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Ox공금x갠소] ☞ epub 제작 배포 자유 / 텍본 유출...은 할말하않(ㆆ_ㆆ) 01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심한 감기에 걸린 겨울날. 난 어느 돌팔이 약장수의 꼬드김에 넘어가 ‘세상의 모든 병을 고쳐준다’는 신기한 보약을 전 재산을 주고 구입했다. ……사기였다. 보약을 잘못 먹은 부작용으로 눈꺼풀이 불편해져서 눈을 이상하게 뜨게 되고, 손도 달달 떨게 되었다. 눈빛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일자리에서도 잘렸다. 덕분에 월세도 내지 못하고 쫓겨나서 급기야 길거리에 나앉고 말았다. 주섬주섬 신문지를 주워다가 차가운 길바닥에 곱게 펴고 누운 뒤, 나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아! 정말이지 새로 태어나고 싶다. 보약을 먹기 전의 몸으로 다시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 그렇게 한겨울에 싸늘한 길바닥 위에서 잠이 들었다가, 저체온증으로 숨이 끊겼는데……. 다음날 눈을 떠보니 진짜로 새로 태어나고 말았다. 다른 세계에서. 차가운 길바닥이 아닌 생판 처음 보는 침대 위에서 깨어나자마자 즉시 깨달음이 왔다. “보약 사기를 당해 패가망신해서 그냥 승천하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이렇게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군.” 그때, 방 저쪽에 걸린 낡은 거울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난 곧장 일어나서 다가갔다. “음? 뭐야? 나 남자……가 아니라 남장 여자로구나?” 거울 속에는 다소 앳된 얼굴의 미청년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인복을 입은 채 남자로 변장하고 있지만, 난 왠지 이 몸이 여자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름 예쁘장한 얼굴을 요목조목 뜯어보던 나는 문득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부릅떴다. “……!” 복면을 쓴 암살자가, 내 등에 검을 내리꽂는 광경이 거울 속에 비쳐 보였다. 스윽―! 순식간에 내 손이 자동으로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휘둘렀다. 풀썩, 자리에서 쓰러진 건 내가 아닌 암살자였다. 피에 젖은 채 내 손에 쥐어진 단검을 보고 나는 뒤늦게 기겁했다. “……히익!” 놀라서 단검을 바닥에 떨어트린 뒤에야, 비로소 비명을 질렀다. “뭐야 이거!”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서 나는 미친 듯이 뒤로 몇 걸음을 뒷걸음질 치고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았다. “사과를 깎다가도 매번 손가락을 베는 똥손이 바로 난데……! 훌륭하게 사람을 베고 찌르다니!” 한편 눈앞에는 복면인이 피가 철철 나는 상처에 손을 갖다 댄 채로 쓰러져 주저앉아 있었다. “끄… 끄윽…….” 놈은 아직 고통스레 숨이 붙어 있었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고 정신을 차린 뒤 암살자를 노려봤다. “하마터면 빙의하자마자 죽을 뻔했네.” 갑자기 이 상황에 분노가 치솟았다. “뭐 하는 놈이야 너?” 나는 놈에게 다가가서는 눈을 있는 대로 부라렸다. “끄… 윽…….” 암살자는 주화입마가 왔는지 입에서 시뻘건 피를 토했다. 그러더니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허탈하게 중얼댔다. “남장…이라니……. 하인인 줄 알고… 지나칠 뻔했잖습니까……. 9황녀 저하. 진짜 사람 헷갈리게…….” 음? 9황녀? 살수가 또 피를 쿠악 하면서 뱉기에 난 옆으로 피했다. “잠깐만, 남장 여자에 9황녀. 암살자를 자체 해결하는 칼솜씨라? 나 이거 뭔지 알 거 같은 기분이 드는데…….” 머릿속에서 갑자기 번개가 쳤다. “맞다! 이거 그거다. <아카데미의 절세 미남들>이야!” 그렇게 내가 제목을 떠올리자마자. “어엇……!!” 갑자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내 머릿속에 촤르르르르 이 캐릭터의 기억이 폭포처럼 쏟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뇌를 짓누르는 엄청난 정보의 양에 극심한 과부하를 느끼고,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 여자가 갑자기 또 왜 이래……?” 뜬금없이 머리를 쥐어뜯는 날 보며 피투성이 암살자가 어이없어했다. “……후우.” 다행히 두통은 금세 말끔히 가셔서, 나는 숨을 제대로 고를 수 있었다. 그러나 머리카락은 미친 여자처럼 산발이 되어버렸다. 어쨌건 이제는 이 몸이 지금까지 살아온 기억과 소설의 모든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아카데미의 절세 미남들>. “보약 먹을 때 읽었던 소설이잖아? 중간까지 읽다가 부작용이 나타나는 바람에 결말은 모르지만…….” 나는 키득거렸다.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나, 시라이드 제국의 9황녀였다. 하인 변장은 그저 이 탑을 자주 찾아오는 암살자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일 뿐. “무엇보다도 <아카데미의 절세 미남들>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희열에 사로잡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소설에는 무려 절세 미남이 4명이나 나온다구!” 내가 소설이니 절세 미남이니 뭐니 하면서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며 웃고 있자, “참나. 죽기 전에 별꼴을 다 보네…….” 암살자는 그렇게 마지막으로 실소를 크게 뱉더니만. 쿨럭……. 마지막으로 목구멍에서 숨을 토하며 진짜로 죽어버렸다. 난 암살자가 죽었거나 말거나 신경 끄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원작의 내용에 따라 여주와 똑같이 행동을 해야 해. 무조건 아카데미로 가는 거야! 절세 미남 4명의 얼굴을 직접 확인해봐야지!” 원작 내용만 그대로 따라가면 앞날에 비단길이 쫙 깔려 있었다. “그 절세 미남 4명, 간단히 줄여서 절4 대부분과 역하렘을 차리는 것이 이 소설의 내용이니까……. 후후.” 웬 또라이 하나만 빼고 다 나를 흠모하게 된다 이 말이었다. 세 명의 절세 미남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누굴 고를까 갈팡질팡하는 그런 소설인데. 내가 무엇을 망설이리오? *** “저분이 9황녀 저하……?” “와, 처음 봐.” “저렇게 생겼구나.” 드레스로 갈아입고 황제궁에 들르자, 시녀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9황녀는 대외 활동도 전혀 하지 않고 평생 탑에만 처박혀 살아서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황제가 거의 없는 자식 취급해서 그 어떤 연회나 무도회에도 초대되지 못했었다. 그렇지만 파인 드레스 위로 드러난, 쇄골 아래쪽에 있는 황가의 표식 덕분에 내 정체를 다 알아보았다. “후… 후후훗…….” 아까 암살자를 죽이느라 피 묻은 손등을 소매로 닦고 있자니, 간지러워서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내 음침하기 짝이 없는 웃음소릴 듣고는 모두 몸을 움찔했다. “……폐, 폐, 폐하, 9황녀 저하께서 알현을 청합니다!” 특히 내 손등에 묻은 피를 보고 얼굴이 창백해진 시종장이 득달같이 외쳤다. 원작에선 여주를 안에 들여보내 주지 않으려고 하던 놈이라서 한참 실랑이를 벌였는데. 이상했다. 어쨌든 원작과 달리, 난 황제의 침전 안으로 직행할 수 있었다. 화려한 침상 위엔 바짝 마른 나무토막처럼 앙상하게 쪼그라든 노인네가 누워서는, 밭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9황녀라…….” 가늘게 눈을 뜬 노인네가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숨죽여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 두 사람이 제대로 얼굴 보는 게 지금이 처음이다. “폐하. 저는 이제 궁 밖으로 나가 자유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으니, 새 신분 증서를 받아야겠습니다. 양식은 알아서 준비해 왔으니까, 폐하는 직인만 찍으시죠.” 나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냉큼 황제 앞에 내밀었다. 원작 여주가 미리 몰래 마련해둔 신분 증서 양식이었다. 밑에는 여주가 이미 적어놓은 새 이름도 있었다. ‘알렉시스 도레’. 여기서 도레는 9황녀의 죽은 어머니의 성이었다. 밖에 나가 황가의 성으로 살아갈 순 없으니 어머니 성을 쓴 것이다. “…….” 지그시 종이를 바라보던 황제는 천천히 베드 트레이 위에 놓인 국새를 향해 손을 내밀었는데……. “하이고, 나무늘보예요? 저기요, 그냥 제가 찍어드릴게요.” 나무늘보의 속도를 도무지 견디지 못한 나는 예의라곤 깡그리 잊었다. 덥석 나무늘보의 손을 잡고 국새를 붉은 인주 위에 콱! 종이에 콱! 찍었다. “이것 참. 억지로 돈을 받아내는 사기꾼이 된 기분이네. 내가 거하게 사기를 당해봐서 사기꾼은 질색인데.” 신분 증서를 낚아채면서, 나는 결국 노숙자가 됐던 과거를 떠올리곤 몸서리를 쳤다. “네가 원래 이런 캐릭터였느냐……?” 나무늘보가 옆에서 뜬금포로 중얼거렸다. “네, 저 원래 이렇습니다. 그럼 가 보죠. 통촉은 됐습니다.” 태연자약하게 말한 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오려고 하는데. “잠깐.” 나무늘보가 갈라진 목소리로 날 부르며, 상체를 반쯤 일으켜 내 팔을 덜컥 잡았다. “……?” 주름지고 검버섯이 난 손이 내 팔을 꽉 붙잡고 있어 꼭 갈고리에 걸린 것만 같이 매우 아팠다. “아, 뭐야.” 뿌리치려 했지만, 나무늘보의 눈빛이 지나치게 형형한 게 무서웠다. “……가져가거라.” 황제는 부들부들 떨리는 다른 손으로 작은 나무토막 같은 걸 품속에서 꺼내더니, 내 손바닥 안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 “이제 네 것이다. 다시는, 이 물건을 황궁으로 들여오지 말라!” *** 내가 무엇을 받았는지 시종장이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가자! 아카데미의 절세 미남들을 만나러! 하하하……!” 침전을 나오자마자 유독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아무 말도 걸지 못했다. 곧 바람을 가르며 말 한 필이 황궁에서 쏜살같이 빠져나왔다. 여행 중엔 잠시 내려서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 성공적으로 변장했다. 드레스를 팔아 여비도 약간 챙긴 후, 저녁에는 여관에 들렀다. 방을 잡고 올라가려는데, 이마에 암살자라고 써 붙인 듯한 남자가 1층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난 모른 척하며 지나가려고 했지만, 그 암살자가 날 힐끔 보았다. “이보시오!” 갑자기 녀석이 날 불러세우더니 일어나서 다가왔다. 덩치도 크고 기세가 몹시 흉흉했다. “……왜요?” 나는 잠시 긴장했다. 설마 내 남장을 간파한 걸까? 여관 주인장은 못 알아보던데. 이 자리에서 이놈을 죽여야 하나? “혹시 이 근방에서 스무 살쯤 된 금발의 귀족 아가씨 하나 못 봤소? 하녀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대충 이렇게 생겼을 텐데.” 암살자는 인상착의가 그려진 용모파기를 착 펴서 내 앞에 보여줬다. “…….” 난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 숨을 멈췄다. 이게 내 얼굴이라고? 용모파기 속에는 웬 미친 마녀 하나가 떡 하니 그려져 있었다. 02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이빨이 죄다 삐죽삐죽 흡혈귀처럼 송곳니로 그려져 있고, 머리는 폭탄이라도 맞은 듯이 산발이었으며. 특히 치켜뜬 두 눈이 새빨간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흐음…….” 이 용모파기는 과연 누구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되었단 말인가? 날 마지막으로 본 게 시종장이니까, 분명 그놈이렷다? “에이 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 세, 미, 녀, 인 귀족 아가씨가 왜 이런 델 혼자 돌아다니겠수? 농담도 잘하네.” 나는 술 취한 아저씨 같은 말투로 껄껄 웃으면서 보란 듯이 콧방귀를 뀌어 줬다. “……절세 미녀라니, 그럴 리가…….” 암살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용모파기를 확인해보더니 날 다시 힐끔 보았다. 내 망가져 버린 눈썰미를 안타까워하는 표정이 짙어졌다. “이런. 장님에 가까운 분이었구료. 실례가 많았군. 살펴 가시오.” 암살자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용모파기를 도로 넣고는 내게 연민이 담긴 인사까지 날리고 다시 밥을 먹으러 갔다. 나는 잽싸게 여관방으로 올라가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끈덕진 놈들 같으니. 벌써 여기까지 쫓아올 줄이야.” 날 죽이려고 다른 황자들이 보낸 거였다. 본디 이 제국의 황실에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황족만이 황위에 오를 수 있다는 오래된 불문율이 있었다. 그래서 대대로 꼭 황자의 난을 봐야 직성이 풀렸다. 이번 대에는 황위 계승이 가능한 황제의 자식들이 원래 12명. 하지만 서로 죽이고 죽여서 이제 남은 건 9황녀인 날 포함해서 5명뿐. 그게 바로 9황녀가 아카데미로 도망갔던 이유다. “후……. 보약 잘못 먹고 부작용에 시달릴 때보다 더 심장이 떨리는구나.”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눈뜨자마자 날 죽이려는 암살자를 만나질 않나, 여관방까지 암살자가 쫓아오질 않나. 심장이 안 떨릴 리가……. “그럼 이제 신분 증서의 이름을 완벽하게 위조해볼까?” 다른 황자들이 내 어머니의 성을 알아내면, 앞으로 어딜 가든 추적을 당할 수 있지 않겠는가. 위조는 간단했다. 나는 여관방 안에 놓인 깃펜을 들어, 성에 획 하나만 더 그었다. “짜잔! 알렉시스 도렌!” ‘도레’에서 ‘도렌’이 되었다. “이 정도면 정말 아무도 모를 거야.” 원작 여주는 훨씬 더 길고 거창한 성으로 위조했었지만, 난 긴 이름을 싫어했다. *** 황궁을 떠난 지 나흘째, 울창한 숲을 뒤로 끼고 있는 높은 성벽이 나를 맞이했다. 제국에서 가장 큰 귀족 학교, 아스테시아. 날 발견하고 성안에서 무언가가 우르르 뛰어나왔다. “혹시 입학을 하러 오셨나요? 내일부터 새 학기가 시작인데 때맞춰 오셨군요!” 눈이 초롱초롱하고 털이 복슬복슬하며 조그마한 새끼 여우 같은 귀염둥이들이 날 일제히 바라보고 있었다. “크헙…….” 난데없이 터진 귀여움 공격에 나는 심장에 지나치게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어스아이’라고 불리는 이 여우 수인족은 아스테시아의 시종들이자, 동시에 침입자들로부터 학교를 보호하는 가디언. 오로지 아스테시아에서만 사는 종족이었다. 학교에 출입할 수 있는 것은 학생, 교수, 그리고 어스아이뿐이었다. “이이이입학하러 온 거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신분 증서를 여우족 앞에 내밀었다. 어스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이더니 각자 종이 귀퉁이를 혀로 스윽, 핥았다. “으음! 괜찮아!” “황제의 직인도 진짜고!” “귀족은 확실해!” 어스아이들이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하며 귀를 쫑긋거렸다. 저게 이들이 가진 ‘촉’이라는 것인가? “참 형편없는 촉이로다…….” 신분 증서에 적힌 내 성은 획을 하나 추가해 위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스테시아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도른 공자님! 입학은 귀족가의 자제라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답니다!” 어스아이들이 신분 증서를 돌려주며 일제히 꼬리를 살랑거리며 외쳤다. “도른이 아니고, 도렌.” 내가 이름을 정정했다. “참, 그런데 도른 공자님은 혹시 불순한 마음으로 우리 학교에 입학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나는 정곡을 찔리자 움찔했다. “맞는데? 난 불순한 마음으로 가득한데?” 원작 여주는 순수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나는 절4와 연관된 불순한 마음으로 꽉 차 있었다. “앗! 혹시 누굴 죽이거나 해칠 작정인 건가요?” 어스아이들이 살랑거리던 꼬리를 빳빳이 세우며 동시에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역하렘을 좀 차리고 싶어서.” “……역하렘?” 단어 자체가 생소했던 어스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한 마리가 내 말을 용케 알아듣고 외쳤다. “아아! 역하렘은 괜찮아요! 들어가세요!” “…….” 아아, 넌 어떻게 역하렘을 알고 있는 거니. 나는 그 어스아이와 둘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시선을 잠깐 교환했다. 아무튼 역하렘은 오케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럼 가 볼까?” 나는 말에서 내려 위풍당당하게 성문 앞에 섰다. “설마 내가 남자로 변신해 남학교에 들어갈 줄은, 황자들은 상상조차 못 하겠지.” 본디 아스테시아는 남학교로, 여성의 입학이 금지되어 있었다. 황녀가 들어갔으리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나는 입으로 크게 기합을 내지르면서, 두 발을 우다다 냅다 달려서 성문 아래를 지나갔다. 광분하여 뛰어든 나를 보고 성 안쪽에 서 있던 어스아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어때. 깜짝 놀랐지?” 내가 윙크를 찡긋 날렸다. “예, 좀 놀랐어요! 공자님.” 어스아이들이 꼬리를 흔들거리며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뭐야 이 웃기는 놈은?” 난데없이 상쾌한 남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기에,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근처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있는 청년 하나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앗…… 그러고 보니…….” 나는 얼른 소설 속 내용을 더듬었다. 여주가 아스테시아 성에 처음으로 입장했을 때, 점심시간이라 한가로이 성문 앞에 앉아 빈둥거리던 절4 멤버를 처음으로 마주치는 내용이 나왔다. 이름은 다니엘. 원작 소설에서 여주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던 전형적인 대형견 캐릭터로, 유력한 남주 후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갈색 머리의 초미남이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와, 진짜 절4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절4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냥 여기서 눈에 확 띄는 초미남이면 무조건 절4였다. 그러니깐 녀석은 내가 처음으로 마주친 절4 멤버라는 뜻이다. 간단히 1번이라고 하자. 무엇보다도 나는 이 대형견남이 첫눈에 내게 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아니나 다를까, 나와 눈이 똑바로 마주치자 녀석은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석상이 되어 있었다. ‘후후후. 나는 네가 이미 나에게 반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느긋하게 1번이 그 사실을 자각할 시간을 주었다. 원작에서 1번 다니엘은 이 상황에서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을 마구 더듬거리면서 여주에게 이름을 물어본다. 나는 원작과 같이 내 이름을 똑똑히 말해주려고 마음먹고는, 다니엘이 얼른 다가오길 기다렸다. “…….” 마침내 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다가오는 게 아니라……,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야, 왜 내 이름 안 물어봐?’ 내가 잠깐 그렇게 어리둥절하는 사이, 우리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우리를 지켜보는 어스아이들조차 꼬리를 내리고 숨을 죽였다. 그렇게 내 낯짝을 빤히 쳐다보던 1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 새끼, 눈깔이 정상이 아닌데……?” 원작 소설과는 사뭇 다른 반응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왜 원작대로 안 됐지? 이상하네.” 하지만 괜찮았다. “내가 빙의자라서 아직 1번이 적응이 안 된 모양이구나……? 결국 원작 내용대로 너도 날 좋아하게 될 거야.” 나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편 그렇게 혼자 독백을 하고 있던 나를, 1번 다니엘은 식겁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혼잣말을 해서 그런가 더 이상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흠흠.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나는 평소처럼 말투를 거칠게 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아이씨, 돌변하니까 더 무서워.” 다니엘이 기겁하듯이 뒤로 피하더니 후다다닥 멀찍이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총알 같은 속도였다. “야! 야! 어디 가!!!” 내가 뒤에서 악을 쓰며 외쳐봤지만, 1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점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 황망한 얼굴로 혼자 서 있자 옆에 있던 어스아이들이 내 눈치를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탁, 하고 주먹으로 다른 손바닥을 쳤다. “괜찮아! 1번과는 앞으로 언제든 다시 만날 기회가 많으니까. 물론 첫 만남이 예상과는 좀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깊은 인상을 심어준 모양이군.” 나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한편, 혼자 허공에 독백을 날리는 나를 어스아이들이 안타깝다는 듯한 눈길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꼬리를 말고 동시에 소리쳤다. “이제 기숙관로 안내할게요!” 그중에서 한 마리가 튀어나와 길 안내를 하면서 앞서가자, 나도 뒤를 따랐다. “궁금한 것이 있을 때는 무엇이든 저희 어스아이에게 물어보세요! 성실히 대답해 드린답니다!” “거참 편리하네?” “그렇지요!” 그래서 난 바로 궁금한 점을 물었다. “저기, 혹시 절4는 지금 다 학교 안에 있나? 방금 1번은 봤으니까 됐고. 나머지 셋은?” “네……? 절사라뇨?” 어스아이가 내 질문을 이해 못 했는지 귀만 쫑긋거렸다. 하긴, 얘네는 절4가 뭔지 모르지. “음, 모르면 됐어. 내가 알아서 찾아볼게.” 나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초미남을 찾아보았다. 03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참고로 절4 멤버들은 전부 3학년들이었으며 나와 스무살 동갑이었다. 다만 나는 남장을 해서 외형상으로 나이가 어려 보일 뿐. 어쨌든 아무 때나 마주치는 것은 아닌지, 가는 길에는 절4가 눈에 띄지 않았다. “역시 내가 적극적으로 찾아다녀야 하는 거로군. 물론 절4의 행동반경은 원작 소설을 통해 잘 알고 있으므로 아무 문제 없지!” 반드시 절4를 모두 찾아내서 어떻게든 역하렘으로 끌어들이고야 말겠다는 당찬 포부를 다시금 다졌다. “…….”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면서 엉터리 보약의 후유증으로 쉴 새 없이 손을 달달 떠는 날 어스아이가 힐끔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여기가 공자님의 숙소랍니다! 마음에 안 들어도 별수 없어요! 그럼 안녕!” 여러 기숙관 중 한 곳으로 나를 안내한 어스아이가 폭신폭신한 앞발을 살짝 흔들며 사라졌다. 내겐 참 다행스럽게도 아스테시아에서는 모든 학생에게 독방을 주었다. “노숙자였던 때에 비하면 궁궐이네, 궁궐.” 방도 제법 넓고 침대도 푹신하고 욕실도 따로 있었다. 난 곧바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절4랑 엮이려면 소설 내용을 그대로 충실히 따라가야 하는데……. 그럼 여주랑 똑같은 수업을 들어야 한단 얘기지.” 나는 앞으로 내가 신청해야 할 수업 과목에 관해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그러자 빙의자의 능력에 따라 머릿속에 소설 속 사소한 디테일들까지 죄다 되살아났다. “젠장. 여주가 하필이면 순수한 열혈 캐릭터라! 강의를 열 개나 신청했었구나!” 나는 머리를 탁 쳤다. “그동안 절4에 눈이 뒤집혀서 간과했군. 다시 잘 생각해보니까 여주가 여간 바쁜 애가 아니었어.” 애초부터 원작의 여주는 나처럼 절4를 보기 위해서 여기 온 게 아니었으니까. 물론 다른 황자들의 암살 시도를 피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전문적으로 약초학을 배워서 앞으로 세상을 돌아다니며 아픈 사람을 고쳐주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약초학의 대가가 교수로 있는 아스테시아를 선택한 그런 친구였다. “후. 다른 귀족 자제들은 수업을 3개만 신청하는데, 얘만 10개나 신청해서 다들 깜짝 놀라는 그런 장면이 나왔었잖아…….” 아스테시아에서는 한 학기에 수업을 3개 이상 들으면 되지만, 그 이상 신청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전부 풍족한 귀족 자제들이라서 기본적으로 느긋한 성향인 데다, 과제가 많아서 세 과목 이상 수강하는 게 생각보다 벅찬 일이었기 때문이다. “절4 중에서는 특히 다니엘과 수업이 세 개나 겹쳤구나.” 여주에게 첫눈에 반한 1번 다니엘이 여주가 듣는 약초학 수업을 일부러 따라 신청했기 때문이다. 즉, 나는 가만 있으면 대형견이 알아서 내가 신청한 수업을 신청할 것이라는 뜻. 좋아. 아무 문제 없어. “또 여주는 퀴즈 클럽에도 가입해서 회장인 2번과 시간을 많이 보냈지.” 특히 나중에 퀴즈 대회에 참가하면서, 회장인 2번이 여주에게 푹 빠지게 된다는 뭐 그런 이야기. “아 참, 그리고 학비를 아끼기 위해 근로 장학까지 했었네.” 어머니가 남긴 유품 반지를 제외하면 땡전 한 푼 없는 거지였던 여주는 할 수 없이 근로 장학을 신청해서 학비를 벌었다. 그러다 모종의 이유로 가문의 지원을 받지 않고 학교에 다니는 근로장학생 3번과 만나게 된다. “그게 끝이 아니군. 새벽마다 연무장에서 검술 연습도 했잖아? 검술에 미친 4번과 연무장을 같이 쓰며, 매일같이 티격태격하고 미운 정을 쌓았지.” 즉, 여주와 똑같이 하려면 새벽부터 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을 깨닫자마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런 슈바.” 절로 욕이 나왔다. “헤르미온느보다 더 바쁘잖아?” *** 다음 날 아침, 나는 늘어지게 꿀잠을 자느라고 연무장에 가는 것 따위는 꿈조차 꾸지 않았다. 즉 검술 천재 4번을 구경할 기회는 초장부터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괜찮아. 도대체 얼마나 미남인지 보고 싶긴 하지만, 사실 그 또라이랑은 안 엮이는 게 훨씬 나으니까.” 우리의 새벽 만남은 앞으로도 영영 이뤄지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룰루랄라 밖에 나가보니 개강을 해서 그런지 학교 안 어디를 가나 학생들로 무척 활기찼다. 나는 보약의 후유증 때문에 손이 마구 떨려서 전반적으로 매우 활기찼다. “좋았어! 당장 2번을 만나러 가 볼까?”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깡총깡총 남쪽 성을 향해 뛰었다. 요상하게 뛰어가는 나를 피해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비켰다. 남쪽 성에는 여러 사교 클럽과 스터디 그룹 따위가 모여 있었다. 미로 같은 복도를 끼고 작은 방들마다 학생들이 들락거렸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 합창단의 노랫소리가 나는 곳, 혹은 무슨 실험이라도 하는지 펑! 하는 굉음과 함께 연기가 몽실몽실 나오는 방까지. [퀴즈 클럽] 마침내 이런 명패가 달린 방을 찾아내서 그 앞에 음침한 얼굴로 섰다. 퀴즈 클럽이란 서로 어려운 퀴즈를 내고 맞추며, 간간이 십자말풀이라든지 체스 게임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클럽이었다. “사실 원작에서는 여주가 이렇게 절4 멤버를 찾아다니지 않지만……. 도무지 천천히 기다릴 수가 없는걸.” 원작에서는 절세 미남 2번이 클럽 회원을 모집하기 위해 전단지를 나눠주던 도중, 여주와 처음 만난다. 여주가 앞을 못 보고 뛰어가다가 부닥쳐서 둘이 같이 넘어진 것이다. 그래서 서로 일으켜주며 말을 트게 되고, 이에 2번이 클럽에 초대하면서 여주가 가입을 하게 된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클럽에 가입하는 건 똑같잖아? 무슨 차이 있겠어?” 나는 벌컥, 노크도 없이 문을 다짜고짜 열고 들어갔다. 벽난로가 놓인 아늑한 방 안에, 체스판이 놓인 테이블이 보였다. 벽을 가득 채운 고풍스러운 책들은 내 눈을 전혀 사로잡지 못했다. “어…… 누구세요?” 혼자 체스판 앞에 앉아 뭔가 궁리를 하고 있던 금발의 초미남이, 문이 열리자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물었다. “우와.” 내 눈이 그대로 초미남에게 꽂혔다. 하얗고 청초한 얼굴…… 금발에 푸른 눈…… 우아하고 호리호리한 몸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보호 본능을 절로 자극하는 병약 미모. “후후후후……. 병약미남이다…….” 내가 음침하게 읊조리자 상대가 몸을 흠칫했다. 2번 피터. 그는 특이하게도 제국이 아니라 남쪽의 어느 소국 출신으로, 아스테시아에서는 몹시 드문 유학생이었다. 절4 중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지적인 스타일. 원작에서는 여주의 절친이기도 했다. 고풍스레 생긴 단안경을 한쪽 눈 위에 걸치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어, 어떻게 오셨는지.” 2번 피터가 왠지 말을 더듬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자 당장이라도 꼭 끌어안아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네! 저는 퀴즈 클럽에 가입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내가 방이 떠나가라 크게 소리쳤다. 아름답고 병약한 절세 미남을 마주하자, 온몸에 힘이 마구 솟았다. 피터가 보약 후유증으로 떨리고 있는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안 받아요.” “……뭐요?” “안 받아요. 가입.” 피터가 다시 말했다. 우리 둘은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안 받는다고?” 내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왔다. “응, 안 받아.” 피터도 반말로 대꾸했다. “왜?” “넌 안 돼.” “…….”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피터의 입에서 튀어나온 세 글자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넌. 안. 돼. 넌… 안… 돼…. “…….” “…….” 넌. 안. 돼. 머릿속이 멍해져서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현실 감각이 느리게 돌아왔다. “아니 왜!!!” 정신을 차리자마자 내가 고함을 질렀다. “원작에서는 이런 설정이 없었는데?” 그 와중에 독백도 연달아 튀어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도대체! 분명히 2번은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하고, 입부 테스트조차 없이 곧바로 하하호호 웃으면서 사이좋게 클럽 활동을 해야 정상인데?” 내가 허공 어딘가를 지그시 응시한 채 혼잣말을 시전하자, 피터는 휴우 하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 진짜 왜 맨날 이렇게 이상한 애들만 와…….” 피터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날 무시하며 다시 체스판 앞에 가서 앉았다. “왜 난 안 되는데? 어?” 나는 당장에 달려가서 체스판 맞은편에 앉으며 괴괴한 안광을 뿌렸다. 피터가 인상을 찡그렸다. “가입을 받고 말고는 회장의 재량이니 내 마음이야. 이제 그만 방을 나가주셨으면 좋겠군, 공자.” “참나, 네가 나를 물로 보는 모양이구나?” 나는 화가 났다. “2번 네가 아무리 당장 꼭 끌어안아 주고 싶은 병약미남이어도 이래서는 안 되지! 정당한 이유를 말해줄 때까지는 나도 이 방에서 결코 나갈 수 없어!” 내가 탁탁 테이블을 일부러 손으로 두들기면서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러자 병약미남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좋아. 입부를 거부한 이유를 알려주면 당장 이 방에서 나갈 거지?” “그렇다니까.” “이유는 간단해. 너는 손을 떨고 있군. 멈추려고 해도 소용없어. 거봐, 지금도 그러잖아.” 그제야 나는 내 손이 아까 탁탁 테이블을 두드린 게 우연이 아님을 깨달았다. 손이 그냥 제멋대로 움직였던 것이다. 내가 슬쩍 떨리는 손을 거두자, 피터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금단 증상에 시달리는 모양이군. 술? 마약? 아니면 도박?” “헉.” 피터가 귀신같이 못 알아맞히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잘못 먹은 보약 후유증인데. 어떻게 그렇게 몰라?” 04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아무튼 손을 그렇게 떠는 자는 우리 클럽에 받아줄 수 없어.” “뭔 헛소리야. 퀴즈랑 손 떨림이 뭔 상관인데?” 내가 한번 뻗대보았다. “퀴즈 대회를 한 번도 보지 못했나? 퀴즈를 맞힐 때는 앞에 있는 종을 누르게 되어 있어. 그런데 너처럼 시도 때도 없이 손을 벌벌 떤다고 생각해봐. 퀴즈를 맞힐 때도 아닌데 종을 마구 눌러대서 팀을 위기에 빠뜨릴 거 아니야?” 병약미남이 말하는 너무나 사소하고 현실적인 이유 앞에 내 입이 그만 꽉 다물렸다. “또 무엇보다 여자는 곤란해.” 2번은 시큰둥하게 덧붙였다. “나중에 퀴즈 대회를 앞두고 신분이 들키기라도 하면 퇴학 아닌가? 그 경우 애꿎은 우리 팀만 팀원이 모자라게 될 수 있지. 그래서 넌 안 된다는 거야.” “뭐…… 자, 잠깐만. 뭐, 뭐라고?” 나는 피터가 하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잇는 바람에 깜짝 놀랄 시기를 놓쳤다가, 뒤늦게 말을 버벅거렸다. “귓구멍이 막혔나? 여자는 곤란하다니까?” 피터가 다시 말해주었다. “아니 이 자식은 뭐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거칠게 말을 뱉었다. “그리고 내, 내가, 어, 어디가 여, 여자라는 거야?” 뒤늦게 티가 나게 발뺌을 해봤지만 병약미남은 코웃음을 쳤다. “누구 눈을 속여. 너 여자 맞잖아.” 피터가 걸친 단안경 뒤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번뜩였다. 나는 새삼 공포를 느꼈다. “된장. 어떻게 알았어?” “딱 보자마자 알겠던데 뭘.” “딱 보자마자?” “그래. 생긴 게 그냥 여자인데 뭘.” 나는 기가 막혀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하, 그러니깐 첫눈에 보자마자 내가 여자라는 걸 알았다고?” “답답하군. 공자는 내가 이미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버릇이 있나 보지?” “와. 이런 음흉한 놈을 봤나.” 나의 결론에, 피터가 확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모습조차 참으로 그림 같아서 잠시 넋을 놓으며 나는 독백을 펼쳤다. “그러니까 2번 병약미남은 주인공이 여자인 걸 첫눈에 알았다 이거지. 다 알면서도 소설 중반부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르는 척 여주와 어울리다니……. 이런 음흉한지고……. 물론 그런 음흉함마저 나는 용인할 수 있지만…….” 다시 한번 원작 소설의 내용을 곰곰이 떠올린 나는 소리 나게 무릎을 탁! 쳤다. “가만 보니 <아카데미의 절세 미남들> 속에서도 은근히 티가 나긴 했네. 꽤 복선이 깔려 있었어.” 읽을 때는 몰랐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알게 모르게 피터가 여주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실마리가 나왔다. 여러모로 주인공이 여자임을 들킬만한 상황에서 도와준다든가, 숨겨준다든가, 등등. 내가 소설을 결말까지 읽지를 않아서 이제야 확실하게 알게 된 것뿐. “어? 잠깐만. 그렇다면 원작에선…… 피터가 주인공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순순히 클럽에 가입시켰다는 얘긴데……?” 나는 그제야 분노로 눈이 뒤집혔다. “주인공은 되면서 난 왜 이놈의 퀴즈 클럽에 가입이 안 되는데……! 똑같은 남장 여잔데! 게다가 똑같은 얼굴인데? 내가 바로 걔인데 지금! 이유가 뭐지?” 보약 후유증인 손 떨림 때문에 안된다는 이유는 감쪽같이 잊어버린 나였다. “후우……. 헛소리를 횡설수설하는 걸 보니 미친 게 분명해. 잠깐 불쌍해서 받아줄까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 분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병약미남 피터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구더러 미쳤대? 나 안 미쳤어!” 급기야 내 눈이 회까닥 뒤집혔다. “눈깔 좀 뒤집지 마. 흉하다.” 피터는 차분하게 알려줬다. 내 기분도 덩달아 착 가라앉았다. “아무튼 가입 거절 이유는 알려줬으니 약속한 대로 방에서 나가주지 그래?” “좋아. 이딴 퀴즈 클럽 따위 포기한다.” 나는 미련을 버리고 자리에서 깔끔하게 일어났다. 애초에 나야 퀴즈에는 별로 관심이 없기도 하고. “하지만 2번 병약미남 너는 결국 나와 엮이게 될 것이다.” 나는 피터의 눈앞에 대고 의기양양하게 주문 같은 저주를 날렸다. “지금 겉으로는 티를 안 내고 있겠지만, 나는 네가 속으로 은밀히 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음하하하.” 나의 입에서 씨불이는 소리를 듣자, 병약미남이 불쌍하다는 듯이 날 쳐다봤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나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코를 킁킁거렸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옆방에서 고소한 빵 냄새가 솔솔 나고 있네. 무슨 클럽이길래?” “식도락 클럽이야. 언제나 맛있는 냄새가 나지. 가입하게?” “응.” “그래. 다들 여기 먼저 왔다가도 결국엔 거기로 가긴 하더라.” 피터가 하도 많이 겪어 이젠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2번아. 조만간 또 보자구.” 내가 윙크를 던지고는 방을 발랄하게 나서자, 뒤에서 피터가 한숨을 푹 쉬며 버릇처럼 나지막이 중얼댔다. “대체 언제쯤 정상적인 애들이……. 진짜 홍보 전단지라도 돌려야 하나…….” *** 나는 망설임 없이 옆방에 있는 식도락 클럽으로 돌격했다. 날 반겨주는 식도락 클럽 회장은 포동포동하고 좀 귀여운 얼굴에다 너구리를 닮은 학생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너구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너구리뿐만 아니라 회원들이 다들 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내가 눈에서 광기를 뿌리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입을 환영해요.” 심지어 가입도 그 자리에서 바로 오케이였다. “우리 클럽은 매주 모여서 직접 요리도 하고, 한 달에 한 번은 각자 요리를 가져와서 나눠 먹기도 한답니다.” “맛집에서 사 와도 되고, 직접 요리를 해도 무방합니다, 공자.” “혹시 공자의 가문에 대를 이어 내려오는 가족 레시피 같은 것이 있다면 더더욱 환영이죠.” 토실토실한 회원들은 구석에 비치된 화덕에서 막 구워진 따끈따끈한 빵을 음미하면서 각자 순서대로 한마디씩 던졌다. “아, 그래요? 요리라? 내가 또 떡볶이를 기가 막히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인데?” 나는 불현듯 몇몇 소설에서 봤던 설정이 떠올라서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맞다, 그렇지! 떡볶이나 한식을 만들어주면 이세계인들이 감탄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빙의를 하면 종종 벌어지는 일이지. 알겠습니다. 다음에 올 때는 꼭 떡볶이를 만들어 오도록 하죠.” “떡볶이라니 처음 들어보는 요리로군요. 기대하겠습니다, 공자.” 너구리와 그 회원들이 전부 진심인 듯 방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먹는 데에 열중했다. “음……. 그런데 일단 떡을 어떻게 만들지?” 나는 열심히 빵을 처먹으면서 새삼스레 고민에 잠겼다. 원래 떡은 그냥 떡집이나 가게에서 사 오는 거 아닌가? 떡이라는 거 자체가 이세계엔 없을 테니 처음부터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얘긴데. “그러고 보니 고추장도 만들어야 되네?” 한마디로 첩첩산중……. “뭐, 어떻게든 되겠지.” 조만간 세계 최악의 떡볶이를 만들 것이라는 사실은 뒤로 한 채, 나는 버터 바른 빵을 쭉 찢어 입속에 앙 집어넣었다. *** 어째 퀴즈 클럽에 들어가려는 계획은 어그러졌지만…… 괜찮았다. 덕분에 배불리 먹었으니까. 보약 후유증마저 잠시 사라질 만큼 식도락 클럽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 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 고귀한 3번의 얼굴을 영접해야 하는데……. 처먹느라고 시간을 지체했군. 바쁘다 바빠.” 내가 도착한 곳은 행정실. 각자 자리에 앉아 학교의 전반적인 사무를 보고 있는 어스아이들이 보였다. 난 안을 둘러본 뒤 누군가를 발견하자마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감탄했다. “크……. 역시 절4다…….” 어스아이 하나와 함께 <신입생 접수>라는 팻말이 놓인 테이블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 적색 머리의 초미남. 그 빛나는 용모는 내 시선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대형견남 1번이나 병약미남 2번과는 또 다른 매력이군. 음…… 고매한 성직자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마치 천사처럼 고결하면서도…… 새벽마다 금욕적인 모습으로 기도를 하고, 굳이 자신을 채찍질할 것만 같은……? 한마디로 성자나 신관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3번 카일. “바로 금욕미남이지. 소설 속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던 캐릭터였어.” 나는 카일을 보며 입을 헤 벌리고 나도 모르게 침을 흘렸다. “항상 다른 이에게 친절하며, 금욕적인 얼굴을 하고는 뒤에서는 여주를 몰래 탐닉하는…… 뭐 그런 복잡다단한 캐릭터. 앞으로 나 때문에 타락을 많이 하게 될 텐데 불쌍해서 이를 어쩐다?” 그렇게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카일을 구경하다 허겁지겁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았다. 참고로 3번은 근로장학생 대표라서, 신입생들에게 근로 장학 접수를 받느라 현재 여기 있었다. 나는 위풍당당하게 <신입생 접수> 테이블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서는 크게 외쳤다. “안녕하세요! 신입생 등록하러 왔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근, 로, 장, 학, 도 신청할게요!” 일부러 ‘근로 장학’에 힘을 주자 카일이 날 힐끔 쳐다봤다. “신분 증서 좀 주시겠어요?” 담당 어스아이가 먼저 대답했고, 나는 품에 있던 신분 증서를 내밀었다. 어스아이가 종이 귀퉁이를 할짝 핥아서 음미했다. 그러더니 만족스럽다는 듯이 증서를 내려놓고 서류에 뭘 적었다. 카일은 내 신분 증서를 쳐다보고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을 꺼냈다. “……도렌 가문이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요.” 이것은……! 마치 악의 기운을 정화하는 것만 같은 거룩한 미소……! 나는 처음으로 절4 멤버의 미소를 마주하자 감격해서 그만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덕분에 손이 마구 바르르 떨렸다. “넵! 저희 가문은 쫄딱 망한 지 오래돼서 아마 모르실 겁니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비록 ‘도렌’이라고 획을 하나 추가했지만, 본래 ‘도레’ 가문은 제국 구석 어딘가에서 근근이 버티다가 결국 폭삭 망해버린 가문.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어머니가 황궁의 시녀로 들어갔다가 황제의 눈에 들어 여주를 낳았다는 이야기다. “비록 카일은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분명 속으로는 망해버린 가문 출신인 나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겠지.” 아무 반응 없이 신분 증서에서 눈을 뗀 3번을 바라보며, 내가 낮게 웅얼거렸다. 05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원작에서 카일은 갈 곳 없는 여주를 불쌍하게 생각해서 이리저리 신경 쓰고 챙겨준다. “……그러니깐 앞으로 3번이 내게 이리저리 신경 쓰고 챙겨주겠지……?” 나는 생각만 해도 황홀감에 도취되어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금욕미남은 내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무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펜을 내려놓은 어스아이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신입생 등록이 완료되었어요! 근로 장학을 하신다구요? 그럼 학비는 무료구요! 바로 옆에서 신청하시면 돼요!”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당장 아름다운 금욕미남 3번과 엮이고 말겠다는 의지가 솟구쳤다. 카일 앞으로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들으셨죠? 전 지금 당장 근로장학생이 되고 싶습니다!” 카일이 흠칫하며 날 피하려고 뒤로 몸을 젖혔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서 쓱 내밀었다. “근로할 수 있는 분야가 적힌 목록입니다. 원하는 분야 옆에 이름을 적도록 하십시오.” 나는 카일의 얼굴을 바라보며 싱글벙글하고 있다가 시선을 천천히 종이 위로 옮겼다. “흐음…….” 나는 종이를 대충 살폈다. 근로 장학 항목에는 교수 조교, 도서관 사서, 우체국, 인쇄소, 의무실, 기숙관, 연무장 관리 등등 많이 있었다. “여기서 원작의 여주는 약초학 교수의 조교를 신청하는 우를 범하고 말지.” 내가 흥얼거리듯 말했다. 약초학을 배워 훗날 세계를 유랑하며 아픈 이를 고쳐주고자 하는 야망을 지니고 있었던 우리의 여주는…… 약초학 교수 조교를 하면 무언가 배울 점이 크리라 믿고 그 자리에 지원하게 된다. “그때는 알지 못했던 거야. 약초학 교수는 일벌레에 성격도 깐깐하며 심부름도 많이 시켜서, 학기 내내 여주는 스트레스와 과로에 시달리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나는 종이 위에 대고 독백을 시전했다. 카일과 어스아이가 그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 후에 서로 흘낏 쳐다보았다. ‘네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지?’ ‘네. 좀 그런 것 같아요, 카일 공자님.’ 둘의 눈빛은 마치 암묵적으로 그런 내용을 교환하는 듯했다. “저는 제일 편안해 보이는 도서관 사서 보조를 하겠습니다!” 마침내 내가 호기롭게 외쳤다. “사서가 평생 로망이었어요! 뭐랄까. 한적한 도서관에서 절4와 이렇게 저렇게 책도 찾아주고, 책 꼽는 거 도와주고, 문이 잠겨서 도서관에 함께 갇히는 등등 여러 에피소드도 벌일 수 있지 않겠어요?” 내가 천장 구석에 시선을 두고 꿈을 꾸듯이 말하자, 카일과 어스아이가 다시 한번 묘한 눈빛을 교환했다. ‘역시 제정신이 아니군.’ ‘네. 역시 제정신이 아니네요, 카일 공자님.’ 아무튼 금욕미남은 다시 시선을 바로 하고 종이를 확인했다. “알렉시스 공자, 도서관 사서 보조는 이미 누군가 신청했군요.” “네……?” 뜻밖의 말에 내가 두 눈을 멍청하게 깜박였다. “여기 벌써 이름이 적혀 있잖습니까? 다른 사람이 신청했다는 뜻입니다.” 카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자, 항목에 다른 놈이 이름을 적어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럴 리가! 감히 누가? 내 자리를 감히 누가 탐냈단 말이죠?” 내가 광기 섞인 목소리를 뿜어댔다. “사서는 안 되니 다른 걸 선택하십시오.” 금욕적인 카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음성. 나는 온몸이 흐물흐물 허물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네……. 우리 3번님께오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난 금세 마음이 풀렸다. 배시시 웃으며 고분고분 다시 종이를 내려다봤다. “어……?” 지금까진 대충 봐서 몰랐는데 그제야 무언가가 번뜩 눈에 띄었다. “어어……? 이거…… 아, 아직…… 아무도…… 신청…… 안 했네요? 그, 그럼…… 이거…… 할……게……요…….” 내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보약 후유증에 시달리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한 부분을 가리켰다. 분명 소설 속에서는 누군가 차지해버렸던 자리가 아직 떡하니 비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내가 3번을 영접하려는 목적을 위해 원작의 여주보다 신입생 접수를 일찍 하러 왔기 때문이겠지! 한편, 내가 가리킨 곳을 본 카일의 얼굴이 굳어졌다. [정원 관리] 바로 카일이 하고 있는 분야로, 본래 2명의 학생이 배정되어 있었다. 마침 한 명이 졸업하면서 올해부터 자리 하나가 남은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름 적으십시오.” 금욕미남은 태연히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내게 깃펜을 건네주었다. “하…… 역시 천사…….” 고작 펜을 주었을 뿐이지만 절4의 상냥함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카일이 하사해주는 펜을 경건하게 받아들었다. 사사삭, 알렉시스 도렌이라고 힘주어 이름을 적었다. 카일과 정원에서 이런저런 은밀한 만남을 가지게 될 거라는 생각에 온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 카일과 어스아이가 또 서로 묘한 눈길을 교환했다. 그러다가 카일이 다시 날 봤다. “금요일에 만찬장에서 근로장학생들끼리 같이 점심 식사를 할 예정입니다. 참석하시면 좋겠군요.” 나는 다시 한번 카일의 부드러운 말투에 넋이 나가버렸다. “넵! 3번 금욕미남님! 무조건 가겠습니다! 차렷! 경례!” 나는 빛나는 카일님 앞에서 나도 모르게 차렷 경례를 하고 말았다. 내 상상 속에서 이미 그와 나는. 뭐…… 그냥 이것저것! *** “결심했어. 역하렘은 포기다. 앞으로는 3번 카일에게 몰방할 거야.” 나는 카일님께서 던져주신 미소를 연신 떠올리며 마치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으로 막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1번과 2번을 만나봤더니 초미남인 건 사실이지만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왠지 성격도 나랑 안 맞는 것 같았다. 아직 만나보지도 않은 4번은 절대 엮이면 안 되는 종자였다. “무조건 금욕이다. 사람은 자고로 금욕적이어야지, 아암.” 전혀 금욕적이지 않은, 욕망투성이인 내가 결론을 내렸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근로장학생 식사 모임 날이 되었다. “우리 카일님과 오손도손 알콩달콩하게 점심을 먹으면서 알찬 대화를 나누자. 이게 바로 데이트가 아니면 무엇?” 혼자 멋대로 데이트란 단어를 입에 올린 나는 정오를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룰루랄라 만찬장으로 뛰어갔다. 공간을 가득 메운 학생들로 그 웅장한 홀 전체가 시끌시끌했다. “카일님!” 창가의 원형 테이블에 앉아있던 카일을 발견한 나는 반갑게 부르며 달려갔다. “아……. 알렉시스 공자.” 카일이 웃으면서 나를 반겼다. 철퍼덕. 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전부 날 쳐다보았다. “맙소사.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군요!” 내가 지나치게 감격해서 외치자 카일은 약간 당황했다. “물론입니다. 같은 근로장학생이니까요. 자리에 와서 앉으시죠. 공자가 마지막입니다.” “네에? 제가 마지막이라고요? 그럴 리가. 12시 종이 땡 치자마자 왔는데……?” “아, 모르셨군요. 아스테시아에서는 11시에 점심시간이 시작됩니다만. 물론, 그전에 와도 애피타이저는 먹을 수 있지만요.” “헉.” 내가 시간을 착각한 것이다. 오매불망 오늘만을 기다렸는데 데이트에 1시간이나 늦다니……! 충격을 받은 나는 머리가 하얘지는 기분으로 원형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하지만 우리 카일님 옆자리로군. 헤헤헤.” 테이블에서 내 위치를 깨달은 순간 다시 바로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아졌다. 나는 달달달 떨리는 손으로 내 앞에 놓인 음료수를 다짜고짜 벌컥 들이켰다. “아, 이거 술이네?” “포도주입니다.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세요.” 금욕미남이 상냥하게 말했다. 나는 친절한 카일의 목소리에 다시 한번 감격해서, 들입다 포도주를 목구멍에 콸콸 쏟아부었다. “캬아. 술맛이 기가 막히는구나.” 내가 주정 부리는 아저씨처럼 얼굴이 벌게져서 빈 포도주잔을 테이블 위에 탁 놓자, 카일이 침묵했다. “…….” 그 순간 나는 같은 테이블에 앉은 익숙한 얼굴 한 명을 더 발견했다. “어? 너구리다.” 식도락 클럽 회장인 너구리가 내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너구리는 갑자기 나의 주목을 받자, 양 볼에 가득 음식을 넣은 채로 동작을 멈췄다. “너구리 공자도 근로장학생이었어요?” 나는 일부러 놀란 척을 하면서 물었다. 너구리가 음식을 꿀꺽 삼켰다. “너구리라면…… 저요?” “네.” 용모와 너무 찰떡처럼 어울리는 별명이어서일까. 옆에서 근로장학생 하나가 크흡, 하고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어, 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우리 식도락 클럽에서 봤었죠?” 너구리가 용케도 내 얼굴을 기억하며 말을 이었다. “말씀대로 저도 근로장학생이에요. 도서관 사서 보조예요.” “아? 도서관 사서 보조? 내 자리를 훔쳐 간 게 너구리였어요?”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너구리라는 단어만 나오면 무척 기분이 좋아지는지, 아까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던 근로장학생이 유독 혼자 어깨를 들썩거렸다. 왜 저래? 어깨춤을 추는 엑스트라는 무시하며 나는 말을 계속했다. “좋아요. 너구리 공자라면 도서관 자리는 양보하겠어요. 제가 전에 맛있는 빵도 얻어먹었으니까.” “음. 감사합니다.” 너구리가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닭고기를 입속에 집어넣었다. 짧은 대화가 그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 한편 정적이 내려앉은 테이블에서는 전부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만큼 나의 존재감이 엄청나다는 뜻이겠지.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습니다. 나는 카일이라고 합니다. 카일 밀리안입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밀리안 백작가의 차남이시죠!” “아, 알고 계시는군요.” 카일은 별로 놀란 눈치는 아니었지만. “으음, 그게.” 생각해보니 카일이 나한테 자기 성까지 소개한 적은 없는데, 내가 그의 이름과 가문까지 알고 있는 게 좀 이상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스쳤다. 06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그러니까……. 저번에 행정실에서 나오는 길에 카일 공자님에 대해 어스아이한테 꼬치꼬치 물어봤답니다. 하하하하!” 크게 웃음까지 터트리며 둘러대고 나니 약간 스토커 같았다. “꼬치꼬치……. 그렇습니까.” 카일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3번 카일은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큰 상단을 소유한 거부로 알려진 밀리안 백작가 출신. 그 가문의 차남을 이 학교 안에서 모르는 이는 없을 거였다. 어차피 다들 알고 있는데, 따로 어스아이에게 정체를 캐물었다고 말하다니 진짜로 스토커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음식이 참 맛있네요!” 나는 분명 카일을 보고 외쳤는데 갑자기 너구리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뭐, 누가 됐든 맞장구를 쳤다는 것이 중요한 거 아니겠는가. 나는 유독 먹음직스럽고 매콤해 보이는 오징어 요리에 꽂혀서 내 앞에 끌어당겨 갖다 놓았다. “생각해보니 이 만찬 모임은 소설에는 나오지 않았었구나.” 나는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먹으며 자연스럽게 독백을 시전했다. “원작의 여주는 수업을 10개 듣느라 너무 바빠서, 느긋하게 점심을 먹는 모임 따위에는 올 수가 없었지. 학기 첫 주부터 겨우 샌드위치로 막간에 허기를 채웠으니까.” 그러다가 내가 무언가를 깨닫고 멈칫했다. “이런 미친.” 나는 다시 오징어를 콱 포크로 찍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수강 신청하는 걸 까먹었네?” 덕분에 첫 주 수업을 다 놓친 셈이지만, 상관없겠지 뭐. 난 남들이 떠드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음식을 계속 흡입했다. 원래는 카일과 오손도손 알콩달콩 알찬 대화를 하려는 계획이었지만 음식의 유혹이 너무 커서 남과 얘기할 겨를은 없었다. 한편, 카일은 근로장학생 대표답게 이 모임을 주도하며 자연스레 중심이 되어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원래도 광채가 나지만, 삶의 무게에 찌들어 있는 근로장학생들 사이에 있자니 3번은 더욱 군계일학으로 보였다. 애초에 카일은 가문에 돈이 없어서 근로 장학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가 상단 경영 수업을 마다하고 아카데미에 가겠다며 우기자, 가주가 학비를 주지 않은 것뿐이라고 원작에 나온다. 한마디로 잠깐 집 나온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내가 그렇게 힐끔힐끔 카일의 고귀한 얼굴을 훔쳐보며 음식을 먹고 있는데. “또 웬 거지새끼야.” 불현듯 홀 안에 크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단숨에 깨지고, 왁자지껄하던 그 넓은 만찬 홀이 일시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모든 공자들이 전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부지런히 테이블 위에 음식을 채워주던 만찬장 소속 어스아이들조차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작을 멈춘 상태였다. 나도 마찬가지로 오징어를 입에 집어넣으려다 그쳤다. “진짜 저 거지새끼는 볼 때마다 꾸역꾸역 잘도 처먹는단 말이지. 밥맛 떨어지게.” 누군가 망발을 일삼고 있는 그곳에는, 흑발의 초미남이 서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금욕미남 카일만을 죽일 듯이 뚫어져라 노려보며. “앗. 절4다.” 갑자기 나타난 절4 멤버 때문에 나는 기습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사람을 홀릴 것만 같은 퇴폐미가 절절 흐르는 얼굴. 큰 키와 단단한 어깨, 민첩하고 잘 단련된 몸이 유독 돋보였다. “4번이네. 4번이야.” 그동안 1번, 2번, 3번을 모조리 만났으니 남은 초미남은 4번뿐이었다. 게다가 저 싸가지를 보니 더더욱 4번이 확실했다. 독자들 사이에서 4번의 별명은 ‘싸가지 바가지’를 줄여서 ‘싸바’였으니깐. “원작 소설의 악역이었지.” 독자들 사이에서 4번은 등장할 때마다 욕을 처먹었다. <아카데미의 절세 미남들> 초반부터 공공연히 여주를 괴롭히던 나쁜 놈. 이유는 여주가 카일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새벽마다 연무장에서 마주치게 되면서, 고운 정이 아닌, 오로지 미운 정만을 쌓으며 여주와 점점 엮이기 시작하는데……. “절4 중에서도 저 녀석만큼은 여주를 좋아하지 않았어.” 물론 원작이 역하렘 소설이었으니만큼, 뒷부분에 가면 여주의 어장에 잡힌 물고기가 됐을 것이다. 결말을 안 봐서 확실치는 않지만……. “특징이라면 3번 카일과 앙숙이라서, 보기만 하면 으르렁거리곤 하지.” 즉, 근처 테이블에 앉아있는 카일을 보고도 시비를 걸지 않으면 ‘싸바’가 아니라는 소리. 둘이 왜 사이가 나쁜지는 원작을 끝까지 읽지 않아 모르겠지만. “뭐, 절세 미남이긴 하네.” 난 얼굴을 대놓고 구경했다. 물론 이미 3번에게 몰방했기 때문에 크게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4번 녀석은 이미 만천하에 공표되어 있는 싸가지 바가지. 미모를 구경만 할 것이지, 절대 엮여서는 안 되는 부류일지어다. 나는 멀리서 연예인이나 구경하는 심정으로, 새로 등장한 초미남을 바라보며 매콤한 오징어 요리를 냠냠거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제라드 공자.” 3번 카일은 공공연히 자신에게 거지새끼라고 지목한 4번 제라드를 굳은 얼굴로 쳐다봤으나, 그밖에는 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태연한 목소리였다. 아마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었을 테니. “모르겠다고? 여기에 거지새끼가 너 말고 누가 있지?” 절정의 초미남이 싸늘한 말투와는 달리 표정만은 싱긋 웃으며, 빈 의자 위에 발 한쪽을 걸치듯 올렸다. 학기 초라 오랜만에 다시 만나서 그런지, 제라드의 카일을 향한 눈빛에서 불꽃이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아, 근로장학생들 사이에서 왕 노릇 하느라고 혼자만 모르나 보군. 거지가 참 주제를 알아야 하는데 안타깝기 그지없어.” “말조심하십시오, 제라드 공자!” 금욕미남이 평상심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의자가 뒤로 쓰러졌다. “…….” 한편, 우리의 근로장학생들은 그 광경을 보며 전부 어쩔 줄을 모르고 앉은 자리에 굳어있었다. 그저 다들 자기들한텐 엉뚱한 불똥이 튀지 않기만을 바라는 표정이었다. “의자가 넘어졌으면 제대로 세워야지. 역시 거지새끼라서 예의도 모르는 건가?” 제라드는 카일이 분에 차서 일어날 때 넘어진 의자를 보란 듯이 발로 차버렸다. 하필이면 의자가 카일의 다리에 세게 맞으면서 카일이 악, 하고 낮은 비명을 뱉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제라드가 재밌다는 듯이 나른하게 웃었다. 그러자 3번 카일의 금욕적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왜 이런 행패를 부리시는 겁니까?” 이런 와중에도 4번에게 계속 높임말을 쓰고 있는 3번은 참 금욕미 그 자체였다. “이야…….” 카일의 분노한 모습마저 경건하고 성스러워서 나는 대놓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반면에 주변의 공자들은 다들 숨을 죽이고 사태를 주시했다. 어스아이들조차 이 사태를 말리기는커녕, 마치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옹기종기 몰려들어 쳐다보고만 있었다. 한데, 이 와중에 3번과 4번의 싸움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단 한 명이 존재하고 있었으니. “와우. 이런 사달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꿋꿋이 먹고 있구나…….” 나는 테이블 맞은편에 있는 너구리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누가 식도락 클럽 회장 아니랄까 봐.” 4번이 치고 있는 깽판조차 너구리의 식성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남이야 싸우든지 말든지. 먹는 것 외에 다른 모든 일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한 얼굴. 너구리 한 마리는 그저 과일과 디저트까지 꼼꼼히 챙겨 먹고 있을 뿐이었다. “오로지 평온한 모습으로 그냥 열심히 먹기만 할 뿐이로군. 세상에 이토록 존경스러울 수가……. 이 정도면 위인전에 올라야겠어…….” 원작에서는 여주가 식도락 클럽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나올 일이 없었던 너구리. 행여나 나왔더라도 그저 엑스트라에 불과했을 너구리. 현재 싸바가 눈앞에서 무슨 지랄을 떨든 간에 죄다 귓등으로만 넘기며,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는 너구리. 진정한 득도의 경지로다……. “어디 다시 한번 말해봐. 내가 뭘 부린다는 건지. 행패?” 제라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위협적으로 카일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집게손가락으로 카일의 이마를 쿡, 쿡 뒤로 밀었다. “그만하란 말입니다!” 카일이 참지 못하고 홱, 제라드의 손을 쳐냈다. 제라드는 피식 웃으면서도 동시에 눈을 부라렸다. “별일이군. 거지새끼를 보고 거지새끼라고 한 것뿐인데. 왜 과민반응이지? 진짜 본인이 거지라고 인정이라도 하는 건가? 이제 만천하에 공공연히 선언할 준비가 된 거냐.” “억지 부리지 마시오!” 