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 남편과 이혼하는 방법 1권 지은이: 해꽃 펴낸이: 김기철 펴낸곳: 텐북 주소: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1로 225 에이스가산포휴 416호 (우 08501) 전화: 070-8823-8681 FAX: 032-667-8681 출판등록: 제 2018-000040호 전자우편: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www.tenbook.co.kr ⓒ해꽃, 2021 ※ ISBN: 979-11-6758-189-1 ※ 가격: 3000원 ※ 발행일: 2021년 8월 30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01. 프롤로그 “하아….” 그와의 키스는 왜 이렇게 항상 몽롱해지는 걸까. 그를 받아들이기 전에도 그리고 받아들이는 것을 결정한 후에도 다르지 않았다. 마음은 거부해도 몸은 그에게 열려 있었다. “흐응….” 특히 지금의 키스는 신음을 참기 힘들 만큼 야릇한 기분이 들게 했다. 짐승같이 달려들었던 키스는 어느새 달뜬 숨을 내뱉게 하는 야한 입맞춤으로 바뀌어 있었다. 키스만으로 온몸이 간질간질하며 몸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공작님, 아읏.” 그가 입술을 시작으로 차례대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말랑한 살덩이로 귓바퀴를 빨고 핥고 문지르며 나를 밀어붙였다. “이름… 불러줘.” 클라우스가 귓가에 속삭였다. “…네? 흐읏.” 갑자기 이름이라니, 그를 이름으로 부를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기에 나는 거부의 몸짓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뿔이 났는지 목으로 그의 입술이 내려와 아까보다 더 집요하게 괴롭혔다. “아앗. 흡!” “…얼른. 안 그러면 온몸에 자국을 낼 거야.” 평소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협박성 짙은 말을 내뱉었다. “이름은… 싫어요. 아앗!” 싫다는 말에 클라우스가 목을 따끔하게 살짝 물었다. “제발, 릴리안….” “….” 지금의 상황에서 그의 애원 가득한 목소리에 더 이상 싫다고 하기도 힘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클라우… 스?” 그 순간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이 촉진제가 되었는지, 그가 슬립의 어깨선을 내리고 본격적으로 내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한 손은 왼쪽 가슴의 유두를 엄지와 검지로 굴려댔고, 또 다른 한 손은 배와 옆구리 등 주변을 쓰다듬었다. 검을 잡는 검사라서 그런지 그의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가득했고 그게 여린 피부 위로 온전히 전해졌다. 내 손과 다른 투박하고 거친 손길이 더욱더 성감을 부추겼다. “하아, 흐읏!” 입술을 깨물어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자극 때문에 신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가 쇄골을 깊게 핥던 입술을 오른쪽 가슴으로 옮겼다. 그리고 가슴을 세차게 빨기 시작했다. “흐응! 공작님…!” “이름.” 그가 왜 이렇게 이름에 집착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걸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이미 머릿속은 그의 움직임에만 반응할 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클라우스…! 아아!” 클라우스가 자신의 입 속에 유두를 가두고 혀로 계속 핥자 젖꼭지가 빳빳하게 섰다. “흐읍, 흣!” 그렇게 한참 가슴을 괴롭히던 그의 머리가 더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배꼽 주위에서 서성이더니 슬립과 팬티를 한꺼번에 밑으로 벗겼다. “하아….” 그 틈에 긴 숨을 내쉬며 나는 간신히 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다리 사이에 입을 갖다 대는 순간 전보다 더한 감각을 느끼며 참을 수 없는 신음을 내질렀다. “…이상해요. 하지 말아- 아흣!” 나는 무릎을 굽힌 채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었고 클라우스는 그 사이에 자리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게 너무 민망해서 그가 제발 위로 올라왔으면 했다. 그의 머리를 잡아 끌어 올리고 싶었지만 지나친 감각에 자꾸만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젖었어.” “…네?” 사실 키스를 했을 때부터 이미 간질간질하고 애가 탔기 때문에 다리 사이가 젖어든 것은 알고 있었다. 의무를 운운한 거치고는 몸이 너무나 착실하게 그에게 반응하고 있어서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이 밀려들어 왔다. 하지만 이내 내가 그런 생각조차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클라우스의 애무가 점점 더 거침없어졌다. “아…!” 클라우스가 내 허벅지를 움켜쥐고 넓게 벌리더니 비부에 있는 은밀한 부분을 일부러 피해 주변만 할짝거리며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몸은 이미 예민할 대로 예민해졌기 때문에 그런 움직임마저도 흥분을 점점 더 끌어 올릴 뿐이었다. 그러다 말캉하고 촉촉한 혀로 감각이 몰려 있는 살점을 핥아 올리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하으응!” 순간 세상이 갑자기 암전이 됐다 다시 돌아왔다. 처음이었다. 그와 키스를 했을 때 밑으로 꺼질 것만 같은 느낌이 얕게 왔다 갔다 했다면, 지금은 그때와 차원이 달랐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이 없는 끝없는 곳으로 몸이 푹 꺼져 자력으로는 절대로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하읏, 하아….” 나는 무엇이든 붙잡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하지만 클라우스의 머리카락만이 손에 잡혔다. 내가 머리카락을 움켜쥔 걸 느꼈는지 그의 고개가 움직이며 다시 위로 올라왔다. “하아.” 그의 정염 가득한 눈과 마주치며 문득 시선을 살짝 밑으로 내렸는데, 반지르르한 입술이 보였다. 방금까지 한 일이 생각나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나보다 그가 더 빨랐다. 그가 다시 내게 입술을 부딪쳐 왔다. “흐읍!” 아직까지 아까의 절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를 못했기에 뭐가 됐든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얼떨결에 그의 목을 껴안자 키스가 더 격해지며 입술이 세차게 빨렸다. 그런데 딱딱하고 거대한 것이 자꾸 허벅지에 문질러졌다. 나는 그것이 그의 성기라는 걸 깨달았다. 여기까지 왔어도 어쩐지 민망한 생각 때문에 닿아 있는 다리를 다른 쪽으로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워낙 단단하게 붙잡혀 있어서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의 것이 다리 사이의 갈라진 곳으로 자리를 잡는 게 느껴졌다. 곧 들어올 것 같다는 생각에 방금까지 흐물흐물했던 몸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고 입구의 위쪽에 위치한 예민한 살덩이를 기둥의 앞부분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흐아, 흣.” 등줄기가 찌릿찌릿하면서 굳었던 몸이 다시 풀리고 성감이 고조됐다. 내 그곳에 닿은 꼿꼿한 성기를 눈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크기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하아, 릴리안….” 그도 이제 한계인지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아, 안 들어갈 것 같아요….” 진짜로 안 들어갈 것 같다는 두려움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까지 잘 먹었잖아.” 클라우스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외설스러운 말이 튀어나오자 나는 깜짝 놀라 움찔했다. “그래도, 흐응….” “들어갈게.” “아, 안 돼요…! 아흣!” 안 된다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귀두가 천천히 입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너무 거대해서 충분히 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찢어질 것 같았다. 익숙지 않은 커다란 이물감에 숨이 꽉 막힐 것 같았다. “릴리안….” 그는 계속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조금씩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페니스를 깊게 밀어 넣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성기가 안으로 다 들어오자마자 압박감과 동시에 아까와는 다른 쾌감이 느껴졌다. “역시, 너무 좁아.” “흣….” 내가 삽입만으로 뻣뻣해진 것을 느꼈는지 클라우스가 내 몸 곳곳에 키스를 했다. 그러자 또 황홀감에 다시 몸이 서서히 녹아내려 갔다. 곧 그가 가슴의 정점을 강하게 빨면서 조금씩 앞뒤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응! 흣, 아…!” 두 사람이 잠자리를 가진 것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다. 그는 이미 내가 느끼는 지점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부분만을 계속 건드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입술을 꽉 깨물어도 계속 달뜬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흑, 아읏, 흐응!” 처음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그가 주는 감각에 빠져 정신없이 흐느꼈다. 그런 나를 더 몰아붙이며 클라우스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아앗! 아흑, 으으응!” 너무 급격히 솟아오르는 미칠 듯한 흥분에 정신이 어떻게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쾌락에 빠져 신음을 흘리는 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릴리안, 힘 풀어.” “하지만, 아흑!”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내가 힘을 주고 있는지도,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의 움직임에 몸이 계속 흔들릴 뿐이었다. 그러다 클라우스가 허리를 둥글게 원을 그리듯이 돌리기 시작했다. “흐응….”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쳐다봤다. 그의 눈동자 안에 흥분으로 가득 찬 내가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다시 강하게 허리를 박아댔다. “아! 아으응!” 그의 움직임은 끝이 나질 않았다. 너무 힘들었다. 신음을 너무 질러서 목소리도 살짝 쉰 듯했다. “흐읏! 그, 그만.” 그에게 이제 그만하자고 간신히 말을 꺼냈다. “그만하라고? 이렇게… 조이면서?" 그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지 계속해서 내가 느끼는 지점을 찔러댔다. 끊임없이 몰아쳐오는 감각에 떨기도 잠시, 거대한 쾌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 안- 흐읏! 하으응!”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몸 안의 깊숙한 곳에서 끌어 올려지는 듯한 신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절정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안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그도 내 안에서 그걸 느꼈는지 짧게 신음을 흘렸다. ‘끝인가….’ 분명 끝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것은 나갈 생각을 안 했다. 그의 성기가 여전히 꼿꼿한 채로 안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뭐, 뭐야….’ 당황스러워서 순간 몸을 일으키려는데 클라우스가 내 허벅지를 움켜잡고 위로 올렸다. 엉덩이 부근이 침대에서 떨어지면서 상체가 다시 침대에 파묻혔다. 아차 하는 순간 나는 다시 신음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전과 다른 매우 빠른 속도로 그가 허리 짓을 했다. “아, 아앗! 흐으응…!” 클라우스가 하체를 올려버린 탓에 고개만 살짝 들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행위가 다 보였다. 나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내 안에서 그의 중심이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게 다 보였다. 너무 노골적인 그 모습에 본 것을 후회하며 눈을 감았다. “아흣, 아응!” “릴리안, 눈 떠.” 그새 들켰는지 클라우스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눈을 뜨지 않았다. 그와 연결되어 있는 그곳을 또 보기엔 너무 부끄러웠다. 내가 눈을 뜨지 않자 이미 끝까지 들어왔다 생각한 것이 더욱더 깊고 빠르게 박아댔다. “흐으읏!” “지금 누구와 몸을 섞고 있는지 제대로 봐.” “아, 알아, 흣, 요!” 대답을 하지 않으면 계속 눈을 뜨라고 할까 봐 나는 황급히 말을 뱉었다. “누군데.” 입에선 자꾸 신음이 터져 나오는데 말을 시키니 단어 하나하나 내뱉기가 힘들었다. “고, 공작님… 이요. 아응!” “누구라고?” 내가 계속되는 신음에 목이 쉬었다면 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인해 낮아질 대로 낮아져 있었다. 그 또한 너무 야한 기분이 들었다. “클… 라우스! 하읏!” 어떻게든 입이라도 막으려고 이름을 부르자 그의 것이 안에서 더 커지는 게 느껴졌다. “아, 뭐, 흐응! 아흐읏!” 엄청난 크기의 성기가 안을 계속 무지막지하게 휘저었고 그의 호흡이 빨라졌다. 그러면서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움직임이 마침내 멈추더니 마지막에는 성기가 강하고 깊게 들어왔다. 우리는 동시에 신음을 내질렀다. “하아앗! 흐앙!” “윽.” 나는 다시 한번 가장 높은 곳까지 솟아올랐다가 쿵 하고 떨어졌다. “흐읏, 으흑, 흐흑.” 쾌감이 너무 강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하아, 릴리안….”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의 얼굴 곳곳에 키스를 했다. 처음엔 이마에 짧게 입술을 댔고 그다음엔 눈물이 흐르는 내 눈가를 핥았다. 마지막엔 입술에 길게 키스했다. “흣, 흐읍.”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감각으로 인해 여전히 잔 떨림이 계속되면서 도저히 몸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끝난… 거죠? 하읏.” 끝났으니 얼른 내 안에서 나가라는 소리였다. 저것만 내게서 떨어져도 조금은 괜찮아질 것 같은데 아직까지도 안에서 꿈틀거리며 자극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었다. “설마.” “네? 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행히 그는 내 안에서 빠져나갔다. 성기가 내벽을 긁고 나가는 감각에 짧은 절정을 느끼며 안이 제멋대로 수축했다. “당신도 아직 부족한 거 같은데?” “아니, 아니에요…!” 입은 부정했지만 몸은 아니었는지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클라우스가 지금까지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어 침대 밖으로 던졌다. 그의 벗은 몸을 보자 저절로 입이 벌어지며 속으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와….’ 예전에도 몇 번 봤지만 이런 상황에서 보니 색다르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그때는 그가 아픈 상황이었던지라 자세히 볼 생각도,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탄탄한 근육질의 몸이 눈에 정확히 들어왔다. 조각같이 잘 짜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을 그의 가슴에 올리려다 깜짝 놀라 급히 내렸다. 그런 내 행동을 이미 본 클라우스가 피식 웃었다. “만져 봐.” “네?” 멍한 얼굴로 클라우스를 보고 있는데 그가 내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나는 그저 가만히 대고만 있었다. 그러자 클라우스가 내 손을 잡고서 자신의 몸을 스스로 만지기 시작했다. “흣.” 그게 커다란 자극으로 다가왔는지 그가 신음을 흘렸다. 그가 신음 소리를 낸다는 게 어쩐지 너무 신기해서 그의 몸 이곳저곳을 건드렸다. 가슴과 배, 옆구리 등을 만지면서 밑으로 살짝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내 안에 들락날락하던 그 거대한 살덩이를. ‘저게 내 안에 들어왔다고?’ 믿기지가 않았다. 저 정도의 크기는 절대 내 안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나는 의문 어린 표정으로 다시 그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를 눈치챈 듯했다. 아까와 같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그가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인지 몰랐다. “릴리안. 이리 와.”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더니 나를 들어 올려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의 중심이 내 비부에 그대로 닿은 채로 나는 그에게 안겨 버렸다. “…뭘 하려고요?”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뭘 할 거냐고 물어보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참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클라우스의 그것을 보기 전까지도 충분히 긴장되고 떨렸지만, 보고 난 지금은 두려운 마음까지 생겨나서 꼭 물어봐야 했다. 그는 내 말에 대답도 안 하고 자신의 것을 내 다리 사이에 비비기 시작했다. 젖은 그곳에서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흣! 안 돼, 요.” 안 된다고 말했지만 그는 대답도 없이 내 목덜미를 혀로 물고 빨았다. 나는 또다시 고조되는 느낌에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클라우스…. 흐읏!” 이제는 흥분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의 이름이 저절로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신호가 된 듯 그가 내 엉덩이를 들더니 그의 것을 내 안에 내리꽂았다. “하으응!” 삽입된 것만으로 등줄기가 순간 오싹해지며 쾌감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의 중심이 정확히 내가 느끼는 지점을 누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진정될 틈도 기다려주지 않고 허리를 급하게 미친 듯이 흔들었다. 그 밤, 나는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자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날이 샐 때까지 계속 그에게 안겨서 신음을 내지를 뿐이었다. 02. 내 남편은 악역 한 달 전,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10중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 강한 충격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핸드폰을 떨어뜨린 것까진 기억하는데, 다시 정신이 돌아왔을 땐 웬 휘황찬란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것도 알몸으로. 그대로 꼼짝없이 죽은 줄 알았는데 눈을 떴더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고개를 돌리자 이제 막 아침이 밝아오는지 창 너머로 햇빛이 조금씩 들어오고 있었다. “나… 산 건가. 여기는 그럼 병원?” 처음에는 그저 좀 화려한 병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덮고 있는 이불이 옷의 질감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대로 피부에 온전히 느껴졌다. 나는 조심히 손을 들어 이불을 살짝 제쳤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두툼한 이불 안의 상태를 확인했다. 굴곡진 곡선을 따라 새하얀 복부 아래로 흰 다리가…. “으악!”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알몸을 보자마자 사고회로가 정지됐다. 그리고 정면으로 마주친 현실을 깨닫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마님?” 비명이 방문 너머로 넘어갔는지 순식간에 밖이 어수선해지고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님? 무슨 일이십니까?” 마님이라니, 누굴 부르는 거야? 안 그래도 알몸이라서 정신이 없는데, 도대체가 무슨 상황인 건지 전혀 파악이 되질 않았다. “마님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아, 안 돼!” 누군가 들어오겠다는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절박한 목소리 때문인지 다행히 문밖의 소란은 사그라진 듯했다. 나는 그 틈을 타 서둘러서 주변을 살폈다. 병원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고풍스러운 가구가 눈에 띄었다. 이제 보니 천장의 화려한 마감뿐만 아니라 넓은 방 안을 둘러싼 벽지부터 테이블 위에 놓인 소품까지, 딱 보기에도 가격이 나가는 것투성이였다. “가릴 거… 뭐든 가릴 만한 거!” 우선 옷부터 입어야 숨든 도망가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시선을 움직이다 옷장으로 보이는 가구를 발견했다. 다행히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불에서 튀어나와 알몸으로 뛰어갔다. ‘뭐야….’ 그런데 옷장을 여는 순간 나는 내가 무슨 인형 놀이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걸려 있는 옷들이 전부 치렁치렁한 드레스였으니까. 나는 옷장에서 그나마 슬립과 비슷하게 생긴 옷을 찾아 입었다. 그리고 내내 들었던 위화감을 떨쳐내기 위해 거울을 찾았다. 내 모습을 지금 당장 봐야만 할 것 같았다. 거울은 다행히 옷장 옆에 있었고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누구세요?”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지만 거울을 보자마자 처음으로 한 소리가 누구냐는 말이었다. 거울 속에는 자다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탐스럽게 넘실거리는 금발의 미인이 에메랄드 보석을 그대로 박은 것 같은 투명한 연둣빛 눈으로 나를 보고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거울로 손을 뻗자 그녀도 내게 손을 뻗었다. “아아-.” 두 여자가 같은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귓가로 들려온 목소리는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게 뭐야.’ 이쯤 되니까 저 거울 안에 비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너무나도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온통 정신을 뺏겨 버려 밖이 점점 소란스러워지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넋을 놓고 있을 뿐이었다.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오고 나서야 나는 거울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나는 문가에 서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자의 키가 무척이나 크고 기골이 장대해서 순간 그의 존재감에 압도될 뻔했다. “네? 누구….”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 내 관심을 끌기 위해 이러는 건가?” 남자는 내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알아듣지 못할 소리만 했다. “원하는 대로 남편으로서 도리를 하고 있잖아. 그런데도 부족해?” 멀뚱거리고만 있는 내가 내키지 않는지 남자의 표정은 무척 차갑고 태도에 날이 서 있었다. “루이덴 공작가의 안주인이면 처신 똑바로 해. 남들한테 흠 잡힐 쓸데없는 행동 하지 말고.” 그렇게 말한 남자는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잠깐 바라보곤 곧바로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 찰나였다. 내가 뭐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내게 일어난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래도 그렇지 황당하네. 다짜고짜 막무가내로 들어와서 자기 할 말만 하고 나가는 건 도대체 무슨 경우지?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서. 얼핏 봤지만 그는 무척이나 잘생긴 미남이었다. 솔직히 살면서 그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봤다. 검은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하얀 피부와 사람의 시선을 단번에 옭아매 버리는 핏빛 눈동자, 그리고 가깝지 않은 거리에서도 알 수 있는 오뚝하고 높은 콧대, 그린 듯한 붉은 입술은 단정한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이 정도면 얼핏 본 게 아닌가?’ 아무튼 그 예쁜 얼굴을 성격이 못 따라가는 것 같아서 나는 속으로 잠시 안타까운 탄식을 터뜨렸다. ‘잠깐, 루이덴… 루이덴이라고 했어.’ 왜 하필 죽기 전에 읽었던 소설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오직 그것만이 지금 내게 닥친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었다. 루이덴 공작가. 지금 내가 공작 부인이고 방금 나간 저 남자가 루이덴 공작이라면 소설과 딱 맞아떨어졌다.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천천히, 거울 속 내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릴리안 프리드.” 나는 떠오른 이름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소설 속에 그려진 그녀의 모습과 지금 거울 앞에 보이는 내 모습은 놀랍게도 비슷했다. 릴리안 프리드. 그녀는 프리드 후작가의 영애로 스무 해를 살았고, 그 이후로는 루이덴 공작가의 공작 부인으로 죽었다. ‘…죽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비죽 돋았다. 나는 괜스레 목덜미를 매만지며 소설에 나와 있던 그녀의 생을 돌이켜보았다. 릴리안은 고작 24년 남짓의 삶을 살았다. 그것도 결혼 생활 4년 중 3년은 남편에게 집착만 하다 시간을 허비했고, 나머지는 남편이 사랑한 여자를 괴롭히다 못해 죽이려다 낭비했다. 물론 그녀의 남편도 다를 바가 없는 게, 여자 주인공에게 집착한 나머지 그녀를 감금하며 사랑을 갈구했다. 결국 모든 악역들이 그러하듯 악행은 세상에 낱낱이 밝혀졌다. 남자 주인공에 의해 처단당하고 가문이 몰살당하는 게 이 부부의 끝이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어디에 떨어졌고 누가 된 것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악역 남편과의 썩 유쾌하지 않은 첫 만남이었다. * * * 나는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걸 인지하자마자 소설과 관련된 정보들을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정확하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억하려고 노력했고, 내가 빙의한 인물과 저 남편이라는 작자가 누구인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끄집어낼 수 있는 건 하나도 빠짐없이 끄집어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재밌어서 이미 여러 번 읽은 소설이었고, 바로 죽기 전까지도 읽었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억의 끝은 전혀 아름답지 못했다. 이제는 ‘나‘인 릴리안 프리드의 생은 비참하게 마감됐기 때문이다. ‘죽더라도 가늘고 길게 귀족의 삶은 누리다 곱게 죽을 것이지.’ 그렇게 사는 것에 크게 연연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꼴사납게 죽는 건 사양이었다. 무엇보다 단두대에 목이 잘려 죽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처음 본 남자 때문에 죽는 건 사양이야.’ 영화나 소설에서만 보던 형벌 기구에 목을 올려놓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아직 목이 잘린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손으로 목을 감싸 쥐었다. 어쨌든 죽으면 끝이라지만 아픈 건 질색이다. “빨리 방법을 찾아야겠어.” 릴리안인 척 원작대로 남편에게 집착하고 여자 주인공을 괴롭힌다면 단두대행은 무조건이었다. 그렇다고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산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왜냐하면 이 가문이 숙청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사람이 이제는 나의 남편인 클라우스 루이덴이기 때문이었다. 아까처럼 남의 말을 귓등으로 안 듣는 그를 교화시키느니 미래의 여자 주인공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집에서 도망쳐서 나라도 다가올 화를 피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앞으로의 일들을 예측하면서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사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님. 아침입니다.” 아직 누군가를 맞닥뜨리기엔 시간과 준비가 더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생각하다 일단 릴리안을 흉내 내기로 했다. “모, 몸이 좋지 않으니 혼자서 조용히 쉬고 싶다.” “저, 의사를 부를까요?” “됐다. 필요 없어.”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하실 건지요.” “생각 없다.” “알겠습니다, 마님. 그럼 필요하실 때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릴리안이 자신을 방해한 사용인을 크게 혼낸 전적이 있었기에, 그 이후로는 아무도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나는 점심 식사 때도 같은 방식으로 시녀를 돌려보냈다. 그렇게 미처 놓친 정보는 없나 몇 번을 더 소설을 복기하다 보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나는 배가 슬슬 고파서 용기 내 설렁줄을 흔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시녀 하나가 내 허락을 구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오늘도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저녁 식사 전, 내 머리를 한껏 끌어 올려 에메랄드가 박힌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해 주던 어린 시녀가 제 주인을 치켜세웠다. 나는 대답 대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바라봤다. 눈앞의 미인을 보고 처음으로 든 생각은 ‘화려하다’였다. 릴리안은 문자 그대로 참 화려한 여자였다. 탐스러운 금발도,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도, 시녀가 골라준 풍성한 프릴이 수놓아진 드레스도, 손가락 마디마다 끼워진 반지도 어느 것 하나 화려하지 않은 게 없었다. “이름이….” “예?” “네 이름이 뭐였지? 생각이 나질 않는구나.” 나는 내 곁에서 시중을 들던 앳돼 보이는 시녀에게 부러 무뚝뚝하게 물었다. “아, 네. 에밀리입니다, 마님.” 그렇게 말하는 에밀리의 표정을 슬쩍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다행히 내가 자신의 이름을 묻는 걸 의아하게 여기는 것 같진 않았다. “에밀리, 네가 여기서 일한 지는 얼마나 되었지?” “6개월입니다.” 공작 부인을 바로 곁에서 시중들기에는 무척이나 짧은 경력이었다. 하지만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릴리안의 성격은 포악무도했다. 그 날 시녀가 해 준 치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조금이라도 심기를 거스르면 가차 없이 내쫓는 건 일쑤였다. 그렇기에 아무리 돈을 많이 쥐여준다 하더라도 그녀의 옆을 오랫동안 지킬 수 없었을 테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릴리안이 클라우스와 혼인을 하고 후작가에서 공작가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을 때, 후작가에서 일하는 그 누구도 그녀를 따라가려고 하지 않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서열에서 밀린 어린 시녀가 선택되었을 때, 그녀 외의 다른 이들은 더 이상 아가씨를 모시지 않아도 된다며 환호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어린 시녀마저도 공작가에서 반년을 못 버티고 도망쳤다. 그 이후에도 릴리안의 패악을 견디다 못한 시녀와 하인들이 수시로 사직을 표했고, 그녀의 곁에는 항상 경력이 짧은 이들만 교대로 남아 있었다. ‘에밀리도 그중 하나가 되겠지.’ 어린아이 주먹만 한 원석 목걸이를 끝으로 치장을 마친 나는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 식당으로 내려갔다. 고소한 음식 냄새를 따라가자 클라우스가 먼저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는 조금 지쳐 보이는 것 빼고는 처음 마주한 아침과 큰 차이가 없었다.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는데….’ 그리 외모에 홀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저 남자는 그게 가능할 정도로 완벽한 미남이었다. 소설의 결말을 몰랐다면 분명 홀렸을 거야. ‘정신 차려야지.’ 아무리 상대방이 잘생겨도 같이 저세상에 갈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이미 한 번 갔다 온 영혼이라 그렇게 금방 또 가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클라우스를 힐끗 쳐다보곤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애피타이저를 시작으로 테이블 위에 싱그러운 채소와 과일로 꾸며진 음식이 순서대로 차려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한입 떠먹으니 하루 종일 긴장으로 뭉쳤던 몸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음식은 확실히 맛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내가 살면서 먹었던 음식 중에 최고였다. 우리 둘은 식사 내내 말이 없었다. 나는 괜히 입을 열어 화를 자초하기 싫었고 딱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 종일 굶었던 터라 내 눈앞에 놓인 진수성찬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정수리에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고개를 살짝 들었다. “왜… 그러시죠?”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는 적안을 마주하자니 아까까지만 해도 잘 넘어가던 음식이 목에 턱 걸렸다. 나는 양손에 쥐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기에 눌리지 않기 위해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새벽에는 경황이 없어서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늘은 음식이 입에 맞나 보군.” 그의 말을 토대로 추측해 보건대, 릴리안은 음식 투정이 심했던 것 같았다. 하긴 뭐든 마음에 드는 게 없는데 먹는 거라고 다를 리가.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충족시켰던 건 저 남자 하나였다. 나는 조금 뜸을 들인 뒤에 의연하게 대답했다. “네, 맛있어요. 공작님께서는 입에 안 맞으세요?” 그런데 그의 미간이 뭔가가 마음에 안 드는지 꿈틀거렸다. ‘대답을 잘못했나?’ 나는 내가 한 말을 곰곰이 되짚어봤다. 음식이 입에 맞냐길래 그쪽도 괜찮냐고 물어봤을 뿐이다. 아무리 부부 사이가 소홀하다지만 책잡힐 만한 대답은 아니었다. “오늘 아침 일은….” “아, 그건 공작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니에요.” 혹시나 그가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을 꺼낼지도 몰라 미리 준비한 답을 술술 꺼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는데 얼굴에 뾰루지가 생긴 걸 알았어요. 그래서 순간 놀라고 짜증 나서 그런 거예요.” 릴리안은 외모에 무척이나 신경 쓰고 공을 들이는 사람이었다. 특히 공작가에 오면서 클라우스가 자신을 봐주질 않으니 외모에 더욱더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점심때까지도 가라앉지를 않아서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이걸로 내가 왜 지금까지 두문불출했는지도 설명할 수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기 한 점을 포크로 집으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정말이지….” “네?” “매번 쓸데없는 행동을 하는군. 당신다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차가우면서도 조소를 담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쓸데없는 변명이지만 저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마주하자니 문득 앞날이 막막해졌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또다시 침묵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라우스가 먼저 식당을 나섰고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자국 뒤에서 그를 따라갔다. 클라우스의 방은 바로 릴리안의 옆방이었다. 그는 뒤따라오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피곤하다….” 나는 방에 들어와서 곧장 대자로 뻗었다. 오늘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보면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피곤한 게 당연하거니와 팔자에도 없던 귀족 마님 노릇을 하려니 배로 지쳐버렸다. 내일은 또 어떻게 해야 하지? 클라우스의 성격을 보아 하니 오늘 같은 변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먹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순간 앞날이 너무나 아득했다.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우선은 피곤하니 자자.’ 생각이 길어져 잠이 올까 했는데 피곤하긴 했는지 눈이 서서히 감겼다. 릴리안으로의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 * * 다음 날부터 나는 이 집안과 사용인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릴리안의 전속 시녀인 에밀리는 꽤 수다스러워서 내가 묻지 않은 일도 술술 말해주었다. 