살 해 달라고 너스레를 떨던 램버트는 땀을 뻘뻘 흘려가며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디아르트와 램버트의 검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힘겨루기 하듯 체중을 실어 상대를 압박하는 자세에 자연스레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계속 저대로 두실 생각이십니까?”
“뭘 말하는 거지?”
“모른 척하시기는.”
램버트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힐끗 시선을 틀어 수풀 사이에 숨어 있는 인영을 가리켰다.
“마님 말씀입니다.”
“기사단장이라는 자가 대련 중에 한눈을 팔다니 기강이 해이해졌군.”
“각하께서도 계속 신경 쓰고 계셨으면서. 평소보다 공격이 무디거든요?”
램버트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자 디아르트의 미간이 좁혀졌다. 순식간에 램버트의 검을 튕겨 낸 디아르트는 그가 제대로 방어할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헉!”
램버트가 숨을 들이켜며 무지막지하게 날아드는 검을 필사적으로 막아 냈다. 그러다 결국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진 그의 목으로 날붙이가 선득한 기운을 풍기며 따라붙었다.
“잘못했슴다.”
램버트가 잘못을 빌었다. 그러나 용서를 구하는 얼굴이 싱글거리고 있어서 그다지 진심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디아르트는 짧게 혀를 차곤 검을 거두었다. 램버트가 살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아르트의 시선이 수풀 쪽으로 향하자 램버트는 동그란 타일을 둘러싸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손뼉을 마주쳤다.
“상관이 엉망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니 재밌었지? 그럼 그 즐거운 기분으로 지금부터 연무장 스무 바퀴 돈다. 실시!”
“에엑?!”
질색하는 기사들을 향해 램버트가 싱긋 웃었다.
“구경 값이다, 이 자식들아.”
너무 해요! 아까도 돌았잖아요! 화풀이 아닙니까! 기사들의 성화에 램버트는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디아르트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이 아까부터 모두 눈치채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있던 공작 부인이 있는 곳이라 기사들은 투덜거리던 입을 딱 다물고 슬금슬금 열을 맞추었다.
이내 하나, 둘 구령에 맞춰 뛰기 시작한 기사들을 뒤로한 디아르트가 수풀 앞에 서서 삐뚜름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제 딴에는 숨는다고 숨은 모양이지만 연한 녹빛 수풀 사이에 보라색 머리카락이 몹시도 눈에 띄었다.
디아르트가 눈매를 좁히며 검집으로 수풀을 신경질적으로 헤쳤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011
“헉!”
갑자기 고개를 돌릴 때부터 느낌이 싸하더라니,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데 심장이 툭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의 몸을 휩싸고 있는 특유의 위압적인 분위기에 솔직히 좀 쫄았다.
웬만한 사람들은 말도 쉽게 못 붙인다고 하더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방금 램버트의 목에 검을 겨누는 장면을 목격한 것도 한몫했다.
만약 원작대로 흘러간다면 내 목에도 저 날카로운 검이 가차 없이 들이 밀어지겠지.
잠깐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떨렸다.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디아르트와의 거리에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릴리의 등을 확 눌렀다. 동시에 수풀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최대한 몸을 옹송그렸다.
제발 날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기를 그토록 바랐건만 이 망할 놈은 시력마저 좋은 모양이었다.
“토끼라도 된 건가?”
서늘한 목소리에 모른 척 입을 딱 다물었다.
‘난 여기에 없다. 없다. 없다. 가라. 가라. 가라.’
하지만 디아르트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지 검집으로 땅을 탁탁 두드렸다.
“머리만 숨기면 못 볼 줄 알았나?”
“…….”
……칼 든 사람 심기를 건드리는 건 멍청한 짓이지.
빠른 판단을 내린 후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며 오만가지 변명거리를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결국 내 입에서 나온 거라곤,
“새로운 풀들을 찾아다니던 중이었어요. 요즘 잡초에 관심이 생겨서.”
이따위였다. 망할.
“여기 풀들이 참 푹신하고 부드럽네요. 품종이 뭘까…….”
나는 손바닥으로 잔디를 살살 쓸면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차라리 나비를 따라왔다고 할걸.’
그게 더 레이디다운 대답이었을 것 같은데.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지금 디아르트의 표정은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그의 한심하다는 눈을 슬쩍 회피했다.
“반성했다더니 빈말이었나?”
“진심이에요.”
“이러고도?”
“정말이라니까요.”
디아르트는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럼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새로운 풀을 찾아다니고 있었다고 말씀드렸……”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네, 그럼요.”
“거짓말을 하려면 좀 더 성의껏 해.”
“진짠데 왜 못 믿으시는 거람. 속고만 사셨나?”
자고로 싸움은 목소리 큰 사람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나는 끝까지 우길 셈이었다. 여기서 내가 자기를 스토, 아니 관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그간의 일을 반성한다고 했던 내 말들의 신빙성이 떨어질뿐더러 안 그래도 마이너스를 찍고 있는 호감도가 아예 소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날 내려다보는 디아르트의 눈에 짜증이 깃들었다. 실없는 입씨름을 하고 있는 상황이 무척이나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들려. 죽여도 되나, 라고 생각하고 있지, 너.’
그때 그가 들고 있는 검이 철컥 소리를 내자 목덜미가 선득해졌다. 더 뻐기고 있다간 진짜 칼 맞을지도 모르니 얼른 튀자.
“앗, 여기에 처음 보는 풀이!”
눈앞에 보이는 아무 풀이나 쥐어뜯은 난 부러 더 오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아르트의 시선이 나뭇잎과 잔가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헝클어진 머리와 흙이 잔뜩 묻은 드레스를 천천히 훑고 내려갔다.
미심쩍은 기운이 담긴 눈빛을 모른 척하며 흔하디흔한 풀떼기를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것 보세요, 공작님. 이 베일 듯이 날카롭게 뻗은 줄기에서 느껴지는 기개를! 요 끝이 두 갈래 갈라진 모양에서는 유연함이 엿보이고요. 이건 마치 동쪽에 있는 신비한 나라에서나 볼 수 있다던 대나무를 닮지 않았겠어요? 분명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품종이 틀림없어요!”
디아르트의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갔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당장 돌아가서 학계에 서한을 보내야겠어요!”
얼른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렸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대로 뒷걸음질 치다 얼른 자세를 바꿔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뒤통수에 어이없어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절대 돌아보지 않은 채.
“흐억, 흐억…….”
연무장에서 한참 떨어진 곳까지 허겁지겁 뛰어온 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마, 마님.”
내 옆에서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숨을 몰아쉬던 릴리가 입에 고인 침을 삼키고 물었다.
“아까 하신 말씀 진짜예요?”
“어떤 거?”
“들고 계시던 풀이 새로 발견한 품종이라는 거요!”
오 릴리.
디아르트에겐 씨알도 안 먹혔던 엉뚱한 변명이 릴리한테는 아주 잘 먹힌 모양이었다. 새로운 발견을 했다는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빛에 실망을 안겨 주고 싶진 않지만 그 풀떼기는 이미 언제 내 손을 떠났는지도 모르게 날아가 버린 후였다.
“디아르트한테 안 들키려고 거짓말한 거야.”
“아…… 전 또. 마님이 너무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씀하셔서 진짜인 줄 알았어요. 진짜 마님이 학계에 이름을 올리시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 발 연기에서 진심이 느껴지다니 나야말로 진심이냐고 묻고 싶다.
릴리도 깜빡 속아 넘어갔다는데 디아르트 이놈도 모른 척 좀 해 주지. 정 안 가는 놈.
“이혼도 해 주겠다는데 좀 사근사근하게 굴면 덧나냐고.”
……아니, 그것도 좀 무섭겠다.
잠시 다정하고 상냥한 디아르트의 모습을 떠올려 본 난 고개를 저었다. 원작에서 그가 얼마나 잔혹한 인물이었는지 뻔히 다 봤는데 그런 상상을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다정한 디아르트 휘턴? 이 소설의 장르가 바뀌는 거다. 피폐물에서 개그물로.
내가 헛웃음을 내뱉고 있을 때, 릴리가 뭔가 잘못 들은 것 같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뭐가?”
“이혼이라뇨?”
“응?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내가 이혼 서류 떼는 거 봤잖아.”
시청에서 이혼 서류 뗄 때 분명 옆에 있었으면서 처음 듣는 사람처럼 놀라는 모습에 난 고개를 갸웃했다. 릴리의 얼굴에 점차 충격이 번져 나갔다.
“진심으로 이혼하려고 하셨던 거예요?”
“장난으로 이혼하려는 사람도 있어?”
반쯤 농담으로 받아쳤건만 릴리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전 마님이 이혼을 협, 아니 구실 삼아 주인님 대화라도 하시려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대화 한번 하겠다고 이혼 서류를 들이미는 건 이상하지 않니?”
“항상 여러 가지 핑계로 그렇게 하셨으니까……. 전에는 같이 죽겠다고도 하셨고…….”
“아… 그랬지…….”
어제 디아르트가 말한 그 소동 말하는 모양이다. ‘같이’ 죽으려고 한 줄은 몰랐는데……. 릴리가 알고 있다면 다른 사용인들도 다 알고 있겠지?
아냐, 네가 한 일 아니야. 쪽팔려하지 마.
난 얼른 치밀어 오르는 공감성 수치를 꾹 눌러 삼켰다. 이쯤 되니 디아르트가 못 믿는 것도 좀 이해가 된다.
“이번엔 진짜야, 릴리. 정말 디아르트와 이혼할 거야. 이미 서류까지 작성해서 줬는걸?”
“네? 주인님께요?”
“응.”
“이혼 서류는 한번 접수하면 되돌리기 쉽지 않을 텐데……. 정말 이혼하시려는 거예요?”
“그렇다니까.”
“마님…….”
릴리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왜 울려 그래?”
“왜 갑자기 이혼하시려는 건데요?”
“나 혼자 좋자고 싫다는 사람 붙잡고 있는 건 못 할 짓이잖니. 이제 디아르트도 정말 좋아하는 여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죽기 전에 도망치려는 거라고는 말할 수 없어서 최대한 포장했더니 릴리의 표정이 더욱 서글퍼졌다.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잿빛 눈동자를 통해 이 아이가 보답받지 못하는 내 사랑에 대해 측은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릴리, 나 그놈 안 사랑해. 독자일 때도 제발 이놈이 남주가 아니길 빌던 사람이야, 내가.’
-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난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눈물을 왈칵 쏟아 낼 것처럼 릴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무래도 내 미소조차 오해한 모양이다.
릴리는 입술을 앙다물며 울음을 참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꼭 이혼하셔야 해요? 마음을 바꾸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응.”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빨리 이혼 안 하면 그대로 데드 루트 타는 거야.’
“그리고 이제 와서 디아르트에게 이혼 서류를 돌려 달라고 한들 그러겠니?”
방금 겪은 상황만 봐도 그가 이혼 서류를 돌려줄 일은 절대로 없었다. 릴리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한층 더 울먹였다. 정말 톡 건드리면 눈물이 우수수 떨어질 것만 같다.
“이제야 마님과 가까워졌는데 떠나신다니…… 너무 서운해요.”
“아직 이 저택에서 나가려면 멀었어. 이혼까지 적어도 반년은 걸릴걸.”
“그래도 언젠간 떠나신다는 거잖아요.”
“곧 좋은 사람이 들어올 거야. 한…… 일 년쯤 후?”
삼 개월 후 아델리아를 만난 디아르트가 반란을 일으켜 황위를 차지하는데 반년이 넘게 걸리니 한 그 정도 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이 작고 귀여운 아이는 정식 시녀가 되어 있겠네.
“새로운 마님은 나보다 훨씬 다정하고 착한 사람일 테니 걱정하지 말렴.”
“마님보다 다정한 분이 계실리 없어요.”
릴리가 고개를 붕붕 저으며 외쳤다.
삼 일 전만 해도 나만 보면 벌벌 떨던 아이였는데 어느새 저렇게 신뢰가 가득 담긴 눈빛을 보내게 되었을까. 어쩐지 ‘한 번 주인은 영원한 주인이다!’를 외치는 충견을 보는 것 같았다.
작은 몰티즈 같아서 내가 지켜 줘야 할 것 같지만…….
이렇게 나를 전적으로 좋아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심장이 몽글몽글하니 간질거렸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손으로 어깨를 감싸며 달래듯 말하니 코를 훌쩍이던 릴리의 표정이 단숨에 달라졌다.
“아이스크림이요?”
‘아, 귀여워라, 정말. 나중에 이혼하고 나갈 때 얘는 데리고 나가면 안 되려나?’


#012
아이스크림을 먹는다고 기뻐할 땐 언제고 또 금세 침울해진 릴리를 달래며 저택으로 들어가자 홀에 있던 사용인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다들 내 몰골에 경악한 표정이었다.
어제 디아르트와 함께 돌아온 나를 보는 얼굴들도 딱 이랬는데.
“내 꼴이 그렇게 엉망이니?”
“그러니까 바닥을 기는 건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수풀에 숨어 연무장까지 기어서 가겠다고 했을 때 극구 반대했던 릴리는 내 어깨에 붙어 있는 나뭇잎을 떼어 내며 울상을 지었다.
릴리야 귀족의 품위를 걱정해서 한 말이겠지만 당장 목숨이 달려 있던 내겐 소귀에 경 읽기나 마찬가지였는데 앞으로는 좀 조심해야겠다. 이 세계에선 신분에 맞게 행동해야 괜한 눈초리를 받지 않을 테니까.
“얼른 목욕하고 드레스를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너도 씻으러 가렴. 만만치 않게 엉망이야.”
“마님 시중이 먼저예요.”
“혼자 씻어도 돼.”
오히려 그게 편했다. 평생 스스로 하며 살다 누군가의 목욕 시중을 받게 되니 편하기보단 불편하고 어색했다. 하지만 릴리는 절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누가 보면 큰일이라도 들은 줄 알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긴 그게 귀족의 법도라면 적응해야 했다. 앞으론 신분에 맞게 행동하기로 했으니까.
“알았어. 그럼 다른 사용인들의 시중을 받을 테니 넌 얼른 가서 씻으렴.”
“그냥 제가 하면 안 될까요? 이제 이렇게 모실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릴리, 앞으로 반년은 더 네 옆에 있을 거거든?”
나는 또다시 울먹이는 릴리의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저만치에서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서 있는 하녀를 불렀다.
“애니.”
“……네?”
애니라는 이름의 하녀가 제 이름을 부를 줄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나 좀 도와줄래?”
당황한 얼굴을 하던 애니가 얼른 도도도 달려왔다. 그녀와 방으로 향하는데 어찌나 힐끗힐끗 쳐다보는지 도무지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왜 자꾸 쳐다보니?”
“그, 그게…… 마님께서 제 이름을 알고 계실 줄은 몰라서요.”
아아.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로에니는 사용인들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하기야 귀족과 평민은 급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그녀가 이름을 알고 있다 한들 제대로 불러 줬을 리가.
사용인들의 이름을 물어봤을 때 릴리가 놀란 눈을 했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당연히 알고 있지, 애니. 너 말고 여기 있는 모두의 이름도 알고 있단다. 제시, 수잔, 메리, 쟝, 제레미…….”
나는 홀에 있는 사용인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이름을 불렀다. 다행히 아까 릴리에게 물어봤던 사람들만 눈에 띄었다. 사용인들은 놀란 듯하다 이내 감동받은 얼굴을 했다.
고작 이름 좀 불러 줬다고 감동까지 받을 일인가 싶지만 잘된 일이었다. 이 공작 저와 안전 이별을 원하는 나로서는 사용인들과의 관계가 개선되어서 나쁠 게 없었다. 만약을 위해서 한 명이라도 더 내 편을 만들어 놓으면 좋을 테니까.
내가 빙긋 웃자 사용인들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한번 웃어 줬다고 이렇게 좋아하다니. 다들 마음이 솜사탕 같구나.
‘근데 정작 이 집 주인은 왜 그러나 몰라.’
* * *
목욕을 마친 후에 릴리, 애니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달콤한 초콜릿 시럽이 잔뜩 뿌려진 데다 고소한 땅콩 가루까지 얹어진 아이스크림은 흙먼지로 텁텁했던 입 안을 상큼하게 해 주어 기분마저 깔끔해졌다.
이 세계에서 아이스크림은 꽤 고급 디저트에 속하는 모양인지 릴리와 애니는 한 수저 한 수저 뜰 때마다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흠…… 어째 몰티즈가 두 마리로 늘어난 거 같은데?’
귀여운 여동생들을 보는 기분에 흐뭇해하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마님, 고든입니다.”
“들어오세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고든이 내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이에요?”
“마님께 서한이 도착했습니다.”
“나한테 서한이? 어디서 보냈는데요?”
“황실에서 보내셨습니다.”
고든이 들고 있던 서한을 정중히 내밀었다. 서한을 받아 든 난 붉은 염료를 탄 밀랍을 떨어트린 후 찍어 낸 인장을 살폈다. 프리지아꽃 모양이 뚜렷했다.
슬쩍 릴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황족들은 각각 다른 인장을 쓰는 게 관례였는데 그들 중 누가 보낸 것인지 알 턱이 없었다. 내 SOS를 받은 릴리도 모르는 눈치였다.
“황녀 전하께서 갑자기 무슨 용무로 서한을 보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고든이 먼저 서한을 보낸 사람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황녀라면…….’
제국의 황녀는 레티시아 드 벨릭 황녀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원작에 따르면 로에니와 레티시아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몇 년 전 무도회에서 로에니가 디아르트와 이야기를 나누는 여자에게 와인을 끼얹은 적이 있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레티시아 황녀는 로에니를 훈계했고, 그 이후로 둘은 파티에서 만나도 서로 없는 사람처럼 취급할 정도로 데면데면하다는 내용이 있었다.
고든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짓는 것도 그를 잘 알기 때문이겠지.
‘황녀가 왜 내게 서한을 보냈지?’
난 은은한 프리지아 향이 풍기는 서한 봉투를 뜯어 편지를 꺼냈다.
「친애하는 로에니 휘턴 공작 부인께.
그동안 격조하였습니다. 가내 평안하게 잘 지내시는지요?
갑작스레 이리 편지를 보내는 연유는 닷새 후에 열릴 다과회에 참석해 주십사 청하기 위해서랍니다.
귀부인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우애를 쌓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공작 부인께서도 꼭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레티시아 드 벨렉 황녀 드림.」
……엄청 공손하네?
결투장 또는 비방문이 아닐까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 레티시아 황녀의 편지에서는 다정함이 뚝뚝 떨어졌다. 근데 갑자기 웬 다과회?
‘얘네 사이 안 좋은 게 아니었나?’
“무슨 일이신지요?”
고든이 적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읽어 보세요.”
고든이 내가 내민 편지를 받아 읽었다.
“황녀 전하께서 왜 마님을 다과회에 초대하신다는 건지…….”
미간을 찌푸리며 의문스레 중얼거리던 고든은 아차 했는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놀라서…….”
“고든이 생각하기에도 이상하죠? 우리가 하하 호호 수다를 떨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닌데 왜 초대를 하는 걸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레티시아 황녀 성격이 어땠더라?’
나는 곰곰이 원작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 봐도 그녀에 대한 정보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다지 비중 없는 엑스트라니 당연한 일이었다.
“초대에 응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뇨. 안 갈 거예요.”
난 단호하게 대답했다. 황녀의 초대를 거절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꾀병을 부려서라도 다과회에는 절대 가지 않을 생각이다. 암만 생각해도 이 초대장이 함정 같거든. 이거 받아 들고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황실로 향했다간 조롱이나 곤욕을 당하는 클리셰가 그대로 펼쳐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지, 나는 악녀니까 안 당할지도. 이런 괴롭힘은 보통 여주들이 당하니까.’
아냐 아냐. 상대는 나랑 사이가 안 좋은 레티시아 황녀잖아. 애당초 싹은 잘라 버려야지. 뻔히 알면서 적진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자.
이혼 후 한적한 나라로 떠날 생각이니 굳이 정신적으로 소모하며 평판을 고려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제 와 이런 다과회에 한두 번 참석한다 한들 좋아질 리 없을 정도로 로에니의 사교계 평판은 최악이니까.
화려하다는 묘사가 잔뜩 쓰여 있던 황궁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어차피 삼 개월 후면 볼 테니까.
‘그리고 당장 며칠 후면 저주가 발현될 텐데 황궁에 다녀올 새가 어디 있어. 황궁에 저주를 풀 방법이라도 숨어 있다면 모를까.’
……응?
“그럼 적당한 핑계를 대고 거절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친히 서한을 보내셨으니 마님께서도 친필로 편지를 쓰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잠깐만요.”
난 손바닥을 들어 고든의 말을 막았다. 고든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나는 순간 내 눈앞에 번쩍 떠오른 인물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황궁에 저주를 풀 방법이 숨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 최애는 숨어 있지!
에드거 드 벨릭.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자 내 모든 주식을 몰빵한 캐릭터. 조신하고 다정한 매력을 가진 내 최애.
소설에 빙의까지 해 놓고 최애를 만날 생각을 안 해 보다니, 이런 바보 같은.
“아무래도 저 황실에 가야겠어요!”
난 내 최애를 만나기 위해 적진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멍청한 짓을 하기로 결심했다.


#013
랜선으로만 보던 아이돌의 팬싸를 가는 기분이 이럴까. 활자로만 만나던 우리 최애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들뜬 난 몇 시간 째 드레스룸을 뒤지는 중이었다.
“이거 어때? 어울려? 예뻐?”
“네! 마님의 제비꽃 같은 머리카락과 무척이나 잘 어울려요!”
“그래? 가슴 부분에 달린 리본이 너무 과한 것 같진 않아? 이걸 입을까?”
난 몸에 대 보고 있던 연한 핑크색 드레스를 내려놓고 하얀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드레스룸에 놓인 기다란 소파 위로 드레스들이 겹겹이 쌓여 갔지만 도통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나같이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드레스였음에도 처음 최애를 만나는 자리니만큼 쉽사리 고를 수가 없었던 터다.
결국 난 커다란 드레스룸을 몽땅 뒤집어엎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드레스를 찾아낼 수 있었다. 옆에서 나를 돕고 있던 릴리가 뿌듯한 얼굴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냈다.
“이보다 완벽한 드레스는 없어요!”
“그치?”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드레스룸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골라놓은 파스텔 톤의 연한 개나리색 드레스를 걸어 놓았다. 바스트 부분에 촘촘히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 알갱이들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게 무척이나 예뻤다.
“구두는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나는 천장에 닿을 듯이 높은 진열대를 한가득 채운 구두들을 올려다보며 입을 벌렸다.
‘하루에 한 켤레씩만 신어도 삼 년은 걸리겠는걸?’
게다가 릴리와 애니가 어디선가 자꾸 보기만 해도 눈 호강하는 것 같은 보석들을 꺼내 왔다. 루비와 다이아몬드가 화려하게 세공된 귀걸이와 목걸이 세트라든가. 알사탕만 한 에메랄드가 박힌 반지와 진주 팔찌라든가. 생전 처음 보는 다채로운 액세서리의 향연에 눈이 돌아갔다.
‘후드티에 낡아 빠진 운동화 한 켤레로 몇 년을 버텼었는데……. 빙의하길 잘했어!’
난 신나서 구두와 액세서리들을 하나하나 골랐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결정이 끝났을 땐 완전히 지쳐서 녹초가 되었다.
“이것도 보통 일이 아니네…….”
TV로 봤을 땐 그저 눈 한 번 흘깃, 손가락 한 번 까딱이기만 하면 되는 부자들의 팔자 좋은 쇼핑을 막상 직접 하니 체력이 보통 소요되는 것이 아니었다.
방전되어 소파에 반쯤 늘어져 있는 나와 달리 릴리와 애니는 지치지도 않는지 잔뜩 헤집어진 드레스룸을 빠르게 정리하고 있었다. 좀 쉬었다 하라고 해도 괜찮다며 웃는 얼굴이 정말 괜찮아 보여서 얘네는 대체 뭘 먹고 이렇게 체력이 좋은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특히 릴리는 뺨에 생기마저 돌고 있었다.
“마님께서 이렇게 들뜨신 건 처음 봐요.”
순식간에 드레스룸을 말끔하게 치운 후 애니가 방을 나가자, 아직까지 맥을 못 추고 있는 내게 차를 따르던 릴리가 입을 열었다.
“황궁으로 가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잖아요.”
“내가 그랬니?”
나는 릴리가 내민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우유와 설탕을 탄 홍차는 고소하고 달콤해서 목 넘김이 부드러웠다. 달달한 게 들어가니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황실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면 늘 기분이 안 좋으셨는걸요.”
오, 그렇게 뽐내길 좋아하고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로에니가 그런 자리를 앞두고 기분이 좋지 않을 정도라면 확신의 호랑이 굴이군.
“앗, 죄송해요.”
릴리가 별안간 고개를 숙였다.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상기한 모양이었다.
난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최애를 보러 가는데 두근거리는 게 당연하지.”
“네? 최애요?”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릴리를 보며 그저 싱긋 웃었다.
릴리 네가 내 덕친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최애를 실제로 눈앞에서 보게 된 지금의 이 들뜬 기분을 공유(자랑)할 사람이 없다는 게 너무나 안타까웠다.
내 아쉬움 가득한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릴리가 시계를 확인했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네요. 옷을 갈아입으셔야겠어요.”
“그대로 갈래.”
“하지만…….”
릴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옷차림이 굉장히 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맨날 하는 저녁 식사에 온갖 치장을 하는 것도 너무 귀찮은 일인 데다 방금까지 수많은 드레스를 갈아입었던 터라 그럴 기력도 없었다.
게다가 암만 때 빼고 광내며 치장해 봤자 디아르트는 내게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을 게 뻔했다. 내 머리에 꽂혀 있는 게 리본 모양 핀인지 얼굴만 한 해바라긴지도 모를걸?
최애를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보람도 없는 일에 괜히 힘 뺄 필요는 없지.
“너무 꾸미고 가면 또 오해할 거야.”
“뭘요?”
“이제 관심 없다고 큰소리 땅땅 친 여자가 온갖 치장을 다 하고 나타나는 것도 이상하잖아. 이혼하겠다고 해 놓고 잘 보이려고 하는 것 같고.”
“마님…….”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릴리가 문득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아까 연무장에는 왜 가신 거예요? 전 언제나 그랬듯 전하를 스토……, 뵈러 가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혼하겠다면서 낮에는 몰래 연무장에 숨어들질 않나, 그래 놓고 지금은 잘 보일 필요 없다고 뒤로 빼니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기야 사정을 모르는 릴리의 눈엔 앞뒤가 안 맞겠지.
“친해지고 싶어서.”
‘친해지고 싶은데 몰래 숨어서 지켜보나요?’라고 말하는 듯한 릴리의 눈을 외면했다. 솔직하게 비상약들을 물색하러 간 거라고는 말해 줄 수 없으니까.
“디아르트와는 결혼하기 전부터 알고 지낸 오래된 사이잖니. 비록 이혼하게 됐지만 친구로라도 남고 싶단다.”
이혼하고 나면 난 페이셔 성을 되돌려 받을 것이다. 로에니와 페이셔 가문의 사이가 어떤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허울뿐일지라도 공작 가의 영애라는 타이틀은 내게 꽤 든든한 배경이 될 거다.
그러니 디아르트가 페이셔를 멸문시키는 일은 절대 없어야 했다. 게다가 디아르트 휘턴은 곧 황제가 될 예정. 이런 신분제 사회에서 황제만 한 뒷배가 어디 있어?
여러모로 친해져서 나쁠 건 없었다. 물론 당사자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이지만 말이지.
“아무튼 그러니 굳이 예쁘게 치장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라고 우물거리는 릴리를 뒤로 하고 난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럼 둘이 먹다 나만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저녁 식사를 하러 가 볼까.
먼저 다이닝 룸에 와 있던 디아르트는 이미 식사 중이었다. 예상대로 내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낮에 연무장에서 마주친 것도 뇌리에서 싹 지워 버린 듯한 서늘한 얼굴을 하고 묵묵히 커트러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도 먼저 와 계셨네요?”
살갑게 말을 붙여 봤지만 디아르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 친해지기 힘든 놈 같으니라고.
그럼에도 곧 최애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이 숨 막히는 정적과 싸늘한 공기마저 달콤하게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릴리가 먹기 좋게 썰어 준 소고기를 입에 넣고 천천히 음미했다. 육즙이 팡팡 터지는 게 입에서 살살 녹는다.
“기분이 좋은가 보군.”
기가 막힌 음식 맛에 속으로 탄성을 내뱉으며 먹는 데 열중하고 있던 난 퍼뜩 포크를 멈추었다.
“학계에 서신은 보냈나?”
잘못 들은 줄 알았건만 디아르트가 말을 건 게 분명했다. 평소에 갖은 아양과 아첨을 떨어도 눈 한 번 마주치기 힘들던 남자가 웬일이람?
접시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든 난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보고 있는 디아르트의 눈동자에 한심하다는 표정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빈정댈 거면 차라리 말을 걸질 말아 줄래?’
난 포크로 소고기를 콱 찍으며 싱긋 웃었다. 억지로 늘어진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그럼요. 조만간 학술지에서 제 이름을 보게 되실걸요.”
되도 않는 허풍 이후, 또다시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열심히 포크를 움직이던 난 문득 황녀의 초대장을 떠올렸다.
‘황실 다과회에 초대받았다는 걸 말해 두는 게 좋겠지?’
상대가 아무리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이런 일이 생기면 언질을 해 주는 게 예의일 것이다. 이혼을 앞두고 있긴 해도 아직은 부부 사이이니까.
작게 한숨을 내쉰 난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운을 뗐다.
“황실에서 서한이 왔어요. 레티시아 황녀 전하께서 다과회에 초대하시겠대요.”
디아르트는 시선을 들지 않았다.
“황녀 전하께서 친히 서한까지 보내 주셔서 감사히 초대에 응하려고 해요.”
여전히 그는 조용히 식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비록 반응은 없지만 용건은 다 전했기에 난 홀가분한 기분으로 접시에 놓인 고기 조각들을 입으로 가져갔다.
더 말 시켜 봤자 호감도만 떨어질 것 같으니까 얌전히 최애 만날 생각하면서 밥이나 먹어야지.
‘우리 에드거, 실제로 봐도 하찮고 귀여울까?’
기대감에 어깨가 절로 들썩인다.
“흠흠~”
고기도 맛있고 최애를 볼 생각에 기분이 좋은 난 어느새 디아르트의 시선이 내게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014
시간은 빠르게 휙휙 지나갔다. 그동안 디아르트와 친분을 쌓으려고 했던 내 갖은 노력들은…….
‘비켜.’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군.’
‘또 무슨 수작이지?’
‘지금 그걸 핑계라고 대는 건가?’
순조롭게 망해 가고 있었다.
어째 점점 호감도가 떨어지는 것 같은데……. 잘 보이려다가 날카롭게 벼려진 검에 비친 울고 있는 나와 마주칠 것 같다는 불길한 상상이 자꾸만 들었다.
아니꼬워서 다 때려치우고 싶어도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지, 어쩌겠어.
저주의 발현까진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남아 있었다. 그 ‘말도 못 할 통증’을 겪는다는 저주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이 점점 커지고 있는 나로서는 체면이고 나발이고 디아르트를 만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하지만 디아르트 이놈은 말도 못 할 정도로 철벽남이었고, 나는 그에게 손가락 하나 대 보지 못했다. 대신,
“우와, 너무 예쁩니다!”
“이런 건 처음 먹어 보는데 엄청 맛있네요.”
“마님, 이건 뭐로 만든 건가요? 맛이 기가 막히네요!”
도시락을 사이에 두고 둘러앉은 기사들이 꺅꺅거렸다.
‘기사들을 길들이고 말았지…….’
나는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넣는 그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휘턴 가의 문장이 은빛 늑대라고 알고 있는데 실은 그거 개 아닐까?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등 뒤로 꼬리를 흔들고 있는 것 같을까. 기사들도 그렇고 저택 내 사용인들도 그렇고 다들 꼭 개 같…… 아니 강아지 같단 말이야.
“마님 덕분에 정말 매번 호사를 누립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내가 내미는 음식들을 마치 독이 든 만찬을 보듯이 보던 기사들이었다. 먹어 보라는 나의 권유에 어쩔 수 없이 손을 움직이면서도 도무지 내키지 않는지 한참을 주저했더랬다.
그러던 이들이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전 매일매일 이 시간만 기다린다니까요.”
“지옥 같은 오전 훈련을 버티는 이유죠!”
잔뜩 경계하던 눈빛은 어디로 갔는지 나를 보는 눈동자에 신뢰와 감사함이 들어차 있었다.
‘친해지려고 매일같이 연무장을 들락거린 보람이 있다니까.’
역시 경계를 푸는 덴 맛있는 음식이 최고였고, 누군가의 신뢰를 얻으려면 먼저 그의 배를 채워 주는 게 만고의 진리다.
칼 휘두르는 기사들이라고 해서 무거운 고기나 빵 같은 걸 좋아할 거라는 건 오산. 살라몬 타르타르나 카망베르 튀김, 딸기가 잔뜩 올라간 타르트, 바닐라 슈크림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들이 여느 귀부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많이 먹어요.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난 앞으로 날 도와줄 비상약들을 흐뭇하게 보며 음흉한 꿍꿍이를 속으로 숨겼다.
“각하께선 이 맛있는 걸 왜 안 드시는지 모르겠어요.”
내 말이.
“마님 성의도 있는데 한번 입이라도 대 보시지.”
그러니까.
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맞장구쳤다. 이들의 말대로 연무장에 있는 모든 기사들이 내가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도시락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데 반해 디아르트는 저만치에서 제 검만 손질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와 가장 가까운 기사단장 램버트 경마저 커다란 슈를 입 안에 욱여넣고 있는데 말이지.
‘뭐 저 먹으라고 싸 온 건 아니지만.’
정말이지 친화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이라 공략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가만 디아르트를 바라보던 난 기사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디아르트가 지금 제일 갖고 싶은 게 뭘까?”
친해지는데 선물 만 한 것도 또 없지. 의상이나 장신구, 구하기 힘든 책 같은 사치품에도 까막눈이다 싶을 정도로 노관심인 디아르트에게 뇌물 공세가 먹힐까 싶긴 하지만.
“글쎄요. 각하께서 어디에 관심을 두시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전쟁터였다면 적군의 머리를 가장 갖고 싶어 하셨겠지만요. 하하하.”
크고 작은 전쟁들을 함께 겪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보내는 기사들이라면 디아르트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해서 물어보았지만 소득은 없었다.
램버트의 다소 소름 끼치는 답변은 흘려넘기고, 이 정도면 무념무상의 상태가 아닌가 싶다. 하기야 하루 일과가 집무실-연무장-침실이 다인 남자이니.
‘그래서 처음 관심을 갖게 된 아델리아에게 미친 듯이 집착하게 된 건가?’
오롯이 집중되는 관심이라니…… 어우, 무서워.
디아르트의 광적인 집착을 익히 알고 있는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참, 마님, 내일 황궁에 가신다면서요?”
그레이트 피레니즈를 똑 닮은 밀토가 물었다.
“응. 그래서 말인데, 밀토 경에게 호위를 부탁해도 될까?”
“그럼요! 제가 목숨 바쳐 마님을 호위하겠습니다!”
밀토가 왼쪽 가슴에 주먹을 대며 비장하게 각오를 다졌다.
“목숨을 바칠 것까지야. 그래도 든든하네. 잘 부탁할게.”
내 말에 밀토가 활짝 웃었다. 볼 보조개가 깊이 패인 게 무척이나 귀여웠다.
‘어이구, 깜찍해라. 참 이 동네는 외모들이 준수하단 말이야.’
작가님이 얼빤 건지 아니면 휘턴 가가 얼굴을 보고 사람을 뽑는 건지 공작 저 사람들의 외모는 상향 평준화 되어 있었다. 고든조차 미중년이니 말 다 했지.
덕분에 눈이 즐겁다. 저주만 아니었으면 잘생긴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지금의 삶은 만끽했을 텐데. 이렇게 잘생기고 몸도 좋은 남자들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난 저놈한테 매여 있는 걸까.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때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디아르트가 그대로 지나치며 낮게 일갈했다.
“휴식이 길군.”
그의 말에 기사들이 남은 음식들을 서둘러 입에 구겨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님.”
나는 내게 인사하고 연무장 쪽으로 뛰어가는 기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젠 아주 대놓고 찾아오는군.”
릴리와 널브러진 도시락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머리 위로 서늘한 목소리가 닿았다. 고개를 드니 벌써 지나간 줄 알았던 디아르트가 눈썹을 구기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보면 고생하고 있을 기사들이 생각나서 자꾸만 찾아오게 되네요.”
사실은 디아르트에 대해 몰래 알아보려 할 때마다 이 귀신 같은 놈에게 족족 들키는 바람에 반쯤 포기한 채 대놓고 찾아오기 시작한 거였다. 차라리 접촉할 기회라도 노려보자는 속셈이었다.
그간 못마땅한 표정을 하면서도 딱히 제재하지 않더니 더는 못 참겠는 모양이다.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전 진짜 이제 공작님께 전혀, 조금도, 단 일 퍼센트도 마음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아무런 속셈도 없어요!”
난 치켜 올라간 그의 눈썹을 보며 항변했다.
이렇게 자꾸 주변을 맴돌면서 아무런 마음도 없다고 하는 걸 믿기 힘든 것도 이해는 된다. 나도 저주만 아니었으면 되도록 네놈 심기에 거슬릴 일은 하고 싶지 않단 말이다.
“이혼 서류를 제출하셨다고 들었어요. 이제 무를 수도 없는 일이 되었으니 제 진심을 좀 믿어 주셨으면 좋겠네요. 다만 전 그동안의 일들을 모두 잊고 앞으로는 그저 오랜 친우로서 우정을 쌓고 싶을 뿐이랍니다.”
틈틈이 내 저주도 좀 풀고 말이야.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잖아요. 이십여 년의 세월이 어디 쉽게 쌓이는 거던가요.”
“그대와 친우였던 적 없어.”
“……앞으로도 그러란 법은 없죠.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전 이제라도 공작님과 친구로 지내고 싶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사이가 되면 좋잖아요.”
정확히는 네가 내게 말이지.
싱긋 웃자 디아트르의 표정이 삐뚜름해졌다.
“훈련에 방해되니 앞으로는 발걸음 하지 말도록 해.”
“기사들은 좋아하던걸요. 이 시간만 기다린다고 했어요. 맛있는 음식과 적당한 휴식은 훈련의 능률을 올리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될 거예요.”
무슨 말을 해도 내가 받아칠 것 같자 디아르트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난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는 그를 보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요! 공작님 머리에 대왕 풍뎅이가 있어요!”
난 호들갑을 떨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내 손이 채 닿기도 전에 디아르트가 몸을 휙 피했다. 그러곤 다소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모습이 잡지 화보에 나오는 모델 같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쳇, 오늘도 실패군.’
진짜 철벽 쩐다니까. 자연스럽게 접촉을 해 보려던 시도는 오늘도 물거품이 되었다. 나는 아쉬운 입맛을 쩝 다시며 있지도 않은 풍뎅이의 비행 궤적을 손가락으로 쫓았다.
“저리로 날아갔네요.”
내 말에 디아르트는 나를 한번 흘깃 내려다보곤 등을 돌렸다.
“진짜 큰일이네…….”
저주의 발현까진 앞으로 고작 사흘밖에 안 남았다. 내일은 황실에 다녀와야 하니 실질적으로 남은 날은 이틀밖에 없는데 지금까지 디아트르의 머리카락 한 올 건드려 보질 못했다.
그리고 현재 상황을 봤을 때 앞으로도 그와 접촉을 할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진짜 저 비상약들을 덮치게 생겼다.
“왜 그러세요, 마님?”
릴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난 어느새 도시락을 다 정리해 놓은 충직한 그녀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것도 아냐.”
고민해 봤자 무슨 소용이야. 나중 일은 나중으로 미루고 오늘은 일단 당장 내일 만날 최애를 위해 팩이라도 해야지.
난 다소 현실 도피적인 생각을 하며 연무장을 나섰다. 시야 끝으로 검을 휘두르는 디아르트의 은발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보였다.
* * *
“다 챙겼어요, 마님.”
릴리가 레티시아 황녀에게 줄 선물을 들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난 밀토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 위로 올라탔다.
‘드디어 최애를 보러 가는구나!’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배웅하러 나온 사용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녀올게.”
릴리까지 마차 위에 오르자 문이 닫혔다. 말 위에 오른 밀토가 앞장서자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드넓은 공작 저는 빠져나가는 데도 한참이었다.
마침내 성 밖으로 나온 마차는 전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속으로 들어섰다. 정석대로라면 디아르트가 다스리고 있는 바트령에서 수도까지는 마차로 쉬지 않고 나흘을 꼬박 달려야 했다. 하지만 고위 귀족이자 휘턴 가의 부인인 난 포탈을 이용할 수 있었다.
바트령 중심 도시에서 겨우 십분 남짓 떨어져 있는 포탈을 통과하면 수도성 근처에 있는 숲까지는 눈 깜짝할 새에 도착했고, 그럼 황궁까지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고 당도할 수 있었다.
며칠 전에 이혼 서류를 가지러 시청에 다녀올 때 처음 이용해 봤는데 어찌나 신기하던지. 내가 진짜 판타지 세계 안에 있다는 걸 그때 제일 실감했다.
‘마법이라는 건 진짜 편리하다니까.’
창밖을 내다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데 저만치 앞에 젊은 여인이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어찌나 느릿하게 걷는지 금방 마차에 따라잡힌 여인의 배는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015
임신한 여자가 홀로 숲속을 걷고 있는 것도 신경 쓰이는데 그녀가 제 몸만 한 짐까지 들고 있는 터라 인간적인 도의로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릴리.”
“네, 마님.”
“잠깐 마차를 멈추라고 해.”
“네.”
릴리가 마차 내부 창문을 열고 마부에게 무어라 말하자 마차가 천천히 멈추었다. 그러자 앞장서고 있던 밀토가 다가와 창문 너머에서 물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응.”
불편하다는 말에 눈이 동그래진 밀토를 보며 웃은 난 창문 밖으로 손을 뻗어 벌써 저만치 뒤처진 젊은 여인을 가리켰다.
“마음이 아주 불편해.”
“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챈 밀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돌리자.”
“넷.”
힘차게 대답한 밀토가 앞으로 가더니 잠시 후 마차가 빙그르르 돌았다. 영주의 문장이 박힌 마차를 보고 허리를 숙였던 여인은 마차가 되돌아오자 놀라서 얼른 물러섰다. 그 잠깐의 움직임조차 버거워 보였다.
제 앞에 마차가 멈춰서자 여인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내리시려고요?”
엉덩이를 들썩이자 릴리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응.”
대답한 난 곧바로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등 뒤로 릴리가 허겁지겁 따라 내렸다.
나를 에스코트한 밀토가 젊은 여인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난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여자를 살펴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배가 많이 나온 게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몸으로 혼자 어디 가고 있는 거예…… 건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습관적으로 존대를 하려던 나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 신분제 사회에서 공작 부인이 제 영지민에게 존대를 하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파워 유교 국가에서 이십여 년 넘게 자란 내게 낯선 이에게 초면부터 말을 놓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저택의 사용인들과 기사들 덕에 그간 많이 익숙해져 있었다.
“몽뜨르누아에 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우물쭈물하는 여인 대신 밀토가 대답했다.
몽뜨르누아라면 제국의 수도였다. 포탈 없이 마차로도 족히 나흘은 걸리는 거리를 만삭의 몸을 하고 걸어가고 있다고?
나는 그녀의 낡은 단화를 내려다보다가 엄지로 마차를 가리켰다.
“타게. 우리도 수도까지 가는 길이니.”
“네, 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듯 젊은 여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괘, 괜찮습니다. 저, 그러니까…….”
젊은 여인이 나를 흘깃 올려다보았다. 공작 가의 마차를 타고 있는 걸로 봐선 지위가 높은 사람인 건 알겠지만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휘턴 공작 부인이세요.”
“네?”
릴리의 말에 젊은 여인이 경악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가 더욱더 경계 어린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자의로는 마차에 탈 것 같지 않고,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 갈 수도 없는 난 밀토에게 조용히 눈짓했다.
불식간에 밀토에게 짐을 빼앗긴 여인이 황망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그저 도와주려는 것뿐인데 흡사 홀로 산길을 걷는 아낙네의 짐 보따리를 무참히 빼앗아 버린 도적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불편하겠지만 그 몸으로 수도까지 걸어가는 건 무리네. 그냥 편하게 카풀한다고 생각하게.”
“네? 카풀……이요?”
“합석한다고 생각하란 말이야. 얼른 타게.”
내 재촉에 주저하던 여인은 더는 거절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여인이 그대로 마부 쪽으로 몸을 틀자 나는 급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
“어디 가는 건가?”
“네? 마차에 타려고…….”
혹 제가 뭘 잘못했나 눈동자를 굴리던 여인은 곧 앗, 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마님. 아둔하여 먼저 등을 보였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쪽으로 갈 게 아니라 여기 타야 할 것 아닌가.”
난 문이 열려 있는 마차 안을 가리켰다. 그러자 여인을 비롯해 릴리와 밀토까지 눈이 동그래졌다.
“제, 제가 어찌 감히 마님과 함께 마차 안에 탈 수 있겠습니까.”
“마님, 그렇게까진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릴리가 작게 속삭였다.
“마부 옆자리면 충분합니다.”
밀토까지 말리고 들었다. 호위 기사인 그로서는 낯선 이와 내가 한 공간에 타는 게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분명 귀족과 평민이 함께 마차를 타는 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법도보다 인의와 도리가 먼저였다.
게다가 임신까지 한 젊은 여인이 낯선 남자와 나란히 앉아 있는 건 불편할 게 뻔했다.
길게 설득하기 귀찮았던 난 딱 한 마디만 했다.
“이거 내 마차야.”
“감사합니다.”
‘이거 내 거야. 내 거니까 내 맘대로 할 거야.’ 시전으로 모두의 입을 한 번에 다물게 한 난 내게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전하는 여인, 레미다에게 손을 내저었다.
“감사할 것 없네. 어차피 가는 길이니.”
“그치만…….”
싱긋 웃은 난 레미다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산달이 언제인가?”
“다음 달 말일입니다.”
레미다가 손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웃는 얼굴이 인자했다.
“다음 달에 몸을 풀 사람이 수도까지 걸어가려고 했단 말인가? 길에서 진통이라도 왔으면 큰일 났을 걸세.”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레미다가 쓰게 웃었다.
“뮤트로이 풀이 영내에선 흔하지만 수도에선 꽤 값을 쳐준다고 들었거든요.”
바리바리 싸 들고 있던 짐들이 그 뮤트로이 풀인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혼자 그 먼 길을 위험하게.”
“남편이 얼마 전에 사고로 죽었어요. 이제 이 아이에게 남은 건 저 하나이니 강해져야죠. 그래야 아이를 지킬 수 있을 테니…….”
지쳐 있는 눈동자에 굳센 의지가 보였다. 여리게만 보였던 그녀는 한순간 그 누구보다 강해 보였다.
“아이는 행복하겠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부터 이리 사랑받으니. 나는 그녀의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나를 가만 보던 레미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들리는 소문과는 전혀 다른 분이시네…….”
작은 혼잣말이었지만 귀에 콕 박혀 들었다. 무슨 소문인지 대강 감이 오지만 묻지 말자. 차라리 모르는 게 속 편하지.
나는 못 들은 척 레티큘 안에서 초콜릿을 꺼내 내밀었다. 당 떨어지면 먹으려고 했던 건데 나보다는 아직도 약간 겁을 먹은 채 마차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레미다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았다.
“먹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일단 받아 든 레미다는 낯선 음식에 주저하다가 조금 베어 물었다. 이내 눈이 동그래진 그녀가 탄성을 내뱉었다.
“엄청 달아요!”
나는 다람쥐처럼 조금씩 초콜릿을 갉아먹는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저만치로 커다란 포탈이 보였다.
포털 앞에 멈춘 밀토가 품 안에서 통행증을 꺼내 포탈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얼마 후 연한 녹색 빛을 띠고 있던 포탈이 푸르게 반짝였다. 길이 열렸다는 신호였다.
‘다시 봐도 신기하네.’
포탈 안으로 진입한 마차는 정말 눈 깜박할 새에 맞은편으로 빠져나왔다. 방금까지 잎이 뾰족한 침엽수들로 빼곡했던 숲은 활엽수 나무들로 들어차 있었고, 지나온 길목마저 낯설어졌다.
벌써 수도 근처 숲에 도착한 것이다.
물건을 팔기로 했다는 슈에츠 상회 앞에서 레미다를 내려 주었다. 화려한 마차에서 낡은 옷을 입은 평민과 드레스를 입은 귀족이 함께 내리니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신기한 광경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 시선들을 뒤로하고 레미다에게 물었다.
“영지에는 언제 돌아갈 생각인가?”
“네? 아, 물건을 팔면 곧장 가야지요.”
“저쪽에 로코 제과점이라는 카페가 하나 있어.”
나는 손가락으로 저 멀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케이크가 무척 맛있지. 거기서 기다리게.”
“……네?”
레미다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오후엔 영지로 돌아가니 그때 같이 가게.”
“아, 아닙니다, 마님. 여기까지 태워 주신 것만 해도 과분한데……. 정말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신경 쓰여서 그래. 내 영지 사람이니 내가 챙겨야지. 내 맘 편하자고 하는 거니 부담 갖지 말게.”
나는 더는 거절도 못 하고 그저 고마운 얼굴로 나를 보는 레미다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곤 밀토를 불렀다.
레미다와 함께 있으라는 내 말에 밀토는 당황했다.
“저는 마님을 호위해야 합니다.”
“저기 황궁 보이지? 마차로 5분만 달리면 도착할걸?”
“그치만…….”
“밀토 경 말고도 나를 지키는 이들이 이리 많은걸. 게다가 영지민을 보호하는 것도 기사의 도리잖아. 혹 상인들이 물건값 후려치는 일 없도록 도와줘. 자고로 수도란 눈 뜨고 코 베이는 곳이거든.”
“……네.”
밀토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후련해진 난 다시 마차 위에 올라탔다.
‘드디어 최애를 만날 시간이다!’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황궁을 바라보며 릴리에게 물었다.
“릴리, 나 어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내 모습에 릴리가 양손 엄지를 척 내밀었다.
“완전, 눈부시게 아름다우세요! 다과회에 마님보다 아름다운 분은 없으실걸요?”
나는 진심이 가득 담긴 그녀의 얼굴을 보며 활짝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래.”
난 자신 있는 손짓으로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016
“역시 황궁은 황궁이네요.”
주위를 둘러보며 연신 탄성을 내뱉던 릴리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그녀의 말대로 황궁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사람이 손으로 그린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정교하고 웅장한 천장화와 기하학적 무늬의 금빛 타일. 대리석 벽을 빼곡히 채운 화려한 액자들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선 각양각색의 조각상들. 소설 속 묘사대로 정말 화려하긴 한데 솔직히 좀…….
‘조잡하지 않나?’
여백의 미라든가 비움의 미학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이 고급스러운 장식품들로 그득그득 들어차 있으니 오히려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과유불급이라더니, 딱 그 짝이었다.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게 수도의 미적 감각인가.’
“근데 우리 공작 저가 더 멋있는 것 같아요.”
릴리가 우리를 안내해 주고 있던 시녀들의 눈치를 흘깃 살피며 소곤거렸다. 난 그녀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에도 그래, 릴리.
나 역시 절제미가 돋보이는 공작 저가 훨씬 고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부턴 사용인들의 출입이 금해져 있습니다. 휘턴 공작 부인만 절 따라오시지요.”
“그럼 릴리, 이 아이는?”
“따로 마련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시녀의 말에 난 릴리를 돌아보았다. 홀로 떨어지게 된 릴리는 다소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내게 바짝 붙어 속삭였다.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낯선 곳에 혼자 있게 되어 두려워하는 줄 알았더니 되려 기억을 잃은 내가 염려되었던 모양이다. 착하기도 하지.
난 주인을 걱정하는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는 릴리에게 싱긋 웃었다.
“내 걱정하지 말고 쉬고 있으렴.”
릴리를 안심시킨 난 그녀를 남겨 두고 시녀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후에야 작은 새 문양이 조각된 커다란 마호가니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잠깐만 견디면 최애를 보는 거야!’
크게 심호흡하자 나를 흘깃 보던 시녀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처음 느낀 것은 화려한 햇살이었다. 그리고 삐롱 삐롱 우는 새소리와 코를 간지럽히는 향긋한 프리지아 향. 포근한 공기와 꾀꼬리같이 맑은 웃음소리들이었다.
“어머, 오셨군요.”
대여섯 명의 화려한 여인들 사이에서 누군가 일어서서 나를 반겼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인들도 하나둘 따라 일어섰다.
‘저 사람이 레티시아 황녀인가 보군.’
꼬리를 잔뜩 부풀린 공작새마냥 잔뜩 힘을 준 사람들과 달리 여인은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도 특유의 기품과 우아함이 흘러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고귀해 보였다.
“제국의 작은 별, 레티시아 황녀 전하를 뵈옵니다.”
난 드레스 양쪽을 잡고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오늘을 위해 지난 며칠간 제국의 예법을 열심히 연습했다. 다행히 빙의 전 로에니가 쌓아 온 경험들을 몸이 기억하는지 금방 습득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완벽한 예법이라고 자부하는데 흘깃 눈을 드니 다소 놀란 얼굴의 레티시아 황녀가 보였다. 더불어 저 뒤에 서 있는 여인들도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오 망할.’
이쪽이 레티시아 황녀가 아니었나?
하지만 이 중에 황녀로 보이는 사람은 이 여인밖에 없는데. 게다가 원작에서 황실 사람들의 외모를 묘사할 때 금발의 푸른 눈이라고 했었단 말이야.
젠장.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기지? ‘서프라이즈!’를 외치며 장난이었다고 하면 미친년 보듯 볼 것 같은데.
머릿속은 물론 눈까지 빙글빙글 도는 와중에 레티시아 황녀로 추정했던 인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해요. 조금 놀라서……. 어서 이쪽으로 와 앉으세요.”
몸을 바로 하며 고개를 들자 여인이 생글 웃으며 제 옆자리를 권했다. 나는 약간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별말 안 하는 걸로 봐선 레티시아 황녀가 맞는 모양인데 아까 그 반응들은 대체 뭐야. 괜히 사람 놀라게…….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황녀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곧 시녀가 다가와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찻물을 따랐다.
폴폴 올라오는 따뜻한 김을 타고 향긋한 플로랄 향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초대에 응해 주어서 고마워요, 휘턴 공작 부인.”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자리에 늦어 송구하옵니다.”
“늦기는요. 우리가 조금 일찍 모였던 것뿐이랍니다.”
레티시아 황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원작에선 분명히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봐도 못 본 척 데면데면하다고 묘사되어 있었는데 이 친절한 환대는 뭐지. 나는 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하긴 제국의 황녀가 아무리 내가 싫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티 낼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겠지.’
그런 건 나나…… 아니, 아니, 원래의 로에니 휘턴이나 하는 짓이지. 나는 납득하며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대충 시간 때우다가 우리 최애나 만나러 가자.
그렇게 다과회에 참석한 지 한 시간 째.
평화롭다. 지나치게 평화로워.
햇살 좋은 창가 앞의 반짝반짝 빛나는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들의 모임. 책에서 묘사하는 그들의 티타임은 웃는 얼굴로 서로를 향한 칼 문 견제를 겨누는 자리인데…….
‘너무 지루해!’
기르고 있는 동물이 새끼를 낳았다든가, 온실에 귀한 꽃을 들였다든가, 수도에 새로 생긴 살롱의 솜씨가 뛰어나다든가.
상상했던 험한 일들이 없어 다행이긴 한데, 그다지 관심 없는 얘기들을 계속 듣고 있자니 졸리기까지 했다. 이런 영양가 없는 대화를 하려고 여기까지 불렀단 말인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세우고 있던 경계는 느슨해진 지 오래였다. 그저 공작 부인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힘겹게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제발 이 시간이 빨리 좀 지나가길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온 시녀가 레티시아 황녀의 귀에 대고 무언가 속삭였다. 그녀의 말을 들은 황녀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잠시 급한 용무가 생겨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손님들을 초대해 놓고 자리를 비우게 되어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황녀 전하.”
“천천히 다녀오시어요.”
그녀를 따라 일어선 귀부인들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들을 향해 미소 지은 레티시아 황녀는 나에게도 눈인사를 건넨 후 시녀를 데리고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하아-”
레티시아가 나가자마자 귀부인들의 표정이 다소 풀어졌다. 훨씬 편안한 동작으로 찻잔을 든 귀부인들이 나를 흘깃거렸다.
“그런데, 휘턴 공작 부인께서 다과회에 다 참석하시고 어쩐 일이세요?”
“그러게 말이에요. 더욱이 황녀 전하께서 주최하신 자리인데 나오신 거 보고 조금 놀랐답니다.”
뭐지? 이 미묘한 말투는? 게다가 어쩐지 나를 보는 눈빛마저 돌변한 것 같은데.
“제가 못 올 자리에 왔나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의외여서요.”
“네. 평소 이런 자리엔 잘 참석하지 않으셨던 분이시라 신기해서 그런답니다.”
귀부인들이 얼굴을 마주하고 야릇하게 미소 지었다.
‘아하.’
일견 공손한 것 같지만 비웃음이 섞인 말투. 저들끼리 교환하는 시선. 나는 여기서 대충 상황을 눈치챌 수 있었다.
‘로에니 너, 무시당하고 있었구나?’
다과회에 오면 레티시아 황녀와 어떤 신경전이 벌어질 거라고만 생각했지,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페이셔 공작가의 영애이자 현 휘턴 공작 부인인 나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없었다. 계급 사회에서 내게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 분위기를 보건대 로에니는 모종의 이유로 이들에게 얕잡아 보인 게 틀림없었다.
황실에 다녀오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릴리의 말도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아무리 우둔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를 느끼지 못할 리 없으니까.
어쩌면 무도회나 모임에서 종종 히스테릭한 난동을 부렸다는 것도 이것 때문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호구였네. 호구였어.’
공작 저의 사용인들이나 아델리아에겐 그렇게 패악을 부려 놓고 이런 데선 무시나 당하고 말이야. 아니, 얜 악녀 주제에 왜 당하고 산 거람?
하지만 내가 빙의한 이상 예전의 로에니처럼 멍청하게 당하고 살 순 없었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하던 차에 차라리 잘됐지. 한마디 할 요량으로 막 입을 떼던 순간이었다.
「그 소문 들었어요?」
「무슨…… 아, 요즘 항간에서 가장 유명한 소문 말씀하시는 거죠? 공작 부인이 시내 제과점에서 부린 행패에 대한 소문 말이에요.」
「네, 그거요.」
귀부인들이 방금까지 쓰고 있던 언어와 전혀 다른 언어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난 이들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나를 힐끔 본 귀부인들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어머, 저 얼굴 좀 보세요.」
「우리가 하는 얘기를 못 알아들으니 짜증이 나나 보군요.」
「그러게, 고위 귀족이나 되어선 히비스어를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요, 호호.」
「그러니까요. 그게 다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은 탓 아니겠어요? 페이셔 공작이 여식을 무시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요. 공작 가의 영애였으면 뭣하나요. 품위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걸.」
「그런 주제에 가문끼리의 친분으로 휘턴 공작을 차지했죠. 정말 염치라고는 없다니까요.」


#017
「아무튼 히비스어를 모르는 건 평민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히비스어를 배우는 건 귀족의 특권이자 의무니까요.」
「그럼요. 이제 보니 제과점에서 그 평민 점원 편을 든 이유가 있었네요.」
귀부인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일도 웨스턴 자작 부인에게 들어보니까 별일도 아니더라고요. 그분들은 그저 지나가던 중이었는데 점원이 제대로 보지 못한 거래요. 솔직히 부딪쳐 봤자 얼마나 세게 부딪쳤겠어요. 제 생각엔 그 점원이 일부러 휘턴 공작 부인에게 음료를 끼얹은 건 아닌가 싶어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동안 공작 부인이 평민들을 얼마나 무시했게요.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던 사람이잖아요? 그래 놓고 이제 와서 평민 편을 드는 것도 웃기지 뭐예요.」
「그러니까요. 근데 그 일로 평민들 사이에서 공작 부인의 평판이 올라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웨스턴 자작 내외만 안 되었어요. 괜히 뒤집어써선 공작 부인 드레스며 가게 물건들이며 하물며 그 점원의 옷까지 싹 다 배상해 줬다고 하더라고요.」
「어머 세상에…….」
「공작 부인이 다 물어내라고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줬다나 봐요. 가문까지 들먹이면서 모욕을 주는데…… 남 보기 부끄럽고 일 크게 만들기 싫어서 물어 줬다고 하더라고요. 웨스턴 부인이 어찌나 억울해하던지…….」
「어머, 안타까워라…… 정말 천박하네요. 날강도가 따로 없어요.」
나는 낯선 언어로 대화하는 귀부인들에게 끼지 못한 채 찻잔만 연신 기울였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다 자기 살려고 그런 거 아닌가 싶어요. 지난주인가, 제 하녀 아이가 시청에 갔다가 공작 부인을 봤는데, 글쎄 손에 이혼 서류를 들고 있었다지 뭐예요. 게다가 이혼 절차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기까지 했다더군요.」
「어머 어머, 웬일이야. 휘턴 공작 각하하고 이혼하려는 걸까요?」
「그게 아니라면 본인이 직접 이혼 서류를 챙겨 갈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하긴 두 사람이 남보다 못한 사인 건 유명하잖아요.」
「각하께 매달리다시피 해서 결혼했으니까요. 자존심도 없지, 정말. 그렇게 싫다는 사람한테 매달리다니 전 상상도 못 하겠어요.」
「그런데 각하가 아니라 공작 부인이 서류를 뗐다는 게 이상하네요. 오히려 서류를 찢어 버릴 사람인데.」
「그러게요. 쉽게 이혼해 줄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 집착에.」
「뭐, 속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중요한 건 공작 내외 사이에 이혼 서류가 오갔다는 거죠. 자신의 방패가 되어 줄 휘턴 공작가가 이제 등 뒤에 없으니 몸을 사려야 하지 않겠어요?」
「아하, 그래서 그 상황에 평민을 도와줬군요. 평민들 사이에 호감도를 높이려는 속셈이겠네요.」
「그게 무슨 소용인진 모르겠지만요. 아무튼 오늘 다과회에 참석한 것도 그 일환일 거예요. 나중에 불이익이라도 당할까 걱정되는 거죠. 홀로 사교계에 나오려면 지금부터라도 여기저기 얼굴 도장을 찍어야 하지 않겠어요?」
「근데 황녀 전하께선 어쩐 일로 공작 부인을 초대하셨을까요? 사이가 안 좋잖아요.」
「그저 변덕이시겠죠. 아니면 전하도 소문을 들으셨던지요.」
「아까 황녀 전하께 인사하는 거 보셨어요? 전 공작 부인이 그렇게 제대로 예법을 지키는 걸 처음 봤지 뭐예요.」
「저도요. 너무 놀라서 순간 말을 잃었답니다.」
「전 좀 가증스럽더라고요.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말이에요.」
「그러게요, 호호호. 아 왜 이렇게 고소한지 모르겠어요.」
「전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은걸요. 솔직히 휘턴 공작 각하가 얼마나 아까웠다고요.」
「네. 그분을 흠모하는 레이디들이 한둘이었나요, 어디? 이번에 혼자가 되시면 엄청난 혼처들이 들어올 거예요. 각하라면 재취 자리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저도 결혼만 안 했더라면 청혼서를 넣었을 거예요. 그 얼굴에 그 능력이라니 흔치 않은 장부시니까요.」
「저도요.」
한참 하하 호호 웃던 귀부인들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개중 녹색 드레스를 입은 백작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공작 부인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계속 홀짝였더니 어느새 비어 버린 찻잔을 내려다보며 무어라 대답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이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생각에도 그래요.”
“그럴 줄 알았어요.”
백작 부인이 조롱을 숨기지 못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한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꼴 좀 보세요.」
「몰라도 아는 척해야겠죠. 히비스어를 모른다는 건 귀족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잖아요.」
「매번 저렇게 애써 숨기는 게 안쓰러운 정도예요.」
「저러다 결국 못 참고 찻잔을 던지겠죠?」
「아, 너무 우스워요, 정말.」
난 기분 좋은 듯한 귀부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시녀가 따라 주는 찻 줄기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 때문에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문과 만세!’
별 쓰잘데기 없는 줄 알았던 언어 능력 버프가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귀부인들이 하는 얘기를 전부 알아듣고 있던 난 찻잔 뒤로 음흉한 미소를 감췄다.
그러니까 저들의 대화를 미루어 보건대, 로에니 휘턴은 생각보다 더 무시당하면서 살았던 모양이다. 고작 귀족들의 고유 특권인 히비스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그러고 보니 여주인 아델리아도 히비스어를 알지 못해 종종 곤경에 처했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디아르트가 히비스어를 쓰는 자는 그 입을 찢어 버리겠다고 공연히 선포했고, 실제로 몇몇의 혀를 본보기로 잘라 버리기도 했다.
‘내가 언어 능력을 갖추게 된 건 어쩌면 로에니의 열등감 때문일 수도 있겠어.’
귀족 태생인 로에니가 어째서 히비스어를 배우지 못했는지, 페이셔 공작은 어째서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정도로 로에니를 무시했는지 등등 의아한 구석이 많았지만 일단 그건 뒤로 제쳐 두고.
‘이것들을 어떻게 물 먹여야 제대로 먹였다고 소문이 날까.’
저렇게 사람 면전에서 대놓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품위며 체통을 운운하는 게 웃겼다. 이게 귀부인들의 진짜 대화라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낮았다.
아무튼 지루해서 돌아 버릴 것 같던 자리가 흥미진진해졌다. 귀부인들은 여전히 내가 그들의 대화를 몽땅 알아듣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나를 비웃고 있었다.
어느 타이밍에 어떻게 운을 뗄까.
‘「부인들의 이야기는 재밌게 들었어요」라고 말하면 혼비백산하려나.’
깜짝 놀라서 얼빠진 얼굴로 날 보는 상상을 하니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아, 일단 그렇게 디아르트가 아까우면 니들이 데리고 살아 보라고 외치고 싶다.’
디아르트 같은 거, 난 줘도 싫거든? 속으로 흥, 코웃음을 쳤다.
‘아무튼 로에니, 네 복수는 내가 해 줄게.’
경악해서 어쩔 줄 몰라 할 귀부인들을 상상하며 완벽한 타이밍을 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귀부인들이 응접실에 놓인 새장을 구경하겠다며 일어섰다. 자리에는 나와 남작 부인, 그리고 아까 내게 말을 걸었던 마이러스 백작 부인만 남아 있었다.
남작 부인이 새장 앞에서 조잘거리는 귀부인들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마이러스 백작 부인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러곤 고개를 기울이며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내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나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는 기색이었다.
「마이러스 부인, 머더스 공국에서 루프탄을 수입하기로 하셨다면서요?」
「어머,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남편이 몰타 상단에 투자하기로 했다면서 말해 주던걸요.」
「공적인 일까지 얘기하시다니 내외 사이가 좋으시군요. 맞아요, 저희 상단이 루프탄을 수입하기로 계약했답니다.」
「제련하기 쉽지 않은 광물이라고 들었는데 성공했나 보네요. 그게 제국에 들어오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 팔리겠어요. 어머, 그럼 제라석을 독점 판매하고 있는 해리스 상단이 타격을 입겠군요. 강도가 세 배 강한 루프탄이 있는데 이제 제라석을 사용할 사람은 없겠죠.」
「그동안 많이 벌었잖아요? 사업이 잘될 때가 있으면 기울 때도 있는 법이죠.」
「참, 요즘 휘턴 공작 가에서 제라석을 대량 구입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쪽도 손실이 상당하겠어요.」
「다이아몬드 광산만 여럿 갖고 계신 분이 고작 그 정도로 눈 깜짝하진 않겠죠.」
「하긴 그렇지만요.」
디아르트 이놈, 다이아몬드 광산이 한두 개도 아니고 여럿이라고?
……부럽다.
수도로 나온 김에 드래곤 이빨로 만들어졌다는 검을 구해서 뇌물로 바쳐 볼까 했는데 피 같은 돈 공중에 흩뿌리기 전에 좋은 정보 감사.
알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의 재력이면 자기가 갖고 싶은 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테니 물질적인 건 그다지 감흥이 없을 것이다. 그가 갖고 있지 않은 건 그저 필요 없기 때문일 테니까.
‘그나저나 루프탄이랑 제라석이라면…….’
분명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아델리아를 둘러싼 두 남자의 삼각관계에만 치중해서 주로 욕하는 재미로 읽었던 터라 정확히 그게 어떤 물건인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꼼꼼히 좀 읽을걸. 내가 빙의할 줄 알았냐고……. 이래서 사람은 만약을 대비해야 한다니까.
‘아!’
어지럽게 얽혀 있는 머릿속을 한참 헤집던 난 마침내 그게 어떤 물건인지 떠올렸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고작 드래곤의 이빨로 만든 검 따위보다 디아르트의 마음에 쏙 들 만한 선물이 떠올랐다. 난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자 백작 부인과 남작 부인이 나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웃는 거죠? 설마 우리 얘기 다 들은 건 아니겠죠?」
「설마요.」
“쿠키가 참 맛있네요. 황실에서 만든 거라 그런가.”
나는 초콜릿 쿠키를 집어 들며 무해하게 웃었다. 백작 부인과 남작 부인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이내 형식적인 대답을 건네곤 다시 저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오늘은 봐준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얻게 된 난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이걸 가지고 디아르트와 협상할 계획이기에 이들을 엿 먹이려던 생각은 잠시 미뤄 두었다.
‘지금 많이 웃어 둬라.’
난 흐뭇한 미소를 찻잔 뒤로 숨겼다.


#018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레티시아 황녀는 그 후로도 한 시간가량 귀부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동떨어진 채 홀로 차와 과자만 즐겼지만 최애를 영접할 시간이 다가온다는 생각에 기분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얼굴에 계속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탓에 레티시아 황녀가 종종 쳐다볼 정도로 말이다.
주변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무슨 핑계를 대야 최애가 있는 장소로 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어느덧 자리가 파할 시간이었다.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황녀 전하와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티시아 황녀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는 귀부인들을 바라보며 난 초조해졌다. 마음대로 황궁을 돌아다닐 순 없으니 어떻게든 황녀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민하는 그때, 레티시아 황녀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휘턴 공작 부인, 괜찮으시다면 저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요?”
나만 콕 집어 남으라고 하자 귀부인들이 의아한 얼굴로 나와 레티시아 황녀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물러났다.
다과회 내내 별다른 기색 없이 모두와 똑같이 대해 주던 황녀지만 혼자 남은 내게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혹시 차라도 끼얹는 건 아니겠지?’
귀부인들처럼 황녀도 본색을 드러내는 거 아닌가 싶어 난 그녀 앞에 놓인 찻잔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나를 바라보는 레티시아 황녀의 얼굴엔 호기심과 약간의 호감뿐 적대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도리어 둘만 남게 되자 그녀의 표정이 한층 더 생생해진 것 같았다.
“갑작스레 다과회에 초대하여 놀라셨나요?”
“조금요.”
레티시아 황녀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부인과 꼭 한번 얘기를 나눠 보고 싶었답니다. 독대를 청하면 불편하실까 싶어 다과회 자리를 마련했지요.”
악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표정에서 그녀가 나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귀부인들을 부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귀부인들이 히비스어로 나를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뭐 어쨌든 덕분에 좋은 정보도 얻었고 앞으로 재밌는 일도 생길 거 같으니까.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살짝 긴장했던 어깨가 사르르 풀어졌다.
근데 왜 갑자기 나를 보고 싶어 한 걸까. 나와 레티시아 황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원작은 백작 부부가 지방에서 지내는 아델리아를 찾아내면서부터 시작하기에 이 시기 휘턴 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실은 며칠 전에 시내에서 부인을 봤답니다.”
“저를요?”
난 레티시아 황녀를 본 기억이 없었다. 대부분이 갈색 머리에 잿빛 눈동자를 가진 벨릭 제국 사람들 사이에서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가 눈에 안 띄었을 리가 없는데.
“변장을 하고 나간 터라 부인께선 절 못 알아 보셨겠지요.”
그때를 떠올리는 듯 레티시아 황녀의 입매가 더욱 길게 늘어졌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부인께서 웨스턴 자작 부부를 혼내고 계셨죠.”
아, 그 장면을 봤구나.
이미 귀부인들에게 그 일로 조롱을 받았던 난 레티시아 황녀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은 지나치게 초롱초롱했다.
“웨스턴 자작에게 야무지게 돈을 뜯어내는 모습이 어찌나 고소하던지…….”
“……네?”
“아, 이게 아니지.”
아차 한 표정의 레티시아 황녀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황녀가 한결 정돈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때 부인께서 자작 내외에게 쓴소리하시는 모습을 보고 무척이나 감명받았답니다. 보통 그 상황이었으면 음료를 엎은 점원을 혼냈을 테니까요.”
“그런가요.”
“그동안 제가 보아 온 부인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서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답니다. 호기심이 들어 이리 초대했지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대체 무슨 전개야.
“정말로…….”
그런 나를 보던 레티시아 황녀가 잠시 말을 골랐다.
“전혀 다른 분이 된 것 같군요.”
의문과 호기심이 담긴 눈빛에 나는 슬쩍 시선을 내려 찻잔을 들었다. 설마 내가 진짜 로에니가 아니라는 걸 알아챈 건 아니겠지?
“어쩐지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갑자기요?’
대체 그 장면이 얼마나 감명 깊었으면 그간 서로를 본척만척하던 사이에서 한순간에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은 건데. 당황스러웠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제가 그동안 부인을 오해했던 것 같아요. 하여 그간의 오해를 사죄하고 이제는 친우로서 가까이 지내면 어떨까 하는데 공작 부인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레티시아 황녀가 직구로 물었다.
친구로 지내자고 매달리는 디아르트 놈은 넘어오질 않고 엉뚱한 황녀와 친구 될 판이었다.
물론 나도 레티시아 황녀와 친구가 되면 좋지. 나 좋다는 사람 싫을 이유가 없는 데다 그녀의 다정함과 은근히 허를 찌르는 솔직한 성격이 나와 잘 맞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얼마 안 있으면 참혹하게 죽을 사람이잖아. 그것도 내 남편 손에.’
반란을 일으켜 황위에 오른 디아르트는 황실의 핏줄은 모조리 참형에 처한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내가 이렇게 다정하게 웃는 레티시아 황녀와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도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다.
‘최애 얼굴 보는 것도 죄책감이 느껴지는 마당에 황녀와 친구라니.’
하지만 아무리 휘턴 공작 가의 권세가 막강하다고는 해도 황녀의 청을 거절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답을 주저하고 있자 레티시아 황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치만 솔직하게,
‘난 얼마 후에 당신 목을 자를 사람의 부인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친구를 먹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원치 않으신다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단지 이 넓은 황궁에 마음 붙일 만한 사람이 없다 보니……. 옆에 시녀들이 있긴 하지만 다들 절 친구가 아닌 황녀로만 대하지요. 가끔 편지를 주고받고 맛있는 가게가 있으면 함께 다닐 수 있는 그런 친구를 사귀었으면 했을 뿐이랍니다.”
자세하게도 로망을 늘어놓는 레티시아 황녀의 얼굴엔 처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아니 왜 하필 그게 나여야 하는데.’
아,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쿡쿡 찔린다. 거절의 말을 했다간 충격으로 눈물이 또르르 떨어질 것 같은 처량한 얼굴에 나는 도무지 그녀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전하와 친구라니. 저야말로 영광이지요.”
방금까지 우울해 보이던 표정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레티시아 황녀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럼 앞으론 그냥 레티시아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그래도 어찌 황녀 전하께…… 그럼, 레티시아 님?”
“세상에, 듣기 좋네요, 로에니 님.”
우아함과 고고함이 철철 넘치던 레티시아의 얼굴에 어째서인지 릴리가 겹쳐 보였다.
최애를 만나러 왔다가 생각지도 못한 절친이 생긴 난 그로부터 한참 동안 그녀에게 붙잡혀 있어야 했다.
“너무 아쉬워요.”
장장 두 시간이나 수다를 떨어 놓고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이런 게 바로 황족의 포스구나, 싶었던 첫인상은 이미 와르르 무너진 후였다. 황녀가 이렇게 푼…… 아니, 동네 친구 같을 줄이야.
“곧 편지 드릴게요.”
“기다릴게요.”
레티시아가 서운한 얼굴로 내 손을 붙잡았다. 역시 아쉽다는 표정을 하고 그녀의 손을 맞잡은 난 아까부터 벼르던 본론을 꺼냈다.
“참, 실례가 안 된다면 돌아가기 전에 황궁 후원을 구경할 수 있을까요?”
“어머, 당연하죠. 안 그래도 이대로 헤어지기 섭섭했는데 제가 직접 안내할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요. 혼자 보내 줘.
난 어떻게 돌려 거절할지 머리를 굴렸다. 최애 앓으러 가는데 그 누나를 매달고 갈 순 없잖아.
한참 난감해하는 그때, 아까 레티시아를 데리러 왔던 시녀가 다시 들어왔다. 그러자 레티시아의 얼굴이 난처해졌다.
“이런, 어쩌죠? 아무래도 다시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직접 안내하면서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고 싶었는데…….”
“전 괜찮아요. 정무가 먼저죠. 어서 가 보세요, 어서.”
레티시아는 ‘어쩜, 이해심도 이렇게 넓으신지.’ 하고 혼자 감격했다.
“그럼 즐거운 걸음 되시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레티시아 님.”
끝내 아쉽다는 얼굴로 미적거리던 레티시아가 시녀와 함께 나갔다. 그제야 한숨 돌린 난 뒤를 따르겠다는 시녀를 거절하고 홀로 후원으로 향했다.
넓은 황궁에서 단번에 후원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주치는 궁인들에게 물어물어 후원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꽤 기울어진 후였다.
초조해진 난 아름답다고 정평이 나 있는 후원에 제대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내 최애를 찾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젠장,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후원으로만 가면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곳은 생각보다 넓었다. 이건 뭐 한양에서 김 서방 찾기도 아니고.
“황자 궁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고 진짜.”
오늘은 포기해야 하나.
예상치 못하게 레티시아와 친구가 되었으니 앞으로 황궁 출입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쉽지만 다음을 노리는 것도…….
반쯤 단념을 삼키던 그때, 저만치 시야 끝에 붉은 튤립꽃 사이에서 유독 밝게 느껴지는 황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찾았다!’
환희에 찬 나는 마음 같아선 바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일단 진정했다.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데 고릴라처럼 돌진할 순 없지.
나는 후원을 뒤지느라 흐트러진 머리칼과 드레스를 정돈한 뒤 우아한 자세로 최애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책 속의 묘사 그대로 커다란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최애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가장하여 최애 옆에 섰다. 책을 가리는 그림자에 최애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구?”
나 또한 의아한 표정의 최애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는 넌 누구니?’


#019
내 최애 에드거 드 벨릭은 코를 묻으면 따스한 햇빛 냄새가 날 것 같은 황금색 머리카락을 가졌고 높다란 코와 발간 뺨에 옅은 주근깨가 박혀 있는 귀여운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남자는…….
금발의 푸른 눈인 건 같지만 묘하게 이미지가 어긋났다. 상상보다 훨씬 선이 뚜렷했고, 소년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성숙한 어른의 기운을 풍겼다. 게다가 묘하게 나른한 듯한 관능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원작의 묘사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 사람은 에드거가 아니다. 이 소설에서 금발의 벽안을 가지고 이런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내가 아는 한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자비스 드 벨릭 황태자.’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바람둥이이자 원작의 서브남. 훗날 여주를 만나 사랑에 빠진 후 그동안 자신이 해 온 과거 행각들을 뼈저리게 후회하는 역할이었다.
아니, 내 귀여운 최애는 어디 가고 이 남자가 여기 있어?
나는 예상치 못한 서브남과의 만남에 당황했다. 자비스 황태자가 특유의 느른한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분명 아는 얼굴인데…….”
기억을 헤집는 듯 눈을 살짝 찡그리던 자비스가 이내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엊그제 광장에서 내 품에 뛰어들었던 작은 사슴이 아닌가!”
“아닙니다.”
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단숨에 잘라 냈다.
“그럼 어제 내 망토 자락을 쥐고 눈물을 떨어트리던 다람쥐인가?”
“아니에요.”
“열흘 전 침대 위에서 앙앙거리던 흰 토끼?”
“절대 아닙니다.”
너 무슨 포켓몬 모으니?
계속 틀리자 눈매를 구기며 고심하던 자비스 황태자는 이후로도 뱁새, 고슴도치, 고양이 등등을 불러 댔다. 자신과 함께 한 여자들을 왜 죄다 동물로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얘도 정상이 아니구나.’
소설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눈앞에서 직접 보니 더 심각했다. 나는 자비스 황태자가 들고 있는 <제비노 자작의 500가지 그림자>라는 책을 보며 속으로 이마를 짚었다.
남주는 광기 어린 집착남. 서브남주는 제정신이 아닌 문란남. 선택지가 딱 이 둘이라니…… 이쯤 되면 작가가 아델리아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가혹한 양자택일을 하게 할 순 없어.
나는 몹시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인데 인사도 안 하고 도망칠 순 없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태자 전하. 휘턴 공작 부인입니다.”
“휘턴 공작 부인?”
자비스 황태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대가 이렇게 생겼던가.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는데…….”
과연 이 여자 저 여자 가리지 않고 만나는 놈답게 눈치가 빨랐다. 이 자리에 더 있어 봤자 득 될 것도 없고, 빨리 튀자!
“독서 중이신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 물러갈 테니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럴 것 없네.”
자비스가 고른 이가 드러나도록 싱긋 웃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잠시 앉아서 대화라도 나누는 게 어떤가.”
“아뇨.”
속이 뻔히 보이는 제의였다. 이 이상 황실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은 데다 누가 보면 괜한 추문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레티시아에겐 도무지 안 나오던 거절의 말이 대번에 튀어나왔다.
“시간이 많이 늦어 이만 공작 저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그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예의 바르게 마무리를 지은 난 다시금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돌아섰다. 그런데 너무 서두른 탓일까. 그만 고리 형태로 돌출되어 있는 나무뿌리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
불식간에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망할!’
엿 됐음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고 다가올 통증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미 바닥에 뒹굴었어야 할 몸이 멀쩡했다.
“괜찮은가?”
귓가에 닿는 목소리에 눈을 번쩍 뜬 난 내 허리를 휘어 감고 있는 자비스 황태자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송구합니다.”
난 그의 단단한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잠깐, 그러다 넘어지네.”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한 상태에서 억지로 그에게서 벗어난 난 휘청거렸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내 팔꿈치를 붙잡았다.
“조심하게.”
‘어?’
난 팔꿈치 아래까지만 올라오는 장갑을 끼고 있었고, 자비스 황태자는 홀로 책을 보고 있었던 탓인지 장갑을 벗고 있었기에 맞닿은 피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이게 뭐지?’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기운이 닿아 있는 살갗을 통해 천천히 스며들더니 이내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감각에 잠시 굳어 있던 난 이내 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오묘한 기운이 책에서 읽었던 저주의 중화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무거웠던 팔다리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뭐냐, 이 얼음 다 녹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건?’
뭐가 이렇게 밍밍하고 맹숭맹숭해?
분명 전신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긴 한데 뭐랄까…… HP가 1포인트씩 찔끔찔끔 차오르는 느낌이랄까. 얼어 있는 물병에서 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피부가 맞닿으면 분명 무언가 굉장히 특별한 반응이 오리라 예상했는데 생각보단 크게 감흥이 없었다.
‘이래서 저주가 풀리는 데 육 개월이나 걸린다고 했구만.’
그때 팔꿈치를 잡고 있던 손이 떨어지면서 곧장 전신으로 감질나게 퍼져 나가던 기운 역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딴생각을 하고 있던 난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에드거가 틈만 나면 이 나무 아래에 앉아 책을 읽길래 대체 무슨 재미인가 싶어 따라해 본 건데, 이렇게 손가락에 카나리아가 내려앉을 줄은 몰랐군.”
“네? 카나……?”
난 장난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나를 내려다보는 자비스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기겁했다. 얘 생긴 건 서늘하게 생겼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왜 이렇게 느끼해.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자비스 황태자의 얼굴은 꽤 훌륭했다. 남자답게 뻗은 눈꺼풀과 날카롭게 각이 진 턱선, 높은 콧대와 그린 듯한 입술까지.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법한 잘생긴 외모, 그러나 차마 말 한마디 걸 엄두를 못 낼 차가운 인상이었다.
입만 안 열면.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하필이면 오늘 에드거를 따라 해 볼 생각을 했는지 원망 어린 마음을 삼키며 난 얼른 그에게서 물러섰다.
“숙녀가 곤경에 처하면 도와야 하는 게 신사의 당연한 의무이니 인사까진 필요 없네. 대신 다음에 함께 차라도 한잔 마시는 게 어떠한가.”
자비스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곱게 휜 눈매에서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와 석양을 등진 채 붉게 물들어 가는 금발. 고른 이가 드러나는 다정한 미소가 동화 속에서나 볼 법한 왕자님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난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누가? 아델리아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남편과 함께 찾아뵙지요.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여지를 단칼에 차단한 난 얼른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등을 돌렸다. 기혼과 미혼을 따지지 않고 여성을 만나고 다니는 자비스지만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 게 모토이니 더는 수작을 부리진 않겠지.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갑자기 피곤이 확 몰려온 난 서둘러 정원을 빠져나가느라 등 뒤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자비스의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롭군.”
* * *
“오셨습니까.”
로코 제과점에 들어가자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있던 밀토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우유를 마시고 있던 레미다도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난 손을 들어 그녀에게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한 후 자리로 다가갔다.
“오래 기다렸나?”
“아니에요, 별로 안 기다렸어요.”
나는 테이블로 시선을 내렸다. 혹 멀뚱하게 앉아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밀토가 알아서 여러 가지 디저트들을 골라 준 모양이었다. 잘했다는 시선을 보내자 밀토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뮤트로이 풀은 잘 팔았고?”
맞은편에 앉으면서 묻자 레미다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네! 기사님이 저 대신 흥정을 잘해 주셔서 생각보다 훨씬 좋은 값을 받고 팔았어요.”
만족스러운 거래였는지 들뜬 목소리였다. 밀토를 쳐다보자 뿌듯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때 점원이 다가와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며칠 전 소동이 있었을 때의 그 점원이었다. 혹 그 일로 해고당하진 않았을지 염려되어 일부러 들렀는데 다행이었다.
점원도 나를 알아본 듯 내 찻잔에 차를 따른 후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휘턴 공작 부인.”
점원의 표정엔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까 귀부인들의 말을 듣자니 그 일로 나를 향한 평민들의 평판이 좋아졌다고 하던데, 그들의 말처럼 노리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별 건 아니지만 이건 제가 감사의 표시로 대접하겠습니다.”
“어머, 고마워라. 잘 마실게요.”
나는 이쪽을 은근히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맛있군요.”
내가 인자하게 미소 짓자 점원의 뺨이 봉긋 솟았다.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하기야 그간 로에니의 패악에 대해 익히 알고 있을 테니 저번 사건에 대한 소문을 들었더라도 쉬이 믿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점원이 정중하게 고개 숙인 후 자리를 떠나자 아까부터 궁금한 얼굴을 하고 있던 밀토가 물었다. 그러자 릴리가 안 그래도 말하고 싶어 근질거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에요, 며칠 전에 마님께서…….”
릴리의 말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질수록 밀토와 레미다의 표정도 시시각각으로 다채롭게 변화했다. 나는 표정 변화가 풍부한 그들을 바라보며 찻잔을 기울였다. 누군가의 호의와 마음이 담겨 있어서 그런지 홍차는 무척이나 달콤했다.


#020
“이렇게 집까지 데려다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던 레미다가 한껏 튀어나온 배 때문에 버거운지 살짝 휘청였다.
“조심하게.”
내가 얼른 그녀의 팔을 붙잡자 어디선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저만치에 숨어서 이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고개를 쏙 숨기는 게 보였다.
저렇게 숨어서 훔쳐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럽다고 이쪽으로는 고개도 안 돌리더니. 참나, 무슨 변덕이래?”
대놓고 흘깃거리며 속닥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나를 향한 시선이 곱지 않은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릴리와 밀토가 다 들리게 숙덕이는 사람들을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그들이 뭐라고 하기에 앞서 레미다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다들 말조심해요!”
일갈한 레미다가 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마님. 다들 겁먹어서 그런 거니 부디 용서해 주세요.”
“난 아무것도 못 들었네만.”
싱긋 웃자 안절부절못하던 레미다가 눈에 띄게 안심하다가 이내 고마운 얼굴을 했다.
“릴리, 그것 좀.”
“네, 마님.”
릴리가 마차 안에서 쇼핑백을 잔뜩 꺼내 와 레미다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쇼핑백을 받은 레미다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선물이네.”
“네?!”
깜짝 놀란 레미다가 두려운 표정으로 들고 있던 쇼핑백들을 도로 내밀었다. 하지만 내 눈치를 살핀 릴리는 고개를 저으며 받지 않았다.
“마, 마님. 이게 무슨…….”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 사양하지 말게.”
“하지만 저 비싼 것들도 받았는걸요.”
레미다가 로코 제과점 로고가 새겨진 상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건 아이 걸세.”
“네?”
“아이 옷 몇 벌이랑 신발 좀 샀어. 혹시 직접 만들어 주고 싶을지도 몰라서 천도 좀 샀고.”
“마, 마님……. 마님 덕분에 생각지도 못하게 마차도 얻어 타고 물건도 잘 팔았는걸요. 거기다 저렇게 비싼 디저트들도 받았고요. 이것까지 받으면 정말 너무 염치없는 것 같아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그냥 길 가다가 복권 하나 주웠다고 생각해.”
“네? 복권……이요?”
“공돈 생겼다고 생각하란 말이네. 공짜 좋잖아?”
장난스럽게 웃는 나를 보며 레미다가 동그란 눈을 깜박였다.
* * *
“엄청 감동한 것 같았죠?”
공작 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릴리가 신난 얼굴로 조잘거렸다.
“처음에 마님께서 선물들을 쓸어 담으실 땐 굳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있나, 생각했었는데 아니에요.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까 저도 너무 뿌듯하더라고요. 보니까 아기 옷 한 벌 해 주기 힘들 것 같았는데 정말 잘 됐어요.”
허름한 레미다의 집을 떠올렸는지 잠시 미간을 찌푸렸던 릴리의 얼굴이 곧바로 펴졌다. 릴리는 마치 무슨 성인이라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도 마님한테 완전 감동받았지 뭐예요? 아이를 가진 여인이 상부하고 홀로 남은 게 마음 쓰이신 거죠? 어쩜 이렇게 사려가 깊으신지.”
별 대단한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니고 문득 엄마가 떠올랐을 뿐이었다. 가난한 데다 몸까지 약한 탓에 어린 나만 남겨 두고 일찍 떠났던 엄마가.
나는 쓰게 미소 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우리 에드거 얼굴 본다고 얼마나 기대했는데. 황태자는 왜 하필 오늘 거기에 나와 있는 거야. 도움 안 되는 놈.’
자비스 황태자를 향해 이를 갈던 난 자연스레 그가 내 팔꿈치를 잡았을 때 흘러 들어오던 기운을 떠올렸다.
생각보다 너무 약한데……. 그 정도면 진짜 내내 손을 붙잡고 있어야 저주가 중화되지 않을까? 하기야 책에서도 저주에 걸린 비스트 휘턴이 하루 종일 침실 밖으로 안 나왔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기사들의 에스코트로는 턱도 없을 것 같은데 비스트 휘턴처럼 침실에 틀어박혀야 하나.
아니면 팔꿈치여서 그런 걸까. 다른 곳으로 접촉하면 강도가 달라지려나?
‘아, 이제 발현까지 이틀 남았는데 어떡하지, 진짜. 아무나 자빠트릴 수도 없고.’
심각해진 내 얼굴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릴리가 펄쩍 뛰었다.
“그 사람들은 마님의 진면목을 몰라서 그런 거예요!”
“……응?”
“마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면 오늘 자신들이 했던 행동들을 엄청 후회할걸요!”
릴리는 필사적이었다. 아까 마을에서 나를 향해 적대감을 세우던 평민들 때문에 내가 시무룩해진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런 거 아냐, 릴리.”
“다들 곧 마님이 좋은 분이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저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마님이 무서웠는데 지금은 세상에서 마님보다 다정한 분은 없다고 생각하는걸요! 마님 같은 분을 모시게 돼서 얼마나 기쁜 데요. 정말이에요!”
릴리는 내가 침울해할까 전전긍긍했다. 나는 낑낑거리는 강아지처럼 귀엽고 안쓰러운 릴리를 보며 풋 웃고 말았다.
진짜 그런 이유 때문에 심각했던 건 아니지만 난 이 아이의 수고를 봐서라도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나를 위로하려고 애쓰는 릴리의 모습이 아까 자비스 황태자와 접촉했을 때 흘러 들어오던 기운보다 훨씬 힘이 됐다.
“고마워, 릴리. 덕분에 기운이 난다.”
* * *
내가 황궁에 다녀온 사이 영지를 둘러보러 나갔던 디아르트는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공작 저로 돌아왔다. 얼마 남지 않은 저주의 발현 때문에 지체할 시간이 없는 난 곧장 그가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서류에 파묻혀 있는 디아르트는 내가 들어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들으면 고개를 안 들 수 없을 테니까.
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집무실 가운데에 놓여 있는 소파에 앉아 차를 부탁했다. 고든이 나가고 디아르트와 둘만 남게 되자 집무실엔 차가운 침묵만이 흘렀다. 먼저 입을 떼는 건 역시나 나였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해.”
디아르트가 깃펜으로 서류에 서명하며 대꾸했다.
‘어휴, 저 싸가지, 저거.’
마음 같아선 주먹을 들고 때리는 시늉이라도 하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은 난 돌려 말할 것도 없이 본론을 꺼냈다.
“몰타 상단이 미더스 공국에서 루프탄을 수입하기로 했다고 해요.”
난 슬쩍 디아르트의 표정을 살폈다.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는 걸로 봐선 역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다만 내가 이런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는지 시선을 흘깃 들었다. 난 눈이 마주친 그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루프탄이 제라석보다 강도가 세 배는 강하다는 사실도 아시나요?”
“…….”
당연히 이것도 알고 있었고.
“그게 들어오면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검과 활은 무용지물이 되겠죠. 강도가 세 배나 강한 병기 앞에서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을 테니까요. 무기들을 전부 교체하는 건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 거예요. 물론 다이아몬드 광산이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 있는 공작님껜 별것도 아니겠지만요. 근데 그 광산의 규모가 대체 어느 정도 되는…… 아, 이게 아니지.”
말이 살짝 샜다. 다이아몬드 광산이 여러 개 있다는 게 뇌리에 너무 강하게 박혔나 보다.
“흠흠, 제 생각에 공작님은 저보다 먼저 몰타 상단이 루프탄을 들여올 거라는 정보를 입수하셨어요. 한데 도리어 더 제라석을 대량 구매하고 계시죠.”
디아르트의 표정은 크게 변화가 없었지만 난 그가 내 말을 꽤 흥미롭게 듣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긴 이쪽에 문외한인 내게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게 의외겠지.
“루프탄이 들어온다면 제라석의 가치는 점점 떨어질 거예요. 그럼 광석을 제련하는데 들이는 품에 비해 수익은 점점 줄어들 거고 해리스 상단은 광산을 팔려고 하겠죠. 그리고 공작님은 그 광산도 사려고 할 거고요.”
루프탄의 수입이 공공연하게 알려지지 않은 지금은 제라석을 대량 구입하고 있지만 몰타 상단에서 판매를 시작하면 곧바로 거래를 뚝 끊을 것이다. 그럼 커다란 거래처를 잃은 데다 점점 저조해지는 매출로 인해 타격을 입은 해리스 상단은 제라석 사업을 접으려고 하겠지.
디아르트는 해리스 상단에서 내놓은 광산의 소유권과 판매권을 모두 가져갈 속셈이었다. 왜냐면 제라석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엄청난 가치가 있으니까. 그건 바로.
“제라석은 마나를 저장할 수 있잖아요?”
날 보고 있던 무표정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제가 생각보다 똑똑하답니다.”
“누가 얘기해 준 모양이군. 램버트인가?”
“아무한테도 들은 적 없어요. 책에서 읽었답니다. 제 취미가 독서거든요.”
독서가 취미라는 내 말에 디아르트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 의심스러운 기색이 깃들었다.
“이런 얘기, 램버트 경뿐 아니라 공작님 측근들이 경솔하게 했을 리 없잖아요.”
‘정말 책에서 읽었단다. 네가 주인공인 책에서 말이야.’
내 말에 수긍하는지 디아르트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공작님처럼 경지에 다다른 사람은 검에 오러를 실을 수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무기의 강도, 그리고 연륜과 기술만으로 상대와 싸우죠. 하지만 만약 그 무기 안에 약간의 마나를 담을 수 있다면요? 오러와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고작 강도가 3배 강한 루프탄 따위는 손쉽게 두 동강 낼 수 있을 거예요. 만약 그런 무기가 전장에 나온다면 승기가 어느 쪽으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겠죠.”
어느새 디아르트는 깃펜까지 내려놓고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 물론 상대와 비슷한 전력이라는 가정 하에요.”
난 싱긋 웃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제라석을 대량 구입하고 계신 거겠죠. 하지만 제라석 안에 마나를 담는 방법에 대해선 아직 모르시는 거예요. 그렇죠?”
디아르트의 표정은 무척이나 서늘했다. 마치 내가 알아선 안 되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또는 현재 자신의 가장 큰 고민거리를 허락도 없이 침범한 게 마뜩잖은 듯.
난 그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후후 웃었다.
‘넌 임마, 나한테 고마워 해야 돼.’
“제가 공작님을 도울 수 있어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막 입을 뗀 순간이었다. 집무실을 나갔던 고든이 트레이를 들고 돌아왔다. 난 그가 내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를 때까지 입을 다물고 가만히 기다렸다.
“나가 있게.”
차를 다 따른 고든이 허리를 세우자 디아르트가 낮게 말했다.
“계속하지.”
고든이 조용히 방을 나서자 디아르트가 재촉했다. 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맨날 날 쫓아내지 못해 안달인 남자 앞에서 여유를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덜컥!
손에서 미끄러진 찻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로 나동그라졌다.
‘어?’