카일이 상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뭐가 억지라는 건지 모르겠군.” 제라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놈이 가주한테 밉보여서 아무것도 못 물려받고 쫓겨났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다 알지. 그게 거지새끼가 아니면 뭔가?” 제라드의 폭로에, 주변에서 많은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카일이 밀리안 백작가 차남이면서도 근로 장학을 하는 건, 카일이 유독 학업에 열정이 있어서 가업보다는 학업을 선택해서일 거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카일이 과연 정말로 집에서 내쳐진 자식인지를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사이. “근거 없는 헛소리는 집어치우십시오. 날 모욕한 데 대한 사과는 받아야겠습니다. 당장 사과하십시오, 제라드 공자.” 카일도 지지 않고 딱딱한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한편 나는 여전히 오징어 다리를 씹어 넘기면서 이 사태를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원작에서는 여주가 이 자리에 없었지만, 나중에 관련 내용이 살짝 언급된다. 원작에서는 결국 카일이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내리고 물러난다. 그런 카일을 발견한 여주가 나중에 위로해주는 내용이 나왔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지고……. “후후후. 그렇구나.”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마음의 상처를 입은 금욕미남을 나중에 위로해주면 되는 거야.” 07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조만간 내가 할 일이 아주 명확했다. “물론 그게 더욱 아니꼬웠는지, 4번 제라드는 점점 여주를 괴롭히게 되지만……. 내가 알 바 아니지.” 바로 내가 지금 그 여주의 몸뚱어리를 하고 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4번이랑은 애초부터 제일 가망이 낮았다. 원작 뒷부분에야 어떻게 됐는지 몰라도, 내가 읽은 부분까지는 여주를 좋아하지 않던 녀석이었다. 당시 댓글란이 저 녀석 욕으로 도배될 정도로 성격이 파탄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봐라. 저거 저거. “사과라. 내가 왜 너 같은 거지새끼한테 사과를 해야 하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것뿐인데.” 제라드는 비아냥거리듯이 쿡 하고 웃으면서 퇴폐미를 사방에 뿌렸다. “당장 사과하라니까요!” 그런 태도에 더욱 화가 난 듯한 카일이 외쳤다. 만찬장 안의 학생들이 모두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으나 아무도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제라드의 가문인 로스트베인 공작가에 찍혀봤자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4번은 제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귀족인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흠…….” 제라드는 카일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톡, 톡, 자신의 검집 위를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까딱였다. 그게 마치 검을 뺄까 말까 고민하는 것만 같은 동작처럼 보여서, 모두 마른침을 삼켰고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왜요, 다짜고짜 검이라도 휘두를 생각입니까?” 제라드의 무심한 행동을 보곤 카일이 한심하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아스테시아 안에서 무기를 들어 누군가 크게 부상을 입거나 죽을 경우, 가해자는 가문으로 돌려보내 지고 제국법에 따라서 처벌을 받게 된다. 다만, 앞날 창창한 차기 공작에게 처벌이 내려질 리는 만무했다. “아아, 그건 안 되지. 그냥 막 죽여버리면 나만 조사받을 때 귀찮아지지. 고작 거지새끼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까지야.” 제라드가 씩 웃으며 검집에서 손가락을 거두며 말했다. “정식으로 결투 신청을 하면 되는데 뭘. 결투에서만큼은 죽이는 것도 합법이니까.” 제라드는 나른한 미소를 머금으며, 로브 안쪽 포켓에 꽂혀있던 행커치프를 빼서 카일의 얼굴 위에 던졌다.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할 때의 동작. 행커치프를 얼굴에 던지는 것은 이런 모욕을 받고도 가만있겠냐는 뜻이었다. “오오……” 귀를 쫑긋거리며 구경하던 어스아이들의 호기심이 극에 달했는지, 일제히 입을 모아 환호 비슷한 소리를 냈다. 반면에 행커치프를 받은 카일의 단정한 얼굴은 얼음장처럼 굳었다. “어때, 카일. 결투에 응할 건가?” 제라드는 카일의 코앞에 제 얼굴을 갖다 대며 비아냥거렸다. “정정당당하게 누군가와 제대로 붙어본 적은 있는지 모르겠군. 비열한 수를 쓰지 않고도 이겨본 적이 있나? 명색이 귀족이니 분명 검은 잡아봤을 텐데……. 연무장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단 말이지.” 참나. 어이가 없어서. 지켜보던 내가 혀를 끌끌 찼다. “뭘 모르네. 우리 카일님은 하늘에 계신 천사인데, 세속적인 검술 따위에 시간을 쓸데없이 허비할 리가 없잖아.” 내가 날린 독백에 다들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심지어 금욕미남과 퇴폐미남까지. 그러나 다들 설마 잘못 들은 거겠거니 하는 표정으로 금방 도로 눈길을 돌렸다.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그만 포기하고 물러나세요…… 카일 공자. 결투라니 말도 안 되잖아요……. 이러다 진짜 죽겠어요.” 상황이 결투로 치달을 만큼 심각해지자, 아까 너구리라는 단어만 나오면 어깨춤을 췄던 근로장학생이 창백한 얼굴로 카일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옆에 말리는 사람도 있겠다, 이제 카일은 그냥 짐짓 못 이기는 척하면서 물러나면 되었다. 카일은 애초에 검술 천재인 제라드의 상대가 되지 못하니, 목숨이 아깝다면 결투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일은 굳은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똑바로 말해라, 카일. 결투 신청 받아들일 건가 말 건가! 그것도 말을 못 하나?” 카일에게 소리치는 제라드의 퇴폐적인 눈빛 위로 비웃음이 잔뜩 어렸다. 강자에게서 우러나오는 경멸이었다. 원래 악역이 약하면 재미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원작에서 제라드는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로 설정되어 있었다. 4번은 검술 명가인 로스트베인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로,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수련을 받은 캐릭터. 사지를 넘나들며 무수히 구사일생을 넘긴 4번 제라드는 결국 별다른 애정도 못 받아보고 이런 싸가지 바가지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제라드 공자와 결투 따위 할 생각 없습니다. 폭력으로만 일을 해결하려 하는 것은 무식하고 어리석은 짓이니까요.” 3번 카일이 차가운 낯빛으로 내뱉었다. “아아…….” 만찬장 안에서 일제히 어스아이들을 포함한 구경꾼들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카일이 고결한 말을 뱉어봤자 아무 의미 없는 일. 귀족들 사이에서는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 자체가 굴욕을 의미했으니까. 상대가 행커치프를 던진 모욕을 갚아주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줄 알았지. 겉으로만 고고한 척하는 이중인격자 새끼.” 제라드가 비웃으면서 손으로 카일의 어깨를 퍽 뒤로 밀었다. “윽.” 카일의 몸이 균형을 잃으면서 뒤로 밀려나 테이블과 부딪혔다. 그런데 하필이면 카일의 몸이 밀려난 자리가 바로 내가 앉아있던 위치였다. 카일과 부딪힌 테이블이 기우뚱해지면서 내 앞에 놓인 접시들도 같이 기울어졌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가 나며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이 일제히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접시들이 깨지면서 주변 테이블에 있던 학생들조차 놀라서 피했다. “아아…….” “안 돼…….” 조만간 그 깨진 그릇들을 치워야 하는 어스아이들이 일제히 천장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괜찮아요, 카일 공자?” 어깨춤을 잘 추던 공자가 멍하니 산산이 조각난 접시와 나뒹구는 요리를 바라보다가, 테이블을 짚고 서 있는 카일을 걱정하며 다가갔지만. 내게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이 싸바 새끼가…….” 나는 이를 악물었다. 4번 싸바가 3번 금욕미남한테 시비 거는 거야 본래 원작에서도 주야장천 나오던 거니 그렇다 치지만. “…….” 나는 먹을 것들이 바닥을 구르자 기분을 완전히 잡쳤다. 특히 매우 맛있던 오징어 요리. 아직 다 못 먹었는데……. 대체 왜 싸바 놈의 지랄에 나한테 불똥이 튀어야 하냐고. “하.” 진심으로 짜증이 나서 보약 사기를 당했을 때 뱉었던 상상 초월하는 거친 욕설을 또다시 뱉을 뻔했다.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패가망신해서 전 재산을 잃었을 때도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었다. “야이씨! 네놈이 감히 식도락 클럽 회원의 식탁을 뭉개?” 광기가 어린 안광을 마구 뿜어내며, 나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금욕미남이 굴욕을 당할 때도 안 나왔던 분노가 빵 터져버린 것이다. “……?” “……?” 나의 괴성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날 휙 쳐다보았다. 심지어 이 모든 사태에 일체 관심 없이 먹기만 하던 너구리조차, 고개를 들고 토끼 눈을 뜬 채로 날 쳐다보았다. 특히 4번 퇴폐미남 제라드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넌 또 뭐지?” 난데없이 발끈한 신입생의 존재에 제라드는 황당한 듯했다. 3번 카일도 어안이 벙벙했는지 날 쳐다본 채 굳어있었다. “아아, 내가 누군지 알고 싶으신가? 나는 바로 이 세상의 주인공인 알렉시스 도렌이시다. 다시 말하지만 내 성은 도, 른, 이 아니고 도, 렌이다!” 나는 제라드가 던진 ‘넌 또 뭐지?’라는 존재의 의의를 묻는 심오한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누가 네 이름이 궁금하댔나?” 제라드는 어이가 없는 얼굴이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카일 새끼 말곤 아무 관심 없으니까 끼어들지 말고 조용히 꺼져라.” “참나, 이 싸바 자식이. 남의 식탁을 뭉개놓고 이래라저래라하기는.” “뭐?” 만찬장은 다시 한번 조용해지고, 모든 이의 시선이 우리에게 못 박혔다. 그러나 나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제라드에게 전혀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못했다. 바로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니까! “특이한 녀석이군.” 잠시 날 쳐다보던 제라드는 내 태도가 흥미롭다는 듯이 쿡 웃었다. “패기 하나는 봐줄 만해.” 제라드가 뜻밖에도 그건 인정해주겠다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좋은 말 할 때 가라. 알아들었나?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지.” 제라드가 마치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 말했지만, 나로서는 그의 고압적인 태도를 받아들일 이유는 전혀 없었다. “지랄 염병을 하고 자빠졌네.” 내가 코웃음을 치면서 받아쳤다. “…….” 제라드는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난 멈추지 않았다. “왜 남이 밥 먹는 것까지 훼방을 놓고 지랄이야? 그놈의 성질머리 좀 못 고쳐? 밥 먹다 이게 뭔 야단법석이냐고? 가만있는 카일님이나 건드리고 말이야. 그러니까 독자들 사이에서 별명이 싸바지.” 나는 제라드를 째려보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쏘아붙였다. 만찬장 안이 고요했다. 모든 이의 시선이 말없이 내게 꽂혀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스아이들도 눈만 동그랗게 뜬 채로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제라드의 얼굴에 마침내 차가운 분노가 스쳤다. 특히 내 두서없는 발언 중에서도 ‘가만있는 카일님이나 건드리고 말이야.’라는 부분이 그의 신경을 건드린 것이다. “이 자식이……. 카일 새끼의 하인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너도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받고 싶은 거냐?” “내가?” 나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결투라니. “전혀 상상조차 안 해봤는데.” “그야 당연하겠지.” 제라드가 물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냉소했다. 08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기실 원작 속에서는 여주와 제라드 중에서 누가 더 강한지 나오지 않았다. 비록 제라드가 계속 여주를 괴롭히긴 했지만, 둘이 정식으로 대련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자기가 여자인 걸 들킬까 봐 일부러 대련을 피했고 그 흔한 검술 수업조차 신청하지 않았었다. 그저 연무장을 같이 쓰면서 따로 연습을 했을 뿐이다. 여주가 황궁에서 암살자들도 쓰러트리던 은둔 고수이긴 했지만, 제라드가 이세계 최강자로 설정된 이상, 대놓고 제라드와 싸우면 질 가능성도 컸다. “이제 상황 파악이 좀 되나? 정신 차렸으면 여기서 그만하는……” 제라드가 입을 뗐지만. “거참 스릴 있겠는데?” 내가 놈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당장 내 로브 안쪽 포켓에 꽂혀있던 행커치프를 꺼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제라드의 얼굴 위로 휙 집어 던졌다. “하시죠, 결투.” 인생은 도박 아니겠는가. *** 결투가 펼쳐진다는 소문이 퍼지자 성안이 흥분으로 뒤집혔다. “호외요! 호외! 13년 만에 처음으로 아스테시아에서 벌어지는 결투……!” 신문부에서는 순식간에 호외를 만들어 사방에 쫙 돌리고 있었다. “간만의 정식 결투를 맞아, 검술과의 데렉 교수님이 심판을 맡아주신다고 합니다……!” “결투 참가자는 제라드 로스트베인! 그리고…… 어…… 이름이, 그러니까…… 도른 신입생……!” 결투 시각이 다가오자 가장 큰 연무장이 있는 라카 광장 주변으로 군중이 불티나게 모여들었다. 심지어 어스아이들과 교수님들까지 죄다 하던 일을 집어치우고 우르르 자리를 잡았다. 결투 당사자인 나와 4번 제라드는 거의 동시에 라카 광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야, 저 신입생은 무슨 깡이냐?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가 봐?” “이름이 도른이라잖아요. 도른 거겠지.” “생긴 건 곱상하게 생겨서 검이나 제대로 휘두를까요?” “제라드 공자가 그래도 죽이진 않겠지.” “아냐, 아까 만찬장에서 보니까 엄청나게 화난 것 같더라고.” “저 살벌한 낯빛 좀 봐요. 진짜 단칼에 죽여버릴 기세인데.” “쯧쯧, 도른 놈만 불쌍하게 됐군. 개강하자마자 시체 치우는 건가?” 군중이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는, 인생이라는 도박에서 방금 주사위를 던진 나에겐 그저 윙윙거리는 소리로만 들릴 뿐이었다. 연무장 주위는 물론이고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2층과 3층 난간에까지 관중으로 빼곡했다. 개중에는 2번 병약미남과 3번 금욕미남도 보였다. 정작 제라드와 앙숙인 3번 금욕미남은 별다른 표정이 없는데, 뜻밖에 2번 병약미남이 근심 어린 표정이었다. 다른 근로장학생들도 긴장한 얼굴로 우리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 너……! 눈깔 이상한 애!” 누군가 날 부르며 급히 다가오길래 쳐다보니, 뜻밖의 인물이었다. “1번 대형견?” 나는 깜짝 놀랐다. 사실 그간 학교 안에서 한두 번쯤 마주쳤지만, 나를 보기만 하면 기겁하며 멀리 피하던 다니엘이 아닌가? 그래서 사실은 제대로 얘기해볼 기회도 없던 차였다. “제라드 공자랑 결투를 한다고? 사실이냐?” 원작의 대형견남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평소에 날 피해 다니던 것마저 지금만큼은 아무렇지 않게 극복할 만큼, 나의 결투 소식은 갯과 동물에게도 엄청난 뉴스였던 것이다. “보면 몰라?” 내가 힐끗 연무장 반대쪽에 있는 제라드 쪽을 눈짓했다. 제라드는 연무장 위에서 서성거리면서, 줄곧 내 쪽을 향해 눈으로 퇴폐미를 철철 흘려보내고 있었다. 아니, 노려본다고 해야 할까. “하, 내가 오늘 식사를 일찍 마쳤더니……. 나 없는 사이에 만찬장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 줄이야.” 다니엘이 살짝 아쉬워했다. “그래도 뭐, 결투는 볼 수 있으니까 상관없지만.” 절4 멤버와 단둘이 대화를 하고 있었으나, 죽느냐 마느냐라는 갈림길을 앞에 둔 나는 이제 1번 초미남을 봐도 심장이 떨리지 않았다. 그냥 내가 벌여놓은 이 미친 도박판 때문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물론 나도 믿는 구석이 있긴 했다. 원작 소설에서 여주의 검술이 무척 뛰어난 것으로 묘사되었던 데다가, 내가 처음 이세계에 빙의하자마자 자동으로 암살자를 칼로 쓱싹한 경험이 왠지 내게 자신감을 주었다. “근데 너, 결투에서는 상대를 죽여도 되는 거 알고 있는 거지? 즉 제라드 공자가 널 죽일 거란 얘기지.” 대형견이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 같은 표정으로 기정사실화하며 말했다. “흥. 인생은 끝날 때까지는 모르는 법이라고.” 한때 보약을 잘못 먹고 노숙자가 되어 승천할 줄 알았지만, 보란 듯이 이세계로 빙의한 내가 퀭한 눈으로 대꾸했다. “그나저나 내가 자세한 사정을 못 들어서 그런데. 제라드 공자하고는 대체 왜 결투하는 거야?” 다니엘이 뒷북을 쳤다. “아 글쎄! 밥 먹는데 저 자식이 시끄럽게 굴면서 식탁을 뭉개잖아!” 난 다시 한번 제라드의 만행을 떠올리며 분개했고. “…….” 식도락 클럽 회원다운 나의 대답에, 다니엘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럼 결투를 시작하겠네! 결투 참가자는 장 위로 올라오시오.” 심판을 보게 된 검술과의 데렉 교수가 외치자,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와아아아아! 시작이다!” “이겨라, 제라드……!” “도른 신입생 화이팅! 죽지만 마라……!” 구경꾼들이 휘파람까지 불며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발을 굴렀다. “뭘 꾸물거리지? 빨리 나와.” 벌써부터 검을 빼 든 제라드가 연무장 위에서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한번 되새겼다. “그래 인생은 도박이지, 도박…….” 퇴폐미남을 무너뜨리면 나는 한 방에 이세계 최강자가 되는 것이다. 원작 여주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이 녀석한테 괴롭힘당할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다니엘을 뒤로하고 얼른 연무장 위에 올랐다. “도른 군. 자네는 검이 없나?” 맨몸으로 나온 나를 보고, 심판인 데렉 교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심지어 교수인데 내 이름까지 틀렸다. 하지만 난 이번에는 굳이 이름을 정정해줄 정신적 여유가 부족했다. “검이요? 없는데요? 그냥 저쪽에 비치된 수련용 검으로 쓰면 안 되나요?” 내가 연무장 가장자리에 놓인 무기 거치대에 꽂혀있는 무기들을 눈짓하며 물었다. 원래 내가 황궁에서 가져온 것은 작은 단검 한 자루뿐. 이런 종류의 결투에서 사용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심판인 데렉 교수는 이런 경우가 처음이었는지 멈칫했다. “뭐야, 넌 네 검도 없어?” 그때 1번 다니엘이 뒤에서 신기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물론 난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뭐야, 검도 없나 봐?” “혹시 검술도 못 하면서 그냥 객기로 나온 거 아니야?” 구경꾼들이 수군거렸다. 나는 심판의 답도 듣지 않고 일단 무기 거치대 앞으로 가서 대충 아무 검이나 잡았다. 그 광경을 보고 1번 다니엘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야! 이 바보야! 진짜 그런 검으로 싸우려고? 넌 제라드 공자의 검이 뭔지는 알고 있어? 고대의 명인 스타셰이드가 만든 세계 3대 명검이란 말이야!” “몰라 그런 거.” 내가 귀를 후비며 대답했다. 제라드는 이세계 최강자니까, 그에 걸맞은 검을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하겠지. 나는 힐끗 제라드의 검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뭐, 좋아 보이긴 하네.” 내가 심드렁한 반응이자 다니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방금 네가 고른 그런…… 바닥에 굴러다니는 낡아빠진 검은 첫 합에 곧바로 작살날 거야! 이 멍청아!” 아니 그럼 말만 하지 말고 네 검이라도 주든가. 내가 다니엘을 쏘아봤다. 바로 그때였다. “이보게.” 심판인 데렉 교수라는 사람이 내게 다가와서는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검의 수준 차이가 너무 나면, 대련에서 불리하다네. 특히 제라드 공자 같은 실력자와 붙으면 더욱 그렇지. 연습용 검으로는 제대로 결투도 할 수 없을 테니, 차라리 내 검을 쓰는 게 어떻겠나?” 데렉 교수가 통 크게 말하면서 허리에서 검집 채로 자기 검을 빼서 내밀었다. “엇?” 나는 멈칫하며 데렉 교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정신이 없어 눈치채지 못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데렉 교수는 왠지 무협지에나 나올 것 같은 무림 고수의 풍모가 났다. 나는 속으로 그의 별명을 ‘무림 고수’라고 정했다. “……무림 고수님, 혹시 저 좋아하세요?”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무림 고수는 내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질문이었는지 다시 물었다. “아니에요.”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때 뒤에서 다니엘이 외쳤다. “뭐해! 검이나 빨리 받지 않고! 데렉 교수님의 검도 상당한 명검이라고! 검 때문에 질 일은 없을 거야! 이런 구경거리는 오랜만인데 첫 합에 허무하게 끝나면 안 되잖아!” 저 자식이……. 나는 다시 다니엘을 쏘아봤다. 남이 결투에서 죽거나 말거나, 재밌는 구경거리를 지키기에만 급급한 저 모습. 후…… 절세 미남도 밉상이 될 수 있구나. 이상하네. 개는 귀여운 면이라도 있는데. 왜 저 녀석은 귀여움과 거리가 먼 걸까. 혹시 개가 아닌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받을 건가?” 무림 고수가 검을 내민 손을 더 내 쪽으로 내밀었다. “됐습니다, 필요 없어요.” 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수련용 검을 그러쥐었다. 무림 고수는 내 반응이 뜻밖이었는지 또 멈칫했다. “뭐……? 아니 왜?” 뒤에서 다니엘이 제 귀를 의심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기실 관중 모두가 그런 얼굴로 날 지켜보고 있었다. “쯧, 저런 바보가…….” 관중들 사이에서 2번 병약미남이 단안경을 고쳐 쓰며 혀를 찼다. 한편 나는 뚜벅뚜벅 연무장 위로 걸어 나가서 위치에 섰다. 정신을 차리고 연무장 위로 올라온 무림 고수가 내게 다시 물었다. “어, 그러니까, 자네. 정말 검을…… 그 검으로 할 건가?” 무림 고수는 물론, 심지어 제라드마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09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제라드의 검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스테시아의 검술 교수가 쓰는 검이라면 아마 거의 버금가는 명검일 것이다. 그런 좋은 검을 쓸 기회가 있는데 거절하다니. 믿을 수가 없을 만큼 바보짓으로 보이겠지. “네. 골랐습니다.” 내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런 내 손에는 학생들이 검술 수업 시간에 연습용으로 사용하는, 칼날도 무뎌지고 흔하디흔한 평범한 검 하나가 들려 있을 뿐이었다. “인생이 이 정도는 되어야 스릴 있잖아?” 보약 후유증에 시달리는 환자의 광기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연무장 안에는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 그런데 바로 그때. 뜻밖에도 제라드가 자신의 명검을 바닥에 툭 던져버리면서 말했다. “네놈이 평범한 검으로 싸우겠다면 나도 그러겠다. 그래야 서로 공평할 테니.” 그러더니 4번도 뚜벅뚜벅 반대쪽 무기 거치대로 가서는 나처럼 아무 검이나 집어 들었다. 싸바 녀석이 뜻밖에도 공정한 태도로 나오자, 잠시 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이놈이 이런 캐릭터가 아닌데. 게다가……. 놈의 걸음걸이 하나하나에서 사람을 최면에 빠트릴 것만 같은 퇴폐미가 절절 흘러서 나는 잠시 넋을 놓았다. “된장. 멋있긴 멋있네.” 이 와중에 진짜. 퇴폐미남이 뭐라고……. 나는 3번 카일마저 잊고 침까지 흘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겨우 참아낼 수 있었다. 퇴폐미남은 그런 나의 눈빛을 보고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는지, 미간을 있는 대로 구겼다. 아무튼 나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수련용 검을 든 퇴폐미남이 내 앞에 마주 보고 섰다. “그럼 결투를 시작하겠네.” 무림 고수가 한 손을 치켜든 후 휙 내리면서 크게 호각을 불었다. 삐이이이이!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연무장 위에 울려 퍼진 순간, 관객들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우아아아아, 소리가 귀청을 후려쳤다. “먼저 공격하도록.” 눈앞의 퇴폐미남이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먼저 공격하라는데 뭘 망설이겠는가. 나는 조금도 기다리지 않았다. 마치 사생팬이 아이돌에게 달려가듯이, 번개 같은 속도로 퇴폐미남에게 달려들었다. “야아아아압!” 요상한 괴성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난 검을 들고 곧바로 찌를 듯이 일직선으로 뛰어갔다. 그러다가 마지막 순간 검을 비틀어서 허점을 노리고 휘둘렀다. 챙! 두 검날이 처음으로 마주친 순간, 나는 놀라서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와, 이걸 막냐?” 황궁의 살수조차 막을 수 없을 만큼 빠른 공격이었는데. 한 합이었지만 마주치자마자 상대의 실력을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원래 고수들은 다 그렇잖은가. “이런 슈바. 너무 센데?” 역시 이세계 최강자는 다르다. 나는 얼른 칼을 빼고 뒤로 후다다닥 물러났다. “……제법이군.” 퇴폐미남도 내 실력이 뜻밖이었는지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의 몸에 밴 여유는 그대로였고, 여전히 날 노려보고 있어서, 난 더욱 위기감을 느꼈다. “후. 내가 괜한 짓을 벌였나?” 후회가 들이닥칠락 말락 하는 그 순간, 4번과 똑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응시하는 그 살벌한 눈빛을 보자 절로 내 마음속 생각들이 속사포처럼 자동으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러다 나 진짜 죽는 거 아냐? 아냐. 내가 주인공인데. 그럴 리가 없지. 그럴 리가 없어. 분명히 원작 소설 속에서도 나는 검술에 뛰어났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세계 최강자와 싸운다는 것은 역시 미친 짓이었단 말이지. 어떡하지……? 이미 저질러버렸으니 이를 어째? 아주 미춰 버리겠네?” “이 자식이, 뭘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나! 여유가 만만한가!” 제라드가 그 초절정의 수려한 얼굴 뒤로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내뿜으면서 내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챙! 또다시 검이 부딪혔다. 다행히 내 팔이 자동으로 얼른 검을 들어서 막은 것이다. 고개를 들자 검을 마주한 퇴폐미남의 얼굴이 코앞에 보였다. “……!” 그런데, 이번에는 4번의 표정이 이상했다. 제라드는 왠지 모르게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심으로 놀란 듯한 그 표정이 낯설었다. 검을 마주한 손이 미동도 없는 것을 보니 마치 순간적으로 온몸이 굳은 듯이 보였다. “뭐야?” 난 어이가 없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 생존 게임에서 넋을 놓다니? “너…… 설마…….” 제라드는 왠지 아연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하게도 그는 순식간에 전의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검을 든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지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난 녀석이 방심한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어깨를 노리며 검을 내리쳤다. 제라드는 이미 싸울 의향이 없어진 듯한 얼굴이었지만, 반사적으로 손을 비틀어 툭, 하고 내 검을 쳐냈다. 쩌억― 허접한 내 검이 더 이상 견디지 못했는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쪼개졌다. 쪼개진 칼날이 아예 검 손잡이에서 빠져 바닥으로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헉…!” 광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경기를 바라보던 나머지 절4 멤버들도 아연히 입을 벌렸다. “된장. 완전 망칼이었잖아.” 퇴폐미남이랑 똑같이 거치대에서 연습용 검을 골랐는데, 내 것만 먼저 부러지다니……. 거치대에서 제일 상태가 나쁜 물건을 골랐던 걸까? “끝났네, 끝났어.” “도른 놈이 졌군.” 관중들이 허탈해하며 웅성거렸다. 이 시점에서 퇴폐미남은 계속 날 공격해서 죽일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놈은 그냥 빤히 날 쳐다보며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항복하겠나?” 제라드는 검을 들고 있긴 했으나 심지어 내게 제대로 겨누지조차 않은 채, 마지못해 묻는다는 듯이 물었다. 현재 우리는 매우 가까워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서 있었다. “항복은 개뿔이!” 나는 그렇게 대꾸하면서. 퍽! 잽싸게 발차기를 날리며 제라드의 검을 든 손아귀를 냅다 걷어차 버렸다. “결투는 완전히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고!” 내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구경꾼들이 일제히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윽…….” 퇴폐미남의 손이 꺾였고, 그가 낮은 신음을 삼켰다. 툭, 그의 검도 바닥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겨, 결투 중에 발차기해도 되는 거예요?” “몰라. 반칙 아닌가?” “심판이 계속 진행하는 거 보니 상관없는가 본데요.” “하긴. 결투에서 꼭 무기를 써야 한다는 법은 없죠.” 관중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퇴폐미남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날 쳐다봤을 뿐, 딱히 바닥에 떨어진 자기 검도 집어 들지 않았다. “이 싸바가 대체 왜 이래……?” 도대체 뭐 때문에 아까부터 전의를 상실했는지 모르겠다만. 내 알 바 아니지. 아까 쪼개져서 바닥에 떨어졌던 내 검의 칼날을 맨손으로 집어 든 나는, 곧장 제라드에게 달려들었다. 칼날을 쥔 내 손에 상처 나는 것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하하하! 하하하하!”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내가 다짜고짜 달려들자, 제라드가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굳이 피하려고도 하지 않고 가만 서 있는 제라드의 어깨에, 쪼개진 칼날 조각을 그대로 콱 박아넣었다. “…….” 제라드는 아프긴 했는지, 윽, 하는 신음을 뱉으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어깨에 꽂힌 칼날이 광장에 쏟아지는 햇빛에 번쩍거렸다. 나는 제라드 앞에 냉정한 얼굴로 꼿꼿이 서서, 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절4라서 살려준 거야, 이 싸바야. 어깨가 아닌 심장에 박아넣을 수도 있었거든. 살려줄 테니 고맙게 생각해라.”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제라드의 얼굴은 고통을 견디며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너…… 왜…….” 그는 어깨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무언가 더 말을 하려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제라드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군. 내가 졌다.” 패자의 항복 선언이 나왔는데도 아무도 소리를 내지도, 발을 구르지도, 휘파람을 불지도 않았다. 하나같이 다들 놀란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고 있을 뿐. 세계관 최강자가 결투에서 처음 보는 신입생에게 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왜 제라드 로스트베인이 결투에서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은 더욱 미스터리였다. “어……. 그럼 이것으로…… 결투를 마치겠네. 오늘의 승자는 알렉시스 도른 공자.” 심판인 무림 고수가 멍한 얼굴로 선언했다. “…….” “…….” 제라드와 나는 연무장 위에서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퇴폐미남이 무덤덤한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한쪽 어깨에 꽂힌 칼날을 손으로 쥐고 확 뽑아서 바닥에 버려버렸다. 칼날을 뽑을 때 손바닥이 베고, 어깨에서도 피가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그러나 퇴폐미남은 살아오면서 이런 부상은 수백 번은 겪었기에, 더 새로울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한 얼굴이었다. “…….” 제라드는 한번 힐끔 나를 쳐다본 뒤 휙 뒤돌아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퇴폐미남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무장에서 내려왔다. 결투가 시작하기 전에는 당장이라도 날 죽일 듯이 쏘아보았던 4번인데, 무려 결투에서 졌음에도 더 이상 별다른 분노를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마지막에 녀석의 뭔가 할 말 있어 보이는 표정도 이상했고……. 하지만 가장 이상한 것은, 놈이 왜 중간에 싸울 의지를 잃고 결투를 포기하다시피 했느냐는 거였다. “저 싸바 놈이 일부러 날 봐줄 그런 캐릭터가 아닌데…….” 나는 고개를 다시 갸웃했지만. 머리가 복잡해지는 게 싫었기 때문에 곧바로 모든 의문을 떨쳐버렸다. “아냐 됐어. 결과가 중요하지 뭐. 어쨌든 내가 이겼잖아! 하하하!”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다 내 실력이 출중한 탓이겠지 뭐! “그럼 앞으로 이세계 최강자는 바로 나란 소린가? 이번 생에서는 잭팟이 터졌다는 말씀? 크하핫!” 내가 허리에 두 손을 얹고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야. 너.” 그때 다니엘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10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결투 어땠어? 재밌었어?” 내가 돌아보며 결투를 본 소감을 물었다. 그런데 다니엘은 얼굴이 굳어있었고, 입을 꾹 다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짝 이상하다 싶었지만,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무수한 청중을 발견하고는 금세 정신이 팔렸다. 으스대는 표정을 하며 손까지 흔들어 주면서 군중 사이를 나섰다. 내가 안광을 뿌리지도 독백을 하지도 않았는데, 광장에 모여 있던 학생들이 파도처럼 옆으로 비켜섰다. 아직 결투 후의 여운이 남아있었기에, 관중 상당수는 그대로 자리에 남아 나의 퇴장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너, 그런 검술은…… 그런 개념 없는 검술은 대체 어디서 배웠냐……?” 이번에도 다니엘의 목소리였다. 뒤돌아보니, 대형견이 가까이 쫓아와서는 엄청나게 살벌한 표정으로 다그쳤다. “꼭 살수의 검술 같잖아!” 난 어리둥절해서 걸음을 멈췄다. “혹시 지금 나한테 따지는 거야?” “그래! 따지는 거다!” 돌직구인 대형견이 소리질렀다. 잠시 대형견 녀석을 쳐다보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개소리야.” 살수의 검술 같다고 따지다니, 난 일말의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다니엘의 반응은 보지도 않고 휙 뒤돌아 광장을 마저 빠져나왔다. “신입생. 내 말에 대답 안 해? 그런 검술은 대체 어디서 배웠냐니까?” 다니엘이 뒤에서 쫓아오며 윽박을 질렀다. 대체 이 녀석은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이에 왜 나한테 윽박을 지르는 걸까. “…….” 난 대답도 않고 귀를 후비며 계속해서 걸었다. 관중들과 차차 거리가 멀어지자, 그들은 결투 결과에 흥분한 채로 서로 떠들어대며 여기저기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다니엘만큼은 끝까지 내 곁을 따라 쫓아왔다. “결투 상대가 검을 이미 떨어트린 상태였잖아! 그러면 항복 여부를 먼저 묻는 게 예의지! 제라드 공자도 너한테 그랬고! 기사도 따윈 전혀 몰라?” 대형견이 분개한 표정으로 내게 다시 따지고 들었다. “게다가 공격할 의지도 없이 가만있는 상대에게 칼날을 그런 식으로 몸에 꽂아버리다니! 대체 그런 것은 어디서 배웠냐고!” “이건 또 무슨 신박한 소리야. 뭔 예의고 기사도야? 그리고 정작 싸바도 아무 말 없었는데 네가 그걸 왜 따져?” 내가 눈을 홉떴다. 당사자인 퇴폐미남도 불평하지 않은 일을 왜 제삼자가 오지랖을 부리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딴 살수 같은 지저분한 검술로 결투에서 이기고도 부끄럽지 않아? 제정신이냐!” 다니엘이 상기된 얼굴로 다그쳤다. 나는 열이 슬슬 받쳐서 걸음을 멈춘 채로 대형견을 째려보았다. “지저분하다고? 그게 1번 너의 생각이냐?” “당연하지! 사람을 죽이기만 하려는 살기가 가득한 그런 검술로는 기사의 자격이 없어. 그런 검술을 가르쳐준 놈은 기사가 아니라 살인자가 분명해! 어떤 놈이 너한테 검을 가르쳐줬지?” 말을 쏟아내던 다니엘이 잠깐 머뭇거린 뒤에 물었다. “너 혹시…… 암살단원이라도 되는 거야?” “하아…….”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대형견이 왜 화가 났는지 그제야 짐작했다. 이 녀석은 내가 암살단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것이다. 정정당당한 기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최악의 불명예. “걱정 마라. 암살단 따위 관심 없으니까. 누구한테서 검술 배운 적도 없고.” 내가 대답해 주자, 대형견은 그대로 얼이 빠졌다. “뭐? 어, 없다고……?” “그래. 없어.” 원작의 주인공은 황궁이라는 살얼음판 위를 홀로 살아야 했던 9황녀다. 완전히 탑에 방치된 덕에 다른 황족들과 달리 검술 교습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냥 죽자 사자 혼자 검을 휘둘렀던 것뿐이다. 암살자들을 상대로 무수히 많은 실전을 거친 것은 덤이다. 결국 암살자들의 검술과 닮은 꼴이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적이 겉으로는 공격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뒤에서 몰래 비수를 숨기고 있을지 모르는 일인데 내가 왜 봐줘야 하지?” 내가 다니엘에게 반문했다. 오랫동안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9황녀에게 기사도 따위는 어울리지 않았다. “적의 사정을 일일이 봐주다가는 내 목이 먼저 날아갈 수도 있는데 말이야. 세상은 그렇게 무정하더라고.” “…….” “그리고 난 이번 결투에서 정당하게 이긴 거야. 아니었다면 심판이 먼저 나서서 날 제지했겠지. 결투 상대가 멍청하게 서 있었던 게 내 잘못은 아니니까.” 나는 말을 끝내놓고 커다란 개 한 마리를 응시했다. 다니엘은 여전히 당황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 대형견은 일단 내가 암살단원이 아니라는 걸 듣고 나서부터 마음이 급격히 누그러진 것 같았다. 침묵 속에 그는 시선을 내리고 잠시 우물쭈물했다. 표정은 풀어져서 마치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기는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연도 모르면서 다짜고짜 윽박은 왜 질러? 너나 기사도 많이 지켜라.” 나는 퉁명스레 말하며 휙 몸을 돌린 후, 기숙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니엘은 쫓아오지 않았다. “흥, 어디 두고 봐라.” 나는 뒤끝이 긴 사람이었다. *** 기숙관에 도착한 나는 침대에 가서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역시 개를 기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군.” 특히 말이 잘 안 통하는 개와 대화를 나누려니까 무척 피곤해서 더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후……. 역시 개는 주인을 다시 찾아오게 되어 있군…….” 나는 당연히 1번 다니엘이 대화를 더 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벌컥 문을 열었다. “어?”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대형견이 아니라 뜻밖의 인물이었다. “어어?” 내가 멍하니 상대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상대가 무언가를 내 앞에 내밀었다. “발라.” “어어어?” “이거 바르라고.”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상대가 내민 것을 내려다봤다. 야리꾸리한 검은색 젤 같은 게 들어있는 작은 통이었다. 그걸 멍하니 내려만 보고 있다가 상대를 향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받을 거야 말 거야?” 2번 병약미남이 오묘한 검은색 젤을 내민 채로 물었다. “뭔데 이게? 지금 이게 뭔지 나더러 퀴즈라도 맞추라는 거야?” 나는 퀴즈 클럽 회장에게서 도전장을 받았다는 생각에 갑자기 호승심이 불타올랐다. 그러나 내가 퀴즈의 정답을 맞히기도 전에 피터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상처에 좋은 연고야. 아까 너 결투하면서 손을 다쳤잖아.” 병약미남의 섬섬옥수가 검은색 젤을 다시 쑥 내밀었다. “음?” 나는 그제야 내 오른쪽 앞발을 확인했다. 어쩐지 따끔하더라. 아까 결투 때 칼날을 집으면서 손바닥이 베였던 것이다. 나는 당장 피터의 손에서 연고를 휙 낚아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 움큼 푹 떠서는 치덕치덕 앞발에 바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절4가 내 방을 찾아온 것은 처음인데……? 후후후…….” 나는 연고를 바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2번은 자기네 클럽 가입을 거부하면서도 남몰래 속으로 날 흠모하기 시작했던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까지 찾아왔을 리가 없겠지……. 나는 내 숙소를 알려준 적도 없으니까 말이야……. 캴캴캴…….” 나의 독백을 멀뚱히 듣고 있던 병약미남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숙소가 어딘지는 본인이 알려줘 놓고 인식도 못 하냐?” “뭐? 내가 언제?” “그간 매일매일 우리 클럽에 입부 신청서를 보냈잖아. 네 기숙관 위치와 방 호수까지 대문짝만하게 적어서 말이야. 기억 안 나?” “아아?” 참, 그러고 보니 그간 나는 매일같이 습관처럼 퀴즈 클럽 입부 신청서를 작성한 뒤, 아침이 되면 일어나서 교내 우체통에 집어넣긴 했었다. “신청서 좀 앞으로 제발 그만 보내. 가입은 계속해서 쭉 거절이니까.” “보내건 말건 그건 내 맘이지. 고려는 해보겠어.” 내가 우겼다. 피터가 착잡한 표정으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자 그 병약 미모가 한층 더 빛을 발했다. 도무지 설득이 통하지 않겠다고 느꼈는지 단안경을 고쳐 쓰며 병약미남은 말을 돌렸다. “상처에는 붕대 감아둬.” “어어. 나 붕대 많아.”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입학하고 난 뒤 어스아이에게 부탁해서 붕대를 한 움큼 얻어 쟁여놨었다. 남장 여자란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결투가 아주 소름 끼치더군.” 병약미남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칼날 잡고 하하하하 광인처럼 웃으면서 제라드 공자한테 달려들 때 사람들이 다들 얼마나 무서워한 줄 알아?” “뭐? 무서워했다고?”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무섭다니……? 처음 듣는 얘기였다. “칼날 잡은 손에서 피까지 철철 나서 더 무서웠지. 그런데 애초에 데렉 교수님의 검을 받아서 썼으면, 검이 부러질 일도 없었을 거 아닌가? 안 그래?” “그럼 인생에 스릴이 없잖아.” 내가 능청스레 대꾸했다. 그러자 피터는 마치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퀴즈를 푸는 사람처럼, 나를 한참이나 빤히 주시했다. “아까 결투장 위에서 그렇고, 왜 그렇게 스릴을 운운하며 혼자 중얼중얼거려?” “그게 왜?” “눈이 뒤집힌 애가 횡설수설하면 더 무서운 거 몰라?” “아니 이 병약미남이 아까부터 왜 자꾸 나더러 무섭다는 거야? 내가 어디가 무서워?” 내가 마녀처럼 두 눈을 뒤집으면서 기세를 폭발시켰다. “됐다. 내가 알 바 아니지. 그냥 주욱 그렇게 살도록 해라. 오늘은 네가 다친 것 같아서 오긴 했는데, 앞으로 우리가 마주칠 일은 없길 바랄 뿐이야.” 병약미남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그 눈깔은 제발 어떻게 좀 하고.” “아니 내 눈깔이 어디가 어때서……?” “모른다니 답이 없구만.” 피터가 한숨을 내쉰 다음에 몸을 돌렸다. 그가 나가고 문이 쾅 닫혔다. 11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그날 저녁, 나는 그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수강 신청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정자세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순진한 노력파였던 원작의 여주를 떠올리며 끌끌 혀를 찼다. “여주가 참 제정신이 아니었구나.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수업을 10개나 신청할 생각을 하냐고? 난 딱 세 개만 신청해야지.” 더 볼 것도 없이 간단히 그렇게 결정해 버렸다. “가만 보니 원작 여주는 나 같은 평범한 보약 후유증 환자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미친 캐릭터였어.” 나 같은 애가 여주처럼 수업 10개를 들으면 결국 모든 과목이 다 망해버릴 것이고, 그만큼 낙제하게 될 위험이 컸다. 아스테시아는 낙제가 세 과목 누적되면 퇴학이니까, 자칫하다간 절4와 제대로 엮이기도 전에 한 학기 만에 퇴장하는 수가 있다. “퇴학이라니. 이제 겨우 카일님을 만났는데 그런 일이 생겨선 절대 안 되지, 암. 크크크.” 나는 혼자 의미 없는 웃음을 터트리고는 대충 학점을 날로 먹을 수 있는 과목 3개를 골라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 후 절4 멤버를 만나고 다니느라 바빠서 구석에 팽개쳐뒀던 행낭을 열어봤다. “황제 그 자식은 줄 거면 돈이나 보석을 주던지…….” 나는 현재 병석에서 골골대고 있을 나무늘보를 향해 욕을 뇌까렸다. 나무늘보가 준 물건은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드는 시퍼런 액체가 든, 조그마한 목재 약병이었다. 그냥 손에 들고 있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기분이다. 특히 황족들이 타고 나는 황가의 표식이 있는 쇄골 아래쪽이 찌릿했다. 황궁을 나온 뒤부터는 옷으로 안 보이게 잘 가리고 있지만 말이다. “쯧쯧. 보나 마나 독약이네. 여차하면 그냥 먹고 죽으라는 건가? 먹으려면 자기나 먹을 것이지 왜 나한테 주고 난리야?”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어쨌든 독이라 생각하니 함부로 버릴 수가 없었다. “누가 잘못 주워 먹고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결국 행낭 속에 다시 목재 약병을 처넣어 버린 나는 뒤돌아서자마자 그것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 한밤중에 달이 뜨자 나는 정원으로 나가서 꽃 한 송이를 주워 머리에 꽂았다. 그리고 꽃밭 위에 대자로 드러누워 곰곰이 생각을 해 봤다. 이곳에 빙의하고 나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말이다. 결론은. 역하렘을 차리려는 모든 계획이 진즉에 폭삭 무너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대형견처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녀야 할 1번은, 내 눈깔이 무섭다며 독설이나 날리고.” “퀴즈 클럽에 들어가서 2번과 엮이려는 계획은 시작부터 막혀버렸어. 외려 옆방에 있는 엉뚱한 식도락 클럽에 가입하고 말았잖아.” “그래……. 그래도 3번이 있으니깐……. 우리 카일님이 최고지, 아무렴. 나한테는 카일님만 있으면 돼.” “4번 그놈은 이제 생각하기도 싫다.” 꽃밭 위로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나는 한참이나 독백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이런저런 몽상에 잠겨있다가, 마침내 객관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카일님 덕에 4개 중에서 1개는 건졌군. 이 정도면 사기당한 건 아니야……!” *** 퇴폐미남과의 결투로 피치 못할 유명세가 났는지, 어딜 가든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눈길이 달라붙었다. 나는 머리에 꽃을 꽂고 학교 안을 활보하며, 그런 유명세를 의기양양하게 즐겼다. 첫 수업은 고대어 과목이었다. 내가 이 과목을 신청한 이유는 단순했다. “난 빙의자라서 고대 문자를 저절로 읽을 수 있으니까. 후후훗.” 한마디로 그냥 앉아서 학점을 날로 먹겠다는 심산이었다. “음? 그런데 1번이 왜 안 보이지?” 동쪽 탑 꼭대기에 있는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던 중, 문득 생각이 나서 휘휘 주변을 둘러봤다. 지난번에 1번과 약간의 언쟁을 하고 헤어진 사실은, 이미 내 작은 두뇌 속에서 깡그리 사라진 뒤였다. “원작 소설에 따르면, 이 대형견 녀석은 분명 내가 듣는 수업으로 전부 바꿔서 따라 들어야 하는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반려동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수강 신청서를 좀 늦게 내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녀석이 수업 변경하는 건 가능할 텐데? 순간 머릿속 한구석에서 지난번 대형견과의 언짢은 대화가 붕붕 떠오르려다가…… 금세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상하다. 오늘 어디 아픈가?” 나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학기 초부터 결석이라니, 녀석도 참……. 이러면 나중에 수업 따라오기 힘들 텐데.” 그렇게 쓸데없는 남 걱정을 한 뒤 고대어 강의를 한 귀로 흘려넘겼다. *** 이튿날 나는 두 번째 수강 과목인 약초학 수업에 들어갔다. 약초학 수업을 신청한 이유는 간단했다. “원작 여주의 버프라는 게 있잖아. 똑같은 몸이니까 나도 이 수업에 천재적 적성이 있어서 날로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원작 여주가 날로 먹은 게 아니라 열심히 공부했다는 사실은 내 머릿속엔 없었다. 이윽고, 거북이처럼 생긴 노년의 교수가 출석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무려 출석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이름을 부르는데도 내 이름을 ‘도른’이라고 틀리게 불렀다. 마침내 거북이 교수가 출석 체크를 마쳤을 때 나는 한쪽 앞발을 번쩍 들었다. “오! 뭔가?” 수업이 시작하자마자 질문이 있다는 듯 앞발을 번쩍 든 나를 보고는 거북이 교수가 반색하며 눈을 반짝거렸다. “다니엘 공자의 이름을 안 부르셨는데요?” “으음?” “출석 체크하실 때 다니엘 펠트 공자의 이름을 빠트리셨다구요.” 거북이 교수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한번 출석부를 펴서 명단을 확인했다. “으음……. 그런 이름은 출석부에 없는데. 혹시 그 다니엘 펠트라는 공자가 자네와 이 수업을 같이 듣기로 했나?” 이제는 내가 고개를 갸웃할 차례였다.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닌데요.” “그럼 그 공자가 이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닌 모양이군.” 거북이 교수는 간단히 결론을 내리더니 곧바로 수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 뒤에도 계속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강의실 안을 연신 휘휘 둘러봤지만, 역시 이번 수업에도 반려동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아, 이 대형견 녀석이 아픈 게 아니었구나……?” 나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이 자식…… 급기야 내 눈깔이 무서워서 수업을 따라 듣지 않는 거로군.” 그제야 나는 원작의 여주와는 달리, 1번 대형견과 아무 수업도 겹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 나를 고의로 피한다면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역시. 나의 이 미친 존재감이란.” 결론이 묘하게도 그렇게 나왔다. “인류와 가장 친한 반려동물인 개마저 피할 정도의 존재감이라는 거군.” 홀로 자화자찬하는 독백이 강의실 안에 울려 퍼졌다. “그래. 세상에서 내가 제일 최고지. 당연히 그렇고말고.” 거북이 교수는 물론이고 학생들조차 다들 나를 한 번씩 힐끔거렸다. 그러나 내 머리에 꽂힌 꽃이 지나치게 아름다웠는지 다들 차마 견디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 내가 신청한 마지막 세 번째 수업은 검술 과목이었다. “원래 여주는 검술에 뛰어나니까. 제라드까지 쓰러트린 실력이잖아. 식은 죽 먹기야. 이번에도 학점을 날로 먹을 수 있겠군.” 아스테시아에서 검술은 제일 인기가 많은 강의 중 하나였다. 가르치는 교수의 수도 가장 많았고, 세부적으로 다양한 검술 강의가 열려 있었다. 내가 신청한 과목의 이름은 <실전 검술>. 수많은 검술 강의들 중에서 그냥 대충 찍은 거였다. 지난번에 결투 심판을 봤던 데렉 교수의 수업이기도 했다. 시간에 맞춰 가 보니 연무장에 학생 스무 명 정도가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역시 1번은 보이질 않는군.” 검술 수업마저 겹치지 않는다니 내 눈깔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학생들 사이에서 누군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쪽으로 홱 시선을 돌렸다. “엥?”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 저 자식이 왜 여기에……?” 놈은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는 것 같더니만 휙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네? 내가 퇴폐미남이랑 수업이 겹친다고?” 원작 소설에 따르면 이럴 리가 없었다. 본래 여주는 1번 다니엘을 제외한 다른 절4와는 수업이 하나도 겹치지 않았으니까. “내가 여주와 달리 약초학 수업을 줄이고, 검술 강의를 신청해서 그런가? 제멋대로 수강 신청을 했더니 이런 일이…….” 나의 실수를 절실히 깨닫고 있을 때 저쪽에서 데렉 교수…… 아니 무림 고수가 나타났다. 지난번 결투에서 내게 검을 빌려주려고 했던 심판이었다. 학생들이 떠들던 입을 다물고 무림 고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첫 시간이니만큼 오늘은 자네들 실력을 확인해보기 위해서 간단히 서로 대련을 하도록 하겠네.” 무림 고수의 말에 학생들이 서로 눈길을 교환했다. “앞으로의 수업을 위해 대략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아보려는 것뿐이니까, 승부 결과는 너무 신경 쓰지 말도록. 그럼 각자 대련 파트너를 정하게.” 그러자 학생들이 다들 주위에 있는 다른 학생과 서로 짝을 지었다. 나도 파트너가 필요하기 때문에 얼른 내 주위에 있는 다른 누군가를 붙잡으려고 했다. 우르르. 갑자기 내 주위에 있던 공자들이 재빨리 나를 피하면서 멀찍이 뒷걸음질 쳤다. “…….” 그들은 날 힐끗 보고는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얼른 옆에 있는 다른 공자와 손을 꽉 붙잡았다. “음? 왜 다들 나랑은 짝짓기하기 싫다는 그런 표정으로 공포에 떠는 거지?” 영문을 알 수 없던 내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공자들이 몸을 흠칫 떨었다. “이건 마치 의자 앉기 게임을 하는 느낌인데…….” 음악이 멈추면 다들 의자에 앉지만, 나 혼자 의자에 앉지 못해 외톨이가 된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가만있을 수 없지.” 12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외톨이가 된 느낌이 너무 좋아서 몹시 흥분한 나는, 미친 듯이 달려가서 누군가를 잡으려 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기겁을 하면서, “으으아아악!” 날 피해서 도망을 다녔다. 연무장 위에 갑작스레 학생들의 공포에 질린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자, 무림 고수가 내 쪽을 보았다. “거기, 알렉시스 공자! 연무장 밖으로 나오게. 자네 실력은 상위라는 거 다 봤으니까 굳이 대련할 필요 없어.” “오오?” 나는 대련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에 두 귀가 번쩍 뜨였다. “역시…… 고수는 내 실력을 알아보는군. 하긴 나야말로 강호로 갓 출사한 은둔 고수라고 할 수 있지. 그렇다면 이딴 대련 따위는 내 쪽에서 거절하겠어.” 내가 콧대를 치켜세우며 온갖 잘난 체를 한 뒤 연무장 밖으로 걸어 나와 주변부에 섰다. “제라드 공자도 자동으로 상위일세. 밖으로 나오게.” 무림 고수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제라드에게로 쏠렸다. 내 시선도 4번에게로 던져졌다. “흥, 나한테 진 주제에 자동으로 상위라고?” 내가 오만한 태도로 독백을 했지만, 아무도 들은 체를 하지 않았다. 제라드는 성큼성큼 연무장 밖으로 나왔다. 문득 그가 나를 쳐다봐서 우리는 두 눈을 마주했다. “하……. 저놈의 퇴폐미 공격 좀 어떻게 막을 수 없나.” 제라드의 온몸에서 절절 흐르는 퇴폐미 때문에 나는 정신 공격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연무장 밖으로 나온 퇴폐미남은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선 것이다. “…….” “…….” 결투 당사자들이 나란히 서자, 학생들을 비롯해서 무림 고수까지 전부 묘한 눈길로 우리를 보았다. “이 자식이 왜 이래?” 나 또한 눈을 가늘게 뜨고 제라드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나 무표정한 퇴폐미남의 얼굴에선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자, 다들 파트너를 정했겠지?” 무림 고수가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본인의 대련만 중요한 게 아닐세. 다른 학생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배울 수 있어야 해. 그럼 이름을 부르는 대로 앞으로 나오도록.” 무림 고수가 출석부를 보면서 한 명씩 이름을 불렀고, 해당하는 학생이 짝과 함께 나왔다. 한편 제라드는 날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냥 말없이 서서, 학생들의 대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야, 4번. 솔직히 말해봐.” 잠시 후 내가 퇴폐미남을 째려보면서 거의 속삭이다시피 입을 뗐다. “검술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호시탐탐 날 죽일 기회를 노리려는 거지……?” “……?” 퇴폐미남이 날 힐끔 보았다. “지난번 결투에 져서 앙심을 품고 날 죽이려는 거잖아. 맞지? 그렇지? 이실직고하면 봐줄게. 솔직히 얘기해 봐.” 제라드는 어이가 없었는지 날 빤히 내려다봤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대련에서 패배하면 언제나 깨끗이 승복한다.” 그의 눈빛에서 사람을 홀리는 퇴폐미가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길래, 나는 저절로 파박, 하고 태권도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빤히 주시한 제라드가 흥미롭다는 듯이 되물었다. “정정당당한 결투였는데 왜 내가 앙심을 품었을 거라 생각했지?” “그야 네 이미지가 원래 좀 그렇잖아.” 나는 태권도 방어 자세를 풀지 않고 이때다 싶어서 입을 나불나불대기 시작했다. “악역이지 한마디로. 맨날 여주나 괴롭히고 말이야. 솔직히 나한테 암살비기를 날려도 이상하지 않을 캐릭터 아니었나?” “…….” “독자들도 얼마나 욕을 했는지 몰라. 아, 돌이켜보니 나름대로 너도 팬들이 개미 눈곱만큼 있긴 했구나. 간혹가다 퇴폐미를 좋아하는 그런 독자들.” 열심히 나불대고 나서야 뒤늦게 악역 앞에서 이런 얘기는 좀 그런가? 싶은 생각이 스쳤다. 아무리 악역이어도 대놓고 너는 나쁜 놈이라고 악담을 퍼부으면, 기분이 나빠서 폭주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어쨌든 나는 태연한 척을 하면서 뻔뻔한 낯으로 상대의 반응을 궁금해하며 제라드를 쳐다봤다.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던 퇴폐미남이 곧 입을 뗐다. “정신 상태가 특이한 여……, 공자로군. 무슨 얘길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그 특이한 자세도 뭔지 모르겠고.” 여기서 ‘특이’하다는 것은 그저 귀족 특유의 아주 완곡한 표현일 뿐. 솔직히 말하면 미친 것 같다는 뜻이었다. 내가 유치원 때 한 달 정도 배운 태권도 자세가 좀 어설프다 보니, 놈의 눈에는 ‘특이’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퇴폐미 공격에 맞서는 태권도 방어 자세를 순순히 풀 내가 아니지.” 내가 경계심이 잔뜩 어린 목소리로 굳게 말했다. 물론 퇴폐미니, 태권도니 하는 내 말을 제라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엇? 잠깐만. 그런데 너…… 어떻게 된 거야?” 그제야 이상한 점을 눈치챈 내가 거친 말투로 물었다. “어떻게 벌써…… 네 앞발이 감쪽같이 나은 거냐고?” 도무지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결투가 끝나고 제라드는 어깨에 꽂힌 칼날을 직접 손으로 무식하게 쥐고 뽑아버렸고, 덕분에 손바닥을 베였었다. 나도 놈을 공격할 때 똑같이 손을 베였지만, 2번 병약미남이 갖다준 연고를 발랐음에도 아직 다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퇴폐미남의 손은 마치 애초부터 하나도 다치지 않은 사람처럼,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아예 흉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상하다? 분명히 나랑 똑같은 날에 베였는데……? 그사이에 혹시 무슨 마법이라도 썼어?” “모르나?” 제라드가 오히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이 더 의아한 듯이 되물었다. “음?” 순간, 파바박 하고 내 머릿속에 다시 한번 소설의 일부가 명료하게 스쳐 지나갔다. “아……? 혹시 너희 가문의 그…… 힐링 포션?” 9황녀는 대개 탑 안에만 처박혀 있어서 다른 귀족들에 대해서는 정보가 부족했다. 절4의 가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나는 원작 소설을 통해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원작에서는 포션이 언급될 만한 일이 생기지 않아서 내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좋겠다 자식.” 