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유금지. 교환금지. 개인소장 부탁드립니다 ‡ 시누이에게는 복수하지 마세요 1 1부 드디어 그날이 왔다. 서둘러 방문을 닫은 여인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비틀거렸다. 눈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를 급히 감싸 안고 토닥였다. 한 팔로 감싸도 품에 폭 들어올 정도로 가녀린 어깨가 가늘게 떨리자 죄책감이 들었지만 내 입은 충실하게 준비한 대사를 읊었다. “멜리장드, 충격이 클 거예요. 나도 미처 오라버니가 그럴 줄은….” 사실 다 알고 있었지만 그건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이다. 어쨌든 자연스러웠어. 2년 전, 나를 둘러싼 세계가 소설 속임을 알게 된 이후 수천 번 이 상황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 온 보람이 있다. 이게 어떤 상황이냐고? 음, 남편의 불륜을 목격한 가련한 여자 주인공. 그것도 그냥 불륜도 아닌, 남편이 가장 친한 동성 친구와 정사를 벌이는 장면을 막 목격하고 나온 참. 그리고 나는 그 옆에서 충격받은 그녀를 위로해 주는 맘씨 고운 시누이랄까. 이제 셀 수 없이 연습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낼 타이밍이다. “멜리장드, 만약 이혼을 원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도울게요. 앙투안은 내 오라버니지만… 나는 멜리장드가 더 소중한걸요.” 멜리장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의아한 듯 푸른 눈을 번쩍 뜨고. 예상과는 달리, 하늘을 닮은 그 눈망울에는 눈물 한 점 맺혀있지 않았다. “이혼이라니요? 무슨 소리예요?” 우는 게 아니었나? 예상보다 멀쩡한 멜리장드의 모습에 머릿속 시나리오가 박살 났고, 나는 버벅댔다. 분명 이 상황은, 남편에게 구박당하던 아내가 사실 남편이 동성애자였으며 자신은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한 위장 결혼에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생각만 해도 멘탈이 바스러지는 장면인데? 원작의 멜리장드는 배신감과 슬픔에 젖어서 투신까지 시도했단 말이다. 원래 계획은 슬퍼하는 멜리장드를 진정시키고 남주에게 데려다주는 거였다. 그리고 잘못한 것은 앙투안 놈뿐이고 우리 레비제트 후작가에는 죄가 없다는 것을 최대한 멜리장드에게 어필하는 게 내 작전이었는데. 머릿속에 사이렌이 윙윙 울리기 시작했다. 이건 바로 전생 35년, 현생 21년, 도합 56년간 쌓아 올린 빅 데이터가 보내는 엿 됐음의 시그널이다. 그래, 뭔가가 어긋나고 있다. 머릿속에 울리는 경보음을 애써 무시하며 멜리장드와의 대화를 이었다. “어…. 방금 앙투안이 뭘 하고 있는지 보지 않았나요?” 멜리장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 당연히 봤지요. 땀 냄새가 어찌나 지독하던지! 미안해요, 하지만 알릭스의 향기가 아니었으면 헛구역질할 뻔했어요.” 그럼 어깨가 들썩이던 건 우는 게 아니라 헛구역질을 참는 거였어…? 내 멘탈에 쩌저적 금이 가기 시작했으나 멜리장드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알릭스, 그것보다 이혼이라니요! 알릭스는 내가 남이 되면 좋겠어요?” 은발에 호소력 짙은 큰 푸른 눈을 가진 미인이 간절하게 나를 쳐다본다. 와, 미모 진짜 효과적으로 쓴다. 여기서 수긍하면 천하의 둘도 없을 개자식으로 판명 날 것 같다. 치밀어 오르는 죄책감에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아, 아니, 그건 아닌데요….” “난 알릭스와 계속 자매처럼 지내고 싶어요.” “네…. 하지만 멜리장드가 이혼해도 우리 관계는 변치 않을 텐데….” 멜리장드가 단호하게 말을 가로막았다. “신성한 서약과 증인들 아래 가족으로 얽힌 관계는 아니게 되잖아요.” 아니, 틀린 말은 아닌데, 그건 주로 부부 관계에나 쓰는 표현이지 시누이한테 쓸 말은 아닙니다만? 의외의 고집에 식은땀이 흘렀다. 무엇인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잔뜩 당황한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멜리장드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원래 귀족 간의 결혼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상대가 칼렙 경이라는 것은 조금 충격적이긴 하지만, 외도 상대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그 차가운 태도를 보고서도 남편이라는 이유로 사랑을 기대하는 여자가 어디에 있겠어요. 어깨를 으쓱하는 멜리장드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설 원작에서의 당신은 남편의 박대에도 불구하고 이혼할 때까지 미련을 놓지 못하는 가련하고 순해 빠진 바보였다고 어떻게 말을 하겠는가? 아연한 내게 멜리장드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빈껍데기면 어때요? 레비제트 후작 부인은 나예요. 그리고, 나는 알릭스와 레비제트를 놓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로, 이혼 같은 소리는 하지 말아요.” * * *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충격을 받으면 눈앞에서 별이 번쩍하면서 깨달음이 머리를 강타하는 경우가 있다. 크게는 머리에 사과를 맞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알아채는 것부터, 사소하게는 서랍장에 발가락 끝을 찧고 나서 갑자기 잊고 있었던 약속을 떠올리는 것까지. 그러면, 내게 일어난 일도 그렇게 해석해야 하는 건가. 한숨이 나왔다. 마음이 급해서 복도를 급하게 걷다가 반질반질하게 닦인 계단에서 미끄러진 게 화근이었다. 하녀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나를 부축해 세웠다. 계단을 청소한 아이를 찾아 문책하네, 어쩌네 하는 종알거림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잠시 정신이 번쩍했을 뿐 천운으로 몸에는 아무 부상이 없었으나, 진짜 문제는 따로 생겼다는 것을. 어처구니없게도, 그 순간에 전생이 기억나 버린 것이다. 전생의 나는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러다가 결혼과 동시에 개룡남인 남편의 강권으로 직장을 관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사표를 내는 그 순간까지도 몰랐다. 그게 헬게이트로의 입성일 줄은. 경력이 단절되는 그 순간 시월드의 손아귀가 무서울 정도로 나를 덮쳐 왔다. 이제 일도 안 하니까 시댁에 좀 자주 와라- 는 시어머니의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을 때 도망쳤어야 했다. 정신을 차리니 나는 매주 가는 시댁에서 시누이의 셔틀이요, 시어머니의 종년이 되어 있었다. 밥만 차리게 하고 집안일만 시킨 것이면 억울하지도 않을 것이다. 시누이라는 인간은 연락도 안 하고 신혼집에 쳐들어오는 것은 예사요, 매번 냉장고를 뒤져 보고 먹을 만한 건 조카 먹인답시고 싹 털어 갔다. 그리고 어쩌다 인스턴트라도 발견한 날에는 시어머니한테 쪼르르 달려가 귀한 아들이 인스턴트나 먹고 산다고 일러바쳤다. 그런 날에는 시어머니의 잔소리 폭격에 하루 종일 시달려야 했다. 그뿐인가, 애 낳으라고 면박 주는 건 예사요, 잊을 만하면 종교 강요에, 용돈 줘라, 보험 가입해 줘라, 여행 보내 줘라 등등 타령이 메들리로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내 욕은 어찌나 동네방네하고 다니셨는지, 나는 어느 순간 온 동네에서 집에서 놀면서 불쌍한 아들 등골 쪽쪽 빼먹는 밥벌레가 되어 있었다. 남편? 그냥 남의 편이더라. 우리 불쌍한 엄마 살날도 얼마 안 남으셨는데 조금만 봐 드리자는 둥, 젊은 당신이 조금만 이해해 달라는 둥, 별별 개소리를 주절거리던 그 면상에 이혼 서류 집어 던지기 전에 죽은 것이 천추의 한이다. 죽은 계기도 어이없는 게, 얼굴도 못 본 시아버지 제사상 차리러 운전해서 가던 길에 교통사고가 났다. 남의 집 귀신 밥 차려주러 가다가 내가 귀신이 되어버린 꼴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다. 하여간 각박했던 내 전생에서 은밀한 위안거리는 핸드폰으로 소소하게 결제해서 보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들이었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소설은 <멜리장드의 대공님>. 신분만 간신히 귀족일 뿐, 찢어지게 가난한 가문의 막내딸이었던 멜리장드는 기적적으로 세력가인 레비제트 후작을 만나서 결혼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신데렐라 스토리지만, 현실은 달랐다. 신데렐라도 왕자가 마차에서 내리라고 하면 유리 하이힐로 돌바닥을 뛰어야 하는 법이다. 하물며 여기는 그야말로 굴러굴러 구름판.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한미한 집안 출신인 멜리장드를 미워해서 엄청나게 구박하고, 남편인 앙투안은 그녀를 첫날밤부터 소박 놓는다. 아무도 보호해 주지 않는 가운데 외로운 시집살이를 견디던 중 설상가상으로 사실 남편이 게이였고, 그 사실을 위장하기 위해 자신을 전시용 부인으로 들인 것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고구마 중의 고구마겠지만 소설의 묘미는 이후에 이어지는 사이다에 있다. 어느 날 전쟁을 마치고 남주가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로판 공식 남주, 전쟁 영웅 북부대공님! 그리고 알고 보니 그 북부대공님은 멜리장드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소꿉친구였다. 다시 만난 북부대공님의 도움으로 멜리장드는 이혼을 얻어 낸다. 그 후, 귀족 여성들을 혐오하지만 결혼은 해야 했던 남주와 (꽤나 클리셰 아닌가?) 계약 결혼을 한다. 그리고 짠- 대공비가 된 뒤 자기를 박대했던 시월드를 차근차근 조져준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계약직 남편과 진실한 사랑에 빠지는 건 덤이고. 멜리장드만큼 속 시원한 복수극은 못 벌이겠지만, 언젠가 시어머니의 무덤에 침을 뱉어 주리라 다짐하며 나름의 대리만족으로 열심히 캐시를 지른 소설이 바로 <멜리장드의 대공님>이었다. 아, 왜 이 이야기를 구구절절하냐고? 자,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아무래도 지금 전생을 기억해 낸 내 정체는, 전생에 본 <멜리장드의 대공님> 속에서 철저하게 파멸하는 악역 시누이 같다. 알릭스 어멘가드 엘레오노르 레비제트. 황제 부처의 대녀, 대부호인 티레 백작의 외손녀, 레비제트 후작의 누이. 작고한 선대 후작의 유일한 적녀로서, 현재 ‘마드모아젤 레비제트’라는 칭호를 쓸 수 있는 유일한 여인. 어제까지만 해도 익숙한 이름이었건만, 지금은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허리께에서 굽실거리는 짙은 스트로베리 블론드도, 예쁘지만 성깔 있어 보이는 이목구비도, 녹색과 금색이 절묘하게 뒤섞인 눈동자도 다 새삼 낯설었다. <멜리장드의 대공님>, 그러니까 원작에서의 알릭스는 멜리장드를 대놓고 무시하고 왕따시킨다. 무려 레비제트 후작가의 적통인 데다가 황후의 대녀이기도 하니 무서운 것이 없었으리라. 나름 끗발 있는 가문의 정식 후작 부인인 멜리장드가 사교계에서 철저하게 묻힌 가장 큰 이유가 알릭스였으니까. 그리고 멜리장드의 복수가 시작된 후 친정인 레비제트는 물론, 그녀가 시집갔던 명문 백작 가문까지 탈탈 털린다. 파산 위기에 처한 알릭스는 그제야 ‘앗 뜨거!’ 하고 멜리장드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빌지만, 그동안 당한 게 있는 멜리장드가 눈이나 깜짝할까. 말하자면, 원작의 알릭스는 주변 인물들에게는 빅엿을, 독자들에게는 사이다를 주고 장렬하게 퇴장하는 역할이다. 젠장. 물론 전직 며느리로서 나를 괴롭히는 시월드에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백분 이해한다. 하지만 내가 복수 대상이라니, 그건 좀 그렇다. 아니, 많이 그렇다. 조금만 더 일찍 전생의 기억이 돌아왔으면 아예 멜리장드와 앙투안의 가짜 결혼식을 막았을 것이었다. 처음부터 얽힐 일 없이 남남으로 평화롭게 살도록. 하지만 지금 내 기억이 돌아온 시점은 바로 앙투안과 멜리장드가 결혼식을 올리는 날 오전. 저기요, 신님. 혹시 진짜로 계신다면 타이밍 좀 해명해 주시죠? 혹시라도 신관이 들었다면 신성 모독이라며 펄쩍 뛸 말을 중얼거리면서 착잡하게 방을 빙빙 돌았다. 몇 시간 후면 신전에서 서약을 마친 멜리장드와 앙투안이 돌아올 것이고, 곧 저택에서 피로연이 열릴 것이었다. 신랑의 직계 가족으로서 한껏 치장하며 연회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었지만 선뜻 준비를 시작할 수가 없었다. 방문 밖에서 치장 도구들을 든 하녀들이 애타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림에도 불구하고.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오늘을 위해 직접 준비했던 드레스 때문이다. 그래, 드레스. 귀하디귀한 흰 비단을 아낌없이 펑펑 써서 풍성한 드레이프를 잡은 드레스. 함박눈처럼 흰 순백색 옷자락 사이사이에 은사로 레비제트 후작가의 문양인 백합을 수놓았다. 풍성한 치맛자락 끝단마다 알알이 매달아 둔 진주와 수정이 빛을 받아서 반짝거렸다. 혹자가 보면 ‘네가 결혼하냐?’고 물을 것 같다. 그야말로 온 대중의 시선을 다 휘어잡을 미친 존재감을 내뿜고 있달까. 네 이름을 ‘개오바 드레스’로 명명한다. 전통적으로 제국에서 결혼할 때 입는 웨딩 가운은 주로 결혼 전에 시어머니가 선물한 천으로 만든다. 그러나 멜리장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전 레비제트 후작 부인, 즉 내 어머니가 좋은 천을 줄 리가 없었다. 대충 구색만 맞출 정도의 평범한 누리끼리한 흰 천, 그것도 딱 한 벌이 간신히 나올까 말까 한 양을 던지듯 내준 것이다. 친정이 좀 더 부유하다면 알아서 비싸고 귀한 천을 사서 덧대겠지만, 예물도 못 가져온 멜리장드가 한 번 입을 웨딩드레스에 그런 거액을 투자할 수 있을 리가. 그리고 여기서부터 ‘나’, 알릭스의 병크짓이 시작된다. 후작가의 재력에 걸맞지 않는 소박한 웨딩 가운을 입은 멜리장드의 옆에서 순백색 화려한 옷을 과시하는 것이다. [결혼식 날에 시댁 식구가 반짝이 달린 하얀 드레스를 입고 왔어요.] X이트판에 쓰면 하루 만에 베스트 글 올라갈 사연이다. 내가 그 글 읽는 톡커였으면 뒷목 잡았다. 웨딩 카페만 들어가 봐도 비슷한 경험을 한, 한 번뿐인 결혼식 날 엿을 먹은 신부들의 울분에 찬 후기가 가끔 올라오곤 했다. 세상에 그런 무개념 막장 시댁이 있다니- 했는데, 바로 저였습니다, 짠. 이걸 그대로 입고 나간다면 소설 속 막장 시누이의 행보를 그대로 밟는 거다. 그리고 장렬하게 대공에 의해 가루가 되겠지. 레비제트 후작가는 풍비박산이 날 거고. 벌써부터 골이 지끈거린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게 둘 수는 없다. 그래, 까짓거, 내가 미래를 다 보고 왔다고 치고 바꾸면 되는 거 아닐까? 작정하고 사기 결혼을 한 앙투안 놈은 구제가 불가능하다 쳐도, 나까지 묶여서 줄줄이 소시지 꼴로 망하는 것만은 면할 수 있도록. 멜리장드가 대공을 만날 때까지 열심히 꼬셔서 내 편으로 만들어 보는 거다. 그런 결심을 하고는 기합의 손뼉을 짝 쳤다. 좋아, 해 보는 거야! 그러다 문을 열고 쏟아져 들어오는 하녀들을 맞으면서 생각했다. 아, 근데 이 개오바 드레스, 어떻게 하지? * * * 먼발치로 신전에서 서약을 마치고 돌아온 멜리장드가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귀족가의 결혼식이었다면 새로운 안주인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온 가족, 그리고 집사에서 말단 마구간지기까지 모든 사용인이 일렬로 서서 그녀를 맞아들였겠지. 하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가주의 새 아내를 맞이한 사람은 무표정한 하녀장과 하인 두엇뿐. 그저 단순한 심술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기저에 깔린 어머니의 의도를 읽어냈다. 결혼은 어쩔 수 없지만, 집안을 총괄하는 안주인의 권위는 절대 네게 내주지 않을 것이다. 순진한 멜리장드는 여기서부터 기싸움이 시작된 것을 느낄 턱이 없으리라. 앙투안은 알아챘을 수도 있겠지만, 그가 사랑하지도 않는 신부를 위해 어머니와 맞설 턱이 있나. 그의 모든 신경은 저기 들러리로 서 있는 제 남자 애인에게 쏠려 있을 것이다. 뭐, 어쨌든 보는 눈이 적으니 내게는 더 잘된 일이다. 저택 대문까지 의례적인 에스코트를 마친 앙투안이 멜리장드를 하녀장에게 넘기고 돌아섰다. 보통은 자신이 먼저 가서 피로연장을 지키고 있을 테니 매무새를 점검하고 천천히 오라는 배려로 생각하겠지만 왠지 짐짝을 넘기는 것처럼 보인다. 말없이 그녀를 안내하는 하녀장을 잠자코 지켜보다, 보는 눈이 없을 때를 노려 나섰다. “레비제트 후작 부인이 된 것을 환영해요, 멜리장드.” 예기치 못한 마주침인지, 하녀장이 굳었다. 하긴 소설 내용대로라면 이 몸은 진작에 개오바 드레스를 걸치고 주인공인 척 피로연장을 누비면서 착실히 업보를 적립하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 진상 짓하는 시누이는 없다. 나는 이제 날개 없는 천사로 거듭났다. 봐,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심플한 감색 드레스. 절대 신부보다 튀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 느껴지지 않아? 최대한 상냥하게 웃으며 멜리장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 반가워요, 마드모아젤 레비제트.” 멜리장드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손을 맞잡는데 순간 할 말을 잊을 뻔했다. 그야말로 파괴적인 얼굴이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은발은 달빛처럼 반짝거리고 청순한 푸른 눈은 호수 같다. 장식 없이 밋밋하고 초라한 흰 드레스마저도 여신의 옷처럼 기품 있어 보이게 만들어 주는 미모랄까. 그야말로 옷이 사람 발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언니! 나를 가져요! 예쁘면 다 언니예요! 마음속으로 백만 주접을 떨다가 정신을 차리고 멜리장드에게 웃어 보였다. “이제 가족이니 알릭스라고 불러 주세요.” 알릭스. 수줍게 중얼거리는 멜리장드를 보고 마음이 찡했다. 왜 이렇게 예쁘고 착한 언니가 남자 잘못 만나서 원작에서 개고생을 할까. 하긴, 돈 없고 예쁜 여자만큼 팔자 사나운 건 없다. 앙투안이 멜리장드를 고른 이유에도, 예쁘니까 첫눈에 반했다고 해도 모두 납득할 거고, 집안도 한미하니까 박대해도 아무 말 못 할 거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으니까. 약한 죄책감을 느끼며 멜리장드에게 다가갔다. “피로연 치장은 내가 도와줄게요.” “송구하오나 아가씨, 후작 부인의 치장을 위한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녀장이 끼어들었다. 상당히 올곧은 성정인 그녀는 내가 개오바 드레스를 준비하는 모습부터 멜리장드에게 심술을 부릴 계획을 짜 둔 것까지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제안이 새로운 골탕 작전인지 우려하는 듯했다. 뭐, 못 믿는 것도 당연하지. 다 내 업보니까. 살짝 입맛이 씁쓸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하녀장, 이건 내 새언니를 위한 선물이야. 설마 내 선물이 그에 뒤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만, 후작 부인을 위해 후작께서 미리 준비하신 방이 있다는 것을 알아 두시라는 겁니다.” 앙투안이 준비하기는 무슨. 어머니가 지시하고, 하녀들이 딱 기본 중의 기본만 갖다 놓은 휑한 방일 것이다. 그녀를 돋보이게 할 장신구도, 지친 심신을 달래 줄 향낭이나 간단한 요깃거리도 없는 곳. 하지만 하녀장이 저렇게 나온 이상 내가 막무가내로 고집부리기 애매한 것도 맞다. 그렇다면. “멜리장드가 하고 싶은 대로 하죠.”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뭐, 본인이 알아서 정해야지. 내가 마련한 치장거리들은 물론 멜리장드를 훨씬 돋보이게 만들어 주겠지만, 기본만 해도 꿀릴 외모는 아니니까. 그냥 내가 관종 짓만 하지 않으면 어련히 빛날 미모였다. 그러니까 본인이 결정하는 게 맞겠지. 하녀장이 미간을 좁혔지만, 그녀는 더 토 달지 않았다. 남편이냐 시누이냐. 잠시 눈치를 보던 멜리장드가 이윽고 결심한 듯,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았다. “그럼…. 알릭스, 부탁할게요.” 좋았어. 자신감 있게 활짝 웃으며 멜리장드를 보자 그녀도 배시시 웃어 주었다. 아, 순간적으로 심장을 강타한 그 웃음은 어딘가 익숙했다. 이건 마치…. 바로 전생에, 지금은 볼 수 없는 내 최애를 처음 영접한 순간. 맥주 까면서 아무 생각 없이 보던 오디션 프로그램 속 그 연습생이 방긋 웃었던 그 순간. 초속 200km의 속도로 심장에 내리꽂혀서 좌심실을 무단 점거하고 약 10년가량을 나가지 않았던 내 최애의 미소를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이다. 미친! 언니, 내 통장에 빨대 꽂아도 좋아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절대, 후회 안 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불타오르는 투지가 느껴졌는지 하녀장이 흠칫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당장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만 하니까! * * * 미쳤다. 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옆에서 자기 일생에서 다시 볼 일 없는 역작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처음에 그녀를 내 방으로 데리고 와서 꾸미라는 명을 들은 전속 하녀들은 당황했으나 이내 착실히 명령을 수행했다. 나중에는 아주 투지를 불태운 것 같다. 하긴, 누가 봐도 꾸밀 맛이 나는 외모다. 직업 만족도 최상을 보장하는 본판이랄까. 내게는 처치 곤란 개오바 드레스가 멜리장드에게 가서 꽃이 되었다. 물론 가냘픈 멜리장드는 나보다 체구가 한 뼘 정도 더 작은 편이었기에 드레스가 조금 크긴 했다. 따라서 손이 빠른 하녀 몇몇이 달라붙어서 즉석 수선할 필요는 있었지만, 이를 감안하고 봐도 장난 아니었다. 맬리장드의 체형이 나와 비슷한 것 같아서 내 사이즈에 맞춰 준비했는데 맞아서 다행이네요- 라는 식으로 양념을 좀 치긴 했다. 진실을 아는 몇몇 하녀들이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봤지만 당당하게 굴기로 했다. 뭐.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멜리장드의 감명받은 듯한 눈빛에는 조금 양심이 찔렸지만. 순백색 드레스를 입은 멜리장드는 말 그대로 천사 같았다. 백합 자수와 반짝이는 보석들이 달빛을 닮은 은발에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같은 무게의 황금을 주고 구입한 최고급 화장품들이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을 덧그렸다. 누가 봐도 그녀는 오늘의 주인공이었다. 멜리장드를 이끌고 피로연이 열리는 연회장으로 들어섰을 때, 과장 없이 수십 명이 입을 떡 벌리는 것을 봤다. 심지어 그 앙투안마저도 충격받은 기색이었다. 신데렐라를 변신시킨 요정 대모의 기분이 이랬을까? 전 세계여, 주목하라. 이게 내 작품이노라. “세상에, 새 후작 부인을 좀 봐요.” “과장인 줄 알았는데, 미인이긴 하군요. 하긴, 그러니 저 후작 각하를 단번에….” “하지만 그 미모에 내실이 없으면 과연 얼마나 갈까요? 우리 주님께서도 고운 것은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은 헛되다고 잠언에서 말씀하셨는걸요.” 잡배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렸다. 슥 돌아보니 몇몇은 아는 얼굴이었다. 방계나 가신 중에서 딸을 앙투안과 결혼시켜 레비제트 본가 가계도에 이름자 좀 올려보려고 용을 쓰던 몇몇 이들. 질시 섞인 악의를 뿜어내던 그들이 시선을 느꼈는지 문득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머, 마드모아젤 레비제트 아니신가요?” “세상에, 이게 얼마 만입니까. 황도에서 잘 오시지를 않으시니, 영지에서는 뵐 일이 없군요. 제 여식이 마드모아젤을 그리워했답니다.” “아, 마드모아젤 레비제트. 저희가 조만간에 만찬을 열 계획인데, 참여해 주신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만.” 쯧, 꿀 발린 쪽으로 몰려드는 파리떼가 따로 없다. 한쪽 입매를 비틀어 웃으며 부채를 탁 손바닥에 부딪혀 접었다. “확실히 간만이긴 하군요. 그나저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들 계신 것 같던데.”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꼈는지 몇몇이 머뭇거렸다. 그러나 언제나 일정 규모의 무리에는 눈치 없는 놈이 있기 마련이다. 개중 ‘눈치 없는 놈’을 맡고 있는 방계 한 명이 용감하게 나섰다. “새 후작 부인과의 결혼이 조금 성급한 게 아닌가 싶어서 염려하던 참입니다.” 동의를 구하듯 은근한 말투와 눈짓으로 내게 다가온 그가 파리처럼 손을 싹싹 비볐다. “레비제트에 속한 몸으로, 제대로 자격이 검증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여인이 어찌 무거운 안주인의 책무를 감당할 수 있을는지 잘 모르겠군요. 새 후작 부인의 수준이….” 와다다, 신부에 대한 불만을 토해 놓으려 하는 남자의 말문을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런가요, 그런데 그대가 누구였더라…. 가일로 남작이었던가.” “…가린 자작입니다, 마드모아젤.” “아, 가린 자작!” 과장되게 손뼉을 딱 쳤다. “그래요, 자작. 그대가 가진 자작위가 아마, 7대조 위 선조가 사생아를 낳고 받은 작위이던가?” 남자가 움찔했다.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미 마드모아젤 레비제트가 이 결혼을 길길이 반대했다는 소문이 쫙 퍼졌던 차였으니 신부의 험담을 좀 해서 비위를 맞춰 볼 심산이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제의 나와는 다르다는 말씀. “대답해 보세요. 그대의 그 위치가 감히, 이 레비제트의 가주인 후작의 판단의 옳고 그름을 평가할 수 있는 위치인지.” 부러 더 싸늘한 얼굴로 내뱉자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거기에 대고 쐐기를 박았다. “그 알량한 문장에 레비제트의 백합화를 다는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그대가 진정 후작가의 일원이라도 된 것이라 착각한 것은 아닌가요? 곁가지 주제에 어찌 가타부타 본가의 일에 참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궁금하네요.” 붉어진 얼굴에 번져 나가는 모멸감을 감상하며 잔을 받아들어 한 모금 마셨다. 가린 자작이 황급히 자리를 피하자 눈치를 보던 그의 식솔들이 썰물처럼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조용해진 분위기를 만끽했다. 그래 봤자 궁정에도 들지 못하는 어중이떠중이들 주제에, 어디서 새 후작 부인을 끌어내리려고.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고, 앙투안이 멜리장드를 댄스 플로어로 이끌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 나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색이 진한 적금발이 멜리장드의 반짝이는 은발과 어우러졌다. 연회장의 아름다운 꽃장식 아래서 춤추는 신랑, 신부는 그 속사정이 어떻든 천상의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 그래, 그걸 보며 살짝은 기대했던 것 같다. 이 일로 멜리장드와 앙투안 사이에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게 된다면, 멜리장드가 마음 아파할 일도, 가문이 망할 일도 없지 않을까? 그 순간, 나름 좋았던 기분을 단번에 박살 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릭스, 레비제트 후작가의 영지에서 뵙는 것은 오랜만입니다. 거의 일 년 만인가요?” “…칼렙.”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서글서글한 인상의 호남이 싱긋 웃고 있었다. 칼렙 줄라드 남작. 앙투안의 소꿉친구이자 이 결혼식의 들러리. 그리고… 앙투안의 숨겨진 애인. 아, 강아지 같은 순한 인상에 속아서 그를 그저 시대가 금지하는 사랑에 빠진 비운의 연인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냥 애틋한 사랑이기만 하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나. 칼렙 줄라드는 앙투안을 향한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지 않게, 한미한 가문의 멜리장드를 아내로 맞아들이도록 종용한 소설 최종보스급 악역이다. 그 와중에 질투는 또 엄청나서, 자기가 후작 부인으로 추천해 놓고서도 멜리장드를 굉장히 증오한다. 그 이유는 그저 그녀가 합법적으로 앙투안의 옆에 설 수 있는 자격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앙투안이 멜리장드에게 일말의 관심이라도 보일라치면 패악을 부려서라도 관심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은 기본이며, 사교계에 멜리장드에 대한 더러운 소문을 흘리기도 한다. 심지어 그 와중에 어린 시절부터 후작가를 왕래한 소꿉친구라는 신분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멜리장드의 혹독한 시집살이를 조장해 온 흑막이기도 하다. 막판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대공비가 된 멜리장드를 해치려 하다가 분노한 대공에게 한 방에 리타이어 당하긴 하지만. 전생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마냥 반가웠을 것이다. 실제로 그를 상냥한 오빠 친구라고만 생각했던 나는 칼렙을 꽤 좋아하던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냥 떨떠름하다. 이놈이 만악의 근원이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 아니, 그것보다 멜리장드의, 저 살짝 건드리면 툭 부러질까 무서운 가냘픈 자태를 보고도 괴롭힐 생각이 들었나 싶다. 잔인한 놈.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렙이 살갑게 말을 걸었다. “시간이 날 때 레비제트 영지에 들를 생각이었는데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더군요.” “그런가요.” “네, 이 저택에서 알릭스를 보니 새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보이네요.” 하긴, 레비제트 본가 저택에서 그를 만나는 건 오랜만이다. 어린 시절에는 여름마다 영지로 그를 초대해서 함께 지냈지만, 우리가 나이가 들어 황도에서 지내게 되었을 때부터는 딱히 영지까지 내려올 일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알릭스. 오늘을 위해 따로 준비한 옷이 있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아, 이것 때문에 온 거였군. 준비했던 흰 드레스는 왜 쟤가 입고 너는 수수한 옷이나 걸치고 있느냐는 거다. 개오바 드레스, 생각해 보면 그 태초에는 칼렙의 부추김이 있었다. 격에 맞지 않는 혼사라고 짜증을 부리던 나에게 드레스라도 예쁘게 입고 오라고 칼렙이 슬쩍 바람을 넣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흰 드레스 이야기를 지나가듯이 흘렸고, 덥석 미끼를 문 나는 룰루랄라 개오바 드레스를 주문했지. 모두 이 새끼의 큰 그림이었구나. 같이 신나서 진상짓 벌인 입장에서 할 말은 없다만. 머릿속에서 재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태연스레 말을 받아쳤다. “아, 꽤 예쁘지 않나요? 이 감색 공단은 남국에서 올라왔답니다. 황녀 전하의 재봉사가 재단해 준 옷이죠.” 칼렙이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물론 그가 말한 드레스는 지금은 멜리장드의 피로연 드레스가 되어 버린 개오바 드레스겠지만, 여기서 그걸 내색했다가 내가 네 진상 짓을 사주했다 내지는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칼렙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여전히 프리드웬(레비제트 후작가의 저택의 이름)은 아름답군요. 피로연이 끝나면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입니다.” 얼른 꺼져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해사하게 웃으며 답변했다. “수도로 가기 전에 한 번 더 들러 주세요. 오라버니가 매우 좋아하겠네요.” “네, 조만간 초대를 주시면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빈말이었어. 초대 안 할 거야. 꺼져. 속마음과는 달리 사교성 대화에 익숙한 입은 충실하게 립서비스를 뱉었다. “아, 그래요. 새언니도 들어왔으니 영지에서 한번 연회를 여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새언니라는 말에 미미하게 칼렙의 이마가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살짝 통쾌했다. 그래, 아무리 네가 날고 기어도 적법한 후작 부인은 따로 있단다. 아무리 그가 갖은 계략으로 괴롭힌들, 이혼 전까지 이곳의 안주인이자 귀족 연감의 앙투안 바로 옆자리에 이름이 새겨질 사람은 멜리장드였다. 물론 순식간에 표정을 갈무리한 칼렙이 수도 상황은 어떻고 하는 식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건수를 잡은 나는 계속 새로운 신혼부부가 너무 아름답다는 둥, 두 사람의 미모를 물려받을 후계가 기대된다는 둥, 현숙해 보이는 새 자매가 생겨서 기쁘다는 둥 칼렙의 복장을 긁을 말만 일부러 쏙쏙 골라서 해댔다. 결국 칼렙은 이를 악문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피했고 나는 배부르게 웃었다. 어디서 참기름 짜나, 참 꼬시다! * * * 내가 피로연 초반에 조금이라도 앙투안의 심경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지 않았던가? 다 헛된 기대였다. 피로연이 끝난 후 앙투안은 뒤풀이를 핑계로 칼렙과 함께 저택을 빠져나갔고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후작저의 중앙, 대대로 후작가 안주인들이 사용해 왔던 방 주변을 서성였다. 신부의 기쁨을 상징하는 오렌지꽃, 행복한 결혼을 상징하는 모란, 다산을 상징하는 황금 사과로 장식했을 방, 바로 멜리장드와 앙투안의 신방이었다. 신혼부부를 위한 배려로 복도에는 아무도 없이 조용했다. 첫날밤의 설렘으로 가득해야 할 신방마저도. 그 주변은 지독한 침묵으로 잠겨 있었다. 이 제국 문화에서 신혼 첫날밤에 남편과 밤을 보내지 못하는 여자는 상당한 수모를 받게 된다. 칼렙이 일부러 노린 거겠지. 정말이지 치사하다. 그나저나, 이 문을 두드려야 하나. 수십 번 고민했다. 오늘치 좋은 시누이 노릇은 충분히 했다. 그냥 발 닦고 잠이나 자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홀로 외로이 밤을 보내고, 그 외로운 밤의 개수가 쌓이고 쌓이면 멜리장드도 슬슬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이 후작 부인이 된 것은 신분을 뛰어넘은 기적적인 사랑이 아니라 편의에 의한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은 기만이었고, 보호라고 믿었던 것은 방치임을. 그렇게 지독한 외로움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내가 그녀가 외로움을 타는 문제에까지 개입할 필요는 없다. 그건 앙투안의 책임이니까. 복수를 피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냥 진상 짓 안 하고 헤실헤실 웃어 주면서 어쩌다 보석이나 쥐여 주기만 해도 될 것이다. 소설 속에서 선량한 멜리장드는 조금이라도 친절했던 사람에게는 절대 복수의 칼날을 갈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정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문 너머로 발소리가 들렸고, 문이 반가운 듯 벌컥 열렸다. 멜리장드가 활짝 웃으며 나왔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고, 그녀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하긴, 신혼 첫날밤이 깊어지도록 오라는 남편은 안 오고, 대신 시누이가 문을 두들긴 이 상황. 말만 들으면 호러다.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멜리장드.” “…알릭스.” “음…. 밤늦게 미안해요.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나는 머쓱하게 말을 시작했고, 멜리장드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결혼 축하를 받으러 친구들이랑 나갔는데, 이야기가 길어지나 봐요.” 사실, 그냥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에요. 그의 마음을 이미 가져간 연인이요. “아마 내일쯤엔 오지 않을까 싶어요.” 그가 저택으로 돌아온다 해도, 이 신방에는 발걸음조차 않을 거예요. 신랑을 볼 수 없을 신혼 꽃 장식은 시들 거고 황금 사과에는 먼지만 쌓이겠죠. 멜리장드가 애써 웃었다. 웃는 모습이 마치 우는 것 같았다. 불쌍한 사람. 진정한 남주가 나타날 때까지 앞으로 몇 년간 남편의 냉대에 속앓이하고 상처받게 될 그녀에게 다음 말을 뭘 해 줘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수십 개의 수식어와 수백 개의 관용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내 입 밖으로 나온 것은 가장 투박하고 담백한 기원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애써 웃어 주려 노력하던 멜리장드가 비에 젖은 꽃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축 처진 흰 어깨너머로 보이는 달빛에 드러난 침대는 혼자 쓰기에는 너무 넓어 보였다. 전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결혼 후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남편을 따라 연고 없는 지역으로 이사 갔을 때. 재취직은커녕 사나운 시댁 눈치 보느라 문화 센터나 학원 같은 곳도 다니기 어려웠던 나는 말 그대로 외딴섬 신세였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에서 의지할 것은 남편뿐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바빴다. 아침 일찍 나가고 밤늦게야 들어오는 바쁜 사람.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외롭다고 하소연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각자 일을 하고, 자기 꿈을 실현해 나가고, 나름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느라 바쁜 그들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이 목에 턱 걸린 것 같아 점차 연락을 끊었다. 다른 사람들은 시집 잘 가서 일도 안 하고 편하게 사는 내 팔자가 부럽다고 했다. 그래,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끔, 텅 빈 집 주방에 멍하니 앉아 있다 보면, 박봉이더라도 일하고 싶었다. 그냥 돈을 벌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존재를 느끼고 싶었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인 것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사람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랬나. 내가 ‘의자’나 ‘냉장고’처럼 집에 으레 딸려 있는 옵션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왜 그때의 주방과 저 침실이 겹쳐 보이는 걸까? 무의식적으로 멜리장드의 손을 잡았다. 멜리장드는 살짝 놀란 듯했지만,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저는, 멜리장드가 레비제트에서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멜리장드가 큰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뒤로 비치는 달빛이 너무 싸늘하고 외로워 보여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아주 만약에라도 원한다면… 내 방으로 와서 자도 좋아요.” “…뭐라구요?” 아, 이게 아닌데. 무슨 쌍팔년도 아저씨 추행 멘트 같다. 어리둥절한 멜리장드 앞에서 당황한 채로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아, 무슨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요, 혼자서는 외롭잖아요! 아,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구요, 만약 이 방이 너무 넓어서 무섭거나 하다면…? 멜리장드가 유령 같은 걸 무서워할 거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에요.” 주절주절 내뱉는 아무 말에 멜리장드가 풋 웃었고 내 얼굴은 홧홧해졌다. 멜리장드가 이내 심각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음, 알릭스?” 순간 긴장했다. “왜요, 멜리장드?” “…제게 왜 이리 잘해 주시나요?” 어색하게 웃었다. 하긴, 원작 소설 속에서도 멜리장드는 미련할 정도로 착하지만, 마냥 바보는 아니다. 결혼 전부터 자기가 못마땅하다는 티를 팍팍 내던 시누이가 갑자기 결혼식 날부터 돌변했는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리는 없다.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나. 대충 머릿속에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 “…이제 우리는 자매잖아요.” 멜리장드는 신성한 서약과 증인들 아래서 앙투안과 묶였고, 제국의 혼인 서약 조항에는 서로의 가족을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내용이 있으니까요. 둘러대는 내 말이 먹혔는지 멜리장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창백한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도 같았지만, 밤이 어두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전할 말은 다 전했으니 나는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실내복 위에 숄을 걸치고 등불을 든 멜리장드가 조심스럽게 내 침실의 문을 두드린 건,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 * * “언니가 한 명, 오빠가 두 명 있어요. 어머니는 어릴 적에 돌아가셔서 기억이 없고….” 우리는 침실에 누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묘사된 바가 없는 멜리장드의 가족 관계에 대한 이야기에, 외전을 읽는 기분으로 흥미롭게 귀를 기울였다.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잇던 멜리장드가 갑작스레 입을 다물었다. “자야 하는데, 제가 너무 시끄럽게 해서 알릭스를 방해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니에요, 재미있어요. 계속해 주세요.” 멜리장드가 살풋 웃었다. “어린 시절에는 평민이나 소작농의 아이들과도 함께 어울리기도 했죠. 근방에 어울릴 만한 숙녀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제가 영주의 딸인 것을 나중에야 안 부모들이 기겁을 했었어요.” “지금은 왕래를 안 하나요?” “몇몇은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가끔 듣긴 하지만, 소리 없이 사라진 아이들도 있었죠. 유독 친했던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멜리장드가 말끝을 흐렸다. 이유는 알 수 있었다. 영지에서 사라지는 평민, 혹은 소작농들의 말로란 뻔했으니까. 세금에 지쳐 야반도주를 했다거나, 비명횡사했다거나, 아니면 죄를 짓고 추방당했다거나. “…그 애는 나무 막대기를 검처럼 썼어요. 어머니한테 배웠다고 했죠. 나무 막대 하나로 저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물리쳐 줬어요. 공주님을 지키는 호위 기사라도 된 것처럼.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어요. 그 애를 며칠을 기다리다 지쳐서 밥도 안 먹고 서럽게 울었는데.” 큰 푸른 눈동자에 추억이 담겼다. “물론, 그 뒤에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식사를 시작했지만요.” 부러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던 멜리장드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이름도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테오’라고 불렀던 건 기억나네요.” 순간 놀라서 숨을 흡 들이마시자 멜리장드가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래요?” “아, 아무 일도 아니에요.” 대충 둘러대니 멜리장드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더 묻지는 않았다. 그 틈을 타 생각에 잠겼다. ‘꼬마 테오.’ 틀림없이 남자 주인공이다. 남주인 니케리온 대공, 리산데르는 계모의 계략으로 인해 친모와 함께 먼 땅으로 추방당한다. 신변의 위협을 피하고자 원래의 이름도 버리고 외조부의 이름인 ‘테오발드’에서 따온 ‘테오’라는 이름으로 먼 땅을 전전하며 살아가다가 그나마 좀 오래 정착한 곳이 멜리장드의 친정인 보덴 영지였다. 그러다가 후계자가 필요해진 선대 대공에 의해 다시 북부로 돌아가지만 이미 오랜 방랑 생활로 쇠약해진 어머니는 사망한 상태였다. 계모와 같은 귀족 여인들을 싫어하던 니케리온 대공이 유일하게 마음을 연 것은 멜리장드였다. 어린 시절, 그래도 어머니가 살아 있고 안정적으로 정착했던 짧은 한때의 소꿉친구. 그리고 기적적으로 궁정에서 그녀를 마주쳤을 때, 추억에서 싹튼 호의는 연민이 되고, 연민은 연정이 되었으며, 결국 진실한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 하, 서사 장난 없다. 살짝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멜리장드를 바라보았다. 멜리장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아랑곳없이 굳은 결심을 했다. 언니, 걱정 마. 내가 고이고이 꽃길만 걷게 돕다가 남주한테 직송으로 보내 줄게. * * * 고위 귀족이거나 일정 이상의 권력을 지닌 자들은 자신의 영지나 저택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어지간히 소박한 자가 아닌 이상, 한번 힘을 가지면 더 많은 힘을 갈망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니까. 이곳, 라무아 제국의 권력의 정점이자 근원은 황제이고, 황제는 제국의 수도인 파데사에 거주한다. 따라서, 황도에는 단물을 찾아 모여드는 개미처럼 세력가들과 야심가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황제의 거처, 라울리 궁이 있다. 라울리는 단순히 황제 가족의 집이 아니다. 라울리 궁은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을 위한 작고도 거대한 사회다. 과거, 바실리오스 대제는 황제의 부와 위엄을 과시할 수 있는 라울리라는 거대한 궁전을 지었고, 그 안에 황족뿐 아니라 선택받은 귀족들이 거할 수 있도록 했다. 곧 고위 귀족들, 황족의 측근들, 떠오르는 세력가들이 궁정에서 지내게 되었고, 라울리는 금세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화려한 궁정에서 거할 수 있는 영광을 원하는 귀족들이 서로 감시하며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경쟁했다. 그사이에 바실리오스 대제는 스리슬쩍 황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견제해야 할 권력자들을 궁정에 모아놓으니 감시할 수 있는 기능은 덤이었다. 고위 귀족들이 수도에서 지내게 되자 그 세력의 기반이었던 영지에 대한 지배력도 점점 약해졌다. 머지않아 귀족들은 라울리 궁이 자신들의 날개를 꺾었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이미 뿌리 깊게 정착한 궁정 사교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미 그 복잡한 상호 의존 관계에 수많은 사람이 얽혀있었기 때문에. 궁정은 귀족들을 가두는 거대한 새장이었지만, 신분 상승과 권력이라는 먹이는 그 누구도 감히 궁정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새장 안에서 물고 물어뜯기는 작은 정글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는 지금 바로 그 라울리 궁전으로 가는 중이었다. “괜찮아요?” 멜리장드가 핏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을 영지에서 올린 탓에 수도까지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이틀 정도는 귀한 마력석을 박은 마차를 탄 덕에 편하게 왔지만, 남은 이틀은 배를 타고 제국을 가로지르는 시렐르 강을 따라가야 했다. 첫날은 괜찮더니만, 이튿날인 오늘은 선실에서 밤 내내 멀미를 했는지 멜리장드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다. 머리색도 은발인데 혈색까지 쪽 빠지니 색소가 아예 없는 사람 같다. 몇 시간만 더 가면 도착일 테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나저나, 꽤 먼 거리여서 이번에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기 어려울 텐데, 이렇게 빨리 올라가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멜리장드가 힘이 쪽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 새로운 안주인을 맞이했다는 걸 인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새 후작 부인은 적어도 두 달 이상은 영지에 머물면서 대소사를 관리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장기적으로는 좋다. 