#021
난 테이블 위로 점점 번져 가는 찻물을 바라보다가 오른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왜 이래?’
마취된 마냥 손에 감각이 없었다. 힘을 주어 주먹을 쥐려고 해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문득 책에서 읽은 구절이 떠올랐다.
[저주가 발현되면 손끝에서부터 천천히 굳어 가는 것을 시작으로…….]
쉣! 설마?!
‘아직 하루가 더 남았잖아!’
정보 제공을 빌미로 디아르트와 악수해 볼 생각이었는데!
예상보다 빠르게 시작된 발현으로 당황한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차가 쏟아진 테이블을 보고 있던 디아르트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
“왜 그러지?”
“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어요. 남은 이야기는 마저 할게요. 그럼 전 이만.”
한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린 난 디아르트의 황당한 시선을 뒤로 한 채 얼른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든과 릴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신없는 내 표정에 놀란 것 같았다.
“마님?”
“릴리, 방으로 돌아가야겠어.”
내가 빠르게 앞장서자 릴리가 얼른 따라붙었다. 놀란 얼굴의 고든이 서둘러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걸 뒤로하고 난 내 방까지 빠른 걸음으로 향했다.
“헉헉, 집무실 안에서, 각하와 무슨 일 있으셨어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릴리가 내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대답하려는 순간 무릎이 꺾여 휘청거렸다.
“마님!”
그대로 바닥에 엎어진 나를 보고 기함한 릴리가 얼른 다가와 부축했다. 난 그녀가 내 왼손을 쥐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감각이 무뎌진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갑자기 저주가 시작된다고?
“괜찮으세요, 마님?”
팔다리가 마비되는 건 둘째 치고 이렇게 굳어 가기 시작하면 곧 고열과 통증이 온몸을 휩싼다고 했…….
순간 명치를 강타하는 격통에 숨을 들이켰다.
“마님!”
옆에서 날 붙들고 있는 릴리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난 통증이 이는 가슴을 손으로 붙잡으며 밭은 숨만 색색 내쉬었다.
그러다 갑자기 핏, 하고 의식이 끊겼다.
* * *
더워……. 뜨거워……. 괴로워…….
어느 순간 의식이 돌아온 난 뜨거운 불길과도 같은 열기에 온몸이 휩싸여 있었다. 손발을 움직이기는커녕 눈조차 뜨지 못한 채 그저 그 뜨거운 기운을 오롯이 감내해야 했다.
빙의 전 병상 생활을 오래 한 탓에 통증에는 어느 정도 이력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과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는데.’
저주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안이했던 면이 없잖아 있었다. 설마하니 그렇게 아프겠어? 그런 근거 없는 느긋함. 하지만 휘턴 가의 역사서는 정말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를 서술한 거였다.
이리 죽을 만큼 괴로울 줄 알았더라면 그때 집무실에서 뛰쳐나올 게 아니라 눈 딱 감고 디아르트를 덮칠 걸 그랬다. 그랬으면 이 정도로 아프진 않았을 거 아냐.
아니, 그놈 성격에 그다음이 문제인가. 아냐, 그때 죽으나 지금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야. 차라리 칼 맞아 죽으면 이렇게 고통스럽진 않을 거 아냐. 그치만 저주는 적어도 육 개월은 살 수 있잖아. 아니지, 이렇게 아픈데 육 개월이고 나발이고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나을지도.
“마님, 흑흑…….”
타오를 듯 뜨거운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물기가 가득한 애처로운 목소리. 아마도 릴리겠지.
그래도 지금은 옆에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전생에서 시한부였을 땐 아무도 찾는 이가 없었었는데. 이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게 통증이 한결 가시는 것 같, 기는 개뿔 아파 죽겠다.
빌어먹을 휘턴가! 빌어먹을 저주! 빌어먹을 디아르트!!
“하아, 하아…….”
누군가 침대 아래로 한없이 끌어당기듯 온몸이 무겁고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내 코에서 내뿜는 숨결도 데일 듯이 따가웠고 머릿속은 안개가 낀 것마냥 흐리멍덩하니 답답했다.
간간이 릴리가 차가운 물을 적신 수건으로 몸 곳곳을 닦아 주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시원함도 잠시뿐, 물러간 줄 알았던 열기는 더 지독하게 들러붙었다.
몇 번이고 까무러치듯 정신을 놓았다가 의식을 되찾았다. 날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가늠할 수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서운 건 진짜 이대로 죽으면 어떡하나는 거였다.
한 번 죽었다가 빙의해서 겨우 살아났는데 제대로 인생을 즐겨 보지도 못하고 죽는 건 너무 허무했다.
내가 그때 그걸 왜 건드려서. 만지면 안 될 것 같은 건 역시 만지면 안 되는 거였는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하아……. 물……. 물…….’
목이 미친 듯이 말랐다. 수분이 몽땅 날아간 목구멍은 쩍쩍 갈라져 찢어지는 것처럼 타올랐고 입술은 바스러질 듯 버석거렸다. 릴리가 종종 물에 적신 수건으로 입술을 축여 주었지만 그 것만으론 부족했다.
‘릴리, 제발 나 물 좀…….’
얼음을 탄 차가운 물을 한 잔만 마시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온몸에 힘이 안 들어가니 손을 들 수도 입술 한 번 뗄 수도 없었다. 괴로움에 미칠 것 같던 그 순간.
‘어?’
문득 왼손 끝에서부터 청량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차가우면서도 기분 좋은 서늘함이 신경을 타고 천천히, 그러면서도 빠르게 온몸으로 퍼져 가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열기 대신 상쾌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비집고 나오던 땀방울 대신 기분 좋은 향기가 피어올랐고 축축 늘어지던 무거운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뿌옇던 머릿속이 시원하게 개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엔도르핀이 도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더, 더…….’
만족스러우면서도 감질나는 자극에 초조해졌다. 이 기운을 더 느끼고 싶었다.
난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손으로 청량한 기운을 잡으려 애썼다. 손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커다랗고 단단한 무언가가 잡혔다. 누군가의 손인 듯 조금 차가운 피부는 열이 올라 있던 내겐 도리어 시원하게 느껴졌다. 힘주어 잡자 커다란 손이 빠져나가려는 게 느껴졌다.
이걸 놓친다면 지금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이 오묘하고 기분 좋은 감각도 순식간에 사라질 것 같은 예감에 난 더더욱 힘을 주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무심하리만치 단호하게 손을 빼냈다.
아쉬움에 손을 휘저어 보아도 잡히는 건 없었다. 괜히 억울하고 야속했다. 누구인지 모를 상대를 원망하던 난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 * *
눈이 번쩍 뜨였다. 빙글 도는 초점을 맞추니 익숙한 침대 천장이 보였다. 그대로 벌떡 일어나 앉자 대야에 손을 넣고 있던 릴리가 수건을 패대기치고 달려왔다.
“마님!”
침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나를 붙잡고 올려다보는 릴리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난 도리어 잘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이 개운했다.
‘뭐지?’
분명 저주의 발현으로 쓰러졌던 기억과 나를 괴롭히던 엄청난 고통까지 생생한데 그렇게 아팠던 몸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잖아요.”
릴리가 울먹이며 외쳤다.
“얼마나 누워 계셨는지 아세요? 오늘로 사흘째란 말이에요!”
사흘밖에 안 됐나? 체감상 적어도 열흘은 지난 줄 알았는데.
“저 진짜 마님이 잘못되시는 줄 알고 너무 무서워서…….”
정말 다행이라고 되뇌던 릴리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일단 달래 주어야 할 것 같아 등을 토닥여 주었다. 릴리가 어느 정도 진정하자 난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릴리, 혹시 내 방에 누구 들어온 적 있어?”
분명 누군가의 손을 잡았었다. 그 손과 맞닿은 곳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지던 오묘한 기운 덕에 한결 편안해졌던 기억까지 있다. 저주로 인한 통증이었으니 아마도 상대는.
“남자인 것 같은데.”
“감히 어떤 남성이 공작 부인의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겠어요. 제가 항상 마님 곁을 지켰지만 그런 일은 없었어요!”
릴리가 다부진 얼굴로 단언했다.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혹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는지 걱정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뭐지? 그럼 그건 꿈인가?’
분명 손에 닿은 감촉이 생생했는데. 게다가 자비스 황태자와 접촉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렬한 기운이었다.
혼몽한 와중이라 착각한 건가. 그럼 갑자기 통증이 사라진 건 어떻게 된 거지? 앓을 만큼 앓아서 저절로 나은 건가?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앗, 사흘 만에 깨어나셨으니 기운이 하나도 없으시죠? 제가 얼른 가서 부드러운 수프를 가져올게요.”
기쁜 얼굴로 방을 나서는 릴리의 뒷모습을 보던 난 고개를 저었다. 그게 꿈이건 현실이건 일단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서 다행이다. 진짜 그대로 죽는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
책에 따르면 한번 저주의 발현이 시작된 이후로는 지속적인 중화 없인 간헐적으로 마비와 통증이 찾아온다고 했다. 즉 언제 어느 때 또 갑자기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열흘이라는 유예 기간이 며칠 앞당겨진 걸로 봐선 마지막까지 남은 육 개월이라는 시간에도 어떤 변수가 생겼을지 모른다.
‘망할.’
나를 지독히도 괴롭히던 지난 사흘간의 고통을 잠시 떠올려 본 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 악몽을 다시 겪을 순 없어. 이대로 손 놓고 앉아서 죽을 순 없다고!
난 반드시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이성과의 접촉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디아르트가 날 도와줄 것 같진 않고.
그럼 남은 건 하나밖에 없었다.
“바람피워야지, 뭐!”


#022
이 세계에선 귀족들이 정부를 두는 게 크게 흠이 되지 않는 일반적인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자비스 황태자도 여러 귀부인들과 염문을 뿌려 댔으니까.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초중고 통틀어 장장 12년간 도덕을 배워 온 나에게 바람이란 도무지 넘을 수 없는 어떤 선이었다.
해서 이혼이 성립될 때까지 어떻게든 저주를 견뎌내려고 했지만 안 되겠다. 다 죽게 생겼는데 양심이고 나발이고 무슨 소용이야!
그 숨넘어가게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다시 겪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마님께서 잘 드시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여요.”
전투적으로 수프를 떠먹고 있는 나를 보며 릴리가 감격한 표정으로 눈가를 찍었다.
“마님은 열이 올라서 괴로워하시는데 의사는 원인을 알 수 없다고만 하지, 얼마나 무서웠다고요.”
소화가 잘되도록 묽게 끓인 수프에서 겨우 찾아낸 고깃덩어리를 씹으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인을 알 수 있을 리 없지. 저주로 인한 발열인걸.
“오늘도 안 일어나시면 제국에 있는 모든 의사들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했어요.”
“걱정시켜서 미안하네.”
난 릴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이렇게 맹목적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고마웠다. 열에 들뜬 내내 날 간호하던 것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디아르트가 날 찾아온 적은 없니?”
“아……. 그게…….”
별 기대 없이 한 질문이긴 하지만 역시나였다. 하긴 그 측은지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한 놈이, 더욱이 꼴도 보기 싫을 날 찾아왔을 리 없지.
그럼 내가 잡은 손이 디아르트의 것도 아니란 말인데, 정말 꿈이라도 꾼 걸까?
아니 근데, 그래도 그렇지. 생판 남인 릴리도 나를 이렇게 걱정했다는데 남편이라는 작자가 한 번쯤은 찾아와 봐야 하는 거 아냐? 그래도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그래, 바람피우자, 그냥!’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죄책감이 바스스 흩어졌다.
“바쁘셔서 그럴 거예요. 도무지 틈이 안 나서 찾아오시지 못한 걸 거예요!”
릴리는 혹 내 마음에 상할까 봐 열심히 디아르트를 두둔했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
그냥 그때 내가 잡은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했을 뿐이란다.
“참, 누워 계시는 동안 모두들 찾아와서 꽃을 주고 갔어요.”
내 눈치를 보던 릴리가 얼른 말을 돌렸다.
안 그래도 내 방을 채우고 있는 낯선 화병들이 궁금했었다. 릴리가 장식해 놓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애니랑 데이지, 타미…… 아, 밀토 경도 문 앞에서 전해 주고 돌아갔고요.”
손을 하나하나 꼽으며 이름을 되뇌던 릴리가 빙긋 웃었다.
“다들 마님이 얼른 일어나시길 바라고 있었답니다.”
“그랬니?”
아마 사용인들 몇뿐인 걸 과장해서 말하는 거겠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 이렇게 침대에 앉아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
다시 저주가 발현되기 전에 나가서 남자를 구해야지. 릴리 말대로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다고, 기왕이면 잘생기고 몸도 좋고 돈도 많은 조신하고 참한 남자를 찾아보자!
‘아, 일단은 디아르트와 하던 얘기를 마저 하는 게 먼저겠지?’
바람을 피우기로 결심한 이상 더는 디아르트와의 접촉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기왕 로판 소설에 빙의한 거 공작가의 영애로 살고 싶었고, 누릴 거 다 누리면서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살고 싶었다. 그러러면 나중에 그가 내 가문을 멸문시키는 일은 없어야 했다.
할 일은 많고 마음은 조급하니 빨리빨리 처리하자.
수프를 싹싹 긁어 먹은 난 스푼을 내려놓으며 릴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디아르트는 어디 있어?”
릴리는 아직 무리하면 안 된다며 침대에 누워 있기를 종용했지만 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쓰러지기 전보다 더 가뿐해진 것 같았다. 그 손을 통해 흘러 들어오던 청량한 기운들이 그냥 꿈이었다면 원래 저주를 한번 앓고 나면 몸이 개운해지는 모양이었다.
“마님, 일어나신 겁니까?”
디아르트의 집무실에서 나오던 고든이 날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방금요.”
“다행입니다.”
고든이 한숨 돌렸다는 듯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벌써 이렇게 돌아다니셔도 될지요. 좀 더 안정을 취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디아르트는 안에 있죠?”
“예, 고할까요?”
“네.”
고든이 곧장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주인님,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해.”
낮은 목소리가 허락을 내뱉자 고든이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난 릴리에게 차를 부탁한 후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쓰러지기 직전에 만났을 때처럼 디아르트는 서류가 쌓인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냉정한 놈.’
그래도 사흘이나 앓았다가 일어난 사람인데 빈말로라도 괜찮냐고 묻지는 않을지언정 한 번 쳐다는 봐야 하는 거 아니니?
의사가 다녀갔으니 분명 내가 쓰러졌다는 게 귀에 들어갔을 텐데.
난 몰래 그를 죽어라 흘기며 소파에 앉았다.
“저번에는 죄송했어요.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일부러 아팠다는 듯 운을 떼 봤지만 디아르트에게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진짜 티끌만큼 남아 있던 찝찝함마저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그래, 역시 넌 글렀다.
“그때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러 왔답니다.”
깃펜으로 서류에 서명을 휘갈긴 디아르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저벅저벅 걸어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하지.”
소파에 등을 기댄 디아르트는 릴리가 가지고 온 향긋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을 때까지 계속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뭐야. 바쁘니까 빨리 얘기하고 꺼지라는 건가?’
“흠흠. 전 제라석에 마나를 담는 방법을 알고 있어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하자 디아르트가 고개를 까딱였다. 계속하라는 제스처였다.
“정확히는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을 알고 있죠.”
“그게 누구지?”
“그냥 알려 드릴 순 없죠. 거래의 기본은 기브 앤 테이크잖아요?”
“원하는 게 뭐야.”
디아르트가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
“저희 가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의외의 말을 들은 듯 디아르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갑자기 그건 왜 묻지?”
“중요해서요. 말씀해 주세요.”
“별생각 없어.”
디아르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집안끼리 오래 교류한 사이인 데다 처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수많은 가문 중 하나라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서 나는 도리어 안도했다. 아내가 귀여우면 처갓집 말뚝만 봐도 절을 한다고 했다. 반대로 아내가 미우면 처갓집 말뚝만 봐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게 인지상정. 한데 플러스 마이너스 없이 제로라 하니 얼마나 다행이야.
내가 뻘짓만 안 하면 얘가 우리 집안을 멸문시킬 일은 없다는 소리니까.
“제가 원하는 건 공작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시는 거예요.”
난 얼른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딱 세 개만 들어주세요.”
디아르트가 미간을 좁혔다.
“들어 보고 결정하지.”
“듣기 전에 약속 먼저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공작님께 해가 될 소원은 빌지 않을 테니까요.”
“……한 개면 충분할 것 같군.”
“세 개요. 제가 드리는 정보가 그 정도 값어치는 있을 텐데요.”
“한 개만 말해.”
“세 개!”
“한 개.”
“세 개!”
한참 한 개와 세 개로 줄다리기를 하던 끝에 디아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두 개.”
“좋아요, 두 개.”
난 만족스러운 미소를 속으로 숨겼다. 원래 두 개 부르려고 했는데 나이스.
“소원이 뭔데.”
“일단 첫 번째는.”
난 검지를 세우며 말했다.
“이혼 절차를 서둘러 주셨으면 좋겠어요.”
디아르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래, 생각지도 못한 요구겠지.
“귀족들의 이혼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들어 보니까 어떤 백작 부부는 일 년이나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전 우리가 빠르고 간결하게 서류 정리를 끝냈으면 좋겠어요. 공작님께서 황제 폐하께 한마디만 올려 주세요.”
권력 놔뒀다가 뭐하니, 남용하자.
“전 최대 3개월을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아무리 바람피우겠다고 결심했지만 오래 하고 싶진 않았다. 이왕이면 제대로 좋은 남자를 만나 죄책감 없는 행복한 연애를 하고 싶었다. 그러니 늦어도 이놈이 아델리아를 만나기 전까진 깨끗하게 정리됐으면 했다.
이렇게 두 개밖에 없는 소원까지 써 가며 이혼을 재촉하면 저놈이 내가 더는 자신에게 마음이 없다는 걸 믿을 거란 계산도 있었다. 그러면 나를 향해 세우고 있는 날도 좀 무뎌질 테지.
날 잠시 바라보던 디아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는?”
“그건 생각해 보고 나중에 말할게요.”
“나중?”
난 마뜩잖은 듯 반문하는 디아르트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무리한 요구는 안 할 거예요.”
지금은 우리 가문에 유감이 없는 것 같지만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보험 하나 들어 두는 거다. 이쪽이든 우리 가문이든 혹시 서로 부딪칠 일이 있으면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만약 그런 일이 안 일어난다면?
이혼할 때 다이아몬드 광산 하나만 떼어 달라고 할 거다. 이왕이면 제일 큰 곳으로!


#023
우선 주위를 둘러보자.
휘턴 공작 저의 사용인들과 기사들은 남주의 주변인이라는 버프라도 받은 건지 다들 외모가 꽤 출중했다. 하다못해 나뭇가지를 자르고 있는 정원사마저 훈남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고려 대상에 넣을 수는 없다. 디아르트의 지인들과 바람피우는 건 상식 밖의 행동일뿐더러 굳이 얽히고 싶지도 않으니까.
‘패스!’
그럼 외부로 눈을 돌려 보자.
빙의 후 지금까지 그냥 오다가다 만난 행인들을 제외하면 남는 건 자비스 황태자…….
‘이렇게 손가락에 카나리아가 내려앉을 줄은 몰랐군.’
……패스.
새로운 남자를 찾아보기 위해 며칠 동안 바트령의 중심 도시와 수도를 돌아다녀 봤지만,
‘괜찮은 남자는 이미 누가 다 채 갔다더니.’
카페나 레스토랑에 들어오는 남자는 대부분 옆에 연인이 있었고,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이들도 짝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 다들 나랑 똑같은 저주에 걸리기라도 한 건가. 왜 보란 듯이 애정 행각을 하며 알콩달콩 깨를 볶는지. 진짜 눈꼴 시리고 부러워 죽겠네.
가끔 홀로 다니는 남자가 보이더라도 나이가 많거나 혹은 너무 적어 보였고, 비슷한 나이다 싶으면 외모가 성에 차지 않았다.
‘이 세계에도 소개팅이나 미팅이 있으려나?’
아니, 그런 게 있다 한들, 내가 친구가 있나 친하게 지내는 친척이 있나. 소개받을 데도 마땅하지 않은 데다 ‘바람피우겠다’ 떠벌리고 다니는 것도 이상했다.
“하아.”
내가 크게 한숨 쉬자 화병에서 시든 꽃잎을 추리고 있던 릴리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걱정 있으셔요, 마님?”
“릴리, 여기도 ‘만나쥬오’같은 곳이 있니?”
“그게 뭐 하는 곳이어요?”
“남녀의 만남을 주선하는 업체 말이야.”
“아~ 중매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거랑은 좀 다른데…….”
다들 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나서 연애하는 거지? 자비스 황태자 이놈은 어떻게 그 많은 귀부인들을 후리고 다니는 건지 비법 좀 물어보고 싶다.
바람을 피우고 싶어도 남자가 있어야 필 거 아냐.
“갑자기 그건 왜 궁금하신 거예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릴리가 물었다. ‘바람피우려고’라고 하면 저 순진한 눈망울이 삽시간에 충격으로 물들 것 같아 난 언젠가 한 번 써먹었던 가상의 친구를 다시 소환했다.
“내가 저번에 말했던 친구 시아버님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렇게 여자를 만나고 다닌다네? 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 거냐고 친구가 한탄을 하더라고. 아주 집안이 난리가 난 모양이야.”
마치 제가 그 친구라도 된 것처럼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릴리가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노먼 백작가에서 일하는 친구한테서 편지를 받았는데, 가면무도회 준비로 굉장히 바쁘다고 하더라고요.”
“가면무도회?”
“네. 가문도 이름도 숨기고 얼굴도 가면으로 가린 채 즐기는 무도회라나 봐요. 아마 친구분 아버님께서도 그런 데서 만나시는 건 아닐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춤만큼 남녀가 눈 맞기 딱 좋은 상황이 어디 있을까.
안 그래도 무도회에 가 보고 싶었던 터라 눈이 절로 번쩍 뜨였다.
“거기 가려면 어떻게 해야 돼?”
정체를 숨긴 채 즐기는 무도회이니 일반적인 방법으로 초대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것까진 잘 모르겠어요. 친구한테 물어볼까요?”
“응. 혹시 초대장이 필요하면 구해 줄 수 있는지도 물어봐 줄래?”
“네!”
내가 친구를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릴리가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어쨌든 생각지도 못한 루트를 알게 됐다.
남자를 만나려면 일단 남자들이 바글거리는 곳에 가는 게 중요했다. 무도회에 모인 많은 남자 중에 설마 내 취향 하나쯤은 있겠지.
만약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다고 해도 이런 비슷한 사교 모임에 대해 정보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꽉 막혔던 길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해진 난 활짝 웃었다.
* * *
“낙이 없습니다.”
오전 훈련을 마치고 그늘에 앉아 숨을 돌리고 있던 밀토가 한숨 쉬듯 말했다.
“원래 이 시간이면 마님께서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오셨었는데…….”
그의 말에 안 그래도 다들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옥 같은 훈련을 버티는 힘이었는데 말입니다.”
“왜 요즘은 통 안 오시는지…….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으신 건가?”
“하긴, 심하게 앓으셨다고 하셨잖습니까.”
“하지만 요즘 매일 같이 외출하신다고 들었는걸요.”
“하면 왜 저희를 부르지 않으실까요? 귀부인께서 호위도 없이 외출을 하시다니…….”
“혹시 저희가 마님께 실수한 게 있는 거 아닐까요?”
행여 자신들이 잘못한 게 있어 마음이 상한 로에니가 연무장에 발길을 끊었나 싶은 기사들은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려 보았다.
“앗, 생각해 보니까 그때 제토 경이 잘 먹었다는 인사를 안 한 것 같습니다!”
“아냐, 난 했어! 필립 경이 안 한 거 같은데?”
“무슨 소리야! 나도 분명 인사 드렸거든? 그것보다 알렉스 경이 음식을 입 안에 욱여넣었던 게 문제 같은데. 아무리 급해도 어떻게 마님 앞에서 그렇게 게걸스럽게! 그건 예의가 아니지!”
“야, 너도 같이 욱여넣고는!”
네가 잘못 했네. 아니, 네가 더 잘못한 것 같네. 입씨름을 하던 기사들은 이내 마지막에 로에니와 함께 있던 사람을 떠올렸다. 평소엔 쳐다도 보지 않더니 그날따라 말을 건 사람.
잠시 입을 다물었던 기사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디아르트가 가볍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모질게 하셨길래!’
소심하게 숙덕거리는 기사들을 뒤로하고 막 연무장으로 들어선 램버트가 디아르트에게 다가갔다.
“각하.”
허공에 검을 들어 보던 디아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노만 백작 가라고 합니다.”
들고 있던 서신을 건네준 램버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야말로 잡아낼 수 있어야 할 텐데요. 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내부에 첩자가 있긴 한 건지, 원. 정말이지 그런 자리는 취미에 안 맞는단 말입니다.”
“내가 가지.”
빠르게 서신을 읽어 내린 디아트르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네?”
램버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신 못지않게, 아니 자신보다 더욱 그런 사교 모임에 질색하는 디아르트를 잘 알기 때문이다.
“진심이십니까?”
“경 말대로 언제까지 질질 끌 순 없잖나.”
“각하께서 가시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하긴, 저보다는 각하의 눈썰미가 훨씬 뛰어나죠. 각하라면 분명 이번에야말로 잡아낼 수 있을 겁니다!”
엄지를 치켜세운 램버트는 그 지겨운 자리에 자신이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렸다.
그런 그를 흘깃 쳐다본 디아르트가 몸을 돌리자 램버트가 뒤를 따랐다. 그가 움직임으로써 휴식 시간이 끝났다는 걸 알아챈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뭐야.”
“예?”
디아르트가 다짜고짜 묻자 기사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부터 내 쪽을 보면서 수군거렸잖나.”
“앗…….”
그걸 또 어떻게 알았지. 뒷담을 했다고 실토할 수 없는 기사들이 난감한 시선을 공유했다. 서로 눈치만 보던 가운데 밀토가 조심스레 나섰다.
“저…… 각하. 마님께 뭐라고 하셨습니까?”
무슨 소리냐는 듯 디아르트가 미간을 좁혔다. 밀토는 머뭇거리면서도 말을 이었다.
“요즘 마님께서 통 오시질 않으셔서 말입니다. 혹시 각하께서 마님께 한마디 하신 건 아닌지…….”
말끝을 흐리며 저를 의심하는 밀토를 바라보던 디아르트는 문득 의아해졌다.
‘언제 이렇게 기사들과 친해진 거지?’
자신이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던 로에니였지만 연무장엔 따라오지 않았다. 흙먼지에 머리와 드레스가 망가지는 게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와도 멀찍이서 지켜보는 것이 다였다.
해서 원래도 검을 수련하기 좋아했던 디아르트였지만 그 이유로 인해 더더욱 연무장에서 살다시피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거리낌 없이 연무장 안까지 밀고 들어오더니 기사들과 둘러앉아 간식을 나눠 먹기 시작했다. 처음엔 불편해하던 기사들도 어느새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역시…….”
밀토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르트가 아무 말 하지 않자 무언의 수긍으로 알아들은 것이다. 곧장 그의 눈빛에 비난이 깃들었다.
“너무하십니다!”
밀토뿐 아니라 그의 뒤에서 디아르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도 비난의 눈길을 보냈다.


#024
“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길래 마님께서 발길을 뚝 끊으신 겁니까.”
“각하께서 눈길 한번 안 주셔도 밝게 웃으시던 분인데 얼마나 상처를 받으셨으면…….”
그간 디아르트의 외면을 받는 로에니의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봤던 기사들은 그의 말에 상처받았을 그녀가 떠오르자 가슴이 아팠다.
“이것들이 각하께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다들 빠져 가지고! 연무장 돌고 싶어?”
기사들에게 일갈하고 돌아서는 램버트의 눈에도 마찬가지로 질책이 깃들어 있었다.
졸지에 혼자 모든 이들과 맞서는 구도가 된 디아르트가 눈매를 구겼다.
말로만 나무랐지 실상 그들과 한편인 램버트로 인해 기사들은 기세가 올랐다. 평소였다면 감히 디아르트를 원망할 생각은 못 했겠지만, 지금은 눈앞에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떨며 울고 있는 로에니의 애처로운 모습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얼마나 마음 아프실까…….
그래, 까짓거 연무장이 100바퀴가 대수냐!
“부디 마님께 좀 다정하게 대해 주십시오.”
“각하께서 조금만 잘해 주셔도 마님은 엄청 행복해하실 겁니다.”
“자고로 있을 때 잘하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요.”
가만 듣던 디아르트가 하, 헛웃음을 내뱉었다. 기사들은 조금 움찔했지만 군중 심리에다가 기사도 정신까지 솟아난 탓에 꿋꿋이 로에니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으며 디아르트를 종용했다.
“마님께서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각하께선 모르십니다.”
“네! 요즘 수도에선 마님에 대한 미담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미담? 그 어떤 것보다 로에니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디아르트가 반문하기에 앞서 밀토가 끼고 있던 장갑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희한테 이런 사려 깊은 선물까지 주시고…… 정말 다정한 분이십니다.”
디아르트가 밀토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가 끼고 있는 장갑은 그간 기사들이 훈련할 때 쓰던 것과 모양이 달랐다. 손가락까지 전부 감싸는 기존의 것과 달리 손등만 가리고 있는 반장갑이었다.
“마님께서 언제 어느 때 급하게 필요할지 모른다면서 선물해 주셨습니다. 점점 날이 더워져서 손에 땀이 찼는데 이걸 끼니까 정말 시원하더라고요. 안 그래도 고된 훈련으로 힘든 저희가 조금이나마 편해지길 바라신 거지요.”
밀토가 고마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장갑을 쓰다듬었다. 아직도 ‘구급상자’라는 게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조차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거라고 밀토는 확신했다.
밀토뿐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자신들의 장갑을 소중하게 바라보았다. 램버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각하께서도 받으셨…….”
당연히 디아르트의 손에도 반장갑이 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눈을 돌린 밀토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는 이 더위에 손가락 끝까지 감싸는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설마 거부하신 건가 싶었지만, 자신들이 낀 장갑을 바라보는 표정에서 아예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
그동안 마님을 외면하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납득한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의 표정에 고소함이 섞여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들의 얼굴이 거슬린 디아르트는 저도 모르게 낮게 말했다.
“받았다.”
‘거짓말!’
기사들은 확신했다.
그답지 않게 변명하듯 거짓말까지 했건만 전혀 믿지 않는 기사들의 모습에 디아르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말했다.
“램버트.”
“네, 각하.”
한 발짝 떨어져서 디아르트에게 간언(비난)을 올리는 기사들을 지켜보고 있던 램버트가 가까이 다가갔다.
“한가한 소리들을 하는 거 보니 훈련이 부족한 모양이군.”
“네. 연무장 돌리겠습니다.”
기사들은 이미 각오한 일이라는 표정이었다. 몸은 힘들게 될지언정 속은 시원했다.
“오랜만에 D플랜 훈련을 하는 게 좋겠군.”
‘헉!’
디아르트가 가장 힘든 훈련 코스를 입에 올리자 기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너도, 참여하도록”
기사들이 저를 몰아붙일 때 슬쩍 고개를 돌리고 낄낄거리던 램버트를 본 디아르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램버트가 깨갱 물러섰다.
“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 * *
보자. 헤어스타일 완벽. 드레스 완벽. 입가를 가려 줄 부채도 확실하게 챙겼고. 이제 입장할 일만 남았군.
“마님, 정말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릴리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그녀는 내가 친구를 위해 몸소 무도회에 잠입한다고 믿고 있었다.
올곧이 바라보는 순진한 눈망울을 보니 양심이 찔려 얼른 가면을 집어 들었다. 제비꽃과 큐빅으로 솜씨 좋게 꾸며 낸 화려한 가면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난 작은 마차에서 내렸다.
일부러 휘턴 공작가의 문장이 양각되어 있지 않은 평범한 마차로 골랐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도 상관없다는 듯 가문의 마차를 타고 들어가는 이들도 왕왕 보였지만 대놓고 정체를 드러낼 만큼 난 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상 들어가려니까 좀 떨리네.”
난 심호흡을 크게 쉰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무도회가 열리는 홀로 들어선 난 벌어지는 입을 부채로 가렸다.
‘우와!’
영화에서나 보던 무도회장이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여기도 저기도 온통 반짝반짝한 게 생각보다 더 호화로웠다.
내가 늦게 도착한 모양인지 화려한 샹들리에가 환하게 비추고 있는 홀 안에는 이미 남녀가 뒤섞여 춤을 추고 있거나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어찌나 화려하게 꾸미고 왔는지 샹들리에 빛에 반사된 보석들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릴리가 내 드레스 차림을 보곤 너무 수수하다며 걱정했었는데 확실히 이 안에서 난 눈에 띄지도 않을 것 같았다.
‘좋았어.’
최대한 조용히 남자들을 물색해 볼 생각이었던 터라 일부러 더 수수하게 입었기에 절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난 부드러운 선율의 음악을 가로지르며 군중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시종이 들고 있는 트레이에서 샴페인 잔을 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젠장. 뭐 얼굴이 보여야 찜을 하지.”
가면으로 가리고 있어 내 정체가 안 드러나는 건 좋은데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볼 수 없다는 게 흠이었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들이댔다가 가면을 벗었을 때 표정 관리 못 하면 그것도 낭패였다.
게다가 혹시 날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떡해.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에 부릅 힘을 주었다. 믿을 건 내 심미안뿐이다. 가려진 얼굴들을 떠올려 보기 위해 가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물론 아무리 눈에 힘을 주어도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 사람의 행동이 잘 보였다.
저 사람은 걸을 때 너무 뒤뚱거리고. 저 사람은 자꾸만 한숨을 내쉬어. 저 남자는 지나가는 여자마다 눈을 떼지 못하는 게 호색한이 틀림없고. 저 남자는 웃음소리가 너무 경박해.
내가 너무 이것저것 따지는 건지 뭔지 아무리 둘러봐도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었다. 실망감에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오, 저 남자 괜찮은데?”
막 홀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본 난 눈을 번쩍 떴다.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 날렵해 보이는 몸매에 걸음걸이는 우아했고, 느릿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에선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다소 수수해 보이는 검은색 슈트는 오히려 남자를 더욱 눈에 띄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남자를 휘감고 있는 상위 귀족 특유의 위엄 어린 분위기. 더 볼 것도 없이 분명 굉장한 미남임이 분명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홀 안에 있던 여인들의 시선이 모조리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하기야 등장하자마자 홀 안의 공기마저 바뀌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홀 안에 있는 그 누구보다 시선을 잡아끄는 남자였지만 난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저렇게 눈에 띄는 사람과 얽혀서 모두의 관심과 시기를 받아 내는 건 사양이었다.
게다가 어쩐지 디아르트와 분위기가 닮은 것도 마음에 걸렸다. 저 남자는 흑발이니 디아르트일 리는 없겠지만.
“너무 재지 말고 일단 아무나 잡고 대화라도 나눠 봐야지.”
그렇게 마음먹고 막 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레이디, 혼자이십니까?”
시야를 가리는 두툼한 그림자와 함께 앞으로 커다란 손바닥이 내밀어졌다. 눈을 드니 웬 작달막한 남자가 싱글 웃고 있었다.
암만 재지 않기로 했다지만 입을 열 때마다 지독한 술 냄새가 나는 이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가면 너머의 풀려 있는 눈빛이 음흉한 기색을 띠고 있는 것도 꺼려졌다.
거절의 말을 내뱉으려는데,
“내 파트너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누군가 내 어깨를 친근하게 감싸 왔다.


#025
어쩐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나는 내 어깨를 감싸고 있는 손에서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귀여운 토끼 가면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지만 화려한 금발과 베일 듯 날카로운 턱선, 입술 밑에 희미하게 박혀 있는 검은 점을 통해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아니,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당황한 나와 달리 토끼 가면, 아니 자비스 황태자는 능글맞게 입술을 말아 올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내 작은 카나리아가 많이 놀란 모양이야. 이리 애처롭게 떨고 있는 걸 보니.”
내가 떠는 건 네 느끼함 때문이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만남을 가진 내가 굳어 있는 사이, 자비스 황태자가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보석 같은 그대의 눈동자가 담기에 저자의 꼴이 퍽 흉측하긴 하지.”
“뭐, 뭣!”
면전에서 대놓고 인신공격을 당한 남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에게 시선을 돌린 자비스 황태자가 상큼하게 웃었다.
“이런, 아직까지 거기 있었나?”
“이, 이……!”
“레이디에게 실례인지도 모르는군.”
남자는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큰 상대에게 차마 맞설 용기는 못 내겠는지 부들부들 떨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괜찮나?”
괜히 말 한마디 걸었다가 쪽을 당하고 씩씩대며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난 머리 위로 내려앉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괜찮습니다.”
난 아직까지 내 어깨를 감싸고 있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며 말했다.
“이 바닥에서 질 안 좋기로 유명한 자네.”
척 봐도 그래 보이긴 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혼자서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솔직히 그닥 고맙지는 않았다. 하나 얼른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던 난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아니, 피하려고 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순식간에 몸이 밑으로 가라앉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대는 내 앞에서 매번 넘어지는군.”
내 허리를 붙잡아 세운 자비스 황태자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날개를 다치기라도 한 건지.”
“아…….”
뇌가 받아들일 수 있는 허용치를 넘어선 단어를 들어 버린 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문득 디아르트와의 첫 저녁 식사 자리에서 분위기를 풀어 보겠답시고 주접을 부렸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디아르트의 심정이 지금의 나와 같았을까. ……젠장, 다신 그러지 말아야지.
짧게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진 난 얼른 자비스 황태자에게서 물러섰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내가 누군지 알면서 모른 척하는군. 오늘도 내게 내줄 시간이 없나?”
망할. 끝까지 모른 척 내빼려고 했건만 황태자 이놈은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 모양이다.
익명을 보장하는 무도회에서 이게 무슨 비매너야, 이 자식아!
자비스 황태자는 마침 옆을 지나가고 있던 시종의 트레이에서 와인 잔 두 개를 집어 들며 턱을 끄덕였다.
“바람도 쐴 겸 테라스로 나가지.”
자비스 황태자는 순순히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계속 빼다가 소란을 일으키면 나만 손해였다. 대충 비위 좀 맞추며 시간 때우다 도망쳐야겠다, 생각한 난 한숨을 삼키며 황태자의 뒤를 따랐다.
테라스로 나오자 마나석을 이용해 냉기를 머금게 한 내부와 달리 여름밤의 습한 열기가 물씬 밀려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쪽이 마음에 들었다. 풀 내음이 섞인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는데 황태자가 와인 잔을 내밀었다.
“마시게.”
“감사합니다.”
잔을 받아 든 난 내게 달라붙는 시선을 모른 척하며 홀짝홀짝 와인을 마셨다. 얼른 마시고 튀자.
“그대를 여기서 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나도 여기서 널 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단다. 이게 어떻게 얻어 낸 초대권인데, 운도 지지리 없지.’
“저인 줄 어떻게 아셨나요?”
나야 그 느끼한 말투로 황태자인 걸 알아챘지만 이 남자는 대체 어떻게 날 알아본 걸까?
“그대만 가지고 있는 향기로.”
“윽.”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참지 못하고 질색하는 표정을 드러내자 황태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긴 표정.”
황태자는 뭐가 그리 웃긴지 한참을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그의 모습을 보며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날 이렇게 대하는 여인은 그대가 처음일세.”
너 드라마 찍니? ‘날 이렇게 대하는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이런 무도회에 참석하면서 머리카락 색도 바꾸지 않는 건 자네뿐일 거야.”
“네?”
머리카락 색을 바꾼다니 무슨 말이야? 하긴 판타지 세계이니 어렵지 않은 일인가.
“본래 제 머리카락 색과 마법으로 바꾼 머리카락 색은 차이가 있다네. 웬만한 사람이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미세한 차이겠지만 난 그 웬만한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지.”
“아, 네…….”
제 자랑을 하고 싶어 말을 꺼낸 모양이다. 황태자는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날 보며 이가 드러나게 웃었다.
“한데 전하께서도.”
“토끼 공작이라고 불러 주겠나?”
“전.하.께서도 머리카락 색을 바꾸지 않으셨네요?”
금발은 황족의 상징이었다. 흔한 머리카락 색을 가진 나보다 마법이 필요한 건 황태자일 텐데.
“난 나를 숨길 생각이 전혀 없거든.”
황태자가 토끼 가면을 벗으며 한 손으로 여유롭게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말이지 금방이라도 잡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이건만 저 방정맞은 주둥이가 다 깎아 먹는다. 부리가 조금만 단정했어도 여주와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응원해 주겠는데.
“그보다, 공작과 이혼한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군.”
“소문을 들으셨나요?”
하기야 귀부인들과 숱한 만남을 가지는 그이니 이런 소문쯤 금방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더욱이 디아르트를 향한 로에니의 집착은 사교계의 유명한 가십거리였다. 그렇게 죽자 살자 매달리더니 결국 이혼당하는 처지라고 얼마나 입방아들을 찧을까.
“소문은 믿을 바 못 되지. 나는 내 눈으로 본 것만 믿네.”
단호하게 말하는 황태자는 의외였다. 가벼운 행실로 스캔들을 몰고 다니는 만큼 즐기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던 터다.
“아버님께 들었지.”
“아아.”
“공작이 이혼을 서둘러 달라 청했다고 하시더군.”
디아르트 이놈, 아주 신나서 달려간 모양이네. 뭔가 밑지는 기분이긴 하지만 덕분에 이혼 절차는 빨라질 것이다.
기다렸던 소식을 들을 난 늘어지는 입꼬리를 와인 잔으로 가렸다.
“역시…… 실상은 소문과 다른 모양이야.”
“소문은 뭐라고 났는지요?”
“본인 앞에서 험담을 하는 취향은 없어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알겠네요.”
내 욕을 들어 봤자 속만 시끄럽지 뭐. 난 어깨를 으쓱하며 테라스 아래 정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따갑게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여 앞으로 밤 소풍을 다니기로 한 건가?”
“밤 소풍이라뇨?”
“사교장에 나올 생각이냔 말이네.”
황태자가 말하는 사교장이 흔히 말하는 사교 모임은 아닐 것이다. 밤 소풍이라니 어울리지 않게 낭만적인 단어였다. 발뺌할까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어차피 이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데다 언행이 가벼워 보여도 어디 가서 내 얘기를 함부로 떠들고 다닐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소문 좀 나면 어때. 어차피 이혼하면 이 나라를 뜰 건데.
차라리 이왕 이렇게 만난 거 황태자에게 정보를 얻어 내자 싶었다.
“앞으로 시야를 넓혀 보려 한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해서 말인데, 전하께서는 주로 어디서 여인을 만나시는지요?”
의외의 질문을 들었다는 듯 동그래졌던 황태자의 눈이 이내 반달로 휘었다.
“내게 관심이 있는 줄 몰랐군.”
“아뇨, 없습니다.”
대화의 흐름이 왜 그렇게 틀어져?
“기쁘군.”
“아니. 전 전하께 정말 일말의 관심조차 없……”
“쉬. 부끄러워할 것 없네.”
이놈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답답함에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 되면 눈앞에 있는 이 미친놈의 명치라도 한 대 때리면 안 될까? 기절하고 일어나면 맞은 것도 잊어버리지 않을까?
진심으로 생각하며 황태자의 가슴을 노려보았다. 황태자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슬쩍 앞섶을 벌렸다.
“자세히 보여 줄 용의가 있네만.”
“사양하겠습니다.”
정보고 나발이고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홱 돌리는데 황태자가 한 손을 내밀며 허리를 숙였다.
“눈부시게 반짝일 그대의 앞길에 첫걸음을 함께할 기회를 준다면 영광이겠군.”
능글맞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건 똑같지만 방금까지의 실없는 소리는 모두 장난이었다는 듯 진지한 눈빛이었다.
“마침 음악도 바뀌었으니.”
황태자가 흘깃 홀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내게 돌렸다. 그의 말대로 아까부터 흘러나오던 경쾌한 연주 소리가 나른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나와 한 곡 춰 준다면 뭐든 답하도록 하지.”
“정말이죠?”
“물론.”
황태자가 싱긋 웃었다. 화보 속 연예인처럼 그린 듯한 미소를 보며 나는 그의 손바닥 위로 손을 얹었다.
그러자 손끝에서부터 묘한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그 기운을 채 느끼기도 전에 황태자가 커다란 손으로 허리를 당겨 안았다.


#026
“하암-”
나는 식탁 의자에 앉으며 나도 모르게 나온 하품에 얼른 입을 가렸다.
“죄송합니다.”
식사 자리에서 상대를 앞에 두고 하품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사과하며 냅킨을 펼쳐 무릎 위를 덮었다.
‘졸려 죽겠네.’
어제 밤늦게까지 무도회에서 시간을 보낸 탓인지 오후 늦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늘어졌다. 이 피곤한 가풍 때문에 침대에서 빠져나오는데 어찌나 힘이 들던지.
‘그래도 어제 꽤 좋은 정보를 얻었어.’
과연 여러 여인을 만나 온 황태자답게 이성을 만나는 장소와 기회에 대해 빠삭했다. 인간 ‘만나쥬오’라고 칭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나는 내 앞에 천천히 차려지는 음식들을 내려다보며 어젯밤을 상기했다.
‘윽!’
‘괜찮으세요?’
‘괜찮지 않네. 몇 번째인지 아는가?’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원망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춤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그의 발이 무차별 공격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괜찮네. 고작 이런 사슴 같은 다리론 내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한다네. 오히려 그대가 너무 가벼워 걱정이군. 식사는 제대로 하고 다니는 건가?’라며 웃던 황태자였지만 춤이 계속될수록 점점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니, 여기서 왜 왼발이 나오냔 말이네.’
‘저도 모르죠.’
‘그대가 모르면 누가 알아.’
황태자는 속이 터진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왈츠니 뭐니 하는 귀족들의 춤은 내겐 생소하기만 했다. 더욱이 원래의 로에니도 잘 추는 편은 아니었던 모양이라 무도회 초대장을 얻은 후 급하게 배운 춤은 미숙할 수밖에 없었다.
‘악!’
‘앗 실수. 죄송합니다.’
‘아니, 그댄 죄송하지 않아. 방금 건 분명 고의였네.’
눈치는 빨라서.
사실 그가 카나리아니 뭐니 수작을 부릴 때마다 일부로 밟기도 했다. 난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왼발. 왼발. 오른발. 오른발. 여기서 한번 턴 하고 다시 왼…… 윽!’
도저히 안 되겠는지 입으로 리듬을 내뱉던 황태자가 또다시 발을 밟히곤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눈꼬리에 눈물까지 그렁한 게 아프긴 진짜 아픈 모양이다.
‘이번엔 정말 실수였어요.’
‘안 믿네.’
진짠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황태자는 마치 고행의 길을 걷는 수도사처럼 비장한 얼굴로 끝까지 나를 리드했고, 그 이후로도 몇 번이고 내게 발등을 밟히고 말았다.
“좋은 일이 있나 보지?”
춤이 끝난 후 절뚝거리던 황태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후후 웃던 난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네?”
“기분 좋아 보이는군.”
잘못 들은 줄 알았건만 디아르트가 맞는 모양이다.
평소엔 말을 걸어도 무시로 일관하던 인간이 웬일이람? 난 놀란 눈으로 디아르트를 바라보았다.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는 식사도 멈추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 네. 어제 즐거운 일이 있었거든요.”
“그렇군.”
디아르트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진 것 같은데 착각인가?
어쨌든 그가 먼저 내게 말을 거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역시 그간의 내 노력들이 빛을 발하는 모양이다.
난 기쁜 마음에 대화를 이어 가고자 어제 황태자에게 들었던 얘기를 화제로 꺼냈다.
“참, 황제 폐하께 이혼을 서둘러 달라 청하셨다고 들었어요. 소원 수리가 빨라서 좋네요.”
“누구한테 들었지?”
“황태자 전하께요.”
난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며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부드럽게 녹아드는 양고기의 훌륭한 풍미를 채 느끼기도 전에 난 디아르트의 다음 말에 입 안에 든 걸 뿜어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다물어야 했다.
“그를 어디서 만났는데?”
입 안에 든 음식 때문에 차마 말을 할 수 없다는 듯 가련한 표정을 지은 난 양고기를 최대한 느리게 씹으며 머리를 팽팽 돌렸다.
저번 레티시아 황녀의 초대로 황실 다과회에 참석했을 때 만났다고 하기엔 이혼 소원을 빌기 전이고.
그렇다고 어제 가면무도회에서 황태자를 만났다고 이실직고한다? 암만 살기 위해 바람을 피운다지만 남편을 앞에 두고 대놓고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갔다고 어떻게 말해.
황태자를 오다가다 길거리에서 만났다고 할 수도 없고.
한참 고민하던 난 거의 녹았다 싶을 정도로 잘게 부스러진 고깃덩이를 삼키며 결국 사실대로 말하기로 결정했다.
“최근에 사교 모임에서 뵈었답니다.”
“어느 사교 모임 말하는 거지?”
아니, 얘가 오늘따라 안 어울리게 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그…… 있어요. 공작님은 잘 모르시는 모임인데, 여름밤을 만끽하자는 취지로 개최된 그런 모임으로, 어…….”
내가 이렇게 순발력이 없을 줄이야. 머리가 굳은 것마냥 버벅거리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디아르트는 이내 관심이 다 했는지 시선을 돌렸다. 한숨 돌린 난 얼른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사우 일족에 대한 자료는 찾으셨나요?”
사우 일족은 내가 디아르트에게 소원 두 개를 얻어 내고 건넨 정보였다. 그들은 태초에 신에게 제일 먼저 마법을 얻은 일족이었다. 오랜 세월 쌓은 마법 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제라석에 마나를 담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이들이었다.
망할 놈의 저주를 내린 우슬라 역시 사우 일족이었다. 문제는 일족 자체가 그녀처럼 괴팍한 성정을 가진 탓에 사악하다고 배척을 받아 지금은 거의 멸족했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우연히 제라석의 숨겨진 기능을 알게 된 디아르트가 오랜 시간 제국을 이 잡듯이 뒤져 그들을 찾아낸다고 적혀 있었다.
분명 최근에 미더스 공국이 루프탄을 수출하기로 결정한 것도 그의 입김이 작용했겠지.
‘아니, 잠깐.’
책에는 아델리아를 만난 이후로 황태자와 척지게 된 디아르트가 마나를 담은 제라석으로 손쉽게 반역에 성공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렇다는 건…….
‘나 지금 우리 에드거 목을 자를 무기를 내 손으로 갖다 바친 거니?’
뎅그렁.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진 포크가 접시 위로 떨어졌지만 난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직 실제로 보진 못했지만 귀여울 게 분명한 에드거와 내 손을 꼭 부여잡고 수줍게 웃던 레티시아 황녀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찾고 있어.”
디아르트의 짧은 대답은 죄책감에 빠진 내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 * *
디아르트는 물 잔을 기울이며 제 앞을 응시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실실 웃고 있던 로에니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로에니가 멍한 얼굴로 포크로 찍은 스테이크를 입 대신 볼로 가져갔다. 사용인이 헐레벌떡 손수건으로 볼을 닦아 주는데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넋을 놓은 듯 반응이 없었다.
희미하게 ‘내가 내 최애를 내 손으로…….’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 잔을 내려놓은 디아르트가 시선을 내렸다. 제가 평소 같지 않게 이것저것 물었다는 자각이 들었다.
아마 어제 일 때문일 것이다.
“굳이 저까지 올 필요는 없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이번 무도회 시찰은 디아르트가 직접 한대서 뛸 듯이 좋아했던 램버트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오랜만에 아내와 외식이라도 나가려고 했더니, 이럴 거면 그냥 저 혼자 왔죠.” 하며 다 들리게 투덜거리는 램버트를 뒤로하고 디아르트는 홀을 둘러보았다.
오늘 이 자리에 타국과 내통하는 자가 참석할 것이다. 디아르트는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거나 무도회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이들을 찾으며 저를 바라보는 구애의 시선들을 가로질렀다.
“저는 이런 곳은 처음 와 봐서 색다르고 좋지 말입니다.”
모든 게 신기한 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밀토가 어느 여인을 보곤 반가운 얼굴을 했다.
“어? 저기 우리 마님과 머리카락 색이 똑같은 분이 계십니다.”
“보통 이런 무도회에선 황족과 같은 금발이나 붉은 머리카락이 인기인데 신기하군.”
램버트가 밀토가 가리키는 여인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마님을 뵌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습니다.”
밀토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지옥 같은 훈련에 마님께서 가져다주시는 간식만이 낙이었건만 누구 때문에…….”
램버트가 대놓고 그 누구를 흘겼다.
“사람이 말 한마디에 웃고 웃는 건데, 얼마나 학을 떼셨으면 발길을 뚝 끊으셨겠나. 무던한 우리가 들어도 가끔은 심장에 대못이 퍽 박히는 것 같은데.”
이미 기사들 사이에선 로에니가 디아르트의 무정한 태도와 싸늘한 말투에 상처 입어 연무장을 찾지 않는 것이라고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숙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건 기사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사내라면 먼저 숙이고 들어가는 법이지. 또 남편으로서도 아내의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게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나. 혼자 잘난 듯 굴 것이 아니라.”
와글와글. 디아르트를 가운데에 두고 아주 들으라는 듯 대화를 나누는 램버트와 밀토였다. 하지만 둘은 그들이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을 보고 로에니를 떠올리기도 전에 디아르트의 걸음이 먼저 멈추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027
디아르트는 대놓고 나누는 제 험담은 무시한 채 보라색 머리카락을 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제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머리카락이었다.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지만 그저 평소대로 무시하면 될 텐데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웃는 자비스 황태자가 유명한 호색한일 탓일 것이다.
‘신경 쓸 필요 없지.’
여태껏 신경 쓴 적 없었고, 이혼이 예정된 지금 앞으로는 더더욱 그럴 일 없었다.
디아르트는 테라스 쪽으로 나가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등을 돌렸다. 거침없이 홀을 가르던 걸음이 얼마 못 가 우뚝 멈춰 섰다.
“왜 그러십니까, 각하.”
디아르트는 밀토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왔던 길을 되돌아섰다. 그리고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진 두 사람이 있을 테라스로 성큼성큼 향했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을 교환하는 밀토와 램버트를 무시한 채 테라스를 뒤로 하고 벽에 등을 기댔다. 열어 놓은 테라스 문을 통해 불어오는 끈적한 여름 바람을 타고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전하께서는 어디서 여인을 만나시는지요?”
“내게 관심이 있는 줄 몰랐군.”
실크 커튼 너머로 들려오는 대화는 꽤 즐거워 보였다.
“정말 황태자 전하실 줄이야.”
밀토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 진짜 황태자가 이 무도회에 참석했을 줄은 몰랐다. 램버트가 테라스 쪽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간 사교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종종 뵙곤 했으니 오늘도 어딘가에 계실 거라고 생각은 했다만, 머리카락 색도 안 바꾸셨을 줄이야. 그보다, 저렇게 대놓고 거부당하는데도 못 들은 척하시다니. 과연 전하시군.”
“저 숙녀분, 황태자 전하인 걸 알고서도 굉장히 단호하네요.”
그때 황태자가 기분 좋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밀토와 램버트의 시선이 돌아갔다.
“전하께서 저렇게 즐겁게 웃으시는 건 처음 보는군.”
“그렇습니까?”
“응. 능글맞아 보여도 의외로 선을 딱 지키신달까. 쉽게 곁을 주지 않으시는 분이거든.”
“저 숙녀분이 정말 마음에 드시나 봐요.”
“그러면 좋겠군. 전하도 이제 마음잡고 정착해야지. 곧 황제가 되실 분이 언제까지고 방탕하게 살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근데 계속 들으면 들을수록 숙녀분 목소리가 어째 익숙하지 말입니다.”
“그렇지? 나도 안 그래도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인데…….”
곰곰이 생각하던 램버트가 누군가를 떠올린 듯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디아르트는 제 쪽으로 홱 고개를 돌리는 램버트에게 턱을 까딱였다.
“수다 떨 시간에 홀이나 둘러보지.”
“저희끼리 말입니…….”
“저기 저 사내가 좀 수상한 거 같은데? 각하, 저희가 가 보겠습니다!”
램버트가 밀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외쳤다.
그가 밀토를 질질 끌고 사라지자 디아르트는 벽에서 등을 떼고 테라스로 고개를 돌렸다.
기분 좋게 미소 띤 황태자가 왁왁대는 로에니를 다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호감이 담긴 눈빛이었다.
“눈부시게 반짝일 그대의 앞길에 첫걸음을 함께할 기회를 준다면 영광이겠네.”
정중히 춤을 청한 황태자가 흘깃 시선을 돌렸다.
“마침 음악도 바뀌었으니.”
커튼 사이로 디아르트와 황태자의 눈이 마주쳤다. 찰나였지만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먼저 시선을 돌린 황태자가 무어라 작게 속삭이자 로에니가 그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두 사람은 숨결도 느껴질 만큼 가까이 맞닿았다.
둘은 이내 연주에 맞춰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장난을 치면 로에니가 발끈한 얼굴로 발등을 즈려 밟았고 그는 짓궂게 웃었다.
“이쯤 되면 그냥 밟는 것 아닌가?”
“설마요. 그저 제 춤 실력이 서툰 것뿐이라니까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리 말하며 로에니는 또 한 번 황태자의 발을 밟았다. 황태자는 윽, 신음을 삼키면서도 이 상황이 퍽 유쾌한 얼굴이었다.
춤을 추고, 발을 밟고, 투덜대고, 발뺌하면서도 즐겁다는 듯 웃고. 누가 봐도 장난치는 연인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춤이 끝났다.
내내 짓밟혔던 발등이 아픈지 황태자가 난간을 붙잡고 끙끙거렸다.
“레이디에게 이렇게 무참하게 밟힌 적은 처음일세.”
“송구합니다.”
로에니가 전혀 송구하지 않은 얼굴로 시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퍽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부축해 주게.”
“네? 제가요?”
로에니가 제게 뻗은 황태자의 손을 내려다보며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좀 앉아서 쉬어야 할 성싶은데 이 발로는 도무지 홀까지 혼자 못 걸어갈 것 같단 말일세.”
“아무리 그래도 외간 남자를…….”
“그대는 피도 눈물도 없군. 진짜 못 걷겠어서 그렇단 말이네.”
황태자가 내민 손을 재촉했다.
“할 수 없죠. 아픈 사람을 모른 척하는 건 도리가 아니니까요.”
“그것참 고맙군.”
“자, 잡으세요.”
로에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태자가 손을 붙잡아 몸을 일으키더니 한쪽 팔을 그녀의 어깨에 걸쳤다. 순간 느껴지는 무게감에 로에니가 윽, 신음을 삼켰다.
“나같이 건장한 사내가 그대처럼 가련한 여인에게 의지하다니, 꼴이 말이 아니군.”
“그 가련한 여인에게 밟혀서 걷지도 못하시는걸요.”
“그건 그대가 집요하게 밟은 탓이지 않은가.”
“네네. 어디로 가면 되죠?”
로에니는 황태자의 말을 들은 척 만 척하며 그를 부축했다. 그새 무도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는지 홀에는 아까보다 더욱 농염한 연주가 흐르고 있었다.
몸을 숨겼던 디아르트는 낑낑대며 홀을 가로지르는 로에니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실실 웃는 황태자의 얼굴로 보건대, 걷지 못하겠다는 것은 수작을 부리려는 핑계임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를 부축하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손으로 그녀의 보라색 머리카락을 빙빙 꼬는 황태자의 표정이 몹시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내가 뭐 하는 거지?’
디아르트는 자신이 왜 여기서 저 둘을 지켜본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몰래 엿듣는 것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오늘 무도회에 참석한 이유를 상기했다. 공국과 내통하는 간자를 찾아야 한다.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쓸 시간은 없다고 생각하며 등을 돌렸다.
한데 성큼성큼 홀을 가로지르면서도 왜 자꾸만 뒷목이 당기는지 알 수 없었다.
* * *
‘호기심이겠지.’
장장 십여 년을 쫓아다닌 여자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듯 관심을 딱 끊었다.
처음엔 또 무슨 수작을 부린다 생각했지만 그간 지켜본 바 진심임이 분명했다.
늘 짜증스럽게 자신을 괴롭히던 존재가 별안간 떨어져 나가니 신경 쓰이는 거겠지. 눈길도 안 주던 개가 갑자기 안 보이면 괜히 궁금해지듯이.
그러나 이것도 잠시뿐이다. 관심도 없는 여자에게 오래 신경을 쓸 만큼 그는 한가하지 않았다.
그러니 로에니가 사흘 후 수도에서 황태자와 만나기로 한 약속 따위도 곧 머릿속에서 지워질 것이다.
디아르트는 무심하게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028
그동안 구급상자에 무심했다. 바람을 피우러 다니면서 남편의 직장 동료와 동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이왕 반장갑도 선물했으니 보람도 느낄 겸 오랜만에 연무장을 찾았다.
“마님!”
내가 연무장에 들어서자마자 각자 흩어져서 연습을 하고 있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게 얼마 만입니까!”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닌지 걱정했습니다!”
마치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들마냥 다들 뒤로 꼬리가 붕붕 흔들리는 것 같았다. 며칠이나 못 봤다고 이렇게 눈이 초롱초롱해져서들. 그간 친밀도를 꽤 쌓았다고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더한 환대였다.
“다들 오랜만에 보네.”
나는 내게 매달려 있는 수많은 시선을 돌리기 위해 릴리에게 눈짓했다. 척하니 알아들은 릴리가 바구니를 번쩍 들어 올렸다.
“오늘은 오렌지와 딸기, 그리고 생크림이 잔뜩 들어간 크레페랍니다. 우유와 꿀을 넣은 달콤한 홍차도 있어요!”
릴리의 말에 기사들의 고개가 바구니로 파바박 돌아갔다. 간식을 기다리는 리트리버들이 얼른 달라는 듯 애절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호위 받듯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걸으며 무심코 연무장을 둘러보았다.
언제나 연무장에서 살다시피 하는 디아르트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까지 내 손으로 내 최애를 죽일 무기를 갖다 바쳤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터라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그제는 어울리지 않게 왜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었담. 평소엔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하면서.’
대답은커녕 본 체라도 해 주면 다행이었다.
‘혹시 내가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걸 알았나?’
아니지. 그렇다고 나한테 관심 가질 인간이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기사들이 돗자리 대신 펼쳐 놓은 망토 위에 앉았다.
릴리가 크레페와 밀크티를 꺼내자 기사들이 흥분해서 감탄을 내뱉었다.
“어서 먹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던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왜 그래?”
내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니 기사들이 얼굴을 붉히며 흠흠, 헛기침했다.
“잘 먹겠습니다, 마님.”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인사한 기사들이 얌전히 손을 뻗어 크레페를 집어 들었다. 여느 때와 달리 점잖게 한 입 베어 무는 모습이 여느 고상한 귀족들처럼 보였다.
휘턴 가 기사단은 신분에 상관없이 실력으로 뽑는 터라 평민들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내부에서 엄격히 예법을 가르치는 덕에 귀족 자제들로 이루어진 기사단 못지않았다.
때와 장소에 따라 강직한 태도를 보이는 점이 휘턴 가 기사단의 특징, 이라고 책에 적혀 있기도 했다.
‘하지만 갑자기 왜?’
아까까지만 해도 똥꼬 발랄한 강아지들 같더니 갑자기 왜 이렇게 낯을 가린담?
난 의아한 시선을 릴리와 공유했다. 그녀 역시 기사들의 태도 변화가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다들 왜 그래?”
“예? 저희가 무얼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왜 딱딱하게 굴어. 무슨 일 있었어?”
오늘 단체로 기합이라도 받았나 싶어 물었더니 저들끼리 시선을 나누던 기사들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간 저희가 마님 앞에서 너무 편하게 있었던 것 같아서요.”
“응?”
“혹시 그것 때문에 기분 상해 안 오시는 게 아닌가 싶어서 다들 조심하자고 다짐했었거든요.”
아까는 너무 반가워서 잊고 있었지만. 기사들이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거 아냐. 그동안 좀 바빠서 못 왔던 거야. 난 오히려 이게 더 불편해.”
“정말요?”
기사들이 파아- 하고 반색했다. 역시 본인들도 어색했던 모양이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역시 우리… 각하가… 제였어…….’, ‘그럴… 다니까…….’, ‘하긴, ……라도.’라며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연무장을 둘러보며 물었다.
“밀토 경이 안 보이네?”
평소라면 제일 먼저 신나게 달려올 텐데.
내 물음에 우아함 따위 집어 던지고 우걱우걱 크레페를 먹던 기사들이 얼른 씹어 삼키고 대답했다.
“새 훈련복이 들어와서 가지러 갔습니다.”
“그래?”
지금 입고 있는 훈련복도 좋은데 왜 굳이 바꿔? 근육질 몸매가 여실히 드러나는 게 마음에 쏙 드는데. 아니지, 날씨도 더운데 이왕이면 반팔이 좋겠다.
난 실수인 척 반팔을 입은 기사들의 팔뚝을 쓰다듬는 모습을 떠올렸다. 다소 변태 같긴 하지만 그저 살기 위해서 이러는 것뿐이지 별 뜻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데 멀리서 우렁찬 외침이 들렸다.
“새 훈련복이 왔습니다!”
기사들의 시선이 우르르 돌아갔다. 멀찍이서 해맑은 표정의 밀토가 머리 위로 손을 휙휙 젓고 있었다.
“풉!”
기사들이 물고 있던 크레페를 뿜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릴리는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나는,
‘오, 생각보다 더 튼실한걸?’
평소에 강아지 같은 모습만 봐서 저렇게 몸이 좋을 줄은 몰랐다. 잔 근육들이 상체에 적절히 달라붙어 있었고 특히 명치 아래로 선명하게 쪼개진 복근이 TV에서나 볼 법한 완벽한 몸매였다.
“저, 저 미친놈이!”
“야! 너 당장 옷 안 입어?!”
기사들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기사들이 득달같이 몰려가자 신나게 달려오고 있던 밀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다, 다들 왜 이러십니까?”
얼떨떨한 목소리로 보아 밀토는 아직까지 나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기사들은 뒷걸음질을 치는 그의 목덜미를 잡고 우악스러운 손길로 망토로 감쌌다.
“이게 어디서 이딴 흉측한 꼴을 내보이고 있어?!”
아니, 왜 가려. 보기 좋은데. 점점 사라지는 구릿빛 피부를 아쉽게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을 가린 손가락을 슬쩍 벌리던 릴리가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꺅, 마님!”
릴리의 비명에 놀란 기사들이 나를 돌아보고 숨을 들이켰다. 그제야 나를 발견한 밀토 역시 경악해서 입을 떡 벌렸다.
왜? 뭐?
나는 헐벗은 상체를 망토로 가리는 것을 위장해 밀토를 두들겨 패고 있던 기사들이 허겁지겁 내게 달려오는 것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마님, 코피가!”
사색이 된 릴리가 급한 마음에 허둥지둥 제 앞치마로 내 코를 막았다.
‘코피가 났다고?’
젠장. 여기서 코피를 흘리면 뭔가 모양새가 이상하잖아!
“마님, 괜찮으십니까?”
“혹시 아직 몸이 안 좋으신 겁니까?”
“아니면 갑자기 저런 극악무도한 것을 보시어 놀라신 겁니까?”
“저놈은 저희가 죽을 때까지 패 놓겠습니다. 아니 죽여 버리겠습니다!”
“네! 반드시!”
기사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들 한마디씩 던졌다.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밀토도 어느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서 망토로 칭칭 감겨 있는 모습이 처량했다.
“죄송합니다, 마님. 계신 줄 모르고 실례를 범했습니다.”
밀토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사죄했다.
‘아니, 솔직히 보기 좋았어.’
전생에 아이돌과 배우들의 각종 화보집으로 단련이 되어 있는 내가 고작 맨 상체 한 번 봤다고 코피를 흘린 건 아니었다. 만화도 아니고.
지금의 난 그간 바람피울 상대를 물색하러 다니면서도 이성과의 접촉이 전무 했던 탓에 저주의 기운이 목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가면무도회에서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던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황태자와 손을 맞잡고 춤을 춘 덕에 잠시 증상을 가라앉힐 수 있었지만 고작 그런 감질나는 접촉으로는 얼마 유예하지 못했다.
저주의 발현을 겪은 후로 나는 마치 게임 속 상태 창처럼 나의 HP 게이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KO 당하기 직전이었고, 그 전에 포션을 마시기 위해 연무장을 찾았던 것이다.
“괜찮아. 아직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래.”
나는 릴리를 물리고 손수건으로 코를 막으며 말했다. 기사들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주시했다.
“물 한잔 갖다 드릴까요?”
기사들은 무슨 명이든 내리면 바로 수행하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이만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밀토 경이 에스코트 좀 해 줄래?”
난 한 명만 공략한다!
연무장에서 방까지는 약 삼십 분. 그 시간 동안 몸이 안 좋은 걸 핑계로 밀토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저주를 중화할 셈이었다.
“마님, 이런 망측한 놈보다는 제가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너희들은 다 연인이 있잖아. 연인이 있는 사람은 양심에 찔린단 말이야.
내가 고개를 저으려는 그때였다.
“무슨 소란이지?”
별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029
흠칫 어깨를 떤 기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삐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인 디아르트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램버트가 무슨 일이냐는 듯 기사들에게 눈짓하는 것이 보였다.
“마님께서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아 모셔다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어느새 가까워진 디아르트의 시선이 붉게 물들어 있는 레이스 손수건에서 내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밀토에게로 옮겨 갔다.
망토로 칭칭 감긴 밀토의 모습에 램버트가 대신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밀토 이 미친…… 아니, 밀토 경이 마님이 계신 줄 모르고 홀딱 벗고 돌아다니는 바람에. 아! 상체만 벗은 겁니다, 상체만!”
상황 설명을 하던 기사들이 얼른 덧붙였다.
“해서 마님께 못 볼 꼴을 보여 드리게 된 점을 사과드리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밀토가 낯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이건 놀라서 그런 게 아니라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거니까.”
난 눈을 내리떠 코를 막고 있는 손수건을 가리키며 말했다.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어요.”
릴리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던 내가 휘청거리자 밀토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 탓에 그의 상체를 가리고 있던 망토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꺅!”
릴리가 놀라 소리치며 얼른 내 눈을 가렸다.
“진짜 이 미친놈이!”
“실수가 두 번이면 고의야, 이 자식아!”
기사들이 디아르트와 내 앞이라는 것도 잊은 듯 밀토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방까진 제가 모시겠습니다.”
램버트가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지금은 밀토에게 에스코트해 달라고 할 상황이 아니네. 난 아쉬움을 삼키고 램버트가 내민 손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역시 반 장갑을 끼고 있는 터라 피부가 살짝 맞닿았다.
‘역시 똑같네.’
무도회 밤 황태자와 춤을 추었을 때와 지금 램버트의 손을 맞잡았을 때 모두 흘러 들어오는 기운의 농도가 똑같았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단 말이군.’
역시 상대보다는 스킨십의 강도가 중요한 모양이다. 더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럼 전 물러가겠습니다.”
얼른 방에 돌아가서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며 디아르트에게 인사한 후 등을 돌리는데 그가 나를 멈춰 세웠다.
“내가 가지.”
“네? 어딜요?”
“그대의 방까지 내가 데려다주겠다고.”
잘못 들은 줄 알았건만 디아르트는 정말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얘가 왜 이래, 부담스럽게!’
“괜찮아요. 공작님은 훈련을 하셔야죠. 전 램버트 경과 함께하면 된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전 애들 연무장 좀 돌리고 훈련 코스 짜고 있겠습니다.”
극구 손사래 치는 나와 달리 램버트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며 싱긋 웃었다.
“아니, 그럼 차라리 혼자…….”
“가지.”
디아르트가 나를 지나쳐 앞장섰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푹 숙였다.
‘중화는 물 건너갔구나.’
에스코트라도 해 주든가. 이렇게 저 혼자 앞장서서 갈 거면 굳이 왜 데려다준다는 거니, 숨 막히게.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벅저벅 걷는 디아르트의 뒤를 쫓으며 구시렁거렸다.
암만 관심이 없다 해도 그렇지 지나가던 개가 피를 흘려도 이것보단 신경 썼겠다. 릴리와 기사들이 그 난리를 부리는 데도 괜찮냐는 말 한마디가 없는 무정한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울컥했다.
저 얄미운 뒤통수를 한 대만 때려 보면 소원이 없겠다 생각하며 주먹을 번쩍 들어 올렸던 난 그와 동시에 뒤를 돌아본 디아르트와 눈이 마주치고 흠칫 굳었다.
“뭐 하는 거지?”
디아르트가 어정쩡하게 들려 있는 내 주먹을 흘깃 보며 물었다.
“아, 그게…… 어제 잠을 잘못 잤는지 어깨가 좀 뻐근한 것 같아서요.”
되지도 않는 변명을 내뱉은 난 괜히 어깨를 돌리며 주먹을 내렸다. 눈치 빠른 놈.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겠어, 아주.
“흠흠. 한데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디아르트가 무슨 말이냐는 듯 내려다보았다.
‘네가 나한테 볼일이 없으면 단 1분이라도 내줄 위인이니?’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키고 생긋 웃었다.
“하실 말씀이 있어 따로 부르신 듯해서요.”
“아.”
잠깐 생각하던 디아르트가 지나가는 듯한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며칠 후에 있을 황실 연회에 초대받았어. 황후의 오라비가 들인 양녀를 소개하는 자리라더군.”
“……네?”
황후 오라비의 양녀라면 아델리아잖아! 둘의 첫 만남이 있는 황태자의 탄신 연회까지는 아직 몇 달 남았는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표정 관리하는 것도 잊었다.
원작에선 디아르트가 아델리아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설정이 있었다. 이 연회에서 두 사람이 만난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물론 악녀 루트를 탈 생각도 없고 디아르트에게 이혼도 재촉하고 있는 상태라 원작과 같은 결말을 맞지는 않겠지만 갑자기 두 사람의 만남이 당겨졌다고 하니 또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미친놈은 독자들도 혀를 내둘렀던 최강 집착남! 아델리아에게 반해 헤까닥 돌아 버려 뭔 짓을 저지른대도 이상하지 않아!
난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그런 나를 가만 내려다보던 디아르트가 불쑥 물었다.
“몸이 안 좋은가?”
“……네?”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뒤늦게 대답하자 디아르트가 턱으로 내 코를 가리켰다.
“아…….”
이게 다 부부 싸움 한번 기깔나게 했던 네 선조들 덕분이다, 임마!
나는 소리치고 싶은 것을 애써 누르며 미소 지었다. 목 뒤에서 칼춤이 춰지고 있는 마당에 디아르트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행동은 절대 금물이었다.
“요즘 좀 피곤해서요.”
“그래 보이는군.”
“네.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황실 연회는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요. 지금 몸 상태로는 공작님께 폐만 끼칠 거예요.”
보통 황실에서 주최하는 연회는 부부가 함께 참석하는 것이 예였다. 그렇기에 디아르트도 지금 내게 연회 얘기를 꺼낸 것이었고.
나는 이 점을 이용해 디아르트와 아델리아의 첫 만남을 늦출 셈이었다. 원래 두 사람은 황태자의 탄신 연회에서 만날 운명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잖아?
“글쎄.”
디아르트도 사교 모임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기에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그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황제가 직접 초대장을 보내서 거절하기 힘들어.”
“아…….”
너 정도면 거절할 수 있잖아! 지금까지 몇 번이고 그랬잖아! 내가 소설에서 한두 번 읽은 줄 알아? 아주 심심하면 거절했다는 걸 내가 다 읽었는데!
그렇게 거절만 해 대다가 오랜만에 참석한 황태자의 탄신 연회에서 아델리아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고…… 아.
이번 연회에서 아델리아와 만나게 되니까 거절할 마음이 안 생긴 거구나?
‘운명적 사랑 납셨어, 아주.’
디아르트가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따라가야 했다. 그가 혼자 가겠다고 해도 꼭 따라가서 두 사람을 직접 볼 필요가 있었다. 분위기를 살피고 앞으로 어떻게 처신할지 결정해야 하니까.
‘망할.’
저주만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진짜.
“그렇게 몸이 안 좋으면 한동안 외출은 자제하고 집에서 요양하지.”
“네, 그럴게요.”
알겠다, 알겠어. 너와 아델리아의 운명적인 첫 만남을 위해서라도 황실 연회에 꼭 참석하마!
난 불퉁하게 입술을 삐쭉였다.
“약속이 있으면 취소하는 게 좋겠군.”
“뭐, 그래야겠죠.”
난 디아르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페이란국 배표를 구입해 놓기로 결심했다. 여차하면 일단 튀어야 하니까.
“내일 별다른 일정은 없나?”
“뭐, 그렇죠.”
“그럼 나 좀 보지.”
“네, 그러세…… 네? 내일이요?”
페이란국에 짐승남이 많다는 소문을 떠올리며 무성의하게 대답하던 난 뒤늦게 되물었다. 디아르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자비스 황태자와 만나기로 했는데.’
남녀가 눈 맞기 딱 좋은 카페에 데려다주기로 했단 말이야. 내가 내일만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무슨 소리야!
“내일은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방금 별다른 일정 없다고 하지 않았나?”
“잠깐 잊고 있었어요. 중요한 약속이라 빠질 수가 없네요.”
“누구와 한 약속인데?”
“그건…… 흠, 그게 중요한가요?”
황태자와 만나기로 한 건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또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으면 답하기 곤란하니까.
아니 근데 얘는 저번부터 왜 관심을 보이는 거야? 평소엔 내가 누굴 만나든 신경도 안 썼으면서.
“소원 두 개짜리 거래보다 중요한 약속인가?”
“물론 다이아몬드 광산보단 중요하지 않지만…….”
“다이아몬드 광산?”
“말이 헛나왔네요. 흠흠, 제가 도울 일이 있는 건가요?”
“비슷해.”
그래, 나한텐 원작에 대해 알고 있다는 이점이 있어. 에드거와 레티시아를 생각하면 양심이 좀 찔리긴 하지만 지금은 디아르트를 최대한 돕자. 나중을 위해서라도 그편이 좋아. 그런 거 있잖아, 반정공신 같은 거. 반정공신은 임금도 함부로 못 건드리는 거야.
계산을 마친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약속은 취소할게요.”
“그래.”
디아르트가 볼일 끝났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의 얼굴이 묘하게 만족스러워 보였지만 생각에 잠긴 난 알아차리지 못했다.


#030
“역시 이대론 안 되겠어.”
“네?”
장미꽃잎이 가득 떠 있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내 어깨 위로 따뜻한 물을 끼얹던 릴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좀 더 확실한 게 필요해.”
이혼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불안했다. 생각해 보니 반정공신이고 나발이고 저 미친놈한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아델리아에게 실수라도 했다간 눈이 돌아 뭔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놈이니까.
‘아예 아델리아와 접점이 생길만한 걸 차단해 버릴 필요가 있어.’
“무얼 말씀이세요?”
릴리가 부드러운 스펀지로 내 팔뚝을 쓸며 물었다. 나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바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래, 이 집에서 나가는 거야!”
“네?!”
놀란 릴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손에서 떨어진 스펀지가 욕조 안으로 퐁당 빠졌다. 나는 스펀지를 건져 스스로 어깨를 닦으며 생각에 잠겼다.
보통 귀족들은 영지에 본 저를 두고 수도에 따로 타운 하우스를 두곤 했다. 그러니 디아르트 역시 수도에 머물 때 사용하는 저택이 있을 것이다.
이혼할 때까지 타운 하우스에 나가 사는 거다. 그럼 괜히 디아르트 눈에 띄어 심기에 거슬릴 일도 없을 테고 아델리아와 오며 가며 만날 일도 없겠지.
‘또 앞으로 황태자가 말했던 밤 소풍을 다니기에도 그편이 유리해.’
바람피우러 다니면서 매번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껄끄러운 일이니까.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어차피 디아르트에게 접촉을 기대하긴 글렀으니 굳이 같이 살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
구질구질했던 전생과 달리 지금은 금수저 그 자체이니 SNS나 동영상에서만 보던 화려하고 여유로운 독립의 삶도 즐길 수 있었다.
“마님…….”
평안하고 영앤리치한 독립 생활을 흐뭇하게 그려 보고 있는데 릴리가 울먹거렸다.
“아직 이혼하신 건 아니잖아요.”
릴리가 내 손을 잡았다.
“왜 벌써 저택을 나가려고 하시는 거예요.”
마음 편하게 바람피우려고. 라는 말을 저 순수한 얼굴 앞에서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잖니.”
“그럼 저도 마님 따라 나갈래요. 지금 마님 몸도 안 좋으신데 혼자 보내드릴 순 없어요.”
릴리가 사뭇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타운 하우스에도 휘턴 가의 사용인들이 있을 테니 같이 가도 괜찮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렴.”
“정말요?”
릴리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릴리가 내 손에 들려 있던 스펀지를 가져가며 물었다.
“집은 알아보신 건가요?”
“수도에 타운 하우스가 있으니까 일단 거기서 지내면서 천천히 알아봐야지.”
이왕 독립하는 거 온전히 내 집이면 더 좋겠지? 이혼한 후에는 어차피 나와야 할 테니까.
이 김에 수도에 있는 건물도 몇 채 더 사 놔야지. 디아르트와 아델리아의 만남이 빨라졌다면 땅값이 오르는 시기도 빨라졌다는 소리니까.
걱정거리를 하나 덜어 낸 난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참, 황태자에겐 밤에 만나자고 연락을 보내야겠네.’
가면무도회가 있던 밤, 반 강제로 약속을 잡은 황태자는 황족과 한 약조의 중요성에 대해 몇 번이고 주지를 시켰더랬다.
정말 그의 말대로 반역죄까지야 당연히 아니겠지만 나중에 괜히 더 귀찮아질 수 있으니까.
본래 약속은 낮이었지만 디아르트를 도와주고 만나려면 밤으로 시간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원래 가려고 했던 카페 말고 남녀가 정분 쌓기 딱 좋다는 야시장으로 가자고 해야지.
‘근데 황태자는 뭘 그렇게 나서서 도와주겠다고 난리람.’
마치 내 순조로운 일탈에 어떤 의무감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말이야. 난 끈질기게 만날 약속을 잡던 황태자를 떠올리곤 고개를 내저었다.
나한테 관심이 있다고 하기엔 황태자는 모든 여자에게 관심이 있었다.
원작에서 아델리아에겐 이러지 않았으니 그가 내게 특별히 마음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다만 그렇게 디아르트에게 집착하던 여자가 바람을 피우러 다닌다니 흥미가 생긴 정도겠지.
뭐 어쨌든 ‘인간 만나쥬오’를 자청하겠다니 내게 나쁠 건 없었다.
‘정보만 쏙쏙 골라 빼먹으면 되지, 뭐.’
난 어깨를 으쓱하며 황태자에게 무어라 편지를 보낼지 고민했다.
* * *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며칠 후 디아르트의 집무실을 찾은 난 의욕적으로 물었다. 무엇이든 말만 해, 내가 다 도와줄게. 대신 훗날 나의 이 헌신을 잊으면 안 된다?
내가 주먹까지 불끈 쥐며 나서자 서류를 보고 있던 디아르트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옆에 있던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기분 탓인진 몰라도 아무 책이나 준 것 같은데. 표지도 보지 않고 대충 집어 들지 않았니, 방금?’
“요약해 주면 좋겠군. 보다시피 바빠서 읽을 시간이 없거든.”
난 사우 일족에 관한 자료인가, 생각하며 그가 내미는 책을 받아들었다.
<불확실한 시대, 정치와 경제의 흐름을 읽는 생태계 패러다임>
“…….”
일단 제목부터 머리에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데. 이걸 나보고 읽으라고?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네요.”
난 책상 위로 책을 내려놓았다. 흘깃 책에 시선을 던진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독서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네, 좋아하는데 제 취향이 아니어서요.”
“취향이 뭔데?”
“저야 싯구 로설을 제일…… 아니, 아니, 제 취향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게 제라석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사우 일족을 찾아내지 못하면 제라석은 무용지물이야. 불확실한데 투자하고 있으니 미리 대비해 두는 게 좋겠지.”
불확실하긴 무슨. 확실한 투자야! 넌 분명 마나가 담긴 제라석으로 적국도 토벌하고 황족도 토벌하고 너한테 반기를 든 자들도 토벌하고, 아무튼 싹 다 토벌해서 혼자 짱 먹는다고!
-라고 외치고 싶다.
“그럼 저보다는 이 분야에 박식한 이에게 시키시는 게 어떨까요? 이쪽으로 문외한인 저보다는 전문가가 더 도움이 될 것 같네요. 공작님이라면 이 책의 저자도 부를 수 있……”
“그러고 보니 제라석에 대한 정보를 책에서 읽었다고 했지. 취향이라던 싯구 로설에서 찾은 건가?”
“……네?”
“그 책은 어디 있지? 나도 한번 읽어 보는 게 좋겠군.”
싯구 로설이라는 건 처음 들어보는데, 라고 중얼거린 디아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책상을 짚었다. 식겁한 난 얼른 책상에 놓여 있던 책을 도로 집어 들며 간절히 외쳤다.
“저 이거 읽을게요! 사실 제가 취향이 아주 폭넓어서 이런 책도 좋아하거든요. 제대로 읽고 요점만 정확하게 요약해 놓을게요!”
“그렇게 하지.”
디아르트가 반쯤 일으켰던 몸을 도로 돌렸다.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내 은밀한 취향을 들키고 싶지도 않거니와 애초에 제라석에 대해 적혀 있는 로설도 있을 리 없으니 디아르트가 꼬치꼬치 캐물으면 둘러대는데 진땀깨나 뺐을 터였다.
“그럼 전 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여기서 읽도록 해.”
왜 굳이?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디아르트가 서류를 들어 보였다.
“제라석 광산 매입 서류야. 혹시 물어볼 게 생길지 모르니 가까이 있는 게 좋겠군.”
“…….”
다른 사람한테 떠넘길 생각이었는데 텄네, 텄어.
힘없이 뒤돌아 집무실 가운데에 놓인 소파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디아르트가 물었다.
“몸은 괜찮나?”
“네에…….”
내 몸을 생각했으면 이딴 골치 아픈 숙제는 떠넘기지 말았어야지. 이거 때문에 몸 상하겠다!
소파에 앉은 난 쓸데없이 두꺼운 책을 원망스럽게 내려다보았다.
‘망할. 대학 다닐 때도 이런 책은 안 읽었는데.’
한숨을 푹 내쉬며 표지를 펼치던 난 오늘 디아르트를 찾은 또 다른 목적을 상기했다.
“참, 공작님.”
“말해.”
벌써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서류를 보는 데 집중하고 있던 디아르트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수도에 있는 타운 하우스를 사용해도 될까요?”
“무슨 일로?”
“저택에서 나갈까 해요.”
바쁘게 움직이던 디아르트의 펜대가 멈칫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이혼을 앞두고 있으니 따로 산다고 해서 흠이 되진 않을 거예요. 어차피 이혼하면 나가야 하니 수도에 머물면서 앞으로 지낼 곳을 천천히 알아보려고요.”
너도 그편이 좋지? 거슬리는 얼굴 보지 않아도 되고 저녁마다 귀찮게 얼굴 맞대고 식사할 필요도 없고.
나는 디아르트가 당연히 수락할 거라고 생각하며 싱긋 웃었다.


#031
디아르트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지나치게 조용하다 싶더니 구시렁거리며 책을 읽던 로에니가 잠들어 있었다.
디아르트는 소파에 모로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얼굴에서 그녀가 들고 있는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꽤 시간이 흘렀는데 책은 몇 페이지 넘어가 있지 않았다.
사실 로에니가 저 책을 다 읽든 말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 읽은 책이었기에.
그런데 별 시답잖은 핑계를 대면서 그녀를 붙잡아 둔 건 황태자와 만나는 게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그간 관심도 없던 여자가 밖에서 누굴 만나든 무슨 상관인가 싶으면서도 며칠째 그는 문득문득 그 생각이 들 때마다 이유 없이 불쾌해졌다.
디아르트는 들고 있던 펜대를 내려놓고 의자에 깊게 등을 묻었다. 크게 기울어진 의자만큼 그의 시야로 화려한 문양의 천장이 들어왔다.
‘언제부터지?’
* * *
자신이 제라석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를 찾아와 말을 꺼내는 표정은 그간 디아르트가 알았던 로에니 휘턴답지 않게 당차고 자신만만했다.
그녀는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제라석의 정확한 효용과 가치를 꿰뚫고 있었다. 더불어 그가 미더스 공국에서 루프탄을 수출하도록 손을 쓴 사실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자신이 아는 로에니 휘턴이 이런 여자였던가?
난 네가 원하는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당당한 눈빛에는 늘 그에게 애정을 갈구하던 집착과 열망이라고는 한 톨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다른 여자.’
그래, 마치 다른 여자가 된 것 같았다.
아무리 관심이 없었다고 하나 어린 시절부터 질리게 보아 온 얼굴이었다. 순간순간 짓는 표정은 물론 말투 역시 그가 알고 있던 로에니와 달랐다.
어느 밤 제 방에 몰래 들어왔던 날 이후로 무언가 변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요즘의 그녀는 확실히 그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이유가 뭘까 생각하며 부쩍 낯설게 느껴지는 얼굴을 주시했다. 그때 로에니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벌떡 일어섰다. 얼마나 급한 일이기에 찻잔까지 떨어트리고 사색이 되어 뛰어나가나 싶었더니 앓아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늘 그의 관심을 갈구하는 여자였기에 꾀병을 부린 적도 많았다. 하여 이번에도 수작을 부리는 걸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하녀의 절박한 얼굴이나 하루에도 몇 번씩 의사가 왔다 갔다 한다는 고든의 염려를 보건대 정말 사경을 헤매는 모양이었다.
로에니 휘턴이 아프든 말든 그와는 상관없었다.
그에게는 너무나 귀찮고 질리는 존재였으니까.
딱. 딱. 딱.
펜으로 책상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던 디아르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서 영지 내 치안 문제에 대해 보고하던 램버트가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왜 일어나십니까?”
“잠깐 쉬지.”
“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지금 전하의 입에서 쉬자는 말씀이 나온 거 맞습니까? 이거 내일 해가 두 개 뜨는 건 아닌지 확인해야겠는걸요.”
능글거리던 램버트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안 됩니다. 마저 듣고 쉬십시오. 저 아까 반차 낸 거 잊으셨습니까? 빨리 보고하고 퇴근해야 합니다.”
디아르트는 램버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집무실을 가로질렀다. 그를 부르짖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문을 열자 마침 차를 가지고 들어오려던 고든과 마주쳤다.
“어디 가십니까, 주인님?”
고든의 물음에 디아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제 주인의 발걸음이 향하는 방향으로 보아 동쪽 서재에 가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동쪽 서재를 한참 지나쳐 로에니의 방문 앞에서 멈춰 섰을 때는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제 주인의 냉정한 성격과 두 분의 좋지 못한 금실을 오랫동안 지켜봤기에 그가 로에니의 병환에 대해 신경 쓸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게다가 애초에 로에니의 방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뜻밖이었다. 결혼한 지 몇 해가 흘렀지만 디아르트가 로에니의 방을 찾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터다.
“고할까요?”
숙련된 집사답게 놀란 기색을 감춘 고든이 물었다. 잠시 가만히 있던 디아르트가 고개를 젓더니 문고리를 잡았다. 고든은 제 주인의 의중을 알아채고는 조용히 물러섰다.
디아르트가 천천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 약초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정말 아프긴 한 모양이군.’
그는 무심히 생각하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노크도 기척도 없이 방에 들어섰건만 누구 하나 나오지 않는다, 했더니 로에니가 늘 데리고 다니는 하녀 아이가 수건을 빨다 지쳤는지 바닥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디아르트는 그를 지나쳐 성큼성큼 침대로 향했다. 로에니는 잠이 든 듯 눈을 꾹 감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침대 시트마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로에니가 미간을 와락 구긴 채 잔뜩 쉰 목소리로 끙끙 앓았다.
“하……. 으으…….”
디아르트는 연신 신음을 내뱉는 로에니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고든이 의사들조차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며 걱정했었다.
확실히 로에니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원래도 하얀 피부가 몹시도 창백했고 동시에 열에 들떠 새빨갰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듯 눈 끝에 있던 눈물이 연신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디아르트는 이대로 로에니가 죽는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나 자신을 성가시게 했던 여자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어차피 얼마 후면 이혼할 사이긴 하지만 세상에서 아주 없어지는 것과는 달랐다. 앞으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날 일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소리였으니까.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시원하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뜻밖에도 그는 로에니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이대로 죽으면 제라석에 관한 정보를 얻지 못하기 때문인가?’
아니, 자신이라면 로에니가 아니어도 언젠간 그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에 관해서 가까이 접근하던 중이었다. 물론 로에니에게 정보를 얻는다면 수고야 덜 하겠지만 어차피 시간문제였다.
그럼 왜?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은 달갑지 않았다. 디아르트가 로에니에게 시선을 돌리며 막 몸을 돌리려던 차였다.
“왜…….”
말라비틀어진 목소리가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디아르트가 다시금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하필, 나… 억… 해. 빌어, 먹… 하아 하아, 휘턴…….”
들릴 듯 말 듯 말을 힘겹게 내뱉던 로에니가 갑자기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통증에 반사적으로 나오는 눈물이 아니라 몹시도 억울한 듯 서러운 울음이었다.
“겨우, 흑, 다시… 이대로 죽을…… 없어. 흐윽, 이번… 금수저…….”
로에니는 무언가와 싸우는 것도 같고 무언가를 원망하는 것도 같았다.
“살…… 싶어. 살 거……야. 하윽, 살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절실했다. 매번 그에게 간절하게 매달리던 여자였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이불자락도 제대로 움켜쥐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리는 손에 눈에 걸렸다.
디아르트는 무심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손등에 닿자 로에니가 마치 차가운 얼음을 만진 것처럼 크게 움찔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건지 그의 손을 와락 잡아챘다. 디아르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하아…….”
방금까지만 해도 잔뜩 괴롭게 찡그리고 있던 로에니의 미간이 풀어졌다. 언제 끙끙 앓았냐는 듯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었고, 불규칙하게 내뱉던 뜨거운 숨소리도 일정해졌다.
바삭하니 허옇게 말라붙은 입술에도 핏기가 돌아왔다.
“기분 좋아…….”
방금까지만 해도 듣기 싫게 갈라지던 목소리 역시 이슬을 머금은 듯 촉촉해졌다. 디아르트는 희미하게 미소까지 띠고 있는 로에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땀에 젖어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얼굴이나 앓았던 흔적이 역력한 모습만 뺀다면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는 듯 편안해 보였다.
디아르트는 아직까지 잡혀 있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늘 이 손이 제 몸에 닿는 게 끔찍이도 싫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나쁘지 않았다.
그때 작은 손이 그의 손가락을 얽으며 몇 번이고 고쳐 잡았다. 혹시 깨어난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너무 오래 있었군.’
디아르트가 퍼뜩 손을 빼내려 하자 로에니가 그를 붙잡았다. 방금까지 앓던 사람답지 않게 퍽 힘이 셌고 필사적이었다.
디아르트는 잠시 그 손을 바라보다가 힘주어 빼내었다. 하릴없이 떨어져 나간 손이 침대 위로 힘없이 툭 떨어졌다.
곧바로 그를 찾듯 손으로 허공을 젓다 뭐가 억울한지 인상을 찌푸리던 로에니는 곧 쌕쌕 고른 숨을 내쉬었다.
좀 전과 달리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로에니에게 잡혔던 손을 쥐었다 펴 보던 디아르트가 등을 돌렸다.