나는 그녀를 통해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소설에 안 나와 있던 내용도 있네. 이런 부분은 조심해야겠어.’ 그렇게 정보 수집과 동시에 릴리안 행세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가끔은 에밀리와 함께 저택 안쪽에 있는 정원도 구경하고, 화려한 드레스도 맞추면서 나름 이 세계에 적응을 해나갔다. 이제는 일상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계속되며 막 2주가 지났을 때였다. “마님. 오늘은 어느 쪽 침실을 준비해 놓으라고 할까요?” 아침 식사 전에 나를 치장해 주던 에밀리의 입에서 뜻 모를 말이 튀어나왔다. “응?” “합방 말입니다.” “합방?” 합방? 무슨 합방? 설마 그 합방? “예. 공식적인 합방일이니까요.” 갑자기 뒤통수를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같이 머리가 얼얼했다. “그게… 오늘이었나?” 나는 내 표정이 혹시라도 구겨졌을까 신경을 쓰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네, 지난 합방 이후로 2주가 지났으니 오늘이 맞아요.” 그것도 2주에 한 번이라니. 교통사고보다 더한 충격이 연속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헐벗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제야 왜 릴리안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오늘은 침실에 어떤 향을 준비해 드릴까요? 저번엔 케이라 장미였는데 괜찮으시다면 또 같은 걸로 준비할까요?” 에밀리가 옆에서 재잘재잘 떠들고 있었지만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향유는… 마님?” 내가 너무 조용했는지 그녀가 나를 조심히 불렀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 나는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고민을 하다 아픈 척을 하기로 했다. “네? 어디가 안 좋으세요? 지금 당장 의원을 부르라고 할까요?” “아니,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다. 오늘은 그저 쉬고 싶으니 그렇게 전해주렴.” “알겠습니다.” 허리에 매달린 드레스 리본 매듭을 단단히 조이고 나서 나는 바로 식당으로 내려갔다. 오늘도 긴 테이블에는 음식만 풍요롭게 차려 있을 뿐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었다. 첫날 그와 같이 저녁을 먹어서 매 끼니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클라우스와 릴리안이 같이 식사하는 건 거의 월례 행사나 다름없었다. 에밀리의 말에 의하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부부가 밥을 같이 먹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고 했다. 그렇게 홀로 식사를 마친 후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며칠 전부터 계획한 일을 실행할 때가 되었다. 나는 침대 옆에 설치된 설렁줄을 당겨 에밀리를 불렀다. “마님 부르셨습니까?” “지금 서재로 갈 것이다.” “서재요? 하지만 서재는….” 평소라면 바로 채비를 할 에밀리가 웬일인지 우물쭈물했다. 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그녀의 대답을 종용했다. “서재는 공작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라. 저번에도 마님께서….” 대충 짜 맞춰 보니 예전에 릴리안이 서재에 몰래 들어갔다가 무슨 사달이 난 것 같았다. 소설에서는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것만 묘사되어 있지 이렇게 자세한 일화는 나오지 않았었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서재에 뭘 숨겨 두었길래 치사하게 혼자만 써?’ 내가 세운 계획에는 서재가 꼭 필요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로부터 독립된 공간이. 물론 침실도 내 허락 없이 아무나 들어올 수 없었지만 절대 공작저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됐다. 나는 작게 한숨을 삼킨 뒤 내 눈치를 보고 있던 에밀리에게 말했다. “그럼 집사를 불러 주렴.” “네, 네. 알겠습니다. 마님.” 5분도 안 지났을 때쯤, 나이가 지긋이 들어 머리가 센 남자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며칠 전에 정원에서 티를 마시다가 에밀리에게 들었는데, 집사장은 선대 때부터 이 가문에서 일해 왔다고 한다. 릴리안의 폭언을 버텨낸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부르셨습니까, 마님.” “지금 서재는 내가 쓸 수 없다더군. 그래서 내 전용 서재가 있었으면 하는데.” 서재를 사용할 수 없으면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말을 해놓고도 통할까 했는데, 집사장이 과연 그 릴리안을 버텨낸 연륜으로 단정한 미소를 띠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서재 말씀이십니까? 세 시간 뒤 바로 옆방을 쓰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놓겠습니다.” 대답이 무척 깔끔하고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결혼 계약서를 보고 싶다.” “결혼 계약서요?” 서재에 대해서는 금방 답하던 그가 결혼 계약서에 대해서 묻자 나를 석연찮은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래. 다시 한번 보고 싶다. 그것도 바로 내 서재에 갖다 줘.” “결혼 계약서는 공작님의 허가가 있어야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허가?” 집사장이 다시 특유의 온화한 표정으로 갈무리하고는 여상하게 답했다. “예. 그리고 결혼 계약서는 공작님께서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제가 감히 손댈 수가 없습니다.” “…알았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가 나간 뒤에도 나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한참이나 중얼거렸다. “결혼 계약서를 꼭 봐야 하는데.” 그나마 소설에서 얼핏 언급된 결혼 계약서를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나라는 귀족들이 혼인을 할 때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을 관습으로 여기고 있었다. 특히 릴리안과 클라우스 같은 정략결혼의 경우 반드시 계약서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허락까지 받아야 볼 수 있는 건 줄은 몰랐네.” 아직 목이 붙어 있는 이상, 나에게 의지만 있다면 릴리안의 삶을 바꿀 수 있다. 며칠 전의 나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릴리안이 클라우스에게 집착한 게 갈등의 원인이었지.’ 그럼 반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 그것보단 차라리 지금이라도 클라우스와 이혼한다면? 어차피 사랑으로 이어진 사이도 아니고 정략결혼이잖아. 식당에서도 보니까 애정은 무슨, 싫어하는 티를 대놓고 팍팍 내던데. ‘역시 이혼이 답이야.’ 그렇게 이혼이란 목표를 설정한 후 나는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나갔다. 우선 무조건 이혼한다. 그리고 나중에 휘말리지 않게 서류 정리는 완벽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후작가로 돌아가기엔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홀로서기를 준비한다. 나는 진짜 릴리안이 아니었다. 남편이야 마음이 사라졌다고 하며 행동이 변해도 크게 의심은 안 할 것 같지만, 가족이란 사람들을 속이는 건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설사 이혼하여 돌아간다고 해도 그곳에서 맘 편히 지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홀로서기.’ 하지만 이 방법도 쉽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특출 난 기술도 없는 여인이 혼자서 살아가기란 소설 속에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경제력이겠지.’ 경제적인 문제만 해결된다면 혼자 산다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물론 그 부분이 가장 어려운 것이지만, 이 망한 결혼생활부터 정리해야 한다. 그렇기에 이혼을 하려면 클라우스와 릴리안의 결혼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2주 동안 안 마주쳐서 편했는데. 결혼 계약서를 보기 위해서는 클라우스를 반드시 만나야 한다. 그는 지금까지 무척이나 조용했다. 우려와 달리 클라우스는 그날 이후로 내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릴리안이 변한 걸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딱히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면 원래 귀족들은 부부끼리도 자주 안 마주치나?’ 그건 뭐 차츰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고. 나는 클라우스를 만나기 위해서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내가 그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클라우스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지.” “결혼 계약서를 좀 보고 싶어요.” “결혼 계약서?” “네, 집사장에게 듣기론 공작님께서 가지고 계시다고 해서요.” 또 뭐가 심기를 건드렸는지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어쩌면 나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걸 수도 있겠다. 나는 대놓고 불편함을 드러내는 표정에도 개의치 않고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걸 왜 보려고 하지?” 역시나 이유를 물어볼 줄 알았다. 나는 며칠 동안 밤새 고심했던 대답을 툭 내뱉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저 확인할 게 있어서요.” “…또 쓸데없는 행동을 하는군.” “그렇게 생각하셔도 할 말은 없고요.” 어차피 이혼할 상대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클라우스가 지금처럼 릴리안을 싫어하는 게 내게는 훨씬 편했다. “그걸 이용해서 또 나를 옭아매려는 건 아니고?” 아니, 옭아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사이의 구속을 풀려고 그러는 거야. 나는 최대한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에게 말했다. “절대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하세요.” “안심? 어떻게 안심하지? 지금까지 해왔던 전적이 있는데.” 어이가 없다는 듯 클라우스의 한쪽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또다. 또 나를 비웃는다. 릴리안은 이 남자에게 왜 그렇게 집착했을까. 외모? 물론 외모라면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외모만 보기엔 인성이 완전…. 나는 속으로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혼 계약서에 관한 건 제게도 권리가 있어요. 그러니 보겠어요.” 아무리 공작이라도 그렇지. 같이 작성했을 게 분명한데 한쪽만 가지고 있는 게 말이 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 또한 지지 않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적안을 마주했다. 그렇게 한참을 둘이서 눈싸움 아닌 눈싸움을 하다 그가 먼저 몸을 움직이더니 서랍에서 서류 더미를 꺼내 책상에 던지듯이 놓았다. “가져가.” * * * “어디 보자….” 클라우스의 집무실에서 나와 내 방으로 돌아오자 에밀리가 목욕 시중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가 장미 꽃잎을 띄운 목욕물에 몸을 맡기자 아까의 날 선 신경이 노곤하게 풀렸다. 그날 저녁은 평소처럼 침실로 드는 것이 아닌, 세 시간 전 집사장이 준비해 둔 서재로 향해 결혼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봤다. “이곳에서 거주한 기간이 2년 6개월이고… 결혼했을 때 가져온 지참금이….” 계약서에는 결혼 날짜를 포함해서 두 가문의 기본 정보와 지참금에 대해서도 나와 있었는데, 그 양이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했다. 물론 이곳의 화폐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은 안 되지만 0의 개수를 따졌을 때 딱 봐도 꽤 나갔다. ‘맞아. 프리드 가문의 영지에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어서 재산이 엄청나다고 써 있었어.’ 어쨌든 릴리안의 가문이 부자인 건 나쁘지 않았다. 혹시나 뭔가 잘못되더라도 손을 벌릴 수 있는 곳이 생겼으니까. 나는 결혼 계약서를 토대로 지금이 어떤 시기인지 알 수 있었고, 정확히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만큼인지도 계산해 보았다. 원작에서 클라우스와 여자 주인공인 엘리아와의 첫 만남은 황제의 탄신일 연회에서였다. 그날은 클라우스 부부뿐만 아니라 엘리아 헤이스와 남자 주인공인 황제 이안 베이누스가 다 모이는 자리였다. “그날이….”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클라우스 부부의 결혼 4주년 기념 연회 한 달 전이 황제의 탄신일 연회였다. 그럼 거의 5개월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할 거야.” 가능하다면 원작이 시작되기 전에 아예 그와 관련된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그냥 이 소설에서 나라는 사람만 쏙 빠지면 완벽할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다시 계획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동안 또 2주가 흘렀다. 나는 귀족 부부가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든지 이제야 알았다. 한 달 동안 클라우스를 세 번이나 보았을까. ‘남도 이렇게는 안 하겠다.’ 하긴 그동안 내가 침실 아니면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고, 클라우스는 공작저에 있을 때면 집무실에서 안 나온다고 하니 그야말로 누구 하나의 의지 없이는 우연히 마주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는 상황이긴 했다. 어쨌든 그를 안 보니 기분 상할 말도 안 듣고 빙의한 게 들킬까 신경 쓸 일이 없어서 좋았다. “이혼하면 위자료는 주겠지? 릴리안이 가져온 지참금이 있는데.” 안 주면 진짜 그건 도둑놈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계획한 일정에 맞춘다면 기껏해야 4년밖에 함께 살지 않은 거니까. 나는 기필코 릴리안이 지참금으로 가져온 재산의 반 이상을 받아내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여느 때와 달리 에밀리가 나에게 서신 한 통을 건네줬다. “마님, 서신이 왔습니다.” “서신? 이리 주렴.” 릴리안에게 편지라니, 누구에게서 온 거지? 에밀리가 건네준 편지 봉투에는 고급스러운 인장이 찍혀 있었는데, 발신인을 알 수가 없어 바로 봉투를 뜯어보았다. [to. 친애하는 나의 릴리안. 당신을 보지 못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나갑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어 이렇게 펜을 듭니다. 혹여 당신의 마음이 변한 건 아닌지 저를 버리실까 겁이 나 잠이 오질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하루하루가 숨이 막혀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부디 이런 저를 헤아려 답장을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곧 다시 만날 날을 바라며. from. 당신의 다니엘.] ‘다니엘?’ 그런 사람이 있었나.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혹시 내가 놓친 인물이 있나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엑스트라급으로 비중이 없던 인물이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런데 편지의 내용은 누가 봐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 같아 보이는데…. ‘…설마 불륜?’ 릴리안에게는 클라우스밖에 없는데, 어떻게 다른 남자가 있을 수 있지?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여기서 티를 내기엔 에밀리와 너무나도 가까웠다. 나는 조용히 서재에 들어가기 위해 발을 돌렸다. “마, 마님.” “응?” 그런데 에밀리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저, 그분께서 답장을 꼭 받아 오라고 하인에게 신신당부를 하셨답니다. 그래서 답장을 받을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시녀인 그녀가 존칭을 사용하는 걸 보니 편지를 보낸 이도 귀족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답장을 뭐라고 쓴단 말인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다니엘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게 도통 없는데. ‘어떡하지.’ 아니다. 애초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이 남자가 릴리안과 무슨 사이였는지 지금에 와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진짜 릴리안이 아니니까. 그에 대한 감정도 추억도 없는데 거짓으로 사랑을 속삭일 수는 없지 않은가. 거기다가 이미 이혼을 결심한 상태였다. ‘이게 이혼할 때 문제가 되면 안 되는데….’ 나는 에밀리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곧바로 서재에 들어갔다. 서재 문을 닫으면서 몇 번 심호흡을 했지만, 잉크를 잔뜩 먹인 깃펜을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진정하자, 진정해. 이 다니엘이란 남자 때문에 실행도 하지 못한 계획을 망칠 수는 없잖아. ‘클라우스만 상대하기도 벅찬데 이름밖에 모르는 남자 때문에 죽을 수는 없다고!’ 나는 펜대 끝을 입술로 가볍게 물다가 이내 릴리안이 할 법한 거절의 말을 줄줄이 양피지 위에 쏟아부었다. 한동안 릴리안의 행세를 하다 보니 내가 봐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릴리안의 서체와 말투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서둘러 왁스를 녹여 인장까지 꾹 찍고 봉투를 에밀리에게 건넸다. “자, 여기.” “네, 그럼 전해주고 오겠습니다.” 에밀리는 잠시 편지와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답장을 보냈음에도 뭔가 찝찝한 느낌이 감돌았다. 예상외의 복병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결국 나는 그날 하루 종일 다니엘이 누군지 기억하려고 애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 * * 다니엘은 이런 내 노력을 비웃듯 릴리안의 일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마님. 그분께 서신이 왔습니다.”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내 허락에 안으로 들어온 에밀리의 손에는 또다시 어제 보았던 인장이 찍힌 편지가 들려 있었다. 나는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리 주렴.” 나는 받아 드는 손끝이 떨릴까 온 신경을 집중한 채 봉투를 열고 어제처럼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to. 사랑하는 나의 릴리안. 당신의 답장을 받고 한동안 눈물이 쉬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사이가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당신에게는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편지 한 통으로 쉽게 놓아질 만큼 가벼운 사이였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당신과 끝낼 수 없습니다. 제발 당신을 한 번만 더 만날 기회를 줘요.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릴리. from. 당신의 다니엘.]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 남자의 말대로 이 정도로는 쉽게 끝날 사이가 아니었나 보다. 어제 답장으로 그만 만나고 싶다고 보냈는데, 바로 다음 날부터 이러니 머리가 살짝 아파왔다. 답장을 너무 대충 썼나 보네. 이번에는 좀 더 단호함을 담아서 써야겠어. 나는 다니엘이라는 남자에게 다시 이별의 답장을 썼다. [to. 다니엘. 어제 말했던 것처럼 난 더 이상 당신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잠시 눈이 멀어 당신과 만났다고 생각하고 이제 그만 나를 놓아주세요. 혹여 또 서신이 오더라도 앞으로는 대응하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서신을 보내지 마세요. from. 릴리안.] ‘설마 또 오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또 편지가 왔다. “마님. 그분과 한동안 만나지 않으시더니 요새 편지를 자주 주고받으시네요.” 에밀리가 네게 편지를 건네주며 말했다. “르웨인 경- 아, 죄송합니다. 이름을 말하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죄송합니다. 마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에밀리가 내게 연신 용서를 빌었다. 아무래도 실수를 한 것 같은데 진짜 릴리안이었다면 그녀를 혼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녀가 이렇게 흘린 실수는 중요한 정보가 되고 있었다. “네가 르웨인 경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지? 그를 본 적이 있는 거니?” 그래서 나는 우선 편지를 제쳐두고 그녀의 수다스러움을 이용해서 다니엘 르웨인이라는 남자에 대해서 캐기 시작했다. 에밀리와의 대화는 거의 이런 식이었다. 내가 ‘아, 기억이 안 나는 것 같은데…. 그게 뭐였더라?’ 이러면 에밀리는 의심 없이 그것에 대해서 술술 읊어줬다. 그 결과 나는 집착적으로 서신을 보내는 남자에 대해서 꽤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니엘 르웨인. 르웨인 남작의 사생아인 그는 에밀리에 의하면 릴리안과 만난 지 2년 정도 된 듯했다. 그런데 의아한 점이 하나 있었다. 스스로 공작 부인의 정부를 자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 대놓고 만날 수가 있나? 저택에서 일하는 이들이 알고 있다면 분명 클라우스도 알고 있다는 건데…. ‘도대체 세 사람은 무슨 관계지?’ 내가 알고 있는 건 릴리안이 클라우스를 사랑하고, 클라우스는 릴리안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다니엘이 껴 있다니,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한 전개였다. 클라우스는 릴리안을 대할 때 단순히 정략결혼으로 인한 무관심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내비치곤 했다. 거부를 넘어 마치 혐오하는 듯한 태도랄까. 그런데 소설에서는 그런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쩔 수가 없는 게, 릴리안은 주인공이 아닌 악역 조연에 불과했다. 주인공을 보여줘도 부족한데 악역 조연의 행동과 생각 하나하나에 정당성과 의미를 부여하면서 소설을 전개할 필요는 없다. 그저 릴리안은 여자 주인공에게 못되게 굴어서 남자 주인공과의 사랑을 확인하게 해주는 역할만 하면 될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괜히 또 짠하네.’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에밀리를 내보내고 편지 봉투의 끝을 나이프로 끊어냈다. 오늘은 어쩐지 답장을 달라는 소리가 없었는데, 편지를 읽고 나서야 왜 그랬는지 알게 되었다. [to. 사랑하는 릴리. 당신의 편지를 받고서 이틀째 저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저에게 또다시 잔인하게 이별을 통보하다니, 너무하십니다. 이것은 당신께 보내는 제 마지막 편지입니다. 이제 당신의 원하는 대로 더 이상 서신을 보내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가볍게 끝낼 사이가 아니라는 걸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 2년 동안 쌓아온 우리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저 또한 우리를 위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아주시길 바라며. from. 영원히 당신을 사랑하는 다니엘로부터.] 아니 이곳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사랑에 목을 매는 거지? 그깟 사랑이 뭐라고 이렇게 집착하는 걸까.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사랑보다 좋은 게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그나저나 큰일이다. 나는 릴리안과 이 남자가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전혀 몰랐다. 그렇다고 이걸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무척이나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극단적인 선택은 또 뭐야. “설마 뭐 죽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왜 이런 식으로 편지를 보내서 사람을 심란하게 만드는 거야. 이혼 준비하려면 시간도 부족한데 자꾸 신경 써야 할 성가신 일들이 생겨났다. “별일 없겠지….” 그렇다고 장소를 알아내서 다니엘을 만날 수도, 그를 위해서 뭘 어떻게 해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가 릴리안을 하루 빨리 잊고 새 출발을 하길 기도해 주며 그의 존재를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고 애썼다. * * * 우려와 달리 아무 사건 없이 이틀이란 시간이 흘러 늦은 밤이 되었다. 자기 전에 나는 결혼 계약서를 돌려주기 위해 클라우스의 집무실을 찾았다. 2주 넘게 계약서만 들여다봤더니 이제는 그 내용을 거의 다 외울 정도였다. 사실 더 읽어보고 싶었지만 계약서를 오래 가지고 있으면 또 다른 의미로 의심을 당할 수도 있어서 되돌려 주기로 했다. “무슨 일이지.” “이걸 돌려드리려고 왔어요.” 나는 그의 책상에 결혼 계약서를 살포시 놓았다. 클라우스는 그 종이 뭉치를 잠시 쳐다보곤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런 건 집사를 통해 보내면 되는 거 아닌가. 괜한 발걸음을 했군.” “그래도 제가 직접 공작님께 요청하고 받은 거니까요. 돌려드릴 때도 제가 드리는 게 맞는 거죠.” 그렇게 말하며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잠시 고민했다. 지금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이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한 적이 손에 꼽은지라 지금이 기회란 생각에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름 진지하게 말을 꺼낸 건데 클라우스가 가소로운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지. 당신이 그냥 올 리가 없지. 이번엔 뭐야.” 말 한마디조차도 살갑게 하는 법이 없다. 이 남자 릴리안을 정말로 싫어하는구나. “…합방 말인데요.” 나는 얼른 원하는 답을 듣고 나가기 위해 바로 본론을 꺼냈다. “합방?” “네. 2주에 한 번 의무적인… 거요.” “그거에 대해선 예전에 얘기가 끝난 거로 아는데.”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아는 척을 하며 내 얘기를 계속 했다. “그게, 다시 꺼내서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몸이 좋지 않아서 몇 달 건너뛰었으면 좋겠어서요.” 물론 건너뛰는 게 아니라 이혼해서 아주 끝낼 거지만. “몸이 좋지 않으면 의사를 부르면 되지 않나?” 그런데 기꺼이 그러겠다고 하며 반길 줄 알았는데 클라우스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의사를 부를 정도의 상태는 아니에요. 그저 지금은 좀 내키지 않아서….” 살짝 시선을 피하며 말하자 그가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지금까지 나는 내켜서 당신에게 동조했나? 당신이 분명 그랬지. 다른 건 다 포기해도 그건 안 된다고 말이야.” 그가 릴리안에게 가지는 감정이 뭔지 알기에 이렇게까지 말이 길어질 줄 몰랐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앞으로의 일들을 위해 합방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무엇을 이유로 들어야 그가 납득할 수 있을까 말을 고르는데 밖이 소란스러웠다.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가 하며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려는데 마침 집무실 문밖에서 집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님, 함버튼입니다.” “무슨 일이지?” 클라우스의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온 집사장이 나를 보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님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내 손님?” 뭘 망설이고 있는 건지 그는 선뜻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누가, 누가 왔는가?” 급격한 초조함이 전신을 감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장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니엘 르웨인 경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 남자가 이 한밤중에 여길 왜 온 거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며 나도 모르게 눈을 굴리는데, 순간 초조함이 가득 찬 내 눈동자와 냉담한 그의 눈동자가 서로 마주쳤다. “어… 그게….” “당신 손님이니 어서 나가 봐.”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차가운 표정만큼이나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네?” “당신의 정부가 온 듯한데, 아니면 내가 친히 나가서 맞이해 줘?” 역시 알고 있었어. 다니엘을 릴리안의 정부라고 표현하는 걸 보니 클라우스는 서신뿐만 아니라 그 서신 너머의 존재 또한 인지하고 있던 거다. “아니, 아니요. 제가 나갈게요.” 우선 상황을 수습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바로 뒤돌아서 나가려는데 뒤에서 그의 비웃음 가득한 말이 들려왔다. “참 대단해. 당신이나 저자나 귀족의 명예 따윈 안중에도 없나 보군. 그자도, 당신도 염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날카로운 가시가 온몸을 콕콕 찌르는 듯한 말투에 나는 그저 고개를 돌려 한 번 쳐다본 후 문을 박차고 나갔다. 내가 한 잘못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떳떳한 입장도 되지 못하는지라 무어라 할 말도 없었다. ‘…이혼하면 어차피 얼굴도 보지 않고 살 텐데, 실컷 무시하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 한쪽이 시큰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집무실을 나가자마자 아까 전보다 더 큰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릴리! 릴리안!” 소리가 나는 곳으로 서둘러서 걸어가니 아주 가관이었다. 홀에는 처음 보는 갈색 머리의 남자가 술에 잔뜩 취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릴리안의 이름을 울부짖었다. 계단 위에 서 있는 내 모습을 확인한 사용인들이 눈치를 슬금슬금 보더니 내 시야가 닿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홀에는 이제 나와 그 남자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지?’ 머리가 아까보다 더 지끈지끈 아파왔다. 저 남자를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막막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생각해. 생각해야 해.’ 그때 남자가 내가 온 것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치켜들고는 더욱 크게 소리쳤다. “릴리안! 저예요. 다니엘입니다. 제가 왔어요!” 다니엘은 주저앉은 몸뚱이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술을 얼마나 먹었는지 몸을 아예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계단을 최대한 천천히 내려가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릴리안이라면 지금 어떻게 행동했을까. 저 남자에게 지금 당장 공작저에서 나가라고 소리쳐야 하나? 아니면 오히려 보듬어주는 게 맞을까. 떠오르는 질문은 많았지만 답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1층에 발을 내딛자마자 곧장 다니엘을 향해 말을 내뱉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나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말투로 그의 행동을 지적했다. 일단 보는 눈이 너무 많기도 하고, 아무리 릴리안이라지만 공작 부인의 소임을 다해야만 했다. “릴리, 당신이 절 보러 오지 않아서 직접 왔습니다.” 그가 안간힘을 써서 일어나더니 휘청거리며 걸어와 내 앞에 섰다. 순간 뿜어져 나오는 알코올 냄새에 막을 새도 없이 미간이 좁아들었다. “제 편지를 받으셨을 텐데요? 이런 행동이 저를 곤란하게 만들 뿐이라는 걸 정녕 모르시는 건가요?” “그러니까 왜 우리의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다니엘은 오히려 나를 탓하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과하게 술에 취해서 몸을 못 가누는 것치고는 발음이 뭉개지지 않아 그의 말이 또렷하게 잘 들렸다. “제 의사가 전혀 담기지 않은 일방적인 약속을 왜 지켜야 하죠? 그리고 경께서는 제가 왜 안 나갔는지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아니요. 저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쉽게….” 그런데 그때였다. 그가 말을 하다 말고 위쪽을 노려보는 것 같더니 급하게 나를 껴안았다. “이게 뭐 하는…! 이거 놓으세요!” 갑작스런 포옹에 당혹스러운 것도 잠시, 나는 불쾌함과 공포를 느끼며 그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릴리안, 릴리.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이거 놓으시라고요!” 하지만 놓으라는 내 말에 다니엘은 더욱더 세게 껴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고 싶었지만 성인 남자의 힘을 뿌리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가뜩이나 그는 키도 크고 골격도 있어서 도저히 내 힘으로는 무리였다. “사랑해요. 당신은 제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줄 수 없어요!” 정말 술에 취한 건 맞나? 사실 다 연기 아니야? 한참을 두 팔에 힘주어 나를 껴안고 있던 그가 갑자기 내게 키스를 하려고 달려들었다. 아무리 아랫사람들이 다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이 넓은 홀에서 이렇게 막무가내라니. 나는 고개를 흔들며 필사적으로 그를 거부했다. “하, 하지 마!” 벗어날 수 없다는 공포감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과 함께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의 외침에도 남자는 멈출 줄을 몰랐다. 싫었다. 누군가 도와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곳엔 나와 이 남자뿐이었다. ‘이렇게 맥없이 당할 수는 없어!’ 도와줄 이가 없다면 스스로 자신을 구해야만 한다. 한쪽 다리를 뒤로 길게 뺀 뒤 남자의 낭심을 가격해 버리려고 무릎을 올리려는 순간, 갑자기 남자의 몸이 비명과 함께 내 곁에서 떨어져 나갔다. “으윽!” “하지 말라잖아. 경.” 서슬 퍼런, 그러면서 지독히도 낮은 어조로 읊조리는 목소리가 바로 내 뒤에서 들려왔다. 얼떨결에 시선을 위로 올리니 커다란 손이 나를 괴롭혔던 남자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목소리로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가 누구인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공작님?” 내가 그를 부르자 클라우스가 시선을 내려 의미 모를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시선이 얽히자 이 공간 안에 마치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온전히 나만을 보고 있었고 나 또한 그에게 집중했다. 어떠한 말도 없이 우리는 서로를 보며 뜻 모를 눈빛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은 남자의 신음 어린 목소리에 깨지고 말았다. “으윽! 뭐 하시는 짓입니까! 놓으십시오!” 고통에 젖은 다니엘의 말에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뒤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재차 인지했다. 클라우스는 본인만큼이나 건장한 남자를 무려 한 손으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남자가 클라우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저 대롱대롱 매달린 채였다. “하지 말라잖아.” 클라우스는 내게서 시선을 돌려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숨, 숨이! 숨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뻘겠던 남자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혹시나 남자가 진짜로 죽을까 봐 문득 겁이 났다. 나는 다급하게 클라우스의 반대 손을 잡았다. “고, 공작님! 이러다 죽겠어요!” “이자가 죽는 게 걱정되나.” “아니에요. 고작 이런 인간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공작님의 손이 더럽혀지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에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저 남자가 어디서 죽든 말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지만 여기서는, 그리고 클라우스의 손에는 아니었다. 다시금 내게로 고개를 돌린 클라우스가 이내 남자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다니엘은 홀 바닥을 뒹굴며 캑캑거렸다. “흐어억….” 홀에는 남자가 방금까지 쉬지 못했던 숨을 몰아쉬는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꺼져.” 클라우스의 살기가 담긴 말 한마디에 남자가 숨을 헉헉대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리, 릴리안 저는 포기할 수 없어요.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러곤 얼토당토않은 말을 던지면서도 목숨의 위협을 느꼈는지 꽁무니를 빼고 문밖으로 도망쳤다. 나는 멍하니 다니엘의 모습이 저택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쳐다봤다. 소란이 잠잠해지자 홀로 나온 사용인 하나가 눈치를 살피다 문을 닫았다. 