그러나 결혼식을 올린 뒤 일주일 만에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이 수도로 올라가게 된 상황. 멜리장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대놓고 내던 마담 엘레오노르, 즉 내 어머니가 결혼식이 끝나기 무섭게 황후의 부름을 핑계로 쌩 수도로 올라가 버린 것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앙투안 놈이 어머니를 혼자 보내는 불효를 저지를 수는 없다고 개소리를 하면서 칼렙이랑 세트로 뒤이어 올라가 버렸다. 결혼은 이쪽이랑 했는데 밀월여행은 왜 너희가 떠나냐. 어처구니가 없다. 하여간 낙동강 오리알 될 뻔한 멜리장드를 위해 내가 남기로 했고, 멜리장드는 영지에 대해 아주 기본적인 것만 대충 배운 뒤에 바로 나와 함께 수도로 향하게 된 것이다. 내가 전생의 기억을 자각하지 못했다면 나도 어머니 따라 쪼르르 먼저 가 버렸을 거고, 멜리장드는 혼자 짐짝 취급당하면서 실려 왔을 테지. 우리 식구들, 맘씨 좀 곱게 씁시다! 속으로 부르짖었다. “어쩔 수 없죠. 나중에 다시 내려갈 수 있을 거예요.” 사실 <멜리장드의 대공님> 소설 스토리라인대로 흘러간다면 올 일은 없을 거다. 멜리장드는 어차피 앙투안과 이혼하고 대공비가 될 테니 후작가의 영지에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나. 마음이 영 불편한 듯한 멜리장드를 다독이다 보니 슬슬 파데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석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라무아의 젖줄, 시렐르 강, 그리고 그 위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흰 대리석 성벽. 시인들은 이 도시를 제국의 진주에 빗대곤 했다. 황도에는 처음 와 본 멜리장드가 감탄하는 탄성을 냈지만 나는 긴장으로 허리를 뻣뻣하게 폈다. 나는 이미 이 보석 장신구처럼 아름다운 도시가 칼 없는 전쟁터임을 알고 있었다. 검 대신 악의 섞인 속삭임, 포탄 대신 뇌물이 오가는 화려한 전쟁터. 작은 행동 하나가 순식간에 거대하게 부풀어 목덜미를 무자비하게 물어뜯을 곳. “멜리장드, 정신 바짝 차려요.” 멜리장드가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도 파데사는 그녀가 앞으로 대공을 만나게 될 때까지 3년간 지내게 될 곳이다. 소설에 따르면 그녀가 3년간 여기서 지내면서 흘린 눈물방울은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지. 그녀가 당했던 수모의 대주주였던 내가 이제 변하기로 했으니까 조금은 덜하겠지만 여전히 멜리장드에게 파데사는, 그리고 라울리 궁은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다. “멜리장드, 제가 뭐라고 했죠? 멜리장드는 레비제트 후작 부인이고….” “저를 향한 태도는 곧 레비제트를 향한 태도이니, 가벼운 모욕도 쉬이 넘기지 말라고 했죠. 맞나요?” 오는 길 내내 귀에 못이 박이게 했던 말이니 지겨워 짜증이 날 법도 한데 멜리장드는 착실하게 대답했다. 어유 귀여워. 선생님 따라 하는 유치원생 같다. 흐뭇하게 웃자 멜리장드는 멋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내가 속으로 자신을 귀여워하는지는 꿈에도 모르겠지? 미안, 언니. * * * 날마다 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사교회가 열리는 라울리 궁에는 셀 수 없는 사람들이 드나든다. 그러나 그 안에서 지낼 수 있는 거처를 배정받는 이들은 소수뿐이다. 아무리 빈방이 많다고 해도 방을 내줄 수 있는 권한은 직계 황족에게만 있는데, 그들이 미치지 않은 이상 개나 소나 다 들일까. 그들은 나름의 기준과 정치적, 사교적 상황에 따라서 방을 조금씩 나누어 주었고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타이틀에 대중들은 더욱 열광했다. 라울리 궁 중앙에 가까이 위치한 방일수록 좋은 방이며, 그만큼 더 권력에 가깝다고 계산할 수도 있다. 개국 공신인 레비제트 후작가에게는 대대로 배정된 추밀원의 의석이 있으니 당연히 의원직을 맡은 앙투안에게도 꽤 좋은 방이 주어졌다. 황후의 친우이자 전직 시녀장이었던 어머니도 황후의 침실 근방에 있는 방을 받으셨고, 황제 부부의 대녀이자 황녀의 말벗인 내게도 나름 중심부에 가까운 방이 있다. 새 레비제트 후작 부인인 멜리장드는 황후에게 인사를 드린 뒤 라울리 궁내의 방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 궁정에서의 첫 데뷔나 다름없는 황후 알현. 다른 이들에게 흠 잡히지 않도록 새벽부터 멜리장드를 두드려 깨운 뒤 하녀들을 들볶았다. 덕분에 결과물은 꽤 만족스러웠지만. 멜리장드가 가난한 친정에서 가져온 옷들은 격이 맞지 않았고, 그렇다고 바로 재봉사를 불러도 지을 수 있는 옷의 개수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멜리장드는 내가 가진 옷들을 수선해서 입어야 했다. 미안한지 차마 옷에 손도 대지 못하는 멜리장드였으나 나는 단호하게 그녀의 몸에 옷을 갖다 댔다. 멜리장드가 이 은혜를 어떻게 돌려주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웅얼거렸고 나는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이건 일종의 투자랍니다, 언니. 멜리장드에게는 커다랗고 촉촉한 푸른 눈망울과 꽤 잘 어울리는 하늘색 비단옷을 내주었다. 사실 불과 몇 주 전에 새로 지은 옷인지라 조금 아까운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걸 입고 나온 멜리장드를 보자마자 일말의 아까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와, 멜리장드! 너무 예뻐요!” “알릭스, 제가 정말 이 옷을 입어도 되나요?” 멜리장드가 심각한 얼굴로 거듭 되물었다. 그녀는 그냥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을 입어도 된다고 몇 번이고 얘기했지만 나는 완강했다. 원작 소설 속에서 패물은커녕 제대로 된 옷도 없이 궁정에 처음 들어간 멜리장드는 황후의 시녀들에게 새 신부가 아니라 과부 같다고 대놓고 비웃음을 당한다. 물론 멜리장드의 시모의 친우인 황후는 그걸 다 들었으나 일부러 모른척했다. 그게 살벌하고 삭막한 멜리장드의 궁정 왕따 라이프의 시작이랄까. 그러니 최대한 그들에게 흠 잡힐 데 없이 멜리장드를 꾸미려는 거다. 떼를 쓰다시피 멜리장드에게 드레스를 입힌 후 진주와 사파이어 귀걸이를 번갈아 대보았다. “화려한 것은 사파이어가 더한데, 진주가 조금 더 품격 있어 보인단 말이지.” “마님의 귀한 은발을 돋보이게 해주는 것은 사파이어 같습니다.” 하녀의 첨언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잘한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사파이어 귀걸이를 멜리장드에게 걸었다. 묵직한 보석 귀걸이가 익숙하지 않은지 멜리장드가 움찔했다. 이어서 세트인 목걸이를 내오라고 명하자 멜리장드가 기가 빠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너무 과해요, 알릭스….” “아직 목걸이밖에 안 왔어요. 반지와 팔찌는 시작도 안 했다구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손수 목걸이의 후크를 채우자 멜리장드가 살짝 뺨을 붉혔다. “하지만, 이건 저보다 알릭스에게 더 어울릴 것 같은걸요. 알릭스의 매혹적인 적금발과 신비로운 눈동자가 더 돋보일 거라구요! 그에 비해 제 하얀 머리는 노인 같고….” 혼자서 땅을 파기 시작하는 멜리장드를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어서 막았다. 원작 여주답게 파괴적인 미모로 그런 말 해 봤자 소용없어요, 언니. 기만하지 마세요. 하녀들도 이 망언을 들었는지 표정이 썩어 갔다. 멜리장드가 입을 비죽였다. “하지만, 저한테만 너무 신경 쓰는 것 같잖아요. 알릭스는 저번부터 보석도 몇 개 하지 않았는걸요. 물론 그렇다고 알릭스의 그 아름다움을 가릴 수는 없지만요!” 헛웃음이 났다. 물론 현생의 내 외모는 (잘난 척이 아니라) 꽤 예쁘장한 편이긴 했다. 하지만 멜리장드 같은 여신에 비하면 한낱 인간이다. 마치 오징어 무리에서 내가 제일 매끈하고 다리 긴 미녀 오징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인어공주가 나타난 상황. 여주인공은 자기 예쁜 것 모른다더니, 딱 그 짝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옷, 딱히 초라한 것도 아니라고. 물론 디자인 자체는 내 다른 옷들에 비하면 상당히 단출한 편이다. 본래의 나였더라면 절대 손도 대지 않았을 터였으나 이상하게 전생의 기억이 돌아온 뒤로는 전생의 취향이 조금씩 겹쳐서 그런지 심플한 스타일이 끌렸다. 별다른 장식 없이 떨어지는 상아색 드레스 끝자락에는 외가인 티레 백작가의 문장인 고양이 문양과 레비제트 후작가의 백합 문양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어머니가 처녀 시절 맞춘 옷을 물려받아서 고친 거다. 양 가문의 권리를 가진 사람, 즉 나와 내 어머니만 입을 수 있는 옷이다. 손목에 맨 리본에도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다. 값비싼 보석 팔찌는 아니지만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상징이다. 가문의 문장이 이렇게나 중요하다. 어떤 가문의 문장을 쓴다는 것은 그 가문에 속한 일원이며, 보호를 받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원작 같았으면 멜리장드가 아무리 후작 부인이라고 해도 문장이 그려진 옷 한 벌, 손수건 한 장 내주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내가 있는 이상 얘기는 달라진다. 오늘만 해도 멜리장드가 입은 드레스의 앞면에는 레비제트의 백합이 크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만, 오늘의 주인공은 멜리장드예요. 알아들었나요?” 멜리장드가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저 인사만 드리는 것 아닌가요?” “‘그저 인사’가 아니니까 이러죠. 이건 궁정 사교계에서의 데뷔탕트나 다름없어요.” “이렇게 화려하게 꾸미고 가 봤자, 다들 저를 비웃지 않을까요? 시골 촌뜨기가 좋은 혼처 꿰차고 졸부 노릇 한다구요.” 멜리장드의 걱정에 양심이 살짝 찔렸다. 사실 충분히 타당한 걱정이었으니까. 아마 전생의 기억을 자각하지 않았다면 나라도 그랬을 거다. 궁정의 사람들은 흠잡기의 달인이었다. 누구든지 깎아내리려면 어떻게든 깎아내릴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멜리장드를 타깃으로 잡은 한, 무슨 일을 하든 꼬투리를 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멜리장드, 어차피 비웃을 자들은 소박하게 하고 가면 소박하다고 비웃을 거고, 화려하게 하고 가면 화려하다고 비웃을 거예요.” 멜리장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멜리장드가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큰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그러니, 이왕 할 거면 최고로 화려하게 해요. 아무도 감히 새 후작 부인의 격에는 입을 대지 못하도록.” “제가 걸친 것들이 다 알릭스의 옷장에서 빌린 것임을 알아채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 적어도 현 레비제트의 유일한 마드모아젤, 알릭스가 당신을 비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게 되겠죠.” “…몇 번이나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 고마움을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멜리장드의 낮은 읊조림에 웃어 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대공비 되고 나서 나한테는 복수 안 해 주면 돼요. 물론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황후의 전용 응접실 기능을 하는 아메티스트 홀은 그 이름답게 자수정(amethyst)과 보랏빛 비단으로 장식되어 있다. 대리석 바닥과 보랏빛 포인트를 준 백금색 가구, 귀한 자색 실을 아낌없이 써서 황가의 문장인 사자를 수놓은 태피스트리들, 거대한 유리 샹들리에. 황제를 알현하는 다이아몬드 홀만큼은 아니지만, 그 화려함과 웅장함 속에 처음 들어가면 주눅이 들기 쉽다. 건축가는 이 방을 건축할 때 황후의 자리를 의도적으로 더 높은 위치에 둠으로써 그녀가 방문객들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객들이 이 방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이 웅장하고 고귀한 황후 폐하의 모습이 되도록. 소설 속의 멜리장드는 이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 황후, 그리고 그녀를 위시한 귀부인들의 위압적이고 싸늘한 태도에 방에 돌아가서 며칠을 끙끙 앓는다. 멜리장드가 대공비가 된 후에는 황후도 그녀를 어찌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그녀를 비웃은 모든 귀부인에게 엿을 먹여 주지만. 어찌 됐든 멜리장드의 첫 알현까지 내가 함께해 줄 수는 없다. 따라서 나는 황후를 위시한 귀부인들 틈에 서서 그녀를 속으로만 응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문득 주변을 한번 돌아보았다. 아메티스트 홀, 문을 마주 보는 부채꼴 대형으로 선 숙녀들이 오늘의 객을 기다리며 낮게 재잘거렸다. 누군가가 들어오게 된다면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는 것이다. 웬만큼 강심장이 아닌 한은 심장이 한 세 번은 떨어지고도 남을 자리다. 오늘 이곳에 있는 이들은 아메티스트 홀 중앙에 선 황후, 그 주변에서 황후의 시중을 드는 시녀들, 그리고 황후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귀부인들과 숙녀들이다. 멜리장드가 라울리 궁에서 마주하게 될 첫 상대들. 자신의 이익에 따라 때로는 멜리장드의 아군, 때로는 적군이 될 이들이었다. “레비제트 후작 부인이 듭니다.” 문밖을 지키고 선 시녀의 알림에 뒤이어 흠잡을 데 없게 차려입은 멜리장드가 사뿐사뿐 아메티스트 홀에 들어섰다. 멜리장드가 우아하게 무릎을 꿇어앉자 풍성한 치맛자락이 꽃처럼 퍼졌다. 귀부인들이 부채 너머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어여쁘네요.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나 봐요.” “…소박맞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저 드레스의 문장은 틀림없이 레비제트의…” “…일단은 인사하는 것밖에 못 봤지만, 예법도 문제는 없어요. 의외의 일이네요.” 드문드문 들려오는 소곤거림에 내색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뿌듯함의 환호성을 질렀다. 오는 길 내내 특훈을 한 보람이 있다. 멜리장드에게 궁정에서 걷는 법, 치맛자락이 우아하게 퍼지게 앉는 법 등을 스파르타식으로 연습시킨 게 나였다. 기본적인 예법을 배웠다고는 해도 궁정 식으로 복잡하게 변형된 몸가짐은 배운 적이 없었을 텐데도 여주인공 버프인지 멜리장드는 기민하게 익혀 냈다. 난 이거 배우는 데 몇 주는 걸렸던 것 같은데, 역시 인생은 불공평하다. 무릎을 꿇고 있는 멜리장드는 이 속닥거림을 듣고 있을까? 황후가 그녀에게 먼저 명하기 전까지는 일어날 수 없기에, 고개를 숙인 멜리장드의 표정을 읽을 길이 없었다. 언제 일어나라고 하시려나, 슬쩍 황후 쪽을 곁눈질했다. 틀어 올린 흑발 밑으로 드러난 목선이 우아했다. 장성한 아들딸을 둔 만큼 나이가 적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비친 것은 생각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냉정한 검은 눈동자가 무감정하게 멜리장드를 훑었다. “일어나시오.” 드디어 황후가 입을 열었고, 멜리장드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황후가 더 오래 그녀를 벌세우듯 꿇어앉혀 놓기를 바랐는지 몇몇 이들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제국의 황후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들을 골탕 먹이는 단골 레퍼토리긴 하지. 물론 황후가 멜리장드에게 호감을 품을 이유는 없었다. 친우가 싫어하는 며느리이자, 나름 고명딸의 혼처로 마음에 두고 있던 앙투안을 꿰차 버린 근본 모를 계집애 정도가 황후가 멜리장드에게 품은 이미지랄까. 하지만 현 황후인 어멘가드는 물리적인 해를 끼치면서까지 적법한 후작 부인인 멜리장드를 괴롭힐 정도로 무분별한 사람은 아니었다. “레비제트는 개국 이래, 황실의 가장 신실한 친구 중 하나였지. 새 레비제트 후작 부인이 된 것을 늦게나마 축하하오.” 누가 들으면 교과서 읽는 줄 알 것 같은 딱딱한 어투로 의례적인 환영 인사를 읊은 황후 뒤로 시녀장인 카트린 방돔 공작 부인이 말을 받았다. 으레 해 온 전통에 따라, 황후의 측근 서넛이 새로운 일원에게 덕담을 건네고 나면 황후가 방을 배정해 주는 것이었다. “결혼을 축하합니다. 목걸이가 참 아름답군요.” 마지못해 건네는 방돔 공작 부인의 칭찬에는 절대 사람 자체를 칭찬하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여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을 뻔했다. 이미 황후가 멜리장드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을 아는지라 가까이할 생각이 하나도 없다는 기세다. 지독하게도 계산적인 여편네 같으니라고. 소설 원작에서도 방돔 공작 부인은 멜리장드를 은연중에 무시해 오지만 멜리장드가 대공비가 되자마자 태세를 싹 전환해서 알랑거린다. 역시 황후의 시녀장 자리는 꽁으로 올라간 건 아닌가 보다. 하여간 그 뒤로, 부시녀장인 발자크 자작 부인이 입을 열려고 했으나 갑작스럽게 들려온 호들갑에 맥이 끊겨 버렸다. “어머, 그러고 보니 카트린이 말한 저 목걸이는, 레이디 레비제트가 저번 황제 폐하의 탄신 연회 때 하고 나왔던 목걸이 아닌가요?” 황후의 시녀 중 하나인 퐁텐 백작 부인이었다. 낮은 술렁임이 아메티스트 홀에 퍼져나갔다. 그걸 알아봤다 하더라도 굳이 이 자리에서 내뱉을 정도로 신중하지 못하다니. 못마땅한 기색이 모든 사람에게 비쳤으나 누구도 내색하지 않았다. 당제로사 퐁텐 백작 부인. 입이 가볍고 교만하여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으나 황후가 함부로 시녀 무리에서 퐁텐 백작 부인을 쫓아내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현재 공공연하게 황제의 정부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아직 공식 정부의 자리를 받지는 못했지만, 황제가 몇 달 전 시녀들이 주로 쓰는 황후의 곁방에서 퐁텐 백작 부인을 빼내 아름다운 정원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나무의 방’을 하사했다는 건 이미 궁정에 파다한 소식이었다. 아직은 공식 정부인 샹동 남작 부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곧 밀려날 것이고, 퐁텐 백작 부인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리고 진짜로 그렇게 될 것이었고. 소설 속에서 그녀는 황제의 총애를 입어 공식 정부가 되는데, 지위에 비해 그리 현명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접근한 칼렙에게 휘둘려서 멜리장드를 괴롭히는 데 크게 일조하다가 첫 번째로 대공의 철퇴를 맞는 역할이기 때문에 기억한다. 나름 기념비적인 첫 리타이어랄까. 어머니가 아주 작게 혀를 쯧 찼다. 저 못마땅한 기색은 비단 퐁텐 백작 부인만을 향한 것이 아닐 거다. 나를 향한 시선에는 네가 괜한 짓을 했구나, 라는 책망이 섞여 있었다. 애써 모른 척 딴청을 피우며 따갑게 내리꽂히는 어머니의 시선을 외면했다. “맞지 않나요? 그때 레이디 레비제트가 하고 나온 목걸이가 아름답다고 안느가 그랬잖아요!” 발자크 자작 부인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렇네요. 여전히 아름다운 목걸이네요.” “그럼, 저 차림새는 빌린 건가요? 아니면 설마, 훔쳤….” “그럴 리가요. 아름다운 새언니가 가족이 된 것을 축하하는 제 작은 성의였을 뿐이랍니다.” 그냥 뒀다가는 일 날라, 확대 해석하는 퐁텐 백작 부인의 말을 끊었다. 퐁텐 백작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쩜, 그러면 자기 패물이 하나도 없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요! 제가 궁정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친정에서 가져온 유서 깊은 목걸이를 하고 왔답니다. 시누이가 준 것을 해야 할 정도로 보석이 없을 줄은-” 어떻게든 멜리장드를 깎아내리려는 속셈이 가상할 정도다. 사실 그녀의 말대로 멜리장드가 빈손으로 시집온 것은 맞긴 했다. 귀족가의 혼인은 최소 금화 궤짝 단위부터 시작해서 영지 급의 땅문서 단위까지 올 정도로 오가는 지참금이 크기 때문에 대부분 그 지위와 부가 엇비슷한 가문끼리 혼사를 맺고는 했다. 일종의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를 노리는 장사랄까. 그렇다고는 해도, 그걸 대놓고 꼬집어서 멜리장드를 공격할 정도로 수준이 낮다니. 저 주둥이가 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내뱉기 전에 어떻게 멈춰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 중인데, 퐁텐 백작 부인의 망언을 멈춘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만큼 의미가 깊은 물건이기에 뜻깊은 자리에서 착용한 것 아니겠는가?” 황후를 빼닮은 긴 흑발과 총명한 흑안. 호사가들이 흑진주에 비견하는 눈이 빛났다. “말해 보게. 내 추측이 맞는가?” 낭랑한 목소리가 멜리장드에게 물었다. 자신을 집어 물을 줄은 몰랐는지 멜리장드의 눈이 잠시 커졌으나, 그녀는 이내 차분하게 답했다. “네, 새로이 연을 맺은 자매가 준 선물이기에 더욱 소중하여 그랬습니다.” 나이스, 멜리장드. 떨렸을 텐데 티도 안 내고, 우리 언니는 대답도 참 잘해요! ‘그녀’가 멜리장드의 답변을 듣고 싱긋 웃었다. 퐁텐 백작 부인이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을 들썩거렸으나 차마 대들지는 못하고 입을 닫았다. ‘그녀’와 내 시선이 스쳤다. 오랜 세월 쌓아온 빅 데이터로 분석해 볼 때, 저 눈빛은 틀림없이 ‘내 덕분에 위기 넘긴 줄 알아.’이다. 쳇, 틀림없이 보석 하나는 뜯기겠군. 속으로 입맛을 다시는데, 그녀가 몸을 돌려 황후를 바라보았다. “레비제트 후작의 아내와 누이가 의가 좋으니 보기가 좋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마마마?” ‘그녀’의 정체는 황후의 막내딸, 엘레네 황녀였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인 <멜리장드의 대공님>에서, 최대 피해자를 꼽는다면 엘레네 황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멜리장드보다 한 살 어리고, 나와 동갑인 열아홉 살의 엘레네 황녀는 본디 앙투안의 신붓감으로 내정되어 이야기가 오가던 여인이었다. 하지만 황녀가 후작 부인이 될 시에는 자신의 영향력이 약해지리라고 계산한 칼렙의 계략과, 칼렙 한정 마리오네트인 앙투안의 충실한 이행으로 후작 부인의 자리는 갑분 뜬금없는 시골 여자 (멜리장드) 가 채 가면서 황녀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버린다. 고고한 황녀 자존심에 꽤 큰 상처가 났을 텐데도 당시 엘레네는 딱히 큰 심술을 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본격적인 소설 속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문제가 생겨 버린다. 전쟁을 마친 북부의 니케리온 대공이 나타나자 황녀가 그에게 첫눈에 반해 버리는 게, 바로 그 문제다. 그리고 알다시피, 멜리장드가 또다시 본의 아니게 날치기식으로 대공을 낚아채게 되면서 황녀는 동일 인물에게 연속해서 남편 후보를 뺏긴다. 그동안은 나름 참아왔지만 두 번째 남편감까지 날치기당한 황녀님은 그야말로 꼭지가 도셔서 궁정에서 나름 영향력 있는 여성들과 함께 멜리장드를 공공의 적으로 상정, 사교계식 융단 폭격을 퍼붓는다. 뒷소문 퍼뜨리기, 티파티 초대 후 알려 주지 않고 장소 바꾸기, 드레스 코드 안 알려 주고 파티 초대한 뒤 혼자 튀는 옷 입은 멜리장드 비웃기 등등. 뭐, 어찌 보면 호구처럼 혼자 모든 것을 감내하려던 멜리장드가 각성하고 본격적으로 복수를 하게 되는 초석을 제공해 준 인물이기도 하다. 마침내 황녀의 결정적인 공격 한 방에 모든 인내심이 무너지고 그동안 당한 일들을 깡그리 복수해 주기로 결심하게 되니까. 결국에는 한창 세력을 더해 가는 전쟁 영웅 니케리온 대공과 굳이 척지지 않기로 결정한 황제에 의해 엘레네 황녀는 먼 섬나라 공국, 허수아비 공왕의 이름뿐인 공비로 떠밀리듯 보내진다. 각설하고, 현재 제일 큰 의문점은 이거다. 어째서 이 엘레네 황녀가 멜리장드를 도왔는가? 나만이 이런 의문을 품은 것은 아닌지, 귀부인들의 부채 파닥이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마치 물음표가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황후가 귀애하는 딸이자, 궁정 사교계의 실세 중 하나인 엘레네 황녀에게 왜 쟤를 도와주냐고 감히 따지고 들 만큼 간 큰 이는 없었다. 이 아메티스트 홀에 모인 여인 중에서 굳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정도의 권위를 가진 사람을 꼽자면 황후와 내 어머니 정도일까. 하지만 황후는 굳이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딸의 의사를 대놓고 반대할 정도로 멜리장드를 공격해야 하는 이유가 아직까지는 없었다. 또한 어머니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일지언정 황후가 공식 활동을 하는 아메티스트 홀까지 집안일을 끌어들여 호시탐탐 가십거리를 노리는 치들에게 먹이를 던져 줄 정도로 현명하지 못한 처사를 하실 분은 아니셨다. 두 노회한 궁정의 암사자가 잠잠히 있자 눈치를 보던 다른 여인들도 하나둘씩 엘레네 황녀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게요, 두 분의 우애가 마치 신화 속 달과 별 자매 같습니다.” “피도 섞이지 않은 관계건만, 이리 의가 좋을 수 있다니 부럽네요.” 멜리장드에게 어떻게든 창피를 줄 심산이었겠지만 황녀의 개입으로 뜻대로 되지 못할 것을 깨달았는지 퐁텐 백작 부인이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섰다. 미처 숨기지 못한 격분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표정조차 갈무리하지 못해서야. 모두가 가면을 쓴 듯 속내를 감추는 이곳에서 밑천 드러나기 딱 좋은 성향이다. 풍만한 아름다움으로 얻은 황제의 비호가 없었다면 당장에라도 궁정 사회에서 내쳐질 것이었다. 하긴, 멍청한 이가 악의를 품는다면 차라리 쉽기야 하지. 어차피 빤히 읽히는 수밖에 쓰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자였다. 하지만 그만큼 다른 누군가가 이용하기도 쉬울 것이고. 이를테면 칼렙이라든가. “루이즈, 후작 부인을 방으로 안내하게.” 황후의 명에 이어지던 생각이 끊겼다. 황후의 시녀 중 가장 어린 숙녀가 고개를 조아리며 멜리장드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내 나이보다 조금 더 어린 여인이었는데, 시녀장의 먼 인척이라고 했었나. 하여간 이 어린 시녀는 표정을 숨기는 데 서투른지, 그녀의 얼굴에서 희미한 즐거움이 묻어 나왔다. 결코 선한 의도로부터 나오는 즐거움은 아니었다. 마치 얄팍한 함정을 파놓고 상대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짓궂음이 묻어 나오는 게, 설마? “레비제트 후작 부인은 경건의 궁 두 번째 층의 다섯 번째 방을 쓰도록 하게나.” 아, 어떻게 그걸 잊었지. 나답지 않은 실수에 입매가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부채를 펴들어 입가를 가리며 자책했다. 멜리장드의 겉모습을 꾸미는 데 집중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황후는 멜리장드를 대놓고 괴롭힐 정도로의 명분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기준으로 격이 맞지 않는 이가 궁정 한복판을 활보하는 것을 두고 볼 정도로 너그럽지도 않았다. 멜리장드를 향한 황후의 반감은 결코 겉으로 대놓고 드러나지는 않지만, 다른 이들의 괴롭힘을 뒷받침할 정도는 충분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그중 첫 번째는 바로 방 문제. 황후가 그녀에게 내려 준 방은, 하녀들이 쓰는 방보다 조금 나은 수준으로 따로 딸린 욕실도 없었으며 난방도 열악했다. 후작 부인이 쓸 만한 방은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고위 귀족들이 쓸 만한 방들에는 다 이름이 붙어 있다. 에메랄드의 방, 장미의 방, 전나무의 방 등등. 방금 황후가 언급한, 무슨무슨 관 무슨 층의 몇 번째 방, 이런 식으로밖에 불릴 일이 없는,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은 방은 즉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이야기다. 주로 언제 궁정에서 퇴출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위치의 하급 귀족들, 사치를 멀리해야 하는 하급 신관들이나 기술자들, 황족을 모시지 못하는 말단 시종이나 시녀들 등이 쓰는 방이다. 고위 귀부인의 방이라면 으레 딸려 있는 살롱을 위한 작은 응접실은커녕 전용 욕실조차 없다. 순진했던 원작의 멜리장드는 공용 욕실에서 씻는 모습이 비웃음거리가 된 이후에야 자신이 박대당한 것임을 알고 남편에게 더 나은 방을 얻을 수 있게 황제나 황태자에게 말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앙투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여보, 부탁이에요. 더 이상 이곳에서 지낼 수가 없어요.’ ‘배부른 소리 하지 마시오. 궁정에서 그런 방이라도 얻기 쉬운 줄 아시오? 그 방에 들어가기 위해 한쪽 팔이라도 자를 자들이 널렸소.’ ‘제발요, 모두가 저를 비웃어요. 레비제트 후작 부인이 말단 시녀보다 못한 방에서 지낸다고요.’ ‘황후 폐하께서 어련히 빈방 중에서 가장 적당한 방을 골라 주시지 않았겠소? 설마, 지금 감히 황후 폐하의 성심이 부족하다 하는 것이오?’ 그래, 이 부분 기억난다. 물도 없이 연속으로 밤고구마 다섯 개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은 듯한 답답함에 하차할 뻔했던 부분이었다. 이를 아득 갈았다. 아니, 허수아비라도 아내로 맞아들였으면 그에 맞는 대접을 해 줘야 할 것이 아닌가. 기실 앙투안은 허수아비 아내를 들임으로써 많은 이득을 보았는데, 가장 주요한 것은 불안정하던 후작위의 완전한 승계였다. 선대 후작이었던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죽고 앙투안이 성년이 될 때까지 가문을 관리해 온 것은 어머니셨다. 앙투안이 단순한 직위를 물려받는 것뿐 아니라 어머니가 장악한 영지의 대소사까지 가져오기 위해서는 새로운 후작 부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신분을 뛰어넘는 희대의 로맨티시스트라는 칭호에, 은근한 주변의 혼사 강요를 물리칠 수 있는 명분은 덤이었다. 그의 주변에서 얼씬거리던, 그리고 칼렙의 신경을 긁어 놓던 숙녀들은 어쨌든 멜리장드의 외모에 비교될까 무서워 줄행랑을 쳤으니까. 그렇게 아내로 맞아들여 단물만 쑥쑥 빼먹을 거면 적어도 아내 대접은 해줘야 할 것 아닌가. 차라리 게이임을 밝히고 계약 결혼을 하든가. 대등한 계약 조건을 내걸기도 싫어서 알량한 사랑이라는 핑계로 사람을 착취하는 짓거리가 정말 쓰레기 같았다. 나름 좋아하던 오라비였으나 이 사실을 자각하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 * * 궁정에서 생활하다 보면 필수로 습득하게 되는 스킬들이 있다. 과즙 잔 틈에 숨은 독주 골라내기, 말꼬리 잡아서 과장하기, 십 미터 밖에 있는 숙녀가 낀 루비 반지 시세 알아맞히기 등등. 하지만 그중에서 제일 필수적인 건, 누울 자리 계산해서 발 뻗기다. 누구 한 명을 공격하고 싶어도 일단 그 뒷배경을 보고 그로 인해 자기가 받게 될 영향을 귀신같이 계산해 낸 뒤 결정하는 거였다. 예컨대, 만약 내가 황족의 시녀인데, 주인에게 단단히 혼나고 누군가에게 시비를 걸어서 화풀이하고 싶다고 치자. 대상을 물색하는데 저기 지나가는 당글라르가의 영애는 아버지가 세무 대신이니 잘못 건드렸다가 탈세 건 털릴 수도 있어서 패스. 대신 얼마 전 남편이 좌천된 아무르 자작 부인으로 타깃 변경. 이런 식의 스캔을 하루에 수십 번은 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만만한 놈만 잡는다는 거지. 그러니 멜리장드를 봤을 때 배배 꼬여 있는 궁중 인물들이 얼마나 희열을 느꼈겠는가? 무려 황후가 판 깔아 주고 가문이 부추기는 후작 부인 괴롭히기였으니. 물론 이제부터는 내가 비호할 테니 그 정도의 동네북 취급은 없겠지만, 이미 황후가 멜리장드를 인정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 이상 은은한 비웃음이 따라붙을 터였다. 대모님, 대녀 머리 터집니다! 소리 없는 내 아우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후는 멜리장드가 시녀를 따라 나간 뒤 모두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아메티스트 홀은 황후와 시녀들만 남긴 채로 문이 닫혔고, 여인들은 사락사락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를 내며 삼삼오오 흩어졌다. 파스텔톤의 파도처럼 미끄러져 나가는 숙녀들의 드레스 자락 속에서 나를 붙잡은 것은 엘레네 황녀였다. “알릭스.” “황녀 전하.” 가슴에 손을 얹고 황족에게 하는 예를 취했다. 흠잡을 데 없는 예절이었으나 엘레네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가 폈다. 그녀를 잘 아는 이가 아니면 아마 잠시 표정이 변했던 것을 알아보지도 못했으리라. “내 처소에 생플로레트산 홍차가 들어왔으니 잠시 들르도록 해.” 멜리장드를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그러나 황녀의 부름을 대놓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사실 궁정의 방에 대한 권한이 있는 직계 황족 중 하나인 황녀를 찔러볼까 하는 생각도 겸사겸사 있었다는 것은, 부정하지는 않겠다. 황녀의 처소에 다다르자 시녀들이 차와 다과를 내온 후 잽싸게 사라졌다. 부드럽게 구운 마들렌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렌지 향이 났다. 향긋함을 음미하며 포크를 놀리는데 엘레네 황녀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걸 좋아하는 걸 알아서 내 넉넉히 준비하라고 했지.”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깍듯한 감사 인사에 엘레네가 입을 비죽거렸다. “지금은 마담 엘레오노르도 없으니 편하게 해.” 바로 꼿꼿하게 세운 허리를 방만하게 풀고 비단 소파에 편하게 기대앉았다. “그러지, 뭐.” 빠른 태세전환에 엘레네가 키득거렸다. 그랬다, 지고하신 황녀 전하와 나는 사석에서는 반말하고 사는 사이였다. 십몇 년을 친구로 지낸 사이였으니까. 외손녀딸 말이라면 고개부터 끄덕이는 부유한 외조부, 어린 여동생에게 언제나 한 수 접어주던 든든한 오라비, 엄격하지만 아비 얼굴을 모르고 태어난 막내딸에게는 꽤 너그럽던 어머니. 거기다가 약간의 섭섭한 기색이라도 내비치면 죽는시늉하며 받들어 모시던 대저택의 사용인들까지. 어린 시절의 나는 나만의 작은 장원의 군주였다. 그렇게 공주처럼 받들어 모셔지면서 자라서 세계에서 제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살던 천둥벌거숭이 계집아이는 여섯 살 무렵 진짜 황녀님을 만나고 좌절에 빠졌었다. 제 버릇 못 버리고 황녀에게 방자하게 굴었던 날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저녁을 굶는 벌을 받고 나서 얼마나 서럽던지. 원래 대자매(황제 부부가 내 대부모이므로)지간인 나를 황녀의 시녀로 넣어 입궁시킬 심산으로 수도에 올라오셨던 어머니께서는 이러다 귀하신 황녀님과 딸이 원수라도 지게 될까 봐 대경실색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의외로, 엘레네 황녀는 고분고분한 시녀 아이들보다 왁왁 맞서는 나를 더 마음에 들어 했지. 좀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 시녀는 절대 안 한다고 뻗대는 내게 그럼 자기 말벗이라도 하라고 냉큼 옆방을 내줄 만큼. 물론 우리 둘 다 어느 정도 크고 나서는 대외적으로는 예의를 갖춰서 대했으나 사석에서는 격의 없이 지내고 있다. 엘레네가 그걸 원하기도 하고. “그런데, 아까는 왜 그랬어?” 포크로 쿡 마들렌을 찌르며 묻자 엘레네가 한쪽 눈썹을 으쓱했다. “얘 좀 보게. 고맙다는 인사가 먼저 아니니? 나 아니었으면 네 새언니, 충분히 곤욕을 치렀을걸.” “그래, 고맙다.” 옆구리 찔리고 절하는 기분으로 말을 내뱉었다. “어쨌든, 무슨 생각으로 도운 거야? 퐁텐 백작 부인과 척을 질 수도 있는데 말이야.” 엘레네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일개 시녀랑 척져 봤자 무어.” “일개 시녀가 아니지.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 시녀지.” 덧붙이자 엘레네의 입매가 비틀렸다. 수많은 군주 부부가 그랬듯이, 황제와 황후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정치 공동체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사이였다. 이에 황후는 황제의 수많은 정부를 묵인, 내지는 몇몇 정치적인 경우에는 오히려 황제 앞에 들이밀어 왔다. 본질적으로 황제의 정부는 권력에 가까운 자리에 위치해 있다. 그 자리에 적의 세력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측근들을 밀어 넣어 적들을 견제하고 정보를 캐 오는 것이 바로 황후가 정부들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 딸 되는 엘레네는 황제의 정부들에 대해 일말의 결벽증과 같은 혐오를 품고 있었다. 뭐, 정부라는 존재의 정치적, 사회적 쓸모를 인정하는 것은 논외로 치고. 엘레네가 말을 돌렸다. “어쨌든, 그건 내가 물을 말인데. 무슨 심산이야? 새로운 인형이라도 들인 거야?” 인형이라. 평민 한 사람의 백 년 치 임금을 턴 것보다 더 비싼 보석과 옷을 단순히 인형 놀이로 치부하기에는 조금 우스운 꼴이긴 하다만. 엘레네는 의도적으로 자기 주체도 없는 인형이라 멜리장드를 깎아내리는 동시에 우회적으로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다 큰 성인이 나잇값 못하고 인형 놀이하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고 있다고. 어떻게 보면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십몇 년간 쌓은 우정은 기민하게 그 밑에 깔린 걱정 섞인 저의를 읽어 냈다. “인형… 은 조금 그렇고, 최애?” “최… 뭐?” 무심코 대답하다가 처음 듣는 단어에 갸웃한 엘레네를 보고 아차 하면서 말을 돌렸다. “왜, 내 신경이 다른 여자한테로 쏠린 것 같아서 기분 나빠?” 가볍게 농을 던지자 엘레네가 픽 웃었다. “아니, 알릭스의 가장 절친한 친우는 나일 테니까.” 은근하게 속 보이는 견제에 웃어 버렸다. 귀엽다, 귀여워, 내 친구. 대공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좋은 남자 찾아서 맺어 줘야 할 텐데 말이야. 그 뒤로 별 의미 없는 몇몇 말(안부라든가, 최근 올라온 진상품이라든가 등등)을 주고받다가 본론을 짚었다. “엘레네, 그나저나, 새 레비제트 후작 부인의 방 말인데, 좀 괜찮은 방으로 바꿔 줄 수는 없어? 그래도 우리 가문 안주인인데 너무하잖아.” 엘레네가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너 지금 내게 청탁하는 거니?” 어깨를 으쓱했다. “부탁이지.” “안 돼, 줄 방 없어.” “저번에 네 시녀장이 결혼해서 은퇴한 뒤로 지금 금목서의 방 비었잖아.” 기억력도 좋네. 투덜거리는 엘레네에게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네 일인데,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티 나는 아부에 엘레네가 못 말린다는 듯 살짝 나를 째려봤으나 이어지는 말투는 조금 덜 뾰족했다. “궁정의 방을 그렇게 간단하게 내줄 수 있는 줄 알아? 어마마마께서 결정하신 일에 내가 함부로 간섭할 수는 없어.” 역시 쉽지 않구만. 큰 기대를 한 것도 아니지만. 하긴, 황녀가 여기서 순순히 방을 내준다면 정면으로 황후의 이번 조치를 거스르는 것이나 다름없어진다. 황후의 권위 손상으로도 연결될 수 있으니, 황녀로서는 황후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함부로 끼어들지 않고 몸을 사리는 것이 낫긴 하다. 좀 쉽게 가보나 했더니, 아쉽구먼. 입맛을 다시는 내게 엘레네가 새침하게 덧붙였다. “정 원한다면, 어마마마께서 마음을 돌리시기를 기다려 보는 건 어때?” 자존심 때문에라도 절대 마음 안 돌리실걸. 애매하게 웃어 보이자 엘레네도 별 기대는 없는지 눈만 몇 번 깜박였다. “하여간, 이렇게 신경 쓰이게 하다니. 새언니라는 족속들은 하여튼 마음에 안 든다니까.” 작게 툴툴거리는 소리에 웃어 버렸다. 황녀가 제 새언니인 디안 황태자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으니까. * * * “어쩜, 거기서 황녀 전하께서 방해하실 줄은 몰랐죠!” “…그러셨습니까.” 답이 한 박자 늦게 나왔지만, 퐁텐 백작 부인은 개의치 않고 험담을 이어 갔다. 감히 황족을 상대로 방해 운운하는 건방진 언사는 충분히 처벌받을 만한 행동이었으나 그에 대한 자각도 없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뒷말을 이었다. “역시 줄라드 남작님의 말이 맞았어요. 주제도 모르는 건방진 계집애였어! 시골구석에서 올라온 주제에 그리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건방을 떠는 꼴을 남작님도 보셨어야 했는데!” 기실 멜리장드는 건방을 떨기는커녕 퐁텐 백작 부인과 직접적으로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으나 이미 단단히 그녀를 싫어하기로 결심한 퐁텐 백작 부인은 그 사실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의 멜리장드는 이미 외모만 믿고 지엄한 궁중에 밀고 들어온, 예절도 모르는 거만하고 무도한 촌뜨기였다. 평판으로 치면 저도 비슷할 터인데. 속으로 비웃던 칼렙의 낯이 이어지는 퐁텐 백작 부인의 말에 미미하게 굳었다. “그 와중에 마드모아젤 레비제트의 사파이어 목걸이를 걸치고 왔더라구요! 왜, 저번 황제 폐하 탄신 연회에서 선보인 앙드레트산 사파이어요. 수십 캐럿은 족히 되어 보이던데. 어떻게 얻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귀하게 자라서 마냥 순진한 레비제트 가문의 영애를 꼬드겼을 거야. 후작님을 꼬여 낸 그 천박한 언사로 말이죠!” 앵앵거리는 콧소리에 슬슬 귀가 아팠으나 칼렙은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공작의 아들이되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자신이 가진 몇 안 되는 자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줄 알았다. 선량하고 무구해 보이는 용모 역시도 그중 하나였다. “제 친우의 아내에게 과도한 비난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부인. 저는 그저, 제 형제 같은 친우가 걱정될 뿐이니깐요.” “남작님은 너무 선량하셔서 탈이라니까요? 제 친우가 그런 뱀 같은 요부를 데려왔더라면 저는요, 머리채를 다 잡아 뜯어 놨을 거예요!” 실존하지도 않는 요부를 눈앞에 둔 것처럼 씩씩거리는 퐁텐 백작 부인을 향해 칼렙이 고개를 축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다만, 목걸이는 조금 걱정되는군요. 아무것도 모르는 알릭스가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길래 그녀에게 아끼는 목걸이까지 넘겨준 건지…. 물론, 친오라비도 아닌 저는 이런 걱정을 할 자격도 없지만요.” 퐁텐 백작 부인이 펄쩍 뛰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신가요? 남작님이 마드모아젤 레비제트하고 십수 년을 친남매처럼 지내 온 것을 온 궁정이 다 아는걸요! 허, 이게 다 여자 하나 잘못 들어온 탓이군요. 남작님이 이렇게 걱정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어요!” 칼렙이 의도한 대로 완벽하게 놀아난 퐁텐 백작 부인의 세 치 혓바닥 끝에서 멜리장드는 조각조각 해체되어 천하의 둘도 없는 요녀이자 충실한 친구 사이를 이간질하는 악당, 순진한 소녀의 패물을 빼앗는 날강도로 거듭났다. 실체와는 백만 광년가량 떨어진 모습일 터이나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칼렙이 멜리장드를 향해 품은 것은 진한 악의일 뿐인데. 그러나 능숙하게 갈무리한 음험한 악의는 검집에 숨겨진 날붙이처럼 겉으로는 결코 표출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마드모아젤 루이즈가 그러더군요. 그 계집애가 입은 하늘색 드레스, 분명 마드모아젤 레비제트가 몇 주 전에 맞춘 옷이라구요. 그 몸에 걸친 것 중에서 자기 것은 하나도 없을 거여요.” 칼렙이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저런. 이야기가 하나 생각나는군요. 아, 아닙니다. 실언했습니다.” 칼렙이 곤란한 듯 입을 다물자 퐁텐 백작 부인이 눈을 번득였다. “무슨 이야기인가요? 말해 주셔요.” “아, 문득 생각난 것이라…. 제 친우 부부에게는 실례가 될 수 있는 언사라서 말입니다.” 잠시라도 친우와 그 아내에게 무례할 수 있는 생각을 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양 구는 칼렙의 앞에서 퐁텐 백작 부인이 궁금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단것을 눈앞에 둔 세 살배기보다 참을성이 없는 여자였다. 너무나도 읽기 쉬운 퐁텐 백작 부인의 행동에 칼렙이 남몰래 웃었다. 자신에게만 알려 달라고,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 않겠다고 조르는 백작 부인에게 못 이긴 척 칼렙이 입을 열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상황을 빗댄 우화를 말하며 절대 다른 사람에게 이 이야기에 대해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서너 번 부탁까지 했다. 퍼뜨리기 딱 좋은 이야기라고 판단했는지 퐁텐 백작 부인이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 이야기는 라울리 궁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리라. 어서 여기저기 험담을 퍼뜨리고 싶어 몸이 달았는지 퐁텐 백작 부인이 서둘러 갈 채비를 시작했다. 수탉이 홰를 치듯 분주한 몸짓이 우스워 칼렙은 낯에 비웃음을 머금었으나, 퐁텐 백작 부인이 고개를 돌리자 비웃음은 씻겨 내려간 듯 사라지고 오로지 선량하고 무구한 분위기만이 남아 있었다. 눈치채지 못한 퐁텐 백작 부인이 말을 던졌다. “참, 조만간 제 살롱에서 음악회를 한번 열 생각이랍니다? 줄라드 남작님도 초대해 드릴 터이니 나중에 꼭 오셔야 해요?” 칼렙은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이 시끄러운 여자를 보내고 쉬고 싶었다. 화제 속에서 나타난 궁정의 신인을 내려찍을 생각에 신이 난 퐁텐 백작 부인이 휴게실을 떠나자 칼렙은 곧바로 귀족 남성들이 지내는 방이 있는 신중의 궁으로 향했다. 사생아라는 신분 때문에 정식으로 방을 얻지는 못하였으나 마치 제 처소처럼 자연스럽게 걸어간 칼렙이 도착한 곳은 산사나무의 방이었다. 선대와 선선대 레비제트 후작이 사용하다가, 이후 두엇의 주인을 거치고 현 레비제트 후작에게 돌아온 방. 바로 앙투안의 방이었다. 칼렙은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웬일로 이 시간에 왔나.”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보던 앙투안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호박색 눈동자가 칼렙을 담았다. 칼렙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가가 앙투안의 어깨를 안고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의아한 듯 바라보던 앙투안이 이내 낮은 한숨을 내쉬며 칼렙을 다독였다. “칼렙.” “…….” “나의 칼렙.” 무슨 일이냐. 나직한 물음에 칼렙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어 앙투안을 마주 보았다. 눈에 띄게 동요하는 칼렙의 모습에 앙투안이 미간을 좁혔다. “알릭스가 그 계집에게 넘어간 것 같아.” 이름 언급 하나 없었지만 주어는 명확했다. 앙투안이 침묵했다. “나는 말이야, 그 계집이 싫어.” 칼렙이 이리도 싫어할 ‘계집’은 이 궁성에 하나뿐이었으니까. 앙투안이 칼렙의 등을 쓸어내렸다. 앙투안의 결혼식 후, 겉으로 표출하지 않았을 뿐 칼렙의 예민함은 극에 달해 있었다. 오직 연인인 앙투안만이 알 수 있는 상태였을 뿐이었다. 허나 정작 멜리장드를 앙투안에게 선보인 것은 칼렙이었다. 앙투안은 칼렙이 그의 앞에 멜리장드를 데리고 와서 소개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 밤, 술잔을 기울이던 칼렙은 앙투안에게 종용했다. ‘결혼만 하면 되잖아.’ 붉게 충혈된 눈빛이 선득했다. ‘황녀는 안 돼. 차라리, 그 여자를 선택해.’ 아직 모친의 영향력이 지대한 레비제트 후작가. 앙투안이 온전히 가문을 승계받기 위해서는 혼인을 통해 새로운 후작 부인을 들일 필요가 있었다. 마침 앙투안과 황녀의 혼담이 오가던 차였다. 레비제트가 위기를 맞았던 때로부터 한 세대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한 번 몰락할 뻔했던 레비제트 후작가에 직계 황족과의 혼사가 가져다줄 이점은 상상을 초월했다. 세수 감면, 황위 계승권을 가질 수 있는 후사, 중앙 정계에서 더 원활한 영향력 선점 등. 그러나 그의 앞에 선 연인은 이 모든 것들을 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어째서.’ ‘황녀와 결혼한다면, 황제 부부는 귀동녀의 결혼생활을 면밀히 살피고 간섭할 거야. 조금이라도 황녀의 비위를 거스른다면 바로 감시가 따라붙겠지. 그렇다면, 우리 관계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권력자의 여식 대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가난하고 예쁜 여자를 택하라. 잔인할 정도로 이기적이고 처절한 연인의 요구였다. 그러나, 앙투안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랐다. 멜리장드는 그런 칼렙의 말을 따라 들인 여자였다. 어차피 빈껍데기일 뿐, 무시하면 그만인 여자를 굳이 괴롭히는 것은 꽤 비이성적이었으나 앙투안은 침묵을 택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칼렙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달랠 수 있으면 상관없었다. 