#032
다음 날 아침 집무실을 찾아온 로에니는 전날까지만 해도 의사들이 손 쓸 수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말끔한 모습이었다.
조금 수척해지긴 했지만 오히려 며칠 전보다 훨씬 좋아 보이기도 했다.
무언가 수틀린 게 있는 듯 그를 바라보는 흉흉한 표정엔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그때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러 왔답니다.”
로에니가 삐죽 튀어나온 입술로 퉁명스레 말을 꺼냈다. 그녀는 몰래 노려본답시고 눈을 부라렸지만 오랜 전장 생활로 상대의 기척을 읽는 데 능숙한 디아르트가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
디아르트는 모른 척하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이내 하녀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디아르트는 찻잔을 들어 홍차를 마시는 로에니를 지켜보았다.
당시엔 몰랐는데 찻잔을 떨어트린 이유가 몸 상태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시선을 느낀 로에니가 눈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곧바로 찻잔을 내려놓고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거래의 기본은 기브 앤 테이크잖아요?”
싱긋 웃는 로에니의 얼굴은 자신만만했다. 디아르트가 제가 건 딜을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집착했던 것과 별개로 늘 그의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있던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제가 원하는 건 공작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시는 거예요.”
차라리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던가 보석들을 원했다면 기꺼이 내주겠는데 뜬금없이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니 무슨 속셈인가 싶었다.
게다가 로에니가 내뱉은 첫 번째 소원은 몹시 의외였다.
“첫 번째는 이혼 절차를 서둘러 주셨으면 좋겠어요.”
소원권을 빌미로 늘 그랬듯 제게 수작을 부리든가 혹은 이혼을 철회해 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로에니가 원하는 건 도리어 그 반대였다.
제 마음을 떠보기 위한 계교라던가 다른 꿍꿍이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둘 사이의 이혼을 제일 바라는 사람은 자신보다 그녀 같았다.
디아르트는 어쩐지 무척 후련해 보이는 로에니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확실히 로에니 휘턴은 더 이상 그에게 마음이 없었다.
목적이 분명한 사교 모임을 다니고, 숱한 염문으로 유명한 황태자와 만날 약속을 잡는 것으로 보아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으니 그도 신경을 끄면 될 터인데 그게 되지 않았다. 갑자기 변한 모습에 호기심이 생긴 것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그동안 쳐다보지도 않던 여자를 눈으로 좇고 있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어제는 정원에서 하녀와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웃는 로에니를 한동안 지켜보기도 했다. 평소엔 듣기 싫었던 웃음소리가 퍽 괜찮게 들린다고 생각하는 순간 디아르트는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근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건 디아르트 본인인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왜 로에니를 신경 쓰는 건지 이해할 수 없으니까.
“쳐다보지도 않던 여자가 갑자기 신경 쓰인다고? 그건 이거지.”
디아르트는 문득 상념을 파고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훈련 후 휴식 시간을 틈타 기사들을 모아 놓은 램버트가 연애 강좌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나만 졸졸 쫓아다니는 게 귀찮기도 하고 짜증 났는데, 이 여자가 막상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한 거야. 뭔가 허전하고 막 그래. 어라? 내가 왜 이러지, 싶어.”
“네, 지금 딱 그런 것 같은…… 아니, 그렇습니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램버트를 응시하는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열중하고 있던 제토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저었다가 다시 끄덕였다.
“내가 얠 좋아하나? 근데 그건 또 아냐. 막상 사귀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거든. 이걸 전문 용어로 뭐라고 하는 줄 아냐?”
“뭡니까?”
기사들이 엉덩이를 더 바짝 당겨 앉았다. 뜸을 들이던 램버트가 제토 옆에 쭈그리고 앉아 그의 어깨에 팔을 척 걸쳤다.
“어.장.관.리.”
“네? 어장 관리요?”
“마음을 받아 주진 않겠지만 관심이 떨어지는 것도 기분 나쁘니 감질나게 먹이 하나씩 툭툭 던져 주면서 다른 데 눈 못 돌리게 하는 거지. 내가 갖는 건 싫고 남 주긴 아깝다는 거야.”
“뭐 그런…….”
“한마디로 무지하게 나쁜 년이니까 그만 마음 접어라, 제토 에이크.”
“넼? 무, 무슨…… 제 얘기가 아니라 친구 얘기라니까요?”
화들짝 놀란 제토가 얼른 반박했다.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터라 신빙성이 떨어졌다. 램버트가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얼른 맘 접고 다른 좋은 여자 알아 봐, 이 송사리 같은 자식아.”
“아, 아니. 진짜 제 얘기가…….”
“그 여자가 조금 신경 써 준다고 해서 넘어가지 마라. 그 어장에 너만 있는 건 아닐 테니까.”
제토의 머리를 헝클이고 일어선 램버트가 말을 이었다.
“나중에라도 네 마음 받아 줄 일은 없을 거다. 네가 다시 자기한테 집중하는 것 같으면 다른 남자한테 눈 돌릴 게 뻔해.”
“아니, 진짜 아닌데…….”
마지막까지 소심하게 반박하는 제토의 곁으로 몰려든 기사들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측은한 얼굴로 소개팅을 시켜 주겠다며 위로하는 동료애에 제토가 눈물을 훔치는 사이 디아르트에게 다가온 램버트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근데 또 가끔은 전세가 역전되는 경우도 있죠.”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라는 진리를 늘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니까요? 의미심장하게 말한 램버트가 싱긋 웃었다. 안 그래도 심기가 복잡했던 디아르트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램버트의 능글거리는 얼굴에 불쾌해졌다.
디아르트에게 허벅지를 걷어차인 램버트는 윽, 신음을 삼키면서도 뭐가 그리 웃긴지 한참을 낄낄거렸다.
* * *
내가 램버트가 말했던 그 어장 관리라는 걸 하는 건가?
디아르트는 쌕쌕 소리를 내며 곤히 잠든 로에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그의 말과 비슷한 점이 있긴 했지만 자신은 한 번도 로에니의 관심을 바랐던 적이 없었다. 도리어 떨어져 나가길 바랐지.
더욱이 로에니 외에 다른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어장이라고 하기엔 모순이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디아르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소파 앞에서 멈춘 그는 로에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얼굴이 상했군.’
로에니에 대한 흐릿한 기억 속에서 가장 오래된 것을 끄집어냈다. 이내 그의 방으로 쳐들어와 제 가슴을 쓰다듬고 있는 주제에 도리에 제가 더 당황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때만 해도 꽤 살이 있지 않았나.’
퍽 통통했던 것 같은 볼이 눈에 띄게 수척했다.
‘그러고 보니 좀 마른 것 같기도 하군.’
아닌가. 사실 자세히 본 적이 없어서 원래의 로에니가 어땠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다만 늘 관리를 받는 귀족답지 않게 푸석해진 피부며 윤기를 잃은 머리카락, 내려앉은 눈 밑을 보건대 몸이 안 좋은 건 확실했다.
디아르트는 어제 피가 흥건한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있던 로에니를 떠올렸다.
‘연회에 가기 싫어 핑계를 대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황후의 조카딸을 소개하는 자리기에 적국에 정보를 넘기고 있는 내통자도 참석할 확률이 높아 받아들인 초대였다.
아픈 사람을 데려갈 수도 없고 혼자 참석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하나 고민하던 때였다.
‘저택을 나갈까 해요.’
문득 아까 로에니가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꺼낸 말이 떠올랐다.
잠이 든 로에니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디아르트가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책을 빼내려고 허리를 숙였다. 그의 손이 막 책을 집는데 꾹 감겨 있던 로에니의 눈이 번쩍 뜨였다.
디아르트와 로에니의 두 눈이 가까이서 마주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으아악!!”
로에니는 마치 괴물이라도 본 듯 소스라치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어깨를 밀쳐 냈다. 어정쩡한 자세로 무방비하게 서 있던 디아르트는 불식간에 몸이 밀려 뒤로 휘청 넘어갔다. 그대로 소파 앞 테이블에 반쯤 누운 자세로 넘어져 손으로 몸을 지탱한 디아르트가 벌떡 일어선 로에니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놀란 듯 숨을 몰아쉬던 로에니가 퍼뜩 상황 파악을 했는지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죄송해요, 공작님! 너무 놀라서.”
디아르트가 말없이 들고 있던 책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곤한 모양인데 책은 나중에 읽고 그만 돌아가지.”
제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는 로에니를 뒤로하고 디아르트는 집무실을 가로질러 책상으로 향했다.
“제가 고의로 밀친 건 아니고요. 눈 떴는데 공작님이 바로 앞에 계시니까 놀라서 그만 순간적으로 그런 거예요. 마음 푸세요.”
“알았으니 나가 봐.”
“마음에 담아두고 그러지 않으시는 거죠?”
뭐가 그리 걱정되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던 로에니가 집무실을 나가자 디아르트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답지 않은 짓을 하다가 꼴불견인 모습을 보였다.
디아르트는 자신을 보고 괴물이라도 본 듯 자지러지던 로에니를 상기하곤 기분이 나빠졌다. 언젠 제가 좋다고 그렇게 매달리더니 이제는 마음이 떴단 말이지?
“태도 변화 한번 칼 같군.”


#033
집무실에서 뛰쳐나오자마자 방까지 단숨에 달려간 난 펄떡이는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왜 사람이 자는데 그렇게 가까이서 빤히 쳐다보고 있냐고!’
안 그래도 저주로 인한 발작 때문에 디아르트에게 물불 안 가리고 들러붙었다가 칼 맞는 꿈을 꾸고 있었던 터라 정말 식겁했다.
꿈에서 살벌하게 노려보던 디아르트를 떠올린 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예지몽일지도 몰라.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어. 디아르트에겐 절대 손가락 하나 대지 말아야지.’
다짐하던 난 집무실에서 나오기 전 본 디아르트를 떠올렸다.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설마 고것 좀 밀쳤다고 마음에 담아두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까지 좀팽이는 아닐 거야. 테이블 위로 넘어진 게 좀 꼴사납긴 했어도 얼굴이 잘생겨서 그마저도 모델 포즈 같았는걸.
난 설마 데드 플래그 하나 꽂은 건 아닌지 걱정하며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쓸어내렸다.
“쓸데없이 잘생겨선.”
나는 은실처럼 가늘고 긴 속눈썹 사이로 황금을 박아 놓은 듯 명도 높은 금안을 떠올렸다. 어울리지 않게 예쁜 눈동자였다.
하마터면 홀릴 뻔했잖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과연 남주구나.
“참, 몇 시지?”
그 더럽게 지루한 책을 한장 한장 고역스럽게 읽던 것까진 기억나는데 언제 잠이 들었던 건지. 고개를 돌려보니 창밖은 벌써 어두웠다.
여름밤이 이 정도로 깜깜하다면 꽤 늦은 시간이라는 말이었다. 서둘러 시계를 확인한 난 또 한 번 나오려는 비명을 삼켰다.
“미치겠네.”
황태자와 약속한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지금 서둘러 달려간다고 해도 황태자가 이미 잔뜩 열받아 떠나고도 남았을 만큼.
난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황태자와의 약속을 당일 변경한 것도 모자라 바람까지 맞혔다. 이 정도면 대역죄는 아니어도 황족 능멸죄는 응당 받을 수 있을 것 같네. 이미 지하 감옥에 내 자리 하나 예약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어. 망할.
“연회에서 그대로 끌려가는 거 아냐?”
황태자가 우락부락한 표정으로 날 가리키며 잡으라고 소리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연회장에서 질질 끌려 나가는 내 모습도. 디아르트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쪽도 원작에서 만만치 않은 또라이였기에 무슨 보복을 할지 몰랐다.
“아, 몰라, 몰라. 이제 와 생각해 봤자 소용없어. 잠이나 자자.”
어떻게든 되겠지. 뭐.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저주며 갑자기 당겨진 아델리아와 디아르트의 첫 만남, 그리고 방금 집무실에서 있었던 일까지 머릿속이 과부하에 걸렸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난 자포자기라도 한 듯 이불을 뒤집어썼다.
* * *
……대비 좀 해 놓을걸.
하다못해 자비스 황태자에게 댈 핑계라도 생각해 놨어야 했다.
막상 황실 연회가 열리는 날이 되니 몹시도 불안해졌다. 황태자가 얼마나 이를 갈며 벼르고 있을까.
이 소설 속에서 손꼽히게 중요한 이벤트가 있는 오늘, 그로 인해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
아니지, 그러고 보니 황태자에게도 아델리아를 처음 만나는 자리구나. 그 역시 본인 스스로 자각만 못 할 뿐 아델리아에게 첫눈에 반하는 설정이었고, 그 루트대로라면 내게 신경 쓸 겨를이 없을지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큰 짐을 덜은 듯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생각해 보니 내 사정은 둘째 치고 소설로만 읽었던 디아르트와 아델리아, 그리고 자비스 황태자의 운명적인 첫 만남을 눈앞에서 직접 구경하는 거잖아?’
이건 원작의 팬으로서 더할 수 없이 흥분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내 최애 에드거도 분명 참석할 테고.
갑자기 황실 연회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황태자는…… 일단 생각하지 말자.
“마님.”
밀토가 마차 앞에 선 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연무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빨개진 얼굴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지만.
겨우 상체 좀 보인 거 가지고 순진하긴. 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맞닿은 손에서 희미한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비록 낮은 레벨의 포션을 마신 듯 감질났지만 HP가 바닥난 나는 이마저도 몹시 반가웠다. 도무지 손을 놓을 수 없어 미적거리는데.
“안 타나?”
서늘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언제 온 건지 밀토의 뒤에 선 디아르트가 삐뚜름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맞잡은 나와 밀토의 손에 닿았다가 내게로 돌아왔다.
못마땅하게 까딱이는 눈썹이 당장 안 타고 뭐 하냐고 재촉하고 있었다.
불현듯 어젯밤 가까이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주 찰나였지만 빨려 들어갈 것 같던 깊은 눈동……, 아니, 갑자기 그런 게 왜 떠올라?
나는 서둘러 머릿속을 지우며 그를 외면하고 마차에 올랐다. 밀토의 손과 떨어지자마자 감질나게나마 들어오던 기운 역시 뚝 끊겼다.
‘아슬아슬한데 버틸 수 있으려나.’
지금의 난 게임으로 따지자면 몬스터한테 한 대 얻어맞는 순간 게임 오버인데 인벤토리에 포션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믿을 건 연회장에서 남자와 접촉하는 것뿐인데, 다행히 기사들도 두어 명 홀까지 대동하니 여차하면 그들과 춤이라도 추면 되겠지.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난 슬쩍 디아르트를 쳐다보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마차 안으로 훌쩍 올라탄 디아르트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아니지, 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을. 전에 했던 다짐 잊었어? 죽고 싶은 거 아니면 쟨 건드리지 말자.’
괜찮을 거야. 난 낙천적으로 생각하며 디아르트와 반대쪽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는 어느새 저택을 나서고 있었다.
곧 여름 축제가 열리기 때문인지 거리의 분위기가 꽤 활기찼다. 창밖으로 시끌시끌한 시장을 지켜보던 난 그 너머로 유독 침침해 보이는 골목에 시선을 주었다.
나는 곧 그곳이 며칠 전 내가 직접 데려다주었던 레미다의 집이 있는 장소라는 걸 기억해 냈다. 나무 기둥 뒤에 숨어 나를 훔쳐보던 꾀죄죄한 옷차림의 아이를 떠올린 난 입을 열었다.
“공작님, 뮤트로이 풀이라고 아세요?”
고개를 돌리진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영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풀인데 수도에서는 꽤 값이 나간대요. 옷을 지을 때 옷감을 단단하게 해 주는 역할이라 방직에 꼭 필요한 재료라나봐요.”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디아르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내 쪽으로 몸을 틀어 앉았다.
하기야 아무리 뮤트로이 풀이 수도에서 값을 쳐준다고 해도 주로 평민이나 형편이 넉넉지 않은 하위 귀족들이 사용하는 재료였다.
눈 돌아가게 비싼 린들 천이라던가 실크로 만든 드레스를 한 번 입고 버리는 것이 일상인 사치스러운 귀족들에겐 뮤트로이 따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로에니 역시 그 드레스를 한 번 입고 버리는 일상을 살던 귀족이었으니 디아르트가 저런 눈을 보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래서 영지민들 중에 뮤트로이 풀을 수도에 가져가서 파는 이들이 꽤 되는 모양이에요. 근데 수도까지는 무척 멀잖아요? 우리야 포털을 이용하지만요.”
마차는 막 도시를 벗어나 숲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거리도 거리지만 가는 길도 험한 터라 도중에 안 좋은 일을 많이 겪는대요. 그래서 제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요.”
디아르트는 웬일로 내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난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서 잠시 입을 다물고 뜸을 좀 들였다.
“기차를 들이는 게 어떨까 싶어요.”
“기차?”
디아르트가 미간을 좁혔다.
“네. 기차요.”
나는 싱긋 웃었다.
이 세계는 평민들에겐 여러모로 불공평했다. 귀족들은 영지가 멀어도 포탈을 이용하면 하루 안에 수도에 도착하는 특혜를 누렸고, 그것이 불가하다면 마차를 몰면 되었다.
하지만 비싼 마차는 꿈도 꿀 수 없는 평민들은 싸구려 짐마차를 빌려 여러 명이 함께 타거나, 그나마도 여의치 않으면 걷는 방법밖에 없었다.
수도나 수도 근교에 사는 이들은 기차라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트령을 포함해 대부분의 영지까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지금 그 기차를 연결하자는 것이었다.
“기차라.”
잠시 눈을 돌리고 생각하던 디아르트가 내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선로를 내려면 황제의 승인이 필요해.”
“받으시면 되잖아요.”
“쉽게도 말하는군.”
“하실 수 있어요, 공작님은.”
제국에서 네가 못하는 게 뭐가 있어. 황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휘턴 공작이.
기차를 수도 인근에만 연결시켜 놓는 특혜를 준 이유야 뻔했다. 영지민들이 수도를 갈망하게 되는 만큼, 수도민들도 그에 자부심을 갖고 황실의 편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특권을 쉽게 내놓으려고 하지 않겠지만 넌 할 수 있어, 유 캔 두잇.
‘그리고 어차피 곧 네 나라가 될 텐데 막 나가도 돼.’
이걸 빌미로 황제와 척을 지게 되든 말든 소설은 주인공인 디아르트가 반란을 일으켜 황위에 오르는 결말을 맺게 되어 있으니까.
아델리아와의 첫 만남이 앞당겨졌으니 그 결말 또한 앞당겨지겠지.
‘그러니 황제가 돼서 수도로 올라가기 전에 영지민들을 위해 좋은 일 좀 하렴.’


#034
“비용이 상당할 테니 황제가 허락할 리 없어.”
“돈 많으시잖아요.”
왜 이래, 쪼잔하게. 다이아몬드 광산은 둘째 치고 무역으로 돈을 쓸어 모으고 있다는 거 내가 다 알고 있거든?
“당연히 공작님께서 부담하셔야죠.”
기차선로 설립 비용이 막대하다고 해도 제국의 지하 경제까지 장악하고 있는 휘턴 가에겐 사막에서 모래 한 수저 퍼내는 정도일 것이다.
“공작님이 관할하는 영지잖아요. 세금은 꼬박꼬박 걷어 가면서 그 정도는 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돈도 많으면서?”
나도 모르게 소시민이었던 전생에 빙의해 툭툭거린 난 디아르트의 눈썹이 치솟은 걸 보고 서둘러 수습했다.
“기차가 연결되면 영지민들이 수입을 얻을 수 있는 활로가 넓어질 테니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영지가 번영할 수 있는 일이에요. 관광하러 오는 사람이 늘어날 거고, 화물 운송이 가능해 교역도 활발해지겠죠. 그리고 기차를 운영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공작님께 꽤 이득이 되지 않나요?”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테니까요.
거기까지 들은 디아르트가 창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삐뚜름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못마땅한 것처럼 보여도 그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보다 더 내 말에 진심으로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하기야 디아르트가 좀 재수도 없고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독단적인 성격에 전쟁광, 집착 쩌는 사이코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유능한 남자였다.
그의 하루 일과 대부분이 연무장 외에는 집무실뿐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수도와 연결한 후에는 천천히 다른 지역으로 선로를 넓혀 가는 것이 좋겠네요.”
“그렇게 되면 뮤트로이의 희소가치가 줄어들 테니 값이 떨어지는 것 아닌가.”
“그래서 말인데 뮤트로이 풀의 재배와 판매권을 제한하는 게 어떨까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사업가인 그라면 분명 이런 얘기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소득이 적은 빈민들에게 우선권을 주세요.”
“나쁘지 않군.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한 거지?”
“그야 원래 살던 세상에선…….”
“원래 살던 세상?”
하마터면 입방정 떨 뻔했다. 나는 입술을 후려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싱긋 웃었다.
“책에서 읽었답니다.”
“방금 원래 살던 세상이라고 하지 않았나?”
“책 제목이 <원래 살던 세상에선>이랍니다.”
디아르트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훑었다. 그의 수상하다는 눈빛이 내가 급하게 말을 바꿨기 때문인지 아니면 책을 읽었다는 대목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을 슬그머니 피하며 말을 이었다.
“몰랐는데 빈민을 위한 복지가 생각보다 열악하더라고요.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학교를 무상으로 다닐 수 있도록 후원해 준다든가, 배우자를 잃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경제적인 지원을 해 준다든가 하는 것들이요.”
잔뜩 부푼 배로 뮤트로이를 들고 힘겹게 숲길을 걷던 레미다를 떠올렸다. 그녀가 조금이나마 안정적인 환경에서 힘들지 않게 아이를 키웠으면 싶었다.
‘그러고 보니 곧 출산하겠네.’
난 그녀를 닮아 씩씩한 아이를 상상해 보느라 디아르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황궁에 도착했습니다.”
뭐? 벌써?
순식간에 개구지게 웃는 아이가 사라지고 연회장에서 질질 끌려 나가는 내 모습이 머릿속을 채웠다.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할 때가 아니었는데! 내 코가 석 자라고, 내 코가!
“내리지.”
속으로 발악하고 있던 나는 내 앞에 불쑥 내민 손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
‘내가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거 아니지? 이거 디아르트 손 맞는 거지? 밀토 아니지?’
내가 얼떨떨한 얼굴로 손의 주인을 몇 번이고 확인하자 디아르트가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안 잡고 뭐 하냐는 표정이었다.
“안 내리나?”
‘아니, 이놈이 웬일이야?’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내게 손을 허락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간 철옹성과도 같았던 그의 철벽을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는 형태로 손 한번 잡아 보겠다고 얼마나 애썼던가.
나는 공들인 케이크에 처음으로 포크를 대는 듯 조심스레 그의 손바닥 위로 손을 얹었다. 비록 장갑에 가로막혀 기운이 흘러들어오는 일은 없었지만 그의 온기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손이 따뜻한 걸 보니 너도 사람이긴 했구나.
감명 깊은 나머지 결국 눈가에 맺혀 버린 눈물을 몰래 훔치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를 따랐다.
이런 일도 다 있고…… 황태자고 나발이고 오늘 하루 왠지 예감이 좋은걸?
“나라를 받치는 용맹한 수호자 디아르트 휘턴 공작과 그의 아름다운 아내 로에니 휘턴 공작 부인 드십니다!”
이렇게 오글거릴 수가.
레티시아를 만났을 때 나 역시 입에 담은 인사법이긴 하지만 직접 듣는 건 고역이었다. 연회장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니 더욱 민망했다.
나도 이럴진대 이런 낯부끄러운 호칭으로 불린 디아르트의 표정은 더욱 가관이겠지?
나는 그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놀랍게도 디아르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적어도 인상은 찌푸릴 줄 알았는데, 너도 귀족이라 이거니?
아니면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라 다들 항마력이 높은 건가?
“휘턴 공작!”
저쪽에서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남자가 반색하며 다가왔다. 자비스 황태자나 레티시아 황녀와 같이 꿀처럼 반짝이는 금발에 벽안을 한 그는 누가 봐도 황제였다.
“제국의 하나뿐인 태양을 뵙습니다.”
입에 발린 말은 조금도 못 할 줄 알았는데 무척이나 잘하는 디아르트에게 놀라며 나도 따라 예를 갖췄다.
“이리 딱딱하게 예를 차릴 필요 있나, 우리 사이에.”
아무 사이 아니다, 라고 디아르트의 눈빛이 말하고 있건만 둔한 건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지 황제는 허허허 웃었다. 난 혼자만 친하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한 황제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이런 곳에선 얼마 만에 보는지 모르겠군. 자주 얼굴 좀 비춰 주게. 아, 공작 부인도 오랜만이오.”
황제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눈썹이 축 처지도록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 있는 게 꼭…….
‘우리 옆집 살던 정육점 사장님이랑 닮았는데?’
나는 황제의 푸근하고 친근한 외모에서 어떻게 레티시아나 자비스 같은 미모가 나온 건지 심히 궁금해졌다. 황후가 절세미인인가?
예의도 잊고 뚫어지게 쳐다보자 황제가 의아한 눈을 끔뻑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앗, 아닙니다, 폐하. 송구합니다.”
“흐음……. 그간 격조한 탓인가. 부인이 좀 달라 보이는 것 같은데…….”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가 별안간 총을 쏘듯 검지로 나를 가리키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더 아름다워지셨구려!”
“…….”
자비스가 친아들이 맞구나.
“……과찬이십니다.”
난 부전자전,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말을 떠올리며 말이 나온 김에 자비스 황태자가 연회장 안에 있는지 빠르게 스캔했다.
그렇게 큰 소리로 입장을 알렸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 자리에 없거나 혹은 내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자였던 모양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난 양해를 구한 후 황제와 디아르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내가 혼자 움직이자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디아르트와 함께 있을 때 받은 호의와 경외 어린 눈빛과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HP가 간당간당한 상태에서 괜한 데 힘 빼고 싶지 않았던 난 그 시선들을 무시하며 연회장 구석으로 향했다.
내가 의자에 앉자 나를 따라온 밀토가 걱정스레 물었다.
“몸이 아직도 안 좋으신 거 아닙니까?”
“좀 쉬면 괜찮아질 거야.”
“따뜻한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티파티도 아니고 샴페인과 와인을 즐기는 연회장에서 어떻게 차를 구한다는 거니. 날 정말 위한다면 내 손이나 한번 잡아 주렴.
난 슬쩍 손을 뻗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밀토는 따뜻한 차를 구하는데 무슨 사명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쏜살같이 돌아섰다. 난 벌써 사라지고 없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만 안타깝게 외쳤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따뜻한 차가 아니라 네 손이야. 넌 나랑 춤을 춰야 한다고!’
밀토가 없는 사이에 댄스 타임이라도 시작되면 낭패였다. 또라이로 소문난 로에니랑 춤을 추려는 사람이 여기 누가 있겠…….
“이게 누구야.”
등 뒤로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난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고개를 홱 돌렸다.
“감히 황태자를 바람맞힌 간 큰 여인이 아닌가.”
자비스 황태자가 눈을 반달로 접으며 싱긋 웃었다.


#035
“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신 거예요?!”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연회장에 없었는데!
“그대가 나를 찾는 것 같길래 숨어 있었지. 이렇게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자비스 황태자가 내 쪽으로 구십도 가까이 숙이고 있던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아니 왜 굳이 그렇게까지?’
확실히 예사 인간은 아니라니까.
난 질린 표정을 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그리고 그대가 내 얼굴을 보고 도망치면 낭패가 아닌가.”
황태자가 생긋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이 더 무서워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전하, 어제는 제가 일부러 바람맞히려고 한 게 아니라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그만…….”
“잠? 나와 만나기로 약속을 해 놓고 잠을 잤다는 말을 하는 건가, 지금?”
“네, 죄송합…….”
“어떻게 잠을 잘 수가 있지? 심장이 두근거려서 도저히 잘 수가 없었을 텐데. 그래, 정말 잠이 오던가?”
“네. 무척.”
나도 모르게 즉답하고 말았다. 황태자는 자신을 바람맞혔다는 사실보다 내가 그와의 약속을 앞두고 잠을 잤다는 사실에 몹시 자존심 상한 표정이었다.
“그대, 나와 만나고 싶어 하는 귀부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애석하게도 전 아니어서요.”
“매일같이 절절한 연서가 수십 장씩 도착한다네.”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너무하는군.”
“죄송합니다, 제가 거짓말을 잘 못 해서.”
잘못한 것도 있으니 웬만하면 받아 줘야 했지만 도무지 받아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처받았다는 듯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주춤 물러섰던 황태자가 이내 다시 다가왔다.
“괜찮네. 날 이렇게 막 대하는 게 그대의 매력이지.”
황태자는 지나치게 회복력이 빨랐다. 그가 평소처럼 능글맞게 웃었다.
“어찌 되었든 나를 바람맞혔으니 그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나?”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다소 건방진 태도에도 그는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즐겁다는 듯, 이가 드러나게 웃었다.
자비스는 가벼운 언행과 달리 포용력 있는 인물이었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사람을 풀어지게 하는 재주가 있었고, 실제로 난 두 번째 만남에서부터 그가 꽤 편하게 느껴졌다.
“아리따운 숙녀의 무릎을 혹사시킬 순 없지.”
조금 짜증 나긴 하지만 꽤 괜찮은 사람이야. 역시 서브 남주구……
“내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는 건 어떤가.”
“네? 소원이요?”
“아니, 한 개는 그대의 죄질에 비해 형량이 너무 가벼워. 감히 나와의 약속을 앞두고 잠이 들었다 하니 괘씸해서라도 세 개는 들어줘야겠네.”
네가 뭘 빌 줄 알고 세 개씩이나?
“……하나만 하시죠.”
“세 개라고 하지 않았나.”
“처음엔 한 개라고 하셨잖아요. 하나만 하세요.”
“그럼 도량 넓은 내가 좀 깎아 주지. 두 개.”
황태자가 큰 선심을 쓴다는 듯 손가락 두 개를 보이며 말했다.
“기왕 쓰신 김에 하나 더 깎아 주세요.”
“네 개로 늘리는 수가 있네? 두 개.”
한 개와 두 개로 한참 설전을 벌이던 끝에 ‘정 그렇게 소원 들어주는 게 싫다면 근위대를 불러야겠군.’이라며 등을 돌리는 자비스를 붙잡아 소원 두 개로 마무리 지었다.
“무리한 건 들어드릴 수 없어요.”
“걱정 말게. 어렵지 않은 소원들일 테니.”
젠장, 데자뷰도 아니고. 내가 디아르트에게 했던 걸 고대로 돌려받는구나.
‘괜찮은 사람이라는 거 취소다, 이 인간아!’
예측하기 힘든 타입이라 어떤 소원을 빌지가 걱정이다. 난 이마를 짚으며 그에게 물었다.
“원하시는 게 뭔데요?”
“글쎄.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겠군.”
“한 달 내에 빌지 않으면 무효예요.”
“뭐? 그런 법이 어디 있나?”
“기한을 정할 수 없다는 말은 안 하셨잖아요.”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정하라고 하고 싶은 걸 참는구만.
“알겠네. 그리하지. 그런데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은 거 아니었나?”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던 황태자가 눈동자를 굴려 어딘가를 보았다.
“따가워서 말이네.”
“뭐가요?”
그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난 흠칫 어깨를 떨었다.
‘쟤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야?’
디아르트가 입술을 꾹 다문 채 약간 찡그린 표정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기에 뭐 거슬리는 거라도 있나?’
난 그의 못마땅한 표정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건 없었고, 무엇보다 디아르트의 시선이 정확하게 내 쪽을 향해 있었다.
옆에서 벙글거리며 연신 조잘대는 황제가 딱해 보일 정도로 그의 신경이 이쪽으로 곤두서 있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왜 저렇게 보는 거야? 불안하게!’
아까까지만 해도 에스코트도 해 주고 기분 나쁜 기색은 없었는데.
“전하, 혹시 공작님한테 실수하신 거 있나요?”
자비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 기억으론 없는 것 같은데. 하나 곧 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네? 그게 무슨…….”
‘헉! 쟤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
난 성큼성큼 다가오는 디아르트를 보고 뒤로 주춤 물러섰다.
‘네 뒤에 아쉬워하는 황제 안 보여? 왜 일로 와, 그냥 거기 있지!’
그때 연회장에 흐르던 연주가 바뀌었다.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이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대도 알고 있겠지만 황실 연회의 무도는 황족이 시작하는 게 법도라네.”
“그렇죠.”
나는 디아르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주위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황태자가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와 함께 해 주겠나?”
“지금 저한테 춤을 청하시는 건가요?”
“내 앞에 그대 말고 여인은 없는데.”
“진심이세요?”
“물론. 난 여인에게 항상 진심이라네.”
“이번에야말로 발에 구멍이 뚫리고 싶으신 모양이네요.”
“하하하. 그건 참아 주게.”
황태자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혹시 고통을 즐기는 변태적인 취향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게 그를 응시하는데 뒤에서 잠시 잊고 있던 목소리가 들렸다.
“로에니.”
디아르트였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내 옆에 와 섰다. 성도 빼고 이름을 부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막상 난 쳐다도 안 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공작. 아, 부인에게 춤을 청하는 중이었네.”
“불가합니다.”
디아르트가 짧게 받아쳤다.
“어째서?”
“남편과 동행한 부인이 다른 남성과 먼저 춤을 추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 근데 이를 어쩌나. 내가 오늘 파트너가 없어서 말이야.”
“보는 눈이 많습니다. 괜한 구설에 오를 수 있습니다.”
“하나 어차피 그대는 추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럼 부인은 연회까지 와서 플로어 한 번 밟지 못한다는 말인데 그는 너무 가혹하지.”
“…….”
“곤경에 처한 황태자가 도움을 청한 것이니 이해할걸세. 다들 나만 기다리고 있잖은가. 더 이상 지체하면 원망받을 것 같군.”
황태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싱긋 웃었다. 점점 좁아지는 디아르트의 미간에 괜히 나까지 조마조마해졌다. 이 남자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웬만하면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자비스에게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 임마, 나중에 후회한다고! 죽을 땐 죽더라도 덜 아프게 죽어야 할 것 아니냐!’
“레이디 로에니.”
“네?”
“내 손이 그만 부끄럽게 해 주겠나?”
왠지 몰라도 여기서 이 손을 잡으면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심기가 걷잡을 수 없이 상할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단 생각에 막 거절하려는데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온 황태자가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첫 번째 소원은 이걸로 하지.”
“네?”
정말 겨우 이런 걸로? 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황태자가 물론, 하고 눈을 찡긋했다.
나는 슬쩍 디아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황태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델리아를 만나기 전인데 왜 이렇게 적대적이지? 원작에서도 둘의 사이가 원래 안 좋았던가?
‘아잇, 모르겠고, 일단 빌어먹을 소원 하나 먼저 없애자!’
“황태자 전하의 청을 거듭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요. 전하와 첫 춤을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옵니다.”
도무지 놓칠 수 없는 청산의 기회에 나는 황태자의 손을 잡았다. 남편과 먼저 춤을 추지 않으면 다른 이성과도 출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더더욱 놓칠 수 없는 기회기도 했다. 힐끔 본 디아르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나야말로 그대와 춤을 추게 되어 무척 감읍하군.”
황태자가 디아르트를 향해 힐끗 미소 짓더니 곧바로 나를 홀 중앙으로 리드했다.
“전하.”
“말하게.”
황태자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늘은 전하의 발이 무사하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대신…… 이라는 전제가 붙기엔 발을 안 밟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부탁이 뭔가.”
“별 건 아니고 춤출 때 장갑을 벗었으면 합니다.”
이왕 춤을 추게 된 거 사심 좀 채울 생각이었다.
“이유라도 있나?”
“전하, 오늘 제 구두가 유독 날카롭답니다.”
“장갑만 벗으면 되나?”
도무지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군. 황태자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장갑을 벗었다. 어느새 홀 중앙에 선 그가 맨손으로 내 손을 잡고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막 춤을 시작하려던 순간이었다.
“제국의 빛나는 달이자 영원한 광영이신 황후 폐하와 레티시아 황녀 전하, 그리고 아델리아 맥그리거 님 드십니다!”


#036
‘아델리아라고?’
재빨리 황궁 내부 출입구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연회장 상단에 있는 계단에서 고아하게 치장한 황후와 레티시아 황녀, 그리고 한 소녀가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입을 흡 틀어막았다.
다소 칙칙해 보일 수 있는 갈색이지만 금실을 은은하게 꼬아 놓은 듯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우아하기 그지없었고, 싱그러운 여름 정원을 똑 떼어다 박은 듯한 에메랄드빛 눈동자, 한 손으로 쥘 수도 있을 것 같은 가냘픈 체구는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아델리아의 모습 그대로였다.
황후와 황녀의 뒤를 쫓으며 저를 향한 시선들에 약간 겁을 먹은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참으로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 작가님, 아주 나이스!’
여주가 너무 이뻐요! 나는 소설을 쓰며 흐뭇하게 웃었을 작가에게 엄지를 척 내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로 허공을 향해 쌍따봉을 날리려는 손을 겨우 잡고 주접을 삼킨 난 황후가 황제 쪽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런. 춤은 잠시 미뤄야겠군.”
황태자가 아쉽다는 듯 내 손을 놓았다. 그의 시선이 아델리아 쪽에서 떨어지지 않는 걸로 보아 원작대로 한눈에 반한 모양이었다.
‘으이구, 너도 이제 맘고생 시작이구나.’
수많은 여성을 만나 봤으면서 정작 여자 주인공의 마음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는 자비스의 미래를 안타까이 생각하며 난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평생 저 혼자 잘난 줄 알고 살다 아델리아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남자주인공이 저쪽에도 한 명 있…….’
지, 하며 돌아본 난 움찔했다. 아델리아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설정이 있기에 당연히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리란 생각과 달리 디아르트는 아까 그 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로 날 삐뚜름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디아르트가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다들 새로운 인물인 아델리아에게 한 눈이 팔려 움직임도 멈추고 그녀만 보고 있는 상황에서 홀로 그 사이를 가르고 있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눈에 띄었다. 오죽했으면 쭈뼛거리며 황후의 뒤를 따르던 아델리아마저 고개 돌려 쳐다볼 정도였다.
“전하.”
디아르트의 부름에 황태자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후 폐하께서 오셨으니 제 아내는 데려가겠습니다.”
“아내라…….”
예법상, 황실 연회 무도의 첫발을 내딛는 순서는 황족 서열순이었다. 황후가 연회에 참석한 이상 황제가 시작해야 했고, 디아르트는 그 점을 지목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 상황이 무척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정말이지 소문은 믿을 게 못 되지 않나.”
무슨 말이냐는 듯 디아르트가 미간을 좁혔다.
“두 사람은 이혼을 앞두고 있을 텐데?”
“황태자 전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평소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디아르트였지만 지금만큼은 기분이 좋지 못한 게 확연히 느껴졌다. 하기야 갑자기 이혼을 입에 올리다니, 사생활을 침범당했다는 생각이 들 만했다.
“글쎄, 신경이 쓰이지 뭔가.”
그렇게 말하면서 황태자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어투만큼은 도전적으로 느껴졌다. 디아르트의 얼굴이 더욱 냉랭해졌다.
그리고 난 이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신경전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다.
오늘은 두 남자주인공과 아델리아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 있는 역사적 이벤트가 벌어지는 날이었다. 디아르트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델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그의 인생 처음으로 춤을 청해야 했고, 자비스는 두 사람이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라앉는 기분을 의아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얘네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너희가 지금 신경 써야 할 여주인공은 저쪽에 있다고!
원작에서 내가 모르는 두 사람 사이에 알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며 둘의 등짝을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밀토 얘는 차를 심으러 간 거야, 뭐야. 왜 안 와!’
밀토라도 나타나서 지금 이 상황의 흐름을 좀 끊어 주었으면 좋겠건만 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램버트 역시 멀찍이 떨어져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이쪽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마치 3D 영화를 보며 팝콘을 먹고 있는 듯한 램버트를 원망스럽게 흘겼다.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로에니 님.”
레티시아 황녀였다. 연회장에 들어온 후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던 그녀가 반가운 얼굴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그녀에게 인사했다.
“제국의 작은 별, 황녀 전하를 뵈옵니다.”
“친우 사이에 이리 딱딱한 인사는 무척 서운하답니다.”
레티시아가 정말 섭섭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트렸다. 난 얼른 그녀의 손을 친근하게 잡았다.
“전하, 아니 레티시아 님, 너무 뵙고 싶었어요. 오늘 연회도 레티시아 님을 만나기 위해 참석했답니다.”
“정말요? 매번 편지를 보내면서 혹시 로에니 님이 귀찮게 여기고 계신 건 아닌가 심려했는데 그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놓여요.”
사실 좀 귀찮긴 했다. 하루가 멀다고 편지가 날아오니 답장 쓰는 것도 고역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그녀가 반가웠다.
“레티시아 님을 귀찮아한다니 설마요. 제가 숫기가 없다 보니 오해를 산 모양이에요. 우리 저기에서 마카롱이라도 먹으며 밀린 담소를 나누는 건 어떨까요?”
난 디아르트와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레티시아의 손을 잡고 자리를 피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잡지 않았다.
“로에니 님, 이거 맛있어 보여요.”
레티시아가 권하는 딸기 생크림 마카롱을 받으며 아직도 대화를 나누고 있는 디아르트와 자비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주위만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는 게 느껴졌다.
“공작님과 황태자 전하의 사이가 원래 좋지 않았던가요?”
“저 인간이라면 누구한테 원한을 사도 이상할 게 없는걸요. 길 가다 등에 칼을 맞아도 놀라지 않을 거예요.”
“그렇…… 네?”
난 잘못 들었나 싶어 레티시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우아하게 웃었다.
방금 등에 칼이 어쩌고 한 것 같은데…… 잘못 들었나?
“신사분들의 일 보단 그간 로에니 님이 어떻게 지내셨는지가 더 궁금해요. 그러고 보니 살이 좀 빠지신 거 같은걸요?”
“다이어트를 좀 했답니다.”
저주의 발현으로 죽다 살아났다고 말할 수 없어 대충 둘러댔더니 레티시아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로에니 님이 대체 뺄 데가 어디 있다고요. 지금도 이렇게 가녀리셔서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실 것 같은데…….”
“…….”
허리가 한 줌도 안 되는 것 같은 사람이 누구한테.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시며 디아르트와 황태자가 있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새 어디로 갔는지 디아르트는 보이지 않았고, 황태자는 다른 귀족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쯤 디아르트와 아델리아가 춤을 추어야 하는데 얜 어딜 간 거야?’
난 그녀에게 춤을 청하는 귀족들을 난처한 얼굴로 거절하는 아델리아를 보았다.
“아델리아 양에게 관심이 있으신가요?”
내가 너무 물끄러미 바라봤던 모양인지 레티시아가 내 시선을 좇으며 물었다.
“처음 뵙는 분이라 호기심이 생겨서요. 듣자 하니 원래 홀튼 백작가의 사용인이었다고 하던데요.”
“네, 맞아요. 외숙부님께서 어릴 때 잃어버렸던 딸과 닮았다며 양녀로 들이셨지요. 한데…….”
잠시 말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하던 레티시아가 생긋 웃었다.
“로에니 님이 신경 쓸 만한 이는 아니랍니다.”
기분 탓인가? 아델리아를 향한 감정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은데. 원작에서 아델리아는 모두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던 터라 의아해졌다.
“그보다 로에니 님, 손목이 이렇게 앙상하셔서 걱정이에요. 이것 좀 드셔 보세요.”
레티시아가 내게 무어라도 먹이려고 이것저것 음식을 권했다. 나보다 손목이 가는 사람이 자꾸만 말랐다고 챙겨 주는 게 민망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무척이나 진심이었다.
그동안 여러 번 편지를 주고받으며 느꼈지만 그녀는 처음 생긴 친구인 날 무척이나 좋아했다. 지금도 다른 영애들이 다가오면 형식적으로 인사만 나눌 뿐이었지 내게 하는 것처럼 유대감 어린 모습은 없었다.
사실 나도 그녀가 좋았다. 편지를 너무 자주 보내는 게 힘들긴 하지만 어릴 때도 가져 본 적 없는 친한 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첫인상과 달리 그녀는 의외로 푼수 끼가 있었고 가끔 레티시아의 편지를 읽고 있자면 중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문제였다. 난 레티시아에게 정이 들어 버렸고 덕분에 겨우겨우 묻었던 죄책감이 솟구쳤다.
이 사람이 어떻게 죽을지 뻔히 알면서 한마디 언질도 안 하는 게 맞는 걸까? 나 혼자 살자고 친구의 미래를 모른 척하면서 이렇게 하하 호호 웃어도 되는 걸까?
물론 말한다고 해서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어 줄지도 의문이고, 무엇보다 그래 봤자 원작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것 같…… 아니, 잠깐만.
‘원작은 이미 틀어진 거 아닌가? 아델리아에게 춤을 신청해야 할 디아르트가 아예 자리를 떠났잖아.


#037
생각해 보니 내가 디아르트에게 이혼을 요구한 것부터가 원작과 달랐다. 그 덕분인지 로에니라면 손끝 하나 닿는 것도 싫어하던 디아르트가 오늘은 에스코트까지 해 줬고.
‘그래, 상황이 바뀌면 원작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거지!’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디아르트가 황실에 반감을 가지게 된 건 아델리아를 사이에 둔 자비스와의 대립 때문이니까 애초에 그럴 일이 없게 하면 되는 거다.
그렇다면 이렇게 착한 레티시아도, 얼굴 한 번 못 봤지만 귀여울 게 분명한 우리 에드거도 살릴 수 있어.
어차피 이 소설의 주인공은 디아르트였고, 자비스는 그의 손에 죽을 운명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다른 여자와 이어지는 게 훨씬 낫잖아.
이것보다 좋은 수는 없다고 생각한 난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황태자 전하께서 파트너도 없이 참석하셨더군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티시아가 사색이 된 얼굴로 들고 있던 머랭 쿠키를 툭 떨어트렸다.
“서, 설마 로에니 님…….”
레티시아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는 듯 고개를 젓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저 난봉꾼한테 관심 있으신 건 아니죠?”
“……네?”
아니, 왜 말이 그렇게 돼?
“로에니 님이 휘턴 공작과 이혼을 앞두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딴 인간을…….”
레티시아는 절대 안 된다는 듯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로에니 님, 저 겉만 번지르르한 얼굴과 말빨에 속아 넘어가시면 안 돼요. 자고로 사람은 고쳐 쓰지 못한다고 했답니다. 저 인간이 여자를 얼마나 많이 만나고 다녔는데요.”
레티시아가 자비스의 험담을 줄줄 늘어놓았다. 덕분에 난 언젠가 그가 말했던 작은 사슴이라던가 흰 토끼와의 연애사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저 인간 일주일에 한 번은 오이 샌드위치에다가 민트초코티를 마시는 괴상한 식성까지 있다니까요? 민트면 민트고 초콜릿이면 초콜릿이지 어떻게 그 둘을 같이 먹을 생각을 하는지 아무튼 보통 이상한 성격이 아니에요.”
나도 오이 샌드위치랑 민트초코를 좋아했지만 차마 레티시아 앞에서 말할 수 없었다.
“저야 로에니 님과 가족이 된다면 정말 좋을 거예요. 하지만 제 소중한 친우가 매일 밤마다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는 모습을 볼 순 없어요. 오, 신이시여.”
신까지 찾을 일이니?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황실에 출생의 비밀 같은 건 없어. 현실 남매 모습에 감탄한 난 흥분한 레티시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전 황태자 전하께 일말의 관심도 없답니다.”
“정말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레티시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놀랐지 뭐예요. 제 친우의 인생이 구렁텅이에 빠지는 줄 알고 어찌나 마음이 졸아들던지.”
생글 웃은 레티시아가 다시 엄격하게 주의를 주었다.
“앞으로 저 인간이 어떤 달콤한 혀로 꾀어내도 절대 넘어가시면 안 돼요. 아셨죠?”
레티시아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귀부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자비스를 바라보았다.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오라버니라 어느 레이디를 모셔 와도 미안할 뿐이지요. 정말이지 저런 게 다음 황제라니 제국의 앞날이 암담하답니다.”
레티시아가 신랄하게 비난했다. 물론 나도 일부분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녀가 모르는 게 있었다. 바로 그녀의 오라버니가 의외로 순정파라는 것.
게다가 이 나라의 황족들은 일부일처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미 혼기가 찬 자비스도 결혼을 미루고 있는 것이었고.
레티시아는 그가 결혼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 모양이었지만 원작에서 읽은 자비스는 의외로 신의와 책임감이 있는 남자였다. 그러니 부인을 두고 다른 여인에게 눈을 돌릴 일은 없을 테고, 디아르트는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으니 아델리아와 혼인해서 잘 살겠지. 나 또한 우정과 최애를 지키고 무사히 이혼해서 저주도 푼 다음 이 나라를 떠나 돈지랄하며 사는 엔딩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게 최선이야.’
본인이 원치 않는 혼인을 할 수도 있는 자비스 황태자에겐 미안하지만 그게 모두의 목숨을 구하고 그의 목도 보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국혼을 진행 시킬 방법을 모색해 봐야 했다.
“로에니 님, 어머님께서 부르셔서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황후의 부름을 받은 레티시아가 금방 다녀오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녀가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귀부인 무리가 내게 다가왔다.
“휘턴 부인, 안녕하세요.”
예전 레티시아의 초대로 황실 다과회에 참석했을 때 봤던 이들과 로코 제과점에서 트러블이 있었던 웨스턴 자작 부인이었다.
‘귀찮은 것들이 나타났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부인.”
백작 부인이 생글 웃었다. 언뜻 예의 바른 모습이었지만 난 이미 저 얼굴들 뒤로 어떤 표정이 숨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아까부터 내 주위에서 지켜보며 레티시아가 자리를 비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공작 각하와 함께 오신 걸로 아는데, 부군은 어디 계신지요?”
“글쎄요. 테라스로 나간 거 같군요.”
“어머, 제가 아까 각하께서 홀을 나가시는 걸 봤는걸요. 모르셨나요?”
백작 부인의 물음에 자작 부인이 맞장구쳤다. 이미 디아르트의 행방에 대해 알면서 물어본 이유야 뻔했다. 남편에게 외면받는 불쌍한 여자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싶은 거겠지.
“부인에게 언질도 주지 않고 자리를 비우시다니, 공작 각하께서 너무하시네요.”
난 무덤덤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대놓고 너 남편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야, 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시큰둥하게 반응하니 귀부인들의 표정이 만족스럽지 않은 듯 비틀어졌다.
“먼저 귀택하신 거 아닌가요?”
“아니에요.”
아델리아가 여기 있는데 남자주인공이 가긴 어딜 가.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키고 저만치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밀토를 가리켰다. 그의 손에는 어디서 구해 온 모양인지 자그마한 찻잔이 앙증맞게 들려 있었다.
“그렇다면 밀토 경이 제게 말을 했겠죠.”
받아칠 말이 없는지 입술을 꼭 깨문 백작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다행이지만 부인, 아직 춤도 추지 않으셨지요? 남편과 먼저 춤을 추지 않으면 다른 남성분들과도 출 수 없다는 걸 아시면서 공작님께서도 너무하세요.”
“그러니까요. 그럴 거면 왜 연회에 참석하신 건지 모르겠군요. 부인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 만들어 놓는 것도 아니고.”
“상심이 크시겠어요, 부인. 이렇게 아름답게 치장하셨는데.”
돈 들여 정성스레 꾸미고 오면 뭐 하니, 정작 남편은 눈길 한번 안 주는데. 라고 돌려 까는 말이었다.
“제가 춤에는 흥미가 없어서요. 남편도 그걸 알기에 청하지 않고요. 아까는 황태자 전하께서 청하시기에 거듭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듯하여 플로어로 나서기도 했지만 다행히 황후 폐하께서 오시어 물러날 수 있었답니다.”
썩어도 준치라고, 디아르트도 자비스도 이 소설 속 남자주인공들답게 여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늘 시선을 사로잡는 두 사람이 날 사이에 두고 대립을 하는 모습은 모두가 지켜봤을 것이다. 물론 그 내막이야 모르겠지만.
파트너 없는 황태자가 첫 춤의 상대로 나를 지목한 건 그들의 질투를 유발했을 게 뻔하다. 바람둥이긴 해도 그를 흠모하는 귀부인들이 많았으니까.
역시 예상대로 귀부인들이 움찔 물러서며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백작 부인이 그 시선들을 단속하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그래요. 다른 남성에게 아내의 옆자리를 양보하다니, 아무리 이혼을 앞두고 있다지만 아직 부부인걸요.”
내가 제 뜻대로 놀아나질 않으니 점점 겉으로라도 챙기던 예의를 집어치우는 모양이다. 겨우 두 번째 만남에 이혼을 입에 담으며 조롱하다니.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 달리 난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사실인데 뭐.
대신 난 그녀의 뒤로 보이는 한 남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걱정 감사합니다만 저보단 남편분을 먼저 염려하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내가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 귀부인들이 부채로 입을 가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내게 남편의 사랑이 어쩌고 운운하던 백작 부인의 남편이 다른 여자들을 희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작 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038
연회가 시작된 지 얼마나 됐다고 마이러스 백작은 술이 잔뜩 취한 모습이었다. 비틀비틀 몸을 못 가누며 보이는 여성들마다 수작질을 부리는 행태가 몹시도 꼴불견이었다.
고개를 홱 돌린 백작 부인의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이러스 백작께서 술을 좋아하신다고 듣기는 했지만 오늘은 과하신 것 같네요. 다른 숙녀분들을 부인으로 착각하고 계신 모양이에요.”
‘남편의 사랑 운운하는 너야말로 네 남편 옆자리 잘 간수하지?’
그들의 화법대로 돌려 깠더니 찰떡같이 알아들은 모양인지 백작 부인이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나는 모른 척 눈을 깜빡였다.
“부인께서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찾으시는 것 같은데.”
사실 디아르트에게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이후 혹 이들과 다시 만날 때를 대비해 몇 가지 조사를 해 두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지만 기대 이상이었고, 그 말은 마이러스 백작 부인 말고도 지금 내 앞에서 나를 무시하고 있는 이들의 약점 하나씩은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아는 게 힘이지.’
난 싱긋 웃었다. 그 미소가 제법 의미심장해 보였는지 귀부인들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웨스턴 자작 부인이 입술을 꼭 깨물더니 나섰다.
“공작 부인, 외람되지만 방금 하신 언사는 너무 무례하군요.”
“제가요?”
“네. 백작 부인께서 마음 상하셨잖아요. 사과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무례라…….”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릴. 제과점에선 내 정체를 알고 꼼짝도 못 하더니 지금은 옆에 제 편을 들어줄 이들이 많으니 만용이 생긴 모양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다가 생긋 웃었다.
“부인 말씀대로 아무리 이혼을 앞두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까진 엄연히 공작 부인인 데다, 휘턴 가의 안사람이기 이전에 제국의 셋뿐인 공작가의 영애인 저더러 자작 부인이 지금 무례를 운운하신 건가요?”
“아, 아무리 공작 부인이라지만 잘못하신 건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도리…….”
“맞아요. 그건 그렇죠.”
“그럼…….”
“하지만 먼저 건드리길래 받아친 것뿐인데 이제 와 저만 나쁜 년 만드시면 안 되죠.”
“네?”
내 입에서 상스러운 말이 나오니 귀부인들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평판이고 나발이고 빡치는데 어쩔 거야.
“부인들께서 먼저 사과하신다면 저도 생각해 보지요.”
「공작 영애는 무슨. 아비가 거들떠도 안 보는 버려진 자식 주제에.」
내가 이렇게 강하게 나올 줄 몰랐는지 주춤하는 귀부인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입술을 꼭 다물고 날 노려보고 있던 백작 부인이 비아냥거렸다.
그녀의 말에 놀란 듯 숨을 들이켰던 귀부인들은 이내 반응이 없는 날 보고 픽 웃었다.
「방금 들으셨죠? 나쁜 년이라니, 공작 부인이라는 분이 어떻게 그런 상스러운 단어를 입에 담을 수가 있나요.」
「본데없이 자라 그렇겠죠.」
「상대해 봤자 우리만 똑같은 사람으로 끌어내려지니 이만 물러가는 게 좋겠어요.」
귀부인들의 기세가 다시 등등해졌다. 내가 히비스어를 못 알아듣는 줄 알고 있기에 나를 향한 조롱을 서슴지 않았다.
난 드디어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랄까, 벌써 재밌다. 난 말아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며 덤덤하게 말했다.
「당신들도 그리 본데 있이 자란 것 같진 않은데요.」
“헉!”
귀부인들이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섰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난 그 숨 쉬는 것도 잊은 것 같은 얼빠진 얼굴에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아무리 사랑받지 못하는 여식이라 하나 밖에서 이런 취급을 받는 걸 아신다면 아버지께서 가만히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 그전에 명예를 중시하는 공작님이라면 제 가문의 안주인이 고작 한미한 백작가나 자작가에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시겠네요. 그게 비록 이혼을 앞둔 부인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죠.」
나는 생긋 웃었다. 내가 듣기에도 저들보다 내 입에서 나오는 히비스어가 훨씬 유창했다. 나를 노려보며 비웃던 백작 부인과 자작 부인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고, 공작 부인…….”
“저, 저희가 방금 한 말은 그냥, 그러니까 그냥…….”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마하고 싶지만 지들이 생각해도 도무지 수습이 안 되겠지. 그렇게 대놓고 조롱한 걸 내가 다 들었으니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테니까.
웬만하면 데드 엔딩을 피하기 위해 로에니가 했던 짓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소설 속 빌런이었던 그녀가 될 필요가 있었다.
난 로에니가 힘없는 사용인들을 괴롭힐 때 자주 했다고 읽은 포즈를 취했다. 짝다리를 짚고 한쪽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고개는 약 사십오도 각도로 기울이고 삐뚜름한 표정으로 귀부인들을 내려다보았다.
“한번 뱉은 말은 쏟아진 물과 같아서 주워 담을 수 없다 했죠. 그간 당신들의 무례한 언행은 반드시 돌려받도록 하죠.”
“고, 공작 부인, 잘못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세요.”
“죄송합니다. 저희가 생각이 짧아서 부인께 그만 큰 무례를 범했습니다. 반성하고 있으니 제발 선처를…….”
그렇게 오만하게 굴 땐 언제고 휘턴 가나 페이셔 가가 무섭긴 한 모양이다.
난 어쩔까, 고민하는 듯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고개를 돌렸다. 나를 지켜보는 귀부인들의 얼굴이 간절했다.
“그럼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 보시겠어요?”
난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이야, 내가 생각해도 재수 없어.’
생각대로 귀부인들의 얼굴이 난처해졌다. 엿 된 상황에도 그동안 무시하던 로에니에게 무릎 꿇는 건 자존심이 상하시겠지. 물론 나도 진심으로 그들이 무릎을 꿇는 걸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난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에요. 뭘 그리 심각한 표정을 하시나요.”
“네? 그럼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무릎 꿇으라는 게 농담이었는걸요? 제가 본데없이 자란 탓에 그 정도로 아량이 넓질 못하답니다.”
나는 흠칫 어깨를 떠는 귀부인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내려다보다 등을 돌렸다.
“당신들을 어떻게 할지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군요.”
물론 정말로 페이셔 공작이나 디아르트에게 고자질할 생각은 없었다. 사교계에 딸을 버렸다는 소문이 날 정도인 페이셔 공작이나 디아르트에게 기대할 게 뭐가 있다고.
다만 저들이 오늘 밤부터 보복을 걱정하느라 제대로 잠도 못 잘 거라고 생각하니 묵었던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았다.
‘아, 속이 다 시원하네.’
그들에게서 멀어지며 빙긋 웃자 밀토가 얼른 다가왔다. 그의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자세한 내용은 몰라도 풍기는 살벌한 분위기를 통해 내가 귀부인들과 마찰이 있는 건 눈치챈 모양이었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밀토가 내 기분을 조심스럽게 살피더니 들고 있던 찻잔을 내밀었다.
“조금 식었지만 괜찮으시다면 드시겠습니까?”
그의 말대로 차는 차갑게 식어 보였다. 하지만 저 차를 구해 오느라 진땀을 뺐을 밀토를 생각해 기꺼이 받아들었다.
“고마워. 안 그래도 목말랐거든.”
내가 차를 마시자 밀토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각하께선 저택에서 온 전령 때문에 잠시 밖에 나가셨습니다.”
“그래?”
별로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라 난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잠시 나가 봐야 할 것 같은데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방금 그 모습을 봤으니 날 혼자 두기 불안한 모양이었다. 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었다.
“다녀와.”
내 대답에도 미적거리던 밀토가 떠나자 난 와인 잔을 들고 연회장 구석으로 향했다. 벼르고 있던 인간들을 엿 먹인 건 속 시원하고 재밌었지만 이제 정말로 기운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디아르트와 먼저 춤을 추지 않으면 다른 남자와도 출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빌어먹을 예법이야. 역시 아까 자비스랑 춤을 췄어야 하는 건데!
나는 여인들과 대화하는데 여념이 없는 자비스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우리 에드거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아까부터 연회장을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에드거로 보이는 인물은 없었다. 오늘이야말로 볼 수 있을 거라고 얼마나 기대했는데, 설마 나 또 공치는 거니? 이럴 거면 그냥 집에 돌아가는 게 낫겠다!
“휘턴 공작 부인.”
오늘 참 여러 사람이 날 찾는구나. 또 누구야, 하며 고개를 돌린 난 헙, 숨을 삼켰다.
아델리아가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수줍은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뵈어요. 아델리아 맥그리거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발간 볼을 하고 드레스 자락을 올려 인사하는 아델리아에게 화답했다. 어쩜 우리 여주는 목소리도 이렇게 상큼하고 예쁘니. 널 보니 피곤이 싹 씻어 내리는구나.
‘근데 여주가 내게 무슨 일이지? 원작에선 늘 아델리아를 질투하는 로에니가 먼저 시비를 걸곤 했는데?’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무척이나 설레어요.”
“저를 보고 싶었다고요?”
로에니가 어디서 누구한테 만나서 설렌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평판이 좋은 편이 아닌데. 내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하자 아델리아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얼마나 멍청하게 생겼는지 꼭 얼굴을 보고 싶었거든요.”


#039
……파든?
“아~ 멍청한 얼굴은 이렇게 생겼구나. 생각보다 평범하시네요.”
아니, 잠깐만. 뇌가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는데 지금 내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이 여자가 아델리아 맞아?
“얼마나 멍청하면 지가 갖고 있는 걸 제 손으로 놓아주나 궁금했어요. 간절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아델리아에게서 멍청하다는 소리를 세 번이나 들은 난 충격으로 어버버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귀부인들에게 시원하게 엿을 먹였던 사람답지 않게 어벙한 얼굴일 게 분명했다.
아델리아가 픽 웃었다.
“휘턴 공작 각하와 이혼하신다면서요?”
우리 여주인공 아델리아가 누구냐.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착한 심성에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고 남부터 챙기는 다정함과 싹싹함으로 주변을 밝히는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서 도전적인 눈빛으로 날 쏘아보며 비웃는 이 여자는 대체 누구야?
아델리아는 아까까지만 해도 황후의 뒤에서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겁에 질리던 소녀가 맞나 싶게 표독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라면 절대 안 놔. 왜 놔? 내 손에 들어온걸. 게다가 그렇게 탐스러운걸.”
……얘 진짜 우리 사랑스러운 여주 아델리아 맥그리거가 맞아요? 원작에 아델리아랑 꼭 닮은 악녀가 있다는 설정이 있었다든가……?
도무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사이 내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아델리아가 피식 웃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는 사랑스러운 모습과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딴판이었다.
“나는요. 이 자리까지 올라오려고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 알아요? 안 해 본 게 없어, 내가. 근데 당신은 운 좋게 귀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 가져 놓고 손쉽게 놓아 버리네. 그럼 너무 억울하잖아. 내가 뭐가 돼?”
아델리아가 내가 들고 있는 와인 잔을 흘깃 보며 말을 이었다.
“너무 열 받으니까 빼앗아 버리려고요. 아, 당신이 놓아 버린 거니까 엄밀히 말하면 빼앗는 건 아닌가? 아무튼 안 그래도 탐나는 남자였는데 알아서 떨어져 나간다니 뭐, 수고를 덜었네요.”
그 보답으로 말이에요. 아델리아가 내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알려 줄게요.”
그러더니 힐끔 주위를 살핀 아델리아는 와인 잔을 빼앗아 제 쪽으로 확 뿌리고는 바닥에 내팽개쳤다.
쨍그랑! 하고 잔이 깨지는 날카로운 굉음이 울리자 연회장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꺄악!”
비명을 내지른 아델리아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벌벌 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부, 부인…….”
무슨 일이냐는 듯 주위로 모여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여인들이 아델리아를 부축해 일으키는 모습을 보며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원작 속에서 착하고 순진하며 사랑스럽게 묘사되었던 아델리아 맥그리거가 사실은 나보다 더한 악녀였고, 지금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물 먹이고 있는 거지?
아니, 남자주인공은 반쯤 돌아 버린 집착남에 서브남주는 나르시스트 환자인 것도 환장할 노릇인데 여자주인공마저 싸가지 없는 이중인격자인 게 말이 돼?
저 선택지들 사이에서 내가 너를 얼마나 안타까워했는데 알고 보니 끼리끼리였냐고!
‘작가님, 대체 주인공들 성격이 다 왜 이러는 거예요? 이쯤 되면 작가님 취향에 진지하게 의문이 들잖아요!’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사람들의 부축을 받은 아델리아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차마 날 쳐다보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정말 겁에 질린 건 나였다. 쟤 너무 무서워!
나는 나를 보는 사람들의 적대 어린 시선에 이마를 짚었다. 하필이면 방금 전에 귀부인들과 마찰이 있었다. 스토리에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디아르트나 자비스, 레티시아의 시선은 피했지만 다른 귀족들이 보는 것까진 신경 쓰지 못했고,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 내가 귀부인들에게 패악질하는 것으로 보였을 확률이 높았다.
안 그래도 포악하기로 유명한 로에니이니 저 또라이가 제 분을 못 이기고 이번엔 여린 소녀에게까지 난동을 부리는구나, 하고 여기겠지. 아델리아가 노리는 것도 바로 그것일 것이다.
‘아 망할.’
어차피 떠날 나라라 평판이고 나발이고 상관없다지만 이렇게 억울하게 몰리는 건 사양이었다. 게다가 이 모습을 디아르트가 본다면?
원작에서 그가 아델리아를 괴롭힌 로에니에게 얼마나 매서웠는지 아는 나로선 미칠 노릇이었다. 아무리 원작이 조금 달라졌다고 해도 디아르트와 아델리아가 이어지는 건 정해진 일이었기에 나로선 데드 플래그를 하나 밟은 격이었다.
‘아델리아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지, 이렇게 시비가 털릴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냐고!’
알고 보면 원작에서도 로에니가 그렇게 패악을 부렸던 게 아델리아의 이런 이중 인격적인 모습 때문이었던 게 아닐까.
‘내가 그동안 끔살 엔딩만큼은 피하겠답시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게 다 뭐야.’
이대로라면 원작의 악녀 루트를 고스란히 밟는 꼴이잖아.
내가 아무리 착하게 굴어도 아델리아가 지금처럼 내게 누명을 씌운다면 난 꼼짝없이 목이 잘릴 수밖에 없었다.
난 오늘 그저 디아르트와 아델리아가 첫눈에 반해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본 후 얌전히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마른침을 꿀꺽 삼킨 난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고민했다. 저만치에서 소란을 들은 레티시아와 자비스가 놀란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아델리아에게 반한 황태자는 몰라도 레티시아는 친우니까 내 편을 들어줄 거야. 연회가 끝나는 대로 당장 다른 나라로 망명 보내 달라고 부탁해 봐야겠어. 생각하던 그때였다.
누군가 내 옆에 와 섰다.
“무슨 일이지?”
고개를 돌리니 디아르트였다. 언제 홀에 들어왔는지도 의문이었지만 지금 그의 언행이 적대적인 것도 의아했다. 왜냐하면 그 적대감이 내가 아닌 아델리아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원작대로라면 그는 아델리아에게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이 상황은 명백히 내 잘못으로 보이는 상황이었다. 내 손에 들려 있던 와인 잔은 바닥에 떨어져 깨져 있고 아델리아의 순백의 드레스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누가 봐도 망나니가 순진한 영애 하나를 괴롭히는 모양새였다.
“괜찮나?”
……얘 지금 나한테 말한 거 맞아? 누가 봐도 안 괜찮은 아델리아를 눈앞에 두고? 혹시 이거 아델리아의 관심을 끌기 위한 고도의 전략 같은 건가?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눈만 끔벅였다.
“설명하지.”
디아르트가 아델리아에게 물었다. 일말의 온기도 없는 목소리였다. 아델리아가 찰나에 입술을 짓씹었다가 이내 처연한 미소를 띠었다.
“제 잘못이에요. 저는 그저 부인께서 속상하신 것 같아 위로를 전해 드리려 한 건데 도리어 심기를 상하시게 한 것 같아요.”
무슨 소리냐는 듯 디아르트가 눈썹을 찌푸렸다.
“부인께서 다른 귀부인들과 잠시 언쟁이 있으셨어서…….”
아델리아가 흘깃, 눈동자를 굴렸다. 저만치에서 지켜보고 있던 귀부인들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디아르트가 그들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거두었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말을 이었다.
“저 같은 게 멋모르고 나서는 게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흑…….”
아델리아는 이 자리를 도무지 견디기 힘들다는 듯 울음을 터트렸다. 청초한 미모의 여린 소녀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니 다들 안쓰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나조차 깜빡 속아 넘어갈 뻔한 아델리아의 연기력에 박수를 쳐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 아까 나한테 멍청하다고 비웃던 걔 맞니?
아델리아가 울음을 터트린 탓에 상황은 더 내 잘못처럼 보였다. 나도 억울함에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나오지 않았다.
디아르트는 말이 없었고 난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연회가 끝나자마자 망명을 신청해야…….
‘허억…….’
순간 참을 수 없는 격통이 명치를 관통했다. 난 이 느낌을 잘 알았다. 망할 놈의 저주가 또 발현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갑자기?
간당간당하긴 했어도 저택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델리아의 실체를 알게 되어 심적인 충격을 받은 탓인 것 같다.
“으흑…….”
다리에 힘이 풀린 내가 그대로 주저앉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난 가슴을 부여잡고 턱턱 막히는 숨을 힘겹게 내뱉었다.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는 가운데 문득 디아르트의 얼굴이 무척 가까이 느껴졌다.
그 엄청난 고통을 다시 느낄 생각에 아득해졌지만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자리에서 그만 벗어날 수 있잖아. 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난 정신을 까무룩 잃었다.


#040
“의사는?”
“밀토가 데리러 갔으니 곧 당도할 것입니다.”
램버트의 말에 디아르트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갑자기 연회장에서 쓰러진 로에니를 안고 오면서 흐트러진 것이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로에니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고 그새 부르튼 입술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원래도 조금 마른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지금은 아주 침대 안으로 꺼져 버릴 듯 앙상해 보였다.
눈 밑이 까맣게 내려앉은 게, 이마에 흐르는 땀이 아니었다면 죽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디아르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 자신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지금 그의 눈에는 두 눈을 꾹 감은 채 통증 어린 신음을 흘리는 로에니만 들어왔다.
얼마 전에 크게 앓았지만 털고 일어나기에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또 이렇게 쓰러졌다는 건 몸에 꽤 큰 문제가 생겼다는 거겠지.
사우 일족의 거취를 찾았다는 전보를 받고 잠시 홀에 나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가 자리를 비우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여자다.
언쟁이 있었다던 귀부인 무리 때문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는 연기를 하던 그 아델리아라는 여자의 짓인가.
연회를 되짚어 보던 디아르트는 퍼뜩 미간을 좁혔다.
‘자비스 황태자.’
로에니의 손을 잡고 플로어로 나가던 그를 떠올린 디아르트가 어금니를 짓씹었다. 원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내였으나 자신을 바라보던 그 승리감 어린 눈빛이 몹시도 거슬렸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거슬리는 것은 저보다 더 그를 믿는 듯했던 로에니의 표정이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붙어 서서 웃던 두 사람을 떠올린 디아르트의 뒷목이 딱딱해졌다.
“각하, 주치의가 도착했습니다.”
이상하게 끓어오르는 화기에 입술을 비튼 그때 문밖에서 밀토가 고했다. 갑자기 험악해진 그의 눈치를 살피던 램버트가 대신 대답했다.
“안으로 모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밀토가 주치의와 함께 들어섰다. 디아르트는 제게 예를 갖추는 주치의에게 어서 진찰하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안 그래도 위압적인 사내가 기분이 저조하니 숨 한 번 편히 내쉴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주치의는 어깨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얼른 침대에 누워 있는 로에니에게 다가갔다.
로에니의 상태를 면밀히 살핀 주치의가 탄식을 삼켰다.
‘이건 역시……!’
유전적으로 타고난 건지 흔한 병치레 한 번 없어 주치의의 존재 의의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휘턴가에서 일하며 이렇게 월급을 날로 먹어도 되나 걱정했던 주치의는 처음 공작 부인 방에 불려갔을 때만 해도 드디어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다며 자신만만했었다.
하지만 공작 부인의 상태는 생각보다 매우 위중했고, 심지어 무슨 병인지조차 알 수 없어 손을 쓸 수도 없었다.
이후 충격을 받은 그는 공작 부인을 치료하고 말겠다는 사명감으로 밤낮없이 의학 서적을 파고든 끝에 그녀의 증세와 똑같은 병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말을 대체 어떻게 꺼내야 할지 난감했다. 침대 맡에 서서 팔짱을 낀 채 그가 하는 양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고 있는 가주의 눈초리가 너무나 매서웠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공작 부인이 앓고 있는 병을 차마 입에 올릴 용기가 안 났다.
주치의가 벌벌 떨고만 있자 디아르트가 못마땅하게 눈썹을 구겼다. 그의 심기를 눈치챈 램버트가 주치의를 채근했다.
“마님은 어떻소?”
“그, 그게…….”
주치의가 디아르트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했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입술만 꾹꾹 씹고 있는 게 도리어 로에니의 상태가 위독하다는 반증이었다.
“무슨 병이지?”
디아르트가 로에니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작게 한숨을 삼킨 주치의는 의사로서 환자의 상태에 대해 최대한 덤덤하게 설명했다.
“마님이 앓고 계신 병은 푸이탄입니다.”
“푸이탄?”
디아르트의 눈매가 구겨졌다. 제대로 설명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주된 증상은 참을 수 없는 어지럼증이고 종종 다리에 힘이 쭉 빠진다든가, 코에서 피를 흘리기도 하실 겁니다.”
“맞아요! 마님께서 자주 어지럽다고 하시고, 저번에도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으셨어요!”
침대에 붙어 앉아 울먹이고 있던 릴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디아르트는 며칠 전 연무장에서 피가 흥건하게 번진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있던 로에니를 떠올렸다.
“치료 방법은?”
“그, 그게… 그게 그러니까…….”
주치의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안타까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없습니다.”
방 안에 한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먼저 입을 뗀 건 디아르트였다.
“없다니?”
“푸이탄은 불치병입니다.”
“평생 앓아야 한단 말인가?”
“아뇨, 그게…… 푸이탄병은 한번 발현하면 최대 육 개월까지 밖에 사실 수 없습니다.”
헉! 숨을 들이켜는 소리만이 차갑게 가라앉은 방 안을 메웠다. 경악한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던 릴리가 로에니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안 돼요! 마님!”
램버트와 밀토의 낯빛이 더할 수 없이 어두워졌다. 주치의는 이런 말을 전해야 하는 것이 송구할 뿐이었다.
디아르트는 말이 없었다. 누가 봐도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내에게 일말의 동정조차 느끼지 않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두 눈이 꼭 감긴 로에니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지금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을 이해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로에니 휘턴이 곧 죽는다. 이혼이 성립되기도 전에 죽을 수 있다. 그건 이상하게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이었다.
사람이 죽는 건 질리게 보아 왔고, 제 손에 수많은 피를 묻히기도 한 그였지만 죽음이란 게 누구를 잃는 일이라는 게 이토록 피부로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마님! 흑흑, 우리 마님 불쌍해서 어떡해.”
릴리가 울부짖었다. 밀토가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등을 돌린 채 눈물을 훔쳤다.
“정말 아무런 방법이 없소?”
램버트의 물음에 주치의가 애처로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푸이탄은 몇십만 명 중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굉장히 희귀한 병입니다. 하여 지금은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고요. 게다가 발병 전까진 아무런 증상도 없고 발병 후엔 사망까지 순식간이니 연구도 미비한 상태입니다. 하여 딱히 약이 없습니다. 그래서 의사들 사이에선 신이 내린 형벌이라고 하기도 합…….”
“닥치시오!”
램버트가 차갑게 그의 말을 잘랐다.
“감히 어디서 그런 망언을 내뱉소!”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주절거리고 있던 주치의가 두 손으로 얼른 입을 막았다. 디아르트와 눈이 마주친 그는 흠칫 어깨를 떨며 뒷걸음질 치다 딸꾹질까지 시작했다.
“찾아라.”
“네, 네? 끅.”
“어떻게든 살려 낼 방법을 찾아.”
스산한 표정을 한 디아르트의 시선이 닿는 곳엔 로에니가 마치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듯 미약하게 잠들어 있었다.
디아르트가 잇새를 아득 짓씹었다.
* * *
가뿐하게 기지개를 켠 난 쓰러지기 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몸을 이리저리 풀었다. 확실히 한번 발현하고 나면 개운해지는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지난 발현 때보다 괴롭지도 않았고 불과 반나절 만에 깨어날 수 있었다.
분명 지난번처럼 손을 통해 전신으로 퍼져 나가던 청량한 기운 덕일 것이다. 첫 발현 때와 달리 그 기운은 이번엔 퍽 오랫동안 나를 감쌌다. 나는 마치 누군가 내 손을 꽉 붙잡고 있는 것 같았던 그 생생한 기운을 떠올렸다. 이대로 일어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아니지. 그러다가 골로 가는 거야.’
난 고개를 저었다. 그 달콤한 기운은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 왜 사형수도 죽기 전에 맛있는 거 먹인다잖아.
“릴리, 이런 멀건 스프 말고 씹을 수 있는 고기를 가져오겠니?”
잘 먹고 체력을 비축해서 얼른 저주를 풀고 망할 주인공들에게서 도망치자. 아무래도 나 혼자 착하게 산다고 해서 데드 엔딩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거든.
연회장에서 쓰러지기 전 놀라웠던 아델리아의 연기력을 떠올린 난 소름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정신인 놈이 한 명도 없다니, 무슨 소설 주인공들이 이러냐고!’
“마님, 추우세요?”
릴리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내 팔을 주물렀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원래 나를 잘 챙기는 아이였지만 아까부터 그녀의 행동은 과하기 그지없었다.
숟가락을 들었다가 미끄러져서 떨어트렸을 땐 울컥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지 않나, 눈을 감고 있으면 자꾸만 조마조마하다는 듯 말을 걸었고, 한숨이라도 쉬면 세상이 꺼진 양 굴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아무리 한참 앓았다가 일어났다고 해도 무언가 이상했다. 나는 한여름에 벽난로를 켜겠다, 솜이 빽빽하게 들어간 두꺼운 이불을 가져오겠다, 부산을 떠는 릴리의 팔을 잡았다. 아무래도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아까부터 왜 그래? 무슨 일 있니?”
“마님……. 몸도 안 좋으신데 제 걱정부터 하시는 건가요?”
“아니, 걱정이 아니라 난…….”
“이렇게 착한 분을 신도 무심하시지…… 흑.”
‘응?’
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린 릴리를 아연하게 보았다. 얘 진짜 왜 이러니?
릴리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등을 돌리더니 씩씩한 척 “장작을 좀 가져올게요.” 외치곤 방을 뛰쳐나갔다.
홀로 남은 난 어안이 벙벙해져서 눈만 끔벅였다.
“진짜 뭔데?”