나는 그제야 클라우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꼭 하고 싶었다. 클라우스는 아까와는 다른, 예의 무심한 눈을 했다. “저자와는 끝난 건가?” “예? 아, 네.” “왜지?” “네? 어, 그게 그러니까….” 왜라고 물으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릴리안이라면 모를까 나는 저 사람을 모르니까요? 당신하고도 이혼할 거니 좀만 기다려요? 급하게 몇 가지 대답을 생각해 봤지만 머릿속에 떠올린 그대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마음이 떠났어요.” 결국 고르고 고르다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가장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마음이라… 그렇군.”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읽히지가 않았다. 클라우스는 더 이상 내게 궁금한 게 없는지 뒤돌아 2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집무실에서 끝내지 못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공작님!” 보폭이 넓어 급하게 쫓아가다 보니 다급하게 나온 부름에도 그는 선뜻 뒤돌아보았다. 아까보다 지쳐 보이는 표정에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이제 와 갈무리할 정신이 없었다. “아까 말씀드린 거 말인데요. 합방….” “당신이 알아서 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대답을 내놓은 그는 그대로 집무실에 들어갔다. 혼자 복도에 남겨진 나는 그제야 현실을 하나둘씩 인지할 수 있었다. 알아서 하라고? 그럼 이제 합방 안 해도 된다는 말이지? 합방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나 했는데 이렇게 쉽게 해결되다니.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닌가?’ 정부의 존재를 들킨 시점에서부터 릴리안의 입지는 좁아져야 마땅했다. 이렇게 떵떵거리며 돌아다닐 수도 없었고, 오히려 이를 원인 삼아 독방에 가둘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클라우스는 릴리안을 그대로 두었다. 그뿐만 아니라 함부로 구는 정부를 쫓아내주었고, 일방적으로 요청한 합방도 철회해 주었다. ‘어쩌면 악역이라고 내가 너무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었는지도 몰라.’ 나는 클라우스의 집무실을 잠시 바라보다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거의 처음으로 마음 편히 푹 잘 수 있었다. 03. 변화의 시작 시끄러웠던 일들이 지나가고 다시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여느 날과 같이 서재에서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머리를 싸매며 하나둘 적어나갔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나는 특출 나게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나마 손으로 뭘 만지는 걸 좋아해서 잠깐잠깐 여러 가지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것도 쉽게 질려 하는 성격 탓에 오래 못 했지만. ‘보석 공예?’ 예전에 센터에서 취미 반으로 무려 한 달 정도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꽤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았는데, 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보고는 빠르게 포기했다. 이곳 세공사에 비하면 내가 배운 기술은 어린아이 수준도 못 따라갔다. ‘뜨개질?’ 이건 뭐 나름 혼자서 뚝딱뚝딱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을 줄 정도는 됐다. 그렇다고 뭘 만들어서 팔 수 있는 능력까지는 아니었다. ‘요리?’ 요리도 내가 먹을 정도는 하지만 여기서 내가 먹었던 음식을 만든다고 그게 팔릴까 하는 의구심이 크게 들 뿐이었다. “어렵다. 어려워.” 내가 이렇게 무능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 아주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이었다. “이곳에 없는 뭔가 획기적인 걸 만들어서 팔면 딱 좋은데.” 만에 하나 위자료를 못 받더라도 당당하게 나갈 수 있고,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게 필요했다. “하여튼 어딜 가나 돈이 문제야.” 돈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렇게 계속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에 고민을 하고 있는데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님, 에밀리입니다.” “들어오렴.” 다른 방보다 화려하게 장식된 문이 가볍게 열리면서 에밀리가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공작님께서 곧 채비를 하고 사냥을 떠나신다고 합니다.” “사냥?” “예, 황제 폐하와 함께 가시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흐음, 사냥이라. 황제는 다정하고 온화한 성격과 달리 매년 귀족들을 불러 산 하나를 사냥터로 쓸 정도로 사냥을 즐겨 했다. 그래도 명색이 부인인데 챙기는 시늉은 해야겠지? 그길로 나는 클라우스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런데 그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는 참이었다. “무슨 일이지?” “사냥을 떠나신다고 해서요.” “3일 정도 비울 거야.” “3일이요?” 사냥을 무슨 3일씩이나 해? 생각보다 긴 시간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매년 가는 사냥일 뿐인데 새삼스럽군.” “아, 저는 그저 3일이 너무 긴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변명이랍시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을 꺼내버렸다. 다행인지 클라우스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얼른 그의 뒤를 따라 저택의 문까지 배웅을 나갔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가 웬일인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말에 올랐다. 뒤도 안 돌아보고 빠르게 저택에서 멀어져 가는 건 그대로였지만.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제 3일 동안 이곳을 책임져야 하는 건 공작 부인인 나였다. 곧 이혼 절차를 밟을 테지만, 그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이혼 전까지는 루이덴 공작 부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생각이다. “함버튼.” “예, 마님.” “공작님께서 없으신 동안 저택에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 써. 급한 일이 생기면 나에게 보고하고.” “예, 알겠습니다.” 집사장에게 단단히 일러둔 다음 서재로 돌아갔다. 작은 창문 밖으로는 릴리안의 취향대로 화려하게 꾸며 놓은 정원이 보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자 에밀리를 시켜 구비해 둔 경제서가 책상 한쪽에 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깃펜에 잉크를 묻혀 작성해 두었던 목록을 하나씩 지워갔다. ‘이대로라면 후작가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겠는데….’ 가짜인 내가 그들 곁으로 돌아가도 되는 걸까. 아니, 애초에 난 릴리안이 아니니까 돌아간다는 말에도 오류가 있겠다. 그래도 남편이라는 설정 때문일까. 클라우스마저 없으니 외톨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늦은 밤이었다. 에밀리가 잠자리를 봐준 뒤 나갔고 침대에 막 누워 잠을 청하려던 참이었다. “마님, 마님!” 그런데 한 시녀가 문밖에서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 “마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다는 소리에 나는 불이라도 난 줄 알고 침대에서 서둘러 내려와 문을 열었다. 문밖에 서 있는 시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인데 그래?” “공, 공작님께서…!” “공작님께서 왜?” 시녀는 뜬금없이 사냥을 간 클라우스를 찾았다. 덜덜 떨리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니 불안감이 삽시간에 온몸을 휘감았다. “공작님께서 사냥터에서 낙마하시어 크게 다치셨다고 합니다!” “뭐?”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말을 타고 나간 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떨려오는 손을 뒤로 숨기며 시녀의 대답을 재촉했다. “지금 부상을 입으신 채 귀환하고 계시다고 해요.” “함버튼은? 집사장은 어디 있지?” “마님! 저 여기 있습니다.” 때마침 함버튼이 2층으로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도 소식을 듣고 곧장 나를 찾아온 듯했다. “자세하게 얘기 좀 해보게. 공작님께서 낙마를 하셨다고?” “…예. 사냥터에서 사냥감을 쫓아 말을 타고 달리시는데 갑자기 고삐가 끊어졌다고 합니다.” “고삐가 끊어지다니?” “죄송합니다. 장비 관리를 제대로 했어야 하는데 제 불찰입니다.” “그건 나중 문제고, 공작님께서는 얼마나 다치셨지?” “그게-” 집사장이 클라우스의 부상 정도를 얘기하려는 그때, 1층 홀이 소란스러웠다. 클라우스와 함께 떠났던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그가 도착한 듯했다. 나는 집사장의 말을 끊고 재빨리 1층으로 내려갔다. 많게만 느껴졌던 계단을 순식간에 내려가자 이제 막 홀로 들어서는 그가 보였다. 상반신을 탈의한 그의 오른쪽 어깨에 붕대가 감겨 있었고, 그 위로 상의가 살짝 걸쳐져 있었다.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갈 생각도 못 한 채 유심히 그의 몸을 살폈다. 두 발로 서 있는 걸 보니 다리는 다행히 다치지 않은 것 같았고, 잘생긴 얼굴에는 살짝 긁힌 자국만 몇 개 눈에 들어왔다. “큰 부상도 아닌데 소란이군.” 공작가에 사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주인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늦은 밤까지 자리를 지켰다. “괜찮으세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표정과 말투를 보아하니 심한 부상은 아닌 것 같았지만 공작 부인의 위치를 잊지 않고 예의상, 그리고 어쩐지 조금 걱정이 되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조금 다쳤을 뿐이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의사를 불러야겠어요.” “마차에서 이미 치료했으니 됐어. 다들 물러가라. 함버튼만 남고.” 클라우스의 말에 사용인들이 조용히 홀에서 물러났다. 집사장만 남으라고 했지만 왠지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공작님, 의사를 불러 제대로 치료를 받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됐다. 그보다 내 말의 고삐를 지금 당장 조사하도록 해.” “고삐요?” “누군가 장난질을 쳐놨어.” “네? “장난질이라니요?” 집사장과 내가 동시에 대답했다. “긴말 필요 없이 그건 조사해서 밝히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이 살기등등했다. 피로와 고통이 겹친 적안이 어느 때보다 붉게 일렁였다. “오늘 나를 죽이지 못한 걸 후회하게 해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가문의 기사들을 풀어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클라우스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집사장 또한 홀에서 물러났다. 이제 넓은 장소에 나와 클라우스만이 남았다. ‘아까 다 물러가라고 할 때 갈걸. 타이밍을 놓쳤어.’ 이미 치료를 받았다니까 의사를 부르러 갈 수도, 그렇다고 잘 자라고 말하기에도 이미 늦은 듯했다. 나는 힐끔 눈만 굴려 그의 어깨에 감긴 붕대를 훔쳐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누구일 거 같나.” 그런데 갑자기 그가 뜬금없이 내게 질문을 했다. “예?”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이곳에 아는 사람이…. ‘리, 릴리안 저는 포기할 수 없어요.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 순간 왜 그 남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이와 그가 생각하는 이가 같은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클라우스를 쳐다봤다. “그래. 나도 그자일 거라고 예상 중이야.” 클라우스는 내가 누굴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지 이미 알아챈 듯했다. 나는 괜히 찔리는 기분이 들어 입술을 적시며 물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제부터 그걸 조사해야지. 내 집에 아무래도 쥐새끼가 있는 것 같군.” 쥐새끼라면 세작을 말하는 건가? 공작가에 그 남자의 세작이 있다고 의심하는 걸까? 설마, 나를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클라우스의 얼굴을 살폈다. 굳게 입을 다문 얼굴로는 도저히 그의 의중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도 들어가지.” “아니에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평소와 다르게 적극적인 태도 때문인지 그의 시선이 달라졌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그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떳떳함보다는 심장이 쿵쿵거렸다. “왜, 왜요?” “…아니야.” 그는 부상을 입고서도 2층으로 성큼성큼 올라가 내 옆방인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문 앞에서 고민하다 이내 문고리를 돌렸다. 이곳에서 한 달을 넘게 있었지만 그의 방은 처음이었다. 화려한 릴리안의 방과는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클라우스의 방은 주인을 닮아 냉랭하고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 서서 뭐 해.” “아, 갈게요.” 나는 그의 어깨에 걸쳐 있던 옷을 받아 정리했다. 시중을 받는 것도 그랬지만 이런 식으로 시중 아닌 시중을 드는 것도 어색하기만 했다. “…당신은 이만 방으로 돌아가. 함버튼을 부르도록 하지.” 클라우스도 나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는 걸 눈치챘는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네? 아니에요. 함버튼은 지금 공작님께서 시키신 일 때문에 바쁠 텐데 제가 할게요.” “그럼 그런 표정은 좀 안 짓는 게 어때?” “제 표정이 왜요?” “억지로 하고 있는 표정이잖아.” 내 표정이 그렇게 좋지 않았나? 나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건 아니에요. 그저 조금 당황스러워서….” “뭐가 당황스럽지?”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처음 하는 사람처럼 새삼스러운 소리를 하는군.” “네? 아, 죄송해요.” 눈치가 진짜 귀신같네. 이 남자 앞에서는 뭘 숨기기도 힘들 것 같았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긴장한 상태였는데 그의 날카롭고 예리한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나름대로 에밀리가 내게 해주듯이 비슷하게 흉내는 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눈에는 영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리 줘.” 클라우스가 다치지 않은 팔을 뻗어 내 손에서 겉옷을 가져가려고 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나는 서둘러 몸을 돌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신 차리자.’ 흙이 묻은 옷을 털어 가지런히 협탁 위에 올려놓은 뒤 새 셔츠를 꺼내 그가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왔다. 몇 번 움직이자 이제 어느 정도 손에 익어 긴장감이 조금씩 옅어졌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솟아올랐다. 왜 클라우스가 범인으로 다니엘을 콕 집어서 언급했을까. 괜히 의심을 살까 봐 걱정되기는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어봤다. “공작님께서는 왜 다니엘 르웨인 경을 범인으로 생각하시는 거죠?” ‘당신은 그 사람 말고도 적이 많잖아.’ 실제로 클라우스는 주변에 적이 많았다. 비뚤어지고 모난 성격 탓도 있겠지만 젊은 나이에 공작으로서 공작가와 영지를 잘 이끌어나가는 모습에 열등감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거기다 클라우스는 황제와 막역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속을 터놓은 형제같이 지냈고, 그 때문에 클라우스를 시샘하고 질투하는 이들 또한 상당했다. 그랬기에 황제가 여러 일련의 사건들로 클라우스에게 등을 돌렸을 때, 그리고 그의 가문이 몰살당할 때 그의 편을 들어준 귀족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같이 묻는군. 그건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아, 뭐 그렇긴 하죠.” 괜한 질문을 한 것 같아 아차 싶었다. 그래도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와 속으로 안도하고 있는데 클라우스가 내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건넸다. “이런 치졸한 짓을 하는 건 그자밖에 없을 테니까.” 그 남자가 원래 이런 식으로 위협을 줬었나? 도대체가 아는 게 있어야 대응을 하고 정보도 얻고 할 텐데, 갈피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그날 다니엘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했는데, 정말 그 남자가 범인이라면 이런 식으로 또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 게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해를 가하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클라우스가 나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봤다. “아마도 당신 때문이겠지.” 순간 내가 한 잘못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릴리안의 정부였고, 그런 정부가 감히 공작에게 위해를 가했다. ‘그것도 나 때문에.’ 정확히 말하자면 릴리안 때문이겠지만, 이제부터 그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 그래서 클라우스가 욕실에 들어가서 씻고 나오는 동안,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이다. “가서 쉬지. 피곤하군.” 그런 내 모습을 한 번 스윽 보더니 그가 침대에 앉으며 말했다. “더 도와드릴 일은….” “없어.” “알겠어요. 그럼, 쉬세요.” 계속 있어 봤자 내게도 좋을 게 없어 보여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애써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며칠 전과 다르게 밤새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설마 잡혀도 내가 시켰다는 그런 개소리를 하진 않겠지?’ 이상하게 불안했다.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한지,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아니야. 그래도 내가 그 남자와 끝낸 걸 다 봤는데 설마 나를 의심하겠어?’ 아직은 다니엘이 고삐를 망가트렸다는 확실한 정황도 없었다. 나와 클라우스의 예상과 달리 그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이번 일이 제발 그 남자와 관련되지 않기를 바랐다. 유독 긴 밤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 * * 이런 근심과 다르게 그 이후 며칠 내내 다니엘에 대한 걱정이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그날 새벽부터 클라우스의 몸에 열이 오르면서 공작저가 한바탕 난리가 났기 때문이다. 갑자기 끓어오른 고열과 오한이 클라우스를 덮쳤다. 그의 방에 설치된 설렁줄 소리를 듣고서 서둘러 도착한 집사장은 거의 반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 후 집사가 바로 나에게 알려왔고, 나는 그에게 의사를 부르라는 명령을 내리고 클라우스의 침실로 갔다. 침대 근처로 가니 클라우스는 고열 때문에 숨을 쉬기가 힘든지 색색대며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공작님….” 내가 작게 부르자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그의 적안은 두려울 정도로 반응이 거의 없었다. 나를 보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클라우스는 처음이었다. 물론 그가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축 늘어져 있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때 시녀 한 명이 차가운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을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수건을 대야에 담근 후 꺼내서 물기를 꽉 짜더니 잠시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할게.” “아닙니다. 마님.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야. 이리 줘.” 나는 시녀에게서 수건을 건네받았다. 얼마나 열이 나는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이 흘렀고, 반쯤 덮고 있는 얇은 이불마저 식은땀에 꽤 젖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서 그의 이마부터 얼굴을 천천히 닦아주었다. 목선을 타고 가슴팍으로 내려가다가 나도 모르게 손이 멈칫했다. ‘몸도 닦아줘야겠지?’ 비록 내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릴리안과 클라우스는 합방을 정기적으로 가졌기에 이미 서로의 몸은 다 본 사이일 거다. 그래서 여기서 그만두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우선 그의 다치지 않은 팔을 이불에서 살짝 뺀 다음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씩 꼼꼼하게 닦아줬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한 뒤 이불을 살짝 젖혔다. 붕대를 감은 부분을 제외하곤 맨 가슴이 눈앞에 드러났다. 아픈 사람의 몸일 뿐인데 괜히 눈길이 가서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아픈 사람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속으로 스스로를 꾸짖으며 가슴팍으로 수건을 옮기는데, 갑자기 클라우스가 내 손목을 잡았다. 피부에서 느껴지는 그의 손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내 손을 잡은 그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가 않았다. “뭐라고요?” 나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그만.” “네?” “그만, 해….” 그는 나에게 그만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픈 사람이 원하지도 않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는 생각과 그래도 몸의 열을 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강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잠깐 고민하는 사이 밖에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님, 의사를 모셔왔습니다.” “어서! 어서 들어오게.” 다행히 때맞춰 의사가 도착했다. 허락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고 집사장과 함께 의사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집사장은 사용인들을 물린 뒤 의사에게 무어라 클라우스의 증상을 설명해 주었다. 그동안 나는 의사의 생김새를 재빨리 훑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꽤 젊어 보이는 외모였다. “공작님과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이리로.” 나는 그의 몸을 닦아주기 위해 숙였던 허리를 펴고 의사에게 자리를 비켜줬다. 그러자 의사가 침대 옆으로 가서 클라우스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공작님,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한 발 뒤로 물러가 의사가 하는 양을 쳐다봤다. 그는 붕대를 풀어 상처를 본 뒤 입 안, 그리고 드러난 피부 곳곳을 살펴봤다. 진찰을 끝낸 의사가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낙마 사고가 있으셨다고 들었는데…. 이 증상은 독입니다. 독에 중독되셨습니다.” “독이라니?” “어깨의 상처를 살피니 고열이 날 정도의 염증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입 안과 피부를 살펴보니 입 안쪽에 검은 반점들이 보였습니다.” 나 또한 그의 상처에 염증이 생겨 열이 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독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럼 해독은? 해독은 가능하겠지?” “그것이….” 의사가 뜸을 들이는 게 느껴졌다. 느낌상 저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대답을 쉬이 못 하는 거였다. “무슨 독에 중독됐는지 확인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해독약을 만들어야 됩니다.” 클라우스가 어디서 독에 중독된 걸까. 나는 그의 일정을 복기하며 곰곰이 생각을 했다. 보통 독에 중독되는 건 무언가를 마셨거나, 무언가를 만졌거나 둘 중 하나였다. 만졌다? 그러고 보니 클라우스의 몸을 닦아줄 때, 그의 오른쪽 손바닥에 의사가 말한 것과 유사한 검은 반점이 있었다. 그저 생채기가 난 줄 알고 별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고삐.” “예?” 클라우스의 어깨 부상도 고삐가 끊어져서 생긴 상처였다. 누군가 그를 의도적으로 해하려 했다면? 분명 그 고삐에도 독을 썼을 가능성이 높았다. “함버튼, 공작님께서 쓰셨던 고삐는 어떻게 됐지?” “아직 기사들이 조사 중에 있습니다.” “그 고삐를 얼른 가져와. 거기에 독이 묻어 있었던 건지도 몰라. 얼른 가져오게.” “네, 알겠습니다.” 내 말에 집사장이 서둘러서 밖으로 나갔다. 의사는 연신 내 눈치를 살폈다. “무슨 독인지 알면 해독약을 만들 수 있는 거 확실한가?” “…우선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네가 해독약을 만든다면 이번 일을 절대로 잊지 않을 테니 최선을 다해주게.” “아, 알겠습니다. 마님.” 의사와 말을 나누는 사이 함버튼이 고삐를 손수건으로 감싼 채 침실로 들어왔다. “여기 있습니다.” 의사가 손수건째 고삐를 받아 들고는 자세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하는 양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여기, 여기를 보십시오.” 의사가 지목한 부분을 바라보자, 갈색 고삐의 삼 분의 일가량이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공작님께서 부상을 당하시고 돌아오셨을 때는 어떤 증상도 보이지 않으셨나요? 혹시 얼굴빛이 달라졌다든가 말입니다.” “아니, 없었어. 어깨만 못 쓰실 뿐 내가 보기에는 멀쩡하셨네.” “흐음…. 독 중에서도 정말 악질인 독은 인체에 스며든 지 최소 몇 시간, 혹은 며칠이 지나야만 증상이 발현됩니다. 공작님께서는 아무래도 그 독에 당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이제 해독약을 만들 수 있는 건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부탁하네. 공작님의 목숨이 달린 일 아닌가.” “우선 열을 내릴 수 있는 약을 지어서 올리겠습니다. 그런데 해독제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시간 이후로 공작님께 계속 눈을 떼지 마셔야 합니다. 증세가 악화되는지 지켜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고 자네는 해독제를 만드는 데에 집중해 주게.” “알겠습니다.” 의사가 곧바로 약을 제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고, 나는 집사에게 다시 한번 저택 보안을 강조했다. “함버튼, 기사들 중에 이 고삐를 만진 자가 있을 테니 기사들도 각별히 신경 써줘야 해.” “알겠습니다, 마님.”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를 테니 나가 보고.” 나는 집사가 나간 문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클라우스의 안색을 살폈다. ‘대단해.’ 분명 온몸을 휘감은 열기에 정신을 놓을 만큼 고통스러울 텐데, 그는 눈을 뜨고서 우리의 대화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작님.” 만약 진짜로 범인이 다니엘이면 어떡하지. 그리고 그로 인해 클라우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심란했다. 내가 원인 제공을 한 셈이 될 테니까. ‘아니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잖아. 괜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나는 다시 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불을 들쳐서 그의 몸에 맺혀 있는 땀들을 조심히 닦아주었다.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지 클라우스의 얼굴색이 말이 아니었다. 더 이상 나를 저지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듯 눈만 끔벅거리며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요. 의사가 해독제를 만들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땀에 젖은 옷을 벗겨낸 후 새 이불을 덮어주었다. 마무리로 수건을 물에 적셔 짠 후 이마에 올려줬다. 그리고 침대 옆에 앉아서 그의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나 계속 유심히 지켜봤다. 노크를 하고 들어온 집사장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애써 담담한 척 그에게 물었다. “해독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아직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게, 이틀 정도는 걸릴 듯합니다.” “너무 늦어. 의사에게 좀 더 빨리 만들라고 재촉을 해줘. 그리고 필요하다는 건 뭐든지 지원해 주게.” “알겠습니다.” 올려다본 집사장 또한 상당히 지친 기색이었다. 나는 눈빛으로 그를 다독이며 기사들의 안부를 물었다. “기사들은 어떻게 됐나?” “고삐를 만진 기사들 중에도 한 시간 전부터 공작님과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그들도 공작가의 기사들이니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 써줘야 하네.” “네, 알겠습니다.” 그가 나가고 다시 둘만 남게 된 방 안에는 불규칙한 숨소리만 들려왔다. “너무 아파서 잠이 안 와요?” 여전히 눈만 멍하게 뜨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얼른 자요. 그래야 체력이 조금이라도 생겨서 이겨낼 수 있어요.” 이상하게도 클라우스는 인상까지 쓰면서 잠을 이겨내려 했다. 그게 또 너무 안쓰럽게 느껴져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미간에 손을 갖다 댔다. 그리고 부드럽게 살살 쓸어줬다. 예전에 엄마가 내가 잠이 오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면 이런 식으로 만져줬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이 남자도 얼른 잠에 빠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자요. 옆에 있을게요.” 그러자 내 손길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가 금세 눈을 감았다. 역시 엄마는 옳았다. ‘여기 와서 간신히 잊고 있었는데.’ 잘 지내고 있을까. 딸을 먼저 보내고 매일을 울면서 지내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이곳에 온 뒤로 한번 떠올리면 눈물이 멈추지 않을 것 같아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살아야 했기에,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기에 나를 약하게 만드는 추억은 애써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아픈 사람을 보니 감정적으로 약해져서 그런 건지 엄마에 대한 기억은 멈추질 않고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흑….” 조금씩 터진 눈물이 이제는 얼굴을 타고 내려올 정도여서 더 이상 눈물을 훔치는 건 무의미했다. 눈물이 앞을 가려 클라우스의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여기 와서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 * * 잠이 든 그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깜박 졸았나 보다.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얼른 클라우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잠결에 들었던 소리가 그의 목소리였는지 입술이 작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잘 들리지 않아서 그의 입술에 귀를 갖다 댔다. “뭐라고요?” “…추워.” “추워요?” 그러고 보니 클라우스가 몸을 잘게 떨고 있었다. “…!” 그의 팔을 만졌는데 아까는 고열 때문에 불덩이처럼 뜨거웠던 몸이 지금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의사를, 의사를 부를게요!” 나는 재빨리 설렁줄을 흔들었다. “마님, 무슨 일이십니까.” “의사, 의사를 불러주게.” 내 어깨 너머로 클라우스의 상태를 확인한 집사장은 곧장 의사를 부르러 달려 나갔다. 나는 이불을 좀 더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하지만 추위가 몰려오는지 쉬이 몸의 떨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어떡해….” 혹시나 정말로 그가 잘못될까 봐 걱정이 밀려왔다. 이혼을 하면 평생 보고 살 생각도 없었고, 그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어떤 업보를 받든 신경 쓸 필요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그가 사그라드는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때 들려온 의사의 목소리에 간신히 정신 줄을 붙잡을 수 있었다. 나는 떨려 나오는 목소리를 누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몸이 얼음장같이 차가워. 그래서 추운지 공작님께서 몸을 계속 떨어. 떨림이 멈추질 않아.” 의사가 클라우스에게 다가와 그의 상태를 살펴봤다.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독이 안의 장기까지 침투해 더 광범위하게 퍼진 것 같습니다.” “해독제는 어디까지 진행됐지?” “고삐에 묻은 독이 스란다라는 독초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 독초의 구조를 파악하여 그에 맞는 해독제를 제조 중입니다.” “스란다? 그 독초가 구하기 쉬운 건가?” “아닙니다. 무척이나 구하기 힘든 식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겠네. 여하튼 얼른 서둘러 주게.” 그 스란다라는 독초를 누가 어떻게 구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눈앞의 이 남자를 살리는 것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런데 공작님께서 지금 체온을 스스로 유지를 못 하셔서 몇 가지 조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뭐가 필요하지? 말만 하게.” “공작님의 침실에 더 뜨겁게 불을 때서 방 안의 온기를 높여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건강한 사람의 정상 체온을 이용하여 온기로 몸을 데워주는 것입니다.” “온기로?” “예.” 의사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한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내가 하겠다.” 지금은 그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살갑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도움의 손을 뻗어준 첫 번째 사람이니까. 악역이라 할지라도 릴리안의 남편이니까. 아직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사람이니까.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모든 변명을 다 써서라도 그를 돕고 싶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곧바로 나는 침대에 올라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실례할게요, 공작님.” 클라우스만 들리게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한 뒤, 그의 커다란 몸을 두 팔로 껴안았다. 생각보다 훨씬 몸이 찼다. 사람의 몸이 이 정도로 식을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클라우스가 몸을 너무 떨어서 그 떨림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럼 저는 서둘러서 해독제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나가보겠습니다, 마님.” 나는 두 사람을 배웅하지 못한 채 눈으로만 인사를 건넸다. “해독제 곧 만들어 올 거예요. 조금만 참으세요, 공작님.” 클라우스에게 체온을 나눠주면서 문득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프다는 건, 누군가가 아픈 걸 지켜본다는 건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나약하게 만드는구나.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겠다고, 이혼을 해서라도 나 혼자만 무조건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애초에 이 남자는 릴리안에게 모진 말을 참 많이도 내뱉었다. 비록 그것이 나에게 향하는 말은 아니었을지언정 듣는 사람은 나였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나였다. 그래서 내 의지는 더욱더 변함이 없었다. 이런 인간과는 절대 엮이지도 말고, 관심도 갖지 말고, 반드시 내 목표만을 이루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은…. ‘당신도 가능하면 좀 더 긴 시간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게 된다면 말이야. 앞으로 또 내 마음이 변할지 변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그의 안녕을 기원했다. 