칼렙이 낮게 중얼거렸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네 옆자리를 차지한 그것이 끔찍하게도 싫어.” 네 진짜 연인인 내가 아니라 그것이 네 사랑으로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것도 싫어. 그 계집이 어부지리로 얻은 레비제트의 이름의 덕을 조금이라도 받는 것이 싫어. 그년이 누리는 것은 본디 전부 다 내 것이어야 했는데. 산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중얼거림 속에서 앙투안은 그 끝에 맺힌 진의를 읽어 내었다. 너마저도 언젠가 그 계집애에게 넘어갈까 두려워. 앙투안은 칼렙의 병적인 동요가 잦아들기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내, 레비제트의 이름은 어쩔 수 없이 그것에게 주었지만 내 재산, 내가 누리는 명예, 권력의 진정한 주인은 너밖에 없다.” 앙투안은 천천히 칼렙의 갈색 고수머리를 쓸어 올리고 드러난 이마에 숭배하듯 입을 맞추었다. “오직 너. 내게 속한 모든 것은 네 손에 이미 쥐여 있으니까.” 내 심장까지도. 앙투안이 칼렙의 손을 자신의 가슴팍에 갖다 댔다. 고동치는 심장 박동을 느끼는 듯 칼렙이 눈을 감자 앙투안이 속삭였다. “기억해라. 내 심장을 이토록 격렬하게 뛰게 하는 것은 오직 너뿐이다.” * * * 엘레네와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방 밖을 나왔을 즈음에는 이미 시간이 상당히 지난 후였다. 조급하게 발을 옮겼다. 그동안 멜리장드에게 별다른 일이 없었어야 할 텐데. 나는 바쁘게 정원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황후가 멜리장드에게 내준 경건의 궁에 있는 방과, 내가 방금 전까지 있었던 자애의 궁 사이 위치한 거대한 정원에는 황후의 길이라고 불리는 긴 산책로가 있다. 아, 네이밍이 그럴 뿐 황후만 다니는 길은 물론 아니다. 황궁인 라울리 궁성의 본궁은 네 가지 미덕을 나타내는 신중, 분별, 경건, 자애의 이름을 붙인 부분들로 나뉜다. 그중 황후와 고위 귀족 여성들이 기거하는 자애의 궁 앞에 있는 길이어서 황후의 길이라고 불릴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황제와 지체 높은 남성들이 지내는 신중의 궁 앞에 있는 길은 ‘황제의 길’이다. 어쨌든, ‘황후의 길’은 경건의 궁에 있는 황실 전용 신전으로 가려면 지나쳐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신실한 신사 숙녀들은 일요일마다 여기를 오가야 한다. 그 길이가 거의 1킬로미터는 되는지라 예쁘고 비실용적인 구두를 주로 신어 온 나는 웬만하면 얼씬도 안 하던 길이지만. 멜리장드가 경건의 궁에 방을 받지 않았더라면 아마 한 1년간은 발도 들일 일이 없었을 것이다. 경건의 궁과 분별의 궁에 딸린 자잘한 방들에서 지내는 이들은 황궁에 거하는 것을 허락받았되, 중심부에 입성할 기회는 철저하게 박탈당한 이들이다. 그러니, 권력의 중심부인 자애의 궁과 신중의 궁에서 이렇게나 멀지. 벌써 다리가 슬슬 아파 온다. 이놈의 저질 체력. 하긴, 현생에서는 몸매 관리한답시고 음식은 개미 눈물만큼 먹고 운동이라고는 춤 정도밖에 안 추는데 체력이 좋은 게 이상한 거다. 결국, 곁길에 놓인 벤치에 주저앉았다. 가로수 그늘에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살짝 눈을 감고 멍하니 생각했다. 이러다가 골로 가기 전에 체력 관리라도 해야겠다. 하는 김에 불면 날아갈 것 같고 쥐면 꺼질 것 같은 멜리장드도 같이하자고 해야지. 그 언니, 보호 본능도 좋지만 너무 안쓰러워서 자꾸 뭘 먹이고 싶어진다. 승마를 시작해 볼까? 균형감 기르기에 좋다던데. 아니면 수영? 펜싱? 등산? 궁정의 귀부인들이 주로 하는 운동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좋아, 재봉사를 불러서 운동하기 좋은 옷이라도 좀 같이 맞춰야겠다. -까지 의식의 흐름이 흘러간 찰나였다. 머리 위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느꼈다. 퍼뜩 눈을 뜨자 태양을 등지고 선 거대한 인영이 보였다. “휴식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마드모아젤.” 낮은 저음이 귀에 박혔다. 눈을 찌르는 태양 빛에 적응하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다른 남자들보다 머리 한 개 정도는 더 클 듯한 장신, 실전으로 다져진 탄탄한 체형, 흔히 볼 수 없는 수려한 외모였다. 그리고, 햇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청흑발. 차갑고 날카로우면서도 위험한, 그러면서도 매혹적인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전설 속 영웅이 바위에서 뽑았다는 마검이 이러할까. 어쩐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궁정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위화감이 스쳐 지나갔다. 남자가 가슴에 한쪽 손을 얹고 허리를 숙였다. 흠잡을 데 없는 기사의 예법이었다. 어쩐지 밀려오는 불길한 기운에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북부의 리산데르 아나스타시우스 테오발드 니케리온입니다.” 아, 니케리온이요. 그 말을 해석하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아니, 잠깐만요, 북부의 니케리온이요? 남주가 왜 여기서 나와! 로맨스판타지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자격 요건은 뭘까? 일단 부유하고, 잘생겼고, 싸움 잘하고, 내 여자 어디 가서 안 꿀리게 할 권력은 무조건 있어야 한다. 여주만이 달래 줄 수 있는 과거의 상처가 있으면 금상첨화고. 거기에 더 나아가서 반쯤은 필수적인 덕목은 차갑지만 내 여자에게만 따뜻한 도시 남자- 는 아니고, 북부대공님일 것. <멜리장드의 대공님>의 남주인 리산데르는 그야말로 그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남주였다. 북부 지방의 지배자인 니케리온 대공. 웬만한 남자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준수한 외양, 금광석의 최대 산지인 투르베 산맥의 주인이니 엄청난 부자이기도 하고. 아마 순수하게 개인이 당장 운용할 수 있는 재산으로만 따지면 황제와도 비빌 수 있지 않을까? 거기다가 곧 일어나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영웅이 될 예정이다. 본격적인 원작의 메인 스토리로 접어드는 3년 후에는 승전을 이끈 주역이 되어서 황도로 귀환하겠지. 그는 거기서 멜리장드를 만나서 계약 결혼을 해야 한다. 사랑을 믿지도 않고, 숙녀들이 보내는 추파를 혐오하는 리산데르가 그나마 가장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상대는 어린 시절 그가 계모에 의해 잠시 쫓겨났을 때 지냈던시골에서 만나 추억을 쌓은 멜리장드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왜 여기, 라울리 궁정 황후의 길 위에 서서, 그리도 경멸하는 귀족 여인의 표본이나 다름없는 나에게 말을 걸고 있나. 밭에서 고구마 캐다가 산삼 뽑은 것보다 더 뜬금없다. 심지어 지금은 아직 남주가 황도 파데사에 등장할 타이밍도 아닌데요? “저는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이곳, 황궁에 왔습니다. 제 대공령의 끝과 국경을 접한 비제른 왕국과 금광 채굴권을 둔 분쟁이 격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막 정식 선전 포고에 대한 칙허장을 받은 참입니다.” 아, 그렇게 된 거였군. 물론 전쟁 전에 황제의 허가를 얻으러 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럼 계속 가던 길 돌아가세요. 왜 저한테 그 이야기를 구구절절하시나요? 머릿속에서 엿됨을 알리는 본능의 사이렌이 웨엥웨엥 울림과 동시에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눈앞의 제복을 입은 사내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갔다. “처음 뵙는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부담되신다면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당신의 아름다움이 전쟁터를 향해 돌아가는 저를 붙잡았습니다.” 잠깐만. 뭐라구요? 아니, 당신, 남주잖아! 여주는 어쩌고! 쟁반으로 뒤통수를 깡 맞은 느낌이다. 충격에 뇌 활동이 정지당했다. 내 정신 줄이 먼지가 되어 흩날리든 말든 리산데르는 꿋꿋이 말을 이어갔다. “살면서 제가 트루바도르(Troubadour, 음유시인)가 아닌 것에 이리도 아쉬워하게 될 줄은 몰랐군요. 제 어휘가 부족하여 제가 받은 인상을 다 전달하지 못할 것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감히 말씀드리자면, 당신을 처음 본 순간에 신의 천사가 이 땅에 내려온 줄 알았습니다.” 파업해 버린 뇌세포는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충격 고백을 이해하는 것을 거부했다. 순간적으로 음유시인이 뭐 어쨌다는 건지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천천히 그 말을 곱씹고 나서야 소스라쳤다. 충격에서 채 회복되기도 전에 갑자기 그가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군인이자 기사다운 절도 있는 동작은 아무 군더더기 없이 빠르고 깔끔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열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름 모를 숙녀분, 당신께 첫눈에 반했습니다. 이름을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미치셨습니까, 휴먼? 다른 은하로 날아가고 있는 멘탈을 간신히 붙잡았다. 굳은 머리를 쥐어짜 내서 간신히 대답했다. “…보잘것없는 이라 대공 각하의 귀를 더럽힐까 두려워 말씀드리기가 저어되네요.” 누가 봐도 완곡한 거절이었다. 이에 리산데르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지금 당장 제 마음을 받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전쟁터로 돌아가야 하는 제 마음을 어찌 처음 본 분께 강요하겠습니까. 다만, 제가 앞으로 마주할 모든 승리의 장에서, 당신께 영광을 바칠 수 있도록 이름만, 딱 이름만 알려 주십시오.”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우수에 찬 미남이 간절하게 나를 올려다본다. 상아로 깎은 것처럼 희고 완벽한 이마 아래로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 그 너머로 자수정처럼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가 비쳤다. 그 눈에 홀려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알릭스입니다.” 아 미친, 왜 말해 줬지? 말하고 바로 후회했다. 멜리장드도 그렇고, 아무래도 난 미인에 약한 것 같다. 때아닌 자아성찰을 하고 있는데 리산데르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알릭스.” 와, 진짜 방금 이 미소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할 뻔했다.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구나. 고삐 풀린 이성을 간신히 붙잡았다. 정신 차려, 알릭스 레비제트! 이 남자는 네 새언니의 미래 남편감이라고! 두 사람은 운명이야! “알릭스.” 되새기듯 내 이름을 거듭 말하던 그가 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맹세합니다.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리하여 알릭스, 그 고귀하고 아름다운 이름에 승리의 영광을 바치겠습니다.” 아니, 필요 없는데요. 어색하게 웃으며 ‘아, 벌써 시간이! 선약이 있어서 이만.’을 시전하며 도망쳤다. 내 인생과 생존 계획이 송두리째 꼬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 악! 으아악! * * * “휴,” 한숨을 푹푹 내쉬자 멜리장드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알릭스, 왜 그래요?” 인생이 복잡해서요. 하필이면 남주를 황궁 한복판에서 마주치다니. 뜬금없이 마주치기만 했어도 심란한데, 더 큰 문제는 그가 갑자기 여주가 아닌 다른 여자한테 한눈을 팔았다. 그것도, 지나가는 악역 1인 나한테! 갑자기 왜죠? 원작의 ‘알릭스’와 리산데르 니케리온 대공은 딱히 단둘이 마주치거나 접점이 생길 구석이 없었다. ‘원작의 알릭스’는 메인 스토리가 진행되던 시점에서는 이미 유부녀였으니깐. 거기다가 직접적으로 ‘원작의 알릭스’를 대하는 것은 대공이 아니라 멜리장드뿐이었다. 그러니, 원작의 리산데르가 원작의 알릭스를 대하는 태도가 언급되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니 내가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복잡한 머리가 팽팽 돌았다. 그래, 백만분의 일 정도의 확률로 내가 그의 취향에 정말로 들어맞는 외모일 수도 있긴 하다. 머리를 굴렸다. 자, 한 천만 걸음 양보해서, 절세 미녀 멜리장드를 제치고 내가 그의 이상형 월드컵 우승자가 될 수도 있다고 쳐 보자. 하도 마주칠 일이 없다 보니 원작의 리산데르가 그걸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었다고 가정해 보는 거는 거다. 그러나 어차피 그는 멜리장드와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소설 속에서의 묘사에 의하면, 그는 멜리장드의 미모가 아니라 외유내강의 올곧은 성정, 선량함과 따뜻한 마음씨에 반했으니까. 외양에 대한 끌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시들어가겠지만, 단단하고 찬란한 내면에 반한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그래, 어차피 그는 내 가문도 모르는 데다가, 3년이면 첫눈에 들어왔던 사람 정도는 잊고도 남을 시간이다. 애초에 말 두어 마디 주고받은 게 다니까. 찜찜한 기분을 그렇게 달랬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입 밖으로 내뱉겠는가. 생각을 감추며 둘러댔다. “아, 멜리장드의 방을 보니까 착잡해서요.”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방금까지 작정하고 사람 죽일 화려함으로 무장한 황후와 황녀의 공간에 있다 와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경건의 궁에 있는 멜리장드의 방이 더 초라해 보인다. 멜리장드가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이 정도면 지낼 만한 방인걸요. 후작저가 하도 화려해서 그렇지.” 속 좋게 이 정도면 괜찮다는 말을 하던 멜리장드가 내 시선에 입을 합 다물었다. 장난합니까, 언니? 여기서 지내다가 고운 얼굴 다 상하려고! 객을 대접하기 위한 응접실은커녕, 향유와 화장품을 놓을 선반도, 패물과 장신구를 보관하기 위한 잠금쇠 달린 캐비닛도, 심지어 이 방에 배정된 전속 하녀조차 없다. 이 점을 지적하자 멜리장드는 납득하지 못한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결혼 전에도 전속 하녀 없이, 여기와 비슷한 방에서 살았는걸요.” “멜리장드!” 한없이 순진한 말에 답답해 이마를 짚었다. “멜리장드가 보덴 준남작의 영애일 때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제가 계속 말했을 텐데요. 멜리장드는….” “적법한 레비제트 후작 부인이라구요?” 반사적으로 대답한 멜리장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덴가의 영애는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레비제트의 후작 부인은 그럴 수 없어요.” 신중의 궁이나 자애의 궁에 딸린 방들의 대부분은 보석이나 나무, 꽃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이름이 붙은 방들은 그냥 방이라기보다는 작은 응접실과 욕실까지 딸린 작은 아파트먼트에 가깝다. 레비제트 후작 부인이라면 그 정도 되는 방에서 기거해야 하는데. 멜리장드가 눈꼬리를 축 떨어뜨렸다. 애처로운 강아지 같은 그 시선에 살짝 죄책감이 느껴져서 덧붙였다. “그리고 자애의 궁에서 여기까지는 너무 멀어요. 한참을 걸어와야 한다구요.” 멜리장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세상에, 그러면 안 되겠네요.” “그렇죠. 사교 행사는 거의 다 자애의 궁에서 열리….” “절대 알릭스를 이 뙤약볕 아래 한참 걷게 할 수는 없어요!” 잠깐, 포인트가 왜 그쪽으로 잡히죠? 잠시 말문이 막힌 사이 멜리장드가 고민에 빠졌다. “그러면, 어떡하죠? 이제 와서 자애의 궁으로 방을 바꿔 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요. 어깨를 으쓱하자 멜리장드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 폐하께서 의도가 있으시니 이 방을 내어 주셨겠죠. 그리고 폐하께서는 쉬이 뜻을 거둘 분으로는 보이지 않아요.” 잘 캐치했네. 원작 이 시점에서는 마냥 순진해서 주눅만 들어있던 멜리장드인데, 조금의 충고와 격려를 곁들이자 여주다운 영민함으로 단숨에 황궁의 생리를 읽어낸다. 슬기로운 차기 대공비가 되겠어. 남주는 좋겠다, 이런 똑똑이 멜리장드랑 결혼해서. 내가 다 뿌듯한 느낌에 벅차오른 눈으로 고개를 대차게 끄덕였다. “그럼, 어떡할까요?” 저는 황후 폐하의 뜻을 돌릴 방법을 아직 모르겠어요. 멜리장드가 미간을 살짝 좁히자 진주같이 뽀얀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미간을 문질러 펴 주니 멜리장드가 살짝 뺨을 붉혔다. 표정 관리를 잘하지 못한 게 부끄러운가. 우리 사이에서는 그렇게까지 관리할 필요 없는데. 살짝 서운한 기분이 들 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죠. 당분간 내 방에서 지내요.” * * * '경건제'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느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전설은 지금까지도 굳건했다. 제국의 명운을 건 전투를 앞둔 그가 산에서 기도하던 중 신의 천사를 만났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승리의 천사라고 불리는 빅투아르가 손수 황제에게 승리의 축복을 내린 것이다. 천사의 축복을 받고 승리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설화는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빅투아르 천사의 하얀 날개는 승전을 기원하는 상징이 되어 황제의 무구에, 전차에, 제국군의 문장에 박혔다. 그 뒤로 전쟁을 앞둔 많은 군주가 비슷한 징조를 갈망해 왔다. 아름다운 신의 천사를, 승리를 약속해 주는 길조를. 대공령으로 돌아가기 위해 황궁의 워프 게이트 앞에 선 리산데르는 천장에 그려진 빅투아르 천사와 아우구스투스의 프레스코화에 눈길을 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악착같이 승리를 쟁취할 자신감 따위 없는 나약한 자들이 핑곗거리를 늘어놓는 것이라고 비웃고 넘겼을 전설이었다. 내게는 신의 천사가 나타나지 않아서 졌다느니, 우습지도 않았다. 그녀를 보기 전까지는. 계모의 혹독한 학대를 겪은 유년 시절 이후 그는 추악한 속내를 감춘 채 아양을 떠는 귀족들에 대한 역겨움을 누를 수가 없었다. 특히 대공비 자리를 노리고 접근하는 여성들에게 학을 떼는 까닭에, 리산데르는 거의 대공령에서만 지내며 황도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전쟁 허가를 받으러 오는 것만 아니었다면 올 일이 없었을 황궁이었다. 황궁 공기에 떠도는 질척한 아부와 추파가 몸에 달라붙는 듯한 불쾌함에 서둘러 돌아갈 생각으로 정원을 가로지르던 도중, 그는 그녀를 보았다. 수수하지만 결코 초라하지 않은 흰 드레스를 입고 상수리나무 아래 차분하게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여성. 별다른 장식 없이도 햇볕 아래서 밝게 빛나는 붉은 금발은 마치 루비가 박힌 황금의 왕관 같았다. 거장이 심혈을 다해 그린 그림 속 천사 같은 모습. 우습게도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 떠오른 것은 빅투아르의 전설이었다. 목전에 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줄 천사가 자신에게 내려온 것인가. 리산데르는 홀린 듯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듯 그녀가 눈을 떴다. 탐욕과 악의로 탁해지지 않은 올곧고 신비로운 눈동자를 본 순간, 리산데르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알릭스입니다.’ 알릭스. 그가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아는 것은 이름뿐이다. 어느 가문의 여식인지도 몰랐으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난생처음으로 그의 심금을 울린 여인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그가 가질 모든 승리와 영광을 바칠 만한 여인이. 리산데르는 그녀가 사라지며 떨어뜨리고 간 리본을 품에서 꺼냈다. 그의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리본 위에 새겨진 백합과 고양이가 복잡하게 얽힌 자수를 덧그렸다. “퍼시발.” 나직하게 부관을 부르자 그가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네, 대공 각하.” “백합과 고양이를 문장에 사용하는 가문을 전부 알아 와라.” 뜬금없는 명령에 퍼시발이 잠시 멈칫했다가 부복했다. 일견 뜬금없게까지 들리는 명이었으나 틀림없이 어떠한 의미가 있을 것이었다. 그에게 하명한 이는 북부의 주인이었으므로. * * * 머리에 찔러 둔 마지막 핀까지 빼내자 거울 속 실루엣의 붉은 금발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내가 머무는 아마릴리스의 방에 배정된 전속 하녀들이 능숙한 손길로 드레스를 벗기며 뻣뻣하게 굳은 근육을 따라 연고를 문질렀다. 이내 묵직한 드레스와 장식들을 다 떨친 내가 미리 향유를 배합해 둔 욕조에 몸을 담그는데, 벗은 옷을 정리하던 하녀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드레스와 짝이던 리본은 어디에 빼 두셨나요, 마드모아젤?” 아. 그제야 언제부턴가 손목이 비어 있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리본은 이게 문제다. 귀금속 장신구들은 특유의 묵직한 무게감이 있어서 있고 없고의 차이가 극명한데 하늘하늘한 리본은 사라져도 눈치채기가 어렵다. 언제부터 없어진 거지? “어머, 어딘가에 떨어뜨렸나 봐.” 매듭이 조금 불안불안하더라니 풀렸나 보군. 보석 팔찌 잃어버린 것보다야 덜하지만 나름 자수가 잘 빠진 물건이라서 그냥 잃어버리긴 아쉽다. 청소하는 이들에게 수소문해 보라고 이르자 하녀들이 고개를 숙이며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으니 누군가가 발견하면 가져오겠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대리석 욕조 벽에 편하게 몸을 기대자 하녀 하나가 기름을 먹인 종이에 싼 서류 뭉치를 건넸다. 서류를 펼치자 이번 분기 지롱드의 세수 내역과 예산에 대한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아, 지롱드 지방은 어머니가 지참금으로 가져오셨다가 내게 물려주신, 그리고 다시 내 지참금이 될 작은 성과 그 주변의 마을이다. 크게 눈에 띄는 곳은 아니지만 달콤한 스파클링 와인이 유명한 곳이다. 조만간 한번 와인을 궤짝으로 공수해 오게 하리라고 생각하며 빠르게 서류를 읽어 내렸다. 포도 생산량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하니 양조세는 그대로 두자. 올해는 직접 방문할 계획은 없으니 성 관리에 배정된 예산을 최소화하고 그 돈으로 축제에 건포도라도 뿌리라고 해야지. 민심 좀 잡을 때 됐지. 행간을 빠르게 읽어 내리며 계산하고 결정을 내렸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혹독한 교육을 받아서 영지 관리에는 어느 정도 잔뼈가 굵다고 자부한다. 나 정도면 꽤 괜찮은 영주감이라고. 스스로 자화자찬하고 있는데 욕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숙녀의 목욕 시간을 방해하는 거지? 눈썹을 추켜올리자 하녀 한 명이 황급히 나갔다가 이내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저, 황녀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마드모아젤.” 뭐라고? 하녀들이 서둘러 가져 온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내고 실내복으로 환복한 후 응접실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티 테이블에 불퉁한 표정으로 앉은 엘레네였다. 그리고… 굳어 버린 멜리장드. 예상치 못한 조우에 멈칫했다. 잠깐, 이 조합. 장차 최강 보스 악녀가 될 사람과 현직 여주 조합 아냐? 어쩐지 살벌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이상하다, 이런 분위기 3년은 멀었는데. “어디 가?” 뾰족하게 날 선 목소리에 뜨끔해서 냉큼 자리에 앉았다. 엘레네가 입을 열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어째서, 레비제트 후작 부인이 이 방에 있는 거지?” “…….” “내가 이 방을 내준 사람은 분명 알릭스일 텐데.”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애써 시선을 돌렸다. 안절부절못하는 하녀들에게 방 밖으로 나가 있으라고 손짓하자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사라졌다. 하긴, 나한테나 친구지 이들에게는 눈도 못 마주칠 황족이니까. 사실 부럽다.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화가 난 황족은 나도 불편하다고. 하녀들이 나가자 엘레네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 아마릴리스의 방을, 다른 사람이랑 같이 쓰라고 내준 줄 알아?” 아메티스트의 홀에서 본 우아하고 새침한 황녀의 모습과는 손바닥 뒤집듯 달라진 모습에 멜리장드가 충격받았는지 멍하니 엘레네를 바라보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거리는 엘레네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어쩔 수 없잖아. 경건의 궁까지는 너무 멀어.” “12년.” 불쑥 엘레네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숫자가 뜬금없었다. “12년 전, 내가 이 방을 네게 내주었지. 그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이 방에 들여서 지낸 적이 없으면서.” 그걸 다 세고 있었어? “어떻게, 만난 지 한 해도 채 되지 않은 사람을, 방에 들일 수 있어! 나도 다른 방을 쓰는데!” 엘레네가 소리를 지르고 입을 다물자 분위기가 싸해졌다. 아연하게 엘레네를 바라보았다. 얘 좀 보게. 왜 갑자기 이렇게 유치하게 굴지? 이전에도 물론 자신이 내 가장 친한 친구임을 강조한 적이 몇 번 있긴 하지만 둘만의 공간, 지극히 사적인 자리에서나 그랬다. 엘레네가 타인이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까지 나와의 관계를 밀어붙인 적이 있었나? 일단 지금까지는 없다. 원작 소설 속에서도 이렇게까지 나와의 우정을 쟁취한답시고 유치찬란한 언사를 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럼 지금은 대체 왜? 적당한 이유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가 퍼뜩 떠오른 사실에 생각이 머물렀다. 정말 코웃음을 칠 정도로 우스운 생각이었으나 이걸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일단, 엘레네는 이 라무아 제국의 적통 황녀이고 황족이지. 한 학자는 이 세계에서 본디 가장 탐욕스럽고 오만한 종족은 황족이라고 했다. 역대 황제들과 그들의 동기들, 자녀들이 그랬듯이. 라무아 황족의 피를 짙게 물려받은 엘레네는 절대로 자신이 가졌다 생각하는 이의 우선순위에서 제가 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원작 이야기 속에서도 대공이 자신을 봐 주지 않으니 분노하고 더욱 광적으로 굴지 않나. 자신이 누군가의 뒤로 밀려날 수도 있다는 자각이 생기는 즉시 상대에게 더 강한 집착을 내보이는 것이다. 뭐, 조금 저렴하고 쉽게 말하자면, 그냥 황족들이 밀당이 잘 먹히는 족속들이라는 뜻이다. 아침 드라마로 치면, ‘훗, 나를 안중에도 안 두는 여잔 네가 처음이야.’라고 말하면서 질색하는 여주 쫓아다니는 재벌 남주 같은 심리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치면 지금 엘레네는 재벌 3세 남자 주인공이고, 나는 재벌 남자 주인공의 플러팅은 뻥 차버리고 웬 듣보 서브남이랑 깨 볶고 있는 여자 주인공인가. 의도치 않은 상황에 헛웃음만 나왔다. 아니라고 믿고 싶다. 내가 생각했지만 비약이라고. 하지만 이게 아니면 이 응접실의 냉랭한 분위기는 설명이 안 된다. 물을 한 잔 떠다 놓으면 바로 쩍 얼어 버릴 것같이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황녀 전하께서는, 그러면 알릭스를 12년이나 알아 오신 건가요?” 침묵을 조심스럽게 깨뜨린 것은 멜리장드였다. 엘레네가 도도하게 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13년일세. 6세 때 처음 만났지.” “어머나, 정말로 오랜 우정이군요.” “그렇네. 아마 올해에야 처음으로 알릭스를 보았을 자네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오랜 세월이지.” 영역 표시하는 골목대장 꼬마처럼 유치찬란한 말투에 멜리장드가 눈을 처연하게 내리깔았다. 그렇군요. 이슬을 맞은 백합처럼 가련한 눈꺼풀이 잘게 흔들렸다. “외람되오나, 황녀 전하가 부럽습니다. 알릭스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볼 수 있으셨다니.” 왜 이야기가 거기로 흘러? 당황한 나를 남겨 두고 멜리장드가 말을 이었다. “분명, 알릭스는 어린 시절부터 우아하고 아름다웠겠죠. 아니면, 사랑스럽고 귀여웠나요?” “사랑스럽고- 조금은 당돌한 편이었지. 자네는 보지 못했겠지만.” 어머. 탄성을 터뜨린 멜리장드에게 엘레네가 과시하듯 처음 본 날 내가 입었던 샛노란 드레스, 적금발에 달고 있던 에메랄드 핀, 여덟 번째 생일선물로 주고받은 서로의 문장, 첫 살롱 데뷔 등 추억 이야기를 쏟아냈다. 멜리장드가 눈을 반짝이며 경청할수록 엘레네는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이건 무슨 일이지? 갑작스럽게 반전된 분위기 속에서 나 혼자 적응을 못 하고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나의 열 살 생일 때 함께 그린 초상화도 가지고 있지. 지금은 앙드레트로 돌아간 화가 브룅 경이 라무아 제국에서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네. 알릭스는 그때 머리를 땋아 내리고 눈동자에 잘 어울리는 녹색 벨벳 드레스를 입었었다네.” “정말로 사랑스러운 모습이겠어요! 언젠가, 꼭 기회가 닿으면 그 그림을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흠. 자네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내 오늘 한번 보여 주도록 하지.” “오, 정말이신가요?” “알릭스와 내 공고한 우정을 기념하기 위함이지, 절대 자네가 마음에 들어서 보여 주는 건 아닌 것은 알고 있게!” 어느새 의기투합한 두 사람이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방 밖으로 떠났다. 황급히 문가로 다가가서 지켜보니 황족 전용 회랑이 있는 복도를 향해 사라져 가는 두 사람이 보였다. 얼핏 보면 화기애애해 보일 정도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방 안으로 돌아와 스툴에 주저앉자 어느샌가 돌아온 하녀가 잽싸게 찬물을 따라 건넸다.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유리잔을 받아 이마에 대면서 뜨거워진 머리를 식혔다. 마치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것 같다. 방금, 뭐였지? * * * “멜리장드, 괜찮아요?” 전날 한참 소동 끝에 돌아온 멜리장드는 생각보다는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어쨌든 지고하신 황족, 그것도 직계 황녀에게 정신 공격을 당한 것 아닌가. 걱정스레 그녀의 낯을 살폈다. “괜찮아요. 어차피 알릭스의 가장 절친한 친우는 황녀 전하. 제가 어찌 그 자리를 노리겠어요.” 아니, 그걸 물어본 것은 아닌데요. 멜리장드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신성한 혼인 서약에 의해 가족으로 묶인 자매는 저니까 괜찮아요.” 음…. 언제부턴가 멜리장드의 대답들이 묘하게 핀트가 엇나간 느낌이다. 어쨌든 괜찮아 보이기는 하네. 살짝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접었다. 그것 말고도 생각해야 할 일이 수백 가지다. 일단, 오늘의 사교회 주최자에게 다가가서 인사하는 것부터. “마드모아젤 레비제트!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요.” “공작 부인, 다시 만나 뵈어서 기쁩니다.” 오늘 우리가 온 곳은 슈농트 공작 부인의 살롱이었다. 황제의 손위 누이이자 부유한 과부인 슈농트 공작 부인은 넉넉한 재정으로 수많은 예술가를 키워온 후원자계의 큰손이었다. 자연히 그녀의 살롱엔 유명한 중견 예술가나 재능 있는 신인들이 넘쳐났다. 자신만의 공고한 영역을 구축한 그녀는 황후나 내 어머니 등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몇 안 되는 궁정의 거물 중 하나였기에, 그녀의 사교회는 아직 자신의 아군을 채 꾸리지 못한 멜리장드가 영역을 넓혀 나가기에 가장 적합한 행사였다. 슈농트 공작 부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 레비제트에 경사가 있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지요.” “네, 신의 축복으로 새로운 가족을 맞아들이게 되었지요. 부인께 제 새언니를 소개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공작 부인이 허하자 멜리장드가 나붓이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비제트 후작가의 멜리장드 실비아입니다.” 흠잡을 데 없는 예법과 외양에 까다로운 심미안도 만족했는지 슈농트 공작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반가워요, 레비제트 후작 부인. 부디 오늘 좋은 시간을 보내면 좋겠군요.” “공작 부인의 격조 높은 살롱에 대해 익히 들어왔는데, 이리 자리할 수 있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정중하되 비굴하지 않은 인사에 공작 부인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신분에 상관없이 재능이 있는 예술가를 후원하는 슈농트 공작 부인이라면, 멜리장드의 한미한 출신 가문 정도야 아랑곳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적중했다. 슈농트 공작 부인과 화기애애한 인사를 나누고 멜리장드와 돌아섰다. 여기저기 흩어진 귀빈 중 도움이 될 만한 이들을 찾아야 한다. 주변을 빠르게 훑고 멜리장드의 귀에 속삭였다. “오른쪽, 사자 조각 앞에 선 숙녀요.” 멜리장드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살랑살랑 사자 조각상 앞으로 향했다. 마치 아무 의도 없이 조각상을 보려는 것처럼. 여유롭게 조각을 감상하는 척하는 멜리장드의 곁에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다가갔다가 짐짓, 뜻밖의 조우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드모아젤 소피! 여기서 다 만나네요! 이게 얼마 만이에요?” 캐러멜빛 머리채를 처녀답게 땋아 늘어뜨린 여성이 반갑게 웃었다. “마드모아젤 레비제트? 어머, 집안일 때문에 영지로 간 줄 알았는데. 일찍 오셨군요?” “신께서 도우셔서 일이 일찍 끝났죠. 아, 이쪽은 제 새언니, 멜리장드예요. 마드모아젤 소피께 제 새언니를 소개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이렇게 우연을 가장한 부딪힘과 물 흐르듯 이어지는 소개로, 살롱을 한 바퀴 돌기도 전에 멜리장드는 상당히 도움이 될 만한 인맥들을 여럿 건지게 되었다. 해군 부제독의 막내딸인 소피 랑비제, 향후 유력한 황태자의 측근으로 꼽히는 강피르 자작, 선대 황후의 시녀장이었던 노아이유 백작 부인 등. 아주 화려한 인맥은 아니더라도, 낯을 터 둔다면 원작에서처럼 마냥 궁정에서 외톨이로 지낼 일은 없을 이들. 이들 대부분이, 외모만으로 후작 부인 자리를 꿰찬 천박한 여인이라는 소문과 다르게 상당히 우아하고 교양 있어 보이는 멜리장드의 모습에 호감을 품은 듯했다. 심지어 랑비제 제독의 영애인 소피는 멜리장드와 나를 그녀의 티파티에까지 초대했으니까, 나쁘지 않은 수확이다. 소정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슬슬 돌아갈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레비제트 후작 부인, 그리고 알릭스.” 익숙하지만 반갑지는 않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멜리장드가 잠시 놀란 듯 부채로 입을 가렸다. “어머, 줄라드 남작님. 여기서 만나 뵐 줄은 몰랐네요!” 젠장, 당신은 왜 또 여기서 나와. 불편한 마음 위에 가면을 쓰고 생긋 미소를 덧그렸다. “오랜만이에요, 칼렙.” “반갑습니다, 알릭스. 그리고, 후작 부인.” 그가 나와 멜리장드가 내민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나는, 멜리장드의 손에 칼렙이 입술을 대는 순간, 구색 정도만 맞춘 결혼반지 위에 그의 시선이 머무르는 장면을 포착했다. 선량해 보이는 개암색 눈동자 위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당사자인 멜리장드조차 알아채지 못했을 짧은 내비침. 아마 내가 전생의 기억, 특히 원작을 읽은 기억이 없었다면 알아채지도 못했을 찰나의 불꽃이었다. 멜리장드는 그저 화사하게 웃고만 있었다. 하긴, 멜리장드에게 칼렙은 결혼식 들러리까지 서 준 남편의 친우일 뿐이다. 그러니 그녀를 괴롭히려고 하는 이들의 배후에 칼렙이 서 있음을 알 리가 없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고. 누가 레비제트 후작 부인의 연적이 칼렙 줄라드 남작임을 알겠는가? 신경을 곤두세운 내 속마음도 모르고 멜리장드는 살갑게 말했다. “궁정에서는 처음 뵙는 것 같네요. 언젠간 식사 자리라도 함께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지요. 다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긴 대화는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선약이 있어서요.” 칼렙이 정중하게 말했다. 이야기하는 걸 보니 오늘 따로 준비한 계략은 없는 것 같다. 그럼, 오늘 마주침은 뭔가 작정한 게 아니라 순전한 우연인가? 경계를 살짝 누그러뜨렸다. 그래, 제아무리 날고 기는 칼렙이라도 사교계의 터줏대감이자 황녀 출신인 슈농트 공작 부인의 살롱에서 대놓고 소란을 피울 수는 없지.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다른 이와 대화를 시작하는 그를 잠시 눈에 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어쩐지 가까이 있기에는 찜찜해 멜리장드의 팔을 잡아끌고 다른 쪽으로 향했다. 슈농트 공작 부인이 얼마 전 발굴해 낸 신진 화가가 그린 유화 전시를 지날 때였다. “어머, 마드모아젤 레비제트, 그리고- 레비제트 후작 부인.” 귀에 거슬리는 비음 섞인 높은 톤에 진한 사향. “이제서야 만나 뵙게 되네요.” 그녀를 따르는 귀부인 무리의 선두에 선 퐁텐 백작 부인이 부채를 살랑이며 웃었다. “…퐁텐 백작 부인.” 방자하다. 황궁에서 시녀를 거느리고 다닐 수 있는 이들은 황족뿐이거늘, 감히 애첩 주제에 황녀 출신인 슈농트 공작 부인의 살롱에, 귀부인들을 위시하고 시녀를 거느린 황후처럼 등장하다니. 예법에 어긋나지 않게 그녀에게 인사했으나, 퐁텐 백작 부인이 뿌린 사향 향수 냄새만큼이나 짙게 느껴지는 듯한 악의에 속이 거북해졌다. 그나저나, 기다렸다는 듯한 저 언사는 뭐지. 멜리장드 쪽을 살짝 보니, 그녀 역시도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살짝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나저나, 새 레비제트 후작 부인께서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하실 줄은 몰랐네요. 지방에서는 아무래도 화가를 접하기가 어렵잖아요. 주로 어떤 풍의 그림을 좋아하시나요?” 촌에서 올라온 주제에 네가 예술을 아느냐- 고 살짝 돌려 까는 화법이었다. 여기서 멜리장드가 ‘사실 저는 잘 모른다.’는 식으로 대답하면 바로 무식한 시골 사람으로 찍히게 된다. 대답 잘해야 하는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는데 멜리장드가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는, 브룅 경의 화풍이 마음에 들더군요. 지금은 앙드레트로 돌아가서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요.” 좋아, 여기까진 무난한 대답이다. 멜리장드가 말을 이어 갔다. “시인 라이네는 그림을 두고 순간을 영원에 박제하는 것이라 했다죠. 그 시상을 바탕으로 평가한다면, 브룅 경은 틀림없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여 새기는 재능이 가장 뛰어난 화가 중 한 명이 아닐까요? 그 세밀한 붓끝에 담긴 세계를 보자면 겉모습뿐 아니라, 화가가 읽어낸 대상의 본질까지 엿보는 듯한 느낌이랍니다.” 생각보다 식견이 풍부해 보이는 답안에 퐁텐 백작 부인이 살짝 당황한 듯 부채만 살랑였다. 어디서 배운 걸까. 생긋 미소 지은 멜리장드가 아주 작게,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사실 황녀 전하께서 어제 회랑에서 말씀해 주신 거예요.’ 아, 그런 거였어? 살짝 헛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뭐 어때, 컨닝도 실력이야! 이내 빠르게 표정을 수습한 퐁텐 백작 부인이 오만하게 턱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나저나, 여기 전시된 그림을 보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군요.” 무슨 그림? 옆에 전시된 그림을 돌아보았다.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독수리를 굵은 붓질로 거칠지만 힘차게 묘사한 그림이었다. “그 이야기, 꼭 후작 부인께 들려 드리고 싶은걸요?” “당제로사.” 백작 부인의 옆에 선 귀부인이 만류하는 듯한 몸짓을 취했다. 그러나 퐁텐 백작 부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을 시작했다. “어느 날, 새들이 모여서 왕을 뽑기로 했답니다. 가장 화려하고 멋진 새를 왕으로 만들기로 했거든요.” 전혀 안 궁금한데요. 하지만 자리를 피할 타이밍을 놓친 나와 멜리장드는 잠자코 퐁텐 백작 부인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새가 자신의 최선을 내보이기 위해 치장을 했죠.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까마귀는 자신을 갈고닦는 대신 편법을 쓰기로 했답니다. 까마귀는 다른 새들의 깃털을 몰래 훔쳐서 자기 몸에 붙였어요. 공작새의 청록 깃털, 앵무새의 노란 깃털, 독수리의 흰 깃털…. 알록달록한 깃털로 치장한 까마귀는 결국 새들의 왕으로 뽑혔답니다. 그런데, 어머, 이게 웬일일까요?” 퐁텐 백작 부인이 과장하듯 숨을 들이마셨다. “그 사실을 먼저 알아챈 것은 앵무새였어요. 앵무새가 저기 자기 깃털이 있다고 소리를 질렀죠. 그리고 모인 새들은 까마귀의 몸에 꽂힌 것이 자신들의 깃털임을 알아챘답니다. 화가 난 새들은 까마귀에게 달려들어서 자기 깃털을 뽑아 버렸죠.” 어느 순간부턴가 살롱의 모든 사람이 이쪽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의 퐁텐 백작 부인은 절대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여든 시선을 즐기는 듯했다. 그렇게 관심이 좋으면 귀부인 말고 광대로 태어나지. 적성에 딱 맞겠구먼. 차게 식은 눈으로 퐁텐 백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궁중에 왕의 광대가 사라진 지는 몇백 년이 지났지만 어떻게 그 제도를 부활시킨다면 나는 적임자로 퐁텐 백작 부인을 추천할 것이다. 하긴, 광대도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잘 맞출 정도로는 똑똑해야 한다만. 당제로사 퐁텐 백작 부인의 가벼운 두뇌를 염두에 두자면, 그녀가 만약 광대가 된다면 왕의 심기를 거슬러서 성벽에 모가지가 걸린 수많은 광대의 뒤를 따를 것이다. “결국 새카맣고 초라한 몸을 들켜 버린 까마귀는 부끄러운 마음에 숲으로 도망쳐서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고 해요!” 비극 오페라의 클라이맥스 아리아를 부르는 프리마돈나처럼 극적으로 외친 퐁텐 백작 부인이 멜리장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롯이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을 빌린 채로 제 것인 양 으스대는 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거라는 이야기죠. 퍽 교훈적이지 않나요?” 누가 봐도 저격이지, 이거? 멜리장드의 입매가 굳었다. 그녀가 오늘 걸치고 있는 것은 내가 내어 준 드레스와 장신구였으니까. 퐁텐 백작 부인이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꽤 타격이 큰 공격에 성공했다는 자부심. 얼굴에 살짝 열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알릭스.’ 멜리장드가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며 내 손을 두드렸다. 차분한 손길에 쓸려나가듯 노기가 진정됐다. 그래, 여기서 싸워 봤자 퐁텐 따위와 같은 급으로 격하된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때, 먼발치에서 이쪽을 주목하고 있는 칼렙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자의 직감으로, 옅은 웃음이 그의 입가를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 일행에게 무어라 말하는 장면이 보였으나, 염려를 가장한 가면 밑의 민낯은 비웃음을 면면에 띄고 있으리라. 네놈이 꾸민 짓인가. 하긴, 퐁텐 백작 부인처럼 어리석은 이가 저런 이야기를 곧바로 생각해 낼 리가 없을 터다. 바람잡이 하나는 잘 잡았다. 자기는 쏙 빠지고, 바람잡이가 대신 북 치고 장구 치고. 바득 이를 갈았다. “이게 무슨 소란인가!” 슈농트 공작 부인이 노한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멜리장드가 말려줘서 다행이다. 여기서 같이 싸웠다면 슈농트 공작 부인에게 높은 확률로 모두가 찍혔을 것이다. 그 타격은 황궁에서 나름의 위치를 점한 나나 퐁텐 백작 부인보다 신인인 멜리장드에게 더 컸으리라. 슈농트 공작 부인이 퐁텐 백작 부인의 무리를 크게 꾸짖고, 사색이 된 무리가 여우 만난 암탉 떼처럼 흩어지는 것까지 지켜봤으나 한번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분노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와서 마냥 찬물만 들이켜는데 멜리장드가 조그맣게 물었다. “괜찮나요, 알릭스?”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녀를 향해 되물었다. “왜 내게만 괜찮냐고 물어봐요?” “…네?” “설마 눈치 못 챈 것은 아닐 거 아니에요. 퐁텐 백작 부인, 그 여자가….” “…그래요. 저를 모욕하려고 했죠.” 살짝 눈을 내리까는 멜리장드에게 물었다. “멜리장드. 멜리장드는 화, 안 나요?” “…….” 아직까지는 원작처럼 각성 전이라서 그냥 속으로만 삭이려는 건가. 호구 같을 정도로 착한 그 모습 말이다. 화가 나면 좀 풀고 살아야 하는데, 사람이. “…휴. 뭐, 아무렇지도 않다면 됐어요.” 단념하고 돌아섰다. 방을 나가려는데 멜리장드가 작게 말했다. “…화, 나요.” “…네?” 문고리를 잡은 채 뒤를 돌아보자 멜리장드가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도, 사람이니깐. 다 참고, 감내하고, 속으로 삭이면서 웃으려고 해도 화가 날 수밖에 없어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멜리장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시골의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난 게 제 잘못도 아닌데. 제가 하기 싫다는 레비제트 후작의 발목을 붙잡고 떼를 써서 결혼한 것도 아닌데.” 멜리장드가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저들이 저를 그렇게까지 모욕함으로써 얻는 것이 무엇일까요?” “…멜리장드.” “맞아요. 자격도 되지 못하는 제가, 운이 좋아 대귀족과 사랑에 빠져서 궁정에 들어왔어요. 결혼 전에 제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한참 밑지는 결혼이니…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참으라고.” 멜리장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섣불리 다가갈 생각이 들지 않아 아연히 그녀만 바라보았다. “그래서, 참기로 했어요. 결혼 전까지만 해도 사랑을 속삭이던 약혼자가, 남편이 된 후 갑자기 마음이 변해서 나를 찾지 않아도, 소박맞은 나를 하녀들이 비웃어도, 후작 부인의 감투를 써 놓고도 제대로 된 방도 못 받고, 권위도 세우지 못한 허수아비라는 수군거림이 들려도.” 멜리장드의 커다랗고 푸른 눈 위에 눈물이 한 방울 고였다 툭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손으로 움켜쥔 치맛자락이 점점이 짙게 물들었다. “참을 수 있었는데, 참기로 했는데. 그래도 알릭스가 있어서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참으려고만 해요.” 무겁게 입을 열자 멜리장드가 시무룩하게 답했다. “저는, 온전히 ‘진짜인’ 후작 부인이 될 수 없을 테니까요.” 예상치도 못한 말에 당황했다. “…무슨 소리예요?” “원래 레비제트 후작 부인의 자리에는 황녀 전하가 내정되어 있었다고 들었어요.” 생각도 못 한 말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순간 멈칫했다. 멜리장드가 작게 말을 이어 나갔다. “역대 레비제트의 안주인들은 그 명예로운 이름에 걸맞은 유능함이나 배경을 가졌었다고 들었어요. 저는, 황녀 전하처럼 고귀하지도 않고, 가문에 큰 힘과 명예를 보태줄 수도 없잖아요. 