나는 새삼스럽게 퇴폐미남을 바라보면서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3대 포션 중 하나를 혼자만 처먹었다니…….” 이쪽 세계에는 소위 3대 포션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중 첫 번째 포션이 바로 로스트베인 공작가 소유였다. 두 번째 포션은 황실 소유.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포션은 아무도 어디 있는지 몰랐다. 어쨌든 로스트베인 공작가는 첫 번째 포션인 ‘힐링 포션’을 고대부터 지금까지 대대로 비밀리에 전수하고 있다. 로스트베인의 차기 가주로 결정되면 이 포션을 먹을 수 있으며, 제라드는 비교적 어린 나이인 6살에 결정되어 이 힐링 포션을 먹었다. 힐링 포션은 평생 동안 제아무리 심한 상처를 입더라도 한 시간 안에 흔적 없이 다 낫는 포션이었다. “부러워할 것 없어.” 질투에 불타오른 날 보며 제라드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우리 가문의 포션은 그저 상처만 금세 낫게 해주는 것뿐이지, 즉사할 경우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되니까.” “그래도 그게 어디야. 쯧쯧,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하다니까. 금수저라고 마음대로 포션을 갖다 처먹는구나.” 나는 불공정한 세상에 탄식했다. 포션을 한 번 먹으면 죽을 때까지 효과가 유지되므로, 퇴폐미남은 손보다 더 심각했던 어깨의 부상도 벌써 다 나은 상태일 것이다. “절4에다가 검술 천재에다가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면서, 나쁜 짓은 혼자 다 하는데 포션까지 처먹었다 이거지. 악역한테 이런 메리트를 몰아주다니 진짜 너무하네.” “……?” 본인이 악역이라는 걸 모르는 퇴폐미남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하긴 그래야 악역인가. 악역이 너무 약하면 재미없으니까.” 난 오락가락하며 금방 마음을 바꿔서 혼자 알아서 납득했다. “넌 뭘 그렇게 혼자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나?” 퇴폐미남이 재밌다는 듯이 날 보며 물었다. 물론 나는 그 말에는 대꾸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4번 네놈이 왜 이 수업을 듣고 있는 거지? 원래 나랑 수업이 겹치지 않아야 정상인데?” 원작 여주와 달리 내가 혼자 멋대로 수강 신청을 다 바꿔버린 사실은 까맣게 머리에서 지워진 채로 물었다. 그런데 제라드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일부러 바꿨다.” “뭐라고?” “네가 이 수업을 듣는다길래. 나도 같이 들으려고 교수님에게 말해서 정정했어.” “……!” 나는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태권도 방어 자세를 더욱 강화하면서 얼른 제라드 곁에서 후다닥 떨어졌다. “내가 신청한 수업을 왜 네놈이 따라 들어? 그건 1번이 해야 할 일인데?” 대형견이 그러면 사랑스럽기라도 하지? ‘싸가지 바가지’이자 악역인 네놈이 그러면 내가 온몸에 돋은 소름 때문에 닭이 되잖아? 내 반응에 제라드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러더니 한마디를 던졌다. “재밌잖아?” “이 미친놈이…….” 나보다 더한 미친놈이었구나. “말은 바로 해야지.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보다 더 미쳤을까.” 제라드가 씩 웃었다. “참나. 웃기고 있네. <아카데미의 절세 미남들>에서 제일 미친놈이었던 주제에.” 강한 정신력을 가진 나는, 세상에서 제일 미친 사람은 내가 아니라 4번이 확실하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머리에 지금도 꽃 한 송이를 장착하고 있으면서 누구더러 미쳤다는 건지 모르겠군.” “너도 심미안이 꽝이구나. 이건 그냥 데코레이션이라고.” 그렇게 이 구역의 미친놈은 너라며 서로 공방을 주고받고 있으려니, 어느샌가 시간이 훌쩍 지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른 학생들의 대련이 전부 끝나 있었다. “다들 수고했네. 오늘 수업은 이걸로 마치고, 다음 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단련을 할 걸세. 빠짐없이 출석하도록.” 무림 고수가 그렇게 말하고 수업을 마치자, 학생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나 역시 퇴폐미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연무장을 나오고 나서도 묘하게 뒤통수에서 싸한 기분이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내 뒤를 밟는 기분. 휙, 뒤를 돌아보자 퇴폐미남이 내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13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나는 저절로 태권도 방어 자세를 취했다. “넌 뭐야. 왜 따라와?” “착각도 자유로군. 왜 내가 널 따라간다고 생각하지?” “…….” 음, 그 말도 맞긴 맞네. 저놈이 날 따라올 이유는 없지. 속으로는 수긍을 하면서도 왠지 기분이 찜찜했다. 하여간에 나는 놈을 한 번 째려본 뒤에 다시 발길을 서둘렀다. “뭐야! 왜 자꾸 따라와?” 잠시 후, 나는 여전히 퇴폐미남이 내 뒤를 쫓아오고 있자 눈을 치켜뜨며 뒤를 돌아봤다. “너 따라가는 거 아닌데? 너무 자의식 과잉 아닌가?” 제라드가 나른한 얼굴로 웃으면서 대꾸했다. “뭐라는 거야.” 나는 예나 지금이나 ‘자의식 과잉’이란 게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지. 자의식이란 넘치면 넘칠수록 좋은 건데, 과잉이 어딨어? “아 왜 자꾸 따라오냐고!” 한참 뒤에도 퇴폐미남이 자꾸 내 뒤를 따라오자, 내가 급기야 빽 소리를 쳤다. “너 따라가는 거 아니라니까?” “그럼 어디 가는데?” “밥 먹으러 가야지. 식사 시간이잖아?” “어? 나돈데?” “…….” “…….”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던 우리는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싸바 자식이. 나 같은 근로장학생들한테 거지새끼라고 욕을 할 때는 언제고. 감히 나랑 같은 시간에 밥을 먹어?” 나는 빡쳐서 웅얼거리듯 뇌까렸다. “뭔 소리야? 내가 언제 근로장학생들한테 거지새끼라고 했어?” 퇴폐미남이 어이없어하며 항의했다. 나는 갑자기 내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기억 안 나냐! 네가 카일한테 거지새끼라고 했을 때, 근로장학생들 사이에서 왕 노릇 하냐고 그랬잖아……! 그러니까 나 같은 근로장학생들을 거지새끼들이라고 한 거나 마찬가지지!” “이봐, 그건 너희들을 두고 한 말이 아니……” 퇴폐미남이 왠지 당황한 얼굴로 해명하려고 했지만 나는 빈틈을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웃기시네. 일일이 근로장학생들을 찾아가서 사과하기 전에는 난 너랑 겸상 안 해, 이 싸바야.” “…….” 툴툴거리는 나를 빤히 쳐다보던 퇴폐미남은, 뭐라고 더 말을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사과하지. 미안하다.” 참나. 알긴 뭘 알아? 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마침내 만찬장에 도착한 나는, 문가에서 놈이 못 들어가게 가로막았다. 그리고 태권도 방어 자세를 한층 더 강화한 뒤에 말했다. “너랑 밥 먹으면 속이 뒤집혀서 체할 것 같거든. 그러니까 내가 밥 다 먹고 나올 때까지 너는 만찬장 안으로 한 걸음도 들어오지 마. 알았어?” “…….” “뭐야, 빨리 대답 안 해? 네놈이 지난번에 결투에서 졌잖아? 이긴 사람 말을 따라야지!” “알아. 난 갈 테니, 식사 잘해라." 제라드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내 태권도 자세 앞에서는 퇴폐미남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제라드가 먼저 짧은 인사를 남기고는 휙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흥. 다음에 보긴 뭘 봐!” 나는 태권도 발차기로 만찬장 문을 쾅 닫아버렸다. *** 다른 공자들이 불타는 금요일을 즐긴 후 대부분 곤히 잠들어있는 토요일 아침.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근로 업무를 하러 가기 위해 방을 나왔다. 조교를 제외한 다른 근로장학생들은 전부 주말에 일을 하는 편이었다. 일종의 주말 아르바이트랄까. “돌팔이 약장수 잡으려고 찾으러 나갈 때도 이 시간에 일어나질 않았는데 이 무슨 개떡 같은 경우야.” 본래 아침잠이 많은 나는 아주 심각하게 도로 방으로 들어가 늘어지게 잠을 잘까 고민했다. 특히 이러한 황금 같은 주말에는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근처 도시에 가서 놀다 올 수도 있었다. 여기서 말을 타고 30분 정도 가면 상당히 번화한 영지가 나오는데, 온갖 상점들과 맛있는 식당들이 즐비해 있었다. 식도락 클럽 회원들이 주로 맛집을 찾으러 다니는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나만 빼고 다 맛있는 거 먹고 놀러 다닐 것을 생각하자 더욱 억울해졌다. “후…… 아냐. 우리 카일님을 가까이서 봐야 하는데 근로 장학에서 잘리면 안 되지. 빨리 가서 대충하고 오자구.” 빛나는 금욕미남을 떠올리며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밖으로 나오니 서늘한 아침 공기가 내 낯짝을 쌀쌀맞게 때렸다. 룰루랄라 걸어가고 있는데, 뒤쪽에서 누군가 조깅을 하며 날 스쳐서 달려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휙 나를 향해 뒤돌아보았다. “…….” “…….” “어, 어. 안녕.” 놈이 다소 어색하게 내게 말을 걸었다. 이게 누군가. 1번 다니엘이었다. 눈부신 미모였지만, 나는 놈을 보자마자 눈살을 홱 찌푸렸다. “맨날 내 눈깔이 이상하다며 피해 다니더니, 오늘은 웬일로 인사를 다 하냐?” “무슨. 내가 언제 피해 다녔다고 그래.” 다니엘이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그럼 아냐?” “아닌데?” 다니엘은 말은 그렇게 해도 여전히 시선을 피한 상태였다. “그럼 왜 내가 듣는 수업 같이 안 듣는데? 너는 내가 듣는 걸 전부 따라서 신청했어야지.” “……?” 대형견은 이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그제야 날 똑바로 봤다. 묘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대형견이 말했다. 그는 한 번 쿨럭하고 헛기침을 하면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다소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말문을 열었다. “있잖아, 지난번 결투 날에 그…… 막 윽박지르고 다그쳤던 일은 내가 미안하다, 알렉시스.” 다니엘이 조금 머쓱한 얼굴로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서 미간을 매만졌다. 그 모습이 또 왠지 강아지처럼 보이기는 하길래 나는 뒤끝 있게 실컷 골려주려던 마음이 약해졌다. “난 그냥 네가 암살단과 연관이 있는 줄 알고, 정신이 없어서 그런 소릴 한 거야. 함부로 따진 건 내 잘못이었어.” “사과는 받아주지.” 어차피 다 잊은 일이었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데 문득, 이 녀석은 인간이 아니라 개니까, 혹시 골려주는 걸 더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는 같이 장난치는 걸 좋아하니까. “어, 고맙다.” 아무것도 모르는 다니엘은 하하, 작게 웃으면서 이제야 속 시원하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잘 생기긴 했네. 자식. 나는 흡족하게 대형견의 얼굴을 구경했다. “그나저나 어디 가던 중이야? 알렉시스. 나는 아침 달리기하던 중이었는데. 같이 달릴래?” 대형견은 순식간에 훨씬 친근한 태도로 내게 다가와 말했다. “역시 개라서 그런지 인간과의 친화력이 엄청나구나.” 난 감격했다. 아무도 나한테 같이 달려보자고 한 적이 없는데! 벌써부터 거의 절친 수준의 친화력을 보일 줄이야……! 내 눈깔이 무서운지 약간 시선을 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달리기는 됐어. 나 어디 가던 중이었거든. 근데 내가 어딜 가던 중이었더라?” 나는 내 원래 목적지를 까먹은 채로 한참 고민에 잠겼다. 그러자 대형견도 같이 고민을 해주다가 이렇게 말했다. “너 근로장학생이지? 그럼 오늘 토요일이니까 그걸 하러 가던 중이 아니었을까?” “와, 이런 영특한 멍뭉이 같으니.” 나는 다니엘의 추리 능력에 몹시 감탄하면서, 원래 목적지를 떠올리곤 곧바로 쐐애애앵 달려 나갔다. “멍……뭉이……?” 홀로 남은 다니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집합 장소인 남쪽 온실로 달려간 나는, 사방팔방으로 광채를 발현하고 있는 3번의 고귀한 모습을 발견했다. “오오, 카일님!” 그 금욕적인 외모를 보자마자 호흡이 가빠지고 열이 오른 나는 광분해서 마구 달려갔다. 금욕미남은 헐레벌떡 뛰어오는 날 보며 친절하게 반겼다. “알렉시스 공자. 좋은 아침이군요. 공자는 오늘도 활기가 넘쳐 보입니다.” “네! 저야 언제나 그렇습니닷! 활기가득 알렉시스! 차렷! 경례!” 금욕미남을 마주하니 나도 모르게 바짝 힘이 들어가 또 경례를 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보약 후유증 덕분에 이마 쪽으로 올라간 내 앞발이 바르르 떨렸다. 한편 금욕미남은 내 모습이 웃긴다는 듯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오오…….” 우리 카일님이 날 보고 웃어주셨어……. 얼굴 생김새는 금욕적이면서도, 눈빛과 미소는 그와 정반대로 저렇게 따뜻하고 부드럽다니……. 그만 눈앞이 해롱해롱해졌다. “공자, 괜찮습니까?” 온몸이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날 보고 금욕미남이 걱정스레 물었다. “물론이죠. 멀쩡해요.” 나는 얼른 정신을 부여잡고는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금욕미남은 내 머리에 꽂혀있는 꽃 한 송이를 힐끔 쳐다봤다가, 곧 슬쩍 시선을 떼고는 말했다. “이들은 정원사 어스아이들입니다. 인사하시죠.” “정원사? 그런 게 있었어요?” 나는 눈부신 금욕미남을 보느라고 그 옆에 있는 줄도 몰랐던 어스아이들 무리에게로 뒤늦게 눈길을 돌렸다. 어느새 나를 둘러싼 어스아이들이 맑고 밝은 목소리로 동시에 외쳤다. “안녕하세요, 도른 공자님! 저희는 아스테시아의 정원을 담당하고 있는 정원사들이랍니다!” “도른이 아니고 도렌.” 내가 이름을 정정했으나 항상 그렇듯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러자 금욕미남이 설명했다. “근로 장학은 어려울 건 없습니다. 그저 이 어스아이들이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됩니다.” “넵.”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어스아이들이 학교에 보고를 하게 되니까 주의하시고요.” “알겠습니다! 차렷! 경례!” 내가 또 한 번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을 바싹 주고 경례를 했다. 금욕미남이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나는 그 미소를 보자마자 그만 몹시 흥분했다. 근로 장학을 하는 주말마다 금욕미남과 이렇게 정원에서 만나 알콩달콩 시간을 보낼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도무지 가만있을 수가 없어 몸을 꽈배기처럼 막 배배 꼬았다. 금욕미남은 그런 내 꼴을 보고도 모르는 체했다. 14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자자! 시작합니다! 그럼, 카일 공자님은 텃밭에서 채소 수확을 도와주세요!” 어스아이들 중 절반이 카일의 앞으로 가서 입을 모아 외쳤다. “알렉시스 공자님은 온실에 있는 약초밭에 물을 주세요!” 어스아이들의 나머지 절반은 내 앞으로 와서 입을 모아 외쳤다. “앗, 안 돼! 나도 텃밭에서 채소 수확할래!” 나는 금욕미남과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소리쳤다. 금욕미남이랑 알콩달콩 남몰래 이런저런 비밀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한단 말이야! 그러자 어스아이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다시 날 보고 외쳤다. “그러면 두 분이 역할을 바꿔주세요!” “뭣?” “카일 공자님은 온실 약초에 물을 주시고! 알렉시스 공자님은 텃밭에서 채소 수확을 도와주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뭐해요! 얼른! 빨리 움직이세요! 이 노예들… 아니 공자님들아!” “…….” 음? 방금 노예라는 단어를 들은 것 같은데. 어스아이들은 내가 뭐라 항의할 겨를도 없이 마구 우리의 등을 떠밀었다. 금욕미남은 그런 어스아이들이 귀엽다는 듯 눈웃음을 지으면서 나를 향해 말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알렉시스 공자.” “아. 네……. 차렷! 경례!” 내 경례를 제대로 보기도 전에 금욕미남은 절반의 어스아이들 사이에 묻혀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숭고한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불쑥 금욕미남이 자리에 멈추더니, 생각났다는 듯이 나를 향해 돌아보며 덧붙였다. “아 참. 그날, 결투에서 말입니다.” “……음?” “제라드 공자를 이겨줘서 아주 속이 시원하더군요. 덕분에 그날 밤 편안하게 잘 잤습니다. 고맙습니다.” 헛…….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어디서 태양이라도 폭발했나……? 왜 이렇게 갑자기 온 세상이 훤하게 밝아지는 거지……? 자세히 보니, 금욕미남이 전에 없이 광채를 뿜으면서 나를 향해 활짝 웃어주고 있었다. 오오오……. 찬란한 빛이여……. 나는 금욕미남의 환한 미소 앞에 그만 너무 황홀하고 눈이 부셔서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뭐…… 뭘요……. 앞으로도 결투 많이 할게요……. 카일님이 원하신다면…….” “하하하. 역시 공자는 재밌는 분이로군요.” 금욕미남은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닌데…… 농담이 아닌데……! 진담인데……! 아아아……! 그의 메아리치는 웃음소리와 눈부신 형체 때문에 난 뭐라고 입도 벙긋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몽롱해졌다. 금욕미남은 다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 보이고는 멀어졌다. 한참 뒤에야 내가 간신히 두 눈을 뜨고 보니, 이미 카일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 난 무조건 금욕미남이다! 이번 판은 올인이야!” 다시 한번 굳게 결심했다. 그러나 그 결심을 재차 다질 사이도 없이, 나머지 어스아이들이 서둘러 내 등을 떠밀었다. “자, 자! 어서 가요! 이 노ㅇ…… 도른 공자님! 빨리! 얼른 움직이라구요!” 나는 우르르 어스아이들에 휩싸여 온실 밖으로 떠밀려 갔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너른 텃밭 한복판에서 노예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 “후우. 절4 멤버랑 엮이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쉼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온몸 여기저기가 벌써부터 욱신거렸다. 보약을 잘못 먹는 바람에 눈빛이 맛이 가서 취직이라곤 못 해본 나로서는 갑작스러운 건강한 노동이 낯설기만 했다. “카일님과 엮이는 거야 좋지만…… 그래도 근로 장학 분야를 잘못 선택한 건 아닐까? 차라리 그냥 약초학 교수 조교나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나는 급기야 내 존재의 의의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지고 말았다. “정말 내가 이 세상의 여주라는 게 맞긴 한 걸까? 절4를 거느리며 역하렘을 차려야 마땅한 이 시기에 왜 이렇게 허리가 뻐근한 거냐고……?” 잠깐이나마 허리를 펴고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경치를 보려고 하는데, 어스아이들이 곧바로 날 다그쳤다. “뭐해요! 이래서 언제 끝낼 거예요! 정신 차리지 못할까? 하악!” 어스아이들이 난데없이 울버린같이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는, 마구 공중에 휘둘렀다. “아, 알았어.” 나는 겁에 질렸다. 세상에서 어스아이가 제일 무서웠다. *** 식도락 클럽 회원들이 각자 음식을 가져와서 나눠 먹는 날이 돌아왔다. 나는 식도락 클럽의 충실한 신입 회원으로서 아침부터 일어나자마자 기숙관 꼭대기 층에 있는 요리실로 직행했다. 아스테시아 기숙관는 대부분 건물 안에 작은 요리실을 갖추고 있었다. “떡볶이를 만들어야 하는데. 재료가 없는 판에 이걸 어떻게 만든다?” 나는 일단 요리실에 비치된 식자재부터 뒤져보았다. “흠……. 모양은 이게 떡이랑 제일 비슷한데?” 나는 난생처음 보는 하얀 뿌리 식물을 들어 올렸다. “좋아. 이걸로 만들자.” 나는 더는 고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떡으로 대체하기로 결정했다. 그 하얀 뿌리 식물을 칼로 반으로 가르자 희한한 악취가 났다. “음, 끓이면 괜찮겠지.” 마치 마녀들이 쓰던 것만 같은 둥그런 검은 가마솥이 보이길래, 물을 붓고 화덕 위에 올렸다. 그리고 하얀 식물 뿌리를 집어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냄새가 점점 더 고약해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잡내를 없애기 위해서 빨리 양념을 만들어야겠어. 고추장을 대체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나는 또 요리실에 있는 재료를 빨리 뒤졌다. 고추장처럼 빨간색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오! 이런 게 있었구만. 아주 훌륭하군. 색깔이 고추장이랑 똑같아. 맛도 비슷하겠지?” 나는 정체불명의 빨간색 젤리를 발견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얼른 가마솥 안에 퐁당 집어넣었다. 빨간 젤리가 뜨거운 물에 녹았으나, 물이 빨간색이 되는 게 아니라 묘한 형광 핑크색이 되었다. “색깔이 좀 이상하네.” 분홍색 구름이 구리구리하게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묘한 냄새와 향을 피우고 있는 가마솥을 나무 국자로 젓고 있는 사이, 요리실 문이 달칵 열렸다. 어떤 공자가 들어오려다 방 안의 광경을 보더니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탁, 얼른 도로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음. 보기엔 좀 그래도 뭐. 맛만 있으면 되겠지.” 나는 떡볶이의 묘한 색깔에도 개의치 않고, 몇 가지 재료를 되는대로 더 집어넣었다. 이윽고 완성된 가마솥 속 내용물을 마치 뚝배기처럼 생긴 둥그런 사기그릇에 담은 뒤에, 룰루랄라 식도락 클럽으로 향했다. 클럽 안에 들어서자, 일찌감치 와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서양식 감자전을 먹고 있던 너구리와 회원들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세요, 도른 공자.” “들고 계신 것을 보니 직접 요리를 해서 가져오셨나 봐요?” “음……. 특이한…… 냄새가 나네요.” “그러네요. 특이…… 하네요.” 회원들이 다들 한마디씩 했다. “떡볶이라는 음식입니다! 여러분!” 내가 자랑스럽게 외치면서 뚝배기의 뚜껑을 열고, 내가 만든 요리를 회원들의 접시 위에 부어주었다. 괴상하게 생긴 하얀 뿌리 식물과 분홍색 소스가 모두의 접시 위에 흥건했다. “으음…….” 딱히 가리는 음식이 없던 너구리가 처음으로 고뇌하며 요리를 내려다보았다. “먹어보세요!” 내가 강요했다. 너구리와 회원들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마침내 회장인 너구리가 가장 먼저 크게 용기를 냈다. 달그락. 포크가 움직이고 내가 만든 떡볶이가 너구리의 입속으로 쑥 들어갔다. 그걸 보고 다른 회원들도 용기를 내서 정체불명의 요리를 입속에 집어넣었다. “퉤!” “퉤!” “퉤!” “퉤!” 연달아 퉤퉤퉤퉤 뻥튀기 튀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차더니, 다들 동시에 포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 “…….” “…….” 한참이나 그 누구도 말이 없었다. 그저 숨 막히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알렉시스 공자는.” 마침내 정신을 되찾은 너구리가 모두를 대표해서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요리는 안 만들어와도 됩니다.” “왜요? 맛이 없어요? 이상하네? 책에서 보니까 요리를 만들어주면 다들 좋아하던데? 더군다나 대한민국의 국민 음식인 떡볶이가 맛이 없을 리가 없는데?” 나는 얼른 포크로 떡볶이를 찍어 입속으로 쑥 집어넣었다. “퉤!”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방 안에 뻥튀기가 튀겨졌다. 나는 조용히 그릇에 남은 떡볶이를 창문 밖으로 버려버렸다. 회원들은 이때다 싶었는지 각자 자신들이 가져온 음식들을 주섬주섬 탁자 위에 펼쳤다. 양도 어마어마해서 금세 태백산맥이 만들어졌다. 내 떡볶이와 달리, 맛있는 냄새와 비주얼이 기가 막혔다. “맛있군요.” “맛있네요.” “맛있습니다.” 회원들은 마치 내 떡볶이로 배린 입맛을 어서 되찾고 싶다는 듯, 재빨리 맛있는 요리를 흡입했다. 물론 내가 가장 많이 먹었다. “아까 그 떡볶이란 음식을 먹고 나니까 솔직히 이젠 세상의 그 어떤 괴식이라도 전부 맛있을 것 같아요.” 회원 중 하나가 말했다. “맞아요.” “동감이에요.”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죽어도 잊지 못할 그런 맛이었어요. 지옥의 괴물들이 먹다 뱉은 이끼도 그보다는 맛있을 거야.” 나의 예상보다 훨씬 신랄한 비평이 오가는 식도락 클럽이었다. 그러나 비평도 잠시, 다시 음식 섭취에 몰두한 클럽 회원들은 말조차 할 겨를이 없어서 잠잠해졌다. 그저 한참이나 먹는 소리만이 방 안에 가득 찼다. 잠시 후 갑자기 클럽의 방문이 열리고 문가에서 누군가 물었다. “여기 아직도 가입 받나?” 먹성 좋은 나와 다른 회원들은 먹기 바빠 고개도 들지 않았다. 오로지 회장인 너구리만이 의무적으로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들어오세요.” “다행이군. 한 번쯤 가입해보고 싶은 클럽이었는데.” 음? 이상하다? 목소리가 익숙한데?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접시에 고개를 박고 입안에서 살살 녹는 오리구이를 냠냠거리고 있어서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15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여기 앉으세요. 마침 요리를 나눠 먹고 있었으니까.” 너구리가 친절하게 말했다. “아, 바로 가입된 건가?” “그럼요. 클럽 명부에는 제가 지금 이름을 올리죠.” 너구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벽에 붙은 클럽 명부 위에다 사사삭 깃펜으로 이름을 적었다. 새로 온 공자가 자기 이름도 말하지 않았는데 너구리가 바로 명부를 작성하는 걸 보니, 이름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사이에 새로운 회원이 비어있던 내 옆자리로 와서 앉았다. 접시에 코를 박고 오리고기를 냠냠거리는 나를 상대가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지만, 나는 흡입을 멈출 수가 없었다. “참 잘도 먹는군.” 새로운 회원이 날 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너구리가 자리에 앉은 뒤 새로운 회원에게 친절히 권했다. “공자도 드셔보세요. 우리 클럽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이렇게 각자 음식을 가지고 와서 나눠 먹는답니다.” 그런데 새로운 회원은 별로 음식에는 생각이 없는 듯 완곡히 거절했다. “먹고 싶기는 한데, 내가 아직까지는 겸상을 못 해서.” 알쏭달쏭한 신입 회원의 말에도, 나를 비롯한 다른 회원들은 먹느라 바빠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안타깝군요. 다른 사람들과 겸상을 못 하면 우리 식도락 클럽 활동이 좀 어려울 수 있는데.” 토실토실 너구리만이 영혼 없이 대답했다. 너구리는 벌써 열심히 요리를 입에 집어넣느라 바쁜 상태였다. “그나저나 저번 일은 사과하겠다.” 신입 회원이 너구리를 향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음? 저번 일이라면?” 너구리는 손에 든 요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대꾸했다. “만찬장에서 카일 녀석한테 거지새끼라고 하면서 근로장학생인 너까지 얼결에 모욕한 것 같아 미안하군. 내 의도는 아니었다.” 푸헙! 나는 먹던 오리고기를 그만 사방으로 입에서 튀기고 말았다. 쿨럭거리고 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들어보니, 퇴폐미남이 그런 날 보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저런. 사레가 들렸나 보지?” 쿨럭! 쿨럭! “그나저나 내 사과는 받아줄 건가?” 퇴폐미남이 너구리를 향해 돌아보며 확인했다. “네.” 너구리가 요리를 씹어 삼킨 뒤 무덤덤한 얼굴로 퇴폐미남을 봤다. “사실 저한테 사과할 필요까진 없었는데, 아무튼 하셨으니 받지요.” “고맙군.” 둘 다 그렇게 깔끔하게 말하면서 상황이 마무리됐다. 너구리는 다시 우물거리며 요리를 섭취하기 시작했다. “와 너구리 공자, 정말 쉬운 사람이었네. 가입도 잘 받아주고, 사과도 잘 받아주고. 그날 싸바 때문에 기분 안 나빴어요?” 내가 허탈한 얼굴로 물었다. “거지새끼라고 한 것뿐인데요, 뭘. 나한테 직접 한 말도 아니고, 카일 공자와 싸우다 그런 거고……. 그리고 거지새끼는 괜찮아요.” 너구리가 냠냠거리며 덧붙였다. “그보다 난 돼지 새끼라고 하면 기분이 나쁘더라구요.” 뜻밖의 추가 설명에 나는 그만 말문이 꽉 막혔다. 거지는 괜찮은데 돼지는 싫다? “어? 방금…… 어디서 돼지 새끼라는 말이 들리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고개를 처박고 먹기만 하던 회원들이 갑자기 일제히 낯짝을 치켜들었다. “맞아. 나도 들었어요.” “틀림없이 돼지 새끼라고 했어.” “누가 그런 심한 욕을 했어요?” “정말 너무하네!” 토실토실한 회원들이 먹는 것도 멈추고 분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너구리가 해명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만, 약, 에, 누가 돼지 새끼라고 하면 기분이 나쁘다고 말했을 뿐이에요.” 너구리의 말을 듣자 회원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순서대로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기분 나쁘지.” “최악이에요.” “차라리 피글렛이라고 불러줘요.” “그건 귀엽네.” 다들 그렇게 또 한마디씩 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요리를 먹었다. “뭐야 이 대동단결 식도락 클럽은.” 내가 황당해서 중얼댔지만 아무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누가 돼지 새끼라고 부르지만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세상사를 등지고 초연하게 그저 열심히 먹기만 하는 너구리와 회원들……. 참 초현실적이었다. 마치…… 무릉도원의 신선들 같다고나 할까? 이 자리에 앉아있으려니 마치 내가 지극히 정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옆을 봤더니 퇴폐미남이 혼자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 혹시 이 세계. 나만 정상인 건 아닐까? *** 나는 식도락 회원들이 음식을 흡입하는 사이에 몰래 요리 몇 가지를 따로 꿍쳤다. 모임이 끝나고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퇴폐미남을 따돌렸다. 그리고 옆 클럽의 문을 벌컥 열었다. “병약미남! 나 왔어!” 2번을 반갑게 부르자, 소파에 앉아 홀로 책을 읽고 있던 병약미남이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가.” “음?” “나가라고.” “왜? 맛있는 거 가져왔는데. 병약하면 음식이라도 잘 먹어야 해.” 나는 마치 병문안이라도 온 사람처럼 달려갔다. 보란 듯이 피터의 앞에다 식도락 클럽에서 꿍쳐온 음식을 짜잔! 하고 펼쳤다. “…….” 후각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는 물론, 윤기가 좔좔 흐르는 요리를 보자 병약미남의 얼굴에 금이 갔다. “먹고 싶지? 맛있겠지?” 나는 꼬리가 9개 달린 구미호처럼 유혹하며 병약미남의 손에 포크를 쥐여 주었다. 병약미남은 차마 그것을 거절하지 못했다. “지난번에 결투에서 내 앞발이 다쳤을 때 네가 친절하게 연고 갖다줬잖아. 그 보답이니깐 부담 갖지 말고 실컷 먹어.” “정말 보답일 뿐인가?” “그럼 물론이지.” “나한테 잘 보여서 우리 클럽에 가입하려는 꿍꿍이는 아니고?” “당연히 그… 아냐!” “…….” “…….” 병약미남은 제 앞에 펼쳐진 음식을 포크로 찍었다. “네가 아무리 아부를 떨어도 우리 퀴즈 클럽은 네 가입을 거절할 거야. 보나 마나 평지풍파를 일으킬 게 뻔하니.” 그렇게 말하면서, 냠냠, 병약미남이 계속해서 음식을 목구멍으로 주워 넘겼다. 당장이라도 바람에 날아갈 것만 같은 하얗고 하늘하늘한 초미남이 연약한 손으로 포크를 꼭 쥐고, 그 가련한 입술 사이로 음식을 집어넣고 있는 모습이라니……. 홀린 듯이 바라보던 내 입가에 절로 배시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피터 네가 우리 식도락 클럽에 들어오지 않을래?” 나는 병약미남이 무언가를 먹는 모습을 매일같이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적극적으로 가입을 권유했다. “맛있는 요리도 해 먹고, 레시피 공유도 하고, 서로 맛집 소개도 하고……. 방학 때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맛집 탐방도 한다던데? 어때?” “그 맛집 탐방에는 너도 참가하겠지?” “당연하지. 그런 재밌는 일에 내가 빠지면 섭섭하지.” “그럼 난 싫어.” “…….” 병약미남은 냉정한 얼굴로 칼같이 내 제안을 잘라버리고는 음식을 계속해서 비웠다. 잠시 후 배가 불렀는지, 병약미남이 포크를 내려놓더니 말했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고 말다니. 잠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내가 아주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군. 실성한 사람한테서는 이런 걸 받는 게 아닌데…….” “실성한 사람? 누구? 누가 실성을 했는데?” 나는 무척 궁금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여긴 우리 둘밖에 없었다. “…….” “…….” “후. 모르면 됐다.” 피터는 단안경을 빼서 가볍게 손수건으로 닦고는 다시 제대로 끼웠다. “음식은 잘 먹었어. 용건이 끝났으면 이제 나가줘.” “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할 수 없지.” 나는 깔끔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에 또 올게.” “아니, 오지 마.” 병약미남이 거절했다. “에이, 겉으로만 그러는 거 다 알아. 속은 내심 내가 와주길 바라면서.” “또 무슨 헛소리야?” 병약미남이 신경질을 냈다. 하여간 녀석도 참. 신경이 너무 예민하단 말이야. “아무튼 담에 또 올게.” “오지 말라고.” “맛있는 거 잔뜩 가져올게.” “…….” 뜻밖에도 피터는 ‘맛있는 거 잔뜩’이라는 말에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었다. 후후. 역시 먹을 것 앞에서는 절4도 어쩔 수 없구나. 나는 병약미남에게 밥을 먹여서 오늘 하루를 아주 뿌듯하게 보낸 것 같아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힘차게 뚜벅뚜벅 문으로 걸어가서 클럽을 나가려고 막 손잡이를 돌리려는데, “야.” 병약미남이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엇……? 왜?” 나는 얼굴이 화색이 되어서 얼른 돌아보았다. “드디어 날 퀴즈 클럽에 받아주려고 마음을 바꾸었구나?” “아니, 그게 아니고.” 피터가 단호히 부인했다. “지난 일주일 사이에 황궁에서 황자 둘이 더 죽었어. 공식 발표는 없지만 우리 가문에서 보내준 정보니까 확실해.” “음?” 뜬금없는 병약미남의 말에, 나는 멍한 표정으로 두 눈만 깜박였다. 여기서 황자들이 왜 나와? 그 정보 자체를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병약미남이 비록 우리 제국과 아무 상관 없는 소국의 유학생이긴 해도, 그의 가문은 오랫동안 대륙을 누비며 거대한 정보 길드를 운영하고 있었다. “못 들었나? 황자 둘이 더 죽었다고. 이제 남은 황자는 둘, 그리고 궐 밖으로 도망간 황녀 하나뿐이라는 이야기다. 황제가 승하하면 그중에서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겠지.” “그래서?”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응하자, 오히려 피터가 어리둥절해했다. “네가 알고 싶어 할 것 같았는데. 아닌가?” “…….” “…….” 병약미남의 말을 되새겨본 나는 잠시 후에 이렇게 물었다. “왜 그걸 내가 알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지?” 병약미남은 표정을 굳혔다. 그리곤 왠지 변명거리라도 궁리하는 것처럼, 눈알을 굴리면서 대충 말을 뱉었다. “그야…… 너도…… 제국 출신이니까?” “뭐, 그건 그렇지만.” 그러나 제국의 백성이라고 해서 전부 황실 동향에 관심 있으리라는 것은 착각이다. 16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걔네들이 죽은 게 뭘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라고. 맨날 벌어지는 일인데. 나랑 별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 황위 다툼은 원작에서도 계속됐던 일.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한 2황자와, 그나마 좀 낫지만 냉혈한 성격의 5황자 둘만 남고, 원래 다 죽게 되어 있었다. “…….” 피터는 입을 다문 채로 내게 시선을 빤히 고정했다. 단안경 너머로 보이는 병약미남의 눈빛은 마치 수수께끼 퀴즈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거참 누가 퀴즈 클럽 회장 아니랄까 봐……. 병약미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관심 없으면 말고.” 마침내 병약미남이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다시 방을 나가려고 뒤돌았다. “그런데 남들 앞에선 조심해라. 황족들한테 아무렇지 않게 ‘걔네들’이라고 하는 건.” 피터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충고했다. “음. 빠이!” 난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작별 인사로 하트와 윙크를 날려줬지만, 병약미남은 더 이상 쳐다보지 않았다. 퀴즈 클럽을 나온 후,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정원을 가로지를 때쯤에야 왠지 이상한 점을 한 가지 깨달았다. “그런데 내가 제국 출신이라는 건 병약미남이 어떻게 알았지……? 나도 걔처럼 유학생 출신일 수도 있는데 말이야!” 피터 같은 유학생은 아스테시아에서 채 10명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탁! 치며 외쳤다. “역시 2번이 내 뒷조사를 한 모양이군.” 흐뭇해진 내가 근처에 떨어진 꽃 한 송이를 주워서 머리에 꽂았다. 지난번에 꽂은 건 시들어서. “몰래 내 뒷조사를 할 정도로 날 사모할 줄이야! 이렇게 나 때문에 타락하는 영혼이 늘어가는구나? 참으로 불쌍한지고…….” 불쌍한지고 라는 말과는 달리, 내 입에선 우렁찬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핫! 하하핳핫핫!” 혼자 허리에 손을 올리고 정원 한복판에 서서 웃고 있자니, 지나가던 어스아이들이 꼬리를 흔들거리면서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서로 소곤거렸다. “혹시, 돌았다고 소문이 자자한 공자님이 저 공자님인가?” “보면 몰라? 저 뒤집힌 눈 좀 봐봐.” “갑자기 혼잣말을 마구 하더니 저렇게 광인처럼 웃기 시작하더라구.” “젊은 나이에 실성을 다 하고 참 안됐다.” “쯧쯧…….” *** 검술 수업에 들어가자 연무장에 학생들이 꽤 많이 모여 있었다. 내가 듣는 <실전 검술> 수업은 학생 수가 스무 명 정도였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어? 다니엘?” 나는 학생들 중에서 뜻밖에도 1번을 발견하고 반가워서 이름을 크게 불렀다. 대형견이 날 보자마자 몸을 움찔했다. “어, 어. 알렉시스!” 대형견은 잠시 놀랐으나 금세 개 특유의 친근함을 되찾았다. 타고난 친화력 덕분인지 요즘은 나를 보고도 멀리 도망가지 않고 잘 다가왔다. 종종 내 눈깔을 제대로 보지 않고 비스듬히 피하기는 했지만. “근데 우리 대형견이 이 시간에 여기 웬일로? 혹시…… 내가 듣는 수업을 따라 들으려고 마음을 고쳐먹기라도 한 거야?” 나는 지레짐작을 하면서 흐뭇한 미소와 함께 윙크를 날렸다.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네가 듣는 수업을 따라 들어?” 대형견은 상상조차 못 해본 일이라는 것처럼 대꾸하면서, 내 윙크를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비스듬히 피한 채 유지했다. “그럼 너 여기 왜 있어?” “수업 시간이니까 있지. 오늘 <실전 검술> 1반과 2반이 합동 수업한다더라. 그게 하필 너희 반인 줄은 몰랐지만.” 나와 어쩔 수 없이 마주치고 말았다는 사실에 왠지 대형견의 목소리에 회한이 가득 차 있었다. “1반과 2반? 합동 수업?” 원래 <실전 검술> 과목은 교수별로 분반이 되어 있었다. 1반에서 4반까지 있었다. “너는 몇 반인데?” 내가 대형견에게 물었다. “2반.” “아, 그럼 난 1반인 모양이네.” 나는 그제야 내가 몇 반인지를 알게 되고는 흡족했다. 아무렇게나 수강 신청을 하다 보니 이제까지 내가 몇 반인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때 마침 꼴 보기도 싫은 4번 퇴폐미남이 연무장 위로 나타났다. 퇴폐미남은 무척 화려한 미남인 관계로, 본래 모든 이의 눈길을 끄는 편이었다. 그래서 다들 그를 힐끔거리고 쳐다보았다. 퇴폐미남을 발견한 1번 대형견조차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알렉시스 너, 설마 제라드 공자랑 같이 수업 듣는 거냐?” “어어. 저 자식이 변태 스토커처럼 내가 듣는 수업을 따라 듣는 거거든.” “제라드가? 에이 그럴 리가 없잖아.” 한 치의 거짓 없는 사실을 내가 말해줬는데도 대형견은 믿지 않았다. 다만 나와 제라드의 수업이 겹친다는 사실에는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또라이 둘이 한 반에 있다니. 조만간 1반은 폭파되겠구나.” 다니엘은 여상한 얼굴로 또 한 번 독설을 읊조렸다. “애꿎은 다른 학생들만 죽어나게 생겼군. 난 조용히 명복이나 빌어야겠다.” 대형견은 그 말만 남기고는, 날 버리고 쫄래쫄래 2반 녀석들이 모인 곳으로 가버렸다. “…….” 가버린 대형견의 뒷모습을 입맛을 다시며 아쉽게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불쑥 누군가 인기척도 없이 다가와서 난 화들짝 놀랐다. “아이씨 깜짝이야!" 대뜸 4번이 퇴폐미로 공격을 하듯이 얼굴을 들이밀며 내게 물었다. “뭐야, 다니엘 공자랑 친한가?” “친하지! 당연히.” 파바박, 태권도 방어 자세가 자동으로 튀어나와서 퇴폐미 공격을 성공적으로 쳐냈다. 적어도 나는 1번이 내게 사과한 뒤로는 무척, 매우, 정말, 아주, 엄청, 오지게 친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대형견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랑 무슨 상관인가. “다니엘 공자는 다른 반이잖아. 우리들의 적이지. 친하게 지내지 마라.” 퇴폐미남이 갑자기 표정 하나 안 바꾸고 헛소리를 씨불여댔다. 나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만 허탈한 실소를 뱉었다. 내가 웃자 녀석이 날 빤히 쳐다봤다. “오늘은 특별히 합동 수업을 할 걸세. 앞으로도 종종 합동 수업을 할 테니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걸세.” 마침내 무림 고수가 나타나서 우리 1반 학생들에게 점잖은 태도로 말했다. 한편, 저쪽에서는 사뭇 다른 투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반드시 무조건 절대로 1반을 이겨야 한다! 알겠나! 제군들!” 콧잔등이 술주정뱅이처럼 빨갛고, 취권을 잘할 것 같이 생긴 2반 교수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2반 교수의 별명을 ‘술주정뱅이’로 정했다. 술주정뱅이가 선동하자 2반 학생들의 눈에 투지가 불타올랐다. 반드시 우리 1반을 이기고야 말겠다는 투지였다. “우리도 질 수 없지!” 나도 갑자기 피가 끓어올라서 앞으로 스프링처럼 튀어 나갔다. “우리 1반이야말로 반드시 무조건 절대로 2반을 짓뭉개버리자! 시체를 밟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자고!” 난데없이 튀어나와서는 무시무시한 말로 선동을 하자, 1반 학생들은 물론 무림 고수까지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저저저저! 저것 봐라! 다들 저놈이 하는 소리 들었지!” 날 보고는 술주정뱅이가 낯짝을 더욱더 새빨갛게 만들더니 사기가 불타올라 목청을 높였다.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가만있을 것인가! 제군들! 저 거지 같은 1반 놈들을 무찌르고 우리 2반이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우리가 반드시 승리하리라!” 참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도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다. 술주정뱅이보다 더한 게 보약 후유증에 시달리는 환자임을 내가 몸소 알려주마. “흥! 2반이 아무리 발광해도 밥 잘 먹는 걸로 따지면 우리가 한 수 위!” 사기가 지나치게 불타오른 나는,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어 아무렇게나 고함을 질렀다. “제아무리 먹성 좋은 놈들이 와도 우리 1반을 이길 수는 없지! 우리 반보다 잘 먹는 반이 있으면 어디 나와보라고 해! 한 명 한 명 골고루 전부 먹보들이니까!” “…….” “…….” 술주정뱅이는 물론이고 무림 고수와 모든 학생들조차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저 또라이가…….” 멀찍이서 1번 대형견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 오로지 퇴폐미남만이 경탄하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박수를 짝, 짝, 짝, 세 번 쳤다. 연무장 위로 복잡미묘한 침묵이 흐른 뒤. “자자, 진정합시다.” 정신을 되찾은 무림 고수가 얼른 나를 다독이며 나섰다. “알렉시스 공자, 2반을 이긴다고 무슨 이득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너무 집착할 것 없네. 성적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아, 그래요? 진작 말씀을 하시지.” 성적에 안 들어가면 필요 없다. 새로 알게 된 사실에 얼른 납득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수업은 일단 원점을 되찾았다. 무림 고수와 술주정뱅이가 서로 뭐라 뭐라 귓속말로 잠깐 의견을 교환한 후, 곧 술주정뱅이가 앞으로 나와서 학생들에게 외쳤다. “제군들! 이제 각 반에서 한 명씩 나와서 서로 대련을 할 것이다! 대련 순서는 간단하다! 각 반에서 교수가 지명한 대로 나와라!” 술주정뱅이의 힘찬 목소리가 울려 퍼진 뒤, 이번에는 무림 고수가 앞으로 나와서 조곤조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승자가 더 많은 반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걸세. 그럼 다들 연무장 밖으로 물러나고, 이름을 부르면 앞으로 나오게.” 양 반의 학생들은 투지에 불타는 눈빛으로 연무장 양 끝에 무리를 지어 앉았다. 무림 고수와 술주정뱅이가 각각 자기 반 학생들 중에 한 명씩 이름을 불렀다. 마침내 두 명의 학생이 나와서 맞붙자, 마치 고대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검투사들의 결투에서처럼 열기가 높아져 갔다. 대련이 서너 번 지나자, 대충 무림 고수가 이름을 부르는 순서가 뭔지 감이 왔다. “제일 검술 실력이 약한 학생부터 부르고 있는데?” 내가 말했다. “그런 모양이군. 적어도 우리 반은.” 내 옆에 앉아있던 퇴폐미남이 대꾸했다. 17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그의 말대로, 우리 반만 그랬다. 상대 팀인 2반은 실력 순서대로가 아니라 무작위로 나오고 있었다. “훗, 무림 고수가 학생들의 실력 순서대로 이름을 부른다 이거지? 그렇다면 분명 난 마지막 순서겠네. 우리 반에서 가장 최고 고수는 바로 나니까.” 내가 낮게 웃었다. “방금 내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누가 최고 고수라고?” 퇴폐미남이 은은한 퇴폐미 공격을 유지하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착각도 자유로군, 알렉시스. 교수님은 날 마지막으로 지명할 거야.” “이 자식이? 나한테 결투에서 진 주제에 뭐가 어쩌고 어째? 그나저나 좀 떨어지지 못해? 퇴폐미 공격이나 좀 치워!” 나는 눈을 부릅떴다. “무슨 공격? 태피 공격?” 퇴폐미남은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고 날 바라봤다. “그게 뭐지? 혹시 검술 이름인가?” “연결을 해도 꼭……. 하긴 넌 머리통에 검술밖에 든 게 없지?” 원작 소설에 의하면, 검술 천재 4번은 여주를 소소하게 괴롭히는 거 말고는 모든 신경이 검술에 쏠려있던 캐릭터였다. “불쌍한 녀석.” 내가 진심으로 혀를 찼다. 검술 명가의 외동으로 태어나는 바람에 가주인 아버지한테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길 정도로 굴림을 당해버린 퇴폐미남. 하필 포션을 먹은 덕분에 회복도 빨라서, 매우 고통스럽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만들어놓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식으로 하도 세뇌를 당해서 결국 4번의 머리통에는 검술밖에는 든 게 없었다. “하여간 인생의 다른 즐거움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니까. 그러니까 심심풀이로 여주나 괴롭힌 거 아니겠어?” 내가 독백을 열심히 날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남들이 알아듣게 말하는 법은 전혀 몰라?” “몰라.” 퉁명스러운 내 반응에, 퇴폐미남도 더는 말이 없었다. 우리는 잠시 다른 학생들의 대련을 조용히 구경했다. 두 반의 대결은 팽팽했다. 누군가 우리 반에서 이겼다 싶으면 다음번에는 2반이 이겨가며, 승점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여섯 번의 대결이 지났다. “다니엘 공자! 앞으로!” 갑자기 술주정뱅이가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나는 대형견을 호출하는 소리에 그만 귀가 번쩍 뜨였다. “누가 내 대형견을 불러? 개 주인은 난데?” 내가 개소리를 하거나 말거나 아무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상대 진영에서 다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연무장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우리 반의 어느 이름 모를 학생과 마주 섰다. 나의 소중한 반려동물이 대련을 한다는 사실에 나는 또다시 피가 끓어올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니엘! 이겨라! 이겨라!!! 우리 강아지 화이팅!” “시발……. 누가 너네 강아지야?” 다니엘은 졸지에 자신을 개새끼로 만들어버린 내 응원에, 얼굴이 빨개져서는 날 보고 욕을 했다. 그러자 우리 반 학생들이 와르르 웃었다. “방금 그거. 일부러 다니엘 공자 엿 먹이려고 그런 건가?” 퇴폐미남이 헷갈린다는 듯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닌데?” 나는 대형견을 개새끼라고 놀리려는 게 아니라 진짜 응원해주려고 한 거였기 때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응원을 마무리했다. “꼭 이기자고! 힘내! 화이팅! 내 하트도 받아랏!” 나는 연신 윙크를 한 다음, 두 손으로 하트까지 날려서 보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았다. 뜬금없는 내 사랑 고백에 모두가 조용할 뿐만 아니라, 하트를 받은 다니엘은 연무장 위에서 그대로 석상이 되어 있었다. “하아…….” 다니엘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꿈에 나올까 무섭다…….” 홀로 그렇게 중얼거린 대형견은 애써 내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하면서 대련 상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흠흠. 대련 시작!” 술주정뱅이가 손을 들었다 내리며 대련 시작을 알렸다. 챙! 챙! 챙! 연무장 위에서 칼날 부딪히는 소리가 마구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손에 땀을 쥐고 열심히 다니엘의 대련을 구경했다. 대형견의 검술 실력은 무척 훌륭했다. 그의 아버지인 펠트 자작은 다름 아닌 황궁 기사단장이었고, 다니엘도 나름 어린 시절부터 성실하게 아버지 밑에서 검을 배워왔다. 다니엘의 장래 희망도 바로 기사였다. 비록 제라드 같은 검술 천재는 아니어도, 수재 정도는 충분히 되어 보였다. 성실하기까지 해서 검술에서만큼은 언제나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1번이기도 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마치 교과서를 보고 익힌 것 같은 정석적인 느낌이 난다는 점이었지만, 그것도 큰 문제 같진 않았다. “아아, 대견하다, 우리 멍뭉이. 저 정도면 어딜 가도 꿇리지는 않겠어.” 내가 흐뭇하게 대형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와는 다른 의견을 가진 퇴폐미남은 미간을 찡그리며 독설을 내뱉었다. “황궁 기사단장이 자식은 잘못 가르쳤군. 검이 아깝다.” 다니엘의 검술은 퇴폐미남과 달리 비교적 안전한 귀족 스타일이었기에, 죽을 위기 넘겨가며 검을 잡아 왔던 퇴폐미남이 그걸 마음에 들어 할 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4번을 째려보면서 곧바로 쏘아붙였다. “감히 개 주인을 앞에 두고 개한테 욕을 하다니 네놈이 미쳤구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곰곰이 생각하던 퇴폐미남이 이렇게 반문했다. “그러니까 네가 개 주인이라는 건가?” “그래! 내가 개 주인이다!” “다니엘 공자는 개고?” “그래! 다니엘 공자는 개다!” “…….” 갑자기 대련을 하던 연무장 위쪽에서 챙! 챙! 거리던 소리가 뚝 멈췄다. 자기더러 개라고 하는 우렁찬 내 목소리 때문에, 다니엘이 떨떠름한 얼굴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한편 난 퇴폐미남을 쏘아보며 빠른 말투로 할 말을 와다다 뱉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 각자 다른 재능을 갖고 태어나는 거야. 한 분야에서 너보다 좀 못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깔보지 말란 말이야, 이 싸바야!” “사람이 아니라 개라며? 다니엘 공자는.” “사람이든 개든!” “…….” 자길 또 개라고 하자 연무장 위에서는 다니엘의 표정이 더욱 썩어갔다. 대형견이 알아서 전의를 상실해버리면서 절로 검을 든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다니엘과 싸우던 학생이 칼로 다니엘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원래 실력이라면 분명 다니엘이 압승했을 경기였는데, 그렇게 승부가 결정 났다. “1반 학생 승리!” 우리 반 학생이 대형견을 이겨버려서, 나는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수업 시작 전에 반드시 2반을 뭉개버리고 시체를 넘자며 무시무시하게 학생들을 선동하던 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져도 괜찮아! 잘했다! 대견한 우리 강……! 아니 대형 멍뭉이!” 나는 다시 윙크를 하고 하트를 두 번째로 날려주었다. 강아지라는 말은 1번이 왠지 싫어하는 것 같아서 대형 멍뭉이라고 정확히 말해주기까지 했다. “하긴 대형견인데 자꾸 강아지라고 하면 사이즈도 작은 것 같고 기분이 좀 그렇지……? 사이즈는 중요하니까! 우리 다니엘이 그렇게 작은 건 아니니까.” 내 힘찬 독백을 듣고서 다니엘은 완전히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한참이나 왠지 모르게 연무장 위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여기저기서 ‘사이즈……’ 라고 학생들이 읊조렸다. “모르겠다. 아 이젠 나도 몰라…….” 대형견은 홀로 세상의 쓴맛을 다 본 듯한 얼굴로 중얼대며 탄식을 했다. 더 이상 날 쳐다보거나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괴롭다는 듯이 제자리로 도망치듯 돌아가 버렸다. 주변의 공자들이 다니엘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그런데 결투에서 져서 위로하는 게 아니라, ‘미친놈이 뱉은 말 따위는 신경 쓰지 말라’면서 위로하는 것이 아닌가? “……?” 나야말로 그런 다른 공자들의 반응에 영문을 몰라 주위만 두리번거렸다. “뭐야, 어떤 미친놈이 우리 대형견한테 망발이라도 뱉은 거야? 누구야?” 내 말에 다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심지어 같은 편인 우리 반 학생들은 물론이고 무림 고수조차도 말이다. 그런데 킥킥거리는 낮은 웃음소리가 나서 옆을 보니까, 퇴폐미남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또 실실 웃고 있었다. 이 자식은 또 왜 이래? 왜 웃어? *** 대형견의 차례도 끝나고 열띤 응원 덕에 에너지가 떨어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대련을 보며 멍을 때리고 있었다. “나랑 내기 하나 할까?” 옆에서 퇴폐미남이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내기?”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어. 내기.” 퇴폐미남이 확언했다. 보약 후유증으로 달달 떨리던 나의 두 앞발이 어느새 뚝 동작을 그쳤다. 나는 오만방자하게 대꾸했다. “내기라면 이 몸이 또 전문가지. 오랜만에 또 인생의 쓴맛을 네놈이 보고 싶은 모양이군? 인생의 맛은 원래 쓰다는 말 혹시 들어봤나?” “금시초문이다.” 퇴폐미남은 그러면서도 도무지 나의 정신세계를 넘보지 못하겠다는 듯이 경탄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아무튼 교수님이 대련 순서에서 마지막으로 부르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지는 사람은 이기는 사람 소원 하나 들어주고.” 퇴폐미남의 제안에, 나는 잠깐 고민하는 척했다. 이번 수업에서 무림 고수는 학생들의 실력 순서대로 대련에 불러내고 있었다. 즉, 마지막에 부르는 학생이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무림 고수가 보기에는 말이다. 물론 그건 다름 아닌, 나겠지. 이상한 건, 퇴폐미남은 왜 결투에서 나한테 져놓고도 무림 고수가 자길 뽑으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할 거야 말 거야? 내기.” 4번이 다시 물었다. “콜.” 나는 빙의한 이후로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진지했다. 그런 내 모습을 퇴폐미남이 재밌다는 듯이 보며 재차 확인했다. “소원 잊지 마라.” “너나 잊지마, 이 싸바야.” 나는 차갑게 쏘아주고 나서 그다음부터 무림 고수의 주둥이만 열심히 쳐다보았다. 18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내기 때문에 지나치게 흥분한 나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 줄도 몰랐다. 정신을 차려보니까 이제 우리 반 학생들 중에 아직 대련을 안 한 사람은 나와 제라드만 남았다. 나는 두 손을 꽉 쥐고 무림 고수의 주둥이를 노려보았다. ‘불러라 제라드.’ 나는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마지막 순서가 나여야 하기 때문에, 그보다 먼저 이름이 불리는 사람은 퇴폐미남이어야 했다. ‘불러라 제라드.’ 두구두구두구. 시상식에서 발표할 때 울리는 북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두구두구두구두구. “알렉시스 공자.” “……?” 나는 어리둥절했다. “나오세요, 알렉시스 공자.” 무림 고수가 내 이름을 먼저 부른 것이었다. 퇴폐미남을 돌아보니 그는 퇴폐미 공격을 감행하면서 내게 씩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겼군. 소원 잊지 마라?” “…….”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머릿속에 떠올리는 말을 그대로 외쳤다. “고수님! 이건 사기예요! 사기라구요!” 전생의 보약 사기 피해자가 절규했다. “……?” 무림 고수는 내 말을 전연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 와중에 모든 사람들이 내가 ‘고수님’이라고 부른 것을 그냥 ‘교수님’을 잘못 말한 걸로 착각하고 넘어가고 있었다. “왜 내가 마지막이 아닌 거죠! 제라드 공자가 나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가요? 결투에서 내가 이긴 걸 보고도 어떻게 그런 결론을?” 나의 항의에 무림 고수가 그제야 내 말을 이해하고는 대답했다. “아, 자네가 실력이 못해서 먼저 뽑은 게 아닐세. 둘 다 비슷한 실력이니, 신입생인 자네를 먼저 뽑은 것뿐이야.” “네?” “이런 친선 대련에서는 원래 상급생을 제일 마지막에 내보내는데……. 몰랐나?” “…….” 나는 그제야 사태를 깨닫고 퇴폐미남을 죽어라고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그걸 알고 날 속였구나. “뭐해? 안 나가나? 네 순서인데,” 여전히 퇴폐미를 흘리면서 얄밉남이 나른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은 퇴폐미보다 얄미움이 더 크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얄밉남인 것이다. “이 얄미운 자식. 오늘의 수모는 내가 반드시 갚아주마.” 나는 대놓고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일단 연무장 위로 나갔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나는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거치대에서 검을 집고 상대방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자 상대인 2반 학생이 갑자기 사색이 되어서는 검을 일부러 바닥에 집어 던지면서 외쳤다. “히이익! 기권!” 아직 시작도 못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후. 평소 같으면 기권을 허락하지 않겠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군.” 술주정뱅이조차 내 희번덕거리는 눈깔을 보더니, 자기 반 학생이 기권한 것은 어쩔 수 없다며 기꺼이 수긍했다. 그렇게 나는 검을 휘두르는 일조차 못 해보고 허망한 승리를 거둔 채 자리로 되돌아왔다. 마지막으로 퇴폐미남이 연무장으로 나가서 상대를 일격에 눌러버리고 자리로 되돌아왔다. “최종적으로 1반에서 10명이 승리, 2반에서 10명이 승리해서 무승부가 되었네.” 무림 고수가 공지했다. 나와 제라드가 이기긴 했지만 반 전체로 따지면 비겼다. “제군들! 무승부가 웬 말이냐! 무승부가! 다음에는 반드시 1반을 이기도록!” 술주정뱅이가 2반 학생들을 무서우면서도 다정한 말투로 다독였다.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무림 고수와 술주정뱅이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나누었다. 술주정뱅이도 평소 학생들한텐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지만, 같은 고수랑 얘기할 때는 참 얌전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다들 해산!” 고수가 마지막으로 외치자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흩어졌다. “대형견! 어딨니? 우리 멍뭉이!” 나는 무리 속에서 얼른 1번을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다니엘은 진작에 눈치를 채고 쏜살같이 도망을 가버렸다. “아아, 이렇게 주인을 버리고 멀리 사라지다니…….” 나는 인류의 가장 친한 반려동물인 개에게조차 버림받은 기분을 느끼면서, 대형견의 떠나가는 뒷모습을 무척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별로 안 친한 것 같은데.” 옆에서 퇴폐미가 절절 흐르는 목소리가 낮게 중얼거렸다. 얼굴은 그렇다 치고 목소리에도 퇴폐미 공격이 실려있을 줄이야. 나는 어쩔 수 없이 촥, 하고 다시금 태권도 방어 자세를 취해야만 했다. “다니엘 공자와 정말 친한 거 맞아?” 얄밉남이 웃으면서 내게 물었다. 그 미소가 몹시 얄미워서 나는 그만 놈의 면상에 대고 태권도 찌르기를 시전할 뻔했다. “친하다니까!” 나는 또다시 우겼다. 그 사이에 1번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져서는 아예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뭐야? 소원이. 그거나 말하고 빨리 꺼져.” 이긴 건 이긴 거니까. 들어보고 결정하겠어. “소원이라면 지금은 생각이 안 나니까 나중에 생각나면 말하도록 하지.” “이 싸바가……. 네가 언제 거지 같은 소원을 빌지 생각하면서 매일같이 불안에 떨란 얘기야? 빨리 말 안 해?” “잘됐네. 매일 같이 생각해라.” “뭐라고?” “매일 같이 내 생각하면서 불안에 떨어보라고, 알렉시스.” 퇴폐미남이 무시무시한 협박을 날리면서 쿡쿡거렸다. “와, 이런 싸가지 바가지를 봤나…….”