클라우스를 껴안은 채 한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목덜미 주변에서 그의 고른 숨결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리고 추위로 격했던 몸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나는 거기에 힘입어 그가 완전히 낫기를 바라며 그에게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죽지 말아요. 적어도 지금 내 눈앞에서는 아니에요.’ 절대로 죽으면 안 돼요. * * * “마님…!”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클라우스에게 체온을 나눠준다고 침대에 껴안고 누워 있었는데 깜박하고 잠이 든 듯했다. 창문 밖을 보니 벌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픈 사람을 보살핀다면서 그만 바보같이 깊게 자버린 것이었다. “어?” 그런데 뭔가 갑갑한 느낌이 들어서 보니 나의 몸 위로 그의 커다란 팔이 둘러져 있었다. 분명 내가 그를 안고 잤는데 일어나 보니 그가 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 “마님! 함버튼입니다.” 집사장이 문밖에서 나를 찾았다. 나는 당혹스러움을 숨기고 조심히 그의 팔을 치워 침대에서 내려왔다. “들어오게.” 흐트러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하자마자 집사와 함께 의사가 들어왔다. “드디어 해독제를 만들었습니다!” “뭐? 그게 정말인가?” “예! 성공했습니다!” 집사장의 감격에 겨운 웃음에 나 또한 기쁨으로 입꼬리가 활짝 올라갔다. 잠도 자지 못했는지 어제보다 수척해진 의사가 나와 클라우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여기 해독제입니다.” “정말 고생 많았어.” 나는 클라우스를 깨우기 위해 뒤를 돌아 그의 팔을 살살 흔들었다. “공작님, 일어나세요. 약을 드셔야 해요. 해독제가 만들어졌어요.” 서둘러 그를 조심히 깨우자 클라우스가 살며시 눈을 떴다. 나는 그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준 뒤 해독제를 입에 갖다 대주었다. 그러자 그가 해독제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휴….’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해독제를 마시는 그를 보니 이제야 긴장이 풀려 온몸 곳곳에서 근육통이 일었다. 해독제를 다 마신 그를 다시 눕히고 이불을 턱 끝까지 덮어줬다. “이제 한숨 주무시고 일어나시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의사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벌써 클라우스의 얼굴의 혈색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의사 대단한 명의였어!’ 소설에서는 클라우스가 독에 당하지 않았으니 이런 의사가 있었는지도 알지 못한 참이었다. 나는 의사를 바라보고는 늦은 인사를 건넸다. “정말 고맙네. 그러고 보니 자네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어. 이름이 뭐지?” “리암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리암, 나도 공작님도 그대의 노고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아닙니다.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의사로서 사명감과 겸손도 있고 여러모로 맘에 드는 인재였다. 이대로 놓치기는 아쉬운 사람이었다. 나는 작게 웃어 보인 뒤 집사장을 향해 말했다. “함버튼, 기사들에게도 당장 같은 해독제를 먹여야 해.” “예, 알겠습니다. 마님.” “그럼 나는 이만 내 방으로 돌아갈 테니 마무리를 부탁하네.” “여긴 제게 맡기고 쉬십시오.” 함버튼에게 뒷일을 부탁한 나는 클라우스를 힐끔 쳐다봤다. 잠이 들었는지 보려고 했는데 순간 붉은빛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약의 효과가 확실히 나타났는지 어제와 다르게 그의 초점이 온전히 나에게로 맞춰져 있었다. 나는 클라우스를 향해 안도의 미소를 짓고 뒤를 돌아 내 방으로 향했다. ‘힘들다.’ 내 방엔 무려 하루가 꼬박 지나고 돌아온 거였다. 나는 침대에 대자로 뻗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번 일로 그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단 상상에 숨이 절로 막혀들었다. 공작가엔 지금 후계도 없어서 당장 가문의 모든 이들이 주인을 잃을 수도 있었던 끔찍한 사건이었다. “깨어나면 피바람이 부려나.” 내가 아는 클라우스는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던 이를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다. 그게 누구든 결국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겠지. 뭐,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나에게만 불똥이 튀지 않기 바라면서 피곤에 절어졌던 몸을 스르르 눕혔다. 지금은 휴식이 필요했다. * * * ‘기분 좋아.’ 꿈에서 누군가 나의 미간을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야?’ 내 미간을 만져주던 사람은 엄마밖에 없는데…. 따스하다.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이어서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말로 엄마라면 이제는 꿈에서밖에 만날 수 없기에 절대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내 이마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손이 떨어졌다. ‘아쉬워…. 가지 마.’ 아쉬웠다. 너무 아쉬워서 인상을 쓰자마자 이마에 따뜻한 감촉이 닿았다. 손보다 더 부드럽고 말캉한 느낌이었다. 정말 누굴까. 누구길래 나를 이렇게 다정하고 조심히 대해줄까. 궁금했다. 그런데 또 어쩐지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이 꿈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계속 그렇게 꿈에서 저절로 깰 때까지 일부러 눈을 질끈 감았다. * * * 이른 아침 마침내 클라우스가 깨어났다. 해독제를 먹고 나니 괴물 같은 회복력을 보인 거였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소란스러웠던 공작가를 재정비했다. 그중 가장 첫 번째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범인을 색출하는 것이었다. 클라우스는 저택의 사용인들을 홀에 모두 불러냈다. 나는 밑으로 내려가지는 않은 채 2층 난간에서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에밀리는 아직 안 왔나 보네.’ 돌이켜보니 클라우스가 부상을 입고 들어온 그날이 에밀리를 본 마지막이었다. 그 후에는 클라우스의 증세가 악화되는 바람에 온통 신경이 거기에 가 있어 정신이 없었기에 그녀를 찾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내 몸단장을 도와주기 위해서 에밀리가 아닌 다른 시녀가 들어왔을 때야 깨달았다. 시녀에게 에밀리에 대해 물어보니 집안에 일이 생겨 잠시 휴가를 냈다고 했다. 설마…. 혹시나 하는 최악의 상상 하나가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나는 강한 부정을 하며 홀에 있는 클라우스와 사용인들을 계속 주시했다. 클라우스가 홀에 나타나자, 저마다 불안함과 공포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작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들의 목소리가 단번에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 고요함을 틈타 깊은 울림을 가진 낮은 음성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다 모였나.” “예, 잠시 개인 사정으로 휴가를 낸 시녀를 제외하고는 다 모였습니다.” 클라우스의 말에 집사장이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휴가?” “에밀리라고 마님을 모셨던 시녀입니다.” “…알았다. 그 외에 수상한 자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발견하지 못했다?” 아직까지 그 어떤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말에 클라우스의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죄송합니다. 좀 더 서두르겠습니다.” 클라우스의 기에 눌린 집사장은 고개를 숙인 채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 클라우스가 사용인들을 천천히 훑었다. 주인의 서늘한 시선에 집사장을 비롯해서 홀에 모인 사용인들의 어깨가 점점 움츠러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무리 속에 섞여 있던 갈색 머리의 남자 하인이 빼꼼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클라우스가 있는 곳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 공작님.” 남자가 클라우스의 앞에 서더니 쭈뼛거리며 그를 불렀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당황이 깃든 눈이 갈색 머리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나 또한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그가 하는 말에 집중했다. “무슨 일이지?” “공작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클라우스가 대답이 없자 남자가 잠시 그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그러고는 아무 말이 없는 클라우스의 태도를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제가 며칠 전에 본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이걸 말씀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공작님 앞에서는 요점만 말하게.” 말을 늘어트리는 하인을 집사장이 빠르게 꾸짖었다. “죄, 죄송합니다, 공작님.” “그래서 뭘 봤단 말이지?” 클라우스가 집사장을 향해 살짝 손을 올려 그를 제지하며 물었다. 자신을 감싸준 것에 대해 힘을 얻었는지 남자의 톤이 한층 올라간 것이 느껴졌다. “예예, 그러니까 제가 며칠 전에 그 에밀리라는 시녀의 수상한 행동을 봤습니다.” 에밀리라는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계단을 타고 살짝 내려왔다. “에밀리? 방금 전에 분명 부인의 시중을 드는 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 맞습니다.” 갑자기 에밀리라니, 지금 여기서 에밀리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이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너는 나를 따라오고 나머지는 해산시켜라.” 나와 마찬가지로 클라우스도 뭔가 심상찮은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공작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클라우스가 단숨에 2층으로 올라왔고 가만히 서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도 들어오지.” “네?”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나는 집무실로 향한 클라우스와 남자 하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름 그녀에게 도움을 받아왔던지라 에밀리를 의심하는 건 꺼림칙했지만, 한편으로는 다니엘의 존재를 알고 있던 그녀였기에 결백을 주장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열려 있는 집무실 문고리를 잡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클라우스는 벌써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그 앞에 하인이 서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소파로 다가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할 얘기가 무엇이지?” “저….” 클라우스의 물음에 하인이 나를 슬쩍 쳐다보며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왜 나를 보는 거지?’ 하인의 시선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씩 떨려오는 손을 뒤로 숨기며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제가 나가 있을까요?” “아니야. 그냥 있어.” 아무래도 이곳에 더 있다가는 뭔가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주 잠깐일지라도 이 자리를 피해서 순간을 모면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하지만 나의 비겁한 요청을 클라우스가 단번에 막았다. “어서 말하라.” “저, 그게… 제가 에밀리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녀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말이죠. 뭐 에밀리를 괴롭히고 그런 게 아닙니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저 멀리서 지켜만 보는 건데 말이죠.” 남자 하인은 아까 집사에게 혼이 나고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클라우스의 앞에서 말을 잔뜩 늘이며 말하고 있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공작님. 요점만 말씀드려야 하는데. 요점만.” 그러면서 자신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더니 말을 다시 이었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그와 나 중 그 누구도 하인의 행동을 보고 웃음을 터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글쎄 며칠 전인가 늦은 밤에 에밀리가 마구간에 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마구간?” “예, 공작님의 말들이 묶여 있는 마구간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따라 들어갈까 하다가, 아이고 이게 제가 뭘 어쩌려고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남자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면서까지 자신의 행동에 전혀 나쁜 의도가 있지 않았음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눈치를 보더니 다시 입을 뗐다. “아무튼 안에 들어가려다 그냥 밖에서 기다렸는데 뭘 했는지는 몰라도 금방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날은 별 의심을 안 했죠. 그런데 이번에 공작님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나니까 딱 생각이 난 겁니다.” “네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인가?” “제, 제가 감히 어떻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알았다. 나가 보거라.” “예? 예, 예예.” 클라우스의 축객령에 하인이 부리나케 밖으로 튀어나갔다. 나는 하인의 말을 듣는 내내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왜 모든 정황이 배후에 내가 있다는 식으로 연결이 되는 거지?’ 만약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미칠 노릇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왜 나를? 릴리안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클라우스를 해치려 들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지?” “네?” 눈앞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고 심각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던 와중 클라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놀란 마음을 애써 가다듬으며 그에게 되물었다. “저자의 말을 믿어도 될 것 같냐는 말이야.” “잘,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하지만?” 이제부터는 말 하나도 조심히 내뱉어야 했다. 이 남자와 나 사이에는 믿음이 별로 없었다. 아니,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나를 믿어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오늘 아침에 복귀하기로 한 에밀리가 아직 오지 않은 것도 그렇고, 저택에서 사라진 시점도 그렇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그렇다면 왜?” “네?” “왜 그 시녀가 나를 죽이려 했을까?” “그건….” 그건 지금 내가 제일 알고 싶은 거였다. 에밀리가 범인이라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말이다. 에밀리가 대체 왜? 가끔 클라우스를 보는 시선에 날이 서 있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그건 릴리안의 영향이 클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모시는 주인을 아무렇지 않게 냉대하고 무시하는 이를 누가 좋게 보겠는가.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나는 그녀를 잘 알지도 못했다. 그저 이곳에 와서 시중을 받거나 정보를 얻기만 했을 뿐, 따로 속을 터놓고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답은 이것뿐이었다. 다행히 나에게서 무슨 대답을 원했던 건 아니었는지 그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 시녀가 다니엘 르웨인이라는 자와 관련되어 있나?” “죄송해요. 저도 아는 게 있으면 답을 드리고 싶은데 전혀 모르겠어요.” “그 시녀를 찾아야겠군. 그래야 배후도 알 수 있겠지.” “저도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도울게요.” “그래.” 아니다. 뭔가 달라. 변화가 없는 게 아니었다.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니라면 아까부터 클라우스에게서 묘하게 예전과 달라진 눈빛이 느껴졌다. 이거라고 딱 집어서 말할 순 없지만 뭔가 달라졌다. 나는 티 나지 않게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다 눈이 마주치자 엉겁결에 시선을 살짝 내렸다. 클라우스의 옷 안쪽 어깨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해독제를 통해 독을 체내에서 빼내서 치료했지만 어깨의 부상은 그렇게 금방 나을 수 있는 게 아닌 듯했다. “어깨는 괜찮으신가요?” 걱정스러운 마음에 어깨의 상태에 대해 물었다. “괜찮아.” “…다행이네요.” 그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잠시 후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가라는 무언의 압박감과 함께 그의 시선에 대한 불편함이 느껴졌다. “저, 더 할 말 없으시면 이만 나가봐도 될까요?” “왜, 바쁜가?” “아뇨, 그건 아닌데….” 예상 밖의 말이었다. 마치 내가 이 자리에 계속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확실히….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분명 평소 그였다면 내 말에 대답을 안 하거나 성의 없이 한마디만 툭 내뱉어야 했다. 아니면 말하기도 전에 나가라고 했을 것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뭘 할 거지? 계속 서재에 있을 건가?” “…아마도 그럴 것 같아요.” “이따 점심은 같이 먹지.” “네? 아, 네. 알겠어요.” 연이은 폭탄 같은 말에 순간 정신이 없어진 나는 나도 모르게 알았다고 대답해 버렸다. “그래. 그럼 나가 봐.” 나는 황급히 클라우스의 집무실에서 나와 내 서재로 갔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방금까지 클라우스와 한 대화를 곰곰이 곱씹어봤다. ‘뭘까. 이러면 곤란한데.’ 왜 갑자기 변했지? 설마 내가 병간호를 해 준 거에 감동했나? 그런 거에 일일이 고마워할 정도로 감정이 풍부하지 않을 텐데. 클라우스가 지목한 다니엘이 범인이라면 어쨌거나 빌미를 준 건 나였다. 비록 지난 2년 동안 다니엘이라는 남자를 만난 건 릴리안이었지만 어쨌든 끝낸 건 나였으니까 말이다. 그가 목숨을 잃을 뻔한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병간호에 선뜻 나설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건 다니엘 르웨인이 범인이라는 전제가 성립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클라우스는 분명 다니엘 르웨인이 범인이라고 완전히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나면 전처럼, 아니, 그보다 더 나를 하대하고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이 완전히 틀린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둘 사이의 분위기가 예전같이 냉랭하지 않을뿐더러 예상치 못한 그의 모습에 갑자기 혼란스러지기 시작했다. “마님, 점심 식사 시간입니다.” 생각에 빠진 사이 시간이 꽤 지났는지, 시녀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 “알았다.” 나는 간단한 치장을 마치고 방을 나섰다. 아직은 소란스러운 공작저이기에 전처럼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 대신 차분한 색상의 수수한 드레스를 입었다. ‘정말로 에밀리가 범인이면 어떡하지.’ 다니엘 한 명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에밀리까지 연관될 수도 있단 생각에 앞날이 막막해졌다. 한편으로는 클라우스가 몸져누웠을 때는 미처 느낄 새도 없었던 배신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느 하나 명확하게 확답을 내릴 수 없어 우선은 눈앞에 있는 상황부터 마주하기로 했다. 마음을 다잡고 식당에 가니 클라우스가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앉지.” “네.” 나는 클라우스의 맞은편에 앉아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함께 식사하는 건 오랜만이네요.” “당신은 식사를 잘 안 하니까.” “아, 네. 그렇죠.”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왜 두 사람이 식당에서 같이 밥을 안 먹을까 했는데, 릴리안에게 그 이유가 있었다니 괜히 먼저 말을 꺼냈다가 실수할 뻔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릴리안이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음식 섭취를 잘 안 한다고 써 있던 게 불현듯 떠올랐다. 그제야 천성도 있지만 더 신경질적이고 짜증과 화가 많았겠구나 싶었다. ‘아, 그래서 그렇게 말랐었나.’ 처음에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손대면 부러질 것 같은 손가락이 뇌리에 선명했다. “그런데 요새는 매 끼니 챙겨 먹는다고?” “네, 요새 갑자기 입맛이 좋더라고요.” 릴리안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몸매를 아름답게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나에겐 예나 지금이나 먹는 즐거움이 인생의 반은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나 이곳에 와서 먹게 된 음식들이 생각보다 입에 맞아서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아무튼 잘 먹어서 지금보다 더 건강해질 자신이 있었고 그러고 싶었다. “다행이군. 그럼 앞으로는 함께 식사하지.” “네? 네, 그래요.” 얼떨결에 긍정의 대답을 했다. 이제 앞으로 꼼짝없이 그와 식사를 하게 된 것이었다. 확실히 우리 둘 사이의 관계는 묘하게 진전되고 있었다. ‘이런 건 전혀 안 반가운데….’ 차라리 예전처럼 차갑게 대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때마침 음식이 나오면서 우리는 한두 마디 더 주고받은 후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클라우스의 다친 어깨는 오른쪽이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오른손잡이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음식을 잘 먹을 수 있을지 조금 염려가 됐다. 그래서 그가 하는 양을 유심히 살펴보는데 왼손으로도 곧잘 먹었다. 아니,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먹고 있었다. ‘왼손잡이였구나.’ 먼저 말을 내뱉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조용히 본 식사를 끝내고 이제 막 디저트를 먹고 있는데, 집사장이 황급히 들어왔다. “공작님, 황제 폐하께 급한 서신이 왔습니다.” “폐하께서?” “예, 여기 있습니다.” 클라우스가 집사장에게 봉투를 받아 인장을 확인했다. 그러곤 봉투를 뜯어 편지를 꺼내 읽었고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폐하께서 곧 도착하신다고 하는군.” “황제 폐하께서요?” 급한 서신이라고 하길래 클라우스를 황궁으로 불러들이는 건 줄 알았더니 완전 반대였다. 황제가 친히 공작저로 오고 있다. 주인공들은 될 수만 있다면 클라우스 빼고 아무도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는데…. 내가 원하지 않아도 계속 접촉을 하게 된다면 이야기의 흐름이 완전히 바뀔 수도 있었다. 나는 웬만하면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없지. 조심하는 수밖에.’ “그래, 함버튼. 서둘러서 폐하를 모실 준비를 하라.” “예, 알겠습니다.” 갑작스런 황제의 방문 소식에 우리는 빠르게 점심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저택의 사용인들은 예고도 없이 오는 황제를 맞이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황제를 만나면 어떻게 그를 대할지, 그리고 소설 속의 그는 어땠는지 계속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준비를 했다. “황제 폐하께서 정문을 통과하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왔다는 집사의 말에 나와 클라우스는 재빨리 저택 밖으로 나가 그를 맞이했다. 황제의 마차는 이제 막 도착해 문이 열리고 있었다. “베이누스의 빛이자 영광이신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클라우스와 나뿐만 아니라 공작저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이 나와 황제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이런, 아픈 사람을 내가 괜히 번거롭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 처음 듣는 황제의 목소리는 확실히 위치에 걸맞게 낮고 위엄이 있었다. 거기다 어쩐지 소설 속에서 알고 있던 그의 성격만큼이나 따스하고 감미롭게 느껴졌다. “다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그의 말에 시녀와 하인들은 몸을 일으켜 재빨리 황제의 용안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고, 나와 클라우스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를 보자마자 베이누스 황족의 가장 큰 특징인 보랏빛의 눈동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두 번째로는 은색 실을 연상케 하는 그의 머리카락이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걸 아시는 분이 이리 오셨습니까.” “하하. 걱정이 돼서 일이 손에 잡혀야 말이지.” “걱정하실 정도로 크게 다친 것도 아닙니다.” 크게 다친 게 아니라니…. 거의 죽다 살아났으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으니 확실히 친해 보였다. 둘을 번갈아 보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는지 클라우스와 대화를 하다 말고 황제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입니다. 루이덴 공작 부인.” “이렇게 공작가에 친히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그와 인사를 나누면서 나는 예의 없는 행동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눈앞에 있는 황제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역시 잘생겼네.’ 얼굴이 개연성이라는 말이 꼭 들어맞는 것같이 황제는 잘생긴 미남자였다. 클라우스가 차갑고 냉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뚜렷한 정석 미남이라면 황제인 이안은 그와 대조적으로 맑고 따뜻하며 다정한 느낌의 호감형의 미남이었다. ‘그래도 클라우스가 더 나은 것 같기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내 눈에는 남편인 클라우스가 더 잘생긴 것 같았다. 두 남자의 외모를 비교하며 감탄 아닌 감탄을 하고 있을 때, 클라우스의 목소리가 나의 잡생각을 깨웠다. “들어가시죠.” “그러지.” 황제가 먼저 걸음을 옮겼고, 나와 클라우스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잠깐 곁눈질로 쳐다보자 클라우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뭐지. 기분이 안 좋은가?’ 지금까지 함께 식사도 같이 잘 해놓고 왜 저러지? 의아한 마음을 미처 풀지도 못한 채 저택의 문이 닫혔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황제가 가장 상석에 앉았고 그 옆쪽에 클라우스가 앉았다. 나는 어디에 앉을까 고민하다 클라우스의 맞은편으로 가려고 움직였다. 그런데 클라우스가 내 손목을 스리슬쩍 잡더니 자신의 옆자리로 이끌었다. 하는 수 없이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몸은 좀 어떤가? 공작.”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이렇게 친히 병문안을 오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내 친우가 아프다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열 일 제쳐두고 왔지.” “한가해서 오신 거 아닙니까?” “공작을 아끼는 내 마음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다니 이거 너무하는군.” “푸흡!” 아뿔싸. 둘이 황제와 귀족 같지 않게 대화가 오가는 모습이 꽤나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두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한 명은 재미난 걸 본 듯 만면에 웃음을 가득 채운 채 흥미롭게 보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그런 내 행동이 맘에 들지 않는지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공작 부인께서 뭔가 재밌으신 걸 발견하신 듯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두 분께서 다정하신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아닙니다. 그나저나 저번에 뵀을 때와 다르게 분위기가 어쩐지 좀 변하셨습니다.” 황제의 예리함에 속으로 헛숨을 들이켰다. 괜히 한 나라의 통솔자가 아니었다. “그, 그런가요? 머리 모양을 바꿔서 그런 건가 봐요.” 나는 대충 외양적인 부분을 언급해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나는 황제를 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가 순간 손목을 타고 올라온 고통에 살짝 인상을 썼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니에요.” 클라우스에게 잡힌 손목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아까부터 손목을 놓지 않아서 신경 쓰였는데 이제는 더 꽉 잡고 있었다. 나는 황제가 알아채지 못하게 테이블 밑에서 살짝 손목을 비틀었다. 놔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손에서 힘을 풀 뿐 놓아주지 않았다. ‘왜 이럴까, 정말.’ 갑자기 급변한 그의 행동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러워 나는 두 남자의 대화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범인은 잡았나?” “아직입니다.” “도대체 누가 공작을 해하려고 한 거지?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이번에 범인을 밝혀내면 내가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황제는 이미 클라우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이곳에 오기 전에 대략적인 보고를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클라우스를 정말 많이 아끼는지 이번에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나저나 고삐에 독이 묻어 있었단 걸 알아낸 것이 공작 부인이라고 들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저는 그저 상황을 토대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쪽을 먼저 생각해 본 것뿐입니다.” “그래도 누구나 그렇게 답을 내놓지는 못하죠.” “공작님께서 멀쩡하셨다면 저보다 더 빨리 알아차렸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클라우스에게 살짝 미소를 지었는데, 내 손목을 붙드는 힘이 약해졌다. 그 틈에 얼른 테이블 위로 자연스럽게 슬쩍 손을 올렸다. “두 사람 사이가 좋군. 공작에게 아름답고 현명한 부인이 있어서 부러워.” “부러우시면 폐하께서도 얼른 혼인을 하시면 됩니다.” 아니야. 아직 아니야…! 여주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나는 너무 이르다고, 그러지 말라고 들리지도 않을 말을 속으로 다급하게 외쳐댔다. “그러고 싶지만 아직 연이 닿지 않았는지 보이지가 않아.” 그래. 아직이야. 좀만 기다리면 나타날 테니 기다려. “폐하께서는 따뜻하시고 다정하셔서 분명 엄청난 분이 곧 나타날 거예요.” “그런가요? 부인께서는 제가 따뜻하고 다정한 것 같나요?” “네, 저는 폐하를 제 남편이신 공작님만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만나 뵐 때마다 그런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물론 내가 황제를 실제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나는 소설 속의 그와 지금의 그를 토대로 대답했다. “이거, 최고의 칭찬이네요.” 황제가 보기 좋게 입꼬리를 올리며 시원하게 웃었다. “언젠가 완벽하게 어울리는, 어질고 아름다운 황후 폐하께서 나타나실 거예요.” 내가 아는 여자 주인공은 그랬다. 그녀의 외모는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다웠고, 성품 또한 올곧고 바른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분명히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다. 나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이 순간 상상이 돼 흐뭇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부인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정말 현실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 바쁘십니까.” 황제와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데 클라우스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매우 가라앉아 있었다. “바쁘지. 그럼에도 이렇게 공작이 걱정돼서 온 거 아닌가?” “저는 이제 괜찮으니 그만 환궁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 날 쫓아내는 건가?” “아닙니다.”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쫓아내려는 게 분명했다. “흐음… 알았다. 이만 환궁하지.” 황제도 클라우스의 분위기가 달라진 걸 느꼈는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를 배웅하기 위해 나와 클라우스도 일어났고 우리 셋은 함께 저택 밖으로 나갔다. “혹시나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게.” “예, 살펴 가십시오.” 그는 마차에 타기 전에 클라우스와 인사를 한 후 나에게도 말을 건넸다. “공작 부인, 오늘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저도 만나 봬서 영광이었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폐하.” 황제는 마지못해 가는 표정을 지으며 마차에 올라탔고 곧 마차가 출발했다. 나와 클라우스는 황제의 마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지켜보았다. 마차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클라우스가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우리는 2층까지 조용히 걸어 올라갔다. 아까 착각한 건가. 분명히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다시 주변 공기가 차가워졌어.’ 뭘 잘못한 것도 없는 거 같은데 괜히 눈치가 보였다. 계속 같이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아 나는 내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서 쉴게요.” 얼른 자리를 벗어나고자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황급히 침실로 들어가려는데, 나직한 말이 나를 붙들었다. “그거 아나?” 그의 목소리가 황제와 있을 때보다 훨씬 낮아져 있었다. “…네?” “오늘 우리 합방일이란 거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새 2주가 지났고, 합방일이 맞았다. “아, 네 그러네요.” 저번에 그와 합방에 대해서 마무리를 지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밤에 당신 침실로 가지.” “네?” 지금 이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고, 공작님…!” 그 말을 남기고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려는 그를, 이번에는 내가 재빨리 달려가 붙잡았다. 그가 자신의 팔을 붙든 내 손에 시선을 한 번 주곤 다시 나를 응시했다. 그런데 눈이 좀 이상했다.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이 스산하다 못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갑자기 어디서 핀트가 나간 거지? “우, 우리 그 얘기는 이미 끝난 거 아니었나요?” “무슨 얘기를 말하는 거지?” “다니엘 르웨인 경이 찾아왔을 때 말이에요…! 기억 안 나세요?” “아, 그날…. 기억하지.” “네네. 기억하시죠? 그런데 왜 지금 이런 얘기를 하시는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 “내가 뭐라고 했더라.” 클라우스의 입꼬리는 분명 위로 올라가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아 스산한 분위기에 무게를 더했다. “…제 뜻대로 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은 게 아니라 그랬었다. 왜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하는 거지? “그…. 아직 어깨도 낫지 않으셨는데 무리하시면 안 좋지 않을까요?” 말이 통하질 않자 나는 다른 방식으로 그를 회유하려고 했다. “날 걱정하는 건가?” “네. 당연히 걱정이 되죠. 제 남편이시잖아요.” 