#041
‘뭔가 있다!’
분명 뭔가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저럴 순 없어.
난 벌써 열세 번째 입을 틀어막고 방을 뛰쳐나가는 릴리의 뒷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저주로 인해 정신을 잃고 있었던 며칠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했다.
처음엔 지나친 생각이라고 여겼지만, 착각이 아니다.
요 며칠, 절대 외출은 안 된다며 내 다리를 붙잡고 울먹이는 릴리 때문에 방 밖을 나서는 것도 힘들었다. 정원에서 바람이라도 쐬려고 나서면 어디선가 나타난 릴리가 이 여름에 겨울 외투를 꼭 걸쳐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원래도 날 잘 챙기는 아이였지만 최근 릴리의 행동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어찌어찌 릴리를 따돌리고 방 밖으로 나와도 찝찝한 기분이 내내 따라다녔다. 다들 나만 보면 눈가가 촉촉해졌기 때문이다.
어제는 난간을 닦고 있던 애니가 날 보자마자 들고 있던 헝겊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한달음에 올라와 부축해 주었다. 괜찮다고 해도,
‘계단에서 넘어지시면 어떡해요.’
라며 부득불 계단 아래까지 데려다주었다. 내 나이가 몇인데 계단에서 넘어진다고 부축하는 건지 의아했지만 애니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어 영문도 모른 채 얌전히 에스코트를 받아야 했다.
그녀뿐이 아니었다. 연무장에 가져갈 도시락을 부탁하러 주방에 들렀을 땐 감자를 깎던 주방장이 갑자기 엄지와 검지로 눈을 찌르더니 눈이 매워 눈물이 나온다는 헛소리를 하질 않나.
정원에서 만난 정원사는 비통한 표정으로 데이지꽃을 건네주며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전했고.
평소 열기와 기합 소리가 가득했던 연무장에는 싸한 분위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의아하게 주위를 살피다 저만치에 둥글게 둘러앉아 있는 기사들을 발견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심각해 보이는 통에 그대로 등을 돌리는데 날 발견한 밀토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마, 마님!’
그 뒤로 기사들이 개떼마냥 우르르 달려오는데 너무 부담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들고 있던 피크닉 바구니를 빼앗듯이 가로챈 기사들은 나를 둘러싸고 위험하게 여기까지 혼자 왔냐, 이 무거운 걸 혼자 들면 어떡하냐, 몸은 괜찮은 거냐 등등 한마디씩 거들었다.
저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그때와 다른 점은 그들의 눈망울이 촉촉했다는 것이다.
‘무슨 일 있었어? 다들 눈이 왜 이렇게 빨개?’
‘앗,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까 연무장 100바퀴 뛰어서 그렇습니다.’
‘다들 건강밖에 볼 것 없는 놈들이니 신경 쓰지 마십…… 헙!’
변명하듯 빠르게 말을 내뱉던 알렉스가 아차 한 표정으로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기사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어떤 눈빛으로 알렉스를 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알렉스가 순식간에 해쓱해진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왜 내 눈치를 봐? 의아해하는데 아까부터 입술만 우물거리던 밀토가 차마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입을 틀어막은 채 어디론가 뛰쳐나갔다.
릴리와 똑 닮은 뒷모습에 마치 데자뷔를 겪는 것 같아 멍하니 바라보니 기사들이 내 앞을 막아서며 변명했다.
‘별일 아닙니다.’
‘저 자식이 아까 뭘 잘못 먹어서 그렇습니다!’
‘네! 배탈 나서 화장실 가는 겁니다!’
하지만 희미하게 들리는 수군대는 목소리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어 보였다.
‘저 미친놈, 티 내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마님께서 눈치채시면 어쩔 거야!’
‘저 새끼 이따 연무장 100바퀴 돌려 버려.’
내가 눈치채면 안 되는 일이 대체 뭔데?
물어보려는 찰나 멀리서 날 부르며 헐레벌떡 뛰어온 릴리가 들고 있던 외투를 입혀 주며 여기저기 살펴보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 * *
“분명 저만 모르고 있는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니까요.”
“연회에서의 일로 다들 걱정하고 있는 거 아닐까요?”
요즘 들어 수상쩍은 휘턴 가 고용인들의 태도 변화에 대해 털어놓자 레티시아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날 저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게다가 며칠째 깨어나지 못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나 걱정이 되던지.”
레티시아는 내가 쓰러진 후 몇 번이고 병문안을 청했지만 디아르트의 거절로 올 수 없다가 오늘 드디어 저택을 방문한 차였다.
“병석에서 일어나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 하루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답니다. 그러니 평소 로에니 님을 가까이서 모시는 이들의 심정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요.”
눈물을 글썽이던 레티시아가 손수건으로 눈을 콕콕 찍었다.
물론 그녀의 말대로 안주인이 또다시 쓰러졌으니 사용인들이 걱정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유가 그것뿐이라기엔 이들의 행동이 석연치 않았다.
아니, 사용인들이나 기사단만 이상해졌다면 납득했을 것이다.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
꿀을 타 달콤한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던 난 뒷덜미에 쿡 박히는 기운에 어깨를 흠칫 굳혔다.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돌리다 테라스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금안과 마주쳤다.
‘또야, 또!’
또 저렇게 날 보고 있어!
“어머, 휘턴 공작이 저기 계셨군요.”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레티시아가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전혀 반갑지 않은데 말이야.’
최근 나를 가장 고민하게 만드는 건 바로 저 남자였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후부터 나를 대하는 디아르트의 태도가 눈에 띄게 변했다.
연무장과 집무실밖에 모르던 남자가 사방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일절 발걸음 않던 내 방까지 찾아오는 걸 보고 확신했다.
‘얘 지금 나 따라다니는 거지?’
갖은 수를 써야 한 번 볼까 말까 한 남자가 눈만 돌리면 보이는 게 여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딱히 나에게 무슨 용건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든지. 지켜본다든지. 응시하고 있다든지. 저렇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 닭 보듯 날 보던 남자가 갑자기 왜 이럴까? 솔직히 다른 남자였다면 나에게 관심이 있나 여기겠지만 상대는 디아르트였다. 그동안 안중에도 없던 여자에게 갑자기 흥미가 생겼을 리가 없을뿐더러 그는 이 세계관 속 남주였다. 여주인 아델리아와 이어질 운명이었고 그 예로 황실 연회에서 두 사람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졌…….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어떻게 된 거지?’
그간 달라진 사람들의 태도에 정신이 팔려 아델리아에 대해서 잊고 있었다. 쓰러지기 전의 마지막 기억은 아델리아의 이중적인 모습에 어안이 벙벙하고 있을 때 디아르트가 내 옆에 서던 것까지였다. 누가 봐도 내가 패악을 부린 것 같은 상황에서 디아르트는 아델리아를 놔두고 내게 먼저 물었었다.
‘괜찮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서 디아르트가 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운명의 상대인 아델리아였다.
“레티시아 님, 그날 제가 쓰러지고 나서 별일 없었나요?”
“글쎄요. 저도 경황이 없었던 터라…… 아!”
레티시아가 무언가 떠오른 듯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제법 소란스럽긴 했죠.”
“무슨 일 있었나요?”
“휘턴 공작이 쓰러진 로에니 님을 품에 안아 들고 연회장을 나갔거든요.”
“……네?”
디아르트가 그랬다고? 아델리아와 연회장에 남아 있던 게 아니라?
“무척 로맨틱한 장면이었어요. 공작에게 그런 다정한 면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다들 놀랐답니다.”
레티시아는 다시 떠올려도 설렌다는 듯 발그레한 볼을 하고 빙긋 웃었다.
그 디아르트가 거들떠보지도 않던 나를 안아 들었다니 나 같아도 놀랄 일이었다.
‘왜 자꾸 원작과 달라지는 거지?’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이상했다. 원작에서 둘은 서로에게 첫눈에 반해 춤을 추는 것으로 인연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날 아델리아가 소개되는 중요한 순간에 디아르트는 자리에 없었다.
첫 만남이 앞당겨진 것도 그렇고 아델리아가 내가 생각했던 사랑스러운 여자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나 두 사람의 만남이 원작과 달라지는 건 반가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가장 큰 힘이 되는 게 원작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으니까.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미래가 불확실해진다는 것만큼 불안한 일은 없었다.
‘뭐 그래도 남편이랍시고 나를 챙겼다고 하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
나는 슬쩍 말아 올라가는 입꼬리를 찻잔 뒤로 숨겼다.
“어머.”
레티시아가 놀란 듯 동그래진 눈으로 내 뒤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녀의 탄성에 막 고개를 돌리려던 참이었다.
“몸은 괜찮나?”
듣기 좋게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고개를 들어 올린 난 의자 등받이를 잡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디아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042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어리둥절해서 멀뚱히 쳐다보자 디아르트가 시선을 옮겨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세요, 휘턴 공작.”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파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직 해가 쨍하니 떠 있는데 무슨 소리야. 게다가 얼핏 들으면 권유하는 듯했지만, 강권이나 마찬가지였다. 디아르트는 정중한 언사와 다르게 위압적인 태도로 레티시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전하께서 오신 지 얼마 안 됐…….
“그러는 게 좋겠어요.”
내가 돌아보자 레티시아가 빙긋 웃었다.
“눈치 없이 오래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죠. 로에니 님도 아직 미령하실 테니 다음에 다시 보는 게 좋겠어요.”
“전 괜찮은걸요.”
내 말에도 레티시아는 미소 지으며 조만간 또 보자는 말과 함께 저택을 떠났다.
* * *
‘부러워요, 로에니 님.’
뭐가 부럽다는 거야? 마차에 오르기 전 귓가에 속삭인 레티시아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디아르트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직 찬 바람을 쐐서 좋을 게 없을 것 같군.”
“아무래도 다들 지금이 여름이라는 걸 잊어버린 모양이에요.”
어깨를 으쓱한 난 디아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함께 레티시아를 배웅한 후 내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한데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제 방은 아니겠죠?”
“맞아.”
디아르트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네? 또요?”
왜 또 오는 건데? 난 걸음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난 최근 내 방에 서류를 쌓아 놓고 처리하는 디아르트 때문에 말 못 할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다.
처음 그가 방으로 찾아왔을 때만 해도 정말 내게 마음을 열어서 병문안까지 왔구나, 그래도 인정이 있네, 감격했더랬다. 딱 삼 일까지는 그랬다. 나흘째부터는 신경 쓰여 미칠 노릇이었다.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남자와 말 한마디 없이 하루 종일 방 안에 갇혀 있는 건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신경에 거슬릴까 매 순간 조심하느라 좀이 쑤시고 온몸이 찌뿌둥했다.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조금만 움직이려 하면 바로 알 수 없는 눈빛이 따라붙었다.
“불편한가?”
“네.”
몹시.
디아르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걸 본 난 얼른 말을 이었다.
“제 방보다는 집무실이 집중도 잘 되고 능률도 높아질 것 같아서 그렇죠.”
“괜찮아.”
“제가 안 괜찮…… 흠흠,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이제 다 나았으니 더 신경 써 주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싱긋 웃는 나를 디아르트가 가만 내려다보았다.
“공작님께서 계시니 저도 편히 쉴 수가 없어서요.”
눈치도 빠른 남자가 왜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건지. 결국 직구를 던졌다.
“불편해도 참아.”
아니, 무슨 이런 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해? 사람이 어이가 없으면 말문이 턱 막히는 모양이다. 차마 받아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데 디아르트가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익숙한 냉랭함과 다른 빛을 띠고 있는 금안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대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으니.”
“네? 저에 대해서 어떤…….”
디아르트가 말없이 물끄러미 내려다보는데 어쩐지 그 눈빛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치 표범을 앞에 둔 토끼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부디 그 생각에 이빨이 들어 있진 않았으면 좋겠구나.
“하실 수도 있죠, 뭐. 계속하세요.”
한숨을 삼키며 먼저 걸음을 옮기자 디아르트가 따라붙었다. 오늘도 편히 쉬긴 글렀지만 앞으로 며칠만 참으면 된다. 곧 타운 하우스로 나갈 테니까.
난 마치 방금 생각난 것처럼 말을 꺼냈다.
“참, 사나흘 후에 나가려고 해요.”
“어딜?”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타운 하우스.”
“아.”
대수롭지 않은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니 디아르트가 생각났다는 듯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잊고 있었군.”
“바쁘셨으니까요.”
“굳이 나갈 필요 있나.”
“준비는 다 해 놨어요. 어차피 나갈 거라면 하루라도 빨리 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나가고 싶나?”
“네, 그럼요.”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을 무시한 채 꿋꿋이 앞만 보고 걸으며 대답했다. 디아르트는 말이 없었다. 구두 소리만 울려 퍼지는 긴 복도를 한참 걷던 끝에 그가 짧게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해.”
혹시 디아르트가 딴지라도 걸지 않을까 내심 조마조마했던 난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안심이 너무 이른 판단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 * *
“이봐! 여기에 짐이 떨어져 있잖아!”
램버트의 외침에 어깨에 짐을 얹고 있던 기사 한 명이 후다닥 달려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상자를 집어 들었다. 상자 안에서 덜그럭, 하고 물건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빠진 얼굴로 멀찍이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오늘은 그토록 기다리던 타운 하우스로 이사하는 날이었다. 아침에 눈을 뜬 난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휘턴 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서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마쳤더랬다. 그리고 언제쯤 출발할지 물으니 릴리는 ‘준비가 다 되면 부른다고 했어요.’라고 대답했다.
벌써 한참 전에 드레스와 보석 등 소지품과 짐을 정리해 놓은 상태였는데 뭘 더 준비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보다 마치 남의 일인 양 말하는 릴리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불과 두 시간 후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내 옆에서 팔짱을 끼고 기사들이 짐을 옮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디아르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내 불안한 예감이 틀렸기를 간절히 바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기사들이 뭐 하는 거죠?”
“보면 모르나? 짐 싣잖아.”
“그니까 그걸 왜 제 마차에…… 아니, 저 마차들은 대체 다 뭐예요?”
나는 내 짐이 실린 마차들 뒤로 주르륵 늘어선 마차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휘턴 가의 문장이 떡하니 박혀 있는 화려한 마차들이 나를 몹시도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를 따라 시선을 돌린 디아르트가 무던한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좀 단출하군.”
성에 차지 않는 듯 못마땅한 목소리였다.
“수도에 가면 사람을 부르도록 하지.”
저 소리가 이제 별거하는 전처의 새로운 터전을 신경 써 주는 의미였다면 참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어조는 옆으로 구르며 들어도 나와 함께 타운 하우스로 가겠다는 소리 같았다.
난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혹시…… 공작님도 타운 하우스로 가시려는 건, 아니죠?”
“맞아.”
제발 아니라고 대답해 달라는 나의 간절한 눈빛을 보지 못했는지 디아르트는 잔인하리만치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네가 왜?
처음 말을 꺼냈을 때만 해도 같이 가겠다는 소리는 없었잖아. 내가 타운 하우스로 나가겠다는 소리만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허락을…… 음? 흔쾌히는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무언가 못마땅한 듯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져 있던 것 같기도 하고.
별거 이야기를 꺼냈을 때 디아르트의 표정을 떠올려 보던 난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혹 떼려다가 혹 붙인 격이 되게 생겼는데.
“내가 타운 하우스로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갑작스러워서 그렇죠. 저번에 말씀드렸을 때만 해도 그런 내색은 없으셨잖아요.”
“아직 그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어.”
“그 생각은 대체 언제 정리가 되는 건데요?”
“글쎄.”
디아르트가 무책임한 얼굴로 내게서 시선을 돌려 기사들이 짐을 나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 돼. 이래서야 타운 하우스로 가는 의미가 없잖아.’
나는 결 좋은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디아르트를 노려보며 심호흡한 후 입을 열었다.
“공작님,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타운 하우스로 옮기는 이유는 이혼 후에 살 곳을 찾기 위해서예요. 한데 공작님과 같이 나가는 건 모양이 좀 이상하지 않나요?”
“이상할 게 있나?”
“이상하죠!”
“그럼 나가지 말든가.”
“전 나가야죠. 앞으로 어떻게 살지 천천히 계획을 세워야 하는걸요.”
“이곳에선 못 해?”
“아무래도 불편하죠.”
“그럼 같이 나가지.”
“그러니까 공작님이 왜요.”
“나간다며.”
“저만 나가면 되잖아요.”
최근 디아르트와의 대화는 쳇바퀴를 뱅글뱅글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계속 도돌이표 되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디아르트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지러운가?”
놀랍게도 걱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아주 미세하긴 했지만. 나는 내 어깨를 힘주어 감싼 커다란 손을 느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금안이 가까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043
“짐 다 실었습니다. 그만 마차에 오르셔도 됩…니다…….”
휘요한 금안에 사로잡혀 있던 난 밀토의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돌렸다. 호기롭게 외쳤다가 말끝을 흐린 밀토가 디아르트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보였다. 아차 한 표정이었다.
“흠흠, 그만 출발하죠.”
마차 앞에 서자 밀토가 도망치듯 달려와 손을 내밀었다. 그 위에 손을 얹으려는데 디아르트가 불쑥 끼어들었다.
“잡아.”
밀토를 막아선 디아르트를 올려다보았다. 황실 연회에서 에스코트를 해 준 것은 장소가 장소였던지라 보편적인 매너를 발휘한 것도 없잖아 있었다고 여겼기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아, 네, 고마워요.”
보채는 눈빛에 뒤늦게 대답한 난 그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가죽 너머로 온기가 느껴졌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차가운 표정이나 성격과 달리 퍽 따뜻한 체온이었다.
내 손을 힘주어 잡고 마차 위로 에스코트한 디아르트가 뒤이어 올라탔다. 밀토가 문을 닫자 적막함이 마차 안에 감돌았다. 요즘 디아르트와 함께 있을 때면 늘 그렇듯 숨이 막힐 것 같은 공기가 흘렀다.
앞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디아르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다음 달부터 공사를 진행할 거야.”
“네? 무슨 공사요?”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디아르트가 나를 빤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나. 영지민들을 위해 선로를 놓아 달라고.”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렇게 빨리 일이 진행될 줄은 몰랐던 터다. 사업 수완이 좋은 디아르트가 솔깃할 만한 제안이라고 여기긴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시행까진 시일이 꽤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황제 폐하께서 승낙하시던가요?”
황실의 특권을 쉬이 포기할 리가 없는데. 체면상으로라도 꽤 오래 줄다리기를 할 줄 알았다.
“뭐.”
디아르트가 짧게 대답했다. 그 별것 아니었다는 표정에서 당시의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푸근한 옆집 아저씨 같던 황제를 떠올린 난 디아르트를 상대로 반강제적인 승낙을 해야 했을 그가 측은해졌다.
“선로가 놓이면 그대의 말대로 뮤트로이 풀의 판매권도 제한할 생각이야.”
“다행이네요. 영지민들의 생활이 한결 윤택해지겠어요.”
황제의 안타까운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이렇게 내 말에 귀 기울여 줄 줄은 몰랐는데.’
원래라면 내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겠지. 원작에서 그는 로에니와 말 한마디 섞지 않을 만큼 그녀를 싫어했으니깐.
물론 사업가이니 이득이 될 만하다고 판단해서 진행했겠지만 어쨌든 내 말을 무시하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 줬다는 얘기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느새 숲을 지났는지 창밖으로 수도의 전경이 보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디아르트의 말에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던 난 고개를 돌렸다. 나도 모르는 새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던 모양이다.
“수도로 나오니 그렇게 좋은가?
“네, 좋죠. 뭔가 활기찬 게 보기만 해도 리프레시되는 것 같고.”
“그렇군.”
짤막하게 대답한 디아르트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모른 척 고개를 돌린 난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포털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수도로 오게 되어 좋은 점이 하나 있었다. 이 곤란한 적막감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 그나마 짧다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주시하는 디아르트가 점점 불편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틀 전에는 체하기도 했었지.’
무시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워낙 존재감이 남다른 남자라 그런지 자꾸만 시선이 가는 데다 성격이 그 모양이면 얼굴도 못날 것이지 하필이면 딱 취향대로 생긴 건지. 아까도 홀려서 잠깐 넋을 놓았었다.
디아르트의 관심을 얻게 되어 안 좋은 점도 있었다. 예전처럼 나를 보는 눈동자에 적대감과 멸시가 담겨 있었다면 그를 대하기 쉬웠을 텐데 그의 눈빛에 담긴 건 분명 호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나를 내려다보던 그의 깊은 금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짧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 내게 마음을 열었다고 해서 괜한 오해를 하면 안 된다. 자칫 방심하다간 원작 로에니의 데드 루트를 그대로 타게 될 테니까.
‘타운 하우스로 가면 릴리를 붙잡고 캐 봐야지.’
도대체 내가 쓰러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당황스러울 만큼 달라진 건지. 체해서 하얗게 질린 날 보고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오던 디아르트를 떠올린 난 미간을 좁혔다.
“공작님, 황실 연회에서 별일 없었나요?”
일단 디아르트 먼저 떠볼 생각으로 운을 뗐다.
“그대가 쓰러진 것 말고 말하는 건가?”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든가…….”
“글쎄.”
“시선이 가는 숙녀분은 없었나요?”
아델리아라든지. 아델리아 같은.
“무슨 의미지?”
디아르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하기야 아무리 이혼을 앞두고 있긴 하지만 아직 부부인데 아내가 남편에게 할 질문으로 적절치 않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원작이 자꾸만 달라지는 상황이었던 터라 불안해서 어쩔 수 없었다.
“별 뜻 없어요. 그저 혹시 그런 분이 계신다면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전 상관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어차피 우리는 이혼을 앞두고 있잖아요.”
혹시 내가 두 사람의 만남의 걸림돌이 되지 않았으면 해서 하는 말이었다. 물론 디아르트가 나를 신경 쓸 타입도 아니고 실제로 원작에서도 로에니를 두고 아델리아를 만났지만.
“이혼. 이혼. 입만 열면 이혼 타령이군.”
디아르트는 무언가 불쾌한 표정이었다. 나보다 더 이혼을 바라던 남자가 왜 저래. 내게서 기다렸다는 듯 이혼 서류를 채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구만.
“그러는 그대야말로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제가요?”
디아르트답지 않게 떠보는 듯한 말에 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연회장에서 만난 사람이라곤 황제와 레티시아, 재수 없는 귀부인 삼인방과 아델리아 뿐이었다. 아델리아가 신경 쓰이는 사람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 자비스 황태자도 있구나.
문득 연회장에서 묘하게 날이 선 채로 대치하던 디아르트와 자비스가 떠올랐다. 분위기상 디아르트가 말하는 사람이 자비스인 게 분명했지만, 모른 척해야 할 것 같다.
“이혼 후에 수도에 살 생각인가?”
모르쇠로 일관하던 난 디아르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무덤덤한 목소리만큼이나 무던한 표정이었다.
“음…… 아무래도 그게 좋겠죠.”
사실은 원작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외국으로 뜰 생각이지만 자세한 계획을 말할 필요는 없겠지. 일단 수도에서 집을 구해 살면서 천천히 이주를 진행할 생각이었으니 거짓말도 아니었다.
“뭐 하면서 지낼 건데?”
“글쎄요.”
이혼 후 삶을 떠올려 보던 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여행도 다니고 좀 쉬다가 좋은 사람 만나면 연애도 하고 그래야죠.”
“……연애?”
저주를 풀기 위해 남자를 만나러 다니겠다고 대답할 수는 없어 돌려 말한 건데 어째 디아르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돌리고 말이 없던 디아르트의 시선이 곧 내게로 돌아왔다.
“남자를 만나고 싶은 건가.”
“괜찮은 사람이라면 그러고 싶단 말이죠. 어렸을 때부터 공작님만 따라다니느라 제대로 된 교제를 해 본 적도 없잖아요.”
“후회한다는 말로 들리는군.”
“후회하죠.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제가 왜 그랬나 싶답니다. 괜한 오기와 아집으로 오랜 세월을 서로에게 상처만 주었잖아요. 이제라도 시야를 넓혀야죠. 공작님도 주위를 한번 잘 둘러보세요. 가까운 곳에 공작님과 딱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답니다.”
“아까부터 나를 다른 이에게 떠넘기지 못해 안달 난 것 같이 구는군.”
“떠넘기다뇨.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저 공작님께서 좋은 배필을 찾아 행복하셨으면 해서 하는 말이랍니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얼른 변명하자 디아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게 각이 진 턱선에 힘이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까.
그는 타운 하우스에 도착할 때까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044
“내려.”
타운 하우스에 도착하자 먼저 마차에서 내린 디아르트가 손을 내밀었다. 마차에서 내내 무언가 화난 사람처럼 말이 없기에 휑하니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손을 올리자 디아르트가 가볍게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나를 내려 주었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주인마님.”
미리 마중 나와 줄지어 서 있던 타운 하우스 내 사용인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디아르트는 별말 없이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럼 그렇지……. 속으로 욕을 삼킨 채, 난 긴장했는지 잔뜩 경직되어 있는 사용인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그 뒤를 쫓았다.
저택 내부로 들어선 난 벌어지는 입을 서둘러 닫았다. 마차를 타고 들어오며 생각보다 거대한 타운 하우스의 외관에 놀랐는데 내부 또한 상당했다. 보통 타운 하우스는 수도에 둔 별장 같은 개념이었지만 소유주의 지위와 영향력의 척도가 되기도 했다.
물론 사용인들이 지내는 마을도 따로 있는 본 저택만큼은 아니었지만 수도 내에서 황성 다음가는 크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다.
‘하기야 그 휘턴 공작가이니.’
휘턴 가는 동시대에 두 명의 공작을 보유하고 있었다. 선대가 죽기 전 작위를 물려주는 것이 보통이기에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만큼 제국 내에서 영향력이 셀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황위 찬탈도 쉽게 이룰 수 있었고.
모든 게 몰빵된 남주 버프를 생각하며 걷던 난 문득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관을 통과해 걸은 지 한참이 되었건만 디아르트가 여전히 내 옆에 있었고 그 뒤로 그의 짐을 든 시종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요즘 들어 날 따라다니는 남자이긴 했지만 이렇게 짐까지 줄줄 달고 쫓아오니 싸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방으로 가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가고 있는데.”
“이쪽은 내실 방향인 것 같은걸요.”
휘턴 저택은 동쪽 내실과 서쪽 외실로 부부의 생활 공간이 나뉘어 있었다. 보통 타운 하우스의 구조는 본저를 본떴기에 그는 지금 나와 정반대의 홀을 걷고 있어야 했다.
“몰랐나?”
“뭐, 뭘요?”
불안함에 말이 절로 떨렸다.
“타운 하우스에는 내실과 외실이 나뉘어져 있지 않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외가 같은 방을 쓴다는 말이지.”
“……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 얘는 무슨 같은 방을 쓴다는 말을 저렇게 덤덤한 얼굴로 할 수가 있는 건지. 당황해서 걸음을 멈추자 디아르트도 멈춰 서서 내려다보았다.
뒤에서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사용인들을 슬쩍 본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제가 손님방을 쓸게요.”
“왜.”
왜냐니. 우리가 이혼을 앞둔 상황이라는 걸 잊은 걸까. 애초에 내가 타운 하우스로 나오려고 했던 이유가 뭐였는데.
“이혼할 사이에 같은 방을 쓰는 건 이상하잖아요.”
“아직 이혼한 건 아니지 않나.”
“그래요. 아직. 아직이라는 부사가 붙은 건 곧 남이 된다는 거잖아요.”
“지금은 남이 아니라는 소리기도 하지.”
“네?”
그게 무슨 궤변이야. 황당함에 말문이 다 막혔다. 내가 어버버거리고 있자 디아르트가 내 허리에 손을 대었다. 생각지도 못한 스킨십에 허리가 움찔 떨렸다. 디아르트가 그대로 나를 밀었다. 그 기운에 못 이겨 결국 그대로 방까지 도착하고 말았다.
사용인들이 화려하게 조각된 마호가니 문을 열었다. 확실히 함께 쓰는 방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본 저택에 있는 방보다 더 넓은 것 같았다. 깊게 들어오는 햇살이 닿은 가구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 보던 난 쓸데없이 넓은 침대에서 멈칫했다.
네 개의 기둥에 실크를 묶어 설치한 캐노피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다음으로 푹신해 보이는 이불과 두 개의 베개가 차례로 보였다. 본 저택의 내 방에도 베개가 두 개였지만 디아르트의 말을 듣고 나서 보니 무척이나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괜히 민망해져 고개를 모로 돌렸다.
“쉬고 있어. 다녀오지.”
고든에게 무언가 은밀하게 전달받은 디아르트가 내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다녀오라고 하자 디아르트가 묘하게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등을 돌렸다.
그가 나가자 난 진이 다 빠져 소파에 늘어졌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드디어 자유라는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한여름 밤의 꿈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멀어지려고 했더니 왜 같은 방까지 쓰게 된 걸까. 어이가 없어 웃음도 안 나왔다.
나를 본 릴리가 사용인들을 내보낸 후 다가왔다. 소파 앞에 무릎 꿇고 앉은 릴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님, 이사하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목욕 먼저 하시겠어요? 따뜻한 물을 준비할까요?”
이사라고 해 봤자 몇 시간도 안 되는 짧은 거리였을 뿐 내가 지친 이유는 순전히 디아르트로 인한 정신적 타격 때문이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릴리가 안절부절못했다.
“그럼 달콤한 케이크라고 내올까요? 아니면 침대에서 좀 쉬시겠어요?”
낑낑거리는 강아지처럼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릴리를 보며 그녀에게 물어볼 좋은 타이밍이라는 걸 알았다.
“릴리.”
“네, 마님. 말씀하셔요.”
“내가 쓰러진 사이에 무슨 일 있었니?”
“네, 네? 벼, 별일 없었는걸요.”
확실히 뭐가 있구나. 어깨를 파득 떨며 눈을 돌리는 릴리를 보며 나는 확신했다.
“요즘 들어 다들 나만 보면 어쩔 줄 몰라 하잖니.”
“그, 그런 적 없…….”
“그런 적 없다는 소린 하지 말렴. 내가 바보도 아니고 다들 태도가 달라졌는데 모를 줄 알았어?”
“…….”
입술을 꾹 다물고 내 눈치만 살피는 릴리를 보니 갑자기 배신감이 치솟았다. 빙의한 후 친동생처럼 가장 가깝게 여겼는데 나한테 숨기는 게 있다니.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은 난 부러 더 냉정하게 말했다.
“내게 숨기는 게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진 않구나. 그만 물러가렴.”
“마, 마님………….”
대번에 울상이 된 릴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물쩍거렸다. 나는 다시 한번 차갑게 축객령을 내렸다.
“어서 나가지 않고 뭐해. 이젠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거야?”
“그게 아니에요, 마님.”
릴리가 내 무릎을 잡고 매달렸다. 울먹이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져서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그러자 그 모습이 더 내치는 모양새로 보였던 모양이다. 내 드레스를 붙잡고 한참 주저하던 릴리가 결국 입을 달싹였다.
“사실은…….”
드디어 입을 여는 것 같아 귀를 쫑긋 세웠다. 쉬이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인지 한참을 주저하던 릴리가 날 걱정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놀라시면 안 돼요, 마님. 충격받으시면 몸에 안 좋을 수도 있어요.”
“대체 뭔데 그래.”
“그게…….”
그러고도 한참을 뜸을 들이는 릴리 때문에 속이 터질 것 같아 머리를 짚었다. 그러자 릴리가 사색이 되어 매달렸다.
“머리가 아프신 건가요? 당장 의사를 불러올게요.”
“아니, 아니야. 괜찮아.”
난 릴리의 팔을 잡고 계속 말하라고 종용했다. 내 안색을 살피던 릴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회에서 마님이 쓰러지고 바로 주치의를 불러왔었어요. 근데 의사가 하는 말이…….”
“의사가 뭐라 그랬는데?”
“마님이 푸이탄…… 병이라고…….”
릴리는 참혹한 표정으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훌쩍이는 릴리를 앞에 두고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푸이탄병이 뭔데?’
한참 동안 울먹이는 릴리를 겨우 진정시키고 푸이탄병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이 세계의 희귀병인 푸이탄병과 저주의 증세가 비슷한 탓에 오해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그제서야 그동안 나만 보면 이상하게 굴던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들 내가 곧 죽을 시한부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제일 먼저 머리를 스쳐 가는 생각은 하나였다.
‘개이득인데?’
디아르트 역시 내가 시한부라고 생각해서 그동안 나름대로 신경을 써 줬단 말이었다. 부쩍 가까워진 디아르트와의 거리감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이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내게 득이 될 것 같았다.
디아르트의 냉정한 성격을 봤을 때 내가 희귀병을 앓고 있는 시한부라고 해서 마음을 써 준다는 게 의외긴 했지만 이게 무슨 굴러 들어온 호박이란 말인가.
나는 입술 사이로 비죽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045
갑자기 부담스럽기 그지없던 저 넓은 침대가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시한부인 줄 알고 잘해 주는 거면 내가 웬만큼 이상한 행동을 해도 받아 주지 않을까. 자면서 모른 척 팔 한번 만져 보거나 손 한번 잡아 본다고 해도 어차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봐줄 거 아냐.
잠시 상상해 보며 음흉하게 웃던 난 고개를 드는 릴리를 보고 얼른 표정 관리를 했다.
“놀라셨죠?”
“조금.”
생각지도 못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황이니 충격받은 척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얼어붙은 표정을 본 릴리가 필사적으로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마님. 요즘 의학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데요. 분명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푸이탄병에 걸린 걸 알아서 너도 그렇고 다들 이상하게 굴었던 거구나.”
“주인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셨지만 다들 마님이 걱정되다 보니…….”
릴리가 내 눈치를 살폈다. 생각에 잠긴 척 잠시 말을 하지 않던 난 몸을 일으켰다. 나를 따라 릴리가 얼른 일어섰다.
“목욕을 하고 싶은데.”
“그럼 제가 얼른 따뜻한 물을 받을게요.”
갑작스러운 변수에 생각도 정리할 겸 혼자 있고 싶어 핑계를 대니 뭐라도 해 주고 싶은 듯 안절부절못하던 릴리가 얼른 몸을 돌렸다. 한데 그대로 방을 나서는 게 아니라 방 안에 있는 다른 문을 열기에 의아해서 따라가 본 난 입이 벌어졌다.
본저와 달리 욕실이 문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방이 통유리창으로 되어 그 너머로 푸릇한 숲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힐링되는 뷰에 놀라는 것보단 현실적인 걱정이 먼저 들었다.
“밖에서 다 보이는 거 아냐?”
마도구가 달려 있는 수도를 비튼 릴리가 고개를 돌렸다.
“밖에선 안 보이도록 마법을 걸어 놓았다고 들었어요. 겉으로는 그냥 벽돌로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마음이 놓인 난 릴리의 시중을 받아 옷을 벗었다. 그 사이에 딱 좋은 온도로 받아진 욕조 안으로 라벤더 오일을 떨어트린 릴리가 수발을 들기 위해 무릎을 꿇으려 했다.
“오늘은 나 혼자 할게.”
“네? 하지만…….”
“생각할 것도 있고.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울적한 표정을 짓자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릴리가 몸을 일으켰다.
“제가 필요하시면 바로 불러 주세요.”
“그래, 알았어.”
릴리가 풀이 죽은 얼굴로 훌쩍이며 욕실을 나갔다. 그제야 한숨 돌린 난 발끝부터 천천히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마도구로 차갑게 만든 공기와 달리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노곤하게 늘어졌다. 거기에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보고 있으니, 마치 숲속 한가운데에서 목욕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디아르트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긴장되어 있던 근육이 사르르 녹았다. 여기에 와인 한잔 마시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욕조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늘어져 있던 난 이내 몸을 바로 세웠다.
‘그나저나 이제 어쩔까.’
설마 불치병으로 오해받고 있을 줄은 몰랐다. 빙의 전에는 정말 시한부였기에 아이러니처럼 느껴졌다.
여러모로 내게 손해될 일은 없었다. 다만 시간이 좀 지나고 생각해 보니 이걸 빌미로 디아르트에게 스킨십을 시도하는 건 문제가 좀 있었다.
변태 같은 건 둘째치고 위험했다. 디아르트와 같은 침대에 누운 모습을 상상해 본 난 고개를 저었다.
빙의한 지 벌써 몇 달째. 그동안 디아르트만큼 잘생긴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전생에서 남자는 외모라고 외치며 누구보다 얼굴에 진심이었던 내가 가끔 인성마저 잊게 만드는 미모를 두고 평온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까처럼 홀리면 안 돼.’
게다가 한 침대를 쓰다가 저주가 발현되어 제어하지 못하고 달려들기라도 하면 끔찍했다.
마차에서 다짐했듯 자칫 로에니의 원작 루트를 그대로 타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원작의 러브 라인에 끼어들게 되는 순간 파멸이니까. 이중인격이었던 아델리아를 떠올린 난 새삼 소름이 돋아 부르르 떨었다.
“그나저나 그 남자한테 동정심 같은 게 있는 줄은 몰랐네.”
요즘 들어 호의적이었던 이유도 죽음을 앞둔 사람에 대한 일종의 인정 같은 거였던 모양이다.
“모르겠다. 일단 좀 쉬자.”
따뜻한 물을 손으로 떠서 얼굴에 끼얹은 난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한참 물에 몸을 담그고 나왔을 땐 이미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릴리가 미리 준비해 둔 가운을 걸치고 수건으로 머리카락 물기를 닦으며 욕실을 나섰다. 초 몇 개만 켜 놓은 방은 어두침침하면서도 퍽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새 해가 졌네.”
까맣게 내려앉은 창밖에서 시선을 돌린 난 화장대로 향했다. 너무 오랫동안 목욕을 해서인지 노곤하게 잠이 쏟아졌다.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날 찾으러 오지 않은 걸로 보아 이대로 냅두려는 모양이었다.
저녁 식사는 온 가족이 함께해야 한다는 가풍마저 시한부 앞에서는 패스인가 보다. 그 성격 더러운 디아르트마저 꼬박꼬박 저녁 식사에 참석했었는데. 편하긴 편…….
‘잠깐.’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잠시 이 방을 디아르트와 함께 쓴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는 최근 업무도 내 방에서 했었고, 나가기 전엔 다녀오겠다는 말도 했다. 게다가 저녁 시간도 아니었다.
싸한 느낌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갔다. 왠지 뒤를 돌아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가만히 서서 뭐 하는 거지?”
“으아악!”
등 뒤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펄쩍 뛴 난 그대로 발이 꼬이면서 몸이 휘청하고 기울어졌다.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려는 찰나 커다란 손이 허리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단단하게 허리를 휘감은 팔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게 된 난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는 디아르트의 금안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주위가 고요해졌다. 낮에 마차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상에 디아르트와 나만 남은 것 같았다.
공기 중으로 묘하게 긴장이 흘렀다. 허리를 잡은 커다란 손이 예민하게 느껴져 무심코 입술을 핥았다. 그러자 일순 디아르트의 미간이 좁아지더니 내 어깨를 잡아 멀찍이 밀쳐 냈다.
나는 디아르트를 흘기며 입술을 삐죽였다. 입술 핥는 게 그렇게 더러워 보였나 싶다. 발끝부터 간질거리던 기운이 순식간에 물러갔다.
“옷부터 입는 게 좋겠군.”
고개를 모로 돌린 디아르트가 말을 이었다. 네에~ 하고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등을 돌리는데 뒤에서 디아르트가 물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지내는 건가?”
“뭐 가요?”
“씻고 그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나?”
난 내 차림새를 내려다보았다. 허벅지까지만 가린 가운 아래로 맨다리를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고, 방금 일어난 사고로 인해 벌어진 앞섶 사이로 가슴골이 드러나 있었다. 목덜미에 달라붙은 채 마르지 않은 보라색 머리카락에선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제야 반나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디아르트와 마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방 안이 어두워 다행이었다. 조금만 환했어도 디아르트가 빨개진 내 얼굴을 봤을 테고 그럼 더 창피했을 것 같다.
당혹감과 수치스러움으로 움츠러드는 어깨를 당당히 편 난 부러 더 아무렇지 않은 듯이 가장했다.
“잠시 이곳이 제 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었어요.”
머리에서 물이 떨어지든 말든 드레스룸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가장 가까운 문을 잡고 여니 소파와 커피 테이블이 놓여 있는 작은 방이 나왔다.
“그쪽은 개인 거실이야.”
“………….”
드레스룸은 저쪽. 하고 디아르트가 어느 방인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뭔 놈의 방에 문이 이렇게 많담!’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쪽팔림을 애써 무시하며 디아르트의 손가락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거기가 아니라.”
너무 서두른 탓인지 뒤에서 붙잡는 디아르트의 목소리가 말끝을 맺기도 전에 난 바닥에 놓여 있는 상자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
“악!”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앞으로 고꾸라진 난 무릎을 꿇은 상태로 넘어졌다. 러그가 깔려 있다지만 넘어질 때 충격으로 무릎에 통증이 몰려왔다. 쓸린 무릎을 쓰다듬는데 불쑥 손이 내밀어졌다. 그 손을 보다 고개를 드니 디아르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046
내게 내밀어진 디아르트의 맨손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어울리지 않게 하얗고 곧은 손가락이었다.
“계속 앉아 있을 건가?”
디아르트의 채근에 정신이 든 난 얼른 그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소스라치게 놀라서 그 손을 내팽개치듯 떨구어 냈다.
“왜 그러지?”
디아르트가 무척 기분 나쁜 얼굴로 물었다. 도와주고자 내민 손을 그렇게 패대기치면 기분이 상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난 그의 심기를 살필 여력이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방금 뭐였지?’
처음으로 맞닿은 디아르트의 손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던 기운은 지금껏 자비스 황태자나 기사들과의 접촉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감각이었다.
이건 그러니까 그때와 비슷했다. 처음 저주의 발현으로 쓰러졌던 날 목이 타는 듯한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손끝에서부터 퍼지던 청량감.
메마른 땅 위에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던 그때보다 자극은 덜 하지만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듯한 기운은 도리어 더욱 강했다. 아주 잠깐의 접촉이었을 뿐인데 기사들의 에스코트를 십여 분 받았을 때보다 에너지가 차는 기분이었다.
“이봐.”
디아르트가 여전히 손을 거두지 않은 채 미간을 찌푸렸다.
“못 일어나겠나?”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버버거리고 있는 나를 가만 내려다보던 디아르트가 갑자기 재킷을 벗더니 내 가슴 위를 덮었다. 그리곤 한 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무릎 사이로 손을 넣어 그대로 안아 올렸다.
“꺅!”
그제야 꼴사납게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문 난 짧게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동시에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감았다. 내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잠시 멈칫했던 디아르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나를 내려놓은 곳은 부담스러운 그 커다란 침대 위였다. 디아르트가 침대까지 나를 안아 옮겼다는 사실에 또 2차 충격을 받은 사이 그는 내 무릎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눈으로만 확인하는 게 성에 안 차는지 무릎을 잡았다.
동시에 다시 그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하고도 강렬한 자극이 파도가 밀려오듯이 몰아쳤다.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의 맥박이 귓가까지 쇄도했다. 진정시켜 주던 첫 저주의 발현 때와 달리 벅차서 호흡하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말도 못 하고 그 감각들을 받아 내고 있을 때 내 사정이라고는 조금도 모를 디아르트는 다른 한 손으로 종아리를 잡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발목이나 무릎이 상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아픈가?”
“아뇨! 괜찮아요!”
몰아닥치는 낯선 감각에 당황한 난 디아르트의 손을 밀어냈다. 등줄기가 쭈뼛 설 정도로 말초 신경을 건드리는 그와의 접촉이 순간 무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디아르트는 거부하는 내 손길에 순순히 물러서면서도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이불을 끌어와 덮어 주며 말했다.
“뼈에 무리가 간 건 아닌 것 같군. 쉬어.”
“아, 저기.”
나도 모르게 돌아서는 디아르트를 붙잡았다.
“손님방으로 가시는 건가요? 불편하실 텐데 제가 옮겨도 돼요.”
“됐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짧게 대답한 디아르트가 문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에 침실이 하나 더 있어.”
“아.”
같은 방을 쓴다더니 그런 의미였어? 하기야 암만 내가 시한부라고 해도 같은 침대를 허락할 리가 없지.
안도감과 함께 아주 살짝 아쉬움이 들었다. 아침에 디아르트와 함께 눈을 뜨며 어떤 기분일지 조금 궁금하긴 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인사하자 디아르트가 별말 없이 성큼성큼 걸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난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고마워요.”
내가 내쳤을 때도 내민 손을 거두지 않은 것이나 나름 신경 써서 끝까지 날 살펴봐 준 점이 고맙긴 하니까.
내 말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던 디아르트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배고프진 않나?”
“네?”
“식사를 하지 않았잖아.”
“아, 음. 달콤한 밀크티가 마시고 싶긴 하네요.”
무심코 막 떠오른 음식을 얘기하자 디아르트가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다른 침실로 들어갔다. 그제야 목 끝까지 차올라 있던 긴장이 쑥 내려갔다. 한숨을 내쉰 난 머리를 쓸어올렸다. 아직 마르지 않은 축축한 머리카락이 손길을 따라 뒤로 넘어갔다가 다시 옆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아직까지도 저릿한 기운이 남아 있는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디아르트의 손가락이 닿았던 피부에 열감이 느껴졌다.
“대체 뭐였지?”
지금까지 다른 이성과 접촉을 하면 흘러들어 오는 그 미적지근한 기운들은 감질나기 그지없었다. 자비스와는 노래 한 곡이 끝날 때까지 춤을 춘 적도 있었지만 무언가 빠진 듯 허전하기만 했었다. 이래서 중화에 육 개월이나 걸린다고 했구나, 혀를 찼더랬다.
하지만 디아르트와의 짧은 접촉은 정반대였다. 꽉 들어찬 무언가가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는 거처럼 예민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감질났다. 더 닿고 싶다는 욕망이 치솟았다.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선대 휘턴 공작은 사랑하는 아내 우슬라와 저주를 풀었다고 되어 있었다. 만약 이 저주의 중화가 휘턴 가에만 특이하게 반응하는 거라면?
‘그 육 개월이라는 기간이 휘턴 가와 접촉했을 때를 말하는 거면?’
목덜미가 오싹해졌다.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휘턴’ 가에 걸린 저주였다.
“설마.”
디아르트와의 그 강렬한 접촉으로도 육 개월이 걸린다는 소리는 다른 남자와는 평생에 걸쳐도 중화를 못 할 수 있다는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럼 진짜 엿 되는 건데.”
그동안 세워 놨던 원작 탈출 계획이 무산되는 건 둘째치고 디아르트에게 매달려야 한단 말이었다.
“아, 망할.”
훅 혈압이 오르고 뒷골이 다 찌릿했다. 나는 디아르트가 사라진 문을 노려보았다. 차라리 디아르트에게 다 털어놓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곧 죽을 사람 소원도 들어주지 않을까.’
딱 육 개월만 진짜 부부처럼 살 부대끼며 살아 보고 싶다고, 그게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라고 하면 디아르트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까. 보기와 달리 꽤 인정이 있는 것 같고…….
“좋네.”
죽기 딱 좋아. 푸이탄병으로 죽기 전에 디아르트가 휘두른 칼을 먼저 맞겠어.
이대로 불치병처럼 저주를 풀지 못한 채 평생 안고 가게 되는 걸까? 아니, 만약 이렇게 계속 제대로 된 중화를 하지 않으면 저주에 잡아먹히게 되는 건 아닐까.
불안함이 밀려온 난 이불을 꼭 쥐었다.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노크했다.
“마님, 릴리예요.”
“들어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트레이를 든 릴리와 다른 하녀가 들어왔다. 아직 젖은 머리카락을 본 릴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얼른 다가왔다. 협탁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은 릴리는 찻잔에 담긴 홍차에 우유를 붓고 꿀을 탄 후 내밀었다.
“드셔요.”
“고마워.”
난 릴리에게 받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보기만 해도 고소함이 올라오는 밀크티였다.
“주인님께서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그랬어?”
“무릎도 다치셨다면서요.”
릴리가 속상한 얼굴로 옆에 서 있는 하녀의 손에 들려 있는 구급상자를 받아 무릎 꿇고 앉았다.
“괜찮아. 안 다쳤어.”
“일어나지 못하셨다고 들었어요. 어머, 무릎이 살짝 까진 것 같아요. 많이 아프셨죠? 얼른 치료하고 머리카락 말려 드릴게요. 그대로 자면 감기 걸린단 말이어요.”
릴리는 제가 더 아픈 얼굴로 소독약을 발랐다. 나는 그녀의 걱정 어린 잔소리를 들으며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다. 꿀이 들어가 달콤한 밀크티를 마시니 방금까지 불안했던 마음이 한결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문득 시선이 디아르트가 들어간 방문에 닿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답지 않게 서툰 친절은 그저 곧 죽을 사람을 향한 인정일 뿐이다. 괜한 착각을 하면 곤란하다. 나는 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047
“……에니 님.”
“………….”
“로에니 님.”
레티시아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난 고개를 들었다. 레티시아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와 시내 찻집에 있다는 걸 상기하고 얼른 사과했다.
“무슨 고민 있으신가요?”
우환이 낯빛에 드러난 건지 레티시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진심으로 염려해 주는 그녀를 보며 차마 솔직하게 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에게 저주니, 기운이니 하는 고민을 털어놓을 순 없으니까. 특히 어제는 하마터면 그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뛰어 들어갈 뻔했다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었다.
한숨을 삼킨다고 삼켰는데도 티가 났는지 레티시아가 내 앞으로 딸기 쇼트케이크를 내밀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단 게 최고랍니다.”
말할 수 없는 고민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리는 게 보였다. 그 친절한 배려에 난 기꺼이 포크를 들었다.
소소한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레티시아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입술을 살짝 벌렸다.
“로에니 님, 실례인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해도 될까요?”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내 허락에 레티시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휘턴 공작과는 예정대로 이혼하시는 건가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뜨자 레티시아가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사과했다.
“너무 내밀한 질문이었죠. 사과드릴게요.”
“아니에요. 생각지 못한 질문이라 좀 놀랐을 뿐이에요. 한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아무렇지 않은 듯 구니 안심한 레티시아가 말을 이었다.
“사실은 어제 아버님께서 두 분의 이혼 허가를 내리셨거든요. 지금쯤 신전으로 이혼장을 보내셨을 거예요. 황제의 승인을 받은 데다 상대는 휘턴 공작이니 신전에선 가문의 허락만 맡으면 바로 처리하겠죠.”
“생각보다 더 진행이 빠르네요.”
남들은 최소 반년은 걸린다는데 이렇게 빨리 처리되다니. 이런 게 바로 권력이구나.
“무르려면 서두르셔야 해요.”
레티시아의 눈동자가 반짝였지만 난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무르다니요?”
장난스러움이 묻어 있던 레티시아의 표정이 당혹스러워졌다.
“저번에 뵈었을 때 분명…….”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달싹이던 레티시아가 미소 지었다. 무언가 하려던 말을 속으로 삼키는 듯했다.
“아니에요. 두 분의 사정이 있으시겠지요.”
무언가 말을 하다 만 것 같아 찜찜했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안 그래도 요즘 디아르트 때문에 골치가 아팠던 터라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케이크 위에 놓인 딸기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은 난 달콤하게 퍼지는 맛을 음미했다.
‘이제 정말 디아르트와의 이혼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토록 기다리던 시간이었는데 마냥 반갑지는 않았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차라리 이혼할 때까지 디아르트와 접촉하지 않았더라면 레티시아의 말이 얼마나 반가웠을까.
요즘 일생일대의 선택을 두고 저울질하는 느낌이다. 갑자기 죽을지도 모를 저주를 안고 디아르트와 이혼할 것인가. 아니면 저주를 풀겠답시고 들러붙어 있다가 디아르트의 칼에 맞을 것인가.
‘지옥에서 온 밸런스 게임이지, 이게.’
어느 쪽이든 끔찍하긴 마찬가지였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일단 이혼을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어쩌면 평생 그저 좀 불편하게 살 뿐 죽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디아르트에게서 그런 기운을 느꼈던 건 의외로 그와 나의 상성이 잘 맞는 것뿐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선택해 놓고도 하루에 몇 번씩 마음이 바뀌는 터라 혼란스러운 요즘이었다.
“참, 로에니 님. 이따 제 동생이 잠깐 들른다고 했는데 괜찮을까요?”
미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의식해서인지 레티시아가 부러 더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동생분이라면…….”
난 설마 하는 생각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에드거라고 작년 황실 무도회에서 한번 보셨었죠?”
난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가렸다. 벌써 두 번이나 바람 아닌 바람을 맞은 터라 어쩌면 환상의 동물이 아닐까 하는 뻘한 생각까지 들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만남의 기회였다.
“이따 봉사 활동에 함께 가기로 했답니다.”
“어쩜.”
에드거는 원작처럼 다정하고 착한 모양이구나.
“언제 오실까요?”
“곧 도착할 것 같아요.”
레티시아가 체인 시계를 확인하고 답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최애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이런, 반가운 얼굴도 함께 있군.”
난 전혀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자비스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대는 내가 반갑지 않은 모양이지만.”
자비스가 짓궂게 웃었다. 아무래도 에드거는 환상의 동물이 틀림없었다. 나는 내 앞에 앉는 자비스를 허망하게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가 여기엔 어떻게 오신 거죠? 에드거는요.”
“몸이 좋지 않다는구나.”
“그래서 대신 오신 건가요? 봉사 활동 같은 데 관심 없으시잖아요.”
“그 핑계로 나온 거지.”
자비스가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하자 레티시아가 질색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고개를 돌렸다.
‘나란히 앉아 있는 걸 보니까 확실히 닮긴 닮았네.’
진중하면서도 소녀 같은 레티시아와 능글맞은 바람둥이 자비스는 성격은 정반대였지만 얼굴은 확실히 빼닮았다.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니 영상에서만 보던 현실판 남매를 눈앞에서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저렇게 악의 없이 다툴 수 있다는 건 사이가 좋다는 뜻이겠지.’
정말 사이가 나쁘면 저렇게 싸우지도 않는다. 문득 전생에서 내게 돈을 뜯어 갈 궁리만 하던 가족들이 떠올랐다. 사는 내내 얼마나 시달렸으면 빙의한 후 제일 기뻤던 게 그 사람들을 더 이상 상대 안 해도 된다는 거였다. 분명 내가 죽을병에 걸렸던 것도 그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생의 육신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대로 죽었다면 그렇게 바라던 보험료를 왕창 받아 냈겠네. 그래 봤자 또 금방 도박으로 날릴 게 뻔하지만. 아주 비참하게 망해 버려라. 난 여기서 금수저로 돈 펑펑 쓰며 잘 먹고 잘 살 테니까.
마음속으로 그들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며 침잠하는 기분을 애써 끌어올렸다.
‘그러고 보니 로에니도 가족과 사이가 나쁜 모양인데.’
그저 데면데면한 사이 정도가 아닐까 했던 예상과 달리 로에니 역시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아버지에게서 거의 방치된 모양이다. 귀족 영애의 가장 큰 이벤트인 데뷔탕트조차 혼자 내보내 지금까지 귀부인들의 조롱을 받게 하는 거 보면.
레티시아도 말했지만 귀족들이 이혼할 땐 양 가문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래서 저번에 페이셔 공작에게 편지를 보냈었고 며칠 전 답장을 받았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정갈한 글씨체는 흔한 안부 인사 하나 없이 곧 수도로 오겠다는 통보만 전해 왔다.
‘우리 가족 같은 사람이면 어쩌냐.’
원작에서 단 몇 줄 적혀 있는 페이셔 공작에 대해 알 턱이 없는 난 부디 그가 적당히 나쁜 아버지이길 바랐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세요?”
레티시아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깬 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말다툼을 멈춘 레티시아와 자비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미안해요. 두 분이 보기 좋아서 저도 형제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고 있었답니다.”
보기 좋다는 나의 말에 표정이 일그러지는 레티시아와 달리 자비스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능청맞게 대꾸했다.
“하긴 나같이 좋은 오라버니가 어디 있겠니.”
“제 어깨에서 당장 손 내리세요.”
단호하게 일갈하며 그의 손을 떼어낸 레티시아가 날 보며 싱긋 웃었다.
“로에니 님, 부디 그런 끔찍한 말씀은 거두어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진심이었던 터라 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늘도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마음 같아선 저녁까지 함께하고 싶지만, 봉사 시간이 다 되어서 어쩔 수가 없네요.”
레티시아가 내 손을 붙잡고 아쉬움을 토해 냈다. 몇 시간 내내 그녀의 수다를 듣느라 귀가 조금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며칠 동안 복잡했던 머릿속이 잠시라도 편해진 나도 맞장구쳤다.
곧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잡은 후 레티시아와 헤어진 난 거리로 발을 내디뎠다. 타운 하우스로 돌아가기 전에 서점에서 책 몇 권 살 생각이었다. 소화를 좀 시킬 겸 마차 대신 걷고 있는데 뒤따라 붙은 이가 너무나 신경 쓰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왜 자꾸 따라오시는 거예요, 황태자 전하.”


#048
일정한 간격을 두고 쭐레쭐레 나를 쫓아오고 있던 자비스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러고는 타격이 조금도 없는 얼굴로 주위를 휙휙 살피더니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들어왔다. 그가 검지를 내 입술 가까이 대며 속닥였다.
“갑자기 황태자라고 부르면 다들 놀랄 것 아닌가. 나는 될 수 있으면 눈에 띄고 싶지 않네.”
금발에 액세서리가 잔뜩 달린 화려한 제복까지 입고 누구보다 눈에 띄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 계속 상대해 봤자 피곤할 게 뻔했다.
“제게 볼일이 있으신 건가요?”
“글쎄. 딱히 그런 건 없네만.”
“그럼 이만.”
미련 없이 등을 돌리려는데 자비스가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곤 낭패라는 표정으로 손을 놓았다.
“이런, 급한 나머지 숙녀의 손목을 허락도 없이 잡았군. 미안하네.”
늘 장난스러운 사람답지 않게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불쑥 치솟았던 짜증이 가라앉았다.
“괜찮습니다.”
너그럽게 답하자 자비스가 오른손을 심장 부근에 대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맙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확실히 황태자인지 우아한 몸짓이었다.
“근데 정말 왜 따라오시는 건데요?”
“실은 그대가 같이 가 줬으면 하는 곳이 있어.”
“제가 오늘은 좀 바빠서요. 다음에 시간 날 때 함께 하겠습니다.”
단칼에 거절하고 돌아서는데 자비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소원 두 개가 남은 걸 잊었나?”
“두 개라뇨? 하나죠.”
도무지 흘려들을 수 없는 말에 홱 돌아서자 자비스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때 황실 연회에서 하나 쓰셨잖아요.”
“정확히는 쓰려다 말았지.”
“전하께서 파투 내신 거잖아요.”
“파투?”
“중간에 절 두고 다른 곳으로 가신 건 전하시라고요.”
“그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네. 이런, 섭섭했나?”
“전혀요.”
“어쨌든 결국 춤을 추진 못했으니 소원은 무효야.”
“그런…….”
너 양아치니? 아무리 자비스라도 황태자에게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어 눈으로 욕하자 그가 이를 드러내며 유쾌하게 웃었다. 더욱 약이 오른 난 눈살을 찡그렸다.
“어려운 일은 아니야. 그저 물건 하나 같이 골라 주면 돼.”
“알겠어요. 뭘 고르면 되나요?”
차라리 빨리 털어 버리자는 생각으로 앞장섰다. 곧바로 옆에 따라붙은 자비스가 흘깃 뒤를 돌아보며 얼굴을 가까이하고 속삭였다.
“그런데 휘턴 가문 기사들은 다 저리 험상궂게 생겼나?”
“네?”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조금 떨어져서 쫓아오고 있던 밀토를 포함한 기사들이 방긋 웃었다. 저렇게 멍멍이들마냥 세상 순박한 얼굴로 웃고 있는데 험상궂다니 무슨 소리인가 싶다.
“허.”
내가 이상하게 쳐다보자 자비스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방금 전만 해도 저 하녀까지 나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단 말일세.”
“릴리가요? 잘못 보셨겠죠.”
몰티즈같이 귀여운 릴리가 무섭게 노려보다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력 검진을 한번 받아 보시는 게 좋겠어요.”
“허. 돌겠군.”
자비스가 억울하다는 듯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제가 골라 드릴 게 뭔가요? 바쁘니 후딱 해치우죠.”
“저 봐. 또 저렇게 무섭게.”
릴리와 기사들을 보며 겁먹은 척 어깨를 움츠리던 자비스가 연기를 그만두고 귓속말해 왔다.
“그대는 꽤 사랑받는 모양이야.”
“원체 사랑스러우니까요.”
“맞는 말이군.”
고개까지 끄덕이며 수긍하던 자비스가 내 표정을 보곤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대가 말해 놓고 창피해하는군. 이쪽일세.”
자비스가 안내한 곳은 한눈에 봐도 화려한 고급 향수 가게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여러 가지 향수 냄새가 뒤섞여 풍겼다. 하지만 조금도 거슬리지 않고 오히려 향기롭게 느껴졌다. 킁킁 냄새를 맡으며 매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곧 고모님의 생신이거든. 향수를 선물해 드리고 싶은데 골라 주겠나?”
“고모님 성향이 어떠신데요?”
향수는 워낙 취향을 타는지라 선물로 고르기 까다로운 아이템이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자비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작은 새를 닮았어.”
“……네?”
정말 이 남자 머릿속에서 여자는 전부 소동물로 치환되어 보이는 걸까. 어떻게 고모님마저. 자비스는 괴상하게 보는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달이 밝은 밤하늘을 닮은 머리카락을 가졌지. 개구져 보이지만 말할 수 없는 사연을 가진 눈동자에 웃으면 잇몸이 예쁘게 드러나는 입술을 가졌어.”
자비스가 말하는 그 고모님이라는 사람이 꼭 나를 말하는 것 같았다. 착각만이 아닌 것이 그는 나를 지그시 훑어보며 말을 잇고 있었다.
“소문과 달리 착하고 다정한 성격이지. 걸걸한 말투와는 달리 말이야. 묘하게 나를 막 대하는데 그게 참 매력적이라네. 볼수록 귀여워.”
자비스가 장난스럽게 끝맺었다.
“혹시 고모님이 카나리아를 닮진 않았나요?”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군.”
역시 수작질을 부리는 거였군. 난 욱하는 심정을 누르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황태자 전하가 눈에 안 띄는 게 고모님께 가장 큰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큽.”
내 말에 자비스는 뭐가 그렇게 웃긴 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향수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도무지 웃음을 멈추지 않는 자비스 때문에 창피해진 난 그에게서 몇 걸음 물러섰다. 이대로 도망칠까 생각하며 출입문 쪽을 바라보는데 자비스가 채 웃음이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님 생신이라는 말은 진짜네. 그분 향수 취향은 내가 잘 알아.”
“그럼 저까지 굳이 있을 필요 없겠군요.”
전 이만. 하고 뒤돌아서려는데 그가 내 앞을 막아섰다.
“그대에게 선물하고 싶어.”
“전 향수를 뿌리지 않는답니다.”
“그래도 하나 골라 봐. 소원으로 칠 테니.”
“정말이죠?”
소원까지 차감하며 돈을 쓰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얼마든지. 하는 듯 자비스가 손을 펼쳤다. 나는 보란 듯이 하나 건너 하나씩 향수를 쓸어 담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점원들이 양손을 써도 다 들지도 못할 만큼 향수가 잔뜩 담긴 바구니를 계산대 위에 올리고 있었다.
너무 했나 싶어 슬쩍 눈치를 살피니 자비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하기야 한 나라의 황태자에게 이 정도 사치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995골드입니다.”
한참 낑낑대며 계산하던 점원이 계 탔다는 얼굴로 고지한 가격에 애써 평온한 척하며 서 있던 난 그만 사레가 걸리고 말았다.
‘아니, 아무리 많이 골랐어도 그렇지, 이게 995골드나 하는 게 말이 돼?!’
무슨 금을 녹여다 넣은 것도 아니고, 1000골드면 일억 원이었다. 이건 바가지가 틀림없어!
멀찍이서 지켜보다 달려오던 릴리가 걸음을 멈추고 내 등을 두드리는 자비스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괜찮나?”
“괘, 크흠, 괜찮아요.”
“뭘 먹은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사레가 걸리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던 자비스가 들고 있던 향수병 하나를 계산대 위에 올려 두었다.
“이것도. 이건 선물용으로 포장해 주었으면 하네.”
“네. 오뒤뜨 프랑 드 휘로랄까지 총 1000골드입니다.”
“딱 좋군.”
딱 떨어지는 숫자가 마음에 드는 듯 미소 지은 자비스가 품속에서 지갑을 꺼냈다. 난 지갑을 펼치는 그의 손을 탁 잡았다.
“잠깐만요, 황태…….”
자비스가 사람들 앞에서 황태자라고 부르지 말라는 눈빛을 쏘았다.
“전…… 아니, 자비스 님. 몇 개 뺐으면 하는데요.”
“왜 그러나?”
“너무 비싸서 부담스러워요.”
“별로 안 하는데.”
이 정도가 뭐가 부담스럽냐는 듯 자비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암만 그래도 향수가 1000골드나 하는 게 말이 돼? 이게 무슨 돈지랄이냐고!’
차마 쏘아붙이지 못하고 눈빛으로 말했지만 찰떡같이 알아들었던 나와 달리 자비스에겐 통하지 않았다. 난 결국 그가 1000골드짜리 백지 수표를 작성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향수 가게를 나왔을 때는 이미 심적으로 지쳐 있었다. 타운 하우스로 배송될 준비를 하고 있을 향수들을 생각하니 뒷골이 당겼다. 한 방 먹이려다가 도리어 내가 당한 느낌이었다.
“전 이만 타운 하우스로 돌아가야겠어요. 너무 피곤하네요.”
“오늘 거리 축제에 함께 하지 않겠나?”
“축제요?”
축제라니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일부러 더 아픈 척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이 내려갔다. 생전 축제 같은 데는 가 본 적이 없었기에 호기심이 일었다.


#049
“일 년에 단 한 번 여름밤에 열리는 로맨틱한 축제이지 않나.”
자비스의 얼굴은 마치 순진한 어린 양을 꼬시려는 사기꾼과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혹하고 말았다. 결국 난 그를 따라 축제가 열리는 거리로 향했다.
아까는 의식하지 않아 몰랐는데 확실히 거리는 평소보다 더 활기찼다. 가로수와 상점에는 축제 장식이 달렸고 사람들의 표정은 묘하게 들떠 있었다. 다들 데이트하러 나온 듯 온통 커플 투성이었다.
거리 연주자들의 경쾌한 음악이 축제의 흥을 돋웠다.
“무얼 기리는 축제인가요?”
보통 축제라 하면 특정한 대상을 기리거나 축하하기 위해 열리기 마련이다. 로맨틱하다고 했으니 연인을 위한 축제인 걸까.
내 질문에 자비스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모르나?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축제인데.”
“아, 그게…… 말로만 들었지 직접 참석한 것은 처음이어서요.”
다소 서투른 변명에도 자비스는 더 의심하지 않고 넘어갔다.
“무엇을 기린다기보단 무엇을 지키는 축제지.”
“네?”
“제국의 주신인 데쿠아가 다른 사내의 연인이었던 여인을 훔쳐서 제 아내로 삼지 않았나. 그걸 본떠 만든 축제야.”
아니 무슨 그딴 난봉꾼이 주신일 수가 있담? 이게 로맨틱하다고? 제국의 도덕성에 대해 심히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오늘 데쿠아가 되어 볼 생각이네.”
자비스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난 눈에 빤히 보이는 수작을 부리는 그를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아직 아델리아에 대한 마음을 깨닫지 못해서 이러는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 아무한테나 1000골드를 턱턱 쓰지. 그동안 만났던 여자들 곱하기 1000골드 하면 대체 그 돈이 다 얼마람. 레티시아가 제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자비스 님, 이렇게 계속 엄한 사람에게 수작을 부리다가 나중에 정말 진심이 된 사람이 생겼을 때 믿음을 주지 못한답니다.”
난 원작을 읽은 사람이자 전생까지 합치면 그보다 오래 살았던 사람으로서 진지하게 충고했다.
“지금 난 그대에게 진심인데.”
“그러다 진짜 후회하신다니까.”
내 말을 귓등으로 안 듣는 것 같은 자비스를 다시 타이르려다가 말았다.
잠깐, 생각해 보니 오늘 축제는 기회가 아닐까? 아직 아델리아에 대한 마음을 확실히 깨닫기 전에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잊고 있던 자비스 혼처 자리를 알아보기 딱 좋은 기회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 김에 나도 디아르트 말고 상성이 맞는 남자가 있는지 합법적으로 찾아볼 수 있었다. 뒤에 릴리와 기사들이 따르고 있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파트너가 있는 이성을 빼앗으라고 만든 축제이니 뭐.
방금까지 제국의 도덕성에 대해 의문을 표했던 걸 싹 잊은 난 그의 팔을 붙잡고 사람들이 많은 쪽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어디 축제를 제대로 한번 즐겨 보죠.”
* * *
망할.
거리를 돌아다닌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축제를 제대로 즐기기는커녕 힘만 잔뜩 뺀 채 날이 벌써 저물고 있었다. 나는 도무지 내게 협조하지 않는 자비스를 홱 노려보았다. 그는 각양각색의 매력을 가진 숙녀들을 가리키며 저런 스타일의 여성은 어떠냐고 묻는 내게 ‘아름답지 않은 여인은 없지.’ 대답하면서도,
‘하지만 지금 내 눈엔 그대가 가장 빛이 난다네.’
라며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렸다. 지친 나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축제고 나발이고 이럴 거면 차라리 남녀가 눈맞기 딱 좋다던 카페나 알려 주었으면 했다. 거기다 아주 던져 버리게.
길에서 파는 음료수를 건넨 자비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데 그대는 왜 자꾸 내게 그런 걸 묻지?”
“어떤 거 말씀이시죠.”
달콤한 파인애플 주스를 마시며 한숨 돌리던 난 성의 없이 대꾸했다.
“이 레이디는 어떻냐. 저 레이디는 어떻냐. 내게 자꾸 여인을 붙여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걸 지금 알았니? 평소엔 눈치 빠르던 양반이 왜 이래.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자 자비스가 대답을 종용했다.
‘용서해요, 레티시아.’
이게 다 당신을 살리려고 그러는 거예요. 나는 레티시아에게 용서를 구한 후 입을 열었다.
“레티시아 님이 걱정을 많이 하시더군요. 황태…… 아니, 자비스 님이 얼른 좋은 배필을 맞아야 할 텐데 고민이라고요.”
“레티시아가?”
자비스가 미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제 동생이 그런 걱정을 했을 리 없다는 눈빛이었다. 하기야 아까 카페에서 본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믿기 어려울 만도 하지. 하지만 끝까지 밀고 나가야 했다.
“레티시아 님이 자비스 님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요.”
“그래서 아까부터 계속 이 사람 저 사람 찍어다 붙였군.”
“찍어다 붙였다기보단 자비스 님이 어떤 여성분을 좋아하실지 몰라 그런 거죠.”
“계속 말하지 않았나. 그대가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고.”
그건 그냥 수작 부리는 거였고. 난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자비스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레티시아가 그렇게 내가 아내를 맞길 바라는지 몰랐지만 만약 결혼하게 된다면 나는 그게 그대이면 좋을 것 같아.”
“저기, 잊어버리신 모양인데 저는 이미 결혼했답니다.”
“곧 이혼하잖나.”
“그, 그건 그렇죠.”
설마 이 남자 진심이야? 생각지도 못하게 프로포즈 비슷한 걸 받게 된 난 당황해서 입술만 뻐끔거렸다. 갑자기 대화가 왜 이렇게 이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비스의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피해 달아나고 싶다는 충동마저 들었다.
‘얘는 무슨 고백을 이렇게 길바닥에서 뜬금없이 한다니?’
“이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대가 워낙에 눈치가 없어서 말이지. 이대로라면 온 세상 여인들을 다 갖다 붙일 것 같거든.”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자비스가 싱긋 웃었다.
“우리 이제 겨우 네 번 만났다는 거 아세요?”
“횟수가 중요한가.”
“아니, 그래도 그렇지 몇 번 만났다고 벌써 결혼 얘기를…….”
“지금까지 여러 여인을 만났지만 함께 있기만 해도 기분이 유쾌해지는 이는 그대가 처음이야. 결혼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 것도 처음이고. 원래 운명의 상대는 한순간에 느낄 수 있다지 않은가.”
‘운명까지?’
문득 지금 이 순간은 상상도 못 하고 딸기 쇼트케이크를 먹었던 불과 몇 시간 전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인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현실 도피를 하고 있던 난 자비스의 진지한 얼굴에 퍼져 나가는 미소에 정신을 차렸다.
역시 짓궂은 장난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채 끝맺기도 전에 자비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무 부담스러워하진 말게. 그저 그대의 넓어진 시야로 나도 봐 달라는 소리니.”
“……일단.”
한참 만에 내가 입을 열자 자비스가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달콤한 게 먹고 싶어요.”
상황에 어울리지 않은 엉뚱한 소리였지만 자비스는 군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잠시 기다리게. 마침 저기에 과일 사탕을 팔고 있더군.”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 준 자비스가 조금 떨어져 있는 간이 매대로 향했다. 뜬금없긴 했지만, 겨우 자비스와 떨어진 난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급작스럽게 휘몰아치는 일의 형편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아델리아에게 첫눈에 반한 줄 알았던 자비스가 실은 내게 마음이 있었다는 거지?
“이걸 좋아해야 하나?”
이런 상황은 생각도 못 해본 터라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아델리아에게 반하지 않았다면 황실에 불어닥칠 피바람은 막은 셈이었지만 왜 하필 그 상대가 나란 말이냐고.
‘근데 왜 아델리아에게 반하지 않았지? 그럼 자비스의 서브남주 설정값은 어떻게 된 거야?’
원작의 가장 큰 축 하나가 무너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인위적으로 다른 사람과 붙여 주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때 머리 위로 서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지?”
능글맞으면서도 다정한 자비스의 목소리와 정반대로 얼음이 낀 듯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는 낯이 익었다. 고개를 드니 디아르트가 매우 굳은 얼굴로 삐뚜름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일어나.”
디아르트가 얼떨떨한 내 손을 불쑥 잡아채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나를 안아 올리더니 불식간에 어깨에 들쳐 업었다. 너무 놀라서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디아르트는 과일 사탕을 들고 고개를 돌리는 자비스를 흘깃 보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자비스의 재킷이 속절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050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사람이 너무 황당하면 오히려 아무 생각도 안 드는 모양이다. 난 흔들리는 시야로 언뜻언뜻 들어오는 릴리와 기사들을 보며 눈만 깜박였다. 어쩐지 다들 흐뭇한 표정이었다. 누군 짐짝처럼 어깨에 매달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고 있는데 그걸 보며 즐거워하는 게 너무 얄미웠다.
“내려 주세요.”
힘들다고 채근해도 디아르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엄살을 부리긴 했지만 사실 그가 단단히 받치고 있는 터라 매달려 있는 게 어렵진 않았다. 그는 마치 조금도 무게가 나가지 않는 것처럼 나를 가뿐하게 들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을 걸었음에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 디아르트가 장갑을 낀 게 아쉽다고 생각하는 나도 참 나지.’
물색없는 스스로가 어이없어 고개를 내젓는데 어느 순간 디아르트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자비스와 함께 있었던 메인 거리에서 한참 벗어난 곳이었다. 사람을 말도 없이 들쳐 업고 올 때는 언제고 나를 내려놓는 손길이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웠다.
딱딱한 바닥에 발을 디딘 난 그를 쏘아보았다.
“이게 무슨 무례한 행동이에요?”
“뭐가 말이지.”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손목을 잡아챘다가 되려 놀라서 사과하던 자비스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팔짱까지 끼고 삐뚜름하게 내려다보는 모습이 누가 보면 내가 잘못한 줄 알겠다.
‘이게 미친놈과 덜 미친놈의 차이인가.’
하기야 집착광공 재질인 인물이 여기서 미안하다고 절절매는 게 더 이상한 건지도 모르겠다.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디아르트가 묘하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축제를 즐기고 싶어 하는 것 같기에 도운 건데.”
“네? 축제를 즐기는 거랑 사람을 짐짝처럼 매다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요.”
너른 마음으로 이해를 하려는 사람을 어처구니없게 만드네? 세모꼴로 노려보니 디아르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곤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뒤쪽을 턱으로 까딱 가리켰다. 그 보라는 듯한 행동에 홱 고개를 돌린 난 그만 말문이 턱 막혔다.
곳곳에 어깨에 누군가를 매단 사람이 도망치듯 뛰고 있었고 그 뒤를 쫓는 이들이 보였다.
“파이라가 되고 싶었던 거 아닌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맥락상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데쿠아가 다른 사내에게서 빼앗아 아내로 삼은 여인이겠지. 그녀를 훔칠 때 어깨에 매달고 도망쳤던 모양이다.
갑자기 할 말을 잃은 내가 입을 다물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아르트가 말했다.
“그거 아나? 파이라는 원래 데쿠아의 연인이었다는 거.”
“그랬어요?”
능력 있는 여자였구나. 원작에서는 언급되지도 않던 신들치고 설정이 꽤 디테일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를 가만 보고 있던 디아르트가 말을 이었다.
“데쿠아가 파이라를 훔쳐 올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알겠군.”
“어떤 심정인데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
마치 직접 겪은 사람처럼 불쾌한 어감이었다.
“나는 데쿠아가 될 생각이 없어.”
알 수 없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누군 데쿠아가 되겠다고 하더니 누군 또 그럴 생각이 없단다. 이쯤 되면 데쿠아의 말도 들어봐야 했다.
어쨌든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축제 구경은 여기서 끝이라는 것. 자비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겠다고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는데 아쉬웠다.
‘아, 그러고 보니 자비스가 걱정하고 있겠네.’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축제가 축제니만큼 다른 남자가 나를 훔쳐 갔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자비스를 생각하니 그가 고백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표정을 봤을 때 분명 진심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지?”
상념에 불쑥 끼어든 디아르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눈에 띄게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쩐지 여기서 솔직하게 대답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게, 이대로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아쉬워서요. 축제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거든요.”
“그럼 더 즐기다 가면 되겠군.”
“네?”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디아르트에게 놀라 되물었다.
“정말요?”
“별일도 아닌 걸 어렵게 말하는군.”
곧바로 저택으로 데려갈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었다. 조금 더 축제에서 놀 수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디아르트가 느릿하게 명치를 손으로 잡았다.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여기가 울렁거려.”
“이런, 몸이 안 좋으신 모양이에요.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은 남자가 아프다고 하니 걱정이 됐다. 손이 먼저 나가 부축하니 디아르트가 제 팔을 잡은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 죄송해요.”
기분 나쁜가 싶어 얼른 떨어져나왔다. 나를 따라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얼른 돌아가서 진찰을 받아 보세요.”
“그대는.”
“전 조금 더 구경하다가 들어갈게요.”
너도 허락했잖아? 하는 눈으로 보자 디아르트가 명치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렸다.
“뭘 하고 싶은데?”
“축제에서요? 글쎄요. 뭐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거리 공연도 구경하려고요. 아, 이따 불꽃놀이도 있다던데 그것까진 보고 싶네요.”
제국의 불꽃놀이는 꽤 화려하다고 자비스가 자랑했다. 전생에서 불꽃축제 한 번 못 가 봤던 터라 기대가 되었다.
“먹고 싶은 게 있나?”
디아르트가 흘깃 눈짓하자 저만치에서 대기하고 있던 램버트가 다가왔다.
“근처에 야경이 유명한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그럼 그곳으로 예약하지.”
“아뇨, 아뇨.”
난 얼른 손사래 쳤다. 내가 뭘 먹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무턱대고 레스토랑을 예약한다는 거야. 뭐, 없으면 만들어 오라고 할 것 같은 남자지만.
“제가 먹고 싶은 건 그런 곳에서 팔지 않아요.”
“그럼 어디서 먹겠다는 거지?”
“저기요.”
난 손가락으로 어느 곳을 쭉 가리켰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긴 디아르트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길에서 음식을 먹겠다는 건가?”
뼛속까지 귀족인 남자라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원래 길거리 음식이 맛있는 법이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디아르트가 못마땅하게 미간을 구겼다. 어차피 나 혼자 먹을 건데 저렇게 질색할 건 뭐람.
“아무튼 공작님은 이만 돌아가 보세요. 꼭 진찰받아 보시고요.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서둘러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반대쪽으로 가야 할 남자가 따라붙었다. 의아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따라오세요?”
“그대가 돌아가지 않겠다며.”
디아르트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축제에 남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묻는 얼굴로 보자 디아르트의 표정이 마뜩잖아졌다.
“나 혼자 돌아가라는 건가?”
네. 당연히요? 눈을 깜박이자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게 먹고 싶다는 게 뭔지 나도 궁금하군.”
나는 앞장서는 디아르트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설마 나와 함께 축제에 남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이것도 내가 시한부라서 그러는 건가?’
혹시 길거리에서 쓰러지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는 거야? 나는 내가 무엇을 먹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면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디아르트의 옆으로 얼른 따라붙었다.
“몸이 안 좋으신 거 아니었어요?”
“괜찮아졌어.”
디아르트가 짤막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를 해도 나와 같이 있겠다는 말로 들리면 내가 이상한 건가?
‘불편한데.’
옆에 뚱하니 있는 디아르트를 두고 제대로 축제를 즐길 수 있겠냐고. 속으로 투덜거리던 난 순간 콧속을 찌르는 익숙한 냄새에 고개를 홱 돌렸다.
‘이건!’
고소한 기름 냄새와 어우러진 매콤한 향내는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분명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디아르트의 팔을 잡아끌었다.
“공작님, 이쪽이요!”
각양각색의 음식들을 팔고 있는 길거리 가판대 사이를 가로지른 난 그 사이에서 유독 길게 줄이 늘어선 매대 앞에 멈춰 섰다. 음식을 받아 든 이들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보아 맛집이 틀림없었다.
줄을 선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던 디아르트가 그대로 직진했다. 당황한 내가 얼른 팔을 잡자 그가 돌아보았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이게 먹고 싶다며.”
“사람들 줄 서 있는 거 안 보이세요?”
“그래서?”
아니, 새치기를 뭐 이렇게 당당하게 해? 어이없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귀족이라 이거지? 보통 사람이었던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난 그의 팔을 힘주어 잡으며 웃었다.
“이리 오세요.”


#051
내가 잡아끌자 디아르트는 의외로 순순히 끌려왔다. 그 사이 몇 명이 늘어난 줄 뒤로 섰다. 그제야 우리를 은근슬쩍 뾰족하게 보던 눈들이 평온해졌다. 신분제가 엄격한 제국에서 모든 일에 우선시되는 게 귀족의 특권이라지만 눈 뜨고 새치기 당한 입장에서 기분 좋을 리 없었다.
“이걸 기다리자는 건가?”
“그럼요.”
디아르트가 못마땅한 눈으로 미간을 좁혔다. 곧바로 살 수 있는 걸 굳이 기다려서 먹겠다고 하는 게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저 노점을 사지.”
“재미없는 농담이네요.”
사실은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금방 웃음을 멈추고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부자들 사고의 흐름은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
뒤에서 보고 있던 기사들이 다가왔다.
“저희가 기다렸다가 사 오겠습니다.”
“두 분은 저쪽에 앉아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밀토가 분수대를 가리켰다. 하지만 분수대는 벌써 데이트하는 연인들로 북적이는 터라 앉을 자리가 없어 보였다. 어디에 앉으라는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자 기사들이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금방 비우겠습니다.”
분수대로 나서는 기사들의 얼굴이 쓸데없이 비장했다. 나는 그들이 죄 없는 커플들의 아름다운 추억에 스크래치 내기 전에 얼른 막았다.
“잠깐 기다려요. 설마 저 사람들을 쫓으려는 건 아니겠죠?”
“맞습니다.”
그 주인의 그 기사들인지 너무나 떳떳한 대답이었다. 뭐, 그 정도로 이 제국에선 당연한 일인 거겠지. 나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왜 가만있는 사람들을 괴롭혀요.”
“그럼 분수대를 사지.”
“금방 빠지니까 기다리죠.”
끼어드는 디아르트의 말을 싹둑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 남자는 아까부터 무슨 말만 하면 사겠다고 하는 거야. 애초에 수도 한복판에 있는 분수대를 사겠다고 하는 발상은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디아르트의 표정이 마뜩잖아졌다.
“왜지.”
“왜냐니. 당연한 거예요.”
“힘들지 않나.”
아. 그러고 보니 나를 시한부로 알고 있지. 슬쩍 피곤한 척하자 놀랍게도 디아르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부축했다.
“아픈가.”
“괜찮으십니까.”
디아르트 뿐 아니라 기사들도 안절부절못했다. 릴리는 이미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어서 돌아가요, 마님. 오늘 너무 오랫동안 걸으셨어요.”
“배고파서 그런 것 같아. 저 꼬치만 사 먹으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양심에 좀 찔리긴 하지만 모두의 입을 다물기엔 꽤 효과적이었다. 더는 사람들을 쫓아내겠다느니 분수대를 사겠다는 헛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거 꽤 편한걸? 뭔가 치트키 하나를 손에 쥔 기분이랄까.
“그럼 저희가 서 있을 테니 저쪽에 계시지요.”
“아니, 이런 건 또 기다렸다가 먹는 재미도 있으니까. 괜찮으니 저만치 물러가 있어. 사람들이 불편해하잖아.”
가뜩이나 화려한 복색의 귀족이 줄을 서서 그런지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데 우리를 둘러싼 기사들로 더 이목을 끌고 싶진 않았다. 하릴없이 멀찍이 물러선 릴리와 기사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끙끙거리듯 나를 보고 있었다.
“정말 괜찮나?”
디아르트가 나를 면밀히 살피며 물었다.
“네. 멀쩡해요. 그보다 저 혼자 서 있어도 괜찮은데.”
“기다렸다 먹는 재미가 있다며.”
너 혼자 재미를 보겠다는 거냐는 말을 참 덤덤하게도 한다. 기다리겠다는데 굳이 돌려보낼 건 없겠다 싶어 가만히 있었다. 비효율적인 일에 시간 낭비하는 걸 가장 싫어하는 디아르트는 방금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새치기를 하려던 사람이 맞나 싶게 얌전히 차례를 기다렸다.
생각보다 줄은 금방금방 빠졌고 나는 곧 양손에 닭꼬치를 쥘 수 있었다. 닭꼬치를 가만 내려다보던 디아르트가 미간을 좁혔다.
“이게 그렇게 먹고 싶었나?”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나 보다. 하긴 휘턴 가의 주방장은 제국 최고의 솜씨를 자랑했고 늘 최고급 재료로 만든 음식을 내왔다. 정갈하게 담긴 음식들만 먹어 온 그로서는 붉은 소스가 줄줄 흐르는 미관상 다소 난해한 닭꼬치를 줄까지 서 가며 먹는 걸 이해 못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겐 너무나 필요한 음식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난 군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닭꼬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
이거야. 이거라고! 이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자극적이고 중독적인 조미료와 목구멍을 휘둘러 패는 듯한 매운맛! 내 몸이 원했던 건 바로 이거였다.
물론 공작가 주방장의 솜씨는 무척이나 뛰어났지만 고추로 만든 고추장에 고추를 찍어 먹는 코리아인으로선 담백하기만 음식들은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허전함을 느끼게 했다. 처음 이 세계에도 고추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제국은 매운 음식을 경시하는 문화가 있어 접하기 쉽지 않았다. 한국인이 쓴 K-로판에서 이해할 수 없는 설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한 방에 풀리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허겁지겁 먹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맛있나?”
낮은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난 고개를 들었다. 디아르트가 나를 보고 있었다. 흠흠, 헛기침하며 물고 있던 닭꼬치를 내려놓았다.
“공작님도 드셔 보세요. 맛있어요.”
내 말에 닭꼬치를 내려다보던 디아르트가 천천히 한입 베어 물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씨익,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닭꼬치를 고를 때 일부러 순한 맛으로 권했더니 내 도발에 넘어간 디아르트는 나와 같은 매운맛으로 선택했다. 매운맛에 면역이 없는 그에게는 쉽지 않은 도전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닭꼬치를 몇 번 씹지도 않은 디아르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괜찮으세요? 맵죠?”
“아니, 맛있군.”
괜찮기는, 너 지금 얼굴이 창백하거든? 센 척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매운 게 분명했다. 천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에 미소 짓는데 디아르트가 내 손에 들려 있던 닭꼬치를 낚아챘다.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니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대는 안 먹는 게 좋겠어.”
“왜 남의 걸 빼앗아요? 이리 주세요.”
“몸에 안 좋아.”
내가 손을 뻗자 그가 닭꼬치를 든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가뜩이나 키 차이가 나는 터라 도무지 손이 닿질 않았다. 아무리 낑낑거리며 빼앗으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주위에서 시선이 모여드는 게 느껴졌다.
정강이를 걷어찰까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는데 디아르트의 입에서 딸꾹질이 나왔다. 생전 접하지 않았던 매운 음식을 먹은 탓일 것이다. 디아르트가 당황한 사이에 그의 손에서 닭꼬치를 낚아챈 난 다시 빼앗기기 전에 얼른 입에 넣었다. 디아르트는 딸꾹질이 멈춰지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아요?”
평소 완벽하고 냉담한 남자가 딸꾹질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좀 귀엽……, 아니, 귀엽기는 무슨. 얼른 고개를 저은 난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디아르트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게, 먹지도 못하는 걸 왜 먹어서 고생해요.”
다소 감정을 실어 등을 두드리며 타박하는데도 디아르트는 날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데리고 마침 자리가 빈 분수대에 앉았다. 기사들에게 우유를 부탁하니 순한 맛 닭꼬치를 먹고 있던 기사들이 얼른 구해 왔다.
내가 건네는 우유를 순순히 받아 마시고 나서야 디아르트의 딸꾹질은 멈추었다. 그제야 평소처럼 냉한 얼굴로 돌아온 디아르트가 물었다.
“그대는 저런 걸 좋아하나?”
“네, 맛있잖아요. 공작님께는 안 맞죠?”
“아니. 괜찮아.”
방금까지 매워서 딸꾹질을 하고 있던 주제에 퍽 단호한 대답이었다. 어처구니없어 바라보니 디아르트가 나를 묘하게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나도 좋아하게 될 것 같아.”
“그, 그래요? 뭐, 그럼 다행이고요.”
이 남자는 무슨 닭꼬치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말을 이렇게 깊은 눈으로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괜히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은 기분에 벌떡 일어섰다. 내 움직임대로 시선을 따라오던 디아르트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닭꼬치도 먹었겠다, 본격적으로 축제 구경을 할까요?”
난 부러 더 밝게 말했다. 그러자 디아르트의 입가가 미세하게 늘어졌다. 평소 그가 짓던 조소나 냉담한 비웃음이 아닌 진짜 미소였다. 괜히 간질거리는 기분에 난 얼른 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저쪽에서 거리 공연을 하더라고요.”
내가 앞장서자 디아르트가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052
화려한 불 쇼도 구경하고 공 위에서 저글링하는 공연도 보다 보니 어느새 달이 한껏 기울어져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축제가 무르익어 가며 가볍게 데이트를 즐기던 연인들의 애정 행각도 노골적으로 바뀌었다. 성적으로 개방적인 문화를 가진 제국이다 보니 적나라한 스킨십도 서슴지 않았다.
나는 거리 곳곳에서 보란 듯이 입을 맞추는 커플들이 너무나 부러워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나도 내 옆에 있는 남자만 없었더라면 괜찮은 사람을 물색할 수 있었을 텐데.
디아르트의 남다른 외모에 뭇 여성들이 날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지만 다들 이 남자가 빛 좋은 개살구라는 건 모르겠지.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더 열심히 거리를 돌아다니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이보세요, 귀부인. 고민이 많으시군요.”
주위를 둘러보니 거리 구석에 작은 가판대를 펼쳐 놓고 있는 한 노파가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검은색 로브를 머리에 둘러싼 모습에 딱 촉이 왔다.
‘점술가구나!’
원래도 타로 카드며 사주 같은 걸 재밌어하는 나였기에 주저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매대 앞에 놓인 앉은뱅이 의자에 앉자 디아르트도 따라 앉았다. 미신은 조금도 믿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좋아하나 싶어 쳐다봤다. 역시나 눈썹을 잔뜩 치켜올리며 점술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불신의 기운이 가득했다. 이럴 거면 왜 굳이 따라 앉았나 싶다.
나를 가만 바라보던 점술가가 입을 열었다.
“독특한 운명을 가지셨군요.”
한 번 죽었다가 소설 속 인물로 빙의한 인생이니 누구보다 독특한 운명이긴 했다. 한마디만 들었을 뿐인데 점술가에 대한 신뢰가 치솟았다.
“부인의 뒤로 늘 죽음이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일어나지.”
점술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딱 자른 디아르트가 내 팔을 잡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던 난 일어나지 않고 버텼다.
“점쟁이의 말 따위 믿을 게 못 돼.”
디아르트가 일어나라고 종용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점술가가 괜한 겁을 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겐 아니었다. 전생에서는 시한부로 죽었고 빙의한 후에는 망할 놈의 저주 때문에 또 죽음을 목전의 둔 사람으로서 그냥 흘려 넘길 수 없었다.
내가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디아르트도 더는 채근하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낀 채 점술가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무척이나 살벌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목을 잘라 버릴 것 같은 살기에 나조차 움찔할 정도였다.
어깨를 떤 점술가가 내 쪽으로 은근히 엉덩이를 틀어 앉으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이 무언지 안 난 품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내밀었다.
앞에 놓인 구슬에 손을 올리고 한참 가만히 있던 점술가가 입을 열었다.
“이런, 부인께선 조금 더 경각심을 가지시는 게 좋겠습니다. 부인에게 일어난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마세요. 그것은 생각보다 더 강력하답니다.”
“안 그래도 골치 아팠……”
근지러웠던 곳을 딱 긁어 주는 점술가의 말에 박수까지 치며 맞장구를 치던 나는 옆에 있는 디아르트의 존재를 상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모호한 점술가의 말을 그가 알아들을 리 없겠지만 괜히 눈치가 보였다. 이 남자는 지금 내가 불치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해답을 너무 멀리서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가장 좋은 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법입니다.”
“가까이라면 어디서?”
내 가까이에 있는 남자라고 해 봤자 휘턴 저 사용인들이나 기사단뿐인데. 설마 자비스 황태자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점술가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외면하시는군요.”
그래, 사실 이미 디아르트와 접촉해 본 터라 모를 수 없었다.
“이미 운명은 바뀌었습니다.”
마치 내가 로에니 몸에 빙의된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 같은 점술가의 의미심장한 말에 놀랐다.
“부인이 알고 있는 세계는 이미 달라지기 시작했으니 두려워하지 마시고, 부러 외면하지 마시고 마음이 가는 대로 흘러가게 두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부인이 원하는 바를 이룰 것입니다.”
정말 모든 걸 다 아는 듯한 그녀의 진지한 눈빛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점술가가 손등을 덮은 소매 사이로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질문 하나 더 하셔서 2골드 추가입니다.”
* * *
“기분은 좀 나아졌나?”
막 강물에 떠내려 가는 화등을 손으로 콕 찍어 보던 난 고개를 들었다. 2인용 조각배에 함께 타고 있는 디아르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점을 보고 난 후로 말이 없잖나.”
“아.”
정곡을 찌르는 점술가의 말을 되새기느라 가만히 있었더니 내 기분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혹시 알고 있는 건가?”
“네? 뭘요?”
“그대가……”
디아르트가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가 삼킨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 턱 없는 그로서는 점술가의 모호한 점사를 듣고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가 불치병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법도 했다.
“그자가 두려워하지 말고 흘러가도록 두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거라 하지 않았나.”
언제는 사기꾼 취급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점술가가 디아르트에게 한 말이 인상적이었나?
‘눈을 떼는 순간 달아나는 인연이니 꼭 붙드십시오.’
야망이 넘치던 아델리아를 떠올려 봤을 때 달아날 것 같진 않은데 말이지. 어쨌든 남한테 관심 없는 남자가 내 기분을 살피고 나름대로 위로라는 걸 하는 걸 보니 조금 고마웠다.
“불꽃놀이 명소라더니 정말 예쁘네요.”
잔잔한 물결이 치는 수면은 달빛에 반짝였고 작은 화등을 띄워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명소치곤 사람도 별로 없는 터라 강은 퍽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연인들이 다정하게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저들의 눈에도 우리가 그렇게 보이려나 궁금해졌다.
“저런 연애를 하고 싶은 건가?”
“네?”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돌리니 디아르트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보고 싶다고 한 거였죠.”
“그래서 찾아본 사내가 황태자인가?”
여기서 황태자가 왜 나와? 눈을 끔벅이던 난 곧 디아르트가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레티시아를 만나겠다고 외출해 놓고 자비스와 함께 축제에 있는 걸 보았으니 거짓말하고 그와 데이트했다고 여긴 모양이다.
“오해하지 마세요. 자비스 님과는 우연히 만난 거예요. 레티시아 님과 함께 있을 때 찾아오셨어요.”
“자비스 님?”
“아.”
아까 하도 이름으로 부르라고 세뇌를 당한 탓에 나도 모르게 그만.
“황태자 전하요.”
-하고 정정하는데 디아르트의 얼굴이 싸늘했다.
“이름으로 부를 정도라니. 그새 많이 친해졌나 보군.”
“아뇨.”
즉답했지만 디아르트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목소리도 퉁명스러운 것이 마치 질투라도 하는 것 같았다.
“전하께서 신분을 들키고 싶지 않다고 이름으로 부르라고 하셔서 입에 붙은 모양이에요.”
“반나절 사이에 입에 붙을 정도로 이름을 불렀다는 건가?”
디아르트의 목소리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떤 이유를 대도 도리어 더 오해할 것 같은 기세였다. 이름 좀 불렀다고 이렇게 성을 낼 일인가 싶다.
“나한텐 공작님이라 부르지 않나.”
“……네?”
“원래는 이름을 불렀잖아.”
“그, 그랬었나요?”
로에니와 디아르트의 서사에 대해선 관심이 쥐뿔도 없어서 몰랐다. 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며 웃었다.
“곧 이혼을 앞두고 있는데 이름을 부르는 건 경우가 아니지 않을까 해서요.”
“그놈의 이혼, 이혼. 귀에 딱지가 앉겠군.”
디아르트가 몹시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혼을 제일 바라는 남자가 왜 이래. 아까부터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이름으로 부를까요?”
“그렇게 해.”
디아르트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게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니 불러 주지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고개를 끄덕이던 난 문득 좀 억울해졌다.
“근데 공작님도 제 이름을 잘 안 부르시잖아요.”
지도 안 부르면서 왜 남한테 강요해? 내가 쏘아보니 그 생각은 못 했는지 디아르트가 미간을 좁혔다.
“앞으로는 이름으로 부르도록 하지.”
“정말요?”
“그래.”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디아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로에니.”


#053
“로에니.”
마치 내 이름을 음미하는 듯한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느른한 눈동자는 오롯이 나 하나만 담고 있었다. 문득 달빛 아래 반짝이는 디아르트의 얼굴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가볍게 부는 바람에 살랑이는 은발과 그윽한 금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로에니 휘턴.”
사람을 푹 녹아들게 하는 음성에 멍해졌던 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과연 남자주인공이다. 이름 한번 부르는 것으로 사람을 이렇게 홀리다니.
“흠흠, 자, 잘 부르시네요.”
방금까지만 해도 이름을 부르니 마니로 티격태격했던 게 꿈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달라진 분위기를 깨기 위해 부러 밝게 말했다. 디아르트는 묘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대도 불러 봐.”
“네?”
“내 이름.”
“아, 네. 그래야죠.”
어쩐지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이리저리 시선을 회피하고 있던 난 괜히 헛기침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디, 디아, 디아르트.”
이름 한번 부르는데 왜 이렇게 말이 안 나오는 건지 바보처럼 몇 번씩 더듬었다. 이게 다 이 묘하게 흐르는 공기와 평소와 다른 태도의 디아르트 때문이다. 괜히 사람을 경직되게 만드는 그를 탓하며 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니 왜 하필이면!’
저쪽에 키스를 나누는 연인이 있는 거야?! 안 그래도 이상하게 긴장되어 숨이 막히는데 입 안이 바싹 말라 침을 꿀꺽 삼켰다.
“음, 저 불꽃놀이는 언제 시작할까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이 불편한 분위기를 깨고자 고개를 돌렸던 난 디아르트의 깊고 그윽한 시선과 눈이 마주치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내게서 눈을 뗀 적 없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내게서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던 그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목덜미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여기에 더 있다간 위험할 것 같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그, 저 이제 그만 저택으로 돌아갈까요? 좀 피곤하네요.”
배를 잡으며 허둥거리는데 디아르트가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그 손길을 피해 몸을 뒤로 물린 난 손이 미끄러져 중심을 잃었다. 그와 동시에 배가 요동쳤다.
“가만히 있어.”
디아르트가 말했지만 당황한 나는 중심을 잡으려고 버둥거렸고 그럴수록 배는 더 사정없이 흔들렸다. 결국 옆으로 완전히 기울어지자 난 망했다는 걸 직감하며 눈을 꾹 감았다.
그때 커다란 손이 나를 낚아채듯 안는 것이 느껴졌다. 허리가 붙잡힌 채 단단한 품속에 끌어 당겨진 그대로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머리끝까지 물속에 잠겼다가 디아르트에 의해 수면으로 끌려 나왔다. 수영을 못 하는 난 발이 닿지 않는 공포감에 발버둥 쳤다.
“괜찮아.”
나를 단단히 끌어안은 디아르트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몇 번이고 계속 괜찮다고 말해 주는 그 덕분에 조금씩 진정할 수 있었다. 마침내 정신을 차렸을 땐 내가 그의 품에 안겨 물 위에 떠 있는 걸 자각할 수 있었다.
“좀 진정됐나?”
날 안고 있던 디아르트가 조금 떨어지며 물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밀착된 거리에 움찔한 내가 몸을 뒤로 빼자 그가 도로 당겼다. 물에 젖은 채 딱 달라붙은 탓인지 그의 딱딱한 근육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맞닿은 체온만큼이나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다시 한번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했으나 디아르트는 허락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단호한 디아르트의 말에 어정쩡한 자세로 최대한 몸을 떨어트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무언가 못마땅하면서도 기분이 퍽 나쁘지 않은 표정이었다.
“눈을 떼면 도망친다더니. 아주 돌팔이는 아닌 모양이군.”
“네?”
“이 작은 머리는 언제나 내게서 도망칠 생각만 하잖나.”
이로 장갑을 물어 벗어 던진 디아르트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짚으며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에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이리저리 숨바꼭질하듯 그를 피했다. 그런 나를 집요하게 쫓던 그가 한 손으로 내 턱을 붙잡아 고정했다.
“날 봐.”
안 돼. 지금 보면 안 될 것 같아. 지금 눈을 마주치면 무언가 크게 달라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모른 척했다. 하지만 불식간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내가 동그래진 눈으로 올려다보자 디아르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나를 보는군.”
“지, 지금 뭐한 거예요?”
“입 맞췄잖나.”
당연한 소리를 왜 묻냐는 듯 덤덤한 목소리에 도리어 당황했다. 디아르트가 어이없어서 더듬거리는 나를 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혼은 무르기로 하지.”
“……네?”
느닷없는 소리에 말문이 막혀 눈만 끔벅였다. 디아르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난 진정하려고 애쓰며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하기 싫어졌어.”
“아니, 공작님 혼자 싫다고 해도 이미 서류를…….”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보고 싶다고 했나?”
디아르트가 물에 젖어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의 손가락이 닿는 곳이 예민하게 느껴졌지만 모른 척했다.
“나랑 해. 그 제대로 된 연애.”
거의 통보였다. 바로 반박하려던 말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디아르트가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한 시선으로 내 입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입술을 감쳐물자 그가 작게 웃음을 삼키는 것이 들렸다.
디아르트가 시선을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금안은 익히 알고 있던 냉담함 대신 열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 강렬한 시선에 침이 절로 삼켜졌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후 목덜미를 잡고 있던 그가 엄지로 내 입술을 문질렀다.
“잘해 볼게.”
말을 마친 디아르트는 그대로 입술을 맞추었다. 가볍게 붙었다 떨어졌던 좀 전과 달리 입술을 벌리고 들어온 그의 따뜻한 혀가 나를 휘감았다. 밀어내야 하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부드러우면서 집요하게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귀에는 질척거리는 소리가 울렸고 뺨을 달궜던 열기가 눈까지 올라온 듯 뜨거워졌다.
아득해지는 이성 너머로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입술을 떼는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디아르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시작된 건지 형형색색 불꽃들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목덜미로 더운 숨이 느껴졌다. 촉촉, 가볍게 맞닿는 입술에 움찔하며 시선을 내리니 디아르트가 나를 보며 입술을 늘였다.
그러고는 손으로 내 뒤통수를 감싸곤 끌어당겼다. 그대로 끌려간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입술에 먹히고 말았다.
* * *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가운 차림으로 침대에 대자로 누운 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끔벅였다. 손가락으로 볼을 꼬집어 보니 틀림없이 꿈은 아니었다. 아까 축제에 있었던 일들이 전부 현실이라는 말이었다.
아직까지도 촉감이 남아 있는 듯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강에 떨어진 우리를 보고 놀란 기사들이 배를 타고 구하러 올 때까지 디아르트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기사들이 마치 눈치 없는 방해꾼이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보았고, 뒤집힌 배를 세워 단숨에 나를 그 위로 올렸다.
그는 기사들의 재킷을 빼앗아 내게 덮어 준 후 저택으로 오는 내내 옆에 달라붙어 있었다. 나를 방까지 에스코트하고서야 그는 따로 준비되어 있는 욕실로 향했다.
“디아르트와 키스를 했다니.”
아직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경멸 어린 표정으로 모진 말을 내뱉던 입술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다정하고 부드러운 키스였다. 나도 모르게 그의 목에 매달릴 만큼,
“좋았어.”
모든 면에 능력이 뛰어난 남자라 그런지 아니면 그마저 남주 버프를 받은 건지 디아르트의 키스는 혼을 쏙 빼놓았다.
황홀했던 순간을 되새기며 입술을 괴롭히던 난 이내 한숨을 토해 냈다.
“이제 인정해야겠네.”
그동안 사실 조금씩 눈치채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있던 걸 더는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의 일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으니까.
디아르트는 나를 좋아하고 있다.


#054
누군가의 행동을 눈으로 좇고 옆에 붙어 있으려 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질투를 느끼는 태도가 무엇을 뜻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다만 그동안은 의도적으로 모른 척했을 뿐이다.
디아르트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고 이어질 여자 주인공이 있었다. 괜히 그사이에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가 원작과 같은 결말을 맞게 되는 건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행동들이 나를 향한 호감이 아니길 바랐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었잖아.”
설마 디아르트가 그 순간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나랑 해. 그 제대로 된 연애.’
갑자기 그렇게 마음먹게 된 이유가 뭘까. 그동안 아슬아슬하긴 했어도 직접적으로 말할 것 같은 기색은 없었는데. 난 곧 자비스 황태자를 떠올렸다. 둘은 황실 연회에서 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적이 있었다.
“근데 둘 다 나한테 이러면 어떡해?”
이러면 원작은 대체 어떻게 굴러가게 되는 거지? 원작의 두 축인 남자 모두 내가 좋다는데. 내가 말하고도 민망하고 쑥스러워 헛기침을 내뱉은 난 축제 거리에서 만난 점술가의 말을 떠올렸다.
‘부인이 알고 있는 세계는 이미 달라지기 시작했으니 두려워하지 마시고, 부러 외면하지 마시고 마음이 가는 대로 흘러가게 두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부인이 원하는 바를 이룰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원작과는 상관없는 나라로 떠나서 돈지랄하면서 사는 거다. 그런데 원작의 남자주인공들과 지독히도 얽히게 된 상황이었다. 그 점쟁이 이제 보니 돌팔이 아냐? 그녀에게 준 2골드가 아까워지는 순간이었다.
“잠깐만. 근데 지금 상황은 원작 속 아델리아 포지션 아닌가?”
딱 두 사람의 구애를 받는 그녀의 위치인데. 그럼 설마 나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가고, 전쟁이 일어나 쑥대밭이 되고, 황실이 무너지고, 디아르트가 황제가 되는 건가?
‘그건 안 돼!’
아델리아 때문에 그 사달이 나도 괴로운데 나로 인해 레티시아나 자비스, 그 밖에 그동안 나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죽는다는 건 너무나 끔찍했다.
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역시 아무하고도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어떻게든 두 사람에게 도망칠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문득 디아르트와 나누었던 입맞춤이 떠올랐다. 비단 접촉으로 인한 기운만이 아니라 그 키스는 순간 숨 쉬는 것도 잊을 만큼 좋았다.
“미쳤어. 미쳤어. 키스에 미쳤니? 욕구 불만이야?”
그치만 달빛 아래 디아르트는 너무……. 머리카락을 반쯤 쓸어 넘긴 디아르트의 젖은 얼굴을 떠올린 난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학하다가 엎드려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놈이 미친 또라이라는 거 잊었어? 네가 얼마나 욕을 했었는지?”
얼굴에 속으면 안 된다고! 세상엔 그 자식보다 훨씬 다정하고 조신한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인생 포기할 거야?
“그동안 너한테 했던 싸가지 없는 행동들을 떠올려 봐!”
난 열심히 그동안 디아르트에게 당했던 갖은 경멸과 무시, 천대, 모욕, 핍박 등을 떠올려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무엇을 떠올리든 나를 내려다보던 디아르트의 열망 어린 눈동자가 덮어 씌워졌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디아르트가 그렇게 차갑게 굴었던 건 빙의 전 로에니에게 시달렸기 때문이잖아. 나라도 십몇 년을 그렇게 스토킹 당하면 그렇게 굴지 않을까. 알고 보면 그렇게 미친놈인 것만은 아닐지도 몰…….
난 고개를 홱홱 저었다. 키스 한 번에 사람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바뀌다니.
“진짜 욕구 불만인가…….”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갑자기 끼어드는 익숙한 목소리에 베개에서 고개를 번쩍 든 난 입을 헙 다물었다. 언제부터인지 디아르트가 침대 기둥에 어깨를 기댄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막 목욕을 마쳤는지 가운을 입은 그의 머리카락에서 뚝 떨어진 물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어, 언제부터 있었어요?”
“그 미친 또라이라는 건 나를 말하는 거겠지?”
아, 앞의 아델리아 어쩌고 하는 얘기는 못 들은 모양이구나. 다행이다.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디아르트가 다가와 침대에 앉았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벌어지는 가운의 앞섶 사이로 근육이 꽉 잡힌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다.
안 보려고 해도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이 가서 난감했다. 욕구 불만이 확실했다.
“머리 제대로 안 말리시면 감기 걸려요.”
“걱정하는 건가?”
“네, 뭐.”
“말려 줘.”
“네?”
눈을 마주칠 수 없어 방황하던 시선이 돌아갔다. 이게 무슨 개수작이지? 미간을 찌푸리고 쳐다보자 디아르트가 픽 웃었다.
“내가 말려 줘도 좋고.”
디아르트가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나를 응시하는 눈빛이 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나는 얼른 몸을 뒤로 물렸다.
내가 아는 디아르트 휘턴은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유혹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원작 속에서 아델리아를 대할 때도 강압적인 면을 보였기에 정말 얘가 남자주인공이 맞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었는데.
난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디아르트에게서 고개를 돌린 후 마음을 가다듬었다. 홀리면 안 돼, 정신 똑바로 차려.
“밤이 늦었어요. 그만 방으로 돌아가세요.”
“여기가 내 방인데 어디로 가란 말이지?”
디아르트가 모르겠다는 듯 답했다. 나는 그동안 그가 들었던 침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동안 저기서 주무셨잖아요.”
“분명 욕구 불만인 건 맞는 것 같군.”
“네?”
“아까부터 계속 내 가슴을 훔쳐보지 않나.”
“제, 제가 언제 그랬다고…….”
사실 그랬다. 방금도 저 탐스러운 가슴이 자꾸만 시선을 강탈하는 통에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내 방에 몰래 들어왔을 때도 가슴을 만지고 있었지.”
내가 로에니에 빙의했던 그 날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질색하며 사람을 벌레 보듯이 보던 남자가 이제는 먼저 유혹하고 있으니 참,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이라면 기꺼이 내어 줄 수 있는데.”
나는 가운 앞섶을 잡고 벌리려고 드는 그의 손을 얼른 붙잡았다.
“아까부터 왜 그러시는 거예요, 대체.”
“나도 마찬가지인 상태라.”
“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디아르트는 가끔 말할 때 주어를 빼먹는 습관이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던 난 그의 시선을 따라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흐트러진 가운 사이로 하얀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꺅.”
짧게 비명을 지른 난 얼른 가운을 여몄다. 고개를 모로 돌리고 있던 디아르트가 픽 웃었다.
“돌아보지 마세요!”
소리친 난 이불을 끌어와 덮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온몸이 붉게 달아올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사부작거리며 이불로 꽁꽁 싸매자 고개를 돌린 디아르트가 불쑥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군. 여름이라 강이 차지 않아 다행이야.”
디아르트의 목소리에는 담백한 염려가 묻어 있었다. 손을 뗀 디아르트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오래 걷느라 고단할 테니 쉬어.”
“가시는 거예요?”
방금까지 수작을 부리던 사람답지 않은 산뜻한 태도 변화에 도리어 당황해서 잡으니 그가 입술을 늘였다.
“참을 자신이 없어서.”
그의 말을 알아먹지 못한 내가 미간을 좁히자 이마를 아프지 않게 툭 친 디아르트가 그대로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뭘 참는다는……헙.”
뒤늦게 이해한 난 타는 듯한 얼굴을 이불 속으로 숨겼다.
‘미쳤나 봐, 진짜!’
한참 이불 속에서 버둥거리다가 정신을 차린 난 얼굴을 쑥 빼내고 디아르트가 사라진 침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자꾸 말려들면 안 되는데.”
제국의 이혼은 한번 서류를 제출하면 물리기 쉽지 않았고, 물리려고 하더라도 부부 양측의 합의가 필요했다. 그러니 내가 동의하지 않는 한 이혼이 취소될 일은 없었지만 상대가 디아르트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설마 이혼이 취소되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난 초조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제국에서 디아르트의 영향력, 그리고 그의 집착 강한 성미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얼마 안 가 그 염려가 비단 염려로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055
축제에서 너무 오래 걸은 데다 생각지도 못한 사건으로 심적 충격과 고민거리를 떠안게 된 탓인지 눈을 떴을 때는 정오가 한참 넘은 느지막한 시간이었다. 침대맡에 일어나 앉자 릴리가 기다렸다는 듯 세숫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왔다. 평소보다 들뜬 얼굴이었다.
“무슨 좋은 일 있니?”
장미꽃잎이 담긴 세숫물에 손을 담그며 묻자 릴리가 입이 간지럽다는 듯 달싹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일어나자마자 뭘 봐? 의아했지만 릴리는 신난 얼굴로 내 세수를 도울 뿐이었다. 간단하게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빗었다.
“마님, 잠깐 응접실로 가시겠어요?”
“왜? 손님이 왔니?”
“네!”
릴리가 활짝 웃었다. 미리 언질도 없이 온 손님이라니 예법에 맞지 않았다. 그러니 상대가 레티시아일 리는 없었다.
‘누구지?’
찾아올 손님이 없는데. 대체 누구길래 릴리가 이토록 흥분한 건지 의아해하며 서둘러 응접실로 간 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이 벌어졌다. 낯선 여인들의 뒤로 옷이 걸린 행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어림잡아도 수십 벌은 걸려 있는 것 같았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인.”
고아하면서도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중년의 여인이 앞으로 나와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마담 베로니카라고 합니다.”
“베로니카라면…….”
원작에서 읽은 적 있었다. 제국은 물론 타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저명한 의상실의 주인이었다. 그녀의 드레스를 사려면 적어도 일 년은 기다려야 한다고 할 정도로 인기 있는 디자이너였기에 무도회나 티파티에 그녀의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는 레이디가 있으면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고 했다.
로에니도 베로니카의 드레스를 구하려고 했지만 결국 구하지 못했었다. 나중에 아델리아가 유행이 지난 초라한 드레스로 귀부인들이 조롱을 받자 디아르트가 그녀를 위해 베로니카의 드레스를 수십 벌 안겨 주었었지.
그런 사람이 왜 여기에. 상황 파악이 안 되어 눈만 끔벅이는 사이 릴리가 나를 소파로 안내했다.
“이쪽에 앉아서 편히 구경하세요. 달콤한 밀크티로 드릴까요?”
“어, 응.”
무심결에 대답하자 릴리가 홍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베로니카가 손가락을 딱, 맞부딪쳤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낯선 여인들, 아마도 베로니카의 점원들이 상자들을 들고 다가왔다. 점원이 상자에서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옷감을 꺼내자 베로니카가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고지대에서만 서식하는 치트라누에가 뽑아낸 실을 한 올 한 올 엮어 만든 것입니다. 굉장히 가벼워 움직일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이 묘미지요. 실제로 입었을 때 은은하게 흐르는 광택이 몸매를 아름답게 돋보여 준답니다.”
그래서? 미간을 좁히니 마음에 안 든다고 오해한 베로니카가 다음 상자를 가져오게 했다. 상자 안에서 또 다른 옷감을 꺼내 설명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내 앞에 밀크티를 놓아 주는 릴리에게 눈치를 주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하렴.’
내가 왜 눈 뜨자마자 이러고 있는 거니? 내 무언의 눈짓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릴리가 몹시도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께서 지시하신 일이에요.”
“디아르트가?”
디아르트가 왜……. 내가 아델리아처럼 드레스가 없는 것도 아닌데. 고개를 갸웃하자 릴리가 말을 이었다.
“주인님께서 일 년 동안 마담 베로니카를 마님의 전용 디자이너로 고용하셨어요.”
“엑?!”
드레스 한 벌 구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라는 사람을 1년이나 계약했단 말이야. 아니 왜?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보자 릴리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마님, 마담 베로니카의 드레스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거 아시지요? 그런 향수 나부랭이 따위와는 전혀 비교도 안 된답니다!”
“아.”
릴리의 말로 대강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릴리는 어제 자비스가 향수를 선물한 일을 디아르트에게 고한 모양이다. 내게 향수를 천 골드 어치나 선물했다는 말을 들은 디아르트는 마담 베로니카를 고용한 거고.
아니, 다 떠나서 대체 언제? 어제 나와 같이 밤늦게 저택으로 돌아왔으면서 저 유명한 사람을 하룻밤 만에 데려왔다는 데에서 그의 능력을 알 수 있었다.
‘뭐, 사 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지.’
다이아몬드 광산도 여러 개라는데 이 정도 사치쯤은 간에 기별도 안 갈 것이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소파에 등을 기댄 후 내 마음에 드는 옷감을 찾아내기 위해 연이어 설명하고 있는 마담 베로니카에 손을 들어 보였다.
드디어 고른 건가, 하는 얼굴로 미소 짓는 베로니카에게 난 싱긋 웃어 보였다.
“그냥 다 주게.”
* * *
“이혼을 무르기로 하셨다면서요.”
레티시아의 말에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홍차에 혀를 델 뻔했다. 손수건으로 얼른 입을 가린 난 황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작이 고백하신 건가요?”
고백 비슷한 걸 하긴 했지만 그걸 어떻게……. 아니, 그 전에 그 소문은 뭐야?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들으신 거예요?”
“지금 사교계에 파다한걸요. 휘턴 공작이 직접 신전을 찾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설마요. 그런 소리는 못 들었어요.”
이 자식, 설마 나한테 말도 없이 독단적으로 이혼을 철회하려는 거야?
“로에니 님께 말씀 없으셨나요? 전 공작이 로에니 님께 고백하고 두 분이 화해하신 줄 알았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신 거예요?”
로에니 휘턴이 남편에게 외면당한다는 사실은 사교계 모두가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걸 레티시아도 모를 리 없을 텐데 디아르트가 내게 고백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보통 저런 소문을 접한다면 내가 그에게 매달렸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어머, 당연한 거 아닌가요?”
레티시아는 도리어 그렇게 말하는 내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저도 휘턴 공작이 냉담한 분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연회장에서 로에니 님을 안고 나가시는 표정은 그동안 볼 수 없이 필사적이었답니다.”
이 얘기는 저번에도 듣긴 했지만 그 디아르트에게 필사적인 표정이라니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들으셨나요? 린든 백작가와 웨스턴 자작가에 대해서 말이에요.”
린든 백작과 웨스턴 자작이라면 지난 황실 연회에서 나를 조롱하려다가 도리어 한 방 먹은 귀부인들이었다.
“무슨 일 있었나요?”
“린든 백작가에서 운영하는 상단이 세무 조사를 받았답니다. 동전 하나까지 철저하게 따지는 꽤 강도 높은 조사였다더군요. 그 과정에서 탈세는 물론이고 그동안 타국에 불법적으로 무기를 유통한 내역까지 드러나서 영지는 모두 반환되고 백작 부부는 지금은 구금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지요.”
“어머.”
“웨스턴 자작가도 불법 도박장을 관리하고 있는 사실이 밝혀져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변방으로 쫓겨났답니다.”
나를 조롱하던 얼굴들을 떠올리니 고소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잘난 척 굴더니 아주 쌤통이었다.
“그 외에도 요 며칠 새 몇몇 귀족들이 크고 작은 일들로 수난을 겪고 있답니다. 한데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글쎄요? 뭐 누구에게 밉보였던 걸까요.”
“맞아요. 밉보인 사람이 있답니다.”
“어머, 누군가요?”
그 고마운 사람이.
“제 앞에 계시는군요.”
“네? 저 말씀이신가요?”
레티시아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아무것도 안 했는걸요.”
“휘턴 공작이 하셨겠지요. 작금 제국에서 귀족들을 그렇게 단숨에 갈아 치울 수 있는 건 휘턴 공작뿐이니까요.”
하기야 원작에서도 아델리아를 괴롭히는 이들을 모두 쓸어버렸던 디아르트였다. 하지만 내가 그들과 마찰이 있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하던 난 연회장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지켜보던 밀토를 떠올렸다.
‘아주 사방팔방이 CCTV구만.’
고개를 젓는데 레티시아가 내 드레스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 드레스, 마담 베로니카의 작품이지요?”
“네. 맞아요. 알아보시는군요.”
“그럼요. 로에니님은 지금 제국 모든 여성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을 거예요. 마담 베로니카의 드레스를 독점하시다니. 게다가 쇼에 내보내려고 했던 의상들까지 전부 구입하셨다면서요.”
베로니카가 방문한 날 난 행거에 걸려 있던 드레스를 손가락으로 쭉 훑으며 재벌 흉내를 냈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사지.’
하지만 이미 디아르트가 구입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게 쇼에 내보낼 의상들이었던 모양이다.
레티시아가 마치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들을 목도한 듯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소문이 파다하게 날 수밖에요. 디아르트 휘턴 공작이 자신의 부인에게 홀딱 빠졌다고 말이죠.”