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초절정 미남의 낯짝을 보고 있으려니 당장 태권도 발차기를 날리고 싶어서 발가락 끝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아직 무림 고수도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대놓고 폭력을 쓰면 곤란했다. “난 평화주의자니까 한 번은 봐준다.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나는 퇴폐미남을 노려보며 경고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제라드는 나른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매일같이 내 생각 많이 하고. 내가 근로장학생들한테 사과 마저 다 하면 겸상도 곧 같이하자고.” 제라드는 그렇게 말하더니 돌아서서 연무장을 떠났다. “……겸상은 개뿔이.” 지금이라도 뛰어가서 태권도 발차기를 날려줄까. 나는 퇴폐미남의 뒤통수를 한참이나 노려보며 고민하다가 그냥 허공에 태권도 발차기를 날렸다. 헛발질이어서 그런가, 내 몸이 균형을 잃고 빙그르르르르 한두 바퀴 돌더니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나는 그 상태로 그냥 연무장 위에 누운 채로 한가로이 명상에 빠졌다. “고작 퇴폐미남 같은 풋내기한테 질 줄이야.” 놈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 것도 어이없는데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있으려니까 싸늘한 한기가 온몸에 느껴지고 있었다. 한때 노숙자가 되어 차가운 길바닥에 누워 자다 저체온증으로 숨이 끊겼던 과거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이세계에서마저 사기를 당하다니…….” *** 퇴폐미남과의 내기 결과 때문에 밤새도록 충격에 빠져있던 나는, 자리를 박차고 분연히 일어나서 결단을 내렸다. “이제부터는 아예 <사기 근절>이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녀야겠다.” 더 기다릴 것도 없이 곧바로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하얀 띠 위에 <사기 근절>이라고 크게 적은 뒤 이마에 두르고 질끈 동여맸다. 그리고 룰루랄라 밖으로 나갔다. “이 정도면 퇴폐미남도 나한테 다시는 사기를 치지 못하겠지?” 나는 혼자서 킬킬거렸다. 머리에 꽃을 달고 다녔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사기 근절>에 집중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광고 효과가 엄청나군. 후후. 역시 내 천재성은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다니까. 이대로 사기 근절 캠페인 광고에 캐스팅돼도 되겠어.” 그렇게 광고 모델을 욕심내며 마침내 약초학 강의실에 도착했다. “뭐야 이 바구니들은?” 강의실에 들어가 보니 각자의 자리 위에 작은 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어쩐지 익숙한 바구니인데…….” 근로 장학으로 채소 수확을 하면서 지긋지긋하게 봤던 바구니 모양과 똑같았다. “무척 불길한 느낌이 들어…….” 내가 바구니를 째려보며 몸서리를 치는 순간, 거북이를 닮은 노년의 약초학 교수가 강의를 시작하자마자 선언했다. “오늘은 직접 숲으로 가서 약초를 채취하는 실습수업을 하겠네. 자! 책은 모두 그 자리에 놔두게. 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가세나.” 거북이 교수가 먼저 앞장서자 학생들도 바구니를 들고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다들 내 이마의 <사기 근절>을 한 번씩 쳐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아…….” 내 입에서 절로 탄식이 나왔다. 주말 동안 온종일 텃밭에서 채소 수확을 했는데 수업 시간에서조차 또 무언가를 수확해야 한다니. 아직도 허리가 뻐근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금세 잊혔다. 왜냐하면. 쏟아지는 눈길 속에 학교를 가로지르며, 올림픽 영웅들이 퍼레이드를 할 때처럼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알지 못하다니……. 채소 바구니 하나씩을 옆구리에 끼고 일렬로 행진하는 광경은 참으로 장관이라는 사실을.” 지나가던 학생들은 물론이고 어스아이들까지도 걸음을 멈추고 우리 바구니 행렬을 쳐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클라이맥스는 바로 <사기 근절>을 이마에 두른 바로 나였다. “앗…… 저 절세 미남은?” 행진 중에 갑자기 어디선가 시선을 휘어잡는 꽃미남이 작은 새장 하나를 들고 지나가고 있는 게 보였다. 실눈 뜨고 얼굴을 자세히 봤더니 2번 피터였다. “병약미남!” 내가 자길 부르자 피터가 멈칫하더니 도망가려고 했다. “어딜 가! 날 만나니까 부끄러워서 그래?” 바람처럼 달려간 내가 확 병약미남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으악! 뭐야? 누구야? 왜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그러시죠?” 병약미남이 정색하고 날 모르는 척하며, 한쪽 손으로 확 내 손을 후려쳐서 떼어 냈다. 그의 다른 손에는 자그마한 새장이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전서구 한 마리가 들어있었다. 노아의 방주에나 나올 것 같은 새하얀 비둘기였다. 역시 정보 길드를 운영하는 가문 자제다운 아이템이었다. 19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피터, 나 몰라? 보약 잘못 먹은 사기 피해자잖아! 내 이마에 이거 안 보여?” 내가 토끼 눈을 뜬 채 말했다. 병약미남은 그제야 내 이마에 둘린 <사기 근절> 머리띠를 물끄러미 봤다. 그때쯤 주위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다른 공자들과 어스아이들은, 대체 왜 내가 그런 걸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참 가지가지 하네…….” 마침내 병약미남이 중얼거리자 나는 칭찬인 줄 알고 얼굴을 활짝 폈다. “그렇지! 가지가지 하지? 채소는 역시 가지가 최고지!” 구구구. 구구구구. 병약미남이 품에 들고 있는 새장 속의 비둘기가 구구구 거리면서 나한테 뭐라고 말을 하려는 것만 같았다. 물론 난 비둘기 말을 알아듣지 못하므로 신경 쓰지 않고, 피터에게 말했다. “보약을 잘못 사 먹으면 노숙자가 되기 때문에 사기 근절 캠페인 중이야! 광고 모델 문의는 언제든지 환영! 모델료는 현금으로!” “…….” 주변 공자들은 뜬금없는 내 캠페인 내용에 일시적으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오오…….” 반면에 주변의 어스아이들만큼은 몹시 흥미로워하며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내 이마에 시선을 고정하며 감탄사를 뱉었다. 나는 그들의 뜨거운 반응을 보자 더욱 흥분이 끓어올랐다. “이 연사 큰 목소리로 외칩니다! 여러분! 노숙자가 되어 차가운 길바닥에서 자다가 낯선 세계로 승천하고 싶지 않으면…… 보약 사기당하지 마세요! 사, 기, 근, 절!” 누가 듣든지 말든지 캠페인을 열렬하게 해버렸다. 병약미남을 비롯한 다른 학생들이 미처 아무 반응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와아아아!” 어스아이들은 내 캠페인 내용을 이해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큰 감화를 받았는지 환호성을 보내주었다. 구구구. 구구구구. 병약미남의 전서구도 나름대로 환호성을 보내주었다. “후후. 감사합니다.” 나는 90도로 허리를 숙여 귀염둥이 여우족과 비둘기에게 인사를 해주었다. 역시 날 이해해주는 건 인간이 아니라 동물들뿐이었다. “그래, 열심히 해라……. 앞으로는 길거리에서 날 봐도 아는 척은 하지 말고.” 정신을 차린 병약미남이 선심 쓰듯 내게 응원의 말을 던졌다. 물론 그의 말 뒷부분은 깡그리 무시하고 ‘열심히 해라’라고 말한 앞부분만 취사선택해서 알아들었다. 병약미남의 응원 앞에 나는 더욱 캠페인을 향한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좋았어! 앞으로도 열심히 할게! 앗. 빨리 가야지.” 광고 효과에 몹시 흡족해하며 나는 이미 거리가 다소 멀어진 약초학 수업 학생들의 뒤를 황급히 쫓아갔다. “병약미남과 헤어지는 건 아쉽지만 어쩌겠어. 아직 수업 시간인걸.” 몇몇의 어스아이들이 지키고 있는 아스테시아 뒷문을 통과하자마자 곧바로 숲길이 나타났다. “이 숲에는 우리가 쉽게 구할 수 있는 흔한 약초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네. 저걸 보게! 이 약초는……” 거북이 교수는 내가 난생처음 보는 풀떼기 앞에 서서 효능과 채취 방법 등을 설명했다. 그런 과정이 우리가 숲길을 지나는 동안 여러 번 반복되었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뒤만 따라다니다가, 신입생들이 어딘가에서 다들 멈추길래 나도 덩달아 따라서 멈추었다. “엄청나게 큰 나무네!” “장난 아니다!” “이런 크기는 처음 봐!” 신입생들이 일제히 감탄하길래 나도 고개를 들었다. “오호라. 삼천궁녀가 강강술래를 해도 될 듯한 두께를 가진 고목이로군. 높이는 63빌딩 수준은 되겠어.” 나 역시 감탄을 금치 못한 채 나무를 올려다봤다. 솔직히 너무 높아 꼭대기가 보이지 않았다. 순진한 신입생들과는 달리, 이미 이 나무에 대해 알고 있을 상급생들은 딱히 관심이 없는 얼굴들이었다. “이 나무는 이 숲의 터줏대감으로, 노스브리치라는 이름까지 갖고 있다네. 정확히 언제 심어졌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이 나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5천 년 전이지.” 거북이 교수가 신입생들에게 설명했다. 기록이 그렇다는 이야기는 나무의 나이가 아무리 적어도 5천 년은 넘었다는 얘기였다. “5천 년……? 에이, 설마. 5백 년이겠죠.” 나는 거북이의 말을 믿지 않고 뜬금없이 딴지를 걸며 덧붙였다. “5백 년이면 조선 시대지만 5천 년이면 선사시대라구요!” “…….” 거북이 교수는 선사시대는 그렇다 치고 ‘조선 시대’를 특히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히 날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네만, 5천 년이 넘은 것은 확실하네. 고대서에 기록되어 있는 나무거든.” 내가 뭐라고 또 대꾸를 하려는 찰나, 거북이 교수는 내게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잽싸게 학생들을 향해 외쳤다. “그럼 각자 흩어져서 약초를 채취해보세. 숲속 깊은 곳으로는 가지 말고! 특히 결계인 하얀 울타리 너머로는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되네. 마물이 나와 위험하니까.” “네!” 아스테시아 숲속 깊은 중심부에는 마물들이 살고 있었지만, 결계가 쳐져 있어 마물들이 중심부 밖으로 나올 일은 없었다. 우리가 스스로 결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에야 안전했다. “무분별하게 채취해서 약초들의 씨를 말리지 말게! 반드시 약초 한 종류당 1개씩만 채취하도록 하게나.” “네!” “가장 많은 종류를 채취하는 사람에게는 가산점을 주겠네. 그럼 세 시간 뒤에 이 나무 아래 모이기로 하세.” 바구니 하나씩을 옆구리에 낀 학생들이 여기저기로 약초를 찾아 흩어졌다. 거북이 교수는 마치 나들이라도 하러 나온 사람처럼 느긋하게 걸음을 떼며 산책을 시작했다. “…….” 나만 멀뚱멀뚱 남은 자리에 서 있었다. 언제나 약초학 수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어서 약초의 종류를 아무것도 몰랐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빈둥거리다가 마지막에 아무 잡초나 뜯어서 넣자.” 그렇게 결정을 내리자마자, 저쪽에서 산책을 하던 거북이 교수가 계속 내 쪽을 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너는 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러고 있느냐’는 의문이 담긴 시선. “…….” 제 발이 저린 나는 일단 거북이의 눈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내 머리통 위로 낙엽 하나가 살포시 떨어져 내렸다. 나는 위를 올려다봤다. “딱 좋다. 이 나무 위.” 올라가서 세 시간만 자고 내려와야지. “타잔처럼 자유를 만끽하는 거야.” 일단 거북이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이 노스브리치라고 이름 붙여진 거대한 나무를 빙 돌아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하도 나무가 커서 거북이의 시야에 마침내 내 몸이 완전히 가렸다. 위로 올라갈 땐 걸리적거리니까 들고 있던 바구니는 대충 나무 틈 사이에 안 보이게 숨겼다. “지난 생에서는 한 번도 나무를 타본 일이 없는데……. 지금은 다람쥐처럼 날쌔게 잘 탈 수 있을 것만 같은 본능적인 기분이 드네?” 빙의자라 그런가, 종종 이런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는 항상 성공했다. 난 주인공이니까. “오오오오오오!” 아니나 다를까, 내 몸이 알아서 자동으로 날렵하게 나무 위를 오르자 나는 절로 감탄사를 내었다. “내가 이렇게 나무를 잘 탈 줄이야……?” 올라가고, 올라가고, 올라가고. 한참이나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아래는 내려다보지 않았다. 무서우니까. “…….” 솔직히 나무가 너무 높다 보니 올라가던 도중에 피곤해졌다. 그러나 이제 와 내려갈 수도 없고 멈추기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계속해서 올라갔다. “아 죽을 것 같아.” 헉, 헉. 나는 숨을 몰아쉬다가 마침내, 더는 오를 가지가 없는 나무 꼭대기에 도달했다. “으아아아아!” 이거야 원. 난 그제야 나무에 기대어 몸을 쉴 수 있었지만. “그냥 다른 애들처럼 약초 채취나 하는 시늉이라도 할 걸 나 혼자 제일 쓸데없이 개고생한 거 아냐?”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래도 시야가 탁 트인 그곳에 홀로 기대고 있으려니 이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 밑을 내려다봤으나, 울창한 나뭇잎에 가려서 다른 학생이나 거북이 교수의 모습조차 안 보였다. “어? 이거 복숭아나무였나 봐?”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이 노스브리치라는 고목의 정체를 그제야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꼭대기에 툭 튀어나온 가지에 탐스러운 복숭아 한 알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과일이 달랑 1개뿐이지? 가만, 지금이 복숭아가 열리는 계절인가?” 잘 모르겠지만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툭, 복숭아를 가지에서 떼어 냈다. “식도락 클럽의 신입 회원으로서 먹지 않을 순 없지.” 유독 탐스러워 보이는 복숭아를 보자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복숭아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복숭아~ 복숭아는 맛있어~” 가사에 무조건 복숭아를 넣어가며 흥얼거리고 노래를 부른 후. 앙, 복숭아를 그 자리에서 바로 베어 물었다. “맛이 기가 막히네. 5천 년 넘은 나무에서 자란 복숭아라 그런가.” 그리고 향도 아주 기가 막혔다. 꽃향기 같기도 하고, 달콤한 꿀 냄새 같기도 하고……. 보통 복숭아에서 나는 냄새보다 훨씬 그윽한 향기였다. 나는 달콤하고 향긋한 복숭아를 눈 깜짝할 사이에 폭풍 흡입하고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꾸륵. “음?” 꾸르륵. “어어?” 꾸르르를륵. 뱃속에서 꾸르륵꾸르륵거리면서 천둥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갑자기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상한 거였나?” 먹었을 땐 아무 문제 없었는데. 맛있기만 했는데……. “헉. 아이고 배야.” 나는 뱃속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면서 숨을 헐떡였다. 마치 뱃속에서 용틀임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나는 고목의 나뭇가지만 붙잡은 채로 몸을 마구 비틀었다. 이건 마치…… 아이를 출산하는 고통이랄까? 낳아본 적은 없지만. “여기서 싸면 안 되는데!” 더군다나 바지에 쌀 수는 없기 때문에 나는 일단 바지를 벗어야만 했다. 하지만 너무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바지 단추를 풀려는 손이 미끄러졌다. 20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아악. 사람 살려!” 내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자마자. 뿌우아아아아아앙! 갑자기 엄청난 소리를 표출하면서 방귀가 크게 터져 나왔다. 방귀가 계속되고. 계속되고. 계속되고. 아주 오랫동안 나왔다. 빠아아아아아아앙! 내 인생에 그렇게 오랫동안 방귀를 뀐 것은 처음이었다. 희한하게도 냄새는 하나도 나지 않았다. “하아아아…….” 방귀가 오랜 시간에 걸쳐 다 나오고 나자, 뱃속이 멀끔하게 아주 편안해졌다. 나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나무 기둥을 붙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행히 그냥 방귀였던 것이다. “……천지신명님 감사합니다. 싸지 않게 해주셔서.” 일단 무사히 한숨을 돌린 나는 하늘에 대고 감사 인사부터 올렸다. 원작에선 복숭아 따위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군.” 기실 원작에선 이 나무에 올라온 것 자체가 아예 없던 일이었다. 여주는 나무에 올라오기는커녕 농땡이 안 부리고 열심히 약초를 캐러 다녔으니까. “방귀가 뭐 이래 요란하냐.” 이놈의 복숭아 다신 안 먹는다. “그나저나 복숭아에 씨가 없다니 희한하군. 아무튼 슬슬 내려가 볼까?” 뱃속의 용틀임과 방귀로 인한 후유증으로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냈던 나는, 꼭대기에서 시간을 꽤 지체한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밑으로 내려가려는데. “어어?” 밑이 까마득해서 나는 순간적으로 그만 심하게 어지럼증을 느꼈다. “어어어?” 그 와중에 몸이 휘청했다. 한 발자국 잘못 디뎠기 때문이다. “어어어어어!” 갑자기 내 몸이 공중에 붕 뜨더니. “으으으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푹! “악!” 퍽! “아악!” 퍼퍽! 나뭇가지와 기둥에 몸이 퍽퍽거리며 마구 부딪힐 때마다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나는 5천 년 넘은 나무 꼭대기에서 곧바로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이런 슈바……!” 나무가 하도 높아 떨어질 때 체공 시간이 길기도 참 길었다. “아직 절4랑 역하렘은 차려보지도 못했는데……!” 다른 건 모르겠고 그것이 가장 억울했다. “한 학기도 안 됐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퍼퍼퍽! “으아악!” 떨어지는 동안 나뭇가지에 몸이 마구 부딪혔고 여기저기 피부가 나뭇잎에 쓸려 따가웠다. 쿵! 마침내 내 몸뚱어리가 바닥에 요란하게 내리꽂혔다. 바닥의 나뭇잎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내 얼굴은 그대로 진흙에 처박히고 사지가 축 늘어졌다. “…….” “…….” 때마침 집합 시간이었는지, 나무 아래에 모여 있던 거북이 교수와 학생들이 사색이 된 채 하늘에서 떨어진 날 바라봤다. 물론 나는 바닥에 죽은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누, 누구야……?” “죽은 거야?” “방금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공자들이 조심스럽게 내 쪽으로 다가오며 날 살피려고 할 때. 하푸! 내가 진흙에 처박힌 고개를 쳐들었다. “으악!” 거북이 교수와 다른 학생들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이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어휴, 죽는 줄 알았네.” 나는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올라가는 건 그렇게 오래 걸리더니 내려오는 건 빠르구나. 나무에서 제일 빨리 내려오는 방법은 바로 떨어지는 거였어.” 내가 앞발에 묻은 흙을 탈탈 털며 중얼거렸다. “…….” 아무도 내 말에 뭐라고 적당한 반응을 하지 못했다. “자, 자네, 괘, 괜찮나? 설마 이 나무에 올라갔던 것인가?” 그나마 빨리 정신을 차린 거북이 교수가 내게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하하하. 갑자기 어지럽네……?” 머리가 뜨겁고 시야가 붉어지면서 내 정신이 해롱해롱했기 때문이다. 풀썩. 나는 바닥에 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아, 나무 꼭대기에서 먹은 복숭아는 나를 무적의 금강불괴로 만들어주는 영약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참 꼭 무협지에 나오는 기연처럼 생겨 가지고는! 왜 사람을 착각하게 만들어! “맙소사! 공자, 괜찮아요?” “헉! 머리에서 피가 쏟아져요!” “팔다리에도 자잘한 상처들이!” “<사기 근절> 머리끈이 새빨갛게 젖어 버렸어!” 공자들이 모두 허둥지둥하며 바닥에 쓰러진 내 몸을 뒤집었다. 특히 뒤통수에서 피가 철철 났다. 아까 떨어지던 도중에 두꺼운 나뭇가지에 뒤통수를 크게 부딪쳤던 것이다. “빨리 지혈해야겠군. 다들 손수건 있으면 줘보게. 그리고 혹시 오늘 프오르 약초를 채취한 학생이 있나?” 거북이 교수가 약초학 교수답게 전문적인 손길로 손수건들을 모아 피가 흐르는 내 뒤통수를 지혈하기 시작했다. 학생들 몇 명이 바구니를 뒤져서 약초를 주었다. “상태가 말이 아니군……. 용케도 나무 중간까지는 올라갔던 모양이야.” 거북이가 내 모습을 보며 중얼댔다. 아니 중간이 아니고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고 자랑하고 싶었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거북이는 약초를 상처 부위에 올리고 내 <사기 근절> 머리띠로 묶어서 고정한 후에 주변 학생들에게 지시했다. “얼른 의무실로 데려가게나.” 그러자 다른 공자들이 와서 내 몸을 들어 올리고 양쪽에서 부축했다. 나는 그런 공자들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없어서 그러지도 못했다. “아, 안 돼…….” 의무실은 안 돼…….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끌려가며 가물가물 정신을 잃어갔다. 의무실에 가면…… 여자라는 게 들킨다고……! *** 어렴풋이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눈에 보인 것은 ‘의무실’이라는 문패였다. 문이 열리고 공자들이 날 의무실 안에 처넣으려는 찰나. “아아악……!” 나는 괴성을 지르고는 갑자기 헤라클레스처럼 괴력을 뿜으면서 날 부축하던 공자들을 일거에 뿌리쳤다. 깜짝 놀란 공자들의 손이 잠깐 떨어진 순간,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작정 미친 듯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앗!” “도른 공자를 놓쳤다!” “저놈 잡아라……!” 공자들은 마치 못된 도둑놈이라도 잡으려는 용감한 시민들처럼 날 쫓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에 시뻘건 피를 철철 흘리면서 무조건 뛰었다. 길가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피 흘리는 날 식겁해서 보다가, 무리를 지어 그 뒤를 뒤쫓아오는 학생들을 보고는 더욱 깜짝 놀랐다. “헉, 헉……!” 절대 잡히면 안 된다. 나는 머리가 어질어질한 와중에서도 그런 일념뿐이었다. “잡히면 여자인 게 들통나서 퇴학이야……!” 머리의 상처뿐 아니라 팔다리도 엄청 긁혔고 여기저기 온몸이 쑤시고 아픈 걸 보니, 의무실에 가면 분명 온몸을 샅샅이 살필 게 분명했다. 그럼 성별을 들키는 건 시간문제. 하지만 머리에서 흐르는 피의 양만큼 내 몸에서는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다시금 다리에 힘이 풀리고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 직전. “알렉시스? 너…….” 누군가 왠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날 향해 달려오기에, 나는 얼른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러나 눈가에 흐르는 피 때문에 시야가 가린 데다 이미 정신이 몽롱해서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안… 돼……. 의…무실은…….” 그렇게만 뱉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러자 단단한 누군가의 팔이 내 몸을 부드럽게 받쳐 들었다. *** “먹어.” 누군가가 내 입속에 이상한 물약을 흘려 넣었다. “역겨워…….” “먹어야 낫지. 먹어.” 내 입속에 짭짤하며 비릿한 액체가 두세 모금가량 흘러 들어오자 나는 뱉지도 못하고 꿀꺽 삼켰다. 꼭 피 냄새 같긴 했지만…… 뭐, 어쩌면 내 머리에서 흐르는 피 냄새일 수도 있었다. “머리에 이건 뭐냐. 사기 근절? 흠…….” 상대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내 피로 젖은 머리띠를 조심스레 풀었다. 나는 비몽사몽인 와중에서도 두 눈을 부릅뜨고 상대방의 낯짝을 보려고 했다. “눈깔 그렇게 부릅뜨니까 반갑네.” 하하하, 낮게 웃음 짓는 상대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지만 여전히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으응…….” 눈깔 얘기를 하는 거 보니 1번인가……. 그렇다면 안심이다. 개 주인은 다름 아닌 바로 나니깐……. “푹 자라. 자고 일어나면 다 나아 있을 거다.” 그렇게 말한 상대가 잠시 내 곁에서 멀어졌다. 싫어, 가지 마……. 입에서는 소리가 안 나와서 속으로만 부탁을 하는데, 이윽고 근처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상대방이 잠시 세면대에서 무언가를 씻는 것 같더니……, 이윽고 젖은 타월을 가져와서는 내 얼굴과 머리에 묻은 피를 정성스레 닦아주기 시작했다. “…….” 아무 말도 없이 오랫동안 내 머리를 세심히 닦아주는 손길을 느끼며, 나는 묘한 온기에 사로잡혔다. 전생에서는 가족도 친구도 지인도 없었으므로 이런 기분이 참 낯설었다. 이런 세심한 정성이라면 분명 2번 병약미남인데……. 그러나 상대가 누군지 제대로 알기도 전에 몽롱한 나의 정신이 점차 따뜻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소원은 센 걸로 빌어야겠군.” 음……? 방금 뭐라고……. 나는 다시 한번 잠에 빠졌다. *** “와우! 온몸이 가뿐한데?” 눈을 떠보니까 기분이 아주 개운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아픈 데도 하나도 없었다. 빠개질 것만 같던 머리통도 감쪽같이 정상이었다. “엇? 그런데 여기가 어디야?” 나는 주위의 환경이 평소와 다른 것을 발견했다. 훨씬 크고 호화로운 방이었다. 내 방에는 침대랑 탁자 하나뿐인데, 여기는 소파는 물론이고 엄청 고급스러운 러그가 깔려 있었다. 침대도 그냥 적당한 침대가 아니고 휘장이 걸려있는 엄청나게 고풍스러운 물건. “이제 일어났나? 너 꼬박 이틀이나 잤어.” 그제야 들리는 낮은 목소리. “헉. 뭐야? 넌 또 뭐야?” 나는 저쪽 소파에 앉아서 내게 말을 건넨 절세 미남을 보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쩐지 방 안에 퇴폐미 공격이 절절 흐르더라니……. 내가 왜 4번하고 이런 호화스러운 방 안에 단둘이 있는 거지? “설마…… 너 나를 납치 감금한 거야?”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다짜고짜 물었다. 대체 어느 사이에 벌써 이런 단계가 되고 말았지? 21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하아, 이런 거였나. 소설 속 악역이 뜬금없이 집착남으로 돌변해서, 주인공을 납치하고 감금한 뒤에 막 그 후로 이런저런…….” 잠깐. 그렇다면 이 소설은 혹시 19금? “혼자 또 무슨 엉뚱한 생각 중이지? 네가 달려와서 안겨놓고. 의무실은 싫다며?” 퇴폐미남은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내가 언제!” 내가 언제 달려가서 안겼어? 내가 언제 의무실이 싫다고 그랬냐고! 내가 언제 의무실이 싫다고……? 어? 그랬나? 그러고 보니 가물가물하게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한참 고민하던 나는 결국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스스로 알아냈다. “그럼 의무실이 아니더라도 그냥 내 방에 갖다 놓으면 됐잖아!” 이런 퇴폐미가 절절 흐르는 방이 아니라! “내가 네 방이 어딘지 알고 갖다 놔?” 제라드의 간단한 반문에 나는 또 말문이 막혀버렸다. “…….” 그건 또 그렇네. 알려준 적도 없는데 놈이 내 방이 어딘지 알고 있다면 그것도 무서운 일……. 나는 그제야 손으로 내 몸을 타다닥 훑으며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내가 입던 옷은 물론이고 몸통에 두른 붕대도 그대로란 사실을 알았다. “원하면 저기 있는 내 옷 중에 아무거나 꺼내서 갈아입어도 된다. ……그, 저 가림막 뒤에서 갈아입으면 돼.” 제라드가 왠지 좀 머뭇거리면서 방 한쪽에 있는 커다란 옷장과 그 옆의 가림막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야, 혼자 사는 방에 뭔 가림막이야. 꼭 일부러 갖다 놓기라도 한 것처럼. “웃기시네. 내가 네 옷을 왜 입어?” 나는 고민해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그야 네 옷이 다 피에 젖었으니까…….” “잘난 척은! 보나 마나 뻔하지! 비싼 옷 많다고 자랑하려는 거지? 왜 네 방만 이렇게 호화판이야? 혹시 행정부의 어스아이들한테 뇌물이라도 먹였어?” 나는 어떻게든 놈의 약점을 찾아보고자, 수사관처럼 한쪽 발로 탁탁 바닥을 두들기면서 팔짱을 꼈다. “학교에 추가 비용만 내면 쓸 수 있는 스위트룸인데. 모르나?” 제라드가 수려한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 하 맞다. 그런 게 있었지 참. 이상하게 입만 열면 내가 지는 기분이라서 나는 금세 심기가 좋지 않아졌다. 그 덕분인지 머리통이 가려운 기분이 들어서 슥슥 만져봤더니 흉터가 나 있어야 할 곳이 멀쩡했다. 여기저기 긁혔던 팔다리도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깨끗했다. “이상하네……. 나무에서 떨어진 게 혹시 전부 꿈이었나?” 이렇게 멀쩡하다니. 진짜 꿈이라도 꾼 건가? 내가 내 팔다리를 공연히 툭툭 두들기고 있노라니. “노스브리치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졌다지? 학교 안에 소문이 자자해. 아무 안전장치도 없이 그 악명 높은 나무에 오르다니 너무 무모한 것 아닌가?” 퇴폐미남은 소파에 나른한 태도로 기대어 앉아서 날 향해 퇴폐미 기습을 날렸다. “오지랖도 넓네. 내가 무슨 나무를 오르든 네놈이 뭔 상관이라고.” “온통 피투성이가 돼서 날 붙잡고 의무실 가기 싫다고만 안 했어도, 내가 상관할 일이야 없었겠지.” “…….” 나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제라드에게 도움을 청하며 안긴 기억에 나는 홀로 몸서리를 쳤다. 왜 하필이면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이 녀석을 마주쳐 가지곤……. “하긴, 노스브리치가 뭔지 네가 제대로 알 턱이 없지. 앞으로는 안 다치게 조심 좀 해라.” 제라드는 그렇게만 말하곤, 어쩐지 피곤한 듯이 소파 속으로 깊이 몸을 묻었다. “…….” 나는 묘한 기분이 들어 말없이 놈을 쳐다보았다. 소파 위, 퇴폐미남 옆에 구겨져 있는 얇은 시트 하나가 눈에 띄었다. “흐음. 그러니까…… 내가 침대에서 자는 바람에 퇴폐미남이 소파에서 저걸 덮고 잤다는 뜻인가.” 나는 혼자 우물거리듯 말하면서 눈길을 돌렸다. 뭐 소파에서 자라고 내가 등 떠민 것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이곳에서 이틀이나 쳐자다니…….” 퇴폐미남이 굳이 거짓말할 이유는 없으니 그런 거겠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깨진 머리통도 이틀 안에 이렇게 감쪽같이 나을 리가 없는데. 현재 흉터 하나 없이 멀쩡한 내 상태가 신경 쓰였다. 왜냐면 그것이 말해주는 바는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너 혹시…… 나한테 너희 가문의 힐링 포션을 먹인 거냐?” 세계 3대 포션이라는 그 포션을? 설마 그럼 나도 녀석과 똑같은 회복 능력을 지니게 된 거야? 하지만 저 녀석에 나한테 그걸 먹였을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있나. 힐링 포션은 내가 여섯 살에 먹은 게 마지막이었는걸. 이젠 구하고 싶어도 없어.” “어? 없다고?” 이건 또 모르던 사실이었다. “본래 차기 가주로 결정되면, 자신이 먹어야 할 포션을 절벽에 가서 채취해와야 하거든. 그때 내가 아예 확 불 질러 버렸지. 그딴 포션은 세상에 차라리 없는 게 나으니까.” “…….” 나는 잠시 입이 콱 막혔다. 과연 싸바다운 짓이었다. “아아, 고작 여섯 살에 너만 처먹고 다른 사람은 못 먹게 하려고 다 폐기해버린 거구나? 성격 한번 정말 지랄 맞도다.” “뭘, 그 정도쯤이야.” 퇴폐미남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잠깐만. 그럼 난 왜 이렇게 빨리 나은 거야? 이상하네. 나 분명 뭐 먹은 것 같은데?” 내가 의아해하자, 퇴폐미남은 날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내 피를 먹였어.” “…….” “…….” 정적이 흐른 뒤. “뭐라고?” 내가 너무 놀라 두 눈을 끔벅거렸다. “여섯 살에 힐링 포션을 먹은 후로, 내 피는 남한테 먹이면 일시적으로 회복 효과가 있거든. 물론 진짜 포션을 먹은 거에 비할 수는 없지만. 회복 시간도 더 오래 걸리고.” “효과가 약하다면서 이틀 만에 내 터진 머리통을 말끔하게 고쳤다는 거야?” 나는 더욱 경악했다. “효과가 약하니까 이틀이나 걸린 거지. 깊은 상처도 아니었잖아.” 제라드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아니 머리통이 찢어져서 피투성이가 됐는데 깊은 상처가 아니라고? 퇴폐미남에게 ‘깊은 상처’의 기준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자기 피를 먹였다면. 4번이 자기 몸에 일부러 상처를 내서 피를 내게 했다는 뜻이 아닌가. 난 본능적으로 녀석의 손을 홱 쳐다보았다. 그러나, 설령 그가 일부러 손을 베어 피를 냈더라도 지금은 다 회복되어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어, 어……. 아, 아무튼 내가 먹여달라고 한 것도 아니니까 내 잘못 아냐. 나 돈 없어! 난 네 말대로 거지새끼거든.” 나는 무척 당황스러우면서도, 혹시라도 4번이 나한테 피 값을 청구하기 전에 얼른 선수를 치고 나섰다. 헌혈 좀 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알아서 준 거니까, 놈이 피를 낭비하게 된 것도 내 잘못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돈이라니 무슨 소리야?” 퇴폐미남이 알아듣질 못했다. 특히 내가 내 입으로 직접 나 자신을 ‘거지새끼’라고 하자 퇴폐미남은 완전히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어, 그러니까, 내 말이 뭔 소린지 몰라?”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모르겠는데.” “…….” “…….” 뭐, 놈이 피 값을 청구하지 않겠다면야 굳이 내가 나서서 기억을 상기시킬 것까지야 없었다. 즉 퇴폐미남과 이 주제로 더 말을 섞어봤자 나만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시선을 애매하게 돌리면서 방 안을 둘러보는 척하는데. 바로 그 순간.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사기 근절> 머리띠와, 피 묻은 젖은 타월이 보였다. 점차 어렴풋이 기억에서 무언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누군가……” 분명 피에 젖은 내 머리와 얼굴을…… 오랫동안 조심스레 닦아줬……, “……!!” 그 자리에서 퇴폐미남과 다시 눈이 마주치자 나는 얼음장이 되어버렸다. 아니 얼음장도 얼음장이지만. 굳은 상태 그대로 갑자기 몸에 열이 올라서 절로 낯짝이 시뻘게졌다. 왜 이러지? 왜 이렇게 당황스럽지? “왜 그래? 괜찮나?” 아니나 다를까 그런 나를 퇴폐미남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 나, 나, 나, 나 갈게. 피, 피, 피, 피, 피는 잘 먹었다.” 나는 어쩐지 눈에 뵈는 것이 없어서 허둥지둥하며, 얼른 일어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빨리 문을 향해 달려갔다. 재빨리 문고리를 잡아당겼지만, 잠겼는지 열리지가 않았다. 덜걱덜걱덜걱! 열리지는 않고 문이 덜걱거리는 소리만 계속 나서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슈바! 이거 왜 안 열려!” 당황한 내가 급기야 미친 듯이 쩌렁쩌렁 고함을 질렀다. “아, 그거.” 갑자기 뒤에서 훅, 하고 다가온 남자의 숨결에 나는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얼굴이 점점 뜨겁게 달아올라 나는 얼른 고개를 푹 숙였다. 내 뒤에 가깝게 서 있는 녀석한테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제라드의 커다란 손이 내 곁을 스쳐서, 손잡이 위에 있는 잠금 고리를 옆으로 당겨서 풀었다. “이걸 먼저 풀어야 열려.” 뒤에서 그가 말하더니 손잡이를 잡고 돌려서 문을 열어주었다. “잘 가.” 녀석이 부드럽게 속삭이는 소리에 대답도 하지 않고, 나는 쏜살같이 방을 박차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뛰어서 녀석의 기숙관를 나와 정원을 마구 달렸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고. 계속 달렸더니 마라톤을 한 것처럼 심장이 막 쿵쾅쿵쾅거렸다. “후우…….” 퇴폐미남의 방에서 어쩐지 좀 싱숭생숭한 일을 겪은 것 같기도 했지만. 이렇게 달리고 나니 그런 일마저도 완전히 깨끗하게 다 머리통에서 날려버릴 수 있었다. “역시 정신 건강에는 달리기가 최고야!” 나는 하하하하 웃으면서 언젠가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었다. 22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4번을 마음속에서 성공적으로 깨끗하게 지운 나는, 주말 아침부터 빛나는 카일님을 영접하기 위해 성지로 향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온실로 향했다. “노스브리치 나무에서 떨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은가요?” 만나자마자 금욕미남이 친절하게 물었다. “넵! 괜찮습니다! 차렷! 경례!” 나는 힘을 쫙 주고 경례를 붙였다.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아무 데도 다친 곳이 없어 보입니다. 다행이군요.” “넵! 그게 퇴폐미……” 퇴폐미남이 피를 먹여줘서 다 나았다고 하려다가 나는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본래 3번과 4번은 앙숙이 아닌가. 무려 피까지 얻어먹었다고 하면 카일이 왠지 날 제라드 편으로 생각해서 거리를 둘 것만 같았다. “퇴폐미……?” 카일이 내가 하다 만 말을 되풀이하며 궁금증 어린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네, 퇴폐미……! 저의 몸에 내재된 퇴폐미로 그깟 상처쯤은 곧바로 격퇴하였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냥 가볍게 긁힌 거였답니다!” 차마 퇴폐미남의 존재를 끄집어낼 수 없었던 나는, 피를 철철 흘리며 죽을 뻔했던 현실을 아무렇게나 왜곡했다. 심지어 나의 퇴폐미를 자랑하기 위해서 슈퍼모델 같은 자세까지 척! 하고 일부러 선보여 보았다. 처음 해보는 자세라 그런지 몸이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느낌이었지만. “……아, 그렇습니까.” 내 말을 이해했는지, 금욕미남은 내 요상한 자세를 보고는 안심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알렉시스 공자는 평소와 다름이 없군요. 다 나았다니 참 다행입니다. 제가 걱정을 많이 했답니다.” “헉…….” 금욕미남이 내 걱정을! 나는 그 자리에서 철퍼덕 주저앉으면서 절규했다. “제 걱정을 해주시다니! 이런 영광이! 앞으로도 카일님이 제 걱정을 많이 하려면 제가 어떡해야 할까요! 다시 노스브리치 나무에 올라서 떨어지면 되겠습니까!” 나는 당장이라도 숲속으로 달려가서 나무에 올라가고픈 충동을 느꼈다. “역시 재밌으십니다. 무릎 아프시겠어요.” 금욕미남의 경건하면서도 따뜻한 말투에 나는 다시금 정신이 해롱해롱해졌다. 정작 금욕미남은 내게 일어나라고 손을 내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걸로 믿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근로 장학 일을 하면서 한 번도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없군요. 오늘은 점심에 함께 샌드위치라도 먹을까요?” 금욕미남이 그렇게 제안하자, 나는 그만 정신을 반쯤 놓고 말았다. “네네네넨네네에네네넨넵!” 내가 절로 랩을 시전했다. 랩이 아주 훌륭했는지, 힙합 음악을 처음으로 접하는 금욕미남조차도 그 금욕적인 얼굴 위로 따뜻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밥이다! 금욕미남이랑 데이트! 점심 데이트다! 캴캬럌.” 나는 당장이라도 온실 안을 방방 뛰어다니며 기쁨을 표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금욕미남의 거룩함과 숭고함 앞에서 차마 그럴 수가 없어 그저 조용히 혼자 음침하게 좋아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 어디선가 소곤소곤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밥 먹는 게 저렇게 좋나?” “응, 도른 공자님은 밥을 엄청 좋아하더라고!” “당연하지! 식도락 클럽 신입 회원인데!”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심지어 식도락 클럽 회원의 식탁을 뭉갰다는 이유로 화가 나서 결투까지 했었잖아!” “저런 열혈 회원이 있다니! 앞으로 식도락 클럽의 미래는 참으로 밝구나!” 금욕미남이 비추는 후광 때문에 지금까지 있는 줄도 몰랐던 주변의 어스아이 무리들이 그렇게 소곤거리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식도락 클럽의 자랑스러운 열혈 회원이다! 밥이 최고!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오로지 먹을 것이지! 절4도 필요 없어!” 쏟아지는 관심 때문에 무척이나 흥분한 나는 아드레날린이 솟구쳐서 그만 만천하에 망발을 뱉고 말았다. ‘절4도 필요 없어!’ ‘절4도 필요 없어!’ ‘절4도 필요 없어!’ 온실 안이라서 그런지, 특히 내 말의 마지막 부분만 메아리를 치면서 온 사방에 윙윙거리며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아!” 어스아이들이 절4마저 포기하는 나의 결단에 우렁차게 손뼉을 쳐주었다. 어딜 가나 참 리액션을 잘해주는 어스아이들이었다. 어딜 가서 방청객 아르바이트를 해도 될 것 같았다. “…….” 금욕미남만이 절4란 과연 무엇인지 고민하는 낯으로 서 있었다. “자자! 이제 빨리 일합시다! 카일 공자! 오늘도 약초밭에 물을 주세요! 빨리빨리 움직이라고요!” 정신을 차린 어스아이들이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면서 카일을 노예 부리듯 끌고 갔다. 어휴 무서워……. “도른 공자도 얼른 시작하죠! 채소밭의 채소들이 해맑게 기다리고 있다구요! 뭘 꾸물거려요! 당장 안 가요?” 다른 어스아이들은 나를 노예 부리듯이 끌고 갔다. 그렇게 열심히 근로를 하던 우리는, 점심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일을 멈추고 잔디밭으로 나갔다. 나보다는 비교적 덜 지쳐 보이는 금욕미남과 만나서 잔디밭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점심으로 어스아이들이 갖다준 샌드위치와 사과 주스를 먹었다. “알렉시스 공자는 참 잘 드십니다.” 내가 샌드위치 6개째를 집어 들자 카일이 놀란 목소리로 날 추켜세웠다. “물론이죠! 저는 식도락 클럽의 열혈 회원이니까요!” “아, 식도락 클럽…….” 내 말에 카일이 잠깐 무언가를 생각했다. “거기에 최근에 제라드 공자가 가입했다 들었는데요. 웃기게도.” “음. 그렇죠.” 내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카일이 ‘웃기게도’라고 했는데 사실 어디가 웃긴 건지를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4번이 이렇게 또 강제로 꺼내지다니. “가만 보니 제라드 공자와 좀 가깝게 지내시는 것 같더군요.” 카일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금욕미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금욕미남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제라드가 식도락 클럽에 가입한 사실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서로 앙숙인 탓에 카일도 상대방의 근황에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럴 리가요. 그런 싸바랑 제가 왜 친하겠어요.” 내가 고개를 저었다. “싸바……?” 처음 듣는 단어에 금욕미남이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네. 싸바. 싸가지 바가지의 줄임말이에요.” 독자들 사이에서 4번의 별명이었던 싸바. 갑자기 건전하게 소설이나 읽던 독자 시절이 떠오르며 나는 아련한 추억에 잠겼다. 그러자 3번 금욕미남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조금은 만족한 듯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재밌는 별명이군요. 하긴, 성격이 좋은 작자도 아닌데 가까이 지낼 이유가 없습니다.” “…….” 물론이죠, 가까이 지낼 이유는 없죠. 라고 대답을 하면 좋겠지만, 왠지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초절정 외모를 지닌 절4 멤버들에겐 아무래도 내가 좀 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퇴폐미남한테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 숭고하신 카일님이 대놓고 퇴폐미남을 깎아내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도 속에 쌓인 게 많은 듯했다. 그러나 딱히 내가 끼어들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난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다시금 흡입하기 시작했다. 고개도 들지 않고 한참을 열심히 먹다 보니 갑자기 목이 막혔다. 손으로 근처에 놓여 있을 사과 주스가 담긴 잔을 더듬거리며 찾는데. “여깄습니다.” 카일이 친절하게 내게 잔을 직접 건넸다. “으흐흐흐흐.” 그래 바로 이런 기분이야. 나는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절세미남과 소풍 나와 데이트 하는 기분이 바로 이런 기분이라고. 내가 이래서 이 개고생을 하면서 근로장학생을 하는 거라고! “헤헤. 그럼.” 나는 잔을 받아서. 꿀꺽꿀꺽꿀꺽. 주스를 남김없이 깨끗하게 비웠다. “음.” 다 마시고 나니까 좀 이상했다. “뒷맛이 약간 텁텁하네요. 아직 덜 익은 사과로 만들었나?” “그렇습니까?” “네. 그래도 맛있긴 하네요.” 그러자 카일도 자기 유리잔에 사과 주스를 따른 후에 한 모금 마셔보았다. 잠시 뒷맛을 곰곰이 음미하는 듯하더니. “저한테는 맛이 괜찮은데요? 역시 알렉시스 공자는 식도락 클럽 회원이라 다르군요. 입맛이 날카롭습니다.” 금욕미남이 나의 미각을 칭찬했다. “하하하! 그렇죠! 제가 좀 입맛이 날카롭죠!” 나는 뜻밖의 칭찬을 들어서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아졌다. “남은 주스는 원하시면 알렉시스 공자가 다 드셔도 됩니다. 저는 지금 잔에 든 것만으로도 충분해서.” 카일이 선심을 쓰며 사과 주스가 든 유리병을 내게 통째로 건넸다. 나의 먹성이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눈치채버린 것이었다. “아휴 참. 네. 제가 다 마실게요.” 나는 사과 주스 병을 통째로 들고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꿀꺽꿀꺽꿀꺽꿀꺽! 내 목구멍으로 주스가 흘러 들어가는 광경을 금욕미남이 신기하다는 듯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카아!” 다 마시고 나서 술 취한 아저씨처럼 소리까지 내어준 다음. 혀로 입안을 날름날름 다시며 뒷맛을 음미해보았다. “이번에는 또 괜찮네.” 아까 느껴졌던 그 텁텁하고 희미하게 씁쓸한 뒷맛이 이번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병 속의 주스는 괜찮은데 컵 속의 주스는 맛이 이상하다니……?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에잇! 잔이 덜 닦였나 봐!” 나는 더러운 잔에다 주스를 마셨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컵을 근처 쓰레기통 속으로 휙 던져 버렸다. 농구 선수가 3점 슛을 던질 때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컵이 쓰레기통 안으로 정확하게 안착했다. “훌륭한 솜씨입니다.” 카일이 빛나는 후광을 뿜으면서 내 던지기 솜씨를 칭찬했다. “헤헤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샌드위치를 마저 모조리 먹어 치웠다. 마지막 샌드위치까지 전부 뱃속으로 사라져버린 바로 그 순간. “어어?” 예고도 없이 찾아온 불길한 느낌. 뱃속이 갑자기 꿀렁거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빨리 화장실로 튀려고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나는데. 뿌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갑자기 엄청난 방귀가 내 몸속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뿌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방귀가 나오고. 나오고. 또 나오고. 그러다가 마침내 뚝 멈췄다. “…….” “…….” 23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이번에는 지난번 노스브리치 나무 꼭대기에서와 달리 냄새가 엄청났다. 그냥 구리구리한 냄새가 아니고, 무언가 코끝을 톡 쏘는 생강 냄새 같은 게 무척 진하게 풍겼다. “……어우. 요즘 방귀를 왜 이렇게 요란하게 뀌지?” 나는 터질 듯이 빵빵한 배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고요한 잔디밭 위로는, 카일은 물론이거니와 여기저기 흩어져서 식사를 하던 어스아이들이 고개를 쳐들고 날 일제히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흠흠. 미안해요! 그냥 방귀였어요! 자연스러운 신체 현상! 다들 신경 쓰지 말아요!” 나는 태연한 모습으로 그렇게 외치고 자리에 도로 앉았다. “우와. 저렇게 크고 요란한 방귀는 처음 봐.” “밥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봐.” “도른 공자님은 역시 대단해.” 여기저기서 어스아이들이 감탄하며 소곤거렸다. 다만 카일만큼은 내 방귀 덕에 밥맛이 떨어졌는지, 먹던 샌드위치를 조용히 도로 내려놓았다. 좀 미안했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 “…….” “…….” 나와 금욕미남 사이에는 한참이나 묘한 침묵이 흘렀다. 곧 카일은 먼저 남은 일을 먼저 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가지 말라고, 아직 우리의 데이트는 끝난 게 아니라며 붙잡고 싶었지만. 방귀의 추억 앞에서는 모든 게 속수무책이었다. 식도락 클럽에 들어서니 토실토실한 회원들이 바삐 화덕에 불을 붙이고 준비를 하는 광경이 보였다. “아 참, 오늘은 회원들이 직접 요리를 한다고 했었지.” 그런데 포동포동한 다른 회원들과는 극심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키가 크고 잘 단련된 근육을 가진 흑발의 초미남 하나가 눈에 띄었다. “왔나? 그동안 내 생각은 많이 했고? 사기 근절 머리띠가 유독 깨끗하군. 핏자국 지우느라 힘들었을 텐데, 새로 제작한 건가?” 퇴폐미를 마구 뿜어내는 신입 회원이 친근한 태도로 반갑게 날 맞이하길래,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특히…… ‘그동안 내 생각은 많이 했고?’라는 질문이 마음에 안 들었다. 실제로 그동안에 생각이 종종 떠올라서 기분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또 놈의 말대로 <사기 근절> 머리띠가 지난번에 다 피에 젖어서 새로 제작한 것도 사실이었다. 놈이 하는 말마다 맞다는 것이 더욱 불쾌하여, 나는 놈이 묻는 말에는 일절 대답해 주지 않고 내 질문만 와다다 해버렸다. “야 솔직히 불어. 넌 여기 왜 들어왔어? 진짜 식도락 클럽에 관심이 있어서 가입한 거야? 아니지? 너처럼 완벽한 체형을 가진 남자가 나 같은 식충이일 리가 없잖아?” 나는 퇴폐미남의 가입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고 확신하면서 추궁했다. “지금 날 의심하는 건가?” 퇴폐미남이 퇴폐미가 좔좔 흐르는 나른한 미소를 띠면서 대답했다. “알렉시스, 잘 떠올려봐. 지난번에 내가 만찬장에서 밥맛 떨어진다고 카일 새끼를 쫓아내려고 했었잖아. 그만큼 내게도 밥맛이란 중요하다는 뜻이지.” “하……. 그러고 보니…… 그때 바닥에 뒹굴었던 내 오징어 요리…… 아직도 아까운데……. 바로 너 때문이었지?” 나는 안 그래도 가물가물 잊어가던 우리의 첫 만남을 새삼스럽게 다시 떠올리고는 두 눈을 치켜떴다. “그 오징어 요리를 다시 먹을 수 있을 때까지 4번 너는 투명 인간이니까 나한테 아는 척하지 마라. 알겠냐?” “흠…….” 투명 인간이 갑자기 손으로 턱을 쓸면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요청을 들어주기에는 네 눈빛이 너무 내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고 있는데. 투명 인간치고는 내가 잘 보이나 보지?” 아차. 나도 모르게 초절정 미남의 얼굴을 명화를 감상하듯 뜯어보고 있었구나. 뒤늦게 시선을 돌리면서 나는 얼른 태권도 방어 자세를 취했다. “역시 강적이군. 퇴폐미 공격에 나도 모르게 당하고 말았어.” 나는 스스로에게 독백을 펼쳤다. “정신 차리자! 식충아! 앞으로 더욱 방어 자세를 굳건히 하는 거야! 투명 인간이 씨불이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말고!” 그런 날 바라보던 퇴폐미남이 중얼거렸다. “재밌군.” “뭐라고?” “대답 안 한다더니. 방금 대답했네.” 슈바……. 나는 놈의 도발에 넘어간 것이 기가 막혔다. 결투를 한 것도 아닌데 마치 결투에서 패배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퇴폐미남은 그런 내 똥 씹은 얼굴이 웃겼는지 킥킥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거기 신입 회원님들! 이쪽으로 와서 좀 도와줘요.” 화덕에 불이 활활 오르자 다른 회원들이 우리 둘을 불렀다. 그런데 내 얼굴을 보고 나서는,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맞다. 도른 공자는 요리하면 안 되지.” “그러네. 아예 화덕에 가까이 오지도 말아요. 부정 탈라.” “그놈의 미친 떡볶이가 다시 생각나려 그러네.” 회원들이 한마디씩 하길래 나는 편안하게 탁자 위로 가서 앉았다. 퇴폐미남만이 화덕 앞으로 다가가서 다른 회원에게 물었다. “뭘 만드는 거지?” “밀가루 반죽을 동그랗게 편 다음에 치즈와 토핑을 올리고 화덕에 굽는 요리예요.” 어? 어? 나 이거 알아. 나는 흥분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그 누구보다도 먼저 답을 맞혀야 한다는 사명감에 휩싸였다. 갑자기 퀴즈 클럽 회원이 된 기분으로, 탁자 위를 마구 쳐대면서 한쪽 앞발을 허공에 번쩍 쳐들고 외쳤다. “정답! 정답!” “……?” “피자! 정답은 피자!” “……?” 모두가 동작을 멈추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아. 이세계는 피자라는 이름이 아닌가?” 그제야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스쳐서 나는 멈칫했다. 혹시 나 지금 혼자 참가한 첫 번째 퀴즈 대회에서 패배한 거야? “피자? 세상에 그런 요리가 있나?” 아니나 다를까 퇴폐미남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몰라요. 처음 들어봐요.” “그래도 이름이 입에 착 붙네요.” “앞으로 이 요리를 피자라고 부르는 건 어떨까요?” “그러지 뭐.” “이제 치즈와 토핑을 올려주세요.” “다 올리면 화덕 안에 넣어주세요.” 회원들이 지시하는 대로 제라드는 군말 없이 따라 했다. 요리하는 퇴폐미남이라……. 소설 속에는 보지 못한 광경. 의외로 다른 식도락 클럽 회원들과 제법 잘 어울리고 있는 퇴폐미남이었다. 잠시 후 화덕에서 솔솔 맛있는 냄새가 나오기 시작해서 내 정신은 홀린 듯이 그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줄까 말까.” 퇴폐미남이 다 구워진 피자 한 판을 내 앞에 내려놓으려다가 뒤로 빼며 깊은 고민에 잠긴 표정을 했다. “좋은 말 할 때 빨리 내려놔라.” 내가 두 눈에 쌍심지를 켜자 퇴폐미남이 쿡 하고 웃었다. 이 녀석은 내가 노려보거나 쏘아보는 것을 외려 즐기는 것만 같았다. “혹시…… 너 M이냐?” 내가 진짜 궁금해서 물었다. “그건 또 뭐야? 아니 됐어. 몰라 알고 싶지 않다.” 퇴폐미남은 내 낯짝에 스친 표정을 보고 도대체 무슨 느낌을 받은 것인지 M에 대한 지식을 극구 거부했다. “맛있게 먹어라. 내가 만든 거니까.” 퇴폐미남이 내 앞에 피자를 내려놓았다. 나는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피자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달려들었다. 한참이나 맛있게 흡입을 하고 있는데 묘하게 싸한 기분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맛있나?” 퇴폐미남이 흐뭇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 먹는 건 난데 왜 저놈이 웃고 난리야? “알렉시스, 넌 언제 어디서 검술 연습을 하지? 새벽마다 중앙 연무장에 가봐도 보이지를 않던데.” 퇴폐미남이 아예 내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서는 물었다. “안 하는데?” 내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안 한다고?” “그런 걸 내가 왜 해?” 퇴폐미남은 왠지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래서 내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이미 검술 수업 하나 듣고 있잖아. 그 정도면 이미 운동으로는 차고 넘치지.” “실력을 더욱 갈고닦으려면 새벽부터 따로 수련을 해야 정상 아닌가? 검술 수업 하나가 고작 얼마나 도움이 된다고.” 퇴폐미남은 무언가가 매우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불만 어린 투였다. “불쌍한 자식. 실력은 너나 실컷 갈고닦아라.” 나는 녀석이 구워준 피자를 입속에 처넣으면서 퇴폐미 공격을 철저히 방어했다. “내가 무슨 원작 여주인 줄 아냐? 꼭두새벽부터 연무장에서 4번이랑 미운 정 쌓던 여주인 줄 아냐고?”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퇴폐미남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후 회원들에 의해 피자가 종류별로 잔뜩 구워지자, 식도락 클럽은 다시금 무릉도원으로 변화했다. 세상사를 등지고 오로지 먹기만 하는 신선들이 열심히 피자를 냠냠 흡입하는 소리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역시 우리 회원들 별명은 ‘냠냠신선’이 좋겠어.” 내가 공개적으로 식도락 클럽 회원들의 별명을 선포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신선들 사이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으려니까 나 역시 신선이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열심히 먹다가 한참 뒤에야, 나는 묘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고 다시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너구리 공자는 오늘 안 보이네요?” 고개를 처박고 피자를 입에 쑤셔 넣고 있던 냠냠신선들이 고개도 들지 않고 한 명씩 대답했다. “네. 컨디션이 좀 안 좋은가 봐요.” “매달 한 번씩 그러더라구요. 일절 움직이기가 싫다던데요.” “적어도 이틀은 기숙관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안 나오죠.” “혹시 늑대 인간인가?” “…….” 난데없이 늑대 인간이라는 가설이 등장하자, 냠냠신선들은 모두 먹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다들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퇴폐미남은 아직 피자를 먹지 못한 채 앉아만 있다가, 이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는 사과해야 할 근로장학생 마지막 한 명을 도통 마주치지 못해 아직도 겸상이 금지되어 있었다. “아뇨, 늑대보다는 너구리죠.” 내가 아주 단호히 결론을 내렸다. “정말 그렇네요.” “많이 닮았어.” “오동통한 너구리.” 냠냠신선들이 동의했다. 늑대 인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자마자, 모두 다시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피자만 먹기 시작했다. 냠냠신선들이 먹느라 바빠 날 쳐다보지 않는 사이에, 나는 피자 세 조각을 접시에 옮긴 뒤에 몰래 클럽을 빠져나왔다. “어디 가는 건가?” 내 뒤를 따라 나온 것은 피자를 먹지 못하는 바람에 혼자서만 무릉도원에 가 보지 못한 퇴폐미남이었다.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신경 끄시지, 이 M아!” 나는 쏘아붙인 다음, 얼른 옆방인 퀴즈 클럽으로 들어가서 문을 쾅 닫았다. 24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또 너냐?” 언제나 홀로 퀴즈 클럽을 지키고 있는 병약미남이 책을 읽다 말고 내 등장을 쳐다봤다. 그의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뒤로 하고 나는 닫힌 문 쪽만 째려보고 있었다. 언제든지 퇴폐미남이 퇴폐미 공격을 펼치면서 저 문을 박차고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중복 가입인가.” 문밖의 제라드가 피식 웃으며 그렇게 중얼대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그러나 여기까지 들어올 생각은 없는지 걸음을 떼고 뚜벅뚜벅 멀리 사라져갔다. 휴우,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병약미남을 향해 뒤돌아봤다. 그리고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병약미남아! 피자 먹자!” “…….” 나는 피터가 아무 대답도 못 하는 사이에 얼른 달려가서 따끈한 피자 세 조각이 놓인 접시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라고?” “피자.” “……맛있네.” 병약미남은 순식간에 한 조각을 완전히 먹어 치웠다. 그 연약하고 하늘하늘하며 아리따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병약미남이 나한테 심부름을 시켰다. “음료수 좀 가져와 봐. 목 막히는데 지금 피자만 먹으라는 거야?” “너희 클럽에는 음료수 없어?” “물밖에 없어. 그런데 이거랑은 별로 안 어울리잖아.” “이 병약미남 놈이 먹을 것 갖다줬더니 그것도 모자라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심부름을…….” 그러나 병약미남의 아름다운 꽃미모 앞에서 차마 거절할 말이 나오질 않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튀어 나간 뒤 도로 식도락 클럽으로 직행했다. 다행히 식도락 클럽 회원들은 이미 다 피자를 해치운 뒤 방을 떠나고 없었다. 회원들이 음료수를 넣어두는 나무 상자를 열어보니 웬 붉은색 음료수가 딱 한 병 남아있었다. 나는 그걸 챙겨서 잽싸게 퀴즈 클럽으로 돌아왔다. “헉헉. 여깄다. 이거 마셔라.” 내가 식도락 클럽에서 주워온 게 뭔지도 모른 채 유리병을 내밀었다. 병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은 병약미남이 살짝 맛을 보았다. “뜻밖인걸. 꽤 고급 포도주로군.” 나는 입을 쩍 벌렸다. “헐. 방금 내가 식도락 클럽에 한 병 남은 술을 다른 클럽 회장한테 넘긴 거야? 그렇다면 나는…… 스파이?” 내가 저질러버린 배신행위의 심각성을 미처 자각하기도 전에. 병약미남은 포도주를 잔에 따라서 우아하게 한 모금 했다. “앗. 나도 마실래!” 눈이 뒤집혀서 당장 포도주병으로 달려드는 날 보자마자, 병약미남이 샤사삭 병을 낚아채며 나를 밀쳐냈다. “안 돼! 너는 술 마시면 통제가 안 되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보나 마나 뻔하지! 이 알코올 금단 증상에 시달리는 놈아!” “하…….” 금단 증상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나. 난 알코올 중독이 되어본 일이 없다고! 보약을 잘못 먹은 후유증이라니까! 병약미남은 이럴 때는 혼자서 착각을 잘해서 참 문제였다. “앞으로도 내 앞에서 절대 술 마시지 마. 괜히 뒤치다꺼리하긴 싫으니까. 어딜 가서 난리법석을 떨든 네 자유니 딴 데서나 실컷 마셔.” 병약미남은 나를 책임져야 하지만 않는다면 내가 알코올 중독이 되든지 말든지 개의치 않았다. “…….” 내가 포도주병과 잔을 아무리 노려봐도 포도주는 피터의 입속으로만 들어갔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병아리 같은 모습으로 두 번째 피자 조각까지 다 먹은 병약미남이 갑자기 날 보며 질문을 던졌다. “참, 너 약초학 실습 나갔다가 노스브리치 나무에서 떨어졌다면서? 이상하게 상태가 멀쩡하군그래.” “역시 우리 병약미남은 나한테 관심이 많구나?” 내가 즉각적으로 반문하자, 병약미남의 얼굴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졌다. “관심은 무슨. 온 학교에 자자한 소문이라 못 들으려야 못 들을 수가 있나.” “그야 내가 워낙 유명인사니까.” 나는 전생엔 한 번도 되어보지 못한 유명인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에 콧대가 하늘로 치솟았다. “좋기도 하겠다. 혼자 아무렇게나 멋대로 생각하니 넌 참 인생 살기 편하겠어?” 