그렇다고 어머님처럼 의무를 지고 가문을 이끌어 나갈 역량도 되지 않고, 알릭스처럼 현명하고 선한, 숙녀의 귀감이 되지도 못해요.” 마지막 말이 조금 이상한데요. “…그래서, 저는 그냥 허수아비가 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적어도 여기서는 흉년에도 배가 고플 일은 없을 테니까. 옷 두 벌로 한 계절을 겨우 버틸 필요가 없으니까. …알릭스처럼 좋은 사람이 곁에 있으니까. 진짜 후작 부인으로서의 권위를 감히 욕심낼 생각은 않으려고. 그냥, 허수아비면 허수아비답게 얌전히 있으려고 했어요.” 멜리장드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런 제가 감히, 화를 내도 되는 걸까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냥 한없이 순진한 줄 알았던 로맨스 소설 속 여주인공의 마음속을 휘몰아치는 검은 절망을 엿본 기분이다. “…멜리장드. 멜리장드는 누가 뭐래도 적법한 후작 부인이에요. 누가 뭐래도, 신과 인간 앞에서 맹세한 것을 뒤집을 수는 없어요.” 이혼한다면 모르겠지만. 하지만 아직 이혼은 머나먼 이야기니까. “…적법성은 가졌어도, 결코 온전한 레비제트의 안주인은 될 수 없겠죠.” 멜리장드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늘진 얼굴을 보자 목에 공이라도 턱 걸린 듯 갑갑했다. 충동적으로 목에 걸린 공을 뱉어 내듯 말을 던졌다. “멜리장드, 진심으로, 후작가의 진짜 안주인이 되고 싶나요?” 멜리장드가 눈을 잠시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마주한 듯한 그 얼굴에 살짝 죄책감이 치밀어 올랐다. 주변의 압박에 자신의 한계를 정해 두고 갇혀 버린 한 마리 나비 같은 여인. 누구보다 찬란한 날개를 가졌음에도, 날아오를 용기가 꺾여버린 가련한 생명체를 닮았다. 전생의 기억을 자각하지 못했다면, 나 역시도 그 불행에 크게 일조했으리라.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요.” 다른 이들이 감히 당신을 허수아비라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어 줄게요. 겸사겸사 엿 먹일 사람도 있으니깐요. “일단 장부 보는 법부터 익히죠.” 남주가 나타나기 전까지만이라도, 진짜 후작 부인이 되어 봐요. * * * 원작 소설에서도 현실에서도, 칼렙은 특유의 호감이 가는 분위기와 재력으로 황도 사교계에서 상당히 유의미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취향, 넉넉한 씀씀이, 사치스러운 습관까지. 그는 신사들의 사교계 중심에 서서 유행을 선도하는 남자이기도 했다. 솔직히 전생의 기억을 자각한 뒤로, 그리고 악행들을 눈치챈 뒤로 그를 좋아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영향력 하나만큼은 인정할 만하다. 문제는 그 막대한 양의 품위 유지비가 어디서 나느냐다. 칼렙이 아무리 공작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공작가를 이을 적자가 따로 있는 상황에서 그는 남작 작위밖에 없는 사생아이다. 칼렙이 가진 남작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은 궁정의 사치를 감당하기에는 훨씬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최신 유행의 중심을 점할 수 있는 재력의 원천은 따로 있었다. 칼렙은 군수 사업에 남몰래 줄을 대고 있었다. 국경 지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분쟁으로 그가 얼마나 이득을 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선전 포고 단계지만 곧 니케리온 대공령과 비제른 왕국의 전쟁은 제국 북부 전체로 번져 나갈 것이리라. 이로 인해 칼렙은 거액의 돈을 벌어들이게 될 것이다. 단, 딱 3년 동안만. 원작 소설 상으로 전쟁이 발발한 지 3년이 되기 전, 리산데르 니케리온 대공이 온 제국을 통틀어 150년 만에 처음으로 검기를 각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장기화할 것으로 예상되던 전쟁은 검기를 각성한 대공에 의해 갑작스럽게 끝나게 되고, 칼렙은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심지어 수익 확장을 위해 줄라드 남작령까지 담보로 잡고 추가로 투자해 둔 상태였는데 투자처가 종전으로 인해 공중분해되어 버렸으니. 그런 그에게 남몰래 재정적 지원을 해 주는 건 앙투안이다. 그때쯤에는 어머니도 영지 관리에서 완전히 손을 떼시는 데다가, 나는 다른 집안으로 시집갔을 때고, 허수아비 아내인 멜리장드는 영지의 재산이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것도 몰랐으니까. 그렇게 레비제트 영지의 혈세는 사랑의 호구 새끼 앙투안에 의해서 칼렙의 값비싼 의복, 식민지에서 공수해 오는 향료와 담배, 사교 클럽 회비, 타운 하우스 유지비 등이 되어 사라지게 된다. 어찌나 해 처먹었던지 나중에 대공비가 된 멜리장드가 레비제트를 뒤엎을 때, 눈에 띄게 부실해져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가문에 경악했을 정도였다. 텍스트로 읽었을 때는 가슴이 뻥 뚫리는 사이다였지만 지금은 내 일이 됐으니 마냥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볼 일도 아니다. 물론 여기에도 대비를 할 계획이긴 했다. 나중에 멜리장드가 대공비가 되었을 때, 조지실 거면 앙투안 놈만 조지고 최대한 가문에는 피해가 없도록 해 달라고 읍소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그리고 더 좋은 방법은? 그 전에 미리 앙투안이 딴 주머니 못 차게 돈 빼돌릴 구석도 착착 막아 두는 거다. 뭐, 그게 겸사겸사 칼렙 놈 엿 먹이기도 되는 거지. 나름의 계산을 마치며 피식 웃었다. 레비제트의 돈은 네놈 사치에는 한 푼도 못 써. 그래서, 내가 지금 멜리장드를 붙잡고 서류 보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거다. 나야 뭐 시집가면 남 될 테니 그때까지 가문 사정에 관여하기도 어렵고, 어머니가 천년만년 장부를 보고 계실 수도 없다. 그래서 적법한 후작 부인이 영지 재정을 관리한다고 하는데 그 누가, 어떤 명분으로 막겠는가. 영지 재정을 감시하고 있는 이가 있는 한, 앙투안이 섣불리 돈을 빼돌려서 칼렙에게 갖다 바치기도 어려워질 거다. 거기다가, 멜리장드가 후작 부인으로서 자신의 역량을 증명해 내고 입지를 굳힌다면, 그녀를 허수아비 후작 부인으로 몰아가는 세력들도 할 말이 없어질 거고. 이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건가- 라고 생각하며 영지에서 보내온 장부 사본을 슥슥 넘겼다. “멜리장드, 여기 좀 볼래요?” 옆에 앉은 멜리장드가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그녀에게 장부 보는 법을 하나하나 설명하자 멜리장드가 하나라도 놓칠세라 집중했다. 훌륭한 학생의 자세에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더 자세히 설명했다. 설명을 마치고 이제 다음 달 예산 배정 서류를 한번 꾸려 보라고 하자 멜리장드가 앵두 같은 입술에 깃펜을 살짝 물고 생각에 잠겼다. 이내 그녀가 빈 종이 위에 사각사각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이게 여주 버프인가. 멜리장드는 정말이지, 귀족가 부인의 책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것치고는 굉장히 영민하고 빠르게 깨우치는 편이었다. 보통 웬만한 귀족 가문에서는 여식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가문의 안살림을 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귀족가의 딸들이 어디로 시집가겠는가. 평민 사내와 귀천 상혼을 하지 않는 이상은 같은 귀족가와 통혼할 터인데, 귀족가의 마나님이 되어서 아무것도 모르면 어찌하겠는가. 한 가문의 안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 가문의 곳간을 관리하는 책무를 지는 것을 뜻한다. 더해서 남편의 부재 상황에는 그 부인이 영주 대행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미혼인 귀족가의 영애들은 기본적인 장부 보는 법, 사람을 쓰는 법, 자잘한 자산을 관리하는 법 등을 배워 둔다. 딸이라도 자기 이름 앞에 땅 한두 쪽은 떼어 받을 수 있는 레비제트 정도의 대귀족이면 아예 영지 전반 행정을 꾸리는 방법을 익히고. 하지만 멜리장드는 그쪽으로는 지식이 전무했다. 원작에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대공가로 시집간 후, 하녀들에게까지 무시당하다가 독하게 공부하는 에피소드가 나오니까. 남주 리산데르에게 대소사를 하나하나 배워 나가면서 사이가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그녀의 무지는 로맨스 소설다운 장치일까? 뭐, 그녀의 친정인 보덴 준남작가는 영지라고 하기에도 구차한 마을 두어 개를 겨우 다스리는 곳이었고, 막내딸인 멜리장드는 평민이나 다름없이 방치되어 자랐다고 했으니 이상할 일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락사락 서류를 넘기는 멜리장드를 관찰했다. “알릭스, 다 했어요.” 멜리장드가 다가오자 손으로 그녀가 짠 예산 계획서와 장부를 대조하며 물었다. “여기, 왜 공용 시설을 짓는 예산을 확충해야 한다고 표기했나요? 세부 내역이… 음, 공용 화장실?” 멜리장드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아, 조금 뜬금없었나요?” “아뇨, 잘못됐다는 건 아니에요. 그저 왜 이런 식으로 생각했는지 궁금해서요.” “음, 영지 범죄율을 좀 봤거든요.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가 다른 범죄에 비해 조금 높은 편이더라구요.” 그게 무슨 상관인지 궁금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멜리장드가 말을 이었다. “많은 평민의 집에는 제대로 된 화장실이 없어요. 귀족들의 저택에는 화장실이 있지만 평민 대부분은 그냥 길가나 풀숲에서 일을 보고….” 멜리장드가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성들은, 이 과정에서 많은 범죄의 대상이 돼요.” “…아.” “…그래서, 일부러, 평소에 피임을 위한 약을 먹는 경우가 많아요. 달루에트라는 풀은 흔한 들풀 중 하나이지만 다른 약초와 적절히 섞으면 피임약이 되거든요. 너무 독해서 월경이 멈춘다는 부작용이 있지만… 아, 미안해요. 다른 곳으로 이야기가 샜네요.” 멜리장드가 살짝 쓰게 웃었다. “음, 그뿐 아니라, 가끔 전염병이 돌 때는 공공 화장실이 있는 마을이 확실히 화장실이 없는 마을보다 더 병이 빠르게 멎었어요. 정확히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저는 어린 시절, 마을 평민 아이들과 자주 어울려서 지냈지요. 그때 알았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다. 나름 지구 21세기의 기억을 가진 나조차도 떠올리지 못했던 방향. 아무리 평민들과 함께 지냈었다고 해도, 상관없어 보이는 요소 간의 인과를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정책을 생각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다. 이 언니는 여기서 게이 커플 커버가 아니라 행정고시를 봐야 하는데. 잘 갈고닦으면 정부 정책의 스페셜리스트가 될 인재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서류를 보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나는 몇 장 이상 보면 질리던데. “힘들진 않아요?” 그녀에게 묻자 멜리장드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재밌는걸요. 그리고… 신기해요.” 하얀 건 종이고 검은 건 숫자인데 신기하다고? 의문을 품고 다시 묻자 멜리장드가 소중한 것을 쓰다듬듯 자간을 어루만졌다. “생각해 봐요. 이 숫자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삶에 바로 영향을 미치는 거잖아요.” 살포시 짓는 미소가 마치 성서 속에 등장하는 거룩한 어머니 같아서 순간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냥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시골뜨기 여자아이인 제가 다른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지배자가 되는 거예요. 숫자 하나를 더 해서 이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도, 더 빼서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겠죠.” 멜리장드가 꿈꾸듯 말을 이었다. “저로 인해서, 누군가가 미소 지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때 저를 기억해 주면 좋겠어요. 저로 인해 웃음 지었노라고. 이 멜리장드 실비아라는 사람의 존재가, 잊히지 않았노라고.”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 봄의 끝자락 즈음에 돌아왔던 라울리 궁정은 늦여름을 앞두고 있었다. 꽃을 감상하며 정원을 거닐던 숙녀들은 찌는 듯한 더위에 대리석의 냉기가 감도는 실내로 사교의 장을 옮겼고, 궁정 주방에서는 하루가 바쁘게 귀한 얼음을 갈아서 빙수를 만들어 올렸다. 냉장고도 없는 이 세계에서 한여름에 얼음을 구하려면 북방의 눈 쌓인 산맥에서 공수해 오거나 귀하디귀한 마법 냉각기를 써야 하니, 시원한 음료는 그야말로 황궁에서만 누릴 수 있는 사치라고 할 수 있다. 온갖 잡다한 생각을 하며 얼음을 넣은 냉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맛에는 좀 맞으시나요?” 다과회의 주최자, 소피 랑비제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레비제트와 같은 파벌에 속해있는 가문의 영애인 소피는 나름 멜리장드가 마음에 들었는지 나와 함께 그녀를 자주 초대하곤 했다. 다행이지. 소피의 모임은 아직은 풋내기지만 장래가 기대되는 젊은이들이 많이 참석하는 모임인지라, 멜리장드가 친분을 쌓기 좋은 곳이었다. “네, 정말이지 향이 훌륭하네요. 부제독님께서 가져오신 건가요?” “네. 밀레디아에서 돌아오시는 항해길에 저를 위해 구해 오셨죠.” 해군인 소피의 아버지가 해외에서 직접 공수해 오는 각종 희귀한 먹거리는 덤이고. 아직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는 밀레디아산 히비스커스차를 차갑게 냉침하여 즐기는 호사는 아무리 황궁이라도 쉽게 누리기 힘든 것이다. 소피가 싱그럽게 웃으며 맞은편에 앉은 마제르 경에게 차를 권했다. 그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지는 모습을 느긋하게 구경하며 수다에 귀를 기울였다. 아, 젊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오는 실없는 수다라고 무시하면 곤란하다. 여기 모인 이들은, 미래에 라무아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자들이니까. 오히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알고 싶다면 귀를 기울여 두는 게 좋다. “그나저나, 그거 들었어요? 대(對) 비제른 전이 말이에요….” 그래, 이런 거. 요즘 사교 모임의 큰 화두 중 하나인 북부 지방의 전쟁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나야 3년 뒤에 전쟁이 끝날 것을 이미 알고야 있지만, 세세한 사정은 잘 모르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물자가 필요하고, 어디의 사정이 좋지 않고, 어디에서 승전을 올렸는지 등등. 소피를 보고 얼굴을 붉히던 마제르 경이 열심히 전쟁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연승을 거두는 니케리온 대공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찬양까지 늘어놓기 시작했다. “니케리온 대공 각하의 검술을 본다면 그 누구도 그분이 북부의 지배자임을 의심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검의 예기는 날카로운 빙풍 같고, 냉엄하신 위엄에 적군조차 굴복한다는 이야기가 돌더랍니다. 검푸른 머리를 얼마 전 짧게 자르셨다는데, 무려 들고 다니시는 검을 한 번 휘두르자 싹둑 잘려 나갔다고 하더군요. 아, 그분이 타고 다니시는 흑마의 이름은 아르고스인데….” TMI가 점점 심해진다. 이러다가 북부 대공 각하의 속옷 컬러까지 나올 기세다. 살짝 불편해지는 화제에 모르는 척 찻잔을 들었다. 원작을 따라간다면 틀림없이 악역 처단자가 될 남주 생각은 별로 하기는 싫은데. 특히 미래의 짝인 여주는 아웃 오브 안중으로, 지나가는 악역 1인 나한테 막무가내로 반했다고 들이대고 사라진 남주라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아, 그나저나, 그 이야기 들었나요?” “무슨 이야기요?” “북풍 한설 같은 그분의 마음을 녹인 레이디가 있대요!” 차를 한 모금 넘기는 순간 들려온 그 말에 사레가 들려버렸다. 커헉헉! “알릭스, 괜찮아요?” 멜리장드가 나보다 더 놀라서 서둘러 손수건을 꺼냈다. “괜, 큭, 괜찮아요. 사레가 들렸네요.” 걱정스레 바라보는 멜리장드를 겨우 진정시키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도 대공의 레이디로 화제가 집중이 된 덕에 기침하는 꼴을 만인에게 주목받는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젊은 청년 중 한 명이 동조했다. “맞습니다. 제 숙부님의 친우가 대공령의 가신으로, 대 비제른 전에 참전하고 있어서 들었습니다. 대공 각하께서는 사모하는 레이디가 계시고, 오로지 그분께 영광을 바치기 위해 싸우리라고 맹세하셨다고 합니다.” 저거, 설마 나야…? 불길한 소름이 척추를 타고 오소소 돋아났다. “맞아요. 대공 각하께서는 가끔 우수에 찬 얼굴로 남쪽을 바라보신다고 해요. 틀림없이 그분의 레이디가 있는 곳이겠죠? 그 레이디에게 정표로 받은 손수건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으신다고 하던걸요!” 어? 나는 손수건 같은 거 준 적 없는데? 살짝 혼란이 오는데 마제르 경이 열성적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지금 장교로 참전해 있는 제 형님이 대공 각하께서 소중히 간직하시는 흰 천을 보았다고 합니다. 한시도 품에서 떼어놓지 않으신다고.” 낭만적인 이야기에 숙녀들이 탄성을 질렀다. 한 소녀가 꿈꾸듯 입을 열었다. “그 레이디가 부럽네요. 대체 누구일까요?” “안타깝게도, 아직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해요. 다만….” 다만 뭐? 혹시라도 내 이름 비슷한 거라도 나올까 봐 온몸에 긴장을 기울였다. “소문으로는, 대공 각하께서 ‘빅투아르’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본 이가 한둘이 아니라던데요.” 빅투아르? 힘이 탁 풀린다. 뭐야, 딴 여자였어? 아무래도 북부의 대공님은 그냥 흔한 금사빠였나 보다. 여주 만나기 전까지 여기저기 반하고 다닌 게 틀림없다. 이거, 좀 캐붕 아닌가? 아무래도 저번에 내가 한 걱정은 헛걱정이었던 것 같다. 원작 남주가 여주가 아닌 나한테 반한 거면 어떡하냐고 설레발을 쳐 댔는데, 알고 보니 상대가 금사빠였다니. 약간의 안도와 어이없음, 무안함이 미묘하게 뒤섞인 기분을 느꼈다. 그나저나, 빅투아르는 또 누구일까. ‘승리’를 의미하는 빅투아르라는 이름은 정말이지 흔한 이름이다. 한국으로 치면 ‘지영이’나 ‘민주’ 정도 될까. 내가 아는 빅투아르만 해도 이 궁정에 서넛은 있을 거고, 맨 앞에 오는 이름이 아니라 두 번째나 세 번째 이름에 빅투아르가 붙는 사람까지 치면 그 수는 열 배는 될 거다. 당장 이 모임의 주최자인 소피의 풀 네임도 소피 빅투아르 안느 랑비제이고, 내 방에 붙어 있는 하녀 이름도 잔느 빅투아르고, 우리 가문의 방계 중에서도 빅투아르가 두 명 있고…. 모르겠다. 손수건까지 주고받을 정도로 유의미한 비중을 가진 ‘빅투아르’는 도대체 누구일지. 일단 원작에서는 절대 안 나왔는걸. “그 정도로 깊이 연모하시는 분이신데, 왜 대공비로 바로 들이시지 않을까요?” “글쎄요. 신분이 한미한 여인인지?” “아니면, 이미 짝이 있어 이루어질 수 없는 분일 수도 있지요.” 북부의 주인에 대한 나름 낭만적이고 애절한 로맨스를 그리며 숙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나는 거기에 차마 동참하지 못하고 의문의 ‘빅투아르’의 정체를 홀로 고민했다. 원작에도 안 나오는 그분이 과연 뉘실까. 아, 어쩌면 원작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사망했을 수도 있다. 소설에서 남주가 등장하기 전 (그러니까, 멜리장드가 한창 소박맞고 있을 때) 전염병이 두어 번 휩쓸고 지나갔다는 묘사가 있었으니까. 전염병으로 마음을 나눈 연인을 잃은 건가? 그럼 진짜 불쌍한 인간이네. 속으로 혀를 한 번 찼다. 어서 돌아와서, 멜리장드와 진정한 사랑에 빠져서 서로가 입은 상처를 치유해 주기를 빌면서.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멜리장드는 남 일 듣듯이 평온했다. 하긴, 멜리장드는 아직까지 어린 시절 어울려서 놀았던 ‘꼬마 테오’가 니케리온 대공인 줄은 꿈에도 모를 테니까. 옆에 앉은 멜리장드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멜리장드가 살짝 웃었다. ‘면화를 더 비축해 둬야겠네요.’ 멜리장드가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일견 뜬금없게까지 느껴질 수 있는 말이었으나 곧바로 이해했다. 지금 다과회의 화제는 비제른의 벨뷔 지방 점거와 그를 되찾기 위한 대공의 싸움이다. 그리고 벨뷔에 있는 마르투와 항구는 밀레디아산 면화가 들어오는 주요 거점 중 하나이니까 면화 공급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거지. 우리 언니가 벌써 상황을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라 그 상황에 얽힌 요소들을 읽어 내는 경지에 이르렀어요! 내적 샴페인을 터뜨리며 자축하는 와중에도 표정을 관리하여 입꼬리만 살짝 끌어 올렸다. ‘맞아요. 잘 분석했어요.’ 멜리장드가 배시시 웃었다. 새삼 심장을 때리는 미모에 순간 눈이 부신 것 같아서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진짜 이 언니는 21세기 지구에 태어났으면 내 통장을 다 털어 갔을 거야. 멍때리며 21세기 지구에 두고 온 내 본진과 멜리장드의 상관관계 따위의 생각을 하느라, 근방에 앉은 이들의 수군거림과 키득거림도 차마 듣지 못했다. “마드모아젤 레비제트?” 흠흠 하는 헛기침 소리에야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신경 써서 부풀려 손질한 녹색 머리를 한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름 신경을 썼겠지만, 타조알처럼 부풀린 머리는 거대한 테니스공을 연상시켰다. 순간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참으며 상냥하게 물었다. “…아, 마담 루이즈, 미안해요. 못 들었네요. 무어라고 했나요?” “별일은 아니에요. 다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답니다.” 루이즈가 새침하게 부채를 살랑였다. 아, 혹시 기억할지 모르겠다. 멜리장드에게 방을 안내해 주면서 비웃던 황후의 시녀. 황후의 시녀로 계속 있었으면 그럭저럭 표면적으로나마 좋은 관계를 유지했을 것을, 어느 순간부터 여기저기 한눈을 팔기 시작하더라. 결국 메트레상티트르(maitresse en titre, 왕의 공식 정부) 자리를 차지한 퐁텐 백작 부인에게 줄을 대고는 그녀의 주선으로 외르지 후작의 아들에게 시집간 뒤 홀라당 황후의 시녀 자리를 걷어찼다. 그 뒤로 내 머릿속에서 그녀의 위치는 ‘대모님의 시녀 1’에서 ‘멍청이’로 격하되었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퐁텐 백작 부인을 향한 황제의 총애가 견고하다지만, 황후와의 연줄을 그렇게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는 치기라니. 어찌 보면 대단하다. 공식 정부 자리가 언제까지 갈 줄 알고 황태자까지 낳은 황후를 뜰 수 있지? 아마 황후도 상당히 기분이 상했으리라. 자신의 시녀 자리가 한낱 정부의 측근이라는 위치에 밀렸다는 것 자체가 높으신 분들께는 꽤 자존심에 타격이 갈 수 있는 문제기 때문에. 다만 당사자가 말단 시녀에 불과했고, 대귀족 출신도 아닌 루이즈이기 때문에 굳이 내색하지 않는 것뿐이겠지. 확실한 것은, 루이즈는 당장의 보상인 중앙 명문 귀족 가문의 입성을 받아 냈다. 무려 마드모아젤 소피가 예의상으로라도 초대를 보내야 하는 가문에. 그러나 장기적으로 몇십 년 뒤를 볼 때, 지금 황태자가 차기 황제로 즉위하게 되고 황후가 태후가 되는 이상 궁정의 핵심에 진출할 길은 막힌 것이나 다름없다. 제아무리 장차 외르지 후작 부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본인은 그걸 알고 있을까? 속으로 혀를 차면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여기, 마드모아젤 마리가 재미있는 말을 하더군요. 대공 각하의 레이디께서 만일 격에 맞지 않는 천한 여인이라면 어찌하나 하구요. 그래서 제가 대답했죠. 궁정에 이미 훌륭한 스승이 있으니 걱정은 없을 거라구요.” 훌륭한 스승 어쩌고를 언급할 때 멜리장드를 빤히 쳐다보는 것을 보아하니 대놓고 도발하려는 성싶다. 루이즈가 요즘 퐁텐 백작 부인의 발닦개를 자처하고 있다더니. 피식 웃음이 나올 뻔했다. 칼렙의 세뇌가 잘 먹혀 있는지 멜리장드만 보면 잡아먹으려고 안달을 하던 퐁텐 백작 부인은 공식 정부가 된 요즈음엔 황후 앞에서 깝죽거리느라 바쁜 나머지 직접적으로 이쪽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의 충실한 미니언들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건드리고 간다. 사실 엄청난 타격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그냥 어디서 개가 짖느니- 하고 넘기는 편이지만. “물론, 그 가문의 빛나는 역사를 이어 가기에는 한참 부족하겠지만요.” 루이즈가 말하면서 과시하듯 찻잔을 들며 손가락을 삐죽 세웠다. 일부러 저렇게 들기도 힘들 텐데. 틀림없이 약지에서 반짝이는 굵은 루비 알을 여봐라 보라고 관종 짓하는 거다. 그녀의 무리 중 하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이건 초대 외르지 후작 부인의 결혼반지 아닌가요? 이걸 받으셨군요!” “어머님께서 주신 결혼 선물이죠. 가문의 대를 이을 며느리로서 인정해 주신다는 거겠죠?” 거드름 피우던 루이즈가 멜리장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마도 이건,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보석 하나 받지 못한 후작 부인이라 비웃는 거다.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상징과도 같은 장신구들이 몇 개씩은 있다. 유명한 몇몇은 아예 그 자체로 신분 증명을 의미하기도 하고. 예를 들면, 레비제트 후작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옐로 다이아몬드를 누군가에게 빌려준다는 것은 상대에게 후작을 대행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레비제트에서는 어머니가 모든 역사 깊은 장신구들을 꽉 쥐고 있다. 유일한 적녀인 나조차도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아주 중요한 행사에나 한 번씩 빌려서 착용할 정도였으니, 알 만한가? 어머니는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죽어도 멜리장드에게 장신구 하나라도 내줄 생각이 없으시리라. 내 노력 덕에 레비제트가 새 후작 부인을 대놓고 홀대한다는 이미지는 어느 정도 사라졌으나, 알 만한 사람들은 멜리장드가 가문의 보물을 단 한 번도 착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마담 엘레오노르, 즉 내 어머니가 새 며느리를 탐탁지 않아 한다는 떡밥을 덥석 물 만큼은 충분히. 그 사실을 저격하는 루이즈에게 멜리장드가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참 아름다운 반지네요. 알릭스, 알릭스도 루비 반지를 두엇 가지고 있지 않나요? 그 빛깔이 얼마나 선명하고 아름다운지, 말 그대로 순수한 비둘기의 핏빛 같더군요. 저는 그렇게 아름다운 루비를 본 적이 없어요.” ‘가문의 상징’이 아니라 ‘루비’에 초점을 맞춰서 능숙하게 상황을 벗어난다. 모욕을 당하는 것도 모르고 헤실헤실 웃다가 나중에야 알아채고 뒤에서 눈물을 짜던 원작과 비교하면 이것도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 “어머.” 한 소녀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가 찌릿 노려보는 루이즈의 눈에 찔끔 고개를 돌렸다. 루이즈가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이 반지는 한낱 장신구에 비할 바가 아니랍니다? 가문을 이끌어 나갈 후작 부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상징이죠.” 아직 남편이 후작위를 물려받지 못해서 ‘외르지 후작 부인’이 아니라 ‘마담 루이즈’라고 불리는 주제에, 후작 부인에게 날을 세우다니. 아무리 같은 후작 작위를 가진 가문의 여인들이라도, 가문의 이름을 ‘마드모아젤’ 뒤에 붙일 수 있는 적장녀가 차녀보다 높고, 아직 남편이 작위를 물려받지 못한 ‘마담’보다는 ‘후작 부인’이 더 높다. 사실 황실 의전 의례에나 통용될 법한 구식 예법이라서 실생활에서는 잘 적용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예법상으로는 레비제트 후작 부인인 멜리장드는 ‘외르지의 마담 루이즈’를 꾸짖을 서열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지적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멜리장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마담은 아직 후작 부인은 아니시지 않나요?” 루이즈가 별 바보를 다 본다는 듯 멜리장드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곧 그리될 것이라는 의미랍니다.” 멜리장드가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하지만 외르지 후작 부처께서 아직 정정하시지 않으신가요? 특히 외르지 후작 부인께서는 ‘곧’ 자리를 물려주시기에는 아직 너무 젊으신걸요. 신과 인간 앞에서 한 가족이 되었으니, 루이즈의 새로운 어버이 되시는 후작 부처께서 건재하시고, 오랫동안 외르지 가문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어찌나 큰 축복인데…. 아, 혹여 마담 루이즈께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그제야 얼굴이 벌게진 루이즈가 절대 아니라고 수습하기 시작했지만, 확대 해석과 역발상으로 의표를 찌르는 멜리장드의 화술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럼, 누가 가르쳤는데. 순진한 어조에 그렇지 못한 논리로 두들겨 패는 멜리장드에 의해 루이즈는 시부모가 죽기만 바라는 호래자식이 됐다. 생각보다 훌륭한 솜씨에 미소 지었다. 만약 내가 나섰으면 루이즈를 제대로 밟아 줄 수는 있었더라도, 멜리장드가 내 비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수아비라는 이미지가 씌워질 가능성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멜리장드는 내 도움 없이도 훌륭하게 루이즈를 물리쳤다. 소문이 빠른 궁정 사회에서, 이 일이 외르지 후작 부부의 귀에 들어간다면 당분간 루이즈를 여기서 볼 일은 없지 않을까? 속으로 배부른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 달다 달아! * * * 상앗빛 리본을 응시하던 리산데르는 막사 밖에서 부관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빠르게 리본을 갈무리했다. 자신이 가진 알릭스의 유일한 흔적을 느끼는 것은 전쟁터에서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치르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았다. 다소 유치한 생각일 수도 있으나 신성한 의식을 다른 이와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치들이 알릭스의 아주 작은 파편마저도 눈에 담는 것을 상상만 해도 싫었다. 혹여, 무심결에 흘린 이름이라도 애먼 놈이 듣고 딴 맘을 품을까 싶어 철저하게 ‘빅투아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지 않은가. 문을 열고 들어온 부관이 절도 있게 경례한 후 전장 상황 보고를 시작했다. 보고를 들으며 리산데르는 머릿속에 펼쳐진 거대한 체스판 위 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르베 산맥 철수. 뒤몽 지역 전진. 마르투와에 사단 투입. 어느 정도 정리된 전장의 지도를 머릿속에서 그려 보던 리산데르는 이어진 부관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비제른의 왕세자가, 아델하이트 왕녀의 중혼을 근거로 들어 라부예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습니다. 라부예 지역의 소유권을 비제른으로 이관받을 때까지 전쟁을 끝내지 않겠다는 칙서를 발행했다는 첩보를 막 받은 참입니다.” “500년 전 이야기까지 끌고 오겠다는 거군. 그래서, 결론은?” “…장기전으로 돌입할 국면을 보입니다.” 리산데르가 짧게 혀를 찼다. 그가 입을 열었다. “3년.” “네?” “아니, 2년 안에 끝낸다.” 부관이 아연하게 리산데르를 바라보았지만, 리산데르는 그저 나가라고 손짓할 뿐이었다. 언제부터였던가.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검기의 길이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모든 검사의 꿈, 소드마스터. 대륙에 마력의 흐름을 느끼는 이들이 점점 줄어들면서, 마력을 검기로 치환해서 사용하는 소드마스터 역시도 배출이 거의 중단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제 구전 동화에서나 나오는 전설로 치부되는 검기의 존재. 그러나 리산데르는 느낄 수 있었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달라지는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 속에서 터져 나오는 미묘한 힘의 알갱이들이 순간적으로 검을 감싸는 감각도 점차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를 본 순간 달라진 세상을 느끼는 감각은 넘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성벽에 작은 균열을 가져왔다. 작은 균열은 점차 그 구멍을 넓혀 나갔고, 견고했던 성벽은 곧 돌무더기만 남기고 무너지리라. ‘승리의 천사, 알릭스. 나의 빅투아르.’ 당신 덕분입니다. 리산데르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반드시, 2년 안에 그녀를 만나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며. * * * “대모님!” 종종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지르며 애교 있게 웃었다. 눈이 마주치자 시녀에게 찻잔을 건네받던 황후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스쳤다. 황후이자 내 대모님인 어멘가드는 한없이 냉정한 듯싶으면서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어느 정도 너그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 어미는 보이지도 않는 게냐.” 황후의 곁에 앉은 어머니가 밉지 않은 어조로 타박했다. 어머니에게 배시시 웃으며 뺨에 입을 맞추자 알싸한 장뇌 향이 올라왔다. 지난 며칠간 황후가 요양을 이유로 벨레르 궁에서 칩거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황후의 말벗인 어머니도 함께 본궁에서 떠나 있었다. 같은 궁정에 살면서도 거의 두 주 만에 처음 보는 것 같다. 황후의 공적 업무가 진행되는 곳이 라울리 본궁인 아메티스트 홀이라면, 벨레르 별궁은 황후가 가장 가까운 이들과 함께 여가를 보내는 곳이다. 라울리 본궁 뒤에 있는 황제의 숲을 마차로 한 10분 정도 가로지르면 나오는 가까운 호수 옆에 위치한 벨레르 별궁은 역대 황후들의 취향에 따라 리모델링을 반복해 왔었다. 근처를 시골처럼 꾸미고 주말농장처럼 쓰던 황후, 총애하는 배우들을 초청해서 극장으로 쓰던 황후 등등 파격적인 변신을 꾀하던 이들도 있었으나 현 황후는 그저 사적으로 가까운 사람들과 휴식을 취하는 용도로만 사용한다. 관리인들 입장에서는 퍽 다행인 일이리라. 몇 대 전에는 신선한 우유를 마시고 싶다고 젖소 수십 마리를 벨레르 별궁으로 끌고 들어왔던 황후도 있었다고 하니. 뭐, 따로 특이한 일을 하지 않아도 작은 호수를 둘러싼 고즈넉한 석조 건물의 전경을 느끼며 휴식하는 것 자체가 운치 있는 일이라 나는 어린 시절부터 벨레르 궁에 초대받는 것을 퍽 즐겼다. 엘레네 황녀와 함께 벨레르 별궁으로 이틀 정도 지내러 오라는 황후의 초대에 흔쾌히 응한 것도 그래서다. 혼자 놓고 온 멜리장드가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방까지 같이 쓰면서 24시간 시누이랑 붙어 있어야 하는 그녀에게 휴가를 준 셈 치기로 했다. 사실 요즘은 나 없이도 씩씩하게 잘 처신하는 것 같다. 밥 같이 먹을 만큼은 가까이 지내는 숙녀들도 몇 생겼고. “알릭스, 엘레네. 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느냐.” 멜리장드를 생각하는 와중에도 황후의 하문에 생글생글 웃으며 답했다. “대모님께서 친히 내려 주신 마차인데 어찌 불편했겠나요. 구름을 타는 것처럼 편하더랍니다.” “편히 왔다니 기쁘구나, 알릭스. 벨레르에서 너를 보는 것은 퍽 오랜만이야.” “거의 2년 만에 처음 옵니다. 여전히 이곳의 공기는 그 이름처럼 아름답네요(bel air).”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니.” 황후가 창백한 낯에 미소를 띠었다. “너도, 엘레네도, 곧 성혼할 나이가 되었구나. 대모 된 입장으로 내 좋은 혼처를 주선해 주어야 할 터인데.” 살짝 어색하게 웃었다. 보통 이르면 십 대 중후반, 늦어도 스물다섯 전에는 결혼을 하는 이곳에서 열아홉 살인 나는 슬슬 결혼을 준비해도 이상할 나이는 아니었으니까. 또 요즘은 결혼하는 나이가 조금씩 늦어지는 추세라고는 해도, 원작에서도 본격적 스토리 진행 전에 이미 결혼을 했던 나다. 하지만 이번엔 적어도 멜리장드가 본격적으로 후작 부인으로 대우를 받으며 원한을 품지 않은 채로 자연스럽게 이혼하고 대공비가 되어, 레비제트를 무너뜨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때까지는 조금 미루고 싶었다. 그렇게 저녁 식사 전까지 혹 교제하거나 맘에 둔 청년이 있냐고 묻는 황후의 질문을 교묘하게 피해 가며 웃기만 했다. 황후의 직속 요리사가 준비한 별궁의 저녁 식사는 호사스러웠다. 황후의 벨레르 칩거의 이유가 요양인 만큼 보양에 신경을 썼는지, 값비싼 향료와 버터를 듬뿍 쓴 기름지고 무거운 메뉴가 대부분이었다. 정작 황후는 입맛이 없는지 먹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니글거리는 속을 쌉쌀한 와인으로 달랬다. 아, 동치미 먹고 싶다. 여기는 비슷한 음식 없나? 입맛을 다시면서 객실로 난 복도를 걸었다. 어머니가 묵는 방을 찾아가기 위해. 내가 이곳에 온 주된 이유는 황후의 초대를 받아서 쉬러 온 것이다. 물론 그게 맞긴 하다. 하지만 겸사겸사 다른 이유도 있다. 어머니한테 로비 좀 할 생각이어서. 다음 달 말미쯤 건국 주간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그때, 귀족들을 상대로 라울리 궁은 황가의 위엄을 과시하는 축하연을 주최할 것이다. 수백 년 전 건국제로부터 내려온 라무아 황가의 핏줄은 아직까지도 굳건하며, 앞으로도 이 제국 가장 지고한 곳에서 너희들을 통치할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축하연에 참여하기 위해 웬만큼 세 있는 가문들은 수도인 파데사에 싹 모일 거다. 그중 하이라이트인 무도회가 열리는 은의 방은 인간 포화상태가 되겠지. 아무리 은의 방이 운동장만큼 크고 초대받은 이들만 입장할 수 있다고는 치더라도. 생각만 해도 산소가 부족해지는 느낌이다, 윽. 하여간 각설하고, 원작에서는 결혼 첫해 건국 축제 때 멋모르고 참석한 멜리장드가 엄청난 수모를 당한다. 초라한 옷차림의 그녀를 하녀 비슷한 신분으로 착각한 사내들이 더러운 말로 희롱을 하는 데다가 ‘원작의 나’, 즉 진상 시누이는 대놓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준다. 뭐 여기까지는 현재의 내가 수습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여기서 하이라이트는, 어머니가 후작 부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레비제트의 가보들을 착용하고 황후의 옆에서 당당하게 등장한 거다. 멜리장드를 향한 어머니의 박대는 ‘원작의 나’ 만큼 적나라한 괴롭힘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보면 더 무정하고 차가운 형태로 일어나 왔다. 바로 후작 부인으로 인정하기는커녕, 같은 가문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 철저한 투명 인간 취급. 레비제트의 가보를 착용하고 황후 옆에 선 어머니는 당연히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자연히 화제는 새로 시집온 후작 부인은 어째서 가보를 갖지 못했는가- 로 이어졌다. 어째서 후작 부인의 이름을 물려준 마담 엘레오노르가, 후작 부인의 상징은 그대로 쥐고 있는 거지? 그렇게 연회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의 추측이 시작된다. 알고 보니 아이를 못 낳는 석녀라더라, 외모만 아름답지 성격이 추악해서 마담이 그걸 알아보고 인정하지 않는다더라, 침실에 다른 남자를 끌어들여서 마담께서 대로하셨다더라, 결혼 전에 낳은 사생아가 서넛 있다더라 등등. 수많은 추측은 뒤섞이고 와전되면서 더 기괴한 형태로 자라나 은의 방 전체로 번져나갔고 큰 수모를 당한 멜리장드는 이후 건국 축제를 쭉 불참하게 된다. 그래서 혹시라도 레비제트에 전해 내려오는 상징적인 장신구들을 빌릴 수 있는지 알아보러 왔다. 본궁 어머니의 방에 찾아가서 이걸 물어보면 쫓겨날 것 같아서 여태까지는 못 물어봤지만, 여기는 가능하다. 벨레르 별궁에서는 나나 어머니나 동등한 황후의 객(客)이기 때문에 함부로 쫓아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 야심 찬 포부를 들은 엘레네는 ‘뭐, 잘해 보든가.’라고 새침하게 말하고 황후와 함께 산책한다고 떠났다. 좀 도와주지. 나름 멜리장드랑도 좀 친해진 줄 알았는데, 쳇. 엘레네가 부득불 우겨서 가끔 멜리장드, 엘레네, 내가 아마릴리스의 방, 한 침대에서 같이 잔 날이 몇 번 있었다. 잠옷을 입고 베개를 껴안은 두 사람이 코드 맞게 조잘조잘 수다를 떨곤 해서 어느 정도 정이 들었나 했더니, 착각이었나? 어쩐지 아쉬운 마음에 입술을 비죽이며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 알릭스예요.” “들어오려무나.” 허락에 문을 열었다. 어머니의 방에는 특유의 알싸한 로즈마리와 장뇌 향이 감돌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느껴온 어머니의 향. 어머니가 얼굴에 얹어 두었던 장미수를 먹인 천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니.” “딸이 어머니를 찾아오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짐짓 서운한 듯 말하자 어머니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풋 웃으셨다. ‘철혈의 마담’이라고 불리곤 하는 어머니셨지만, 유복자로 태어난 딸인 내게는 한 수 접어주시고는 하셨다. 그 때문에 나는 아버지 없이도 어머니의 비호 아래 고운 것, 귀한 것만 먹고 입고 보면서 자라났다. 그래서 원작에서 내 성격이 그 모양이었지. 오만방자하기가 하늘을 찔렀던 원작 소설의 묘사를 떠올리자 뺨이 살짝 화끈거렸지만 태연하게 숨겼다. 재잘재잘 어머니에게 그동안 있던 일들을 얘기하면서 본론을 꺼낼 각을 쟀다. “…그래서, 엘레네가 마담 루이즈의 주문을 취소시키고 그 목걸이를 대신 샀죠. 자신이 탐내던 토파즈 목걸이를 엘레네의 시녀장이 차고 무도회에 나타났을 때 마담 루이즈의 그 표정을 보셨어야 하는데!” 왕의 정부만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던 전직 시녀를 기억했는지 어머니도 짧게 웃으셨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좋아졌다고 느껴졌을 때 즈음에 슬쩍 떡밥을 던졌다. “그런데, 어머니. 다음 달에 곧 건국 기념일이 있지 않나요?” “그렇지. 이제 곧 준비가 바빠지겠구나.” “음…. 거의 처음으로 새 후작 부인을 보게 되는 이들도 있겠네요.” 멜리장드에 대한 화두를 던지자 어머니의 낯이 가라앉았다. 제아무리 아끼는 딸이라고 해도 거의 없는 사람 취급해 온 며느리에 대한 화제를 꺼내는 것이 불쾌하신 듯 눈에 띄게 부정적인 어머니의 낯에 살짝 죄책감이 들었으나 계속해야만 했다. 어머니, 이게 다 우리 가문을 위한 일이라구요! “아무래도, 대외적인 우리 레비제트 후작가의 면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후작 부인의 격에 맞는 장신구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니?” 갑자기 돌덩이처럼 무거워진 공기에 살짝 심호흡하면서 말을 골랐다. “음, 후작 부인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보석을 몇 개만이라도 빌려주는 것은 어떨까요?” “생각도 말거라.” 칼로 베듯 딱 자른 거절에 더 얘기를 꺼내기도 민망해졌다. 이런, 다른 보석들은 몰라도 ‘봄의 심장’만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 봄의 심장은 대대로 레비제트 후작 부인에게 전해 내려온 브로치다. 타원형으로 세공한 달걀만 한 에메랄드 주변을 자잘한 다이아몬드와 진주가 꽃처럼 감싸고 있다. 불순물 없이 영롱하고 고운 빛깔에 어린 시절 나도 탐을 냈긴 하지만 어머니한테 크게 혼나고 마음을 접었을 만큼 큰 의미를 가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 중앙의 에메랄드는 레비제트 후작가의 전신인 레비사 백국(County, 백작이 다스리는 국가)의 군주였던 메로비크가 그 반려였던 프레데공드의 관에 박기 위해 선물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 뒤로 몇 차례 재세공을 거쳐, 레비제트 후작가가 된 지금은 브로치의 형태로 고정되어 내려오는 것이고. 태곳적부터 시모에게서 자부로, 또 그 자부로 전해진 가주의 반려의 상징이라는 귀한 뜻을 생각하면 알 만도 하다. 아무리 딸이라고 해도 함부로 내줄 수 없는 성물이나 다름없는 상징. 적법한 레비제트의 안주인, 가문을 직접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면 손도 댈 수 없는 것. “그 아이가 네게 부탁하던? 자신이 직접 이야기할 용기는 없으니, 네가 시모에게 가서 보석을 좀 얻어 오라고?” 날카롭게 찔러 오는 어머니의 질문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오해를 산 건가. “내, 안 그래도 줄라드 남작에게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네가 그 아이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오해의 근원을 찾아냈다. 하여간 칼렙 자식, 인생에 도움이 안 돼요. 속으로 짜증을 짓씹는데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너도 이제 성년이고, 충분히 슬기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태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다만.” 어머니의 녹안이 어둡게 물들었다. “그 아이가 마음에 든 모양이지? 네 몫의 연금까지 다 그 아이에게 쓸 만큼.” 사실 이번 분기 내 몫으로 배정된 연금을 대부분 멜리장드의 품위 유지에 쓰고 있는 건 맞긴 하다. 레비제트 가문으로 들어오는 연금을 관리하는 앙투안이 후작 부인의 몫을 따로 챙길 생각도 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껏 모아온 물품들이 넉넉한 데에다 엘레네가 자신의 진상품 중 내 몫을 떼어서 자주 챙겨 주기 때문에, 매일 포도주로 목욕하고 금가루를 바르는 사치를 부리지 않는 한은 딱히 내 생활에 부족함이 있을 일도 없다. 하지만 여기서 이 이 사실을 털어놨다가는 어머니의 말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역효과다. 무슨 말을 할지 머리를 굴리는데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무슨 말로 너를 꼬여 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인형 놀이는 적당히 하는 것이 좋을 게다.” “…인형 놀이가 아니에요. 그저, 레비제트의 낯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어머니가 쥐어짜 낸 내 말을 끊었다. “레비제트의 안주인으로서 격이 맞지 않는 아이이다. 차라리 촌부로 지내는 것이 더 합당했을 터.” “…하지만, 그녀는 이미 신과 인간 앞에서 앙투안과 부부의 연을 맺은 아내예요. 이 정도면 후작 부인으로 충분히 합당하지 않나요? 신의 대행자인 사제 앞에서 맺어졌으니, 신이 맺은 것이죠. 신이 맺은 것을 감히 인간이 끊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어머니가 내 항변에 짧게 웃었다. “신이 맺은 인연이라.” 어머니가 이내 차가운 말로 내게 되물었다. “신께서 어째서 부부를 맺고, 결혼을 수호할까. 혹 그 이유를 알고 있느냐?” 그리 신학에 조예가 깊지도 않고,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닌지라 침묵했다. 어머니가 짧게 한 구절을 읊었다. “신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비록 신전에 간 지는 오래되었으나, 종교색이 고루 녹아 있는 궁정에서 자란 나는 어머니가 인용한 문장이 성서의 첫 부분, 창세의 서에 등장한 구절임을 바로 알아챘다. 어머니가 차갑게 말을 이었다. “남녀의 혼인은 후계를 낳고 번성하기 위함이다. 신성한 혼인으로 가문에 맺어진 여인들이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은 고귀한 의무이지. 내가 그러했고, 네 조모가 그러했고, 그 위의 수많은 후작 부인이 그러하였듯이.”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찌르는 어머니의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어째서인지- 앙투안은 그 아이를 안을 생각이 없더구나. 그렇다고 그 아이가 직접 신중의 궁에 있는, 산사나무의 방에 찾아가서 밤을 청할 만큼 간절함을 가지고 있느냐? 혹, 그리 행하면서 비웃음을 듣더라도 감내하고 계속해서 앙투안을 찾아갈 만큼 의무를 자각하고 있더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적나라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어머니는 멜리장드가 앙투안을 유혹해서라도 밤을 보내지 못한 것을 질책하는 거다. 예법의 표본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아한 어머니가 이런 말을 입에 담을 줄이야. “레비제트의 가보는 의무들 속에 희생할 줄 아는 참된 안주인의 것. 