#056
레티시아의 말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평소엔 한 통 오지도 않던 연회며 다과회 초대장이 주체할 수 없이 쌓이고 있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쌓인 초대장들을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다들 디아르트가 내게 푹 빠졌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알고 싶은 거지. 또는 내게 줄을 대고 싶거나.’
그도 아니면 그동안 내게 무례를 저질렀던 게 있으면 사죄한다는 편지들일 게 뻔했다. 디아르트가 마이러스 백작 가문을 완전히 몰락시킨 게 다들 퍽 충격인 모양이다. 본인들도 보복당할까 무서운 거지. 하긴 아무리 디아르트라지만 한순간에 그 많은 귀족을 보내 버릴 줄은 몰랐다.
‘진짜 무서운 놈이라니까.’
나는 침대 기둥에 기대 나를 내려다보던 디아르트의 눈빛을 떠올리며 어깨를 떨었다. 제 마음을 자각하더니 아주 거침이 없다.
“마님, 안 읽어 보시는 거예요?”
“뭐하러 읽어. 다 똑같은 얘기들뿐인데.”
지겹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홍차가 든 찻잔을 들었다. 릴리가 내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했다. 등 뒤로 숨기고 있는 손이 수상했다.
“손에 들고 있는 건 뭐니?”
“저, 그게…….”
주저하던 릴리가 감추고 있던 편지를 내밀었다. 이게 뭐라고. 특별한 것 없는 편지를 시큰둥하게 살피던 난 뒤에 찍혀 있는 인장을 보고 멈칫했다. 낯이 익은 그것은 페이셔의 문장이었다.
“페이셔 공작님께서 보내셨어요.”
난 얼른 편지를 꺼내 읽었다. 짧고 간결하게 적힌 내용은 휘턴 대공작과 함께 곧 타운 하우스에 도착한다는 소식이었다.
“드디어 오는구나.”
두 가문의 승인까지 받으면 이혼은 완전히 마무리될 것이다. 이혼 철회가 제 생각만큼 수월하지 않은지 디아르트는 요즘 틈만 나면 내게 이혼 취소 서류에 사인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또는 무심하게, 가끔은 강압적으로 서류를 내밀었고 나는 번번이 거절하고 있었다.
‘대체 왜 사인하지 않는 거지?’
디아르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눈빛은 무심했으나 서운함을 담고 있었고 이따금 애가 타 보였다.
‘이혼하고 싶으니까요.’
내 단호한 대답에 디아르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왜 이혼하고 싶으냐 물었다.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히는 그가 어이없었다. 야, 그동안 네 행동들을 돌아봐, 라며 요목조목 따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먼저 다가가는 나를 밀어낸 건 당신이 아니었냐고 돌려 쏘아붙였다. 그를 가만히 듣던 디아르트가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혼은 안 돼.
‘한 번 더 날 좋아해 봐.’
이번엔 잘해 줄 테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멘트에 심장이 쿵 뛰었다. 하마터면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깊은 눈동자에 넘어갈 뻔했다. 잘생기면 무슨 말을 해도 유혹적으로 느껴지는구나, 통감했다.
씻어야겠다며 급하게 자리를 피했던 어젯밤을 떠올린 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저녁에도 불도저처럼 내 영역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디아르트를 막아 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했다. 더욱이 문제는 점점 그를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여기게 된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디아르트 휘턴 같은 남자는 다시 보기 힘들었다. 외모 잘났지, 능력 있지. 성격이 다소(?) 더럽다는 게 문제였지만 지난날의 그를 떠올려 보면 내 앞에선 놀랍도록 얌전해졌다.
‘그 정도면 그냥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 것 같……, 헉!’
돌았어? 네가 혀를 내둘렀던 남자야. 순간의 감정에 넘어갔다가 평생 힘들게 살래?
나는 주먹으로 이마를 때리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던 릴리가 얼른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왜 그러세요, 마님. 다쳐요.”
아무래도 그동안 너무 굶주렸던 것 같다. 더 이상은 안 돼. 내 이성이 마비되기 전에 그걸 찾아야겠어!
내가 벌떡 일어서자 내 이마를 살피고 있던 릴리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릴리, 외출 준비해!”
* * *
“역시 남자주인공은 이래야지!”
여주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는 남주의 모습을 떠올린 난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책장을 넘겼다.
그래, 남주란 자고로 이렇게 눈물도 많고 조신해야 했다. 누구처럼 툭하면 못마땅해서 눈썹을 치켜올리거나 삐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사람을 내려다볼 것이 아니라.
역시 그동안 디아르트랑 가까이 지내면서 남자를 보는 눈에 잠시 혼란이 왔었다. 이렇게 로맨스 소설을 읽으니 잊고 있던 취향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원래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인물도 에드거였는데 말이지. 우리 에드거는 대체 언제 볼 수 있을지…….
“이것도 사자.”
아무래도 이번 생에는 그른 게 아닌가 생각하며 고개를 저은 난 점원이 끌고 있는 이동식 트레이 위에 책을 내려놓았다. 릴리가 벌써 한가득 쌓여 있는 책들을 보며 입을 벌렸다.
“이걸 다 읽으시려고요?”
“응.”
난 단호하게 대답했다. 흐릿해진 올바른 남성상을 바로 세우기엔 이 정도도 모자랐다. 트레이에 담긴 책들을 하나씩 들어 제목을 읽는 릴리를 뒤로하고 다음 목표를 물색하던 차에 만족스러운 제목이 눈에 띄었다.
책을 꺼내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키가 닿지 않을 만큼 높이 있었다. 릴리와 점원이 나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그들 역시 역부족이었다. 그때 사이로 쭉 뻗어 나온 하얀 손이 책을 빼내었다. 그 책의 궤적을 따라 시선을 움직인 난 그대로 멈추었다.
꿀처럼 달콤해 보이는 금발과 콧잔등에 알알이 박혀 있는 귀여운 주근깨. 다정함이 묻어나는 푸른 눈이 곱게 휘었다.
“여기 있습니다, 레이디.”
어쩜, 목소리도 이렇게 살가운지. 나는 내게 책을 건네고 돌아서는 등을 바라보다가 다급히 그를 불렀다.
“에드거 황자 전하 아니신가요?”
에드거가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마저도 귀여워 보여 입꼬리가 올라갔다. 얼굴 한번 보기 힘들더니 설마 이런 곳에서 이렇게 예기치 못하게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절 아십니까?”
날 기억해 내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린 에드거가 낮게 중얼거렸다. 뵌 기억이 없는데…….
아마 로에니와도 안면이 없는 모양이었다. 치맛자락을 들며 그에게 인사했다.
“광영의 빛이 깃들길. 로에니 휘턴이라고 합니다.”
“아!”
에드거의 눈이 동그래졌다. 갸웃하던 그의 얼굴에 반가움이 깃들었다.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누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가슴에 주먹을 대고 화답하는 모습이 그렇게 젠틀하고 상냥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정상적이지 않은 인물들에게 치이며 지쳐 있던 난 원작에서 묘사된 그대로인 에드거의 나긋나긋한 심성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눈물까지 글썽이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얼굴이 친절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차 한잔 드시겠어요? 도와주신 보답을 하고 싶은데.”
“저는 좋습니다.”
에드거가 눈매를 휘며 웃었다. 왜 이런 애를 놔두고 그 두 인간이 주인공들인 걸까. 책으로 읽을 때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실제로 보니 더 납득이 안 되었다. 그러다 아델리아를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사람은 끼리끼리 만나야지. 이렇게 착하고 다정한 에드거에게 아델리아는 가당치도 않았다.
“근처에 케이크가 맛있는 카페를 안답니다.”
“혹시 로코 제과점 아닙니까?”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자주 가거든요. 중심가에서 케이크가 가장 맛있는 곳이죠.”
어쩜 입맛까지 나랑 딱 맞니.
로코 제과점으로 가는 내내 이어진 에드거와의 대화는 방금 처음 만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죽이 잘 맞았다.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케이크가 반쯤 없어져 있었다.
“누님께 듣던 대로 재밌는 분이십니다.”
싱긋 웃는 에드거 뒤로 싱그러운 초록빛 나뭇잎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 이게 바로 힐링이구나. 답답했던 체증이 씻은 듯 내려가는 기분에 싱글거리던 난 문득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기운에 차를 마시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입에 머금은 차를 내뿜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윽!’
뜨거운 차를 꿀떡 넘기며 인상을 찌푸린 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디아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쟤가 왜 또 여기 있어?’
통유리창에 떡 버티고 서서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이고 있는 디아르트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057
디아르트에게서 고개를 돌린 난 저만치에 서 있는 밀토를 째려보았다. 내 원망스러운 눈빛에 밀토가 은근슬쩍 시선을 모로 피했다.
‘저저, 배신자.’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그새 또 쪼르르 일러바쳐?
요즘 어디를 가던 디아르트에게 일일이 보고되는 듯했다. 분명 호위랍시고 따라다니는 기사들의 수작임이 틀림없었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사이 통유리창 밖에서 나를 보고 있던 디아르트가 몸을 돌렸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 좀!’
그렇게 바랐건만 디아르트는 제과점 안으로 들어왔다. 홀을 성큼성큼 가르는 디아르트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주저 없이 직진하던 그가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았다.
레이스가 달린 천과 리본으로 장식된 테이블은 거대한 덩치를 가진 그와 몹시도 이질적이면서 또 은근히 잘 어울렸다.
예상과 달리 옆 테이블에 앉아 태연하게 커피까지 주문하는 그의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안 그래도 시선을 끄는 데다 워낙 유명인이었던 터라 그를 알아보는 이들이 나와 디아르트를 번갈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숙덕거리는 모양새가 또 소문이 날 게 뻔한 터라 이마를 짚었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요즘 유행하는 소설 작가에 대해 말하고 있던 에드거가 내 표정을 보고 갸웃했다. 난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래, 신경 쓰지 말자. 내가 지금 뭐 대놓고 바람피우는 것도 아니잖아?
“아니에요. 어디까지 얘기하셨죠?”
“아, 그 작가가 동대륙에 관심이 많은 터라 신비한 주술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책에도 나오는데…….”
에드거의 말을 들으면서도 내 신경은 자꾸만 옆에 있는 디아르트에게 쏠렸다. 눈동자만 굴려 흘깃 쳐다보니 디아르트는 우아한 몸짓으로 커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에드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사주니 손금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게 안타깝습니다. 확실하게 알고 있다면 작품에 대해 더 공감할 수 있을 텐데.”
어떻게 이 선 같은 게 운명을 나타낸다는 건지 도통……. 에드거가 제 손을 내려다보며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귀여운 행동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제가 봐 드릴까요?”
“손금 볼 줄 아십니까?”
에드거의 눈이 동그래졌다.
“조금요. 흥미가 있어서 배운 적이 있답니다.”
사실 사주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속성으로 배웠었다. 고리짝 작업 멘트 같은 소리에 에드거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실례가 안 된다면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고개를 끄덕이자 에드거가 장갑을 벗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새하얀 에드거의 손은 고생 한번 하지 않은 듯 상처 하나 없이 부드러웠다. 이렇게 최애의 손을 잡아 보는구나, 나는 흡족한 미소를 숨겼다.
“이게 생명선이에요. 진하고 길수록 아프지 않고 장수한다고 하죠.”
비록 그와 맞닿은 피부에서 전해지는 기운은 여타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미약했지만 심적으로 느끼는 충족감만은 달랐다. 활자로만 읽으며 상상해 오던 인물이 눈앞에서 숨 쉬고 있고 이렇게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건 정말 특별한 느낌이었다. 이래서 팬들이 팬미팅을 가고 싶어 하는 거구나, 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결혼선인데, 전하는 네 개나 되시네요.”
“네? 그 말은 제가 결혼을 네 번이나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다기보다는 여성분과 원만한 교제를 한다고 해석하는 편이죠.”
깜짝 놀랐던 에드거가 한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연신 감탄을 내뱉는 에드거로 인해 신이 난 내가 계속해서 감정선이며 성공선 같은 걸 설명하고 있는데 문득 머리 위가 어두워졌다. 고개를 돌린 난 움찔했다. 디아르트가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에드거와 맞잡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 눈길을 쫓은 에드거가 어깨를 떨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신이 나 있던 표정에 주눅이 든 게 보였다.
‘디아르트가 무서운가 보네.’
하기야 그동안 내가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렇지 디아르트는 제국에서 전쟁귀라고 불리는 사내였다. 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사실인 것처럼 퍼져 있었고 또 반쯤은 맞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니 심신이 여린 에드거에게는 두려울 만했다. 게다가 가만히 있어도 서느런 남자가 매섭게 노려보고 있기까지 하니 더하겠지.
마치 사나운 맹수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인 초식 동물처럼 무력해 보이는 에드거를 안타깝게 보는데 디아르트의 목소리가 더욱 섬찟해졌다.
“즐거워 보이는군.”
황족에 대한 예도 갖추지 않음에도 에드거는 그의 눈치만 살폈다.
“저도 앉아도 되겠습니까.”
“아, 그, 그럼요, 공작. 앉으십시오.”
에드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옆에 앉은 디아르트가 뾰족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제 아내가 황자 전하와 친분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아. 아까 서점에서 처음 뵈었습니다.”
“오늘 처음 만났다기엔 무척이나 친밀해 보입니다만.”
“누님께서 공작 부인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시다 보니 친밀감이 느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또 워낙 재밌는 분이셔서.”
“그래서 대낮에 이렇게 트인 장소에서 손을 마주 잡고 있을 정도로 친해졌단 말이지.”
“그, 그건 손금을 보려고…….”
어금니를 씹는지 디아르트의 아래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의 냉담한 일갈에 에드거가 안절부절못했다. 디아르트가 왜 이렇게 공격적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마치 아내와 바람 난 상대를 취조하는 듯한 그의 팔을 잡았다. 말을 섞을수록 그의 기세가 험해지는 게 느껴졌다.
“전하, 아쉽지만 다음에 다시 뵙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게 좋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에드거가 반색했다. 안도하는 표정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으니 디아르트가 미간을 찡그렸다.
“저런 게 취향인가?”
그간 기대했던 거에 비해 너무나 짧은 만남이었다. 에드거가 떠난 자리를 아쉽게 보고 있는데 디아르트가 낮게 물었다. 고개를 돌리니 그가 삐뚜름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못마땅함과 퉁명스러움이 물씬 담겨 있었다.
“취향이라뇨?”
“바라보는 눈빛에 호감이 가득하던데.”
그야 최애니까. 디아르트가 알아챌 정도로 티를 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황자 전하신데 저런 거라니, 누가 들을까 무섭네요.”
“난 이혼 안 한다고 했어.”
디아르트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가 완고한 기세로 다시 한번 못 박았다.
“그러니 그대가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될 일은 없어.”
“그럼 이혼 안 하고 만나면 되겠네요.”
괜히 강짜 부리듯 말하니 디아르트의 표정이 사라졌다. 순간 찔끔해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정말 다른 남자를 만나면 무슨 사달이라도 낼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긴 집착이 어마어마한 놈이니 상상하기도 무서웠다.
정적이 흐르던 중 디아르트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어쩌라고? 의아해서 보니 그가 눈썹을 까딱였다.
“내 결혼선은 어떻지?”
허. 이런 걸 믿을 남자가 아닌데 무슨 수작인가 싶다. 뚱한 표정이 질투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얼른 보라는 듯 채근하는 손짓이 좀 귀엽게 느껴졌……. 난 얼른 입술을 깨물었다. 귀엽긴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 디아르트의 손을 거칠게 잡아챘다. 순간 신경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강렬한 기운에 하마터면 이성을 잃을 뻔했다. 요즘 들어 디아르트와 접촉이 잦아진 덕분에 저주 때문에 갈증이 이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와 닿을 때마다 느끼는 기운의 강도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망할 놈의 저주가 어떻게든 날 디아르트와 엮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난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한 줄이네요.”
“내게 결혼은 한 번뿐이군.”
디아르트가 역시 그렇다는 듯 말했다. 옆 테이블에서 내가 에드거에게 하는 말 다 들었으면서.
“이성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는 뜻이에요.”
“해석하기 나름이지.”
“우기지 마세요.”
재물, 성공 모든 게 보기 드물게 좋은 손금이었다. 개중에서도 생명선이 진하고 긴 게 명도 길었다. 과연 남주답게 모든 걸 다 가졌구만.
반 억지로 보게 된 손금이지만 막상 손을 놓아주려니 아쉬워서 미적거리다가 물었다.
“자식은 몇 명이나 낳는지 봐 드릴까요?”


#058
“자식?”
어느새 불쾌해 보이던 기색이 사라진 디아르트는 뜻밖의 소리를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아이에 대한 건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던 모양이다.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디아르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먹을 쥐어 보세요.”
디아르트가 순순히 주먹을 쥐었다. 손이 커서 그런지 주먹이 과장 조금 보태서 아기 머리만 했다. 그의 팔목을 두 손으로 잡은 난 엄지로 손바닥 아래쪽을 꾹 눌렀다. 팔목 위로 작은 돌기가 불쑥 튀어나왔다.
“네 명 낳는다네요.”
어렸을 적에 동네 아주머니에게 배운 야매 점을 봐 주니 디아르트의 표정이 묘해졌다.
“부지런히 해야겠군.”
“네?”
“네 명이나 낳으려면 말이야.”
뭐를 부지런히 한다는 거야, 이 남자가?
무얼 떠올리는 건지 디아르트는 퍽 흡족한 표정이었다. 괜히 뺨이 달아오른 난 헛기침을 내뱉으며 얼른 그의 손을 놓았다.
디아르트가 내게 쥐여 주었던 손을 쥐었다 펴며 말했다.
“오늘 저녁은 외식 어때.”
“어디서요?”
“드몽제.”
“드몽제라면…….”
적어도 육 개월은 기다려야 먹을 수 있다는 제국 내 핫플레이스 중의 핫플레이스였다. 한번 먹어 본 사람은 그 맛을 절대 잊을 수 없다는 극찬을 받는 곳이라 가 보고 싶었지만 예약이 잔뜩 밀려 있다는 소리에 포기해야 했었다.
“거기를 예약했어요?”
“예약이 필요한가?”
당당한 그의 표정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너 is 뭔들.
* * *
과연 유명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입으로 느낄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을 느낀 난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즐기며 디저트로 나온 오렌지 무스를 포크로 찍었다. 새콤달콤한 오렌지와 크림치즈가 어우러진 맛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던 디아르트가 제 몫의 디저트를 밀어 주었다. 디저트 배는 따로 있는 법이니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접시를 내 쪽을 당겨오는 걸 바라보던 디아르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것도 사양하지 말고 받지.”
그가 펼쳐서 내민 서류를 본 내 얼굴은 달콤한 크림과 달리 떨떠름해졌다.
“서명해.”
디아르트는 친절하게도 펜까지 내밀며 종용했다. 나는 벌써 몇 번이나 버리고, 찢고, 외면했지만 다시 돌아온 이혼 철회 서류를 지겹게 내려다보았다.
알고는 있었어도 정말이지 끈질긴 남자다.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벌써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전 이혼을 무를 생각이 없어요. 이건 공작님 혼자 밀어붙인다고 되는 일이 아니에요.”
디아르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못마땅하다는 뜻이었다.
“조만간 저희 아버지와 대공작께서 방문하신다는 서신이 왔어요. 두 분의 승낙만 받으면 끝나는 일이에요.”
“끝날 일 없어. 페이셔 공작도 내 아버지도 승낙할 일 없으니까.”
“그럼 소송으로 가는 거죠. 가문의 허락이 필요하다지만 형식적인 거 아시잖아요. 가장 중요한 건 당사자의 입장이니까요. 이미 황제의 승인까지 받았으니 내가 이혼하겠다면 결국은 하게 되어 있어요.”
흥. 콧방귀를 뀐 난 디아르트가 종종 그러는 것처럼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협상의 여지는 없다는 의미였다.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아르트가 낮게 중얼거렸다.
“역시 신전을 없애 버리는 게 빠르겠군.”
……뭔가 무서운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나는 애써 담담한 척 찻잔을 들었다.
“대체 왜 그렇게 나와 이혼하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친구로라도 남고 싶다고 했을 정도면서 곧 죽어도 이혼은 하겠다고 하는 게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와 이혼하고 싶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실 제일 마음에 걸리는 건 하나였다.
“공작님.”
“디아르트.”
“갑자기 왜 제게 관심을 보이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시적인 감정일 거예요. 십여 년을 함께하는 동안 안중에도 없었잖아요.”
디아르트의 운명의 상대는 정해져 있었다. 아델리아 맥그리거. 지금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여자 주인공과 이어지겠지.
안심하고 있다가 디아르트가 훗날 제 짝을 찾아가게 되면 난 원작의 루트를 그대로 타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가장 무서웠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그가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루트에서 벗어나려는 날 궤도에 올리려는 원작 시스템의 개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 주먹보다 큰 케이크를 한입에 욱여넣는 모습마저 예뻐 보이는데 일시적인 감정일 것 같진 않군.”
찔끔해서 입을 다물자 케이크로 꽉 찬 양쪽 볼이 볼록 튀어나왔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디아르트가 픽 웃었다.
디아르트의 입에서 예쁘다는 말이 나왔다는 것보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다정한 눈빛에 순간 꾹 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울컥 솟아오를 뻔했다. 애써 그를 피하는데 디아르트가 말을 이었다.
“오해할지도 모르지만 난 당신이 예전의 내가 알던 사람 같지 않아.”
씹지도 않은 케이크가 꿀꺽 넘어갔다. 과연 디아르트.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짐승 같은 감으로 느끼고 있던 모양이다.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동그래진 눈을 서둘러 깜빡였다.
“예전에 당신은…….”
그답지 않게 미간을 찌푸리며 단어를 고르던 디아르트가 말을 이었다.
“성가셨지. 하지만 지금은 아냐. 마치 다른 여자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지. 그리고 난 그게 마음에 들어. 그대를 밀어냈던 게 후회될 만큼.”
디아르트의 말은 그가 호감을 품은 상대는 원작의 로에니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말로 들렸다. 그건 사람 마음을 말랑말랑해지게 만들었다.
“지금은 제발 날 좀 성가시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야.”
디아르트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나는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감쳐물고 있던 입술을 떼었다.
“평생을 귀찮게 따라다니던 여자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니까 잠깐 호기심이 든 걸 거예요.”
“로에니 휘턴.”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내 눈을 똑바로 보라는 듯이. 고개를 들자 디아르트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호감하고 호기심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그치만…….”
“당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했잖아. 오랫동안 고민하다 얻은 결론이야. 난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
* * *
하마터면 서명할 뻔했다. 디아르트에겐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었다. 침대에 대자로 누운 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이혼하고 싶지 않다고 했던 디아르트였지만 나에 대한 호감을 직접적으로 말로 내뱉은 건 처음이었다. 그는 진짜 로에니 휘턴과 다른 내가 좋다고 했다.
전생에서든 빙의하고서든 평생 사랑이란 걸 받지 못하면서 살았는데 이제야 정말 나를 좋아해 줄 사람을 만난 것 같다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릴리와 기사들이 나를 좋아해 주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미쳤어?”
나는 얼른 머리를 쥐어박았다.
“나라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디아르트야. 네가 원작을 읽으면서 그렇게 치를 떨었던 그 디아르트 휘턴이라고.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 말이 안 되는 상대잖아.
고개를 휘젓는데 방으로 들어온 릴리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마님,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손님? 이 시간에?”
요즘따라 날 찾는 이들이 왜 이렇게 많담. 게다가 보통 손님들은 서신을 먼저 보내는 게 예의였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해가 떠 있는 낮에 방문하는 게 일반적인 관례였다.
“누군데?”
“아델리아 맥그리거 님이라고 하세요.”
생각지 못한 이름이 툭 튀어나오자 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걔가 여길 왜?
“아델리아 맥그리거라고?”
“네.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다음에 방문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는데도 꼭 마님을 뵙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셔서.”
릴리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입술을 삐죽였다.
“지금 어디에 있니?”
침대에서 일어난 난 빠른 걸음으로 방을 가로지르다가 우뚝 멈춰 섰다. 릴리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살폈다.
“마님?”
“릴리.”
“네?”
“지금 당장 마담 베로니카의 드레스 중 가장 화려한 것으로 가져오렴. 그리고 머리도 다시 올리는 게 좋겠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릴리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준비할게요!”


#059
“맥그리거 양, 오래 기다리셨죠.”
드레스를 갈아입고 화장과 머리를 고쳤더니 시간이 퍽 지나 있었다. 소파에 앉아 손톱을 물어뜯고 있던 아델리아가 짜증 난 표정을 감추고 미소 지으며 일어섰다.
“아니에요, 부인. 연락도 없이 늦은 시간에 찾아온 무례를 용서하세요.”
“흔치 않은 일이라 조금 놀라긴 했지요.”
웃으며 몰상식을 짚자 순식간에 싸늘해진 아델리아를 보니 통쾌해졌다. 그날 연회장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이중인격적인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입 한번 제대로 떼지 못하고 당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어떤 태도를 취하더라도 곱게 보지 않는 상대에게 물러설 필요 없었다.
난 릴리를 흘깃 보고 표정을 지우는 아델리아의 앞에 앉았다.
“여러 차례 서신을 보냈으나 답이 없으시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올 수밖에 없었답니다.”
서신이라니? 그동안 여러 곳에서 편지를 받았지만 아델리아가 보낸 것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흠칫 어깨를 떤 릴리가 입술을 감쳐물며 내 눈치를 살피는 게 보였다.
아아. 대강 상황을 짐작한 난 아델리아에게 웃어 보였다.
“제가 요즘 워낙 여기저기서 초대장을 받고 있는 터라 미처 연락을 드리지 못했어요. 그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나요?”
“중요한 일이라. 혹 둘이서만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릴리가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와 아델리아 사이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강 아는지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홍차가 좀 쓰구나. 우유를 가져다주겠니?”
“……알겠습니다.”
발이 안 떨어지는 듯 주저하던 릴리가 나가자 아델리아의 태도가 돌변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소심한 사람처럼 내 눈치를 보던 표정이 거드럭거렸다.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댄 아델리아가 나를 노려보았다.
연회장에서 내게 충격을 안겨 주었던 그 고약한 표정이었지만 그때만큼 못되어 보이지 않는 건 얼굴 뒤로 느껴지는 초조함 때문일 것이다. 다른 이들처럼 디아르트와 나의 소문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온 줄 알았는데 단순히 그것 때문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당신 짓이죠?”
“알아듣게 말하세요.”
나도 똑같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쏘아보자 아델리아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연회장에서 순순히 당하던 여자가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겠지.
“당신 짓이 아니면 거래처들이 갑자기…….”
말을 잇던 아델리아가 문득 나를 훑어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뜯어 보던 아델리아의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아무래도 알아본 듯했다.
“소문이 아주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군요.”
마담 베로니카의 드레스 중에 고르고 골라 가장 우아한 옷을 선택한 보람이 있었다. 난 의기양양하게 드레스 자락을 잡아 올렸다.
“예쁘죠? 공작님께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았답니다.”
현재 사교계에는 내가 마담 베로니카의 드레스를 1년간 독점하게 된 것이 큰 이슈라고 했다. 드레스나 유행에 민감한 이들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델리아에겐 더욱 의미가 다를 것이다.
평민에서 귀족, 그것도 황후의 오라버니인 맥그리거 후작의 수양딸 자리까지 올라온 아델리아였다. 연회장에서 한 말을 돌아보면 그녀가 얼마나 신분 상승과 명예욕에 목말라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현재 사교계에서 가장 주목받아야 할 때 뜬금없이 내가 화제가 되고 있으니 속이 꼬이는 건 당연했다. 그 꼬인 심사가 그녀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입술을 짓씹은 아델리아가 질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죠?”
“수작이라뇨?”
“당신이 휘턴 공작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건 평민들도 다 아는 사실이에요. 그 드레스도 사실은 당신이 계약한 거 아닌가요?”
“이런, 아델리아 양이 아직 귀족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르시는 모양인데.”
은근히 깔아뭉개는 말에 아델리아의 얼굴이 모멸감에 사로잡혔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치졸함이었지만 무도하고 교만한 태도의 사람에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응수해야 하는 법이었다.
“마담 베로니카의 드레스는 설사 황족이라고 해도 구하기가 힘들답니다. 그러니 소문대로라면 남편에게도 사랑을 못 받는 사교계의 트러블메이커인 제가 어떻게 무려 1년 동안이나 그녀의 드레스를 계약했겠어요?”
자신이 생각해도 그럴듯한지 입을 다물었던 아델리아가 입꼬리를 삐죽 비틀었다.
“쓰러지는 척하더니 동정심이라도 사셨나 봐요?”
“잘 먹힌 것 같죠?”
아무렇지 않게 받아친 난 고아한 손짓으로 찻잔을 들었다. 기 싸움에서 밀리는 게 분한 듯 아델리아가 드레스를 콱 움켜쥐었다.
“그럼 아놀드 상단의 거래처들이 일시에 계약을 파기한 것도 당신 짓이 아니란 말인가요?”
아놀드 상단이라면 맥그리거 후작이 운영하는 상단이었다. 그 상단으로 벌어들인 부로 지금의 후작 작위까지 오를 수 있었던 터라 모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맥그리거 가문의 핵심이었다. 더욱이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상단이기에 거래처들과의 신뢰 관계가 끈끈했다.
그런 거래처들이 하루아침에 계약을 파기하자 들었다고?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인물은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아델리아의 태연자약한 표정에 숨겨진 불안함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맥그리거 후작이 당신을 탓하던가요?”
맥그리거 후작은 자신의 가문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잃어버린 딸을 대신해 아델리아를 수양딸로 들이고 잘해 주었겠지만 그녀로 인해 지금까지 쌓아 온 가문의 광영을 잃는 것까지 두고 볼 정도는 아니었다.
정곡을 찔렸는지 아델리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그래서 이렇게 급하게 나를 찾아왔구나. 그럼 나한테 이런 태도를 보이면 안 되지 않나?
연회장에서야 내가 디아르트와 틀어진 줄 알고 본색을 드러냈지만 지금은 내게 잘 보여도 모자랄 판이었다. 아무래도 그때의 내가 어리숙해 보인 탓에 만나기만 하면 제 맘대로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델리아 양, 사실 전 생각보다 관대하답니다.”
난 찻잔을 내려놓으며 인자하게 타일렀다.
“지금이라도 사과를 하신다면 제가 공작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내 말이 진심인지 살피는 시선에 빙긋 웃었다. 고민이 되는지 머뭇거리던 아델리아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연회장에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부인.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용서해 주세요.”
“믿네?”
놀랐다는 듯한 내 말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설마 정말 그 사과를 받아 줄 거라고 생각했나요?”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부러 더 거들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속았다는 생각에 아델리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전 그런 진심이 조금도 담기지 않은 사과를 받고 넘어갈 만큼 멍청하지 않답니다.”
연회장에서 무려 다섯 번이나 멍청하다는 말을 들었던 울분을 토해 내니 속이 다 시원했다. 아델리아는 무어라 하지도 못하고 입술만 까득까득 깨물며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어쨌든 사과는 잘 받았어요. 제가 그 보답으로 당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려 줄게요.”
난 문으로 흘깃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지금쯤 올 때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고 디아르트가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릴리가 아델리아를 데려올 줄 알았다. 난 얼른 손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을 쏟아 냈다. 느릿했던 디아르트의 발소리가 다급해지는 것이 들렸다.
나는 어이없는 듯 입을 벌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델리아를 향해 슬쩍 미소 지어 보였다.
‘너만 연기할 줄 아는 거 아니거든.’
저번에는 저주 때문에 정말 기절했다면 이번엔 충격으로 쓰러진 척해 볼 작정이었다.
“로에니!”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휘우듬 몸을 휘청이자 디아르트가 손을 뻗어 나를 받아 냈다. 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를 올려다보았다. 평소 무표정이 박제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표정이 절제된 그의 얼굴이 걱정과 놀람으로 일그러진 걸 보니 미안해졌다. 하지만 이제 와서 연기를 멈출 수 없던 난 정신을 잃은 척 눈을 감았다.
디아르트가 나를 안아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보내.”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움찔 떨었다. 악다문 잇새로 축객령을 내린 디아르트가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060
응접실에서 방까지 날 그대로 안고 와 침대에 눕힌 디아르트가 의사를 부르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요란하게 기절했으면서 벌써 깨어났다고 할 수는 없어 난 꿋꿋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사이 헐레벌떡 도착한 의사가 나를 진찰했다.
“어떤가.”
“……상태가 악화되신 것 같습니다.”
의사가 비통한 목소리로 진단을 내렸다. 방 안에 있는 이들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에 난 침착하기 위해 입 안 살을 질근 씹었다.
“얼마나.”
한 템포 느리게 디아르트가 물었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다 불규칙합니다. 푸이탄병은 스트레스와 심통이 주된 원인인지라 무엇보다 안정이 가장 중요한데…….”
그야 지금 모두를 속이고 있기에 가슴이 조마조마한데다 디아르트가 아까부터 내 손을 붙잡고 있으니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게 당연했다.
“혹시 심적으로 충격받으실 만한 일이라도 있으셨는지요.”
의사의 물음에 디아르트는 답이 없었다. 다만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을 때만 해도 멀쩡했던 내가 아델리아와 만나고 쓰러졌으니 누구의 탓이라고 여길지 뻔했다. 실제로 그녀에게 차가운 축객령을 내리기도 했고.
아델리아에게 한 방 먹이려고 그녀 앞에서 쓰러진 척하긴 했지만 디아르트의 기세를 보니 덜컥 겁이 났다. 그가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조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치료법은 아직 못 찾았나?”
잠시 말이 없던 디아르트가 묻자 의사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아, 아직…… 보내 주신 서적들을 밤낮없이 훑고 있습니다만 워낙 자료가 방대하다 보니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의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대답했다. 내가 불치병인 줄 아는 디아르트는 그동안 내 병을 고칠 방법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꼭 날 낫게 해 줄 거라던 릴리의 말은 이런 이유에서였나보다.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것 같아 입술을 감쳐물었다.
“방금 입술이 움직였다. 깬 건가.”
디아르트의 말에 의사가 살피는 동안 난 깨어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을 죽였다. 얼굴 위로 닿는 뜨거운 시선에 제발 눈꺼풀이 떨리지 않기를 바랐다.
“고든.”
“예, 주인님.”
“램버트를 불러와.”
그의 명을 받은 고든이 방을 나선 듯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나가 봐.”
방 안에 있던 이들을 모두 내보낸 디아르트가 두 손으로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
“일어나, 로에니.”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간곡한 목소리였다. 디아르트가 내 손을 잡은 손 위로 이마를 기댔다.
* * *
디아르트는 내가 쓰러져 있는 내내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덕분에 안 그래도 가뿐하던 몸이 최근 들어 가장 가벼웠지만 나는 며칠을 침대 위에서 꼼짝도 못 했다.
떠들썩하게 쓰러져 놓고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게 멋쩍기도 했거니와 디아르트가 내가 침대에서 내려오는 걸 허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앞에서 벌써 세 번째 쓰러진 터라 퍽 놀란 것 같았다.
난 내 곁을 떠나지 않는 디아르트와 지극정성으로 날 돌보는 릴리 외 사용인들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몸은 더할 수 없이 좋아졌지만 양심에 찔려 침대가 가시방석마냥 불편해 혼났다.
디아르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침대에 일어나 앉은 난 릴리를 불렀다. 내가 무얼 추궁할지 눈치챘는지 릴리는 차마 내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방황했다.
“릴리, 내게 온 편지는 왜 숨긴 거니?”
“그, 그게…….”
잔뜩 기죽은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는 릴리의 모습은 몰티즈처럼 귀여워 보였지만 난 짐짓 엄하게 얼굴을 굳혔다.
“디아르트가 시켰니?”
“……네.”
역시 릴리마저 디아르트에게 넘어가 있었군. 릴리만큼은 완전한 내 편이라고 생각했건만 아주 사방팔방이 다 호랑이 새끼들이었다니.
내 배신감 어린 표정을 본 릴리가 다급하게 변명을 쏟아 냈다.
“주인님께선 마님을 생각하셔서 그런 거예요. 밀토 님이랑 램버트 님도 마님께서 연회장에서 언쟁이 있으셨다기에 저 역시 혹시 마음이 상하실 편지가 있을까 걱정되고 그래서……”
“맥그리거 영애 말고 다른 이들의 편지도 빼놓은 거 있니?”
“마이러스 백작 부인과 웨스턴 자작 부인, 그리고 레오폴드 남작 부인. 또…….”
릴리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았다. 모두 연회장에서 내게 적대적으로 굴었던 이들이었다. 무서운 건 레티시아가 초대했던 다과회에서 본 이들도 있었다. 디아르트가 그들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시 그 안에 자비스 황태자의 서신도 있었어?”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걸로 봐선 맞는 모양이다. 어쩐지 자비스 성격에 그렇게 내게 프러포즈 비슷한 걸 해 놓고 편지 한 번 안 보내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몇 통이나?”
“다섯 통 정도 왔었어요.”
다섯 번이나 황태자의 편지를 무시했는데도 까마득하게 몰랐다는 건 디아르트가 중간에서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내 기색을 살피던 릴리가 무언가 결심한 듯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님, 주인님이 남편으로서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응?”
“물론 다른 사람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성격에 세상 혼자 사시는 것처럼 독단적이시고 가끔은 정말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냉정하셔서 정떨어질 때도 있지만.”
……차라리 욕을 하지 그러니? 갑작스러운 릴리의 뒷담화에 난 눈만 깜박였다.
“제국의 셋뿐인 공작이죠, 가늠도 안 될 정도로 돈도 많죠. 그리고 무엇보다 몸도 좋고 잘생기셨잖아요. 밖에 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시는걸요. 물론 성격을 모르니 그렇겠지만 아무튼, 전 잘생기면 얼굴값, 못생기면 꼴값이라던 저희 할머님 말씀이 진리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릴리가 내 손을 붙잡고 단호하게 확언했다.
“자비스 황태자 전하보다 우리 주인님이 훨씬 더 잘생기셨어요.”
나는 도무지 맥락을 따라갈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릴리가 눈썹을 늘어트렸다.
“다들 전전긍긍하고 있어요. 혹시 마님이 주인님을 버리고 황태자 전하에게로 가실까 봐.”
아무리 그래도 버린다는 표현이 좀 아니지 않니.
혹시 그동안 내가 외출을 한다거나 다른 남성과 이야기만 나눠도 디아르트가 귀신같이 나타났던 게 그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CCTV 역할을 했던 건가.
“예전엔 주인님이 냉정하시니 마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다른 좋은 분을 만나셨으면 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주인님은 마님을 정말 귀하게 여기고 계세요. 어렸을 때부터 모신 집사장님도 요즘 같은 모습은 처음 본다고 하셨는걸요.”
“그러니.”
“마님이 쓰러지셨을 때 공작님이 한시도 떠나지 않고 침대를 지키시는 걸 보고 얼마나 감동했는지 몰라요.”
사실 나도 감동하긴 했다. 응접실에서 쓰러진 척했을 때 조금 조마조마했었다. 아델리아를 다시 만난 디아르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내게 달려왔고, 나를 안아 올렸다. 아델리아에게 축객령을 내리던 목소리는 지금까지 잊히지 않을 정도로 싸늘했다. 그에 안심하는 내 자신이 못되게 느껴질 만큼.
언젠가 원작의 흐름대로 아델리아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학을 뗄 때는 언제고,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스스로가 이해 안 될 지경이다. 그동안 미운 정이 든 건지 아니면 그의 강렬한 접촉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잘생긴 남자가 좋다고 하니 마음이 기우는 건지 모르겠다.
“바람 좀 쐐야겠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난 정원으로 나왔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었지만 가벼운 옷차림만큼이나 기분도 산뜻해졌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쏟아지는 햇살과 시야를 물들이는 싱그러운 초록색 잎사귀들을 눈에 담았다.
가만히 앞을 보고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하얀색 슈트를 입은 디아르트가 바람에 휘날리는 은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고 금빛 눈동자를 흘깃 들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쳤다.
눈꺼풀도 깜빡이지 않고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걸어오던 디아르트가 입꼬리를 늘이며 웃었다.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난 무심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을 잡은 것도 아닌데 설명하기 어려운 간지러운 기운들이 신경을 타고 발끝까지 찌르르하게 흐르고 있었다.


#061
웃는 미남은 위험하다.
정원에서 디아르트와 마주하고 절감했다. 왜인지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몸을 돌려 내빼던 난 그에게 뒤를 붙잡혔다. 분명 꽤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거리를 좁혀 온 건지 내 허리를 휘어 감은 그가 제게로 당겨 안았다.
“왜 도망치지?”
못마땅한 기색이 실린 목소리가 너무 가까웠다. 순식간에 뺨이 달아오르고 눈이 핑핑 도는 것 같아 손을 잡아 뿌리치려고 했지만 디아르트는 쉽게 물러나 주지 않았다. 얼굴도 마주하지 않고 피하려는 내가 불만스러운 것 같았다.
“아파요.”
아무리 버둥거려도 벗어날 수 없어 최후의 방법으로 소리치자 날 안고 있던 디아르트의 힘이 느슨해졌다. 그대로 튀어 나가려는 날 순식간에 안아 든 디아르트가 빠른 걸음으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놀라서 다가오는 사용인들에게 의사를 부르라고 지시한 디아르트가 방까지 거침없이 움직였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한 거짓말에 일이 커졌다. 내가 이마에 손을 얹자 디아르트의 표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
“어지러워?”
푸이탄병의 주된 증상은 어지러움과 그로 인한 실신이었고 빈도수가 잦아질수록 병이 악화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디아르트의 심각한 표정은 그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연신 괜찮다며 내려 달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다시 침대에 붙들린 난 디아르트와 릴리에게 외출 금지령을 받았다.
그렇게 또 며칠. 모두의 걱정과 달리 몸 상태가 더할 나위 없는 난 좀이 쑤셔 미칠 노릇이었다. 몰래 나가고 싶어도 옆에는 디아르트가 문 앞에는 릴리가 버티고 서 있으니 시도조차 불가능했다.
“하아…….”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자 디아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 불편한가?”
그의 시선이 샅샅이 훑는 것이 느껴졌다. 요즘 들어 왠지 디아르트를 똑바로 보기 힘들어진 난 눈을 슬그머니 피했다.
“안 바쁘세요?”
“바빠.”
“그럼 가서 일하시는 게 어떨까요? 램버트 경이 일이 잔뜩 밀려 있다고 한탄하던데.”
“고든이 이리로 서류를 가져올 거야.”
“굳이 왜…… 집무실에 편하게 앉아서 하시면 되잖아요.”
“난 이게 편하니 신경 쓰지 마. 이런, 또 틀렸군.”
디아르트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쯧, 혀를 찼다. 그의 시선이 박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내린 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커다란 손에 어울리지 않는 앙증맞은 바늘을 움켜쥔 그가 도안을 벗어난 노란색 실을 풀어내고 있었다.
“근데 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
“수 놓잖나.”
그러니까 안 어울리게 갑자기 웬 수냐고. 보면 모르냐는 듯 당당한 표정의 디아르트를 보니 말문이 막혔다. 오늘 아침에 하얀 천과 실을 들고 온 그는 마치 보란 듯 몇 시간 째 수를 놓고 있었다.
“어때. 괜찮아?”
디아르트가 수를 놓다 만 천을 들어 보였다. 퍽 뿌듯한 표정에 비해 실력은 형편없었다. 난 도무지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수놓은 천을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당신을 닮은 토끼야. 귀엽지 않나?”
“토끼요?”
그 노란 괴물이? 저 흉측한 것이랑 닮았다는 데에 화를 내야 할지 귀엽다는 소리에 좋아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갑자기 왜 수에 취미가 붙으신 건가요?”
빈말로라도 잘했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아 말을 돌렸다.
“그대의 취향이 조신한 남자라기에 애를 쓰는 중이지.”
“누가 그래요? 내가 조신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홱 노려보니 릴리가 얼른 딴청을 부렸다.
“한데 그런 책도 있는 줄은 몰랐군.”
“네?”
무슨 책? 고개를 갸웃하니 디아르트가 등 뒤에 책 한 권을 꺼냈다. 익숙한 분홍색 표지가 몹시도 불안하다 했더니 역시나였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빼앗으려 드니 그가 한 템포 빠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서 흔들리는 익숙한 제목이 부끄러워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마님은 버섯이 제일 좋아.”
“으아아악!!”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제목을 읊는 디아르트 때문에 수치사 할 것 같았다. 큰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서서 그의 손에서 책을 낚아챘다. 의외로 순순히 빼앗긴다 싶더니 그의 등 뒤에서 책들이 하나씩 튀어나왔다.
“복종하는 집사님.”
“아아악!”
“그 기사는 왜 밤마다 눈물을 흘리는가.”
“꺄아악!!”
치부가 하나씩 까발려지는 것 같았다. 디아르트가 덤덤하게 제목을 읽으면 괴성을 지르며 빼앗기를 수 차례. 침대 위에 널브러진 책들을 이불로 감싼 난 그 위로 엎드렸다.
쪽팔려. 쪽팔려! 이불에 묻은 얼굴을 차마 들지 못하고 있는데 머리 위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많이도 샀던데. 읽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다 읽은 거예요?”
“우는 남자가 취향인 모양이지?”
차라리 기절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런 책으로 욕구가 해결되나?”
하필 고른 것마다 찐한 19금 소설이었던 거야. 정말 울고 싶다. 이대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는데 디아르트의 목소리가 바짝 가까워졌다.
“책보다 확실한 방법을 아는데.”
귓가의 솜털이 쭈뼛 서는 느낌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몸을 한껏 숙인 디아르트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해 본 적은 없지만 자신 있어.”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깊고 그윽한 시선에 순간 숨 쉬는 것도 잊었다. 나도 모르게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키자 그의 눈길이 따라붙었다. 이불을 콱 움켜쥐고 있는 손 위로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닿았다. 명백한 유혹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덫에 걸린 것처럼 디아르트의 시선에서 꼼짝도 할 수 없던 난 문이 닫히는 소리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벌떡 일어서니 문 앞에 있던 릴리가 보이지 않았다.
‘둘만 남겨 두고 나가면 어떡해!’
갑자기 분위기가 야릇해진 상황에서 침대 위에 나를 빤히 쳐다보는 커다란 남자와 둘만 남게 되자 긴장돼서 삐걱거리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삐뚜름하게 몸을 기울인 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디아르트에게서 억지로 도망치듯 눈을 피하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했다.
“자비스 황태자에게서 온 편지를 중간에 가로채셨다면서요.”
이 숨 막히는 공기를 깨 보겠답시고 나온 말이 이런 것이었다. 느긋한 미소를 짓고 있던 디아르트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 분위기에 다른 남자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군.”
안방 침대 위에서, 그것도 남편 앞에서 프러포즈 비슷한 걸 한 남자의 이름을 올렸다. 내가 생각해도 실수였지만 덕분에 디아르트가 흥이 깨졌다는 얼굴로 몸을 바로 했다. 의자로 물러나 앉은 디아르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 전하신데 편지를 무시해도 괜찮을지 걱정되어서요.”
한숨 돌린 내가 변명하자 디아르트가 픽 웃었다. 괜찮지 않으면 어쩔 건데, 라는 얼굴이었다. 그 냉담한 표정에는 자비스에 대한 숨기지 않는 적의가 묻어 있었다.
“혹시 향수도 가져다 버렸어요?”
무언의 긍정이었다. 자비스 황태자가 향수를 선물한 다음 날 마담 베로니카가 방문한 것이 공교롭다 했더니.
디아르트가 못마땅한 듯 뚱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 남자 성격에 환불을 했을 리는 없고 버렸을 게 뻔했다. 어이가 없어 허, 하고 바람 빠진 웃음만 나왔다.
“그거 1000골드 어치란 말이에요!”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진심으로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보니 말문이 막혔다. 1000골드 정도는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이거지.
“더 좋은 향수를 사 주지.”
“그런 문제가 아니라.”
“다른 남자가 주는 선물은 받지 마.”
디아르트의 눈동자에는 질투와 원망이 뒤섞여 있었다. 이 남자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짚어 줘야 할지 막막했다.
‘1000골드 짜리 선물을 받아 놓고 프러포즈를 거절하면 모양새가 너무 이상하잖아!’
향수가 배달되면 돌려주려고 했건만 글러 먹었다. 답답함에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마 소리 지르진 못하고 디아르트를 쏘아보고 있는데 노크한 릴리가 방으로 들어왔다.
“주인님, 마님. 대공작님과 페이셔 공작님께서 곧 도착하신대요.”


#062
조만간 타운 하우스에 도착한다는 서신을 받긴 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이른 방문에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다.
릴리의 도움을 받아 서둘러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내가 준비하는 모습을 벽에 기대어 지켜보고 있는 디아르트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힘들게 마중 나갈 필요 없어. 누워 있어.”
벌써 이 말만 네 번째였다. 가볍게 무시하고 방을 나서자 옆으로 따라붙은 디아르트가 팔을 내밀었다. 자연스러운 에스코트였다.
‘침착하자.’
그동안 페이셔 공작이 하루라도 빨리 방문하길 기다렸지만 막상 대면하려고 하니 긴장되었다. 전생에서 난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여 페이셔 공작과의 만남이 두렵게 느껴졌다.
‘손을 올리진 않겠지?’
아무리 이혼이 흠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들에게는 허물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개중에서도 페이셔는 건국 공신 출신의 가문인 터라 영예롭지 않은 일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 할 정도였다. 뭐, 물론 로에니가 이미 여러모로 그 명성을 깎아 먹었지만.
아무튼 그런 집안의 골칫덩이가 이제 와서 요란스럽게 이혼을 한다고 하니 페이셔 공작이 나를 어떻게 대할지 짐작할 수 없었다.
“무서운가.”
차분한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디아르트가 살피는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이 굳었군.”
이제라도 돌아가는 게 어때? 라며 눈썹을 까딱였다. 내가 그러자, 한마디만 하면 곧바로 돌아설 기세였다.
디아르트는 내가 페이셔 공작과 만나는 게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아마도 곧바로 이혼 승낙서를 받아 낼까 저어되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저으니 그의 입술이 삐딱해졌다.
마침내 저택 입구로 나오자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던 사용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저만치에서 다가오고 있는 마차를 지켜보았다.
‘긴장하지 마, 로에니 휘턴.’
속으로 심호흡을 한 난 천천히 멈춰 선 마차 안에서 페이셔 공작이 내리길 기다렸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기다란 다리가 먼저 보였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새하얀 피부에 나와 꼭 닮은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미남자였다. 서늘한 외모를 가진 그는 도무지 40대로는 보이지 않았다.
거울로 종종 볼 수 있는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분명 오늘 처음 보는데도 불구하고 가슴 부근에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좀 비켜 주게.”
나도 내려야 할 것 아닌가. 낮은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시선을 돌리다 마차 밖으로 나오고 있던 디아르트와 꼭 닮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햇빛에 반짝이는 은발이며 깊은 금안. 장난스러운 기운이 담긴 눈빛만 아니라면 마치 몇 년 후의 디아르트를 목도한 것처럼 닮은 그는 누가 봐도 휘턴 대공작이었다.
“오랜만이구나.”
마차에서 내려선 휘턴 공작이 미소 지었다. 나와 디아르트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까지 디아르트의 팔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던 난 불에 덴 듯 손을 떼었다. 머리 위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동안 잘 지낸 모양이군.”
놀란 듯한 기색은 곧장 장난스러운 눈웃음으로 사라졌다. 휘턴 공작이 멀뚱히 서 있는 페이셔 공작의 등에 손을 얹었다.
“마차를 오래 탔더니 시장하군. 식사부터 하자꾸나.”
식사 자리는 생각보다 유한 분위기에서 흘러갔다. 휘턴 공작은 디아르트의 부친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쾌하게 대화를 끌고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여행지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끊임없이 쏟아 내는 동안 그 모든 걸 함께 겪었을 페이셔 공작은 묵묵히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대하는 휘턴 공작의 태도 또한 퍽 호의적이었다. 덕분에 양측에서 비난받을 각오를 하고 있던 난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수도에 올라온 김에 황실 사냥 대회에 참석하려고 한다.”
저녁 식사 후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던 휘턴 공작이 말했다.
“궁부에서 물러난 후 십여 년간 참여하지 않았으니 오랜만에 폐하도 뵐 겸 페이셔 공작과 함께할 생각이야.”
페이셔 공작은 말없이 찻잔을 기울였다. 본인의 이름이 나오는데도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외관만 아니었으면 이쪽이 디아르트의 아버지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혼을 하고 싶다고?”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휘턴 공작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포문을 열었다. 사냥 대회에 대해 말하다가 왜 갑자기 이혼 얘기가 나와? 럭비공처럼 뜬금없이 튀는 대화 주제에 마침 차를 마시고 있던 난 뜨거운 찻물에 혀를 델 뻔했다.
“허락하마. 처리할 건 빨리 처리하고 사냥 준비를 해야지.”
“안 합니다, 이혼.”
디아르트가 씹어 뱉듯 단호하게 잘랐다.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 있기에 방심했는데 제 아들의 이혼을 처리라고 일컫는 휘턴 공작을 보고 절감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나.
“그래? 로에니의 의견은 다른 것 같은데.”
휘턴 공작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전…….”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자 디아르트가 내 손을 움켜잡았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강렬한 기운에 어깨를 흠칫 떨며 고개를 드니 그가 어서 이혼하지 않겠다고 대답하라는 단호한 눈빛을 보내 왔다.
“아무래도 디아르트 네놈의 일방적인 생각인 모양이구나.”
휘턴 공작이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음. 갑자기 이런 말이 떠오르는군.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진리지. 명언이야.”
디아르트가 고개를 홱 돌려 휘턴 공작을 쏘아보았다. 아버지를 보는 눈이 맞나 싶게 냉랭한 눈빛이었지만 휘턴 공작은 조금도 타격받지 않은 듯 여유롭게 찻잔을 기울이며 덧붙였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군.”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던 페이셔 공작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잠깐 다들 자리를 비켜 주게.”
중후한 목소리였다. 아들을 놀려먹는 게 분명한 휘턴 공작이 그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작이 일어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지만 디아르트는 요지부동이었다.
“있는 데서 말씀하시죠.”
“오랜만에 만난 부녀가 회포를 풀 시간은 주어야지.”
휘턴 공작이 나가자 눈짓했다. 탐탁지 않은 얼굴로 버티던 디아르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어깨를 한번 짚고는 방을 나섰다.
종잡을 수 없긴 하지만 분위기 메이커인 휘턴 공작이 나가고 페이셔 공작과 둘만 남은 응접실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분위기에 연신 차만 들이켰다.
“야위었구나.”
한참 만에 나온 목소리는 퍽 낮았다. 테이블의 기하학적인 무늬만 눈으로 좇으며 불편한 공기를 견디고 있던 난 고개를 들었다. 공작이 눈동자를 모로 돌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페이셔 공작 역시 나만큼이나 이 자리를 어색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편지를 받고 놀랐다.”
그가 넌지시 운을 뗐다.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미간을 좁힌 페이셔 공작이 뒷말을 삼켰다. 그 얼굴에 억울함과 원망이 울컥 치솟았다. 얼마나 무책임하게 느껴지는 말인지 모른다. 그동안 방치해 놓고 이제 와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으로 보였다.
페이셔 공작이 딸에게 관심이 없다는 소문은 로에니가 사교계에서 조롱받는 원인 중의 하나였다. 관심 없는 아버지, 외면하는 남편 사이에서 고립된 채 사람들과 반목하며 점점 더 혼자가 되었을 로에니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표정을 굳힌 채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으니 시선을 모로 돌리고 있던 페이셔 공작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어라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서신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작은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예요?”
봉투를 들어 안에 있던 걸 꺼내 펼쳤다. 이혼 승인서였다. 가문의 인장까지 완벽하게 찍혀 있었다. 미리 승인서를 작성해 가져왔다는 것에 놀라 그를 보았다.
“네 방은 아직 그대로다.”
페이셔 공작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게 어떻겠니.”


#063
이혼 후에 페이셔 가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페이셔 공작이 그동안 외면했던 골칫덩이 딸을 받아 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타국으로 나가 살 계획을 세웠었다.
사이가 좋지 않은 가족과 숨 막히게 사느니 그게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택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하는 공작의 표정은 진지했다. 결혼해서 나간 지 십 년 가까이 되었는데 방을 그대로 두었다는 것도 의외였다. 딸을 방치했던 사람의 행동치고는 모순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정말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다.”
말을 잇는 페이셔 공작의 표정에는 놀랍게도 후회의 빛이 엿보였다. 난 그가 미리 작성해온 이혼 승낙서를 곱게 접어 다시 봉투 안으로 넣었다.
페이셔 공작과의 만남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나는 그가 소문과 달리 적어도 나를 미워하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그게 뭐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기도 전에 손에 들려있던 봉투를 빼앗겼다. 거침없이 봉투 안에 있는 서류를 꺼내 읽은 디아르트의 눈살이 와락 구겨졌다.
“이리 줘요.”
서류를 찢으려 드는 디아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쓰면 그만인 거 몰라요?”
내 말에 표정이 더욱 사나워진 디아르트가 서류를 와락 구겼다. 그의 손에 무참히 찌그러진 서류를 아무렇게나 집어 던진 그는 나를 향해 몸을 숙였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감에 몸을 뒤로 물리며 시선을 피했다. 나를 샅샅이 읽어 내리던 디아르트가 짓씹듯 말했다.
“끝까지 이혼하겠다는 건가?”
예전만큼 디아르트와 이혼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지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를 대하는 디아르트의 태도는 달라졌고, 그 때문인지 아니면 저주 때문인지 나 역시 디아르트가 싫지 않았다. 언젠가 원작의 루트대로 아델리아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불안감 역시 그날 이후로 옅어졌다.
릴리의 말대로 돈 많지, 몸 좋지, 얼굴 잘생겼지. 때때로 귀여워 보였고 또 자주 섹시하기도……. 난 입술을 감쳐물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왜 얼굴이 빨개져?”
턱을 붙잡아 제게로 돌린 디아르트가 물었다.
“좀 떨어지세요. 너무 가깝잖아요.”
나는 헛기침을 뱉으며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디아르트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고 도리어 더 가까이 다가왔다. 더는 물러설 때도 없었다. 그의 입꼬리가 말아 올라간 게 보였다.
‘분명 일부러 이러는 거야.’
내가 당황하는 걸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홱 쏘아보니 디아르트는 무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침대로 갈까.”
은밀하게 속삭인 디아르트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나를 안아 올렸다.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손을 두른 난 당황해서 눈만 깜박였다.
나를 가뿐하게 내려놓은 디아르트가 그대로 침대 위로 올라왔다. 화들짝 놀라 파바박 침대 맡으로 도망치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왜, 왜, 왜 올라와요?”
“자야지. 밤이 늦었어.”
“그, 근데 왜 내 침대 위에 눕냐고요.”
너무 당혹스러워서 자꾸만 더듬거리게 되었다. 그간 디아르트가 여러모로 수작을 부려 오긴 했지만 이렇게 침대 위까지 올라온 건 처음이었다.
이불이 흐트러진 침대 위에 누운 디아르트의 모습은 너무 위험했다.
“아무 짓 안 해.”
당신 지금 무리하면 안 되거든. 모로 누운 디아르트가 머리를 괸 채 말했다.
‘뭐, 뭘 무리한다는 건데?’
묻고 싶었으나 물으면 안 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아르트가 긴 팔을 쭉 뻗었다. 그 손에 이끌려 그대로 그의 품 속으로 쏙 안겼다. 이렇게 안기는 것은 처음이라 그대로 굳었다.
디아르트가 이불을 끌어와 덮어 주었다.
“물러설 때 얌전히 자는 게 좋을 거야.”
협박 어린 말에 뒤늦게 바르작거리던 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자 디아르트가 더 바투 끌어안았다. 머리 위로 내려앉는 뜨거운 숨결에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디아르트의 것인지 내 것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침을 삼킨 난 눈을 질끈 감았다. 잠깐 이성을 놓치면 무슨 짓을 하게 되는 건 내가 될지도 모르겠다.
옷을 입고 있는 터라 피부가 맞닿은 것도 아닌데 알 수 없는 충족감이 번지는 것이 느껴졌다. 숨을 쉴 때마다 디아르트의 냄새가 따라붙었다. 도무지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 * *
잘도 자는군.
누군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데. 금세 곯아떨어진 무해한 얼굴을 보니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쌕쌕 숨을 내뱉는 로에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아르트가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바람을 좀 쐬고 와야 할 것 같다.
곧 여름이 지나가려는지 열기가 가신 바람이 부드럽게 불었다.
시들지 않는 마법을 걸어 둔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산책로를 따라 걷던 디아르트는 가제보 아래에 앉아 있는 인영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들도 디아르트를 봤는지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무시하고 돌아설까 생각하다 가제보로 향했다.
“잠이 오지 않아 나온 게냐?”
휘턴 공작의 물음에 짧게 끄덕인 디아르트가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술잔을 보고 있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페이셔 공작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적대가 담긴 눈빛이었다. 디아르트에겐 별스러운 것도 아니었으나 하필이면 로에니와 꼭 닮은 보라색 눈동자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를 볼 때의 페이셔 공작은 늘 못마땅한 눈초리였다.
“로에니는?”
“잠들었습니다.”
짧은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휘턴 공작이 술잔을 내밀었다. 디아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여전히 장미가 피어 있군.”
휘턴 공작이 정원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서, 이혼을 하는 게냐, 안 하는 게냐.”
“안 합니다.”
휘턴 공작은 단호하게 자르는 디아르트를 의외라는 듯 보았다. 처음 이혼을 승인해 달라는 서신을 받았을 때는 아들놈의 무정함에 지친 로에니가 드디어 그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적부터 둘을 보아 온 터라 로에니의 일방적인 구애를 디아르트가 진저리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처음에 결혼시켜 달라고 조르는 로에니를 설득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무조건 디아르트와 결혼하겠다며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로에니를 말릴 수 없었다. 제 아비 역시 만류하지 못했지.
그리고 디아르트에게 외면당하는 로에니를 볼 때마다 그 아이가 안쓰럽고 친우에게 미안했다.
휘턴 공작이 술잔을 기울이며 페이셔 공작의 기색을 흘깃 살폈다. 표정이 담기지 않은 무덤덤한 얼굴이었지만 몇십 년을 함께 했던 그는 알았다. 지금 페이셔 공작이 무척이나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디아르트는 자신을 쏘아보는 페이셔 공작에게서 물러서지 않았다.
“로에니와 얘기가 된 거고?”
답이 없었다.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다웠다.
“로에니는 바이올렛 하우스로 데려가겠다.”
바이올렛 하우스는 페이셔 저택의 별칭으로 공작 부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제비꽃이 정원 가득 피어 있어 붙은 이름이었다.
“그렇겐 안 됩니다.”
디아르트가 차가운 목소리로 단칼에 잘랐다. 페이셔 공작의 표정이 더할 수 없이 싸늘해졌다. 휘턴 공작은 이 상황이 퍽 즐거웠다.
그렇게 싫다고 무시하더니 디아르트와 로에니의 관계가 역전된 것이 유쾌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휘턴 공작은 입꼬리를 늘였다.
제 친우에게 딸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산후열로 아내를 잃은 후 제정신이 아니었던 페이셔 공작은 제 딸조차 보기 힘들어했다. 그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땐 두 사람의 사이에는 이미 좁히기 어려울 정도로 간극이 생겨 있었다.
슬픔에 젖어 있는 사이 훌쩍 커 버린 로에니를 대하는데 어색했던 페이셔 공작은 그녀가 하기 싫어하는 건 시키지 않았고 원하는 건 안겨 주는 것으로 미안함과 애정을 표현했다. 디아르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서도 로에니와 결혼시킨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다들 페이셔 공작이 딸을 미워한다고 여겼고 로에니마저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는 그저 서툰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자네가 밀려날 거야.’
휘턴 공작은 제 아들을 잘 알았다. 한번 로에니를 제 사람으로 각인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을 것이다.
‘사냥 대회나 즐겨야겠군.’
휘턴 공작이 픽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064
느지막이 일어나 간단한 식사를 하고선 정원 테이블에 앉아 장미를 바라보았다. 저 장미가 그 빌어먹을 장미는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속에서 열불이 치솟아 나도 모르게 노려보게 되었다.
“장미꽃을 싫어하는 모양이구나.”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난 찻잔을 내려놓고 있는 페이셔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네 어머니도 장미처럼 화려한 꽃보다는 소박한 제비꽃을 더 좋아했지.”
페이셔 공작의 뺨이 느슨해졌다.
정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후로 매일같이 그와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공작에 대해 몇 가지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늘 무표정하게 굳어 있는 그의 얼굴이 아내의 이야기를 할 때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산후에 죽었으니 아이를 외면했던 것도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방치를 두둔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로에니를 정말 미워해서 무시했던 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전생에서 나를 싫어하던 가족들을 겪어 본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냉담해 보이는 공작의 눈빛에서 애틋함을 읽을 수 있게 했으니까.
그는 종종 내 기분을 살폈고, 때때로 대화를 주고받을 때면 은근히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바이올렛 하우스의 후원에 핀 제비꽃들은……”
“제비꽃은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비집고 들어온 불청객의 한마디에 페이셔 공작이 싸늘한 시선을 돌렸다. 디아르트가 지지 않고 응수했다.
‘또 시작됐다, 또.’
“음, 오늘따라 차가 달콤하구나.”
옆에서 눈으로 싸움을 하든 말든 여유롭게 차를 음미하던 휘턴 공작이 미소 지었다. 태평하게 햇살을 즐기고 있을 게 아니라 두 사람 좀 말리라고 눈치를 주어도 그는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요 며칠간과 똑같은 패턴으로 이어진 상황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예전에 페이셔 가문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다던 디아르트는 그사이에 감정이 생겼는지 살벌한 눈빛이었고, 페이셔 공작 역시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이대로라면 원작에서처럼 두 사람 사이에 교전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원인이 나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만나기만 하면 반목하니 서로를 피하면 좋겠건만 디아르트는 내가 정원으로 나올 때마다 꼬박꼬박 따라붙었다.
“참, 듣기로 이번 사냥 대회는 특이한 방법으로 진행된다더군.”
휘턴 공작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화 주제를 틀었다. 그럼에도 서로를 노려보는 시선을 떼지 않던 디아르트와 페이셔 공작이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혼인한 귀족들은 반드시 부부 동반으로 참석해야 한다지.”
일 년에 한 번 황실에서 정기적으로 여는 사냥 대회는 백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가문에서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행사였다. 건국 공신 가문인 페이셔와 휘턴 가의 수장만이 그 공로를 인정받아 불참할 수 있었기에 디아르트 역시 그간 빠짐없이 참가했었다.
주로 남성들만 참여하던 사냥 대회를 갑자기 왜 부부 동반으로 바꾸었나 의아해하던 중 휘턴 공작이 덧붙인 말에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자비스 황태자의 제안이라던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아무리 그라도 사냥터에서까지 여자를 만나려고 할 리는 없고, 만약 그렇다면 더더욱 부부 동반이라는 수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나를 만나기 위한 수단이 분명했다. 아무리 편지를 보내고 연락을 취해도 소용없으니 아예 나올 수밖에 없는 자리를 만든 거겠지.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지 디아르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부인들의 사냥감도 점수에 포함된다던데. 활은 쏠 줄 아니?”
휘턴 공작의 물음에 대답하려 했지만 디아르트가 한발 빨랐다.
“저희는 안 갑니다.”
“귀족들 모두 참석하는 자리다. 아무리 너라도 불참하면 말이 나올 게야.”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누가 욕을 하든 말든 직접적으로 건드리지만 않으면 개의치 않을 남자였다. 그리고 사실 이미 욕을 많이 먹고 있기도 해서 그쯤은 별 타격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번 사냥 대회에 참여하고 싶었다. 제 시야에서 벗어나는 걸 허락지 않는 디아르트 때문에 마음 한쪽에 무겁게 걸려 있던 일을 해결할 기회였기 때문이다.
디아르트와의 이혼을 떠나서 자비스 황태자의 마음을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 조금 부담스럽긴 해도 좋은 사람이지만 그가 남자로 느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일은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는 게 서로에게 좋았다.
‘천 골드짜리 향수도 양해를 구해야지.’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남의 성의를 무시하게 된 격이니 사과를 하는 게 도리였다. 정작 일을 저지른 사람은 저렇게 당당한데. 나는 디아르트를 홱 쏘아보았다.
“전 참석하고 싶어요.”
내 원망 어린 눈길에는 꿈쩍도 하지 않던 디아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안돼. 당신 지금……”
“사냥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해요.”
“내가 활을 가르쳐 주마.”
페이셔 공작이 말하자 휘턴 공작이 반색하며 맞장구쳤다.
“네 아버지의 활 솜씨는 알아준단다. 나도 지금까지 한 번도 이겨 보질 못했어. 분명 좋은 스승이 될 거다.”
“그래요?”
디아르트를 낳은 사람답게 기골이 탄탄한 휘턴 공작에 비해 페이셔 공작은 슬림한 체형이었다. 활 같은 무기보다는 책이나 악기가 어울릴 것 같은데 의외였다.
“말이 나온 김에 당장 배워 보는 게 어떻겠니.”
휘턴 공작이 제안했다. 페이셔 공작이 대답을 기다렸다. 디아르트만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냥 대회에 참석하는 걸로 결론이 나 불만인 것 같았다.
차를 마시다 갑자기 활을 배우기 위해 연무장으로 향했다. 훈련을 하고 있던 기사들이 나를 보고 반가워서 달려오다가 내 옆에 줄줄이 달린 남자들을 발견하곤 후다닥 대열을 갖췄다. 경례하는 기사들의 표정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꽤 자세가 좋구나.”
페이셔 공작이 활을 쏘는 기본적인 자세부터 잡아 주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휘턴 공작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확실히 자네 여식인가 보군.”
페이셔 공작의 입꼬리가 옅게 늘여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기분이 안 좋은 것은 팔짱을 끼고 삐뚜름하게 지켜보고 있는 디아르트 한 사람뿐인 모양이다. 나는 말없이 노려보고 있는 디아르트는 모른 척하며 활시위를 당겼다. 핑, 소리와 함께 날아간 화살이 과녁 밑바닥에 내리꽂혔다.
“처음인데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해.”
휘턴 공작이 박수를 치며 칭찬하자 페이셔 공작도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뒤쪽에서도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고개를 돌리니 기사들이 대단하다는 듯 엄지를 치켜들거나 박수를 치고 있었다.
“대단하십니다, 마님!”
“몇 번만 더 하시면 과녁 중앙에 맞히실 것 같습니다.”
검이며 활을 능숙하게 다루는 기사들이 고작 이 정도로 뭐 이렇게 감탄하는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쉬어도 좋다고 했는데도 굳이 뒤에서 지켜보는 게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기사들과 사이가 좋은 모양이구나.”
휘턴 공작은 기사들의 반응이 재밌는 기색이었다. 저렇게 잘 따르는 척하지만 사실은 호랑이 새끼들이라는 사연 긴 말을 할 수 없어 고개만 끄덕이는데 문득 옆쪽이 어두워졌다. 어느새 바짝 다가온 디아르트가 손에 들린 활을 움켜잡았다.
“처음부터 무리하면 안 좋아.”
“괜찮아요.”
딱 한 번 활시위를 당긴 것뿐인데 무리랄 것까지. 디아르트야 내가 불치병에 걸린 줄 알고 있으니 그렇겠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페이셔 공작과 휘턴 공작의 눈에 그가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다.
페이셔 공작은 미간을 좁혔고 눈이 동그래졌던 휘턴 공작은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괜히 민망한 기분에 활을 힘주어 당겼다.
고집을 부리는 날 바라보다 한숨을 삼킨 디아르트가 내 뒤로 바짝 붙었다. 그로 인해 순식간에 밀려난 페이셔 공작을 신경 쓰기도 전에 그가 내 손을 잡고 자세를 고쳐 주었다.
“잠깐……”
“다리를 조금 더 벌려.”
디아르트가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귓가에 느껴지는 숨결은 물론이거니와 맞잡은 손이며 등 뒤로 붙은 체온 때문에 그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가 손으로 배를 잡아 제게 바투 끌어당겼다.
“배에 힘주고. 숨을 멈춰.”
진작부터 숨을 못 쉬겠거든?!
페이셔 공작과 달리 디아르트는 지나치게 달라붙어 있었다. 등 뒤가 의식돼 좀체 집중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했다.
“지금. 쏴.”
디아르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손가락에서 떠난 활이 과녁의 정중앙에 퍽, 꽂혔다.


#065
그날 이후 내게 활을 가르치는 건 디아르트의 몫이 되었다. 딸과의 사이를 좁힐 수 있는 오붓한 시간을 빼앗긴 페이셔 공작은 언짢은 기색이었지만 디아르트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그가 잘 가르친 덕인지 아니면 정말 소질이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디아르트와의 밀착된 스킨십 때문에 바짝 긴장을 하게 되어서인지 내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사이 디아르트는 꾸준히도 이혼 철회 동의서를 내밀었고, 페이셔 공작은 바이올렛 하우스로 동행할 것을 제안했다. 둘은 마주치면 말없이 눈으로 싸웠고 휘턴 공작은 말리기는커녕 부추기는 일상이 흘러갔다. 그 어느 때보다 시끄럽고 북적거리는 하루하루였다.
그러는 동안 황실 사냥 대회가 당일로 다가왔다.
“어때, 어울리니?”
거울에 이리저리 옷을 비춰 보며 묻자 릴리가 눈을 반짝이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요! 너무 잘 어울리세요!”
이 세계로 빙의된 후 오랜만에 바지를 입었다. 좀 어색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거추장스럽게 풍성한 드레스보다 훨씬 몸이 가벼웠다. 머리도 한데 올려 묶으니 움직임이 무척이나 가뿐해졌다.
사냥복 입는 걸 도와준 릴리와 애니 모두 멋있다며 난리였지만 한 사람만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디아르트의 시선이 내 차림새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너무 딱 붙는 거 아닌가. 불편할 것 같은데.”
“편해요. 그렇게 붙는 것도 아니고요.”
사실 전생에서 한때 유행했던 스키니진을 입은 듯 다리에 딱 달라붙긴 했다. 하지만 잘 늘어나는 재질이라 훨씬 편했다.
“몸 선이 너무 드러나는 것 같군.”
그렇긴 하지. 하지만 말을 탈 때는 바람의 저항을 덜 받기 위해 딱 붙는 복장을 하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승마복이라는 게 있었고. 전장에서 뼈가 굵은 그가 그를 모를 리 없었다. 디아르트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는 이유야 뻔했다.
연인의…… 아니 아직 연인은 아니지. 자연스럽게 떠오른 단어를 서둘러 지운 난 민망함에 괜히 거울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내가 봐도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게 노출 있는 드레스보다 일견 관능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소유욕과 집착이 강한 디아르트의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이렇게 옷차림에 간섭하는 건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좀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나 이런 취향이었나?’
그때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디아르트가 외투를 벗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기세에 주춤 뒤로 물러섰다. 릴리와 애니가 붉어진 얼굴로 저만치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어째서인지 둘은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주먹까지 쥐어 가며 응원하고 있었다.
‘대체 뭘 응원하고 있는 거야?!’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온 디아르트가 벗은 외투를 내 허리에 두르고 소매를 묶었다. 근사한 사냥복에서 순식간에 뒷산을 오르는 평범한 등산객 패션이 되어 어이없는 나와 달리 디아르트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한결 낫군.”
“설마 이대로 계속 있으라는 건 아니죠?”
디아르트가 눈썹을 까딱이며 긍정했다.
“당신 이런 남자였어요?”
기막혀 보다가 묻자 디아르트가 눈을 찌푸렸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원래 이렇게 질투도 많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었냐고요.”
요즘 들어 원작 속 디아르트와 다른 모습을 자꾸 보여 주는 터라 혼란스러웠다. 내가 아는 그는 취향에 맞춰 보겠다며 수를 놓거나 망한 요리를 내오지도 않았고, 수십 권이나 되는 로맨스 소설을 읽고 정확히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었냐며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았다.
냉정하고 냉담하고, 여주를 원한다고 하지만 그의 사랑은 소유욕에 가까웠다. 원작에선 한 번도 이렇게 귀여운 행동을 한 적 없는 남자였다.
“요즘 가끔 당신이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 같다니까요.”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달라지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이것 봐,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이렇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하는 남자가 아니란 말이야, 너는.
난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손으로 가리며 등을 돌렸다. 도망치듯 서둘러 방을 나서는 내 뒤로 따라붙은 디아르트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택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페이셔 공작과 휘턴 공작은 물론이거니와 기사들과 사용인들까지 내 패션을 보고 입을 벌렸다. 난 그들의 경악한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 내며 당당한 표정으로 내게 손을 내미는 디아르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 안으로 달아났다.
* * *
사냥 대회는 수도 인근의 마숲에서 열렸다. 사냥 대회라고는 하지만 마치 작은 국지전이라도 벌이는 듯 가문마다 진영을 정비했고 기사들은 무기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사냥 대회는 전쟁이나 마찬가지야.”
다른 가문과 마찬가지로 휘턴 가의 깃발을 올린 진지를 구축하는 것을 바라보는데 디아르트가 덤덤히 설명했다.
“가문의 힘과 능력을 보여 주는 자리거든. 가장 훌륭한 사냥감을 잡을수록 가문의 영예가 높아지지.”
그냥 재미로 하는 거 아니었어? 생각보다 본격적인 것 같아 조금 겁이 났다. 고작 며칠 배운 활 솜씨로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 섞인 걱정이 은연히 드러난 모양이다. 디아르트가 픽 웃었다.
“내 옆에 있으면 안전할 테니 걱정 마. 그리고 부인들을 위한 사냥터는 따로 마련됐다더군.”
“네. 저쪽에 하얀색 끈이 묶여 있는 지역이 귀부인들의 사냥터라고 합니다. 크게 위험하지 않은 소동물들의 서식지라고 하더군요.”
옆에 있던 램버트가 말을 받아 설명했다.
“마님의 사냥 솜씨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램버트가 시원하게 웃으며 엄지를 세웠다. 그때 멀리서부터 나팔 소리가 들렸다.
“황제가 부르는군.”
마숲의 지형에 대해 페이셔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휘턴 공작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사냥 대회 시작을 알리려는 거지.”
“가자.”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내 허리에 손을 감은 디아르트가 귓가에 대고 말했다. 움찔 어깨를 떤 난 그대로 그에게 이끌려 걸음을 옮겼다.
황제가 있는 중원으로 가자 우리보다 먼저 와 있던 귀족들이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결혼한 이들은 반려자를 동반해야 한다더니 익숙한 귀부인들도 여럿 보였다. 그들을 가로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경악과 선망 어린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특히 귀부인들의 표정은 볼 만 했는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딸,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일 터인 로에니 휘턴이 오른쪽엔 페이셔 공작, 왼쪽엔 휘턴 대공작을 두고 기사들을 거느리며 들어섰으니 놀랄 만도 했다.
더욱이 디아르트가 내 옆에 바짝 붙어서서 허리를 감싼 채 에스코트를 하고 있으니 그동안 소문으로만 듣던 사실을 확인하는 기분일 것이다.
그 놀라움 가득한 시선과 탄성이 퍽 유쾌해서 나도 모르게 씩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그 모습이 악녀처럼 퍽 사악해 보였던 모양이다. 귀부인들은 물론 몇몇 귀족들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제국의 셋밖에 없는 공작 세 명에게 둘러싸여 상석에 도착하자 황제 옆에 있던 레티시아가 반가운 눈인사를 건넸다.
레티시아에게 화답한 나는 바로 옆에서 내가 상석으로 오는 동안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자비스 황태자와 눈을 마주쳤다. 자비스 황태자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때 허리를 콱 당겨 안는 손에 고개를 돌리니 디아르트가 나를 응시하다가 자비스 황태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금니를 짓씹는지 턱 근육이 딱딱해졌다.


#066
디아르트가 위험하다며 참석을 반대했던 것과 다르게 사냥 대회는 퍽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물론 귀부인들을 위해 따로 표시해 둔 구역에 한해서.
“우아아아악!!”
또 한 번 사람이 지르는 건지 곰이 지르는 건지 분간도 안 되는 괴성이 숲을 울렸다. 놀라서 푸드득 날아오르는 새들만큼이나 심약한 귀부인들이 심장을 부여잡았다. 이쯤 되면 숲 건너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냥이 마물을 잡는 건지 아니면 사람을 잡는 건지 의심해 봐야 했다. 작은 전쟁이나 마찬가지라더니 저들끼리 칼싸움이라도 하고 있을지 모른다.
픽, 날아간 화살이 겨냥했던 목표에 정확히 꽂혔다. 흡족하게 활을 내리기도 전에 나를 둘러싸고 있던 귀부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박수 쳤다.
“어머, 세상에. 또 맞았어요!”
“어쩜 쏘시는 것마다 백발백중이네요!”
“멋있어요!”
분명 입에 발린 아부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듣기 나쁘지 않았다. 내가 쏘는 것마다 명중인 건 사실이니까.
‘이게 바로 주몽의 민족 실력이란다.’
흐뭇하게 웃으며 쓰러진 사냥감으로 향했다. 내 움직임을 따라 귀부인들을 쪼르르 쫓아왔다. 사슴뿔이 달린 토끼였다. 마물치고는 귀여운 외관이었다.
“활을 배운 지 얼마 안 되셨다고 들었는데 실력이 엄청나신걸요? 저도 더 분발해야겠어요.”
레티시아가 손뼉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대부분의 귀부인들은 작은 마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고 레티시아만이 나와 비등한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들은 서툴기도 했지만 그것보단 내 비위를 맞추는 데 혈안이라 사냥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그들이 내 옆에 딱 달라붙어 굽실거리는 사연이야 명확했다.
“한데 입고 계신 사냥복도 마담 베로니카의 의상인가요?”
“맞아요. 알아보시는군요.”
“그녀의 시그니처인 B 로고가 수놓인걸요. 마담 베로니카는 드레스 외의 의상은 만들지 않는 걸로 아는데 휘턴 공작이 신경 쓰셨나 보군요.”
레티시아가 귀부인들을 흘깃 살피며 들으라는 듯 말을 이었다.
“아까 중원으로 오실 때 놀랐답니다. 공작에게 그렇게 다정한 면이 있는 줄 몰랐어요. 내내 로에니 님만 바라보시던걸요.”
레티시아가 굳이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그간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을 그녀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랬나요? 부끄럽네요.”
“어머, 부끄럽긴요. 내외간의 사이가 좋은 게 너무 보기 좋았답니다.”
“요즘 그이가 안 하던 행동을 한답니다. 며칠 전에는 글쎄 이런 걸…….”
레티시아가 깔아 둔 판에 신명 나게 놀아 보기 위해 난 아까 마차 안에서 디아르트가 억지로 떠안긴 손수건을 꺼냈다. 께름칙하게 받아 챙겼던 것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은 몰랐다.
“돼지인가요? 아니면, 음…….”
손수건에 수놓인 형태가 무엇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티시아를 보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손수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은연중에 조소가 섞여 있었다. 귀부인의 덕목 중의 하나인 자수 실력이 형편없는 것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이 상황에서도 자존심을 부린다는 거지? 하지만 너희들이 비웃는 이 자수를 놓은 사람은 말이야.
“공작님께서 손.수. 수를 놓아 주셨지 뭐예요.”
“네?”
주위에서 숨을 들이켜는 것이 들렸다. 다들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레티시아마저 정말 놀란 얼굴이었다. 하기야 자수 손수건은 보통 여인들이 연인에게 하는 선물이었으니까.
“이 끔찍…… 그러니까…….”
“토끼래요.”
“이 토끼를 휘턴 공작이 직접 수놓았단 말씀이세요?”
“네, 여기에 제 이니셜 R과 공작님의 D 보이시죠?”
<내 발밑의 우는 왕자님>이라는 책에서 읽었다며 만류에도 끝끝내 이니셜을 박아 넣던 디아르트때문에 수치스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던 사실은 속으로 삼켰다.
엉망인 자수 사이에서 힘겹게 이니셜을 찾아낸 레티시아가 진심으로 감동한 듯 손뼉을 쳤다.
“어머, 어쩜. 정말 로맨틱하시군요!”
귀부인들의 얼굴은 볼 만했다. 분명 중원에서 그에게 에스코트를 받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알랑거리고 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예상치 못했겠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는데 건너편에서 또다시 괴성이 들렸다. 모두의 고개가 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아갔다.
“듣긴 했지만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어요.”
레티시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숲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놀라지 말라던 디아르트와 페이셔 공작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레티시아가 퍼뜩 생각난 듯 탄성을 터트렸다.
“로에니 님의 사냥 실력이 이렇게 출중한 건 페이셔 공작 각하를 닮은 덕이겠군요. 아버님이 그러셨어요. 제국에서 가장 활 솜씨가 뛰어난 분이시라고요. 사냥 대회에서 한 번도 우승을 놓친 적이 없으시다더군요.”
“그런가요?”
휘턴 공작이 페이셔 공작의 활 솜씨가 뛰어나다고 하긴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몇 년간 사냥 대회에 참가하지 않으셔서 그 솜씨를 볼 수 없는 게 아쉽다고 늘 말씀하셨죠. 이번에 참여하신 건 로에니 님 덕분이겠군요.”
부러 말없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더니 귀부인들의 표정이 창백했다.
하긴 중원에서 임팩트가 세긴 했지? 제국에 셋밖에 없는 공작들에게 둘러싸여 에스코트를 받으며 등장했으니. 냉대받는 줄 알았던 로에니 휘턴이 사실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한 만큼 충격은 상당했을 것이다. 그동안 내게 잘못한 건 없는지 불안해졌을 거고.
저쪽에서 차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귀부인들은 내게 직접적인 조롱을 한 적은 없으나 마이러스 백작 부인이나 웨스턴 자작 부인 편에 서 있던 이들이었다. 괜히 눈에 띄어 긁어 부스럼이 될까,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내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사색이 된 표정으로 후다닥 시선을 피했다.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 * *
수확한 마물들을 가지고 양양한 표정으로 하얀 깃발 구역에서 나오다가 디아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입구에 떡 버티고 팔짱을 끼고 있는 그는 안 그래도 위압적인데 피까지 잔뜩 뒤집어쓰고 있어 절로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뒤를 따르고 있던 귀부인들이 어머, 작은 탄식을 뱉으며 물러서는 것이 느껴졌다.
“로에니.”
어서 오라는 듯 디아르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악귀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모습을 한 주제에 목소리는 퍽 다정해서 나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다쳤어요?”
가까이서 보니 잘생긴 얼굴에도 피가 잔뜩 튀어 있어서 눈을 찌푸리며 묻자 그가 픽 웃었다.
“내 피 아니야.”
……그럼 누구 핀데?
묻기 무서워 가만히 있으니 그의 뒤에 서 있던 램버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페테라를 잡으셨습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곱게 죽지는 못했을 것 같다. 디아르트가 내 뒤로 흘깃 시선을 틀었다. 사용인들이 옮기고 있던 사냥감을 본 그가 입꼬리를 늘였다.
“재밌었나 보군.”
너만큼은 아닐 거야. 묘하게 시원해 보이는 디아르트의 표정에서 오랜만에 그의 설정값이 떠올랐다. 아군도 겁을 먹게 만드는 전쟁귀. 피를 뒤집어쓴 모습이 정말이지 묘사와 딱이었다.
그동안 티격태격하느라 잠시 망각하고 있던 나와 달리 귀부인들은 잊고 있지 않았는지 차마 이쪽으로 다가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가지.”
디아르트가 내 손을 잡았다. 다른 곳과 다르게 피 한 방울 튄 곳 없이 깔끔한 손을 내려다보다가 뒤를 돌았다. 레티시아가 디아르트에게 끌려가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숲에서 별일 없었고?”
진영으로 향하는 동안 디아르트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와의 접촉은 비단 저주만 중화시키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사냥을 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쌓여 있던 피곤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나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손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는 걸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괴롭히는 이는 없었나?”
디아르트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지기 시작한 석양에 그의 은발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늘진 속눈썹 사이로 깊은 금안이 나를 담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 느끼는 일시적인 충동인지 아니면 내가 정말 이상해진 건지 그의 얼굴에 가슴이 찌르르 떨렸다.


#067
톡. 톡. 몸을 담근 채 손가락으로 물을 튕기던 난 욕조에 고개를 기댔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나, 디아르트를 좋아하게 되었나 봐.’
아까 그를 보며 느낀 떨림은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간 저주를 비롯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가며 단순한 호감 정도로 치부했지만 결국 그 이유들을 외면했던 건 디아르트를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가 그런 놈을 좋아하게 된 거야.”
내 이상형은 다정하고 조신한 남자였는데 어떻게 그런 정반대의 미친놈을 좋아하게 된 거냐고. 앞으로 디아르트 앞에서 어떻게 얼굴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붉게 달아오르는 뺨을 식히기 위해 물속으로 머리까지 푹 담갔다.
“꺅! 마님!”
물 밖에서 들리는 놀란 목소리에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오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던 릴리가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았다.
“놀랐잖아요. 전 또 마님이 혼절하신 줄 알았어요.”
릴리가 울먹였다. 향유를 가지러 나간 잠깐 사이에 내게 큰일이 생긴 줄 알고 정말 놀란 듯했다.
“어지럽지 않으시죠? 사냥터에서 무리하신 건 아니에요?”
아까 활에 맞아 피 흘리는 마물을 보고 욕지기하는 릴리를 먼저 돌려보냈었다. 그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괜찮아. 앞으로 쓰러질 일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 병은 디아르트만 있으면 멀쩡하거든.
하지만 릴리는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욕조에 향유를 떨어트린 그녀가 사뭇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로를 풀기 위해서라지만 너무 오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도 안 좋아요.”
“알았어. 좀만 더 있다가 나갈게.”
디아르트에 대한 마음을 인정한 탓일까. 릴리가 달리 보였다. 언젠가는 헤어질 사람에서 앞으로도 쭉 마주하게 될 사람이 된 릴리를 보는 건 오묘한 느낌이었다.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목욕 시중을 들던 릴리가 무언가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 우물쭈물했다.
“무슨 일 있니?”
주저하던 릴리가 결심했는지 허리춤에서 서신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
“뭔데?”
“아까 황태자 전하의 시종이라는 분이 주고 갔어요.”
그녀에게서 받은 서신을 꺼냈다. 짤막하게 적힌 편지의 끝에 자비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사냥터에서 먼저 돌아온 릴리에게 건네준 모양이었다.
“디아르트가 허락한 거니?”
“주인님은 모르세요. 마님께 은밀히 전해 드리라고 해서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전에는 몰래 빼돌렸잖아.”
“그, 그때는 마님을 뺏길까 봐 불안해서…….”
‘하지만 전 마님의 하녀인걸요. 마님이 어떤 선택을 하시던 따를게요.’라고 말하면서도 눈빛에는 불안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릴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럴 일 없어.”
* * *
마침 페이셔 공작과 휘턴 공작이 오랜만에 만난 황제와 회포를 풀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디아르트 역시 내일 있을 사냥에 대해 기사들과 회의 중이었다. 자비스를 만나기 위해 딱 좋은 타이밍이란 말이었다.
“괜찮을까요? 아무래도 주인님께 말씀드리고 나가시는 게…….”
“디아르트가 알면 절대 못 나가게 할걸.”
그 질투 쩌는 성격에 이 밤중에 자비스를 만나러 가는 걸 용납할 리가 없었다. 아니 밤중이 아니더라도 못 만나게 하겠지.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이렇게 어두운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여기는 마물들이 못 들어오게 결계를 쳐 놓았다며. 그리고 사방에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잖아.”
게다가 상대는 누구보다 신원이 확실한 황태자였다.
“디아르트가 알기 전에 후딱 갔다 오자.”
보초병들이 교대하느라 정신이 팔린 틈을 타, 휘턴 가 진영을 빠져나온 난 황태자가 기다리고 있겠다던 장소로 향했다. 하얀 깃발 구역 바로 옆에 있는 폭포는 휘턴 가 진영에서도 가까웠다. 릴리에게 큰소리치긴 했지만, 막상 밖으로 나오고 보니 겁이 났다. 밀토라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보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생각하는데 앞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참으로 만나기 힘든 사람이군.”
장난스러운 말투에 졸았던 심장이 탁 풀어졌다.
“얼굴 한번 보려면 이리 첩보 작전을 펼쳐야 하니 말이야.”
자비스 황태자가 싱긋 웃었다. 그 역시 시종 한 사람만 데리고 나와 있었다. 난 가슴에 손을 올리며 고개 숙였다.
“언제나 광영이 함께하시길, 제국의 샛별 자비스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자네가 이렇게 예를 갖춰 인사하는 건 처음인 거 아나? 만나자마자 선을 긋는군.”
자비스가 황태자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처받은 듯한 눈이었지만 고작 이런 걸로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됐다. 디아르트를 향한 감정을 인정한 이상 더더욱 지체 없이 자비스의 마음을 거절해야 했다. 그러려고 무리를 해서 나온 거였다.
“전하, 제가 이 자리에 나온 건…….”
“아.”
“아?”
자비스 황태자가 갑자기 입을 벌리자 나도 모르게 따라 입을 벌렸다. 그 순간 입 안으로 무언가가 쏙 들어왔다.
“뭐, 뭐예요?”
“내 사랑일세.”
“퉷!”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입 안에 든 걸 바닥에 뱉었다. 자비스 황태자가 유쾌하게 웃었다.
“이 가차 없음. 그리웠네.”
웃던 자비스 황태자가 손에 든 걸 내밀었다.
“공국에서 진상한 초콜릿일세.”
어서 받으라는 듯 재촉했지만 받을 수 없었다. 자비스 황태자는 고개를 젓는 내 손에 초콜릿 상자를 떠넘겼다.
“사람은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상자 안에 든 걸 다 먹은 다음에 그 할 말이라는 걸 하게. 지금은 듣지 않는 게 좋겠어.”
“전하, 전…….”
“그동안 많은 여성을 만나 온 건 사실이야. 내 가벼운 언행을 그대가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네. 하지만 지금 난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야. 몇 번 만난 적 없지만 그대가 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의 말대로 지금 자비스의 표정은 지금껏 본 적 없이 진지했다. 자신의 진심을 내가 믿어 주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제 지난날을 후회하는 모습을 이렇게 눈앞에서 볼 줄은 몰랐다.
“나는 그대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 그러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이게 내 소원일세.”
남은 소원권까지 쓰는 자비스였지만 대답을 미루는 건 그에게 못 할 짓이었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당장은 잔인할지라도 지금 확실히 잘라 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전하는 좋은 분이에요. 가벼워 보이시지만 누구보다 진중하고 속이 깊으신 분이라는 거 알고 있어요. 제게도 진심이시겠죠. 하지만 저는 전하의 마음을 받을 수 없어요.”
“……휘턴 공작 때문인가.”
그도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 역시 중원에 있었으니 나와 디아르트의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짐작했을 것이다. 누구보다 남녀 사이에 통달한 사람이니 미묘해진 분위기를 몰라볼 리 없었다.
“귀한 소원까지 빌었는데, 모질군.”
“죄송해요.”
“그게 그대의 매력이지.”
자비스가 쓰게 웃었다.
“말했듯 난 그대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 그대는 그대의 마음대로 하게. 나는 내 마음대로 할 테니.”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상처받았음에도 애써 내색하지 않는 자비스에게 더 냉담하게 굴 수도 없었다. 오늘은 일단 여기에서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진영까지 데려다주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방금 찬 상대에게 에스코트를 받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그러다 디아르트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몰래 나온 보람이 없었다. 밤중에 몰래 만나고 온 격이니 분명 이상해 보일 것이다.
내 의중을 알았는지 자비스가 순순히 물러섰다. 그를 뒤로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내 선물은 버렸나?”
“네?”
뜨끔해서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사과를 하려고 했으나 도저히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라서 물러섰던 건데. 내 표정을 보고 짐작했는지 자비스가 싱겁게 웃었다.
“며칠 전에 공작이 갑자기 찾아와서 만 골드를 놓고 갔거든.”
아주 싹을 잘라 버렸던 모양이다. 그것도 열 배나 되는 돈을 떠안겨서. 디아르트다운 행동이다 싶었다.
아무리 돈이 많다지만 만 골드라니. 다이아몬드 광산 있다고 아주 돈을 막 쓰나 보지?
‘역시 마지막 소원은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해야겠어.’
코앞에 휘턴 공작가 진영이 보였다. 왠지 모를 반가움에 걸음을 서두르던 그때였다. 고개를 돌리던 순간 누군가 내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쳤다. 충격을 채 느끼기도 전에 핏, 하고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068
생각보다 길어진 회의를 마치고 곧바로 로에니를 찾아온 디아르트는 썰렁한 처소를 둘러보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곧바로 처소를 나선 디아르트가 야영지 가운데에 피워 놓은 모닥불 안에 마른 장작을 집어넣고 있던 밀토를 불렀다.
“로에니는 어디 있지.”
“목간에 계실 겁니다.”
회의에 불려가기 전 사용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꽤 지나지 않았나?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하는 밀토의 모습에 디아르트는 즉시 등을 돌렸다.
예상대로 목간에서도 로에니를 찾을 수 없었다. 전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디아르트였다. 남들보다 기민하게 벼려진 본능적인 직감이 그의 뒷 목을 타고 내려갔다.
마침내 진영 입구를 지키던 보초병들에게서 로에니가 나가는 모습을 본 적 없다는 말을 들은 디아르트는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당장 숲을 수색하라.”
디아르트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명했다. 진영에서 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 공작 부인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기사들 역시 비상 상황임을 깨닫고 딱딱하게 긴장된 표정으로 수색 대열을 갖추었다.
그렇게 숲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 휘턴 기사단의 선봉에는 디아르트가 있었다. 아닌 밤중에 갑자기 들이닥친 휘턴 기사단 때문에 다른 귀족들의 진영 또한 발칵 뒤집혔다. 분명 무례하기 짝이 없는 침입이었으나 한마디도 할 수 없었던 건 디아르트 때문이었다.
섬찟할 정도로 표정이 없는 얼굴은 도리어 그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를 반증하고 있었다. 자칫 입을 잘못 열었다간 그의 살벌한 칼날이 목을 내리칠지도 몰랐다.
귀족들의 진영에서 로에니를 찾지 못한 디아르트는 황족의 주둔지까지 밀고 들어갔다.
사냥 대회는 작은 전쟁터였다. 각 가문은 각자의 진영을 구축했다. 황족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들이 있는 곳은 황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디아르트가 하는 행동은 반란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공작!”
늘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황제가 굳은 표정으로 호통쳤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휘턴 공작과 페이셔 공작이 놀란 얼굴로 황제를 빤히 보고 있는 디아르트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 있는 거냐?”
디아르트의 눈을 본 휘턴 공작은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디아르트는 휘턴 공작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황제 앞으로 성큼성큼 향했다. 그 기세에 황제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황태자는 어디 있습니까.”
황태자를 입에 담는 어조가 무엄했다. 하지만 그를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 앞에 선 사내의 얼굴이 살벌했던 터라 황제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신 그의 뒤에서 황후와 손을 잡고 있던 레티시아가 물었다.
“오, 오라버니는 왜 찾으시는지요?”
디아르트의 시선이 레티시아에게 닿았다. 그동안 로에니와 함께 있을 때의 디아르트에 익숙해져 있었던 그녀는 싸늘한 눈빛에 손을 떨었다.
“일단 왜 그러는지 말을 해 보거라.”
휘턴 공작이 디아르트의 어깨를 잡으며 만류했다. 디아르트가 품에서 처참하게 구겨진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숲에 떨어져 있던 걸 찾아낸 것이었다. 그를 받아 읽은 휘턴 공작이 당황한 얼굴로 황제를 돌아보았다.
“로에니가 사라졌습니다.”
디아르트의 짧은 대답에 그때까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페이셔 공작이 다가왔다. 휘턴 공작이 종이를 건넸다.
“한 번 더 묻겠습니다. 황태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번에도 답하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을 목소리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휘턴 공작이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페이셔 공작이 앞으로 나섰다. 늘 큰 표정 변화가 없는 그의 얼굴이 더할 수 없이 매서웠다.
“대답하십시오.”
방금까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옛 추억을 나누던 사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디아르트는 물론이거니와 휘턴, 페이셔와 대치하게 된 황제는 얼떨떨할 뿐이었다.
“공작 부인이 사라진 게 대체 황태자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그때 달리듯 빠르게 다가온 레티시아가 페이셔 공작이 들고 있는 종이를 낚아챘다. 종이에 쓰인 글자를 읽어 내린 레티시아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자비스의 익숙한 필체로 적힌 편지에는 로에니를 불러내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편지를 받은 로에니가 사라졌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만약 자비스까지 보이지 않는다면 두 사람이 도망쳤다고 여길 수 있었다. 실제로 디아르트가 이렇게 무작스럽게 들이닥친 것도 그 때문이 분명했다.
레티시아가 휘턴 가 기사들과 대치하고 있는 황실 근위대를 돌아보며 명했다.
“당장 오라버니를 찾아보세요. 얼른!”
레티시아는 서둘러 진영으로 흩어지는 근위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디아르트가 휘턴 기사단에 눈짓하는 것이 보였다. 그의 명을 받은 기사들이 진영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황제의 거처를 마음대로 헤집어 놓는 무도한 행동이었으나 감히 그를 말리는 이는 없었다. 디아르트 옆에 있는 휘턴 공작과 페이셔 공작마저 방조할 뿐이었다.
그리고 자비스 황태자의 거취는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 * *
먼지 구덩이를 마신 듯 목이 깔깔했다. 밭은기침을 내뱉다가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흙이 굴러다니는 나무 바닥이었다. 그 앞으로 분홍색 구두가 보였고,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난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델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드디어 깼네.”
나는 기침을 내뱉으며 릴리가 무사할지 걱정했다. 숲에서 뒤통수를 강타당해 기절한 후 처음 눈을 떴을 땐 마차 안이었다. 손발이 묶인 채 날 보며 울먹이던 릴리는 내가 눈을 뜨자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연신 내 걱정만 하던 릴리는 나를 보자마자 손을 날리던 아델리아에게서 몸을 던져 나를 보호했다.
돌을 밟았는지 마차가 크게 휘청이며 문이 열렸을 때 릴리를 밀어 밖으로 떨어트렸었다. 달리던 마차 안에서 떨어졌으니 멀쩡할 순 없겠지만 부디 크게 다치진 않았으면 좋겠다. 무사히 돌아가서 디아르트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면 좋으련만.
“딴생각할 여유가 있나 봐?”
상황 파악이 안 돼? 무릎을 접고 앉아 몸을 낮춘 아델리아가 비아냥거렸다.
“왜, 쿨럭, 왜 이러는 거야.”
“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아델리아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잃게 만들어 놓고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니?”
아델리아가 화를 쏟아 냈지만 난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뭘 한순간에 잃었다는 거야.
“빌어먹을 휘턴 공작이 후작을 압박해서 날 파양시키게 했잖아!”
“뭐?”
처음 듣는 소리였다. 어쩐지 중원에 아델리아가 안 보인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다. 디아르트는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모른 척하지 마. 네가 속살거렸잖아.”
“난, 그런 적 없……”
짝, 파열음과 함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거 같아? 쓰러지는 척해서 사람 엿 먹였을 때부터 알아봤지. 네가 어떤 년인지.”
아델리아가 내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두피가 뽑히는 것 같아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혼자 죽을 것 같니?”
“진짜 난 몰라.”
“됐어.”
거칠게 머리를 팽개치는 손길에 뒤로 휘청 넘어졌다. 그 모습이 웃긴 지 깔깔거리던 아델리아가 손바닥에 턱을 괴고 웃었다.
“넌 곧 팔려 갈 거야.”
“뭐?”
“후작한테 받은 돈이 쥐꼬리만 하거든. 네 몸뚱이라도 팔아서 써야지 않겠니?”
아니, 얜 저런 청초한 얼굴로 무슨 삼류 범죄영화 속 악역 같은 소릴 하는 거야.
“디아르트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넌 그 태생부터 귀족인 그 자식이 상상도 못 하는 곳으로 팔려 갈 거야. 절대 널 못 찾을걸.”
“모르나 본데, 디아르트는…….”
지하 경제를 쥐고 있는 인물이야. 너보다 그쪽에 빠삭하다고. 게다가 집착이 장난 아니라서 어떻게든 날 찾아낼걸.
-라고 하룻강아지에게 말하려는 찰나, 누군가 창고 문을 두드렸다. 아델리아가 들어오라고 소리치자 체격이 상당한 거구 둘이 누군가를 끌고 들어왔다. 설마 릴리가 다시 잡혀 들어온 건가 싶어 얼른 살폈더니 정말 의외인 인물이 보였다.
‘아니, 저 인간이 왜 잡혀 들어와?’
나는 기절한 듯 눈을 감고 있는 자비스 황태자를 보고 허, 탄식을 뱉었다.