피터가 날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비아냥을 날렸다. “어, 편한데?” “…….” 내가 멍청한 낯으로 앉아있으려니 피터는 도무지 답이 안 나온다는 듯한 표정을 하며 다시 물었다. “근데 너무 빨리 상태가 좋아졌는데? 정말 다쳤던 거 맞아? 아니면, 머리가 맛이 간 대신에 몸은 비정상적으로 튼튼하다 이건가?” “무슨 소리야. 머리가 깨지고 피를 철철 흘려서 정신 놓고 죽을 뻔했는데.” 내가 툴툴거렸다. “의무실 문 앞까지 끌려갔다가 간신히 도망쳐서 제라드 공자와 마주쳤는데, 걔가…….” 여기까지 말하고 난 말을 뚝 멈췄다. 그날의 일이 머릿속에 촤르르 떠올랐으나, 말하고 싶지 않아졌다. “제라드 공자……?” 하지만 눈치 백 단인 병약미남은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곧바로 감을 잡았다. “설마…… 제라드 공자가 너 고쳐줬어?” “어어, 그, 그런 셈이지.” 들켰으니 떨떠름하게 수긍했다. 제라드한테서 피를 얻어먹은 일은 아무한테도 얘기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 “맙소사……. 대체 어떻게 고쳐줬어? 제라드 공자가 어떻게 했어?” 병약미남은 도무지 믿지 못하겠는지 단안경까지 떨어뜨렸다. “과거에 로스트베인 가의 공작이 자기 누이를 몰래 치료해 줬다는 비밀 정보가 2백 년 전에 한 번 있긴 했는데…….” 피터는 머나먼 과거까지 들먹였다. “맙소사, 그게 진짜였단 말이야? 말해봐! 알렉시스, 대체 어떤 방법으로 고쳐줬어?” 병약미남이 보기 드물게 흥분한 표정으로 내게 열심히 물었다. 그가 이렇게 열심히 말을 하는 건 진짜 처음 봤다. “…….” 반면 나는 완전히 말문이 막혀버렸다. 심지어 정보 길드인 파라야의 핵심 인물인 병약미남도, 4번 제라드의 피에 치료 효과가 있다는 걸 모른다……? 그렇다는 말은…… 이 제국에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파라야 정보 길드에서 모르다면, 황제도 모르리라. 베일에 감춰진 비밀. 본디 로스트베인 공작가에서 포션을 섭취할 수 있는 건 가주와 차기 가주, 단 2명뿐이다. 그리고 현재 제라드에겐 이 비밀을 공유할 수 있을 만한 다른 직계가족도 없었다. 즉, 제라드와 그의 아버지인 로스트베인 공작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근데 왜 나한테는 제라드가 말해줬지? “몰라. 약 먹을 때는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그냥 이틀 자고 일어나보니까 나아 있더라고. 난 정말 아무것도 몰라.” 내가 둘러댔다. “약? 약을 먹었다 이거지?” 피터가 내 말에서 정보를 낚아챘다. 약이 아니라 피……인데. 착각하게 놔두자. 굳이 내가 정정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회복에 이틀이나 걸렸다니 진짜 포션은 아닌가 보군. 하긴 진짜 포션을 남에게 줄 리가 없지.” 병약미남이 추리를 시작했다. “혹시, 힐링 포션의 성분을 분석해서 비슷하게 만든 희석 약 같은 걸까? 그런 시도가 과거에 분명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래. 그런 거라면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을지도…….” 피터는 혼자 중얼중얼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머릿속 생각들은 벌써 우주 저 멀리 혼자 따로 떠나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멀뚱멀뚱 쳐다보자, 피터는 정신을 차리고 마침내 현실로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알렉시스, 정말 굉장했다. 무려 제라드 공자를 그렇게 뜯어먹었다니!” “뜯어먹긴 누가 뜯어먹어.” 나는 새삼스레 4번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작게 대꾸했다. 내가 달라고 한 게 아니라 걔가 알아서 준 거라고. 피를. 문득, 4번의 피에 치료 효과가 있다는 걸 알면, 황제가 그를 잡아 죽여 피를 마시려 할지도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상상이 떠올랐다. 제라드의 피는 상처만 치료하므로, 노환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지만……. 인간의 욕심이란 무서운 법. 그만큼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라는 뜻이다. 공작가가 이 사실을 비밀로 하는 데에는 바로 그런 이유가 있겠지. 역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난 속으로 결심했다. “제라드 공자한테 빌붙는 건 지금껏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인데……. 역시 너 정도쯤은 실성해야 가능한 일이었구나.” 병약미남은 정말이지 나의 온갖 능력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실성 운운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뭐, 칭찬이었다는 게 중요했다. “당연하지. 한때 노숙자였던 나니까 빌붙는 거엔 또 일가견이 있단 말이지.” 나는 콧대가 높아져서 노숙자였던 특이한 과거를 자랑했다. “…….” 병약미남은 내가 노숙자였다는 것은 또 처음 알았는지, 몹시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곤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상념에 잠겨있던 피터는 이윽고 고개를 들고 내게 물었다. “그래서 노스브리치는 갑자기 또 무슨 바람이 들어서 올라갔냐?” “내가 도전 정신이 엄청나잖아. 인생의 모험가가 바로 나라고! 그런 나무를 보면 끝까지 올라가 줘야지.” 거북이 교수의 눈을 피해 농땡이를 피우려고 올라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선 내 멋대로 대답했다. “말은 그럴듯하군. 떨어져서 의무실 신세를 질 뻔했으면서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지. 어차피 끝까지 못 올라갈 나무라는 게 딱 보면 각이 안 나와?” “그게 왜 끝까지 못 올라갈 나무야? 꼭대기 경치도 좋더구만.” “……!” 푸학, 마시던 포도주까지 그 자리에서 뱉어버린 피터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 병약미남이 지나치게 놀라는 바람에 그 모습을 본 내가 더욱 놀라고 말았다. 피터는 심지어 옷에 여기저기 튄 포도주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꼭대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고? 농담하는 거냐?” “농담 아닌데?” 나는 영문을 몰라 두 눈만 끔벅거리면서 병약미남을 쳐다보았다. “…….” “…….” 25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병약미남은 한참이나 날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행커치프를 꺼내서 옷 주변에 튄 포도주의 흔적들을 천천히 닦아내고는, 단안경에 뛴 한 방울까지 다 닦은 후 다시 눈에 끼웠다. “미쳤네, 미쳤어…….” 녀석이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또 뭘? 왜 나더러 맨날 미쳤대?” 내가 벌컥 신경질을 냈다. “미친 게 미친 거지 뭐! 대단하다! 알렉시스! 정말 굉장해!” 피터가 갑자기 웃으면서 날 극찬하는 바람에, 나는 화가 삽시간에 사라져버렸다. “그, 그래? 나 굉장해?” “마법을 뚫다니! 진짜 미쳤군!” 피터는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킥킥거리면서 마구 웃어댔다. 얘가 왜 이래…….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마법이라니 무슨 마법?” 그것이 금시초문이었다. “뭐? 그것도 모르고 올라갔냐?” 피터는 더 웃겼는지, 연신 낄낄거림을 그칠 줄을 몰랐다. 뭐, 꽃미남이 웃으니까 보긴 좋구나. 난 흐뭇하게 녀석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는 실성을 해야 그 마법을 뚫는 거였구나. 아, 그런 줄도 모르고.” 병약미남은 마침내 애써 웃음기를 가라앉혔다. “그게, 노스브리치 나무에는 고대에 어느 마법사가 장난으로 마법을 걸어놨거든.” 피터가 흐트러진 단안경을 고쳐 쓰며 설명해줬다. “나무에 올라가려다 떨어져서 열 받아서 마법을 걸었다는 얘기도 있고, 나무 아래에서 실연을 당해 화가 나서 그랬다는 설도 있고…….” “…….” 그러하구나……. 여하튼 실없는 이유로 그런 재능을 기부하였구나……. “그래서 노스브리치 나무는 지금까지 꼭대기까지 올라간 학생이 아무도 없어. 마법이 환각을 일으켜 도전자들을 모두 떨어트리거든.” “음?” “올라갈 때 아무 환각도 못 봤어?” “못 봤는데?” “역시…… 원래부터 제정신이 아니라서 환각조차 들어먹지 않은 건가?” 피터가 그렇게 납득했다. “누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여간 나무에 올라가려는 학생들이 그간 온갖 궁리를 다 해봤는데 아무도 성공 못 했어. 심지어 나무를 베거나 불에 태워보려는 학생들도 있었다더군.” 병약미남이 말을 계속했다. “밧줄이나 기계 등을 이용해서 올라가려던 애들도 있었고. 3년 내내 나무 옆에 탑을 쌓고 나무 위로 뛰었던 공자도 있었대. 물론 다 안 됐지만.” 병약미남이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매 학기 종업식 전야제에 노스브리치 나무 올라가기 대회가 열려. 나무 밑에 그물을 설치하고 떨어지는 학생들을 받아내곤 하지.” “재밌겠네.” “학생들이 이런저런 환각에 빠진 채로 그물에 떨어져서 허우적거리는 광경을 보면 제법 구경거리지.” “캬캬. 나도 담에 꼭 구경 가야지. 우리 같이 구경 갈래?” “아니, 됐어.” 피터는 즉각적으로 칼 같이 거절했다. 심지어 학기 말이 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그전에 어떻게든 꼬드겨야겠군. “그래서, 꼭대기에 올라가 보았으니 뭐라도 있었겠지? 뭐가 있었어?” 병약미남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면서 내게 물었다. “처음으로 마법을 뚫고 올라온 도전자인데. 고대의 마법사가 남겨놓은 무슨 환영 메시지 같은 거라도 있었겠지?” “음? 아니?” 아무리 장난으로 마법을 걸어놨다지만 환영 메시지라니, 너무 유치하잖아.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 피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믿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학생들을 열심히 떨궈온 나무 꼭대기에 진짜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다소 실망한 얼굴. “아무것도 없다니까 그러네.” 먹은 건 있지만. “진짜 없었어? 정말로?” “응. 그냥 평범한 복숭아나무던데……?” “…….” “…….” “복, 숭, 아, 나, 무?” 병약미남이 마치 이글이글거리는 듯한 말투로 한 글자 한 글자 강조를 하면서 나한테 눈을 부라렸다. “어, 복숭아나무……. 꼭대기에 복숭아 하나 열린 게 아주 맛이 기가 막히더라고.” 한 톨의 거짓도 없는 내 순수한 표정만을 마주한 병약미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군. 복숭아를 먹었다 이거군.” “응.” “이 녀석아! 그 나무에선 한 번도 복숭아가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어!” 피터가 소리쳤다. “아니, 복숭아뿐 아니라 그 어떤 열매도 떨어진 적이 없다고! 게다가 그 나무는 복숭아나무도 아니잖아!” “뭬야?” 난 어리둥절했다. “복숭아나무가 아니면 그럼 뭔데?” “노스브리치는 세계 딱 하나뿐인 특이종이고, 그 열매도 지금까지 발견된 적 없어. 열매가 있다 해도 복숭아는 아니겠지.” “그렇구나! 어쩐지 복숭아가 씨앗이 없더라니. 또 먹고 나니 엄청난…….” 방귀가 나오더라고 말하려다가 나는 피터가 피자와 포도주를 앞에 두고 입맛을 버릴 것 같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엄청난 뭐?” 피터가 하필 뒤 내용을 궁금해했다. “그러니까, 엄청난…… 엄청난 복통이. 복통이 느껴지더라고.” 뱃속에서 용틀임을 느낀 게 사실이기 때문에 거짓말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엄청난 방귀도 나오고 말이지. 병약미남은 내 말을 듣더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놈의 복숭아를 추호의 의심도 없이 집어먹긴 했단 말이지? 복통은 금방 사라졌나?” “응.” 방귀를 뀌고 나니까 감쪽같이 없어졌지. “그 밖에, 열매를 먹고 나서 몸에 다른 변화는 없었고?” “없었는데.” 피터는 그제야 입을 다물고 갑자기 심각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더니 한참이나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나도 녀석이 잡는 진지한 분위기 때문에 별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다 잠시 후 확인했다. “알렉시스, 넌 나무에서 내려오다가 떨어진 거지?” “응.” “피도 많이 나고 다쳤다고 했지. 제라드 공자가 고쳐줬고.” “그래.” “…….” 피터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난 녀석이 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혹시…… 복숭아를 먹고 싶다는 생각? “꼭대기까지 올라갔다는 걸 혹시 나 말고 아는 사람 있어? 제라드 공자는 알고 있나?” “아니. 그러고 보니 아직 아무한테도 자랑을 못 했네!” 맙소사! 빨리 자랑했어야 했는데! 난 몸이 조급함으로 달아올랐다. “아니, 앞으로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 피터의 발언이 내게 찬물을 끼얹었다. “왜? 그렇게 커다란 나무도 혼자 잘 탄다고 동네방네 자랑해야 하는데.”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무어라 대답해야 날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병약미남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세상엔 나쁜 사람들이 많잖아. 그렇지?” “응? 그런가?” “그래, 나쁜 사람들 따라가면 안 돼.” 피터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주의를 시키듯이 날 타일렀다. “그런데 네가 갑자기 노스브리치 꼭대기까지 올라가 열매를 따 먹었다고 소문이 나면, 그런 나쁜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지도 모른단 말이야.” “나, 나쁜 사람들이? 무, 무슨 관심?” 겁먹은 내가 토끼 눈을 떴다. “뻔하지 뭐. 네가 어떻게 나무에 올라갔는지, 열매의 효과는 무엇인지 등등을 알아내고 싶어 할 거란 이야기야. 그런 나쁜 사람들은 널 잡아다 생체 실험을 할지도 몰라.” “생, 체, 실, 험?” 나는 너무나 끔찍한 소리에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귀를 막아버렸다. “그러니까, 노스브리치 나무 꼭대기에 올라간 것은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병약미남이 친절하게 내 두 손을 억지로 떼어 내면서 내 귓가에 대고 일러주었다. “설마 네가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할 테니까, 알렉시스 너만 입 다물면 돼.” “아, 알았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으로 혹시 몸에 특이사항 같은 게 생기면 바로 얘기해.” 이럴 수가…… 이렇게 날 속속들이 알려고 하다니. 피터는 역시 나한테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난 슬쩍 웃었다. “아무튼 나도 이번 일은 비밀로 해줄게. 하필이면 너한테 피자도 얻어먹었으니.” 피터가 말했다. 아아, 역시…… 우리 병약미남은 먹을 것에 약하구나.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결심했다. “앞으로도 맛있는 거 많이 갖다줄게! 먹을 게 최고지! 그렇지? 이참에 우리 식도락 클럽에 가입하는 것이 어때?” “안 한다고 했잖아.” “그사이에 마음 바뀌지 않았어?” “아니!” “그래도 퀴즈 클럽이 너무 썰렁해서 네가 외로워 보인단 말이야.” “신경 꺼!” “내가 퀴즈 클럽 홍보 전단지 돌리는 거 도와줄까?” “……!” 병약미남이 눈에 띄게 멈칫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 원작 소설에서는 퀴즈 클럽 홍보 전단지를 돌리던 병약미남과 부닥치면서 처음 만났었는데……. 내가 가입하겠다고 직접 대놓고 쳐들어오면서 우린 이미 다른 경로로 만나버렸으니. 전단지 홍보라도 도와줘야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어… 언제?” 병약미남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전단지 시안 만들어 왔어?” 다음날 다시 퀴즈 클럽에 쳐들어간 나는 병약미남을 보자마자 다그쳤다. “응.” 병약미남은 평소와 달리 날 쫓아내려 하지도 않고 다소 민망해하는 얼굴로 스윽 종이 한 장을 끄집어냈다. 홍보 전단지 시안이었다. 내가 전단지 홍보를 해주기로 약속한 뒤, 병약미남이 전단지 시안을 만들어 오기로 했던 것이다. 난 시안을 들여다봤다. <퀴즈 클럽에 가입하세요!> 홀로 십자말풀이는 지겨우시다고요? 퀴즈 문제집을 보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으신다고요? 동료들과 함께 매주 새로운 퀴즈를 풀고 싶진 않으신가요? 퀴즈 대회에 출전해 자신의 실력을 뽐낼 수도 있습니다! 분야별 퀴즈 문제 완비! 언제나 문이 열려 있습니다! 퀴즈 클럽 위치: 남쪽 성 3B12 나는 물끄러미 전단지를 내려다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용이 너무 평범하잖아. 이래 가지고야 사람들의 주목을 확 끌어낼 수 있겠어?” “아무래도 좀 그런가?” 병약미남이 머리를 긁적이며 딱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쯧쯧. 네가 아직 유명 인사가 아니라서 사람들의 관심 끄는 법을 모르는구나? 내가 수정해줄게.” 26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당장 펜을 집어 들자, 왠지 불안한 표정이 된 피터가 나를 말리려 들었다. “아니 잠깐만……” 그러나 나는 펜으로 완전 크게 딱 엑스 자를 그어버린 다음. 종이에 자리가 없어서 뒷장으로 뒤집은 뒤 이렇게 크게 적었다. <우리 학교에는 남장 여자가 있다!> 오호롸? 남. 장. 여. 자. 라고? 여기서 퀴즈! 그것은 누구? 궁금하지 않느냐 이놈들아? 퀴즈의 정답을 맞히는 사람에게만 몰래 귓속말로 알려줄 거양~! 당장 퀴즈 클럽으로 답을 제출하세요! 퀴즈 클럽이 어디냐고? 그건 네가 알아서 맞춰야지. 퀴즈 몰라? 잘 찾아와 보라구!! “어때? 이 정도라면 공자들의 흥미를 끌지 않겠어?” 내가 의기양양한 자세로 병약미남에게 전단지를 돌려주었다. “…….” 내가 적어놓은 글귀를 보면서 병약미남은 어쩐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래도 되는 건가……?” 병약미남이 전단지의 내용과 나의 낯짝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혼란스러워했다. “남장 여자가 있다는 걸 이렇게 막 아무렇게나 만천하에 밝혀도 되는 거냐고?!” “아 그게 걱정이야?” 별 쓸데없는 걱정도 다 하네. “걱정 마! 어차피 내가 여자란 건 아는 사람은 너 말곤 없으니까! 정답을 맞힐 사람도 없단 얘기지. 즉 나의 정체는 안전하다는 말씀이야.” “미친. 도무지 신뢰가 안 가!” 병약미남은 절규를 하면서 손안의 전단지를 와락 구겼다. “…….” “…….” 우리는 구겨진 전단지를 심각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병약미남이 전단지를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초조한 심정으로 앞발을 바들바들 떨었다. 음, 아니면 보약 후유증 때문일 수도. 마침내 병약미남이 구겨버린 전단지를 도로 제대로 폈다.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전단지 내용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알렉시스. 이거 정말 괜찮을까……? 혹시 정답을 맞히는 사람이 나오면 어떡하지?” “그럼 그 사람한테만 내 정체를 귓속말로 알려주면 되지. 뭘 걱정이야?” “이런 도른 작자를 봤나. 본인의 정체를 결국 누구한테는 알려주겠다는 거네?” “답을 맞히는 사람이 나오면 그렇다고. 누가 아무한테나 알려준대?” “젠장. 상대가 비밀을 지킬 거란 보장이 어딨어? 금세 소문이 쫙 날걸? 여자인 거 들통나면 넌 퇴학인데 그래도 상관없어?” “거참, 답은 아무도 못 맞춘다니까 그러네.” 나는 온갖 근심 걱정에 사로잡힌 병약미남의 어깨를 토닥이며 재촉했다. “빨리 인쇄나 하러 가자구, 병약미남아.” “……안 돼. 아무래도 안 되겠어.” 병약미남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고작 우리 클럽 홍보에 누군가의 개인정보를 쓸 순 없잖아. 특히 넌 우리 클럽 회원도 아닌데.” 병약미남은 마침내 작심한 듯 내 전단지를 다시 와락 구겼다. 그러고는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그는 그제야 속이 후련해 보였다. “아니 난 괜찮은데……. 개인정보 따위 널리 퍼져도……. 이미 인터넷에 많이 돌아다닐 텐데…….” 나는 버려진 전단지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뭔 개소리야. 괜찮긴 뭘 괜찮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병약미남은 나의 슬픔을 무시하며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았다. “후, 정말이지 악마의 유혹에서 간신히 벗어났어……. 전단지 내용이 너무 자극적이라서 하마터면 진짜 인쇄할 뻔했다니까. 역시 실성한 사람 말을 진지하게 듣는 게 아닌데……. 그만 방심하고 말았군.” “야, 근데 도대체 누구야? 맨날 대체 누가 실성을 했다는 거야?” 예전부터 자꾸 누군가 실성을 했다고 하는데 여긴 우리 둘밖에 없는데 말이지. 나는 다시금 주위를 휙휙 둘러봤지만 아무리 봐도 역시 병약미남과 나뿐. “뭐, 어쨌든 도와주려고 한 건 고맙다. 전단지 내용은 그냥 내가 처음에 작성한 걸로 할게.” 병약미남은 내 질문은 무시하면서 홀가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겠다는데 나도 별수 없었다. 곧 우리 둘은 학교 인쇄소로 갔다. 활자판을 전단지 시안대로 나열한 다음, 판화 찍듯이 종이에다 대량으로 찍어냈다. 그렇게 피터가 구상했던, 평범하기 그지없는 홍보물이 완성되었다. “…….” 나는 완성된 전단지 내용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약미남은 중앙 광장에 있는 커다란 게시판에다가 잘 보이게 전단지 한 장을 붙였다. “흠흠. 피터, 그러면 나는 학교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발품을 팔아볼게.” 내가 선언했다. “정말? 발품? 그렇게까지 하려고?” 병약미남은 무척 협조적인 나의 태도에 깜짝 놀랐다. “어, 내가 고생할 테니까 너는 광장에 편하게 앉아서 지나가는 애들한테 나누어주도록 해. 병약미남은 연약하니까 무리하면 안 되지. 그럼 수고!” 본인은 연약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병약미남을 뒤로하고, 나는 전단지 몇 장만 빼 들고 재빨리 광장을 나섰다. 그리고 곧장 다시 인쇄소로 갔다. “후후후. 나는 나의 전단지를 포기할 수 없다구! 어디 누구의 전단지가 이기나 보자! 병약미남아, 너의 전단지는 내 전단지를 이길 수 없을걸!” 이미 내가 구상했던 전단지 내용은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어서 활자판은 금방 제작할 수 있었다. “이번 홍보만 성공하면 퀴즈 클럽은 사람들로 북새통이 되겠지!” 나는 마구 킬킬거리면서, 남장 여자를 찾는 자에게 정답을 알려준다는 내용의 전단지를 마구 찍어냈다. 인쇄소에서 인쇄를 맡은 어스아이들이 어느샌가 전단지 내용을 보고 구름처럼 몰려들어 웅성거렸다. “하하하하쿄쿜! 꺄하핫!” 나는 대박 조짐을 느끼며 소름 끼치는 웃음을 터트리면서 인쇄소를 나왔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가면서, 마주치는 모든 이들에게 한 장씩 전단지를 나눠주었다. 교수고 학생이고 어스아이고 할 것 없이 죄다 전단지를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여자가 몰래 정체를 숨기고 우리 학교에 입학을 했다고?” “이게 사실이에요?” “와우, 이런 재밌는 일이. 얼른 가서 다른 애들한테 알려줘야지.” 다들 진짜로 깜짝 놀라면서 전단지를 앞다투어 가져가곤 했다. “나도 한 장 줘봐요!” “뭔데 이 난리야? 나도 볼래.” 급기야 주변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내 전단지를 가져가려고 혈안이 되었다. “자자! 가만있어 봐 다들! 내가 저기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쫙 뿌릴 테니까!” 나는 전단지에 혈안이 된 관중들을 그 말로 진정시켰다. “아니 그냥 나눠주면 될 걸 굳이…….” “뭘 또 거기까지 올라가려고…….” 사람들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뒤로 한 채, 나는 근처에 보이는 아무 탑으로 뛰어들어서는 꼭대기까지 흥분해서 뛰어 올라갔다. “음하하하핫하! 내 전단지가 이긴다! 내가 병약미남을 이길 거라고! 아스테시아 전체 수석을 내가 짓밟아버리겠어!” 나는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구름 떼처럼 모여든 대중들 위에 서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전단지를 그냥 그 자리에서 공중 위에 흩뿌려버렸다. “우오오오!” 어스아이들은 이런 이벤트가 오랜만인지 무척이나 좋아하면서 깡총깡총 전단지를 잡으러 뛰어다녔다. 다른 이들도 여기저기 떨어지는 전단지를 주워서 내용을 읽었다. “후후. 홍보가 아주 성공적이군. 역시 내 전단지가 세계 최고!” 사람들이 우르르 모인 탑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소중한 내 개인정보까지 뿌려서 직접 전단지를 작성한 보람이 있었다. 무척 자유로운 느낌이라고나 할까? “역시 사기 근절 캠페인 모델을 하던 나의 천재성이란…….” 비록 광고 모델에 발탁된 적은 없지만 나는 그렇게 머릿속의 기억을 마음대로 왜곡했다. “……앗.” 바로 그때, 화려한 존재감을 사방에 뿌리면서 웬 절세 미남이 저쪽에서 걸어오는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저 무시무시한 녀석 같으니라고. 저놈의 퇴폐미 공격이 여기까지 풍기다니. 내가 당할 줄 알고?” 옥상 위에서 퇴폐미남의 모습을 본 나는 척! 하고 태권도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한편, 날 보지 못한 퇴폐미남은 평소처럼 온몸에서 퇴폐미를 절절 풍기면서 걸어오더니, 바닥에 떨어진 전단지 한 장을 주워서는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을 딱딱하게 구긴 퇴폐미남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순간 마치 내 시선이라도 느낀 것처럼 휙, 옥상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나와 시선이 똑바로 마주쳤다. “흥. 저놈의 퇴폐미 공격을 오늘은 반드시 결딴을 내주겠어.” 나는 이를 악물고 결심했다. 다행히 내 발밑에는 아직 허공에 날리지 않은 전단지 뭉치가 놓여 있었다. “신에게는 아직 전단지 열두 장이 남아있소이다!” 기실 몇 장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열두 장보다는 훨씬 많았다. 나는 남은 전단지 뭉치를 당장 품에 들어 올리고는. “이것도 받으시게나! 적군들아!” 옥상까지 쳐들어오는 퇴폐미 공격을 물리치며, 마치 전쟁터의 장군이 된 심정으로 허공에 다시 한번 전단지를 뿌려버렸다. 미처 아까 전단지를 얻지 못했던 병사들이 우르르 다시 한번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그 한복판에 서 있던 퇴폐미남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날 올려다봤다. “하아…….” 갑자기 제라드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 미친 여자가 또…….” *** “이건 또 무슨 짓이야? 제정신이냐?” 옥상까지 날 찾아 올라온 퇴폐미남이 전단지를 내 눈앞에 흔들어 댔다. “조용히 가만있어도 모자랄 판에 이딴 전단지를 만들어서 뿌리면 어떡하려는 거지?” “퀴즈 클럽 홍보를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시선을 끌지. 무려 병약미남을 이기는 거라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의 이런 승리욕을 퇴폐미남은 전혀 이해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처음부터 알아는 봤지만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군. 이러다 여자인 걸 들……” 녀석이 그렇게 말하고 갑자기 입술을 깨물면서 말을 멈췄다. 나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여자인 걸 들……? 뭐?” “그러니까 여자인 걸 들키면 그게 누구든지 퇴학이라는 거지. 왜……, 사람을 제멋대로 곤경에 빠뜨려?” 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4번의 말을 되씹으면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그러니까 퇴폐미남의 말이 암시하는 바에 따르면. “뭬야? 우리 학교에 진짜 남장 여자가 있다는 거야? 그게 정말이야?” 나 말고? 또 있다고? 이런 상상조차 못 한 일이! 27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너무나도 놀란 나는 퇴폐미남의 조각 같은 얼굴 위에 시선을 똑바로 고정한 채로, 두 눈만 깜박깜박했다. “…….” 제라드는 도무지 할 말을 찾을 수 없는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그나저나 남장 여자가 둘이라……. 원작에서도 이런 내용은 없었는데?” 난 누가 옆에서 듣든지 말든지 혼자서 독백을 시전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퇴폐미남이 무려 남장 여자2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참고로 여기서 남장 여자1은 바로 나다. 어쨌거나 남장 여자2는 원작의 뒷부분에 나오는 걸까? 왜 하필 난 소설을 중간까지 읽다 만 것인가! 궁금한데! 한편, 한참이나 날 복잡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퇴폐미남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딴 전단지를 만들어서 뿌렸다가 진짜 들키기라도 하면, 한 학기도 못 다닐 텐데. 괜찮겠어?” “한 학기도 못 다닌다고……? 잠깐. 그럼 지금 그 남장 여자가 나 같은 신입생이라는 거네?” 심지어 그 미지의 학생이 나와 같은 학년이라니. 혹시 나와 영혼의 쌍둥이? 퇴폐미남은 답이 없다는 듯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대체 그 남장 여자가 누군데? 나도 아는 사람인가?” 이 소설은 도대체 지금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혹시 내가 여주라는 것은 그저 나의 착각이었던 것은 아닐까? 실은 남장 여자2가 이세계의 주인공이고, 나는 잘못 빙의해버린 떨거지인 것은 아닐까? 그런 쓸데없는 잡념을 흘려보내던 중. “잠깐. 그런데 퇴폐미남 너는 왜 남의 그런 비밀을 숨겨주고 있는 거지?” 갑자기 그런 의문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4번 제라드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누군가가 남장 여자라는 사실을 숨겨주고 있다니……. 악역이 절대 이럴 리가 없는데? “너 혹시…… 그 불쌍한 남장 여자2를 협박하고 있는 거냐? 그런 거야?” 나는 두 눈을 사납게 치켜뜨면서 추궁했다. “내가? 협박?” 퇴폐미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협박! 누군가 성별을 숨기고 학교 안에 몰래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네놈이 협박을 안 하고 가만있을 리가 없잖아!” “…….” “이렇게 비밀을 숨겨주는 대가로 대체 뭘 받아내고 있는 거야? 무슨 이득이 있어서 숨겨주고 있…는……” 퇴폐미남의 눈빛이 점점 험악해지면서 날카롭게 번뜩여서, 나는 움찔하고 하던 말을 흐리다가 멈췄다. 얼음처럼 서늘한 눈빛 앞에, 보약으로 단련된 강심장인 나마저 왠지 뜨끔했다. 이런 된장. 놈이 악역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너무 대놓고 자극한 건가. 당장 죽빵이라도 날릴 눈빛인데?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밖에 안 보이는 모양이군.” 퇴폐미남은 흉흉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노려보며 말했다. “뭐, 날 구제 불능의 쓰레기로 여기고 있다는 건 잘 알겠어.” “…….” “네 말을 듣고 보니까 갑자기 그 여자를 협박하고 싶어지네. 상상도 안 해봤는데 말이야. 참 재미있겠군그래.” “아니 왜 얘기가 그렇게 흘러?” 내가 퇴폐미남을 말리려고 얼결에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나 때문에 불쌍한 남장 여자2가 곤란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야, 의심한 건 미안하다. 네가 하도 싸바여서 그……” 나는 싸바, 즉 원작 독자들 사이에서 4번의 별명이었던 싸가지 바가지의 줄임말을 자동으로 꺼냈다가 바로 입술을 깨물었다. 잘못하다가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부을 뻔했군! “……런 게 아니고, 그러니까 우리가 첫 만남도 별로 안 좋았고 해서 너한테 좀 선입견이 있었을 뿐이야. 어? 앞으로는 나도 조심할게.” “흠.” 퇴폐미남은 그제야 좀 누그러진 낯이 되더니 제 팔을 붙잡고 있는 내 손을 힐끗 쳐다보았다. 나는 놈이 이대로 도망가서 협박질을 시작할까 봐 놓지 않고 꽉 붙잡고 있었다. “남장 여자2한테 협박은 안 할 거지?” 내가 낯짝을 놈 앞에 더욱 가까이 들이밀며 확인했다. “누가 한다고 했나?” 퇴폐미남이 싱겁게 반문했다. 그래 하지 마라. “어차피 상대는 내가 그 사실을 안다는 걸 전혀 모른다. 눈치가 꽝이거든.” 퇴폐미남이 날 빤히 쳐다보면서 덧붙였다. “아, 그래?” 이건 또 의외였다. 즉, 4번은 협박을 하긴커녕 자기가 그 비밀을 안다는 사실을 남장 여자2에게 지금까지 알리지도 않았다는 거였다. “그래서 누군데? 그 남장 여자2가. 나도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이래 봬도 나 입 무거워.” 다시 궁금증이 솟아오른 내가 퇴폐미남의 옆구리를 은근슬쩍 쿡쿡 찔렀다. 같은 남장 여자인 처지에 나처럼 비밀을 털어놓기에 딱인 상대가 어디 있겠는가. 상대와 서로 알게 되면 앞으로 학교생활 하면서 남몰래 도와줄 수도 있고 의지할 수도 있고……. 어쩌면 절친이 될 수도. 하여간 장점이 많을 것만 같았다. “글쎄, 내가 발설했다가 어디서 소문이라도 나서 퇴학당하면, 그 여자는 보나 마나 날 원망할 텐데. 퇴학당하는 거야 상관없지만, 난 원망은 받고 싶지 않거든.” 퇴폐미남이 말했다. 원망은 받기 싫다니, 정말 싸바답지 않은 발언이었다. 이제까지 싸바 짓으로 독자들한테 받은 원망이 하늘을 찌를 텐데 말이다. “그건 다른 사람한테 말했을 때의 얘기지. 나한테 말하는 건 괜찮아. 난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니까.” 내가 장담했다. 그나저나 퇴폐미남이 생각보다 입이 무거운 스타일이었구나. 나라면 입이 근질근질해서 누구한테라도 벌써 털어놨을 것 같은데. “…….” “…….” 한참이나 말없이 날 쳐다보던 퇴폐미남이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안 돼. 아직 말하는 건 곤란하다. 나중에 네가 우리 학교에서 정식으로 퇴학당하면 그때 얘기해주겠어. 그때라면 상관없을 테니까.” “뭐라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퇴, 학?” 하도 기가 막혀서 퇴학 두 글자에 힘을 바짝 주면서 침을 튀겼다. “참나. 여기서 왜 내 퇴학 얘기가 나와? 어이가 없네. 누가 퇴학을 당한다는 거야 지금!” “학교 다니는 꼴을 보면 뻔하지 뭘.” 퇴폐미남이 쿡 웃으면서 퇴폐미 공격을 날렸다. “조만간 크게 사고 쳐서 퇴학당하거나. 수업에 소홀해서 세 과목 낙제되고 퇴학당하거나. 둘 중에 하나겠지. 아무리 길어도 두 학기를 넘기지 못할 것 같은데.” “이 자식이…… 죽을래?” 나는 퇴폐미남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에 악력을 팍 주면서 분노로 눈을 부라렸다. 퇴폐미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을 뿐이었다. “퇴학당하면 우리 영지로 놀러 와라. 너는 가문도 몰락하고 돈도 없는 것 같으니까…… 어차피 갈 데도 없지?” 연달아 뻥뻥 터지는 퇴폐미 공격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 자식이 내가 갈 데도 없고 돈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근로 장학을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게 사실이라는 게 더 짜증 났다. “미쳤구나! 내가 왜 네 영지를 가냐! 세상에 갈 곳이 널렸구만!” “어디? 어디로 갈 건데?” “……그건.” 모르지 나야. 원작 소설이 주로 아스테시아 안에서만 진행되기 때문에, 바깥세상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밖에 나가면 어떻게 먹고살지? 그래도 여주 어머니가 남긴 유품 반지를 팔면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지 않을까. 근데 팔아도 되는 걸까. 한참이나 앞으로 어떻게 살지 골똘히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으려니. “……뭘 또 그렇게 표정이 심각해지고 그래.” 갑자기 퇴폐미남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고개를 들어보니, 뜻밖에도 제라드는 무척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걱정 마라. 얼마든지 우리 영지로 와서 편하게 지내도 되니까. 원한다면 우리 가문 기사단에 입단해도 좋고……. 넌 검술 실력이 뛰어나잖아.” “참나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앞에 다른 얘긴 다 안 들리고, 마지막에 ‘넌 검술 실력이 뛰어나잖아’만 취사선택해서 알아듣고 난 콧대를 높였다. “내가 좀 뛰어나긴 하지. 스스로 독학한 실력이 이 정도라니 완전 충격적이지? 역시 난 주인공이라니까. 이세계에 다른 주인공이 있다는 건 역시 말이 안 돼.” 자화자찬하며 혼자 지껄이자 퇴폐미남은 흥미로워하며 쳐다봤다. “우리 기사단에 입단할 의향은 있나 보지? 그런데 입단하려면 제대로 된 검 한 자루는 있어야 할 텐데.” 4번은 여전히 내가 아무런 검도 지참하지 않은 것이 걸리는지 턱을 쓸었다. “특히나 너 같은 뛰, 어, 난, 실, 력, 자, 가 검 한 자루 없다니 소름이 끼치도록 놀라운 일이잖아. 안 그런가?” “…….”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퇴폐미남을 쳐다보았다. “이 자식이 실실 쪼개며 웃는 거 보니까 왠지 지금 날 놀리는 것 같은데…….” 특히 한 글자 한 글자 특정 부분을 강조하는 걸 보면 더더욱. “놀리긴. 오해다. 그저 뛰, 어, 난, 실, 력, 자라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얘기한 것뿐이지.” “음, 그런가?” 나는 놈이 일부러 이러는 건지 아닌지 긴가민가하면서도, 놈의 말에 틀린 점은 하나도 없었으므로 바로 수긍했다. 제라드의 실실 쪼개는 미소가 약간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 영지에 10대 명검 중 하나를 만든 명인 호크스피어가 있지. 방학 때 나랑 같이 가서 검 한 자루를 맞추는 게 좋겠군.” “이건 또 뭔 쌉소리야.” 나는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놈의 면상 쪽으로 머리를 팍 쳐들었다. “내가 너랑 가서 검을 왜 맞춰?” “제대로 된 검이 하나 정도는 필요할 거 아닌가? 아무것도 없이 영영 그러고 다닐 셈은 아니겠지?” 난 일단 다른 누구도 아닌 4번이 이 제안을 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인을 따르는 1번 대형견이나 세심한 2번 병약미남, 그리고 천사 같은 3번 금욕미남이라면 몰라도. 4번 이 싸바가 같이 자기네 영지에 가자고 한다? 게다가 검도 같이 가서 맞춘다? 이건 절친 사이에나 가능한 시추에이션인데? 왜 이렇게 친절하게 나오지? 수상쩍은데?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지만 명검 따위 맞출 돈은 없으니까 사양하겠어. 차라리 그 돈으로 너구리와 같이 식도락 기행을 다니고 말지.” “…….” 퇴폐미남이 입을 벌린 채 마른세수를 하더니, 갑자기 벌컥 화를 냈다. “누가 너더러 돈 내라고 했나? 당연히 내가 사주겠다는 거지! 나중에 내 제안을 거절한 걸 후회하며 쓰레기 같은 검 아무거나 주워서 다니지나 마! 그럼 같이 가는 걸로 알고 있겠어.” “아니 필요 없다니까?” 28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이 자식이 왜 이래? 아무리 절4라도 지나친 친절은 부담스러웠다. “내가 쓸 검을 왜 네가 구하겠다고 난린데? 네가 그걸 왜 신경 써?” “알렉시스. 정신 차려. 너는 이 제라드 로스트베인의 라이벌이니까……! 허접한 검을 들고 다니는 꼴은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다.” “내가 왜 너의 라이벌……” “시끄러우니깐 다음에 보자. 난 간다. 이딴 전단지는 그만 날리고.” 퇴폐미남이 손에 든 전단지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구겨서 바로 바닥에 버려버리며 휙 뒤돌아 떠나버렸다. 나는 멍하니 놈의 사라지는 뒤통수를 바라보며 회한에 잠겼다. “도대체 어느 틈에 내가 저 싸바의 라이벌이 된 거야?” *** “알렉시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다 뭐냐고!” 퀴즈 클럽으로 돌아가자마자 병약미남이 어디서 내 전단지를 주워왔는지 손에 들고 흔들어 대면서 마구 따졌다. “이걸 진짜로 인쇄해서 뿌리면 어떡해! 이 도른 놈아!” “왜? 효과 좋잖아?” “익……! 그건 그렇지만!” 내 전단지의 위력은 막강했다. 이튿날부터 퀴즈 클럽에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각자 추측한 남장 여자의 정체를 답으로 제출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퀴즈 클럽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이름, 알렉시스 도렌이라고 정답을 맞힌 사람은 없었다. “이상하네. 그래도 한 명쯤 날 의심할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절세 미녀를 못 알아보다니.” 잠시 방문자가 끊긴 틈에, 나는 퀴즈 클럽 소파에 늘어지게 앉아 내 얼굴을 만지작만지작하면서 의아해했다. 아무리 남장을 했다 한들 이런 초절정 미녀를 어떻게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단 말인가. “혹시 이것도 원작 소설의 영향인가? 소설 속 세계라서 남들 눈에는 자동으로 남자로 보정되는 게 아닐까? 눈 가리고 아웅 한다고 그냥 다들 남자라고 믿는 그런 것……?” 물론 병약미남이 날 단번에 알아본 일이 있긴 하지만……. 피터는 눈썰미가 특출나게 발달한 것 같으니 예외로 쳐도 좋았다. “알렉시스, 네가 하도 미친 짓을 하며 돌아다니니까 다들 무서워서 아예 다른 생각조차 나질 않는 거야.” 소파 맞은편에 늘어져 있던 병약미남이 끼어들면서 확신했다. “너의 용모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일단 피하기 급급하거든. 지나고 나면 그냥 네 미친 짓만 뇌리에 남는 거지.” “……그럴싸한데?” 내가 수긍했다. 병약미남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나한텐 그냥 무조건 설득력이 있었다. “아직까지 정답을 맞힌 사람은 없지만, 앞으로 누군가 정답을 맞히더라도 그냥 답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게 좋겠어.” 병약미남이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왜? 난 말해도 상관없는데. 내가 내 개인정보 뿌리겠다는데 왜……” “네가 퇴학당하는 건 상관없지만 혹시라도 널 숨겨줬다고 애먼 우리 클럽까지 폐부되면 안 되잖아. 그냥 아니라고 배 째는 거야. 정답을 맞힌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공지하면 돼.” “이런 사기꾼 같으니라고.” 나는 병약미남의 사기꾼 기질에 아주 크게 감탄했다. 아무 손해 보는 것 없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겠다는 거군. 소위 주최 측의 농간. “그래도 답을 맞히는 사람이 있다면 내 정체를 어떻게 알게 된 건지 궁금한데…….” 내가 중얼거리자. “그딴 게 왜 궁금해? 궁금해하지 마!” 피터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단안경을 벗고 눈을 감아버렸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는 혹시 정답을 맞히는 자가 나오더라도 그냥 모르쇠를 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이것은 퀴즈 클럽으로 사람들을 꼬드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으니까. 답을 내러 온 방문자들 중에 퀴즈 클럽에 관심이 생긴 일부가 가입을 해서, 처음으로 퀴즈클럽의 벽에 걸린 명부에 새로운 이름들이 쓰였다. “어때? 이게 다 내 덕분이지?” 방문자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리는 퀴즈 클럽을 바라보며 나는 흐뭇해했다. “네 덕분이긴 한데…… 기분이 좀 이상하군.” 병약미남이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대답했다. “왜? 뭐가 이상한데?” “뱃속이 차가워.” “음?” “좋지 않아……. 뱃속에 이런 느낌이 들면 꼭 뭔가…… 안 좋은 사건이 생기던데.” 아스테시아 수석이자 두뇌형 인간답지 않게 뱃속 느낌이나 따지고 있는 병약미남이었다. “너는 아이스크림 자주 먹으면 아주 큰일 나겠구나. 차가운 거 먹을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생긴다니 인생이 롤러코스터가 되겠어.” “그거랑은 느낌이 달라. 이건 뭔가…… 좀 싸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불안해하는 얼굴의 병약미남을 보자, 새삼 측은지심이 든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에이, 신경 쓰지 마. 싸한 느낌은 원래 인생의 동반자라구. 그런 김에 나도 이제 너희 클럽에 가입해도 될까?” “안 돼.” 여전히 퀴즈 클럽에 가입하려는 나의 시도는 철통같이 막혀버렸다. 병약미남은 가입을 구걸하는 그런 내 모습을 불쌍한 듯이 쳐다보았지만. “후후, 그럼 할 수 없이 학교에 제안해서 전단지 홍보 학과를 개설해야겠네. 내가 교수를 해야지.” “뜬금없이 뭔 개떡 같은 소리야.” 피터는 역시 나의 퀴즈 클럽 가입은 불가능하다고 뇌까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 참. 혹시 나 말고 우리 학교에서 또 남장 여자 본 적 없어?” 제라드는 남장 여자2가 있다고 했지만 그건 오로지 싸바의 의견일 뿐이라서 신뢰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파라야 정보 길드의 병약미남이 확인해준다면 믿을 수 있었다. “너 말고?” 병약미남이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응, 나 말고. 다른 남장 여자. 본 적 있어?” “없는데. 게다가 내가 그런 걸 보기만 해서 어떻게 아냐?” “그야 넌 눈썰미가 좋잖아. 내가 여자인 것도 한눈에 알아봤잖아.” “넌 이상하게 내 눈엔 유독 티가 나서 그런 거고.” 병약미남은 단안경을 다시 한쪽 눈에 끼우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설마 성별을 숨기고 이런 남자 소굴에 들어오는 너 같은 또라이가, 세상에 둘이나 있겠냐?” “…….” 즉, 병약미남의 레이다에 걸린 남장 여자는 없다는 소리였다. 그럼 둘 중에 하나였다. 4번 퇴폐미남 제라드가 뭘 잘못 알고 착각을 한 것이든지. 아니면 그 남장 여자2의 변장이 병약미남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기가 막힌 것이든지. *** 퀴즈 클럽에서 빠져나온 나는 자동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역시 식도락 클럽의 파워는 강력하군. 신입 회원으로서 참으로 자랑스러워. 매번 기가 막힌 냄새로 날 유혹하다니.” 물론 나는 그 유혹에 홀림을 당할 의향이 충분했다. 그런데 코를 킁킁거리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뭐야? 이 맛있는 냄새는?” “옆방인데요?” “식도락 클럽 명패가 달려있네.” “빨리 들어가 봅시다.” 어라? 분명히 조금 전까지 퀴즈 클럽에 와서 답을 제출했던 공자들이었는데? 어느샌가 전부 코를 킁킁거리면서 홀린 듯이 식도락 클럽으로 줄줄이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맙소사.” 나는 다시 한번 나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말았다. “그 홍보 전단지가 퀴즈 클럽뿐만 아니라 식도락 클럽의 회원까지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있었던 것인가!” 이 막강한 광고 효과에 나는 몹시나 뿌듯해졌다. 가슴을 쫙 펴고 위풍당당하게 식도락 클럽으로 입장했다. 사람들이 방 안 여기저기 빼곡했고 무언가를 하나씩 든 채 베어 물고 있었다. 인파 사이에 놓인 중앙 테이블에는 냠냠신선들이 도란도란 앉아서 무언가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난 그들이 먹는 음식을 보자마자 두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었다. “비켜! 다들 비키라고!” 나는 괴성을 지르면서 우르르 모여 있는 사람들을 헤쳐 앞으로 나갔다. 놀란 학생들이 얼른 옆으로 비켰다. “나도 줘요! 나도 달라고!” 내가 테이블을 쾅 내려치면서 소리치자 열심히 먹고 있던 너구리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다른 냠냠신선들은 자기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전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먹기에만 바쁠 뿐. “아? 알렉시스 공자 왔어요?” 너구리가 오물오물하면서 느긋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저도 주세요! 치맥!!” 그들이 먹고 있는 것은 튀긴 닭고기와 맥주였다. “물론이죠. 맘껏 드세요.” 너구리가 친절하게 옆자리를 내어주면서 치킨까지 끌어다 놓아줬다. “친절한 우리 회장…….” 나는 너구리의 상냥함에 그만 눈물까지 글썽해지고 말았다. “혼자만 먹지 않고 이렇듯 남과 서로 나눠 먹는 것을 좋아하는 신선이었구나. 역시 식도락 클럽이 최고다!” 나는 너구리에게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 너구리는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했다는 듯이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 이심전심인 것이다. 치킨 덕분에 사람들이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었기에, 빠른 속도로 음식이 동이 나고 있었다. “휴우. 퀴즈 클럽에서 조금만 늦게 나왔어도 하마터면 치맥을 못 먹을 뻔했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얼른 따끈따끈한 치킨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너구리를 비롯한 냠냠신선들, 그리고 모여든 사람들까지 전부 한참이나 말없이 치맥을 먹었다. 이윽고 내가 기름진 입가를 대충 닦으면서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켜고 있는데. “그나저나…… 지난번에 제가 없을 때 피자라는 훌륭한 음식을 먹었다면서요?” 뜬금없이 너구리가 입맛을 다시면서 물었다. “네?” “꽤 맛있었다던데. 그 피자라는 요리가.” “맞아요. 그랬죠.” 지난번에 여기서 피자를 만들어 먹었었지. 너구리는 몸 상태가 별로라 일절 움직이기가 싫다며 클럽에 오지 못했던 날이었다. 심지어 그날 4번 퇴폐미남이 직접 피자를 구웠지. “다음에도 만들어서 먹도록 하죠. 꼭. 제, 가, 있, 을, 때.” 너구리가 불끈 주먹을 쥐고 말했다. “그럽시다.” 동의를 해주지 않으면 왠지 한 대 얻어맞을 거 같아서 나는 얼른 동의했다. 29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치맥을 입에 넣고 있으면서도 전에 놓친 피자까지 아쉬워하는 자세는 참으로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너구리 공자, 이제 몸 상태는 좀 좋아졌나요?” 식도락 클럽 회장의 상태는 무척 건강해 보였지만 예의상 물어보았다. 전엔 얼마나 상태가 별로였으면 재수 없이 피자 먹는 날 빠졌을까. “네 괜찮아요. 아픈 건 아니었고 제가 원래 생……” “생?” “생……각을 많이 하면 그냥 계속 누워있고 싶어져서.” “그러시구나. 앞으로 생각을 하시면 안 되겠어요.” “네. 안 해야죠.” “저도 안 한답니다 생각을. 아예. 덕분에 머릿속이 참 깨끗해요!” 내가 으쓱거리면서 나의 청순한 뇌를 자랑했다. “그거야 잘 알죠.” 너구리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도른 공자는 생각이 없지.” 열심히 치맥을 먹던 냠냠신선 중 하나가 불현듯 덧붙였다. “그런데 사실 저도 생각이 별로 없어요.” “먹느라 바쁘니까.” “나도 그런데.” 냠냠신선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계속해서 치킨을 물어뜯었다. 테이블 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뇌의 청순함을 만천하에 인정받고 무척 흡족해진 나는 여기서 내 자랑을 그만둘 생각이 없어졌다. “오늘 방문객이 엄청나지 않나요? 사실 다 제가 홍보 전단지를 돌린 탓이랍니다.” “홍보 전단지요? 우리 식도락 클럽에 홍보 전단지가 있었나요?” 너구리는 회장인 자신조차 모르는 홍보 전단지의 존재에 어리둥절해했다. “아니요, 그게 아니고. 사실은 옆방 퀴즈 클럽 홍보 전단지를 제가 만들어서 뿌렸거든요. 그런데 여기까지 사람들이 모여들 줄이야.” “아아.” 너구리가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그랬군요. 하긴 옆방에 들른 공자들은 항상 여기에 또 들르니까요.” 평소 자주 겪은 일인 모양이었다. 열심히 치맥을 먹던 냠냠신선들이 또다시 한마디씩 고개도 들지 않고 거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더 별나기는 해요. 그렇죠?” “옆 퀴즈 클럽에서 홍보 전단지는 매 학기 돌렸는데, 이런 적은 처음이네요.”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이다니.” “대체 그 홍보 전단지에 무슨 내용을 적었길래 그럴까요?” 마지막 질문이 나오자 모든 냠냠신선들이 먹는 것도 멈추고 대답을 기대하면서 내 낯짝을 일제히 응시했다. “오! 이런 맙소사! 화제의 전단지 내용을 아직도 모른단 말이에요?” 나는 일부러 과장된 말투로 리액션을 보여주면서 신선들에게 되물었다. 이미 학교에 소문이 쫙 났을 텐데! 듣지 못했단 말인가! 그러자 냠냠신선들이 한 명씩 전단지 내용을 추측하기 시작했다. “혹시 먹음직스러운 음식 그림이라도 잔뜩 그려놨나요?” “퀴즈 대회에서 우승하면 맛있는 요리를 대접한다고 적어놨나요?” “맛집 초대 쿠폰이라도 제공하셨어요?” 냠냠신선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문장 하나하나가 모두 어떻게든 음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주옥같았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학교에 그, 남장 여자가 있으니까 누군지 맞춰보라는 퀴즈를 냈어요…….” 전혀 음식과 연관이 없어서 자신감이 팍 꺾인 내 말끝이 작아졌다. “아아. 퀴즈.” “그런 퀴즈를 냈군요.” “음. 퀴즈구나.” 냠냠신선들이 왠지 실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마디씩 하더니 다시 치킨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따위 사소한 퀴즈에는 관심이 없는 얼굴들. “역시 신선들은 달라……! 아무도 남장 여자의 존재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구나……!” 정말이지 존경스러운 자세였다. “한낱 세속적인 가십에 휩쓸리지 않는 신선들의 평상심이란! 정말이지 앞으로 나도 본받아야겠어.” 나는 신선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굳게 결심했다. 열심히 치킨을 물어뜯고 냠냠거리며 맥주까지 홀짝홀짝 들이켜는 이들. 속세의 일 따위야 어떻게 되든 아무 신경 쓰지 않고서, 무릉도원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 그런데, 유독 그 신선들 중에 한 명만이 먹던 치킨을 내려놓은 채 묘한 표정으로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너구리였다. 너구리의 눈길을 느낀 내가 동물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래요? 너구리 공자.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 너구리는 날 빤히 주시하다가, 무언가 꺼내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잠시 입을 달싹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거기에.” 너구리가 손가락으로 대충 내 얼굴 어딘가를 가리켰다. 나는 손으로 내 얼굴을 더듬거리다가 치킨 부스러기 같은 것을 털어냈다. “고마워요.” “아뇨, 뭘요.” 우리는 다시 먹기 시작했다. ***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다시 출출해져서, 난 <사기 근절> 머리띠를 두르고 룰루랄라 만찬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휘황찬란한 광채를 내뿜는 절4 멤버와 만찬장 문 앞에서 마주쳤다. “알렉시스! 마침 잘 만났다.” 4번 퇴폐미남이 반가워하는 얼굴로 씩 웃으면서 내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근로장학생들한테 사과 다 했거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날 무서워하며 도망쳐다니던 마지막 녀석을 붙잡아서 사과를 마쳤지.” “뭬야?” “뭘 모르는 척이야. 이제 우리 겸상해야지?” 퇴폐미남이 내게 눈웃음을 날렸다.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 만찬장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어? 앗. 카일님!” 마침 만찬장 안에서 나오던 3번 금욕미남을 보고는 내가 걸음을 멈추고 반갑게 불렀다. “식사하셨어요? 맛있게 드셨는지 모르겠군요! 차렷! 경례!” 내가 활짝 웃으면서 3번에게 경례를 하자, 옆에서 퇴폐미남이 인상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렸다. “…….” “…….” 퇴폐미남이 고갤 돌려 카일을 노려봤지만, 카일은 그런 퇴폐미남을 완전히 무시하듯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카일은 내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반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네, 저는 방금 식사를 마쳤습니다. 그럼 저녁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알렉시스 공자.” “물론이죠! 전 항상 맛있게 먹는답니다! 맛없게 먹는 날이 없어요! 식도락 클럽 신입 회원이거든요!” 내가 다시금 만면에 웃음을 지으면서 헤헤거렸다. 순간 퇴폐미남과 금욕미남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고, 불꽃 튀는 눈싸움이 벌어졌다가…… 금욕미남이 무시하고 가버리면서 마무리되었다. “저런 자식이 뭐가 좋다고 헤헤거려? 정신 못 차리나?” 퇴폐미남이 대뜸 서늘한 목소리로 내게 따졌다. 3번과 4번이 앙숙인 거야 원래부터 원작의 설정이긴 하지만, 둘 사이에 껴 있는 나도 답답했다. “그래도 카일님이 나한테 얼마나 친절하고 상냥한데. 아까 그 빛나는 미소를 보지 못했어?” “하. 빛나는 미소? 의뭉스러운 비웃음밖에 못 봤는데 말이지. 알렉시스 너는 누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나 보고 꼬리를 흔드나? 네가 개인가?” “아니 개는 다니엘 공자고.” “…….” “물론 나는 개처럼 여러 인간들과 친하기는 하지. 카일 공자도 포함해서 말이야. 하지만 난 개는 아니야.” 나는 단언했다. “나는 친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 당연한 일이지 뭐. 나의 이 엄청난 존재감과 친화력으로 안 친해질 수가 없거든……. 즉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전부 내 친구라고.” 전생에서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외톨이었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뭐, 친구 사귀는 건 좋은데 저 거ㅈ…… 카일 새끼는 안 돼. 저놈이랑은 가깝게 지내지 마라.” “거참 당황스럽네.” 그러한 충고가 바로 그 누구도 아닌 원작의 악역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러는 싸바 너도 뭐 가깝게 지낼만한 상대는 아니잖아? 시도 때도 없이 여주나 비열하게 괴롭히던 놈이 말이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더니…….” 난 이세계인들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속담까지 꺼내 들었다. “아무튼 난 카일님께 충성 바치면서 살 작정이니까 남의 인생에 신경 꺼.” 퇴폐미남의 얼굴이 팍삭 구겨졌다. 그는 전에 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아아, 그러신가? 꼬리나 흔들면서 카일 시종 노릇이나 하시겠다고? 누구는 시종 많아서 좋겠군그래.” “하여간 누가 싸바 아니랄까 봐 꼬여 가지고는. 대체 카일 공자는 왜 싫어하는 건데? 전에 무슨 일 있었는데?” 궁금해진 내가 물었다. 3번과 4번이 왜 앙숙인지는 원작에서 읽지 못해 무척 궁금했다. 아마 원작 뒷부분엔 나오지 않았을까. “…….” 퇴폐미남은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빠졌는지, 대답도 없이 입을 다물어버렸다. 찬바람 펄펄 풍기는 놈의 표정을 보니까 더 캐묻기도 좀 그래서 나도 입을 다물었다. 퇴폐미남은 뚜벅뚜벅 안으로 걸어가더니 먼저 만찬장의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나도 놈을 그냥 한번 노려봐주면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우리 앞으로 어스아이들이 차려놓은 진수성찬이 놓여 있었다. 4번과 나는 서로 아무런 말도 없이 각자 앞에 놓인 향긋한 버섯 수프를 비웠고, 이후 본격적으로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달콤한 고구마 요리와 이색적인 소스가 뿌려진 샐러드도 간간이 입에 쑤셔 넣어주었다. “…….” “…….” 식도락 클럽의 회원들답게 먹기만 하던 나와 퇴폐미남. “겸상하니까 좋군.” 먹을 게 들어가자 드디어 기분이 풀렸는지, 이윽고 퇴폐미남이 입가에 여유만만한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영광인 줄 알아라. 악역이 감히 나랑 겸상을 하다니.” 내가 콧대를 높이 추켜올리면서 거만한 태도로 대꾸했다. 퇴폐미남이 피식 웃더니, 크림소스가 섞인 호박 요리를 맛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30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와장창, 어디선가 접시 떨어져서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컥…….” 만찬장 저쪽 끝에서 어떤 공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채로 손으로 심장 부근을 움켜잡고 있었다. 그 바람에 접시 몇 개를 쳐서 떨어트렸던 것이다. 자리에서 비틀거리는 공자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얬다. 그 공자의 얼굴이 조금 낯익었다. 근로장학생 모임에서 봤던 근로장학생 중 한 명으로 엑스트라였다. “뭐야? 왜 저래?” “숨을 못 쉬는 것 같은데요?” “브랜든 공자! 괜찮아요?” 주변 공자들이 놀라서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가가는 순간. “커헉…….” 쿵. 브랜든이라는 이름의 근로장학생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며 졸도해버렸다. “꺅! 뭐야! 뭐야!” 만찬장 안에서 음식을 교체하던 어스아이들이 자리에 그대로 선 채로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만찬장 안에 소란해지고,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우르르 달려갔다. 퇴폐미남은 원래는 별 관심 없는 것 같았지만 내가 먼저 자리를 뜨자 일어나서 따라왔다. “정신을 잃었나 봐!” “빨리 의무실에 데려가요!” 다들 웅성거리며 모여들며 잇따라 외쳤다. 몇몇 사람이 바닥에 엎어진 모습으로 쓰러진 브랜든 공자를 뒤집었을 때. “……헉!” 모여든 이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켜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나도 바닥에 쓰러져있는 브랜든 공자를 내려다봤다. “…….” 두 눈이 하얗게 뒤집혀 있고, 몸은 전혀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상태로 봐선 숨이라도 거칠게 쉬어야 할 것 같았지만, 심장 근처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고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죽은 거예요?” “모, 모르겠어요.” 충격이 주위를 휩쓸었다. “어떡하지? 어떡해!” 공자들 사이를 뚫고 들어온 어스아이들도 옹기종기 서로 모인 채 귀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나 어스아이들은 딱히 어떤 조처를 할 생각은 없는지, 쓰러진 브랜든 공자에 대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대다수의 어스아이들은 여우족의 특성 때문에, 본래 자기에게 본래 주어진 일 이상으로 무얼 적극적으로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보다 못한 내가 나서서 브랜든 공자의 맥박을 확인했다. “……사망했어요.” 수없이 많은 암살자를 죽여본 원작 여주의 기억을 가진 나는, 맥박을 짚어보기 전에도 브랜든 공자가 이미 사망 상태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맥박을 짚은 건 그저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죽었다는 내 말에 주변 사람 모두가 굳은 얼굴을 했다. 