어중이떠중이에게 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가 차갑게 일축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어머니가 또 두통이 도지셨는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빠르게 서랍 속에 든 향낭을 찾아 건네자 어머니가 받아 들고 향을 들이마셨다. 고질적으로 앓아온 두통을 잠시나마 완화해 준다고 즐겨 찾으시는 장뇌 향. 잠시 느리게 호흡하시던 어머니가 이내 조금 누그러진 어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서 레비제트의 후계가 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퍼뜩 고개를 들고 어머니의 말을 경청했다. “내, 늦어도 2년 이내로 너를 결혼시킬 생각이란다.” 일견 상관없게 들리는 말이었으나, 귀족 사회의 생리에 익숙한 두뇌는 빠르게 그 의미를 계산해 냈다. 뻣뻣하게 척추가 굳어졌다. 어머니가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아들을 둘만 낳거라. 레비제트의 후계권을 가진 아들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반드시.” 비록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으나 그 뒤에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는 우리 둘 다 알았다. 태어난 아들 둘 중 하나가 차기 후작이 될 것이다. 어머니의 말에 담긴 의미가 무거워 잠시 아연해졌다. 무슨 정신인지 모르게 작별 인사를 하고 어머니의 방에서 나오는데, 잠자리 인사 대신 마지막으로 들은 한마디가 무겁게 나를 내리눌렀다. “현명하게 처신하려무나.” * * * “왜 그렇게 한숨만 푹푹 쉬어대?” 벨레르 별궁 주방에서 내온 아이스크림을 포크로 쿡쿡 찌르는 나를 보면서 엘레네가 물었다. 신선한 달걀과 우유를 듬뿍 써서 만든 아이스크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먹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벨레르 별궁 정원 테이블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호수의 전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해서 터질 것 같거든. 결국 엘레네가 짜증을 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래?” “현시대의 기술 수준으로 인간이 무성 생식 번식에 성공할 수 있는지의 가능성에 대해.” “뭐?” 엘레네가 별 미친 소리를 다 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시무룩하게 아이스크림 그릇만 괴롭혔다. 왜 가문의 후계자 문제에 대해 생각도 못 하고 있었을까. 멜리장드가 대공비가 된 후 자비를 베풀어서 레비제트가 존속하게 된다면 당연히 후계자가 필요할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천지에 후계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멜리장드는 물론 여기서는 임신해서는 절대 안 된다. 괜히 이상한 짓 해서 발목 잡혔다가는 대공비는커녕, 평생 게이 커플의 위장용 트로피 와이프로 살게 될 수도 있으니까. 내 언니의 예정된 꽃길을 굳이 뻘짓으로 날려 버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앙투안이 다른 여자한테서라도 애를 낳을 리 없다. 그 순정 게이의 온 마음과 정성은 애인 칼렙한테 가 있으니깐. 그럼 내가 결혼해서 애 낳는 수밖에 없는 건가? 막연하게 언젠간 하겠지- 라고만 생각했던 결혼을 조금 더 실질적으로 생각하니 본능적인 거부감이 치솟았다. 이건 틀림없이 전생의 결혼 생활이 남긴 더러운 추억의 찌꺼기다. 출산도 조금 많이 별로다. 전생에서도 애는 없었다고! 뭐, 그건 갖고 싶어도 못 가진 거지만. 난임 클리닉까지 다니면서 개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라 등골이 서늘했다. 난임 사유가 남편에게 있다는 것이 밝혀질 때까지 얼마나 시모가 괴롭혀 댔는지. 물론 남편이 난임 원인으로 밝혀진 후에도 네가 우리 아들에게 스트레스를 줘서 그렇다고 나만 달달 볶았다. 그 뒤에도 동네 돌팔이 건강원에서 지어온 임신에 좋다는 수상쩍은 즙을 계속 나한테만 먹여 대는 통에 두드러기가 나서 응급실까지 갔던 날이 생각났다. 죽기 전에 그 즙을 몽땅 까서 중간 역할 못 한 남편 놈 정수리에 부어 줬어야 했는데. 여기서는 나름 친정이 빵빵하니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지만, 혹시라도 레비제트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시집가면 말짱 황이다. 거기다가 이 세계에는 난임 검진 같은 것도 없고, 만일 애를 못 낳아도 문제가 남편에게 있는지 아내에게 있는지도 둘 중 하나가 다른 데서 애라도 낳아오기 전까지는 모른다. 재수 없으면 남편이 무정자증인데 나만 구박받고 살 수도 있다는 소리지. 머리가 아프다. 그냥 출아법으로 앙투안한테서 애만 하나 뚝 뽑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아, 그 이기적인 마인드는 쏙 빼 버리고. 그리고 칼렙 하면 그냥 눈이 돌아가 버리는 그 이상한 비이성도 좀 어떻게 치우고. 으, 칼렙은 원래 꽤 좋아하던 친한 오빠였는데 어쩌다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픈 짜증 유발자가 돼 버렸는지. 착한 척 내숭이나 떨고 정치질이나 해 대고. 앙투안은 그게 뭐가 좋다고 가문이고 뭐고 다 갖다 바칠 정도로 홀딱 빠진 걸까? “알릭스.” 의식의 흐름을 따라 칼렙 생각을 골똘히 했더니 버터 바른 것처럼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환청조차 짜증 나네. “알릭스!” 환청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헛것이라기엔 너무나도 리얼한 모습에 테이블 위로 스푼을 툭 떨어뜨렸다. “칼렙 경이 왜 여기 있어요?” 벨레르 성은 본궁에서 떨어져 있으나 엄연히 황후의 공간. 허락받지 못한 이가 함부로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외간 남자인 칼렙의 뜬금없는 등장은 궁중 연회 아뮤즈 부쉬로 고추장 닭발이 나온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아니, 댁이 여기서 왜 나오냐고. “에스테 공작께서 황제의 숲에 여우 사냥을 오실 때 함께 동행하였습니다. 오신 김에 황후 폐하를 문안하시겠다 하셔서 잠시 벨레르 별궁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을 뒷받침하듯 멀리서 사냥개가 컹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사냥용 활을 등 뒤에 차고 있군. 거기다가 황후의 친정 오라비인 에스테 공작이라. 벨레르까지 올 만도 하다. 요즘 들어 황제의 편 가르기로 상당히 입지가 좁아졌을 텐데, 동아줄인 황후가 칩거해 있으니 그쪽도 상당히 갑갑할 것이다. 사실 여우 사냥은 핑계고, 본 목적은 황후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칼렙을 슬쩍 보았다. 아, 굳이 꼬리로 칼렙을 붙이고 왔다면 세트가 같이 왔을 텐데. “황녀 전하, 안녕하십니까. 간만에 보는구나, 알릭스.” 역시. 바늘 칼렙의 충실한 실, 앙투안이 나타났다. 별로 반갑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아는 척은 해야지. “오라버니. 오랜만이야.” “레비제트 후작, 줄라드 남작. 본궁 밖에서 보는 것은 올해 들어 처음인 것 같군.” 엘레네가 턱 끝을 살짝 들고 오만하게 말했다. 혼담이 파투 난 뒤로 엘레네가 앙투안을 사석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래도 정작 둘 다 별 감정도 없어 보인다. 시답잖은 날씨 이야기가 한 차례 오간 뒤 엘레네가 새침하게 말했다. “그럼, 여기서 오랜만에 만난 남매끼리 회포를 좀 풀게나. 나는 간만에, 외숙을 좀 뵈어야겠네.” 엘레네가 익숙하게 칼렙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연하다는 듯 에스코트를 요구하는 손길에 앙투안의 입매가 순간 씰룩였으나 나만이 알아챘을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신사가 있는데 귀한 황녀 전하께서 혼자서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당연히 에스코트해야지. 멀어지는 칼렙과 엘레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앙투안에게 툭 말을 건넸다. “궁정에서 잘 모습을 안 비치던데, 요즘 추밀원 일이 많이 바쁜가 봐?” “건국 축제 예산 배정 관련 논의가 좀 길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끝났단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추밀원 일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침묵을 깰 만한 동기가 필요했을 뿐이지. 손짓해서 앙투안을 티 테이블 맞은편에 앉히고 주전자에서 차를 한 잔 따라서 건넸다. 찻잔을 기울이던 앙투안이 이어진 내 말에 멈칫했다. “어머니께서 나를 곧 시집보낼 계획이래.” 앙투안이 미간을 좁혔다. “넌 아직 어리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나와 동갑인 엘레네도 오빠와 혼담이 오갔더랬지.” “…내 경우에는 후작위의 승계가 걸려 있었으니 조금 이르게 혼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너는 몇 년간, 괜찮은 사내들을 여럿 고려해 보며 결정해도 늦지 않아.” 진심으로 염려 섞인 목소리에 살짝 울컥할 뻔했다. 사실 앙투안은 나쁜 오빠가 아니었다. 오히려, 다섯 살 어린 여동생에게 없는 아버지의 역할을 해 주려는 듯 자상하게 보호자 노릇을 톡톡히 해 온 고마운 오빠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사랑에 눈이 멀어서 그리 아끼는 여동생을 포함한 모두를 불구덩이로 끌고 가는 걸까. 내게 하는 반만큼만 아내에게 해 주면 멜리장드가 그렇게 힘겨운 나날을 보낼 일도 없을 텐데. 불현듯 겨울철 고드름처럼 돋아난 심술에 뾰족한 말을 툭 뱉어 냈다. “하긴, 나는 이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비싼 신붓감일 테니깐. 나를 감당할 수 있는 치들이 몇 없을 테니 잘 저울질해 봐야지.” “알릭스.” 냉소적인 말투를 나무라는 듯한 앙투안의 말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만약, 만약에- 비싼 값을 치르고 데려온 신부가 막상 성에 차지 않는다면서 괴롭히면 어쩌려나.” 앙투안이 눈을 날카롭게 떴다. “너는 레비제트의 적장녀다. 너를 감히 홀대할 가문이 어디 있겠니?” “혹시 모르지. 만약에 애라도 못 낳으면 구박받고 살 것 아냐. 아니면, 남편에게 이미 사생아나 애첩이 있거나? 아니면,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변태일 수도 있고, 또….” 갖가지 최악의 경우의 수를 늘어놓자 앙투안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막았다. “그러면 상대의 가문에 영지를 건 전쟁이라도 선포하마.” 픽 웃었다. 고리짝 적 얘기를 대응이랍시고. 마지막으로 영지전이 일어난 지 몇백 년은 됐을 터인데. 짐짓 실없는 얘기를 진지하게 하는 앙투안 때문에 헛웃음을 흘리다가 이내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새언니는?” “…너와 내 내자(內子)는 다르다.” “그녀도 누군가의 누이동생이야. 비록 그 친정에 영지전을 일으킬 만큼의 전력은 없지만, 여동생을 아끼는 오라비의 마음에 어찌 경중을 따질 수 있겠어.” 앙투안이 침묵했다. 여기에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까. 잠깐 생각하면서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반질반질한 앙드레트산 도자기 찻잔 테두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멜리장드를 사랑하지 않는 것쯤은, 나도 눈치채고 있어.” 사교계식의 미사여구나 은유가 단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말이었다. 같은 태에서 태어나고,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사이에서만 가능한 표현 방식이기도 했다. ‘세기의 로맨스’라고 불리는 부부의 사랑 이야기를 대놓고 부정하는 말을 여동생의 입으로 듣게 될 줄은 몰랐는지 앙투안이 눈을 크게 떴다. “…이제 와서 그녀를 사랑하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적어도 후작 부인으로서 대접은 해 주라는 거야. 오라버니에게 정부가 있든, 단순히 황녀와 엮이기 싫어서 급하게 아무나 잡아채서 결혼한 것이든.” 일단 두 사람은 결혼한 사이잖아. 그것도, 강제적인 개입 없이 오롯한 자신의 자유 의지로. 직설적인 화법에 앙투안이 미간을 문지르다가 고개를 들었다. “비난하는 것이냐.” “아니, 이건 누이동생으로서 하는 충고,” 적어도 네가 필요해서 데려온 이면 적절한 대가 정도는 지불하라는 논지를 읽었는지 앙투안이 눈을 감았다. 그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실체 없는 편두통 덩어리를 잠시 떠올리다가 외면했다. 사실 이 충고 한마디에 앙투안이 변할 것이리라 기대도 안 했다. 이미 그의 삶은 사랑이라는 밧줄로, 칼렙의 의지에 묶여 있는 꼭두각시 신세였으니깐. “그녀를 조금이라도 존중해 줬으면 해.” 다만, 그가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서, 적법한 아내를 착취하는 것을 그만두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생각을 한다면. 그렇게, 잘못의 대가를 덜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만들어 낸 오지랖이었다. 어깨를 으쓱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무 사이에서 이곳을 응시하는 칼렙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이 품은 짙은 격분에 심장이 철렁했다. 어느새 돌아온 건지, 어디서부터 들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단지 굳은 표정에 아로새겨진 배신감과 분노가 실물처럼 선명해서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대놓고 앙투안 앞에서 멜리장드를 옹호함으로써, 오랜 세월에 힘입어서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던 우리들의 우정이 방금, 겨울이 끝난 호숫가의 살얼음판처럼 파사삭 깨졌다는 것을. * * * “알릭스, 보고 싶었어요!” 본궁으로 귀환하자마자 반갑게 달려오는 멜리장드를 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틀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보고 싶었다고 말해 줄 정도로 친해진 것이 뿌듯하기도 하면서, 그래도 시누이인데 이렇게까지 반가워해 주는 그녀가 조금 걱정됐달까. 이렇게 쉽게 사람에게 정 붙이고 다니다가 어디서 배신이라도 당하면 얼마나 상처받을까? 역시 대공비가 되기 전까지는 내가 옆에서 잘 지켜 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갑작스러운 소식이 우리를 덮쳐 왔다. 어머니께서 영지에 방문하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이거면 될까요?” 종종걸음으로 여행길 짐을 꾸리는 멜리장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궁정에 온 뒤 처음으로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하는 멜리장드는 살짝 설레 보이기까지 했다. 자기를 그렇게 무시하는 시모랑 같이 떠나는 길인데도 마냥 씩씩하게 준비하는 멜리장드가 신기하기만 했다. 어머니는 일 년에 서너 번은 영지를 시찰하러 내려가시고는 하셨다. 보통 궁정에 적을 둔 대귀족들은 일 년에 단 한 번도 본성에 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나 어머니는 타인들의 손에 레비제트의 영토를 온전히 맡겨 둘 생각 따윈 없으셨다. 나와 앙투안에게 가문을 관리하는 법을 가르칠 때 가장 많이 하셨던 말씀이, ‘수족은 네 몸에 붙어 있는 것 외에는 신뢰하지 말아라.’였으니.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홀로 레비제트 영지를 건사해 온 어머니를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배경에는 발로 직접 뛰어온 세월이 녹아 있다. 지금은 좀 덜하다지만, 좀 더 젊었을 시절 어머니는 불시에 영지에 내려가서 몰래 딴 주머니 차는 놈의 목을 무려 직접 단두대에 올려서 쳐낸 분이셨다. 그렇다고 반드시 지금 내려가야만 할까. 걱정스럽게 어머니가 꾸린 짐을 살폈다. 장부를 살피시던 어머니가 돈이 새는 구석을 발견하시고 대로하셔서는 당장 오늘 저녁에 영지로 내려가겠다고 선언하신 참이었다. 요즘 퍽 잦아진 두통 증세를 보이는 어머니셨기에 나도 따라가야 하나 싶었지만, 하필이면 이틀 뒤 결혼식 일정이 있기 때문에 갈 수가 없다. 랑비제 부제독의 장녀이자 소피의 언니인 엘리자베트의 결혼에서 들러리를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두 명의 신부 들러리 중 하나인 내가 빠진다면 엄청난 실례이거니와 결혼식 식순에도 큰 차질이 생긴다. “알릭스, 너무 걱정 말아요. 제가 어머님을 잘 보필할게요.” 멜리장드가 차분하게 말했다. 나를 대신해서 부득불 따라가겠다고 주장한 것은 멜리장드였다. 앙투안은 추밀원의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함께 내려가기를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내가 볼 때는 백 퍼센트, 추밀원 일이 아니라, 히스테리 부리는 칼렙 놓고 가기 싫어서 거절한 거다. 그럴 거면 후작위 반납하고 저들끼리 어디 섬에 가서 살든가. 아, 그런데 후작위 반납해도 대신 후작 할 놈이 없구만. 내가 시집가서 애 낳지 않는 이상. 결국 절망스러운 결론에 도달했다. 아버지도 참. 남동생 하나만 더 낳아 놓고 돌아가시지. 케케묵은 제국법이 여성의 승계를 제한하고 있으니, 내가 대신 후작 해 먹을 수도 없고. 속으로 혀를 찼다. 결론은 또 내 결혼과 출산이다. “마드모아젤?” 조심스러운 하녀의 부름에 퍼뜩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멜리장드에게 무엇을 입혀야 할지 묻는 하녀에게 몇 가지 옷을 지정해 주며 습관적으로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 “멜리장드, 제가 언제나 말했죠? 멜리장드는….” “적법한 레비제트 후작 부인이니까 당당하게 처신하라구요?” 지겨울 만도 하건만 착한 멜리장드는 충실하게 대답했다. 하녀들이 순진한 어린양 세뇌하는 사이비 교주 보듯이 나를 쳐다봤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는 적어도 모두를 위한 선택을 하는 것뿐이라구. 음, 아마도 거의 모두? * * * 로르주 공작가의 수도 저택에서 열린 마드모아젤 랑비제의 결혼식은, 제국 해군 2인자의 딸의 예식이라기에는 그 규모가 조금 작은 편이었다. 아마 전시(戰時)상황에서 군인 집안 간의 결합을 호화롭게 진행하기에는 조금 부적절하다는 판단이 있었으리라. 거기다가 장교인 신랑이 곧 북부 전선으로 떠나야 할 것이기에 조금 급하게 치르는 감도 없잖아 있고. 그래도, 비교적 소박하되 격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예식과 피로연을 치르게 될 로르주 가문의 연회장은 황실처럼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호사스럽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고급스럽고 어여뻤다. 안목 있는 자들은 연회장을 장식한 생화들이 황족의 온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귀한 품종이라는 것을 눈치챘으리라. 양가의 지인인 군부 장성들이 대부분 전장에 있는 탓에 하객의 수는 적은 편이었으나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친히 예식에 왕림한 덕에 면이 죽지도 않았다. 지금쯤 황태자 부부는 하객석에 앉아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신부에게 말을 걸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결혼을 축하해요, 마드모아젤 랑비제.” 엘리자베트 랑비제가 수더분하게 웃었다. 그녀는 소박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여동생 소피처럼 활발하게 사교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허나 장차 군부에서 유력한 세력가가 될 것으로 점쳐지는 로르주 경의 아내가 되는 만큼 그녀가 사교계에서 점하게 될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드모아젤 랑비제’라고 불리는 마지막 순간이군요. 아쉬워라.” “이제 슬슬 그 호칭을 내게 넘겨줄 때가 됐지.” 신부에게 작약 꽃다발을 건넨 소피가 농을 던졌다. 엘리자베트를 둘러싼 여인들이 까르르 웃었다. 제국의 예법상, 마드모아젤 뒤에 가문의 이름이 붙는 호칭은 가주의 적장녀만이 받을 수 있다. 내가 유일한 ‘마드모아젤 레비제트’인 것과 같은 맥락이랄까. 단, 적장녀가 혼인하여 성이 바뀌면 그때부터 차녀에게 그 이름이 내려가게 된다. 그러니까, 십 분만 있으면 소피가 ‘마드모아젤 랑비제’, 엘리자베트는 정식으로 ‘로르주의 마담 엘리자베트’가 된다. 머지않아 ‘엘리자베트 로르주 공작 부인’이 되겠지. 이내 신부와 들러리들은 대기하라는 전언이 왔고, 나와 소피가 신부의 뒤에 일렬로 섰다. 라무아 제국에서 적법한 혼인을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 번째는 신랑, 신부. 이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고. 두 번째는 사제다. 촌부들이 찾아가는 하급 신관이든, 대귀족들의 혼인을 주관하는 주교 이상의 고위급 성직자이든 간에, 그 결혼이 ‘신 앞에서 맺어진 합당한 결합’이 되기 위해서는 신의 대리인으로 취급받는 사제가 결혼식을 보증해야 한다. 그리고 세 번째가 증인이다. 사제가 신의 대리인이라면 증인은 인류가 이룩한 문명사회 전체의 대변인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대표로, 인간이 세워 온 문명과 법에 기반하여 이 두 사람이 합법적으로 부부가 되었다는 것을 증언한다고나 할까. 사실 이렇게 세 가지 요소만 있다면 결혼의 형식은 크게 상관은 없었다. 황궁에서 하든, 신전에서 하든, 혹은 길바닥이나 허름한 여관에서 즉흥적으로 맺어지든. 다만, 이로써 ‘신과 인간 앞에서 맺어진 신성한 결합’은 함부로 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결혼식 증인의 수는 크게 제한이 없기 때문에 보통은 들러리들이 모두 증인을 서곤 한다. 현 황태자의 결혼식에는 증인이 무려 스무 명이었다. 멜리장드와 앙투안의 경우에는 칼렙 단 한 사람만이 그 증인이었지만. 하여간, 오늘 신부 측 들러리로, 증인 중 한 사람을 맡은 나 역시도 일말의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냥 제때 대답만 하면 되는 건데, 인류의 대표로서 이 결혼식을 보증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또 그 거창한 타이틀이 좀 어렵더라고. 살짝 곤두선 신경을 죽이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신랑 측 들러리에 누가 서기로 했더라. 아마 신랑의 부관 되는 기사 한 명이랑, 소피의 약혼자인 펭송 후작이었나? 남녀 들러리의 수를 맞춘 경우에는 피로연에서 신랑 신부를 따라 들러리들이 함께 춤을 추는 관습이 있기 때문에, 누구와 춤을 출지도 봐둬야 한다. 소피는 당연히 약혼자와 출 거고, 나는 그 부관이랑 추면 되겠지. 그런데 그 부관이 누구였었더라? 기억이 안 난다. “지금 들어가시면 됩니다.” 하녀장의 속삭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악단이 느릿한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그 선율을 따라 엘리자베트가 눈을 내리깔고 미끄러지듯 신부의 길을 걸었다. 그녀의 흰 드레스 자락 끝에 집중하며, 신부의 기쁨을 상징하는 오렌지꽃 부케를 들고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이내 엘리자베트가 신부의 길 끝에 설치된 단상 위에 선 대주교 앞에 다다랐고, 거기서 신랑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그 뒤를 따라 들러리들이 고개를 숙여서 신에 대한 예의를 보였다. 오늘의 대주교는 그저 맘씨 좋은 대머리 아저씨가 아니라 신의 대리자로서 이곳에 선 것이기 때문이다. “로르주의 아들, 조제프 샤를르 이지도르. 그대는 랑비제의 딸, 엘리자베트 안느 테레즈를 아내로 맞아, 삶의 모든 순간을 신의와 사랑으로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랑비제의 딸, 엘리자베트 안느 테레즈. 그대는 로르주의 아들, 조제프 샤를르 이지도르를 남편으로 맞아, 삶의 모든 순간을 신의와 사랑으로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신랑 신부의 서약 뒤로 이어지는 긴 주례사에 목이 뻐근해 왔다. 대주교가 존중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이며 이로써 번성하게 될 가문을 축복한다는 논지의 말들을 장황하게 한참을 읊은 후에야 비로소 긴 주례사가 끝나 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로써, 신랑과 신부는 부모를 떠나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었으니, 신이 맺은 것을 사람이 감히 나누지 못할 것임을 선포합니다.” 드디어 영원처럼 느껴지던 대주교의 말이 멎었다. 사실 신랑, 신부가 신의 앞에서 정식으로 맺어졌다는 사실보다 뻐근한 고개를 곧 들 수 있다는 것이 더 기껍게 느껴졌다는 사실에 약간의 자괴감을 느꼈으나 이내 합리화했다. 왜, 지금 머리에 쓰고 있는 황금으로 조각한 장미 화관이 얼마나 무거운데. 조금만 더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목뼈가 부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증인들은 들으십시오.” 대주교가 말을 이었다. “신께서 지으신 피조 세계를 향유하고 정복하여 문명을 이룩한 인류의 대표자로서 이 자리에 선 증인들은, 신랑 신부의 결합이 신의 이름으로 맺어진 것을 엄숙히 증언하는 바입니까?” 왼편부터 늘어선 들러리들이 하나씩 답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소피였다. “랑비제의 딸, 소피 빅투아르 안느가 엄숙히 증언합니다.” “레비제트의 딸, 알릭스 어멘가드 엘레오노르가 엄숙히 증언합니다.” 무사히 넘겼다. 오른쪽에 선 신랑 측 들러리가 입을 열었다. “펭송의 아들, 알란 장 필리프가 엄숙히 증언합니다.” 여기까지는 아는 이름이다. 그럼, 마지막 증인은 그 이름 모를 부관인가? 마지막 증인의 말을 기다렸다. “니케리온의 아들, 리산데르 아나스타시우스 테오발드가 엄숙히 증언합니다.” 아하. 니케리온 부관님이구나. 멍하니 생각하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뭐라고? 니케리온? 리산데르 니케리온? 북부대공? 잠깐! 당신이 여기서 왜 또 나오는 거죠? * * * 황도 파데사로부터 제국 남동부에 위치한 레비제트 후작령으로 가는 길은 꽤 먼 편이다. 제국의 젖줄 시렐르 강을 따라 내려가는 배에서는 선실에서 나오지도, 멜리장드에게 문을 열어 주지도 않았던 마담 엘레오노르였으나 같은 마차를 타고 내려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동행인에게 눈치라도 주는 듯이, 마담 엘레오노르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닫고 장부만 살피고 있었다. 궁을 떠난 지 나흘째. 레비제트 영지를 목전에 둔 지금이라면 무어라고 말 한마디라도 할 법도 한데도. 멜리장드가 조심스럽게 침묵을 깼다. “저, 어머님.” “누가 네 어머니더냐.” 엘레오노르가 단칼에 말을 끊었다. 궁에서 어멘가드 황후의 시녀장으로 지내던 시절에 시녀 여럿 잡았던, 전직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그 마담’의 냉대는 웬만한 젊은 여자들이라면 바로 눈물을 글썽일 만큼 차갑고 살벌했다. 바로 주눅이 들어서 쭈그러들 것이리라고 예상한 마담 엘레오노르는, 그러나 멜리장드가 예상과 다르게 생글생글 웃고 있자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러게요, 사실 너무 고우셔서 저도 어머님이라고 부르기 망설여진답니다. 어머님은, 알릭스와 자매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아요. 어쩜 그렇게 젊고 아름다우신가요?” 묘하게 초점이 어긋나면서도 해맑은 화법이었다. 마담 엘레오노르가 기가 찬다는 듯 허 소리를 냈다. “네 주제를 알라는 뜻이다.” “네! 저는 제 주제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멜리장드가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신과 인간 앞에서 아드님의 아내가 된 유일하고도 적법한 레비제트 후작 부인이랍니다!” 시시때때로 멜리장드에게 세뇌해 온 알릭스의 정밀한 주입식 교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마담 엘레오노르는 이마를 짚었다. 분명 결혼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화했을 땐 이렇게 근거 모를 자신감이 충만한 여자가 아니었는데. 오히려 주눅이 잔뜩 든, 소심한 여자아이였다.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벌벌 떨더니만. 왜 갑자기 변했는가. “어머, 어머님. 머리가 아프신가요? 아, 장뇌와 로즈마리가 첨가된 향유를 쓰시는 것을 보아하니 주기적으로 두통을 느끼시나 보군요. 제가 약초를 좀 아는데, 혹 관자놀이 부근이 쑤시듯 아프신가요? 아니면, 머리 전체가 울리듯 아프신가요? 목을 주기적으로 따뜻한 수건으로 문질러서 근육을 풀어 주는 것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하는 멜리장드에 마담 엘레오노르가 말을 잃었다. 지금껏, 자신의 기를 감당할 수 있는 이들 중 이 정도로 젊은 여인들은 몇 없었는데. 어쩌다 단둘이 있게 될 때마다 그녀의 기에 눌려서 조용히 구석으로 찌그러지거나 훌쩍거리는 처녀들에게 익숙해져 왔던 마담 엘레오노르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여태껏 그녀가 정점의 자리를 차지해 왔던 궁정 먹이 사슬 계에 알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의 인물이 나타났음을. 이는 노회한 사냥꾼으로서의 직감이었다. 먹이인지, 천적인지는 아직 알 수는 없었으나. * * * 어지간해서는 절대 북부, 그의 영토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 니케리온 대공이 황도에 나타났다. 이것만 해도 놀라 자빠질 일인데, 무려 그가 지금 사교계의 화두인 대(對) 비제른 전쟁의 총사령관임에도, 로르주 경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 워프까지 타고 왔다는 사실에 저택이 요동치다시피 했다. 워프를 타려면 일단 황제나 황위 계승 서열 3위 이내의 황족의 허가가 필요하다. 허가를 받은 후에는 게이트를 사용하거나, 좌표가 설정된 일회용 마도구를 사용해야만 한다. 워프 게이트는 제국의 황도, 극서와 극동 지방, 최남단과 최북단, 이렇게 다섯 곳에만 설치되어 있어서 보통 사람들은 이용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일회용 마도구는 게이트와 같은 공간의 제약은 없지만, 구하기는 몇 배로 더 힘들다고 봐야 한다. 당장 황궁에서 자라다시피 한 나조차도 한 번도 본 적 없으니까. 그리고 마도구든 게이트든, 마력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옮기려는 대상과 같은 무게의 은에 달하는 비용이 소모된다. 즉, 니케리온 대공은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이곳에 온 것이다. 그의 방문을 일단 전장에 복귀할 때까지는 극비에 부쳐 달라는 이야기에 따라 사람들은 대체로 침묵했지만, 그 속에서 술렁이는 흥분이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들뜬 이유는 바로 며칠 전 그가 성공적으로 벨뷔 지방을 탈환한 전쟁 영웅이기 때문이다. 승리의 주역, 대공 각하 만만세. 무려 그 니케리온 대공이, 단지 전우들의 가문이 맺어지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황도까지 왔다. 그리고 결혼식의 증인까지 서 주었다! 유원지처럼 들뜬 공기가 연회장을 떠돌았다. 피로연이 시작되고 악단이 무도회 춤의 시작인 알라망드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경쾌한 음악에 가볍게 몸을 맡긴 신랑 신부를 따라, 들러리로서 연회장으로 나가며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등에 꽂히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도 당연히 들러리 두 명 중 하나인 소피가 약혼자 펭송 후작의 파트너가 되어, 자연스럽게 나머지인 내가 니케리온 대공의 춤 상대가 된 탓이다. 아, 원작 스토리 시작할 때까지는 마주치기 싫었는데. 이제 남주가 내 이름도, 가문도 안다. 뭔가가 단단히 꼬여가는 느낌이다. 두뇌의 위험 감지 영역이 팝핀을 추고 있다. 애써 시선을 피하며 스텝을 밟았다. 이번 곡만 끝나고 도망갈 거다, 반드시! 굳게 다짐하다가 마지막 부분의 스텝을 헷갈렸다. 중심을 잃은 나를 붙든 건 파트너, 리산데르 니케리온 대공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자수정처럼 투명한 보랏빛 눈에 걱정이 스쳤다. 순간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만 주억거렸다. 알라망드 춘 세월이 몇 년인데 스텝 꼬여서 넘어질 뻔하다니. 망신이다, 망신.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하고 그의 손에 붙잡힌 허리를 빼려고 했으나 그는 붙잡은 손의 힘을 풀지 않았다. 당혹스러움에 눈만 깜박였다. 도망갈 타이밍인데? 그때, 리산데르 니케리온 대공이 입을 열었다. “알릭스, 혹, 저를 기억하십니까?” 자수정빛 눈동자가 붉게 타오르는 듯했다.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에 어영부영 미뉴에트 연주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얼결에 나와 니케리온 대공은 미뉴에트 대열로 마주 보고 섰다. 아니, 이렇게 날치기식으로 춤을 또 춰야 한다고? 혼이 나가기 직전, 니케리온 대공이 짧게 속삭였다. “저를 기억해 주셨다니, 기쁩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건지도 모르겠다. 워낙 재빠르게 사람들이 뒤섞여서. 그저 멍하니 몸에 익은 대로 스텝을 밟았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파스텔톤 드레스 자락들이 사락사락 스쳤다. 이내 남녀가 짝지어 손을 맞대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내 앞에 선 니케리온 대공이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였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는 당신 없는 하루가 천 일 같았습니다.” 그 의문의 빅투아르는 어쩌고 저한테 또 이러세요! 당장이라도 멱살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으나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서 참았다.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돌리자. 그리고 끝나자마자 바로 도망가는 거다. 더 이상 원작 남주와 플래그 꽂히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음…. 전쟁은 어찌하고 오셨나요?” “비제른의 선왕이 서거했습니다. 비록 적국이긴 하나, 군주에 대한 예우와 최소한의 기사도를 지키기 위해 이틀간 일시 휴전을 맺은 상태입니다. 저희 측에서도 일시 정비가 필요한 상황이고 말입니다.” 그렇구나. 아무리 영웅이라도 총사령관이 전쟁터 버리고 갑자기 여기 와도 되나 싶었더니. 그때, 리산데르가 내 주변을 돌면서 귓가에다가 스치듯 속삭였다.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황제 폐하께서도 윤허한 일입니다. 다만, 삼십 분 정도 후에는 돌아가 보아야 하겠지만요.” 순간 움찔했다. 내 속을 읽은 듯한 말에 놀라서 움찔한 건지, 아니면 귓속으로 내리꽂힌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에 어쩐지 목덜미가 간지러워서 그런 건지는 나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태연하게 스텝을 밟는 대공이 어쩐지 얄미워 슬쩍 노려보았다. 내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살짝 웃었다. 미인이 웃으니까 갑자기 화가 스르르 풀린다. 인간의 탐미주의적 본능이 낳은 감정의 알고리즘인가? 어쩐지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니케리온 대공이 입을 열었다. “기억하십니까? 당신께 승리의 영광을 바치기로 했던 것을.” 그가 말을 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 당신께 벨뷔 전투 승전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당신 미쳤어? 혹시라도 다른 누가 들었을까 봐 기겁했다. 다행히 한층 커진 음악에 주변 사람들은 신나게 춤을 추느라 정신이 없어 채 듣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안도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송구하오나 저는 아직 스물이 채 되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인지라,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네요.” 궁정 사교계 먹이사슬의 포식자, 천하의 알릭스 레비제트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다니. 엘레네가 들었으면 사흘 밤낮을 비웃었을 것이었다. 최대한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아이를 흉내 내며 가련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아.” 니케리온 대공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혹, 제가 부담스럽게 해 드렸습니까?” “…각하께서는 전쟁 영웅이시니,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이 당연하지요. 다만, 저는 이런 시선이 익숙하지 않아서….” 온 힘을 다해서 처연한 척을 했다. 다들 춤에 열중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마드모아젤 레비제트가 시선에 익숙하지 않다니. 궁정에서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씨도 안 먹힐 구라였지만, 북부에만 박혀 살던 니케리온 대공의 표정은 심각하게 변했다. “죄송합니다. 곤란하게 만들어 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나 둘 셋. 옷자락들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다시 남녀가 쌍쌍으로 우아하게 돌기 시작했다. “대공 각하께서 제게 사과하실 일이 무어 있겠나요. 다만….” 필살기로 단련한 속눈썹 파르르 떨기를 시전하자 니케리온 대공이 움찔했다. “보잘것없는 저를 기억해 주신 대공 각하의 신의에는 무한한 감사를 표하는 바이지만, 저는, 소박하고 조용하게 살고 싶답니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말이었다. * * * 레비제트 영지 본성의 서재. 본디 후작의 집무실이었으나 근 50년간 이곳에 가장 자주 드나든 이를 꼽는다면 전대 후작 부인, 현 마담 엘레오노르일 것이다. 전대 후작이 불시에 병사한 후, 친정에서 조심스럽게 제의한 재혼도 거부하고 나선 마담이 레비제트의 모든 것을 샅샅이 지배하게 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외간 계집이 후작가를 주무른다고 반발하던 방계가 없던 것도 아니었으나 단시일 내 영지의 모든 것을 장악해 낸 마담 엘레오노르의 업적 앞에서는 입을 닫았다. 심지어 암암리에 있던 부패를 일소해 버리고 영지민들의 생활을 개선해 낸 깔끔한 일 처리에, 마담 엘레오노르라고 하면 레비제트 영지민 사이에서는 거의 여신으로 추앙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다만, 그 화려한 결과 밑에는 그녀가 후작의 서재에서 잘 시간도 아껴가며 몸을 혹사해 온 세월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십일조세가, 어째서 이렇게 막대해진 게냐.” 칼로 베듯 서늘한 마담 엘레오노르의 말에 집사는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절절매기만 했다. 영지에서 상주하는 그조차도 알아내지 못한 영지 세금의 구멍을 수도에 있는 마담은 재빠르게 알아냈고, 그 즉시 신랑 되신 주님처럼 예고도 없이 영지 본성으로 찾아오셨다. 신실한 집사는 성서에 기록된 열 명의 처녀의 비유를 떠올리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들러리로서 결혼식을 준비하던 열 명의 처녀가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불시에 신랑이 들이닥친다. 성실히 준비한 다섯 처녀는 식장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지만, 준비를 게을리하느라 등불을 밝히지 못한 다섯 처녀는 식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났다지. 이래서야 할 말이 없다. “올해는 타이유(taille, 토지에 부과한 조세)도 면제하기로 이야기가 되었지. 하나 이를 명목으로 영지민을 수탈한 흔적도 남아 있군.” “저는, 신전이 그리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비록 요즘 들어 세속적인 모습으로 돌변했다고는 하나, 그 기반은 신을 섬기고 청렴을 표방하는 곳이 신전이다. 이번 횡령에서는 신앙심이 깊고 성직자들을 신뢰하던 집사가 미처 신전 교구가 그 권력을 남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 컸다. 뼈저린 실수였다. 마담 엘레오노르가 못마땅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알겠네. 내 오늘 직접 피해 지역을 시찰할 것이야.” 집사는 그저 조용히 부복했다. 마담 엘레오노르가 묵직한 마호가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우아한 걸음걸이로 문으로 향하던 그녀는 이내 균형을 잃고 잠시 비틀거렸다. “마님!” 집사가 달려와 부축하려고 들었으나 마담 엘레오노르는 거부했다. “됐네. 가 보게. 잠시 빈혈기가 도졌을 뿐이야.” 마담 엘레오노르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손짓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집사를 뒤로하고 서재를 나선 그녀는, 마구간을 향해 걸어가다가 이내 갑작스러운 어지러움을 느끼며 쓰러졌다. “마님!” 달려오는 집사와 하녀들에게 괜찮다고, 오는 길에 조금 무리를 한 것뿐이니 쉬면 나을 것이라고 진정시키려 했으나 마담의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내 그녀의 눈앞에 암전이 찾아왔다. * * * “어쩜, 거기서 대공 각하가 나오실 줄이야!” 탄성을 지르는 숙녀들 틈에 갇혀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유리잔에 담긴 스파클링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달콤한 맛을 따라 탄산 방울이 톡톡 터졌다. 이 발포주는 결혼 선물로 내가 직접 내 영지인 지롱드에서 공수해 온 것이었다. 네가 부담스러우니 가까이 오지 말아 달라는 논지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리산데르 니케리온 대공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부관의 부름에 갈 때가 되었다며 사라졌다. 어쩐지 개운치 못한 뒷맛이 있었지만 상큼한 백포도주와 함께 뒤로 넘겨 버렸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무려 로판 남주를 부담스럽다고 거절한 상황이다. 그래도, 일단 그는 막무가내로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사내는 아닐 테니 어지간해서는 이제 볼 일 없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애써 그를 지우려고 노력했다. “그 청흑발 보셨어요? 세상에 그런 신비로운 색깔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나를 둘러싼 숙녀들의 수다의 화두는 단연, 짧은 등장으로 엄청난 임팩트를 흩뿌리고 사라진 니케리온 대공이었다. “맞아요. 북부의 대공께서 그런 미남자이실 줄은 몰랐죠!” “저는 전쟁의 총사령관이라고 해서, 골라이어스(Goliath, 성서에 등장하는 거인) 같은 우락부락한 거한을 생각했는걸요.” 여인들이 황홀한 듯 뺨을 붉혔다. 하긴, 보기 드문 미모이긴 하지. 사교계의 어지간한 잘생기고 조건 좋은 남자들은 진작 품절된 상태이니, 그녀들이 생선가게에 취직한 고양이처럼 신선한 미혼 미남의 등장에 열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섭리다. “마드모아젤 레비제트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그 멋진 대공 각하와 춤을 출 수 있다니.” 로시앵 자작의 딸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들러리를 설 것을 그랬어요.” “어머, 들러리를 선다고 해도 각하께서 아무나랑 춤을 추시겠어요? 마드모아젤 레비제트 정도는 되어야 대공 각하와 격이 맞죠.” ‘아무나’로 격하된 마드모아젤 로시앵의 표정이 굳었다. 다른 숙녀를 깎아내리면서까지 내게 알랑거리는 이는 몽탕 백작 가문의 딸이다. 대놓고 하는 아부에 쓴웃음이 나왔다. 마드모아젤 몽탕은 박쥐처럼 요리조리 붙어서 이득이 될 만한 곳에 기웃거리기로 유명한 여자였다. 그녀가 내게 바짝 다가와 붙어 속살거렸다. “무도회장 샹들리에 불빛 아래서 춤추는 두 분이 얼마나 잘 어울렸는데요. 혹 아나요. 마드모아젤 레비제트께서 미래의 대공비가 되실지?” 몽탕 백작녀가 까르르 웃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대공 눈에서 벗어나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어차피 대공비는 멜리장드라고! 그녀가 그리는 장밋빛 시나리오를 부정하려 했으나 다른 이의 입에서 말이 나오는 것이 더 빨랐다. “어머, 대공 전하께는 이미 기사의 맹세를 바친 레이디가 따로 있으시다고 하던걸요. 그저 예의상 같은 들러리끼리 춤을 춘 거겠죠.” 그녀가 다가오면서 도발하듯 부채를 살랑이자 나를 에워싼 숙녀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졌다. 유유자적 턱끝을 들고 다가오는 것은 루이즈 외르지였다. “마담 루이즈, 두 분이 춤을 추시는 것을 보시고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몽탕 백작녀의 미약한 항변은 루이즈의 귀찮다는 듯 무성의한 손짓에 흩어지듯 줄어들었다. 몽탕 백작녀가 찌그러지자 루이즈가 비웃듯 미소를 지었다. “다 보았죠. 허나, 마드모아젤 레비제트께서는 춤 한 번으로 사람들이 맺어진다고 믿으시나요? 설마, 시골뜨기처럼 순진하게?” 대놓고 하는 도발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같이 슬슬 긁어 주거나 말로 한 대 쥐어박아 줬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약에 쓰래도 없던 개똥을 기적적으로 발견한 기분이구나! 그녀에게 활짝 웃어 주었다. “그럼요. 춤 한 번 췄다고 맺어진다면, 라울리 궁성에 연인 관계 아닌 이들을 찾아보기도 어려울 것이에요. 마담 루이즈, 맞는 말 하셨네요!” 러블리 개똥 루이즈가 당황해서 눈을 치떴다. 시비 걸러 왔는데 갑자기 첫눈 본 강아지처럼 반가워하니까 혼란스러운 얼굴이다. 물론 그녀의 마음속 혼란은 내 알 바 아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마구 논리를 몰아붙였다. “안 그런가요? 부부간의 결합이 얼마나 신성하고 무거운 것인지요.” “아… 그렇, 긴 합니다만.” 루이즈가 더듬거렸다. “아, 이미 결혼하신 마담께서는 아시겠네요! 부부 관계를 기반하는 사랑과 존중은 춤 한 번 추는 사이에 쌓일 만큼 만만치는 않다는 것을요.” “그건, 그건 그런데요. 하지만….” “그렇죠? 대공께서 기사의 맹세를 바치신 레이디를 향한 순결한 마음을 어찌 제가 넘보겠어요. 짧은 시간 춤으로 기대할 수 있는 바는 그저 얕은 우정 한 꺼풀에 불과한 것을요.” 그, 그런가요. 예상과 다른 폭풍 같은 전개에 휘말려 허우적대던 루이즈는 찝찝한 기분을 품고 사라졌다. 나는 그 뒤에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하마터면 본격적인 원작 스토리 진행도 전에 이상한 소문에 휩쓸릴 뻔했다. 가라, 루이즈몬. 소문을 흩어 버려! * * * 마담 엘레오노르는 눈을 떴다. 천장에는 시집 왔을 때부터 익히 봐왔던 청색 벨벳 캐노피가 늘어져 있었다. 레비제트 본성, 후작 부인의 침실. 뻣뻣한 몸을 일으키자 황금종이 울리는 듯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매끄러운 은발을 틀어 올리고 움직이기 간편한 면 옷을 걸친 멜리장드의 상체가 불쑥 캐노피 사이로 들어왔다. “어머, 어머님. 일어나셨어요?” “…네가 왜 내 곁에 있는 게냐.” “어머님, 쓰러지셨었어요. 하루가 조금 지났네요. 주치의가 말하기를, 무리를 조금 심하게 하셨대요. 평소 두통과 어지럼증이 좀 있으셨죠? 잠드신 때에 사혈 검사를 했는데 다행히 큰 문제는 없다고 하네요. 다만 가벼운 만성 피로가 있으신데, 향유로 버티지 마시고 한동안 좀 쉬셔야 할 거라고….” 재잘거리는 멜리장드에게 마담 엘레오노르가 입을 닫으라고 손짓하자 눈치껏 조용해졌다. “쉬기는, 당치도 않은 소리. 당장 확인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거늘. 손수 수탈 피해 지역을 시찰해야 하고….” “어머, 거기라면 제가 대신 다녀왔어요.” 마담 엘레오노르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상아처럼 흰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네가 무얼 안다고 거기를 다녀와?” “집사에게 보고를 듣고, 근 3년간의 장부를 비교해 보면서 나름 대략적인 문제를 파악해 보았습니다. 이를 근거로, 시찰 결과를 보고드리기 위한 문서도 써 왔어요.” 얼결에 마담 엘레오노르는 멜리장드가 내미는 종이 뭉치를 받아들었다. 전문적으로 몇십 년간 서류를 꾸며온 이들의 것에 비하면 조금 엉성하고 서투른 개요였으나 마담 엘레오노르는 그럭저럭 글을 읽어 나갔다. 정갈한 글씨체 사이에서 나름의 생각도 엿보였다. 아직 미숙하고 다듬어지지는 않았다만. 마뜩잖은 표정으로 서류를 넘기던 마담 엘레오노르의 눈에 이내 이채가 돌았다. “특이한 결론이구나.” 