#069
“어떻게 된 거야?”
“뒤를 쫓아오고 있길래 붙잡았어. 반반하게 생긴 게 비싼 값에 팔릴 거야.”
아델리아의 물음에 사내들이 낄낄거렸다. 자비스의 얼굴을 확인한 아델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황태자임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미친!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데려온 거야?!”
“누군지 알 게 뭐야.”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한 사내들이 자비스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퍽 충격이 갔을 텐데도 자비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의 팔다리를 묶는 사내들 뒤에서 아델리아가 초조한 낯빛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하기야 제국의 황태자를 납치해 왔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너희 얼굴을 봤어?”
“보지 않았을까. 복면도 안 썼는데.”
태평한 태도에 속이 터지는지 발을 구르던 아델리아가 사내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밖에서 철커덩, 하고 쇠사슬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흘깃, 한쪽 눈을 뜬 자비스 황태자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조심히 좀 던져 주지. 아파서 소리 지를 뻔했군.”
이런 상황에서도 능글맞은 목소리는 여전했다. 나는 그 한결같은 태도에 어쩐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나야 그렇다 치고 자비스 황태자는 어떻게 잡혀 온 건지 의아했다.
“잘 돌아가는지 확인하려고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가 나타나서 그대를 납치하는 것 아닌가. 하여 쫓아왔네.”
“사람들에겐 알린 거죠?”
혹시 내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아직까지 모르고 있을까 봐 걱정이었는데 한숨 놓았다. 지금쯤 휘턴 가는 물론이거니와 황실의 근위대도 나와 자비스의 뒤를 쫓고 있겠지.
그런데 자비스의 표정이 묘했다.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제발 아니길 바라며 물었다.
“혹시, 알리지도 않고 무작정 쫓아온 건 아니죠?”
“그때는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혹시 자네를 놓치면 어떡하나 싶어서 경황이 없었네.”
“망할.”
도움 안 되는 사람 같으니라고. 나는 자비스를 원망스럽게 흘겨보았다. 겸연쩍은 표정을 짓던 자비스가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지금쯤이면 내 근위 기사가 알렸을 거야.”
“정말요?”
“그래, 마차에서 떨어진 하녀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서 상황을 전하라고 했네.”
“아아. 릴리. 다행이다.”
혹시 마차에서 떨어진 채 잘못되면 어떡하나 걱정이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그럼 이제 디아르트와 황실 근위대가 찾으러 오기만 기다리면 됐다. 온몸에 바짝 들어가 있던 긴장이 풀어졌다.
“다친 곳은 괜찮은 건가?”
“괜찮아요. 전하는요?”
“나야 멀쩡하지.”
멀쩡하긴. 봐 줄 거라곤 얼굴밖에 없는 사람이 여기저기 상처 입었는데. 근데 아까 본 사내들이 건장하긴 해도 둘밖에 없는데 왜 저렇게까지 다친 거지? 보통 황족들은, 특히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을 후계자는 기본적인 무예를 익히지 않나?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용케 내가 생각하는 바를 알아챘는지 자비스가 선수 쳤다.
“모든 황족들이 무예를 배우진 않네.”
“황제는 문무를 겸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특히 문을 숭상해서 말이야.”
……말이나 못 하면. 덩치는 디아르트 못지않게 좋으면서 쓸모라고는 하나 없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옆에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을 상대라도 있으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얼른 디아르트가 나를 찾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 * *
마숲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밤새 숲 전체를 샅샅이 뒤졌으나 자비스 황태자를 찾을 수 없었다. 마물에게 당했다면 흔적이라도 남을 터인데 완전히 증발한 듯 깨끗했다. 휘턴 공작 부인과 자비스 황태자가 함께 도망쳤다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휘턴 공작가와 황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현 상황은 벌써 휘턴 공작이 황제를 볼모 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들 술렁거리는 가운데 밤새 초조하게 로에니와 자비스의 행방을 기다리던 레티시아가 디아르트에게 다가갔다. 그는 처음 황제 진영을 찾아와 자비스를 찾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밤새 서 있었다.
“저…… 휘턴 공작.”
레티시아의 부름에도 디아르트는 표정 없는 얼굴로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그의 주위로 차갑게 가라앉은 기운이 두렵지만 한 걸음 다가갔다.
“로에니 님이 오라버니와 함께 도망쳤을 리 없어요. 말하지 않았지만 로에니 님은 분명 공작을…….”
시끄러워. 디아르트는 생각했다.
‘눈을 떼는 순간 달아나는 인연이니 꼭 붙드십시오.’
그 빌어먹을 점쟁이의 말은 정확했다. 아주 잠깐 눈을 떼었을 뿐인데 달아났다. 하지만 분명 스스로의 의지는 아닐 것이다. 이혼하겠다던 로에니였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담긴 호감을 숨기지 못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손을 잡고 미소 짓던 여자가 갑자기 도망칠 리 없었다.
디아르트는 끓어오르는 머리를 차갑게 식히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럼 경우의 수는 두 가지였다. 자비스 황태자가 로에니를 납치했거나 그 외에 제3의 인물이 데리고 간 것. 자비스 황태자와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아 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그렇다면.
디아르트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황제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온기라고는 한 톨도 없어서 레티시아는 본능적으로 주춤 물러섰다.
“램버트.”
몇 시간 만에 디아르트의 입이 열렸다. 굳은 얼굴로 곁을 지키고 있던 램버트가 얼른 대답했다.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수도 인근을 모두 봉쇄하고 성문마다 기사들을…….”
그가 냉랭한 어조로 명을 내리고 있을 때였다. 소란스러운 기운에 모두의 시선이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갔다.
근위 기사가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한눈에 봐도 상태가 좋지 않은 릴리가 매달려 있었다. 누구보다 빠른 걸음으로 디아르트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야.”
차가운 물음에는 조급한 기색이 물씬 묻어났다. 눈을 깜빡이며 대답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는 릴리 대신 근위 기사가 그가 본 것을 그대로 고했다.
공작 부인이 숲 안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되었고, 자비스 황태자가 그를 쫓고 있다는 그의 말에 다들 안심한 얼굴로 한숨을 삼켰다. 일단 제국 내에 전쟁이 벌어질 일은 없었다.
“어디로. 어느 쪽으로 향했나.”
“미더스 공국 방향이었습니다.”
답을 듣기 무섭게 디아르트는 몸을 돌려 말 위에 올라탔다. 뒤따라오는 기사들을 기다리지 않고 조급하게 말을 몰기 시작했다. 페이셔 공작 역시 더할 수 없이 굳은 얼굴로 말에 올라 그 뒤를 따랐다.
홀로 남은 휘턴 공작이 한숨을 삼켰다. 행방을 알았으니 이미 끝난 일이었다. 며느리를 찾아오는 건 아들의 몫이었고 남아 있는 그가 할 일은 뒤처리를 하는 것이었다.
귀족들 앞에서 감히 황권과 반목했으니 수습이 쉽지 않을 것이다. 하필 그가 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휘턴 공작은 지끈거리는 고개를 저었다. 감히 누가 제 며느리를 납치했는지는 몰라도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 * *
망할.
얌전히 앉아 디아르트가 찾아 줄 때까지 더 기다렸다간 저주로 죽거나 굶어 죽겠다. 그도 아니면 맞아 죽거나. 벌써 사흘이 지났건만 디아르트는커녕 근위대 기사조차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검문 없이 움직인다는 건 납치범들만이 아는 루트가 있다는 소리였고, 그렇다면 언제 발견될지 기약할 수 없었다.
나는 납치 전에 자비스에게 받은 초콜릿 상자에서 마지막 초콜릿을 꺼내 반으로 쪼갰다. 반은 입에 넣고 반은 자비스의 입에 넣어 주었다.
“내 사랑은 못 받는다더니.”
“일단 살아야죠.”
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자비스를 일으켜 앉혔다.
“볼품없는 꼴을 보여 낯이 안 서는군.”
“평소와 다를 바 없으세요.”
“너무하네.”
자비스가 힘없이 웃었다. 태평하게 받아치는 말과 달리 그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아델리아는 퍽 난폭했다. 그녀가 내게 분풀이하는 것을 자비스가 대신 막아 주었기에 온몸이 상처투성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큰일 날 것 같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지금 도망쳐야 돼요.”
다들 잠이 든 지금이 도망치기에 가장 좋았다. 다리에 힘을 주려는 자비스를 부축하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엉망인 상태라 도망 못 칠 거라고 생각했는지 따로 자물쇠를 채워 두지 않은 터에 밖으로 나서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얼마 만에 보는 햇빛인지 모르겠다. 눈 부신 햇살을 올려보다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눈앞에 보이는 숲속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 멀리 도망치지 못했는데 뒤쪽이 소란스러워졌다.


#070
소리 지르는 아델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비스가 힐긋 고개를 틀어 뒤를 보았다.
“의뭉스러운 면이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지 뭔가. 잘생긴 얼굴을 이렇게 가차 없이 만들다니 참 독한 여인이야. 난 솔직히 봐줄 줄 알았거든.”
“헛소리할 힘이 있으면 좀 더 빨리 걸어요.”
그때였다. 근처까지 쫓아왔는지 날카로운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그 뒤로 걸걸한 사내들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이를 악물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성치 않은 몸으로는 쉽지 않았다.
“여기 있었구만.”
낄낄거리는 사내의 음성이 그렇게 소름 끼칠 수가 없었다.
“어디 도망쳐 봐.”
사내는 재밌다는 얼굴로 손에 든 활을 매만졌다. 우리를 사냥하겠다는 의도였다. 끼리끼리라고 아델리아의 어린 시절 친구라더니 하나같이 미친놈들이었다.
잔뜩 짜증 난 얼굴로 뒤늦게 도착한 아델리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가뜩이나 국경이 막혀서 나가지도 못하고 골치 아팠는데 그냥 죽여 버려.”
“그래도 돼?”
허락을 얻은 사내들의 얼굴이 흥미로 반짝였다. 그들이 턱을 까딱였다. 도망치라는 말이었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유희가 무엇인지 알았지만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발끝에 힘을 주어 뛰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도저히 빠르게 움직일 수가 없었고 사내들이 뒤에서 여유를 부리며 쫓아왔다. 자비스가 내 어깨에 얹고 있던 팔을 치웠다.
“먼저 가게.”
“네?”
“둘 다 죽는 것보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않겠나.”
자비스가 어울리지 않게 체념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내 등을 떠밀며 얼른 달리라고 했지만 그만 두고 도망칠 수 없었다. 나를 보호하려다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사람인데 어떻게 버려.
그때 커다란 손으로 수풀을 확 제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포기한 거야? 재미없게.”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자비스를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나도 모르게 그 앞을 막아서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죽는구나.’
그동안 살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쳤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니. 퍼뜩 디아르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죽기 직전에 떠오르는 얼굴이 그라니 내가 정말 좋아하긴 하나 보다.
아쉬움, 분함, 억울함 등등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볼걸. 이혼하겠다고 버티지 말고 키스도 많이 할걸. 디아르트 키스 잘하는데. 해 본 적 없다던 키스가 그 정도면 분명 밤에도 끝내줄 텐데. 빼지 말고 다 할걸. 망할. 어차피 죽어 스러질 몸 아껴서 뭐 해, 똥 되게 생겼는데!
그렇게 한참 후회를 곱씹으며 다가올 고통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죽기 전에 스쳐 지나간다는 주마등이 생각보다 긴 건지 아니면 벌써 죽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로에니!”
그토록 기다렸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설마, 하며 눈을 뜨기도 전에 허리가 끌어당겨졌고 곧 커다란 품 안으로 빨리듯 안겼다. 그새 익숙해진 손길이 몇 번이고 고쳐 안자 그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보는 디아르트의 핏발 선 눈동자와 무너진 얼굴을 보았을 때 그동안 참고 있던 눈물이 펑 터졌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그 허물어진 표정에서 그가 나를 찾아 헤매는 동안 느꼈을 감정들이 밀려 들어왔다. 반갑고, 원망스럽고, 보고 싶었고, 고맙고, 안심되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기분이 순식간에 치받아 올라서 디아르트를 안고 소리 내어 울었다.
디아르트는 우는 날 꽉 끌어안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긴장이 풀린 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조금만 늦었으면 정말 영영 잃을 뻔했다. 그 생각만 하면 디아르트는 손끝이 차가워졌다. 활 앞에 서 있는 로에니의 모습은 정말이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끔찍한 악몽이었다.
디아르트가 잠든 로에니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새 살이 내린 뺨이며 얼굴 여기저기에 난 생채기들이 며칠 사이에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짐작게 했다.
역시 그렇게 곱게 죽여선 안 됐는데. 디아르트는 그의 칼에 단박에 쓰러진 사내들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로에니가 겪은 고통을 똑같이 겪게 해 줬어야 했다.
주범인 아델리아는 황실 근위대에 넘겼다. 직접 처리하고 싶었으나 뒤늦게 그를 쫓아온 이들의 만류로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와서 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 여자는 감히 공작 부인을 납치하고 황태자까지 죽이려 했다. 지하 감옥형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제국의 지하 감옥은 악명 높았다.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왜 안 일어나는 거야.”
이틀째 잠만 자는 로에니를 진찰한 주치의는 다행히 큰 부상은 없다고 했다. 찰과상에 영양실조가 겹친 데다 며칠간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탓에 몸에 과부하가 걸린 것 같다는 소견을 내렸다. 가뜩이나 건강이 좋지 않은 이가 험한 일을 당했으니 병이 악화된 건 아닌지 걱정이었다.
디아르트가 로에니의 손을 잡았다. 쓰러져서 정신을 잃을 때마다 손을 잡아 주면 편안해지던 모습을 기억했다. 과연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보자 디아르트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녀를 찾아 헤매던 며칠은 그에겐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잠깐이라도 지체했다간 로에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폐가 터질 때까지 말을 몰았다. 그 시간들은 로에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생각보다 더 너를 마음에 담은 것 같다고, 디아르트는 로에니 손에 대고 고백했다.
“램버트입니다.”
문밖에서 램버트가 노크했다. 천천히 로에니에게서 시선을 돌린 디아르트가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지.”
“사우 일족을 데려왔습니다.”
분명 그가 사우 일족을 찾아내 데리고 오라고 명하긴 했지만 지금 그따위는 아무 상관 없었다. 램버트에게 알아서 하라고 짧게 명한 후 방으로 들어가던 디아르트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로에니에게 사우 일족에 대해 전해 들은 후 그들에 관해 알아보았었다. 제 조상이기도 한 터라 서재에 그들에 관한 서적들만 여럿이었다.
그 책들을 다 읽은 디아르트는 사우 일족이 치유 능력이 뛰어나다는 정보를 기억해 냈다. 방으로 반쯤 들어갔던 디아르트의 걸음이 돌아섰다.
디아르트는 저와 똑 닮은 금안을 무감정하게 바라보았다. 그와 같은 피가 섞여 있다고는 믿기 어렵게도 사우 일족은 무척이나 가냘픈 체구였다. 그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덩치가 큰 디아르트에게 겁을 먹은 듯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치료에 능하다고 들었는데.”
한참 만에 디아르트가 입을 열었다. 미리 램버트에게서 제라석에 관한 언질을 들은 터라 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던 사우 일족이 당황해서 눈을 깜박였다.
“맞나.”
“그, 그게 대대로 치료술을 전승받고 있습니다만…….”
대답을 잘못하면 큰일 날 것 같은 분위기에 사우 일족이 말끝을 흐렸다. 디아르트는 눈을 도록 도록 굴리는 그를 미심쩍게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봐 줬으면 하는 이가 있다.”
“어떤 병을 앓고 계시는지요.”
“주치의가 푸이탄병이라고 하더군.”
“아…….”
사우 일족이 탄식을 내뱉었다. 푸이탄이라면 사우 일족에서 가장 치료술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자신조차 고칠 수 없는 병이었다. 오죽하면 신이 내린 형벌이라는 별칭까지 붙었으니까.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무서운 일을 당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한번 뵐 수 있을지요.”
디아르트는 사우 일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를 데리고 침실로 향했다. 로에니는 그가 나가기 전과 똑같이 잠들어 있었다.
“저분이십니까?”
디아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턱짓했다. 얼른 진찰하라는 압박에 사우 일족은 벌벌 떨며 로에니에게 다가갔다. 기본적으로 맥부터 짚어 본 그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나 잘못 느꼈나 싶어 다시 짚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안 좋은 건가.”
무겁게 깔린 목소리에 어깨를 흠칫 떤 사우 일족은 차마 그를 돌아보지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아닙니다.”
사우 일족은 설마 하는 생각으로 로에니를 이리저리 살폈다. 보통의 의사들과는 달리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비비고 냄새를 맡는 모습에 디아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야.”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디아르트가 사우 일족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의 무서운 얼굴에 사우 일족이 히끅, 숨을 들이켜며 시선을 피했다.
“그, 그게 아니라 이분이 걸린 병은 푸이탄병이 아닌 것 같습니다.”


#071
“푸이탄병이 아니라고?”
디아르트가 허튼소리를 지껄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사우 일족을 노려보았다. 사우 일족은 그 사나운 시선을 피하며 한 발 뺐다.
“그게, 확실치는…….”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확실하지도 않은 말로 입을 놀리는 건가.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대로 있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 같다는 예감에 사우 일족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하, 하지만 분명 저희 일족에서 금기로 내려오는 저주술과 증상이 비슷해 보입니다.”
“저주?”
저주라면 더 위험하지 않은가. 그것도 금기된 술법이라고 하니 디아르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언뜻 보기엔 푸이탄병과 증상이 비슷하여 오인할 수 있으나 저주가 지닌 고유한 특징은 머리카락에서 꽃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이 저주는 꽃을 매개로 하는 터라 매개체가 된 꽃의 향기가 머리카락에 배게 되지요. 아마 마님의 경우 장미가 매개체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 장미라면 귀족들이 자주 쓰는 향유의 재료였다. 로에니 역시 평소에 장미 향을 풍기곤 했다. 디아르트의 불신 어린 얼굴에 사우 일족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머리카락을 비빌수록 향기가 짙어지는 게 특징입니다.”
디아르트는 로에니의 머리카락 몇 오라기를 쥐어 코에 갖다 댔다.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은은한 장미 향이 풍겨 왔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비비니 향기가 매우 강해졌다. 사우 일족의 말대로였다.
“정확히 어떤 저주지?”
“저희 일족은 본래 정략혼이 많았던지라 내외간의 불화가 잦았습니다. 하여 1년 이상 유지되는 가정이 극히 드물었지요. 그 때문에 만들어진 저주입니다.”
디아르트가 계속 말하라는 듯 팔짱을 끼고 턱을 까딱였다.
“저주에 걸린 후 발현이 시작되면 간헐적으로 팔다리가 마비되고 정신을 잃는다고 합니다. 제때 중화를 하지 않을 경우, 결국 심장이 굳어 죽게 되지요.”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저주치곤 너무 끔찍한 거 아닌가? 디아르트의 옆에서 듣고 있던 램버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우 일족이 괴팍하다는 말은 들어 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인상을 구기는 램버트와 달리 표정에 변화가 없는 디아르트가 낮게 물었다.
“이성과의 접촉입니다.”
“접촉?”
“본래 사이가 안 좋은 부부를 붙여 놓기 위해 만들어 낸 저주니까요. 스킨십의 농도가 진할수록 중화가 잘 된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이혼하는 부부의 수가 대폭 줄었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비윤리적이란 이유로 금지된 터라 저도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
로에니가 사우 일족조차 본 적 없다는 금지된 저주에 걸렸을 리 없다. 하지만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문득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제 손을 잡고 놓지 않던 로에니가 떠올랐다. 괴로워 보이던 얼굴이 순식간에 편안해졌었다.
“푸이탄병에 대해 알아봐.”
제국에서 가장 의술에 능한 일족이니 분명 그에 관한 서적들도 못지않을 것이다. 명을 내린 디아르트는 짧게 덧붙였다.
“그 저주라는 것에 대해서도.”
* * *
눈을 뜨자 보이는 익숙한 천장에 살았다는 안도감이 제일 먼저 밀려왔다. 눈꺼풀을 깜박이며 현실을 인지하는데 낮은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정신이 드나?”
침대에 손을 얹고 허리를 한껏 숙인 채 나를 응시하는 디아르트의 걱정 가득한 눈빛과 마주하자 다시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저 금안이 그토록 보고 싶었다.
“아파?”
울먹이는 나를 본 디아르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곧바로 주치의를 불러왔다. 진찰을 받는 동안에도 디아르트는 내게서 시선을 조금도 떼지 않았다.
안심해도 된다는 소견을 내린 주치의가 방을 나가자 디아르트가 침대에 앉았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눈빛에 안심이 되면서 더럭 원망이 치솟았다.
“왜 그렇게 늦었어요?”
근위 기사가 납치된 사실을 알렸을 거라는 자비스의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디아르트가 날 금방 찾아낼 줄 알았다. 검문은 피했어도 디아르트는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결국은 기다리다 못해 직접 탈출하게 만들다니. 남주라면 반나절 안에 딱 찾아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때 디아르트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정말 죽을 뻔했다. 눈앞에서 활을 겨누며 히죽 웃던 사내의 얼굴이 떠오르자 소름이 끼쳤다.
“도처에 위장한 자들을 심어 놓았더군. 덕분에 시간을 잡아먹었어.”
디아르트도 그때 생각을 하면 분노가 차오르는지 이를 아득 씹었다.
이 남자에게 혼란을 줄 정도라니, 아델리아는 그 비상한 머리를 좋은 데 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뾰족한 시선이 느껴졌다. 디아르트가 언짢은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말도 없이 다른 놈 만나러 나갔던 주제에.”
어이없다는 듯한 그의 눈초리를 슬그머니 피했다. 사실 언질도 없이 몰래 진영을 빠져나간 내 잘못이긴 했다. 그것도 자비스를 만나러 나갔다가 일어난 일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둘이 만날 일이 뭐가 있지?”
“그냥…… 얘기 좀 했어요.”
“무슨 얘기.”
“뭐, 이러저러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랄까…….”
머리를 다치면서 순발력도 떨어졌나 보다. 눈을 도록, 도록 굴려 봐도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무슨 변명을 한들 자비스와 만난 이유를 이해시키긴 어려웠다. 당연히 디아르트도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밤의 이야기를 하려면 자비스가 내게 프러포즈했다는 사실도 털어놓아야 했다. 그를 말하면 이 남자의 얼굴이 더욱 살벌해질 것 같았다.
“황태자에게 마음이 있나.”
“네? 아니요?”
저러다 턱이 나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씹어 뱉듯 나온 질문에 난 즉각 부인했다. 그러자 험악했던 디아르트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극명한 반응이 좀 귀엽다고 생각하는 찰나.
“황태자의 목을 딸 일은 없겠군.”
너무나 진담 같은 농담에 난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납치범들은 어떻게 됐어요?”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끝이 곱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나 대신 응징을 제대로 해 준 듯해 억울함이 가셨다. 아델리아는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릴리는 괜찮은 거죠?”
디아르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디아르트는 여전히 퉁명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 밤의 일에 대해 더 이상 추궁하진 않았다.
‘자비스도 괜찮겠지?’
마지막에 본 그의 상태는 무척이나 안 좋았다. 괜찮은 척 부러 더 능글맞게 굴었지만 낯빛이 창백한 게 무리를 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온몸으로 날 감싼 채 발길질을 막아 주던 자비스를 떠올리는데 불쑥 턱이 잡혔다. 디아르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살을 구기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지금.”
이 짐승 같은 놈. 자비스를 생각한 지 불과 몇 초도 안 되는 것 같은데 눈치도 빨랐다. 모른 척 고개를 젓자 디아르트가 미심쩍은 얼굴로 손을 떼었다.
“나는 어땠는지 궁금하지 않나.”
그 말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이 퍽 까칠했다. 며칠 못 잔 사람처럼 눈이 빨갰다. 나를 찾아다녔을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뭉클했다.
“미안해요.”
잠긴 목소리로 말하자 디아르트가 눈썹을 까딱였다. 그 익숙한 표정에 안심이 되었다.
“너를 정말 잃는 줄 알았어.”
디아르트가 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그의 엄지가 뺨을 문질렀다.
“다신 돌이키고 싶지 않은 끔찍한 날들이었지.”
낮게 속삭이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이 무겁고 나른해졌다. 아직 물어볼 것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은데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다시 눈을 감았다. 깊은 잠에 빠지기 전 내 이마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그와 어울리지 않게 퍽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072
“마님!”
문을 여는 순간부터 이미 눈물 바람인 릴리가 우다다 달려와 침대에 매달렸다.
“마님이 잘못되신 줄 알고 제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세요?!”
릴리가 침대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울었다. 디아르트에게 듣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아 보여 다행이면서도 머리에 붙어 있는 면포를 보니 미안해졌다. 그날 내가 몰래 나가지만 않았어도 다칠 일은 없었을 텐데. 날 들쳐 업은 납치범들의 발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졌던 릴리의 모습이 다시금 떠오르자 울컥했다. 무서운 상황에서도 나를 지키려던 그녀의 충직함이 고마웠다.
“넌 괜찮은 거니? 어디 부러진 데는 없고?”
“저야 당연히 멀쩡하죠!”
달리는 마차에서 떨어졌으니 혹 팔이라도 하나 부러지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그때 왜 저만 도망치게 하신 거예요.”
날 보는 릴리의 울멍한 눈에 원망이 깃들어 있었다. 납치당하던 중 마차 문이 열린 걸 본 순간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달아나 봤자 멀리 못 갈 게 뻔했다. 하여 릴리라도 내보내자는 판단이 들었다.
“너라도 도망쳐야 디아르트에게 상황을 알릴 것 아니니.”
“만약 제가 주인님께 도움을 청하지 못하면 어쩌시려고요.”
그럼 뭐 망하는 거지. 그때는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나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얼굴을 한 릴리를 보며 싱긋 웃었다.
“결국 이렇게 모두 무사하잖니?”
자비스 황태자가 뒤를 쫓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듣기로 이미 진영에서 꽤 멀리 벗어났던 터라 상처를 입은 릴리 혼자선 그렇게 빨리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니 자연스레 디아르트의 기세가 무서워 제대로 물을 수 없었던 자비스의 안위가 염려되었다.
‘그러고 보니 레티시아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네?’
하루걸러 편지를 보내던 레티시아였다. 험한 일을 겪고 돌아온 내게 분명 서신을 보내고도 남았을 텐데 이상하게 조용했다.
“황녀 전하께 온 서신 없니?”
“없었어요.”
혹시 또 레티시아나 자비스에게 온 편지를 숨긴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자 릴리가 손까지 저으며 부인했다.
“진짜예요. 앞으론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억울함 가득한 얼굴을 보니 사실인 듯했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릴리, 편지지를 준비해 줄래?”
레티시아에게 먼저 편지를 보내 자비스의 상태를 물어볼 셈이었다. 나는 곧 릴리가 준비한 편지지에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 * *
요 며칠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안객들로 집 안이 떠들썩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레티시아는 볼 수 없었다. 얼마 전에 보낸 편지에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이럴 사람이 아닌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혹시 자비스 황태자의 상태가 위중한 건 아닌지 걱정이었다.
“고민이라도 있는 거니?”
상념을 깨우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난 페이셔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햇살이 내리쬐는 창문 앞 테이블에 마주 앉은 그의 모습은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그는 내가 깨어난 이후로 매일 내 방에 찾아왔다. 별 대화 없이 조용히 차만 마시는 것뿐이었지만 그 시간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무사히 구출되던 날 디아르트의 품에 안겨 기절하기 직전에 그의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페이셔 공작의 얼굴을 보았다. 전에 없이 허물어진 표정은 공포에 차 있었다.
‘그렇게 소중하면 진작에 좀 돌아봐 주지.’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른 채 상처만 받았을 로에니의 감정이 전이된 듯 가슴이 아려 왔다. 아직도 수척함이 남아 있는 페이셔 공작의 얼굴을 보며 난 원작에서 그가 무모하게 반란을 일으켰던 이유를 짐작했다. 제 상처만 들여다보느라 외면했던 딸이 남편에게 잔혹하게 죽었으니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왔을 것이다.
‘이제 그럴 일은 없겠지.’
아델리아는 납치 및 살인미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한다. 디아르트와 아델리아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졌다고 여겨도 무방했다. 비단 그게 아니더라도 그가 아델리아를 선택하진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원작은 완전히 틀어졌구나.’
예전엔 원작이 바뀌는 것에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이제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인생은 개척해 나가는 거지, 암.
“로에니?”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난 페이셔 공작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람을 앞에 두고 너무 길게 딴생각을 했다. 민망함을 숨기려 괜히 헛기침을 내뱉었다.
“요즘 레티시아 황녀 전하와 연락이 되지 않아서요. 편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으시고……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어요.”
찻잔을 내려놓는 페이셔 공작의 몸짓은 무척이나 우아했지만 순간적으로 스친 그의 표정이 미묘한 것이 미심쩍었다. 나만 모르는 무슨 사정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황성에 문제가 생겼나요?”
정말 자비스의 상태가 안 좋기라도 한 걸까. 괜찮은 척 웃던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걱정이 들었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단다.”
다음 황위를 이을 황태자가 위독하다면 황성이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별일 아니라고 치부하는 걸로 봐선 심각한 일은 아닌 모양이다. 이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빙의한 지 시간이 꽤 지나서 그런지 원작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페이셔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놈이 널 많이 아끼는 것 같더구나.”
반듯한 성품의 그가 지칭하는 그놈이란 한 명밖에 없었다. 그동안 그의 앞에서 나에 대한 소유욕을 감추지 않던 디아르트를 마땅찮게 여기는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표정 역시 생각에 잠긴 듯했으나 전과 달리 부드러웠다.
“동부는 폐쇄적인 지역이지.”
그가 두 손을 깍지 끼며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수도 소식이 무척이나 늦어.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다 핑계군.”
페이셔 공작은 속에 담아 둔 이야기를 풀고 싶은 듯 보였지만 그의 마음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는 듯 느릿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나는 그 힘들어 보이는 모습을 보며 그가 내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좋아하는 이와 결혼했으니 행복할 거라고 판단했다. 이제 와 보면 그런 생각조차 무책임한 회피였지. 네 편지를 받고 수도로 오는 동안 너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들었는데…….”
그 소문들이 떠오르는지 페이셔 공작의 얼굴은 괴롭게 일그러졌다. 소문을 들었을 때의 그의 심정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동안 디아르트에게 적대적이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디아르트가 내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해도 믿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모두 내 잘못이란 걸 안다. 용서해 달라는 말이 아니야. 그저 너에게 사과하고 싶었단다. 사라진 널 찾았을 때 정말…….”
차마 잇지 못하고 삼킨 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페이셔 공작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그의 구겨진 미간이 보였다.
“사과도 못 하고 널 잃게 되는 줄 알고 무서웠다.”
덤덤한 어조였으나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순간 무언가 속에서 울컥 올라왔다. 그를 마주할 때마다 느껴지던 묘한 서러움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진짜 내 아버지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네가 이혼하면 함께 바이올렛 하우스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제라도 그동안 못한 아버지 노릇을 하며 네게 속죄하려 했는데 이미 늦은 것 같더구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뗀 페이셔 공작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일그러진 눈매 안 익숙한 보랏빛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어쩌면 내 눈도 똑같을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보아 온 터라 얼마나 차갑고 모진 녀석인지 잘 안다. 그런데 그런 놈이 너를 찾겠다고 밤낮을 쉬지도 않고 말을 몰더군. 네게 달려가는 절박한 얼굴을 보며 느꼈지. 그리고 그 녀석을 마주한 순간 안심하는 네 표정을 보며 알았다.”
페이셔 공작이 희미하게 입가를 늘였다.
“네가 나와 바이올렛 하우스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목구멍에 무언가 들어찬 듯 꽉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페이셔 공작의 얼굴은 안도와 미안함,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또 늦어 버렸지만 네가 이제야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 기쁘구나.”


#073
“가라앉질 않네.”
찜질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빨갛게 달아오른 눈언저리를 꾹꾹 눌러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페이셔 공작이 방을 나간 후 북받친 감정에 한참을 울었다. 나도 왜 우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힘겹게 사과를 전하는 페이셔 공작의 모습에 디아르트의 품에 안겨 정신을 잃기 직전 나를 보던 그의 황망한 얼굴이 겹쳐졌다.
“울고 나니까 속은 후련하네.”
꼭 이 순간을 기다려 온 듯 가슴 언저리에 꽉 막혀 있던 무언가가 허물어졌다. 앞으로는 페이셔 공작을 조금쯤 더 편하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 얼굴은 아니지.”
퉁퉁 부은 눈 때문에 여간 못생겨 보이는 게 아니었다. 이런 얼굴을 디아르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찜질했지만 소용없었다. 요즘 계속 침대를 같이 쓰고 있기에 숨길 수도 없고, 일찍 자는 척할 생각으로 이불을 목 끝까지 뒤집어쓰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때마침 하루 종일 격무로 자리를 비웠던 디아르트가 돌아왔다. 곧장 침대로 다가오는 그의 기척이 느껴졌다.
“자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디아르트의 숨소리가 가까워졌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그가 꼬치꼬치 캐물으면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설명할 여력이 없었다.
진득하게 달라붙던 시선이 이내 떨어졌다. 옷을 벗는 듯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문이 여닫히는 소리로 이어졌다. 씻으러 간 것 같아 한숨 돌리며 눈을 뜬 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왜 자는 척해?”
욕실에 들어간 줄 알았던 디아르트가 바로 앞에서 팔짱을 끼고 날 삐뚜름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치밀한 놈!’
날 속이려고 문소리까지 내? 어이없이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던 디아르트가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가 허리를 숙이며 손으로 내 턱을 감쌌다. 커다란 손에 완전히 잡힌 채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울었어?”
고개를 저어 봤자 소용없었다. 하기야 나라도 빨간 눈을 하고서 아니라는데 믿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 있었나?”
디아르트가 침대맡에 앉아 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아까 페이셔 공작과 차를 마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자에게 무슨 소리라도 들었어?”
“그자라뇨.”
유아독존이라는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장인어른에게 말하는 본새가. 내가 뾰족하게 쏘아보자 디아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제 아버지세요. 저를 존중하신다면 예의를 갖춰 주세요.”
“페이셔 공작을, 아버님을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이제 아니에요.”
턱을 쥔 그의 손을 툭 쳐내고 불퉁하게 고개를 홱 돌렸다. 날 가만 내려다보던 디아르트가 침대 속으로 들어왔다. 목 뒤로 팔이 쑥 들어오더니 내 몸을 끌어당겼다. 버텨 보긴 했으나 부질없었다. 그대로 그의 품속으로 빨리듯 안겼다.
“그럼 왜 울었는데.”
그의 목소리가 한결 나긋해졌다. 나름대로 위로해 주는 건지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퍽 다정했다. 그래도 내가 뭐라고 하니 바로 아버님이라고 정정하는 모습이 좀 귀여운 것 같아 마음이 누그러졌다. 절대 벌어진 셔츠 앞섶으로 슬쩍 보이는 그의 가슴 때문만은 아니었다.
“말하기 싫은가?”
“네.”
나도 내가 왜 울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디아르트가 나를 더 바투 당겨 안았다.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말해.”
그건 바로 너,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디아르트는 성격과 다르게 체온이 높았다. 따끈한 품에 안겨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자니 자꾸만 불건전한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더욱이 그의 입술이 맞닿은 이마에서부터 전해지는 뜨끈한 기운이 발끝까지 쭉 내달았다. 가빠지는 숨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며칠 영지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왜요?”
“사우 일족을 찾았어.”
뭐? 눈을 번쩍 뜬 난 자꾸만 눈이 가던 가슴도 밀어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말요?”
“음. 황실 연회가 열리던 날 일족의 거처를 찾았고 그중 하나를 만났어.”
사우 일족이라면 우슬라의 혈통이니 저주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을까? 나도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고 싶은데.
“마침 해리스 상단에게서 제라석 광산도 사들였으니 함께 둘러보고 올 생각이야.”
생각해 보니 곧 공국과의 전쟁이 있겠구나. 내가 일찍이 제라석에 대해 알려 준 덕에 미리 무기들을 무장할 수 있어 원작보다 피해는 적겠지만 그래도 전쟁이란 무서운 일이었다. 디아르트는 물론이고 그동안 정이 쌓인 기사들 역시 참전하겠지. 디아르트야 원작에서도 다치는 곳 하나 없이 돌아왔다고 되어 있지만 이름도 없는 기사들의 생사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함께 가지 않겠어?”
납치 사건 이후로 나와 잠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 디아르트는 며칠씩이나 나를 혼자 두는 게 마뜩잖은 얼굴이었다. 나도 사우 일족을 만나 보고 싶긴 했으나 지금은 그보다 다른 일이 우선이었다. 내가 그들을 만나려는 이유는 혹시 휘턴 가를 통해서만 저주가 완전히 중화되는 건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디아르트에 대한 감정을 인정한 지금은 당장 묻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앞으로 그와만 접촉할 테니까.
가만 응시하는 디아르트의 얼굴과 마주하니 불순한 생각이 불쑥 치솟은 난 헛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같이 갔으면 하는 의사를 몇 번이나 더 내비치던 디아르트는 내가 끝까지 고개를 젓자 결국 물러섰다.
“나 없는 동안 울지 마.”
엄지로 부어오른 눈언저리를 살살 문지르던 디아르트가 그 위로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기운에 어깨가 절로 떨렸다.
‘덮칠까?’
아까부터 힘들게 참고 있는 사람 마음도 모르고 계속 유혹하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먼저 덮치면 좋아할걸?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나쁜 꼬임에 난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몰라도(?) 디아르트는 처음인데 배려해 줘야지. 이렇게 충동적으로 말고 더 그럴듯하고 로맨틱한 분위기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경험을 만들어 줘야 했다.
어른스럽게 물러선 난 디아르트의 품속에 폭 안기며 문득 생각했다.
‘그나저나 저주에 대해 언제 말하지?’
* * *
아침 일찍 영지로 떠나는 디아르트를 배웅하고 방에 들어온 난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드디어 해방이다!”
그동안 아직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방에 갇혀 있다시피 하며 외출 금지를 당했기에 디아르트가 없는 지금이 기회였다. 릴리를 부른 난 서둘러 치장을 하고 외출을 감행했다. 나중에 사용인들이 디아르트에게 말하든 말든 지금을 즐겨야지.
어젯밤 아련한 분위기를 잡던 사람 맞나 싶게 신나서 타운 하우스를 뛰쳐나온 난 로코 제과점부터 들렀다. 부드럽고 고소한 생크림과 상큼한 딸기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케이크를 먹으며 바깥바람을 맞고 있으니 답답했던 속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맞은편에서 열심히 먹고 있는 릴리와 달리 함께 나온 밀토는 어딘지 불편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그래?”
“아닙니다.”
내 물음에 움찔한 밀토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말할 것 같지 않았다.
그때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사냥 대회에서 내 뒤를 따라다니며 아부를 늘어놓던 귀부인들이었다.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에 띄게 흠칫하더니 어쩔 줄 몰라 했다.
“왜 저러는 거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듯한 그들을 지켜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귀부인들이 드레스 자락을 들어 인사한 후 서둘러 줄행랑쳤다. 순식간에 사라진 그들의 뒷모습에 난 께름칙해졌다.
사냥터에서만 해도 내게 잘 보이지 못해 안달 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꿀 이유가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별 상관없는 사람들이니 나중에 생각하자.
“황성에 들어갈 방법이 없을까?”
레티시아는 물론이거니와 자비스의 상태도 걱정되는데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으니 답답했다. 아무리 공작 부인이라도 황성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무슨 방법이 없는지 푸념처럼 내뱉었더니 밀토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 얼굴에 갑자기 나를 보고 안절부절못하던 귀부인들의 모습과 감감무소식인 레티시아가 겹쳐졌다.
아무래도 황성과 디아르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074
디아르트와 황성 사이에 문제가 생길 일이 뭐가 있을까. 이 시기에는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을 텐데.
‘혹시 나랑 자비스 때문인가.’
둘이서 만날 일이 뭐가 있냐고 이를 갈던 디아르트의 기세를 볼 때 사냥터에서도 얌전하진 않았을 것이다. 설마 황실 진영에까지 들이닥쳐서 나를 찾은 건 아니겠지?
‘아냐, 설마. 디아르트가 그렇게까지 미친놈은 아니야.’
황제 진영에 난입한다는 건 반란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디아르트라도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로 행동했을 리 없었다.
‘반란’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마음에 걸렸지만 애써 무시한 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자비스의 편지를 받고 둘이 함께 사라졌으니 어쩌면 우리가 사랑의 도피를 했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공작가의 부인과 황태자가 도망을 쳤다는 건 비록 남녀 간의 애정사에 대해 관대하다 할지라도 충격적인 스캔들임이 분명했다.
‘그걸로 입방아들을 찧었을 귀부인들이야 그렇다 치고 디아르트나 황실에선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
레티시아에게 편지가 오지 않을 이유로 충분치 않았다. 더욱이 이렇게 반목한다면 오히려 그 소문이 사실인 것처럼 보여 서로에게 득 될 것이 없었다. 천진하게 케이크를 먹고 있는 걸로 보아 릴리는 모르는 눈치고, 나는 밀토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불안해하는 게 이와 상관있음이 분명했다.
“밀토 경.”
“넷?”
내가 무얼 물어볼지 벌써 짐작한 듯 그의 얼굴에 불안함이 가득했다. 그러면서 묻기도 전에 입을 꾹 다무는 게 절대 대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를 가만히 응시하니 밀토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니에요. 물어도 답할 것 같지 않네요.”
퉁명스럽게 말하자 밀토가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그를 모른 척하며 일어섰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나만 모르고 있는 듯한 상황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흥이 떨어진 터라 서점에서 신작만 구입한 후 곧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서점 안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나기 전까진 그랬다.
“앗.”
나와 시선이 마주친 에드거가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하는 모습이 어찌나 순진해 보이는지 뚱해 있던 난 나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우리 에드거는 저런 하찮음이 매력이지.
“광영의 빛이 깃들길, 에드거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아. 휘턴 부인.”
내 인사에 화답한 에드거는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 태도에서 나만 모르는 무언가를 그 역시 알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제게 잠시만 시간을 내어 줄 순 없는지요?”
우연한 이 만남을 서둘러 끝내려는 에드거였지만 나는 그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빙긋 웃는 내 얼굴에서 무얼 느낀 건지 에드거가 어깨를 떨며 한발 물러섰다. 나는 두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 * *
에드거에게서 내가 납치된 날 있었던 일에 대해 듣게 된 난 아연해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설마설마했는데 그렇게까지 미친놈이었던 모양이다. 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저도 그 자리에 없어서 정확한 상황은 잘 모릅니다.”
에드거의 말에 따르면,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디아르트에게 능멸을 당한 황제 부부의 충격은 상당했던 듯하다. 공작의 중재도 소용이 없었는지 황제는 디아르트의 무엄에 분노했고, 현재 공작가와 황실 사이에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고. 아까 귀부인들이 어쩔 줄 몰라 하다 줄행랑쳤던 것으로 보아 다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눈치를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밀토는 내가 이 사실을 모르길 바랐던 거군.’
에드거를 바라보는 밀토의 눈빛에 원망이 가득했다. 내가 헛기침하자 움찔한 밀토는 마치 혼이 난 학생처럼 의기소침해져서 물러섰다. 그에게 이 사실을 숨기라고 명한 사람이야 뻔했다.
“레티시아 님께서 연락이 없으신 건 그 때문이었군요.”
“앗, 오해하지 마십시오. 누님께선 요즘 무척 바쁘셔서 그럴 겁니다.”
내가 시무룩해지자 에드거가 얼른 레티시아를 변호했다. 아직 몸을 추스르지 못한 자비스를 대신해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데다 황제에게 디아르트를 두둔하느라 눈코 뜰 새도 없다는 말이었다.
“황태자 전하는 좀 어떠신지요?”
안 그래도 궁금했던 자비스의 상태에 대해 물으니 에드거가 걱정 말라는 듯 미소 지었다.
“저만 보면 장난부터 치는 걸 보니 멀쩡하십니다. 누님께선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뜰 거라고 혀를 내두르셨죠.”
다행이다. 마지막에 봤던 그의 상태가 무척 안 좋았던 터라 걱정이 많았는데 안심이 되었다. 에드거가 힐긋 눈치를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형님께선 부인이 괜찮으신지 염려하고 계십니다.”
“전 덕분에 잘 지낸다고 전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에드거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지금 양쪽이 서신을 주고받을 분위기가 아닌지라 누님도 어쩔 수 없으실 겁니다.”
나야 상황을 모르니 황실에 편지를 보냈지만 레티시아 입장에선 여러모로 눈치가 보일 만했다.
디아르트가 황제에게 맞서는 모습을 직접 보았으니 황족으로서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나는 건 마찬가지였을 텐데 침착하게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레티시아다웠다.
‘누구와는 다르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던 디아르트가 떠올라 고개를 젓는 순간 그가 오늘 영지로 떠난 이유가 생각났다.
‘잠깐. 설마 서둘러 사우 일족과 제라석 광산을 보러 간 게 이거 때문은 아니겠지?’
디아르트의 입장에선 자비스가 불러낸 탓에 내가 험한 일을 당했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그는 받은 건 배로 되갚아 주는 성격에다 자비스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황제와의 반목으로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하게 된 상황이니 교전을 염두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는 분명 반란에 성공할 것이다. 전쟁귀라 불릴 만큼 전투에 노련한 남자였고, 공국과의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기에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더욱이 지금 타운 하우스에는 휘턴 공작과 페이셔 공작도 있으니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 제라석으로 만든 무기까지 소지하게 된다면…….’
불 보듯 뻔한 결과를 상상해 보던 난 고개를 저었다. 레티시아와 자비스, 그리고 푸근한 인상의 황제가 연이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란만은 막아야 했다.
난 에드거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그만 도망치고 싶은 듯 눈치를 살피고 있던 에드거가 움찔했다. 다람쥐처럼 귀여웠으나 지금은 태평하게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부탁이 있어요, 전하.”
“부탁……이요?”
내게 붙잡혀 반강제로 모든 상황을 털어놓아야 했던 에드거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최애에게 신뢰를 잃은 것 같아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종종 여기서 절 만나 주실 수 있을지요?”
“네?!”
에드거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무슨 오해를 했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선 얼른 손사래 쳤다. 떨리는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부인, 상황도 그렇고 저희가 따로 만나는 건 아무래도…….”
“제 편지를 레티시아 황녀 전하께 전해 주셨으면 해요.”
반란을 막기 위해서는 황제의 분노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레티시아와 소통하며 서로의 상황을 공유하는 게 좋을 것이다. 서신을 주고받기가 눈치 보이는 상황이라 하나 이는 에드거를 통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내 의중을 알아챈 에드거가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좋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도와야지요.”
아마 에드거는 물론 레티시아도 만약 전면전이 일어나면 황실에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터다. 그러니 더욱 불안할 테고. 나는 부러 더 걱정 말라는 듯 방긋 웃었다. 에드거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 * *
그날 이후 에드거를 통해 레티시아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먼저 내 안위부터 걱정한 그녀는 디아르트를 이해한다고 했다. 나를 무척 사랑하는 모양이라며 밝은 문조로 이어진 편지는 내 마음을 가볍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였다. 다정한 그녀다웠다.
레티시아를 위해서라도 얼른 디아르트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텐데 그는 나흘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밀토에게 에드거와 만났다는 사실을 말하는 순간 호위 기사를 바꾸겠다는 협박을 했던 게 무색해졌다.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늦는다는 연락을 받긴 했지만 속이 터졌다.
나는 습관적으로 손을 주물렀다. 디아르트가 영지로 떠난 다음 날부터 가끔 손가락에 감각이 없어졌다. 그동안 디아르트의 저돌적인 스킨십으로 인해 저주가 순조롭게 중화되고 있었기에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아직 이런 증상이 나타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설마 저주가 더 심해진 건 아니겠지?’


#075
제라석은 겉보기엔 평범한 돌처럼 보였다. 디아르트가 광산을 둘러보며 물었다.
“알아보았나?”
“앗, 네. 제라석에 마나를 주입시키려면 애초에 제련할 때부터 다른 방식으로…….”
“그거 말고.”
“네? 그럼?”
요 며칠 밀린 영지의 일을 처리하느라 타운 하우스로의 귀환이 늦어진 탓에 디아르트의 심기가 썩 좋지 않았다. 덕분에 바짝 긴장한 채 언제 날아올지 모를 질문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사우 일족이 고개를 갸웃했다. 디아르트의 서늘한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저주라는 것에 대해 알아보았냐 물었다.”
그걸 왜 뜬금없이 광산 돌아보다가 물어, 사람 헷갈리게! 라고 맞서고 싶었으나 힘도 없고 용기도 없는 심약한 요정은 속으로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워낙 오래된 저주술인데다 긴 시간 금지되었던 터라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
푸념처럼 말을 잇던 사우 일족은 디아르트의 싸늘한 표정에 얼른 덧붙였다.
“-는 대신 관련된 고서적들을 샅샅이 훑어보았습니다. 고대어로 적혀진 탓에 아직 전부를 해독하진 못했습니다만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뭐지?”
“먼저 이 저주를 처음 만든 분은 우슬라라고 하는 저희 선조이십니다.”
우슬라? 디아르트는 묘하게 익숙한 이름에 미간을 좁혔다.
“마력이 독보적으로 높았다고 하는데 인간과 혼인하기 위해 일족을 등진 분이시죠. 전 그분과 혼인한 인간이 휘턴 가의 조상님이 아닐지 조심스레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희 일족은 혈통을 중요시하기에 다른 종족과 혼인하는 경우가 극히 드뭅니다.”
사우 일족의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가 동화처럼 자주 들려주던 휘턴 가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 ‘우슬라’라는 이름이 익숙한 건 그 때문이었다.
만약 사우 일족이 말하는 우슬라와 자신의 선조인 우슬라가 같은 인물이라면 로에니가 걸린 게 푸이탄병이 아니라 저주일 가능성도 더 높아졌다.
디아르트는 로에니가 저주에 걸렸다면 그 매개체는 장미일 거라는 말을 떠올렸다.
‘장미. 장미라.’
머릿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가문의 역사를 되짚어 보던 디아르트가 이맛살을 구겼다.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 * *
언질도 없이 갑작스레 본저를 찾은 그로 인해 허둥지둥하는 사용인들을 빠르게 가로지른 디아르트가 동쪽 서재로 향했다. 대부분의 책을 섭렵한 후로 발길을 끊었던 동쪽 서재는 기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망설임 없이 직진해서 원하던 책을 집어낸 디아르트는 그를 사우 일족에게 내밀었다. 고대어로 적혀진 탓에 그가 읽지 못하는 몇몇 책 중 하나로 휘턴 가의 역사를 담고 있었다.
의아한 얼굴로 책장을 펼친 사우 일족의 낯빛이 하얘졌다. 설마 이걸 해독하라는 거냐는 듯 묻는 눈빛에 디아르트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 잔인하리만치 단호한 모습에 울상이 된 사우 일족을 뒤로한 디아르트가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띄엄띄엄 힘겹게 활자를 해독하는 사우 일족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스트 휘턴이 아내 우슬라에게 받은 저주받은 장미는 대대로 휘턴 가문에 내려져 오고 있다. 누군가에게 저주를 건 후 사라지더라도 다음 대에 또다시 홀연히 나타나기에 영원한 족쇄라고 불리기도 한다.”
서재 안을 둘러보던 디아르트는 구석에 널브러진 종이들을 주워 들었다. 알 수 없는 글자들을 적은 필체가 낯익었다. 서재에 있는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도록 교육받은 사용인들 때문에 남아 있는 로에니의 흔적에 디아르트의 입가가 길게 늘여졌다. 이 낙서의 주인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황실과의 전면전에 대비하기 위해 급히 영지를 방문한 건데 이렇게 일이 지체될 줄 알았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함께 올 걸 그랬다.
황실을 생각하자 자연스레 자비스 황태자가 떠오른 디아르트의 턱이 딱딱해졌다. 방금까지 부드럽게 미소 짓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한 표정이었다. 자비스의 선 넘은 욕심으로 하마터면 로에니를 잃을 뻔했다. 자신이 조금만 늦었어도 그녀가 끔찍한 일을 당했을 거란 상상만 하면 지금도 아찔했다.
그는 두 번 실수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면 된다. 아무도 감히 로에니를 건들지 못하게 하면 되는 거다.
‘서둘러야겠군.’
너무 오래 옆을 비웠다. 종이들을 갈무리하던 디아르트의 눈에 서재와 어울리지 않는 유리 돔이 보였다. 그 이질적인 장식품은 이상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성큼성큼 다가간 디아르트는 유리 돔 안에 들어 있는 새까맣게 시든 장미꽃을 꺼냈다.
손에서 줄기를 빙글거리던 디아르트가 사우 일족을 돌아보았다.
“저주가 대를 이어 내려오는 게 가능한가?”
보통 저주라함은 특정한 대상을 향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휘턴 가의 역사는 제국과 함께했다. 그 아득한 시간 동안 전해지는 저주라니, 전설로나 내려올 법한 일이었다.
“가능은 합니다.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제일 중요한 건 처음 저주를 건 이의 마력입니다. 마력이 낮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저주의 파장이 옅어지니까요. 두 번째는 대상입니다. 만약 피에 저주를 걸었다면 그 피를 가진 이가 있는 한 저주는 계속 유지되게 됩니다. 하나 두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 하더라도 성공할 확률은 매우 희박하지요.”
“우슬라라는 이의 마력은 그를 가능하게 할 정도인가?”
“고서를 통해서 기록만 전해지는 분이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일족에서 그 정도로 힘이 강했던 분은 전무후무하다고 들었습니다.”
디아르트는 가만히 사우 일족의 말을 곱씹으며 장미꽃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웃었다.
* * *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에 눈을 뜬 난 머리를 괴고 모로 누운 채 나를 보고 있는 디아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눈을 뜨자마자 훅 들어오는 미모 공격에 잠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떨어져 지낸 게 며칠이나 되었다고 새롭게 잘생겨 보여 심장이 뛰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콩깍진가?’
속으로 심호흡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동안 디아르트는 물끄러미 나를 응시할 뿐 말이 없었다. 나를 샅샅이 읽어 내리는 듯한 그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담겨 있었다. 영지에서 무슨 일 있었나, 의아했다.
“언제 온 거예요?”
“아까.”
“근데 왜 안 깨웠어요.”
“너무 곤히 자서 깨울 수 없더군.”
그렇다고 자는 사람을 그렇게 지켜보고 있으면 어떡하니. 난 혹시 침이라도 흘렸을까 봐 간지러운 곳을 긁는 척 자연스레 입가를 닦았다. 그 모습마저 진득하게 바라보던 디아르트가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나?”
음? 그러고 보니 디아르트가 없는 며칠 동안 시큰하던 손가락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했다. 자는 동안 손을 잡기라도 한 모양인데 이왕이면 눈 떴을 때 잡아 주지 그랬니. 아쉬움에 그의 손을 바라보자 내 시선을 따라간 디아르트가 손을 내밀었다.
“잡아 줄까?”
만지라는 듯 내민 손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익숙함이 무섭다고, 그동안 내게 닿지 못해 안달하던 남자 때문에 저주를 중화시키는 기운에 길들어져 있던 모양이다. 얼른 그의 손을 잡자 익숙하면서도 늘 새로운 기운이 피부를 통해 천천히 스며들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이거지. 몸속 가득 퍼지는 충만함에 절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런 내 얼굴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응시하던 디아르트가 이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허무한 것 같기도 하고 안도하는 것도 같은 미소는 곧 장난스럽게 변했다.
“멀쩡해 보이는군.”
그러더니 불쑥 손을 빼내었다. 평소의 그라면 내가 밀어내기 전까진 절대 먼저 물러서지 않았을 텐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당황스러워 눈만 깜박이자 디아르트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덩달아 나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내게 사우 일족의 피가 섞인 것 아나?”
“네. 그럼요.”
“어떻게 알았지? 나조차 잊고 있었을 만큼 이제 그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을 텐데.”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던 난 뜨끔했다.
“그게…… 책에서 읽었던가? 아, 아버님께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우물쭈물하던 난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디아르트에게 저주에 대해 숨길 필요가 없잖아? 이렇게 말이 나온 김에 차라리 모든 사실을 털어놓자는 생각으로 막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그대에게 알려 줄 것이 있어.”
디아르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순간 잊고 있던 중요한 문제가 떠올랐다. 설마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 싶어 나 역시 비장하게 얼굴을 굳혔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동안 충격을 받을까 봐 차마 말을 못 했는데 더 이상 숨겨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답지 않게 주저하던 디아르트가 힘들게 말을 꺼냈다.
“사실 그대는 불치병에 걸렸어.”


#076
응? 전쟁 얘기 하는 거 아니었니? 여기서 왜 갑자기 불치병이 나와? 생각지 못한 주제에 당황해서 어버버하는 나와 달리 디아르트는 심중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미간이 괴로운 듯 잔뜩 찌푸려졌다.
“놀랐군.”
이럴 것 같아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디아르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내가 불치병에 걸린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여기는 건가? 난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푸이탄이라는데 치료제가 없는 무서운 병이라더군.”
“저, 디아르트 사실은…….”
“하지만 걱정하지 마.”
디아르트가 진실을 밝히려는 내 입술을 엄지로 문지르며 막았다. 여린 살갗을 통해 내달리는 찌릿한 감각에 멈칫한 사이 그가 말을 이었다.
“사우 일족은 예부터 치료술에 능하다고 알려져 있지. 그들에게 푸이탄병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으니 분명 방법을 찾아낼 거야.”
“아니, 잠깐 내 말을 좀 들어 보……”
“배타적인 일족이지만 내게 그들의 피가 흐르는 게 유효했어.”
디아르트가 나를 품에 당겨 안았다. 커다란 손이 위로하는 듯 다정하게 등을 쓸었다.
“겁먹지 마. 내가 있는 한 당신은 죽지 않아.”
나를 잃을까 두렵다는 듯 그의 목소리가 애절했다. 겁을 먹은 건 본인인지 어깨를 파르르 떠는 디아르트에게 차마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나는 도리어 그의 등을 토닥이며 눈을 끔벅였다.
‘망할, 이거 어떡하지?’
* * *
디아르트가 이상하다. 요즘 계속 어울리지 않은 행동들로 이상하긴 했지만 최근의 그는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이런, 또 식사를 남겼군. 입에 맞지 않나? 제대로 먹지 않으면 건강에 안 좋다고 했잖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이 마주친 건지 아닌지도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멀찍이 떨어져서 식사하던 디아르트가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음식을 입에 넣을 때마다 따라붙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포크를 내려놓았더니 곧바로 미간을 구겼다.
“요 며칠 계속 이러는군. 아무래도 주방장을 바꿔야겠어.”
“네?”
나는 주방장을 부르려는지 고개를 돌리는 디아르트의 팔을 얼른 붙잡았다.
“왜 그래요.”
“주인의 입맛도 맞추지 못하는 건 명백한 업무 태만이야.”
“…….”
나는 내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그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면서도 스테이크는 싹 다 먹어 치웠다. 남은 거라곤 맛없어서 밀어 둔 채소들 뿐이었다.
“쉬었다가 먹으려고 한 거예요.”
부당하게 해고당할 위기에 처한 억울한 주방장을 위해 얼른 포크를 든 난 입으로 부지런히 채소들을 옮겼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던 디아르트가 물 잔을 건넸다. 물 마시는 것도 어찌나 물끄러미 바라보는지 하마터면 사레가 걸릴 뻔했다.
함께 식사하고 있던 휘턴 대공작이 보다 못해 한마디 던졌다.
“아주 얼굴이 뚫어지겠다. 그렇게 좋으냐?”
“네.”
아랑곳하지 않고 즉답하는 디아르트 때문에 민망한 건 나였다. 휘턴 대공작은 녀석, 진즉에 좀 잘할 것이지, 혀를 차면서도 흐뭇한 얼굴이었다. 그가 떫은 표정의 날 살피며 말했다.
“먼저 방으로 돌아가는 건 어떻겠니. 로에니의 안색이 좋지 않구나.”
“그럼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그 말만 기다렸는지 벌떡 일어선 디아르트가 손을 내밀었다. 바라만 볼 뿐 망설이고 있자 어서 잡으라는 듯 채근했다. 떨떠름하게 그의 손을 잡자 디아르트가 불식간에 나를 안아 올렸다. 나는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품에서 낯 뜨거운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대로 다이닝 룸을 나서는 디아르트의 등 뒤에서 휘턴 대공작이 엄지를 치켜올리는 게 언뜻 보였다. 문득 그가 엄한 아버지였다던 릴리의 말이 떠올랐다. 대체 저 모습 어디에서 근엄함을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 맞은편에서 가만히 차를 마시던 페이셔 공작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페이셔 공작이라도 디아르트를 막아 주었으면 좋겠건만 그는 조용히 찻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디아르트는 나를 안은 채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청소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옆으로 물러서며 흘깃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벌써 며칠째 똑같은 모습을 보는 터에 다들 익숙해졌는지 덤덤한 표정이었다. 이 민망한 상황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건 나뿐인 것 같았다.
“그만 내려 주세요.”
말하면서도 그가 들어 주지 않을 걸 알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말했지만 늘 소용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침대 위에서야 나를 내려놓은 그가 옆에 앉았다.
“이렇게 매번 안아서 옮겨 주실 필요 없어요.”
다 큰 숙녀가 매번 안겨 다니는 게 얼마나 남 보기 민망한 줄 알아? 라고 차마 불평은 못 하고 돌려 말했다.
“당신 병은 무리하면 안 좋다고 했잖아.”
“가벼운 산책은 건강에도 좋은걸요.”
“그러다 어젠 넘어질 뻔했지.”
그거야 발밑에 벌레가 지나가는 바람에 놀라서 그런 거고!
넘어지기 전에 중심을 잡았는데도 불구하고 야단스럽게 의사를 부르라고 소리치던 디아르트가 떠오른 난 고개를 저었다. 그의 닦달에 주치의는 물론이거니와 사용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내 시중을 드는 데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푸이탄병은 갑작스럽게 사지의 힘이 빠진다고 했어. 혹시 계단 같은 데서 구르기라도 할까 걱정돼서 그래.”
“그치만 매번 안고 다니면 당신도 힘들잖아요.”
내 말에 디아르트가 픽 웃었다.
“당신 정도는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어. 마음 같아선 계속 안고 있고 싶군.”
나는 손등으로 내 뺨을 조심스레 쓰는 디아르트를 바라보며 대체 이 남자가 요즘 들어 왜 이러는지 고민했다.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그의 행동들은 모두 나를 위한 것이긴 했다. 다만 이상한 점은 그가 내가 불치병에 걸렸다고 오해한 게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요즘의 그는 너무 과했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것 같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애지중지 소중하게 대해 주니 좋긴 한데 묘하게 찝찝했다. 딱 집어 설명할 순 없지만 그동안 살면서 쌓아 온 촉이 뭔가 꺼림칙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디 아픈가? 표정이 안 좋은데.”
디아르트의 물음에 상념에서 깬 난 그를 바라보았다. 잠깐이라도 의심한 게 미안할 정도로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그래, 이렇게 날 위해 주는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 사람은 정말 내가 불치병에 걸린 줄 아는 거야. 그동안은 내게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어서 티를 낼 수 없었던 거겠지.
애써 의심을 눌러 삼킨 난 고개를 저었다.
“자꾸 살이 내리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군.”
디아르트가 마뜩잖은 얼굴로 내 얼굴을 감쌌다. 그의 금안에 담긴 염려를 보니 또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루라도 빨리 사실 내가 걸린 건 푸이탄병이 아니라 너희 집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라고 말해 줘야 하는데 디아르트의 저런 눈을 마주하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 고백했다가 디아르트가 화를 내면 어쩌나 걱정됐다. 불치병인 줄 알고 저렇게 속을 태웠는데 사실은 아니라고 하면 허탈하고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았나 싶어 분노할 것 같았다. 내가 시작한 거짓말은 아니지만 묵인한 꼴이 되었으니, 이제는 내가 한 거짓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디아르트가 내게 불치병이라는 말을 했을 때 그때 고백했어야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말하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나한테 실망해서 내가 싫어지면 어떡해. 난 이제 얘가 너무 좋은데.
처음 디아르트가 내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오해를 하고 있단 걸 알았을 때 개이득이라며 좋아한 것에 대한 벌이라도 받는 듯했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나도 모르게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인 디아르트가 불쑥 다가왔다. 언제 내게 날 세운 표정을 한 적이 있었냐는 듯 다정한 얼굴을 보니 울컥했다. 만약 다시 예전의 그 무심한 눈빛으로 날 본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민이라도 있나? 털어놓으라는 듯 살갑게 어르는 목소리에 손을 뻗었다. 각이 진 그의 턱을 두 손으로 감싸려는 순간이었다. 디아르트가 얼굴을 뒤로 훅 물렸다. 그대로, 마치 내 손을 피한 게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게 침대에서 일어선 디아르트가 눈을 휘었다. 그가 끼고 있던 장갑을 느릿하게 벗으며 물었다.
“차를 가져오라고 하지. 밀크티를 준비시킬까?”
“…….”
방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묻는 그를 보며 나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요즘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저것이었다.
나를 만지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쉴 새 없이 달라붙던 디아르트가 어느 순간부터 내 손을 피하고 있었다.


#077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쏘아만 보자 디아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지?”
“방금 제 손을 피한 거 아니에요?”
“내가?”
“네.”
그래 네가.
원망 어린 목소리에도 디아르트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요 며칠 내내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는데 내가 바보도 아니고 눈치를 못 채겠니?
“요즘 계속 피하고 있잖아요.”
“그런 적 없어.”
이게 발뺌하네? 방금까지 디아르트가 날 싫어하게 되면 어떡하나 걱정하던 것도 잊은 난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리곤 성큼성큼 디아르트에게 다가갔다. 내가 한 발 다가가면 디아르트가 두 발 물러섰다. 이를 악물고 쫓아가니 곧 도망칠 곳 없는 디아르트의 등이 벽에 닿았다. 손을 잡으려 하자 디아르트가 팔을 들었다.
“이것 봐, 이것 봐!”
“팔이 뻐근해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오기가 생긴 난 그의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디아르트가 팔을 더욱 높이 치켜들었다. 가뜩이나 머리 하나 이상 키 차이가 나는데 팔까지 드니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이리저리 팔을 휘저어도 보고 뛰어도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약이 올라 씩씩거리며 디아르트의 손을 노려보고 있는데 문득 앞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니 순식간에 표정을 감춘 디아르트가 눈썹을 까딱였다. 그 천연덕스러운 얼굴에 뿔이 돋아 뒤로 물러섰다. 더럽고 치사해서 안 만진다, 안 만져.
완전히 포기했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인 난 그대로 돌아섰다. 등 뒤로 디아르트가 따라붙는 기척이 느껴졌다. 난 그가 방심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타이밍을 쟀다. 1…, 2…, 3. 지금! 불식간에 몸을 홱 돌린 난 디아르트의 손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이 귀신같은 놈은 그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피했다.
“이런, 반사적으로 그만.”
국어책 읽는 듯 어색한 변명을 뻔뻔하게도 늘어놓는 디아르트를 쏘아보았다. 내 무언의 불만 어린 시선을 받아 내는 그의 얼굴은 어울리지 않게 천진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램버트입니다.”
그대로 나를 지나쳐 문으로 향하는 디아르트의 입꼬리가 말아 올라가 있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문을 열어 둔 상태로 램버트와 짧게 대화를 나눈 디아르트가 나를 돌아보았다.
“잠시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
다녀오든지, 말든지. 빈정이 상한 난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애꿎은 바닥만 쳐다보았다.
“손님이 왔다는군.”
부아가 치밀어 팔짱을 끼고 씩씩대던 난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서 있던 디아르트가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불퉁하게 쳐다보자 디아르트가 허리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내 머리에 입을 맞췄다.
“금방 다녀올게.”
그대로 디아르트가 방을 나간 후 나는 침대에 누웠다. 자존심 상하게 기분이 또 풀리는 건 뭐야.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그가 닿았던 정수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이번엔 이렇게 넘어갔지만 요즘 디아르트가 나를 피하는 건 사실이었다. 그는 며칠째 제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날 안고 다니고 있으니 스킨십은 잦아졌으나 묘하게 벽을 세우고 있달까. 최근엔 잘 끼지 않던 장갑을 다시 끼기 시작했고, 나를 안을 때도 옷으로 꽁꽁 싸맸다. 마치 피부끼리 스치는 걸 피하는 느낌이었다.
“저주에 대해 알고 있을 리 없는데.”
갑자기 왜 그러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되었다. 심지어 그는 같은 침대에 누워 나를 끌어안고 자면서도 실수로라도 살결을 닿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아주 철벽도 그런 철벽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저주의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내가 잠들어 있을 때 손이라도 잡는 게 분명했다.
아니, 왜 지만 만지냐고! 나도 좀 만지자고! 아니면 내가 깨어 있을 때 만지든가! 난 요즘 정말 욕구 불만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디아르트의 손만 봐도 감질나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그것도 자존심 상했다. 게다가 묘하게 유독 내 앞에서 자주 제 손을 쓴다거나 깍지를 끼는 것 같은 건 내 지나친 억측일까?
‘언제는 방심하면 잡아먹을 듯이 굴었으면서.’
툭하면 노골적으로 유혹하던 디아르트가 떠올랐다. 그러던 남자가 왜 하루아침에 달라졌을까. 나에 대한 감정이 식었다고 생각하기엔 날 대하는 태도가 또 너무나 지극정성인지라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졌다.
혹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도 이렇다 할 말도 안 하고……. 아무튼 요즘 디아르트는 여러모로 내게 혼란을 안겨 주고 있었다.
“아니 근데, 생각할수록 화나네?”
솔직히 내가 그 정도로 했으면 모른 척 손 한번 잡아 줘야 하는 거 아냐? 갑자기 왜 그렇게 철벽 치는 건데, 대체?
아까 일을 곱씹어 보며 이를 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브라스 종을 울려 릴리를 부른 난 치장을 부탁했다.
“이렇게 예쁘게 입고 뭐 하시려고요?”
릴리가 침대에 누운 탓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물었다. 내가 기분 전환 삼아 옷을 갈아입은 거거나 정원에 산책이라도 나가려는 모양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난 순진하게 방글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거울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가출!”
* * *
내가 가출을 해 봤자 어딜 가겠어. 사실 그동안 내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디아르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에드거를 만나러 나왔다. 서로의 길이 엇갈릴 경우 서점에 있는 오래된 책 속에 편지를 넣어 두자고 미리 약속해 두었으니 그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레티시아의 편지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디아르트가 갑자기 달라진 건 둘째치고 나는 그동안 꾸준히 그가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설득하려고 노력을 했더랬다. 하지만 디아르트는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돌리거나 들으려 하지 않았다. 반란을 일으키려는 생각이 확고한 듯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의 의지를 돌릴 수 있을지 무척이나 고민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사이에 자비스가 병석에서 일어났고,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지낸다는 소식이었다. 그 덕에 황제의 분노도 많이 수그러들었다고 지난 레티시아의 편지에 쓰여 있었다. 레티시아는 여러모로 노력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나는 진척이 없어 미안하고 답답했다. 오늘도 안부가 담긴 편지만 두고 올 생각에 한숨을 내쉬던 그때, 약속했던 시간이 지난 터라 못 만날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에드거가 막 서점을 나서고 있었다.
서둘러 인사하자 그가 이를 시원하게 드러내며 웃었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자비스와 똑 닮은 웃음이었다.
“휘턴 부인. 오늘도 못 뵙는 줄 알았습니다.”
에드거의 상큼한 목소리를 들으니 방금까지 먹구름이 끼어 있던 명치가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역시 힘들 땐 최애를 보며 힐링해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절감했다.
“막 편지를 두고 나가던 참인데 하마터면 길이 엇갈릴 뻔했습니다.”
배시시 웃는 에드거는 햇빛을 잔뜩 받아 뽀송해진 곰돌이처럼 귀여워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하지만 여기서 반갑게 인사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지금쯤 디아르트는 내가 저택에서 사라진 사실을 알아챘을 거고 그 귀신 같은 놈은 분명 나를 금방 찾아낼 것이다. 그에게 에드거와 함께 있는 걸 들키기 전에 어디 은밀한 장소로 피해야 했…….
여기까지 생각하던 난 낯빛이 하얘진 에드거의 얼굴을 보고 목덜미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설마하며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귓가로 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뭘 하나 했더니 남자를 만나러 왔군.”
한겨울 찬바람 같은 냉기 어린 목소리였다. 후다닥 물러서며 고개를 돌린 난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이고 눈썹을 치켜올린 디아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어, 어떻게 벌써 찾았어요?”
나 가출한 지 삼십 분도 안 됐는데? 아무리 디아르트라고 해도 이 넓은 수도에서 이렇게 빨리 찾는다고?
“처음부터 당신 뒤에 있었어.”
“네?”
내가 고개를 홱 돌리자 밀토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디아르트가 쫓아오고 있으면 그렇다고 말 좀 해 주지, 저 갈색 머리 짐승이!
“잠시 눈을 뗐을 뿐인데 그새 도망쳤군. 정말이지 그 점쟁이를 찾는다면 상이라도 내리고 싶은 심정이야.”
도망쳤다니 그냥 잠깐 외출 나온 것뿐인데, 라고 반박하기엔 디아르트의 기세가 무서웠다.
“뭐 하려고 몰래 나가는 건지 궁금해서 뒤를 밟았더니 설마 남자를 만날 줄은 몰랐어. 그것도 황자를.”
나를 내려다보던 디아르트가 눈동자를 흘깃 들었다. 그 눈빛에 담긴 살기에 우리 심약한 에드거의 어깨가 파득 튀었다. 에드거는 마치 사자를 앞에 둔 토끼마냥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가 내 뒤로 숨었다. 하지만 그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디아르트의 표정이 더욱 싸늘해졌다.
한걸음에 거리를 좁힌 디아르트가 불식간에 나를 안아 올렸다. 저택에서야 그렇다 치고 대낮에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거리에서 안길 줄은 몰랐던 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078
얼떨떨해서 디아르트를 올려다보던 난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놀란 다람쥐마냥 동그란 눈만 깜빡이는 에드거에게 필사적인 눈빛을 보냈다.
‘도망쳐!’
가뜩이나 황실과 감정이 좋지 않은 시점에서 이 질투쟁이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반목 중인 상황이라 그런지 아니면 나 때문인지 에드거를 내려다보는 디아르트의 표정이 무척이나 불손했다. 저번 제과점에선 그래도 선을 지켰다면 지금의 그는 거리낄 게 없다는 태도였다. 겉으로 봐선 누가 황족인지 모를 정도로. 겁에 질린 듯 눈치를 보며 주춤거리는 에드거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이 모습만 봐도 반란의 결과가 어떨지 빤하네.’
고개를 내저은 난 다시 한번 다짐했다. 반란만큼은 반드시 막는다!
겁먹은 모습조차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에드거의 목은 내가 꼭 지켜 주겠다고 결심한 난 일단 이 상황에서 먼저 구해 주기로 했다.
디아르트를 움직이게 할 방법이야 뻔했다.
“황족답지 않게 경솔……”
“앗……!”
에드거를 향해 서늘한 경고를 뱉어 내던 디아르트의 시선이 단박에 내게로 돌아왔다. 난 힘이 빠진 듯 늘어진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영락없이 아픈 사람이었다. 디아르트 역시 내 완벽한 연기력에 속아 넘어갔는지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그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니 미안해졌지만 일단 사람 목숨 먼저 살리고 봐야지.
“왜 그래. 어디 안 좋은가.”
“갑자기 너무 어지러워요. 누워야 할 것 같은데…….”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디아르트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난 디아르트의 어깨 너머로 점점 멀어지는 에드거를 바라보았다. 그는 디아르트의 살벌한 시야에서 벗어난 것에 안도하면서도 내 상태가 염려되는 표정이었다.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눈짓하자 에드거가 안심한 듯 한결 풀어진 얼굴을 주억거렸다.
그때 나를 안아 든 디아르트의 손에 힘이 와락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움찔해서 고개를 드니 단단해진 턱과 주름 잡힌 미간이 보였다. 꾀병이 들킨 건 아닌 모양인지 디아르트의 걸음이 빨랐다. 나는 그제야 내가 그의 품에 안긴 채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왜 하필 서점은 메인 거리에 있는 거니?’
너무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
훤한 대낮에 남편에게 안겨 다니는 귀족 부인이란 흔치 않은 구경거리긴 할 거다. 나는 내게 달라붙는 사람들의 경악 어린 표정에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려 얼굴을 가렸다. 뺨이 타오르듯 화끈거렸다.
진짜 민망해야 할 남자는 뻔뻔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는데 나만 안절부절못하는 게 억울하기까지 했다.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아요. 그만 내려 주세요.”
더는 참지 못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요구했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단호했고 안아 든 팔은 완고했다. 어지럽단 말 한마디 했다가 이 무슨 봉변이야. 난 결국 반쯤 포기한 채 디아르트의 단단한 품속으로 얼굴을 숨겼다.
* * *
마차 안에서까지 날 놓지 않던 디아르트는 기어코 저택 안까지 안아 들었다. 요즘 들어 왜 이렇게 날 안고 다니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구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이제 그만 내려 달라는 요청은 또 한 번 묵살되었다.
“마님, 어디 아프신 거예요?”
릴리가 놀란 얼굴로 달려와 물었다. 디아르트에게 안긴 모습이야 요즘 타운 하우스에서 그리 신기할 것도 없는 일상이었지만 그의 굳은 표정에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릴리의 표정은 도리어 더 심각해졌다. 내가 괜찮은 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주치의를 부르겠습니다.”
릴리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디아르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를 필두로 사용인들이 재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왜소한 체격의 남자가 복도 끝에서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그는 눈 밑이 새까맣게 죽어 퀭한 낯빛으로 디아르트에게 말을 걸었다.
“각하께서 명하셨던 책을 전부 해석했습니다. 말씀하신 부분을 확인해 보았는데…….”
졸린지 눈꺼풀이 반쯤 내려온 채 빠르게 말을 잇던 남자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흠칫 어깨를 떤 남자는 뒤늦게 날 발견하고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다음에 보고 올리겠습니다!”
남자는 그대로 뒷걸음질 치다가 쏜살같이 사라졌다. 타운 하우스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라 누군지 궁금해서 디아르트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지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던 중 마침 함께 내려오고 있던 페이셔 공작, 그리고 휘턴 대공작과 딱 마주쳤다.
‘이 시간에는 외출하고 없던 분들이 왜 하필 오늘따라 저택에 있는 거야!’
난 민망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에드거를 구하겠다고 시작한 꾀병에 어째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릴리가 그랬듯이 디아르트의 얼굴이 보통 때와 다르다는 걸 알아챈 두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와 날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는 게냐?”
“아까 잠시 어지러웠어요. 지금은 괜찮답니다!”
디아르트가 대답하기 전에 얼른 선수 친 난 그에게 눈빛을 보냈다. 괜한 말 하지 말아!
디아르트가 내게 불치병에 걸렸다 알려 주었을 때 페이셔 공작과 휘턴 대공작에겐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었다. 나중에 수습하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 눈빛을 읽은 디아르트는 두 사람에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니니?”
“의사는 부른 게냐?”
“네.”
짤막하게 대답한 디아르트가 그만 올라가겠다는 듯 움직이자 페이셔 공작과 휘턴 대공작도 따라붙었다. 그대로 방까지 쫓아올 기세에 나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괜히 주치의가 진찰하는 걸 지켜보다가 푸이탄의 ‘푸’자라도 나오면 골치 아파졌다.
“전 정말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주치의에게 내 상태에 대해 듣고 가겠다는 페이셔 공작과 휘턴 대공작을 겨우 말렸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뒤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죄책감에 양심이 콕콕 찔렸다.
결국 디아르트에게 안긴 채 방까지 돌아온 난 허겁지겁 달려온 주치의에게 진찰을 받았다. 그는 푸이탄병의 진행이 예상보다 빠른 것 같다며 안타까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고, 나는 대체 어떻게 휘턴 가의 주치의가 됐는지 모를 그의 의사로서의 자질에 안타까운 의문을 품었다.
한참 후 주의 사항을 고지한 주치의가 방을 나서자 내내 내 옆에 붙어 서 있던 디아르트가 등을 돌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물 잔을 집어 드는 그의 손이 멀리서도 보일 만큼 떨리고 있었다.
‘많이 놀랐나?’
그냥 잠깐 어지럽다고 한 것뿐인데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난 조금 당황스러웠다. 물 한 잔을 다 비운 디아르트가 탈진한 사람처럼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허리를 숙인 채 바들거리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 상황이 고통스럽다는 듯 디아르트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진정하려 애쓰던 그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매일 밤 널 잃는 꿈을 꿔. 그게 꿈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하루에도 몇 번이고 미쳐 버릴 것 같아.”
“디아르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이렇게 무력할 수 없군.”
괴로운 목소리로 말을 잇던 그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우는 거야?’
깜짝 놀란 난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디아르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그의 어깨가 애처롭게 떨리는 모습이 더욱 잘 보였다.
‘이, 이걸 어떡하지?’
난 디아르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였다. 설마 그가 울기까지 할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꾀병 부리지 말걸. 아니, 진즉에 푸이탄병이 아니라 저주에 걸린 거라고 사실대로 말했어야 했다.
“나 혼자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건 오만한 판단이었어. 널 살릴 수만 있다면 무슨 수든 다 동원했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아버님께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게 좋겠어.”
불식간에 벌떡 일어선 디아르트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당장에라도 페이셔 공작과 휘턴 대공작에게 모든 걸 밝히겠다는 듯 걸음을 옮기는 그를 얼른 붙잡았다.
“자, 잠깐만요!”
나는 돌아보지 않는 디아르트의 등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하필 이렇게 최악의 순간에 사실을 털어놓다니, 그가 내게 질려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 때문에 괴로워 우는 사람을 더는 속일 수 없었다.
잠시 주저하던 난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사실 난 푸이탄병이 아니라 저주에 걸린 거예요!”
내 외침에 디아르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적막을 견디다 못해 슬그머니 눈을 뜨던 그때였다.
“그게 무슨 소리지?”
방금까지 물기에 젖어 있던 그 목소리가 맞나 싶게 멀쩡한 음성이었다.


#079
‘화났구나.’
나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에서 나를 싸늘하게 대하는 디아르트의 모습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상상만 해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실제로 겪으면 얼마나 괴로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저만치 떨어져 있던 디아르트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어깨가 움찔거렸다. 슬며시 눈을 내리뜨니 드레스 자락 바로 앞에 선 디아르트의 구두가 보였다.
“자세히 설명해 봐.”
디아르트의 말에 난 우물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 가문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져 오는 저주가 있어요.”
난 그에게 휘턴 가문의 저주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
“저주를 풀 유일한 방법은 이성과의 접촉뿐인데…….”
“언제부터지?”
동쪽 서재에서 장미꽃을 만지게 된 경위와 저주에 관해 책을 찾아 알아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디아르트가 내 말을 싹둑 잘랐다. 차가운 목소리에 방 안 온도가 적어도 5도는 내려간 것 같았다.
“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어깨를 들썩이며 울던 남자의 눈이 지나치게 깨끗했다. 붉은 기 하나 없이 하얀 흰자위는 물론이거니와 보송하니 건조한 뺨. 도무지 운 사람 같지 않았다.
‘어?’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언제 저주에 걸렸냐고 물었어.”
얼떨떨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자 디아르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된 난 어벙하게 대답했다.
“한 달 반쯤인가…… 아니, 두 달쯤 된 것 같은…데…….”
저주에 걸린 기간을 늘려 말할수록 디아르트의 미간에 잡힌 주름도 늘어났다. 난 입을 다문 채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가면무도회 같은 델 갔었던 건가.”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난 고개를 갸웃했다. 얘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확실히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디아르트가 한 걸음 불쑥 내디뎠다. 황금빛 금안이 흉흉하게 번들거렸다. 그 기세에 나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뺐다.
“그동안 남자들을 만나고 다녔던 게 저주를 풀기 위해서라는 거군.”
“아, 네. 그렇……”
“남편인 나를 두고.”
“……네?”
“남편인 나를 두고 다른 새끼랑 그 저주라는 걸 풀 셈이었다는 거잖아.”
그야 네가 손끝 하나 못 대게 했으니깐.
“……저, 디아르트?”
난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무언가 생각하듯 입을 꾹 다문 디아르트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졌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튀자.’
슬쩍 문을 힐끔거리던 그때였다.
“괜찮아.”
전혀 안 괜찮은 목소리로 디아르트가 입을 열었다.
“다신 그럴 일 없을 테니까. 그렇지?”
그동안 내게 납작 엎드리던 모습만 보았던 터라 잊고 있었다. 그가 원래는 어떤 사람인지.
“하지만 애초에 그럴 일이 없도록 만드는 게 좋겠군. 남편으로서 저주에 걸린 아내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방긋 웃는 얼굴이 이렇게 무섭기 있니?
“아니, 괜찮……”
“걱정 마, 로에니. 내가 그 빌어먹을 저주를 확실히 풀어 줄 테니.”
천천히 다가오는 디아르트에게 밀린 난 뒷걸음질을 쳤다.
“디, 디아르트…….”
나를 직시하며 톡톡 단추를 푸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얘 눈이 돌았는데?!’
엄마야!
침대에 무릎이 걸린 난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기울어지는 시야로 낯익은 침대 천장이 들어오기 무섭게 디아르트가 가득 들어찼다. 그늘진 그의 얼굴은 스산하면서도 몹시도 관능적이었다.
은밀한 열망이 어린 디아르트의 눈빛에 발가락 끝이 오싹해진 난 침대에 손을 짚고 뒤로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디아르트가 도리어 발목을 그러쥐어 당겼다. 그 바람에 뒤집힌 드레스 자락 아래로 하얀 종아리가 드러났다.
다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디아르트가 침대에 팔을 댄 채 얼굴을 숙였다. 바투 가까워진 숨결에 차마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아래로 닿아 있는 그의 단단한 허벅지에 온 신경이 쏠렸다.
“듣기로, 저주에 걸린 채 이성과 접촉하면 기묘한 기운이 흘러 들어온다던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말해 준 적 없는 디테일한 내용을 읊는 디아르트 때문에 순간 아연해졌다. 어리벙벙한 얼굴로 올려다보니 디아르트가 입꼬리를 늘였다. 그대로 몸을 세운 디아르트는 이로 장갑을 물어 벗어던졌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디아르트가 엄지로 내 입술을 가볍게 문질렀다.
“어때.”
정말 그래? 라고 묻는 듯한 금안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어떤 느낌이지?”
“그게, 간지럽기도 하고 시원해서 기분이 좋은…….”
딱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더듬더듬 설명하던 난 디아르트의 굳어진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느긋하게 풀려 있던 눈빛이 돌변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른 남자가 만졌을 때도 그랬나?”
아니, 솔직히 얼음이 다 녹아서 밍밍해진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았지. 이렇게 생생하고 자극적인 건 디아르트 한 사람뿐이었다. 내가 고개를 단호히 젓자 디아르트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어딜 만져도 똑같은 건가.”
디아르트가 한 손으로 내 목을 가볍게 감아 손끝으로 살결을 쓸었다. 찌르르,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자극에 어깨가 움칫 떨렸다. 디아르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그 위험한 미소에 더럭 겁이 나 일단 그를 진정 시키기로 했다. 가만히 있다간 잡아먹힐 것 같았다.
목덜미 아래로 느릿하게 내려가는 커다란 손을 잡아채자 디아르트의 눈썹이 이지러졌다.
“저, 일단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는 게 좋을 것 같…….”
“남은 얘기 지금 하고 있잖아.”
삐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인 디아르트가 내 입술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어쩐지 숨이 가빠 왔다. 디아르트의 눈이 입술의 선을 따라 느른하게 움직였다. 괜히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입술을 숨기듯 감쳐물자 그의 손가락이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자연스레 벌어진 입술 사이를 가볍게 밀고 들어온 손가락이 혀를 살살 문질렀다. 가칠한 질감이 주는 찌릿한 자극에 배꼽 아래가 파르르 떨렸다. 삼켜도 삼켜도 자꾸만 침이 고였다. 내 표정을 샅샅이 읽어 내리듯 빤히 바라보던 디아르트가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에 달라붙는 뜨거운 숨결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
절로 나오는 신음에 입술을 사리물었다. 고개를 기울이며 집요하게 탐하던 디아르트의 입술이 더듬더듬 방향을 틀어 귓바퀴를 빨았다. 처음 입술이 닿았던 목덜미에서부터 시작된 열기가 그리로 번져 나갔다. 나는 물에 잠긴 듯 습한 마찰음과 강렬한 자극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격렬하게, 그러면서도 감질나게 온몸을 갉작이는 감각이 온전히 저주로 인한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 보는 디아르트의 상기된 표정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기어코 드레스 속을 침범한 디아르트가 허벅지를 쓸어 올렸다. 평소 체온이 높은 그의 손이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온몸에 열이 올랐다.
디아르트가 고개 들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가가 붉었다. 나는 노골적으로 갈구하는 눈빛을 마주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내 무언의 허락을 읽은 디아르트가 눈에 입을 맞춘 후 상체를 일으켰다.
디아르트는 반쯤 풀다 만 단추를 끄르면서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느릿하던 그의 손은 점점 조급해지다가 마지막에는 단추를 거의 뜯어냈다. 그가 조급한 손길로 셔츠를 단숨에 벗어젖혔다. 직각으로 떨어지는 널따란 어깨를 따라 근육들이 보기 좋게 자리 잡힌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갑자기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있던 현실 감각들이 돌아왔다. 아직 낮이라 창문 밖은 밝았고, 그 너머로 사용인들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디아르트와 이렇게 침대 위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배덕한 기분이 들었다.
“날 봐.”
그런 나를 귀신같이 눈치챈 디아르트가 내 턱을 그러쥐고 시선을 맞추었다. 딴생각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금안에는 짙은 욕망이 위험할 정도로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그 눈에 사로잡힌 채 점점 가까워지는 디아르트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의 뜨거운 입술이 나를 삼켰다.