어스아이들이 귀를 늘어뜨린 채로 서로 쳐다보더니 일제히 “아아!” 하고 하늘을 보고 슬픈 얼굴로 탄식했다. “여기 이렇게 놔둘 수 없으니 의무실에 옮기는 것이 좋겠군.” 퇴폐미남이 나와서 주변을 정리하듯이 말하자, 그제야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 “이봐, 너희가 데려갈 수 있겠나?” 제라드가 어스아이들에게 묻자, 어스아이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에! 공자님!” 시키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지만, 시키면 또 하는 게 어스아이였다. 어스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람들도 주변에서 물러났다. 곧 시신이 들것에 실려 만찬장에서 빠져나갔다. “교장실에 가서 알려라. 브랜든 커쉬 공자가 죽었다고.” 퇴폐미남이 남은 어스아이들에게 일렀다. 어스아이들은 한데 모여 가위바위보를 해서 전령을 결정했다. 어스아이들의 가위바위보는 인간이 봤을 때는 다 똑같은 바위였다. 전부 동글동글한 찹쌀떡처럼 보여서 구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자기네들끼리는 용케 알아보고 가위바위보를 마친 그들. 전령이 된 어스아이가 우다다다 교장실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평소에 무척 건강해 보였는데.” “대체 왜 갑자기 그렇게 픽 쓰러져서 죽었을까요?” 만찬장에 남아있던 공자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로 웅성거리면서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제법 충격적인 사건이라 그런지 다들 만찬장을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 예상과 달리, 공자들은 뜻밖에도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식사를 계속했다. 식사보다는 조금 전 일에 대해 서로 떠드는 게 주목적인 것처럼 느껴졌지만 말이다. “브랜든 공자가 먹은 음식들은 조사가 필요하니까 따로 치워놓도록.” 현장 가운데에 서 있던 제라드가 주변의 어스아이들에게 일렀다. “음식을요? 조사요? 공자님?” 어스아이들이 일제히 되물으면서, 두 눈을 퇴폐미남에게 고정한 채로 두 귀를 쫑긋거렸다. 어스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만 지을 뿐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이자, 퇴폐미남이 덤덤하게 설명했다. “원인 조사가 필요하니까. 음식에 ㄷ…… 그러니까, 문제가 있었을지 모르니.” “에이, 아녜요! 음식에 문제라뇨! 음식들은 전부 신선한 재료를 사용했는걸요! 제라드 공자님!” 어스아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저으면서 한목소리로 외쳤다. 만일 식중독이었다면 그렇게 갑자기 심장을 부여잡고 즉사할 리 없었다. “오해가 있나 보군. 너희들이 만든 음식이 잘못됐다는 뜻이 아니다. 예를 들면 알레르기 같은 것일 수 있다는 뜻이지.” 제라드의 말에, 어스아이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분분한 의견을 교환했다. “알레르기? 알레르기 쇼크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거야?”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긴 해.” “어쩌면 그냥 음식물이 기도에 걸린 걸지도!” “다른 원인일 수도 있잖아! 왜 꼭 음식이랑 연결시키는데!” “세상에, 만찬장에서 공자가 죽은 건 처음이야!” “백 년 전에 노교수는 한 명 있긴 했지!” 듣던 난 깜짝 놀랐다. 오잉? 저 어스아이들이 백 년 전에도 여기 있었다고? “어쨌든 제라드 공자님 말대로 음식은 따로 보관해놓는 게 좋겠어!” “맞아! 나중에 교장이 확인해보자고 할지도 몰라!” 어스아이들이 종알거리더니 결국은 제라드 말대로 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죽은 공자가 남긴 음식 그릇을 따로 다른 곳으로 옮겼다. “혹시 모르니까 같은 테이블에 있던 음식도 다 치우는 게 좋겠어. 다른 사람들이 먹지 못하도록.” 퇴폐미남이 말하자, 어스아이들도 평소처럼 활발한 목소리로 "네!" 하고 서둘러 움직였다. 나는 밥 생각은 이미 없어져서 말없이 만찬장을 나와버렸다. 제라드는 평소 같으면 퇴폐미 공격을 날리면서 내 뒤를 쫓아왔을 텐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힐끔 뒤돌아봤을 때, 그는 현장 근처에 우두커니 서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 만찬장에서 사망한 브랜든 공자의 사인은 심장마비로 판명 났다. 식중독도, 알레르기도, 기도에 음식이 걸린 것도 아니었다. 음식과는 아무 관련도 없었다. 워낙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보니 학교가 뒤숭숭했다. 여기저기서 온갖 억측을 해댔다. 평소에 운동을 안 해서 그렇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렇다, 시험 스트레스로 무리가 온 거다 등등. 어쨌든 결론은 심장마비였다. 시신은 곧바로 가문으로 되돌려 보내졌고, 장례도 그쪽에서 치러진다고 했다. 뒤숭숭한 분위기도 잠시. 상위 귀족도 아니고 평소 존재감 없던 가난한 근로장학생이었던데다, 사인도 명백해서인지, 며칠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전부 잊어버렸다. 공자들은 수업 시간마다 강의실을 찾아다녔고, 과제를 하느라 바빴으며, 남는 시간에는 승마장에서 말을 타거나, 홀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카드 게임을 하며 놀곤 했다. 나도 어느 틈엔가 브랜든 공자라는 엑스트라가 급작스레 쓰러져 죽은 일을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었다. “심장마비라……?” 어느 날 퀴즈 클럽에 먹을 걸 싸 들고 쳐들어갔을 때, 우연히 병약미남이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하루하루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흘러갔다. *** 검술 수업에 가 보니 평소보다 두 배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도 1반과 2반의 합동 수업이라는 뜻이었다. “멍뭉이? 멍뭉아 어딨니?” 나는 휘휘 주변을 둘러보며 애타게 부르짖으면서 다니엘을 찾았다. 2반의 교수인 술주정뱅이가 나와 있는 걸 보니 분명 다니엘도 있어야 정상인데. 지각인지 아직 눈에 뵈질 않았다. “누굴 그렇게 간절히 찾나?” 퇴폐미남이 불쑥 뒤에서 나타나 또 나를 놀라게 하면서 퇴폐미 공격을 날렸다. “안 보이니까 좀 비켜! 난 우리 강아지 찾아야 한단 말이야!” “흠, 다니엘 공자의 환심을 사고 싶다면 그놈의 강아지 소리는 그만두는 게 좋을 텐데.” 말은 짐짓 이렇게 해도, 사실 내가 1번을 강아지라고 부르면 제일 킥킥거리면서 재밌어하는 게 바로 이 녀석이었다. “곤란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님을 형님이라 부르지 못하며 강아지를 강아지라 부르지 못하면! 여기가 무슨 조선 시대나 다름없잖아!” 내가 파바박, 태권도 방어 자세를 취하면서 대꾸했다. “그렇게 우리 강아지니 뭐니 하면서 살살 약 올리면 다니엘 공자가 더 심기 불편해지지 않겠나?” “아니 내가 언제 살살 약을 올렸다고?” “정말 몰라?” 퇴폐미남이 재밌다는 듯이 반문했다. 나는 정말이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만 갸웃거렸다. “아, 바로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얼굴로 대놓고 엿을 먹인다 이거지. 역시 대단하다.” 퇴폐미남은 킥킥거리고 웃으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 와중에도 놈의 온몸에서 절절 흐르는 퇴폐미 때문에 나는 정신이 어질했다. “좀 저리로 떨어져라. 지금 너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거든.” 내가 허공에다 태권도 찌르기를 날려서 퇴폐미 공격을 퇴치했다. 퇴폐미남은 그런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진짜로 아무 말도 안 하고 내 곁에서 조금 떨어졌다. 31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엇? 우리 멍뭉이 왔네?” 마침 다니엘이 그 절정 외모를 발하면서 연무장 안으로 들어오더니, 자기네 반 학생들이 모인 곳으로 합류했다. 나는 얼른 방방거리며 뛰어가서 다니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대……” 대형견아 안녕? 이라고 제대로 인사를 하기도 전에. “악! 시발 뭐야! 이 눈깔은!” 날 보자마자 유독 소스라치게 놀라는 대형견. 그러더니 뒤로 후다다다다닥 잽싸게 물러나는 게 아닌가. 대형견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다른 2반 학생들까지도 경계하듯이 날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음, 대형견아 안녕?” 나는 하려던 인사를 마저 했다. 그리고 활짝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어주었다. “……누구세요?” 대형견은 시선을 슬쩍 피하더니 난데없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못 알아보는 척을 했다. “초면에 왜 나한테 알은체를 하는지 모르겠군. 우리 반도 아닌 것 같은데 얼른 저리로 떨어지지 그러세요?” “음? 이놈의 개자식이 왜 이러지?” 내가 개 주인인데. 자기 주인을 못 알아보다니. “…….” 또다시 자길 개라고 하자 대형견의 얼굴이 단번에 분노로 바뀌었다. “시발 나한테 개라고 하지 말라고!” “그치? 너 나 알지?” “뭔 개소리야! 우린 초면입니다. 누구시라구요?” “우리 멍뭉이 왜 그러니? 혹시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거야? 왜 갑자기? 어디 머리라도 부닥쳤어?” 나는 진정으로 1번의 상태를 걱정하면서 기억상실증이라고 혼자 확신했다. “기억도 잃었는데 개라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힘들었겠구나. 거참 불쌍한 강아지 같으니라고.” 내 진심 어린 걱정을 듣고 2반 학생들이 침묵에 휩싸였다. 하지만 대형견은 머뭇거림 없이 대꾸했다. “맞아. 머리를 부닥쳤어. 아무튼 난 너 모르니까 앞으로도 영, 원, 히, 모르도록 하자고. 그럼 어서 저리로 가주겠니?” “아, 우리 강아지가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인데 내 이름은……” “몰라! 알고 싶지 않다고! 난 기억상실증이라니까?” 다니엘이 두 귀를 손으로 막아버리면서 눈을 질끈 감고 날 외면하며 왈왈 짖었다. 그런 다니엘의 모습을 주변의 2반 학생들이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후우…….” 나도 마찬가지로 대형견의 상태에 참으로 안타까워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할 수 없구나. 기억상실증 환자라면…….” 아무리 대형견과 놀아주고 싶어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었다. “아픈 강아지는 회복이 우선이니까. 알겠어. 그럼 꼭 회복해서 나중에 같이 놀자.” “안 놀아, 필요 없어.” 대형견이 또 왈왈 짖었다. 나는 개를 뒤로 하고 터덜터덜 우리 반이 있는 쪽으로 도로 걸어왔다. 잘생긴 강아지가 아프다니까 내가 참 마음이 아팠다. “다니엘 공자를 개자식도 모자라서 이번엔 기억상실증으로 만들어 버렸군. 엄청난걸.” 이 모든 광경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던 퇴폐미남이 말했다. 그때 수업 종이 땡 치고 무림 고수가 우리 반 학생들 앞으로 나왔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오늘은 중간 평가가 있는 날일세.” “네에?”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들 알고 있다고? 중간 평가라는 걸? “세상에. 왜 난 처음 듣지? 벌써 시험 기간이라니? 도대체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린 거야?” 하긴 그동안 이런저런 사건 사고를 겪느라고 바빴지. 수업은 전부 흘려들어서 몰랐는데, 벌써 학기가 절반이나 지났단 말인가! 내가 혼자 흘러간 시간을 한탄했다. 아무튼 무림 고수는 말했다. “오늘은 특별히 숲속 결계 안으로 들어가서, 마물 사냥을 하겠네. 팀별 시험일세. 각 팀은 3급 마물종을 적어도 한 마리 이상 사냥해야 하네.” “네에?” 내가 또다시 큰 목소리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다들 이 정도 실전은 예상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벌써 사냥을 나간다구요? 게다가 몬, 스, 터?” 마물은 태어나서 구경조차 해본 적 없는 난데…… 난데없이 사냥이라니? “알렉시스 공자.” 무림 고수는 내가 이런 반응을 할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본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이라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검술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 마물 사냥도 충분히 할 수 있다네. 자네도 수업 시간에 열심히 단련했잖은가.” 고수의 말과는 달리, 사실 나는 검술 수업 시간을 전부 날로 먹었다. 이미 황궁에서 생존하기 위해 검술로 다져놓은 몸이라, 다른 공자들이 죽어라 단련할 때 나는 한두 번만 휘두르면 끝인 경우가 많았다. 무림 고수가 그런 내 모습을 ‘열심히 단련’한 걸로 받아들였다면 굳이 그 생각을 바꿔줄 필요는 없지만. “무기가 없는 학생들은 지금 각자 원하는 만큼 거치대에서 챙기도록 하게. 오늘은 원한다면 검 외에 다른 무기를 사용해도 좋네.” 무림 고수가 말하자 나를 비롯한 몇몇이 거치대로 다가가서 무기를 챙겼다. 퇴폐미남은 내가 가져온 수련용 검을 보고는 혀를 찼다. “또 제일 허섭스레기 같은 검을 골랐군. 눈썰미가 꽝이다.” “제 눈깔은 얼마나 잘났다고.” 나도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그때 2반 학생들이 모인 쪽에서 술주정뱅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또다시 선동을 시작했다. “지난번에는 무승부였지만! 오늘은 반드시 1반보다 더 많은 3급 마물종을 사냥해야 할 것이다! 알겠는가 제군들!” “넵!” “무조건 많이 잡으면 잡을수록 좋다! 중간 평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잊지 마라! 오늘은 반드시 1반을 타도하리라!” 감화를 받은 2반 학생들이 전투력에 불타서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이런! 나도 질 수 없지!” 술주정뱅이가 선동하는 꼴을 눈뜨고 두고 볼 수 없던 내가 막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데. “그만 나서라. 제발 가만히 좀 있어.” 퇴폐미남이 날 재빨리 제지하며 앞을 막아버렸다. “하지만 우리 반의 사기가 너무 저조하잖아? 이래서 2반을 이길 수 있겠어?” 내가 조바심을 내면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굳이 왜 2반을 꼭 그렇게 이겨야 하지? 너 완전 2반 교수님하고 똑같은 거 알고 있나? 너도 나중에 커서 2반 교수님처럼 되고 싶은가 보지?” 퇴폐미남이 빠르게 물었다. “……!” 나는 놀라서 홱 술주정뱅이를 쳐다봤다. 술에 취한 것처럼 코가 새빨갛고, 취권을 잘할 것 같이 생긴 중년인. 내가 저 술주정뱅이하고 똑같다고? 저게 내 미래의 모습이라고? “하하하. 4번 네 놈이 마침내 퇴폐미를 상실하였구나? 이건 나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다! 즉시 전쟁을 선포하겠어!” 내가 억지웃음을 토해내며 퇴폐미남을 노려본 채로 이를 악물었다. “감히 나 같은 보약 후유증 환자에게 알코올 중독까지 선사하다니……! 도대체 날 얼마나 폐인으로 만들려고! 이 나쁜 자식이!” “……?” 내가 눈에 불을 뿜으며 큰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퇴폐미남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보약만으로도 벌써 패가망신인데, 거기다 알코올까지……? 후…….” 나의 불타는 상상력에 점점 기름이 끼얹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보약을 잘못 사 먹고 사기를 당해서 전 재산을 잃은 다음, 술까지 처먹고는 인사불성이 되어 교통사고를 당해 저세상으로 승천하라는 뜻이겠지? 그런 거지? 그런 거냐! 대답해!” “진정해라. 진정해.” 퇴폐미남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과거에 네가 뭘 잘못 사 먹고 사기를 당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몸은 멀쩡하잖아? 사기도 우리 학교에서 싹 근절했고. 머리띠까지 하고 다니면서.” “어, 그랬지.” “그럼 이제 알코올 중독만 해결하면 되지.” “…….” 진지하기 짝이 없는 퇴폐미남의 표정 앞에서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근데 알렉시스, 언제부터 알코올 중독이었냐?” 퇴폐미남이 심히 걱정하는 말투로 물었다. 나는 그를 실망시킬 수 없어서 대충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꾸를 해버렸다. “어, 어렸을 때부터…….” 졸지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술 나발을 부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농담인 걸 아는지, 퇴폐미남이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혹시 조만간 <알코올 근절>도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닐 건가?”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며 맞장구를 쳤다. 안 그래도 요즘 <사기 근절>만 하고 다녔더니 좀 질린 참이었다. 그렇게 퇴폐미남과 시시껄렁하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덧 무림 고수를 따라 학교 뒷문을 빠져나와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히잉. 우리 멍뭉이하고 나란히 다정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가고 싶었는데…….” 나의 바람과 현실은 무척 달랐다. 최대한 나와 멀리 떨어진 채로 걸어가고 있는 대형견을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다. “개한테는 개 주인과 거니는 산보가 최고인데 말이야. 왜 하필 개가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개 주인인 나를 까맣게 잊어버렸을꼬?” 정말 인생이란 미스터리였다. 그러다 마침내 내게도 익숙한 노스브리치 나무가 떡 하고 등장했다. 숲속이긴 해도 아직 여기는 결계 밖이었고 마물들이 나오지 않는 구역이라서 안전했다. 좀 더 숲의 중심부로 걸어 들어가자 마침내 빙 길게 둘러쳐져 있는 하얀 울타리가 나타났다. 결계였다. 숲속 담당 어스아이들이 정기적으로 보수를 하는 모양인지, 울타리는 여기저기 판자로 덧대어진 데가 있었다. 그러나 이 울타리는 그저 결계가 있는 위치를 표시해놓은 것뿐, 실제 결계의 역할을 하진 않았다. 실제 결계는 마법이라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윽고 두 고수들이 서로 뭐라고 잠깐 속닥거리더니, 각자 자기네 반 학생들을 불러 앞으로 모았다. 무림 고수가 우리를 보며 말했다. “자, 그럼 내가 이름을 부르는 대로 한 팀일세.” 32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그러더니 출석부를 보고 다섯 명을 한 팀으로 묶었다. 우리 반에는 총 스무 명의 학생이 있었기 때문에 팀은 총 4개가 나왔다. 2반도 마찬가지였다. “휴우! 다행히 퇴폐미남하고는 다른 팀이구나.” 팀이 다 결정되자 나는 안도하면서 4번 곁에서 확 떨어졌다. 중간 평가까지 4번과 같이 다니며 퇴폐미 공격을 처맞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때 무림 고수가 갑자기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왔다. 고수는 갑자기 내 어깨에 턱, 하고 손을 얹으면서 이렇게 신신당부를 했다. “알렉시스 공자, 자네가 특별히 걱정되는군. 꼭 팀원들과 같이 다니게나. 괜히 혼자 쏘다니다가 사고 치지 말게.” “그걸 왜 저한테만 말씀하세요? 다른 사람 다 놔두고요? 저 지금 특별대우 받는 건가요? 기분이 엄청 좋네요?” 특별 관심에 내가 흥분했다. “그야 자네는 어디로 튈지를 모르는 폭탄이니까. 괜히 팀을 공중분해 시키지 말라는 이야길세. 자네는 실력만큼은 뛰어나니 다른 팀원들을 잘 따라가다가 위험할 때 도와주게나.” 무림 고수는 잔잔한 말투와는 달리 신랄한 독설을 서슴지 않고 있었다. 역시 고수는 고수였다. 아닌 척하면서 공격력이 엄청난 것이었다. “참나. 제가 왜 폭탄이라는 거죠?” 폭탄이란 말에만 필이 꽂혀서 따지려고 들려는데, 저쪽에서 퇴폐미남이 심드렁하게 딱 한 마디 거들었다. “맞지 뭘, 폭탄.” 나는 고개를 홱 돌려 퇴폐미남을 노려보며 발끈했다. “저 자식이……! 맨날 퇴폐미나 투척하는 주제에. 우리 반에 폭탄이 있다면 바로 너지. 내가 아니고.” 퇴폐미남은 쿡 하고 웃을 뿐, 딱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허허, 두 사람은 언제나 사이가 참으로 좋아 보이는구만.” 우릴 보던 무림 고수가 끼어들면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이 같은 팀이 되어서 제라드 공자가 알렉시스 공자를 좀 보살펴 줬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다른 팀의 전력이 너무 떨어지게 되니 안 되겠지. 자, 그럼 팀은 이렇게 최종 결정하는 걸로 하지.” 그러자 그간 내가 신경도 안 썼던 다른 학생들이 한마디씩 했다. “맞습니다. 팀은 이렇게 하는 걸로 하죠.”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교수님.” “잘됐네요.” “휴, 마음이 놓인다.” “저 미ㅊ…… 도른 공자만 우리 팀이 아니면 돼.” 문제는 그렇게 한마디씩 던진 학생들은 전부 내 팀이 아닌 다른 팀 학생들이라는 거였다. 반면, 나와 같은 팀의 학생들은 그저 죽상이 된 채로 착잡함이 담긴 한숨만 땅이 꺼져라 푹 내쉬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우리 반 학생들을 바라보며 배신감에 몸부림을 쳤다. 마침 2반도 팀 구성이 끝났는지 술주정뱅이와 무림 고수가 다시 접선했다. 곧 술주정뱅이가 학생들 앞으로 나와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주목! 각 반의 제군들! 주의 사항을 알려주겠다!” 공자들의 눈길이 전부 술주정뱅이에게로 집중되었다. “다들 알겠지만 목표는 3급 마물종을 잡는 것이다! 그 이상의 상위 마물종은 위험할 수 있으니 절대 잡으려고 하지 말고, 마주치면 무조건 피하도록 한다!” 곧바로 무림 고수가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만에 하나, 심각한 위기 상황이 닥친다면 신호탄을 쏘게나. 신호탄을 쏘면 교수들이 곧바로 달려갈 걸세. 그럼 해가 지기 전에 잡은 사냥감을 들고 노스브리치 나무 앞에서 집합하게나.” “넵!” 양 반의 학생들이 동시에 우렁차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의문이 있었다. 그래서 손을 번쩍 공중으로 쳐들었다. 술주정뱅이는 나의 그러한 행동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무림 고수는 인자한 낯으로 나를 보며 받아주었다. “왜 그러나 알렉시스 공자?” “위험 상황에서 신호탄을 쏘면 고수님들이 달려오겠다고 하셨는데요. 그전에 1급 마물종을 떼거리로 만나면 고수님들이 오기 전에 상황 종료되는 거 아닙니까? 물론 저한테는 1급 마물종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허허허.” 무림 고수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우려할 것 없네. 일단 1급 마물종은 떼로 움직이질 않으니까. 한두 마리 만나더라도 공격하지 않고 무조건 도망가면 굳이 쫓아오지 않을 걸세. 신호탄을 쏠 경우, 우리 교수들은 특별한 비행 장치를 타고 이동할 거라서 금세 현장에 도착할 수 있네.” “비행 장치? 이쪽 세계에도 벌써 그런 게 있어요?”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림 고수가 미소를 지으며 뭐라고 더 설명하려는 찰나, 옆에서 술주정뱅이가 재촉했다. “자, 빨리 서두릅시다.” 그러자 무림 고수도 입을 다물고 서둘러 학생들에게 일일이 약초 주머니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약초는 혹시라도 다치면 바르게나. 신호탄은 팀에 하나씩만 지급되니까, 각 팀에서 뽑은 팀장들만 나와서 받게.” 이쪽 세계의 신호탄이라는 것은 작고 긴 투박한 나무 원통에 줄이 달린 것으로, 줄을 세게 당기면 불꽃과 색색의 가루가 터지는 것이었다. “암. 당연히 내가 팀장이니 이런 건 내가 받아야지.” 우리 팀에서 내가 팀장을 자처하면서 먼저 앞으로 나섰다. 우리 팀의 멤버들이 한숨을 또 한 번 길게 내쉬었다. “네가 팀장이라니, 너희 팀도 참 큰일이군.” 자기 팀과 같이 있던 제라드가 날 향해 말했다. 이놈은 왜 계속 내 일거수일투족에 신경 쓰는지 모르겠다. “참나. 너희 팀이나 신경 써. 우리 팀은 내가 잘 보살필 테니까!” 물론 팀원을 보살필 생각 따위야 없었지만, 짐짓 그리 선언했다. 바로 그때 무림 고수가 우리 팀에게 다가왔다. “흠, 이 팀은 아직 팀장을 정하지 못한 모양이군. 그럼 신호탄은…… 거기, 자네가 받게.” 뜬금없이 무림 고수가 나 말고, 제일 덩치 큰 팀원을 지목하며 신호탄을 건네주려고 했다. “왜요! 나도 신호탄 주세요! 내가 팀장이란 말이에요!” 나도 신호탄 쏘고 싶어! “역시 안 되겠군. 줬다가는 아무 때나 쏘아 대겠어.” 무림 고수가 혀를 차며 덩치에게 신호탄을 재빨리 건넸다. “이놈의 무림 고수가…… 벌써 나에 대한 파악을 끝내다니…….” 역시 고수는 고수로구나. 고수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어. 내가 신호탄을 마구 쏘아 댈 걸 알고 있다니. 비록 신호탄을 놓쳤지만 새삼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는 생각에 경탄에 빠지고 말았다. 퇴폐미남 팀에서는 웬걸로 제라드 놈이 팀장이 됐는지, 무림 고수가 놈에게 신호탄을 순순히 건넸다. 퇴폐미남네 팀원들도 그가 팀장이 된 데에 아무런 불만이 없어 보였다. “흥. 그깟 신호탄 따위는 없어도, 우리 팀에서는 내가 팀장이지, 아무렴.” 나는 왠지 제라드를 내심 부러워하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나 우리 팀원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알렉시스 공자는 그냥 무시할까요?’ ‘그냥 처음부터 없다고 치죠.’ ‘도른 공자에게 말려들면 마물을 한 마리도 못 잡을지도 몰라.’ 팀원들은 서로 눈빛을 통해 암묵적으로 그런 대화를 교환하는 듯했다. 그걸 눈치챈 내가 두 눈을 치켜뜨며 몹시나 인자한 신사임당 같은 모습으로 팀원들을 쳐다보았다. “…….” “…….” 신사임당의 인자한 시선을 견디지 못한 팀원들은 입을 다물고 날 외면했다. *** “알렉시스, 너 신호탄 없지? 혹시 도움이 필요해지면 이 호각을 불어. 내가 도와주러 갈 테니까.” 결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퇴폐미남이 내게 슬쩍 다가와서 내 손에 작은 나무 호각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난 놈이 준 호각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내려다보곤 고개를 들었다. “혹시 지금 날 무시하는 거냐? 내가 무슨 호각이 필요해? 난 1급 마물종도 혼자서 때려잡을 수 있는 몸이신데 그걸 잊었어?” 단 한 번도 마물 따위 본 적이 없었으나 내가 이 소설의 여주니만큼 그쯤은 아무것도 아닐 게 분명했다. 1급 마물종도 칼질 몇 번이면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난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튼 필요하면 호각 불어라.” 퇴폐미남이 무심히 말하더니 자기네 팀에 합류해서 가버렸다. 바로 그때, 앞에 가던 술주정뱅이가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랗고 두툼한 가방을 벗었다. 무림 고수가 다가가서는 그 가방에 달린 줄 하나를 확 잡아당겼다. 파아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단숨에 팽팽하게 공기가 들어가고, 커다랗고 동그란 풍선이 그들의 머리 위에 떡하니 만들어졌다. “아, 저거구나, 비행 장치가.” 나는 멈춰서서 관심 있게 지켜봤다. 다른 학생들도 일제히 눈길을 그곳에 모았다. 빵빵한 풍선 밑에 대롱대롱 달려있던 짧은 막대를 쑥 잡아당기자, 2명이 나란히 서서 잡을 수 있는 기다란 조종대가 만들어졌다. 고수들은 조종대에 대롱대롱 달린 줄과 버클로 몸통을 각자 묶었다. 이후, 풍선 아래쪽에 부착된 철통에 있는 레버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화악, 하면서 불이 붙는 소리가 났다. 마침내 비행 장치를 타고 고수들의 몸이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열기구 같은 거구나.” 열기구인데 사이즈가 좀 작고 사람 두 명이 대롱대롱 매달릴 수 있는 2인용 기구였다. 나는 금세 심드렁해졌지만, 상당수의 학생들은 무척 경탄하며 하늘을 보고 있었다. “진짜 하늘을 날 줄이야…….” “놀라기는. 나는 이미 작년에 두 번이나 봤는데.” “검술 수업 낙제해서 작년에 두 번이나 들었나 보죠?” “어, 그게. 어쩌다 보니.” “우리 형이 타보고 싶다고 노랠 부르던 게 저거였구나. 나도 타보고 싶다.” “교장 선생이 직접 만든 발명품이라던데요.” “교장? 우리 학교에 교장이 있었어요?” “그러게? 왜 난 한 번도 못 봤지?” “저거 파라야 정보 길드에도 하나 있을걸. 교장 선생이 만든 걸 베낀 거지만.” “이 숲의 마물들은 죄다 땅 짐승들이니까, 하늘을 날고 있으면 안전하겠네요.” “난 떨어질까 무서워서 줘도 안 탈 거야.”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공자들은 고수들의 모습이 하늘 저 멀리로 사라지자 그제야 도로 시선을 내렸다. 33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공자들은 잠깐 서로의 눈치를 본 후, 팀별로 모여서 여러 방향으로 알아서 흩어졌다. 우리 팀도 다른 팀과 겹치지 않는 방향으로 두서없이 나아갔다. “엇! 저기 뭐가 있는데!” 내가 풀숲 뒤쪽 어딘가를 가리켰다. 풀숲이 흔들흔들하는 게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이윽고 툭 하고 웬 조그만 동물 하나가 튀어나왔다. “흐이이익!” 내 옆에 있던 팀원 하나가 갑작스러운 튀어나옴에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정작 튀어나온 건 별것 아니었다. 작고 토끼처럼 생겼지만 송곳니가 엄청나게 긴 마물 하나가 두리번거렸다. 슈욱―! 우리 팀의 팀장이기도 한, 덩치 큰 공자가 재빨리 화살을 쏘아 맞혔다. 토끼처럼 생긴 마물이 그 자리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즉사했다. 마물은 온갖 알록달록한 피를 뿌릴 줄 알았는데 인간과 똑같은 붉은 색이었다. “별로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3급 마물종이었어요?” 마물들의 상세한 등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니. 저건 5급이에요.” 다른 팀원이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5급은 마물종 중에서 가장 낮고 위험도가 거의 없는 마물이었다. 1급으로 올라갈수록 위험했다. 그리고 이번 사냥에선 3급 마물종만 잡으면 되었다. “5급이라면 굳이 죽일 필요 없었잖아요?” “미리 손 좀 풀어야죠.” 덩치 녀석은 뭘 그리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이 대답하면서 토끼 마물을 발로 툭툭 찼다. 그리곤 그 자리에 토끼 마물을 그대로 버려둔 채로 걸음을 옮겼다. “…….”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런 덩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죽어 있는 토끼 마물을 내려다보았다. 장난감처럼 사냥당해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좀 불쌍해 보여서, 나는 풀숲 옆으로 토끼 마물을 옮겼다. 발로 흙을 좀 판 다음에 토끼 마물을 놓고, 덤불 가지들을 좀 꺾어서 대충이라도 덮어주었다. 다른 팀원들은 다 덩치 녀석을 따라 떠났기에 거리가 멀어졌지만, 개중에 한 명만은 내 옆에 남아서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 토끼가 튀어나왔을 때 놀라서 비명을 질렀던 심약한 공자였다. 토끼를 묻어준 우리 둘은 앞서간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서둘렀다. 저 앞에서 뒤를 돌아본 덩치와 다른 팀원 둘은 우리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기다려주지 않고 계속 가버렸다. 슈욱! 슈욱! 저 앞에서 덩치가 계속 화살을 쏘는 소리가 들렸고. 다른 팀원 둘도 가끔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와 함께 하급종 마물들이 마지막 비명과 함께 죽어가는 소리가 몇 번 들려왔다. “으으…….” 그나마 내 옆에 있던 심약한 공자는 죽어 있는 마물들을 보며 속이 거북한지 앓는 소리를 냈다. 앞선 일행이 하도 많이 죽여서 이젠 그 마물들을 일일이 묻어줄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꽤 길을 걸었으나, 아직은 3급 이상의 마물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중심부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위험한 마물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흐익!” 날 따라오던 공자가 갑자기 크게 비명을 지르며 얼른 내 쪽으로 달라붙었다. 빠르게 어디론가 쉭쉭거리며 사라지는 구렁이 마물을 보고 놀란 것이었다. “미, 미안합니다. 놀라서 그만. 저도 모르게 자꾸 비명을.” 심약하게 생긴 이 팀원은 괜히 내 눈치를 보면서 얼른 사과를 했다. “그럴 수도 있죠 뭐.” 난 누가 비명을 지르건 말건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까 이 팀원은 왠지 낯이 좀 익었다. 물론 이 수업을 같이 들은 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어디선가 다른 곳에서 전에 본 것 같은데. 누구였더라? 어디서 봤더라. “아, 혹시 근로장학생 아니에요? 어깨춤을 잘 췄죠?” 빤히 그 공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내가 마침내 머릿속에서 기억을 찾아냈다. 근로장학생 식사 모임에서 봤던 얼굴. 내가 너구리 공자를 너구리라고 부를 때마다, 어디 신경이라도 자극을 당했는지 흥겹게 어깨춤을 췄던 공자였다. 딱히 그간 내가 주의를 기울일 일은 없었던 그냥 엑스트라 중의 엑스트라. “어… 어깨춤을 춰요? 제가요?” 상대는 처음 듣는 얘긴지 어리둥절해했다. “네, 어깨춤 공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춤 공자는 엑스트라에서 벗어나서 새롭게 부여받은 자신의 호칭이 아직 익숙지 않은 표정이었다. “지난번 만찬장에서 보니까 어깨춤을 아주 흥겹게 잘 추시던데요?” 내가 즐겁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언제 그랬지?” 어깨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자기가 대체 언제 내 앞에서 춤을 췄는지 기억을 더듬거렸다. “모르면 됐어요.” 내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웃으면서 먼저 걸음을 뗐다. “…….” 어깨춤은 당최 날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일단 옆에 가까이 붙어서 따라왔다. “아, 아무튼, 그래도 알렉시스 공자가 있어서 저는 약간 안심이 되네요.” “그래요? 그런데 아까 같은 팀이 됐을 때는 그렇게 죽상이었어요?” 내가 정곡을 찌르자. “아, 처, 처음에는 저도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앗.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깐. 뭐라 해야 하나…… 아무래도 그, 알렉시스 공자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좀 부담스럽달까.” 어깨춤이 내 눈치를 잔뜩 보며 둘러댔다. “아아! 그랬구나!” 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쳤다. 팀원들이 왜 죽상이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홀연한 깨달음이었다. “내가 너무 유명해서 그런 거였군! 나의 넘치는 존재감을 다들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었던 거였어!” “…….” “역시 유명 인사의 삶이란 참으로 고달프단 말이야! 그냥 돈만 많고, 유명하진 말았어야 했는데……. 왜 거꾸로 됐을까?” “……어, 음. 네, 뭐.” 어깨춤은 도무지 내 말에 어떻게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앞서가던 덩치 일행은 우리가 뭔 대화를 하건 말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들끼리 길을 가고 있었다. “어, 어쨌든, 정작 숲에 들어와 보니까, 그래도 알렉시스 공자가 있어서 다행이다 싶지 뭐예요. 다른 팀원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알렉시스 공자는 우리 학교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나잖아요.” “물론 그렇죠! 내가 최고죠. 퇴폐미남은 꺼지라 그래요.” 콧대를 추켜올린 내가 흐뭇해했다. 그가 말한 ‘다른 팀원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이라는 부분은 전혀 귓등으로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냥 내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뒷부분의 말만 귀를 파고들었던 것이다. 의기양양한 내 모습을 보자 어깨춤은 좀 마음을 놓은 표정으로, 속삭이듯이 내게 이렇게 고백했다. “소, 솔직히 저는 좀 무서워요.” “네?” 갑작스럽고도 비밀스러운 고백에 나도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저는 2학년이긴 하지만 이 숲에 들어온 건 처음이거든요. 검술 실력도 아직 미천하고……. 마물들도 책에서만 많이 봤지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별걸 신경 쓰네. 나도 마물들 보는 건 처음이에요.” 내 말에 어깨춤은 그나마 동지 의식을 느꼈는지 이번에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히이익!” 그러나 언제 미소를 지었느냐는 듯이 어깨춤은 커다란 거미 마물이 보이자 흠칫하면서 비명을 내뱉었다. 그 비명이 들렸는지 다른 팀원들은 저 앞 멀리서 뒤를 돌아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힐끔 쳐다봤다. 그러나 나는 어깨춤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좀 흉측하긴 하네…….” 원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온갖 특이하고 괴상하며 때로는 징그럽기까지 한 생물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하급종들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지만, 그럼에도 내겐 그들의 생김새와 크기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우리 둘은 열심히 발을 놀려서 앞 일행을 거의 따라잡았다. “미친놈도 모자라 겁쟁이까지 같은 팀이라니.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네.” 그런데 앞에서 문득 나지막이 투덜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팀장인 덩치였다. 마물들이 나타날까 봐 조용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그런 독백까지 또렷하게 다 들렸던 것이다. “저 환상의 짝꿍은 딱히 사냥할 마음이 없는 것 같죠?” “신경 쓰지 말아요. 도움받을 일도 없을 텐데. 나중에 교수님한테 사냥감은 우리끼리 잡았다고 말씀드리면 되니까.” “아, 그럼 되겠군요.” 다른 팀원들도 동의하면서 수군거렸다. “…….” 졸지에 나랑 환상의 짝꿍이 되어버린 어깨춤은 아무 반응도 못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난 귀만 후비적거렸다. 우리는 그저 앞으로 계속 나아갔고, 그 이후로 어깨춤은 마물들이 나타나도 절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내 옆에 꼭 붙어있을 뿐이었다. “……그, 그런데 좀 이상한데요.” 문득 주위를 살펴보던 어깨춤이 걸음을 멈추고 중얼댔다. 그러나 겁쟁이의 말이라서 그런지 다른 팀원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나만 걸음을 멈췄다. “왜요?” “나무도 우거지고 이렇게 어두워진 걸 보니까 상당히 숲속으로 깊이 들어온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금쯤이면 3급 마물종을 두세 마리는 마주쳤어야 정상이거든요.” “으음.” “그런데 왜 지금까지 안 나타날까요? 게다가, 우리가 지금껏 마주친 하급종 마물들도…… 이상하게 어디론가 막 빨리 도망치는 것 같지 않았어요?” 어깨춤이 불안한 듯 두 눈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랬나……?” 나는 어깨춤의 발언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지금까지 목격한 하급종 마물들의 행동을 천천히 떠올려 보았다. 처음 만났던 그 토끼 마물도 죽기 전에는 어디론가 황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중간에 만난 구렁이 마물도 쉭쉭거리며 어디론가 빨리 기어가고 있었고……. “그런데 어깨춤 공자. 원래 동물들은 인간을 보면 피하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우리 눈엔 도망가는 것처럼 보인 거겠죠.” 내가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뭐랄까. 우리를 피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때문에 도망가는 그런 느낌 아니었어요……? 마치 지진이 나기 전에 쥐들이 도망가는 것처럼요.” 어깨춤이 불안에 바들바들 떨면서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빨리 3급만 잡고 돌아가야겠네요.” 나는 어깨춤을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담담하게 말했다. “혹시 1급 마물종이 나타나도 내가 다 잡아버릴 테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그렇게 내 말이 끝나자마자. 펑! 어디선가 커다랗게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불꽃과 형형색색의 색소가 하늘 한쪽에 퍼졌다 사라지는 게 보였다. 34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앗! 신호탄이다!” “어떤 팀에서 신호탄을 쐈어요!” 어느덧 훌쩍 앞서 가버린 덩치 일행도 그것을 보고 외쳤다. “신호탄을 쏘, 쏘았다는 건…… 어느 팀이 교수님들의 도움을 요청할 만큼 위,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뜻인데…….” 어깨춤이 눈가에 경련을 일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앞서 있던 덩치 일행 셋의 의견은 사뭇 달랐다. “잘됐어! 한 팀이 낙오됐으니까.” “우리 팀이 제일 많이 사냥합시다.” “이놈의 3급 마물종은 왜 계속 안 나타나는 거야?” 그들은 오히려 신호탄을 보고 좋아하며, 사냥의 의지를 더욱 크게 다지고 있었다. “흠……. 어쩐지 기분이 좀 그런데…….” 왠지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타고난 감이 내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뱃속이 싸하다고나 할까. 2번 병약미남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이런 기분일까? 그러나 여기서 돌아갈 순 없었으므로, 덩치 일행의 뒤를 쫓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펑! 또다시 하늘 한쪽에 신호탄이 터졌다. “…….” 앞서 있던 덩치 일행이 다시 한번 놀라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깨춤은 거의 죽상이 된 채로 하늘을 응시하며 말했다. “처, 첫 번째 신호탄과는 달리 이번에는 상당히 거리가 가, 가까워요.” “음. 그럼 혹시 우리도 도와주러 가야 하는 건가요?” 내가 물었다. 만약에 여기서 가까운 어떤 팀이 신호탄을 터트릴 정도로 위험에 처한 거라면, 다른 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수도 있었다. 그러자 어깨춤이 대답했다. “아, 아뇨, 교수님이 두 분이시니까 괜찮을 거예요. 신호탄을 쏜 팀이 둘이니까, 한 명씩 따로 도와주러 가셨을 거예요.” “아. 그렇겠네.” 내가 고갤 끄덕였다. 하늘을 쳐다봐도 그 소형 열기구를 타고 날아오는 고수들의 모습은 아직 발견할 수 없었지만. 문득 어깨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별로 안전하진 않은 것 같아요. 이 숲에 계속 있는 건……. 차라리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 “나야 상관없지만, 쟤네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은데.” 우리보다 앞서 있는 덩치 일행을 힐끔 쳐다보며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어깨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갑자기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더니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큰 목소리로 소리를 치면서 멀찍이 앞선 덩치 일행을 불러세웠다. “저기요! 제가 의견을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그게 뭐냐면!” 어깨춤은 벌써 다른 팀이 둘이나 낙오되었고, 계속 안으로 들어가는 게 그리 안전하지 않은 것 같으니 지금 결계 밖으로 돌아가자는 내용으로 프레젠테이션을 구구절절이 마쳤다. “뭐라구요?” 덩치가 멀찍이 선 채 마치 제대로 듣지 못한 것처럼 반문했다. “이, 일단 결계 밖으로 돌아가자고요! 신호탄이 두 개나 터졌으니까요.” 어깨춤이 다시 제안했다. 그러나 덩치와 다른 팀원들은 자리에 서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게, 이제는 위험 상황에 부닥치면 교수님들도 도와주러 올 수 없잖아요. 이미 앞의 두 팀을 각각 도와주러 가셨을 테니까……. 그리고 마물들의 상태도 좀 이상한 것 같고…….” 어깨춤이 열심히 부연 설명했다. “황당하네. 돌아가려면 혼자 돌아가요.” 덩치가 차갑게 반응했다. 다른 팀원들의 표정도 싸늘했다. “그냥 처음부터 돌아가고 싶었으면서. 겁먹고 그만두고 싶은 거 누가 모를 줄 알아요?” “신호탄을 쏜 저 두 팀들은 약해서 낙오된 거라구요. 우리 팀이 사냥을 그만둬야 할 이유가 없어요!” 팀원들이 차례대로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덩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쪽은 근로장학생인 주제에 낙제 당해도 상관없나 보죠? 학비도 없으면서 학교 오래 다니고 싶어요?” 어깨춤이 근로장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저러다니. 듣는 근로장학생 기분 나쁘게? “여기서 근로장학생은 왜 붙잡고 늘어져? 죽고 싶냐?” 같은 근로장학생인 내가 발끈해서 덩치를 노려봤다. 아무래도 나는 좀 무서운지 덩치 일행이 살짝 움찔했다. 옆에서 어깨춤도 입술을 달싹거리며 뭐라고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차마 아무 말도 나오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누가 뭐랬나.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라는 거죠. 아무도 말릴 사람 없으니까.” 움찔했던 덩치가 다소 작아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다른 두 팀원과 함께 우리를 내버려 두고 휙 뒤돌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펑! 하늘에 다시 신호탄이 터졌다. 불꽃과 다채로운 색깔들이 한쪽을 물들였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 “…….” “…….” 이번에는 덩치를 비롯한 팀원들도 멈춰 서서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러나 그 충격을 제대로 납득하기도 전에 또다시 귓전을 때리는 소리. 펑! 하늘에 또다시 신호탄이 터졌다. “…….” “…….” “…….” 펑! 그리고 또 다른 신호탄. “어…… 이게…….” 당황한 덩치와 팀원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어깨춤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나는 손가락으로 지금까지 터진 신호탄의 개수를 세었다. “벌써 신호탄이 다섯 개나 터졌잖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이번 수업에는 총 8개의 팀이 있었다. 두 반에서 각각 네 팀씩이었으니까. 그런데 그중에 5개 팀이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는 얘기였다.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심지어 마지막 신호탄은 그동안 터진 모든 신호탄 중에서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였다. “돌아가요! 돌아가! 결계 밖으로!” 어깨춤이 소리를 지르면서 냅다 오던 길로 되돌아 튀었다. 물론 나도 뒤따라 튀었다. 멍청하게 서 있던 덩치 일행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우리 뒤를 따라 달려왔다. “헉. 헉.”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뛰었다. 나는 원체 달리기가 빨라서 선두였다. 한편 심약해 보이던 어깨춤도 나름 발은 빠른지, 나한테 반걸음 정도밖에 뒤처지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겁에 질려서 초인적인 잠재 능력이 발휘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펑! 또다시 신호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뛰어가는 와중에서도 우리는 힐끔 하늘을 올려다봤다. “젠장! 6번째 신호탄이잖아!” “두 팀밖에 안 남았어!” “시발! 대체 무슨 일이야!” 8개의 팀 중에 이제 낙오되지 않은 것은 두 팀. 우리 팀이 아직 살아있으니, 남은 것은 다른 한 팀뿐이라는 얘기였다. “앗! 잠깐! 그럼 우리 강아지는?” 다니엘도 낙오되었으려나? 전체적인 실력으로만 따지자면,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직 살아남은 다른 팀은 퇴폐미남의 팀일 가능성이 컸다. 물론 지금 퇴폐미남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강아지는 죽으면 안 되는데……!” 나는 다니엘의 생사를 걱정하면서 미친 듯이 달렸다. 쿵. 쿵. 갑자기 뒤에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몹시 크고 둔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주변의 나무들에서 잎들이 파르르 떨며 진동했다. 우리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아아악!” “으아아아아!” 덩치 일행이 다들 일제히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요…… 용족이다!!!” 어깨춤이 그 와중에도 용케 무슨 마물인지 알아보고 외쳤다. 용, 그중에서도 특히 적룡의 후손이라고 일컬어지는 용족. 이 마물은 마치 티라노사우루스를 똑 닮았으면서도 눈이 불같이 빨갛고, 날개가 달려있었다. 마물들은 죄다 땅 짐승들이라더니 왜 날개가 달려있는지 모르겠지만……. 거기다 입에서는 화염을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괴물이었다. 그때, 덩치가 용케도 들고 있던 활을 용족을 향해 겨냥했다. “주, 죽어라!” 슈욱―! 덩치의 활에서 화살이 발사되었지만, 화살은 용족의 돌 같은 피부에 맞고 허무하게 튕겨 나왔다. “으악!” 화르르르르! 분노한 용족 마물이 뿜어낸 화염이 어마무시하게 뜨거웠다. 덩치가 그 자리에서 검게 타버리는 광경이 보였다. 검은 잿더미가 바닥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죽어버린 것이다. “된장! 신호탄은 쏘지도 못했잖아. 그러게 팀장은 나라니까……. 왜 저런 놈한테 신호탄을 줘 가지고!” 내가 안타까워하며 중얼거렸다. 그놈의 신호탄은 죽은 덩치한테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지금 쏘아봤자 도와주러 올 교수도 이젠 없겠구나.” 그래도 한 번쯤 쏘아보고 싶었는데. 신호탄. 쿵. 쿵. 땅이 울리고 용족은 무시무시한 태도로 우리를 쫓아왔다. 우린 계속 걸음아 나 살려라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근데 이거 원작에서 언급된 사건인가? 아닌데?” 원작의 여주는 아예 검술 수업을 들은 적이 없긴 하지만……. 만약에 용족이 나타나서 검술 수업 학생들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면…… 학교가 완전히 뒤집혔을 테고, 반드시 원작에서도 언급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용족의 존재라든가, 검술 수업 학생들이 시험 중에 당한 참사 관련 에피소드는 떠오르지 않았다. 콰직! 다시 한번 끔찍한 소리가 들려 뒤돌아봤더니 이번엔 용족이 다른 팀원 하나를 발로 콱 밟아버린 뒤였다. “중간 평가 난이도가 아주 헬이로군.” 나는 비로소 진정한 공포를 느끼며 뇌까렸다. “중간 평가가 이 정도라면 도대체 기말 평가는 어떤 수준이란 말인가……!” 그 와중에 기말시험이 참으로 걱정이었다. 나는 과연 낙제를 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으아아아아!” 옆에서는 어깨춤이 거의 눈물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로 비명을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우리 둘이 무조건 정신없이 뛰고 있는데. 촤자작! 뒤에서 또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호기심에 나도 모르게 또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용족이 날개를 쫙 펴고 있었고 거기에서 사방으로 뿜어진 초록색 액체. 그 액체를 뒤집어쓴 팀원이 그 자리에 연기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이런 슈바! 저건 또 뭐야!” 35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맹독! 맹독! 맹독!” 이제 나와 마지막 길을 함께 하는 동반자가 되어버린 어깨춤은, 공포에 질려 맹독이란 말만 반복했다. “앗. 그랜드 캐니언이다.” 미친 듯이 달리던 나는 전방에 보이는 거대한 틈을 발견했다. 광활한 너비의 바닥이 쩌적 갈라져 있었고, 그 밑으로는 깎아지른 벼랑이었다. 아래엔 뭐가 있는지 몰랐다. 그쪽으로 달려가면 협곡 아래로 떨어져 죽는 셈이었다. 그러나 뒤에서는 화염과 맹독을 내뿜는 용족이 쫓아오고 있고, 도망갈 데는 없었다. “그래, 저 맹독을 뒤집어쓰고 죽느니, 그냥 절벽에서 떨어지는 게 차라리 낫겠어.” 내가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뒤에서 우릴 쫓아오는 용족이 날개를 활짝 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또 뒤를 돌아봤다. “이런……! 사물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구나!” 용족이 내 예상보다 훨씬 우리에게 가까이 쫓아온 상태였다. 그래도 날지는 못하는 걸 보니. “그놈의 날개는 하늘을 나는 용도는 아닌가 봐?” 「그렇다. 아니다.」 엥? 방금 용족이 대답을 했어? “……” 하지만 뭐라고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살해자에게 응징을!」 촤자작! 용족의 날개에서 초록색 액체가 사방으로 퍼져 나왔다. “으아아악!” 푸쉬쉬. 그 자리에서 맹독을 뒤집어쓰고 연기가 된 채 어깨춤이 사라져버렸다. 절벽을 거의 발밑에 앞둔 상태였다. “아오, 끈적거려.” 나 역시 용족이 뿜어낸 맹독을 흠뻑 뒤집어썼지만. 이유는 몰라도 어깨춤과 달리 연기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내가 입고 있던 옷과 검집, 제라드가 준 호각만 전부 녹아버렸을 뿐이었다. “…….” 한마디로 맨몸이라는 뜻이었다. 그것도 초록색 액체로 끈적거리는. 허접한 검조차 녹아서 사라졌기 때문에 마지막 발악으로 용족 한번 잡아보겠다고 싸워볼 수도 없었다. 절벽을 앞에서 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용족을 마주했다. 놈도 내가 자기 맹독에 안 죽은 게 이상했는지 걸음을 멈췄다. 용족의 새빨갛던 눈이, 문득 평범한 뱀처럼 노란색에 검고 가는 세로 선이 있는 눈으로 잠시 되돌아왔다. 「동족인가.」 용족이 물었다. *** “뭔 개떡 같은 소리야.” 용족이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한데 누구더러 동족이래? 하여간 어차피 죽은 목숨이기 때문에, 나는 삶의 미련을 전부 버렸다. 그리고 절벽 밑으로 스스로 몸을 날리기 전, 마지막으로 놈을 쳐다보며 사소하게 궁금한 것을 하나 물었다. “혹시 너 3급이냐?” 3급 마물종이 아니라면 설령 이 녀석을 잡아가도 중간 평가에서 점수는 못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녀석의 눈이 다시 시뻘게졌다. 내 말엔 대답조차 하지 않고 화염을 내뿜으려고 입을 쩍하고 벌리길래, 난 그냥 절벽 밑으로 알아서 뛰어내렸다. “으아아아아아아!” 절벽 밑은 그냥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암흑이었다. 마치 계속해서 떨어지다 보면 지옥으로 연결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중간 평가는 빵점이구나아아아아아아!” 그렇게 비명을 지르다가 문득 눈앞에 무지갯빛 강물이 흐르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어?” 그 무지갯빛 강물이 너무나도 신비로워 보여서 절벽에서 추락하는 나의 처지도 잊고 그만 혼미한 상태로 입을 헤 벌렸다. 이윽고 내 정수리가 강물과 찰랑, 하고 마치 종소리가 울리듯 산뜻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따뜻한 무지갯빛 강물이 내 몸을 온통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엥?” 분명 무지갯빛 강물 속으로 떨어졌는데 난 어느새 숲속에 서 있고, 주변에는 햇볕이 화창했다. “흐이이익!” 내 옆에 있던 어깨춤이 놀란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뭐야? 용족이야?” 내가 놀라서 반사적으로 반문했다. 그러나. 아까도 봤던 토끼 마물이랑 똑같이 생긴 게 풀숲에서 튀어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슈욱―! 덩치가 재빨리 화살을 쏘아 맞혔다. 토끼 마물이 그 자리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즉사했다. “……뭐야 이건. 데자뷔?” 분명 아까 겪은 것과 똑같은 상황이라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게다가 분명 용족한테 죽어버린 덩치 일행과 어깨춤까지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미리 손 좀 풀어야죠.” 이번에는 내가 뭐라고 묻지도 않았는데 덩치가 날 보며 그렇게 말하더니, 토끼 마물을 발로 툭툭 찼다. 그 모습마저 아까와 똑같았다. 덩치는 그 자리에 토끼 마물을 그대로 버려둔 채로 걸음을 옮겼다. “…….” 나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가만.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온 모양인데?” 원인이 뭘까. 용족에게 쫓겨 마지막으로 떨어졌던 그 절벽이 수상했다. “그 절벽이 뭔가 있어 보이더라니. 그게 날 여기로 되돌려 보낸 게 분명해.”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왜 난 죽지 않고 이 시간대로 되돌아온 것일까? 원작에도 이런 건 없었는데. 용족한테 쫓기다 죽었던 게 설마 꿈은 아니었겠지? 한편 이런 날 버려두고 덩치 일행은 앞으로 이동해 버렸고, 이번에도 여전히 어깨춤만이 내 곁에 남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어깨춤이 내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 난 빤히 어깨춤을 쳐다보다가 마침내 무언가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는 주둥아리를 열었다. “이 숲속에서 계속 이러고 있다가는 용족한테 당해서 전부 죽어버릴 것 같은 진리의 깨달음이 오네요.” “네……?” 어깨춤이 당황했다. “용족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그냥 그런 아주 강한, 무척 강한 예감이 든단 얘기죠.” “……에이. 그럴 리가 없어요.” 어깨춤이 주변을 불안하게 마구 살피면서도 굳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족은 겨울에만 활동하잖아요. 나머지 계절에는 동면에 들어서 깊은 잠에 빠져 있고요. 지금은 가을이니 괜찮아요.” “그래요?” 그것참 이상하네. 잘만 돌아다니던데. “지금은 절대 용족이 깨어날 시기가 아니라구요. 그래서 교수님들도 안심하고 마물 사냥 수업을 하실 수 있는 거고…….” “그딴 건 난 모르겠고, 아무튼 용족은 이미 깨어났어요.” 내가 막무가내로 우겼다. 어깨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한 채 날 쳐다보았다. 난 아랑곳하지 않고 주장을 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또다시 전부 죽어버릴 테니, 사냥은 포기하고 이대로 돌아갑시다! 지금이라도 결계 밖으로 돌아가면, 적어도 죽진 않을 테니까.” 내가 성큼성큼 의기양양하게 먼저 발길을 떼면서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아, 아니! 잠깐만! 진짜 가려고요?” 어깨춤이 당황하여 날 붙잡으며 물었다. “어깨춤 공자도 오늘 비명횡사하고 싶지 않으면 날 따라오는 게 좋을걸요.” “…….” 비명횡사라는 말에, 입을 멍하니 벌리고 날 바라보던 어깨춤 공자가 동공에 지진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런……. 이대로 사냥을 포기하면 낙제 받을 확률이 높은데요……? 용족이 깨어났다는 증거는 전혀 없고…….” “아무튼 난 갈 테니 알아서 해요.” 난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서둘러 결계 밖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망설이던 어깨춤은 그런 날 바라보더니 결국 더는 날 따라오지 않았다. 용족이 깨어났을 거라는 내 예감만 믿고 행동하기에는, 나의 예언에 아무런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중간에 생각 바뀌면 돌아와요.” 내가 잠깐 뒤돌아보며 어깨춤에게 마지막으로 충고했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다른 팀원들은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튀라구요.” 덩치 일행이야 조언해봤자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이다. 녀석들이 어디서 비명횡사하든 그것도 내 알 바 아니기도 했다. 그래도 어깨춤에겐 충고는 해놨으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때 서둘러 돌아오면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다른 놈들보다는 눈치가 그래도 좀 있는 것 같았으니까. “뭐야, 도른 공자는 어디 가는 거죠?” “혼자 돌아가나 본데요.” “결국 포긴가. 참나, 별꼴이라니까.” 저쪽에서 덩치 일행이 마치 들으라는 듯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팀원들을 버리고 홀로 터덜터덜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아직 초입이니 결계가 제법 가까운 상태였다. “야호!” 마침내 결계를 표시한 하얀 울타리를 발견한 나는 환호성을 지르면서 당장 달려갔다. 이 결계 안에서만 빠져나가면 내 목숨은 안전했다. “우리 강아지가 좀 걱정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 목숨을 용족한테 버릴 순 없지. 그냥 빨리 학교로 돌아가서 지원군이나 이끌고 오는 게 나을 거야.” 나는 그대로 하얀 울타리를 뛰어넘으려고 돌진했다. 퍼엉!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에 부딪힌 나는 그대로 바닥에 대자로 쓰러졌다. “으억?” 인상을 팍 쓰며 아픈 이마를 매만진 내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더듬더듬. 허공을 더듬어보니 정말로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있었다. 결계였다. “……엥? 이게 뭐야! 왜 나갈 수가 없는 거지?” 투명한 결계가 날 이 숲속에서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 펑! 첫 번째 신호탄이 울렸다. 난 그동안 결계를 마구 때리고 발로 차고 돌도 던지며, 어떻게든 결계를 부수고 넘어가려고 악을 써보았지만. 전부 무용지물이었다. “어떡하지?” 결계 앞에서 왔다 갔다 서성거리며 나는 깊은 고민에 사로잡혔다. 왜 결계를 빠져나갈 수 없는 건지 그것부터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원래 결계는 마물이 숲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쳐진 건데…….” 즉, 마물이 아닌 인간들은 아무런 상관없이 안팎을 오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근데 왜 이러지? “큰일 났군. 결계를 빠져나갈 수 없다면 결국 용족에게 언젠가는…….” 그 뒤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나중에 학교에서 구조단을 보내온다고 해도 내겐 별 소용이 없다. 