마담 엘레오노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서류의 한 부분을 짚었다.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신전에 구휼을 명목으로 주는 돈 역시도 줄여야 한다는 부분을 보아라.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멜리장드가 쑥스럽게 웃었다. “네, 신전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고아와 빈민을 구제하는 방식을 채택한다면 신전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게 되겠지요.” 자연히 신전의 수탈도 줄어들 거라고 설명하는 멜리장드를 향해 마담 엘레오노르가 내뱉었다. “비현실적이구나. 종교와 신실함은 여태껏 이 땅을 지배해 왔다. 이들의 반발을 어떻게 막을 것이냐.” 멜리장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살짝 눈을 깜박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제가 지난번 신전에서 주일 예배에 참석했을 때에요, 아주 먼 옛날, 고대의 라티움 제국이 대륙에 이름을 떨칠 때의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일견 생뚱맞은 소리였다. 마담 엘레오노르는 미간을 좁혔으나 끼어들지는 않았다. “주님의 아들이신 성자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천국에 대해 설파하는 그분의 영향력을 시기한 당시 정치가들이 함정을 팠더랬죠. 그들은 성자께, 천국의 백성들이 그 땅을 정복해서 식민지로 삼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냐고 물었어요. 세금을 내라고 한다면 황제의 식민 통치를 인정하는 셈이 되고,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한다면 제국에 반기를 드는 불순분자로 몰아 처형할 계획이었으니까요.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이라 자신하고 의기양양한 그들은 성자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답니다.” 마담 엘레오노르가 침묵했다. 그녀는 이 이야기의 속뜻을 알았다. 멜리장드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님의 것은 주님께 돌려라.]” 멜리장드가 기도를 올리듯 손을 모았다. 모르는 이가 보면 성녀처럼 고귀하다고 칭송할 외면이었다. “내면의 결실, 온정, 자비, 신앙생활같이 고귀한 천상의 것은 주님의 것이니 주님께 드리되, 세속적인 황제의 것은 따로 저희가 챙겨야 하지 않겠어요?” * * * 건강을 이유로 벨레르 별궁에 칩거하던 황후가 다시 본궁으로 돌아온 때는 건국 축제를 단 석 주가량 앞둔 시점이었다. 황후가 본궁에서 떠나 있는 동안 황제의 무한한 용인으로 메트레상티트르인 퐁텐 백작 부인, 아니, 이제 그녀의 남편이 후작위를 받아 후작 부인까지 올라갔으니 퐁텐 후작 부인이지. 하여튼 그녀는 끊임없이 깝신거리고 나다녔다. 엘레네가 ‘그 여자가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꼴은 못 봐준다.’라고 짜증을 부리면서 그렇게 좋아하던 매사냥 모임까지 불참할 정도로. 하나뿐인 황녀가 분노하든 말든 황제는 점점 날뛰는 퐁텐 후작 부인에게 주의조차 줄 생각이 없이, 그녀의 교태를 보며 껄껄 웃기만 했다. 이미 적잖은 관료의 목이 그녀의 베갯머리송사에 잘렸으니, 뜨내기들은 궁의 실세가 퐁텐 후작 부인에게 있다고 계산하기 시작했다. 이내 쏟아지는 뇌물과 아첨 속에서 퐁텐 후작 부인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그녀가 비웃고 견제하던 황후가 떠난 상황에서, 한창 의기양양해진 퐁텐 후작 부인이 제 가학성을 풀기 위해 잡은 다음 과녁은 그녀가 병적으로 싫어하던 멜리장드였다. 어쩔 수 없이 나와 멜리장드는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마음으로 사교 활동을 대폭 줄였다. 적어도 황제가 퐁텐 후작 부인을 내칠 때까지는 그녀가 사방팔방 깝죽거리는 꼴을 봐야 할 터인데. 하지만 당분간 황제는 그녀를 내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황제는 퐁텐 후작 부인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황후의 친정 오라비인 에스테 공의 세력을 축소하고, 퐁텐 후작 부인의 뒷배에 서 있는 가스콜레 공의 세력을 강화하여 의도적으로 궁정의 힘의 균형을 재조정하고 있었다. 레비제트가 속해 있는 파벌의 구심점인 에스테 공작이 힘을 잃는다면 파벌이 속절없이 공중분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그러나 퐁텐 후작 부인에게 맞설 수 있는 가장 큰 세력인 황후가 건강 문제로 칩거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저울의 균형이 무너졌다. 내가 아무리 레비제트의 마드모아젤로서 어느 정도 사교계에서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는 젊은이들 사이에 한정되어 있다. 결혼도 하지 않은 ‘마드모아젤’ 주제에, 사교계를 주름잡는 ‘마담’들 사이에서 무슨 큰일을 할 수 있겠는가. 짜증스럽게 입술만 짓씹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멜리장드가 ‘봄의 심장’을 받은 것으로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지난달 어머니와 함께 돌아온 멜리장드의 가슴에서 빛나는 에메랄드를 보고 기절할 뻔했다. 햇빛에 투명하게 빛나며 영롱한 광채를 뿜어내는 봄의 심장. 어떻게 얻어낸 걸까? 물어봤지만 멜리장드는 어머니가 선물해 주셨다고 천진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혹시 해가 서쪽에서 뜬 건가 의심했지만, 멜리장드와 같은 마차에서 내린 어머니는 그저 무뚝뚝하게, ‘네가 마음에 들어서 준 것은 아닌 줄 알고 있어라.’라고만 하시고 황후가 있는 벨레르 별궁으로 쌩 떠나 버리셨다. 그렇게 아연한 나는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로 번쩍번쩍한 에메랄드를 찬 멜리장드와 본궁에 남겨졌다. 그저 그 이후 전달된, 이듬해부터 사용할 것이라는 영지 재정 개편안을 접하며 그냥 멜리장드가 무언가 혁신적인 정책을 내놓았구나- 라고 짐작만 할 뿐. 하여간, 이 시점에서 황후의 귀환은 다행인 일이었다. 만일 황후께서 건국 축제 주간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누가 건국 연회를 주관할 것인지에 대한 권리를 두고 엘레네와 퐁텐 후작 부인 간의 신경전이 불거지고 있었으니깐. 원래대로라면 황후의 부재 시에는 황태자비가 이를 대행해야 했으나, 타국 출신으로 제국의 사교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황태자비는 여주인의 영광을 기꺼이 내려놓았다. 황제가 차라리 대놓고 누군가의 편을 들어 준다면 더 편했으리라. 엘레네의 편을 들어 준다면 그대로 진행하면 되고, 퐁텐 후작 부인의 편을 들어 준다면 궁중 예법을 근거로 항의할 수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황제는 그저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고 방관했기에 자애의 궁에는 폭풍전야 같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다행히 라울리 궁의 여주인이 되돌아옴으로써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안도를, 누군가에게는 실망을 안겨 준 귀환 이후 건국 축제 연회 준비가 시작되며 궁의 공기는 한층 더 분주해졌다. 서류를 들고 뛰어다니는 시종 시녀들, 가구를 나르는 인부들, 밤늦게까지 분주한 방을 촛불로 밝히는 하녀들. 그들의 움직임이 한데 복잡하게 얽히고 어우러져 라울리 궁을 한창 꿀을 모으는 때의 거대한 벌집처럼 느껴지게 했다. 건국 축제라는 거대한 태풍이 궁을 휩쓸고 다니는 것 같았다. 허나, 그 중심부에 위치한 황후의 공간은 마치 폭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고요하고 차가운 정적에 왠지 머쓱하여 풍요의 뿔을 본떴다는 문손잡이만 쓰다듬었다. 어머니의 부름을 받은 나와 멜리장드는 황후의 공간 중 하나인 ‘상아의 홀’에 막 들어온 참이었다. 라울리 궁의 하고많은 식당과 응접실 중에서 하필이면 황후의 식당이라고 불리는 상아의 홀에 부르시다니. 그것도 황후와 동행하는 자리도 아니고, 오롯이 딸과 며느리만을 부르는 용도로. 시녀장을 그만둔 뒤에도 어머니를 향한 황후의 총애가 지극히 굳건함을 나타내는 표식이라고 해야 할까. 그 이름답게, 상아의 홀 중앙에 놓인 흰 대리석 탁자 주변에는 금방이라도 살아 숨 쉴 듯 정밀한 상아 조각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거의 작은 미술관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문 옆을 지키듯 선 사냥의 여신 조각에 눈이 스쳤다. 고대의 이교도 신화 속 상징들을 본뜬 상아 조각들. 어린 시절에는 무서워했었지. 지금은, 글쎄. 이교도의 조각 사이사이로 국교를 수호하는 성인(聖人)들의 이콘(icon, 성화)이 걸려 있는 걸 보면 조금 우습기도 하다. 종교 대통합의 장도 아니고. 어쩌면, 어린 시절의 나처럼 이교도의 조각을 무서워했던 어떤 이름 모를 황후가 이콘을 하나 갖다 놓은 게 아닐까. 그리고 성인의 수호를 청한 것이 엉뚱하게 전통이 되어 버려, 하나둘씩 세월이 흐르면서 이콘들이 추가된 것 아닐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아의 홀에는 처음 와 보는 멜리장드가 감탄의 탄성을 내뱉었다. “정말 아름다운 작품들이네요.” “가까이서 봐도 될 거예요. 단, 어머니 오시기 전에 빨리.” 멜리장드가 풋 웃으며 그림에 다가섰다. 그림들을 감상하는 멜리장드를 따라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역사서 속에나 나오는 화가들이 그린 백몇 년 전 그림부터, 비교적 최근의 그림까지 골고루 놓여 있다. 한 그림 앞에서 멜리장드가 발을 멈추었다. “어머, 잔느 다르덴(d’Ardennes)이네요.” 멜리장드의 고향, 보덴 준남작령이 자리 잡고 있는 아르덴 지역의 수호성인인 성 잔느를 묘사한 그림이었다. 흰옷을 입은 성 잔느가 위기에 처한 제국을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일어나는 장면을 섬세한 붓질로 묘사해 두었다. 그 시대에 여러 번 염색해야만 나오는 귀한 흰옷을 입을 수 있던 것은 황족이나 고위 성직자 정도밖에 없었을 텐데. 농노의 딸이었던 성 잔느가 계시를 받을 때 흰옷을 입고 있을 리는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무시한, 고증 따위 씹어 먹은 그림이다. 하지만 우중충하게 묘사된 배경과 달리, 성 잔느의 새하얀 옷과 금발이 대조되는 장면은 퍽 인상이 깊다. 일자로 굳게 닫은 입매에 결의가 가득 차 있다. 멜리장드가 손을 뻗어 성 잔느의 얼굴을 가리켰다. “이 그림, 뭔가 알릭스와 닮은 것 같아요.” 평소라면 이 언니 또 눈에 콩깍지 껴서 헛소리한다고 넘길 말이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나를 너무 이유 없이 좋게 봐주는 멜리장드는 온갖 아름다운 것이 나를 닮았다는 망언을 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 말은 헛소리로 치부하기에는 조금 어려워 애매하게 웃었다. 그 이유는.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아, 이 그림의 진짜 모델이 우아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알릭스는 내 딸이니, 닮은 것이 당연하지.” * * * 선선대 레비제트 후작, 즉 알릭스와 앙투안의 조부에게는 괴짜라고 불리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필리프 레비제트라고 불리던 사내는, 제가 이미 학문과 결혼했노라고 주장하며 결혼조차 하지 않고 학문 연구 기관인 대학에 틀어박혔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가문을 이을 후계자는 굳건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많은 이들은 필리프가 자진해서 권리를 포기한 덕에 굳이 방계를 늘려 레비제트의 땅을 쪼개 상속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더 기꺼워했다. 소원한 대로 제국 변방 카마르그 대학을 평생 떠나지 않으며 조용히 학자로 살다가 눈을 감은 필리프의 존재는 가문에서도, 정계에서도, 사회에서도 철저히 잊혔다. 자신들을 ‘레비제티안’이라고 부르는 알 수 없는 무리들이 등장할 때까지. 이는 필리프 레비제트가 젊은 시절 술을 마시다 재미 삼아 쓴 짧은 글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신의 피조물인 모든 인간에게는 일종의 천부적으로 부여된 평등한 권리가 있다는 논조로, 목을 뻣뻣하게 세운 귀족 사회를 비웃는 두 장 분량의 짧은 수필을 썼고, 필리프의 주변인들은 대경실색해서 그 글을 어딘가에 처박았다. 그렇게 필리프가 취중에 끼적거린 글은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조차 잊힌 채 숨을 거두는 듯했다. 한 학생이 도서관을 청소하다, 당사자조차 썼다는 것을 잊어버렸을 그 짧디짧은 글을 발견할 때까지는. 원래 대학은 양과 같이 무지한 대중을 인도하는 목자, 즉 성직자를 키우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했나. 그러나 카마르그 대학에서는 신의 신성한 말씀 대신 알 수 없는 술렁임이 들끓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젊은 혈기를 타고 적색의 광기가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교수진과 시청의 눈길을 피해 돌아다니는 짧은 수필, 그리고 그 사본, 또 사본의 사본. 새끼를 치듯 늘어난 종이들이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원본 말미에 적힌, 무려 대귀족 레비제트의 서명이 그 불온함을 정당화시켰다. 무려 대귀족인 레비제트조차도 부정한 신분제 아닌가. 그러니 우리가 무너뜨려도 정당하지 않은가. 이내 제국 곳곳에 폭동이 일어났다. 자신들을 ‘레비제티안’이라고 규정한 이들은 당시 이미 세상을 떠난 필리프 레비제트의 유지를 잇는다는 명목하에 무력을 사용한 폭동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단지 근방 영주들을 끌어내리는 식으로 전개되던 폭동은 곧 무자비한 약탈로 이어졌다. 혼란을 틈타 한자리 꿰차 볼까 하고 어중이떠중이들은 몰려드는데, 이들을 통제할 만한 중앙의 강력한 체계 따위는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신께서 모든 인간에게 부여한 천부의 권리를 주장하는 신성한 혁명’이라는 거창하고 긴 이름으로 불리던 움직임은 곧 만만한 곳을 약탈하는 도적질이 되었다. 원래 목표했던 귀족들은 궁성에 모여서 꼭꼭 문을 잠그고 있으니, 일단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가까이 있는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신성한 혁명’을 위한 희생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고 정당화하던 이들은 곧 분노한 당시의 지배자, 선황제가 파견한 군사에 의해 소탕되었다. 일차적으로 폭동이 일단락되자 선황제는 그 원흉에 화살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레비제티안’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선황제는, 충실한 신하였던 레비제트에게 배신당한 것이나 다름없게 된 양상에 격노했다. 당시 레비제트 가문에 남아있던 일원 중 그 누구도 필리프 레비제트의 머리카락 끝자락조차 본 적 없다는 사실도, 폭동으로 인해 레비제트 영지의 풍성한 포도밭조차도 약탈당했다는 사실도 선황제의 마음을 돌리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작금의 작태가 충실한 신하에게 뒤통수를 맞은 격이라고 믿은 선황제의 뜻은 돌산처럼 완고했다. 조심스러운 청원도 소용없었다. 심지어 레비제트 후작 부인을 시녀장으로 둔 적이 있다는 이유로 선황제는 나름 아꼈던 맏며느리, 당시 황태자비였던 어멘가드의 문안조차 받지 않고 다이아몬드의 홀의 문을 걸어 잠갔다. 이미 레비제트는 가주였던 후작이 전해에 병사한 터라 힘겨운 상황이었다. 유일한 적통 후계자는 여섯 살짜리 코흘리개에, 가문에 남은 것은 몸을 푼 지 일 년을 겨우 넘긴 후작 부인, 요람에 누워 있는 어린것 하나. 그 와중에 황제의 분노가 매서우니, 이제야말로 레비사 백국 시절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레비제트가 멸문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흉흉했다. 그날 밤에는 바람이 찼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흰옷의 여인이 나타났다. 울지 않는 밴시(울음소리로 죽음을 예고하는 요정)처럼 홀연히 나타난 숙녀는 지고한 황제의 전이 있는 신중의 궁 입구 앞에 꿇어앉았다. 하나둘씩 궁을 지나다니던 이들은 곧 그녀가 소문의 ‘레비제트 후작 부인’임을 알아챘다. 그러나 이들이 주목한 것은, 귀부인의 표본이라고 칭해지던 평소에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고귀한 귀부인답게 틀어 올리고 다니던 머리는 길게 풀어 헤친 상태였다. 평소에 신고 다니던 보석 구두는 온데간데없이 맨발이었다. 굽이 높고 무거운 구두는 착용한 이가 직접 뛰어다닐 필요가 없는 지위와 권위를 가진 이임을 의미한다. 신발을 벗고 흰 맨발을 드러낸 이 상황은 그 고고한 레비제트 후작 부인이 자신의 힘과 안전을 오롯이 내려놓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몇백 년 전, 파문당할 위기에 처한 한 왕이 수일을 혹한 속에서 맨발로 빌고 빌어 교황에게 용서받았다고 했나. 그러나 지금 무릎 꿇은 이 여인의 모습은 구전 속 그 왕의 설화처럼 굴욕적이기보다는 오히려 고고하고 우아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지켜보는 와중에도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달이 점점 높게 떠오르자 그녀가 걸친 옷이 그 빛에 희게 빛났다. 그동안 후작 부인이 걸치고 궁정을 누빈 화려한 비단옷과 보석 장신구들에 비하면 모욕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단순한 옷이었다. 풍성하게 잡힌 드레이프도, 끝단에 자수나 테팅 레이스도 없는 흰옷. 얼핏 여인의 가장 내밀한 옷차림이라고 여겨지던 슈미즈가 떠오를 법도 했지만, 턱 밑까지 채운 단추는 일말의 음심조차 남기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신앙에 귀의한 수녀들의 수도복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눈치 빠른 이들은 곧 흰옷은 비둘기처럼 순결한 레비제트의 결백을, 아주 단순한 장신구조차 달지 않은 옷은 그녀가 황제에 대해 그 어느 살의도 품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귀를 막고 항변조차 묵살하는 황제에게 마지막으로 온몸으로 호소하는 결백이었다. 온몸을 다한 시위는 달이 지고, 태양이 떠오르고, 다시 그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다시 새로운 달이 떠오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면서도 꼿꼿한 자세로 꿇어앉은 모습은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혹자는 이를 보고 독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흐트러지지 않는 기품을 칭송했다. 궁정을 드나들던 화가 한 명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밑그림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후작 부인은 이 모든 소란 속에서도 미동도 없이 신중의 궁, 가장 지고한 이가 있을 다이아몬드 홀이 자리한 궁성 4층의 창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신께서 가호하사, 굳게 닫힌 다이아몬드 홀의 문이 열렸다. * * * 상아의 홀을 메운 이야기가 멎었다. 준비된 다과가 차게 식고도 남을 시간이었으나 미처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멜리장드의 눈에는 살짝 물기가 고여 있었다. “그렇게, 가문을 지켜 내신 것이로군요.” 맨몸의 탄원 하나로 전 궁정의 옹호를 얻어내고, 황제의 마음을 돌린 여인은 우아하게 자수 냅킨을 집어 입매를 닦았다. “그래. 그 모습을 본 당대의 궁정 화가, 위베르 경이 그려간 스케치에서 저 그림이 탄생했다.” 어머니의 시선이 성 잔느의 그림 위에 머물렀다. 옅은 냉소가 그녀의 입가에 스쳤다. “우습지 않으냐. 역신(逆臣, 반역한 신하)을 두고 제국을 구한 성녀의 그림을 그릴 생각을 다 하다니. 평소 같았으면 비웃고 지나갈 일이었다. 하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야 했다. 가문에 덧씌워진 반역자라는 꼬리표를 떨쳐 버리고, 내 아들과 딸에게 더럽혀진 긍지가 내려가지 않도록. 레비제트의 이름 아래 거하는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어머니가 옅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몸을 낮추고 머리를 조아렸다. 5년간 레비제트산 와인과 양털에 막대한 중앙 세금을 물린다는 정책에도 수긍했다. 저런 것과 같은….” 어머니가 성 잔느의 그림에 눈짓했다. “광대놀음에도 어울려 주었다. 어째서일까. 이 궁정에서, 명예는 그 자체로 너와 네 사람들을 지키는 방패요,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입이 그림 속 성 잔느의 그것과 정확히 같은 모양으로 다물렸다. 한순간에 박제된 그림 속 여인과는 달리, 그 실물에는 살아온 세월이라는 조각가가 노회함과 완고함을 한층 더 깊게 새겨 넣은 듯했다.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의무를 갖는다(noblesse oblige).” 어머니가 우리가 앉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정확히 말했다. “어찌 통치하는 푸른 피들의 손에 쥔 것이 권력뿐이라고 생각할까. 그 어깨에 메인 것이 다스림 받는 이들의 목숨이거늘. 책임이 막중하지 않으냐. 이는 네 발판이자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 심해로 가라앉듯 무거워진 분위기에 숨을 깊게 마셨다. 어머니가 소리 없이 일어나, 물 흐르는 듯 나와 멜리장드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어머니가 멜리장드의 앞에 흑단 보석함을 내려놓았다. 분명 살짝 내려 두었을 텐데, 상자가 대리석 탁자와 만나며 내는 둔탁한 소리는 그 무게가 상당할 것임을 짐작게 했다. “그러니, 너는 이 궁정에서 가장 현명하고, 아름답고, 기품 있고, 명예로운 이가 되어야 한다. 네가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이용해 네 슬하에 있는 이들을 지키려무나.” 멜리장드의 떨리는 손이 보석함 위에서 머뭇거렸다. 어머니가 열어 보라는 듯 턱을 살짝 까닥였다. 상자 안에는 오색 광채를 뿜어내는 굵은 진주가 가득 들어 있었다. 양식 진주가 없는 이 세계에서 완벽한 구형을 띤 진주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아 나조차도 숨을 흡 들이켰다. 흐린 분홍빛은 분명 바다 건너 무흐페르, 이교들의 땅에서만 생산되는 품종이다. 어머니가 일견 무심하게 말했다. “정치에는 자금이 필요하지.” 멜리장드가 멈칫했다. “정치, 말인가요?” 어머니의 입매에 순간적으로 웃음이 스친 것 같았으나 이내 무표정해졌다. “그래, 정치. 정치가 무엇이냐. 비단 추밀원에 모인 치들이 어떤 돈을 어찌 쓰느니, 무슨 땅을 무슨 명목으로 침략하느니 하고 떠드는 것만이 정치라고 생각하느냐. 알릭스, 정치가 무엇인지 네가 말해 보려무나.” 갑자기 저요? 순간 당혹스러웠으나 기억을 더듬었다. 비슷한 내용을 책에서 읽었는데… 기억을 되짚어 답했다. “음, 반디아 공의 측근이었던 루크벨로가 그 저서에서 규정한 바에 의하면, 정치는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는지에 관한 이야기지요.” 어머니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을 일컬어 정치적 동물이라고 하지. 사람이 둘 이상 되는 시점부터 정치가 자리하게 된다. 과수원의 포도나무 다섯 그루를 세 명의 형제가 어떻게 나누느냐를 결정하는 과정조차 정치이다. 그러니, 어찌 아녀자라고 해서 정치를 모르겠느냐. 네 힘을 써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것, 가진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 누군가를 몰아내는 모든 것이 정치이거늘. 그리하여.” 어머니가 멜리장드와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가냘픈 중년 여인의 손이니 무거울 리가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천근을 얹은 듯 무거웠다. “내, 너희가 어찌 행할지를 한번 보려고 한다.” 어머니가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내게 한번 보여 주려무나. 내 눈이 나이가 들어 흐려진 것인지, 아닌지.” * * * 닭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같은 맥락에서 말하자면, 우리의 머리가 깨져도 건국제의 날은 다가온다. 무엇을 위해 쓰라는 것인지 지시도 없이 어머니가 주고 가신 진주는 여전히 번쩍거리기만 했다. 진주라는 것이 원래 유분기에 취약한지라, 함부로 손대지도 못하고 흑단 보석함을 지켜보기만 했다. 부담스러워라. 살짝 어깨를 털며 서랍장을 닫자 멜리장드가 말을 건넸다. “무슨 보석을 끼고 갈지는 정했나요?” “음. 노란 옷이니 노란 보석을 하는 것은 조금 우스울 것 같네요. 오늘은 페리도트를 하죠.” 자잘한 수정이 박힌 감람석 목걸이를 가리키자 하녀들이 부리나케 장갑을 낀 손으로 목걸이의 체인을 채웠다. 멜리장드가 미소 지으며 왼쪽 옷깃에 단 봄의 심장을 매만졌다. 부러 비슷하게 노란 비단으로 맞춘 드레스에, 똑같은 스토마커의 백합 문양. 거기다 비슷한 녹색 계열의 보석으로 포인트를 주니, 거울 속에 비친 우리의 그림자는 닮지 않게 만든 쌍둥이 인형 같았다. 하녀들이 새벽부터 수도 레비제트의 저택에서 실어 날라온 상자들을 들고 분주히 뛰어다녔다. 연회는 원래 준비할 것이 많은 법인데, 특히 일 년에 한 번, 일주일이나 가는 건국 축제의 연회라면 얼마나 준비할 것이 많겠는가. 창고 속에서 잠자고 있던 가문의 상징, 평소에 착용하기에는 무거워 밀어뒀던 장신구들 등등이 궤짝에 실려 응접실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했다.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이 문장을 달아라, 이 향유를 뿌려라, 등등 지시하는 와중에 하녀 하나가 백단나무 상자를 넘어뜨렸다.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새하얗게 질려서 눈물을 글썽이는 얼굴이 아직 앳되어, 경을 치는 대신 그냥 빨리 정리만 하라고 손짓했다. 성급하게 주워 담는 손이 미처 여물지 못해, 팔 틈으로 자락 몇 개가 미끄러져 나왔다. 멜리장드가 무심코 떨어진 흰 물체를 주워 들었다. “어머, 깃털이네요.” 그제야 내용물에 눈이 갔다. 튜닉에 가까운 하늘색의 천 조각에 얼기설기 붙어 있는 깃털들. 그리고 상자 틈으로 빠져나온 굵은 금빛 사슬. 마치 옛 CC였던 구남친과 전공 필수 과목에서 같은 조가 된 순간처럼, 예기치 못한 마주침에 순간 살짝 얼굴이 굳었다. 저택에서 이것까지 보내올 줄이야. 깃털을 들고 이게 무엇이냐 묻는 멜리장드에게 태연히 웃어 보였다. “…별것 아니에요. 작년 건국제 가장무도회에서 입었던 옷이 섞여 들어왔네요. 이제, 나갈까요?” * * * 옛날, 아직 숲에는 정령이 살고, 사악한 용이 공주님들을 납치하던 아주 먼 옛날에, 어느 젊고 잘생긴 영주님이 숲에서 금 사슬을 목에 건 신비로운 처녀 엘리옥스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답니다. 하지만 영주님은 전쟁에 나가야 했어요. 남편이 전쟁에 나간 사이 엘리옥스는 목에 금 사슬을 건 일곱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권력을 욕심낸 엘리옥스의 사악한 시어머니가 엘리옥스를 죽이고 아이들을 숲에 버렸답니다. 아이들은 숲의 은자의 손에서 자라났습니다. 엘리옥스의 마법 능력을 물려받은 아이들은 금 사슬을 벗으면 백조가 될 수 있었답니다. 어느 날, 시어머니의 시종이 나무를 하러 갔다가, 금 사슬을 벗어 놓고 백조의 모습으로 목욕하는 여섯 사내아이를 목격했습니다. 욕심이 생긴 시종이 금 사슬을 훔치자 소년들은 영영 백조의 모습에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유일하게 사슬을 빼앗기지 않은 막내 누이가 아버지의 성으로 찾아가 진실을 밝혔고, 오라비들의 사슬을 돌려받아 다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시종이 이미 사슬 하나를 부서뜨린 바람에 미처 사람이 되지 못한 백조 하나는, 맏형인 백조 기사 엘리야스의 배를 수호하는 백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엘리옥스의 백조 아이들은 모두 성으로 돌아왔고, 사악한 시어머니와 시종은 벌을 받았답니다. <엘리옥스의 백조 아이> * * * “이제 들으시오, 당신의 금지된 질문에 내가 어찌 대답하는지! 나를 보낸 이는 성배를 지키는 왕이고, 내 아버지의 기사인 나는 엘리야스요. 나의 신부였던 여인이여, 사랑과 의심이 어찌 공존할 수 있겠소?” 테너 가수가 웅장한 노래를 부른다. 여자 주인공인 공주 역할을 맡은 소프라노는 슬픔에 겨워 쓰러지지만 이미 금기가 깨져 버린 터라, 그녀의 신랑이었던 엘리야스는 그녀를 잡아 주지 못하고 백조가 끄는 배를 타고 떠나간다. 애처롭게 뻗은 손끝을 스치는 것은 빈 바람뿐. 쓰러진 공주가 비탄의 아리아를 부르며 오열하자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보였다. 황실 오페라 극단이 ‘백조 기사와 공주’를 공연하던 때였다. 아버지와 형제들의 죽음으로 위기에 빠진 공주님이 있었다. 공주는 어느 날 홀연히 백조를 타고 나타난 기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한다. 공주를 지키기 위해 백 번의 결투에서 승리한 기사는 정체를 묻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공주와 결혼한다(정체도 모르면서 결혼은 왜 한 건지? 싶지만 몇백 년 전에는 이게 낭만이었다니까 넘어가자). 하지만 결국 공주는 의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정체를 묻고, 그로 인해 금기가 깨져 버려 기사는 떠나 버리고 만다는 이야기. 진부하다면 진부한 비극 오페라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그걸 꽤나 좋아했던지라, 주야장천 백조 기사와 공주를 보고 싶다고 떼를 쓰고 다녔다. 그러나 열세 살 어린애였던 나를 매료시킨 것은 기실 파멸하는 비극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사슬만 풀면 백조로 변신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이었다. 하긴, 전생에서도 나는 그 나이 때까지 마법소녀물을 좋아하긴 했다. 별의 수호를 받는 미소녀 전사의 변신 이야기만큼 재밌는 건 없다고. 각설하고, 그때 내 생일 선물로 앙투안이 백조 기사의 이야기의 원형인 ‘엘리옥스와 백조 아이들’ 전설이 담긴 서사 시집을 구해 왔었다. 자연스럽게 백조 아이들의 이야기에 푹 빠졌던 열세 살 어린애는 가장무도회에서, 우리 모두 백조 아이를 해야 한다고 난리를 쳤다. 앙투안도 칼렙도 난색을 표했지만 결국 내 떼를 못 이겨, 목에 가짜 금 사슬을 걸고 소맷자락에 깃털 날개를 단 튜닉을 걸친 상태로 백조 오빠들로 가장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군말 없이 어울려 줬을까. 나야 한국 나이로는 중학생이었다지만 둘은 스물을 코앞에 둔 상태였는데. 뭐 해골, 도깨비, 동물, 정령 등 온갖 괴생물들로 분장하는 가장무도회에서 별 특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린 누이동생의 고집을 들어주느라 우습지도 않은 백조의 기사로 분한 것은 갸륵했다. 팔랑거리는 얇은 튜닉, 그 위를 감싸는 흰 깃털. 목에 걸칠 가짜 황금 사슬까지 야무지게 챙겼으니까. 어쨌든 그때부터, 가장무도회에서 백조 아이로 분장하는 것은 우리 레비제트 남매와 칼렙의 작은 전통이 되었다. 작년까지도 함께 맞춘 백조 옷을 입지 않았던가. 살짝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관계가 이렇게 치닫게 될 줄은 몰랐다. 평생 함께할, 가족 같은 사이인 줄 알았는데. 그러나 앙투안과 내가 연적 관계의 양극단에 서게 되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은 파도에 모래성이 부서지듯 스러졌다. 지금은, 썩어 가는 외나무다리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것 같다. 건국 축제 무도회장으로 향하는 길, 내 앞을 걷고 있는 멜리장드와 앙투안이 보였다. 후작 부처로서 함께 입장하기 위해 손을 잡고 걷고 있는 모습이다. 말 한마디 주고받는 모습도 없다는 것은 제외하고, 뒷모습 자체는 문제없는 부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어떠할까. 뒤에서 그들을 따라가는 나는 볼 수 없다. 나를 에스코트하던 사촌이 뭐라고 말을 걸어왔으나 온 신경이 오빠 부부에게 쏠렸기 때문에 대충 대꾸만 하며 은의 방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은의 방 문을 지키던 시종들이 앙투안을 알아보고 거대한 거울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무도회장의 열기가 훅 얼굴에 끼쳐 오는 것 같아서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라울리 궁을 건축했던 바실리오스 대제는 정말로 돈지랄을 하고 싶었나 보다. 이 시대의 거울은 유리 위에 은을 얇게 입히는 공정을 거쳐야 해서 굉장히 비싸다. 그런 거울들을 운동장만 한 방의 벽 한 면에 도배하다시피 해 뒀으니. 덕분에 이 방은 몇 배로 더 커 보이긴 한다. 그뿐인가? 황금 촛대, 크리스털 샹들리에, 대리석 바닥. 천장에는 건국제와 신의 설화를 담은 웅장한 프레스코가 그려져 있다. 저 그림을 그렸던 화가는 이후에 이를 뛰어넘는 역작을 그리지 못하자 미쳐서 자살했다지. 아무 생각 없이 궁정을 뛰어놀던 여섯 살 때의 나와 엘레네는 어린 시녀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고, 은의 방에서 피눈물 흘리는 화가의 유령이 기어 나오는 악몽을 꿨더랬다. 아무 생각 없이 천방지축 황녀님과 마드모아젤을 조금이나마 얌전히 시킬 생각으로 이야기를 했던 시녀는 벌로 한 달간 무도회 참석을 금지당했었다. 한동안 자기 전에 무섭다고 통곡을 하던 터라 앙투안이 인형을 하나 구해다 줬었는데. “자비로우신 성부의 은총으로 라무아 제국의 황제, 신성 라티움 제국의 후계자, 파데사 대공, 뤼제나와 밀레디아의 공왕, 디외 샤를 연합의 수장이시며, 성령의 대행자이신 교황께서 기름 부어 세운 거룩한 신앙의 수호자이신 아르튀르 위그니스 샤를루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황제의 시종장의 외침에 의식의 흐름이 끊겼다. 황제에게 예를 취하기 위해 부복한 군중들을 한번 훑어본 황제가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황제가 단상에 오르자 모든 이들의 눈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허나 내 눈을 잡아챈 것은 그 뒤에 선 황후였다. 진주를 갈아 넣은 분을 바르고 금사를 섞어 짠 베일을 드리웠으나 굳은 낯을 가릴 수는 없었다. “뜻깊은 날에 라울리에 온 그대들을, 짐이 이 궁성의 주인으로서 환영하오.” 보통 정략으로 얽힌 궁정의 부부 관계가 그렇듯이, 황후와 황제는 일반적인 부부 관계는 아니다. 어떤 때에는 정치적 파트너, 어떤 때에는 정적(政敵). 지금은 어느 쪽이냐면…. “건국제께서 신의 이름으로 라무아를 세운 이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제국은 그대들의 충의를 기억하고 있소.” 레비제트 후작가의 근처, 본래 에스테 공작이 서 있었어야 할 빈자리에 눈이 스쳤다. 전장을 시찰하고 오라는 황제의 갑작스러운 요구로 건국 축일 당일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황후의 친정 오라비. 건국 축일 행사는 단순히 1년에 한 번 있는 명절에 모여서 춤추고 즐기는 행사가 아니다. 적어도 라울리 궁성에서는. 제국을 이끄는 가문들을 한데 모아서 황제의 위엄을 다시 각인시키고, 그 위엄 있는 황제의 신의가 그들에게 있음을 상기시키는 일종의 의식이나 다름없다. 그런 행사에 의도적으로 불참시키는 것을, “짐의 신뢰는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위에 있음을 기억하시오.” 네 발판이자 기반인 황제의 신뢰를 거두어 가겠다- 라고 해석한다면. 황제가 연사를 끝내자 무표정 위에 가면을 쓰듯 미소를 그린 황후가 잔을 들었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안주인으로서 내가 잔을 들도록 하겠소. 자비로우신 성부의 광휘와, 이제까지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이어져 나갈 제국을 위해서 잔을 듭시다. 제국의 찬란한 영광을 위하여!” “제국의 찬란한 영광을 위하여!” 황후를 따라 건배사를 외치면서도 머리는 바쁘게 굴러갔다. 억측일까, 아니면 진실에 근접한 예상일까. 간단한 연사가 끝난 뒤 황제가 퇴장하고, 어느샌가 시작된 악단의 연주를 따라 사람들이 춤을 추기 위한 대열로 나섰다. 아무리 내로라하는 가문이 모였어도 그 안에서도 신분의 고하가 또 나뉜다. 비공식적인 연회나 가면무도회면 모를까, 은의 방에서 열리는 공식적인 무도회는 철저하게 신분에 따라 자리가 구분되기 때문에 아무나와 춤을 출 수가 없다. 사실 춤을 추고 싶은 기분도 딱히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제약이 기껍다. 개나 소나 감히 춤을 신청할 생각은 못 하니까. “후작 각하, 연통이 있습니다.” 크리스털로 만든 포도주잔을 톡톡 두들기며 춤추는 이들을 구경만 하는데, 갑작스럽게 하인 한 명이 다가왔다. 은쟁반 위에 올려진 곱게 접힌 봉투에는 아무 문양도 없었다. 앙투안이 장갑을 낀 손으로 쟁반 위에 있던 은제 페이퍼 나이프를 집어 봉투를 찢었다. 종이를 읽던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황제가 퇴장했으니 이후로는 떠나도 큰 상관은 없으나, 이렇게 일찍? 미간을 좁혔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추밀원 일? 집안일? 아니면, 칼렙? 그때, 멜리장드가 앙투안의 소매를 붙잡았다. “춤 한 번도 없이, 벌써 가시나요?” 멜리장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내가 아는 한, 그녀가 앙투안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내보인 의사였다. 악단이 연주하는 현란한 쿠랑트(Courante, 빠른 춤곡)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리는 가운데 앙투안이 멈칫했다. 멜리장드가 붙잡은 소매 끝이 작게 흔들렸다. 앙투안이 낮게 한숨을 쉬며 손을 뻗어 소매에서 멜리장드의 손을 떼어 냈다. 멜리장드의 낯이 금세 어두워졌다. “미안합니다, 부인. 조금 있다가 제가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멜리장드의 얼굴에서 그림자가 걷혔다. 기나긴 장마가 끝난 호수에 햇빛이 드리우는 것처럼 큰 눈에 기대가 떠올랐다. “저, 정말이신가요?” 앙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멜리장드의 얼굴에 나이대에 걸맞은 싱그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하인을 보내 주세요.” 수줍게 건넨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아닌지, 고개만 까닥인 앙투안은 코트 속에 편지를 집어넣고 무도회장에서 바람같이 사라졌다. 살짝 상기된 얼굴을 한 멜리장드가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가 부채 너머로 내게 속삭였다. “알릭스, 들었어요? 그이가 이따가 만나자고 했어요!” “…그렇게 좋아요?” “어머, 좀 주책인가. 하지만, 그이가 만나자고 했는걸요.” 수줍게 웃는 멜리장드를 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앙투안은 빈말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긴 하다. 하지만, 해가 서쪽에서 뜨지도 않았는데. 원작에서는 한 번도 멜리장드를 찾지 않은 앙투안이 과연 멜리장드를 만나러 올까? 살짝 미간을 좁히고 고민했다. 설마, 원작이 변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알릭스, 반가워요.” 부드러운 캐러멜색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여인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주홍빛 눈이 따스하게 빛났다. “어머, 마담 엘리자베트.” “저번 결혼식에서는 큰 신세를 졌지요.” “신세랄 것까지야. 레비제트와 로르주, 랑비제 세 가문 간의 긴 우정을 생각하면 더한 것도 할 수 있는걸요. 어머니께서도 긴한 사정으로 참석을 못 한 터에 애석해하셨지요.” 엘리자베트가 부드럽게 웃었다. “조촐한 예식이었는데 그리 말씀해 주시니 부끄럽군요. 그나저나, 옆의 분은?” “아, 제 새언니를 아직 만나 보시지 못하셨군요.” 멜리장드에게 눈짓하자 멜리장드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부끄럽게도, 그리 활발하게 사교 활동을 하지는 않는 편이라서 이런 자리에서야 레비제트 후작 부인을 처음 뵙게 되네요.” 멜리장드가 언제 들떴냐는 듯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저 역시도 처음 뵙습니다, 마담. 레비제트의 멜리장드입니다. 마드모아젤 랑비제에게 손위 자매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이리 아름다우시고 기품 있으신 분인 줄 알았다면 진작 찾아뵈었을 것을요.” “부디 말을 편히 하세요. 저도 레비제트의 마드모아젤과 후작 부인 두 분의 우애가 지극한 점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답니다. 그 후작 부인의 미모가 달빚을 빚어 만든 것처럼 아름답다는 이야기도요.” “겨자씨조차도 울창한 나무로 오인케 하는 것이 소문인지라, 들으신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이 두렵네요.” “어찌 그런 말씀을. 소문이 그 실체의 절반도 채 담지 못한 것을요.” 화기애애 재잘거리는 잡담이 한 차례 돌았다. 마담 엘리자베트가 생긋 웃었다. “아름다운 후작 부인을 알게 되어서 기쁘네요. 우리가 비록 만난 시간은 짧지만, 소중한 우정을 이어 나갈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어요. 곧 로르주 저택에서 살롱을 한번 열 예정인데, 후작 부인을 초대해도 될까요?” 대박이다. 로르주 공작 부인의 살롱에 출입하는 인물 중에는 정재계 핵심 인사들의 부인들, 영향력 있는 학자들과 문인들이 있다. 그녀의 살롱을 이어받게 될 엘리자베트의 초대라면 결코 가볍지 않다. 보이지 않게 뒤로 살짝 멜리장드의 등을 콕 찔렀다. 멜리장드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초대해 주신다면 지극한 영광이지요. 부디 멜리장드라고 불러주세요.” “오, 고마워요, 멜리장드. 멜리장드도 저를 엘리자베트라고 불러 주신다면 좋겠네요.” 마담 엘리자베트가 멜리장드를 보며 미소 짓다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물었다. “오, 잊어버릴 뻔했네요. 제가 알릭스에게 긴히 할 말이 있는 참이라. 알릭스,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을까요?” 무슨 말이길래. 의문이 들었으나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마담 엘리자베트를 따라 테라스로 나갔다. “다른 것은 아니에요. 다만 전해 줄 것이 있어서 불렀어요.” 엘리자베트가 살짝 손에 무엇인가를 쥐여 줬다. 빳빳한 고급 봉투가 손에 안착했다. 도톰하고 묵직한 게, 딱 봐도 싸구려 갱지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급 종이였다. 앙투안도 그렇고, 요즘은 무도회장에서 전갈을 주고받는 게 유행인가. 엘리자베트가 열어 보라는 듯 눈짓했다. 페이퍼 나이프가 없는지라 급한 대로 브로치를 떼어 냈다. 날카롭게 벼려진 브로치 핀으로 도톰한 봉투를 와드득 뜯었다. 내용물은 단순했다. 가장무도회의 초대장이었다. 금박을 얇게 입힌 초대장. “이게 뭔가요?” 엘리자베트가 눈을 천진하게 깜박였다. “가장무도회 초대장이에요. 오늘 밤, 알릭스가 꼭 와 줬으면 해서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굳이 초대를 하고자 했다면 이렇게 당일에 초대장을 직접 줄 것이 아니라 사람을 시켜 내 방으로 보내면 됐을 것인데. “여기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데, 저 혼자 갈 수는 없기 때문에 알릭스가 꼭 와 줬으면 해요. 다만, 시국이 어지러우니 우리 둘 다 눈에 띄지 않는 방법으로 갔으면 해서요. 알릭스는 가족 다음으로 제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와다다 빠르게 말한 마담 엘리자베트가 눈꼬리를 찡긋해 보이고는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방금 뭐였나. 엉겁결에 받아 든 초대장을 열었다. 시간은 오늘 밤 10시, 장소는 벨치아 대사관저. 가면을 쓰고 와야 한다는 말이 적혀 있다. 뭘까. 종이를 다시 닫는데, 봉투 사이에서 다른 쪽지가 툭 떨어졌다. 쪽지에는 마담 엘리자베트의 방 위치, 연회가 끝났을 즘인 저녁 시간, 그리고 혼자 오라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 * * * 알릭스가 양해를 구하고 마담 엘리자베트와 사라진 직후 멜리장드는 쟁반을 든 하인에게서 잔을 하나 받아 들었다. 입에 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자 향긋한 향이 화하게 퍼졌다. 이전까지 포도주에 대해서는 단순히 달다, 시다, 쓰다 정도만 알고 있었다. 친정이던 보덴 영지에서 포도주는 아버지와 오빠들이나 마시는 것이었고, 멜리장드가 맛봐 온 포도주는 어쩌다 신전에서 영성체를 받을 때나 한 모금 받아먹는 쓰고 떫은 액체일 뿐이었다. 맹한 무지를 걷어 준 것은 알릭스의 가르침이었다. 레비제트의 안주인이 포도주를 구분할 줄 몰라서는 안 된다 주장하며 술을 종류별로 쭉 깔아서 맛을 구분하는 연습을 시켰다. 결국 둘 다 취해서 뻗어버림으로써 끝나곤 했던 연습들을 상기하며 멜리장드가 풋 웃었다. 다행히 풍년의 포도 알맹이가 여물듯 연습은 결실을 거두었다. 원산지와 포도 품종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아로마와 숙성 기간과 방식에 의해 좌우되는 보디의 묵직한 질감, 한 모금 머금는 순간 입과 목에 남는 여운의 미묘한 차이를 이제는 구분할 수 있었다. 단순히 단것만 찾는 것이 아니라 씁쓸한 맛 사이에서 한 줄기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풍미를 찾아내게 된 것이다. 멜리장드는 레비제트 지방에서 주로 생산하는 샤토 리브라는 와인을 가장 좋아했다. 레비제트 영지에서만 나는 포도로만 만들 수 있는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과일 향, 그러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게 균형 잡힌 여운이 좋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마음에 담았던 레비제트, 그 자체를 닮은 듯한 맛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충족감에 멜리장드가 살짝 눈을 감았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단순히 술의 맛을 음미하는 것으로 보이겠지. “안녕하십니까, 마담.” 갑작스럽게 걸려온 말에 멜리장드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한 인영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있었다. 예법에 한 치 어긋남이 없는 동작이었으나 어쩐지 그 끝에서 경박함이 묻어 나오는 듯하여 멜리장드가 티 나지 않게 눈초리를 찌푸렸다가 폈다.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객관적으로는 훤칠하고 잘생긴 얼굴이긴 했다. “미안합니다만, 내가 그대를 알던가요?” 냉정한 멜리장드의 말에 사내가 살짝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 저로 인해 당황하셨더라면 심심한 사과를 표합니다. 다만, 이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빛을 무색게 하는 미모에 눈이 멀어, 나비가 꽃에 이끌리듯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에로스(사랑의 신)의 미천한 노예일 뿐인 저입니다만, 감히 그대의 존함을 알 수 있을까요?” “먼저 말을 걸어오신 이가 소개를 먼저 하는 것이 예법상 옳은 일이라고 사료합니다.” 칼 자르듯 냉정한 대응에 남자가 당황한 듯 입술을 짓씹었다. “아, 죄송합니다. 저는 바랭 백작 에두아르드입니다.” “그렇군요, 바랭 백작. 저는 앙투안 레비제트 후작의 내자 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차가운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바랭 백작이 살짝 진땀을 흘렸으나 이내 면면에 수줍은 표정을 뒤집어썼다. “그렇군요. 이리 아름다우신 분께서 그 후작 부인이셨다니. 미처 몰랐습니다. 다만 슬프게도, 제 마음속에서 이미 불길은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 제가 마주한 비극은, 메마른 들판에 번지는 불길을 꺼줄 비의 요정이 오로지 당신이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청하건대, 제게 이 불길을 잠시라도 잠들게 할 단 한 번의 춤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바랭 백작이 물망초를 닮았다는 평을 듣는 눈을 호소력 짙게 떴다. 우수에 가득 찬 듯한 짙은 푸른 눈에 넘어가지 않은 여자는 몇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것은 예상외의 심드렁한 표정을 한 멜리장드. 그리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리는군.” 부채를 손바닥에 탁 내리쳐 접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바랭 백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돌아본 그가 마주친 것은 맹수의 것과 같은 날카로운 흑안이었다. 흑진주에 비견될 것 같은 흑색 눈동자가 번득인다. 정성 들여 땋아 올린 검은 머리채 위에 얹은 티아라에는 섬세하게 조각된 6개의 카메오가 반짝였다. 진주와 다이아몬드 장식으로 엮은 카메오에는 황실을 수호한다고 여겨지는 여섯 천사의 얼굴이 묘사되어, 이 티아라의 주인이 틀림없는 황실의 핏줄임을 증명했다. 거기다가, 그녀의 뒤에 시립한 여인들은 일개 하녀도 아닌, 누가 봐도 고귀한 이들이다. 