그때 클라우스가 자신의 팔을 잡은 내 손목을 붙들더니 입가에 가져갔다. 그리고 살짝 혀로 핥으며 비소를 흘렸다. “걱정하지 마. 그 정도는 한 손으로도 충분하니까.” 순간 온몸이 굳으며 소름이 돋았다. 그런 나를 쳐다본 클라우스가 다시 집무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나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다시 그를 붙잡았다. “공작님, 이러시면 안 되잖아요.” “뭐가 안 된다는 거지?” “분명 그때 말씀드렸어요. 저는 지금 공작님의 막무가내 행동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이 문제에 관해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단호한 태도로 그에게 말했다. “왜 당신은 마음대로 해도 되고 나는 안 되지?” 그런데 그는 내 의견 따위는 애초에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계속 당신 마음대로 했잖아. 그래서 이제는 나도 내가 내키는 대로 해 보려고.” 클라우스가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대화는 나에게 전적으로 불리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감정이 오갔는지 나는 전혀 몰랐다. 사랑 없이 의무 때문에 했다고 모든 것을 일축하기엔 걸리는 점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당신이 공작 부인이라는 걸 항상 기억해. 우리는 공작가의 대를 이어야 하는 의무가 있어.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거야.” 무엇보다 그가 의무를 들먹이며 말하면 내 위치에서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기다리고 있어.”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클라우스는 그렇게 한마디만 남기고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내 방으로 돌아왔다. 이 사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생각해야만 했다. 그런데 힘없는 노크 소리가 내 주위를 환기시켰다. “마님, 로아입니다.” 로아는 에밀리 대신해 나를 시중드는 시녀였다. “들어와.” 로아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요즘 그녀를 볼 때마다 내내 보고 싶던 한 사람이 떠올라서였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로아는 내 가장 친한 친구와 무척이나 닮은 편이었다. “마님?” 내 행동에 이상함을 느끼며 로아가 나를 불렀다. “아, 무슨 일이니.” 나는 멍하던 정신을 차리며 로아에게 물었다. “저, 공작님께서 합방 준비를 하라고 명하셔서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해 왔습니다.” 벌써 집사장에게 말을 해놓은 듯했다. 그는 오늘 정말로 합방을 할 생각이었다. “내가 알아서 씻을 테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서 쉬렴.” “하지만…. 네, 알겠습니다.” 나는 로아를 물리고는 머리를 거칠게 헝클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차라리 지금이라도 이혼하자고 말해버릴까? 그런데 아무 준비도 없이 어떻게 밖에서 살아가지? 내가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었고, 아는 사람이라곤 공작가에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아나면 일단 후작가로 들어갈까?” 원래 이혼을 하면 그곳으로 갈 생각은 아니었다. 아는 사람도 없이 릴리안을 흉내 내며 신경이 곤두선 채로 매일매일을 그곳에서 지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대로 준비도 하지 못한 위기 상황이었다. 아무리 관계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해도 더 이상 클라우스와 가까워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 그래도 작위가 후작 정도인데 막 나오지는 않겠지?’ 다만 걱정되는 건 클라우스가 어떻게 나올 건지였다. 지금 그의 태도로 보아 순순히 이혼을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진짜 이해가 안 된다고. 원래 릴리안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처음 만났던 날 클라우스의 태도를 떠올리건대 그가 릴리안을 싫어했던 건 확실했다. 그날 나를 응시하던 차가운 시선과 서늘하고 매서운 분위기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니 말이다. 그럼 도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거지? ‘왜 갑자기 내게….’ 남같이 살다가 이혼해달라고 하면 좋다고 해줄 줄 알았더니,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완전 큰 착각이었다. 그렇다고 여자 주인공이 등장할 때까지 잠자코 이곳에서 그와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클라우스는 어딘가가 꼬이고 비뚤어진 인간이었지만 솔직히 무척이나 매력적인 남자였다. 물론 거기에 그의 잘생긴 얼굴이 한몫한 것도 인정한다. 진짜 얼굴도 보기 싫고 닿는 것도 끔찍한 남자였더라면 죄책감이든 뭐든 병간호를 할 생각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지금 우리 사이가 좋아진다고 한들 결국 클라우스는 여자 주인공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질 거고, 릴리안은 본 척도 안 할 게 분명했다. 그건 싫었다. 마음이 거의 없을 때, 헤어져도 금방 회복할 수 있을 때, 클라우스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도 무심한 표정으로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이혼을 해야 했다. ‘마음 독하게 먹어야 해.’ 그래. 그냥 후작가로 가자. 생각보다 이르긴 하지만 가서 그에게 이혼 합의서를 보내는 거야. 어차피 지금 이혼하나 나중에 이혼하나 결과는 똑같았다. 나는 해결책을 찾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가 오려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얼른 이곳을 떠야만 했다. 우선 방문을 열어 밖의 동태를 살폈다.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로아…!” 로아가 보이자 나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러자 로아가 한달음에 내 앞으로 왔다. “부르셨습니까, 마님?” “잠깐 들어오렴.” “네.” 로아가 방에 들어오고 나는 누가 들을세라 문을 꽉 닫았다. “지금 당장 마차를 준비해 주렴.” “마차요?” “그래, 잠깐 보석 상점에 다녀오려고 해.” “하지만 곧 있으면 공작님께서 오실 텐데요…?” 로아가 난처한 얼굴을 했지만 이미 생각해 둔 게 있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얼른 갔다 오려고. 공작님께 드릴 선물이 있는데 몰래 준비하는 거라 아무도 모르게 갔다 오고 싶어.” “아, 깜짝 선물이군요?” 그렇게 말하며 로아가 흐뭇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응. 그러니 지금 당장 마차를 저택 앞에 준비시켜 주렴.”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로아가 방을 나갔다. 거짓말에 능숙한 편은 아니었지만 위기의 상황이라 그런지 말이 술술 나왔고 다행히 로아도 속은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아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마차가 준비됐다는 말에 나는 홀로 내려갔다. 운이 좋게도 집사장과 마주치지 않았고, 클라우스도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저택 앞에 서 있는 마차에 먼저 올라타니 로아도 내 뒤를 따라 타려고 했다. “너는 함께하지 않아도 된다.” “네? 하지만 마님을 모시는 게 제 일입니다.” “아니야. 금방 올 거니 너는 네 일을 하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응.” 그렇게 마차가 공작저를 떠났다. 그리고 나는 저택의 정문을 나서자마자 마부를 불러 마차를 세웠다. “시내의 보석 상점 말고 프리드 후작가로 가자.” “프리드 후작가요?” “그래, 얼른 서둘러라.” “아, 예. 알겠습니다.” 일이 꽤 수월하게 진행되니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그래. 앞으로는 이런 날만 계속될 거야.’ 후작가에서 며칠 쉬다가 이혼 서류를 보내 이혼을 해야지. 그리고 계획을 다 세우면 그곳을 나와서 내 인생을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거야. 조금은 어설프고 대책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란 마음이 더 컸다. 나는 마차 안에서 앞으로 뭘 할지 생각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던 중 달리던 마차가 멈췄다. 창문을 통해 보니 어느 저택의 앞이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린 다음 마부에게 공작저로 돌아가라고 명했다. 마부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떠나지 않고 있었다. “가거라. 어서.” “아, 알겠습니다.” 내가 한 번 더 강하게 말을 하자 마부가 하는 수 없이 마차를 끌고 떠났다. 드디어 후작저에 왔다. 내가 문 앞에 서 있자 몇몇의 사람들이 나와서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표정을 언뜻 보니 긴장감에 차 있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아, 아가씨…!” 사용인 중 한 명이 나를 부른 것과 동시에 공작가의 집사장인 함버튼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나이 지긋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나는 한눈에 그가 이 후작가의 집사장임을 알아봤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부모님은 안에 계시나?” “후작님과 마님께서는 현재 영지의 성에 계시고, 이곳 저택에는 도련님만 계십니다.” 일이 아주 잘 풀려갔다. 이곳에 올 때 릴리안의 가족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을 했는데, 저택에 가족은 한 명뿐인 듯했다. ‘쌍둥이 남동생이 있다고 했으니 그 사람이겠지?’ 그러니까 이름이…. “데미안 도련님, 나오셨습니까.” 그래, 데미안이었어. 나는 집사장의 시선이 간 곳을 쳐다봤다. 금발에 녹색의 눈을 가졌을 뿐 릴리안을 전혀 닮지 않은, 훤칠하고 잘생긴 키가 무척 큰 건장한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릴리안.” “데미안.” 우리는 각자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를 응시했다. 04. 급변하는 상황 저택 안으로 들어와 나는 곧장 내 방을 찾았다. “내 방은 그대로 놔뒀겠지?” “예, 아가씨.” “그럼 앞서거라.” “예? 예." 나는 일부러 시녀를 앞세운 다음에 그녀를 따라갔다. 2층 가운데 즈음의 문 앞에 그녀가 섰고 문을 열어주었다. “좀 쉬고 싶구나. 나가 보렴.” “예, 아가씨. 쉬세요.” 나는 바로 시녀를 내보내고 침대에 앉아 그녀의 방을 둘러봤다. 릴리안의 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지금 내가 앉아 있는 화려한 캐노피가 늘어진 고풍스러운 침대였다. ‘와, 어마어마하네.’ 온갖 비싼 가구나 소품들은 이곳에 몽땅 밀어 넣은 듯 릴리안의 방에는 금테를 두른 것들이 즐비했다. 그렇게 그녀의 방을 구경하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릴리안, 나야.” 아까 마주쳤던 릴리안의 쌍둥이 동생인 데미안의 목소리였다. 아직 연락도 없이 후작저로 온 변명거리를 준비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를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그와 나는 아까처럼 서로를 지긋이 쳐다봤다. ‘그런데 진짜 안 닮았다.’ 이란성 쌍둥이라도 이렇게 안 닮을 수가 있나? 릴리안과 데미안이 닮은 곳이라곤 머리 색과 눈동자 색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것마저 달랐다면 두 사람은 남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오랜만이네.” 그가 먼저 입을 뗐다. “응. 2년 만인가?” “정확히는 2년 7개월 만이야.” “아, 그래? 서 있지 말고 앉아.”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소파로 가서 앉았고 데미안도 나를 따라 맞은편에 앉았다. “갑자기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잠시만 쉬러 왔어.” 오자마자 클라우스와 이혼한다고 얘기를 꺼내는 건 너무 성급하다고 판단했다. 우선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계획을 재정비한 다음 며칠 뒤에나 말할 생각이었다. “공작저에서 무슨 일 있었어?” “그건 아니고….” “그래?” “응.” “그렇다면 다행이고. 잘 돌아왔어. 계속 기다렸잖아.” “응?” 나를, 아니 릴리안을 계속 기다렸다고? 물론 가족이라서 출가한 누이를 그리워할 순 있다. 그런데 데미안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묘하게 퇴폐적이고 어두웠다. “도련님! 도련님…!” 그런데 그때 문밖에서 집사장이 데미안을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났다. 데미안은 소파에서 일어나 집사를 마주했다. “무슨 일이지?” “저, 루이덴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루이덴이란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가 이렇게 빨리, 그리고 설마 여기까지 올 줄은 예상을 못 했다. 데미안이 뒤돌아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내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문을 닫고 나갔다. ‘어떡하지.’ 나가서 직접 클라우스를 만나야 하나? 하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가 나를 본다면 바로 붙잡고 공작가에 끌고 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갈팡질팡 고민하는 사이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있었다. * * * 1층으로 향하는 데미안의 발소리는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았다.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릴리안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후작저로 돌아온 이유는 그 남자 때문이겠지. ‘클라우스 루이덴.’ 막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그 남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데미안 또한 클라우스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두 남자는 계단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향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루이덴 공작님 아니십니까.” 홀에서 마주 선 두 사람 중 데미안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프리드 경, 오랜만이군. 누이의 결혼식 이후 처음인가?” 일부러 누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듯한 말투에 데미안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러나 겉으로 티 낼 정도로 그는 아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이 남자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데미안이 응접실로 가기 위해 막 발을 떼려던 순간 클라우스의 단호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그저 내 아내를 데리고 가면 되니까.” 클라우스는 지체하지 않고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다. “아내라면… 릴리안을 말하는 겁니까?” “릴리안이라.” 그녀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 모습에 클라우스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제 그녀는 프리드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 엄연히 루이덴 가문의 공작 부인이야. 아무리 가족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된 호칭으로 불러야 하지 않겠나?” “릴리안이 공작 부인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게 있어 그녀는 언제까지고 릴리안일 뿐이니까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두 남자는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동생이 누이를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니 그 누이의 남편으로서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그래서 내 아내는 어디 있지?” “릴리안을 왜 이곳에 와서 찾으시는지 모르겠군요.” “…경. 나는 지금 경과 장난칠 기분이 아닌데.” 분명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왔는데 릴리안을 숨기고 내놓지 않으려는 데미안의 괘씸한 행동에 클라우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저 또한 장난칠 기분 아닙니다.” 그에 맞서 데미안도 이제껏 머금고 있던 미소를 싹 지우고는 무표정의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이곳을 수색해도 괜찮을 테지.” 그 말을 끝으로 클라우스가 데미안을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데미안은 재빨리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아무리 루이덴 공작님이라 하셔도 이곳을 마음대로 통제할 권리는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릴리안은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마치 짐승의 우두머리들이 영역 싸움을 하는 것처럼 두 남자가 서로를 으르렁거리듯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하.” 클라우스가 어이가 없는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데미안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잠시 2층을 올려다보았다. ‘릴리안.’ 그녀의 텅 빈 방을 보고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아니, 생각을 할 시간 따위 없었다. 그저 릴리안을 되찾아야 한다는 강박이 머릿속을 장악했고, 끊어졌던 이성이 돌아왔을 때는 후작저의 영역에 침범한 차였다. 그녀가 지척에 있는데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음에 씁쓸하고 공허한 감정이 확 밀려왔다. “프리드 경.” 클라우스가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서며 데미안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리고 둘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데미안에게 경고했다. “내 아내가 이곳에 없을 리가 있나. 오늘은 이만 물러나지. 하지만 그녀에게 똑똑히 전해. 공작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는 나도 장담하지 못한다고 말이야.” 클라우스는 그 말을 끝으로 프리드 후작저를 빠져나갔다. ‘릴리안에게 전하라고?’ 천만에. 데미안은 그의 말을 릴리안에게 전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곳으로 그녀가 어떻게 돌아온 건데, 다시는 후작저에서 벗어나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릴리안이 루이덴 공작가로 떠난 후, 단 하루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 저와 비슷하면서도 더 반짝거리는 금발에 에메랄드를 박은 듯한 초록빛 눈동자를 가진 그녀를 말이다. 낳아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태어나서부터 고아원에서 자란 그는 프리드 후작가에 입성해 릴리안을 처음 마주한 순간 결심했다. 이 작고 어여쁜 소녀를 평생 지켜주겠다고. 릴리안의 아버지인 아서 프리드는 릴리안이 막 태어났을 무렵 승마 도중 말에서 떨어져 성적으로 불구가 되어버렸다. 베이누스 제국은 여성에게도 작위를 이을 수 있는 자격을 주었지만 프리드 후작가는 가문 대대로 남성만이 작위를 이을 수 있었다. 아서 프리드에게 닥친 예기치 못한 사고로 가문이 대가 끊길 위험에 처하자, 몇 년 뒤 프리드 후작 부부는 수도에서 멀리 위치한 한 고아원에서 남자아이를 하나 몰래 데려왔다. 그 아이가 바로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릴리안과 마찬가지로 금색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를 지녔는데, 후작 부부는 데미안이 릴리안의 쌍둥이 동생이라고 귀족 사회에 공표했다. 미숙아로 태어나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요양을 보냈다는 울음 섞인 말과 함께 말이다. 물론 데미안의 외모가 너무나도 후작 부부를 닮지 않았기 때문에 귀족들 중에 그 말을 믿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부부는 그들이 뒤에서 뭐라고 떠들어 대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들에게는 오직 프리드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후작 부부의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프리드 후작저로 온 데미안은 릴리안을 마음에 담았다. 그는 자신이 저택에 들어온 후로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 홀대당하는 그녀를 위로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아니, 밀린다는 말은 맞지 않았다. 애초부터 릴리안은 부모님의 사랑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데미안이 들어온 후로 집안의 분위기가 좋아져서 릴리안에게도 가끔 표면적인 관심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렇게 릴리안은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를 사치와 사용인들에 대한 심술로 풀었고 그 마음을 매번 다독여준 것이 데미안이었다. ‘이제야 둘이서만 있게 되었는데.’ 데미안은 프리드 후작 부부의 전폭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부모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릴리안뿐이었고 후작 부부는 릴리안과의 관계를 망치는 방해꾼일 뿐이었다. ‘너무 안일했어.’ 잠시 수도를 비운 사이에 릴리안을 결혼시킬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다. 릴리안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저에게서 릴리안을 빼앗아 간 후작 부부를 용서할 수 있을 리가. 표면적으로는 요양이라 칭했지만 그들을 수도 밖으로 쫓아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마음도 없는 정략결혼이잖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건 저뿐이라며, 매일 밤 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모습이 생생하기만 했다. 유약한 그녀라면 분명 제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데미안은 그렇게 홀로 저택에 남아 릴리안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데미안은 멀어져가는 클라우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 * *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데미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 이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공작님께 너 없다고 하니 그냥 돌아가셨어.” 그런데 초조하게 그를 보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데미안은 마치 내 질문에 답을 하는 것처럼 먼저 말을 꺼냈다. “진짜?”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남자가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갔다고? “응.” “아무 말도 없이?” “그래.” 믿지 않기에는 데미안의 태도가 무척이나 단호하고 담백했다. 정말로 클라우스가 그의 말에 수긍하고 공작저로 돌아간 듯했다. ‘과대망상이었나.’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떻게 알아챈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곳에 없다고 해준 그가 고마웠다. “고마워, 데미안.”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곳에서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푹 쉬어.” “응.” 어깨를 가볍게 으쓱여 보인 데미안이 내 이마에 키스를 하고 방을 나갔다. 나는 그의 입술이 닿은 이마의 느낌이 이상해서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이곳에선 가족끼리 이런 스킨십도 하는 건가?’ 낯설었지만 내가 겪지 못한 문화겠거니 하며 그냥 넘겼다. “어쨌든 다행이다.” 물론 의심은 살짝 들었지만 지금 나는 내 안위가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다른 건 더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프리드 후작가에서 나름 편하게 생활을 했다. 종종 정원을 산책하거나 별일이 없으면 데미안과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가 과거 이야기를 할 때면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식으로 넘어갔다. 조금 불안했지만 릴리안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후작저에서 사는 것도 괜찮겠는데?’ 처음 후작저로 오는 것을 꺼렸던 건 당연히 릴리안의 가족들에게 들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데미안은 릴리안의 영혼이 바뀐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고, 그녀의 부모님 또한 멀리 요양을 가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클라우스. 가끔 클라우스가 떠오르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이혼을 해도 괜찮을 정도가 되었다. ‘이제는 나 때문에 아플 일도 없을 테니까.’ 괜히 나 때문에 다치지 않길 바란 것도 사실이었다. 갑작스런 합방 얘기에 도망치듯 그의 곁을 떠났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서로에게 더 나은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조만간 이혼 서류를 보내야겠네.’ 그때 여자 주인공에게 너무 집착하지 말란 말도 써줄까? 아니야, 그건 너무 미련이 있어 보이잖아. 그냥 착하게 살라고만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클라우스보다 지금 당장 가까이 지내는 데미안을 관찰할 일이 많아졌다. 가끔 그가 릴리안을 대하는 게 남매에게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조금 꺼림칙했다. 또한 이곳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의 눈빛에 긴장감과 의아함이 가득한 게 느껴졌다. 나는 잠시간의 달콤한 여유에 취해 그 모든 것들을 애써 무시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저택의 정원에 있는 그네 의자에 앉아 책을 보던 중이었는데, 근처에서 두 사람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었어? 공작가 일?” 공작가라는 단어가 너무 선명하게 들려서 나는 숨을 죽이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공작가란 단어만 잘 들리고 나머지 말들은 정확히 들리지가 않아서 나는 좀 더 가까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두 사람은 아직 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응, 너무 무섭더라.” “그니까 말이야. 갑자기 무슨 일이래.” “나도 몰라. 거기 시녀 하나와 하인 하나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노예로 팔려갔다지?” “도대체 왜 그런 거래?” “모르지, 그리고 요새 거기에 의사가 매일매일 문이 닳도록 들락날락한대.” “어머, 그건 왜?” “공작님이 벌써 일주일째 기사들을 반죽음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던데? 무슨 검술 대련을 하는데 가짜가 아니라 진짜 검으로 한다더라고.” “어머, 어떡하면 좋아. 헉! 아, 아가씨…!” 충격적인 대화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리고 나를 보자마자 무슨 못 볼 걸 본 것처럼 두 사람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지금 도대체 공작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 “저, 저, 밖에서 흉흉한 소문이 들려서 그 얘기를 하고 있, 있었습니다.” “그 흉흉한 소문이 루이덴 공작가를 말하는 것이냐?” “네, 네. 그런데 저, 저희도 본 게 아니고 들은 거라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용서하세요. 아가씨? 아가씨!” 뒤에서 나를 부르는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데미안을 찾았다. “데미안은 어디 있지?” 나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냅다 지나가는 하인을 붙잡고 물어봤다. “예? 아, 도련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그 말에 당장 집무실로 올라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 “릴리안?” “공작님께서 그날 오셔서 뭐라고 하셨어?” 나는 그토록 외면했던 그날의 일을 물었다. “응?” “며칠 전에 오셔서 뭐라고 하셨냐고…!” “릴리안, 무슨 일인데 그래?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말해 봐.” 데미안은 다가오더니 나를 붙잡고 소파로 이끌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나한테 분명 아무 말도 없었다고 했잖아.” “그랬지.” 와, 이제 보니 이 남자도 클라우스만큼 보통이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흥분해서 날뛰고 있는데, 그는 침착하고 차분한 얼굴로 나를 대했다. “그런데 왜 그런 소문이 들리는 거야?” “무슨 소문? 아, 사용인들이 노예로 팔려갔다는 소문? 아니면 공작이 미쳤는지 날뛰고 있다는 소문?” 역시 데미안도 알고 있었어. 그는 그 사실을 무척 덤덤하게 말했다. “왜 말 안 했어.” “말할 이유가 있나?” “당연히…!”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이렇게 비이성적으로 대화를 하는 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신 다음에 말을 이었다. “그날 공작님께서 날 찾았지?” 나는 우선 클라우스가 날 찾아왔던 그날의 일부터 끄집어냈다. “응, 널 찾더라고.” “그래서 자세하게 뭐라고 했어? 내가 없다고만 한 거 맞아?” “공작이 오기 전에 네 표정을 보아하니 너무 초조하고 불안해 느껴졌어. 그대로 널 돌려보내면 안 될 것 같더라고, 물로 나도 보내기 싫었고. 그래서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랬더니 뭐라 했더라….” 데미안이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말을 끌었다. “아, 맞다. 네가 여기 있는 걸 안다고 너에게 똑똑히 전하라고 하더라고. 공작가로 돌아오지 않으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말이야.” “뭐라고?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나는 나에게 사실을 숨긴 그를 책망하며 따졌다. “흐음….” 그런 내 모습과는 다르게 데미안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게 너무 어이가 없어서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릴리안,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뭐, 뭐라고?” “저택의 사용인들은 발에 차이는 돌멩이 취급도 안 하던 너잖아. 그깟 하인들 노예로 좀 팔리면 어떻다고 이렇게 호들갑이야.”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데미안의 말대로 예전의 릴리안이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사용인들을 아무렇지 않게 괴롭히던 악랄한 주인이었으니까. 그 사실은 나도 알았다. 그래서 이곳의 사용인들이 나를 쳐다볼 때 일부러 모른 척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릴리안이 아니었다. 한순간에 자신의 터전과 삶을 잃었을 그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게 나 때문이라면 더더욱. 너무 안일했다. 나 하나 살자고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무턱대고 공작저를 나왔어도 안 됐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클라우스를 떠나서도 안 됐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가로 돌아갈 거야. 마차 좀 빌릴게.” “어딜 간다고?” “내 집에.” “릴리안!” “여길 오는 게 아니었어. 괜히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 잘 있어.” 그렇게 말하며 집무실을 나가려고 발을 떼는데 데미안이 다급한 몸짓으로 나를 붙잡았다. “가지 마.” “뭐?” “가지 말라고. 그냥 이혼해 버리면 되잖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널 계속 기다렸어.” 갑자기 이상한 말만 계속 해대더니 대뜸 데미안이 나를 끌어안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나랑 여기서 평생 살자, 릴리안.” “우린 남매야.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어차피 진짜 남매도 아니잖아.” 뭐? 순간 사고회로가 정지됐다. 데미안과 릴리안이 피가 섞인 남매가 아니라고? “아, 부모님 때문에 그래? 그건 걱정하지 마. 부모님은 내가 남부의 영지로 아예 내쫓아버렸어. 그러니 이곳엔 앞으로 우리 둘뿐이야. 우리 사이를 방해하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어.” “이거 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경악에 물든 나는 온 힘을 다해서 그를 밀었다. 다행히 내가 미친 듯이 난리를 치자 그의 몸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재빨리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뒷걸음질 쳤다. “가까이 오지 마.” 그가 내게 다시 다가오려고 하기에 나는 날 선 눈빛으로 그에게 경고했다. “나는 루이덴 공작 부인이야. 이런 무례는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너도 그자가 싫어서 여기로 도망친 거잖아.” 내 이기적인 행동에 대한 벌일까. 그저 살고 싶어서 그랬을 뿐인데, 릴리안뿐만 아니라 그녀의 주변까지 망치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긴. 여기로 왔던 날 네 눈빛이 말해주던데.” “만지지 마…! 더 이상 너와 할 얘기 없어. 돌아가겠어.” 그는 무슨 생각인지 한참을 말이 없더니 침대 근처로 가서 설렁줄을 당겼다. 종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집사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도련님, 부르셨습니까.” “루이덴 공작 부인께서 공작가로 돌아가신다니 마차를 준비해라.” 데미안은 루이덴을 강조하면서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집사장과 함께 따라 나가려 하자 데미안의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여태껏 들었던 목소리 중 가장 소름 끼치고 꺼림칙했다. “릴리안, 난 여기서 계속 널 기다릴 거야. 그러니 언제든 돌아와.” 나는 그런 그가 너무 무서웠다. 그동안 보여준 다정함이 거짓말 같았다. 나는 대답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마차를 빌려 서둘러서 공작가로 돌아갔다. * * * “마, 마님…!” 내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사용인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공작님께서는 어디 계시지?” “고, 공작님께서는 지금 훈련장에 계십니다.” “훈련장?” “예예. 지금 기사들과 훈련 중이십니다.” 아까 후작가 하녀들의 말을 생각하면 단순한 훈련이 아닐 게 분명했다. 나는 바로 훈련장으로 가기 위해 서둘러서 저택을 빠져나왔다. 당장 그를 만나야만 할 것 같았다. “마님…!” “어떡하면 좋아. 가시면 놀라실 텐데!” 뒤에서 사용인들의 말이 귓가로 들려왔다. ‘내가 가면 놀랄 거라고?’ 그 말을 들으니 더욱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마, 마님!” 그렇게 한 번도 쉬지 않고 뛰어서 공작가의 구석에 있는 훈련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왜 그들이 내가 보게 되면 놀랄 거라고 말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맙소사….’ 나는 경악으로 물든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다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들은 이곳에 오기 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이었다. 훈련장 바닥에는 열 명은 족히 넘는 기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또 그만큼의 기사들이 클라우스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클라우스는 한눈에 봐도 꽤 지친 기색에 온몸 곳곳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건 진짜로 훈련이 아니라 완전히 누구 하나를 죽이기 위해 검투를 벌이는 것 같았다. ‘대체 왜!’ 그때였다. 클라우스가 잠시 호흡을 고르며 주변을 살피다 내가 있는 곳을 쳐다봤고,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의 눈에 깃든 공허함과 광기를. 나는 그가 나를 보자마자 하던 것들을 멈추고 내게 다가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입가에 조소가 걸리더니 다시 기사들에게 먼저 검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기사들도 처음엔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이렇게 하다가는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공격적으로 변했다. 내가 당장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 진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그저 넋 놓고 쳐다만 보고 있는데, 한 기사가 클라우스의 팔에 검상을 냈다. “고, 공작님!” 