#080
디아르트는 본인이 한 말을 지켰다.
‘해 본 적은 없지만 자신 있어.’
설마 그 말이 진짜일 줄은 몰랐지. 어떻게 처음부터 잘해? 하지만 이 세상엔 정말 타고나는 사람이 있나 보다. 아니면 남주라서 그런 거니?
나는 근육이 꽉 잡힌 등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누군 손가락 하나 들 힘도 없는데 가뿐해 보이는 움직임이 묘하게 얄미웠다.
방 안 깊숙이 밀려 들어오던 햇빛이 기울다 못해 완연히 물러난 창밖은 소란스러웠던 낮과 달리 고요했다. 저녁 시간은 한참 전에 지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쉴 틈 없이 몰아붙이던 남자가 놓아준 건 고작 몇 분도 채 되지 않았다.
‘체력도 좋지.’
나는 아직도 밭은 숨을 할딱였다.
내가 생각한 첫날밤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어색하고 서툰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쑥스러워서 서로의 얼굴도 제대로 못 보는 그런 풋풋함을 상상했었단 말이다. 무엇보다 내가 처음인 디아르트를 리드할 거라던 예상과 달리 정신없이 휩쓸린 건 내 쪽이었다.
‘물론 좋았지. 좋았는데!’
아무래도 속은 것 같단 말이야.
컵에 물을 따라 들고 다가온 디아르트가 나를 일으켜 앉혔다. 욱신거리는 허리에 이를 앙다물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만하라고 했…….”
목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물기 하나 없이 마른 듯한 목구멍이 아릿한 통증을 호소했다. 목을 잡으며 인상을 찌푸리자 디아르트가 입가에 물 잔을 대 주었다.
“목이 상했군.”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마지막에 제발 그만하라고 애원했을 때 멈췄으면 이 정도는 아니었겠지. 표독스러운 눈초리에도 디아르트의 만족스러운 입꼬리는 내려올 줄 몰랐다. 그게 얄미워 눈에 힘을 풀지 않은 채로 물을 받아 마셨다.
“눈 빠지겠어.”
내 추궁 어린 눈살에도 마냥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물 한 잔을 다 비우고서야 컵을 거둔 디아트르가 손가락으로 부어오른 입술을 쓸었다.
“미안. 자제가 안 됐어.”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정도가 있어야지! 라고 흘기는 눈꼬리를 입맞춤으로 무마한 디아르트가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바투 붙어 오는 커다란 몸피에 흠칫 몸을 물렸다. 달라붙는 살갗이 위협적이었다. 나는 이불을 잔뜩 끌어 가슴을 가리며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사람이야. 더는 못 해.”
디아르트가 목 뒤를 손으로 주무르며 말했다. 하나 피곤하다는 사람의 낯빛이 지나치게 상쾌해 보이는 게 의심스러워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응시하던 난 이내 포기했다. 길게 생각하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실컷 괴롭힘당한 온몸이 저렸고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던 눈가는 뜨끈했다.
혹시 몰라 경계하듯 등을 보이고 모로 눕자 베개 사이로 두꺼운 팔이 쑥 밀고 들어왔다. 남은 손이 편평한 배를 당겨 안았다. 내 몸 구석구석 닿지 않은 곳 없이 누비던 손임에도 피부에 예민하게 닿는 감촉에 반응하지 않기 위해 입술을 사리물어야 했다. 그의 손이 움직이는 궤도를 따라 뱃속이 찌르르 울렸다.
‘사람이라며!’
등 뒤에 달라붙은 단단한 가슴 아래로 익숙해지지 않는 부피가 느껴졌다. 이 짐승에게 그렇게 속고 또 속은 게 틀림없었다. 정수리를 지분거리는 입술을 느끼며 모른 척 눈을 감고 있던 난 불현듯 다시 눈을 떴다. 이렇게 되기 전에 디아르트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듣기로, 저주에 걸린 채 이성과 접촉하면 기묘한 기운이 흘러 들어온다던데.’
아까는 정신없이 밀어붙이는 디아르트에게 휩쓸려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 남자가 대체 그걸 어떻게 안 거야? 무언가 당했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난 얌전한 척 굴다 슬그머니 위로 향하는 손을 잡아챘다.
“어떻게 알았어요?”
“뭘?”
“다른 사람하고 접촉하면 기운을 얻는다는 거.”
“아.”
머리에 닿는 짧은 탄식과도 같은 단음에 난 확신했다.
‘이 자식 역시 뭔가 수상해!’
따지고들 생각으로 몸을 돌리려는 내 머리를 턱으로 누른 디아르트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나야말로 묻고 싶군. 언제까지 숨길 셈이었지?”
“그건, 말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처음 저주에 걸렸을 때, 연회에서 쓰러졌을 때, 하다못해 내가 마음을 드러냈을 때라도. 디아르트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쉬운 방법을 옆에 두고 애먼 짓을 한 건 언제든 도망칠 생각이었던 건가?”
디아르트를 감싸고 있는 기운이 한껏 싸늘해졌다. 그 기세를 따라 어째서인지 아래는 더 흉흉해졌다. 더욱 바짝 끌어안는 손길에 틈 없이 붙은 것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나는 좀 억울했다.
처음에 네가 얼마나 재수 없었는지 기억 안 나니? 저주에 걸렸다고 말하면 더 철벽 칠까 봐 말 못 했지. 네가 불치병에 걸렸다고 말했을 때 사실대로 털어놓으려는 날 막은 것도 고의적이었잖아!
-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가빠지는 숨을 삼키는 데에 급급해 받아칠 여력이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도망치듯 다리를 접자 곧바로 쫓아온 커다란 손이 허벅지를 도로 당겼다. 귓가로 낮은 신음 섞인 숨결이 닿았다.
“옆에 있는 나는 무시하고 찾은 게 황태자란 말이지.”
“그건…… 하아.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곳을 알려 준다고 해서…… 읏!”
허벅지를 쥔 디아르트의 손에 힘이 와락 들어갔다. 강렬한 자극에 혼이 빠져 솔직하게 털어놓던 난 홧홧한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몇 놈이나……, 하고 짓씹듯 잇새로 내뱉던 디아르트는 무언가를 참듯 숨을 골랐다.
“그럼 황자는 왜 만난 거지?”
설마 또 바람피우려던 건 아니겠지? 라는 디아르트의 스산한 추궁에 아득한 와중에 불쑥 억울함이 치솟았다. 바람이나 제대로 펴 보고 이런 말을 들으면 분하지나 않지, 실질적으로 뭘 해 본 건 아무것도 없는데!
응수하고 싶었으나 목이 잠겨 말이 나오질 않았다. 대신 입을 꾹 다물고 반응하지 않자 디아르트가 몸을 일으켜 내 위로 올라탔다. 어깨를 잡은 그로 인해 시야가 빙글 돌았다. 허리를 숙인 디아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왜 대답을 안 해?”
디아르트의 눈동자가 광포하게 번들거렸다. 분명 아니라는 걸 알 텐데 꼭 내 입으로 들어야겠다는 고집이 보였다. 앞으로 그럴 일 없을 테니 괜찮다던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태도였다. 더 가만히 있다간 큰일(?) 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레티시아 황녀와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어요.”
한마디 했을 뿐인데 무슨 상황인지 눈치챈 모양이다. 디아르트의 표정이 한결 수그러들었다. 나라의 존립이 거론되는 대화와는 어울리지 않게 예사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렇게 말이 나온 김에 그동안 그가 피하는 통에 할 수 없었던 주제를 꺼내 들었다.
“정말 반란이라도 일으키려는 거예요?”
“음.”
분명하게 대답하지 않았지만 디아르트의 표정은 긍정하고 있었다. 그가 반란을 생각한 건 비단 나와 자비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원작에서도 아델리아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지만 그땐 자비스 역시 흑화한 상태였고 두 사람의 대립이 극에 달했을 때였으니까.
사라진 나를 찾겠답시고 황실에 큰 무례를 저질렀으니 언제고 보복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디아르트 입장에서는 시한폭탄을 안고 가느니 선수 칠 생각을 했음직 했지만 레티시아에 따르면 황제의 노기는 많이 가라앉았다. 그녀의 말이라면 믿을 만하거니와, 황제 역시 냉정을 되찾는다면 구태여 질 싸움을 하려 들지 않겠지. 나만 디아르트를 설득하면 만사 오케이였다.
“납치당했을 때 자비스 황태자가 아니었으면 저 정말 크게 다쳤을 거예요. 덕분에 끝까지 버틸 수 있었어요. 그리고 만약 황실의 보복이 걱정되는 거라면 레티시아 님이 그럴 일 없다고 했…….”
“거슬려.”
이를 으드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살벌한 행태에 열심히 자비스와 황실을 두둔하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여기서 자비스 편을 드는 건 실수였다.
“침대 위에서 이름이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 같은데.”
미간을 찌푸린 디아르트가 상체를 일으키곤 흐트러진 은발을 쓸어 넘겼다. 물색없이 야릇한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드는군.”
불만스럽게 투덜거린 디아르트가 내 종아리를 잡아 올렸다. 그의 커다란 손에 쏙 잡힌 하얀 종아리가 외설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종아리에 입을 맞추었다.
“지금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잊은 모양인데.”
집중해. 종아리를 쓸어 올린 손이 혼내듯 무릎 뒤를 꾹 눌렀다. 찌릿하게 전해지는 자극에 허벅지가 바짝 섰다. 순식간에 숨이 달았다. 디아르트가 나를 응시하며 손으로 침대를 짚었다. 그러곤 종아리를 제 허리에 감았다.
분명 진이 빠진 줄 알았는데 다가올 희열에 기대감 어린 손이 방황했다. 디아르트가 그를 잡아채 제 목에 두르며 불온하게 웃었다. 긴 밤의 시작이었다.


#081
디아르트가 사흘 만에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마님은 좀 괜찮으십니까?”
“혹시 많이 안 좋으신 겁니까?”
밀토에게서 로에니가 거리에서 어지러움을 호소하고 쓰러졌다는 말을 전해 들은 기사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욱이 주치의가 다녀간 후로 방에서 두문불출하며 병문안조차 받질 않으니 혹시 큰 사달이라도 난 게 아닌지 발만 동동 굴렀다. 오죽하면 그 냉담한 디아르트마저 곁에 붙어 떨어지지 않나 싶어 요즘 연무장은 내내 초상집 분위기였다.
“트리톱스의 심장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고 들었습니다. 당장 토벌대부터 꾸리시죠!”
“누구 하나 봤다는 사람도 없는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 좀 그만하라니까. 타르보를 잡아야 한다고! 각하, 원기 회복에는 타르보 고기만 한 게 없댔습니다!”
기사들이 저마다 로에니의 건강을 기원하며 찾아온 비책들을 꺼내 놓았다. 결의와 비장함마저 보이는 기사들과 달리 느적느적 다가온 램버트는 하품까지 쩍 하는 느긋함을 보였다.
“한 보름쯤 더 쉬다 나오시지, 그러셨습니까. 그 김에 저도 숨 좀 돌리게.”
아니, 마님이 위독하신데 어떻게 저런 말을! 기사들이 경악한 얼굴로 인정머리라고는 없는 단장을 홱 노려보았다. 평소라면 저런 무례한 태도에 한마디 일침을 날렸을 디아르트마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는 보통 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마님의 상태가 위중한 와중에 저리 밝은 얼굴이라니. 요즘 좀 잘하는가 싶었더니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기사들은 진작부터 내심 의심하고 있었던 제 주인과 상관의 인성에 대해 깊이 실망하는 한편, 아무것도 모른 채 사경을 헤매고 있을 로에니에 대한 측은함에 가슴이 아렸다. 그들은 자신들이라도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자고 굳게 다짐했다.
디아르트와 램버트는 부하들의 비난 어린 눈초리를 번갈아 받으며 연무장 한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황실의 동향은 어떻지?”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비밀 군대는.”
“별다른 움직임은 안 보입니다. 뭐, 움직여봤자 별거 없을 게 뻔하잖습니까.”
램버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황제가 반란을 대비해 황실 소속의 비밀 군대를 소집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쪽에서는 디아르트가 그를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황제로서는 정말 전면전을 각오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군사력이란 디아르트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소꿉장난 같은 수준이었다. 오랜 세월 전장에서 단련된 휘턴 가와 평화에 취해 있던 황실의 세계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반란을 일으키면 불과 하루 이틀 사이에 대륙에서 벨릭 제국이 사라지게 되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진행하던 건 멈추지.”
“네?”
램버트가 무슨 소리냐는 듯 이맛살을 구겼다. 아무리 뻔한 결과라고 하더라도 만약을 대비해 만전을 기하는 것이 디아르트의 습벽이었고, 그를 시행하는 건 램버트의 일이었다. 그동안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놨는데 이제 와 모든 일을 멈추라니 램버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주인이 한번 기한 일을 번복하는 일은 없었던 터라 더욱 의아했다. 잠시 머리를 핑그르 돌린 램버트는 몇 가지 없는 선택지 중 가장 그럴듯한 사유를 골라냈다.
“마님이 관두래요?”
마치 ‘엄마가 하지 말래?’라는 어조였다. 능글맞게 휜 눈썹마저 놀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디아르트는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디아르트는 어제 로에니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반란은 절대 안 돼요.’
‘왜.’
딱히 황위에 욕심난 적은 없었지만 로에니를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그동안 로에니가 귀족 부인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본보기 삼아 되갚아 주긴 했지만 앞으로 그가 안 보이는 데서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실례로 아델리아 맥그리거, 그 여자도 감히 로에니를 해치려 들었다.
디아르트는 두 번 다신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자리,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리에 로에니를 앉혀서. 자비스를 없애는 건 부수적인 일이었다. 굳이 일을 크게 벌이지 않더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그의 목을 따는 것쯤 그에겐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깐.
대부분의 여인은 황후 자리를 선망한다고 들었기에 로에니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디아르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전 황후가 되고 싶은 마음이 요 새끼손톱만큼도 없어요.’
‘왜지? 황후가 되면 권력이든 뭐든 당신이 원하는 건 모두 손에 쥐게 될 텐데.’
‘높은 자리에는 많은 책임감이 따르는 법이거든요. 전 그냥 맘 편히 돈이나 펑펑 쓰면서 자유롭게 살래요.’
그리고 무엇보다. 로에니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당신은 황제가 되면 안 돼요.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도!’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른 반란을 포기한다는 약속을 하라며 매달리는 로에니는 퍽 귀여웠다. 한껏 놀리다가 허리를 낚아채 침대로 향하며 디아르트는 반란을 단념했다. 로에니가 황후가 되기 싫다는데 그가 황제가 될 이유는 없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램버트가 조금 질린다는 눈빛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무얼 떠올리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의 주인이자 오랜 전우인 디아르트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그동안 그가 익히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 무서웠다.
돌연 전장에서 집요하게 적을 몰아붙이던 디아르트가 생각난 램버트는 넌더리 내듯 팔뚝을 쓸었다.
‘불쌍한 마님.’
그냥 내가 전생에 나라를 여럿 팔아먹었나 보다, 생각하고 단념하십쇼. 램버트는 남의 일인 양 무책임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가만 응시하던 디아르트의 시선이 램버트의 손에 닿았다. 반장갑 착용을 금지한 이후로 기사들은 모두 손가락 끝까지 전부 덮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한번 시원함을 맛본 기사들 사이에서 덥다는 불평이 터져 나왔지만 그는 가볍게 묵살하는 중이었다.
디아르트는 문득 기사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던 로에니를 떠올리곤 미간을 좁혔다. 처음 저주에 대해 알았을 땐 미처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는데, 친밀함이 오고 가는 와중에 로에니가 저들과 접촉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특히 저 자식. 시무룩하니 기가 죽은 모습으로 괜히 발로 땅을 괴롭히고 있는 밀토에게 디아르트의 시선이 꽂혔다.
“램버트.”
“네, 말씀하십쇼.”
반란이라는, 꽤 기대하고 있던 이벤트를 놓치게 된 램버트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기사들이 가지고 있는 반장갑을 모두 몰수해.”
“네?”
금지하는 것도 모자라 뺏는다니. 램버트가 진절머리를 냈지만 디아르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저만 반장갑을 받지 못했다. 그때부터 본인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소리였다. 더욱 심술이 돋은 디아르트가 짧게 덧붙였다.
“그리고 저 자식은 타르본지 뭔지를 잡아 올 토벌대에 던져 넣어.”
램버트의 시선이 디아르트에게 찍힌지도 모른 채 로에니 걱정에 우울해하는 밀토에게로 향했다.
* * *
“세상에, 어머 어쩜, 아니…… 아무리 그래도 대단…….”
부드러운 스펀지로 내 어깨를 살살 문지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릴리를 보다 못한 난 한마디 했다.
“감탄하든지, 궁금해하든지, 걱정하든지 셋 중에 하나만 해 주겠니.”
“좋으셨어요?”
세 가지 선택지 중 ‘궁금해하기’로 결정했는지 릴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귀여운 눈망울로 내뱉은 순수하지 못한 질문에 잠시 말을 잃었던 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했다. 괜스레 뺨이 달아올랐다.
“이왕이면 걱정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마님 표정이 좋으신걸요. 며칠 전보다 훨씬 생기가 도시는 게 피부에서 윤기가 흘러요.”
그야 밤낮없이 괴롭히는 디아르트 때문에 몸은 피곤할지언정 저주는 확실하게 중화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와의 접촉으로 지금 나는 기운이 충만한 상태였다.
“며칠씩 방 밖으로 안 나오셔서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런 경사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뭐예요!”
릴리는 흥분한 듯 상기된 얼굴이었다. 경사라고 할 것까지야……. 나는 뜨끈한 귓불을 만지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릴리의 이런 호들갑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럼 이제 두 분 완전히 부부가 되신 거죠? 이혼하실 일은 없는 거죠?”
앞으로도 계속 모시게 되어 기쁘다며 꺅꺅거리는 릴리에게 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글쎄? 정말 이혼할지 안 할지는 두고 볼 일이지.”


#082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니.”
눈썹을 으쓱하며 가볍게 대꾸하자 혹시 잘못 들었나 싶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릴리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릴리는 흡사 순진한 총각을 꼬드겨 홀랑 벗겨 먹은 후 냅다 튄 파렴치한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순식간에 상종 못 할 인간이 된 난 비난 어린 릴리의 눈빛에 몹시 억울해졌다. 따지고 보면 순진한 사람을 꼬드긴 쪽은 내가 아니라 디아르트거든?!
“마님, 저는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신의라고 생각해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차마 다 내뱉을 수 없다는 듯 말을 고른 릴리가 내 손을 꼭 부여잡았다.
“혹시 주인님께서 다소 부족하시어 만족스러운 밤을 보내지 못하셨다고 하더라도.”
응?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대화에 난 얼떨떨해서 눈을 깜박였다.
“부부 사이에 잠자리가 전부는 아닌걸요. 주인님께도 남편으로서 좋은 점이 분명 있을 테니 그 정도 사소한……, 아니 사소하진 않지만 그 부분은 마님께서 조금 양보를 해 주시면 어떨까요? 사람이 모든 걸 잘할 수는 없잖아요.”
“릴리,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네 생각과 달리 오히려 너무 대단해서 문제란다. 오늘 아침에 여기에서도…….
릴리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려던 난 머릿속에 굳이 재생되고 만 살구 빛 향연에 가만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온몸에 남아 있는 생생한 감각들 때문에 체온이 올라 입술을 감쳐물었다. 하필 지금 그때가 떠오를 게 뭐람. 나를 내려다보던 관능에 이지러진 디아르트의 눈매를 떠올린 난 괜히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귀를 간질이던 물소리가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쪽으로 디아르트는 완벽하다고 말해 주고 싶었으나 차마 그런 노골적인 소리를 할 만큼 내 낯짝은 그리 두껍지 않았다.
그 탓에 릴리는 제 생각에 확신한 듯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보는 릴리의 눈빛에 연민이 어렸다.
“물론 쉽지 않으시겠지만 주인님께 다시 한번 기회를 주세요. 단번에 냉정하게 내치시는 건 잔인한 처사라고 생각해요. 전 마님을 믿어요!”
릴리가 절대 먹튀는 안 된다며 눈을 부릅떴다. 나는 그녀의 다부진 손아귀와 맹렬한 기세에 밀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제야 조금 안심한 릴리가 욕조에 빠트렸던 스펀지를 건져 내 어깨를 부드럽게 쓸었다.
내 발언이 릴리에게 오해를 심어 주고 말았지만 나도 다 억울해서 그런 거다, 억울해서. 그동안 그가 했던 과한 언행들이 모두 나를 놀려 먹었던 거라니, 암만 생각해도 너무 분했다. 불치병에 걸렸다고 오해하며 괴로워하는 그를 보며 내가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그게 다 연기였단 말이지.
내가 죽을까 봐 무섭다며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괴로워하던 디아르트를 떠올린 난 어깨를 떨었다. 내 완벽한 연기력에 속아 넘어간 줄 알았더니 진짜 홀라당 속아 넘어간 건 내 쪽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는 남자가 취향인 것 같아 노력해 봤는데 그건 아무리 해도 안 되더군.’
아쉽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는데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가끔씩 고개를 돌린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어깨를 들썩였던 건 모두 웃음을 참고 있던 거였다. 아주 연기 대상감이 따로 없었다.
‘이대로는 너무 억울해!’
내가 먼저 불치병에 걸렸다고 속인 것도 아닌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쉽게 밤을 보내지는……, 아니지.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그 상황에선 나도 모르게 그의 목을 껴안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더더욱……. 흠흠, 이 생각은 그만하고. 아무튼 이대로 가만히 있기엔 원통했고 내게는 카드 하나가 남아 있었다. 바로 이혼 철회 서류!
그동안 디아르트가 아무리 종용해도 절대 사인해 주지 않았던 보람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지금쯤 그는 모든 걸 해결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나와의 이혼은 없던 일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도 이제는 세상일이 모두 제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가 되었고, 내가 친히 그를 알려 줄 참이었다.
‘암만 서류를 들이밀어 봐라, 내가 사인해 주나!’
디아르트에게 한 방 먹일 생각에 신이 난 난 오랜만에 악녀다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 * *
밀린 업무를 처리하러 다녀오겠다던 디아르트는 불과 몇 시간도 안 되어 돌아왔다. 분명 며칠 동안 쌓인 일이 있을 텐데 너무 빠른 귀환이었다. 릴리에게 레티시아에게 보낼 편지를 건네고 있던 난 성큼성큼 방 안을 가로지르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벌써 일을 마쳤어요?”
“급한 것들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디아르트가 곧장 다가와 나를 안아 들었다. 그동안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안아 들었던 건 나를 놀리기 위함이었을 테고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는 여전했다. 난 나를 안은 채 소파에 앉은 디아르트에게서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물론 소용없었다. 디아르트가 가만히 있으라는 듯 허벅지를 아프지 않게 찰싹 내리쳤다.
“왜 이래요, 자꾸. 민망하게.”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한 디아르트의 표정이 어이없었다. 좋겠니? ……사실 좀 좋긴 했다. 아니, 뭐 좀 익숙해지니까 널따란 가슴에 안겨 다니는 게 편하기도 하고 좀 두근두근하기도 하고. 나도 내 취향이 이런 줄은 몰랐지.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냅다 긍정해 버리면 없어 보이니 모른 척했다.
“책에 나와 있던데.”
……책? 불안해진 내가 손으로 그의 입을 막으려는 순간 디아르트가 한발 빨랐다.
“[공작님 품에 안겨 앙앙]이라는 책의 여주인공은 밤낮으로 안겨 다니더군.”
젠장. 침대 밑에 숨겨 놓은 건 또 어떻게 찾아 읽은 거야! 이쯤 되면 그냥 네가 읽고 싶어서 읽는다고 해라, 내 핑계 대지 말고. 나는 밀려오는 수치심에 그의 입을 막으려고 들었던 손으로 내 얼굴을 숨겼다.
“유독 그 책만 헤져 있기에 제일 좋아하는 줄 알았지.”
“…….”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안 들을래요.”
“당신 취향이 정확히 뭐지? 너무 다양해서 어디에 맞춰야 할지를 모르겠어.”
안 듣겠다고 했는데. 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디아르트는 정말 고민이라는 듯 말했지만 또 놀리는 게 분명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표정을 볼 수는 없어도 그가 지금 웃고 있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일단 우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알겠고. 또 하나 공통점을 찾은 게 있다면.”
디아르트가 목소리를 낮추어 은밀하게 속삭였다.
“다들 침대 위에서 꽤 격렬하던데.”
그건 나도 자신 있지. 잘 알겠지만. 귓가를 간질이는 숨결에 어깨를 움츠리던 난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릴리의 모습에 하마터면 그대로 넘어갈 뻔했던 이성을 되찾았다. 릴리는 연민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오묘한 표정으로 디아르트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동정 어린 응원을 보냈다.
나는 그녀의 오해가 더 깊어지기 전에 부쩍 가까워진 디아르트의 어깨를 밀어냈다. 내가 이렇게 유혹에 약한 줄도 몰랐지만 디아르트에게 이런 능글맞은 구석이 있다는 건 정말 예상 밖이었다. 내가 아는 원작 속에서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으니까.
나는 손짓으로 릴리를 내보낸 후 디아르트에게 말했다.
“다시 일하러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서류가 꽤 밀렸을 것 같은데.”
“그보다 중요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밀린 업무 따위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디아르트를 대신해 지금쯤 서류의 홍수에 빠져 있을 램버트가 불쌍해졌다. 내가 다른 생각을 하는 걸 기민하게 눈치챈 디아르트가 턱을 잡아 제게로 고정시켰다.
몸을 바로 세운 디아르트는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는 그가 펼치는 매우 익숙한 서류에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왔음을 직감했다. 중요하게 처리할 일이 바로 저거였던 모양이지?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더군.”
어서 사인해. 라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풍기며 디아르트가 만년필 뚜껑까지 손수 따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나는 만년필을 든 채 이혼 철회 서류를 가만 응시했다. 이미 수십 번도 더 본 서류를 꼼꼼히 읽어 내리자 디아르트가 미간을 좁혔다. 내 낌새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싱긋 웃으며 서류 종이를 들어 보였다.


#083
하라는 사인은 안 하고 종이만 들고 있자 디아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또 무슨 장난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사인 안 하고 뭐 하는 거지?”
디아르트의 채근에 나는 만년필을 아주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 모습을 기다렸던 난 느긋하게 대꾸했다.
“이건 좀 더 천천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어째서?”
디아르트는 여기까지 와서 이혼을 철회하는데 머뭇거리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가 처음에 이혼을 말씀드렸을 때 얼마나 많은 밤을 고민한 줄 아세요?”
실은 뒤도 안 돌아보고 호로록 결정했었지만, 여기선 그때 생각이 난다는 듯 아련한 표정을 지어 주어야 한다. 물론 능청스러운 태도를 슬쩍 곁들여서. 그래야 더 약 오르거든.
“서로에게 상처뿐이었던 세월이 아쉽고 이혼 후의 삶이 두려워 몇 번이나 망설였는지 몰라요. 그토록 오랜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었는데 쉽게 번복할 순 없잖아요.”
“쉽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나.”
“맞아요. 상황은 언제든 변하기 마련이죠. 지금은 이렇게 좋지만 사람 일이란 게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거고…….”
나는 마치 꼭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과장되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사이가 변할 일이 있다는 건가? 함께 밤까지 보내 놓고?”
한번 잤으니 평생 함께해야 한다는 듯한,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순진한 생각이 귀엽단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입술이 절로 맞다물어졌다. 디아르트의 목소리가 몹시도 낮게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한여름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방 안의 온도가 싸늘해졌다. 나는 그의 등 뒤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스산한 기운에 찔끔했다. 분명 내가 일부러 약 올리는 걸 눈치 못 챌 남자가 아닌데 왜 이렇게 살벌한 거야.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는 어깨를 잡아 딱 고정시킨 디아르트가 덫을 놓듯 시선을 부딪쳤다.
“잘 들어, 로에니 휘턴. 지금 도망칠 구석을 만들어 놓는 모양인데, 당신과 나 사이에 이혼은 절대 없어. 그딴 건 꿈도 꾸지 마.”
지금 이 관계가 바뀔 일은 앞으로 절대 없을 거라는 디아르트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단호했다.
‘이게 아닌데?’
분명 내가 놀리는 중이었는데 왜 이렇게 됐지. 예상보다 심각한 디아르트의 반응에 도리어 당황한 난 후다닥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의외로 순순히 놓아주는 손과 달리 그의 눈은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마치 기회만 생기면 가정을 버리고 도망칠 궁리를 하는 바람 난 배우자를 보는 것 같은 디아르트의 눈빛에 갑자기 억울함이 밀려왔다.
“언제는 이혼 서류를 내밀자마자 좋다고 홀랑 채갔던 게 누군데?”
내 일격에 디아르트가 멈칫했다.
“소원까지 써 가며 이혼 절차를 서둘러 달라고 했더니 다음 날 황제 폐하께 쪼르르 달려갔던 것도 당신이잖아요!”
사납던 디아르트의 기운이 한풀 꺾인 게 보이자 난 기세가 올랐다. 그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은근히 자존심 상했거든요? 그리고 사람이 손 한번 내주는 게 그렇게 힘든가? 내가 당신이랑 접촉 한번 해 보겠다고 안 해 본 게 없어요!”
나는 디아르트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만큼 뒤로 물러서며 쏘아붙였다. 생각과 다르게 흐르는 상황에 당황해 받아치다 보니 그동안 그에게 무시당했던 서러움이 북받쳐 오르면서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철벽도 그런 철벽이 없었으면서, 그래 놓고 다른 남자를 만났다고 화를 내? 나도 살려고 그랬다, 살려고! 아니, 내가 그렇다고 제대로 뭘 하기나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사람을 바람둥이 취급하고 말이야!”
원망을 우다다 쏟아 내며 뒷걸음질 치던 난 이내 벽에 등이 부딪쳤다.
“저주인 걸 알았으면 팔딱팔딱 풀어 주지는 못할망정 사람을 애태우기나 하고. 난 또 혹시 당신이 나한테 마음이 식었나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데…….”
더는 도망칠 곳이 없어지자 울컥했던 감정들까지 푸스스 꺼지기 시작했다. 마치 폭격을 당하듯 고스란히 원망들을 받아 냈던 디아르트는 내가 숨을 고르는 척 눈치를 살피는 틈에 불쑥 거리를 좁혀들었다. 뭐, 왜. 왜 그렇게 무섭게 보는데?
……슬쩍슬쩍 욕을 섞은 걸 눈치챘나? 재수 없었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했던 게 문제였던 것 같다. 세 번 정도만 할 걸, 하고 후회하는 그때 디아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미안해.”
응? 나는 혹시 환청을 들은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 이 상황에 귀를 후빌 뻔했다. 내가 어벙하게 눈만 깜박이자 디아르트는 다시 한번 그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내가 잘못했어.”
지금 이 오만한 남자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온 거지? 원작은 물론이거니와 몇 개월을 함께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단어였기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상처받았을 줄은 몰랐군. 나도 후회하고 있어. 그때 내 입을 찢어 버리고 싶을 만큼.”
아니 얘는 무슨 후회한다는 말도 이렇게 살벌하게 하는 걸까. 어안이 벙벙해서 가만히 있자 디아르트가 내 손을 잡았다.
“다시 한번 기회를 줘. 이번엔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그와 어울리지 않는 조심스럽고 정중한 손길에서 전해지는 강렬한 기운에 하마터면 홀랑 넘어갈 뻔했다. 이 남자, 이걸 노린 건 아니겠지? 합리적인 의심을 떨칠 수 없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쏘아보았다. 혹시 또 연기를 하는 건지 미심쩍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난 나를 가두다시피하고 있는 그의 품에서 후다닥 도망쳤다.
“겨우 그런 몇 마디 사과로 풀어질 응어리가 아니에요. 내 한은 깊고도 집요하거든! 아무튼 난 이 가슴에 맺힌 게 다 없어지기 전까진 절대 사인 못 하니까 그런 줄 아세요!”
더 같이 있다가 디아르트가 작정하고 접촉을 해 오면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없는 난 그대로 방 밖으로 줄행랑치며 외쳤다.
“그리고 한동안은 각방 써요!”
난 내 마지막 결정타에 디아르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뒤로 하고 문을 쾅 닫았다. 곧바로 문에 귀를 대고 방 안의 낌새를 살폈지만 쫓아오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안심한 난 등을 기대고 한숨 돌렸다.
장난처럼 시작한 일이 좀 커지긴 했지만 디아르트에게 한 방 멕인 게 만족스러웠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반격은 아니었어도 그간 은근슬쩍 속에 쌓여 있던 걸 다 쏟아 내니 속이 다 시원했다.
‘어디 내가 쉽게 사인해 주나 봐라.’
너도 한번 애 좀 타 보라구! 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룰루랄라 자리를 벗어났다.
* * *
며칠 동안 디아르트와 함께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터라 온 가족이 모인 저녁 식사 자리는 오랜만이었다. 나를 본 휘턴 대공작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디아르트 놈에게 안겨서 들어온 후 두문불출하기에 걱정 많이 했는데 아무래도 괜한 오지랖이었던 모양이군.”
오히려 얼굴이 그때보다 훨씬 보기 좋구나. 휘턴 대공작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흐뭇한 표정이었다. 그는 내가 시선을 돌릴 때마다 나를 살피고 있는 페이셔 공작에게 눈짓했다.
“자네는 괜한 고생을 했어.”
페이셔 공작은 휘턴 공작의 능글맞은 말에 반응하지 않은 채 와인을 마셨다. 대신 휘턴 대공작이 손을 들어 사용인들을 불렀다. 그의 신호를 받은 사용인들이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식탁 가운데에 놓인 접시 위에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요리가 담겨 있었다. 사용인들이 먹기 좋은 크기로 고기를 분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휘턴 대공작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헤타르라고 들어 보았느냐? 원기 회복에 좋아 기사들이 보양식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거란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 꼭 찾는 음식이지. 네 아비가 너 먹이겠다고 혼자 나가서 잡아 왔지 뭐냐.”
휘턴 대공작의 말에 난 페이셔 공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마치 남의 얘기를 듣고 있는 양 무표정했다. 하지만 난 이제 그의 무던한 얼굴에서 조금씩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웃으며 말하자 페이셔 공작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그 표정에 어쩐지 흐뭇해졌다. 얌전히 내 앞에 놓인 헤타르 고기를 썰었다. 생소한 식감이었으나 왜인지 그 어느 음식보다 맛있게 느껴졌다.
한참 식사가 진행되던 중 거의 혼자 대화를 이끌어 나가고 있던 휘턴 대공작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너희 둘 혹시 싸웠니?”
“아니요.”
곧바로 대답했지만 휘턴 대공작은 전혀 안 믿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녁 식사를 하러 다이닝 룸에 올 때부터 일자로 닫혀 있던 디아르트의 입술이 지금까지 한 번도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저놈이 저렇게 뚱해 있는 게야?”


#084
과연 아버지는 아버지구나. 원래 저렇게 무뚝뚝하지 않냐는 듯 관심 없는 얼굴로 한번 흘깃 보고 고개를 돌린 페이셔 공작과 달리 휘턴 대공작은 디아르트의 기분을 제대로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는 대답 없는 디아르트에게서 시선을 돌려 날 보았다. 무슨 일 있었냐고 묻는 눈빛에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모른 척 미소 지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내 말에도 나와 디아르트를 번갈아 바라보는 시선에 깃든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이내 그가 안 봐도 뻔하다는 듯 주억거렸다.
“어서 사과하지 않고 뭐 하는 게냐.”
디아르트를 바라보는 휘턴 대공작의 눈빛은 네가 뭔가 잘못한 게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확신에 찬 꾸중에 디아르트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다이닝 룸에 들어올 때부터 줄곧 내게 무시당하고 있던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잘못했어.”
“그래, 네가 잘못했으면 당연히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음?”
설교하려던 휘턴 대공작의 말문이 딱 막혔다. 사과는커녕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디아르트의 입에서 너무나 쉽게 미안하다는 말이 나와 놀란 듯했다. 휘턴 대공작의 입이 벌어졌고 관심 없어 보이던 페이셔 공작마저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디아르트의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서 사과를 받아 달라는 듯한 무언의 요구가 느껴졌지만 난 모른 척 고기를 입에 넣었다. 디아르트의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허, 오래 살다 보니 저놈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다 보는군.”
휘턴 대공작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지 고개를 내젓다가 이내 웃었다. 지금 이 상황이 유쾌한 듯한 웃음소리에도 디아르트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웃던 휘턴 대공작이 눈물이 찔끔 고인 눈 끝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말했다.
“저 저 잘난 맛에 사는 놈이 먼저 굽히고 들어갔으면 정말 미안해하는 것 같은데 그만 사과를 받아 주는 게 어떻겠니.”
“억지로 그럴 필요 없다.”
사이를 중재하려는 휘턴 대공작의 말이 싹둑 잘렸다. 지금껏 한발 물러서서 가만히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페이셔 공작이 불쑥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네 마음이 풀릴 때까지 사과를 받아 주지 말렴.”
“이보게, 아이들을 화해시키지는 못할망정.”
휘턴 대공작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페이셔 공작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일일세. 이렇게 우리가 나서서 화해를 운운할 일이 아니야.”
“하나 모르면 모를까, 눈앞에서 보고도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
“저 둘은 아이가 아니야. 본인 일은 본인이 알아서 할 수 있는 성인이지. 그리고 마음이 동하지 않는데 옆에서 부추겨 억지로 받아 준 사과가 무슨 소용인가. 용서를 강요하지 말게.”
“강요라니. 자네 말이 조금 지나친 것 같군.”
아니, 난데없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난 갑자기 눈앞에서 펼쳐진 휘턴 대공작과 페이셔 공작의 설전에 눈을 깜빡였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는 말을 실시간으로 보게 된 난 점점 격해지는 두 사람을 어떻게 말려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몇 마디 만류의 말을 건네 봤지만 소용없었다.
안절부절못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도움을 청하려고 옆을 돌아보니 디아르트는 이 소동에도 홀로 의연히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마치 혼자만 다른 세계에 있는 듯 태연하기만 했다. 얼른 두 사람을 말리라는 듯 눈짓하자 흘끔 시선을 돌렸던 디아르트가 눈썹을 끄떡였다.
‘그럼 화를 풀 건가?’
-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이 황당한 난 눈과 손을 이용해 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요? 우리 때문에 싸우시잖아요!’
‘그게 뭐.’
‘이러다 두 분이 크게 의 상하시면 어떡해요. 얼른 말려 봐요.’
‘당신 때문에 상한 내 마음도 생각해 줬으면 좋겠군.’
이 남자가 진짜. 이 와중에 무슨 한가한 소릴 하는 거야. 답답함에 한마디 내뱉으려는 찰나 휘턴 대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넨 예전부터 그랬어. 아카데미 시절에도 그렇게 곧이곧대로,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원칙주의자였지.”
“그러는 자네야말로 근거 없는 낭만주의자가 아니었나. 자네가 일을 벌이면 수습하는 건 늘 내 몫이었던 걸로 기억하네만.”
페이셔 공작이 마주 일어서며 맞받아쳤다. 디아르트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눈싸움을 하고 있던 난 이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두 분 다 그만 고정하세요.”
“아무래도 오늘은 자네와 더 얼굴을 마주해서 좋을 게 없겠어!”
“동감이군.”
휘턴 대공작과 페이셔 공작이 동시에 등을 돌렸다. 다이닝 룸에서 누가 먼저 나갈 것인지 싸움이라도 하듯 바람 소리를 내며 사라지는 두 사람을 벙하니 바라보던 난 고개를 홱 돌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평하게 물을 마시는 디아르트를 쏘아보자 그가 눈썹을 까딱였다.
* * *
다이닝 룸 앞에서 아카데미 재학 시절 누구의 승마 점수가 더 높았는지로 2차전을 벌이던 휘턴 대공작과 페이셔 공작이 결판을 내겠다며 연무장으로 향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난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상하게 꼬이는 것 같은데.”
이마를 짚다가 무심코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 방에 들어온 건지 팔짱을 낀 채로 침대 기둥에 휘우듬하게 어깨를 기댄 디아르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얼른 그를 막아서듯 베개를 잡아 올렸다.
“한동안 각방 쓰자고 했잖아요.”
“진심인가?”
“네. 완전 진심인데요. 백 프로.”
단호한 목소리에 디아르트의 표정이 못마땅하게 구겨졌다. 나는 나를 빤히 응시하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 금안과 계속 마주하면 홀릴 게 분명하니 안 보는 게 상책이었다.
무언가 생각하듯 시선을 모로 돌렸던 디아르트가 기둥에 대고 있던 어깨를 떼더니 그대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기다란 다리가 침대 위로 올라오자 위기의식을 느낀 난 엉덩이를 뒤로 물리며 외쳤다.
“왜 올라와요?”
“저주에 대해 당신이 모르는 게 하나 있어서 알려 주려고.”
은밀하게 낮아진 목소리에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었지만 흘려 넘길 수 없는 말을 들은 난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제가 모르는 거요?”
이 망할 놈의 저주에 또 뭐가 있는데? 불안해진 난 디아르트의 무릎이 침대 위를 완전히 점령하는 것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나보다 한참은 큰 그의 체격 아래에 갇힌 꼴이 되어 있었다. 디아르트는 아까까지의 불퉁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묘하게 만족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뭐 하는 거예요?”
미간을 찌푸리자 디아트르가 빙긋 입꼬리를 늘였다.
“내가 모르는 게 있다는 거 거짓말이죠?”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보자 디아르트가 웃으며 내 머리카락 몇 올을 가볍게 쥐고 코에 대었다. 그 모습이 몹시도 야릇한 터라 나는 자꾸만 무너지려는 결심과 싸워야 했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은 거(?) 하면 좋잖아.’
‘아니지, 그렇게 큰소리를 쳐 놨는데 이렇게 쉽게 무너질 거야? 없어 보인다고.’
‘없어 보이면 좀 어때, 좋은데!’
잠깐 사이에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다투던 두 개의 선택지 중 이긴 쪽은 아주 미세한 차이로 ‘넘어가지 않는다’였다.
아쉬운 손길로 어깨를 밀어내자 떠름해졌던 디아르트의 표정이 금세 다시 천연덕스러워졌다.
“며칠 전에 사우 일족이 직접 알려 줬어.”
그러고 보니 디아르트가 사우 일족을 만났다고 했었지. 우슬라 일족의 말이라면 흘려들을 수 없었다. 어깨를 밀어내던 손에 힘이 빠지자 그를 감싸듯 잡아챈 커다란 손이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날카롭지만 따스한 그의 턱을 채 음미하기도 전, 이어지는 그의 말에 눈을 끔벅였다.
“접촉에도 내성이 생긴다던데.”
……내성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단어를 들은 난 어안이 벙벙했다. 몸을 낮춘 디아르트가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작 이렇게 손을 만지는 정도로는 중화할 수 없게 된다고 하더군.”
디아르트가 제 손안에 갇힌 내 손가락을 하나씩 얽으며 짓궂게 미소 지었다. 묘한 만족이 담긴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번들거렸다. 문득 처음 저주에 걸린 걸 알았을 때 읽었던 휘턴 가의 역사서에서 스킵해 버린 문구가 떠올랐다. 초대 공작인 비스트 휘턴이 저주에 걸린 이후로 황성에 휴직서까지 내고 하루 종일 우슬라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그런……. 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디아르트의 눈동자에는 이미 열기가 가득했다.
‘아니 대체 뭔 놈의 저주가 이렇게까지 망측한 거니?’
물론 나도 좋지만! 그걸 핑계로 유야무야 넘어가려는 디아르트의 불순한 손길이 괘씸했다. 나는 어느새 내 치마 속을 파고들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챘다. 어디서 수작을 부려?
“침대에서 내려가요.”
나는 결코 순순히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빙긋 웃었다. 내 단호한 표정에 디아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085
디아르트 휘턴은 최근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덕분에 무척이나 날카로워진 그를 매일 같이 상대하고 있는 기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또 한 명의 희생자가 나가떨어지자 보다 못한 램버트가 디아르트에게 다가와 한마디 했다.
“그냥 싹싹 빌어 보시라니까.”
재밌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능글맞은 발언에 디아르트의 얼굴이 살벌해지자 램버트가 어이쿠, 하며 양손을 들고 항복한다는 듯 물러섰다. 디아르트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꽂았다. 별로 힘을 준 것 같지 않은데 푹 박힌 검 손잡이에 손바닥을 눌러 기댄 디아르트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타운 하우스가 있었다.
벌써 며칠째 억지로 각방을 쓰고 있는 디아르트의 컨디션은 이 검보다 더 바닥을 찍고 있었다. 그날 저주의 내성에 대해 말해 준 그는 로에니가 더 버티지 않고 안겨 들 거라고 생각했다. 은근히 제 외모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작정하고 유혹했는데도 밀어내는 손길이 퍽 단호했다. 그대로 침대에서 쫓겨날 때의 기분이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겨우 그런 몇 마디 사과로 풀어질 응어리가 아니에요. 내 한은 깊고도 집요하거든! 아무튼 난 이 가슴에 맺힌 게 다 풀리기 전까진 절대 사인 못 하니까 그런 줄 아세요!’
처음엔 로에니의 가슴에 원망을 맺히게 한 과거 자신의 행동들을 돌아보며 자성하기도 했다. 그를 아는 이들은 믿지 않겠지만.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하는 로에니로 인해 디아르트는 점점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역시 신전을 먼저 없애 버려야겠어.”
일단 이혼 철회 서류의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도망칠 구석부터 없애고 그다음에…….
멀찍이서 디아르트를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은 점점 살벌해지는 그의 표정에 찔끔했다.
요즘 그들은 하루가 멀다고 디아르트에게 대련을 가장한 일방적인 분풀이를 당하고 있었지만 고된 육체와는 달리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정머리도 없고 인성도 별로인 자신들의 주인이 마님에게 외면당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시하더니 아주 쌤통이었다.
-고 생각했던 기사들은 요즘 제 주인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적들을 벌벌 떨게 만든 전쟁귀. 피를 뒤집어쓴 야차. 그 어떤 흉악한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아깝지 않은 자신들의 주인이. 한없이 강하게만 보이던 주인이 사실은 약한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기사들은 처음 느끼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안도하는 한편 그가 애처로웠다. 기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디아르트의 어딘가를 응시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필…….’
“겨우 그런 것들로 정말 효과가 있긴 한 걸까요?”
디아르트에게 가장 많이 불려가고 있는 밀토가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말을 꺼내자 기사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이 디아르트의 말 못 할 사정을 알게 된 사유는 이러했다. 최근 들어 타운 하우스에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물품이 있었는데 그게 남자의 정력에 좋다는 약초 피턴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요즘 주방에서 자주 사용되는 식재료들도 모두 피턴과 유사한 효능을 가졌는데 그걸 주문한 이가 바로 마님의 최측근 하녀인 릴리 그레셔라는 점에서 그간의 의혹과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두 분 내외의 사이가 데면데면해진 건 바로 그것 때문이었구나!
이를 눈치챈 건 비단 기사들 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들 디아르트의 자존심을 생각해 쉬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님의 실망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으나 어쨌든 같은 남자로서 디아르트에게 동지 의식을 느끼는 기사들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어떻게든 두 분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지키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엿보이는 기사들을 뒤로한 램버트가 디아르트에게 다가갔다.
“선물은 해 보셨습니까?”
유일하게 내막을 알고 있는 램버트의 물음에 디아르트가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여 그를 보았다. 놀리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꽤 오랜 결혼 생활을 행복하게 유지하고 있는 램버트였기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 디아르트는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물론 그는 램버트가 기사들의 오해를 바로잡지도, 그렇다고 그 사실을 디아르트 본인에게 알리지도 않고 있다는 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평소였으면 제게 향하는 미묘한 시선과 분위기를 기민하게 알아챘을 남자가 마님과의 다툼으로 정신이 팔려 모른다는 게 램버트는 무척이나 유쾌하고 재밌었다.
“했어.”
자비스 황태자가 로에니에게 향수를 선물했다는 사실을 들은 후 곧바로 마담 베로니카를 찾은 디아르트였다. 사교계에선 그녀의 의상 한번 입어 보는 게 소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기에 독점 계약을 맺어 선물했고 로에니 역시 즐거워했다는 말을 들은 디아르트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선물은 직접 건네야 하는 법인데 그렇게 하셨겠죠?”
오랜 세월 함께 해 왔기에 그의 성정이 어떤지 익히 잘 아는 램버트가 허를 찌르자 디아르트가 멈칫했다. 램버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에 한심하다는 듯한 기색이 어렸으나 듣고 싶은 게 있는 디아르트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선물의 묘미는 받은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기뻐하는 모습이라. 입안에서 곱씹던 디아르트는 행복하게 웃는 로에니의 표정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입가를 늘였다. 그리고 그걸 놓쳤다는 생각에 몹시도 아까워졌다. 분명 무척이나 예뻤을 터다.
어울리지 않게 풀어진 얼굴을 하는 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했다. 최근의 제 주인은 꽤 읽기 쉬운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램버트는 웃음을 삼켰다. 누가 저 남자를 그 잔혹한 전쟁귀라고 생각할까. 예전이었으면 상상도 못 했을 만큼 달라진 모습을 보니 확실히 이 냉랭한 남자가 사랑을 하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선물 싫어하는 사람 없습니다. 남에게 호의를 보이는 가장 간단한 방법도 바로 선물이죠. 대신 상대가 좋아할 만한 걸 고민하는 정성이 보여야 합니다. 그러니 먼저 선물로 분위기를 풀고 진심을 전해 보시죠.”
램버트는 ‘좋아할 만한 선물.’을 중얼거리는 디아르트를 보며 이제 놀릴 만큼 놀리기도 했고 기분이 안 좋은 티를 내는 그 때문에 원활한 훈련이 진행되지 않는 게 귀찮기도 한 터라 이제 그만 두 사람이 화해했으면 하고 바랐다.
* * *
오늘 정원의 티파티는 디아르트와 로에니 둘뿐이었다. 아직까지 화해하지 않은 휘턴 대공작과 페이셔 공작은 이번엔 누구의 사냥 실력이 좋은지 결판을 내겠다며 저택을 비운 상태였다. 디아르트는 정원에 핀 꽃을 바라보는 로에니를 가만 응시했다. 누군 눈을 못 떼겠는데 다른 곳에 시선이 팔린 모습이 퍽 야속했다. 이렇게 애를 태우는데도 얼굴을 보니 좋다는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어이없어 디아르트는 낮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차를 따르겠습니다. 피턴 차입니다.”
티포트를 들고 다가온 릴리의 말에 로에니가 난감한 기색으로 입술을 감쳐물었다. 근래 들어 그가 이 차를 마실 때면 미묘한 표정을 짓곤 하는 로에니였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눈을 모로 돌릴 뿐 대답을 피했다. 묘하게 미안한 얼굴로 흘끔거리는 게 귀여워 디아르트는 오늘도 얌전히 찻잔을 들었다.
“황실에서 연회 초대장이 왔어.”
그와 달리 홍차가 담긴 찻잔을 기울이던 로에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세간의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참석해야 할 것 같은데, 함께 가겠나?”
“당연하죠!”
말 끝나기 무섭게 로에니가 반색했다. 손뼉까지 마주치는 게 기뻐 보였다. 디아르트의 동물적인 감이 지금이 그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적기라고 말했다. 디아르트가 눈짓하자 저만치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든이 다가와 서류를 내밀었다. 그를 받아 든 디아르트가 로에니 앞으로 하나씩 밀었다. 로에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예요?”
“선물이야.”
“선물이요?”
아니, 무슨 선물로 서류를 줘? 로에니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예전에 사우 일족을 찾는 일을 도와 달라며 내밀었던 제목조차 이해 안 되는 책이 떠오르면서 혹시 일거리를 선물이랍시고 떠넘기는 건 아닌지 하는 의심 어린 표정이었다. 너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 하는 듯한 미심쩍은 눈초리에 디아르트가 빙긋 웃었다. 분명 마음에 들 거라는 듯 그의 표정이 자신만만했다.
“당신 꿈이 돈을 펑펑 쓰면서 사는 거라길래 준비해 봤지.”
디아르트가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서류를 하나씩 짚으며 말했다.
“남부 로만 해안가. 북부 카이만사르 호텔. 그리고 이건 서부에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 소유권이야.”


#086
“릴리.”
“네?”
“내가 무얼 포기했는지 아니?”
“남부 로만 해안가, 북부 카이만사르 호텔, 서부 다이아몬드 광산이요.”
“잘 알고 있구나.”
내가 미쳤지, 미쳤어! 그게 다 얼만데 그걸 마다해, 이 멍청아!
난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테이블 아래로 발을 굴렀다. 어제 디아르트가 내민 어마어마한 서류들을 밀어냈던 손이 아쉬움에 부들부들 떨렸다. 얼마나 아까웠으면 다이아몬드 광산을 둘러보고 로만 해안가에서 일광욕을 즐긴 다음 카이만사르 호텔에서 우아하게 룸서비스를 만끽하는 꿈까지 다 꿨다. 아침에 일어났을 땐 어찌나 헛헛하던지…….
‘눈 딱 감고 받을 걸 그랬어. 준다는 걸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었는데.’
하지만 그걸 받자마자 용서해 주면 너무 속물처럼 보일 것 같았다. 디아르트에게 그런 인상을 남길 순 없어 슬그머니 끌어안고 있던 서류들을 내려놓자 그의 표정이 시무룩해지는 게 보였다. 평소보다 기대감 어린 표정이 별스러웠는데 회심의 한방이었던 모양이다. 그냥 받아 줄 걸 그랬나? 하기야 벌써 내가 돈을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는 눈치긴 했다. 하나 아무리 그래도 그 생각에 확신을 심어 줄 순 없었다. 나도 이미지라는 게 있는데!나중에는 몰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받지 않는 게 맞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용서해 줬지.’
그날 이후로 디아르트가 몇 번이고 사과를 해 온 터라 화는 이미 진즉에 다 풀어진 지 오래였다. 사실 빙의 전 로에니가 디아르트에게 한 행동들을 생각해 보면 그의 냉랭한 태도는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 일이었다. 억지로 결혼한 데다 몰래 약까지 먹이려고 한 여자를 어떻게 다정하게 대하겠어. 심지어 내가 빙의하자마자 처음 맞닥뜨린 상황 역시 잠자는 그를 덮치는 거였으니 말 다했지. 내가 하지도 않은 일들로 배척당한 게 억울하지만 디아르트는빙의한 사실을 모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간 속을 태운 게 억울해서 좀 골려 주려던 일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매일 밤 지치지도 않고 찾아와 무언의 허락을 구하는 얼굴이 귀엽고, 거부하면 아무렇지 않은 척 뒤돌아 나가지만 어깨가 축 늘어진 게 또 사랑스러워서 모른 척하다 보니 벌써 며칠이나 지난 터다.
‘정말이지 콩깍지라는 게 무섭다, 무서워.’
고개를 저은 난 한숨을 내쉬며 턱을 괴었다. 비단 그뿐 아니라 사이좋던 휘턴 대공작과 페이셔 공작도 아직까지 서로를 보면 으르렁거리고 다투고 있지, 사용인들은 또 어떻고.
“마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주방장이 마님을 위해 특별히 만든 케이크래요.”
릴리가 테이블 위로 케이크를 내려놓았다. 난 떨떠름한 얼굴로 퍽 공들인 게 분명한 귀여운 장식이 꽂힌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최근 타운 하우스의 사용인들은 모두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다들 두 분을 걱정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타운 하우스에 나와 디아르트의 이혼에 대한 소문이 돈 모양이었다.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하필이면 이혼 사유로 거론되는 게 디아르트의 능력 부족(?)이었다. 그가 그런 민망한 오해를 받는 데 크게 일조한 릴리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알아봤는데 노력만 하면 충분히 증진이 가능하대요.”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눈빛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라니까, 릴리야.’
그간 그녀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몇 번이나 아니라고 했지만 릴리는 내가 디아르트를 감싼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덕분에 디아르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쓸데없는 보양식들을 굳이 먹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난 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안타까운 눈초리를 받게 된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이 얘기를 알게 된 디아르트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사용인들이고 기사들이고 다들 내 눈치를 살펴 대니 도리어 디아르트의 사과를 받아 주는 게 힘들었다. 지금 그를 받아 주면 이유가 정말 그것 때문인 것 같잖아!
역시 이런 일은 질질 끌면 끌수록 어려워지는 법이다. 이제 와서 디아르트의 사과 한마디로 풀어졌다고 하기엔 너무 시간을 끌었고, 처음엔 장난으로 시작했던 상황이 생각보다 커져 버린 터라 무슨 계기가 있어야 했다. 하여 그동안 여러 가지를 고심해 봤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골머리를 앓던 중이었다.
‘다이아몬드 광산이 그 계기가 되었으면 좋았잖아, 이 멍청아!’
다시금 눈앞에서 놓친 다이아몬드 광산이 떠오른 난 울적하게 테이블 위로 얼굴을 묻었다. 옆에서 릴리가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 그녀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생각보다 오래 지속된 냉전으로 제일 힘든 사람은 사실 디아르트가 아닌 나였다.
그동안 디아르트와의 접촉으로 충만하게 차올랐던 기운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지 팔다리에 이따금 마비가 오기 시작했다. 더더군다나 문제는 접촉에 내성이 생긴다던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아니면 이미 디아르트에게서 너무나도 큰 충족감을 느낀 탓인지 사용인들과 스치듯 접촉을 하더라도 예전만큼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마저도 디아르트가 눈에 불을 켠 듯 노려보는 통에 순탄치 않았다. 그는 그럴 때마다 성큼성큼 다가와손을 내밀었다. 어서 잡으라는 듯 유혹적으로 흔들리는 손에 침만 삼킨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 디아르트는 당장이라도 안고 싶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곤 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그를 안고 싶은 건 바로 나였다. 하지만 사과는 받아 주지 않으면서 저주를 풀기 위한 접촉은 한다는 게 속없어 보이는 터라 꾹 눌러 참아야 했다.
디아르트 금단 증상을 겪는 요즘엔 그의 얼굴만 봐도 못 참고 덤벼들 것 같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일쑤였다.
‘망할. 대체 누굴 위한 줄다리기야.’
내가 제일 아쉬운데! 디아르트를 애태우려다가 내가 먼저 타 죽게 생겼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 같은 상황에 발을 구르던 난 얼굴을 번쩍 들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이제 와 갑자기 찾아가서 용서한다는 말을 먼저 할 순 없는 노릇이니 어떻게든 계기를 만들어서 이 상황을 마무리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자. 난 전투적으로 케이크를 먹으며 머리를 굴려 보았다. 이제 와서 사실 장난이었다고 하면 너무 어이없을 것 같고…….
그냥 지금이라도 디아르트에게 다이아몬드 광산을 다시 달라고 할까? 아니야, 너무 속물 같아.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 잠깐. 난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디아르트가 원작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내가 통장을 탈탈 털어 투자했던 건물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야심 찼던 투자가 휴지조각이 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난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 * *
한순간에 벼락부자의 꿈도 좌절되고 디아르트와 화해할 계기도 생각해 내지 못한 채 울적한 나날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황실 연회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디아르트가 대수롭지 않게 말한 탓에 예사로운 연회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자비스 황태자의 탄신 연회였다. 어쩐지 함께 가겠느냐고 묻는 디아르트의 눈빛이 묘하게 마뜩잖아 보였더랬다. 원작에서 자비스의 탄신 연회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다. 아델리아가 모종의 이유로 물러간 후 원작이 완벽히 틀어진 상황에서 연회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 며칠간 잠까지 설쳤다.
아침부터 일어나 거의 반나절 만에 릴리와 애니의 손에서 놓여난 내가 한숨 돌리는 사이 아까부터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디아르트가 다가왔다.
“출발하지.”
디아르트가 에스코트하겠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공적인 자리에 참석할 때면 늘 끼던 장갑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의 손과 눈을 번갈아 보자 디아르트가 얼른 변명하듯 말했다.
“갑갑해서 벗었어.”
평생 장갑을 끼고 살던 남자가 이제 와 갑갑함을 느꼈을 리 없지만 모른 척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디아르트와 닿을 때마다 느낄 수 있던 익숙한 기운들이 강렬하게 전해졌다. 나는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그 기운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다 시원한 청량음료를 마신 것처럼 시원하고 기분 좋았다. 하지만 동시에 부족함을 느꼈다. 이미 이보다 강하고 기분 좋은 기운을 겪어 본 터라 너무나 애가 타고 감질났다. 하마터면 연회고 뭐고 그대로 디아르트의 품속으로 달려들 뻔했다.
‘정신 차리자!’
나는 멈추었던 발을 힘겹게 떼었다. 그러자 내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불안한 듯 나를 살피던 디아르트의 표정이 한결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제 손 위에 가볍게 놓인 내 손을 훑듯이 미끄러트리더니 손가락 하나하나 얽어 잡았다. 일반적인 에스코트와 달라 올려다보니 디아르트가 시선을 피했다. 빼려면 충분히 뺄 수 있겠지만 나도 모른 척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내 손가락을 얽은 디아르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차에 오를 때까지 꽉 붙들고 있던 그의 손이 아쉽게 물러갔다. 나는 혹시 내가 이성을 잃고 그의 손을 붙잡을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디아르트의 뜨거운 시선이 내게 꽂혀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마차 안에 미묘한 긴장이 흘렀다. 왠지 모르게 그에게 잡혀 있던 손바닥에 땀이 나 슬쩍 치맛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그 모습마저 빠짐없이 지켜보는 듯한 느낌에 그가 몹시도 의식되기 시작했다.


#087
“이곳에 머무르시면 됩니다.”
시녀가 안내해 준 곳은 황궁에 딸려 있는 별채였다. 말이 별채지 별궁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규모에 가구들이며 장식품 또한 최상급이었다. 외국에서 왕족들이 방문하면 머물게 할 법한 곳이었지만 내부를 대강 훑어본 디아르트의 표정은 못마땅했다.
“조잡하군.”
콧방귀 뀌는 디아르트의 모습에 난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지금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있겠니.’
포탈을 통해 수도 인근 숲에 도착했을 때부터 기분이 가라앉은 게 눈에 보이던 디아르트는 몽뜨르누아를 가로지르는 내내 올라간 눈썹이 내려오질 않았고, 황궁을 통과하는 순간 어깨에서 스산한 기운을 스멀스멀 풍기며 불편한 심기를 대놓고 드러냈다.
그 덕에 마차 안을 감돌던 아슬아슬한 공기는 푸스스 흩어졌으나 난 다른 쪽으로 긴장이 되었다.
‘이 연회, 무사히 끝날 수 있겠지?’
그런 와중에도 에스코트만큼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시종이 마차 문을 열자마자 날 듯이 내려선 디아르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저 손을 잡으면 느끼게 될 감각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무언가 한계에 다다른 듯했던 마차 안에서의 긴장감이 떠오른 난 그의 반대쪽에 서 있는 밀토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 앞으로 내밀어진 손에 당황한 얼굴로 디아르트의 눈치를 흘깃 살피던 밀토는 내 채근에 할 수 없이 나를 에스코트했다. 움찔거리는 밀토의 어깨 너머로 느껴지는 맹렬한 시선을 통해 디아르트의 언짢은 기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로에니.”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 디아르트가 나와 밀토 앞을 가로막고 섰다.얼른 잡으라는 듯 내 쪽으로 뻗은 손과 달리 눈은 밀토를 노려보고 있었다. 옆에서 밀토가 살려 달라며 눈치를 주었다. 할 수 없이 디아르트에게 다가간 난 그의 손 대신 옷에 감싸인 팔목을 잡았다. 디아르트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안 그래도 평소보다 날카로운 그의 기분을 건드리고 싶은 건 아니었다. 지금 누구보다 디아르트와의 접촉이 필요한 건 바로 나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오랜 시간 접촉을 하지 않은 탓인지 닿기만 해도 찌릿찌릿하니 민감해진 감각들이 불안했다. 저택도 아니고 황궁에서 이성을 잃고 덮치면 어떡해. 그땐 가뜩이나 바닥을 기고 있는 평판에 불을 지피는 소문 하나가 더해지는 거다.
‘뭐, 어차피 엉망진창인 평판이라 상관은 없나?’
아무튼 그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안 좋은 디아르트의 심기가 곤두박질친 듯했다.
“황제를 만나고 올게.”
못마땅할 때면 늘 그렇듯 디아르트의 눈썹이 치솟아 있었다. 보통 하룻밤이면 끝나는 황태자의 탄신 연회가 예외적으로 이틀 동안이나 진행되는 이유는 하나였다. 사실상 이 연회의 진짜 목적은 자비스의 생일을 축하하는 게 아니라 황실과 휘턴 가의 사이가 소문과 달리 공고하다는 것을 귀족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황제는 디아르트를 이틀이나 황성에 머물게 함으로써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비쳤고, 디아르트 역시 소수의 기사만 인솔하고 근위대가 지키는 황성으로 입궁함으로써 반역의 의사가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디아르트와 황제가 일찍이 입을 맞춰 두었다고 레티시아의 편지에 적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저 얼굴로 황제를 만나러 가면 아무도 안 믿을 것 같은데.’
지금의 그는 누구 하나 걸리면 곱게 두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뒤도는 디아르트의 등에 대고 외쳤다.
“전 맘 편하게 살고 싶어요, 알았죠?!”
그가 몸을 반쯤 돌려 나를 보았다.
“알아. 그렇게 살게 해 줄 거야.”
내 말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디아르트가 한결 풀어진 얼굴로 옅은 미소까지 지으며 대답했다. 냉탕, 온탕도 아니고 급격한 온도 변화에 적응 못 하고 멍하니 바라보자 그가 되돌아와 내 어깨를 붙잡고 당부했다.
“내가 올 때까지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 아무 데도 나가지 말고. 누구랑 만나지도 마.”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디아르트가 입가를 늘이곤 응접실을 나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잔뜩 굳어 있던 어깨마저 가뿐해 보이는 게 의아한 난 고개를 갸웃하며 소파에 앉았다.
릴리와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길 얼마나 되었을까. 황제와의 면담이 오래 걸리는지 디아르트는 해가 기울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연회의 첫날인 오늘은 후원에서 간단한 다과회와 작은 이벤트가 진행된다고 들었기에 가벼운 이브닝드레스로 갈아입은 난 별채를 나섰다.
아무 데도 나가지 말라던 디아르트의 말이 떠올라 기다릴까도 생각했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그 때문에 마냥 대기하고 있을 순 없었다. 귀족들에게 내가 연회에 참석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고 레티시아와도 이미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 두었던 터다. 자비스와 한 공간에 있으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겠지만 그럴수록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해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는 게 나았다. 레티시아도 함께 있을 테니 괜찮겠지.
디아르트에게 먼저 후원으로 갔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일러둔 난 릴리와 밀토를 데리고 별채를 나섰다.
* * *
“안쪽으로는 공작 부인만 출입하실 수 있습니다.”
후원 입구를 지키고 있는 궁인의 제제에 릴리와 밀토를 두고 안으로 들어가자 귀족들의 시선이 내게로 몰려들었다. 홀로 입장한 날 의아하게 바라보거나 저들끼리 속닥거리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가 먼저 후원에 갔다는 말을 전해 들은 디아르트가 곧장 이리로 올 터였다.
“세상에, 로에니 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레티시아가 무척이나 반가운 표정으로 내게 뛰듯이 다가와 손부터 부여잡았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보는 거예요.”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세요? 레티시아의 눈 끝에 눈물이 그렁했다.
“저도요. 저도 레티시아 님이 너무 보고 싶었답니다.”
그동안 너무나 많은 사건들 겪은 탓인지 한 일 년 만에 만난 듯 레티시아가 더할 수 없이 반가웠다. 마음 같아서는 꼭 껴안고 방방 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보는 눈이 많아 생각대로 할 수 없는 게 아쉬웠다. 레티시아 역시 마찬가지인 표정이었다. 그동안 편지를 주고받긴 했지만 실제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기에 조금 초조했었는데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납치 사건도 그렇고 그 후 황실과의 반목 때문에 여러모로 마음 상할 일이 많았을 텐데도 여전히 다정하고 따뜻했다. 몇 번이고 내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걱정을 쏟아 내는 레티시아로 인해 긴장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레티시아와 한참 반가움을 나누다 보니 나를 향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갔다. 그제야 난 자비스의 행방을 물어볼 수 있었다. 자신의 탄일을 축하하는 자리인데 그는 아까부터 보이지 않았다.
“곧 올 거예요. 주인공은 늦는 법이라고 늘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라.”
레티시아가 지겹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남매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자비스의 상태를 직접 봐야 완전히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여전한 듯한 그의 모습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휘턴 공작은 아버님과의 면담이 길어지는 모양이군요.”
레티시아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황제를 능멸한 데다 반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동안 황실과 척을 졌던 디아르트였으니 어떤 거래가 오고 가고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런 연회 정도로는 귀족들의 입방아를 완전히 막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때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종소리가 울리더니 시종이 크게 외쳤다.
“지금부터 보물찾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뜬금없이 무슨 보물찾기야? 설마 작은 이벤트라는 게 저걸 말하는 거였나?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레티시아가 말했다.
“오라버니다운 장난이죠. 아주 어렸을 때 종종 하곤 했던 이벤트랍니다. 그걸 다 커서 또 할 줄은 몰랐지만요.”
그렇게 말렸는데. 레티시아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꽤 좋은 선물들이 숨겨져 있다고 하니 함께 찾아봐요.”
레티시아는 질색하면서도 은근히 즐거워 보였다. 따분한 연회보다야 훨씬 낫긴 했다.
“좋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제일 좋은 선물을 받아 가야겠네요.”
난 의욕적으로 레티시아와 함께 보물찾기에 나섰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선물이 적혀있는 쪽지가 보이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난 눈에 불을 켜고 후원을 뒤지느라 어느새 레티시아가 옆에 없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정신없이 수풀을 헤치던 난 맞은편에서 들리는 소란에 고개를 들었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에게 뺨을 얻어맞은 남자의 턱이 홱 돌아갔다. 남녀의 싸움을 목도하게 된 난 보물찾기도 잊은 채 흥미진진하게 그들을 구경했다.
“어머 어머.”
“역시 사랑싸움이 제일 재밌군.”
사정없이 남자를 몰아붙이는 여자의 모습에 감탄을 삼키는 그때 바로 옆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주억거리며 수긍하던 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렇지 않나?”
자비스 황태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088
“왜 여기에 계세요?”
“내 생일 파티니 내가 있는 게 당연한 건데 왜 있냐고 물으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걸.”
“아니, 그게 아니라…….”
이 넓은 후원에서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고. 라고 묻는 내 눈빛에 자비스가 이런,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자네, 안 본 사이에 자기애가 상당해졌군.”
“네?”
“나도 보물찾기를 하고 있던 중이네.”
안타깝다는 듯한 자비스의 표정에 무안해져서 입술을 감쳐물자 그가 고른 이를 드러내며 시원하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 익숙한 얼굴에 마음이 놓였다. 그 순간 앞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툭툭 남자를 밀며 원망을 쏟아 내던 여자가 결국 남자의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언제 살벌하게 싸웠냐는 듯 부둥켜안은 모습이 눈꼴사나우면서도.
‘부러워라.’
저렇게 확 싸우고 확 화해해야 하는 건데. 나도 빨리 저렇게 안기고 싶다고. 디아르트의 단단하고 넓은 가슴이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했는지 떠올리며 입술을 삐죽이던 난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자비스 황태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살피듯 보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자네…… 혹시 휘턴 공작과 싸웠나?”
“네?”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당황해 표정 관리를 못 하자 자비스가 확신에 찼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며 휘는 눈매가 어째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속이 시원하군.”
“네?”
“이게 바로 쌤통이라고 하는 건가.”
“……재밌으세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 자비스가 말을 이었다.
“아주 통쾌해.”
“말씀하시는 걸 보니 그동안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직도 그 우락부락한 사내들에게 발길질 당한 등허리가 욱신욱신한다네.”
“입은 멀쩡해 보이시는걸요.”
“여긴 안 맞았잖나.”
자비스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건드리며 눈썹을 으쓱했다.
차마 아쉽다는 말은 못 하고 쏘아보자 자비스 황태자가 유쾌하게 웃었다. 원래도 잘 웃는 사람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웃음이 잦았다.
“감히 제국의 황태자를 찼으면 그 정도 고초는 감수해야지.”
무언가 평소와 다르다 했더니, 나를 보는 자비스의 눈빛이 납치 전과 묘하게 달라졌다. 호감을 품고 있는 기색은 여전했지만 그 속에 단념이 어려 있었다.
“그래도 빨리 화해했으면 좋겠군. 안 그러면 애써 접은 내 마음이 너무 아깝지 않나.”
“네?”
내내 장난스러웠던 자비스의 표정이 그답지 않게 진지해졌다.
“이렇게 진심이 된 여인은 처음이라 포기하고 싶지 않았네만…….”
자비스의 얼굴에 일순 씁쓸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쪽팔려서 더는 매달리지 못하겠더군.”
“네? 쪽……?”
눈부신 금발과 우아함 넘치는 외모로 내뱉은 상스러운 단어에 순간 멈칫하는 나를 보며 자비스가 말을 이었다.
“여인에게서 보호받는 사내라니 너무 꼴불견이지 않나.”
자비스가 어떤 상황을 떠올리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납치당했을 때 괴한이 겨눈 화살 앞에서 그를 막아섰을 때를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 전에 내게 쏟아지는 발길질과 주먹질을 모두 막아 주었던 건 그였다.
“납치된 내내 저를 감싸셨잖아요. 덕분에 전 무사할 수 있었지만 전하께서 많이 다치셨죠. 늦었지만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난 고개를 숙여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나도 나름 그대를 지키고 있었다고 자부했네. 마지막에는 도리어 짐이 되었지만 말이야. 한데 휘턴 공작을 보고 안도하는 그대의 표정으로 알았어. 내가 그대에게 의지가 되지 못했다는 걸 말이야.”
“전하.”
자비스는 다시금 그때를 회상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늘 밝은 그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내가 좀만 더 힘이 있었다면 진즉에 그대를 구해 냈을 텐데. 그렇게 무력할 수 없더군. 요즘 제일 후회하는 게 뭔 줄 아나? 어렸을 때 검술 연습을 게을리한 거라네. 그래서 늦었지만 다시 검을 잡고 있어. 보게, 여기 굳은살이 박인 걸.”
자책하는 자비스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던 난 손바닥을 촥 펼쳐 잘 보이지도 않는 굳은살을 어떻게든 찾아내고 있는 그의 모습과 말하는 중간중간 자꾸만 끼어드는 커플의 목소리에 산통이 깨졌다.
그러고 보니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그래도 소설의 서브 남주이자 제국의 황태자가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마음을 접는 절절한 장면인데 상황이 어수선해도 너무 어수선했다. 어두컴컴한 후원 구석의 수풀 뒤에 쪼그리고 앉은 채, 그것도 생판 처음 보는 커플의 싸움을 지켜보다가 들을 얘기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드는 가운데, 자비스의 표정만큼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내가 그대에게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네. 하여 이 마음을 접기로 했지.”
혹시나 디아르트와 충돌이 있진 않을지, 그래서 원작의 전개가 재현되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마음을 접는다니 다행이었다. 다만 주위 상황이 도무지 이 애틋한 분위기에 빠지지 못하게 만들었다. 멀찍이서 들리는 ‘찾았다’는 외침과 아직까지도 화해의 여운을 즐기며 밀어를 나누는 커플들의 목소리에 표정이 절로 떨떠름해졌다.
“마음을 전할 순간이 없을까 우려했는데 마침 휘턴 공작이 자리를 비워 다행이지 뭔가.”
디아르트가 있었으면 이런 자리조차 가지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자비스와의 관계는 언젠가 정리해야 할 일이었다.
“내 마음을 받아 주지 않은 야속한 사람이지만 난 자네와 친구가 되고 싶네.”
“친구요?”
방금 차고 차인 사이에 친구라니, 진심인가? 의심스럽게 응시하던 난 이어지는 그의 말에 수긍할 수 있었다. 워낙 독특한 사람이니까.
“그대만큼 날 막 대하는 사람이 없거든.”
자비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때, 남자로는 아니더라도 친구로는 꽤 괜찮은 사람이지 않나, 내가?”
뭐, 가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진저리가 쳐지긴 해도 자비스와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디아르트가 알면 싫어하겠지만 꽤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았다. 더욱이 황태자인데 친하게 지내면 좋지 뭐.
“카나리아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생각해 볼게요.”
“그건 좀 힘든데.”
“그럼 안 되겠는데요.”
“이런,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비단 저뿐만이 아니라 느끼한 말투는 여자한테 인기 없어요.”
“알겠네. 노력은 해 보지.”
전혀 노력할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잡자 자비스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친구가 된 기념으로 선물을 하나 주지.”
“선물이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라는 말에 기대감 어린 눈으로 기다리니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조그맣게 접힌 종이쪽지는 보물찾기의 상품임이 분명했다.
“내 힘들게 찾은 건데 그대라면 줄 수 있어.”
자. 하고 내민 쪽지를 얼른 받아 든 난 조심스레 종이를 펼쳤다. 레티시아가 꽤 좋은 선물들이 준비되어 있다고 한 터라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종이를 하나하나 펼쳐 보니 안에 적힌 건,
[자비스 황태자 1일 이용권]
“아이씨.”
나도 모르게 끝에 하트까지 그려져 있는 종이를 패대기쳤다. 기대했던 만큼 실망이 몰려와 자비스를 흘겨보았다. 이딴 걸 보물이라고 숨겨 놓지는 않았을 테니 분명 놀릴 작정으로 일부로 준비해 온 게 분명했다.
기대 어린 표정으로 날 보던 자비스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 반응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역시 자네는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
특유의 능글맞은 얼굴로 돌아온 자비스가 씩씩거리는 내게 쪽지를 다시 쥐여 주었다.
“후원에 숨겨져 있는 그 어떤 선물들보다 귀한 것이니 챙겨 넣게.”
받지 않으려던 난 순간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황태자를 하루 동안 이용할 수 있는 건 언젠가 꽤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았다. 쪽지를 들고 빙긋 웃자 싱글거리던 자비스가 움찔 떨었다.
“뭔가 불안한 예감이 드는군. 안 되겠어. 도로 주게.”
“한번 줬으면 땡이지, 줬다가 빼앗는 게 어디 있어요. 매너 없이.”
쪽지를 가지고 이어진 실랑이는 내 승리로 끝이 났다. 자비스가 도저히 못 이기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이런 행동 덕분에 자칫 심각하고 진지하게만 끝이 났을 이야기가 유쾌하게 마무리된 걸 알기에 나도 모른 척 그에게 장단을 맞췄다. 물론 쪽지는 곱게 접어 소매 속으로 숨겼다.
수풀 너머를 살피던 자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커플도 간 것 같으니 그만 일어나지.”
배려를 거절하는 것도 무례라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너무 오래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탓인지 종아리에 경련이 일어나 휘청거리자 자비스가 웃음을 참으며 나를 부축했다. 도무지 방금 차인 사람과 찬 사람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었지만 그것이 자비스와 내 관계에 퍽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비스와 닿은 피부를 통해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확실히 내성이 생겼거나 아니면 디아르트에게 너무 익숙해진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옛날엔 어느 정도 기운을 얻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망할. 이 정도면 디아르트 없으면 못 사는 몸이 된 거 아냐?’
뭔가 억울해서 툴툴대며 쥐가 내려가길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겨우 중심을 잡고 선 난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가 저만치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디아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089
디아르트의 시선이 내 양손을 잡고 있는 자비스의 손으로 향했다. 그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점점 차갑게 굳어 가는 것이 보였다. 가뜩이나 어두운 후원에서 그림자 진 모습이 몹시도 스산했다. 나도 모르게 잡고 있던 자비스의 손을 놓으니 그가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런.”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자비스가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남의 일인 양 재밌어하는 게 분명한 목소리에 그를 쏘아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성격에 진작 쫓아오고도 남았을 텐데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모습이 더 무서웠다.
그때 디아르트가 거침없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누구 하나 죽이고도 남을 것처럼 범상치 않은 기세였다. 그 ‘누구’가 꼭 나일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도망칠까?’
하지만 튀는 것과 동시에 뒷덜미가 잡힐 것 같았다. 예상대로 한 걸음 떼기도 전에 붙잡혔다. 뒷덜미가 아니라 온몸이. 불식간에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쳐 든 디아르트가 남은 손으로 등과 어깨를 잡아 한 번에 나를 안아 올렸다. 놀라서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내려다보니 디아르트가 시선을 흘깃 틀어 자비스를 노려보는 게 보였다. 그 살벌한 시선에도 자비스의 능글맞은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도리어 입꼬리를 더 말아 올리는 게 내가 봐도 얄밉기 그지없었다.
미간을 구기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디아르트가 성큼성큼 후원을 가로질렀다. 보물찾기에 열중하고 있던 귀족들이 아연한 얼굴로 입을 벌린 채 우리가 움직이는 대로 시선을 좇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하기야 귀부인이 남편에게 짐짝처럼 안겨서 운반되는 게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긴 할 것이다. 더더군다나 그 당사자가 디아르트와 나여서 더욱 시선을 끄는 듯 했다. 나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디아르트의 어깨에 묻었다.
‘젠장, 아까 분위기 좋았는데.’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이던 디아르트였기에 오늘이야말로 화해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대로 별채까지 직진한 디아르트는 놀란 사용인들을 모두 물렸다. 2층에 있는 방까지 올라가지 않고 가장 가까운 응접실로 들어간 그가 나를 테이블 위에 앉혔다. 자연스레 벌어진 다리 사이로 자리 잡은 디아르트 때문에 민망해져 몸을 뒤로 빼자 그가 더 바짝 다가섰다. 테이블의 다리가 높은 데다 양손으로 상판을 짚은 디아르트 덕에 시선의 키가 맞닿았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진득한 금안으로 나를 옭아맨 채 한참 동안 말없이 응시만 하는 탓에 도리어 더 긴장이 되었다. 어디 가지 말라고 했는데 먼저 후원으로 나간 데다 하필 자비스를 만나고 있던 터라 화가 난 듯했다. 게다가 어두침침한 후원에 있었으니 밀회를 즐긴다고 오해 사기도 딱 좋았다.
한눈 한번 팔지 않고 달라붙는 시선에 초조해져 땀이 밴 손바닥을 슬쩍 치맛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정적을 깨는 움직임에 디아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용서해 줘.”
분명 자비스와의 만남에 대한 추궁을 들을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는데 예상을 완전히 깨는 말에 벙찐 난 동그란 눈을 깜박였다.
“더는 한계야. 좀 봐줘.”
디아르트는 정말 막다른 곳에 몰린 사람처럼 절박한 눈동자로 미간을 좁혔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자 그가 제발, 이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 오만하고 냉랭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내게 매달리는 상황이 묘하게 흥분되었다. 찌푸린 미간이 왜 이렇게 사랑스러워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충동적으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아주 잠깐 붙었다가 떨어졌는데도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렬한 기운이 온몸으로 흘러 들어왔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그 기운을 채 느끼기도 전,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디아르트의 표정이 일순 돌변했다. 물러서는 목덜미를 한 손으로 잡아채듯 감싼 디아르트가 그대로 입술을 부딪쳐 왔다. 가벼웠던 나의 입맞춤과 달리 그의 입술은 마치 내 모든 걸 삼켜 버릴 듯이 거셌다. 맹렬한 기세에 밀려 자꾸만 뒤로 빠지는 등을 다른 손을 붙잡아 고정시킨 디아르트는 숨을 쉴 틈조차 주지 않은 채 나를 몰아붙였다.
마치 그동안을 모두 보상받겠다는 듯한 그의 기세가 무섭기보단 반가웠다. 한계에 다다랐던 건 디아르트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목덜미를 양손으로 감싸는 걸로 화답하자 디아르트의 등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질퍽하고 노골적인 침소리가 귀를 연신 괴롭혔다.
마침내 아랫입술까지 모조리 맛보듯 잘근잘근 씹어 대던 입술이 물러서고 나서야 난 모자란 숨을 몰아쉬었다. 턱에 쪽쪽 소리 내어 입을 맞추던 디아르트의 입술이 거세게 들썩이는 가슴 쪽으로 내려갔다. 이로 끈을 풀어내던 디아르트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오늘따라 릴리가 골라 준 드레스에는 많은 리본이 달려 있었다. 가뜩이나 인내심 없던 디아르트의 표정이 매듭을 풀어낼수록 점점 더 참을성을 잃어 갔다. 그의 성급한 손놀림과 반득이는 눈동자에서 당장이라도 드레스를 찢어발기고 싶은 게 느껴졌다.
사실 나도 그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안기고 싶어 안달이 났다. 인상을 와락 구긴 채 리본을 풀어내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무언의 내 눈빛을 읽은 디아르트가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방까지 가는 시간도 아쉽다는 듯 나를 테이블 위에 눕힌 디아트가 바짝 허리를 붙였다. 그가 늘어진 내 두 허벅지를 한 번에 잡아 끌어내린 후 제 허리에 감았다. 그 바람에 드레스가 말려 내려가 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디아르트에게 잡힌 곳만 붉게 부어오른 게 몹시도 외설적이었다.
입을 맞추고 있는 것도 아닌데 농도 짙은 공기에 자꾸만 숨이 막혔다. 들썩이는 가슴을 내려다보던 디아르트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갈증 어린 그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디아르트의 눈매가 일그러진다 했더니 다음 순간부터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 * *
목덜미에 닿는 따뜻한 숨결을 느끼며 숨을 고르던 난 문득 궁금해졌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후원에서 자비스와 단둘이 있었던 일에 대해 아직까지 한마디도 없는 게 의아했다. 물론 덕분에 그동안 고민했던 관계 회복이 순식간에 이루어지긴 했지만 익히 알고 있는 그의 성격상 무섭게 따지고 들며 질투를 해야 했다. 내 물음에 허벅지를 느릿하게 쓸고 있던 손이 멈칫했다. 디아르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싸우기 싫어서.”
싸우기 싫어서라니. 뭐야, 이 남자 어울리지 않게 왜 이렇게 귀엽게 구니. 그러면서도 못마땅한 기색을 채 숨기지 못한 그의 불통한 목소리에 나는 입술을 맞다물어 웃음을 참았다. 잠시 말이 없던 디아르트가 물었다.
“황태자와는 왜 같이 있었어?”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아닌 척하지만 계속 신경 쓰고 있던 티가 났다.
“보물찾기하다가 우연히 만났어요.”
“그렇군.”
디아르트는 무언가 더 따져 묻고 싶은 것 같았지만 그랬다간 지금의 이 평화로운 분위기가 깨질까 꾹 참는 듯했다. 그래도 이렇게 참을 줄도 아는 걸 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원작을 읽으며 미친놈이라고 욕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면서 이 남자가 많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장난기가 솟았다.
“거짓말이면 어떡하려고 그렇게 쉽게 믿어요? 실은 황태자랑 바람이라도 피웠던 거면 어쩌려고.”
잠시 말이 없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당신은 괜찮아.”
……자비스는? 많은 뜻이 내포된 듯한 그의 대답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나는 괜찮을 거라는 대답과 달리 허벅지를 터트릴 듯이 쥐는 손은 믿음이 가지 않았다.
나는 등 뒤로 느껴지는 스산한 기운에 얼른 농담을 바로 잡았다.
“농담인 거 알죠? 그런 일 절대 없었어요.”
“알아. 그래야 할 거고.”
디아르트가 내 정수리에 턱을 괴며 말했다. 애초에 이런 농담을 한 내 잘못이지. 나는 입방정을 떤 것을 반성하며 다짐했다. 자비스에게 고백을 받았었던 사실은 무덤까지 평생 가지고 가는 거다. 그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자비스 황태자와는 친구가 되기로 했어요.”
“친구?”
둘 사이에 친구라는 감정이 끼어들 필요가 있냐는 듯 심기가 비틀린 듯한 목소리에 난 얼른 말을 이었다.
“황족과 친해 두면 나중에 당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아.”
디아르트는 그런 생각을 한 내가 기특한 모양이었다. 자신을 위하는 게 마음에 드는지 머리 위로 입맞춤이 잘게 이어졌다. 무사히 넘어가 한숨을 쉬는데 디아르트가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물며 말했다.
“그래도 친하게 지내지는 마.”
집착이 드러나는 경고와도 같은 말에 난 몸을 꼼지락거리며 움직였다. 품에서 벗어나는 줄 알았는지 바투 끌어안던 디아르트는 제 쪽으로 돌아서는 걸 알아채고 손에서 힘을 풀었다. 좁은 소파에서 힘겹게 몸을 돌린 난 나를 내려다보는 디아르트와 얼굴을 마주했다. 아직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의 눈가가 붉었다. 새삼 잘생겨 보이는 얼굴에 가슴 한 켠이 찌르르 떨려왔다.
“방금 든 생각인데요.”
디아르트의 뺨을 양손으로 감싼 난 빙긋 웃었다.
“내가 당신을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당신의 그 집착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걸 보니. 내 말에 멍해졌던 디아르트의 얼굴에 점점 미소가 번졌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무해하고도 환한 미소였다. 내 콧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의 입술이 눈가에 닿았다. 한참 말이 없던 디아르트가 낮게 속삭였다.
“나보다는 아닐 거야.”
벅찬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행복하게 웃었다.


#090
“다 들었어요.”
마치 무언가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레티시아의 의미심장한 말에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홍차를 뿜을 뻔했다. 난 애써 태연한 척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한테까지 모른 척하시는 건가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던 레티시아가 그녀답지 않게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를 꼭 닮은 표정에 불안이 밀려오던 난 이어지는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원에서 휘턴 공작에게 안겨 가셨다면서요. 지금 귀부인들 사이에서 무척 화제랍니다.”
아아, 난 또.
집도 아니고 황성에서 말 못 할 밤을 보낸 탓에 도둑이 제 발 저렸던 모양이다.
“무슨 일인지 말씀 안 해 주실 거예요?”
지난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없기에 어지러워서 쓰러졌다고 둘러대니 흥미진진하던 레티시아의 표정이 대번에 걱정스러워졌다.
“아직도 후유증이 있으신 거 아니에요? 세상에, 그러고 보니 얼굴 살도 쏙 빠지신 것 같아요.”
고운 얼굴이 이게 뭐예요. 레티시아의 탄식에 난 겸연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음험한 사람이라고 느끼긴 했지만 설마 그런 짓을 벌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답니다.”
주어가 없었지만 레티시아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리 없었다. 사람에 대해 함부로 속단하지 않은 그녀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아델리아가 쓴 가면이 그리 단단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어쩐지 황실 연회에서 아델리아에 대해 물을 때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피했던 레티시아였다.
“오죽하면 오라버니도 제게 어울리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그날 아델리아에게 반한 줄 알았던 자비스는 사실은 걱정되어서 지켜보는 거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에요. 아델리아 양은 곧 변방으로 이송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변방으로요?”
지하 감옥에 갇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재판을 받을 때 난동을 부렸다지 뭐예요. 해서 괘씸죄가 추가되었대요. 변방의 감옥은 지하 감옥보다 훨씬 열악하다고 하니 지내기 쉽지 않을 거예요.”
하기야 나는 그렇다 치고 제국의 황태자를 납치한 데다 죽이려고까지 한 것치고는 그래도 온화한 처벌이었다. 어쨌든 사형은 면했으니까. 원작의 여주인공답지 않게 퍽 씁쓸한 결말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레티시아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번득였다.
“그보다 그 소문이 완전히 거짓은 아닌 것 같은걸요.”
“소문이요?”
“한동안 사교계에서 굉장히 뜨거웠던 소문이었죠. 들어 보시겠어요?”
그동안 사교계에 나갈 일이 없었던 데다 아는 이도 없으니 귀에 들어오는 것도 없었다. 보통 나에 대한 소문이야 뻔했지만 웃음을 참는 듯한 레티시아의 표정을 보니 궁금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에 나와 둘뿐인데도 불구하고 주위를 살핀 레티시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글쎄…… 휘턴 공작이 완전히 미쳤대요.”
“……네?”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디아르트가 미쳤다는 소문이 났다고?
내가 얼른 자세하게 말하라는 듯 재촉의 눈빛을 보내자 레티시아가 뜸을 들일 만큼 한참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자기 부인에게 완전히 미쳐 버렸다지 뭐예요.”
유쾌하게 웃는 레티시아와 달리 난 눈만 끔벅였다. 장난치는 얼굴은 아니었다. 아니, 물론 디아르트가 나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어쩌다가 저런 소문까지 났는지 모르겠다. 얼빠진 나를 재밌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레티시아가 말했다.
“로에니 님이 납치당하셨을 때 휘턴 공작이 그 밤 중에 모든 진영을 샅샅이 뒤진 데다 황실까지 들이박았잖아요.”
그 들이박혔다는 황실의 일족인 사람의 표정이 너무나 해맑았다.
“그 전부터 휘턴 공작이 로에니 님을 대하는 게 달라졌다는 말이 나오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거죠. 그동안 황실에 충직한 모습을 보이던 휘턴 가였으니까요.”
“저 때문에 죄송해요.”
“어머, 아니에요, 로에니 님. 그런 말씀을 들으려고 꺼낸 말이 아니에요. 그게 로에니 님 탓도 아니고요.”
손사래를 치는 레티시아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물론 나 역시 그녀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지만 당시에는 마음고생을 꽤 했을 그녀였다.
“그저 고소해서 그렇답니다.”
“네? 고소하다뇨?”
“그동안 이렇게 사랑스러운 로에니 님을 외면하던 휘턴 공작이 얼마나 얄미웠다고요.”
아무래도 나보다 콩깍지가 심한 사람은 레티시아인 게 틀림없었다. 괜히 부끄러워 입술을 감쳐무는 나와 달리 그녀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물론 휘턴 공작이 나중에 로에니님 께 잘한 건 알지만 그래도 앙금이 남았는데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이 시원하지 뭐예요.”
레티시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귀족들에게도 쐐기를 박은 거 아니겠어요? 로에니 님이 휘턴 공작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사냥터에서 사색이 되었던 귀부인들의 표정이 떠오르네요. 후후후.”
내가 그동안 레티시아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의 표정이 무척이나 사악해 보였다. 하지만 고소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인 터라 우리는 마치 나쁜 짓을 성공한 악당들처럼 음침하게 웃었다.
“후원에서 로에니 님을 안고 있는 휘턴 공작의 표정이 심각했었나 봐요. 다들 두 분이 크게 싸웠다고 여기고 있어요. 저야 두 분을 잘 아니 정반대로 생각했지만요. 로에니 님이 쓰러져서 휘턴 공작의 표정이 그렇게 심각했던 거라니, 무척이나 로맨틱한걸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범죄 스릴러나 다름없었는데……. 낭만적이라며 소녀처럼 꺅꺅거리는 레티시아를 보니 조금 양심이 찔렸다.
“아무튼 덕분에 이따 저녁에 있을 무도회가 무척이나 기대된답니다.”
빙긋 웃은 레티시아가 찻잔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바로 원작이 시작되는 그 무도회였는데……. 원작 여주가 사라진 지금 무도회가 어떻게 흘러갈지 가늠할 수 없었다.
* * *
레티시아의 기대는 현실이 되었다. 나와 디아르트가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홀에 있던 모든 귀족의 시선이 몰렸다. 다들 어제 후원에서의 일을 알고 있는지 다정한 우리의 모습에 의문과 경악이 담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시선과 관심을 만끽하며 홀로 들어서던 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곧바로 디아르트의 눈이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별채에서부터 나를 에스코트하고 있는 디아르트의 손길은 그 어느 때보다 다정했다. 더욱이 그의 얼굴에는 내내 그린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이 부분에서 다들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 같았다. 하기야 늘 무표정하거나 비웃음만 짓던 남자였으니. 아까 밀토와 램버트를 비롯한 기사들은 무섭다며 뒷걸음질 치기까지 했다.
난 내게 완전히 미쳐 버렸다는 소문에 소문을 더하려는 듯한 그의 모습에 슬쩍 눈짓했다. 내 의도를 알아들은 디아르트가 고개를 기울여 귀를 가까이 했다. 난 그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만 웃어요.”
“왜.”
“소문 못 들었어요?”
“소문?”
무슨 소문을 말하냐는 듯 고개를 미세하게 기울이던 디아르트가 곧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언제 미소를 짓고 있었는지 모르게 살벌한 표정이었다.
“또 당신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도 도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나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듯한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저 말고 당신이요.”
“나?”
“당신이 나한테 완전히 미쳤다네요.”
그러니 그만 체통을 지키라는 듯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툭 치니 디아르트가 픽 웃었다.
“틀린 말도 아닌데 뭐.”
네? 얼떨떨한 나와 달리 디아르트는 당당한 표정이었다. 도리어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는 게 체면을 지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남자가 왜 이래. 괜히 낯부끄러워 뺨이 달아오르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번지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홀을 가로질렀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적막이 흐르는 공기를 갈랐다.
“이게 누구야.”
장난기 다분한 목소리로 알은체하며 다가오는 사람은 자비스였다. 디아르트의 손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내 생일에 나보다 더 화제가 되고 있는 부부가 아닌가.”
디아르트가 자비스의 능글맞은 웃음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우리를 지켜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음 직했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울려 들릴 만큼 긴장감 어린 적막이 홀을 맴돌았다. 그때 디아르트가 느릿하게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광영이 함께 하시길, 제국의 샛별 자비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자비스가 디아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디아르트가 그의 손을 잡자 자비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친우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군.”
자비스의 말에 귀족들이 작게 탄식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그동안 나와 디아르트, 자비스의 관계에 대한 불미스러운 소문을 단번에 불식시키는 말이었다.


#091
우릴 향하던 관심이 흩어지자 자비스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던 디아르트의 얼굴이 대번에 바뀌었다. 의무적으로 짓고 있던 사무적인 표정이 사라진 그가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제국의 황태자를 앞에 둔 이의 태도라기엔 무척이나 불손했으나 자비스 역시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도리어 더욱 장난스러워진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선물은 어디 있나.”
“네?”
“설마 생일 파티에 오면서 선물도 안 가지고 온 건 아니겠지?”
안 가지고 왔다. 챙길 생각도 하지 않았던 터라 입을 꾹 다물자 자비스의 표정이 한층 더 능청스러워졌다. 자비스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과장되게 탄식을 내뱉었다.
“이런, 이런. 친구에게 선물 받을 생각으로 내내 들떴었는데 섭섭하군…….”
자비스의 유들유들한 태도에 디아르트의 심기가 비틀리는 게 느껴졌다. 이제 겨우 불식시킨 듯한 스캔들의 불씨를 다시 살리고 싶지 않았던 난 디아르트의 팔에 팔짱을 꼈다. 디아르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자비스 앞에서 제게 의지하는 게 기분이 좋은지 일자로 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너무나 빤히 읽히는 그의 기분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오려는 순간, 자비스가 선수 쳤다.
호탕한 웃음소리에 홀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다시금 모여들었다가 흩어졌다. 디아르트가 기분 나쁜 기색으로 미간을 구겼다. 이 사람 왜 이래. 눈짓으로 눈치를 주자 내게 시선을 돌린 자비스가 ‘뭐’ 하는 표정으로 눈썹을 들썩였다. 그 얄미운 표정에 불안함이 몰려오던 그때, 자비스가 말을 이었다.
“할 수 없군. 마음 넓은 내가 넘어가 주는 수밖에. 그럼, 이렇게 하지.”
자비스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애초에 지금 꺼내려는 말이 본론임이 틀림없었다. 그의 실룩이는 입꼬리가 그를 반증했다.
“선물은 나와 한 곡 추는 걸로.”
나는 싱긋 웃는 자비스의 얼굴을 보고 확신했다. 저 인간 지금 저거 놀리는 거다. 누구를? 디아르트를.
그걸 모를 리 없는 디아르트의 눈매가 와락 구겨졌다. 디아르트가 나와 자비스 사이를 가로막았다. 반응하길 바란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가만 듣고 넘어갈 수 없는 모양이었다.
“불가합니다.”
“난 자네가 아니라 내 친우에게 말하는 거네만.”
“제가 남편입니다.”
“남편이라 해서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제약할 수는 없지.”
“제약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보호라니. 누구로부터?”
어쩐지 데자뷔를 보는 듯했다. 점점 과열되는 두 남자의 언쟁을 보다 못해 말리려던 찰나 디아르트가 일갈했다.
“감히 남의 걸 넘보는 잡놈으로부터.”
제국의 황태자를 잡놈으로 명명하는 디아르트의 행태에도 그 잡놈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도리어 더 재밌다는 듯 입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하지만 난 보고야 말았다. 싸늘하게 내려다보는 디아르트의 눈빛에 그의 손이 움찔하는 것을.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리니…….
그때 황제와 황후, 그리고 레티시아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홀을 울렸다. 그리고 한 명 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 호명되었다.
“이어 들어오시는 분은 애나벨 맥그리거 님이십니다!”
레티시아의 뒤로 모습을 드러낸 그 이름의 주인은 아델리아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소녀였다. 금실을 꼬아 놓은 듯 반짝이는 갈색 머리카락.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 톡 치면 쓰러질 듯한 가냘픈 체구는 아델리아와 판박이였다. 레티시아 뒤를 졸졸 따르며 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 역시 아델리아를 쏙 빼닮아 있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나는 순간 요 며칠 잠을 설칠 만큼 가슴 한 구석에서 스멀거리던 감정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건 불안이었다. 혹시 무도회에서 무언가 일어나지 않을까. 원작에서처럼 디아르트가 누군가에게 반하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지만 원작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여인에게 마음을 준 적 없다가 아델리아에게 시선을 빼앗겼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아까 별채를 나설 때부터 무언가 얹힌 듯 속이 불편했다.
지금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홀을 가로지르고 있는 소녀에게 디아르트의 금안도 닿아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 차마 고개 돌려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데 귓가로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아픈가? 표정이 좋지 않은데.”
퍼뜩 정신이 든 사람처럼 고개를 돌리니 디아르트가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쪽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 오롯이 나를 향하고 있는 그의 눈빛에 순간 마음이 탁 놓였다.
“돌아갈까?”
말만 하면 나를 안아 들고 연회장을 빠져나갈 것 같은 기세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래, 원작은 바뀌었어, 완전히. 이제 이 남자와 함께 이곳을 살아갈 사람은 나야. 이 눈부시게 잘생긴 남자는 내 남편이라고. 안도감이 몰려오는 동시에 벅차오른 난 이 자리에서 디아르트를 끌어안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으며 빙긋 웃었다.
“괜찮아요.”
“무리할 필요 없어. 마차를 준비시키지.”
“진짜 괜찮아요.”
“자네, 어디 안 좋나?”
불쑥 끼어든 자비스의 걱정 어린 물음을 디아르트가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고 싹둑 잘랐다. 자비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친우로서 걱정도 못 하게 하는군. 자네, 이 결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저렇게 집착하는 남자는 피곤한 법이야. 내 친우로서 조언하는 걸세.”
자비스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디아르트가 살벌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러더니 이내 하는 말이,
“사랑스럽다 했습니다.”
“음?”
“그 집…….”
난 얼른 디아르트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아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낯뜨겁게! 내가 무언의 눈빛으로 질책하자 디아르트가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이 남자에게 이런 뻔뻔함이 있었나 싶다. 그러나 눈치 빠른 자비스는 내가 막은 디아르트의 뒷말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런 취향인 줄은……, 내가 공작보다 부족한 게 바로 그 점이었군.”
디아르트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아직까지도 레티시아의 뒤에 숨어 있는 애나벨에게 시선을 돌렸다.
“누구인가요?”
“내 사촌일세.”
“설마 후작이 또 양녀를 들인 건가요?”
“아니, 진짜 딸을 찾았다네. 아델리아하고는 달리 무척 조용하고 착한 아이야.”
자비스는 그렇게 말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아델리아도 보기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소녀였기 때문이다. 그녀와의 아찔한 첫 만남을 떠올리며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레티시아가 등 뒤로 애나벨을 매달고 다가왔다.
“로에니 님.”
반가운 목소리에 아직까지 디아르트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얼른 떼었다.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어요.”
레티시아가 손을 잡아 이끌자 힐끔힐끔 나를 살피던 애나벨이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계속 날 의식하는 듯한 그녀의 시선이 미심쩍었다. 설마 너도 아델리아와 같은 과니?
“이번에 찾은 제 사촌인데 글쎄 로에니 님을 알고 있지 뭐예요.”
“네? 저를요?”
난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의아한 표정으로 보자 애나벨의 뺨이 붉어졌다. 숨고 싶은 듯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꼭 비에 젖은 강아지마냥 귀여웠…… 아니, 방심하지 마.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법이라고!
“저…… 팬이에요!”
귀여운 모습에 스르르 풀어지는 경계심을 다잡던 난 우물쭈물하던 애나벨이 내뱉은 뜻밖의 소리에 멈칫했다. 지금 설마 나한테 한 말인가? 고개를 갸웃하니, 제가 말해 놓고도 부끄러운 듯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던 애나벨이 작은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그때 마님이 주신 케이크, 전 평생 그렇게 달콤한 건 처음 먹어 보았어요.”
케이크라니? 점점 모를 말만 한다 싶던 그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난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레미다 언니도 마님 덕분에 무사히 출산하고 잘 지내고 있고요.”
‘설마.’
순간 언젠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레미다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던 날, 나무 뒤에 숨어서 날 지켜보던 사람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설마 그때 그 사람들 중에 이 아이도 있었던 건가?
디아르트와 자비스가 무슨 말이냐는 듯 의아하게 바라보자 애나벨은 수줍어하면서도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후에도 마님께서 몇 번이나 식료품을 보내 주신 덕에 배곯는 이들이 줄었어요. 다들 정말 감사드리고 있답니다. 모두 마님의 은혜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어 해요.”
애나벨의 말이 이어지는 내내 레티시아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자비스는 퍽 놀란 모습이었다. 나는 숭배와도 같은 칭찬에 얼굴이 달아오르면서도 은근히 기분 좋았다. 이런 걸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제 할 일을 다 한 사람처럼 부끄러운 듯 다시 레티시아의 뒤로 숨어 나를 흘끔거리는 애나벨을 보며 난 흡족하게 웃었다.
‘굉장히 사랑스러운 소녀네.’
난 단숨에 애나벨이 마음에 들었다.
한참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디아르트가 귓가에 속삭였다.
“황제를 만나고 올게.”
당신까지 고개 숙일 필요 없으니 여기 있으라고 말한 디아르트가 황제에게 다가갔다. 디아르트가 가로지르는 대로 물러선 귀족들이 그를 지켜보았다. 황제 앞에 선 디아르트는 귀족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평소보다 정중한 태도로 예를 갖추었다. 그가 사냥터에서 있었던 무례에 대해 고개 숙여 사과하자 황제가 인자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간 휘턴가와 황실 간에 있었던 분쟁을 종식시키는 형식적인 장면이었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디아르트의 파격적인 선언에 연회장에 있던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황실에 일으킨 불충에 대한 대가로 공작 위를 내려놓겠습니다.”