감히 황후가 주관하는 행사에서 시녀를 위시하여 나타날 수 있는 여인이 누가 또 있겠는가. 바랭 백작이 황급하게 부복했다. “황녀 전하.” “일어나게.” 황녀의 허락에 바랭 백작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엘레네 황녀가 턱 끝을 쳐들고 오만하게 물었다. “어느 가문의 누구이기에, 내 친우의 가족 되는 이를 곤란하게 하고 있는 겐가.” “곤란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했단 말인가. 그저 미모를 칭찬하고 춤을 한번 청했을 뿐인데, 갑자기 지고하신 이가 나타나 자신을 질책한다. 땀을 뻘뻘 흘리던 바랭 백작이 힐끗 멜리장드의 눈치를 봤다. 당연히 제 역성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백작은, 그러나 가련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멜리장드를 보고 경악했다. 호수 같은 눈이 그렁그렁했다. 당장 누구라도 손수건을 건네고 위로해야 할 것 같았다. 이래서야 모양새가 영 이상했다. 마치 제가 정숙한 숙녀를 위협해서 강제로 희롱한 놈팡이 같지 않은가. 등골이 서늘해진 바랭 백작이 황급히 자신을 소개했다. 당장 황녀에게 자신이 한낱 무뢰배가 아님을 호소해야 한다는 본능적 사고의 발로였다. “아, 저는 바랭 백작 에두아르드입니다.” 엘레네 황녀가 곱게 손질한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바랭이라는 가문은, 내 들어 본 적이 없건만.” 바랭 백작이 황급히 말을 얹었다. “제 친척뻘 되시는 이가 생시몽 공작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저를 후계로 들이시며 같이 가지고 계신 작위 중 하나인 바랭 백작위를 제게 넘겨주셨습니다.” “아.” 엘레네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또, 시종장이 안목이 흐려져서 당치도 않은 떨거지를 은의 방으로 출입시킨 줄 알았네.” 얼떨결에 당치않은 떨거지가 된 바랭 백작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으나 엘레네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면, 자네 아비 되는 이는 누구인가? 생시몽 공의 인척이라면, 내 익히 아는 이일 터이니.” “아, 제 부친은.” 바랭 백작이 눈치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모트 자작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엘레네의 입매가 실룩였다. 엘레네가 역한 공기를 차단하듯 흑단으로 대를 만들고 비단을 덧댄 쥘부채를 펴들어 하관을 가렸다. “그럼, 자네가 바로, 사르코사 지방, 모트 자작의 아들이라는 겐가.” 황녀가 자신의 가문을 알아봤다는 점에 잠시 놀란 듯한 바랭 백작이 이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친부였었는데, 웬일로 황녀 전하와 안면이 있었나. 무려 황녀와의 연줄을 기대하는 마음이 힘차게 부풀어 올랐다. 엘레네 황녀가 입을 열었다. “생시몽 공도 참 안타깝군. 후계로 들일 이가 어지간히도 없었는지.” 부풀어 오른 풍선을 난도질하는 듯한 발언에 하늘 높이 떠올랐던 기대가 곤두박질쳤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한 바랭 백작을 보는 엘레네의 얼굴에 짙은 혐오감이 떠올랐다. “지금 당장,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게.” “네, 네?” “뚜쟁이의 아들과 더 섞을 말은 없네.” 차갑게 돌아서는 엘레네 황녀를 아연히 바라보았으나 어찌 지고한 황족의 말을 거역하겠는가. 바랭 백작은 입을 몇 번 달싹거리다가 차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자리를 피했다. 멜리장드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살짝 피어오른 의문을 털어 버렸다. 바랭 백작에 관한 것은 그리 궁금하지도 않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황녀 전하.” “고맙다는 말을 들으러 한 일은 아니다만.” 엘레네가 말을 딱 잘랐다. “알릭스는 어디로 간 겐가?” “잠시 로르주의 새 마담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자리를 비웠어요.” 엘레네가 입매를 살짝 비틀었다. “알릭스가 없다고 해서 아무 치의 말이나 다 받아 주면 어찌하나?” “먼저 말을 걸어와서, 어쩔 수 없었답니다.” 멜리장드가 살포시 웃었다. “그나저나, 방금 전 백작은 조금 이상한 자 같네요.” 엘레네가 이유를 묻듯 눈썹을 추켜올리자 멜리장드가 답했다. “저를 처음 본 것처럼 구는데, 제가 결혼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맨 처음 저를 마담이라고 불렀는걸요. 멜리장드의 지적에 엘레네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참, 알 수가 없는 일일세. 무슨 목적으로 그대에게 접근한지는 모르겠다만. 앞으로 변변찮은 떨거지가 말을 건다면 내 이름이라도 대게.” “어머나, 그리해도 괜찮은 건가요?” “딱히 자네를 생각해서는 아니다만. 혹시 자네의 평판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알릭스가 슬퍼할 것을 염려해서이니 오해하지는 말게.” “그래도 감사해요.” 멜리장드가 해사하게 웃었다. “아, 저기 알릭스가 오네요.” 날 때부터 고귀한 황녀님과, 결혼으로 신분 상승에 성공한 운 좋은 여인이라 불리는 후작 부인. 단 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 접점도 없었을 법한 사이였다. 두 여인은 걸음을 한층 더 빠르게 재촉하는 알릭스가 다가오는 장면을 나란히 바라보았다. * * * 엘리자베트의 하녀들이 솜씨 좋게 둘둘 말아 넣은 적금발을 타오르는 듯 붉은 가발 아래로 숨겼다. 평소에 그리 즐겨 찾지 않는 핏빛 연지를 입술에 톡톡 펴 바르고 나니 유리 거울 너머에는 평소의 나와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 여인의 모습이 비쳤다. 이미 나무의 정령인 드라이어드로 분장을 끝낸 마담 엘리자베트가 나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드러운 옅은 갈색 머리 사이로 나뭇가지가 솟아나 있었다. 살짝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대체 제가 뭘로 분장하는 거죠?” “글쎄요. 알릭스가 한번 알아맞혀 보겠어요?” 붉은 머리에 붉은 화장. 선홍빛 가운이라. 온몸으로 빨간색을 외치는 듯한 차림새다. “불의 정령?” “음, 틀렸어요.” 하녀가 머리에 쓸 화관을 가져왔다. 진한 생장미 향이 풍겼다. 끝을 뭉툭하게 갈긴 했지만, 가시들까지 그대로 붙어 있는 붉은 장미를 엮어 만든 화관이었다. “아, 설마 장미꽃 공주 샤론느인가요?” “맞아요!” 마담 엘리자베트가 손뼉을 쳤다. 저주에 걸려 장미꽃에 갇혀, 고귀한 남자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전까지는 인간이 될 수 없었다는 공주의 전설을 떠올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딱히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닌데. 하지만 굳이 준비까지 해 준 성의에 입을 대는 것은 아니겠다 싶어 그냥 입을 닫았다. “그래서, 누구를 만난다는 거예요?” 마담 엘리자베트가 살짝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시절의 친우랍니다. 외국으로 시집갔는데, 건국 축일을 맞아 잠시 들어왔다고 하네요.” “어머. 친우를 멀리 보내셨다니, 상심이 크셨겠어요.” 하긴, 장교의 아내로서 외국으로 시집간 친구를 만나기는 쉽지 않으리라. 특히 전쟁 중인 지금은. “아, 그래서 가장무도회에서 만나기로 하신 건가 보네요.” “네, 맞아요.” 마담 엘리자베트가 살짝 눈을 피하며 웃었다. 친구 하나도 제대로 못 만나고, 결혼은 참 어렵다고 생각하며 나도 살짝 웃어 주었다. 붉은 실로 놓은 장미 자수가 새겨진 흰 반가면까지 받아 쓰자 마부가 우리를 마차로 안내했다. 마차가 어둠을 가르고 밤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성국의 옆 동네, 손에 꼽힐 정도로 부국인 벨치아는 라무아에 대사관저를 지을 때 황금을 범선 분량으로 짊어지고 왔다는 전설 아닌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닌지, 평시에도 호화롭기로 유명한 벨치아 대사관저는 오늘 특히 더했다. 분수에서는 포도주가 솟아났고, 귀한 크림과 설탕을 아낌없이 쓴 당과류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하늘하늘한 새틴 리본을 묶어 늘어뜨린 나뭇가지들 사이에 밝힌 등불로 인해 시간은 자정을 넘겼음에도 정원이 대낮처럼 밝았다. 그중 백미는 가장무도회가 열리는 은밀한 무도회장이었다. 건국 축제 기간에, 수도 파데사에는 내로라하는 귀족 집안의 남녀들이 모이게 된다. 개중에서도 젊은 아들딸들은 으레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혈기를 누르지 못하는 법이다. 예법의 족쇄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딱딱한 공식 행사.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젊은 피들은 숨구멍을 찾아서 이곳저곳을 미꾸라지처럼 파고들었다. 따라서 스타킹부터 숄까지, 예법에 하나하나 따라가야 하는 엄격한 복식을 벗어던지고, 파격적이고 관능적인 차림으로 얼굴을 가린 채 즐기는 가장무도회가 유행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냥 예의상 반가면만 착용한 이들부터, 본격적으로 동화 속 등장인물로 꾸미고 온 사람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이는 가장무도회의 불문율은 딱 하나. 서로의 신원을 그림자 속에 감추는 것. 자연히 별의별 일이 일어난다. 일개 하녀와 황자가 하룻밤을 보내기도, 원수 집안의 아들딸이 눈이 맞기도, 추밀원에서 멱살 잡고 싸우던 정적이 술친구가 되기도 하는 곳. 가장무도회장은 현실과 유리된 별세계다. 회장을 벗어나는 순간 이곳의 일은 하룻밤 꿈속의 일이 되어 버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취한 척 늑대 가면에게 엉겨 붙는 사냥의 여신을 보며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어린 시절에 내가 앙투안과 칼렙을 따라 주로 참석했던 가장무도회는 참으로 건전하고 가족 지향적이었구나 싶다. 물론 그런 무도회에서도 눈 맞아 어느 빈방을 찾아 사라지는 남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퇴폐적이지는 않았다. 푸른 수염과 짙은 입맞춤을 나누는 고양이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눈이 마주친 것 같아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마담도 참, 이런 데서 무슨 친구를 만난다고. 어색하게 과실주 잔을 받아 들고 머금으며 악단의 연주에라도 집중하려 애썼다.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찢어지는 듯한 바이올린의 기교, 낮게 울리는 첼로와 지저귀는 플루트의 트릴이 한데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기묘한 교향곡이 귓바퀴를 두드렸다. 그때였다. “…그럼, 그렇게 하지.” 평생에 걸쳐 들어온 익숙한 목소리가 너무나도 분명하게 들렸다. 소음에 미처 착각했다기에는 그 느낌이 수면 위에 분리되어 떠오른 기름처럼 분명했다. 튕기듯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당신들이 여기에. 황망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얼굴 전체를 가린 가면과, 체형조차 전혀 특정할 수 없는 검은 로브를 썼으나 그 아래로 살짝 보이는 적금발이 분명했다. 금발은 상당히 흔한 머리 색이었으나, 나와 같은 결의 색깔을 내가 어찌 못 알아보겠는가. 앙투안. 그리고 그 옆에 선 것은 칼렙.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으나 어쩐지 마주하기 껄끄러웠다. 물론, 엘리자베트의 하녀들이 전심전력으로 변장시켜 둔 나를 알아볼 일은 없을 것이다. 나조차도 거울 속 내 모습이 낯설었으니까. 역시 앙투안과 칼렙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멀어져 갔다. 무엇인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듯 서로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가면 너머로 오가는 것은, 서로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애틋한 눈빛이리라.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설마, 갑자기 뒤를 돌아보고 장미꽃 공주가 누이를 닮은 것 같다며 따지러 오지는 않겠지. 멀어져 가는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멀어져 가는 두 사내의 로브가 바람에 살짝 술렁였다. 아. 갑작스러운 충격이 심장을 때리고 지나갔다. 잠깐 드러난 그들의 목덜미에는, 황금 사슬이 걸려 있었다. * * * 고귀하신 남성이시여, 제 말을 들어주세요. 제 이름은 샤론느, 동쪽의 왕국의 공주입니다. 제게 청혼을 거절당한 사악한 마법사가 분노하여 수탉의 알, 투구꽃 진액, 사형수의 뼛가루로 저주의 그림을 그려 왕의 딸인 저를 장미꽃 속에 가두었습니다.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고귀한 신분과 청고한 인품을 가진 이께서 매 새벽 첫 번째 이슬이 맺히는 이파리에 일곱 번씩 일흔 날 동안 입맞춤해 주시면 된답니다. 허나, 곧 시들 꽃 한 송이의 미약한 부탁은 고귀한 이에게 닿을 바 없어, 늘 허공에 흩어졌지요. <라무아의 전래동화, 장미꽃 공주 샤론느 中> 달달한 과실주를 가득 머금어도 입안 가득 들어찬 쓴맛은 내려가지 않았다. 옆에서 적당히 마시라고 만류하던 엘리자베트의 말에 대충 대꾸하면서 비운 잔이 한 잔, 두 잔…. 다섯 잔까지 세다가 그만뒀다. 짜증 나게도, 취기도 올라오지 않았다. 어느샌가 마담 엘리자베트는 사라져 있었다. 그 친우를 만나러 간 걸까? 어느 순간부턴가 주변 인적이 뜸해졌다. 하나둘씩 짝을 찾아서 떠났나 보다. 뭐, 사람들이 적건 많건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음악을 무시하고 의자를 잡고 앉아 버렸다. 아예 하인이 들고 다니는 음료 쟁반을 통째로 뺏어서 옆에 내려놨다. 평상시 참석하는 파티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긴 하다. 품위 없다고 한 3년은 씹힐 일이다. 그렇지만, 뭐 어떤가. 혼신의 분장 덕에 아무도 내가 레비제트의 알릭스인 것을 모를 터인데. 얼굴은 다 가려놨고, 겹겹이 둘러싼 붉은 천 옷은 몸매를 드러내지도 않는 데다가 머리도 가발을 썼는데, 뭐. 눈 색 정도면 구분할 수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 어둑하고 은근한 조명 아래서 가면 아래로 스치듯 보이는 눈동자 색을 구분할 수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되겠나. 거기다가 천하의 알릭스 레비제트가 혼자서 술판을 벌인다고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아마 지금 내 모습은 우아한 혼술이라기에는 조금 청승맞아 보이는 꼴일 테니. 쓴웃음을 술 한 모금에 털어 넘겼다. 아, 이렇게 혼자서 마실 게 아니라, 누구 한 명 앉혀 놓고 닭발에 소주 까고 싶다. 사실 그냥 아무 말이라도 주고받고 싶다. 술친구 할 만한 사람 어디 없나. “장미여, 무슨 일로 수심에 잠겨 있소?”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훤칠한 인영이 보였다. 입가를 제외하고 얼굴 전체를 가린 흰 가면이었다. 그 외 특정할 만한 것은, 어두운 금발 정도? 멍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그의 말이 ‘장미꽃 공주 샤론느’ 설화에 나오는 왕자의 대사임을 알아챘다. 모험을 떠났던 왕자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누운 덤불 옆에 피어 있던 장미의 슬픈 목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지 묻는 대사다. 개인적으로 말도 안 되는 동화라고 생각하지만. 쉬려고 누웠는데 식물이 말을 걸다니. 장미꽃의 그 어디가 입이어서 말을 건단 말인가. 꽃의 입이라고 하면, 버섯 왕국을 뚫고 공주를 구해야 하는 모 게임에 나오는 이빨 달린 식인 식물밖에 생각이 안 난다. 솔직히 이건 좀 호러군. 대답을 기다리는 인영을 슬쩍 훑어봤다. 술에 절어 있는데도 용케도 장미꽃 공주인 걸 알아챘다 싶다. “별일은 아닙니다만.” 방만한 대꾸에도 사내는 꿋꿋했다. “기사 된 바로써, 숙녀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 또한 저의 일입니다.” 왕자 배역에 상당히 과몰입한 듯싶은 사내를 그냥 보낼까 하다가 옆에 있는 의자를 툭툭 쳤다. “그러면, 술이나 좀 상대해 주세요.” 어차피 술친구도 필요한 참이었으니까. 취기, 그리고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리라는 자신감이 뒤섞여 만들어 낸 충동적인 여흥이었다. 그가 냉큼 앉았다. 잔을 하나 건네며 운을 띄웠다. “고귀하신 신사분은 어쩌다 이곳으로 오시게 되었나요.” “당신의 향기에 이끌렸다고 하면, 이상합니까?” 픽 웃었다. “어머, 본인이 고귀하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건가요?” 짓궂은 놀림에 금발 사내의 입매가 순간 굳었다. 일자로 닫힌 입술과 그 아래 턱선이 마치 대리석으로 만든 이국의 태양신의 조각 같다. 순간 가면을 벗겨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가면 아래 자리한 이목구비도 조각같이 수려할까, 아니면 술과 가면이 만들어 낸 착시일까? 나도 모르게 뻗어 나갈 뻔한 손을 거두고 다른 잔을 집어 들었다. 남자가 화제를 돌리듯 입을 열었다. “아직 제 첫 질문에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귓가에 꽂힌 은근한 어투에 정신이 팔려서 내용을 깨닫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첫 질문? 그게 뭐였더라. “어째서 수심에 잠겨 계신지,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아아.”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하지만, 장미여. 알지 못한다면 어찌 당신을 위로하겠습니까. 알고 싶습니다.” 은근 끈질긴 말에 슬쩍 입을 비죽이다가 입을 열었다. “맨입으로요?” 그대가 나를 장미라 한다면 나는 자본주의의 장미가 되겠다. 남자는 당황한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기를 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제가 이기면,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겁니다.” 흐응. 심심한데 잘 걸렸다 싶긴 하지만. “그러시면, 신사분께서는 뭘 거시게요?” 그가 잠시 고민하다가 팔목에 달고 있던 단추를 뺐다. “이건 어떠십니까.” 순도 높은 사파이어가 박혀 있는 커프스. 세심하게 양각된 독수리 조각을 보니 꽤 고가의 물건으로 보였다. 하지만 딱히 흥미가 일지는 않았다. “글쎄요, 보석이라면 저도 꽤 있답니다.” 시큰둥한 답변에 그가 잠시 침묵하다가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이 술이 입에 맞으십니까?” 저의를 알 수가 없어서 눈을 잠시 가늘게 떴다. “그럼요. 이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과실주이다 싶은걸요.” 그가 낮게 웃었다. “그런가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좋다고 할 수 있는 술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가 손짓하자 어디선가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금발 사내가 병 하나를 받아들었다. 언뜻 보기에는 얼룩지고 볼품없는 모습. 하지만 마개에 새겨진 E 자와 그를 감싼 네 개의 날개 문양은. “에르네스틴 수도회?” 성 에르네스틴 수도회의 특별한 비법으로 담근 와인은 꽤 유명한 편이긴 하다. 레비제트의 와인도 훌륭하지만, 풍미가 조금 다르달까. 하지만 내 이목을 끈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바로, 유리병에 섬세하게 음각된 1660이라는 숫자. 저건, 그랑 에르네스틴 루아얄 1660이다. 50년도 더 전, 외국의 한 귀족이 에르네스틴 수도회의 포도주를 대량으로 주문했고, 주문을 받고 가던 배가 길을 잘못 들어서 그대로 난파됐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서야 발견된 배에서는 포도주 수백 병이 나왔다. 차가운 북부의 바닷물과 수압 속에서 완벽하게 숙성된 포도주가. 50년도 넘은 빈티지 와인이라니. 순간적으로 심장이 뛰었다. 저건 황제나 되는 사람이 재위 몇십 년 기념일에서야 축배용으로 겨우 맛볼 수 있을 정도로 귀한 술이다. 포도주의 호수라고 불리는 레비제트의 딸인 나조차도 먼발치에서 단 한 번 봤을 정도. 살짝 입이 벌어졌다. 남자의 입에 옅은 미소가 걸린 것을 보고 나서야 머쓱함에 헛기침을 했다. 아, 너무 흥분한 티를 냈나 보다. 그가 갑자기 내 방향으로 고개를 숙였다. “저와의 내기에서 이기시면 이걸 드리겠습니다.” 미쳤나? 이야기 하나 듣자고 저걸 건다고. 저치가 그랑 에르네스틴 루와얄 1660의 가치를 알기나 하는지 의문이 든다. 저 병 하나만큼, 아니 서너 개만큼 다이아몬드를 가득 채워 온다면 간신히 그 가격이 나올까 말까 한 것을. 아니, 그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어도 구할 수나 있을까. 북해의 인어가 건져 왔다는 소문까지 도는 저 술은 돈을 수레로 실어서 북부로 떠나도 구하기 힘든 것이거늘. 이 호구, 놓치면 호구다. 강렬한 생각이 뇌리를 지배했다. 밑져야 본전이다. 승낙을 외치면서 그가 제시한 게임 패를 집어 들었다. * * * 털렸다. 21세기 지구 식으로 말하자면 대규모 강원랜드나 다름없는 이 궁정에서는 숨 쉬듯 도박판이 열린다. 나도 몇 번 낀 적이 없지는 않다. 물론 성년이 된 지는 오래 안 된 만큼 큰돈이 오가는 본격적인 도박판에 낀 적은 없긴 하다. 하지만 출생부터 금탯줄을 쥐고 태어난 운발이 어디를 가지는 않는지 또래 아가씨들이 모여서 자잘한 장신구나 은화를 걸고 하는 작은 내기판에서는 잃은 적은 없었다. 나름 게임을 못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무심하게 툭툭 던지는 게임 패가 내 패를 다 잡아먹었다. 초반에는 분명 이기고 있었는데. 일견 생각이 없어 보일 정도로 막 던지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막판에 이렇게 뒤집을 수가 있지? 금발 사내의 입매가 의기양양한 호선을 그렸다. “제가 이겼군요.” 테이블에 상아를 깎아 만든 패가 와드득 흩어졌다. 진짜로 지다니. 이렇게 그랑 에르네스틴 루와얄 1660이 날아갔구나. 서글프게 테이블 위에 올려진 병을 바라만 봤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리 슬피 우는 까닭은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금발 사내가 갑자기 씩 웃음을 지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봤나. 약간 민망해져서 고개를 돌리는데, 갑작스럽게 맑은 통 소리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가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병마개를 따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는 나를 향해 금발 사내가 태연하게 크리스털 잔에 와인을 따라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아 들자 진한 향이 퍼졌다. “제가 이겼으니 병째로 가져가지는 못하시겠군요.” 농을 던지듯 잔을 부딪치는 그에게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덕분에, 황제 폐하의 호사를 다 누리네요.” “무얼요. 별것 아닙니다.” 그랑 에르네스틴 루와얄 1660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한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허나 궁금증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보다 그의 말이 더 빨랐다. “그럼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받아먹을 것 다 받아먹고 입 씻는 건 좀 아니다 싶어서 입을 열었다. 술기운이 어느 정도 올라온 덕도 있었다. “본인이 비겁하다고 느낀 적 있으세요?” * * * 자,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게요. 한 사람이 있어요. 평범한 다른 이들과 똑같이 태어나고, 첫걸음을 떼었고, 세상을 배웠고, 친우를 사귀고, 성장했죠. 장성한 그는 여느 사람이 그러하듯, 사랑에 빠졌어요. 하지만 그 사람의 사랑의 색은 달랐어요. 그 사람은 필사적으로 그 사랑을 숨겨야 했죠. 보편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징계할 자격이 되는 세상이거든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 입는 사람이 생겨 버렸어요. 이대로 둔다면 그 상처는 어둠을 먹고 자라나서 모든 것을 파괴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 모든 내막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된 또 다른 사람이 있어요. 모든 것을 알게 된 사람은, 상처받게 될 사람을 최대한 감싸기 위해 노력해요. 하지만, 그 상처의 근원까지는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있어요. 모든 것을 드러내야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데, 모든 것을 드러낸다면, 사랑을 숨긴 사람은 치러야 할 죗값보다 더 많은 형벌을 받게 될 거예요. 단지, 조금 다른 사랑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랑으로 누군가가 상처를 받고 있다면 밝히는 것이 맞겠지 싶다가도, 사랑이라는 게 사람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거잖아요. 또, 사랑을 숨기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악당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서로의 추억을 공유하고, 그 추억을 놓지 못하는 상대이기도 해요. 단순한 악당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저어할 일은 아니겠죠. 하지만, 앞서 말한 것이 너무 걸리는 바람에, 모든 것을 알게 된 사람은 어느 편도 온전히 들지 못하고 있어요. 두서없는 이야기였지만 금발의 남자는 잠자코 들었다. 숨기려고 했던 이야기지만 입 밖으로 내뱉으니 오히려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라서 더 이야기하기가 수월하기도 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 리가 없지 않은가. 피식 웃으며 포도주를 입에 머금었다. 천상의 풍미가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자조적으로 내뱉었다. “비겁하지 않나요.” 그래, 내가 이 존재만으로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이들을 향해 품은 감정을 규정한다면, 표면적으로는 원망이겠지. 하지만 여섯 자 아래 묻힌 관뚜껑을 열면 그 밑바닥에는 이해와 동정이 깔려 있다. 미묘한 감정. 그 감정은 애증과 닮아 있었다. 오고 가는 원망 속에서 관계가 썩은 고목처럼 시들었더라도 십수 년의 세월을 양분으로 자라난 뿌리까지 뽑아내기는 어렵다. 백조 아이들이 목에 습관처럼 걸고 있던 황금 사슬처럼. “그 상황을 어째서 비겁하다 하시는 겁니까?” 금발 남자가 물었다. 그 이야기 속의 ‘모든 것을 알게 된 사람’이 나라는 것을 눈치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모두에게 상처가 되는 모순을 끊어 낼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크리스털 잔 입구를 느릿하게 쓸면서 답하자 금발 남자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고대의 철학자 베스티아누스는 인생을 긴 전쟁에 비유했지요.” 뜬금없는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전쟁의 현장에서는 칼을 휘둘러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러서야 할 때 전진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경솔함입니다. 물러서야만 하는 상황에서 칼을 휘두르지 않는 이를 비겁하다고 하는 이는 없습니다.” 쓴웃음을 지었다. “물러서야 할 때와 전진할 때는 어찌 구분해야 할까요.” 간단한 답이 떨어졌다. “자신의 판단을 믿어야지요.” “제 판단이 옳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신이 아닌 이상 어찌 완벽하게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이래서야 원점이다. 허탈하게 웃었다. “뭐예요, 그러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똑같잖아요.” “죽… 밥?” 남자가 생소한 단어를 입에 굴렸으나 대꾸하지 않고 멍하니 흩어진 상아 게임 패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판단도 내 몫이니, 여전히 죄책감도 내 몫이라는 거네요.” 남자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홀로 모든 결과를 짊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아까는 제 판단이라면서요.” 튀어나온 삐딱한 말에 남자가 은은하게 웃었다. “전쟁을 혼자 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옳은 판단을 내리지 못하더라도, 당신의 전우들이 그 책임을 오롯이 당신의 죄책감으로 만들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배신하지 않을 가까운 이들이 있으십니까.” 그의 말에 머릿속에 몇몇 이름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 엘레네, 멜리장드. 그 외에도 여러 사람.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만일 더 이상 물러나지 못하고 전진해야 할 때가 오더라도, 꼭 당신이 칼을 휘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내 손을 잡아 올렸다. 따뜻한 입술이 손등에 닿았다. “당신의 기사 된 이로서 제가 대신 칼을 휘둘러 드리겠습니다.” 단순히 손에 접구(接口)하는 것은 신사가 숙녀에게 하는 흔하디흔한 예절에 불과했다. 나뭇가지에 날아드는 새를 세지 않듯, 손등 위에 닿는 숨결에 따로 신경을 쓴 바 없다. 그러나 왜 이번에는. “그게 당신의 뜻이라면, 기꺼이.” 홀로 싸울 필요 없노라고, 나를 대신해서 기꺼이 손을 더럽히겠다는 남자의 입술이 닿은 부분이 왜 화끈거리는 것처럼 느껴질까. 손등에서 피어오른 열기가 정맥과 동맥을 타고 맥박치며 올라가는 기분이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다. 얼굴까지 올라온 열기에 붉어진 뺨을 들킬 일이 없으니까. 포커페이스로 돌아가, 내 얼굴아! 티 나지 않게 심호흡을 하면서 마인드 컨트롤을 하던 와중에 밖에서 갑작스럽게 펑 터지는 소리가 들려서 움찔했다. “불꽃놀이를 하나 보군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단단하고 큰 손이었다. “함께 보시겠습니까?” 나를 인도하는 손이 너무 따스하게 느껴져서, 발코니에 도착해서까지 그의 손을 놓기 싫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알릭스 레비제트, 미쳤니? 저 가면 밑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처음 본 사람한테 그러는 거 아니다! 머릿속으로 셀프 싸대기를 착착 갈기고 발코니에 섰다. 하늘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하늘에서 터지는 오색 찬란한 불꽃. 마지막으로 불꽃놀이를 본 적이 언제더라. ‘알릭스’로서는 작년에도 봤지만, 전생의 기억을 자각한 지금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전생 연애 시절에는 불꽃놀이도 자주 봤었는데. 심지어 프러포즈도 한강 불꽃 축제를 보며 받았더랬다. 평생 너와 이 불꽃을 함께 보고 싶다는 말에 감동해서 바로 오케이를 외쳤는데 실상은 뭐. 바쁜 남편, 연고 없는 지방 생활, 시댁 식구 건사에 치여서 불꽃이 뭐냐, 외출도 어려웠다. 색색의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섬광처럼 빛났다가 벚꽃처럼 스러진다. 살짝 멍멍해진 귓가를 문지르다가 문득 옆에 선 남자를 의식했다. 고개를 돌린 순간, 내 쪽을 향해 고정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마주친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화려한 불꽃이 아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애달플 정도로 강렬할 그 눈빛은 나에게 붙어 있었다. 처음 받아 보는 시선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불꽃놀이가 가져왔던 낭만은 현실의 풍파에 진작 마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름 모를 이방인과 함께 선 이곳에서 설렘이 왜 갑자기 찾아온 걸까? 쿵. 쿵. 불꽃의 굉음과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졌다. 심장이 뛰는 소리만 들리는 듯했다. 남자의 흰 가면 아래로 드러난 입매가 그믐달 같은 호선을 그렸다. 수려한 턱선 위의 모습은 어떠할까. 가면에 가려진 얼굴이 궁금했다. 나도 모르게 그의 가면으로 손이 향했다. 세밀하게 음각된 가면의 무늬에 손이 닿는 순간 남자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채 인식하기도 전, 남자가 내 손을 잡고 머리 뒤로 고정된 끈을 풀어냈다. 툭 하고 가면이 떨어졌다. 그 순간, 나의 심장도 같이 떨어졌다. “조금 더 뒤에 밝힐 생각이긴 했습니다만…. 궁금하시다면 미리 보여 드려야지요.”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대공 각하?” 남자가 금빛 가발을 풀어내자 청흑발이 쏟아졌다. 어두운 밤인데도 불구하고 또렷하게 주변과 구분되는 신비한 색이었다. 그가 씩 웃었다. “정식으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다시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알릭스.” 입만 뻐끔거렸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당혹감이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니케리온 대공이 태연하게 답했다. “저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이 부담스럽다 하셨으니, 아무도 저인지 모르도록 하고 왔습니다.” * * * 약 3시간 전. 제국의 황태자, 줄리앙은 살짝 인상을 썼다. 평소 같았으면 그의 미간에 주름 비슷한 것이 잡히자마자 호들갑 떨면서 굴러올 자들이 수십, 수백 명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의 앞에 있는 작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무려 제국에서 두 번째로 존귀한 몸, 황태자가 엉덩이가 배기는 것을 각오하고 평소에 타던 황실의 문장이 박힌 백향목 마차도 아닌 상업용 마차를 타고 친히 강림했으나 반응은 시큰둥하다 못해 싸늘했다. 가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습기와 열이 남아있는 밤공기에 로브까지 뒤집어쓰고 왔거늘. 웬만한 다른 귀족 놈들 같았으면 지문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손을 비비며 황공함에 고개를 조아리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하긴, 이자는 황궁에 있는 것보다 제 수하의 명의로 된 저택에 있는 것이 더 편하다는 이유로 귀한 황궁의 거처조차 거절한, 이상한 데에서 주관이 뚜렷한 놈이었으니. 평범한 반응을 기대하면 안 될 것이다. 생각을 바꾼 황태자는 눈앞의 젊은 대공을 훑어보았다. 어지간해서는 수도 쪽으로 침도 뱉지 않던 비싼 몸이 어쩐 일로 꿀이라도 발라둔 것처럼 황도를 기웃거리는 것인가. 먹이를 찾는 젊은 사자의 눈이 빛났다. “왜 건국 축하연에는 참석을 안 했나?” 슬쩍 찔러 들어오는 황태자의 질문에 리산데르가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굳이 해야 했습니까?” “아니, 오지 않는 것이 더 나았다네.” 황태자가 픽 웃으며 리산데르를 바라보았다. 떠오르는 전쟁 영웅, 니케리온 대공. 건국 축하연의 자리에 온다면 만인의 화젯거리가 될 사람. 그렇기에 더더욱 와서는 안 됐다. 일견 모순적이었다. 그러나 굳이 전쟁 총사령관인 리산데르에게서 직접 보고를 받는다는 핑계로 그를 황도에 불러들이고 일말의 언질조차 주지 않는 황제의 치졸함을 생각한다면 눈에 띄어 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황태자가 빈정거리듯 내뱉었다. “아바마마께서는 새로운 영웅이 부각 되는 게 어지간히 싫으신 듯하니.” 황태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부친, 황제는 굳이 잘 싸우고 있는 총사령관을 올려 보내고, 그 자리에 황태자의 가장 강력한 측근인 에스테 공작을 임시로 파견 보냈다. 그러면서 기껏 황도까지 불러낸 총사령관을 예의상으로라도 치하하는 자리조차 만들지 않았다. 예상보다 빠르게 적군을 격파하고 있는 니케리온 대공의 공적에 제한을 두는 겸사겸사, 황태자의 외숙인 에스테 공작을 견제하는 조치였다. 즉 황후와 황태자의 세력을 축소하는 행위. 에스테 공작은 황제가 요즘 들어 총애하고 있는 피카르트 공작의 맞수이기도 했다. 수십 년을 살 맞대고 잔 아내에 친아들까지 경계하는 편집증적인 졸렬함이란. 황태자가 한쪽 뺨을 둥그렇게 부풀렸다. 로브 아래로 늘어진 흑발 사이 날카로운 회청색 눈이 깜박였다. 껍데기만은 젊은 시절의 부황(父皇)을 빼닮아 근사하긴 했다. 가끔 거울 속에서 보이는 황제의 흔적에 선득 소름이 돋을 때도 있었으나, 이마저도 없었으면 황제가 친아들이 아니라고 지랄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판단을 내린 황태자는 그냥 이 겉껍데기를 운 좋게 타고나온 보호색 정도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찌되었든, 그 와중에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눈앞의 대공의 행보. 황태자보다 서너 살 어린 이 젊은 대공은 굳이 황제의 기이한 명을 받들었다. 아무리 황제가 불러도, 전쟁 중이라고 핑계를 대고 오지 않으려면 오지 않을 수도 있을 일이었다. 물론, 황제와 척지는 것을 각오해야겠지만, 어차피 북부와의 갈등이 장기화되면 아쉬운 소리를 하게 될 것은 황제 측이었다. 대공이 얼마나 그간 황도를 개떡같이 여겼냐면, 그동안 대공을 영입하려는 수많은 파벌들이 황도로 오라고 애걸하며 보낸 초대장을 대공성에서는 장작 대신 쓴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수도 쪽에는 발걸음도 않던 인사가 이제 와서 황명이라고 수도에 왔다고?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아, 혹시. 황태자가 리산데르의 빈 손목을 흘낏 훑었다. 옛이야기에서, 귀부인들이 자신에게 명예를 바친 기사들의 손목에 손수건을 매어 주었다던데. 황태자의 눈빛이 짓궂게 빛났다. “참, 자네가 드디어 고귀한 숙녀를 모셨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리던데. 곧 대공령의 안주인을 볼 수 있는 건가?” 황태자가 은근하게 물었다. 리산데르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이야, 이것 봐라. 어쩐지 저 돌덩어리에 한 방 먹인 기분이 들어, 황태자가 유쾌하게 웃었다. “니케리온 대공가는 황가의 의형제나 다름없지. 대공비가 들어온다면 곧 내 새 식구 같은 존재 아니겠는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어린 시절부터 궁정의 살벌한 정치판에서 굴러온 황태자가 리산데르의 낮은 목소리에 동요가 섞여 든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지 말고, 말해 보게. 자네가 모신다는 그 숙녀…. 빅투아르 양이랬나?” 니케리온 대공의 눈이 살벌하게 번득였다. 그가 낮고 빠르게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다. 부관 놈, 보안이 어쩌고, 들은 놈부터 차례대로 족친다 비슷한 단어들이 들린 것 같았는데. 뭐, 설마 황태자를 족치겠나. 황태자가 씩 웃었다. “조만간 내게 소개를 해 주게.” “안 됩니다.” 칼 같은 거절에 황태자의 입매가 비틀렸다. “아니, 인사만 하자는 걸세. 소개해 준다고 닳나?” “닳습니다.” 간결한 답에 황태자는 할 말을 잃었다. 잠시 입만 뻐끔거리던 황태자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섭섭하군. 이래 봬도 차기 황위를 이을 몸이라고? 자네의 미래 주군일세.” “지금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칼 같은 거절에 황태자가 잠시 침묵했다. 어지간한 귀족이라면 황제의 유일한 적장자에게 쓸개라도 빼서 내어줄 것처럼 굴 것이련만, 니케리온 대공은 그가 황태자인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기색이었다. “아, 설마 자네…. 숙녀 분께서 내게 반할까 봐 경계하는 건가? 물론 이 몸이 여성분들의 과도한 사랑을 받긴 하지만, 나는 오로지 내 비(妃)뿐인 걸 알지 않나.” 니케리온 대공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느낀 황태자가 부러 실없이 웃었다. 너스레를 떨며 넘겼으나 쓸개즙을 삼킨 듯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북부의 주인은 아직 자신을 주군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큰 기대는 없었으나 아쉬웠다. 황제가 급작스러운 변덕을 보이며 자신을 위협하는 상황에, 대공의 지지를 얻는다면 잡음 없이 원활한 승계가 가능할 것을. 북부의 니케리온은 라무아가 제국으로 선 이래 가장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가신이었다. 제국에 속하되 황제에 헌신하지는 않는다. 지금껏 북부를 온전히 장악한 황제는 몇 없었다. 때로는 황가를 위협하는 가장 큰 라이벌이자, 때로는 가장 든든한 우군. 그를 영입할 방안은 없으려나. 황태자는 끙 소리를 내며 등을 의자에 기대앉다가 문득 대공이 살피고 있는 책자에 눈을 고정했다. “그나저나, 자네 지금 뭘 하고 있는 겐가?” “선물을 고르고 있습니다.” “오, 누구 선물?” 저 얼음으로 빚은 것 같은 대공이 선물이라니. 틀림없이 그 레이디를 위한 것이렷다. 짓궂게 놀리려던 황태자는 형형한 대공의 눈빛에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의문의 빅투아르 양’에 대해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진실로 쫓아낼 기색이었다. 유부남으로서 도와준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스리슬쩍 다가간 황태자가 흘긋 책자를 보고 질린 표정을 했다. “설마, 내가 뇌물을 선물로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낭만적인 관계의 여성한테 선물을 준다고 한다면 장신구, 꽃, 달콤한 주전부리류를 떠올리지 않는가. “누가 숙녀께 고미술품을 드리나!” 니케리온 대공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가장 비싸고 귀한 것을 드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이 그림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건, 심지어 이름난 궁정 화가 위베르 경의 유작이다.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부르는 것이 값일 텐데, 이걸 어떻게 입수해서 카탈로그에 버젓이 적어 놨는지 모르겠다. 0에 수렴하는 여성 편력과 경주마 같은 추진력, 무한한 재력이 결합해서 만들어 낸 끔찍한 혼종에 황태자의 동공이 흔들렸다. “자, 잘 듣게. 원래 서로를 알아가는 남녀 간에 선물은, 부담 없는 것부터 주고받는 것이지.” 니케리온 대공은 미간을 좁혔으나 황태자가 그렇게 태자비와 마음을 나누었다는 경험담을 풀어놓자 마지못해 경청하기 시작했다. 기실 황태자는 태자비에게 정착하기 전까지는 사교계에서 꽤 날리는 남자였다. “자, 숙녀 분께 선물은 작아도 자네의 성의를 보여 줄 수 있는 것으로 하게. 꽃이나, 제철 과일이나, 달콤한 과실주 같은 것 말이야. 특히, 그녀가 하는 말 한마디조차 흘려듣지 않고 경청했다가 나중에 그걸 기억해서 적용하는 걸세. 나의 디안이 앙드레트가 그립다고 했을 때에 나는 온 제국을 수소문해서 앙드레트에서만 나는 엘라베리 열매 한 바구니를 구해 와서 바쳤지. 얼마나 기뻐하던지!” “먹을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까.” 뚱한 대공의 말에 황태자가 혀를 찼다. “자네가 뭘 모르는구만. 먹을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데! 정적 간에도 함께 식사를 하다 보면 조금은 분위기가 풀어지지 않는가? 부담 없을 정도로만 귀하고 맛 좋은 것을 준비해서 그녀와 하나씩 사이좋게 주고받다 보면 그 사이에서 없었던 연정도 솟아나는 법이라네.” “흠, 그럴듯하군요. 그럼 와인 정도로 해야겠습니다.” 대공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황태자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지 모를 미지의 여인에게 국보급 고미술품이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그래, 와인이면 부담 없고 괜찮지.” * * * 이 남자, 뭔가 포인트를 단단히 잘못 잡았다. 내가 조용하게 살고 싶다고 한 것은 거절의 의미였다. 아마 길 가는 사람 백 명을 붙잡고 물어봐도 의도에 맞게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패러다임을 뒤집는 신박한 해석일까. 골이 띵했다. “…황도에는 언제 오신건가요?” 궁색한 화제 전환에 그가 옅게 웃었다. 얼마 되지 않았노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며 빠져나갈 타이밍을 재기 위해 데굴데굴 눈알을 굴렸다. “그렇군요. 그럼, 실례했네요. 시간이 늦어져서, 이만.” 발코니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그가 갑작스럽게 털썩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깜짝 놀라서 그를 내려다보자 그가 호소력 짙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는 당신의 말을 들어드렸지요. 당신도 잠시만 제게 시간을 내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게 과연 전쟁터를 쓸어 버린다는 소문의 주인공인가. 애처로운 대형견이 따로 없었다. 살짝 떨리는 긴 속눈썹 아래 자수정 같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망설였다. “단 몇 시간이라도 좋습니다. 건국 축제의 밤, 당신의 시간을 제게 허락해 주시면 정말이지 기쁠 것 같군요.” 알코올에 전 두뇌, 눈앞의 미모의 남성, 그리고 당장에라도 위로해 주고 싶은 처연한 분위기. 실로 파괴적인 조합이었다. 황망히 방을 훑었다. 텅 빈 방에는 도박 테이블과 술잔 몇 개가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사실 도망치려면 아무도 없는 지금이 적기였다. 그때, 테이블 위에 떡하니 올라간 그랑 에르네스틴 루와얄 1660 병이 눈에 띄었다. 아. 무려 그랑 에르네스틴 루와얄 1660까지 받아 처먹고 그냥 가면 먹튀가 되는 건가. 그렇게 되면 와인의 가치를 아는 이로서 상당히 양심이 아플 것 같았다. 전생의 철모르고 천진하던 고등학교 시절, 야자 중 담임이 뜬금없이 질문한 적이 있었다. “야, 너네는 세상에서 제일 나쁜 꽃이 뭔 줄 아냐?” 식충 식물, 파리지옥, 라플레시아 등등 별의별 꽃 이름을 대는 우리들에게 담임은 이렇게 말했다. “국화도 목화도 아니고 바로 자기합리화야, 임마들아.” 쌍팔년도식 언어유희에 썰렁해진 교실 분위기에도 아랑곳없이 담임은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담임이 자기합리화를 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너희들의 앞길에 도움이 되고 어쩌고 하는 논지의 이야기를 펼쳤지만 그걸 귀담아듣고 실천했으면 대한민국 피 끓는 여고생이 아니겠지. 담임의 피와 살이 되는 진실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오늘 똥을 싸도 뒷수습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할 것이라는 무책임한 태도 하에 자기합리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공부는 내일도 할 수 있지만 내가 덕질하던 오라버니들의 음방은 오늘이 아니면 갈 수 없다, 나는 실전에 강한 편이니 모의고사 따위는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다이어트 중이지만 오늘까지만 먹고 내일부터 운동하면 된다, 등등. 수많은 자기합리화가 진짜 꽃이었다면 나는 화훼 농가 주인이었다. 그리고 현생의 오늘, 또 한 묶음의 자기합리화 꽃다발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딱 3시간만이에요.” 다이아몬드 값과 맞먹을 가치의 와인을 넙죽 받아먹고 입 씻을 수는 없으니까. 레비제트의 일원으로서도 못 할 짓이다. 좋은 와인에 정당한 값어치를 지불하지 않는다고? 포도주 후작이라고 불렸던 선조 알브레히트가 관 뚜껑 박차고 뛰쳐나올 일이라구. 절대 이 남자를 그대로 보내는 게 아쉬워서 그러는 건 아니다. 속으로 합리화하며 대공의 팔 위에 손을 올리고 발코니에서 걸어 나왔다. ‘원작 남주랑 얽히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튀어, 멍청아.’ 머릿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네가 하는 거, 다 비겁한 합리화잖아.’ 아, 젠장할. 취기로 눌러 두었던 이성이 깨어났다. 옮기던 발걸음에 질척한 망설임이 엉겨 붙어 발목을 잡았다. 방문 앞에서 머뭇거리자 니케리온 대공이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 섣불리 입을 뗄 수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사실 제가 미래를 알고 있는데요, 그쪽은 제 새언니랑 사랑에 빠질 운명이고 저는 빌런이라서 같이 놀면 조금 모양새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요. 아, 이건 진짜 아니다. 아무리 니케리온 대공이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말을 들으면 미친 사람 취급할 게 뻔하다. 