나는 재빨리 훈련장으로 뛰어 들어가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고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내가 클라우스를 부르는 소리에 훈련장에 있던 모든 기사들이 검을 내려놓았지만 클라우스만은 여전히 검을 쥐고 있었다. “다치셨잖아요!” 나는 출혈을 막기 위해 손수건을 꺼내 베인 팔에 갖다 댔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인 건지 이해를 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것도 나 때문이라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갑자기 클라우스가 검을 바닥에 꽂더니 나를 무시한 채 뒤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공작님!” 아무리 불러도 그는 대답도 없이 피를 뚝뚝 흘리며 붉은 길을 만들었다. 나는 재빨리 그를 따라 뛰어갔고 이내 도착한 곳은 저택이었다. 사용인들이 홀로 다 나와 멀리서 우리를 멀뚱히 쳐다봤다. 물론 근처로는 아무도 다가오려고 하지 않았다. 클라우스는 그 시선과 뒤에서 불러대는 내 목소리를 무시하며 2층에 있는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나에게 들어오라는 뜻인지 침실 문을 완전히 닫지 않았다. 나는 잠시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이내 그의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때 말없이 도망가서 미안하다고?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그랬다고? 이제 와 그렇게 말한다고 소용이 있을까? 쏟아져 나오는 물음에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니야. 아직 늦지 않았어.’ 후회해 봤자 바뀔 건 없겠지만 잘못은 바로잡아야만 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간 그대로 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할 말이 있-!” 그리고 그에게 먼저 말을 걸려던 순간이었다. 그가 뒤를 돌아 나를 보더니 커다란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입술을 부딪쳐 오기 시작했다. 말캉한 살덩이가 내가 놀란 틈을 타서 입 안으로 들어와 곳곳을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키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치 나를 잡아먹을 것같이 달려들었고, 결국 몸이 뒤로 밀리면서 문이 닫힘과 동시에 막혔던 숨이 트였다. 억세게 밀린 것과는 다르게 등의 통증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클라우스가 내 등을 감싸며 충격을 완화시켜주었다. 이런 감상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와의 첫 키스는 참 이상하고 생경했다. 급하고 우악스러운 몸짓에 비해 그가 입 속의 간질간질한 곳들을 계속 건드려서 그런지 마치 혼을 빼앗긴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어지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그렇게 저항도 못 한 채 정신없이 키스에 빠져드는 사이 꼭 밑으로 꺼질 것만 같은 아찔한 느낌에 무언가 잡을 곳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꽉 붙잡았는데 손에서 끈적끈적하고 축축한 느낌이 났다. 그제야 나는 클라우스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걸 인식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재빨리 그를 밀쳐내려고 했다. 체격 차가 있어서 그런지 데미안을 떨쳐 냈을 때와 달리 그는 쉽게 밀려나지도 않았다. 결국 어떻게든 그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내려쳤는데,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움켜쥔 채 신음을 내뱉었다. “지금 피를 흘리… 괜찮아요?” 그렇게 세게 쳤다고 생각은 안 했는데 타격이 꽤 컸나 보다. 클라우스가 왼쪽 가슴을 움켜쥔 채 고통에 허덕이고 있었다. “왜, 왜 그래요? 많이 아파요?” 아무리 그래도 내 힘이 장사도 아니고. 무엇보다 아픈 사람을 이 정도로 때리진 않았는데…. 괜스레 불안해져 가슴 부근을 살피는데 셔츠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가슴에도 피가 나잖아요! 의사, 의사를 부를게요.” 황급히 집사장을 부르기 위해 손을 문고리로 뻗었지만 클라우스가 나보다 더 빨랐다. 그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내 행동을 저지했다. “…됐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지금 당장 치료를 해야죠.” “이깟 상처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아예 핏물이 잔뜩 밴 셔츠를 풀어 헤쳤다. 그제야 나는 칼에 베이고 찔린, 그러나 치료하지 못한 상처들이 그의 몸 곳곳에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상처들이 아직 아물지 못한 걸 보면 최근 소문의, 그러니까 그 일주일 동안의 훈련을 빙자한 검투에서 생긴 것 같았다. 내가 방금 때린 왼쪽 가슴에 있는 상처는 다른 곳보다 더 심해 보였다. 깊게 베인 상처가 한 번 스스로 아물었다가 다시 터졌는지 핏물이 단단한 근육을 타고 연신 흘러내렸다. “치료… 안 받았죠?”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왜, 왜 그런 거예요? 왜 스스로를 이렇게…!” 아연실색하여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도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자신을 학대한 거지? 내게 화가 난 거라면 나에게 풀면 되잖아.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괴롭힌단 말인가. 그때 가만히 내 말을 듣고만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날 우롱하니 즐거웠나?” “네?” “동생과 짜고서 날 엿 먹여서 좋았어?”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클라우스는 나를 비웃는 건지 아니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비웃는 건지 입가에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의 상처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상처가 점점 벌어지고 있어 얼른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우선 치료부터 해요. 그러고 얘기해요.” “당신은 내가 아파야만 봐주는군.” “네?” 그 말은 꼭 내가 이곳 공작저로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서 몸에 일부러 상처를 냈다는 것처럼 들렸다. “나와 자는 게 그렇게 끔찍했어? 도망갈 정도로?” “…그건 아니에요.” 이 남자와 잘 수도 있었다. 두렵긴 했지만 몸을 섞는 게 몸서리쳐질 정도로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클라우스가 아프고 난 후 그에게 연민이 생겨버렸다. 그를 안타깝게 생각했고, 불쌍하다고 느끼며 동정했다. 지금도 그랬다. 그가 아픈 게 맘에 걸렸다. 얼른 치료를 받고 안정을 취했으면 했다. 그래서 절대로 그와 잘 수 없었다. 이혼을 하기 전까지 나는 어떻게든 내 마음을 지켜야만 했다. 그의 파멸을 바란 건 아니지만 더 이상 소설의 내용과 멀어져서는 안 됐다. 그는 내가 아닌 여자 주인공을 사랑할 거고 나는 그런 그에게 상처를 받아야만 하니까. 그게 우리의 정해진 운명이니까. 그러니까 하다못해 내가 당신을 아무렇지 않게 놓아줄 수 있어야 하잖아. 이 정도 이기심은 허락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면 왜 그랬지? 왜 내게서 도망간 거야.” “저는….” 지금 내가 생각한 것 그대로는 그에게 절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나는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생각보다 늦었어. 그 쌍둥이 동생이란 놈이 당신의 눈과 귀를 막은 건가?” 이번에도 내가 대답이 없자 그는 자기 할 말을 계속 했다. “하긴, 그날 당신이 그곳에 있단 걸 알고 갔는데도 잡아떼더군. 참 눈물 나는 가족애야.” 이제 그는 입에서 내뱉는 모든 말을 비꼬고 빈정거리면서 나를 자극하려 했다. “아니면 가족이 아니라 이성으로 보는, 뭐 그런 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저와 제 가족을 욕보이지 마세요. 데미안은 제 동생이에요.” 이런 식으로 가족과의 관계를 더럽게 보듯이 말하는 건 절대 참을 수가 없었다. 비록 데미안이 나와는 완전히 무관한 사람이었더라도, 릴리안과 친남매가 아니었더라도 이런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피도 안 섞인 남매 주제에.” 그런데 그는 나와 데미안이 남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도대체 이 소설은 뭘까. 왜 내가 모르는 게 이렇게 많은 거야. 지금까지 소설 속의 릴리안의 얘기는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클라우스가 릴리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그리고 그와 반대로 릴리안이 클라우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또한 그녀에게 다니엘이라는 정부가 있었는지도, 그녀의 쌍둥이 동생이 그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그 어떤 것도 맞는 게 전혀 없었다. 내가 정말로 소설 속에 들어온 건 맞는 거야? 이제는 그런 의심까지 들고 있었다. 아니면… 그저 소모품으로 쓰다 버릴 악역 따위에게 이런 사연이 있었다는 걸 일일이 서술하는 건 사치에 불과한 걸지도 모르지.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영원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정부에, 피가 안 섞인 남동생에, 당신 정말로 대단해.” 그의 말은 내가, 아니, 릴리안이 그들과 뭔가가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그런 게 아니에요.” 우선 잡아뗐다. 과거에 릴리안이 그랬을지언정 지금의 나는 그러지도, 앞으로 그럴 생각도 없었기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지금까지 당신이 어떻게 행동을 하고 다니든 상관 안 했지만 앞으로는 아니라는 걸 명심해.” 그가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대더니 음산하고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내 것이 다른 새끼의 손을 타는 걸 보지 못하니까. 두 번 다시 이번 같은 행동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야.’ 그렇게 말하며 마주친 그의 붉은 눈은 집착과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 공작님의 소유물이 아니에요.”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아내며 이를 악물고 말을 내뱉었다. 그의 집착 가득한 말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고,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분하고 억울했다. 나는 누구의 것도 아니고 내 것이었다. 오롯이 나만이 나를 소유할 수 있었다. 이곳에 온 지 3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만나는 남자들마다 믿지 못할 헛소리들을 하고 있었다. 왜 내가 알지도 못하는 남자들에게 이런저런 소리를 들어야 해? ‘너를 사랑해서 그랬다’고 절절하게 고백하며 지껄여대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클라우스라면 절대 받아들일 수도 받아들여서도 안 됐다. ‘어차피 변할 텐데.’ 그는 어차피 변한다. 지금은 나에게 이런 식으로 집착을 하고, 사랑을 빙자한 말들을 속삭이며 현혹해도 곧 변할 것이다. 끝이 정해진 사랑놀음 따위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드니 그에게 끌려가며 위축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나는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떳떳하고 당당한 표정을 짓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지금 내 경고를 무시하겠다는 건가?” 클라우스는 내 태도가 무척이나 맘에 들지 않는지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경고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걸 의미하는 거라면 저 또한 그럴 생각은 없어요.” 예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와 그런 건지 그의 표정이 살짝 풀어지는 게 보였다. 이렇게 표정이 시시때때로 변하는 사람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그가 대답할 여유를 주지 않고 바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건 공작님께도 마찬가지예요.” “무슨 뜻이지?” 그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사납게 굳어졌다. 그는 알면서도 물어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내 뜻을 전했다. “사람의 마음은 변해요. 지금도 보세요. 저에 대한 공작님의 마음이 변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니까요. 옛날에는 그래요, 그랬던 적도 있었죠. 마음을 기대하고 애정을 갈구하고 사랑을 바랐던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런 확실하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에 미래를 걸고 싶지 않아요. 저는 앞으로는 사람의 마음에 기대서 살지 않을 거예요.” 릴리안이 어떤 마음으로 남자들을 만났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거라곤 릴리안에게 남자는 클라우스뿐이라는 거였다. 그를 사랑하고 집착했기 때문에 악행을 저지른 건데, 이제는 그것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녀가 다니엘뿐만 아니라 데미안과도 그런 사이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모르는 어떤 다른 남자들과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건 지나간 과거였다. 릴리안이 된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 나약하다는 걸, 그래서 쉽게 변한다는 걸 잘 알았다. 그 사실을 외면하고 달콤하기만 한 환상에서 살고 싶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환상은 언젠가 깨진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다르게 나는 그 시기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죽을 걸 알고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굳게 지켜야 했다. 특히 클라우스에게 향하는 마음을, 나는 어떻게 해서는 막아야 했다. “그래서 저는 공작님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믿지 않을 거야. 절대로. 이건 그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나 자신과의 다짐이기도 했다. “내가,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지?” 그는 답지 않게 꽤나 충격받은 얼굴을 걸었다. 하긴 릴리안이 이런 식으로 말할 줄 몰랐겠지. “공작님께서 제게 무엇을 주시든 저는 아무것도 돌려드리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 클라우스가 어이없는 실소를 터트리며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는 그의 매서운 눈길을 피하지 않았고 곧게 직시했다.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겠다라.” 그 말을 끝으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지 클라우스가 꽤 오랜 시간 뒤에야 입을 열었다. “한번 해 봐. 할 수 있으면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갑자기 그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훨씬 거친 키스였다. “하지- 읍!” 나는 그의 입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계속 내저었다. 하지만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붙들고 있어서 피할 수가 없었다. 이미 입 안은 그의 혀가 장악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아까도 그랬지만 지금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 그의 키스에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또다시 몸이 달뜨면서 추락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를 붙잡는 대신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왜 이러지.’ 내 머리는 원치 않는데 몸은 그에게 착실히 반응하고 있었다. 이런 건 전혀 나답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아 혼란스러운 틈에 갑자기 그가 입술을 뗐다. “내가 잠시 잊고 있던 게 있었어.” 아직도 내 얼굴은 클라우스에게 붙잡혀 있어서 그와 아주 가까이 눈을 맞대야만 했다. “당신은 내 몸을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도 키스에 내 몸이 반응했다는 걸 알아챈 듯했다. “아니, 아니에요.” 나는 재빨리 부정했지만 이미 동공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긴.” 그가 나를 비웃으며 그걸 증명하듯 다시 한번 내게 입을 부딪쳐 왔다. 이번에는 방금 전의 거친 키스가 아니었다. 애를 태우고 몸을 녹아들게 하는 끈적끈적한 입맞춤이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바로 입 안으로 혀가 들어오지 않고 입술 주변에서 연달아 쪽쪽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 그가 갑자기 입술을 이로 긁더니 살짝 깨물었다. 따끔한 감촉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고 그 사이로 클라우스의 혀가 침범했다.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나른해지면서 황홀한 느낌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안 돼.’ 이런 식으로 그에게 끌려갈 수는 없었다. 나는 무너져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두 손으로 그의 팔뚝을 잡았다. 의외로 클라우스는 내게서 가볍게 몸을 뗐다. “침대로 갈까?” 그가 은밀하고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수치스러웠다. 쉽게 몸이 달아 우습게 보이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느껴졌다. “싫어요. 더 이상 저에게 다가오지 마세요.” 나는 그를 경멸 어린 눈으로 노려봤다. “뭐, 당신이 원한다면.” 그러나 그는 그런 내 시선에도 불구하고 이미 기분이 좋아질 대로 좋아져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가 입가를 잔뜩 끌어 올려 웃는 모습을 보았다. 자신이 이겼다는 듯이, 내가 자신을 원할 거라 굳게 믿으며 오만하게 웃고 있는 저 모습이 나의 자존심을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황급히 품에서 빠져나와 도망치듯 침실을 벗어났다. 클라우스는 그런 나를 붙잡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 * * 도대체 왜 그랬던 거지?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가만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왜 몸이 그에게 반응을 하는 걸까. 마치 릴리안의 몸이 내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지만 머리가 차분해지고 처음부터 곰곰이 따져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릴리안의 정신은 나지만 이 몸 자체는 그녀의 것이다. 클라우스의 말대로 그녀가 그와의 잠자리를 원했고 또 즐겼다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반응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와의 스킨십을 피해야겠어.’ 클라우스 또한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를 자꾸 건드리는 게 틀림없다. 그러니 내 의지대로 몸이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다음 날부터 그는 나를 노골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나를 만지려고 했고 내게 닿으려고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전혀 접촉이 없었던 사람이 정말 몸으로 어떻게 해볼 것처럼 굴다니. 그런데 내가 자신을 피하는 걸 눈치챘음에도 클라우스는 예상과 달리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의 손길을 피할 때마다 입꼬리를 한쪽만 스윽 올리며 웃을 뿐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게 더 신경 쓰였다. 물론 그가 그날처럼 정신이 나가서 거칠게 나오는 것보다는 훨씬 낫긴 했지만 내 신경을 쉴 틈 없이 날이 서 있게 만들었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 합방 얘기도 꺼내지 않고, 가벼운 접촉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불행 중 그건 다행이었다. 05. 나비효과 오늘도 클라우스를 피해 서재로 피신을 온 상태였다. 며칠 무시하면 그도 지쳐 떨어져 나갈 거란 나름의 대책이었다. 그리고 세워두었던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기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참이었다. 이제는 데미안 때문이라도 후작가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나름의 뒷배가 하루아침에 없어진 셈이니 하루 빨리 돌파구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만.’ 때마침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클라우스일 수도 있겠단 생각에 움찔했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내가 기다리던 사람의 것이었다. “마님, 함버튼입니다.” “들어오게.” 내 허락의 말에 집사장이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바로 본론을 꺼내놓았다. “로아는 어디 갔지?” “마님의 시중을 들었던 그 시녀라면… 그날 공작님께서 크게 노하신 후로 노예 시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럼 공작저에서 노예로 팔려갔다는 이가 로아와 나를 후작가로 데려다준 마부인가?” “예, 그렇습니다.”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그들의 잘못이라면 주인의 말을 따른 것뿐이기에 너무 잔인한 처벌이었다. ‘더 이상 나 때문에 고통받는 이가 생겨서는 안 돼.’ 내가 진짜 릴리안이 아니었기에 에밀리와 다니엘의 연관성을 알아내지 못했고, 그로 인해 클라우스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리고 지금은 순간의 반발심으로 두 사람의 인생이 시궁창으로 빠질 위기에 처했다. 이번만큼은 내가 책임져야 해. 특히 로아는 유독 친구를 닮아 마음이 갔던 시녀였다. 그런 그녀를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 추적할 수 있겠는가.” “노예 시장에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그럼 그들을 빼 오게.” “네?” 집사장은 평소의 부드럽고도 단정한 표정이 아닌 얼이 빠진 얼굴을 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마저 말을 이었다. “돈이 얼마가 들든 상관없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두 사람을 다시 빼 와야 해.” “하지만….” 그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분명 이 일이 클라우스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그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되는 거겠지.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거야. 그러니 자네는 그 두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 빼 오게.”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고민을 했다. 그들을 이곳에 다시 데려오는 게 나을지, 아니면 비록 충분하진 않겠지만 다른 보상을 하는 게 나을지. “두 사람을 노예 시장에서 빼 오면 그들에게 20년 치의 급여를 계산해서 주고 집으로 돌려보내게.” 역시 이곳에 다시 돌아오는 건 안 될 것 같았다. 클라우스가 그들을 보는 것도, 그들이 클라우스와 마주치는 것도 서로에게 별로 좋은 일은 아니었다. “부족하다면 더 줘도 상관없어. 분명하게 말하지만 그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줘야 하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돈은 내가 내일까지 마련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고.” 내 지시를 들은 집사장이 묵례를 하고는 이내 서재를 나섰다. 나는 작게 난 창 밖으로 여전히 화려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을 구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20년 치의 연봉을, 그것도 두 사람의 분의 돈 말이다. “하아.” 왠지 모르게 이혼을 하려면 할수록 일이 꼬여만 가는 기분이 들었다. * * * 하루 종일 머리를 싸매고 돈이 나올 구멍을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나는 식당으로 가서 먼저 와 앉아 있는 클라우스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노예로 판 시녀와 마부를 다시 살 거라고?” “네, 저 때문에 두 사람이 그렇게 된 거니까요.” 그의 귀에 들어갈 걸 당연히 예상했기 때문에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따져 물었다. “왜 그들을 노예 시장으로 보내셨죠? 제게 화가 나셨으면 저한테 푸셔야지, 왜 죄 없는 이들을 괴롭게 해요?” “주인의 심기를 거슬렀는데 죽지 않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 아닌가?” 순간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이런 것이 신분 사회인 건가.’ 신분에 따라서 사람의 가치와 그 사람의 처분권이 정해진다니. 그의 말 덕분에 신분 사회의 무서움을 재차 깨달으며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피부로 와 닿았다. “그건 그렇고, 돈은 당신이 마련한다고? 어떻게?” “제 보석들을 팔 거예요.” “보석?” 프리드 후작가는 광산을 소유하고 있다. 매년 귀한 광석이 쏟아져 나왔기에 그녀는 부족한 거 없이, 아니, 오히려 넘치게 자랐다. 지금 공작가에 있는 릴리안의 옷장에만 해도 엄청난 양의 드레스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화려한, 딱 봐도 고가의 보석들이 즐비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보석의 반의반 정도만 팔아도 두 사람을 꺼내 오기엔 충분할 것이다. 그녀의 물건을 건드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꼭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만 같아서 이혼할 때도 위자료만 챙기고 되도록 손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어제 이후로 생각을 완전히 바꿨다.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이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쌓은 업보로 인해서 나는 내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몇 번이나 겪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릴리안이 가졌던 모든 것들을 주저 없이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특히 이전에 그녀가 행했던 일과 관련된 거라면 더더욱 망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인 클라우스에게도 분명히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겠다고. 나는 내 말을 지키고 싶었고 이 문제는 꼭 내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다. “보석이라….” 클라우스는 뭐가 맘에 안 드는지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나를 무섭게 쳐다봤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할 말을 계속 했다. “그래서 내일 시내에 갔다 오려고요.” “당신 그날도 보석 상점을 갔다 온다 하고 나갔다지?” “네?” “후작가로 도망간 날 말이야.” 아, 맞다. 그날도 그랬었다. “네, 뭐 그랬죠.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로 보석 상점에 가는 거예요.” “당연히 그래야지. 설마 또 무모하게 행동할 거라곤 생각 안 해.” 그가 나에게 경고하듯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또 나에게서 도망간다면, 그때는 이 저택의 모든 이들의 이름이 노예 시장에 걸릴 거라는 걸 단단히 기억해.” 순간 식당 안에서 우리의 시중 들고 있던 사용인들이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울렸다. “…제가 맘에 안 드시면 저를 질책하세요. 괜히 아랫사람들에게 화를 풀지 마시고요.” 그의 방식이 너무나 맘에 들지 않아서 한 소리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 그런데….” 나는 그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당신은 그게 안 통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말을 알아들었다고 판단했는지 클라우스는 식사를 마저 하기 위해 잘게 썬 고기를 입 안으로 가져갔다. 우리는 그 이후로 침묵 속에서 각자 식사를 했다. 나는 그의 행동과 말들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고,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처음 식사를 할 때와는 다르게 기분이 가라앉아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저녁 식사를 마쳤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시내에 있는 보석 상점을 가기 위해 나갈 준비를 했다.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보석함에 있던 보석들을 반 정도만 챙긴 후 마차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서 마부가 마차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보석 상점으로 가자.” “네? 네…!” 그의 대답이 시원찮아서 나는 마부를 빤히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보석 상점에 갔다 올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마차에 올라탔고, 내 뒤를 시녀 한 명이 따르고 나서야 마차가 저택의 정문을 나섰다. 공작가에서 시내에 있는 보석 상점은 그리 멀지 않아 금방 도착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금박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문턱을 넘었다. “어서 오세요… 어머!” 상점의 직원이 릴리안을 알아봤는지 내게 살갑게 인사를 해왔다. “루이덴 공작 부인 아니십니까…! 오랜만에 오셨네요!” 나는 가볍게 눈인사를 한 뒤 나를 따라온 시녀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시녀가 직원에게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이것들을 처분해 주게.” 직원은 주머니 안을 확인하더니 보석의 양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이것들을 전부 다요?” “그래.” “아, 알겠습니다. 시세에 따라 정산을 해드릴 테니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직원은 내게 테이블이 있는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얼마나 걸리겠는가?” “한 시간 정도는 걸릴 것입니다.” 한 시간이라….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상점 안에서 멍하니 기다리는 것보다는 밖을 구경하는 게 나을 듯했다. 이렇게 시내를 나온 건 처음이었기에 이곳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곳곳에서는 무엇을 파는지 내심 궁금하던 차였다. “그럼 잠시 다른 곳을 둘러보고 오겠네.” “아, 네. 알겠습니다. 돌아오실 때까지 다 끝내놓겠습니다.” 나는 그길로 상점을 나왔다. 근처에서는 마부가 대기하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구경을 하고 올 테니 너도 어디 가서 요기를 하고 오렴.” “아니, 아닙니다. 여,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마부의 눈이 아까보다 더 심한 공포로 젖어들었고, 이제는 말도 더듬었다. ‘나는 아무래도 이들에게 신뢰가 바닥이 난 것 같네.’ 하긴 클라우스가 내가 없어지면 다 노예 시장에 팔아넘긴다고 했으니, 그들이 걱정하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한 시간 후 꼭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으렴.” 나는 '꼭'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그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물론 그 말에도 여전히 못 미더운 듯 마부의 얼굴에서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지만 말이다. 마부의 마음이 어쨌든 정말로 돌아올 것이기에 뭘 해줄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시녀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사실 아침이 되기까지 나름 많은 고민을 해보았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클라우스와 멀어지고자 했다. 냉소적인 태도로 면박을 줄지언정 딱히 나에게 해를 끼치거나 목숨을 위협하지 않았어도 말이다. 그때는 후작저라는 최후의 보루도 있었다. 클라우스의 말처럼 데미안과 그러한 관계인 줄은 모르겠지만 그가 비친 광적인 모습을 보고 나니 쉬이 돌아가기에도 꺼려졌다. 솔직히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알고 있기에 쉬울 줄 알았다. 에밀리나 다니엘처럼 예기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금방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막막하다 못해 참담한 심정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클라우스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건 그에게 남아 있는 죄책감과 나로 인해 고통받은 이들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리라. 새벽이 밝아오고 나서야 나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자. 아직 원작이 시작되기 전까지 여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전까지 나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수습하고 클라우스와 깔끔하게 정리를 할 거다. 최근 클라우스가 집착 아닌 집착을 하고 있지만, 여자 주인공을 만나면 달라지겠지. 그런 안일한 마음을 끝내 지울 수는 없었지만 아직 희망은 남아 있었다. 베이누스 제국의 수도 잉카르타. 잉카르타는 제국과 대륙의 중심으로서 전 세계의 물자는 이곳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다. 그로 인해 잉카르타에는 없을 거 빼곤 다 있다는 소리가 항상 따라다녔다. 저택에서 두 달여를 있으면서 이곳에 대해 공부를 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서재를 만들어 달란 것도 조용하게 공부를 하기 위함이었다. 이혼을 하고 나면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나에게 이곳은 아는 이 하나 없는, 너무나 낯선 곳이었다. 그렇기에 더 베이누스 제국과 이 세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만 했다. 상점 거리를 쭉 걸어가니 전생에 거닐었던 한 도시의 거리와 다르지 않아서 퍽 반갑게 느껴졌다. 눈이 휙휙 돌아가는 구경을 하며 상점 거리를 지나니 사방이 확 트인 거대한 광장이 나왔다. “마님! 저기 좀 보세요…!” 어쩐지 나보다 시녀인 린다가 더 신나고 즐거워 보였다. 갑자기 그녀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한 곳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원을 만들어 공간을 크게 둘러싸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어떤 이는 소리를 지르고 어떤 이는 환호를 하는 것이 꼭 도박장 같은 모습이었다. 뭘 보고 있는지 궁금해 나는 까치발을 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서는 간신히 중요 부위를 가린 짧은 바지만을 입은 채 남자 두 명이 주먹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과거에 보았던 한 영화가 떠올랐다. 귀족들의 유희이자 재미로 소비됐던, 노예들의 검투를 그린 영화였다. ‘진짜 잔인하고 너무한다.’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는 황족과 귀족이 되어 권력의 최정점에서 모든 것을 누리는데, 누구는 가장 밑바닥의 하층민으로 태어나 개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한다니. 그리고 같은 인간을 고작 재미를 위해서 이용하는 사람들의 행태가 역겨워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그래도….’ 그때였다. 상대를 쓰러트리고 숨을 고르고 있던 붉은 머리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 눈을 피해버렸다. 그들을 보면서 떠올리고 있던 내 생각이 너무나 창피해서였다. 나는 귀족들을 역겨워하면서도 내가 빙의한 인물이 귀족 여인이어서 다행이라는, 지독히도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말았다. “가자.”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굳은 표정으로 린다에게 말하며 뒤를 돌았다. “재미가 없으십니까?” “그래, 별로야.” 내 말투가 차갑고 건조했는지 린다는 더 이상 내게 말을 붙여오지 않고 조용히 따라왔다. 그렇게 거리를 다시 지나고 있던 때였다. “마, 마님!” 큰 대로를 지나가는데 골목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나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공작저나 후작저도 아니었고 이 낯선 곳에 나를 아는 이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시하고 다시 갈 길을 가려는데 이번에는 좀 더 큰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익숙해 나는 곧장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밀리?” 