내 몸 자체가 결계를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평생 이 숲에 묶인 팔자라는 것이다. 거기다 나의 무기는 오로지 허접스러운 수련용 검 한 자루뿐. 그렇게 고민에 잠겨있다 보니. 펑! 두 번째 신호탄이 울렸다. “…….”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일단 퇴폐미남을 만나봐야겠어.” 다른 사람들이야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내겐 현재 유일하게 연락 가능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난 퇴폐미남이 준 호각을 주머니에서 꺼내서 세게 불었다. 삐! 삐! 삐이이이이! 열심히 호각을 불어댄 뒤에야, 불안한 예감이 떠올랐다. “근데 이 호각 소리에 용족도 반응해서 쫓아오는 거 아니야?” 36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잠시 후, 나는 퇴폐미남은 구경조차 못 하고 웬 용족 한 마리에게 미친 듯이 쫓기고 있었다. “이놈의 호각! 다시는 내가 부나 봐라!” 그런데 이번 용족은 피부 색깔이 아까 본 용족이라는 살짝 달랐다. 같은 용족이지만 살짝 더 붉은색이 도는 놈이었다. “이놈의 용족이 도대체 몇 마리나 돌아다니는 거야?” 처음에는 한 마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이었다. 하긴 한 마리뿐이라면 막판에 신호탄이 여기저기서 짧은 간격을 두고 터졌던 게 설명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본능적으로 절벽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왠지 절벽에서 떨어지면 다시 타임 루프할 것 같거든.” 지금은 어차피 용족한테 잡혀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냥 마지막 희망을 거기다 걸었다. 촤라락! 용족이 또 그놈의 날개를 펴고는 초록색 맹독을 뿌렸다. 물론 나는 멀쩡했다. 「동족인가.」 맹독을 뒤집어쓰고도 살아있는 날 보고는 용족이 뒤에서 쫓아오며 물었다. 용족이 딱히 입을 연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놈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텔레파시처럼 들려올 뿐이었다. “아니라니까!” 내가 소릴 질렀다. 그러다가 순간 아차 싶어서 다시 말을 바꿨다. “앗. 그냥 그렇다고 할게. 나 동족이야. 그럼 살려줄 거야?” 「아니군. 살해자에게 응징을!」 처음 봤던 용족과는 다른 놈이지만, 살상력은 동일했다. 화염이 쿠아아아아 뿜어졌다. “으악! 뜨거워!” 맹독은 괜찮았는데 불은 아니었다. 화염이 그대로 내 몸에 활활 달라붙었다. “아뜨뜨뜨뜨……!” 온몸이 불에 활활 타는 채로, 나는 절벽에 도달했다. 워낙 뜨거워서 망설일 찰나조차 없었다. 미련 없이 당장 뛰어내렸다. *** 눈을 떴더니 이번에도 익숙한 토끼 마물이 풀숲에서 튀어나오는 게 보였다. “무조건 이 시각으로 되돌아오는구나. 여기가 루프 시작점이라는 건가.” 내가 중얼거리는 순간, 피융! 덩치 놈이 아까처럼 똑같이 토끼 마물을 활로 쏘아 죽였다. “손 좀 풀어야죠.” 덩치의 대사도 동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그저 홀로 고민에 잠겨 독백을 시전했다. “신호탄이 처음 터질 때까진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그전에 무조건 여기서 탈출해야 해. 하지만 결계가 날 나가지 못하게 막아버리는데 어떡하지? 된장, 우리 똑똑한 피터라면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새삼스레 절4 중에서 가장 똑똑해 보이는 2번 병약미남이 그리워졌다. 전화가 발명되어 있다면 한 통 걸고 싶은 심정이었다. “병약미남이랑 같이 수업을 들었으면 좋았을걸. 아무 쓰잘데기 없는 퇴폐미남이 아니라.” 안타깝게도 육체 활동과는 거리가 먼 피터는 이런 검술 수업 따윈 듣지 않았다. “원인을 알아야 해결을 할 텐데. 도무지 원인을 모르겠단 말이야.” 왜 결계가 날 거부하는지……. “뭘 말인가요?” 옆에서 어깨춤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미 덩치 일행은 저 멀리 앞서 가버린 후였다. “그러고 보니, 어깨춤 공자는 아까 얘길 들어보니까 마물에 대해 제법 박식한 것 같던데요. 그렇죠?” 나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반대 방향으로 옮기면서 어깨춤을 잡아끌고 물었다. “예? 우리가 언제 그런 얘길……?” 어깨춤은 덩치 일행과 반대로 가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나의 손길에 자동으로 이끌려왔다. “척 보면 척이죠. 딱 봐도 마물 박사처럼 생겼구만.” “……하하. 그런가요? 제가 좀 그렇게 생기긴 했죠?” 어깨춤은 덕후처럼 생겼다는 말에 내 예상보다 훨씬 기뻐하고 있었다. “사실 제가 어릴 때 마물 도감을 좋아해서…… 부모님이 처음으로 생일 선물로 주신 책이었거든요 그게. 아주 그 마물 도감을 외우다시피 탐독하긴 했었어요. 왜, 어린 시절에는 다들 마물을 좋아하고 그러잖아요?” 음. 공룡 좋아하는 덕후 뭐 그런 건가? “그렇군요. 그런데 용족은 겨울에만 활동한다고 했죠?” “용족이요?” 뜬금없는 용족이 튀어나오자 어깨춤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이번 루프에선 그도 처음 듣는 이야기일 것이다. “만약에 용족이 겨울도 아닌데 지금 깨어났다면,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 “……?” “시간 없으니까 빨리 대답해봐요. 나 지금 엄청 급하니깐.” 내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대답을 재촉했다. 어깨춤은 그런 날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용족이 지금 깨어날 가능성은 없지요.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만약에! 만, 약, 에 깨어났다면! 그 이유가 뭐겠느냐고요?” 내가 눈깔을 마구 부라렸더니 어깨춤이 왠지 어깨를 움츠렸다. “그…… 글쎄요. 고대 문헌에 나오는 바에 의하면, 용족은 용사를 아주 증오한다고 되어 있긴 하죠……. 그러니깐 근처에 용사가 나타나면 동면에서 깨어날 거예요.” 자기가 잘 아는 분야라서인지 어깨춤이 나름대로 술술 말을 이었다. “용족은 본래 적룡의 후손이잖아요. 적룡의 마력에서 태어난 존재니까요. 그러니까 먼 고대에 적룡을 죽여버린 용사를 증오하는 거죠. 용사가 자신의 영역에 나타나면, 용족들의 눈은 붉게 변하고 잠에서 깨어나서 적룡의 복수를 한다고 하거든요.” “그럼 용사가 이 숲속에 나타났기 때문에 용족이 깨어났단 거예요?” 난 어리둥절했다. 용도 이젠 사라진 시대인데, 용사가 어딨단 말인가. 그런 고시대의 유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남아있는 것은 아스테시아나 대신전 같은 곳에 걸려 있는 약간의 고대 마법 정도……. 하지만 그것도 고대에 걸린 것이 그저 유지되고 있는 것뿐이라서 지금은 파훼하거나 고치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물론 이제 용사는 사라지고 없죠. 용사는 고대 마법의 산물로, 태어날 때부터 평범한 사람보다 세 배는 더 큰 체격을 가진 거인인데……. 주변에 그런 사람 없잖아요.” 어깨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결국 용족이 깨어날 일은 없다는 거죠.” “하지만 이미 깨어났는데?” “네……?” 잘 모르나 본데, 용족이 깨어나서 지랄을 하는 바람에 우리는 이미 두 번이나 비명횡사했다는 말씀이야. “혹시 용사 말고, 용족을 깨울만한 다른 건 없어요?” “없어요.” 어깨춤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럼 용족을 사냥할 수 있는 방법은? 그놈들만의 약점이라든가……. 기가 막히게 죽일 수 있는 요령 같은 거. 뭐 없어요?” “그런 게 어딨겠어요. 용족은 용의 후손이라니까요. 인간한테는 죽지 않아요.” “뭐라고?”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용족을 죽일 수 있는 건 오로지 용사뿐이에요. 인간 손에는 죽지 않아요.” “하지만 이제 용사는 없다면서?” “그러니까요. 결국 용족을 죽일 방법은 없는 거죠.” 어깨춤이 자기 분야에 몰입한 덕후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재밌는 게 뭔지 아세요? 설령 용사가 있어서 용족을 죽인다고 해도, 본디 용족은 마력에서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다시 태어난다는 설이 있어요. 죽으면 불꽃에서 다시 태어나는 불사조처럼 말이에요……! 물론, 그냥 가설이긴 하지만.” “…….” “…….” “그럼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용족을 죽이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죽일 방법이 없다는 거잖아. 나는 완전히 사방이 꽉 막힌 미로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그때 어깨춤이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 잠깐.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앗. 다른 팀원들은?” 덩치 일행과는 어느덧 아예 볼 수 없게 된 우리였다. “그깟 중간 평가가 뭐라고. 어차피 우린 곧 죽을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내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해주며 위로했다. “예? 주, 죽는다고요?” 어깨춤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물론 난 번거롭게 두 번이나 대답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나저나 우리 강아지의 신변이 심히 걱정되긴 하는데……. 이를 어쩐다. 찾을 방도가 없다니.” 1번 다니엘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고, 서로 주고받은 호각도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이 숲을 뒤지고 다니는 것도 시간 낭비가 될 확률이 높았다. 내 계획은 여전히 연락이라도 가능한 퇴폐미남을 먼저 만나서 후일을 도모하는 거였다. “그나저나 퇴폐미남을 만나기 위해 호각을 불면 아까처럼 용족이 먼저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첫 번째 신호탄도 안 터졌으니까 용족도 아직은 깨어나지 않았을지도……. 속는 셈 치고 그냥 한번 불어보자.” 정 안 되면 절벽으로 가서 또 떨어지면 되지 뭐. 결심을 마친 나는 주머니에서 호각을 꺼내서 세차게 불어대었다. 삐! 삐이! 삐이이이이이! 동네방네에 아주 메아리가 치면서 호각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난 아주 흡족해졌다. “…….” 한편 내 옆에 붙어있는 어깨춤은 내가 왜 호각을 부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팀원들과 떨어진 게 좀 불안한 듯, 그들이 사라진 방향만 힐끔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서 덩치 일행을 찾아 떠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는지 내 곁에 꼭 잘 붙어있었다. “일단 절벽으로 같이 가죠. 4번이 먼저 오는지, 아니면 용족이 먼저 오는지 알아보자고.” 난 걸음을 옮기면서 어깨춤을 끌고 절벽 쪽으로 향했다. 내 말을 이해 못 한 눈치였지만 어깨춤은 별다른 저항 없이 따라왔다. 나는 4번 퇴폐미남을 계속해서 내 경로로 유인하기 위해 드문드문 호각을 계속 불어주었다. 삐! 삐! 삐이이이이! 37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멀쩡하면서 호각은 왜 불었지? 이미 신호탄 두 개나 터진 거 모르나? 당장 결계 밖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텐데.” 절벽 앞에서 어깨춤과 같이 서성거리고 있었더니, 마침내 익숙한 실루엣이 홀로 퇴폐미를 사방에 뿌리면서 걸어왔다. 내가 절벽으로 오는 사이에 이미 신호탄은 두 번 터진 상태였다. 그리고 팀원들은 결계 밖으로 돌려보냈는지 4번은 혼자였다. “퇴…… 퇴폐미남!” 나는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그만 쪼르르 뛰어가서 4번을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 4번은 나의 포옹에 무척이나 당황한 얼굴로 그 자리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이런 된장. 내가 싸바를 반가워하게 될 줄이야……. 나도 이런 내가 싫다.” 난 욕을 뇌까리고는 끌어안은 퇴폐미남을 확 놓아주며, 진정으로 씁쓸함을 느꼈다. “두 분이 역시 친하시구나.” 옆에서 우리의 재회를 놀라워하며 어깨춤이 말했다. “아냐, 안 친해요.” “좀 친하지.” 나와 퇴폐미남이 동시에 말했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내가 언제 너랑 친했어?” 내 입에서 먼저 질문이 튀어나왔다. “방금 실컷 껴안은 게 누구였더라?” 퇴폐미남이 반격했다. “그건 이 헬 난이도의 중간 평가 때문에 하도 내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거고.” “아, 신호탄 두 개 터진 것 때문에 그러는 모양이지? 너무 걱정하지 마라. 두 팀은 교수님들이 도와주러 가셨을 테니까.” “이런 상황분간 못 하는 자식 같으니라고.” 펑! 때마침 세 번째 신호탄이 터졌다. 퇴폐미남과 어깨춤이 놀라서 휙 하늘을 올려다봤다. 물론 난 하늘을 쳐다볼 필요도 없었다. 이제부터는 신호탄이 연달아 터지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네 번째 신호탄이 터지기도 전에. 쿵. 희미하지만, 저쪽 아주 멀리서 나무들이 진동하며, 어디선가 둔중한 발소리가 북소리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챙! 퇴폐미남이 곧바로 검을 빼어 들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어깨춤도 검을 빼어 들었다. 비록 심약자지만, 우리 반에서 가장 실력자인 나와 퇴폐미남과 같이 있어서인지 아직은 도망갈 생각은 안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상대가 용족인 줄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사냥은 무리일걸. 용족이거든.” 내가 퇴폐미남을 유인하느라고 호각을 불어 재꼈기 때문에, 용족 놈 하나가 이쪽으로 나타난 것이다. “뭐? 용족?” “요, 용족이요?” 퇴폐미남과 어깨춤이 동시에 날 휙 쳐다보았다. “응, 그래서 신호탄이 계속 터진 거고. 앞으로도 계속 더 터질 거야.” 펑! 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또 신호탄이 터졌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난 퇴폐미남을 붙잡고 속사포처럼 물었다. “너 이 숲속에 들어온 뒤 팀원들 데리고 어떤 경로로 이동했어? 다음에는 내가 그쪽으로 찾아갈게. 호각을 불면 용족까지 저렇게 찾아와서 힘드니까 말이야.” “뭐?” 쿵. “빨리 대답해. 난 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시간을 좀 되돌아간다고. 그러니까 이번에 여기서 떨어져 죽으면 다음번에 널 찾아갈 테니, 말해 봐. 숲 어느 쪽으로 갔었어?” “알렉시스. 드디어 머리가 완전히 맛이 간 거냐?” “아니라니까. 저기 왔다, 용족.” 쿵!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용족이 우릴 향해 달려왔다. “으아아아아아!” 그전까지만 해도 용족이란 내 말을 믿지 않던 어깨춤이 기겁하며 먼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젠장.” 눈이 붉게 달아오른 산채만 한 용족을 보자마자 도무지 안 되겠다 싶었는지, 퇴폐미남이 욕을 뱉으면서 내게 외쳤다. “튀어!” 우리 셋은 그대로 절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미친 듯이 달렸다. 비록 우리 중에서 퇴폐미남은 세계 3대 포션인 힐링 포션을 먹은 몸이었으나, 상처를 빠르게 회복시켜준다는 것은 즉사하지 않고 살아있을 때나 효과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용족은 그를 바로 즉사시킬 것이 분명했다. “제기랄. 진짜 용족이잖아! 넌 어떻게 안 거지?” 퇴폐미남이 뛰어가면서 날 향해 물었다. “말했잖아. 난 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시간을 되돌아간다고. 벌써 이번이 세 번째야.” “세 번째?” “그래. 세 번째로 용족한테 쫓기는 거라고. 앞선 두 번은 이미 죽었어.” “……!” 퇴폐미남은 이 믿지 못할 상황 앞에서 입술을 짓씹었다. 펑! 펑! 도망가는 와중에 신호탄들이 연달아서 하늘 위에 터지고 있었다. “……나는.” 이윽고 내 말을 믿기로 결심을 굳혔는지 퇴폐미남이 말했다. “바위산 쪽으로 갔었다. 숲 서쪽에 있는 바위산 알지? 멀리서도 잘 보이잖아. 만약 다음이 있다면, 거기로 오면 날 찾을 수 있을 거다.” “알았어.” 내가 숨을 헉헉거리며 대답했다. 쿵. 쿵. 쿵. 그 와중에도 우리는 용족에게 쫓기고 있었고, 거리도 공격이 닿을 만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막 따라잡은 어깨춤 공자한테 막간을 틈타 물었다. “어깨춤 공자! 용족들을 다시 동면시킬 방법은 없어요?” 죽일 방법이 없는 건 알겠는데. 그럼 재우면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난 이 결계 안에서 용족과 계속 숨바꼭질을 해야 할 판이었으니까. “몰라! 몰라! 몰라!” 어깨춤이 헐떡거리면서 공포에 질린 채 마구잡이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지 말고 침착하게 잘 생각해봐요! 중요한 문제니깐!” 하지만 뛰느라 바빠서 내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은 어깨춤 공자였다. 힐끔 용족을 돌아본 퇴폐미남이 미간을 심각하게 구기며 대신 외쳤다. “겨울이 되고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다시 동면에 들기야 하겠지!” 즉, 지금이 가을이니까 어림잡아 반년은 기다려야 용족이 잠잠해질 거라는 소리. 당연히 그 전에 이 미로 속에서 나는 죽고 말 것이다. “도대체 용족이 왜 깨어난 거지? 지금은 깨어날 시기가 아닌데.” 퇴폐미남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었다. 「살해자에게 응징을!」 용족의 익숙한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들려오면서 뒤에서 화염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으아아아악!” 살짝 한걸음 뒤처진 어깨춤이 비명을 지르면서 화염에 휩싸였다. 어깨춤 공자가 바닥에 검게 탄 채로 쓰러져 죽어버렸다. 화르르르! 멈추지 않고 용족의 입에서 다시금 화염이 터져 나왔다. 내 등 뒤에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아슬아슬하게도 아직 피부에 닿지는 않았다. 다만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등이 따갑고 얼얼했다. “알렉시스,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면…… 무조건 결계 밖으로 도망치는 게 최선이야! 문제는 다른 팀들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알리느냐는 건데……” 퇴폐미남이 이 와중에도 재빨리 머리를 굴리길래, 내가 이의를 하나 제기했다. “아 참, 내가 해봤는데 나는 결계를 넘을 수가 없었어!” “……뭐?” “두 번째로 눈뜨자마자 혼자 도망가려고 결계로 되돌아갔거든! 근데 막혔어! 투명한 벽이 있어서 나갈 수 없었어!” “……그럴 리가!” 퇴폐미남은 눈썹을 찌푸렸다. 쿵. 쿵. 「살해자에게 응징을!」 용족이 쫓아오는 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가까웠다. 나와 퇴폐미남은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쏟아 전력 질주했다. 우리 왼쪽 옆으로는 깎아 지른 절벽이고, 우린 그 가장자리를 따라 아슬아슬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틈 아래로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어둠만이 존재했다. 육안으로는 그 무지갯빛 강물이 보이지 않았다. 쿵. 쿵. 쿵. 이제 이번 생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알렉시스! 이번에는 나랑 같이 떨어져 보자!” 끝이 다가왔다고 느꼈을 때, 퇴폐미남이 뜬금포로 말했다. “……뭐?” 「살해자에게 응징을!」 촤르륵! 바로 뒤에서 용족이 날개를 펴는 소리가 들렸다. “바위산에서 기다리겠어!” 퇴폐미남이 외쳤다. 그는 맹독을 뒤집어쓰기 직전, 날 와락 끌어안더니 절벽 아래로 같이 뛰어내렸다. *** 토끼 마물이 나오는 지점에서 눈을 뜬 나는, 팀원을 모두 버리고 서둘러 혼자 바위산으로 달려갔다. 이번엔 어깨춤까지 뒤로 했다. 숲 서쪽엔 유독 눈에 띄는 뾰족한 바위산이 있어서 찾기는 쉬웠다. 열심히 달리던 도중에 펑! 하고 첫 번째 신호탄이 터졌다. 첫 신호탄 덕에 경계도가 높아져 있던 퇴폐미남네 팀은, 내가 풀숲을 헤치고 다가오는 소리에 일제히 무기를 쳐들었다. “나야! 퇴폐미남……!” 내가 풀숲을 헤치고 반갑게 뛰어가며 4번을 불렀다. 아까 한 번 포옹을 해서인지, 이번에는 놈을 껴안는 참사는 저지르지 않아도 되었다. “알렉시스?” 갑자기 튀어나온 날 보고 4번과 그의 팀원들이 무기를 내렸다. “마물인 줄 알았잖아. 네가 왜 여깄는 거지?” 퇴폐미남이 날 향해 반가워하는 얼굴이면서도 동시에 의아해하고 있었다. “뭐야. 기억 안 나?” “뭐가?” “…….” “…….” 잠시 머뭇거리던 내가 말했다. “아까 나랑 같이 절벽에서 뛰어내렸잖아. 기억 안 나?” 그러자 퇴폐미남뿐만 아니라 그 옆에 있던 팀원들까지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 “…….” 묘한 침묵이 흐르고, 퇴폐미남이 자신의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더 이상 맛이 가긴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광인의 길은 끝이 없구나. 없는 기억까지 만들어내다니.” “응? 없는 기억 아닌데?” “됐어. 무슨 영문인지는, 들어봤자 난 이해도 안 갈 테니.” 그러자 다른 공자들이 혀를 찼다. “쯧쯧. 알렉시스 공자는 맨날 헛소리를…….” “이젠 익숙해지려고 그래요. 항상 그러는걸.” 팀원들은 나의 등장에 아예 흥미를 잃어버리고 각자 마물들을 경계하며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38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퇴폐미남만이 나를 향해 씩 웃으면서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근데 너희 팀은 어디 가고? 또 혼자 빠져나와서 길이라도 잃어버렸나?” “아니라니까. 정말 기억이 안 나는가 보군.” 나는 나대로 무척 심각한 표정으로 4번을 쳐다보았다. 절벽에서 서로 끌어안고 떨어졌는데, 퇴폐미남은 기억을 하지 못하다니. “그렇다면 절벽의 효과는 나한테만 적용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나름대로 새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역시 내가 주인공이라서 그런가. 절벽마저 날 특별 대우하는구나! 이런 내 존재의 특별함이란…….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구만!” 내 작은 머리통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고작 그 정도였다. “…….” 그런 내 모습을 퇴폐미남이 빤히 응시하다가 다시 물었다. “이상하군. 너 혹시…… 일부러 나 찾아온 건 아니겠지?” “맞는데?” “……내가 여깄는 건 어떻게 알고?” “당연히 네가 알려줬지.” “내가?” “응.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기 전에.” “…….” 나는 속사포처럼 따다다다다다 퇴폐미남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퇴폐미남은 말없이 들어주긴 했으나, 표정은 도저히 내 말을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펑! 마침 하늘에서 두 번째 신호탄이 터졌다. 퇴폐미남을 비롯한 그의 팀원들이 전부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 말대로지? 내가 또 신호탄 터진다고 했잖아. 그리고 저게 끝이 아니야. 앞으로 계속 터진다.” 내가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늘어놓자 퇴폐미남이 미간을 구겼다. 그리곤 팀원들을 향해 돌아보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즉시 결계 밖으로 돌아가겠다. 두 팀이 낙오된 걸 보면 숲속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으니까. 교수님들도 이젠 도와주러 올 수 없고……. 혹시 불만 있는 사람은 혼자 남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도록.” 그러더니 퇴폐미남의 나를 잡아끌고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팀원들은 퇴폐미남의 카리스마 어린 말투 때문이었는지 곧 빠짐없이 전부 뒤따라왔다. 덕분에 나도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음, 그렇구나. 퇴폐미남은 두 번째 신호탄이 터지자마자 항상 이런 식으로 팀원들을 데리고 결계로 돌아가려고 했을 거야……. 그렇다면, 내가 맨 처음 용족한테 당해 죽었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팀은 바로 이들이었겠는걸.” 아직은 결계 밖으로 갈 시간이 충분했으므로 이들은 생존할 가능성이 컸다. 한편, 나는 나 외에 다른 사람들도 결계에 막힐지 아닐지 궁금했다. 아직도 퇴폐미남은 내 말을 딱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긴 용족이 깨어났단 얘기가 허무맹랑하게 들리기야 하겠지. 그런데 돌아가는 도중에 펑! 세 번째 신호탄이 터졌다. “…….” 세 번째 신호탄이 터지고 나서야 퇴폐미남의 낯빛이 서늘해졌다. 그가 날 한번 쳐다봤다. 그리곤 팀원들을 향해 크게 고함쳤다. “전속력으로 뛰어!” 퇴폐미남이 앞서 달리기 시작하자, 팀원들도 어물거리지 않고 그런 퇴폐미남의 뒤를 쫓았다. 세 번째 신호탄까지 터진 데다 팀장의 명령도 있어서 아무도 망설이지 않았다. “일단 알렉시스 네 말이 맞다 치자. 진짜라고 믿고 싶진 않지만.” “거참 진짜라니까 그러네.” “아무튼 넌 결계 밖으로 못 나간다고 했지?” “응.” “큰일이군.” 퇴폐미남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젠 내 말을 의심하는 투가 전혀 없었다. 한참 후, 우리는 하얀 울타리가 쳐진 결계 앞에 무사히 도착했다. 잠시 날 쳐다보던 퇴폐미남이 먼저 결계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더니. “…….” 아무런 문제 없이 그대로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이 아닌가. 퇴폐미남의 다른 팀원들도 서둘러 울타리를 우르르 뛰어넘었다. 결계에 막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만이 아직 안에 남아있었고, 그런 날 퇴폐미남이 울타리 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펑! 하늘에 네 번째 신호탄이 터졌다. 팀원들이 전부 경악한 얼굴로 하늘을 힐끔 쳐다봤다. 비록 그들은 현재 안전해졌지만 결계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문제였다. 그때 퇴폐미남이 우두커니 서 있는 날 향해 말했다. “뭐해, 넘어오지 않고.” “어, 응.” 나는 조심스레 울타리로 다가갔지만. 터엉! 마치 투명한 막에 가로막힌 것처럼 울타리를 넘으려던 내 발이 허공을 쳤다. “……!” 퇴폐미남은 물론이고 다른 팀원들마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 맙소사.” “어떻게 된 거야?” “왜 도른 공자만 막혔지……?” 제라드의 팀원들이 결계에 막힌 날 보면서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된장!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왜 나만 못 나가는 건데……!” 열이 뻗친 나는 결계를 손발로 미친 듯이 쾅쾅 두들겨대면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결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놈의 결계가! 감히 주인공을 막아? 참나 어이가 없어서!” 펑! 하늘에는 신호탄이 또 터졌다. 공자들은 더욱 경악했다. 이 와중에 나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시끄러운 야단법석이었다. 그때 퇴폐미남이 도로 울타리를 넘어서 결계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뭐야? 넌 또 왜 도로 들어와……?” 제라드의 뜬금없는 태도에 내가 어안이 벙벙해서 물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퇴폐미남이 날 잡아끌면서 뛰기 시작해서, 나도 얼떨결에 같이 뛰게 되었다. “제라드 공자! 어딜 가는 거예요!” 결계 밖에서 그의 팀원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퇴폐미남은 그들을 향해 한번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위험하니 따라오지 마라! 너희는 당장 학교로 돌아가서 도움을 요청해!” 그렇게 말한 퇴폐미남은 어안이 벙벙해진 팀원들을 내버려 두고 나와 같이 길을 달렸다. 팀원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말대로 학교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서둘러 학교 쪽으로 달려갔다. 설령 학교에서 누군가 도와주러 온다고 하더라도, 결계 안의 학생들을 구조하기엔 이미 늦었겠지만……. “퇴폐미남, 넌 굳이 이렇게 할 필요 없어! 너도 지금은 얌전히 결계 밖에 있는 게 좋을 텐데…….” 내가 퇴폐미남에게 충고했다. 결계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은 나뿐이므로, 충분히 살 수 있는데 굳이 왜 다시 결계 안으로 돌아와서 사서 죽으려고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걱정이나 해. 너야말로 절벽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었나? 그래야 죽지 않고 특정 과거 시점으로 되돌아가는 거였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절벽 말고 딴 곳에선 안 죽어봐서 사실은 아직 정확히 모르는 문제였다. 굳이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고 죽어도 시간을 되돌아갈 가능성도 있긴 했다. 물론 그런 가능성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다른 방식으로 죽어볼 의향은 없었다. 재수 없으면 시간을 되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냥 요절할 수도 있으니……. “뚫리지 않는 결계 가지고 아무리 용써봐야 시간 낭비다. 차라리 용족이 나타나기 전에 다시 절벽에서 떨어지는 게 나아.” 퇴폐미남이 옆에서 덤덤한 목소리로 내게 묘한 저주를 내리는 것이 아닌가. “이 싸바 자식이……. 아예 날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이런 드문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퇴폐미남은 웃지도 않고 심각하게 대꾸했다. 그동안 하늘에서 신호탄이 계속 터지고 있었다.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살아있어야 해. 그전에 잡혀 죽으면 안 되니까. 그때까진 내가 최대한 도와줄게.” “웬일로 도와준대? 싸바 인생은 접기로 했냐? 뜬금없이 개과천선한 거야?” 내가 궁금증을 토해냈지만. 쿵. 저 멀리 용족이 발걸음 소리가 들려서 우리는 곧바로 걸음을 멈췄다. “진짜 용족이군.” 멀리 떨어진 용족의 뒤통수를 힐끗 본 퇴폐미남은 도무지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다는 투였다. 풀숲에 몸을 숨긴 우리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길을 돌아갔다. “오래 숨어다닐 순 없을 거야.” 그래도 멋모르고 나 혼자 무식하게 뛰어다니는 게 아니라서 그런지, 효과가 있었다. 퇴폐미남이 시키는 대로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다니자, 아직은 용족이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조심히 이동하니 마침내 용족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퇴폐미남은 길을 가는 도중 유심히 주변의 지형과 흔적을 살폈다. 가끔은 발길을 멈추고 바닥에 흩뿌려진 발자국이라든지 나뭇잎, 바위 등을 자세히 관찰하기도 했다. “뭔가 이상한데.” 퇴폐미남이 중얼거리길래. “뭐가 이상한데?” 내가 물어봤지만, 퇴폐미남은 생각에만 잠겨있을 뿐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용족을 피해 조심히 이동하고 있어서 절벽까지 가는 데에는 전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다른 마물들은 이제 완전히 안 보이네.” 내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원래 이 숲에 들어온 목표였던 3급 마물종을 사냥하려 해도 이젠 사냥할 만한 마물이 안 보였다. “용족이 깨어났으니까……. 모두 숨어버렸겠지. 마물들은 용족을 두려워하거든.” “하긴. 나도 용족은 무서워.” 용족의 그 무시무시한 빨간 눈만 봐도 소름이 끼쳤다. 그 거대한 발에 짜부라져서 죽고 싶지도, 화염에 타서 죽고 싶지도, 맹독에 녹아 죽고 싶지도 않았다. “무서워하지 말고 다음에는 용족이랑 대화라도 나눠보는 게 어떤가?” 퇴폐미남이 이상한 제안을 했다. “뭔 소리야?” “그냥 이런저런 얘기 한번 나눠보라고. 영 대화가 안 풀린다 싶으면 넌 그냥 절벽에서 떨어지면 되니까.” 퇴폐미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나는 그만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도 이젠 맛이 진짜 갔구나. 용족이랑 무슨 대화를 해? 아무리 놈들이 말을 할 줄 알기로서니……. 앞뒤 분간 안 하고 맹독이나 쏘아 대는 마물하고 뭔 대화가 통하겠어? “……정말 모르겠나?” “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숲을 헤치고 나아가던 우리는 그 자리에 멈췄다. 퇴폐미남이 날 우두커니 서서 쳐다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용족이 말을 할 줄 안다는 거 말이야. 네 귀에 들린다고 했잖아.” “그런데?” 물끄러미 날 쳐다보던 퇴폐미남이 곧 내게 반문했다. “설마 그게 다른 사람들한테도 들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39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 난 정신이 멍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지. 용족의 맹독은 너한테 통하지 않는다면서? 게다가 절벽에서 떨어졌더니 혼자 되살아나질 않나.” 퇴폐미남이 계속 말을 늘어놓았다. “심지어 나랑 같이 붙잡고 떨어졌다면서 혼자서만 되살아났지. 또, 유독 결계에서 혼자서만 빠져나가지 못했어.” 마치 내가 그 사실들을 속으로 흡수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잠시 시간을 둔 뒤 퇴폐미남이 다시 입을 뗐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잖아. 이제 뭐 짐작 가는 거 없나?” “있지.” 내 입에서 대답이 즉각 튀어나왔다. “당연히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서 그런 거지 뭐. 새삼스럽게스리. 그런 건 그냥 기본 장착이잖아?” “…….” 그러려니 하는 표정을 지은 퇴폐미남이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아무튼 넌 지금 정상이 아니야. 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더러 정상이 아니래? 참나. 그러는 자기는 뭐 정상인 줄 아나?” 그렇게 우리는 또 이 구역의 비정상은 너라며 잠시 옥신각신했다. 그동안 이동하고 있던 우리는, 풀숲을 헤치고 나온 순간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 학생들의 시신으로 보이는 검은 잿더미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용족의 화염이라 그런가, 탄내조차 전혀 없이 그냥 검은 재만이 바닥에 남아있었다. “아예 전멸했군.” 바닥에 남겨진 재 덩어리가 총 다섯 개. 화염 브레스에 한 팀이 전부 죽어버린 듯이 보였다. “…….” 퇴폐미남은 흔적을 살펴보다가, 저쪽 어딘가에 달랑 혼자 떨어져 있는 로브 하나를 주워들었다. 아스테시아의 2학년 학생에게 지급되는 청색 로브였고, 제법 상태가 멀쩡했다. 아마 학생들 중 하나가 용족을 만나자 도망가다가 바닥에 떨어트린 것 같았다. “……역시.” 퇴폐미남이 로브 표면에 묻어있는 먼지를 손가락으로 만져보며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중얼댔다. “뭔데? 뭐가 역시라는 건데? 너만 알지 말고 나도 좀 같이 알자.” 내가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절세미남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퇴폐미남이 뭔가 알아낸 것만 같은 촉이 왔기 때문이다. “이걸 자세히 봐.” 퇴폐미남이 내게 말하며, 들고 있던 로브를 건넸다. “음?” 나는 로브를 받아들고 열심히 여기저기를 살폈다. “구멍도 없고 멀쩡하네. 제법 잘 만들었는데? 반들반들한 게 재질도 좋네. 세탁한 지도 얼마 안 됐나 봐. 어스아이들의 세탁 솜씨는 역시 끝내준……” “아니 그런 거 말고. 자세히 좀 봐.” 퇴폐미남이 내 말을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퇴폐미남을 뚫어지게 쳐다봤다가, 로브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퇴폐미남이 로브에 붙은 먼지를 살펴봤었지? 나는 놈의 흉내를 내기로 하고 로브 표면을 손으로 슥삭 문질러 본 후, 손바닥을 들어서 살펴봤다. “음……. 무슨 파란색 모래 같은 게 좀 묻어있는데?” “맞아.” 퇴폐미남이 고개를 끄덕했다. “오는 길마다 자세히 살펴봤는데 이 파란 가루들이 이따금 떨어져 있더군. 비록 아주 희미한 흔적이었지만 말이야. 특히 검술 수업 학생들이 지나간 자리에만 이런 푸른 가루의 흔적이 남아있었지.” 이 녀석이 그렇게 바닥이니 나뭇잎이니 바위 등을 살펴봤던 이유가 그것인가. “그래서 이 파란 모래가 어쨌는데? 뭐 중요한 거야?” “물론이지. 그건 모래가 아니고, 화장한 유골 가루거든.” “……!” 나는 숨을 헉하고 들이키면서 로브를 바닥에 떨구고, 자동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유골 가루?” “그래.” “근데 왜 파란색이야? 유골이면 하얀색 아니야?” “딱 한 명 있어. 과거에 파란색 유골을 남긴 사람이.” “그게 누군데?” 퇴폐미남이 내 말에 대답하려는 찰나. 쿵. 뒤쪽 어딘가에서 용족의 발걸음 소리가 정적을 깨며 들려왔다. 쿵. 쿵. 쿵. 갑자기 용족의 발걸음 소리가 엄청나게 빨라지고 있었다. 녀석이 전속력으로 뛰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방의 나뭇잎들이 파르르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최대한 빨리 절벽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쿠아아아아앙! 마침내 아주 멀리 뒤편에서 용족이 귀청이 떠나갈 것 같은 괴성을 지르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아직은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지만. 「살해자에게 응징을!」 용족이 새빨간 두 눈으로 우리를 발견하고는 이쪽 방향으로 똑바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에 나타난 용족은 지금까지 본 용족과는 또 다른 놈이었다. 지난번보다 더욱 붉은 표피를 갖고 있었다. 즉 이 숲속에 적어도 용족이 3마리는 된다는 이야기였다. 나와 퇴폐미남은 어차피 용족에게 들켰기 때문에, 이젠 풀숲 따위에 몸을 숨기는 짓은 포기하고 무조건 전속력으로 절벽을 향해 달렸다. “절벽까진 가까워!” 과연 나무들 사이를 벗어나자마자 저 앞에 익숙한 거대한 틈이 나타났다. 쿵. 쿵. 쿵. 뒤에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우리를 쫓아오는 용족. 우리는 절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으므로, 이젠 옆으로 그냥 떨어지기만 하면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그 푸른 유골은!” 쿵. 쿵. 쿵. 용족의 거리가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퇴폐미남이 절벽 아래를 힐끔 한번 쳐다보고는 외쳤다. “용사의 유골이다!” *** 뭐야 이건 또. “용사의 유골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내가 달리기 도중 숨을 헐떡거리면서 물었다. 용사의 활약은 먼 고대의 일. 용과 마법이 실재했을 때에 있었던 일이란 말이다. 즉 이제는 어린애들 동화 속에나 나오는 전설일 뿐이고,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옛날 일인데 그 뼛가루가 아직도 남아있다니? “그래! 용사의 유골은 함에 봉인된 채로 황실의 비밀 금고에 비치되어 있었지! 대체 어떻게 유출된 건지 모르겠군!” 퇴폐미남도 달리는 도중에 대답했다. “황실에……?” 아, 정말 너무 탑 안에만 처박혀 있었나 봐. 황녀인데 처음 듣는다.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는 아니지만. “어쨌든! 누군가 그것을 손에 넣어 일부러 숲속에 흘린 거고! 용사의 흔적을 느낀 용족이 동면에서 깨어난 걸 거다!” 퇴폐미남이 외쳤다. “미친! 왜 용족을 깨우는 그런 미친 짓을 해?” 나는 그렇게 대꾸하자마자 머릿속에 어떤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푸른 가루는 아까 발견했던 로브에 묻어있었다는 걸. “엇! 그럼 혹시 아까 그 로브의 주인공이 범인인가……?” 그러니깐 그 죽어버린 이름 모를 공자가 감히 숲을 돌아다니며 용족을 깨우고 다니는 간 큰 놈이었다는 말인가? 정신줄 놓고 그런 짓을 하다 용족한테 통구이가 되어 죽어버렸고? 뭣 하러 그런 자살행위를 한 거지? “아니, 그 공자도 몰랐을 확률이 높다! 유골 가루의 흔적을 남기고 다닌 건 한 명이 아니었거든! 숲속 여기저기 흔적이 남아있었는데! 각기 다른 팀의 흔적이었다!” “…….” 즉, 그 많은 학생들이 알면서도 일부러 가루를 묻힌 채로 태평하게 숲을 돌아다녔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무도 몰랐을 거다. 그런 게 자기들 로브에 묻어있는지. 애초에 범인이라면, 사실 숲속에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 안의 누군가가! 일부러 학생들의 로브에 묻혀놓은 거군!” 내가 결론지었다. 내 말에 동의하는지 퇴폐미남도 아무 말 없었다. 쿵. 쿵. 「살해자에게 응징을!」 한편, 아까만 해도 상당히 거리가 멀었던 용족이 이제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알렉시스! 다음에는 바위산으로 날 찾아오지 말고! 첫 신호탄이 터지면 그쪽으로 바로 가봐라!” 퇴폐미남이 말했다. “뭐? 왜?” “교수님들이 거기로 가셨을 테니까! 궁금하지 않아? 왜 교수님들이 지금까지 확성 뿔피리를 사용하지 않았는지!” “……확성 뿔피리?” 뭐라 더 물어보기도 전에 퇴폐미남이 검을 빼 들고 휙 뒤돌아, 어느 틈에 바로 뒤까지 쫓아온 용족과 대치했다. 쿠아아아―! 화염이 내뿜어지면서, 제라드의 몸이 뜨거운 불에 휩싸였다. 나는 달려가 활활 타고 있는 녀석의 손을 나도 모르게 확 끌어당겨 붙잡고는, 같이 불에 휩싸인 채로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 낯익은 토끼 마물이 풀숲에서 다시 한번 튀어나왔다. 슈욱―! 또다시 덩치가 쏜 화살에 토끼 마물이 즉사했다. “미리 손 좀 풀어야죠.” 덩치가 정해진 대사를 던졌다. 이번에 나는 팀원들의 로브 색깔에 처음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만일 누군가 학교에서 공자들의 로브에 유골 가루를 일부러 뿌려놓고, 숲속에 들어가길 기다렸다면……. 유골과 같은 색인 청색 로브에 뿌려놓는 것이 제일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스테시아에서는 1학년은 적색, 2학년은 청색, 3학년은 흑색 로브를 입었다. 우리 팀에서 2학년은 단 한 명이었다. “어깨춤 공자. 2학년이죠?” 내가 친근하게 어깨춤에게 다가가서 어깨동무를 했다. “……네? 네.” 갑작스러운 나의 친한 척과 어깨동무에 어깨춤이 무척 당황해했다. 우리의 친근한 모습을 보고는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는지 덩치가 혀를 쯧, 하고 차면서 팀원들 데리고 자기들끼리 앞으로 가버렸다. “로브에 참 먼지가 많아 보이네요. 세탁은 언제 했어요?” 나는 손바닥을 쫙 펴고 퍽, 퍽, 힘차게 어깨춤의 등을 두들기며 방긋 웃었다. “쿠, 쿨럭…….” 너무 세게 쳤는지 어깨춤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기침을 했다. “세탁한 지 얼마 안 됐는데요……. 한 이틀 됐나……?” “아, 그렇구나.” 나는 어깨춤의 로브를 퍽퍽 두들기던 손바닥을 그제야 떼고서 내 손에 묻은 흔적을 자세히 살폈다. 푸른 가루의 흔적이 선명히 보였다. 범인이 누군진 몰라도 어깨춤 공자의 로브에도 용사의 유골을 뿌려놓은 것이다. 40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현재 어깨춤 공자뿐만이 아니라 다른 2학년 학생들도 이런 상태로 울창한 숲속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범인이라면 오히려 숲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했을 테니, 검술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는 범인이 없을 거야. 오늘따라 누군가 결석을 했다면야 모르겠지만, 중간 평가를 하는 날이라서 아무도 결석하지 않았어.” 학교 안을 오가며 검술 수업 학생들의 로브에 몰래 가루를 살짝 묻히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사실은 아스테시아에 있는 그 누구든지 저지를 수 있었다. “혹시 누군가 중간 평가를 엿 먹이기 위해 저지른 짓일까?” 그럴 가능성도 있긴 했다. 시험 기간이라서 머리가 돌아버린 학생들이야 한둘도 아니지 않겠는가. “아주 잡히기만 해봐라. 혼꾸멍을 내줄 테다.” 일단 여기서 살아나가만 하면, 범인이 누군지 알아보는 거야 간단했다. 병약미남한테 의뢰를 하면 되니까. 뭐, 어쨌거나 범인을 잡아 족치는 것은 여기서 살아난 뒤의 일이었다. “지금은 그보다 여길 무사히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야.” 아직은 첫 번째 신호탄이 터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게 대략 숲 북쪽에서 터질 거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도른 공자! 혼자 어디 가세요?” 내가 팀원들한테는 말도 없이 팀을 이탈해버리자 어깨춤이 불안해하며 얼른 날 붙잡고 물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버릴 어깨춤 공자에게 측은함을 느낀 내가 선심 쓰며 제안했다. “난 이제 혼자 움직일 건데 어깨춤 공자도 같이 갈래요? 덩치 저놈은 재수가 없어서 더는 같이 못 다니겠거든요.” 용족이 나올 거라고 해봤자 어차피 믿지 않을 것이므로 그렇게 둘러댔다. 물론 어깨춤 공자가 날 따라올 거라는 큰 기대는 없었다. “…….” 어깨춤은 멍하니 입을 뻐끔거리다가, 내가 휙 몸을 돌려 빨리 사라지자 황급히 내 뒤를 쫓아왔다. “그, 그래요! 같이 가요.” 이번에는 웬일이지? 지난번에 용족이 나온다고 경고했을 때는 내 말을 믿지 않고 덩치 일행과 남더니만……. 이번에는 따라오다니? “덩치 공자가 저희를 좀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죠? 저도 싫었어요.” 어깨춤이 작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 그냥 둘러댄답시고 한 말이었는데 덩치 공자가 재수 없다는 사실이 어깨춤의 마음을 이렇게 쉽게 돌려놓고 말다니. “참, 그놈의 로브는 지금 당장 여기서 먼지 좀 털어야겠어요.” 내가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밀었다. “일단 벗어봐요.” “네?” “로브 벗어보라고요.” “아니 왜……” “아휴, 빨래를 언제 했는지 먼지가 장난이 아니잖아요. 난 이런 걸 보면 참을 수가 없더라. 얼른 줘봐요.” 내가 별로 친하지도 않은 어깨춤 공자의 로브를 벗기려고 달려들었다. “……아, 아니. 이, 이틀 전에 빨았는데. 그, 그 정도예요?” 어깨춤은 자기 옷을 벗기려는 내 모습에 당황하긴 했지만. 도른이라는 공자가 원래부터 좀 특이 행동을 간혹 한다는 사실을 진즉에 이해한 학생이었다. 어깨춤은 얼굴을 좀 붉혔지만 내가 벗기는 대로 로브를 내주었다. “쯧쯧, 로브에 먼지가 이렇게 많으면 큰일 나요. 자칫하면 용족을 유인할 수 있단 말이에요.” 내가 말했다. “뭘 유인해요……?” 어깨춤이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는 사이에, 나는 근처 나무 앞에 가서 경건하게 섰다. 그리고 어깨춤의 로브를 탁! 하고 나무 기둥 위에 때려서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나의 손짓이 점점 격해졌다. 이윽고 도무지 옷 한 벌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엄청난 소리가 탁! 탁! 하고 터져 나왔다. 나는 온몸의 에너지를 총동원해서 거의 사생결단하듯 옷을 털었다. 로브가 나무 기둥에 부닥쳐서 헤지고 보풀이 날 때까지 마구 쳤다. “…….” 자신의 로브를 거의 광기 어린 몸짓으로 나무에 강타시키는 내 모습을 보고 어깨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와, 박력이 대단하네요, 도른 공자. 고작 로브를 터는 것에 이렇게까지 열심히…….” “후우…….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아주 기분이 가뿐하네요. 자, 여기요. 이제 입어도 되겠어요.” 난 눈 깜짝할 사이에 한 200년은 입은 것처럼 너덜너덜해진 로브를 어깨춤에게 당당히 건네주었다. 그놈의 소름 돋는 유골 가루는 그의 로브에 더 붙어있으려고 해도 없을 거였다. 로브는 어스아이들에게 말만 하면 새것을 갖다주기 때문에, 어깨춤도 딱히 로브의 망가진 상태에 개의치는 않았다. “어……. 고마워요.” “그럼 갑시다!” 어깨춤이 로브를 채 다 걸치기도 전에 내가 외치며 길을 앞장섰다. 힘쓸 것도 없이 그냥 로브를 멀리 버려버리면 되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긴 했지만 말이다. 로브를 도로 걸친 어깨춤은 내 곁에 꼭 붙어서 따라왔다. “다른 팀원들 없이 우리 둘만 있어도 사냥 잘할 수 있을까요? 저는 숲에 들어온 게 오늘이 처음이고 검술 실력도 아직 미천한데…….” 전에도 어깨춤이 이 비슷한 대사를 던졌었기 때문에 난 관심 없었다. “오늘은 사냥 따위 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요.” “네?” “아까 본인 입으로 이상하다고 그랬잖아요. 하급 마물들도 어디론가 다들 도망가는 것 같고, 3급 마물종은 보이지도 않는다고 말이에요.” “제,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요……?” 언젠가 지난 루프에서 한 말이었다. 어깨춤은 당황해하면서도 내 말을 곰곰이 고려해보는 눈치였다. “음, 도른 공자 말대로 정말 그렇긴 하네요. 이상하게 다들 어딘가로 숨고 도망가는 느낌이…….” “그래서 지금 무림 고수를 만나러 가는 중이에요. 고수라면 혹시 내가 결계를 뚫는 방법을 알지도 모르고.” 그때 펑! 하고 첫 번째 신호탄이 터졌다. 이미 내가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꽤 올라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신호탄과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웠다. 나는 얼른 어깨춤을 잡아끌고 신호탄이 터진 장소를 향해 무작정 뛰었다. 쿠웅. 어딘가 근처에서 용족의 둔중한 발걸음 소리가 났다. “이, 이게 무슨 소릴까요?” 용족이 깨어났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어깨춤이지만, 신호탄이 터진 뒤인 데다 하급종 마물들이 안 보인다는 사실도 깨달아서 그런지 다소 불안해하며 물었다. 난 대답은 않고 얼른 풀숲 속에 재빨리 몸을 숨겼다. 무림 고수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용족한테 발견이 안 되고 살아있어야 하는 게 더 중요했다. “무림 고수는 비행 장치를 타고 올 테니 기다리면 금방 오겠지.” 쿵. 쿵. 잠시 가까워지는가 싶던 용족의 발걸음 소리는 다행스럽게도 어디론가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가 확실하게 멀어져서 더 이상 들리지 않은 이후에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앗. 저기 교수님들이에요! 신호탄 터진 지가 얼마 안 됐는데, 정말 말씀대로 빨리 오셨네요.” 풀숲 속에 같이 숨어있던 어깨춤이 하늘을 보며 낮게 말했다. 과연 고수들이 탄 2인용 열기구가 근처 어딘가에 착륙하기 위해 내려오고 있었다. 고수들이 왔다는 사실에 난 안심이 됐지만, 아직 그들과 거리가 좀 있었다. 그래도 이 주위는 안전해진 것 같아서 일어났다. “빨리 현장에 가보죠.” 내가 당당히 앞장서며 말했다. “현장이라면, 신호탄이 터진 곳으로 가시려는 거군요? 역시 위험에 빠진 다른 팀을 도와주시려는 거죠? 이미 교수님들이 오셨지만 말이에요. 도른 공자, 생각보다 의협심이 아주 넘치네요. 같은 학생이지만 존경스러울 정도로…….” 어깨춤의 눈망울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보듯 날 우러러보았다. “물론이죠. 계속 그렇게 날 찬양해주세요.” 나는 어깨춤의 용비어천가를 절대 끊을 의향이 없었다. 무척이나 흐뭇하게 어깨춤의 찬탄을 벗 삼으면서 숲을 헤치며 다시 나아갔다. 크아아아아! 저 멀리 어디선가 용족이 내지르는 소름 끼치는 괴성이 들려서 마침내 어깨춤이 용비어천가를 멈췄다. 나도 자리에서 멈췄다. 어깨춤이 온몸을 벌벌 떨었다. “소, 소리만 들어봐선 어, 엄청난 마물인 것 같은데……. 설마 1급종일까요?” 아직 용족인 줄은 모르는 어깨춤이었다. 용족이라고 말하면 어깨춤 공자가 비명을 지를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무작정 어깨춤을 잡아끌었는데 언제나 그렇듯 어깨춤은 잘 이끌려왔다. 쿵, 쿵, 하고 용족이 뛰어가는 소리가 나더니. 곧 어디선가 펑! 하고 뭔가 터진 것 같은 굉음이 사방 천지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어깨춤은 이제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 한동안 용족이 괴성을 질러대며 쿵쿵거리는 발걸음으로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어깨춤은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였다. 한참 후에야, 용족이 이 근처에서 벗어나면서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주위가 완전히 조용해졌을 때 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헉……!” 잠시 후, 눈앞에 등장한 사건 현장 앞에서 어깨춤이 숨을 들이켰다. 공자 둘이 검은 재로 변해 있고, 나머지 셋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맹독을 뒤집어쓰면 연기가 되어 사라지기 때문에, 시신의 흔적이 남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어깨춤이 질겁한 사이에 나는 땅 위의 발자국을 살폈다. 세 명의 발자국이 있었는데 그중 둘은 마치 허공에서 발자국이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바닥에 초록색 맹독의 흔적도 남아있었다. 즉, 둘은 맹독에 죽어서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나머지 한 명의 발자국만이 횡으로 풀숲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뒤를 쫓아야 하는 용족의 발자국이 뜻밖에도 다른 방향으로 난 게 보였다. “오호라. 공자 한 명은 용케도 도망쳤구나.” 아마 용족이 다른 학생들을 죽이는 사이에 풀숲에 몸을 숨길 수 있었던 듯했다. 그리고 그 도망친 마지막 학생이 신호탄을 쏘았을 확률이 높았다. “용족이 한 명을 놓쳐서 열 받아 가지고 아까 그렇게 괴성을 질렀나 보네?” 내가 추리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아… 알렉시스?” 뒤쪽 풀숲 속에서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어깨춤이 홱 고개를 동시에 돌렸다. 41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 거의 울상을 하고서는 나무 사이에 반쯤 숨어있던 웬 절세 미남의 얼굴 하나가 보였다. “……멍뭉이?”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 순간. 풀숲에서 대형견 한 마리가 폴짝 튀어나와 내게 달려왔다. “알렉시스……!” 초절정 미모의 대형견이 세상에 나를 꼭 끌어안으며 오열을 터트렸다. “시발 이 또라이가 반가울 줄이야……. 난 진짜 죽는 줄 알고…… 이런 시발…….” 인정사정없이 욕을 하면서 말이다. 황궁 기사단장 아들내미가 이렇게 식빵을 좋아하는지는 미처 몰랐다. “어, 어. 그래. 우리 강아지. 그래도 안 죽고 살아있었구나?” 나는 욕을 혼자 바가지로 퍼붓고 있는 다니엘의 등을 꼭 끌어안아 주며 말했다. 첫 번째 신호탄을 쏜 팀은 바로 1번 다니엘의 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 입에서 나온 ‘우리 강아지’라는 말에 갑자기 뚝, 다니엘의 욕이 멈췄다. 그러더니 날 뒤로 팍 밀어냈다. “이런 젠장…… 내가 정신을 잠시 놓았군……. 하필이면 껴안을 인간이 없어서 눈깔 녀석을.” “괜찮아, 실컷 많이 껴안아도 난 괜찮……” “내가 안 괜찮거든? 하 진짜 용족만 아니었어도…….” 다니엘은 또 혼자 씨부렁거리면서 욕을 한 바가지 바닥에다 대고 퍼부었다. “우리 강아지. 이런 욕쟁이가 되다니. 아무래도 용족을 만난 충격이 컸던 모양이구나.” 나는 다 이해했다. 평소 같으면 내게 화를 내며 강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할 텐데. 이번에는 워낙 용족을 만난 충격이 컸는지 다니엘은 그런 말을 할 겨를도 없어 보였다. 아니면 혼자서 욕을 씨불이느라고 내 말을 못 들었거나. “요, 용족이라뇨?” 그때 불쑥 내가 까맣게 잊고 있던 존재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어깨춤이 동공에 지진을 일으킨 상태로 나와 다니엘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래, 용족이 나타났어! 시발. 우리 팀은 다 죽었다고!” 내가 대답하기에 앞서 다니엘이 먼저 격하게 말을 뱉었다. 대형견은 또 혼자 한참 욕을 씨부렁씨부렁하더니 말을 이었다. “난 운 좋게 수풀 속으로 빨리 도망을 쳤는데…… 뛰어가면 오히려 용족이 더 쫓아올 것 같더라고. 그래서 저 커다란 바위 밑에 꼼짝도 안 하고 숨어있었지. 시발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네! 하아…….” 난 그 말을 들으며 그나마 다니엘이 3학년이었기에 살아남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만약 그가 2학년이어서 파란 가루가 묻은 청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면, 아무리 바위 아래 숨어있었다 하더라도 용족한테 틀림없이 걸렸을 테니까. “요, 용족이라니…… 맙소사…….” 어깨춤은 말만 듣고도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상태였다. “다 필요 없고 난 당장 결계 밖으로 도망갈 거야. 그게 유일한 살길이야.” 다니엘이 서둘러 움직이며 그렇게 말했다. “너희 둘도 지금 나랑 같이 가는 게 좋을걸. 최대한 빨리 결계 밖으로 도망가지 않으면 다 죽어버릴 테니까.” “도망가도 난 소용없어. 결계가 날 못 나가게 막아버려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거든.” 내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지금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너는 그런 개소리가 나오냐?” 용족에게 쫓긴 충격으로 아직 감정이 가라앉지 않은 다니엘이 화를 벌컥 냈다. 결계가 날 막고 있다는 내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아니, 내가 하는 건 개소리가 아니지. 나는 개가 아니고 개 주인이거든. 개는 바로……” “닥쳐! 시끄러워!” 다니엘은 더 뭐라고 하기도 싫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여기 이대로 있든지 말든지 너 알아서 해. 난 갈 테니까.” “저, 저도 같이 가요!” 어깨춤도 곧바로 다니엘의 곁으로 붙었다. 하긴, 이 둘은 지금이라도 떠나면 멀쩡히 결계 밖으로 나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것은 현명한 행동이었다. 문제는 바로 나였다. 이 세상의 주인공인 내가 살아남으려면 결국에 언젠간 결계를 뚫고 나갈 수 있어야만 했다. “혹시 고수님들은 못 봤어? 분명히 근처에 착륙하는 걸 봤는데.” 다니엘이 앞뒤 안 보고 서둘러 도망갈 모양새였으므로, 내가 그전에 서둘러 물었다. “…….” 내 질문에 다니엘이 얼굴을 굳혔다. “뻔하지. 죽었을 거야.” “죽었다고? 벌써?” 그러자 다니엘이 침울한 낯으로 대답했다. “바위 밑에 숨어있었을 때, 그 비행 장치가 내려오는 소리가 났어. 용족이 그쪽으로 뛰어갔고…… 사실 그 덕분에 내가 살아난 거기도 해. 용족이 날 찾는 걸 포기하고 그쪽으로 갔으니까.” “…….” “그런데 용족이 지르는 괴성과 함께 무언가 굉음이 들리더라고. 얼마나 소름 끼치던지. 하늘을 열심히 살펴봤지만 비행 장치도 다시 떠오르지 않았고……. 교수님들도 살아계셨으면 적어도 이쪽으로 우릴 도우러 오셨을 텐데. 결국 오지 않았잖아.” 다니엘의 설명을 듣고 나서 내가 곰곰이 상황을 정리해봤다. “그러니깐, 고수들은 첫 번째 신호탄이 터지고 나서 여기 왔지만, 곧바로 용족한테 당해서 죽었다는 거네……. 고수들이 확성 뿔피리인지 뭔지를 갖고 있었다고 하던데.” 무림 고수는 초장에 죽어버려 그 확성 뿔피리를 쓰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내가 절벽에서 떨어지며 이 지랄 맞은 상황을 반복하는 동안, 고수들의 뿔피리 소리를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확성 뿔피리? 맞다. 그런 게 있었지.” 마침내 다니엘도 그것의 존재를 떠올렸는지 놀란 듯한 표정을 하며 날 보았다. 마치 무식한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듯이. “그 확성 뿔피리를 불면, 다른 공자들도 대피시킬 수도 있는 거겠지? 그 정도 성능이 아니면 아예 고수들이 비상용으로 들고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내가 말했다. “…….” “…….” 다니엘과 어깨춤이 동시에 얼굴을 굳혔다. “도른 공자의 말이 맞지만, 그렇게 해선 안 돼요.” 어깨춤이 먼저 소심하게 나를 말렸다. “음?” “지금 교수님들을 확인하러 가시려는 거잖아요? 확성 뿔피리 얘길 하시는 거 보니까.” “그야 당연히 그렇지.” “확성 뿔피리는 소리가 엄청나요. 그걸 불면 이 숲에 사는 용족 네 마리를 전부 불러 모으게 될 거예요. 뿔피리를 분 사람은 반드시 죽을 거라고요.” 아? 용족이 네 마리였어? 그건 또 몰랐네. “이 공자의 말이 맞아. 자살행위야. 안 그래도 용족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데…….” 다니엘이 주위를 불안하게 경계하면서 덧붙였다. 다니엘도 그렇지만 어깨춤 역시 쓸데없는 확성 뿔피리에 관심 끄고 당장 이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표정이 간절했다. 나도 내 목숨을 희생해서 그 뿔피리를 불어볼 생각은 없었다. 퇴폐미남을 만나려고 호각 불었다가 용족한테 쫓겨서 개고생한 걸 생각하면. “잠깐. 그런데 고수들이 죽었다고 해도 열기구는 멀쩡할 수도 있잖아. 그걸 타고 하늘 위에서 뿔피리를 불면 괜찮을 텐데? 용족은 날지 못하니까.” 내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들도 비행 장치를 타면 결계 밖으로 돌아가는 게 훨씬 빠를 테고.” “…….” “…….” 다니엘과 어깨춤은 동시에 얼이 빠진 것 같았다. 마치 얼어붙은 사람처럼 날 멍하니 응시했다. 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가봅시다.” “얼른 가보자.” “교수님들이 정말 돌아가신 것인지 확인은 해봐야죠.” “맞아. 그게 학생 된 도리지.” 갑자기 두 사람은 짝짜꿍이 되어 날 재촉하면서 내 등을 떠밀었다. 지금까지 고수들이 죽었거나 말거나 상관 않고 일단 도망부터 가려던 두 사람이건만. 열기구를 타면 빨리 탈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어느샌가 스승을 참으로 존경하는 성실한 제자로 돌변해 있었다. *** 고수들이 죽어있는 곳은 멀지 않았다. 술주정뱅이는 용족의 발에 밟혀 죽어있었고 무림 고수로 추정되는 것은 화염에 타서 재가 되어 있었다. “젠장. 비행 장치도 고장 났잖아.” “그렇게 요란한 굉음이 나더라니…….” “망했네. 망했어.” 다니엘, 어깨춤, 내가 차례대로 말했다. 고수들의 시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기구부터 살핀 우리는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풍선은 크게 구멍이 나서 바람이 빠진 채로 시체들 옆에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풍선도 풍선이지만 점화 장치가 화마에 터진 채로 망가져 있었다. 아까 전의 쾅 터지는 소리는 아마 이 점화 장치가 터지는 소리였던 것 같았다. 하늘을 날아보려던 희망은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비행 장치가 없으면 확성 뿔피리도 갖고 있어봤자 별 의미가 없었다. 뿔피리는 하늘 위에서 불 게 아니라면 위험했기 때문이다. “헛수고였군. 가자고.” 다니엘이 혀를 끌끌 차며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어깨춤은 곧바로 다니엘에게 합류했지만, 나는 따라가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 남아 고민에 잠겼다. “난 결계로 가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오히려 절벽 쪽으로 가는 게 나았다. 아니면 퇴폐미남의 이동 경로를 아니까 그쪽으로 가서 다시 만나보든가. 어디로 가든 결계 쪽과는 방향이 달라서 여기서 다니엘과는 찢어져야만 했다. “뭐해? 안 올 거야?” 먼저 가던 다니엘이 의외로 내가 신경 쓰이는지, 뒤를 돌아보면서 조급하게 물었다. “빨리 오세요.” 어깨춤 공자도 내가 얼른 따라오길 바라는 눈치로 덧붙였다. “어어! 그래!” 