내 침묵을 무어라 해석했는지, 대공의 얼굴이 굳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 어른 앞에서 혼신의 재롱을 선보였는데 그가 줄 수 있는 용돈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조카가 저런 표정을 했던 것 같다. 만약 귀가 있었다면 아래로 축 처져 있었을 것이다. 아, 내가 무슨 생각을. 별 실없는 생각을 다 하네. 정신 차려, 알릭스 레비제트! 머릿속으로 셀프 뺨 때리기를 몇 번 시전하는데 불쑥 니케리온 대공이 물었다. “혹, 여전히 부담스러운 것입니까.” “네?” 순간적으로 이해를 못 하고 눈을 깜빡이는데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가면을 얼굴에 다시 착용했다. 청명한 얼굴에 일식처럼 가면이 드리워졌다. 금빛 가발까지 다시 쓰고 나니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사로 둔갑했다. “이러면 어떻습니까. 가면무도회의 규칙에 맞게, 오늘은 마드모아젤 레비제트와 니케리온 대공의 만남이 아니라 장미꽃 요정과 이름 모를 왕자의 일탈인 것으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공식적으로, 마드모아젤 레비제트와 니케리온 대공은 이날 만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설탕처럼 달콤한 면죄부였다. 이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짧은 꿈같은 일탈을 마치고 일상으로 바로 복귀한다면. 낮잠 중에 꾼 꿈을 기억하는 이는 없잖은가. 짧은 망설임 끝에 그가 다시 내민 손을 잡았다. “그럼, 맡기겠어요. 각하.” “리산데르.” “네?” “말씀드렸잖습니까. 오늘 여기에 니케리온 대공과 마드모아젤 레비제트는 없다고.” 그의 말끝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지금은 알릭스와 리산데르입니다.” “…리산데르.” 짧은 음절을 내뱉었다. 치조(齒槽)를 스치는 혀끝이 만들어 내는 기류음이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영광입니다, 알릭스.” 대공, 아니, 리산데르가 환하게 웃었다. 황도 파데사의 거리는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시간은 새벽이었으나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여전히 길거리 악사들은 흥겨운 음악을 연주했고, 즉석으로 만들어진 댄스 플로어에서는 남녀가 쌍쌍이 춤추고 있었으며,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구워 내는 노점상들의 숯불은 꺼지지 않았다. 하긴, 건국 축제가 끝나면 곧 성자의 수난을 기념하는 사순 주간이 올 것이고,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금욕해야 하는 사순 주간 전에 원 없이 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건국 축제는 그야말로 적기였으니까. 한시가 황금 같은 이때를 밤이라고 어찌 잠만 자면서 허비하겠는가. 전생에서는 야시장이니 등불 축제니 유사한 행사에 몇 번 가 본 적은 있었지만,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란 현생에서 길거리의 축제는 올 일이 없었기에 다소 생경한 기분으로 길거리를 훑었다. 부촌 근방이어서 그런지, 길거리 축제임에도 무뢰배나 걸인들은 없었다. 오히려 대놓고 몸에 나 귀족이오- 하고 써 붙인 듯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 그리고 그 근처를 치안 유지대와 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었다. 하긴, 이 난리 통에 세도가의 누군가가 해라도 입으면 불똥이 여기저기로 튈 것이 자명하니. 내 모습이 눈에 띌까 조금은 염려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가면을 쓴 그대로 나와서 축제를 향유하는 사람의 비율은 생각보다 많았다. 덕분에 살짝 안심했다. 우리도 가장무도회를 즐기다가 길거리로 나온 흔한 남녀 두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굳이 밤거리의 축제에 나온 것은 로맨스판타지 소설 남주다운 선택인가? 그럼 클리셰답게 불량배라도 마주치려나. 시답잖은 생각을 붕붕 흩었다. 하긴, 내가 멜리장드처럼 여주도 아닌데 뭘 굳이. 길거리 좌판에 놓인 액세서리 몇 가지를 둘러보다가 흥미를 잃었다. 나름 기념품으로 삼기에는 적당히 고왔지만 나중에 처치 곤란이다. 유리로 만든 가짜 보석은 깨지기도 쉽고, 보석함에 넣어 뒀다가 진짜 보석이 긁히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거든. “마음에 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지금은 딱히요.” 원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영앤리치 남주 모멘트를 과시하던 리산데르가 좌판에서 납작하게 만든 등불 두 개를 구매했다. 갑자기 웬 등불? 의문을 표시하자 리산데르가 싱긋 웃더니 바짝 다가왔다. “제가 어린 시절 자랐던 지역에는, 건국 축일 기간에 강물에 등불을 띄워 내려보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속삭이는 저음을 따라 귓가에 확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쳇, 이건 어쩔 수 없는 생리적 현상이다. 이렇게 우월한 유전자가 플러팅 같은 행동을 옆에서 해 대니까 본능적으로 내 안의 진화 생물학적 유전 인자가 대응하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나도 모르게 내 정신은 또 한 송이의 자기합리화에 물을 주고 있었다. “한동안 참여하지 못했던 전통인데, 이번에는 알릭스가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소원이라니, 꽤 낭만적이잖아? 그쯤이야, 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갔다. 시끄러운 밤거리의 풍경이 아스라이 멀어질 때쯤이었다. “어머, 예뻐라.” 묶여 있던 흑마가 고개를 돌렸다. 흑단을 깎아 만든 듯 매끄러운 검은 털가죽. 머리 위에 흰 점은 일각수의 뿔이 있던 자리 같았다. “아르고스.” 리산데르가 손을 뻗어 고삐를 내리자 흑마가 의젓하게 고개를 숙였다. 투레질 한 점 없이 얌전한 말의 모습에 호감이 갔다. 리산데르가 먼저 나를 말 위에 올릴 때에도 얌전했던 흑마는, 주인이 그 위에 올라타자마자 날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주변의 풍경이 내 곁을 빠르게 지나쳐가는 듯하다. 시원한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숲길을 달리면서 느끼는 밤의 수풀 내음은 낮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무섭지는 않았으나 혹시라도 낙마할까 걱정이 됐는지 리산데르가 내 어깨를 감쌌다. 나를 감싼 단단한 팔 아래로 뛰고 있는 그의 맥박이 느껴졌다. 내가 그의 맥박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그도 지금 뛰고 있는 내 심장을 느끼면 어떡하지. 이 심장의 박동이 단지, 밤의 숲길을 조우한 숙녀의 긴장이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처음으로 미친 듯한 속도를 느낀 전율이라거나. 말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숲을 지나 도착한 곳은 한적한 강가였다. 울창한 나무 틈에 숨겨진, 시렐르 강의 한 줄기. 밤의 자락을 품은 나뭇가지들이 사락거리는 가운데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먼 곳에서 밤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장소는 어떻게 안 걸까? 내게 초 하나를 건넨 리산데르가 익숙한 손길로 성냥을 켜서 불을 밝혔다. 내 초에 먼저 불을 붙인 리산데르는 자신의 초를 내 것에 갖다 대어 불을 옮겨 붙였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뺨에 열이 오르는 걸 들킬 염려가 없으니까. 리산데르가 강물 위에 조심스럽게 등불을 올렸다. 그 행위를 주의 깊게 보며 따라 했다. 유유히 흘러가는 등불 한 쌍을 보자니 알 수 없는 상실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마치 꿈속에서 별을 떠나보내는 것 같았다. 밤이 사라지면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외면하려 해도 결국 별은 지고 아침을 맞이해야 할 때가 온다. “마음속으로 소원을 비시면 됩니다.” 리산데르의 말에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맞아. 소원.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까. 진지하게 이 행위가 소원을 이뤄 주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간절한 기원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내 소원은 무엇일까. 가문, 멜리장드, 엘레네, 황궁…. 나를 둘러싼 여러 가지가 머릿속을 스쳤다. 스쳐 지나가는 여러 가지 가닥을 그러모아 하나로 엮은 그물을 만들어 머릿속 바다에 던지면 나오는 답. 행복. 내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서로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그 상처로 인해 영영 불행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아픔을 겪더라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기를. 비를 만난 갈대가 쓰러지더라도 꺾이지는 않는 것처럼, 해가 뜨면 아픈 기억들도 추억하며 웃을 수 있기를. 내 사람들이, 각자의 해피 엔딩을 맞게 해 주세요. 마음속으로 기원하며 고개를 들었다. 문득 옆을 보니 리산데르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면은 어느 틈에 벗어 둔 건지, 밤하늘에 박혀서 쏟아질 것 같은 별들 틈에서 자수정빛 눈동자의 반짝임이 선연했다. 그의 손짓을 따라 홀린 듯 옆에 걸터앉았다. “제가 처음 당신을 뵙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깜박였다. 그게 언제였더라? 멜리장드가 처음 궁정에 들어오던 날이었지. 시간상으로 반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기분인지 모르겠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가 웃었다. “그때, 제게 이름을 알려 주셨죠. 그리고 저는 그 이름에 모든 승리의 영광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거 아직도 유효한 거였어? “원래 승리의 영광을 바칠 때에는 적군의 수장의 목을 그 손에 가져다드리는 것이 관례입니다만.” 정원에서 꽃을 꺾어다 주겠다는 말처럼 태연한 투에, 그 말이 상대의 모가지를 따다 주겠다는 의미라는 것을 깨닫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질색하는 티를 내는 나를 보며 리산데르가 말을 이었다. “다만, 알릭스는 그걸 원치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가 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벨벳으로 덮인 상자였다. 리산데르가 긴 손가락으로 납작한 상자를 열자 달칵 소리와 함께 상자가 품고 있던 것이 드러났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목걸이였다. 가운데서 빛나고 있는 보석은 달빛을 머금은 영롱한 밤바다의 빛깔을 닮았다. 체인 틈틈이 박힌 다이아몬드가 투명한 광채를 내뿜었다. “코델라이트입니다.” 바다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코델라이트. 나조차도 이름만 들어 봤지, 실물로는 처음 보는 보석이다. 황후의 보석함에나 한두 개 들어 있을까? 신비로운 광채에 할 말을 잃었는데, 리산데르가 나직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번 전쟁에서, 적국인 비제른은 라부예 지방을 탈환할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것을 천명했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오직 라부예에서만 코델라이트가 나기 때문입니다.” 코델라이트. 이번 전쟁의 씨앗. 특유의 신비로운 광택은 다른 보석들에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한다. 한 시인은 코델라이트를 바다 여왕의 눈물이라고 불렀다. 비제른의 건국 설화에 의하면 성자가 남긴 성물을 이어받은 기사가 비제른을 건국하였는데, 그 성물이 바로 주먹만 한 코델라이트를 깎아 만든 우림과 둠밈이었다는 것이다. 그 뒤로 비제른 왕가는 코델라이트를 상징처럼 삼고 신성시했다. 그리고 코델라이트가 나는 지역은 오로지 라부예뿐이었다. 원석 수만 개를 캐내도 밤톨 하나만 한 양이 나올까 말까 한 비율이긴 했지만. 그로부터 수백 년 뒤 라부예의 상속권을 가진 비제른의 아델라이드 왕녀가 이복동생 및 전남편의 암살 위협을 피해 라무아 황가로 피신하게 되면서 라부예는 라무아의 영토로 넘어왔다. 이후 아델라이드의 외손주가 초대 니케리온 대공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니케리온 대공령이 되었고. 500년도 지난 일이기 때문에 이제 와서 언급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지만 비제른 측에서는 또 아닌가 보다. 사실 몇 번, 역대 비제른의 왕 중에서 라부예의 소유권을 주장한 자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라무아 제국이랑 편먹은 법황의 파문당하고 싶냐는 위협에 (그때까지는 신전과 성국의 영향력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막대했다) 깨갱 물러섰다고 했었다. 하여튼 각설하고, 적장의 목을 자신의 레이디에게 바치는 행위. 이 관습의 유래는 이렇다. 너희의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아 나의 여인에게 주리라는 적군을 향한 조롱, 그리고 그녀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는 비할 바 없는 보복을 당하게 되리라는 의미의 선전포고. 코델라이트 목걸이라면 ‘레이디에게 전쟁 승리의 영광을 바치는 선’에서 적장 대장의 모가지와 엇비슷한 가치를 지니긴 한다. 특히 그 상대가 비제른이라면. “당신의 기사 된 이로서 청하니, 부디 받아 주십시오.” 다만, 그걸 왜 지금 나에게 주는 것인가. 머뭇거리는 내 손을 그가 부드럽게 잡아 목걸이에 얹는 순간, 입 밖으로 지워 두었던 이름이 툭 튀어나왔다. “…그, 당신의 다른 레이디는요?” 리산데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다른 레이디?” 왜 금시초문인 것처럼 구시나. 소문이 파다한데! “그… 승리를 바치기로 약속한 다른 레이디가 계시다고 들었는데….” 말끝을 흐리자 리산데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헛소문입니다.” 하지만, 헛소문이라기에는 그 꼬리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헛소문도 뜬구름 잡는 소리래야 헛소문이지, 퍼진 이야기는 꽤 신빙성이 있었는걸. 그리고,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는가. 아 물론, 궁정에는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를 내다 못해 버섯구름까지 뿜어내게 만들 수 있는 언어의 연금술사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쪽은 궁정이 아니라 북부잖아. 그것도 전쟁터. “…하지만, 분명히 들었어요. 손수건까지 주고받으셨다면서요! 그 손수건을 품에서 떼어 놓지 않으신다고 분명….” “…손수건?” 리산데르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뭐야, 진짜 헛소문이었어? 혼란이 우리 위에 드리워졌다. “분명, 빅투아르 양에 대해 들었는데.” “빅투아르?” 무심코 내뱉은 말에 리산데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방금, 빅투아르라고 하셨습니까?” 아, 말해 버렸다. 왠지 모르게 말실수한 기분에 조개처럼 입을 합 다물었다. 리산데르가 가벼운 한숨을 내뱉었다. “궁정까지 퍼지다니, 역시 군에 입을 함부로 놀리는 놈이 있나 보군요.” 부정하지 않는 말투에 마음 한구석이 쿵 내려앉았다. 방금 전까지 유유히 평화로운 밤바다를 가로지르던 유람선 같던 마음이 암초에 충돌한 기분이다. 사실 그에게 레이디가 있든 없든, 내가 알 바는 아닌데. 내심 그가 확실히 부정해 주기를 바랐던 걸까? 왜 내 마음이 철렁하는 걸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온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리산데르가 입을 열었다. “진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빅투아르 양’의 정체는 당신입니다.” “네, 네?” 멍청한 얼굴로 되묻고 말았다. “‘빅투아르’를 진짜로 사람 이름으로 알아듣고 소문까지 낼 줄은 몰랐군요.” 리산데르는 얼핏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빅투아르가 이름이 아니면 뭐야! 내가 아는 빅투아르만 하나, 둘, 셋…. 궁정에만 몇 명이더라? 잠깐, 궁정의 빅투아르? 분별의 궁에 그려진 빅투아르 천사와 건국제 아우구스투스의 일화에 대한 프레스코까지 생각이 닿았다. 여기서의 빅투아르는 사람이나 천사 그 자체보다 ‘승리’에 대한 메타포라고 해석되고는 한다. 그렇지. ‘빅투아르’라는 단어 자체가 우승이나 승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까. 설마, 그렇다면? “제 승리의 천사는 당신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서운한 말투였으나 그의 얼굴에는 빙글빙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못살아! “아니, 멀쩡한 사람 이름을 두고 다른 단어를 붙이면 어떡해요!” “죄송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알릭스도 다른 이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그건 고맙긴 하지만….” 말을 잇지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뭐야, 나는 내 자신을 의식한 거야? 쪽팔려! 살짝 입술을 깨무는데 불쑥 리산데르의 질문이 들어왔다. “혹, 질투하셨습니까?” “…그건 또 무슨 실례되는 질문인가요?” 뾰족하게 쏘아붙이자 그가 낮게 웃었다. 짜증 나게, 웃음소리조차 잘생기고 난리야. “죄송합니다. 하지만 질투해 주셨다면 매우 기쁠 것 같습니다.” 저를 의식하셨다는 뜻이니까요. 은근 뻔뻔한 말투에 입만 비죽이다가 퍼뜩 또 다른 것에 생각이 스쳤다. 그럼 손수건은 뭐지? “그럼, 손수건은 뭔가요? 저는 손수건 같은 건 드린 기억이 없는데요.” 흠.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저도 손수건을 가지고 다닌 기억은 없습니다만.” 의문 섞인 침묵이 밤공기 속에 감돌았다. 문득 그가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아, 소리를 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데, 리산데르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흰 천을 꺼냈다. “이걸 보고 오해했을 수도 있겠군요.” 어! 그가 꺼낸 긴 상앗빛 자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거, 내가 잃어버린 리본이잖아! 티레 백작가의 고양이와 레비제트 후작가의 백합이 얽힌 문양. 잃어버린 날 결국 찾지 못해서 아쉬워했지만 금방 잊어버렸다. 소피가 자수를 잘 놓는 장인을 주선해 주어서 똑같은 리본을 다시 주문하기도 했고. “뭐예요, 왜 그걸 당신이 갖고 있어요!” “주웠습니다.” 일견 뻔뻔한 태도에 아연해졌다. 아니, 주웠으면 주인을 찾아 줘야지 그걸 홀랑 가져가서 이상한 소문이나 나게 만들고! 손을 내밀었다. “돌려줘요.” “안 됩니다. 제 승리의 부적입니다.” 그가 잽싸게 품 안으로 리본을 갈무리했다. 살짝 노려보는 눈초리가 느껴졌는지 리산데르가 이것이 없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느니 하면서 온몸으로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 모양새에 어이가 없다 못해 김이 탁 샜다. 사실 똑같은 것을 이미 주문한 터라 굳이 돌려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걸 왜 자기가 갖고 있대? 웃겨, 정말! “그럼 물물 교환이라고 하죠. 이 코델라이트 목걸이를 가져가시고, 당신께서는 당신의 문장을 제게 주시는 걸로.” 그의 설득에 마음이 움찔했다. 머리 한구석, 뱀같이 피어난 유혹이 속삭였다. 이 밤의 기념품 정도는 챙겨 봐도 좋지 않겠어? 나중에 먼 미래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서, 북부의 대공인 그와 내가 평생 볼 일이 없게 된다고 하더라도, 가끔 보석함에서 스치면 꺼내 볼 수 있는 기념품이라면. 내가 한여름 밤의 꿈같았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나만의 작은 비밀을 간직할 수 있도록. 그가 챙긴 것은 단순한 리본이니, 언제고 마음에 걸리는 순간에 첫 연모의 조각을 태워 버릴 수 있지 않을까. 정신을 차린 순간 어느새, 코델라이트 목걸이에 손을 뻗고 있었다. 스승님, 죄송합니다. 불초 미욱한 제자는 이번 생에서도 자기 합리화의 정원을 일구는군요. 자기 합리화 정원의 최대주주가 말했다. “제가 걸어 드리겠습니다.” 빠르게 목걸이를 잡아챈 그가 번개처럼 내 뒤에 섰다. 그가 나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 올렸다. 서늘한 공기에 노출된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섰다. 검을 잡는 손이라 단단하고 거칠 것만 같았는데, 의외로 느껴지는 손길은 따스했다. 다시 한 번 가면에 감사했다. 딸깍 소리와 함께 후크가 채워지자 목덜미에 도톰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살짝 눈을 내리깔자, 양어깨의 쇄골이 만나는 자리에서 밤바다가 빛나고 있었다. 간질간질하다. 어쩌면, 지금 내 마음에서 피어난 감정이- 코델라이트에 손끝을 살짝 가져다 대자 리산데르가 미소 지었다. 당신의 것과 같다면. 어쩌면, 원작 소설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벗어던진다면. “이제 약속한 시간이 지났군요.” 생각이 채 뻗어 나가기도 전에 열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 같은 알림에 눈을 깜박였다. 벌써?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통금에 걸린 신데렐라처럼 올라오는 아쉬운 기분을 뻥 차서 밀어 넣었다. 리산데르가 손을 내밀었다. “말에 타시죠. 라울리 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 * * 무슨 정신으로 돌아온 건지도 모르겠다. 정신 차리니 나는 라울리 궁 뒤편에 서 있었다. 누가 볼세라, 빠르게 자애의 궁으로 돌아와 아마릴리스 문양이 새겨진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아…. 알릭스, 왔나요.” 성장한 차림새를 아직 풀지도 못하고 소파에 앉아 있는 멜리장드였다. 살짝 아연하게 그녀를 바라보자 멜리장드가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아, 그냥 잠깐….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네요. 이제 치장을 풀고 잘 채비를 해야죠.” 잠들었다기에는 손질해 올린 머리칼에 한 점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누가 봐도, 이 시간까지 기다린 모습이다. 무엇을 기다렸겠나. 답은 뻔하다. ‘미안합니다, 부인. 조금 있다가 제가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남편이 지나가듯 던진 공수표 하나에 큰 기대를 걸고, 밤보다는 아침이 더 가까울 이 시간까지 몸을 조여 오는 드레스를 입고 기다린 여자 주인공. 원작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앙투안의 사랑은 칼렙에게 있고, 멜리장드는 박대당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요동치는 심장을 따라 뺨을 데우던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멜리장드가 유일하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길, 새로운 사랑. 진정한 그녀의 반려가 될 사람을 감히 마음에 품다니. 멜리장드의 구원을 내 손으로 망칠 뻔한 거다. 걱정스레 바라보는 멜리장드에게 애써 웃어 준 뒤 곁방으로 뛰어들어가 문을 닫았다.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풀어 내렸다. 손가락 틈으로 새어 나오는 바다빛을 누가 볼세라 황급하게 가리곤 가장 깊은 서랍 속, 질리거나 유행이 지나서 더 이상 찾지 않는 보석들을 담아 두는 보석함을 열었다. 구기듯 코델라이트 목걸이를 상자에 욱여넣고, 열쇠로 보석함을 잠그고, 서랍 문을 단단히 봉했다. 갓 피어난 새싹을 구두 뒤축으로 뭉개버리는 것처럼. 호흡을 가다듬고 나가자, 늦은 시간임에도 용케 깨어 있던 하녀들이 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온 게 보였다. 개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내가 신뢰하는 하녀에게 말했다. “날이 밝으면, 어머니께 연통을 넣어. 내가 뵙자고 한다고.” 짓밟은 싹 위에 소금을 뿌리리라. 외전. 오래오래 행복하게, “아이를 낳아요.” 멜리장드는 멀거니 고개를 들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마드모아젤’답게 길고 풍성한 적금발을 늘어뜨린 여성이 눈앞에 서 있었다. 건국 축일 무도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들른 듯, 흠잡을 구석 하나 없이 치장한 모습. 레비제트의 당당한 백합 문양이 아로새겨진 붉은 드레스가 화려했다. 장식 한 점 없이 투박하게 틀어 올린 제 흰 머리가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져 멜리장드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알릭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알릭스’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녀가 탁 하고 협탁 위에 병 하나를 내려놓았다. “합환채가 들어간 무흐페르산 미약이에요.” 멜리장드는 그저 큰 눈만 끔벅였다. 밖에는 건국 축일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멜리장드는 굴욕적이었던 첫 참석 이후로 한 번도 건국 축일 무도회에 간 적이 없었다. 만일 누가 이유라도 물으면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댈 생각이었으나 그 누구도 두 번 권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그러했듯이 레비제트 후작 부인의 빈자리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첫 무도회에서 누가 보아도 후작 부인 같지 않은 여성이, 보호자도 없이 덩그러니 연회장 벽에 붙어 서 있었으니. 아마 파트너를 잃어버린 촌뜨기 시골 아가씨거나 코르티잔이라고 생각한 잡배들이 집적거리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까. ‘아가씨, 참 곱군. 이름이 뭡니까?’ ‘놓으세요. 저는 레비제트 후작의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잡배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레비제트 후작 부인은 저기, 황후 폐하 옆에 계신 분이고. 당신이 진짜 레비제트 후작 부인이라면, 봄의 심장은 어디에 있나?’ ‘아무래도 술을 먹고 정신이 이미 간 것 같은데, 내가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줘야 할 것 같군요.’ 사내 한 놈이 음탕한 손짓을 했다. 낄낄 천박한 웃음이 퍼졌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들고 나를 듯 다가오는 사내들 때문에 멜리장드는 파드득 몸을 떨며 물러섰다. 누군가 성대를 꼭 쥐고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누가 도와줬으면 하는데. 그러나 누구도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제발, 누가 도와줘요. 뒷걸음질 치는 등에 퍽 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부딪혔다. 벽이었다. 궁지에 몰린 작은 설치류처럼 멜리장드가 절망했다. ‘어머, 친애하는 나의 새언니. 어쩌다가 여기서 이런 꼴을.’ 탁. 상아 뼈대를 댄 부채를 손바닥에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화려하게 손질한 적금발 아래로 오묘한 녹금안이 형형하게 빛났다. 옥빛 드레스에 금사로 수놓인 레비제트의 문양이 선연했다. ‘마, 마드모아젤 레비제트?’ 사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권세깨나 쓰는 가문의 이름을 달고 버젓이 난봉을 피우는 불량배들로, 한미한 여인들을 건드리고 그 이름을 술자리에서 늘어놓는 것을 명예로 삼았다. 따라서 그들이 단순히 시골뜨기 처녀를 건드리는 것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일이었다. 개가 짖는다고, 혹은 암탉이 알을 낳는다고 사람들이 주목하겠는가. 그러나 중앙 귀족 중에서도 거물인 레비제트의 직계가 그 그림에 나타나면 그때부터 모든 것이 어긋난다. 벌써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모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부인!’ ‘마드모아젤의 가족이신 것을 몰랐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내들이 무어라 사죄 비슷한 말을 중얼거리고 꽁무니에 불이 붙은 것처럼 내뺐다. 멍하니 그 꼬락서니를 바라보던 멜리장드의 귀에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부채를 펴서 입가를 가린 시누이를, 멜리장드는 멀거니 바라보았다. 알릭스는 흠잡을 데 없는 귀족 여인이었다. 멜리장드가 되고 싶었던 모습 그 자체. 동화 속에 나오는 고귀한 푸른 피를 가진 고아한 숙녀. 그러나 그 눈동자를 본 순간, 멜리장드는 서늘한 얼음 조각에 찔린 듯 움찔했다. 신비로운 녹금색 눈동자에서는, 대개 고귀한 숙녀의 덕목으로 여겨지는 따스한 자비심 대신 차가운 경멸이 뚝뚝 떨어졌다. ‘자격도 되지 않으면서 후작 부인 자리를 꿰찼으니 그 모양이죠. 적어도 귀족답게 처신하든가.’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였으나 그 뜻은 똑똑하게 멜리장드의 귀에 내리꽂혔다. ‘그리 시골뜨기의 딸로 남고 싶으면 그렇게 살아요. 딱 시골뜨기 대접만 받으면서.’ 척추를 따라 열패감이 번져갔다. 알릭스는 이내 제 친우인 황녀와 함께 사라졌으나, 한번 모인 시선은 쉬이 흩어지지 않았다. 입에서 입으로, 시선에서 시선으로 말이 전해졌다. 저 사람이 레비제트 후작 부인이래. 후작이 결혼을 했었나? 왜 사교계에 나오지 않는 거지? 왜 후작 부인은 자애의 궁에서 지내지 않아? 왜 보석 한 점 없이 저리 초라한 차림인 거지? 왜, 왜, 왜, 왜. 의문들은 뒤섞이고, 나뉘고, 갈라지고, 합쳐지며 황색의 거대한 구름을 만들어 냈다. 아이를 못 낳는대. 얼굴만 반반하지, 성격이 추악하대. 결혼 전에 낳은 사생아가 세 명이 넘는대. 사악한 사술로 후작을 유혹했대. 바람을 타고 온 황충이 여문 알곡을 갉아먹듯, 황색 구름은 멜리장드의 마음을 난도질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욱한 연기에 질식할 것 같았다. 멜리장드는 올라오는 신물을 누르고 비틀거리며 은의 홀을 빠져나왔다. 그 누구도 붙잡지 않았으나, 그녀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은 집요하게 뒤를 따라왔다. 그날 이후, 마음을 크게 다쳤던 멜리장드는 다신 건국 연회가 열리는 ‘은의 방’에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제 눈앞에 선, 은의 방에서 열릴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더없이 우아하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시누이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멜리장드가 시무룩하게 알릭스를 바라보았다. “잘 들어요. 이건 내가 결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베푸는 호의예요. 앙투안에게 이걸 먹여요. 그리고 어떻게든 아이를 가져요. 아이를 가진다면 그도 더 이상 당신을 외면하지 못할 테니깐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멜리장드는 바닥만 쳐다보며 조그맣게 덧붙였다. “저, 저는 외면당하고 있지 않아요. 이런 사술 같은 거… 필요 없어요.” 허. 알릭스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 소리를 냈으나 멜리장드는 꿋꿋이 말을 이어갔다. “그이는, 아무것도 없는 저를 정식 부인으로 들였고, 그 흔한 코르티잔과의 염문조차 내지 않았어요. 저는 이런 것 없이도, 그의 유일한 사랑이에요.” 알릭스가 짜증 섞인 손길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저러면 곱게 손질한 머리 모양이 흐트러질 텐데. 멀거니 생각하는 멜리장드를 두고 알릭스가 뒤돌아 문을 열며 쏘아붙였다. “정신 차려요. 혼자만 동화 속에서 살고 있지 말구요. 당신이 살고 있는 이 궁정은, 엄연한 현실이니깐!” 알릭스가 나가면서 한 마지막 말이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이 되어 심장에 아프게 박혔다. 멜리장드는 고개를 젓고 일어나서 알릭스가 두고 간 병을 쓰레기를 모아 두는 통에다가 내던졌다. 알릭스가 틀렸다. 멜리장드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 [옛날 옛날, 한 시골에, 가난하지만 착한 소녀가 살았습니다.] 쓸데없이 아이만 많은 가난한 지방 귀족의 막내딸. 말 그대로, 멜리장드는 딱 그 정도 위치였다. 과거의 조상 때에는 그나마 지역의 명문이었다고 했으나, 방계가 갈라지고, 또 그 안에서 방계가 갈라지며 떨어져 나온 보덴 가문에 남은 것은 있으나 마나 한 준남작 작위에, 그나마 영주님이라는 칭호를 간신히 유지할 수 있는 콩알만 한 마을 두 개의 조세권뿐. 이런 집안에서 넷째 딸로 태어나 봤자 무슨 귀족 아가씨의 위세를 부리겠는가. 심지어, 그녀의 형제들 모두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수많은 병마와 혹한, 흉년의 위협 속에서도 끈질기게 목숨 줄을 부지했다. 보덴 준남작령은 살아남은 네 명의 형제자매가 공평하게 나눠 가지기에는 너무나도 작았다. 그나마 멜리장드는 조상들의 좋은 점만 물려받은 외모가 어릴 적부터 상당히 눈에 띄는 편인지라, 늙은 유모는 그녀를 두고 잘하면 좋은 집안으로 시집갈 수도 있다는 장밋빛 가능성을 점쳤다. 위의 두 오라비는 누가 영지를 물려받을지를 두고 서로를 물어뜯었다. 첫째는 둘째를 수도원에 밀어 넣으려고 했고, 둘째는 그런 첫째의 흠을 잡아 부친에게 일일이 고하면서 서로 경쟁했다. 그러느라 누이동생들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래로 있는 언니 한 명은, 글쎄. 제국법상 딸이 작위를 물려받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양자나 데릴사위를 들이는 풍습이 존재하는 이유다. 하지만 가문을 이어받을 아들이 이미 존재한다면 딸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그나마 지참금이 두둑하다면 다른 좋은 집안으로 시집가서 안주인 노릇을 하면서 살면 된다. 그러나 지참금조차 변변찮은 데다, 근방에 안주인 노릇할 만한 집안들도 몇 없는 시골 귀족가의 영애들은 서로 끊임없이 경쟁해야 했다. 이는 자매 사이에도 예외는 아닌지라. 십 대에 접어들고, 멜리장드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나기 시작하자 언니는 대놓고 그녀를 견제했다.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신 탓에 가문을 꾸리는 방법을 미리 배우고 있던 언니였지만 멜리장드에게는 그에 관련하여서는 한마디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민 아이들과 놀러나 다니라고 그녀를 내보냈다. 멜리장드는 언니가 ‘하루 종일 햇볕을 받아도 저 얼굴에는 주근깨 한 점 떠오르지 않는다.’라고 분통을 터뜨리는 것을 듣고서야 그녀의 종용이 순수한 호의가 아니었음을 알아차렸다. 그 뒤로는 언니가 등을 떠밀어도 여간해서는 성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언니는 다른 집안의 사교 행사에 어쩌다 가게 되더라도 절대 멜리장드와 동행하지 않았다. 가문의 장녀가 결혼하기 전까지 차녀 아래부터는 사교 활동을 삼가야 한다는, 수십 년 전에나 성행했던 고루한 풍습을 갖다 붙이면서. 멜리장드는 홀로 남겨져서 책과 벗하곤 했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즐겨 모으셨다는 음유 시인들의 사랑 시, 사슬처럼 얽힌 동화 속 용감한 왕자들과 사로잡힌 공주들의 사랑 이야기. 앙드레트의 위대한 작가가 썼다는, 엉성하게 번역된 극본 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위대한 연인과 역경을 이겨 낸 비천한 아가씨와 왕자님의 사랑. 하나같이 사랑의 아름다움, 사랑이 가져다주는 행복을 찬미하는 줄글 속에서 헤엄치던 멜리장드는 언젠간 자신에게도 이런 사랑이 찾아올 것이라 상상하기 시작했다. 언니가 시집을 가고, 멜리장드가 ‘마드모아젤 보덴’이 되어서 사교계에 나간다면. 멜리장드는 품에 안고 있던 책등을 쓰다듬었다. 가끔 선득하게 불안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만약, 이 시골에 갇혀 있다가, 모든 사람에게 잊히면 어떡하지? 동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냥 시골뜨기 노처녀로 늙고, 그렇게 죽는다면. 그때마다 멜리장드는 유모가 해 준 말을 되뇌었다. 나는 아름답고, 내 미모에 반한 근사한 남자가 나와 진실한 사랑에 빠져서 나를 대저택으로 데려갈 거야- 라고. 그렇게 몇 년 후, 언니는 결국 다른 자잘한 가문의 숙녀들을 제치고 지역에서 나름 유망한 귀족인 스케인 자작을 사로잡았다. 자매들을 둔 집안에서는 결혼을 앞두고 언니에서 동생으로, 혹은 동생에서 언니로 신부가 뒤바뀌는 경우가 드물지는 않았다. 이를 염려한 언니에 의해 결혼식 전날까지 멜리장드는 방 안에서 감금되다시피 생활했다. 특히 손님이 드나드는 날에는 하루 종일 방문 밖을 밟을 수도 없었다. 그저 창문 틈으로 마차가 오가는 것을 보며 저 사람이 형부겠구나, 저기 나가는 것이 예물이겠구나, 하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결혼 전날 방으로 찾아온 언니를 보고 더 놀랐다. 언니의 얼굴에는 새 신부다운 설렘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알 수 없는, 지친 듯한 표정으로 멜리장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사과는 하지 않을 거야.” 뜬금없는 말에 멜리장드는 눈만 깜박였다. 언니는 개의치 않고 그저 멜리장드를 응시하다가, 옅은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시집가는 것 외에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었다면….” 언니가 이내 말을 멈췄다. 굳은 표정 위로 알 수 없는 회한이 스쳐 지나갔다. 새 신부라기보다는 노파의 것에 더 걸맞은. 서둘러 이를 갈무리한 언니가 무표정하게 화제를 바꿨다. “됐어. 결혼식에 그이의 지인을 비롯해서, 몇몇 지역 유지들이 참석할 거야. 특히 수도에서 온 줄라드 남작. 상처(喪妻)하긴 했지만 아직 젊고, 궁정에도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랬으니까, 무조건 내일 다가가 봐. 넌 어리고 예쁘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 [신실하고 아름다운 소녀는 영주의 눈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영주의 탐욕스러운 가족은 그녀를 미워했습니다.] 언니의 결혼식에서 칼렙 줄라드 남작을 만난 것은 천운이었다. 쭈뼛쭈뼛 다가간 멜리장드를 보며 선량하게 웃어 주던 줄라드 남작은 새 아내를 맞아들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더 좋은 것을 멜리장드에게 주었다. 그는 멜리장드를 저택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대했고, 거기서 앙투안 레비제트 후작을 만났다. “유모,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나이 들어 정신이 흐려진 유모가 눈을 끔뻑였다. 멜리장드가 종알거렸다. “후작님이래.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잘생기고, 가장 멋있어. 그것도 황도에서, 아니, 라울리 궁정에서 살고 있대. 저택도 따로 있을 정도로 부유해.” 무려 후작님.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높은 계급이라고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았던, 수도에서 온 백작이라는 할아버지 한 명이었는데. 멜리장드가 유모가 누워 있는 딱딱한 침대 머리맡에 턱을 괴었다. “로맨스 책 이야기에 나오는, 공주님을 구하러 온 멋진 기사님 같아.” “거기다가, 오라버니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완벽한 예법이라니. 아아, ‘진짜 귀족’이란 그런 거였어.” 촌티가 좔좔 흐르고, 예법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오라비들에 비하면 그는 신이 천상의 것으로 손수 빚은 완벽한 대천사나 다름없었다. 레비제트 후작은 촌스러운 멜리장드가 상상에서만 그려 왔던 신사였다. 멜리장드가 후작을 처음 본 순간 넋을 잃고 입을 헤 벌리는 것을 비웃지도 않았다. 그녀가 고기용과 생선용 포크를 헷갈렸음에도 신사답게 모른 척해 주었다. 정원에 난 산책로를 걸으면서 레비제트 후작의 에스코트를 받던 그 순간은, 하늘을 나는 듯 짜릿했다. 어쩌면, 그가 이 시골 동네에 갇힌 멜리장드를 구하러 온 남자 주인공 아닐까. 유모는 이가 다 빠진 입으로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아마 정신이 멀쩡했다면 이렇게 말했겠지. ‘제가 뭐랬어요, 아가씨는 귀한 신랑 만나서 명망 높은 집안 마나님으로 떵떵거리면서 살 거랬죠?’ 멜리장드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그녀를 사랑하노라고 말한 그가 불쑥 내민 감람석 반지를 약지 손가락에 끼울 때, 멜리장드는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그는 연애 소설 속에 나오는 완벽한 남자 주인공이었다. 멜리장드는 꿈꾸는 듯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그녀의 인생 앞에 펼쳐진 것은 연애 소설 속 행복한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지참금을 준비하지 못한 보덴 준남작이 멜리장드의 친족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서류에 떨리는 손으로 서명하던 순간에도, 변변찮은 예물을 받았을 때에도, 무서운 시모를 처음 보던 순간에도. “이 장부를 읽고 빠진 부분을 채워 보거라.” 딱 봐도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예비 시모가 내려놓은 서류 속에 적힌 것은 멜리장드가 모르는 이야기였다. 가문을 꾸려 본 경험이 있는 언니라면 조금은 이해했을까? 하지만 멜리장드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기호, 문자, 숫자들일 뿐이었다. 포도주가, 중앙세가, 양털이 뭐 어쨌다는 거지? 목화는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이 세금은 어디서 나온 거지? 유리병에 세금을 매긴다고?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다. 더듬거리며 계속 내용을 놓치는 멜리장드를 본 예비 시모는 어이가 없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지극히 간단한 셈도 못 해서야, 어찌 후작 부인 자리에 앉으려고.” 한심하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에 울컥해 버렸다. 차라리 그때 납작 엎드려서 배우겠노라고 빌 것을, 더듬더듬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항변하던 멜리장드는 시모의 냉정한 눈길에 막혀서 그마저도 다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주워섬겼다. 예비 시모는 모든 기대가 다 떨어졌다는 듯, 서류를 다시 갈무리해서 한 장도 남김없이 가져갔다. 그렇게 예비 시모가 떠난 뒤, 멜리장드는 결혼식 날까지 그녀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불안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결혼식 날짜만 세었다. 결혼만 끝나면 모든 오해와 반목이 풀릴 것처럼. 동화 속 주인공들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처럼. * 결혼 3년 차. 남편의 불륜을 목격하고 4층 난간에서 몸을 던졌던 그녀를 구해 낸 것은 북부의 대공이었다.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소드마스터라고 하더니. 그가 받아 든 그녀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왜 자신을 살렸냐고 울면서 발악하는 멜리장드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죽을 거면 죽으십시오. 단, 내 승전 연회가 열리고 있는 기간만 빼고. 그 뒤에는 죽든, 살든, 상관 않겠습니다.” 제가 황도에 있는 동안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건 딱 질색이니까요. 물을 끼얹듯 차가운 말에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멜리장드는 수려한 얼굴에 가득 배어 있는 짜증에 눈치를 보았다. 그때, 갑자기 니케리온 대공이 짚고 있던 지팡이를 휘둘렀다. “누구냐!” “어머낫!” 근처 덤불 틈에서 밀회를 가지려고 분위기를 잡던 남녀가 비둘기처럼 퍼드덕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잠깐이나마 그들의 달콤한 침실이 되어 준 덤불은 검기로 인해 주방의 당근처럼 깔끔하게 반으로 잘려 있었다. 멜리장드는 멀거니 그 꼴을 바라보았다. “젠장, 이래서 황도에는 어지간해서는 오기 싫었는데.” 대공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째서인지 짜증 섞인 한숨이 익숙했다. 날조차 없는 지팡이를 검처럼 사용하는 폼도, 어쩐지. “잠깐. 테오?” 대공이 바위처럼 굳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멜리장드가 말을 살짝 더듬었다. “죄, 죄송합니다. 어린 시절의 친구랑 닮아서…. 저, 저는, 레비제트의 아내, 멜리장드 실비아이고, 처녀 시절에는 아르덴 지역의 보덴 준남작령에서 살았는데….” 점차 굳어지는 대공의 면을 보고 와락 겁을 집어먹은 멜리장드의 말끝이 흐려졌다. 침묵하던 대공이 입을 열었다. “설마, 당신이, 멜?” * * * 이전의 기억을 회상하던 멜리장드는 살짝 눈을 감았다. 그녀와 대공은 어쩌다가 만난 소꿉친구로 시작해서, 그 뒤에는 서로를 도와주는 계약 부부 사이로 이어졌고, 그리고 지금은 진정한 반려가 되었다. 그래, 그녀는 더 이상 구박받던 멍청한 시골뜨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광활한 북부의 안주인, 니케리온 대공비였다. 방금 전에는 무얼 했더라. 그래, 멜리장드는 자신을 찾아와서 무릎 꿇던 알릭스를 막 돌려보낸 참이었다. 그녀가 기억하던 화려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아무 장식도 없는 흰옷을 걸치고 산발로 나타난 알릭스는 멜리장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대공비 전하, 죄송합니다. 제 뺨을 때리셔도, 침을 뱉으셔도, 발길질을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티레 백작령에 가한 처사는 멈춰주십시오. 면화가 제때 들어오지 못하면 영지민들이 겨울을 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했더라. 그래, 마르투와 항구를 닫고, 수입 면화가 알릭스가 있는 영지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았지. 그냥 종이 몇 장에 서명만 했을 뿐이었다. 한없이 고고하던 귀부인이 이리 쉽게 제 앞에서 무너지는 건가. 자신을 박대하던 전 시누이와 시모를 짓밟으면 통쾌할 줄 알았다. 그러나 왜일까. 영 개운치 않은 기분이었다. 어쩐지 쓸개를 씹어 먹은 듯 입맛이 썼다. ‘그대를 보는 것도 불쾌하니, 내 눈 앞에서 물러가라.’ ‘대공비 전하, 제발 자비를! 제가 아니라, 죄 없는 영지민들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멜리장드는 절규하는 알릭스를 하인들을 시켜 내쳤다. 이제 완벽히 몰락한 알릭스를 여간해서는 살면서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리라. [소녀를 괴롭히던 사악한 시누이는 벌을 받았답니다.] 악역은 벌을 받았다. 이제 남은 것은. “부인,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들려오는 말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니케리온 대공. 나타난 남편의 모습에 멜리장드가 얼굴에 미소를 덧그렸다. 그를 볼 때마다 습관적으로 짓는 미소였다. 그래, 앙투안이 아니라 그가, 제 인생의 남자 주인공이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각하.” 대공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각하는, 행복하십니까?” 대공이 잠시 무슨 저의인지 모르겠다는 듯 생각하다가 답했다. “네, 행복합니다. 그러는 부인은 어떠하십니까?” 멜리장드는 잠시 침묵하다 붓꽃처럼 웃었다. “네, 저도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한가. 불온한 질문이 마음을 불쑥 뚫고 올라오는 듯했으나 멜리장드는 서둘러 이를 갈무리했다. 신화 속 호기심 많은 여인이 세상의 온갖 재액을 담아 둔 상자를 설핏 열어 보았다가 서둘러 다시 닫았듯이. 그녀는 행복했다. 행복해야만 했다. [그리고, 소녀와 왕자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2권에서 계속됩니다.> ‡ 공유금지. 교환금지. 개인소장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