#092
작위를 내려놓겠다니 무슨 소리야? 아연해서 절로 입이 벌어졌다. 지금 이 홀에서 유일하게 태연한 사람은 모든 이들의 경악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디아르트뿐이었다.
“공, 잠깐 그게 무슨…….”
황제마저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니 사전에 약속된 게 아닌 모양이다. 디아르트는 황제의 만류에도 개의치 않은 채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앞으로 전 어떤 정치적인 일에도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제 검은 저의 가장 소중한 것을 건드리지 않는 한.”
디아르트가 고개를 틀어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황제 폐하의 앞에서 적을 향해서만 겨눠질 것을 맹세합니다.”
다소 협박이 섞여 있는 것 같은 맹세였다.
“저거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지 않나?”
자비스가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황제에게 눈을 돌리기 전 나를 떠난 시선이 자비스를 훑고 지나간 걸 보면 같은 게 아니라 확실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보통 한 가문에 두 개의 작위가 존재할 수 없기에 디아르트는 무척이나 특이한 경우였다. 더욱이 제국의 셋밖에 없는 공작. 그만큼 그가 제국에 공헌한 바가 크다는 걸 시사하며 영향력 또한 여실히 드러내는 특혜를 스스로 포기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황제의 만류가 이어졌지만 디아르트가 말을 번복하는 일은 없었다. 수군거리는 귀족들의 목소리를 뒤로한 그가 두 번째 충격적인 발언을 던졌다.
“오늘 황태자 전하의 탄신을 축하드리는 의미로 서부 다이아몬드 광산을 내놓겠습니다.”
‘헉!’
숨을 들이켜는 사람들보다 더 기겁한 건 나였다. 아니, 뭘 준다고? 생일 선물로 다이아몬드 광산을 준다고?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자비스가 옆에서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먹고 떨어지라는 거군. 어지간히도 내가 자네와 춤추는 게 싫은 모양이야.”
작위를 내놓겠다고 한 것보다 다른 의미로 더 충격적인 터라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입만 뻐끔거리는 날 보며 자비스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퍽 사랑스러운 집착이지 않나.”
그 말에 난 고개를 홱 돌려 그를 흘겨보았다.
마치 회오리에 휘말린 것처럼 홀을 연이어 충격에 빠트렸던 디아르트는 제 볼일을 끝내자마자 붙잡는 황제를 뒤로하고 내게 다가왔다. 나와 자비스의 가까운 거리감에 디아르트가 미간을 좁혔다. 자비스가 양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하곤 내 옆자리를 비켜 주었다.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니 생일 선물치고는 화려하군. 덕분에 황실의 내탕금이 퍽 든든해지겠어.”
디아르트는 능글거리는 자비스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주위에 사람이 많아 참고 있으니 레티시아가 나섰다.
“저쪽에서 오라버니를 찾으시네요.”
레티시아는 그대로 자비스와 애나벨을 데리고 자리를 피해 줬다. 눈치 빠른 그녀에게 고마워하고 있는데 홀에 잔잔히 흐르던 음악이 바뀌었다. 황제 부부가 플로어 가운데로 나오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나누고 있던 담소도 멈추고 두 사람의 춤을 감상하는 귀족들의 모습에 나도 황제 부부의 춤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확실히 황족이라 그런지 우당탕거리는 나와 달리 무척이나 우아했다. 두 사람의 춤이 끝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나 역시 손뼉을 치고 있는데 디아르트가 내 시야를 가리고 섰다.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며 허리를 숙였다.
“부인, 저와 한 곡 춰주시겠습니까.”
디아르트의 태도는 더할 수 없이 정중했다. 마치 작업 거는 바람둥이와도 같은 느끼한 멘트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설렐 수 있구나, 감탄하던 난 이내 짓궂게 미소 지었다.
“발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실컷 밟도록.”
아직 내 춤 실력을 제대로 모르는구만.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빙긋 웃는 디아르트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조금만 지나면 저 여유로운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지 눈에 선했다.
우리가 플로어로 나서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벌써 춤을 추고 있던 이들마저 우리에게 시선을 돌리는 게 보였다. 하기야 결혼하고 십여 년 동안 수많은 무도회를 거치면서도 함께 춤을 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플로어에 선 디아르트와 내 모습이 모두의 눈을 잡아끌 만도 있다.
새삼 나와 디아르트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게 실감 났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와 춤추기는커녕 손잡는 것도 질색하던 남자였는데. 괜히 이 상황이 쑥스러워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그때 디아르트가 한 손으로 허리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순식간에 시야가 그로 가득 찼다.
나를 내려다보는 깊은 금안에 플로어에 그와 둘만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디아르트의 리드에 따라 천천히 춤이 시작되었다. 디아르트는 의외로 춤에 꽤 능숙했다. 감탄하던 난 문득 배신감이 느껴졌다.
“잘 추시네요. 평소에 춤 좀 추셨나 봐요.”
나랑은 그거 잠깐 춰주기 싫어서 지난 연회 내내 방치하더니. 목소리가 곱게 나가지 않았다. 은근히 흘기는 시선에 디아르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춤은 처음인데.
“내가 몸으로 하는 건 금방 배우는 편이라.”
응용도 잘하고. 디아르트가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하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가 말할 때마다 귓가에 닿는 따뜻한 숨결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사람들도 많은 데서. 퍼뜩 어젯밤이 떠올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밀어내자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찔린 난 혹시 누가 듣진 않았을까 얼른 주위를 살폈다. 작은 속삭임이었던 터라 들은 사람은 없는 듯했다. 부쩍 더워진 공기에 얼른 말을 돌렸다.
“작위를 반납하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아.”
방금 공작 작위를 던지고 온 사람 같지 않게 디아르트의 표정은 남의 일인 양 무심했다.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하군. 나도 방금 정한 일이라.”
“……방금 정하다뇨?”
무슨 그런 중요한 일을 길가에 있는 붕어빵 사 먹듯 정해. 어이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전쟁에 나가기 싫었거든.”
전쟁? 아, 그러고 보니 곧 공국과의 전쟁이 있었지. 근데 그게 작위와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내 눈빛에 디아르트가 흘깃 시선을 틀어 황제 쪽을 바라보았다.
“광산 몇 개 주고 끝내려고 했는데 욕심을 부리더군. 이번 공국과의 전쟁에 출전하지 않겠다는데 계속 종용하길래 귀찮아서.”
“네?”
“저렇게 사람 좋아 보여도 영토 확장에 대한 야욕이 상당하지.”
뭐? 저 개미 한 마리 못 죽이게 생긴 푸근한 아저씨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춤을 추는 와중임도 잊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황제가 고개를 이쪽으로 틀기 전에 디아르트가 내 턱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뭐, 평소라면 기꺼이 따랐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그러니까 그동안 디아르트가 피에 미친 전쟁귀라고 불릴 만큼 전장에서 구른 이유에 황제의 탐욕도 한몫했다는 거지? 문득 내게 장난스러운 제스처를 하던 황제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상황이 다르다뇨? 무슨 일 있어요?”
나의 물음에 디아르트는 도리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잊은 거야?”
“아.”
맞아, 그렇지. 디아르트가 출정하면 당장 저주를 중화할 방법이 없구나. 이 남자에게 길들어진 탓에 다른 사람과의 접촉은 간의 기별도 안 가게 되었으니 그가 없는 동안 꼼짝없이 저주에 말라 갔겠네.
그 생각을 왜 못 했지? 하마터면 끔찍한 저주의 고통 속에서 허덕였을지도 모르겠다. 작위가 문제냐, 내 목숨이 먼저지. 잘했다는 듯한 눈빛으로 칭찬하자 디아르트가 풋 웃었다.
“내 아내는 나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라서 말이야. 그게 참 기쁘군.”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고. 속삭이는 디아르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번에 퍽 세게 발을 밟혔는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을 정도로.
“오늘 오전까지도 출정을 강권하기에 작위를 내놓았지. 전쟁으로 얻은 작위이니 그를 내려놓는 순간 입을 다물 수밖에 없거든.”
“아.”
그래서 그렇게 모든 귀족 앞에서 선언했구나. 황제가 빼도 박도 못하도록.
“공작이 아닌 나는 별로인가?”
“아뇨.”
전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다. 작위야 곧 다시 물려받을 테고 그게 없으면 또 어때. 디아르트가 공작이라서 좋은 것도 아닌데.
다행이군, 하고 웃던 디아르트가 이내 말을 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게 많은데 그깟 전쟁에 시간을 소비할 순 없지.”
해야 할 게 많다니?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디아르트가 내 허리를 더 바짝 끌어안았다. 춤을 추기 어려울 정도로 바투 붙은 거리감에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그가 충격적인 발언을 내 귓가에 던졌다.
“그대와 이혼할 생각이거든.”


#093
……파든?
“네? 지금 뭐라고…….”
“당신하고 이혼하겠다고.”
황실 연회만 오면 기가 차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아니, 넌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다정하게 웃으면서 하니? 그리고 이게 춤을 추면서 들을 얘기야?
“진심이세요?”
“이런 말을 농담으로 하는 사람도 있나?”
그럼 정말 나와 이혼을 하겠단 말이야? 어제 그런 밤을 보내 놓고? 방금 나 없으면 못 사는 몸이라며!
나는 춤을 멈추고 오늘 여러 번 놀라게 하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어이없는 만큼 삐끗한 발에 힘을 주었다. 아무리 디아르트라고 해도 발등을 뚫어 버릴 듯 짓이기는 구두 굽에는 견딜 수 없는지 잘생긴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곧 그보다 더욱 구겨진 내 얼굴을 보곤 아차한 표정이 되었다.
“잠깐,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오해라니. 이혼하자는 말에 오해라는 단어가 끼어들 틈이 있나요?”
웃으면서 말하자 디아르트가 움찔했다. 물론 그동안 내가 이혼 철회 서류에 사인 안 해 주고 애를 태우긴 했지. 했는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진짜 이혼하자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물론 살짝 내로남불이긴 하지만 이러면 안 되지. 너만 스산하게 웃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친히 보여 주었다.
“로에니.”
“네. 왜요, 디아르트.”
기분이 상한 만큼 목소리가 불퉁해졌다. 디아르트가 허리를 더욱 바짝 당겨 안았다. 안 그래도 가까운데 거의 딱 달라붙게 된 터에 춤을 추는 건지 포옹을 하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속도 모르는 귀족들이 우리를 바라보며 탄성을 삼키는 게 보였다.
“내가 당신을 놔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도리어 이해 안 되는데. 설마 지금도 나와 이혼할 속셈은 아니겠지?
아니, 지금 이혼을 하자고 한 게 누군데.
하지만 정말 그런 생각이라면 이 조그마한 머리통을 다시 굴리는 게 좋을 거야, 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입이 딱 다물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내가 화를 내고 있던 상황 아니었나?
“……당신이 지금 이혼하자고 했잖아요.”
지지 않고 맞서기는 했으나 이미 형세가 기울었다. 불만스럽게 꼼지락거리는 몸을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은 디아르트가 말을 이었다.
“당신 말을 듣고 생각해 봤어. 그동안 내가 했던 행동들. 그로 인해 상처받았다는 말 전부 이해해. 이혼 서류를 내밀며 당신이 그랬지. 우리 결혼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맞아, 우리 결혼은 애초에 잘못되었어. 그러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네?”
디아르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귀엽다는 듯 미소 지었다. 디아르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그러면서도 온전한 온기를 띤 금안으로 말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이번에는 제대로. 디아르트는 금방이라도 키스할 듯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추었다.
* * *
무도회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생각지도 못한 결혼하자는 말에 순간 주변의 소음들이 모두 사라지고 오롯이 나와 디아르트만 멈춘 시간 속에 남은 듯한 착각이 들었었다. 중간에 끼어든 자비스가 아니었더라면 작정하고 홀리는 눈빛에 그대로 휩쓸렸을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과도한 애정 행각은 누군가의 부러움과 시기를 산다는 걸 모르나.”
원치 않은 방해꾼에 유혹적으로 번들거리던 디아르트의 낯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방해하지 마십시오.”
“방해는 누가 하는지 모르겠군. 추지 않을 거면 플로어에서 내려가게. 다들 자네를 피해 움직이느라 곤욕스러워하는 게 안 보이나?”
자비스의 말대로 나와 디아르트 반경 3m 안에 들어가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 귀족들이 홀 외곽으로만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이쪽으로 눈과 귀가 열려 있는 것이 느껴졌다.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그나저나 디아르트에게 그런 섬세한 면이 있을 줄이야.
그가 내가 이혼 서류를 내밀며 한 말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더욱이 그 때문에 결혼식을 다시 올릴 생각까지 했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물론 나도 다시 결혼하면 좋지. 로에니의 기억이 없는 나한텐 디아르트와 결혼식을 올렸던 기억도 없으니 따지고 보면 첫 결혼식이나 마찬가지니까.
“드레스는 역시 베라 살롱이겠죠? 웨딩드레스는 그곳이 제일 유명하잖아요! 마님께 분명 잘 어울릴 거예요!”
릴리는 아까부터 난리였다. 마치 제가 결혼하는 듯 신나서 조잘거리는 그녀를 보니 조금씩 디아르트의 말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그래, 복잡하게 생각할 거 뭐 있어? 그냥 즐기면 되는 거지. 이혼이 흠이 되는 사회도 아니고 헤어졌다가 다시 재혼하는 경우도 흔한데 뭐.
‘이혼 절차를 밟는 동시에 결혼 준비를 하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뭐 어때.’
정말 결혼식을 올린다고 생각하니 새삼 설레었다. 가족에 학을 뗐던 전생에선 평생 결혼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했었는데 내가 결혼을 하는구나. 물론 지금도 유부녀이긴 하지만. 디아르트의 말대로 드레스며, 액세서리 등 결혼 준비를 할 생각을 하니 두근거렸다. 역시 제일 먼저 골라야 하는 건 드레스겠지? 릴리의 말대로 베라 살롱이 좋을까 고민하던 난 이내 멈칫했다.
‘잠깐. 근데 설마 그게 프러포즈였나?’
* * *
“그게 프러포즈라고요?”
램버트가 경악 어린 눈빛으로 디아르트를 바라보았다. 불과 몇 분 전 로에니와의 이혼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도록 손을 쓰라는 그의 말을 듣고 비난의 눈초리를 보냈던 램버트는 뒤이어 결혼식 준비를 위해 예정되어 있던 일정을 조율하라는 주문에 안도와 역정이 동시에 일었다. 제 상관은 가끔 말이 부족했다. 괜히 사람 간 떨어지게 한 디아르트를 흘기던 램버트는 이젠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하루 아침에 작위를 버렸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더 어이없어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 그게 끝입니까?”
혹시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 몰라 다시 한번 물으니 디아르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에 램버트는 한숨을 삼켰다.
그가 이렇게 기막혀하는 이유는 프러포즈는 어떻게 했냐는 물음에 돌아온 답변이 이랬기 때문이다.
“그게 프러포즈 아닌가?”
이런 어리숙한 남자를 보았나.
연애 기간만 십 년을 넘기고 현재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램버트는 한심한 눈빛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최근에 확실히 깨달았는데 제 주인은 정치나 전쟁에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여자에 대한 마음은 쥐뿔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적을 향해 검을 휘두를 때는 그토록 가차 없고 멋있는 남자가 왜 이 방면에서는 이토록 모자라기 그지없는지. 램버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결혼식은 여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결혼식을 구성하는 것들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게 바로 프러포즈였다. 평생 기억에 남는 게 프러포즈인데 그걸 지금 저렇게 무성의하게 넘어가겠다고? 저런 무심함으로 결혼식을 다시 올리겠다는 발상은 어떻게 했는지가 의문이었다.
“뭐야.”
절 보며 결국 소리 내어 쯧쯧, 혀를 차는 램버트로 인해 디아르트의 미간이 구겨졌다. 자신을 보는 눈빛에 담긴 불손한 기색이 거슬렸다. 그의 물음에도 말없이 한참 응시하던 램버트가 물었다.
“그래서, 마님께는 답을 들으셨겠죠?”
“당연…….”
-히 들었다고 대답하려던 디아르트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로에니에게 대답을 들었던가? 연회장에서는 중간에 끼어든 훼방꾼으로 인해 유야무야 넘어갔고 타운 하우스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도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디아르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램버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이 더욱 불손해졌다.
“잘 들으세요.”
램버트는 마치 모자란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 심정으로 처음부터 짚어 주었다.
“애초에 이 결혼식을 다시 올리려고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과거의 다소 불행했던 결혼을 청산하고 새 출발을 하고 싶으신 거 아닙니까.”
말하지 않아도 정확하게 요점을 파악하고 있는 램버트의 말에 디아르트가 가만히 경청했다.
“그럼 시작부터 잘하셔야죠. 결혼의 시작은 무엇이다? 프러포즈다. 프러포즈를 잘못하면 그 기억은 평생 가는 겁니다. 무슨 일 있을 때마다 초콜릿 뽑아먹듯 계속 혼나고 싶으세요?”
본인 역시 그때의 일로 아직까지 혼나고 있다는 말은 쏙 집어넣은 램버트가 거들먹거렸다. 디아르트가 미간을 좁혔다. 생각해 보니 램버트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이번 결혼식이 로에니에게 행복한 기억으로만 남았으면 하는데 시작부터 부족하다고 느끼게 할 순 없었다.
‘프러포즈라…….’


#094
“프러포즈는 역시 모두의 축복 속에서 받는 게 제일 감동적이지 않을까요?”
밀토의 주장에 기사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휘턴 기사단 사이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건 ‘어떤 프러포즈가 가장 감명 깊을까.’ 하는 것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필립 경이 디아르트와 램버트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면서부터였다. 두 주인마님 사이의 지난했던 냉전이 끝난 것만 해도 크게 기뻐하고 있던 기사들은 결혼식을 다시 치른다는 소리에 쌍수 들고 환영했다.
무심한 자신들의 주인에게서 어떻게 그런 발상이 나왔는지 다소 신기하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그동안 마음고생한 마님을 생각하면 기쁜 일이었다. 기사들은 마님께서 가장 행복한 프러포즈를 받을 수 있도록 디아르트를 돕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훈련 틈틈이 쉬는 시간이 생길 때마다 모여 앉은 기사들은 가장 완벽한 프러포즈에 대한 토론을 이어 갔다. 그 사실은 곧 디아르트의 귀에도 들어갔는데 평소라면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일갈했을 그에게서 아무런 질타도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어떤 프러포즈가 가장 좋을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램버트의 말대로 연애 쪽에는 완전 문외한인데다 조언을 얻을 만한 곳이라고는 바로 그 램버트 정도인데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눈빛에 서려 있는 묘한 우월감이 거슬렸다.
하여 디아르트가 찾은 것은 로맨스 소설이었다. 하지만 며칠 낮과 밤을 업무까지 미뤄 두고 로맨스 소설을 탐독해도 만족할 만한 성과는 없었다. 하나같이 너무 사소하고 자잘한 내용들 뿐이었다. 이 제국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주고 싶은데 겨우 둘만의 조용한 반지 교환이라든가 침대맡에서의 은밀한 프러포즈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이미 로맨스 소설에서 읽은 프러포즈를 받아도 별 감흥이 없을 것 같았다.
로에니에게 평생의 기억에 남을 만한 완벽한 프러포즈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디아르트로 하여금 그와 어울리지 않게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디아르트가 가만히 있자 기사들은 신이 나 의견을 내놓았다.
“시간은 낮보다는 밤이 좋을 것 같습니다. 태양이 내리쬐는 밝은 대낮보다야 별이 뜨는 고즈넉한 밤이 훨씬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장소는 배 위가 어떻겠습니까. 밤하늘이 비치는 바다 위에서의 청혼이라니 상상만 해도 로맨틱하지 말입니다.”
“사람들이 장미꽃을 한 송이씩 마님께 건네 드릴 때 각하께서 딱 나타나셔서 마님 앞에 무릎을 꿇으시……”
말을 하던 밀토의 입이 다물어졌다. 아무리 프러포즈라고 해도 저 성격에 무릎까지 꿇을까 싶었는데 디아르트가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밀토는 조금 놀랐지만 이내 브리핑을 계속했다.
“한쪽 무릎을 꿇으신 상태에서 반지 케이스를 내미시는 거죠. 그리고 한 마디. ‘나와 결혼해 주겠소?’”
기사들이 바로 이거라는 듯 탄성과 박수를 쏟아 냈다. 어리숙하게만 봤더니 이런 쪽으로 꽤 쓸 만한 구석이 있는 밀토를 바라보는 기사들의 눈동자에 대견함이 깃들었다. 탄력을 받은 밀토가 말을 이었다.
“이때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박수 치며 환호하면 마님께서 얼마나 감동하시겠습니까.”
밀토의 말이 끝나자 기사들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냐는 듯 눈동자를 반짝이며 보자 디아르트가 미세하게 끄덕였다. 상상해 보니 퍽 괜찮은 장면이 그려졌다. 꽤 만족스러워 보이는 디아르트의 표정에 기사들이 흡족하게 웃었다.
‘저런 걸 의견이라고.’
한쪽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기사단 내 기혼자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저런 고리타분한 프러포즈가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풋내기 미혼 기사들이 한심해 혀를 찼다. 저러니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지.
“요즘 누가 무릎 꿇고 프러포즈를 합니까.”
거절당하기 딱 좋은 프러포즈를 의견이랍시고 내놓은 미혼들 사이로 파고든 알렉스 경이 기혼자들을 대표해 이의를 제기했다.
“저런 고전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방법은 백 년 전에나 통했죠. 요즘 저렇게 청혼하면 진부하다는 소리 듣습니다. 세련된 마님께서 좋아하실 리 없어요. 그보다는 말입니다.”
알렉스가 잠시 입을 다물어 뜸을 들였다. 얼마나 신박한 프러포즈 방법이 있길래. 모두의 궁금증과 기대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알렉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화첩 프러포즈가 어떻습니까? 고백 문구를 적은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마지막 장에 ‘결혼해 주겠소?’라는 글자가 딱 나오는 순간 무릎 꿇고 반지를 내밀 때보다 더한 박수갈채와 함께 마님께서도 엄청나게 감동 받으실 겁니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소문을 들은 이들 모두 부러워할걸요?”
과연 기혼자! 확실히 경험자는 다르다며 기사들이 감탄 어린 눈빛으로 그를 우러러보자 우쭐해진 알렉스가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그때 각하께서 케이크를 떠서 마님의 입에 넣어 주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오물거리던 마님은 그 안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발견하시는 거죠.”
완벽하다!
이보다 더 완벽한 프러포즈는 없다는 생각에 기사들이 박수를 쏟아 냈다. 세기의 프러포즈로 기억될 게 분명하다고 장담하는 기사들 사이에서 디아르트도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꽤 괜찮은 프러포즈임이 분명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모두를 지켜보고 있던 램버트는 몇 년 전 자신이 실패했던 프러포즈를 추천하는 기사들과 이를 수용하고 있는 디아르트를 보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실패할 게 분명했지만 그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청혼하는 게 가장 낭만적이라는 자신의 조언이 무시당한 데 대한 앙금이었다.
* * *
아무래도 그게 프러포즈였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 디아르트에게 이렇다 할 기미가 없는 걸로 봐선 확실했다. 디아르트 성격을 생각하면 그마저도 어디냐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쉬움이 채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일생에 한 번뿐인 프러포즈인데. 남들은 평생 곱씹을 만한 프러포즈를 받는다는데 명색이 로맨스 소설 남주면서 그렇게 넘어간다고?
며칠간 계속 아쉬움을 삼키던 난 마침내 결심했다. 디아르트가 안 하면 내가 프러포즈하면 되지. 꼭 남자만 프러포즈하라는 법이 있나? 이렇게 된 거 절대 잊지 못할 만큼 감동적인 프러포즈를 해 주지 뭐.
이왕이면 디아르트의 눈에서 눈물을 뽑겠다는 각오인 터라 요즘 틈만 나면 그 고민뿐이었다. 사람들 많은 데서 요란하게 하는 이벤트보다는 둘만 아는 장소에서 조용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프러포즈가 최고겠지?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어디가 있을까……. 머릿속을 한참 굴려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디아르트와 함께한 기억이 있는 곳은 늘 집 아니면 거리, 그도 아니면 황궁뿐인 탓에 프러포즈하기 전에 어디 여행이라도 가야 할 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런 얼굴이야?”
저녁 식사 중인 것도 잊고 고민에 몰두하던 난 디아르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늘따라 고기가 너무 맛있다는 생각이요.”
모른 척 스테이크를 썰자 디아르트는 더 묻지 않았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던 그가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수도에 오래 있었잖나. 작위를 내놓았으니 영지도 정리해야 하고.”
“그래요. 그게 좋겠어요.”
원래 저택을 나온 건 디아르트와 떨어지기 위해서였는데 그럴 이유가 사라졌으니 타운 하우스에 남아 있을 필요도 없었다. 내 시원한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디아르트의 입꼬리가 느슨해졌다.
“며칠 후에 철도 시공식이 열릴 거야.”
“벌써요?”
철도를 놓는 게 쉬운 일도 아닌데 벌써 시공식까지 열린다니 새삼 디아르트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디아르트는 별거 아니라는 듯 감흥 없는 눈을 하고 있었지만 무언가 다른 기색이 엿보였다. 철도 시공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어울리지 않게 긴장이 어려 있기도 했다. 이유를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웃하는데 디아르트가 말을 이었다.
“그때 귀족들을 초대하려고 하는데 어때.”
“이왕이면 많은 귀족이 함께하면 좋죠.”
이런 일은 널리 널리 자랑해야지.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공식을 마친 후에 선상에서 연회를 열려고.”
“배 위에서요?”
귀족들을 모두 수용할 만한 배라면 꽤 규모가 크겠는걸? 그럼 저번에 축제 때 탔던 배처럼 뒤집어지는 일은 없겠지? 물론 그때 그 덕에 디아르트와 첫 키스를 나누고 좋은 기억으로 남긴 했지만 수영을 못하는 나로선 물에 빠지는 경험은 두 번 겪고 싶지 않았다.
“배 위에서 파티라 낭만적이네요.”
“그렇게 생각하나?”
디아르트가 무언가 기쁜 듯 되물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기대해도 좋을 거야.”
뭐 얼마나 화려하게 준비하려고? 나는 왠지 자신만만해 보이는 디아르트의 얼굴이 귀여워 웃었다. 그가 이렇게 호언장담하니 선상 파티가 퍽 기대되었다.


#095
오랜만에 저택으로 돌아오니 사용인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들은 건강해 보이는 내 모습에 안도하면서도 혹시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디아르트와 램버트를 제외하고는 다들 내가 아직도 푸이탄 병에 걸린 줄 알고 있었다. 내게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터에 나도 내가 시한부라고 오해받고 있단 걸 잊었는데 조만간 이 오해부터 풀어야 할 것 같다.
“서류 정리 때문에 좀 늦을 거야.”
나를 방까지 에스코트한 디아르트가 말했다. 우리가 타운 하우스를 떠나기 전까지 황제는 끈질기게 작위 반납을 다시 생각해 보라며 붙잡고 늘어졌지만 디아르트가 말을 번복하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도무지 단념할 수 없었는지 작위는 잠시 내려놓더라도 영지는 그대로 다스리라고 했다. 나중에 그걸 빌미로 작위를 돌려주고 출정을 권할 목적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애초에 지금 디아르트가 다스리고 있는 영지의 대부분은 오래전부터 휘턴 가의 영지였다. 저택이 있는 중심 도시 역시 휘턴 가의 소유였고 나머지는 얼마 되지도 않았다. 자꾸만 귀찮게 하는 황제 때문에 디아르트는 그 영지 문제부터 해결할 요량인 모양이었다.
디아르트가 방을 나선 후 릴리가 따라 준 홍차를 마시며 한숨 돌리던 난 수도를 떠나기 전 레티시아에게 받은 편지를 꺼냈다. 벌써 철도 시공식에 대해 알고 있는 그녀는 꼭 참석하겠다는 말과 그날 저택에서 하루 묵어도 되냐고 청하고 있었다. 다정한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따뜻한 편지를 읽으며 미소 짓던 난 멈칫했다. 편지 하단에 우리가 타운 하우스를 떠나는 날 아델리아도 변방으로 추방당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던 터다.
‘얼마나 멍청하게 생겼는지 꼭 얼굴을 보고 싶었거든요.’
앞으로의 세상은 모두 제 것이라는 듯 자신만만하게 웃던 아델리아는 결국 자신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말을 맞게 되었다. 조금만 마음을 예쁘게 먹었어도 지금쯤 귀족 가의 양녀로 안온한 삶을 살았을 텐데. 듣기로 변방에선 매일같이 고된 노동이 주어진다는데 고생깨나 할 것이다. 뭐 물론 납치를 당한 데다 죽을 뻔하기까지 한 터라 그녀의 말로가 그리 불쌍하진 않았다.
이제 두 번 볼 일 없는 사람보단 디아르트에게 할 프러포즈나 생각하자. 나는 빙의한 첫 순간, 그러니까 자고 있는 디아르트를 덮치던 그 순간을 재현해 볼 생각이었다. 그와 함께했던 많은 시간 가운데 첫 만남이자 가장 강렬한 순간이었으니까. 물론 나와 디아르트의 관계가 달라진 만큼 그때와는 많은 게 다르겠지만 여전히 탄탄한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는 거다. 오늘은 덮쳐도 쫓아내지 않을 거냐고.
물론 디아르트가 날 쫓아내는 일은 없을 테고 난 나를 안으려는 그의 손을 막은 채 그에게 키스할 생각이다. 그리고 미리 물고 있던 반지를 입 안에 넣어 주는 거지. 그다음에는 뭐…….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내 손을 안마하던 릴리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흐흐흐, 음흉하게 웃고 있던 난 서둘러 표정을 관리했다. 몸까지 뒤로 물리며 미심쩍은 얼굴로 날 보던 릴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 표정이 어떻다고 그러니.”
“누구 하나 잡아먹을 것 같은 얼굴이셨어요.”
릴리 얘는 가끔 날카로운 면이 있단 말이야. 난 내 생각을 정확하게 꿰뚫은 듯한 릴리의 말에 찔려 괜히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왕이면 방도 예쁘게 꾸며 놓는 게 좋겠지. 그러려면 릴리의 도움이 필요했다. 난 릴리에게 제일 중요한(?) 부분만 빼놓고 내 프러포즈 계획을 설명했다. 내가 먼저 청혼하겠다는 말에 놀라던 릴리는 이내 진지한 얼굴로 경청했다. 그녀의 얼굴에 반드시 이 프러포즈를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서렸다.
* * *
그리고 마침내 철도 시공식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시공식이 끝난 후 선상 파티가 열리는 항구까지 곧바로 갈 예정이기에 아침부터 분주했다. 내 치장을 마친 릴리와 애니는 파티에서 입을 드레스와 장신구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나선 난 디아르트의 방으로 향했다. 최근 내 방에서만 머무는 디아르트이기에 빈방이나 다름없는 그의 처소는 이미 릴리의 손이 닿아 있었다. 내 주문에 따라 완벽하게 꾸며진 디아르트의 방을 둘러보며 흐뭇하게 웃던 난 침대 위에 뿌려진 장미 꽃잎 하나를 주워 들고 방을 나섰다가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하필이면 문 앞에서 디아르트와 딱 마주쳤기 때문이다.
“왜 여기서 나와?”
치장하는 내내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디아르트는 램버트의 호출에 집무실에 갔었다. 그의 방과 집무실이 가깝다는 걸 잠시 잊고 있던 난 못된 장난을 딱 걸린 아이처럼 차마 변명도 못 하고 어버버했다. 그 사이 그의 시선이 내가 들고 있는 장미 꽃잎에 닿았다.
“그건 뭐지?”
디아르트가 단숨에 다가와 내 손에 들린 장미 꽃잎을 가져갔다. 꽃도 아니고 꽃잎 하나에 디아르트의 얼굴이 의아해졌다. 나는 그의 눈동자가 제 방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얼른 그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 여기서 들키면 완전 망한다고!
“아까 잠깐 정원에 나갔더니 그사이에 옷에 붙었던 모양이에요.”
“방에는 왜 들어갔었는데?”
“당신이 하도 안 오길래 찾으러 왔죠.”
디아르트가 자리를 비운 건 채 십 분도 안 되었지만 우겨야 했다. 나는 의심을 채 거두지 않는 그의 표정에 부러 삐진 척했다.
“당신 방에 좀 들어가면 안 돼요? 자기는 맨날 내 방 오면서!”
난 들어가서 확인해 보려면 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곤 앞장섰다. 그 도박 같은 행동에 디아르트가 얼른 날 쫓아왔다. 난 그의 방에서 한참 멀어질 때까지 내 기분을 풀어 주려고 하는 디아르트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무척이나 쾌청했다. 곧 완연한 가을에 접어드는 계절은 부드러운 바람을 일으켰다. 이따 프러포즈할 생각 때문에 괜히 더 기분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디아르트에게 손이 잡혔다. 그는 아직도 내가 화가 난 상태일까 전전하고 있었고, 어쩐지 평소보다 더 긍긍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프러포즈할 생각 때문에 그런가, 이 남자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여워.’
나는 ‘여러분, 이 남자가 제 남편이에요.’라고 외치고 싶은 걸 꾹 참아야 했다.
“로에니 님!”
벌써 도착해 있던 레티시아가 날 부르며 다가왔다. 그녀의 뒤로 에드거와 애나벨의 모습도 보였다. 옆에 있던 디아르트가 낮게 쯧, 하고 혀를 찼는데 그들의 옆에 능글맞게 웃는 자비스도 있었기 때문이다.
“황족보다 늦다니 예의가 없는 것 아닌가.”
“원래 주인공은 늦는 법이라면서요.”
괜히 장난으로 트집을 잡는 자비스의 말을 받아친 후 레티시아와 반가움을 나누었다.
“이 사업이 사실 로에니 님이 제안하신 거라면서요?”
레티시아가 대단하다는 듯 눈빛을 반짝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어떤 팔불출이 제 아내의 생각이라고 말했지 뭔가.”
대신 대답한 자비스가 놀리는 듯한 눈으로 디아르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거슬렸는지 미간을 구기던 디아르트가 내가 돌아보자 얼른 표정을 바꾸는 게 보였다. 왜 그랬냐는 눈빛에 디아르트가 대수롭지 않게 눈썹을 끄떡였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저…… 마을 사람들도 감사해하고 있어요.”
레티시아 뒤에서 수줍은 표정으로 날 훔쳐보던 애나벨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마님 덕분에 뮤트로이 풀 판매권도 받았다고요. 다들 마님께 인사드리고 싶다고 와 있어요.”
애나벨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아이를 안은 레미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나를 본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난 레티시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다들 부끄러운 표정을 하긴 했지만 전처럼 적대감 어린 얼굴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냥 조금 도와준 것뿐인데 날 보는 눈빛에 감사와 애정이 가득해서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나?”
“마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나는 레미다가 안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토실토실하니 너무 귀여웠다. 내가 안아 들자 아이가 꺄르르 웃었다. 방싯거리는 얼굴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따라 웃자 옆에서 가만히 있던 디아르트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아이는 더 귀여울걸.”
아니, 이 남자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얼굴이 벌게진 난 팔뚝으로 그를 밀어냈다. 짓궂게 웃는 얼굴에 무어라 한마디 하려는 찰나 시야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시공식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틈에서 검은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여인은 변방으로 쫓겨났다는 아델리아와 닮아 있었다.


#096
‘아델리아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왜 그래.”
내가 어딘가를 빤히 응시하자 디아르트가 물었다. 그를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리니 그사이 후드를 쓴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잘못 봤나?’
디아르트가 내 시선을 따라 사람들을 훑었다.
“누구 찾아?”
아델리아의 얼굴을 알고 있을 디아르트가 아무 말 않는 걸로 봐선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모양이다. 하기야 지금쯤 군사들의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북부 변방으로 향하고 있을 아델리아가 여기에 있을 리 없지.
“아니에요.”
아델리아를 본 것 같아서요. 지나가듯 말한 난 안고 있던 아이를 레미다에게 넘겨주었다. 아이가 어찌나 순한지 이렇게 소란스러운데도 보채지 않고 멀뚱히 날 쳐다보는 게 너무 귀여웠다. 디아르트의 말대로 우리 아이는 더 귀여울까.
‘디아르트를 닮았으면 아기 때부터 무표정할 것 같은데.’
상상해 보니 그것도 꽤 귀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난 얼른 고개를 저었다. 괜히 뺨이 화끈했다.
철도 시공식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디아르트가 꽤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선로가 놓일 장소 앞에서 리본을 자르는데 마치 재벌이라도 된 것 같았다. 디아르트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자비스와 레티시아도 함께 자리함으로써 일말이라도 남아 있을 수 있는 황실과의 반목 의혹도 불식시키고 선로 공사의 정당성도 증명했다.
그 후에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수많은 풍선이 하늘로 올라가고 거리로 종이로 만든 꽃비가 내렸다. 탈을 쓴 어릿광대들이 재주를 넘었다. 마치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에 영지민들은 물론이고 귀족들도 즐거워했다.
항구로 향했을 때는 벌써 해가 꽤 기울어져 있었다. 선상 파티가 열리는 배는 내가 그동안 봐 왔던 유람선보다 훨씬 컸다. 디아르트가 직접 주최하는 파티이니 클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예상보다도 더 큰 규모에 놀라서 구경하던 난 선박 주변으로 배치된 병사들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단순히 호위를 위해서라기엔 그 수가 많았다.
배로 들어가는 입구에도 익숙한 얼굴의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퍽 삼엄하다고 생각하며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하던 난 이내 겉에서 보는 것보다 더 화려하게 꾸며진 배 안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갑판 위로 올라오자 드넓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수평선으로 바닷속으로 반쯤 숨고 있는 노을이 보였다.
“마음에 드나?”
붉게 물든 바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귓가로 디아르트의 목소리가 닿았다.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난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근처에 별저가 하나 있는데 침실 창밖으로 바다가 보여. 오늘은 그곳에서 묵지.”
“……오늘요?”
“왜? 무슨 일 있나?”
있지, 큰일이. 내가 오늘 밤을 위해 얼마나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왜 하필 오늘이야. 물론 창밖으로 밤바다가 보이는 침실도 꽤 로맨틱할 거 같지만 문제는 반지를 저택에 두고 왔다는 거다. 그 반지를 고르려고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데! 게다가 그 프러포즈는 디아르트의 방이어야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디아르트의 표정에 평소와 다른 기색이 어려 있어 쉽사리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엄청나게 실망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디아르트뿐 아니라 오늘따라 다들 이상했다. 나는 곁눈질로 저만치에 서 있는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묘하게 평소보다 상기되어 있으면서도 긴장한 모습이었다. 저쪽에 있는 사용인들은 어떻고. 나는 시선을 반대쪽으로 틀었다. 사용인들이 아닌 척하면서 은근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 걸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제일 이상한 건 디아르트였다. 아까 그의 방 앞에서 마주친 것만 해도 그렇다. 아마 평소의 디아르트라면 내 기분을 풀기 위해 전전긍긍할 게 아니라 도리어 장난을 쳤을 것이다. 무언가 오늘 내 기분이 상당히 중요한 듯해 보인달까.
더욱이 그답지 않게 화려하게 준비한 선상 파티까지…….
순간 N 년간 살아온 직감이 뇌리에 꽂혔다.
‘이건 무언가 있다!’
그것도 아주 큰 무언가가. 이를테면 프러포즈라든가 프러포즈 같은…….
나는 들뜬 표정의 사람들과 평소처럼 여유로워 보이지만 묘하게 긴장한 기색의 디아르트를 보며 확신했다.
“왜?”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날 의아하게 바라보는 디아르트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뭔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디아르트가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지만 내가 태연하게 바다로 시선을 돌리자 이내 의심을 거두는 게 보였다.
“어쩔까…….”
프러포즈 계획을 눈치챘다는 걸 알릴까 말까.
그 무뚝뚝한 남자가 프러포즈를 하겠답시고 이것저것 계획했다는 걸 상상하니 귀엽긴 하지만 아무래도 감이 좋지 않았다. 어쩐지 그와 어울리지 않게 귀족들을 초대한 선상 파티를 연다 싶더라니 아무래도 공개 프러포즈를 하려는 게 분명했다.
“와, 상상만 해도 얼굴이 빨개지는데.”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물론 그림은 이쁘겠지. 별이 수 놓인 밤하늘과 그를 고스란히 비추고 있는 밤바다, 아름다운 조명을 밝힌 갑판 위에서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반지를 받는 모습은 분명 꽤 낭만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드라마나 소설 속의 이야기라고. 막상 내가 그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주인공이 된다고 생각하니 팔뚝에 닭살이 다 돋았다.
‘지금이라도 말릴까.’
솔직히 내가 준비한 소소한 이벤트가 여러모로 훨씬 나은 거 같은데. 디아르트도 더 좋아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 말리기엔 디아르트의 공이 아까웠다. 타인과 함께 있는 걸 싫어하는 남자가 공개 프러포즈를 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노력이니까. 아니, 원래 남의 시선 따위 생각도 안 하는 남자니 상관없나. 근데 디아르트야 애초에 연애에 관심이 조금도 없던 남자이니 잘못된 선택을 했겠지만 주위에선 안 말리고 다들 뭐 했담.
“마님, 이 드레스로 입으시겠어요?”
릴리가 깨알 같은 다이아몬드가 무수히 박혀 반짝이는 푸른색 드레스를 들며 물었다.
“조금 더 밝은색이 좋을 것 같은데.”
어두운 푸른색 드레스는 묻히기 십상이었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디아르트의 프러포즈를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소설에 빙의도 됐는데 드라마 속 여주인공 한번 돼 보지 뭐.
한참 동안 드레스를 고르다가 하얀색 머메이드 드레스를 선택했다. 실크로 되어 있는 드레스는 몸에 딱 달라붙어 움직일 때마다 은은하게 반짝였다.
‘이 정도면 프러포즈 받는 장면에 딱 어울리겠지?’
움직이기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아름다운 그림을 위해 오늘 하루 활동성을 포기하기로 했다.
“마님, 장갑이 들어 있는 짐이 다른 곳으로 간 것 같아요. 제가 찾아보고 올게요.”
짐을 이리저리 뒤지던 릴리가 난색이 되어 말했다. 굳이 장갑이 필요할까 싶었지만 반지를 끼는데 더 예뻐 보이긴 하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자 릴리가 곧장 방을 나섰다.
선실에 홀로 남은 난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드레스며 머리에 꽂은 장식, 투명한 유리구두까지 프러포즈 받기에 완벽했다. 조금 낯간지럽긴 해도 막상 사람들 앞에서 프러포즈 받을 생각을 하니 설레기도 했다. 뭐, 내가 디아르트를 거절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으니 그의 청혼은 분명 해피 엔드가 될 테고 다른 사람들이 부러움과 시기 어린 시선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푸스스 웃던 난 선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입술을 감쳐물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들어오렴.”
릴리라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후 삐뚤어진 귀걸이를 매만지던 난 이내 거울로 비치는 낯선 사람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당신 누구야?”
내 물음에 선원 복장을 한 키가 작은 남자가 깊게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생기를 잃고 푸석푸석한 갈색 머리카락이 후두둑 쏟아졌다. 초록빛 눈동자와 마주친 난 아까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단 걸 깨달았다.
“아델리아.”
“오랜만이야.”
아델리아는 살이 많이 빠진 듯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나를 훑어내린 그녀가 피식 웃었다.
“날 이런 꼴로 만들어 놓고 넌 행복해 보이네.”
아델리아가 탓하는 말투로 이죽거렸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어.”
“지금쯤 변방으로 쫓겨났을 내가 여기에 있는 게 이상해? 세상엔 돈만 주면 안 되는 일이 없거든.”
뇌물로 병사들을 매수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아델리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여기 들어오는데 힘들었어. 생각보다 경비가 삼엄하더라고.”
아델리아가 혀를 차며 아쉽다는 듯 말했다.
“원래는 폭탄을 설치해서 배를 폭발시켜 버리려고 했는데 그건 가지고 들어올 수 없겠더라고.”
“뭐?”
얘가 지금 무슨 무서운 소릴 하는 거야?
그러고 보니 아델리아의 눈빛이 정상이 아니었다. 난 슬쩍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리쳐 봤자 소용없어. 지금 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내 생각을 꿰뚫고 있다는 듯 비웃은 아델리아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고 너 혼자만 잘 살 줄 알았어?”
나는 날 향해 바짝 날이 선 단도에 마른침을 삼켰다.


#097
“그걸로 뭐 하려고?”
아델리아가 꺼낸 단도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묻자 그녀가 웃었다. 그 웃음이 무척이나 위험해 보여서 나는 더럭 겁이 났다.
“밖에 아무도 없어?”
몇 번이고 소리쳐 봤지만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델리아가 피식 웃었다.
“소용없다니까. 지금쯤 다들 불 끄느라 정신없을걸?”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는 아델리아의 모습에 아연해졌다.
‘불까지 질렀단 말이야?’
배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상황에서 불이 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더욱이 배 안에는 수많은 사람이 타고 있어 인명 피해까지 날 가능성이 높았다. 본인도 위험해질 수 있는데 막장으로 가자는 건가?
“내가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간 줄 알아?!”
즐겁다는 듯 웃던 아델리아가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며 날 노려보았다.
“너만 아니었으면 지금 그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건 나였겠지.”
“아니, 네가 그렇게 된 건 너 때문이야.”
아무리 상황이 이래도 말은 바로 해야지. 그녀의 팔자를 꼰 건 아델리아 본인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후작의 양녀가 되었으면 만족하고 살지 헛된 욕심을 부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만들었으니까.
내 바른말이 화를 돋운 모양이다. 아델리아의 표정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단도를 고쳐잡는 게 보였다. 주책맞은 입술을 때리고 싶은 걸 참으며 그녀를 향해 양손을 들어 보였다.
“일단 진정해.”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너만 행복하게 살게 할 줄 알았어?”
아델리아가 단도로 날 겨눈 채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난 점점 구석으로 몰리며 릴리가 제발 빨리 돌아오길 속으로 빌었다.
등 뒤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바다를 담은 한 폭의 그림 같아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았던 커다란 창문이 지금은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왔다.
“차가운 바닷물에 천천히 죽어 가는 것도 나쁘지 않네.”
아델리아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점점 가까워졌고 결국 등 뒤로 커다란 창문이 닿았다. 금방이라도 바닷속으로 빠질 것만 같아 종아리가 찌릿해졌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난 애써 두려움을 가라앉히며 아델리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서 내가 빠진다고 해도 사람들이 금방 구해 줄 거야. 그리고 넌 붙잡힐 거고. 그럼 이번엔 정말 사형을 면하지 못할 수도 있어.”
“웃겨. 네가 지금 남 걱정할 때니? 뭐 그래도 충고를 받아들여서 확실하게 칼로 찔러 줄게.”
쟨 무슨 저런 잔인한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뱉는다니.
“지금이라도 멈춰. 그러면 다 없었던 일로 할게. 디아르트에게도 아무 말 하지 않을게.”
“헛소리하지 마. 내가 믿을 거 같아?”
아델리아가 단칼에 내 말을 잘랐다. 나는 불신 어린 그녀의 눈빛에 속고만 살았냐고 소리치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으며 차분하게 설득했다.
“차라리 이대로 도망쳐서 숨어 사는 게 어때? 이 방에 있는 보석만 팔아도 꽤 될 거야. 모자라면 내가 보내 줄게.”
“하. 너 지금 자랑하니?”
도주를 도와주겠다는 말인데 오히려 아델리아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아델리아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평생 구질구질하게 네 도움이나 받으며 살라고? 난 그렇게 못해.”
아니, 지금 네 상황에 그것보다 더 좋은 대책이 뭐가 있는데! 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델리아의 화를 돋울 만한 말을 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럼 네 죄를 면해 달라고 부탁할게. 디아르트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웃기지 마. 그딴 개소리 안 믿어.”
그럼 뭐 어쩌라고! 하마터면 한동안 입에 담지 않았던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으면 정말 날 죽이기라도 할 셈이야?
……그럴 셈이구나. 나는 살기로 번들거리는 아델리아의 눈동자를 보며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소용없다는 걸 직감했다. 아델리아는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점점 가까워졌다. 앞으로 내 미래는 둘 중 하나였다. 저 칼에 찔리든 바닷속으로 추락하든.
“날 죽이면 너도 끝이야.”
“어차피 난 갈 데까지 갔어. 혼자 죽을 순 없잖아?”
아델리아가 비릿하게 웃었다. 창문틀에 팔꿈치가 부딪쳤다. 이제는 정말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었다. 나는 조금만 휘청거려도 뒤로 넘어갈 것 같아 창문을 꽉 붙잡았다. 슬쩍 뒤돌아본 밤바다는 무척이나 까맣고 아득했다. 하필이면 배에서 제일 위층인 탓에 보기만 해도 발끝이 저렸다.
“어떡할 거야? 빠질 거니, 찔릴 거니?”
아델리아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원래도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확실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순간에도 저렇게 소리 내어 웃다니. 다시 한번 이 소설을 쓴 작가를 원망하며 그 순간 마음을 정했다.
‘상어는 없겠지?’
“죽어!”
나는 아델리아가 칼을 들고 내게 돌진하는 것과 동시에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몸을 반쯤 내민 채 떨어지는 날 구경하는 아델리아의 웃는 얼굴이 느릿하게 멀어졌다. 죽을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도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무척이나 고요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더니 적대감 어렸던 디아르트의 태도가 점점 바뀌어 가던 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도대체 언제부터 나를 좋아한 건지 궁금했는데, 언젠가 그가 했던 말대로 어느 한순간을 콕 집을 수 없게 날 향한 그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졌다. 하기야 나 역시 디아르트를 좋아하게 된 게 언제냐고 물으면 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의 첫 만남을 기분 좋은 기억으로 바꾸고 싶었는데 어쩌면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차가운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쳐졌다. 온몸을 휘감는 얼음장 같은 물을 느끼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왜 곧 죽을 사람처럼 구는 거야?!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순 없잖아!
‘난 앞으로 오십 년은 더 살 거란 말이야!’
난 수면 밖으로 나가기 위해 팔다리를 휘저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수영을 못하는 데다 몸에 달라붙는 드레스 때문에 발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더욱이 배 주위로 일어나는 물보라에 휘말려 이리저리 몸이 휩쓸렸다. 코와 입으로 바닷물이 쉴 틈 없이 밀려 들어왔다.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고 숨이 막혀 고통스러웠다. 점점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 * *
“로에니는?”
배가 출발한 후 프러포즈 이벤트가 제대로 준비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왔던 디아르트는 귀족들에게 붙잡혀 있다가 응접실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서둘러 로에니가 있는 선실로 향하던 디아르트는 반대쪽 복도에서 종종 걸어오는 릴리를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마님은 선실에 계세요.”
“혼자 두었어?”
절대 로에니를 혼자 두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디아르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자 릴리가 움찔 몸을 떨었다.
“마님의 짐이 다른 곳에 딸려가서 가져오느라…… 선실 앞에 기사님들이 지키고 계세요.”
기사들이 있어서 잠깐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고 변명하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릴리가 들고 있는 가방에 흘깃 시선을 던진 디아르트가 맵차게 등을 돌렸다.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선실로 향하는 디아르트의 뒤로 릴리가 힘겹게 따라붙었다.
‘별일 없겠지.’
하녀 아이가 자리를 비우면 얼마나 비웠을까. 게다가 선실 앞에는 기사들이 지키고 있으니 별일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디아르트는 뒷덜미가 선득했다. 이 알 수 없는 불안함은 아까 거리에서 로에니가 아델리아 맥그리거를 봤다고 말을 꺼냈을 때부터 시작됐다. 로에니는 잘못 본 것 같다고 했지만 디아르트는 그냥 흘려 넘길 수 없었다. 하여 원래 계획보다 배의 경비를 더욱 강화하고 드나드는 사람들의 신원을 철저하게 파악하라고 명하긴 했지만 언제나 틈은 있고 사람이 하는 일은 완벽하기 어려웠다.
점점 빨라지던 디아르트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풍겨 왔기 때문이다. 설마 하는 생각에 다급히 뛰어간 디아르트는 선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퍼지는 연기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디아르트가 바쁘게 움직이는 기사를 불렀다.
“무슨 일이야.”
“식품 보관 창고에서 불이 났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모두 진화하고 혹시 다른 곳에는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디아르트는 문득 텅 비어 있는 로에니의 선실 앞을 응시하며 불길함에 어깨를 굳혔다. 뒤늦게 쫓아온 릴리가 당황한 기색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그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디아르트의 온 신경은 굳게 닫혀 있는 선실에 쏠려 있었다. 이 안에 로에니가 있을 텐데, 어쩐지 문고리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디아르트는 이내 선실 문을 확 잡아당겼다.


#098
순간 서늘하면서 비릿한 바닷바람이 훅 끼쳐 왔다. 활짝 열려 있는 창문에 달린 커튼이 불길하게 나부끼고 있었고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여자가 절 보고 놀라 몸을 굳히는 게 보였다. 방 안에 있는 귀중품들을 닥치는 대로 챙기고 있던 모양새를 감흥 없이 바라보던 디아르트는 이내 바닥에 부주의하게 내팽개쳐져 있는 단도를 발견했다. 있어서는 안 될 건 있는데 있어야 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디아르트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어넘기며 방 안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그의 시선이 다시 창문에 닿았다. 찢어진 하얀색 실크 천이 창틀 거스러미에 걸려 나풀거렸다. 그가 천을 집어 올리자 등 뒤에서 “마님!” 하고 릴리가 비명을 질렀다.
디아르트의 시선이 어두운 밤바다에 닿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더할 수 없이 흥겨웠던 선상 파티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갑판 위에서 파티를 즐기고 있던 귀족들은 기사들 손에 끌려 나오는 아델리아의 모습에 경악했다. 분명 북부 변방으로 후송되었을 죄인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 의아한 것도 잠시, 그녀의 위협을 받은 공작 부인이 바다로 투신했다는 말을 들은 귀족들은 충격에 말을 잃었다. 더욱이 공작 부인을 구하기 위해 공작마저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니 다들 황망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놀란 건 자비스와 레티시아였다. 아델리아가 도망쳤다는 전언을 들은 바 없는 자비스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움직였고, 레티시아는 칠흑처럼 까만 밤바다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밤바다는 조용하고 잔잔해 보이지만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배 안은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조차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할 만큼 심각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작은 보트를 탄 기사들이 선박 주위를 탐색하며 젓는 물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시간이 흐르고 선실로 들어가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갑판 위에서 공작 부부가 무사히 돌아오길 기다렸다.
달이 꽤 기울었을 때 휘턴 공작이 마침내 자신의 아내를 끌어안고 돌아왔다. 사람들은 축 늘어진 공작 부인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푸른 빛을 띠는 창백한 얼굴에 다들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인을 온몸으로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공작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달려오는 사용인들을 물린 휘턴 공작이 빠른 걸음으로 선실로 향했다. 사람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야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냉담한 남자가 저토록 절박한 얼굴도 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하여 휘턴 공작부인의 숨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다들 제 일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요즘 휘턴 가는 정원에 핀 장미마저 생기를 잃은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택의 안주인이 며칠째 침대 위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활기찼던 저택은 마치 죽은 듯이 고요해졌고, 사용인들의 표정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디아르트만큼 괴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매일 아침부터 다음 날 아침이 될 때까지 눈을 뜨지 않는 로에니의 곁에 붙어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는 그의 모습에 사용인들 사이에선 공작 부인보다 공작에게 먼저 큰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주인님, 어쩌시려고 자꾸 식사를 거르십니까.”
보다 못한 집사 고든이 몇 번이고 식사와 수면을 권했지만 디아르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꽉 물린 듯 일자로 다물어진 그의 입에서 가끔 나오는 말이라고는,
“사우 일족에게선 아직도 소식 없나.”
로에니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떠난 사우 일족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초가을의 밤바다는 무척이나 차가웠다. 자신조차 이럴진대 로에니는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생각하며 미친 듯이 배 근처를 헤집던 디아르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무서워졌다. 이대로 이렇게 갑자기 순식간에 로에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깊고 어두운 밤바다가 아득해 점점 절망에 잠식당하던 그때, 배에 매달린 밧줄을 붙잡고 있는 로에니를 발견한 그는 생전 믿지 않던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렸다.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로에니의 팔에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그대로 검은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로에니를 다급하게 헤엄쳐 구해 낸 디아르트는 얼음장 같은 몸을 끌어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시간 바닷속에 있었던 탓에 로에니의 상태는 무척 위독했다. 디아르트는 떨어진 체온을 올리기 위해 빳빳하게 굳은 그녀의 팔다리를 필사적으로 주물렀다. 그의 입에서 ‘제발’이라는 애원이 연신 흘러나왔다. 그 마음이 통했을까, 로에니의 혈색이 조금씩 돌아왔을 때 디아르트가 그 미약한 숨을 붙잡아 매달 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는 보는 사람이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 이후로 며칠이 지났지만 로에니는 눈을 뜨지 않았다. 디아르트는 물살에 휩쓸리며 여기저기 생채기를 입긴 했으나 큰 상처가 없어 생명에 지장은 없다는 주치의의 멱살을 붙잡아 집어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괜찮다면 지금까지 눈을 뜨지 않을 리 없었다. 전국에서 불러 모은 의사들도 다들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돌팔이 같은 소리뿐이었다. 황실에서 보낸 황의 역시 마찬가지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믿을 건 사우 일족뿐이었다. 로에니가 정신을 잃고 있는 건 어쩌면 저주로 인한 부작용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더라도 치료술에 능한 일족이니 분명 방도를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오늘도 기다리던 소식은 없는지 고든이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디아르트는 별 반응이 없었다. 하나 고든은 그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사이 마른 듯한 주인이 걱정되어 몇 마디 더 하려 입술을 달싹이던 고든은 이내 조용히 방을 나섰다.
로에니와 둘이 남게 된 디아르트는 두 손으로 감싸고 있던 로에니의 손을 한 손으로 고쳐 잡으며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눈썹 위에 찢긴 상처가 많이 아문 게 보였다. 다행이었으나 그만큼 그녀가 일어나지 못한 날들이 길어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당신, 정말 사랑받고 있더군.”
입술이 마른 만큼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을 뜨지 못하더라도 귀는 열려 있으니 자꾸만 말을 걸어야 좋다는 사우 일족의 조언을 들은 후로 그는 말이 많아졌다.
“오늘 아침에도 영지민들이 약초를 주고 갔어.”
로에니가 불의의 사고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영지민들은 하루가 멀다고 찾아왔다. 저택에는 그들이 로에니의 쾌유를 바라며 건넨 약초며 과일 같은 음식들이 쌓여 갔다.
디아르트는 두서없는 말을 이어갔다. 그중 어느 것에라도 반응하길 바랐으나 로에니는 미동도 없었다. 그 평온한 얼굴을 가만 바라보던 디아르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프러포즈하려고 했다며.”
로에니의 하녀로부터 뒤늦게 그녀가 제게 프러포즈할 계획이었다는 소리를 전해 들은 후 그는 제 방을 찾았었다. 이것저것 손이 닿은 곳들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침대 앞에 선 디아르트는 한쪽에 늘어진 끈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캐노피 위에 숨겨져 있던 장미 꽃잎들이 눈처럼 나풀나풀 쏟아졌다. 디아르트는 그날 아침 장미 꽃잎을 든 채 자신을 보고 당황하던 로에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날 방에 들어가 볼 걸 그랬어.”
무언가 이상한 로에니의 태도를 눈치챘으면서도 프러포즈할 생각에 급급해 그냥 넘어간 걸 이렇게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날 방에 들어갔더라면, 그래서 로에니의 계획을 알아챘더라면 어쩌면 배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 종일 그녀를 안고 사랑스러운 입에서 나온 청혼을 몇 번이고 곱씹었겠지.
애초에 선상 프러포즈를 계획하는 게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로에니가 물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테지. 아니, 로에니가 그 여자를 본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때라도 저택에 돌아갔어야 했다. 하다못해 경비하는 눈을 더 늘렸더라면. 자신이 로에니의 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붙잡는 귀족들을 뿌리치고 곧장 선실로 돌아갔더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후회들로 점철된 디아르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디아르트는 로에니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두 손을 꽉 쥐고 조금이라도 제 기운이 그녀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던 그는 이내 로에니의 옆자리로 파고들었다. 로에니를 꽉 끌어안고 정수리의 입술을 묻었다. 원래라면 등을 감싸 안았을 손이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게 슬펐다. 이대로 영영 감긴 눈이 뜨이지 않을까 디아르트는 더할 수 없이 두려웠다.


#099
휘턴 가가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문을 걸어 잠근 사이 아델리아 맥그리거의 교수형이 이뤄졌다. 죄인에게 온후한 처벌을 내리기로 유명한 제국이었지만 죄인 신분으로 또다시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과 현재까지 공작 부인이 의식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 징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흔치 않은 처형 소식에 제국이 들썩거렸지만 휘턴 가만큼은 예외였다. 디아르트는 아델리아의 소식을 듣고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만약 로에니가 침대에서 일어났더라면 그가 직접 아델리아의 목을 졸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굳게 닫힌 로에니가 눈을 뜨는 데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었다.
“정원에 그네를 달았어. 바이올렛 하우스에 있는 것보다 높게 만들었으니 마음에 들 거야.”
오늘도 로에니에게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던 디아르트가 초췌한 얼굴을 두 손으로 쓸었다. 누워 있는 로에니보다 그의 안색이 훨씬 나빴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눈 밑이 퀭하게 죽어 있었다.
“제비꽃도 심었어. 내년 봄에는 예쁘게 필 거라더군.”
디아르트가 힘겹게 말을 잇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도 방에 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사우 일족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기에 그는 낮게 방문을 허했다. 고든이 들어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토록 기다리던 사우 일족이 모습을 드러내자 디아르트가 벌떡 일어섰다.
“방도를 찾았나?”
사우 일족이 채 인사를 하기도 전에 디아르트가 다급히 물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사우 일족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디아르트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모른 척하며 다시 물었다.
“로에니를 일어나게 할 방법을 찾았냐고 묻잖아.”
“그게…….”
우물쭈물하며 속을 태우는 사우 일족의 멱살을 잡아채려던 디아르트의 이어지는 그의 말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고서까지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원인을 모른다면 해결 방법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마지막 남은 기대가 무너진 디아르트가 주먹을 와락 움켜쥐었다.
“저주에 걸린 몸은 외부 요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의식을 찾지 못하는 건 아무래도…….”
“아무래도 뭐.”
“……마님 스스로 깨어나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사우 일족이 디아르트의 눈치를 흘깃 살폈다. 무섭게 굳은 얼굴이 평소처럼 두렵게 느껴지지 않는 건 그 무표정 이면으로 무너지는 그의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사우 일족은 무어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제 아내에게 다가가는 디아르트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디아르트는 덜컥 내려앉은 자신과 달리 평온한 얼굴로 잠든 듯 눈을 감고 있는 로에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가 허탈한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본인이 깨어나길 원치 않는다고.”
* * *
‘아냐! 아니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억울해서 가슴을 쾅쾅 내리치고 싶어도 손가락 하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저 돌팔이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누구보다 깨어나고 싶은 게 바로 나라고!
개떡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지만 무력하게 누워만 있어야 하는 게 분통 터졌다. 디아르트가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 반응한 걸 보면 사우 일족이라는 말인데 치료술에 능하다는 사람이 저런 무책임한 소리를 하다니. 아무래도 이 세계는 돌팔이들밖에 없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하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내가 의식을 찾은 건 이미 한참 전의 일이었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전신 마비 같은 상태였다. 그걸 깨달았을 때 무척이나 두려웠지만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말을 거는 디아르트 덕분에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내가 이런 상태에 빠진 데에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있는 것 같았다. 빙의한 데다 저주까지 걸린 상태에서 죽다 살아났으니 아무래도 몸에 과부하가 걸린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 몸이 회복될 때까지 마음을 편히 먹고 충분한 시간을 갖고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저 망할 놈의 돌팔이가 내 평정심을 박살 내고 있었다.
가뜩이나 하루 종일 내 옆에 붙어 있기만 할 뿐 제 몸을 챙기지 않는 디아르트가 걱정돼 점점 초조해지는 상황에서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대로 저 돌팔이 멱살부터 잡겠다고 다짐했다.
‘아니, 디아르트도 그래. 저 말을 믿니?’
내 손을 붙들고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는 디아르트는 사우 일족의 말을 믿는 게 분명했다. 보지 않아도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떻게 저 말을 믿을 수 있는지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내가 너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러고 보니 축제 때 거리에서 만난 점술가의 말도 철석같이 믿었지. 돌팔이라고 할 땐 언제고 내가 어디만 가면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은근한 협박을 일삼던 디아르트를 떠올린 난 그가 어디 가서 사기당하는 일이 없도록 잘 챙기자고 결심했다.
결심하는 건 좋지만 일단 움직일 수가 있어야지.
나는 다시 한번 눈을 뜨기 위해 온 힘을 주었다. 하지만 역시나 소용없었다. 답답함에 한숨이라도 크게 쉬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니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사우 일족이 나간 듯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후 디아르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깨어나고 싶지 않은 건데. 내가 싫어졌나?”
정말 제대로 믿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너한테 프러포즈하려고 했던 건 그새 잊은 거니? 라고 소리치며 돌팔이보다 디아르트의 멱살을 먼저 잡고 싶어졌다.
“아니면 늦게 구해줘서 화가 난 건가.”
디아르트가 제 나름대로 생각해 낸 이유들을 늘어놓았다. 이대로라면 내게 숨기고 있던 그의 치부까지 나올 기세였다. 하지만 그가 싫어지기는커녕 이번 일로 도리어 그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진 내겐 모두 말도 안 되는 소리일 뿐이었다.
아델리아를 피해 바닷속으로 떨어지면서도, 거센 물살에 휩쓸리며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계속해서 생각나는 건 디아르트의 얼굴이었다. 온몸이 고통스럽게 얼어붙고 밧줄을 잡은 손에 힘이 빠져갈 때도 그를 생각하며 견뎠다. 그리고 마침내 흐릿한 시야로 나를 응시하는 디아르트의 절박한 얼굴이 보였을 때 안도감이 밀려오는 동시에 겨우 잡고 있던 정신을 놓으며 절감했다. 내가 정말 저 남자를 사랑하는 모양이라고.
‘그랬는데!’
당신은 나에 대한 믿음이 고작 이 정도니? 정신만 차려 봐,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세뇌시켜 줄 테니까!
내 사랑을 의심받는다는 억울함 때문인지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눈을 뜰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떠져라, 떠져라! 외치며 눈에 힘을 주는 그때, 디아르트가 불쑥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귓가로 그의 서늘한 목소리가 닿았다.
“정말 나한테서 도망치려는 건가? 난 당신 절대 안 놔줘. 이대로 평생 누워 있더라도 내 옆에 있어.”
……방금까지만 해도 애틋한 장면을 찍고 있지 않았니? 왜 갑자기 공포물이 되는 거니.
순간 디아르트의 집착 쩌는 성격이 떠오른 난 움찔했다. 이 남자라면 정말 그러고도 남았다. 별안간 돌변한 분위기에 놀란 탓인지 나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였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익숙한 침대 천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무척이나 푸석푸석해진 은발이었다.
내 귓가에 엄청난 집착을 쏟아붓던 디아르트는 미세한 움직임에 몸을 흠칫 굳히더니 고개를 들었다. 처음엔 상황을 자각하지 못했는지 덤덤하던 금안이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래졌다. 내 이름을 부르려는 듯 입술을 벌렸던 그가 멈칫했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디아르트가 조심스레 내 뺨을 쓸었다. 그의 손이 떨리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생각보다 더 수척해진 디아르트의 얼굴에 미간을 찌푸렸다. 고든이 그토록 걱정을 쏟아내던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강건하던 남자가 왜 이렇게 해쓱해진 거야. 한마디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자 그가 곧바로 내 입을 막았다.
“말하지 마.”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표정에서 난 그가 지금 이 상황이 꿈일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눈을 뜨지 못하는 동안 그는 이런 꿈을 몇 번이고 꾼 모양이었다. 꿈에서 깰 때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불안함 가득한 디아르트의 얼굴을 보니 나도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았다. 나 살았구나. 살아서 이 남자를 다시 만났구나 싶어 목구멍이 시큰해졌다.
내가 정말 눈을 떴다는 걸 완전히 믿기 힘든 듯 괴로워하는 얼굴이 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난 부러 유쾌한 장난을 치기로 했다. 오랜만에 끌어 올린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내 것이 아닌 양 낯설었다.
“……당신, 누구예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디아르트의 눈썹이 일그러진다 싶더니 이내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100
‘우, 울어?’
곧바로 ‘놀랐죠!’를 외치려고 했던 난 당황해 입술을 벙긋거렸다.
장난이 너무 심했나?
하기야 며칠 동안 그렇게 맘고생을 시켜 놓고 눈 뜨자마자 하는 소리가 고작 당신은 누구냐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 철이 없었다. 그치만 드라마에서나 통하는 줄 알았던 기억 상실 레퍼토리가 그대로 먹힐 줄은 나도 몰랐지. 당연히 안 믿을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분위기를 풀려다가 도리어 심각해진 상황에 눈만 깜박이던 난 천천히 손을 들었다. 오랜만에 움직인 탓인지 팔이 무거웠지만 턱 끝에서 툭툭 떨어지는 눈물에 시선이 뺏겨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언젠가 디아르트가 놀리듯 말했던 것처럼 우는 남자는 내 취향이었다. 잘생긴 남자가 우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얼마나 심쿵인데. 하지만 그건 제3자였을 때나 설레는 모양이었다. 파리한 낯빛의 디아르트는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듯한 금안으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마치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내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무언가가 목 끝까지 울컥 올라왔다.
내 손가락 끝이 그의 턱에 닿자 움찔 어깨를 떤 디아르트가 곧장 자신의 손으로 내 손을 감싸듯 잡고 얼굴을 기댔다. 보기에만 살이 쪽 빠진 게 아니라 손바닥에 닿는 턱선이 더욱 날카롭게 벼려져 있어 가슴이 시큰했다.
“놀랐어요? 농담한 건데…….”
“……알아.”
디아르트의 목소리는 나만큼이나 잠겨 있었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아는 사람이 왜 울어? 하는 표정으로 보자 디아르트가 픽 하고 옅게 웃었다.
“날 보는 당신 눈빛을 내가 몰라볼 것 같아?”
디아르트는 겹쳐져 있는 내 손가락에 손가락을 얽으며 고쳐 잡았다. 그와 맞닿을 때면 늘 그랬듯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감각보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피부가 더욱 신경 쓰였다.
“근데 왜 울어요. 진짜 믿는 줄 알고 놀랐잖아요.”
“안심해서.”
당신이 말을 하니까. 그 소리를 내뱉는 순간에도 디아르트의 눈 끝에서 글썽거리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당신이 이렇게 잘 우는 남자일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내 아내만큼은 아닌 것 같군.”
디아르트가 손으로 부드럽게 내 눈가를 쓸었다. 그제야 난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둑이 터지듯 눈물이 와락 솟구쳤다. 내가 나머지 손을 들어 올리자 디아르트가 기다렸다는 듯 그 손을 잡아 제 목에 두르며 몸을 낮췄다. 나는 그를 꽉 안은 채, 또 그에게 꽉 안긴 채 울음을 토해 냈다.
나 정말 살았구나.
괜찮을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할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품에 넘치게 들어찬 부피와 이제 안심하라는 듯 더욱 바투 끌어안는 남자로 인해 나는 드디어 온전히 안심할 수 있었다.
* * *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한 일주일 남짓 지난 줄 알았는데 보름하고도 며칠이 더 흘렀다는 말에 디아르트가 사우 일족의 헛소리를 믿었던 것도 조금 이해가 되었다. 나라도 그 긴 시간 동안 디아르트가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별생각 다 들었을 것이다.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달려온 건 페이셔 공작이었다. 그는 휘턴 대공작과 변방에 있다가 뒤늦게 내 사고에 대한 전갈을 받고 급하게 귀환한 뒤로 매일같이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디아르트 못지않게 해쓱해진 페이셔 공작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가 얼굴을 숨기기 전 안도로 무너지는 표정을 본 난 또 한 번 울컥했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침대 옆에서 주저하던 페이셔 공작이 내 손을 붙잡았다. 디아르트처럼 기운이 전해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 크고 단단한 손은 다른 무게로 무척이나 안심되면서 든든했다. 정말 내 아버지도 아닌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저 상처 보이니? 네 소식을 듣자마자 뛰어가다가 넘어져서 생긴 거란다.”
디아르트의 빨개진 눈을 놀리던 휘턴 대공작이 이번엔 페이셔 공작의 이마에 난 상처에 얽힌 일화를 털어놓았다. 연신 유쾌한 장난을 치며 분위기를 풀면서도 몇 번이고 나를 꼼꼼히 살피는 시선은 그 역시 날 몹시 걱정했다는 걸 짐작게 했다. 페이셔 공작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휘턴 대공작을 노려보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페이셔 공작과 휘턴 대공작이 떠난 후에는 릴리가 들이닥쳤다. 들어올 때부터 이미 뺨이 잔뜩 젖어있던 릴리는 나를 보자마자 손으로 입을 틀어막더니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제가 마님 곁을 떠나지만 않았어도 그런 사고는 없었을 텐데…… 죄송해요, 마님.”
괜찮다며 위로해도 릴리는 디아르트에 의해 쫓겨날 때까지 침대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이외에도 다른 사용인들과 기사들이 병문안을 청했지만 디아르트는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물론 자비스의 방문 요청 역시 가차 없이 잘라 낸 그는 한시도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마터면 잃을 뻔했던 품에 안겨 있는 시간이 새삼 소중한 터라 나 역시 굳이 그를 말리지 않았다.
저녁 식사 후 디아르트의 품에 안긴 채 침대에 누워 있던 난 문득 아델리아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졌다. 디아르트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뜩잖은 얼굴이었지만 계속되는 채근에 짧게 대꾸했다.
“교수형에 처해졌어.”
설마 죽었을 줄은 몰랐던 터라 숨을 들이켜자 디아르트가 이를 아득 갈며 덧붙였다.
“빌어먹게 관대한 처사지.”
만약 자신이었다면 결코 그렇게 편히 끝내게 두지 않았을 거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칼을 들이민 채 내게 다가오던 아델리아를 떠올렸다. 날 죽이려던 사람이고 실제로 정말 죽을 뻔했기에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그녀와는 완전히 끝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럼에도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아 화제를 돌렸다.
“참, 우리 이혼은 어떻게 됐어요?”
디아르트가 이혼 절차를 서두르기 위해 손을 썼다는 걸 알기에 내가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마무리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디아르트의 표정을 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당신이 누워 있는데 이혼할 순 없었어.”
나는 디아르트가 삼킨 말이 뭔지 알 수 있었다. 평생 누워 있더라도 제 옆에 있으라는 남자가 하는 생각이야 뻔했다.
“그럼 결혼식도 늦춰야겠네요.”
장난기가 솟은 내가 태연하게 말하자 디아르트는 그 생각을 못 했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내일 당장 처리하라고 하지. 당신은 정말 눈만 떼면 도망을 치니 하루라도 빨리 내 옆에 제대로 붙여 놔야겠어.”
아 놔, 또 이 소리. 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자꾸 누가 도망을 친다는 거니. 그리고 지금도 네 옆에 있잖아!
“그때 괜히 점을 봐 가지고. 그 소리 좀 제발 그만 잊어요. 내가 왜 도망을 가.”
몇 번이나 좋아한다고 했는데 왜 못 믿어요? 쏘아붙이자 디아르트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 말이 도무지 잊히지 않아.”
디아르트는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가끔 당신이 갑자기 훌쩍 사라질 것 같아 불안하거든. 이번에 눈을 떴을 때도 이상하게 초조했어. 당신이 내가 아는 여자가 아닐까 봐.”
나도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군. 디아르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언젠가 디아르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본능적으로 내가 예전의 로에니가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가 빙의했던 것처럼 또 갑자기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예전의 로에니는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나는 완벽히 로에니 휘턴이었고 앞으로 그의 옆을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이다.
디아르트에게 내가 사라질 일 따위 절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 모든 일을 설명하긴 힘들었고 한다 해도 허무맹랑하게 들릴 게 분명한 터라 나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다짐했던 일을 실행에 옮길 차례였다.
“당신 안 되겠네요.”
나는 짐짓 엄한 눈초리를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곤 그의 두 뺨을 잡아 나를 바라보게 했다. 손바닥에 뺨이 눌린 모습이 무척 귀여웠지만 표정을 풀지 않으려 입 안쪽 살을 꽉 깨물었다.
“부부 사이에 이렇게 믿음이 없어서야 앞으로 어떻게 살겠어요. 아무래도 결혼은 보류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드네요. 네. 해야죠. 신 앞에서 아주 확실하게 영원의 맹세를 해요.”
장난을 치려다가 무섭게 굳어지는 디아르트를 보고 얼른 말을 돌리자 그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부드러워졌다. 이렇게 양 볼이 눌리고도 무서워 보이다니 정말 대단한 남자였다.
“몇 번이고 다시 말하겠지만 들을 때마다 계속 새겨 넣어요.”
살짝 수그러들었던 기세를 애써 펼치며 목을 가다듬은 난 그의 금안과 시선을 마주하며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 내뱉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난 조금씩 커지는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입술을 부딪쳤다.


#101
몇 번이나 말해 주겠다고는 했지만 몇 번씩이나 시킬 줄은 몰랐지. 질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들려 달라는 요청에 응하느라 진이 빠졌다. 목구멍이 욱신거려 흠흠, 헛기침을 내뱉자 귀를 지분거리고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면밀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디아르트가 물었다.
“물 가져올까?”
고개를 끄덕이자 뺨에 입을 맞춘 디아르트가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레 근육이 잘 잡힌 등을 따라가던 시선이 어깨에 난 상처를 담았다. 정신없이 매달리던 중에 긁은 모양이다. 달아오르는 뺨을 손으로 식히며 눈을 돌렸다.
물을 들고 돌아온 디아르트가 나를 일으켜 앉혔다. 허리가 찌릿해 그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디아르트와의 관계에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잦은 마찰로 인해 열상을 입은 아래가 욱신거렸다.
물 잔을 향해 뻗은 손을 무시한 디아르트가 입술에 물 잔을 대 주었다. 생각보다 꽤 목이 탔었는지 물이 끊임없이 들어갔다. 한 잔을 다 비워 내자 가볍게 입을 맞춘 디아르트가 협탁에 물 잔을 내려놓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눕히려는 디아르트에게 고개를 저었다.
“앉아 있을래요.”
“힘들지 않아?”
“괜찮아요.”
지금 누우면 더 힘들게 될 것 같거든.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디아르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이내 몸을 움직였다. 내 뒤쪽으로 자리를 옮긴 그가 등을 제 가슴에 기대게 했다. 아직 채 땀이 식지 않은 터라 떨어지려고 버둥거렸지만 도리어 더 찰싹 달라붙게 되는 결과만 낳았다. 디아르트는 마치 어디 한 군데라도 피부가 맞닿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 집요했다.
문득 첫날밤이 떠올랐다. 그때와 똑같이 전개되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불안감이 몰려오는데.
“다시 말해 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던 디아르트가 당연하게 요구했다. 그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열이 오르는 피부를 애써 모른 척하고 있던 난 곧바로 디아르트가 원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사랑해요.”
거의 반사적으로 나온 대답에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면 디아르트를 세뇌시키려다가 내가 세뇌된 거 아니냐고. 사람이 이래서 반복 학습이 무섭다는 거구나, 절감할 수 있었다. 목덜미에 묻은 그의 입술이 만족스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다는 게 안 봐도 느껴졌다. 좋아하니까 나도 좋긴 한데 뭘까 이 손해 보는 기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남자, 몇 번이고 사랑한다는 말을 얻어내면서도 정작 돌려주는 법이 없다. 억울함이 확 몰려왔다. 내 기분이 달라졌다는 걸 기민하게 알아챈 디아르트가 보듬고 있던 배꼽 주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왜 그래.”
무슨 말을 하든 다 들어줄 것 다 들어줄 것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만큼 그의 기분이 무척 좋다는 의미였다. 디아르트가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나긋나긋하게 얼렀다. 손이 은밀하게 움직이며 나를 꼬드겼다.
말해 보라고 하니 뺄 것 없이 물었다.
“당신은 왜 안 해 줘요?”
“뭘?”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목소리였다. 디아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은색 머리칼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절로 움츠러드는 어깨를 애써 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응.”
이 와중에도 기분 좋은지 디아르트의 목소리가 상기됐다. 그렇게 수없이 들어 놓고 들을 때마다 좋아하는 게 새삼 신기하긴 했지만 또 그만큼 얄미웠다. 너 혼자 좋으면 다니?
“그러고 끝이에요? 나한테 해 줄 말 없어요?”
내 물음에 고민하던 디아르트가 낮게 탄식을 내뱉었다. 미처 생각을 못 한 기색이었다. 그래도 눈치가 빠른 남자라 다행이다. 하마터면 나한테는 왜 사랑한다는 말 안 해 주냐고 골낼 뻔했잖아. 디아르트는 나를 더욱 바짝 끌어안으며 내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 당연해서 잊었어.”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사랑해. 나조차 놀라고 있을 만큼.”
듣기 좋은 단어에 귀가 간질거렸다. 진부하기 그지없는 말 한마디가 이토록 심장을 뛰게 할 줄은 몰랐다. 눈치 없이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을 고스란히 느낀 디아르트가 낮게 웃었다. 그의 가칠한 손가락이 늑골을 쓸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고 있어.”
디아르트가 이래서 자꾸만 다시 말해 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들을 때마다 가슴 어딘가가 충만하게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언제부턴가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어. 달라진 모습에 일던 호기심은 순식간에 호감으로 변했고. 호감이 사랑이 되는 건 더욱 빨랐지. 어느 순간에는 스스로도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을 만큼 당신을 사랑하고 있더군. 이런 내가 가끔 낯설게 느껴지지만 좋아. 마음에 들어.”
그가 내뱉는 한 글자 한 글자에는 무거울 만큼 진심이 담겨 있었다. 디아르트가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문득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나를 올려다보던 경멸 어린 눈빛을 이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처럼 나를 사랑하게 된 디아르트는 정말 많이 변했다.
“시종을 시켜 나를 침실에서 내쫓던 남자 맞아요?”
장난스러운 타박에 디아르트가 신음을 삼켰다.
“그건 이제 그만 잊어 줄 순 없나?”
“내 회심의 농담을 야멸차게 바라보던 시선을 잊을 수가 없네요.”
“로에니…….”
“괜찮아요. 전 아직도 당신의 ‘얼굴’을 좋아하니까.”
키득거리자 디아르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단단한 허벅지로 나를 가두듯 감싼 디아르트가 용서를 구했다.
“다신 그럴 일 없어. 맹세하지.”
“맹세까진 필요 없고 얼굴 관리 잘해요. 내가 당신한테 약한 가장 큰 이유가 그 잘생긴 얼굴 때문이니까. 못생겨지면 나도 어떻게 변할지 몰라요?”
“노력하지. 그리고 나도 좋아해, 당신 얼굴.”
“내가 좀 예쁘긴 하죠?”
“못생겨져도 좋을 거야. 나이 들어서 주름이 진다 해도 예쁠 거고.”
“할머니가 될 때까지 옆에 있으라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안 그러려고 했나?”
배꼽 주위를 배회하던 손이 노골적인 의도를 가지고 움직였다. 그 음흉한 손을 찰싹 내리치자 디아르트가 모른 척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되게 해 줄게.”
귓가에 따뜻하면서도 다정한 숨결이 닿았다.
“누구도 당신을 두고 헛소리하는 일 없을 거야. 그 어느 여인보다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가 될 테니까.”
디아르트가 굳이 이혼 후에 다시 결혼하려는 이유가 이거 때문이었구나. 남편에게 외면당하는 부인이라고 조롱받았던 불행한 내 지난 결혼 생활을 행복한 기억으로 덧씌워 주고 싶어서.
“앞으로 내 모든 시간은 당신 거니 마음대로 써먹어.”
부디 그래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목소리였다.
“내가 성가시게 하면 어쩌려고.”
“바라던 바야. 실컷 성가시게 해 줘.”
나를 향한 디아르트의 진심이 전해져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거 프러포즈예요?”
“……너무 멋없었나.”
꽃 한 송이 없는 성의 없는 청혼이라고 생각했는지 디아르트가 미간을 구기는 게 눈에 그려졌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공개적으로 받는 것보다 훨씬 좋네요.”
“……알고 있었어?”
“당연하죠. 다들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 줄 알았어요? 배에 타자마자 눈치챘다구요. 사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견뎌 보려고 한 거지 정말 별로였어요. 도망칠까 잠깐 고민까지 했다니까요.”
‘도망’이라는 단어에 민감한 남자가 어깨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찔끔한 난 얼른 덧붙였다.
“앞의 말이 중요한 거라고요. 당신을 사랑하니까 견뎌 보려고 했다는 게.”
“그러고 보니 당신도 나한테 프러포즈하려고 했지.”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어찌나 날렵한지 눈 깜박할 사이에 나를 눕히고 올라탄 디아르트가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말아 올라갔다.
“난 당신이 하려던 프러포즈가 마음에 들던데.”
디아르트가 엄지로 내 입술을 문질렀다. 은근한 기운이 담긴 손길이었다. 건조했던 입술이 순식간에 다시 촉촉해졌다. 한순간에 급변한 공기에 침이 고였다.
“지금 해 주면 안 되나?”
“중요한 게 없어서요.”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디아르트가 무척이나 섹시한 터다. 그늘진 금안이 유혹적으로 번들거렸다. 뭐가 없냐고 묻는 얼굴에 메인 목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반지요. 입술에 물고 키스할 생각이었거든요.”
“아깝군.”
디아르트는 진심으로 아까운지 미간을 좁혔다. 프러포즈 받는 장면을 상상해 보는 듯하던 디아르트가 미소 지었다. 분명 짓궂은 미소인데 사람을 홀리려 작정한 것 같은 눈빛에 나도 모르게 완전히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 프러포즈에서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잖나.”
“……어떤 거요?”
한 박자 느린 물음에 디아르트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대답 대신 내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문 디아르트는 이내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정신없이 얽히는 혀에 휩쓸리며 멍하게 생각했다.
‘그래 중요한 건 이거지.’
난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눈을 감았다.


#102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막 초입에 들어서던 가을은 완연한 제 색을 입었고 난 결혼식 준비로 내내 바빴다. 드레스를 고르고, 구두를 고르고, 부케에 들어갈 꽃을 고르는 순간마다 디아르트와 함께였다. 끈질긴 황제의 설득에도 끝끝내 미련 없이 공작위를 버린 디아르트는 그의 모든 시간은 나의 것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시도 내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남편이 결혼 준비에 이토록 열성인 경우가 흔치 않은 터라 디아르트 휘턴이 아내에게 미쳤다는 소문에 소문이 더해졌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정신없이 이어지던 치장은 어깨 위에서 달랑이는 드롭 귀걸이로 마무리되었다. 릴리와 애니가 뿌듯한 얼굴로 물러서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디아르트가 들어섰다.
“오…….”
언제 봐도 잘생긴 얼굴이긴 했지만 오늘의 디아르트는 정말이지 완벽했다. 자연스럽게 쓸어 넘긴 은발은 창을 통과한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였고, 곱게 빚은 도자기처럼 매끈한 얼굴선은 턱 끝까지 유려하게 이어졌다. 하얀 예복 또한 디아르트의 흰 피부와 딱 맞춘 듯 어울려서 그를 골라준 사람이 보람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건 나를 담은 그의 따뜻한 금안과 다정한 미소를 띤 입술. 오로지 나만 보인다는 듯 눈을 고정한 채 성큼성큼 다가오는 디아르트 그 자체였다.
‘누구 남자인진 몰라도 참 잘났네.’
정말 거리로라도 뛰쳐나가서 ‘이 남자가 내 남편이에요.’ 하고 외치고 싶을 만큼 뿌듯했다.
나를 천천히 훑어 내리던 디아르트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이내 느릿하게 감상평을 내놓았다.
“이대로 침실로 안아가고 싶은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옆에 사람도 있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남자가. 타박 어린 시선으로 쏘아보자 디아르트가 짓궂게 웃었다. 힐끔 시선을 돌리니 눈치 빠르게 저만치로 물러섰던 릴리와 애니가 꺅꺅거리고 있었다.
“보자마자 농담부터 하는 거예요? 다른 할 말은 없어요?”
난 내 모습을 잘 보라는 듯 양 팔을 벌렸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디아르트는 밀려오는 감정을 무어라 설명할지 모르겠다는 듯 타이를 붙잡고 미간을 좁혔다. 늘 능숙한 남자가 내게만 이렇게 서툴어질 때마다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겠다.
“그렇게 예뻐요?”
“눈이 부실 만큼.”
곧장 나온 답이 마음에 든다. 내가 웃자 디아르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디아르트가 더욱 거리를 좁혔다. 눈이 부실 만큼 예쁘다더니 그는 한시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열망 어린 눈동자에 심장이 빨라지는 것 같아 말을 돌렸다.
“신전에는 다녀왔어요?”
“아아.”
손가락으로 내 뺨을 조심스럽게 쓸던 디아르트가 품속에서 서신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봉투를 받은 난 신전의 인장이 찍힌 이혼 승인서를 꺼내 펼쳤다. 승인서 하단에 적힌 로에니 페이셔라는 이름이 낯설었다. 곧 다시 로에니 휘턴이 될 터인데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디아르트가 마뜩잖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런 표정이야?”
“내가 무슨 표정인데요?”
“내 마음에 안 드는 표정.”
디아르트가 혹시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곧 식까지 올리는데 이제 와 무슨 걱정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 세뇌가 아직 부족한 거니?
“이런 종이 하나로 남남이 되었다는 게 신기해서 그래요.”
“곧 다시 부부가 될 거야.”
디아르트가 잘라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난 장난스레 말했다.
“이혼 절차를 밟으면서 동시에 결혼 준비를 한 건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일걸요?”
“이혼 승인서를 받은 날 결혼식을 올린 것도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겠군.”
태연하게 받아친 디아르트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실까요, 부인.”
디아르트는 몹시 정중한 태도로 유쾌하게 말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빙긋 웃었다.
“좋아요.”
기꺼이 일어서는 내 뒤로 이혼 승인서가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내 손을 부드러우면서도 힘주어 잡는 디아르트와 시선을 부딪치며 드레스룸을 나섰다.
* * *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높게 올려붙였고 부드러운 바람이 뺨이 간질였다. 야외에서 결혼식을 올리기 딱 좋은 날씨였다. 휘턴 저의 후원에서 숲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지키는 형형색색의 나무들이 버진로드 위로 나뭇잎을 떨어트렸다.
내 말이라면 뭐든 다 받아들인 디아르트가 딱 하나 고집한 건 결혼식 날짜였다. 이왕이면 나무들이 눈꽃을 피우는 겨울이나 상큼한 벚꽃이 휘날리는 봄에 식을 올리고 싶다고 했지만 그는 가장 빠른 날을 원했다. 디아르트는 가장 예쁠 때 결혼하고 싶다며 툴툴거리는 내 귓가에 마음이 사르르 녹지 않고는 못 배기는 말을 속삭였다.
‘어느 계절의 당신이라도 아름다워.’
정말 사람 홀리는 덴 일가견이 있는 남자라니까.
그래도 그의 말을 듣길 잘한 것 같다.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이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신부 입장을 알리는 연주가 시작되었다. 나보다 더 긴장한 듯한 페이셔 공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버진로드를 걸었다. 디아르트를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처음 빙의한 후 오늘이 오기까지 있었던 추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많은 일을 모두 겪고 마침내 저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이번엔 네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결혼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페이셔 공작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난 그의 목소리에 담긴 애틋한 바람에 목이 시큰해졌다. 눈가가 달아오르는 것 같아 빠르게 깜박이며 고개를 돌렸다.
식장에 있는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로 만들어주겠다던 약속을 지키듯 디아르트는 모든 귀족은 물론 황제 내외까지 초대했다. 버진로드를 따라 걸으며 꽃잎을 뿌리고 있던 레티시아가 싱긋 웃었다. 그녀는 황녀임에도 내 친우로서 들러리 역을 자처했다. 맞은편에는 애나벨이 수줍게 뺨을 붉히고 있었다. 주례석에는 매번 방문을 청하지만 매번 누군가의 방해로 거절당하면서도 오히려 그걸 즐기는 것 같던 자비스가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릴리, 애니. 그 외 빙의한 후 만난 모든 이들의 얼굴이 차례차례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버진로드의 가운데에서 오로지 나만 응시하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디아르트가 눈부시게 웃었다.
잠깐의 거리도 못 참겠다는 듯 성큼 마중 나온 그가 팔을 내밀었다. 나를 디아르트에게 인도한 페이셔 공작이 내 등을 한번 토닥이고 물러섰다.
“왜 벌써 눈이 빨개졌어?”
디아르트가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서러운가 봐요. 원래 신부들은 다 그렇대요.”
“뭐가 서러운데?”
“몰라요. 결혼을 너무 성급하게 결정했나?”
눈물을 참고자 농을 하니 디아르트가 픽 웃었다.
“나보다 서럽진 않을 것 같은데?”
누가 들으면 내로남불이라고 하겠지만, 내가 먼저 서럽다고 해놓고 막상 디아르트가 서럽다고 하니 절로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당신이 뭐가 그렇게 서러운데요?”
“오늘 아침에 기사들이 내게 약병을 주더군.”
“약이요?”
혹시 어디 아픈 건가 싶어 놀라 그를 살피려던 찰나 이어지는 말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다들 첫날밤을 걱정하던데.”
그동안 열심히 숨겨왔던 그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알아버린 모양이다. 입술만 뻐끔거리고 있으니 디아르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듣고 있자니 너무 억울하더군.”
“디아르트, 그게…….”
“내가 그렇게 부족했나?”
“아뇨, 절대!”
오히려 넘쳐서 문제라구. 난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오늘 밤은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야. 내겐 아내의 저주를 풀어줘야 할 책임도 있으니까 말이야.”
물론 약 따윈 필요 없어. 디아르트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무언가 기뻐 보이는 그에게 한마디 하려는데 똑똑, 하고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디아르트의 불만에도 끝끝내 주례를 맡은 자비스가 못 말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건 좋네만 그래도 맹세의 언약은 해야지 않겠나?”
사람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식이 여기까지 진행되었담. 뺨이 달아올랐다.
“디아르트 휘턴은 로에니 페이셔를 아내로 맞아 평생 함께 하겠는가?”
“기꺼이.”
자비스의 물음에 디아르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그리곤 나를 내려다보았다.
“로에니 페이셔는 디아르트 휘턴을 남편으로 맞아 평생 함께 하겠는가?”
나는 디아르트와 시선을 마주하며 그가 기다리는 대답을 흔쾌히 내주었다.
“네.”
부부의 연이 성사되는 맹세의 키스가 이어졌다. 나는 아쉬운 얼굴로 떨어지는 디아르트의 목에 팔을 둘러 당겼다. 그리고 순순히 따라오는 그에 귓가에 넌지시 속삭였다.
“그럼 나도 최선을 다해볼게요. 저주를 풀어야 하니까.”
내 말이 끝나자마자 디아르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놀란 듯 했지만 이내 박수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디아르트가 무척이나 행복한 얼굴로 내 허리를 끌어안더니 그대로 입술을 부딪쳤다. 긴 입맞춤이었다.

<저주를 풀 방법은 당신과의 접촉뿐, 完>







By.[Y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