나를 부른 이는 얼마 전에 집에 갔다 온다고 하고 사라졌던 에밀리였다. “마님!” 그런데 에밀리의 상태가 어쩐지 좋지 않았다. 눈물범벅을 한 채 초조한 기색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야. 이 꼴은 뭐고…!” 에밀리는 꼭 무슨 험한 일을 당한 것같이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감은 지 오래됐는지 산발에 뭉쳐 있었고, 얼굴엔 얼룩과 상처들이 나 있었다. 옷도 마찬가지로 군데군데 찢겨서 제 구실을 못 하고 있었다. “마님, 흐읍!” 묻는 말에도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계속 서럽게 울 뿐이었다. “이리, 이리 와.” 나는 에밀리의 손목을 급히 잡고 그녀를 좀 더 깊숙한 구석으로 데려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어느 정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은 곳에 도착한 뒤, 나는 울고 있는 그녀를 품에 가득 안아 주며 토닥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내가 널 도와주지.” “와, 진짜네?” 그런데 대답은 에밀리가 아닌 근처에서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낯선 남자의 말이 들리자마자 내 품에서 울고 있던 에밀리의 떨림이 일순간 멈췄다. 그리고 내게서 재빠르게 떨어지더니 언제 울었냐는 듯이 눈물을 닦아 냈다. “뭐, 뭐야.” 급작스런 전개에 너무 당황스러워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제가 뭐랬어요. 통할 거라고 했죠?” 에밀리는 굳어 있는 나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얼빠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갈색 머리의 남자가 다가왔다. ‘다니엘.’ 목소리의 주인은 설마 했는데 다니엘 르웨인이었다. “당신이 변했다는 에밀리의 말을 못 믿었는데, 정말이었군요?”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어요. 성공할 거라고 했잖아요.” “설마 그 릴리안이 시녀에게 동정심을 갖다니.” 두 사람은 잠시 상황 파악을 위해 입을 다물고 있는 나를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았다. “지금 이게 무슨 짓들이지?” 이내 나는 머릿속을 빠르게 정리한 후 화가 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워워, 릴리안. 진정해요.” 남자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나를 달래더니 두 손까지 번쩍 들어 보였다. 나는 그를 있는 힘껏 노려봤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짓을…!” “내가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 절대 포기 안 한다고.” 편지도 그렇고 공작가에 찾아오는 것도 그렇고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날 클라우스에게 크게 혼이 났으니 다신 접근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럼 이 방법도 통하려나?” 그가 갑자기 내 뒤에 있던 린다에게 다가가더니 그녀의 목에 단도를 들이댔다. “뭐 하는! 린다…!” “마, 마님! 사, 살려주세요!” 자신의 목에 차가운 칼날이 닿자 린다가 나를 부르며 벌벌 떨기 시작했다. “릴리안.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이 시녀는 무사할 거예요. 안 그러면, 알죠?” 그렇게 말하며 그가 린다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하필 골목 깊숙이 들어와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나는 입술을 앙물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니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원하는 게 뭐죠?” “저기 반대 골목 보이죠?” 나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슬쩍 곁눈질했다. 귀족들이 타고 다니는 마차 한 대가 보였다. “저기로 가서 마차에 타요.” “내가 왜 타야 하죠?” 내 대답에 기분이 상했는지 다니엘의 눈빛이 음습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내게 보란 듯이 칼날을 비스듬하게 세웠고, 린다의 목에서 피가 조금씩 흐르기 시작했다. “알았어요! 탈게요! 그러니까 린다는 보내줘요.” “와, 에밀리, 대단한데? 릴리안. 당신답지 않게 왜 그래요.” “마님 곁에서 무려 반년이나 버틴 저예요. 마님의 변화는 이미 눈치챘다고요. 솔직히 유감은 없어요.” “그럼 왜 이런 짓에 동참하고 있는 거지?” 빙의하기 전까지는 릴리안이 좋은 주인이 아니었다는 건 동감한다. 하지만 나는 에밀리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좋은 사이를 유지했다고 여겼다. 그녀가 자취를 감췄을 때도 의심하기는 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저는 그저 클라우스, 그 남자에게 복수하고 싶을 뿐이에요.” 릴리안이 아니라 클라우스? 에밀리가 왜? “매우 궁금한 눈으로 저를 보고 있으시네요. 뭐, 이제 우리가 이렇게 얼굴을 맞대는 것은 마지막일 테니 알려드릴까요?” “에밀리, 간단하게 말해. 공작의 끄나풀이 붙을지도 모르니 조금이라도 더 빨리, 멀리 도망가야 한다고.” 다니엘이 주위를 연신 살피더니 에밀리를 재촉하며 말했다. “알았어요. 저도 공작이 더 안달 나서 미치길 바라는 사람이니 간결하게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 말은 공작저에 가서 들어 주도록 하지.” 서늘하고 낮은, 그러나 내게는 이제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골목 끝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에밀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공작 가문의 기사들이 에밀리와 다니엘을 순식간에 포위했기 때문이다. 기사들이 원의 한쪽에 공간을 만들자 그 사이로 클라우스가 걸어왔다. “어, 어떻게…!” 다니엘은 이미 손에서 단도를 떨어뜨린 상태였다. 그리고 에밀리와 마찬가지로 포박돼 몸의 자유를 뺏긴 채였다. 나는 얼른 린다에게 다가가 그녀의 목을 살폈다. 다행히 작은 상처에서 피가 약간 흐를 뿐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목에 갖다 대 주었다. “이제 괜찮아. 힘주어 누르고 있으렴.” “가, 감사합니다. 마님….” 나는 자신이 죽을 뻔했단 사실에 여전히 덜덜 떨고 있는 린다를 감싸 안으며 진정시켰다. “괜찮나.” 그제야 클라우스가 내 근처로 다가와 나를 살펴보는 것이 느껴졌다. “…저를 미행하신 건가요?” “미행보다는 호위라고 해두지.” 하긴 그가 나를 홀로 보낼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나는 그에게 믿음을 준 적이 없고, 그는 그런 나를 믿을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어제 저녁 식사에서 보석 상점에 간다고 했을 때, 흔들리던 그의 눈빛이 떠오르자 이 상황이 납득이 됐다. 나는 차분하게 상황을 응시했다. “릴리안!” 내가 클라우스와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고 속이 부글부글 끓는지 다니엘이 내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릴리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나와 함께- 윽!”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클라우스가 그의 목을 잡고 저번처럼 들어 올렸다. “경, 왜 이렇게 머리가 나쁘지?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으윽!” “그를 놔줘. 그 사람은 내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니까.” 줄에 포박된 채 가만히 있던 에밀리에게서 얼음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의 말에 클라우스가 손에서 힘을 풀었다. “캑캑!” 클라우스가 에밀리를 서늘한 눈빛으로 응시하더니 안 어울리게 선심을 쓰듯 말했다. “네 이야기를 듣는 동안만이라도 살려 둘까.” “당신을 죽이려고 한 것도 공작 부인을 빼돌리려고 한 것도 다 내가 계획한 일이야.” 에밀리는 그 기세에 지지 않고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클라우스를 노려봤다. “마, 맞습니다. 저는 저 시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이때다 싶어 에밀리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울 생각인지 갑자기 다니엘의 태도가 돌변했다. ‘저 비겁한 인간.’ 나는 그를 경멸스럽게 쳐다봤다. 에밀리도 마찬가지인지 헛웃음을 짓더니 이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캐서린 하이너를 기억해?” “캐서린… 하이너. 글쎄, 기억이 안 나는군.” “역시 당신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캐서린 하이너는 우리 언니야. 당신을 사랑하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사랑? 스스로 목숨을 끊어? 캐서린 하이너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나는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그래. 바로 당신의 그런 태도 때문에 언니가 죽은 거야!” 에밀리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언니가 당신에게 고백한다고 찾아갔을 때, 나는 그 상황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어. 언니는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혹시 몰라 걱정이 됐었지. 그날 언니의 고백을 받은 당신의 표정은 지금과 똑같았어. 지루한 것을 본 듯한 표정, 아무것도 관심 없다는 표정, 상대방을 경멸하는 듯한 표정.” 에밀리가 말하는 클라우스의 표정이 뭔지 나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클라우스가 나를 대하던 그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나니까 말이다. 처음 그와 만났을 때, 클라우스는 나를 무척이나 한심하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 그건 아무리 심지가 굳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자존심과 자존감을 무너뜨리기에 너무나 충분했다. 자신이 짝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 큰 치명타로 다가왔을 거다. “당신이 그런 태도만 보이지 않았어도 언니는 죽지 않았을 거야. 언니는 내 유일한 가족이었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내 곁에 남은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들을 가치가 없군. 가지.” 클라우스는 그녀의 말을 다 들을 생각도 안 하고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런데 에밀리가 뭐가 웃긴 건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나와 클라우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응시했다.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에밀리가 단번에 웃음을 그치고는 말했다. “그때 당신을 제대로 죽였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말고삐에 독을 묻힌 사건을 말하는 듯했다. “그것만 성공했어도…! 마님, 마님께서 그렇게 명석하신 분인 줄 몰랐군요. 당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게 제 실책이었습니다.” “너 혼자만의 짓이었나?” “그게 이제 와서 뭐 그리 중요할까.” 솔직히 이 모든 일은 에밀리가 혼자서 할 수 있는 판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다니엘을 감싸주고 있었다. “흐음, 그래?” 클라우스도 그녀의 말을 믿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니 르웨인 경은 풀어줘.” “안 되지. 공작 부인을 납치하려고 했는데.” “그, 그것도 저 시녀가 시킨 짓입니다! 저는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건 내가 밝힌다.” “지, 지금 여기서 다 말하겠습니다! 릴리에게 내쳐진 후 상심하고 있는 제게 저 시녀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저를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 정말입니다…! 저는 스란다를 구해준 것밖에 없습니다. 그걸 그런 식으로 사용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거짓말. 그 독초를 어떻게 사용하든 그것이 클라우스를 죽이기 위해 이용될 거란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해도 해도 너무한 말에 에밀리가 더 이상 참기 힘들었는지 다니엘을 쏘아봤다. 그녀의 매서운 눈에 다니엘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에 굴하지 않고 다니엘은 계속 입을 나불댔다. “저는 그저 릴리를 사랑해서 질투에 눈이- 윽! 으아악!” 갑자기 클라우스가 발로 다니엘의 복부를 가격했다. 그 엄청난 힘에 커다란 몸뚱이가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지금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한 건가?” 클라우스의 목소리에 정제되지 않은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으윽, 아니, 아닙니다. 저, 저는!” 다니엘이 슬쩍 나를 올려다보며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시야가 막히고 넓은 등이 앞을 가로막았다. 고개를 들자 클라우스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가 내 앞으로 와서 다니엘의 시선을 차단한 것이었다. “경, 경은 왜 이렇게 머리가 나쁘지?” “어, 아니, 그게, 아닙니다. 자, 잘못했습니다! 다, 다시는 릴리, 아니, 공작 부인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사, 살려주십시오!” 다니엘이 돌바닥에 쿵쿵 이마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 그가 고개를 살짝 들 때마다 피가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에밀리에게서 피식 헛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아주 잠시 동안 다니엘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랑이란 게 참 웃겨. 결국엔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안달 나고 초조해지지. 공작님. 당신도 곧 언니의 기분을 느낄 날이 머지않은 것 같군요.” 에밀리가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마님, 그래도 옛정으로 한 말씀 드리죠.” “들을 필요 없어. 그만 가지.” “잠시만요.” 나는 지체 없이 골목을 빠져나가려는 클라우스를 저지하고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남자에게 사랑을 구하려 애쓰지 마세요. 특히 이 남자한테는 말이죠.” 사랑을 구하지 말라니, 나에게 너무나도 쓸데없고 의미 없는 충고여서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누구보다도 사랑에 회의적인 사람이 나였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과거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클라우스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말할 필요는 없지만, 이 말만은 에밀리에게 꼭 하고 싶었다. “에밀리. 네 언니가 그렇게 된 건 유감이지만 모든 잘못을 공작님께 뒤집어씌우려는 건 이해가 안 가는구나.” “뭐라고요? 그날의 일을 보지도 않았으면서!” “물론 나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두 사람이 어떤 표정으로 어떤 대화를 했는지 몰라. 앞으로 알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말이야.” 나는 잠시 클라우스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공작님께선 혹시 에밀리의 언니에게 어떤 기대를 품을 만한 말을 했었나요?” “전혀.” 그럴 줄 알았다. 그를 완벽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에게 있어 사랑은 오직 여자 주인공을 향할 뿐이다. 이 남자는 자신이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상대를 가지려고 하지, 다니엘처럼 얄팍하고 비열한 수는 쓰지 않는다. 그게 클라우스고, 그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여자 주인공 외의 그 모든 것들은 길바닥의 발에 차이는 돌멩이만도 못한 존재였다. 관심도 없고, 애초에 그의 관심을 끌 만한 이들도 아니었다. 지금은 어쩌다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아 있지만 조만간 나도 그에게 똑같은 취급을 당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에 그런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에밀리의 언니와 같은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 차가운 시선이 오히려 반가울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끝을 알고 있는 나이기에 할 수 있는 대응이었다. 에밀리의 언니로서는, 아니, 더 가까이서 찾자면 원래의 릴리안은 그러지 못했을 터였다. ‘그래도 이런 건 옳지 않아.’ 나는 연달아 끊어지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멈추고 에밀리를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랑에 보답받지 못했다고 그걸 오로지 태도의 문제로 엮어서 상대를 비난하는 건 옳은 걸까? 공작님께서 네 언니를 어떻게 대했는지 짐작은 가지만 그렇다고 네 언니의 죽음이 오로지 공작님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어.” 그런데 에밀리가 내 말에 뭔가 걸리는 게 있는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네게 더 설교할 생각은 없어. 그리고 난 네 입장이 아니기에 널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어. 그러나 네 복수의 방향이 결국엔 왜 나로 향했던 건지, 그래서 왜 아무런 관련도 없었던 내가 피해를 당할 뻔했어야 했는지 그걸 기억하고 반성할 마음이 생긴다면 그러길 바라.” 에밀리의 언니를 내 식으로 제단해서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것 말고도 이유가 분명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서 이유를 밝혀봤자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내게 피해가 올 뻔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별일이 없었기에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의 처분은 공작님께 맡길게요. 가요.” 그들을 등지고 마차를 향해 걸어가는데 뒤에서 에밀리의 울부짖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너무나 서럽고 후회스럽게 들렸다. 그리고 복수에 모든 것을 바쳤던 그녀의 인생이 안타까웠다. “할 말이 있어요. 하지만 안 들어주셔도 돼요.” 그에게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을 거라고 이미 말한 전적이 있기에 나는 꼭 들어주지는 않아도 된다고 먼저 못을 박았다. “말해 봐.” “공작님께 에밀리를 용서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시다면 그녀를 용서해주셨으면 해요. 물론 강요는 아니고 공작님께서 결정하실 문제지만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가 내 말을 들어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에밀리와 다니엘 르웨인은 후에 처분을 내리기 위해 공작저의 지하 감옥에 구금됐다. 그러나 에밀리에 대한 내 부탁은 결국 쓸모없게 되어버렸다. 에밀리는 그날 밤 감옥 안에서 자신의 혀를 깨물고 삶을 마감했다. 그녀가 죽기 직전 나에게 할 말을 남겼다며 집사장이 편지 한 통을 전달했다. 편지를 읽기 전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몬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죽기 직전 내게 편지를 남겼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제가 왜 마님께 편지를 남겼는지 의아하시겠죠.] 첫 문장부터 내 마음을 읽은 것 같아 깜짝 놀란 나는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제가 가장 사랑했던 내 하나뿐인 언니가 죽은 뒤, 맞아요. 마님의 말씀대로 언니는 그 남자에게 차였다고 죽은 게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남자의 책임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결국 언니를 그렇게 만든 건 그 남자니까요.] 차였다고 죽은 건 아니지만 클라우스의 책임은 있다라…. [언니는 고백 후에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하루 종일 울고, 먹지도 않고 방 안에서만 지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을 차린 후 다시 활기를 되찾더군요.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언니를 죽게 만든다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역시 고백을 거절당했다고 죽는 건 너무나 말이 되지 않았다. 다른 일이 있었구나. [언니는 그 후 한 남자를 만났어요. 언니의 얼굴에서 행복한 웃음이 끊이질 않아서 저 또한 행복했죠. 그런데 몇 달이 흐른 뒤 언니는 임신을 했고 언니와 만난 남자는 결혼을 했어요. 언니랑 했냐고요? 아니요. 그 인간은 알고 보니 언니와 바람을 피웠던 거였고 언니의 임신했다는 말을 외면한 채 원래의 약혼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나는 편지를 읽으면서 에밀리의 언니가 겪은 상황에 경악을 금치 못한 채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언니의 절망과 배신감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죠. 하지만 저는 언니를 믿었어요. 저번처럼 다시 일어날 거라고요. 그러나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그 인간의 결혼식 날, 언니는 방 안에서 목을 매달아 죽었어요.]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편지를 붙잡은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어서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더 이상 읽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게 편지를 남긴 에밀리의 마음을 생각하며 입술을 꽉 깨물고 글자에서 눈을 떼지 않으려 애를 썼다. [아이와 함께 언니는 그렇게 가버렸어요. 저만 남기고, 제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말이죠. 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내 언니와 조카의 목숨을 앗아간 그 인간을 용서할 수 없었죠. 복수를 해야 했어요. 그리고 복수에 성공했죠. 헤미온 백작이 반년 전에 마차를 타고 가다가 낭떠러지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소식은 들으셨겠죠. 워낙 멍청한 자라 죽이기도 쉽더군요.] 헤미온 백작? 이곳에서 반년도 지내지 않은 나로서는 당연히 처음 듣는 일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인간이 누구와 닮았는지 아세요? 바로 클라우스 루이덴, 그 남자를 닮았어요. 언니는 클라우스 루이덴을 잊지 못하고 그 남자와 닮은 인간을 만났다가 그렇게 된 거였어요.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더군요. 그 남자가 언니의 고백만 받아줬어도! 언니가 그 인간쓰레기를 만나진 않았을 텐데, 그런 원망을 하다 보니 클라우스 루이덴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어요. 그 남자를 죽이고 나도 죽자. 그게 언니의 복수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일이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러나 에밀리의 편지를 읽고도 난 왜 클라우스에게 원망의 화살이 갔는지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편지를 마저 다 읽기 시작했다. [결국 아시다시피 복수는 제 뜻대로 되지 않았고 저는 이제 언니 곁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 전에 마님께 구구절절 편지를 남기는 것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니가 클라우스 루이덴에게 차여서 죽은 게 아니라고 하셨죠? 그 남자가 언니의 죽음에 일조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마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화살이 마님께 갔던 거에 대해서는 사죄를 드리고 싶습니다.] 편지를 거의 다 읽고서야 알았다. 에밀리는 내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편지를 남긴 거였다. [마님. 제가 언니를 지켜보면서 느낀 건 딱 하나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결국은 절망한다는 것. 준 만큼의 감정을 받지 못해 마음과 정신이 망가져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남자, 클라우스 루이덴에게 마음을 주지 마세요. 그 남자는 마음을 줄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마님의 마음을 지키세요. 그것만이 마님께서 마님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제 부모님과 언니를 만나러 가야겠네요. 그럼, 안녕히.] 다 읽은 편지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마음이 어쩐지 착잡했다. ‘마음을 지킨다….’ 나를 언니와 동일시하며 걱정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내가 클라우스에게 마음을 주지 않아 그를 절망에 빠지게 함으로써 복수를 완성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두었다. 그걸 의도하고 에밀리가 내게 이 편지를 남긴 거라면 방향은 틀렸지만 어쨌든 결국 그녀의 복수는 성공할 것이었다. 물론 나 때문은 아니겠지만. 나는 복수에 삶을 바쳤던 그녀의 인생에 짧게 애도했다. 나중에 다시 태어날 기회가 그녀에게 온다면 행복해지기를 기도했다. 그 후 내 행선지를 다니엘에게 밀고한 세작이 또 있을 거라고 확신한 클라우스는 사용인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에밀리에 대해 고한 갈색 머리의 하인이 범인이었다. 하인은 저번의 사용인들과 마찬가지로 노예 시장에 팔렸다. 다니엘 르웨인은 사생아이긴 해도 귀족이어서 클라우스가 함부로 처분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처분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결국 다니엘은 죽은 에밀리를 물고 늘어진 덕분에 귀족 직위가 박탈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렇게 모든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06. 쉽지 않은 이혼(1) 다음 날 보석 상점에서 처분한 보석 값이 저택으로 전해져왔다.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는데 다행히 상점에서 알아서 돈을 보내줬다. 얼마가 들었을지 궁금해 주머니를 받자마자 열어본 후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아니, 생각 이상으로 너무 액수가 컸다. 나는 집사에게 두 사용인을 노예 시장에서 구해 올 만큼의 돈을 주고 나머지는 서재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나중에 이혼하게 되면 가져가야지.’ 그나저나 나머지 보석도 팔면 액수가 엄청날 것 같았다. 이렇게 된 거 위자료는 포기하고 보석이나 다 팔아서 나가는 게 빠를 듯했다. 돈 문제가 없다면 이혼도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며칠 동안 이혼하면 뭘 할지와 이 돈으로 뭘 할 수 있을지에 고민을 하는 사이, 로아와 마부를 찾았다는 집사의 보고가 있었다. 그들이 노예에서 해방돼 다시 평민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사는 그들에게 20년 치 월급을 계산해 줬고 필요하다면 더 주겠다고 했지만 두 사람은 그거면 충분하다고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고맙다라….” 내가 들어도 될 말일까. 나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됐을 고초를 겪었는데 오히려 고맙다니, 더욱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일이 잘 해결됐지만 무거운 마음은 계속 남아 있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다 보니 저녁 식사 때가 돼서 식당으로 내려갔다. 역시나 오늘도 그가 먼저 와 앉아 있었다. ‘식사 시간은 정말 칼같이 지키네.’ 하긴 여태까지 지켜보건대 저 남자의 일상은 엄청나게 단조롭고 규칙적이었다. ‘스트레스를 못 풀어서 그렇게 비뚤어졌나?’ 나도 모르게 그를 유심히 살펴봤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아, 아니에요. 혹시 에밀리가 제게 쓴 편지 보셨어요?” “아니. 봐야 하나?” “아니에요. 안 보셔도 되는데, 그래도… 혹시 보실래요? 보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요.” “됐어.” 클라우스가 단칼에 거절했다. 전혀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당신도 힘들겠다.’ 시기와 질투를 받고 있는 건 알았지만 그게 목숨까지 위협할 줄은 몰랐다. 그를 신경 쓰지 않겠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안타깝게 생각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 빨리 이혼해서 아예 안 보고 모르고 살아야 이런 마음도 안 들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또 하면서 밥을 먹고 있는데 그가 말을 걸었다. “폐하께서.” “네?”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그를 봤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클라우스는 그렇게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일이 뭔가 잘못됐나?’ 근데 또 잘못될 일이랄 게 없는 것 같은데…. “폐하께서 나흘 뒤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시는데.” “폐하께서요?” “그래.” 식사 초대를 하는 건데 표정은 왜 그런 거람. 괜히 걱정했네. “가시면 되죠.” “당신도 함께 오라시더군.” “저도요?” 하긴 나도 같이 가는 게 아니면 그가 이렇게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제 의견을 물어보시는 건가요?” “그래.” 딱히 거절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식사 정도야 괜찮겠지. 그리고 어차피 한 번 만났던 사이라서 내게는 황제를 피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전 괜찮아요.” “간다고?” 꼭 내가 가지 않았으면 하는 것처럼 그가 되물었다. “네.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거절을 할 수 있는 입장인가요?” “핑계야 무엇이든 댈 수 있지. 당신이 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그러니까 가기 싫다고 말하라는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가지 말아요? 가지 말까요?” 피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꼭 가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황제랑 밥을 못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물론 황궁의 음식이 얼마나 맛있을지 궁금하긴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의 남자 주인공인 황제와 자주 마주치는 것도 여러모로 피곤한 상황을 만들 것 같았다. 가지 않는 것도 나름 괜찮을 듯했다. “그럼 전 가지 않는 걸로 할게요.”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그가 내 말의 의도를 찾으려는 듯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왜요?” “당신이 가고 싶으면 가도 돼.” 아니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야? 설마 황제까지 내가 뭐 어떻게 할까 봐 견제하는 거야? 분명히 그가 며칠 전에 나에게 그랬다. 다른 남자를 보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 지금 이 남자의 태도를 보건대 그걸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가죠.” 나는 왠지 반항심이 생겨 가겠다고 대답했다. “알았어.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는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그 후 우리는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 * * 나흘 뒤 황궁으로 가기 위해 마차를 탔다. 나는 마차의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쐬며 밖을 구경했다. ‘황궁은 처음 가는 건데 어떻게 생겼을까. 황제가 먹는 건데 역시 음식은 엄청 맛있겠지?’ 이곳에 와서 멀리 외출 나가기는 처음이라 어쩐지 조금 설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내가 조금 들떠 있는 걸 알아챈 클라우스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창밖에 그대로 시선을 준 채 그에게 대답했다. “네, 좋아요.” 밖에 나온 게 정말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별 의미 없이 대답했다. “그래?” 그런데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매우 낮아져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건지 궁금해서 흘깃 눈을 굴리는데, 클라우스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괜히 어색한 기분에 모르는 척 그의 시선을 피해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궁에 도착하고 손님을 대접하는 식당으로 안내받았다.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황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우리는 일어나서 황제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베이누스의 빛이자 영광이신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일어나세요.”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나는 고개를 든 뒤 황제가 가장 상석에 앉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폐하.” 그래도 두 번째 봤다고, 황제가 한결 편하게 느껴진 나는 웃으며 그에게 살갑게 대답했다. 역시나 언제 봐도 훈훈한 미모였다. 가뜩이나 오늘은 정복까지 차려입고 있어서 그의 외모가 더욱더 빛나 보였다. “공작도 오느라고 고생했나?” 황제가 클라우스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유일하게 황제만이 클라우스를 편하게 대했다. 누구도 저 얼굴과 풍채 앞에선 그럴 생각도 못 할 텐데. 하긴 그렇기에 클라우스가 황제를 형제처럼 믿을 수 있었겠지. 그런데 여자 때문에 이런 두 사람의 사이가 금이 갈 줄 누가 알았겠어. 결국은 우정보다 사랑인 건가. 물론 여자 주인공은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기에 두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다.’ 그녀는 이 소설 속에서 내가 정말로 동경하던 인물이었다. 그녀를 만나서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정말 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친구가 되고 싶을 정도였다. ‘현실적으론 힘들겠지?’ 왠지 아쉬워 나도 모르게 입을 삐죽였다. “공작 부인께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신가 보군요.” “네? 아닙니다, 폐하. 너무 맛있습니다.” 나는 정말로 맛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접시에 있던 고기를 썰어 한입에 넣었다. “그럼 기분이 별로이신가요?” “아뇨, 기분이 안 좋을 이유가 없죠. 너무 좋습니다.” “아쉬운 표정이라 걱정되어 물어봤습니다.” “이곳이 불편하다거나 음식이 별로여서는 아니에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두 사람끼리 꽤 오랫동안 대화를 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황제는 내 얼굴 표정까지 신경 쓰고 있었구나. 주변의 모든 것들을 허투루 보지 않는 것이 역시나 황제다웠다. “폐하께서 어쩐지 제 부인께 관심이 넘치십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클라우스가 더없이 서늘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했다. 말은 둘째 치고 태도가 너무 불손해서, 나는 혹시나 황제가 기분이 상해 무슨 일이 날까 조마조마했다. “당연한 거 아니냐.” “뭐가, 당연하다는 겁니까.” 클라우스의 표정이 더 굳은 반면 황제의 얼굴엔 웃음기가 만연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이의 부인인데 더욱더 신경을 써 드려야지.” “제 부인은 제가 신경 쓸 테니 폐하께서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푸하하하!” 클라우스의 반응에 황제가 박장대소를 했다. 나는 그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공작이 부인을 꽤나 아끼는 듯하는군요. 이렇게 부인을 좋은 뜻으로 대하는 것도 맘에 차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 하하….” 나는 황제의 말에 어색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너는 나를 못 믿는 것이냐.” 그런데 갑자기 황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의 표정이 클라우스와 마찬가지로 무섭게 돌변했다. “믿습니다. 하지만….” 클라우스가 나를 한 번 슬쩍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믿습니다.” 아, 나를 못 믿는 거구나. 클라우스가 시선을 나에게 한 번 두었다 거두는 것을 보고 단박에 눈치챘다. 저 남자는 황제가 아니라 나를 못 믿고 있었다. 내가 황제를 유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초조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분 더럽다. 진짜.’ 나를 무슨 남자만 보면 안달 내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네. 릴리안이 과거에 행했던 전적이 있겠지만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식당 안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무거워졌다. 클라우스의 말과 행동 때문에 우리 셋 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나는 정말 최악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엿 먹일 심정으로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더 살갑게 황제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공작님께서는 폐하가 아니라 저를 못 믿어서 저러시는 거예요. 그러니 기분 푸세요, 폐하.” “부인을요?” 황제가 금세 굳었던 표정을 풀고는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클라우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황제 쪽으로 일부러 몸을 돌린 후 그에게 계속 말했다. “제가 잘생긴 외모만 보면 혹하는 게 있어서요. 폐하께서는 미남이시고 또 이 나라의 황제이시면서 유머도 있으시니까요. 폐하의 반려가 되시는 분은 아마도 평생의 행운을 다 쓰신 분일 거예요.” 그리고 끝에 이 말을 덧붙였다. ‘너무 부러워요.’라고. “공작 부인께서 저를 너무 좋게 봐주시는군요. 저는 오히려 공작이 부러운데요? 부인같이 아름답고 현명하고 재치가 있는 분을 아내로 맞이했으니 말입니다. 안 그런가?” “저니까 감당하고 살고 있는 겁니다.” 감당? 진짜 말이면 단 줄 아나. 그래, 역시 이 남자는 이런 인간이었다. 말로 사람을 잔인하게 후벼 파고 죽일 수도 있는 사람. “그럼 감당 안 하고 사시면 되겠어요. 어때요. 우리 그렇게 할까요?” 나는 황제를 쳐다보고 있던 고개를 휙 돌려 클라우스를 차갑게 응시했다. “저는 준비가 다 되었으니 공작님께서 결단을 내리세요. 마침 증인으로 폐하께서도 계시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클라우스는 분명 이해했을 것이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나를 무섭게 쳐다볼 뿐 그에게서는 어떠한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두 사람 왜 그러나. 부인께서도 기분 푸시고 공작도 그만하고 식사를 마저 하게.” 부부싸움 아닌 싸움을 황제가 얼떨결에 중재했다. 그때부터 우리 셋은 거의 침묵 속에서 식사만 했다. 간간이 황제가 나와 클라우스에게 각각 말을 붙일 뿐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선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식사 정말 맛있었습니다. 초대 감사합니다. 폐하.” “잘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다음에는 더 맛있는 것을 대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이 멀지 않은 날이길 바라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황제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클라우스가 대뜸 말을 끊었다. 더 이상 황제의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가 없다는 생각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후 황제가 궁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본 뒤 우리는 마차에 탔고, 그대로 출발했다. 아까의 일 때문에 마차 안은 정적뿐이었다.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재빠르게 내려 2층으로 향했다. 그런데 막 내 방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클라우스가 나를 쫓아오더니 내 손목을 잡았다. “아까 무슨 뜻이지?” “뭘 말씀하시는 거죠?”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을 했다. “당신하고 말장난할 기분 아니야.” “저도 장난할 기분 아니에요.” “그럼 아까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거야?” “네. 진심이에요.” 그러자 그가 자신의 침실로 날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쾅 닫더니 그대로 내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춰왔다. “읍!” 이번에는 절대로 그에게 응해줄 생각이 없었다. 이런 방식은 이젠 구역질이 났다. 그래서 나는 그의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하지만 무는 힘이 약했는지 그가 내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고 오히려 더 거칠게 입술을 부딪쳐왔다. 그의 입술에서 난 피로 인해 비린 맛이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안 하고 그 틈에 입 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또 몸이 그의 키스에 반했다. 이제는 무력한 내 모습에 도저히 제정신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윽, 흡.” 이런 일 따위에 울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운다는 걸 알아챘는지 잠시 후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클라우스가 내 눈가의 눈물을 훑으며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아, 울지 마.”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가슴팍을 확 밀어냈다. “하지 마요! 더러워! 역겨워! 당신은 구제 불능이야! 쓰레기야! 당신 따위 진짜 싫어…!” 나는 그에게 할 수 있는 나쁜 말들을 다 내뱉은 뒤 쳐다보지도 않고 침실에서 나와 내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그고 곧장 침대에 엎드려 서러운 마음에 펑펑 울었다. 나를 이런 식으로밖에 대하지 못하는 그가 미웠다. 그럼에도 아마 저 남자는 원래 저 모양이라서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가 여자 주인공에게 했던 행동들을 떠올리면 이건 약과였다. “나쁜 놈.” 나쁜 놈부터 시작해서 나는 내가 아까 하지 못했던 온갖 욕을 다 퍼부었다. 그러니까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면서 내 일도 걱정이지만 클라우스에게 납치당할 그녀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클라우스를 이대로 놔둬도 괜찮은 걸까. ‘그녀는 강하니까. 그리고 황제가 있으니까.’ 괜찮겠지? 괜한 오지랖을 부릴 필요는 없을 거야. 남까지 그렇게 걱정할 정도로 내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나는 애써 그렇게 포장하며 내일 그에게 당장 이혼 얘기를 꺼내야겠다고 결심했다. * * *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나는 내 결심을 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바로 그의 집무실을 찾았다. “할 말이 있어요.”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다시 자신의 일에 집중하며 말했다. “지금은 바빠.” “중요한 얘기니 시간 좀 내주세요.” “나가.” 왠지 내가 무슨 얘기를 할지 예상을 하는 것처럼 그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완고하게 거절을 했다. “그럼 그냥 이야기할게요.” “릴리안.” 그가 내 이름을 이를 꽉 깨물고 내뱉었다. 화를 참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내가 그를 찾아온 목적을 바로 꺼냈다. “이혼해 줘요.” “이혼?” “네. 이혼하고 싶어요.” 이혼이라는 소리에 클라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가 또 내게 다가와 무슨 짓을 할까 봐 경계 태세를 갖추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혼이라….” 클라우스의 눈빛이 탁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를 살핀 결과 저건 거의 맛이 가기 전의 전조 증상이었다. “내가 말했지.” 한 글자 한 글자 말을 내뱉을 때마다 그가 애써 분노를 참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어떤 말이 나올지 긴장하며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이 이곳에서 도망치면 이 집구석의 모든 인간들을 노예 시장에 팔아 버릴 거라고.” 그날 보석 상점에 간다고 했을 때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장난 같아?” 그렇게 말하는 그의 입가에 조소가 걸려 있었다. “이, 이런 식은 너무 비열한 거 아닌가요?” “비열? 진짜 비열한 게 뭔지 보여줄까.” 사용인들을 노예 시장에 다 팔아버린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비열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비열한 거라니, 나는 애써 초조한 기색을 숨기며 그의 다음 말을 숨죽여 기다렸다. “그럼 이건 어때. 노예 시장이 아니라 그냥 다 죽여 버리는 거야. 그러면 당신 입에서 이혼 소리가 안 나오려나?” 노예로 전락시키는 걸로도 부족해서 죄 없는 이들을 죽인다고? 이 남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정말로 이렇게까지 미친놈인 줄은 몰랐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년 동안 수발들어 준 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다니, 나는 그를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를 노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간 울분이 터질 것 같았다. “왜 제게 이러는 거예요? 공작님께선 저 싫어하셨잖아요!” 나는 그에게 크게 소리쳤다. 그래도 속의 답답함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혼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안일하게 생각했다. 클라우스가 릴리안을 싫어하기 때문에 언제든 내가 맘만 먹으면 이혼쯤은 가볍게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생각한 대로 일이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그는 나에게 족쇄를 채우고 있었다. “릴리안.” 그가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소유욕은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문제가 아니야. 내 손에 들어온 후부터 당신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내 거라는 거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소유욕이 이 정도일 줄이야. 나는 그제야 클라우스가 왜 황제와의 관계를 저버릴 정도로 여자 주인공에게 집착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여자 주인공….’ 이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되도록 가능하다면 이 문제만큼은 죽어도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했다. 무엇보다 나는 원작의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완전히 발을 빼고 싶었다. 그곳에 휘말려서 생길 수도 있는 혹시 모를 일들을 미연에 방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안 되나 보다. 그래서 나는 초강수를 두기로 했다. “그럼 공작님께 다른 여인이 생긴다면 어떻게 하실 거죠?” 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다른 여인을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면 어떻게 하실 거냐는 말이에요.” 나는 다시 한번 클라우스에게 확실히 물었다. “그때는 저를 놓아주실 건가요?” “…내가 반드시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 같군.” 역시나 이 남자의 눈치는 보통이 아니었다. “앞으로의 일들은 모르는 거니까요. 공작님께서는 제게 다른 남자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저는 상관없어요.” 클라우스는 내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지 무섭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니 공작님께 다른 여인이 생긴다면 언제든 이혼해드릴게요.” “그럴 일이 과연 있을까.” “있을지 없을지는 두고 보면 되겠죠. 공작님께서는 저와 약조를 해주시면 돼요. 그런 날이 온다면 이혼한다고.” “재밌네, 당신 참 재밌어.”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다른 여자라…, 이혼이 꼭 필요한가? 당신이 다니엘 르웨인을 정부로 둔 것처럼 그러면 되는데.” 나는 순간 참지 못하고 코웃음을 칠 뻔했다. 곧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모르는 사람의 소리가 너무도 가소로웠다. ‘여주를 정부로 둔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가 그녀를 정부로 둘 거였으면 애초에 단두대에 오르지는 않았을 거다. “왜 웃는 거지?”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도 어이없는 말에 웃음이 조금 새어 나갔나 보다. 그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아니에요. 좀 이해가 안 가서요. 정부라…, 정부로 만족을 하실 수 있으실까요?” 당신 같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오로지 소유욕에 놓지 못하는 사람이 죽을 만큼 사랑하는 여자를 정부로 둔다고? “공작님. 제가 르웨인 경에게 마음을 줬다고 생각하세요? 온 마음을 준 사람을 정말로 정부로 둘 수 있을까요?” 릴리안이 다니엘과 무엇 때문에 만남을 지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사랑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절대 두 번째로는 두지 못할 테니까. “저는 그런 얄팍하고 가벼운, 사랑이라는 단어를 갖다 대기엔 너무나 하찮은 마음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공작님께서 목숨까지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여인을 만나게 된다면, 그렇다면 공작님은 저와의 이혼을 받아들이실 건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죠.” 나는 사랑에 대해 그렇게까지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지만 이 남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완벽하게 확신을 했다. ‘당신은 절대로 그럴 수 없어.’ “물론 이 모든 건 '혹시나 그럴 날이 온다면'의 가정일 뿐이지만요.” 나는 괜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뒷말을 덧붙였다. 그는 내 얘기를 다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으로도 읽을 수 없었다.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더니 무슨 결론을 내렸는지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 날이 온다면.” 긴 시간 후에 나온 그의 목소리는 얼음같이 차가웠다. “당신 말대로 그런 날이 온다면 이혼하도록 하지.” 말투는 여전히 냉랭했지만 매우 흡족한 답이었다. 나는 그의 대답에 드디어 얻을 것을 얻었다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환호했다. “단.” 단?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나는 잠시 환호했던 기분을 가라앉히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그전에 적어도 이혼을 얘기하려면 당신의 의무부터 제대로 이행해야 할 거야.” “저는 지금까지 제대로-” 제대로 했다고 말하려다 순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도 마찬가지지만 릴리안도 결혼생활에 그다지 충실하지 않았기에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원하는 게 뭐죠?” 나는 하던 말을 접고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다지 별거 없어. 나는 당신이 공작 부인으로서 할 일을 하라는 것뿐이니까.” 공작 부인으로서의 일이라면, 뭘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아, 미치겠네.’ 일전에 그와 키스를 하면서 몸이 달았던 기억이 떠오르고 말았다. 후에 나는 그와 접촉하는 일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공작 부인의 의무를 내게 들먹이는 이상 이제는 정말 현실을 마주할 순간이었다. ‘아니야. 할 수 있을 거야. 앞으로 조금만 견디면 돼.’ 클라우스는 미래를 모른다. 그는 현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곧 정말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게 될 거라는 것도, 그래서 그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나밖에 보이지 않는 거였다. 자신의 집착과 소유욕이 끝까지 나에게만 뻗어갈 거라고 믿을 테니까. 반면에 나는 미래를 안다. 그러니까 나는 절대로 불리하지 않다. ‘오히려 내가 유리한 게임을 하는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굳은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제 의무를 다하도록 하죠. 공작님께서도 우리가 한 오늘 약속을 절대로 잊지 마세요.” 클라우스가 내 대답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오늘 밤 준비하고 있어.” 그러면서 곧바로 내게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 *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사용인들이 곧장 문을 두드렸다. “마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이제는 더 이상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좀 전의 그와의 대화를 통해서 깨달았다. 시녀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와서 내 침실에 딸린 욕실에 들어가더니 얼마 뒤 바로 나왔다. “마님, 목욕 준비를 마쳤습니다.”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처음에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는 누군가가 나를 씻겨준다는 것이 부끄럽고 민망했다. 하지만 그것도 점점 익숙해졌고 급기야 이제는 그것의 편함을 알아버리기까지 했다. “오늘은 라벤더 향으로 준비했는데 다른 향으로 바꿀까요?” 내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걸 알았는지 시녀가 눈치를 살살 보며 물어봤다. “아니다. 괜찮아.” “네, 알겠습니다.” 나는 멍한 기분으로 사용인들이 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짧게 목욕을 마치고 온몸에 향유를 바른 뒤에 속옷 위에 얇은 슬립만 걸쳤다. “혼자 있고 싶다. 나가 보렴.” “예, 마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나는 바로 침대 위로 올라간 뒤 무릎을 모아 고개를 푹 숙였다. ‘잘 견딜 수 있겠지?’ 아까는 클라우스의 앞에서 기세당당하게 나갔지만 막상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걱정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떡하지.’ 릴리안의 몸은 처음이 아니겠지만 내 정신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누군가와 한 번도 몸을 섞어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처음’이라는 두려움에 잠식될 것 같아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별거 아니야. 남들 다 하는 거야.’ 내가 못 할 것도 없지. 진짜 별거 아니야. 큰 의미를 두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던 그때, 문이 열리고 클라우스가 들어왔다. “….” “….” 그도 오기 전에 씻었는지 몸에 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돌리며 이불을 들쳐서 내 몸에 덮었다. “뭐 하고 있었지?” 평소 무감한 목소리가 어쩐지 잠겨 있는 듯도 했다. “그냥 있었어요.” 나는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말하며 그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있는 와인 병을 집어 잔에 따랐다. “마실 건가?” “아니요. 별로.” 술을 마시려면 그가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지금 내가 입은 옷의 상태로 보아 거기까지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또 원래 술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평소 술로 인해 정신이 흐려지는 것이 싫었다. “좀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더니 찰랑거리는 잔을 건넸다. 막상 눈앞에 술이 보이니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그에게서 잔을 받아 단번에 안에 담긴 와인을 비웠다. 술에 뭔가를 의지하는 게 싫었지만 이번에는 예외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차라리 술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나았다. 내가 잔에 있는 와인을 한꺼번에 다 비우자 그가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렇게 마시면 금방 취할 텐데. 당신은 술을 잘 못 마시잖아.” 그러고 보니 금방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한 잔 더 줘요.” 잘됐다. 예전의 나라면 이 정도로는 절대 취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의 말대로 릴리안은 술이 약한 듯했다. 다행히 좀만 더 마시면 금방 취할 듯했다. 그가 테이블에서 와인 병을 들고 와 내 잔에 와인을 채워줬다. 나는 아까처럼 잔을 단숨에 비웠다. “릴리안.” 클라우스가 뭐가 맘에 안 드는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만 마시지.” 그렇게 말하며 내 손에 든 잔을 뺏으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계속 마시고 싶었다. 마실 수 있을 때까지 마셔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을 술김으로라도 돌리고 싶었다. “마시라고 하셨잖아요. 더 주세요.” “이런 식으로 마시라는 건 아니었어.” 그가 힘을 줘서 내 잔을 빼앗았다. 나는 순간 심통이 나서 입을 삐죽였다. 그가 그런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테이블로 걸어가 잔과 병을 놓았다. 술 때문인지 내 몸에 열기가 점점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손으로 얼굴에 연신 부채질을 했다. “덥나?” “아니요, 이제 괜찮아요.” 사실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은 척해야 했다. 덥다고 하면 이불을 치우라 할 테니까. 그런데 내 생각보다 꽤 많이 취한 듯했다. ‘술 진짜 약하구나.’ 와인 두 잔만 마셨을 뿐인데 정신이 약간 몽롱했다. 나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고개를 살짝 돌려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취했군.” “네? 아니- 흐읍!” 클라우스가 몸을 숙이더니 한 손으로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그런 다음 내 입술을 입술로 틀어막았다. 내가 얼굴을 뒤로 빼려 하자 바로 한 손으로 뒷머리를 받쳐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 침대가 살짝 출렁였다. 그가 침대 위로 순식간에 올라와 팔로 몸을 지탱한 후 그 안에 나를 가뒀다. 그의 혀가 본격적으로 입 안을 휘젓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 입 안의 치아가 몇 개인지 세 보려는 듯 하나하나 훑더니 다음은 더 깊게 들어와 입천장을 부드럽게 긁어 올렸다. 나는 또다시 몸이 푹 꺼질 것만 같은 느낌에 이불을 꽉 움켜잡았다. 비록 다른 남자와의 경험은 전혀 없었지만 나는 확신했다. 이 남자는 키스를 무척이나 잘했다. 입술을 맞댈 때마다 혼이 빠질 것 같은데, 이것보다 더 잘하는 사람은 분명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가 슬쩍 내 눈을 보더니 입술을 뗐다. “딴생각을 할 여유가 있나 보군.” “네? 아!” 목덜미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나왔다. “잠시만! 잠시만요!” 나는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어서 그의 어깨를 붙잡고 밀었다. 그럼에도 그는 내 목을 핥더니 급기야는 살짝 물고 빨기 시작했다. “잠시만! 공작님…! 잠시만 할 말이 있어요!” 계속해서 내가 할 말이 있다고 하자 그가 아쉬운 듯 목줄기를 힘주어 빨고는 조금 떨어졌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거지?” 그의 목소리가 흥분 때문이지 잔뜩 가라앉은 게 느껴졌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그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이 밤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히 하고자 분명하게 말했다. “약속, 꼭 잊지 마세요. 저도 제 의무를 잊지 않고 반드시 이행할 테니.”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열기 가득했던 그의 눈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그럴 거라고 예상하고 말한 거기도 했다. 그의 기분 따위 신경 쓰지 않으려고 시선을 살짝 피했다. “릴리안.” 그런데 그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더니 내 눈에 자신의 눈을 맞댔다. “당신이 그 의무를 잘 이행한다면 나 역시 두말하지 않을 거야.” 클라우스의 말에 나는 속으로 안심하며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내가 만족할 만큼이어야 하겠지.” “그게 무슨 뜻-” “그만.” 그는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는 듯 제 할 말만 내어놓았다. “내가 지금 자제가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야.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순간 내가 다시 입을 열 새도 없이 그가 자신의 입술로 내 입을 막았다. 아까의 키스와는 확연하게 다른, 엄청나게 격하고 짐승 같은 키스였다. 그리고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 * * 클라우스는 릴리안에게 조급하게 달려들었다. 그녀가 방금 전 자신에게 한 말이 그를 더 이상 이성적인 상태로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물론 요즘 그녀와 있을 때면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요동쳤다. 분명 그러지 않았었다. 그는 릴리안에게 별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를 싫어한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릴리안 프리드. 아니, 이제는 자신의 부인인 릴리안 루이덴은 세상이 온통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여자였다. 적어도 클라우스가 보기엔 그랬다. 어디를 가더라도 모든 이들의 관심을 독차지해야 했고, 혹시라도 다른 이가 자신보다 관심을 받거나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그 상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아야 속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남자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자신을 좋아할 거라 믿었고, 그녀의 미모는 그걸 한층 더 쉽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달랐다. 클라우스는 릴리안의 외모가 어떻든 결혼을 하고서도 그녀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을 테다. 모든 남자들이 자신을 이렇게 우러러보는데, 어떻게 해서든 자신과 닿으려고 애를 쓰는데, 저 고고한 남자만이 그녀를 아무런 감정 없이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더 집착하고 또 집착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지만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해. 그게 릴리안의 숨기지도, 숨길 생각도 없는 마음이었고 그걸 클라우스도 알고 있었다. 고작 짓밟힌 자존심 하나 때문에 그런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서 크게 경멸을 느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런 그녀가 변했다. 처음엔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자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좀 색다른 방법을 취한 줄 알았다. 그런데 다니엘 르웨인을 쳐내는 모습을 보며 잠시 흥미가 일었다. 그는 그녀가 무려 이 년 넘게 만난 남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단호하게 이별을 고하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 거였다. 그저 그녀 나름의 변덕일 줄 알았다. 클라우스는 릴리안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들을 사냥감 보듯이 사냥했고, 질리면 또 다른 사냥감을 물색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날, 독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맸던 그날은 릴리안에 대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뒤집어 놓았다. 평소의 릴리안이었더라면 자신을 병간호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 거다. 지금까지의 그녀를 보건대 릴리안은 그런 귀찮고 피곤한 일을 제 손으로 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아프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걱정이 한가득한 얼굴로 내내 곁을 지켰다. 뿐만 아니라 의사와 집사에게 지시를 내리고 똑 부러지게 행동했다. 너무나 생경한 모습에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어디까지 하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설마 이것까지 할까 하는 것도 그녀는 기꺼이 행동하고 있었다. 자신의 미간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울던 그녀가 뇌리에 박혔다. ‘날 위해 울어주는 건가.’ 갑자기 왜? 무엇 때문에? 이것도 내 관심을 끌려는 수작일까? 의문이 읾과 동시에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일찍이 사고로 혼자가 되었기에 부모의 정은 모르고 컸다. 주변은 자신을 어떻게 하면 잡아먹을까, 어떻게 하면 이용해서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키울까 노리는 승냥이들로 득실했다. 그런 놈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공작가를 이끌어야 했다. 감정적인 모든 것들은 배제했고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면 무조건 참지 않고 치워버렸다. 그래야 살 수 있었기에 그런 방법으로 그들에게서 자신을 지켰다. 결혼은 누구와 해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위치를 더욱더 확고히 하고 가문을 번성할 기회로 프리드 후작가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저 정략결혼의 일환으로 공작 부인이라는 칭호만 줬을 뿐 릴리안 프리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 또한 그렇게 행동했기에 그는 그녀를 자신의 선 밖에 내놓았다. 그런데 그런 릴리안이 변했다. 무엇이 그녀를 변하게 한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그녀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픈 자신을 위해 울어 주고, 춥다는 자신에게 체온을 나눠주는 그녀를 보면서 감정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상냥한 투로 아프지 말라는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클라우스의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 내 것이라고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갑자기 선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클라우스는 그때 생각했다. ‘내가 가져도 되는 것인가.’ 끓어오르는 열로 머릿속이 눅진했지만 릴리안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지켜보고 또 지켜봤다. 자신의 것인지, 그녀를 믿어도 되는지 말이다. 그리고 결국 그는 확답을 내렸다. 해독제를 먹고 몸이 씻은 듯이 나은 날, 릴리안은 병간호가 꽤나 힘들었던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잠든 와중에도 어딘가 불편한 걸까,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똑같이 그녀의 미간을 살며시 만져 주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릴리안의 얼굴이 평온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게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누군가를 사랑스럽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다분히 충동적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클라우스는 그 밤, 그녀의 자는 모습을 오랫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클라우스는 릴리안을 더 이상 혐오스러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그녀가 뭘 하는지 궁금했고 그녀에게 시선이 계속 머물렀다. 그래서 황제가 온 날, 그녀의 시선과 표정이 황제에게 가 있는 걸 보고 불안감과 분노로 감정이 일렁였다. ‘왜 황제를 보고 웃어 주는 거야.’ 당신은 내 것이니까 누구에게도 눈을 돌리지 마. 다른 남자는 보지 마. 관심 갖지 마. 그녀를 잡아둬야 한다. 나에게만 오롯이 집중하도록, 다시는 떠나지 못하도록 잡아둬야 해. 클라우스는 그 방법으로 부부의 합방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과의 잠자리를 좋아했다. 다른 남자를 그렇게 만나도 의무를 운운하며 합방일을 거의 잊지 않고 찾아와서 요구할 정도였다. 그래서 분명 그녀도 좋아할 거라 생각하며 똑같이 일렀는데, 그게 역효과를 가져올 줄 전혀 몰랐다. 릴리안이 도망치는 건 그의 예상 밖이었다. 그녀가 프리드 후작가로 도망친 걸 알고 찾아갔을 때, 릴리안은 자신이 왔다는 걸 분명 알았음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쌍둥이 동생인 데미안 프리드가 어떤 인간인지는 알고 있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프리드가의 후계자. 누이에게 연심을 품은 뿌리 모를 짐승. 결혼 전부터 프리드가의 더러운 소문은 익히 알았으나 이제는 절대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을 왔다. 그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데미안 프리드는 만만치 않았다. 릴리안을 숨기고 전혀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그녀 스스로 후작가를 걸어 나오게 해야 했다. 공작가로 돌아오자마자 도망치게 도와준 시녀와 마부를 노예 시장에 팔아버렸다. 그리고 가문의 기사들을 모두 불러서 그들과 밤낮없이 대련에 몰두했다. 몸에 상처를 내고 치료하지 않았다. 몸이 아픈 것보다 배신당한 마음의 상처가 더 컸다. 그 모든 것들을 사용인들을 통해 일부러 소문을 내라 명했다. 그녀의 귀에 들어가도록, 그래서 그녀가 돌아오도록.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생각보다 꽤 늦었지만 그녀가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그녀는 태도가 싸늘하고 차가웠다. 마음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를 잡을 방법은 이제 오직 제 몸뚱이밖에 없다. 그 방법이 정답이었는지 키스를 하자 그녀의 몸이 반응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격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른 이 앞에서 자신을 감싸줬다. 위치상 언제나 자신을 음해하고 시기하는 세력들은 많았다. 그렇기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무시로 일관했다. 다니엘 르웨인과 시녀에 관한 일도 연장선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릴리안을 납치하려고 했던 것에 더한 분노를 했을 뿐이지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릴리안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시녀에게 정당하지 못했다고, 그건 자신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두둔해줬다. 또다시 희망이 싹텄다. 하지만 그것도 금세 짓밟혔다. 황제와의 만찬에서 그녀가 이혼이란 단어를 꺼냈을 때였다. 왜 이렇게 황제와 엮이면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것인지, 불안감이 증폭되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릴리안이 황제를 바라보는 모습은 너무나 따스했다. 황제는 어두컴컴하고 음습한 자신과 달리 밝고 빛나는 인간이었다. 릴리안이 그 빛에 마음을 빼앗길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자신과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태도가 변했다는 것을. 이혼을 하려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별 감정 없이 자신을 대한 것이었다. 자신을 그저 다른 이들과 같은 선상에 두었을 뿐, 전혀 가까워지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이혼해 달라고?’ 어림도 없지. 마음이 온통 그녀에게 가 있는데, 처음으로 그런 감정을 느꼈는데 이런 걸 또다시 느끼게 될까? 릴리안은 묘하게 확신에 찬 어투로 그의 신경을 자극했지만 클라우스는 그걸 그녀가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믿음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가 믿든 안 믿든, 어차피 그녀는 루이덴 공작 부인이고 자신의 아내니까.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그녀를 이곳에 묶어두면 되는 것이다. 클라우스는 자신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고, 그녀를 제게 가둘 방법으로 역시나 단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