내가 우렁차게 대답하며, 단숨에 내가 갈 방향을 결정해버렸다. “기왕에 우리 잘생긴 멍뭉이를 만났으니 이번에는 같이 옆에 있어 줘야지. 아암. 그게 개 주인의 의무지.” 내가 주먹을 불끈 쥐며 얼른 그들을 따라잡았다. “…….” 개 운운하는 내 말을 들었는지 다니엘이 표정을 구겼지만, 생존을 위협하는 용족 문제가 지금은 더 크기 때문에 그냥 내 말을 씹어버렸다. 42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주변에 용족이 있을 수도 있어서 우리는 쉽게 눈에 띌 수 있는 달리기는 자제했다. 그저 주변을 경계하며 걸음만 빨리 놀릴 뿐이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동물이 뭔지 알아? 개야, 개.”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뒤 뜬금없이 다니엘이 그렇게 입을 뗐다. “엥? 말도 안 돼. 개를 싫어한다니? 그토록 사랑스럽고 귀여운 동물을?” 내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반문했다. 우리 대형견이 동족을 싫어한단 말인가? 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나의 반응과 달리,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어깨춤 공자는 이미 다니엘의 심정을 익히 아는 눈치였다. 다소 안타깝다는 듯한 연민 어린 표정으로 다니엘을 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개는 귀엽지. 개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아무 잘못이 없지.” “그런데 왜 싫어해?” “인간을 잘못 만나면 개고생을 하기 때문이지.” “음?” 다니엘의 대답이 정말 알쏭달쏭해서, 나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치고 깨달음을 얻은 후에 말했다. “아아, 괜찮아! 인간도 다른 인간을 잘못 만나면 개고생을 하거든. 그런 점에서 인간들은 모두 개라고 할 수 있지.” “…….” “…….” 내가 모든 인류를 그 자리에서 개로 만들어버리자, 다니엘과 어깨춤은 묘한 표정으로 날 봤다. “인간들도 전부 같은 개새끼들이니까 네가 개라고 해서 너무 실망할 것 없다는 소리야, 다니엘.” 내가 토닥였다. “그나마 1번 너는 엄청 잘생긴 개잖아? 이렇게 잘생긴 개도 드물지. 아주 훌륭해. 리트리버 같아.” 침묵하던 다니엘은 날 힐끗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뜻밖에도 1번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너의 개 같은 생각이었구나.” “그렇지. 난 그런 개 같은 생각을 많이 하곤 하지. 개가 하는 생각이 다 그렇지 뭐.” “어쨌든 너도 개라는 거네.” “이제 이해를 하는구나.” “그랬군. 지금까지 내가 잘 몰랐는데 이제야 너 같은 개자식이 이해가 가네.” “그럼! 난 개자식이고 말고.” 내가 다시 한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인간이 아닌 개로 다시 인정받았더니 아주 기분이 상쾌했다. 다니엘의 얼굴을 슬쩍 보니까 어쩐지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어깨춤도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손으로 입을 꽉 막고 있었다. “왜 그래? 기분 좋아 보여.” 내가 다니엘한테 물었다. “어? 아니야. 그냥 개새끼가 말을 하는 게 신기해서.” 다니엘이 답했다. 역시 날 개새끼라고 부른 것에도 악의는 없어 보였다. “아무렴, 내가 이래 봬도 세상 천하에 제일가는 개새끼거든. 고작 인간의 말을 좀 하는 것 정도야. 당연한 거 가지고.” 나는 나의 천재성을 또 세상에 이렇게 두루 알렸다. 이놈의 천재성은 인간일 때나 개일 때나 변함없이 동일한 것이다. 크흡, 하고 어깨춤이 희한한 소리를 뱉으면서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러면서도 어깨를 마구 들썩거리면서 열심히 어깨춤을 추었다. “오, 어깨춤 공자는 역시 춤에 일가견이 있다니깐. 용족한테 쫓기는 이런 와중에도 그런 춤 솜씨를 보이다니. 예술혼이 불타오르는군요.” 그의 별명을 ‘어깨춤’이라고 지은 나의 천재적 작명 실력에 나는 또 스스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 흠, 흠. 네.” 어깨춤은 춤을 추느라 힘든지 얼굴도 빨갛고 호흡 곤란이 오는지 잠시 끅끅거렸지만, 간신히 대답했다. 나는 어깨춤을 향해 벙싯 웃었다. 그때 하늘 위로 펑! 하고 두 번째 신호탄이 터졌다. 다니엘과 어깨춤도 이젠 용족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 그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다른 학생들에게 경고할 방도가 없었기도 했지만, 우리끼리만 결계로 가고 있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잠시 얼굴 위에 스쳤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이 숲에 용족이 네 마리 있다고 했죠?” 내가 화제를 돌려 어깨춤에게 물었다. 결계를 빠져나갈 때까지 난 이 숲에서 루프를 할 팔자이기 때문에, 이번엔 용족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얻어보기로 했다. “마물 도감에 나온 바에 의하면 그래요. 용족은 아스테시아 숲에만 서식하며, 세상에서 단 네 마리가 있다고요.” 어깨춤이 말을 계속했다. “이 숲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동굴이 있는데, 그 동굴의 동쪽 길, 서쪽 길, 남쪽 길, 북쪽 길을 각자 용족이 한 마리씩 차지하고 있다는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동굴?” 다니엘조차 금시초문인지 흥미로워하는 낯으로 호기심을 보였다. “물론 실제로 가본 사람은 없어요. 있다면 용족한테 다 죽었을 테니까요.” “그럼 마물 도감이란 책을 쓴 작가는 그런 동굴이 있는지 어떻게 알고 썼을까?” 다니엘이 기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어깨춤이 씨익 웃었다. “마물 도감은 고대에 어느 이름 모를 마법사가 쓴 책인데요, 자기 방 흔들의자에 앉아서 천리안으로 살펴보고 적었다고 후기에 적어놨어요.” “…….” “…….” 그렇구나. 천리안. 아무리 천리안일지언정 눈에 안 보인다는 동굴을 도대체 어떻게 봤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일단 넘어갔다. “네 마리 중에선 북쪽 길을 차지한 용족이 우두머리예요. 가장 마력을 많이 먹고 태어난 용족이죠.” 어깨춤은 이 상황에서도 점점 덕후의 본능이 살아나는지 목소리에 약간의 활기가 어렸다. “용족들은 몸에 어느 정도 붉은 기가 섞여 있는데, 우두머리만큼은 온몸이 태양처럼 새빨갛대요.” “그래? 내가 아까 봤던 용족은 그렇게 새빨갛진 않던데.” 다니엘이 다시 한번 떠올리는 것조차 싫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나도 지금까지 루프를 하면서 총 세 마리의 용족을 만났으나, 태양처럼 새빨간 용족은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도 용족이 총 4마리라면, 우두머리만 빼고 다 만나본 셈이었다. 세 번째 신호탄이 터진 직후 우리는 결계 앞에 도착했다. 아직 퇴폐미남 팀이 도착하지 않은 걸 보니 우리가 일등이었다. “휴우…….” 마침내 살아났다는 안도감에 다니엘과 어깨춤이 안도의 숨을 길게 뱉었다. 그러더니 서둘러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이놈의 결계.” 나는 통, 통, 하고 결계를 손으로 두들겼다. 역시 그것은 그대로 건재했다. 퉁! 한 번 더 발로 팍 차보았지만 보이지 않는 결계가 날 가로막고 있었다. “어? 알렉시스……?” 울타리를 넘어간 다니엘이 그런 날 보더니 당황해서 입을 벌렸다. “뭐, 뭐야? 왜 그러는 거야?” “말했잖아. 난 결계를 못 나간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빨리 나와.” 다니엘이 다시 한번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서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다니엘만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뿐, 내 몸은 결계를 나가지 못하고 막혀버렸다. 다니엘에게 잡힌 팔이 결계 사이에서 그대로 걸렸다. 다니엘이 아무리 움직이려고 해도 내 팔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 말도 안 돼.” 다니엘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맙소사.” 이 광경을 지켜보던 어깨춤도 경악해서 입을 쩍 벌렸다. “난 됐어. 우리 멍뭉이는 이럴 시간에 차라리 학교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내가 자포자기한 채 1번에게 말했다. 구조단이 와봤자 이미 늦었겠지만, 이라는 말은 목 뒤로 삼켰다. 그냥 다니엘을 내게서 떨어트리기 위해 한 말이었다. 멍뭉이를 안전하게 바래다줬으니까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구조단! 그래, 그게 낫겠다! 아,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다니엘은 도울 기회가 생긴 것에 반색했다. “저도 갈게요! 빨리 데려올게요!” 어깨춤도 그게 낫겠다 여겼는지 얼른 다니엘과 함께 학교로 달려갔다. 여기서 머뭇거리며 시간을 지체해봤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올 때가 됐는데.” 분명 퇴폐미남은 두 번째 신호탄이 터지고 나서 자체적으로 결론을 내려서, 팀원들을 이끌고 결계로 되돌아온다. 이번에도 4번은 여기로 올 것이다. *** 잠시 후, 팀원들과 함께 결계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제라드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하늘에서 네 번째 신호탄까지 터진 상태라서 그들은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마침내 울타리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날 보고는, 퇴폐미남이 순간적으로 반가운 얼굴을 하고는 와서 멈췄다. “알렉시스, 여기 있었구나! 빨리 왔군! 다행이다. 날 기다린 건가?” “…….” 마치 내가 놈을 보고 싶어서 기다린 줄로 착각하는 저 퇴폐미 흐르는 미소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물론 기다린 건 맞긴 한데. “넌 이번에도 기억 안 나지?” “뭐가 말인가?” 퇴폐미남의 순진한 표정을 보니까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게 명백했다. “후…….” 나는 또다시 설명해야 하는 이 비극에 장탄식이 나왔다. 그의 팀원들이 허겁지겁 울타리를 뛰어넘고 있을 때, 나는 퇴폐미남을 붙잡고 속사포처럼 빠르게 설명을 마쳤다. 내 얘길 듣고 난 퇴폐미남은 눈을 가늘게 떴다. “더 이상 맛이 가긴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광인의 길은……” “끝이 없구나. 없는 기억까지 만들어내다니. 라고 하려고 했지?” 나는 이미 4번이 뱉을 말을 알고 있었다. 지난 루프 중에서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 퇴폐미남이 눈에 띄게 흠칫하더니 충격받은 얼굴로 멍하니 날 봤다. “이것 봐. 난 결계 밖으로 못 나간다니까!” 내가 결계를 발로 퍽퍽 차고 손으로 쾅쾅 두들겼다. 퇴폐미남은 물론이거니와, 울타리 밖으로 넘어간 그의 팀원들이 전과 똑같이 경악했다. 심지어 그들의 대사마저 전과 같았다. “마, 맙소사.” “어떻게 된 거야?” “왜 도른 공자만 막혔지……?” 제라드는 결계를 빠져나가려고 용을 쓰고 있는 나를 우두커니 서서 쳐다보다가, 마침내 내 팔을 낚아챘다. “젠장. 그럼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떡하냐? 시간이 없잖아!” 43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퇴폐미남은 일단 내 말을 믿기로 결정하면 그다음부터는 행동이 빨랐다. 그는 날 잡아끌고 전과 똑같이 절벽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자세히 다시 설명해봐!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까 내가 간단히 설명한 걸로는 부족했는지 퇴폐미남이 다시 요구했다. 나는 절벽으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했다. 시간이 흐르며 하늘에서는 펑, 펑, 신호탄들이 연달아 터졌다. 우리는 속도를 늦추고 용족을 피해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 내 얘기가 끝난 뒤에도 퇴폐미남은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듯이 한동안 조용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결계가 못 나가게 너를 막고 있고……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다시 살아났으며, 용족의 말까지 알아듣는다 이거지.” “비슷한 대사를 얼마 전에도 네 입으로 한 거 알아?” 내가 알려줬지만 제라드는 내 말을 무시했다. “하긴 맹독에 죽지 않는다니 동족이냐고 묻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군.” 그렇게 말하고 나서, 퇴폐미남은 자리에서 우뚝 멈춰서서는 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거의 사람을 꿰뚫을 듯이 날카로워서 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왜. 뭔데. 왜 그렇게 꼬나봐?” 결국 저 퇴폐미 흐르는 눈빛을 도무지 참지 못한 내가 고개를 치켜들고 물었다. “생긴 건 똑같은데.” 날 빤히 보던 제라드가 문득 중얼거렸다. “나를 대하는 태도도 똑같고. 말투도 똑같고. 게다가…… 완전히 맛이 간 저 눈깔이야말로 속일 수가 없는데. 분명 맞는데.” 제라드는 날 보면서 계속 엉뚱한 말만 구시렁거렸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군…… 그렇다면 가능성은 한 가지뿐인 것 같은데…….” “아까부터 왜 자꾸 뭘 씨부렁거리는 거야? 눈깔 얘긴 또 왜 꺼내!” 답답한 내가 따졌다. 이 자식이 맨날 이런 식이라니까……. 제 혼자만 알고 잘난 체하는 거. 불현듯 가슴이 꽉 막힐 것만 같은 답답함에 사로잡힌 나는, 제라드한테 달려들어 놈의 팔뚝을 손으로 퍽퍽 쳤다. “뭐냐고! 뭐야! 말 좀 해봐! 당장 말 안 해?” 퇴폐미남이 갑자기 자길 퍽퍽 때리던 내 손을 양손으로 휙 붙들었다. 그리고 자기 얼굴을 바로 내 눈앞에다 갖다 댔다. 헉, 내가 숨을 삼켰다. 우리 두 눈이 코앞에서 마주쳤다. 서로의 숨소리마저 들릴 만큼 가까웠다. 절세 미남의 얼굴을 마주한 채 두 손마저 잡혀있다 보니 나는 갑자기 심장이 콩닥콩닥하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여기서 키스라도 하려는 건……. 나는 절로 입술을 움찔거리면서 조금씩 앞으로 내밀기 시작했지만. “너.” 퇴폐미남의 입에서 퇴폐미가 절절 흐르는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이 아닌 것 같은데.” “……뭐라고?” 이 미친놈이 뭘 잘못 먹었나. ***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하나밖에 안 나오거든. 알렉시스, 너 혹시 오늘 뭐 이상한 거 먹지 않았나?” 제라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걸 물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거든? 이 퇴폐미나 줄줄 흘리는 자식이. 너야말로 뭐 잘못 먹었냐?” 우리는 이 구역에서 뭘 잘못 먹은 인간은 네가 아니냐면서 아웅다웅했다. “농담 아니다. 곰곰이 잘 생각해봐라, 알렉시스. 정말 오늘 뭐 이상한 거 주워 먹지 않았나?” 제라드는 무얼 그리 확신하는지 자꾸만 내가 뭘 먹었다고 했다. “식도락 클럽 회원인데 당연히 맨날 주야장천 뭘 먹었지! 지금 날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차기 냠냠신선 유망주인 거 몰라? 매일매일 시도 때도 없이 처먹거든!” 내가 항의했다. 퇴폐미남은 멈칫하더니 막막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 숲, 속, 에 들어와서 뭐 먹은 거 없느냐는 거다.” “아아. 없는데?” “……그래? 이상하군. 그럼 애가 왜 이렇게 됐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 손을 놓고 걸음을 뗐다. 나는 퇴폐미남이 잡았던 두 손을 탈탈 털어서 손에 묻은 퇴폐미를 떨친 다음, 녀석의 뒤를 얼른 따라갔다. 근데 몇 걸음 떼기도 전에 갑자기 제라드가 걸음을 뚝 멈췄다. “아…….” 무언가를 떠올린 듯한 퇴폐미남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날 빤히 쳐다보며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착각했군.” “뭘?” “오늘 먹은 게 아니었구나.” “뭐를?” “너, 전에 노스브리치 나무에 올라갔다 떨어졌었지.” “……갑자기 그건 또 왜.” 내가 멈춰서서 제라드를 올려다봤다. 뜬금없이 여기서 그 얘긴 또 왜 하는 건지. 거참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 퇴폐미남은 말없이 날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당연히 중간에 떨어졌을 거라고 다들 지레짐작했지만, 사실은 꼭대기까지 올라갔던 거야. 그렇지?” “음.” 그건 또 어떻게 알아 가지고. 내가 대답을 피하며 눈알을 굴렸다. 병약미남 피터가 꼭대기까지 간 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근데 이번엔 내가 말한 게 아니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제라드가 알아서 추측한 것뿐이지. “노스브리치 꼭대기에 마지막 포션이 있었다는 건가……? 그럼 그게 환각 마법이 아니라, 나무의 자체적인 마력 때문에……? 마법사가 걸어놓은 장난이 아니었다고……?” 퇴폐미남이 생각에 잠긴 채로 혼자 중얼중얼댔다. “뭘 혼자 중얼거려? 나랑 같이 붙어있더니 너도 나 닮아가냐?” 내가 물었다. 캐릭터성을 빼앗긴 게 기분이 별로였다. 게다가 포션이니 마법이니 뭐니, 놈이 중얼거리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제라드는 갑자기 날 보고 물었다. “알렉시스, 그 나무 꼭대기까지는 대체 어떻게 올라갈 수 있었지? 환각이 보이지 않았나?” “아니? 안 보이던데?” “환각이 안 보였다고?” 퇴폐미남은 처음에는 놀란 얼굴을 했지만, 곧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마나 정신 상태가 특이했으면 환각도 소용없었을까. 장애물 따위는 다 이겨버리는 정신력이로군. 묘하게 설득력 있어.” 이 자식이 뭐라는 거야. 가만있어 봐. 전에 병약미남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나는 식도락 클럽 회원답게 다시 한번 복숭아의 꿀맛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거참, 그 꼭대기의 복숭아가 참 달고 맛은 기가 막히게 좋더라.” “그렇군. 또 그런 걸 집어먹었군.” 제라드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그 복숭아인지 뭔지가 혹시 세계 3대 포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참 뜬금없는 발언이었다. “…….” 하지만 난 진지하게 나무에서 떨어졌던 그때를 떠올려봤다. 머리가 피떡이 된 채, 복숭아가 기연처럼 생겨 가지고는 아무 효과도 없었다는 사실에 얼핏 화가 났던 것 같다. “그럴 리가 있냐? 머리 찢어져서 피투성이 된 걸 너도 봤잖아. 포션이었으면 금방 나았겠지. 그거 그냥 복숭아야.” “아니, 그동안 아무도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질 못해서 3대 포션이 거기 있는지 몰랐을 뿐이다. 다들 마법사의 장난이라고만 생각했으니까.” 난 여전히 믿기지 않아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젠 세 번째 포션의 효과가 뭔지도 알 수 있을 텐데.” 퇴폐미남이 마치 내게 맞춰보라는 듯이 말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3대 포션이라고 다 맛있는 건 아니다. 우리 가문 포션은 맛이 엄청 썼거든.” 퇴폐미남이 피식 웃으면서 덧붙였다. “흠…….” 난 잠시 머리를 굴려보았다. 정말로 그 복숭아가 이 녀석 말대로 3대 포션이었다면. 과연 그 복숭아의 효능은 뭘까. 세계 3대 포션 중에서 로스트베인 가문이 가진 첫 번째 포션은 평생 모든 상처에서 급속히 빠르게 회복시켜주는 ‘힐링 포션’. 황실이 갖고 있는 두 번째 포션은 검으로 베어도 몸에 상처가 나지 않게 만들어주는 ‘쉴드 포션’. 9황녀였던 나는 물론이고 다른 황자, 황녀들도 구경도 못 해 봤던 것이다. 이 쉴드 포션을 손에 쥔 자는 오로지 황제뿐이다. 황위에 등극해야지만 먹을 수 있는 것이라서 그렇다. 황궁의 비밀 금고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 오로지 황제만이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다. 황제는 이 포션 덕분에 적어도 칼에 찔려 죽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포션은, 지금까지 아무도 행방을 몰랐는데……. 정말로 그게 내가 먹었던 복숭아라면……. “……아?” 무언가가 퍼뜩 떠오른 내가 마침내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해독! 해독이다! 해독 포션이었구나! 그래서 나한테 용족의 맹독이 안 통했던 거야!” 내 말에 퇴폐미남도 싱긋 웃었다. 세 번째 포션은 모든 독에 내성을 가지게 되는 포션이 분명했다. 왜 세계 3대 포션에 속할 정도인지 이제야 알겠다. 심지어 용족의 맹독까지도 통하지 않으니까……! 세상의 다른 모든 독은 절대로 통할 리가 없었다. 크르르르르! 그때 불길하게도 멀찌감치에서 용족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 우리는 다시 조심하며 말없이 숲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런데 뒤늦게 내 머릿속에 병약미남의 경고가 떠올라서 속삭였다. “참, 나 꼭대기 올라간 거 비밀이니깐 다른 사람한텐 말하지 마. 피터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피터 레이? 그 녀석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가?” 퇴폐미남은 살짝 미간을 구겼다. “당연하지. 피터와 나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절친이거든.” 물론 피터가 날 세상에서 제일가는 절친이라고 생각하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냥 우겼다. “병약미남하고 얘기하다 보면 마음이 아주 편해. 걔한테는 숨길 게 없거든.” 내가 허심탄회하게 뱉자, 퇴폐미남은 잘생긴 얼굴에 차가운 낯빛을 했다. “숨길 게 없다고? 피터 레이는 네… 비밀을 전부 알고 있다는 말인가?” 44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4번의 목소리가 어딘지 묘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이지. 절친이라니까 그러네. 그리고 피터는 눈치가 빨라서 뭘 숨겨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어. 어차피 다 들키게 되어 있거든. 심지어 내가 여자……” 여자, 까지 뱉고 나는 아차 싶어 말을 멈췄다. 피터는 내가 여자임을 첫눈에 알아봤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여자……?” 제라드는 흥미와 놀람이 반반씩 섞인 얼굴로 날 빤히 응시했다. 난 이미 튀어나온 이 말을 어떻게 수습할까 하다가 대충 이어붙였다. “……여자 친구를 그간 몇 명 사귀었는지까지 알아낸다 이 말이지. 하하하.”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 슬쩍 웃음까지 던졌다. “아아.” 퇴폐미남이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 곧 장난기 어린 말투로 되물었다. “그래? 네가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고?” “물론이지.” “몇 명이나 사귀었는데?” “한…… 3명?” 나는 어린 시절 같이 놀이터에서 놀았던 동네 친구들을 머릿속으로 헤아렸다. 착해서 그나마 나랑 놀아주던 꼬마 애들. 그 이후로는 딱히 이렇다 할 친구도 없어서 모르겠다. 하루하루가 피폐한 보약 후유증 환자의 삶이란 다 그런 게 아니겠는가. “3명이라. 생각보다 많군.” 제라드가 여전히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대꾸했다. “음. 그래?” 이 동네 귀족 아이들은 대체 놀이터에서 몇 명을 데리고 노는 걸까. 그래도 세 명보다는 많을 것 같은데. “누구누구를 사귀었지? 언제 어떻게? 귀족 영애였나? 아니면 평민? 설마 노예는 아니었겠지?” “어?” 몹시나 구체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퇴폐미남의 상세한 질문에 난 황당했다. 기억도 안 나는 놀이터 꼬마 애들 신상은 갑자기 왜 캐려는 것인가. 그런데 다시 가만히 보니까, 퇴폐미를 줄줄 흘리면서 씩 웃고 있는 능글맞은 그의 표정이 정말이지 수상쩍었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휙 고개를 돌렸다. “별건 아니고, 그냥 너 같은 애는 어떤 스타일이 이상형인지 궁금해서.” 퇴폐미남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뭐? 놀이터 얘기하다가 갑자기 이상형은 왜 물어?” 난 어이가 없었다. 놀이터 얘기 따위 한 적이 없는 퇴폐미남은 잠깐 멈칫했다. 급작스러운 화제 전환이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난 침을 튀기며 대답했다. “그야 뭐, 내가 좋아하는 이상형은 뻔하잖아. 나는 무조건 절세……” 절세 미남, 이라고 하려다가. 현재 내가 남자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뜻밖의 오해를 살까 봐 얼른 뒷부분을 고쳤다. “……미인이지!” 한참이나 물끄러미 날 보던 제라드가 돌연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렇군. 절세미인…이란 말이지.” 퇴폐미남이 중얼거렸다. “문제없겠군.” “……?” “…….” 잠시 후, 절벽 앞에 거의 도달해갈 때쯤에 퇴폐미남이 화제를 돌리며 다시 입을 뗐다. “그건 그렇고 넌 용족이랑 진짜 대화 좀 해보면 좋겠는데.” “그건 사양하겠어.” 내가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용족만 봐도 지릴 것 같은데 무슨 대화라는 말인가. “전에도 그 소리 하더니. 진짜 내가 걔네랑 얘기가 통할 거라 생각하는 거냐?” “어, 너라면 통할걸.” “…….” “…….”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퇴폐미남이 먼저 얘기했다. “넌 세 번째 포션을 먹고 벌써 반쯤은 용족이 된 것 같거든.” “허…….” 나는 제라드의 헛소리에 그만 뒤통수가 얼얼했다. 정신부터 찾고 마침내 탄식했다. “이 싸바 자식이 전엔 멀쩡한 나를 알코올 중독으로 만들려고 하더니…… 이제는 아예 마물로 만들어버리네?” “농담이 아니다. 그 포션…… 복숭아를 먹었을 때 뭔가 이상하지 않았나?”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맛있기만 하더라 뭘.” 내가 쏘아붙였다. 그때 방귀를 좀 요란하게 뀐 게 문득 생각나긴 했지만. 퇴폐미남 앞에서 방귀 얘긴 꺼내고 싶지조차 않았다. 얘기하면 분명 앞으로 마주칠 때마다 날 놀릴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말이 없던 퇴폐미남은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지? 용족은 근본적으로 죽은 적룡의 마력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을.” “응.” “적룡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아스테시아 숲속에서 죽었다. 만약 적룡이 죽은 후…… 남은 마력이 미약하게나마 어딘가로 흘러갔다면?” “뭬야?” “생각해 봐. 상당히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그 마력 한 줄기를 빨아들였다면 어떻게 됐을지. 그 나무가 마력을 띠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야.” “……그게 노스브리치 나무라는 거야?” “물론, 그냥 가설일 뿐이다.” 현재 노스브리치 나무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비록 결계 안쪽은 아니지만, 엄연히 아스테시아 숲의 일부였다. 다만 마물들이 더 깊은 안쪽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고대 마법사들이 중심을 둘러싸고 결계를 친 것뿐이다. 어쨌거나, 먼 옛날에는 노스브리치 나무가 있던 숲의 외곽 부근도 다 적룡의 영역이었다는 듯이다. “죽은 적룡의 마력을 조금이라도 흡수했으니, 노스브리치 나무가 지금까지 그리도 오래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제라드가 말했다. “환각도 마법사가 재미로 건 게 아니고 말이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나무의 생존 본능이 마력 덕분에 그렇게 발현되는 건지도 몰라.” 거기까지 말한 퇴폐미남이 지그시 날 응시하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무 열매도 마력을 지니고 있었겠지. 애초에 적룡에게서 흘러들어왔던 마력이. 그러다 만약 인간이 그걸 먹게 됐다면…… 그 인간은 어떻게 될까?” 불현듯 그때 먹은 복숭아가 지금 뱃속에서 요동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타고난 몸은 인간이니, 완전한 용족이 되긴 힘들 거야. 아직 넌 상태가 멀쩡해 보이기도 하고…….” 퇴폐미남은 내 상태를 가늠하듯이 내 낯짝을 훑어봤다. “혼자만 결계를 못 빠져나가는 것도, 네 몸에도 용족과 똑같이 마력이 흘러서인 것 같다.” 여전히 뱃속이 복숭아로 꿀렁거리는 느낌이었지만, 난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한마디로 내가 복숭아를 먹고 반쯤 용족이 되는 바람에, 결계에 막혔다. 그게 너의 결론이란 거지?” “내 추측은 그렇다.” 퇴폐미남 역시 걸음을 멈추고 날 응시했다. “…….” “…….” 우리는 멈춰서서 서로를 쳐다본 채 숲속에 서 있었다. 나는 갑자기 머리가 어질했다. “그 말인즉슨, 나도 다른 용족들처럼 이 숲속에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거야? 마물은 결계 밖으로 못 나가니까.” “…….” 퇴폐미남이 뭐라도 대답해주길 바랐지만, 대신에 길고 긴 침묵만이 흘렀다. “으아아아악!” 급기야 나는 혼자서 절규하며 머리를 쥐어뜯고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말도 안 돼. 내가 진짜로. 마물이 됐다고? “알렉시스, 어떻게든 방법은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퇴폐미남이 뜻밖에도 날 위로라도 하려는 것처럼 다가와서 다정하게 말했다. 졸지에 반쯤 용족이 되어버린 날 내려다보면서도 퇴폐미남은 딱히 거부감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건 내 겉모습이 아직 인간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망했어! 망했다고! 이러고 있다가 갑자기 내가 저 용족들처럼 날개 나오고 화염 뿜는 괴물로 변신하면 어떡해!” 나는 머릿속을 잠식한 내 상상에 그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은 멀쩡해 보여도 갑자기 완전한 마물이 될지 모르는 거 아니야? 아아! 주인공이 마물이 되고 이 소설은 끝나버리는 것인가! 아직 연애도 제대로 못 해 봤는데……! 완전히 변신하기 전에 키스라도 한 번쯤은……” “제발 진정 좀 해.” 퇴폐미남이 다가와서 바닥에 주저앉은 나의 어깨를 살짝 토닥였다. “용족이건 아니건, 어차피 네 미친 성격은 똑같을 텐데 뭔 차이가 있어.” “아니 그게 무슨…….” 밑도 끝도 없는 4번의 발언에 나는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절규까지 뚝 멈췄다. “그렇잖아. 용족이든 아니든 네 연애 사업은 별반 차이가 없잖아. 원래부터 제로였는데 뭘 그래.” 퇴폐미남이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물론 나야 전생에서도 그렇고 지금까지 남자친구 한 번 사귀어 본 적이 없는 모태 솔로가 맞긴 하지만……. 왜 뺨이라도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지? “키스는 원하면 언제든지 내가 해줄 테니까, 그만 일어나.” “어어?” 방금 뭐라고…… 뭘 해준다고……? 내가 뭘 잘못 들었나? “그러니까 용족이랑 대화 좀 해보라는 거야. 혹시 아나? 그들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 다른 녀석들 말고 우두머리를 한번 만나보는 것이 어떤가?” “…….” 나는 멍한 정신 때문에 귓가에 아무것도 안 들렸다. 그보다는 그전에 4번이 한 말이 더 중요했다. “너 아까…… 뭘 해준다고……?” 내가 멍한 표정으로 두 눈을 끔벅하고 올려다보자, 퇴폐미남이 피식 웃었다. “뭐? 키스? 해줘?” “…….” 어? 어어?? 내가 어버버하면서 머뭇거리자 퇴폐미남이 날 재밌어하는 표정으로 응시했다. “지금은 말고, 나중에.” 퇴폐미남이 쿡 웃고는 말했다. 그리고 휙 몸을 돌렸다. “어차피 이번에 네가 또 죽으면, 난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할 테니. 이럴 때 하면 억울하지.” 그가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 나한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퇴폐미남은 내가 여자인 걸 모르는데. 서슴없이 키스를 해주겠다 하다니……? “…….” 아니지, 참. 난 곧바로 생각을 바꿨다. 원작에서도 4번은 남장하고 있던 여주와 티격태격하며 미운 정으로 엮이던 캐릭터가 아닌가. 결말까지는 안 읽어봐서 몰라도, 나중엔 분명 여주를 좋아하게 됐을 것이다. 지금까지 신경 안 썼는데. “역시 성향이 그쪽이겠지?” 내 질문에 담긴 느낌이 심상치 않았는지 퇴폐미남이 멈칫하곤 뒤를 돌아봤다. “무슨 성향?” “너 남자 좋아하잖아. 맞지?” 적당히 돌려 물어볼 줄 모르는 내 주둥이가 돌직구를 날렸다. “…….” 4번은 얼굴이 굳어진 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퇴폐미남은 마치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차마 할 말이 나오지 않는 듯, 입은 떼어지지 않았다. 그저 길고 긴 침묵일 뿐이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나 퇴폐미남의 심경은 참으로 복잡해 보였다. 내가 너무 지나친 돌직구를 던졌나 싶어서, 그런 성향도 괜찮다고 말하려는 찰나. 마침내 퇴폐미남이 먼저 정적을 깼다. “눈썰미만 꽝인 줄 알았더니, 역시 눈치도 꽝이군.” 퇴폐미남은 그런 알쏭달쏭한 말만 남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45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용족을 기다릴 필요도 없겠어. 그냥 지금 뛰어내려야지.” 절벽에 도착한 내가 주먹을 불끈 쥐고 망설임 없이 뛰어내리려고 하자, 퇴폐미남이 얼른 날 잡았다. “용족 쳐들어오면 그래도 얼굴은 보고 죽어.” “왜?” “혹시 모르잖아. 운이 좋으면 곧바로 용족의 우두머리를 만날지도.” “만나기 싫다니까 그러네. 별로 걔네들이랑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밑져야 본전이잖아.” “…….” 맞는 말이라 나는 나중에 떨어지기로 하고, 벼랑 끝에 걸터앉았다. 나와 4번은 나란히 앉아 머리를 간질이는 산들바람을 느꼈다. 너른 협곡을 사이에 두고 멀리 펼쳐진 울창한 숲은 참으로 웅장한 광경이었다. 이후 퇴폐미남은 나름 머리를 굴리더니 다음 루프에 내가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를 얘기하며 내 의견을 구했다. 난 얘길 듣다가 제라드의 얼굴을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봤다. “너 원작에서도 이랬냐? 싸바 주제에 다른 공자들 목숨을 신경 쓰다니.” 나는 그냥 혼자서만 결계 밖으로 도망가려고 했는데, 퇴폐미남은 다른 학생들까지 구조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작? 또 무슨 소린가.” 퇴폐미남은 이해하질 못했다. 나도 이세계에서 좀 살다 보니 느낀 건데. 이쪽 사람들은 내가 아무리 들으라는 듯이 독백을 날려도 특히 원작 관련 이야기는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쩌면 자동으로 잘 이해가 안 되게끔 보정되는지도 몰랐다. 마치, 아무도 내가 여자인 걸 못 알아보는 것처럼. “아냐, 아무것도.”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퇴폐미남이 제안한 계획을 검토해봤다. 내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 검술 수업 학생들 대부분은 죽게 된다. 원래라면 살아남을 사람은 첫 번째 신호탄이 터졌을 때의 우연한 생존자인 1번 다니엘. 그리고 두 번째 신호탄이 터졌을 때 곧바로 결계 밖으로 돌아온 퇴폐미남의 팀원들뿐이었다. 나머지 팀의 신호탄이 전부 터진 걸로 봤을 때 그 밖의 학생들은 전부 다 죽을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다른 공자들까지 구조할 방법을 제안하는 제라드에게 나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번엔 그의 제안을 시도해봐도 나쁠 거야 없겠지. “흐음, 저 아래로 무지갯빛 강물이 흐른다니. 내 눈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이윽고 절벽 아래를 힐끗 내려다본 퇴폐미남이 말했다. “지금은 안 보이고 한참 허공에서 떨어지다 보면 보여. 이따 뒤에서 밀어줄 테니까 확인해봐.” 내 살해 협박에 퇴폐미남은 피식 한번 웃기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 조용하던 제라드는, 그동안 계속 마음에 걸렸었는지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나 남자 안 좋아한다.” 「살해자에게 응징을!」 “뭐라고?” 하필이면 용족 한 마리가 저쪽에서 나타나 귀청을 때리는 괴성을 내지르는 바람에, 나는 퇴폐미남이 뭐라고 했는지 듣지 못했다. 그러자 퇴폐미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 남자 안 좋……” 「살해자에게 응징을!!」 퇴폐미남이 뭐라고 말만 하려고 하면 용족의 괴성이 그걸 덮어버렸다. “뭐?” 내가 제대로 듣기 위해 얼른 일어나 퇴폐미남한테 가까이 낯짝을 들이대며 귀를 기울였지만. “나 남……” 「살해자에게!!」 “……됐다. 됐어.” 퇴폐미남은 하늘을 향해 길고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응징을!!」 저기서 용족 한 마리가 쿵, 쿵, 하고 우리들 앞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비록 용족이지만 자주 보니까 좀 반가운 거 같기도 했다. 반면, 용족이 자꾸 자기 말을 덮어버려서 기분이 상한 퇴폐미남은, 용족을 죽일 듯이 쏘아보고 있었다. 쿵. 쿵. 용족이 다가왔으나 우리 둘은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용족을 마주했다. “나는 너와 같은 동족이다! 우두머리를 만나고 싶다!” 내가 피하지도 않고 다짜고짜 앞으로 나서서 용족에게 소리치자, 용족이 자리에서 멈췄다. 눈앞의 용족은 태양처럼 새빨간 피부가 아니었다. 즉, 용족의 우두머리는 아니란 뜻이었다. 오히려 이놈은 날 맨 처음에 죽인 용족 녀석 같았다. 「살해자에게 응징을!」 머리가 나쁜 놈인지, 용족은 내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우리들에게 화염을 화르륵 내뿜었다. “……악! 뜨거!” 이래 가지고 용족의 우두머리를 만나라고? 아니 굳이 만나야 해? 싫다 싫어. 그냥 안 만날래. 내가 그런 결심과 함께 뜨거움과 고통에 휩싸인 찰나. 퇴폐미남도 화염에 휩싸인 게 보였고, 나는 아까 예언한 것처럼 일단 퇴폐미남의 등을 절벽 아래로 밀어버렸다. 마찬가지로 나도 다시 한번 절벽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 변함없이 토끼 마물이 풀숲에서 튀어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슈욱―! 이번에도 덩치가 화살을 쏘아 토끼 마물을 죽였다. “미리 손 좀 풀어야죠.” 덩치 놈이 정해진 대사를 치자마자. “야 신호탄 내놔.” 나는 다짜고짜 그렇게 뱉으면서 와락 덩치한테 달려들었다. “뭐, 뭐야? 왜 이래? 아악!” 덩치는 제 품속에 있는 신호탄을 노리는 나를 떼어내려 하며 몸부림을 쳤다. “이 엑스트라 녀석이. 예상보다 힘이 센데?”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덩치는 검술 실력은 떨어졌지만, 몸집이 크기 때문에 쉽게 나의 레슬링 공격에 굴복하지 않았다. “도른 공자! 왜 그러는 거예요!” “신호탄은 왜 뺏으려고! 설마 그걸 쏠 작정은 아니겠지!” “혼자 팀장이라고 착각하는가 본데 절대 아니라니까!” 갑작스러운 육박전에 다른 팀원들이 전부 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당황해서 한마디씩 외쳤다. “이 돌은 새끼가 진짜!” 급기야 덩치가 욕을 하면서 그 큼지막한 손으로 마치 유도 선수처럼 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으악!” 낙법도 모른 채 딱딱한 땅바닥에 던져진 내가 비명을 질렀다. 신호탄은 뺏지도 못한 상태였다. 이러면 퇴폐미남과 나눴던 행동 계획은 초장부터 물거품이 되고 만다. 지금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좀 미친놈처럼 보이겠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간의 일을 찬찬히 설명해봤자 덩치 일행이 믿을 리도 없고……. “신호탄! 내놓으라고! 빨리!” 굴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내가 두 눈에서 형형한 안광을 내뿜으면서, 검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스르릉! 퇴폐미남이 허섭스레기 같다고 했던 내 연습용 검이 비로소 자신의 허접함을 자랑하면서 검집에서 튀어나왔다. “무슨 짓이야! 검 집어넣어!” 덩치가 소리 지르며, 자신의 메인 무기인 활에다 번개같이 화살을 끼우고 날 겨냥했다. 다른 팀원 둘도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도, 도른 공자…… 진짜 왜 이러세요, 갑자기……. 얼른 검 집어넣으세요.” 검을 빼지 않은 것은 심약한 어깨춤 공자뿐이었다. “여기서 지금 우리끼리 싸우면 어쩌자는 거예요?” 물론 나는 어깨춤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덩치에게 나의 용건이나 말했다. “다 필요 없고 나는 지금 당장 신호탄 좀 쏴봐야겠어.” “…….” “…….” “…….” 덩치 일행이 다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신호탄에 대한 집착이 참으로 엄청나네요…….” 어깨춤 공자마저 진심으로 감탄스러워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반면 다른 공자들의 반응은 무척이나 격정적이었다. “참나. 그놈의 팀장 놀이를 하려고 지금 이 난리를 부리는 거야?” “장난으로 신호탄을 쏘면, 교수님들이 와서 감점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 해?” “내 중간 평가 성적을 망치면 도른 공자가 책임질 거냐고?” 덩치 일행이 내게 분노를 쏟아냈다. 귀족 간에 존재해야 할 격식 있는 대화고 뭐고 아예 없었다. “도른이 아니고 도렌.” 난 이런 정신없는 와중에도 내 이름을 정정했다. “…….” “…….” 싸한 정적이 흘렀다. 우리는 서로 무기를 겨누고 있었지만, 내게는 이런 팽팽한 신경전을 펼칠 시간이 없었다. “후. 어디 막아볼 테면 막아보시지! 간다아!” 내가 무작정 덩치한테 달려들자 히익, 하고 놀란 덩치가 얼결에 겨냥하고 있던 활에서 화살을 놓치고 말았다. 슉! 화살이 날아왔지만 나는 검으로 가볍게 탁 쳐내버렸다. 그냥 본능적으로 검을 흔들었더니 그렇게 된 거였다. 화살촉이 핑, 하고 칼날에 맞고는 저 멀리 바닥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 “……!!”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무려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버린 나의 반사 신경은 내가 봐도 경악스러웠다. 다들 어안이 벙벙해져서 입을 쩍 벌렸다. 심지어 얼결에 활을 쏜 덩치마저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어있었다. 잠시 놀라긴 했으나 나는 목표물을 놓치지 않았다. “빨리 내놔! 신호탄!!” 미친 듯이 달려들어 검으로 덩치의 목을 가까이 겨누자, 덩치가 손에 들고 있던 빈 활시위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아, 알았어. 주면 될 거 아냐! 이 미친…….” 마침내 덩치가 항복했다. 다른 팀원들도 차마 내게 달려들어 말릴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저 또라이가…….” “미쳤나 봐 진짜…….” 그냥 그렇게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릴 뿐이었다. 덩치는 새삼스레 분노 어린 눈으로 나를 쏘아보면서, 품속에 넣어놨던 신호탄을 꺼내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진작에 줄 것이지.” 내가 신호탄을 받아들면서 방긋 웃었다. 그러면서 덩치한테 겨눴던 검을 도로 거둬서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다들 안도하는 표정으로 각자의 무기를 내렸다. “다음번에는 그냥 육박전 하지 말고 바로 검부터 휘둘러야겠구만.” 내가 덧붙였다. “……” “……” 다음번에도 이런 짓을 하겠다는 내 말에 다들 이를 꽉 깨물었다. 물론 내 말은 이번 루프에서 죽으면 다음 루프에 그러겠다는 말이었지만…… 그런 나의 심오한 뜻을 이해할 자는 없었다. “기, 기말 평가 때도 이러시려구요?” 어깨춤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딱히 설명하기도 뭣해서 아무 말도 안 했더니, 덩치 일행의 얼굴에 일제히 똑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다시는 저 도른 놈이랑 같은 팀 하나 봐라.’ ‘기말 평가마저 망치는 것은 절대 안 돼.’ ‘왜 하필 저런 또라이랑 엮여 가지고.’ 뭐 보나 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물론 내겐 그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신호탄을 하늘로 향한 채로 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46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펑! 저 높은 하늘 위로 신호탄이 날아오르더니 불꽃과 형형색색의 가루가 터졌다. “우리 팀은 망했네. 망했어.” “아무 위험도 없는데 구조 요청을 하다니.” “그래도 교수님께 상황을 잘 말씀드리면 우리는 괜찮지 않을까요?” “도른 공자가 저지른 행동에 대해 당연히 자세히 말씀드려야지.” “팀장을 공격해서 신호탄을 빼앗은 거니, 낙제라도 할 말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감점은 도른 공자 혼자서 받아야 한다고요.” 덩치 일행은 그렇게 침 튀기며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낙제야 되든지 말든지.” 내가 코웃음을 쳤다. 그놈의 용족 때문에 지들의 생사가 걸려 있는 줄도 모르고. 참 별 걱정을 다 하네. “그나저나 아직 용족이 깨어나지 않은 시점이어야 할 텐데…….” 만약 용족이 이미 깨어나서 동굴 밖으로 나온 상태라면, 신호탄 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직행할 가능성이 몹시 컸다. 그렇다면 다니엘 팀이 아니라 우리 팀이 첫 번째 희생이 될 것이다. 다만, 지금은 원래 다니엘이 첫 번째 신호탄을 쏘는 시각보다 훨씬 더 이른 시각이었다. 즉, 아직은 용족이 동굴 안에 있을 가능성이 있긴 했다. 어쨌든 나는 긴장감에 콩닥거리는 마음으로 잠시 주변에 귀를 기울여봤다. 아직은 딱히 용족이 다가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언제 용족들이 나타날까 심장이 두근반세근반이었으나, 무림 고수가 신호탄을 쏜 장소로 올 것이므로 나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고 기다려야만 했다. “그나저나 무림 고수가 오고 난 다음엔 어떡하나?” 내가 심각하게 독백을 날렸다. “일단 퇴폐미남과 세운 계획은, 고수들에게 알려서 비행 기구를 타고 최대한 빨리 하늘로 올라가 확성 뿔피리를 부는 거였는데…….” 최대한 빨리 뿔피리를 불 수만 있다면, 다니엘의 팀원들까지 포함해 모든 학생들이 아무 탈 없이 전원 대피할 수도 있었다. 아직은 꽤 초입이고, 공자들도 숲에 깊이 들어간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계획대로만 된다면 정말이지 너무나도 간단하고 환상적인 결과였다. 물론 나는 결계를 빠져나갈 수 없으니 예외였지만, 그 문제는 일단 차치하기로 하고. “고수들이 내 얘길 믿지 않을 거라는 게 문제야.” 4번 퇴폐미남한테 고수들을 어떻게 설득할지 물어보자, 녀석은 어깨만 으쓱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그건 나도 모르지. 알아서 잘해봐.” 너만 믿는다면서 내 어깨까지 토닥여준 4번 퇴폐미남. 하여간에 절4들은 결정적 순간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니까. “역시 검으로 협박을 해야 하나?” 내 허접한 검으로 고수 두 명을 상대하는 상상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무려 아스테시아의 검술 선생들인데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이다. 덩치 같은 쭉정이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한 명이라면 어떻게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고수 둘과 맞붙는다는 건 무모했다. “온다!” 내가 마침내 하늘 저쪽 멀리를 보고 소리쳤다. 미친놈 보듯이 날 향해 수군거리던 덩치 일행도 전부 휙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열기구 하나가 두둥실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 대롱대롱 달린 것은 익숙한 형체들. 바로 무림 고수와 술주정뱅이였다. “진짜 빨리 오네.” “신기하긴 하다.” 예상보다 빠른 비행 장치의 속도에 팀원들이 다들 감탄했다. 스스스스스! 마침내 열기구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면서 빠른 속도로 근처에 착륙했다. 푸슈슈슈슉! 고수가 열기구에 연결된 어떤 줄을 잡아당겼더니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무림 고수님!” 내가 얼른 달려갔다. 팀원들도 서둘러 내 뒤를 따라왔다. 몸에서 버클을 푼 무림 고수가 마침내 날 바라보았다. “……괜찮은가?” 하지만 주변이 꽤 평화로운 걸 발견하고 무림 고수는 의아한 표정을 했다. 옆에서 술주정뱅이도 마찬가지 얼굴을 하곤 다가왔다. “알렉시스 공자, 대체 무슨 일인가?” 무림 고수가 먼저 부드럽게 물었다. “아무 일도 없는데 신호탄은 왜 쏜 거냐!” 평화로운 광경에 화가 난 술주정뱅이가 다짜고짜 고함을 질렀다. 두 고수들은 팀원들을 한번 둘러봤지만, 금세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왜냐하면 덩치 일행이 전부 은근슬쩍 내 쪽을 눈짓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허리를 쫙 펴고 당당하게 외쳤다. “용족을 봤습니다! 고수님!” 내 말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결코 뻥이 아니었다. 본 건 사실이었다. 이번 루프에선 아직 아니었을 뿐. “뭐? 용족?” 술주정뱅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말을 예상치 못한 덩치와 팀원들도 입을 쩍 벌렸다. “네! 용족을 봤습니다! 저 멀리 지나가는 걸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죠!” “그럴 리가 없네. 잘못 봤겠지. 아직 용족이 동면에서 깨어날 때가 아닐세.” 무림 고수가 고개를 저으며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교수님! 알렉시스 이 또라…… 공자가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용족이라뇨. 저희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뜬금없이 덩치가 끼어들면서 초를 쳤다. 나는 굴하지 않았다. “덩치 넌 당연히 못 봤겠지. 하지만 주인공인 나는 달라. 나는 몽골의 유목민처럼 시력이 아주 좋거든!” 이세계인들은 아무도 ‘몽골’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으므로 다들 무시했다. 어차피 내 시력도 몽골의 유목민과는 거리가 멀었다. “도른 공자, 진짜 본 게 맞다면, 왜 용족을 봤을 때 우리한텐 아무 말도 안 했습니까?” 덩치가 불퉁한 표정으로 딴지를 걸었다. “그거야 너희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요란하게 야단법석을 부리면, 당연히 용족이 쫓아올 테니까. 입 닥치는 게 상책이었지.” 난 아무렇게나 대답해 버리고는 얼른 무림 고수를 향해 고갤 돌렸다. “무림 고수님. 자, 귀를 기울여 잘 들어보세요. 저기 멀리 어디선가…… 쿵, 쿵, 하는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그딴 발걸음 소리 따위 내 귀엔 안 들렸지만 나는 태연히 뻥을 날렸다. 기실 지금 그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 또한 몹시나 심각한 문제였다. 바로 용족이 여기로 오고 있다는 증거니까. “…….” “…….” 고수들은 시선을 교환하더니 조용히 사방에 귀를 기울였다. 팀원들도 덩달아 사방에 귀를 기울였다. “…….” “…….” 한참 후. “안 들리는데 아무것도?” 마침내 무림 고수가 입을 뗐다. “하아…….” 내가 연극 조로 과장되게 탄식을 하면서 머리에 손까지 갖다 대려는데. “아니, 뭔가 들리는 것 같긴 하오만.” 뜬금없이 술주정뱅이가 그렇게 말을 하는 게 아닌가? “???” “???” 다들 얼굴이 물음표가 되어 술주정뱅이를 홱 쳐다봤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들리긴 뭐가 들려? 내 귀엔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물론 티는 내지 않았다. “정말입니까? 뭐가 들린다고요?” 무림 고수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면서 술주정뱅이한테 확인했다. “그렇소. 다시 들어보시오. 정말 멀리서 아주 거대한 마물이 움직이는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술주정뱅이 만세! 나는 하마터면 입 밖으로 그 말을 외칠 뻔했다. 코가 새빨간 중년인이 나의 뻥에 넘어갈 줄이야? 쯧쯧, 역시 알코올 중독은 사람 하나 골로 만들기에 충분하구나! 사실 술주정뱅이 고수는 그저 콧잔등이 좀 빨갛게 생긴 것뿐, 술을 마신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심각하군. 용족인진 모르겠으나, 멀리서도 이 정도 진동이 느껴진다면 절대 작은 마물이 아닐 거요.” 술주정뱅이는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나는 이때다 싶어 얼른 술주정뱅이에게 동조했다. “그러게 말예요. 제가 두 눈으로 멀리 있는 걸 봤다니까요, 용족을! 다시 한번 주의를 기울여서 잘 들어보시라고요.” 아무도 내 말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술주정뱅이의 의견은 무시할 수 없었다. 전부 다시금 입을 다물고 주위에 귀를 기울였다. “…….” “…….” 나도 귀를 기울여봤지만 멀리 어딘가에 있을 용족의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전 안 들립니다만.” “저도요.” “저도 안 들려요.” 덩치 일행이 차례대로 말했다. 어깨춤만이 아무 말도 않았지만 녀석도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얼굴이었다. “둔한 녀석들.” 내가 일부러 끌끌, 혀를 보란 듯이 찼다. 물론 나도 아무것도 안 들렸지만. “정말이군. 무언가…… 있긴 있는 것 같습니다.” 난데없이 무림 고수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 “!!!” “!!!” 학생들이 죄다 이번에는 무림 고수 쪽을 홱 쳐다봤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무림 고수도 들었다고? 진짜 들었나? 내 두 눈이 크게 벌어지고 심장이 급격히 쫄리기 시작했다. 좀 전에 신호탄을 쐈으니까 이미 용족이 깨어나서 동굴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면…… 그걸 듣고 이쪽으로 오고 있긴 할 거였다. 새삼스레 등에서 마구 식은땀이 흘렀다. “그, 그렇죠? 드, 들으셨죠?” 나는 혼란과 공포를 급히 감추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쳐줬다. 진짜로 용족이 나타나기 전에 사태를 빨리 매듭지어야만 했다. “당장 중간 평가를 중지하고 얼른 학생들을 전부 대피시켜야 한다구요. 그래서 제가 신호탄을 쏜 거예요.” “으음.” 고수들은 처음으로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용족이 아닐 수도 있긴 합니다. 지금 이 시기에 깨어난 건 말이 안 되니까요. 예컨대, 지각변동이라든지…… 진동은 다른 게 원인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바빠죽겠는데 무림 고수가 느릿하게 고심을 하며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 하더라도 이대로 있어선 안 되오. 빨리 학생들은 대피시키고, 원인이 뭔지 알아보는 게 좋겠소.” 다행히 술주정뱅이가 서둘렀다. 크흡. 술주정뱅이 만세!! 나는 다시 한번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외쳐주었다. 47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학생들이나 선동해서 우리 반만 이겨 먹으려는 좀생이 교수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믿음직스러울 줄이야?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확성 뿔피리를 부실 거죠? 그런데 여기서 그걸 불면 용족이 이 부근으로 올 수 있으니까 우리들이 위험하거든요. 고수님들은 비행 장치를 타고 아주 노오오옾이 올라가서 부는 것이 좋을 거예요!” 나는 잊지 않고 다다다다 속사포로 주의 사항을 공지했다. 잠깐 침묵이 흐르면서, 무림 고수와 술주정뱅이가 정말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날 동시에 응시했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으음. 알겠네.” 무림 고수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 말했다. “자네들도 어서 학교로 돌아가도록 하게나. 중간 평가는 안타깝지만 추후에 하도록 하지.” 전혀 안타깝지 않았다. “옙!” 나는 언제라도 용족이 나타날까 무서워서 재빨리 대답하고는 얼른 휙 뒤돌아서 외쳤다. “자! 들었지! 우린 돌아가자고! 빨리 뛰어!” 잠시나마 팀장이 된 기분으로 나는 당장 자리를 박찼다. 덩치 일행은 내 말을 믿지 않기에 인상만 찡그리고 있었지만, 어깨춤은 달랐다. 용족 얘기가 나온 순간부터 불안한 얼굴로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던 어깨춤이 가장 빨리 날 따라나섰다. 그 뒤로 덩치 일행도 머뭇거리다가 결국 뒤따라 달려왔다. 펄럭! 뒤에서 다시 풍선 펴지는 소리가 났다. 점화 장치의 레버를 내리자, 두둥실, 열기구가 하늘 위로 떠올랐다. 난 달리는 와중에 힐끗 고수들의 사라지는 모습을 올려다봤다. 열기구가 저 멀리, 높이 높이 올라갔다. 그 후 마치 천지가 떠나가는 듯한 광포한 뿔피리 소리가 하늘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부우우우우우우우웅! 마치 거대한 고동 소리가 세상을 뒤흔드는 것만 같았다. 왠지 둘이서 부는 것처럼, 번갈아 가며 고동 소리가 났다. 부우웅! 부우우우웅! 고동 소리가 짧게 났다가, 다시 한번 길게 나고, 두 고동 소리가 마치 대화를 하듯이 맞물렸다. 일종의 정해진 코드를 이용해 대피 신호를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콘서트장에서 사용하는 거대한 스피커라도 틀어놓은 것처럼, 엄청나게 요란한 소리였다. “대체 뿔피리가 얼마나 크길래, 저렇게 요란한 소리가 날까? 그러고 보니 고수들이 들고 다니는 건 못 봤는데!” “실제로 생긴 건 일반 피리처럼 작대요! 교장 선생님이 발명한 거라고 들었어요!” 내 옆에서 달리던 어깨춤이 숨을 헐떡거리면서 말해주었다. 아무도 얼굴을 못 본 아스테시아의 교장은 발명가임이 확실했다. “그런데, 정말 용족을 보셨어요?” 어깨춤은 불안에 떠는 얼굴로 나를 향해 확인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한번 끄덕였다. 덩치 일행은 나의 목격담을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으나, 어깨춤만은 낯짝에 핏기가 가셨다. “빨리 가야겠네요!” 우리 둘은 젖 먹던 힘까지 내서 달렸다. *** 다행스럽게도 결계까지 가는 동안 우릴 쫓아온 용족은 없었다. 어쩌면 고수들이 부는 저 뿔피리 소리 때문일 수도 있었다. 대피 신호가 하도 크고 요란해서, 내가 터트린 신호탄 소리가 들린 장소로 오려던 용족의 주의가 분명히 바로 하늘 위로 몰렸을 테니까. “와, 우리가 제일 빠를 줄 알았는데! 벌써 세 팀이나 와 있구나!” 결계에 도착한 어깨춤이 마침내 숨을 고른 뒤 말했다. 확성 뿔피리의 효과는 강력해서, 심지어 우리보다 더 일찍 도착한 팀들이 셋이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우리 팀보다 더 결계 근처에 있었던 팀들이었을 것이다. 어깨춤이 먼저 울타리를 뛰어넘었고, 덩치 일행이 뒤따랐다. 나는 대충 툭, 툭, 결계를 두 손으로 두들겨봤으나 전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때 뒤에서 따뜻한 후광을 뿌리면서 다니엘이 도착했다. “멍뭉아! 왔어?” 내가 반갑게 외쳤다. 이번에는 다니엘뿐만 아니라 그의 팀원 전체가 무사했다. 즉, 원래 루프에서 첫 희생자들이었던 첫 번째 신호탄의 주인공들조차 이번에는 모두 목숨을 구한 것이다. 게다가 용족과의 만남이 아예 없어서인지 다니엘도 이번에는 멘붕 상태가 아니었다. “……누가 멍뭉이야? 주위에 개새끼 한 마리 안 보이는구만.” 대형견은 마치 나더러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곤 날 멀찌감치 피하면서 재빨리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지난 루프 때는 팀원들을 용족한테 모두 잃어버린 후 내게 달려와서 반갑게 껴안더니만. 그런 기억들은 대형견의 머리통에서 아예 없어져 버렸다. “포옹의 기억이 물거품이 되다니……. 아쉽도다. 바로 이런 것이야말로 루프를 반복하는 주인공의 숙명이로군.” 나는 입을 쓰게 다셨다. 대형견의 기억이 사라진 건 아쉽지만 이제 와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교수님들이 왜 대피 신호를 부는 거죠?” 울타리 바깥에 모여 있던 공자들이 모두 궁금해하고 있었다. 고수들은 아직도 하늘 위에서 요란하게 대피 신호를 내보내느라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용족을 봤대요.” “누가?” “도른 공자가.” “…….” “…….” 일제히 학생들이 날 향해 눈길을 돌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내가 분명히 또 사고 친 것 아닌가 의심하는 표정들. 나야말로 그들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동분서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으니 기분이 나쁠 법도 하지만. “이렇게 나는 또 한 번 유명세를 치르는구나! 하아……. 역시 나의 이 넘치는 존재감과 천재성은 다들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어!” 나는 결계 근처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를 머리에 꽂으면서 위풍당당하게 외쳤다. “…….” “…….” 아무도 말이 없었다. 어쨌든 나는 아직 고수들한테 볼일이 남았으므로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며 계속 울타리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뿔피리를 불어 학생들을 대피시키는 것은 성공했으니 이 정도만 해도 첫 루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군.”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내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그것이 참으로 문제였다. 마침 뿔피리 소리가 멈추었길래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음, 곧 고수들이 돌아오겠어.” 내가 기다리는 사이에 속속들이 다른 팀들이 되돌아왔다. 그중에는 사방에 퇴폐미를 철철 뿌리며 자기 팀원들을 데리고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절세 미남도 있었다. “알렉시스!” 나를 발견한 퇴폐미남이 마침내 발을 멈추곤 반갑게 불렀다. 빠른 속도로 달려온 뒤라, 그는 잠시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그 바람에 하필이면 그놈의 퇴폐미가 아주 폭발을 하고 있었다. “결계 밖으로 안 나가 있고 뭐하나. 나 기다렸나?” 마침내 숨을 고른 퇴폐미남이 그 초절정 미모에 미소까지 띠면서 반갑게 물었다. “…….” 나는 심드렁하게 4번을 쳐다봤다. 제라드가 온몸으로 뿜어내는 퇴폐미 공격마저 이젠 성공적으로 방어가 가능했다. 무려 태권도 방어 자세조차 필요 없었다. 지나간 루프에서 호각을 불고 퇴폐미남을 만나자마자 와락 달려들어 끌어안았던 것은 기억 속 먼 과거의 일. “루프에서 하도 많이 봐서 그런가. 이젠 저놈을 봐도 마치 결혼한 지 20년 된 부부 같은 익숙한 기분이란 말이야.” 내 중얼거림에 퇴폐미남이 멈칫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거 지금 날 두고 하는 소린가?” “그럼 누구긴 누구겠어.” “그러니깐, 내가 너랑 결혼한 지 20년 된 부부 같다는 건가?” “쯧쯧. 재차 확인하는 걸 보면 가는 귀가 먹었나 보네.” 나는 진심으로 퇴폐미남의 청각에 우려를 금치 못했다. “…….” 퇴폐미남은 날 빤히 봤다. 그 와중에 그의 다른 팀원들은 죄다 울타리를 다 넘어가 버렸다. 이윽고 퇴폐미남이 씩 웃으면서 입을 뗐다. “그렇군. 20년이나 웬 이상한 여자랑 결혼 생활을 하는 바람에, 내 가는 귀가 먹었나 보군.” “그래, 너의 가는 귀는 먹……” 나는 곧바로 수긍하려고 하다가, 뒤늦게 뭔가 걸렸다. “근데 이상하다니? 누구? 누가 이상해?” 설마 나……? 퇴폐미남은 입가에 나른한 미소를 띠면서 퇴폐미 공격을 날렸다. “왜, 이상하다는 게 맘에 안 드나? 20년 결혼 생활은 괜찮으셨구요, 부인?” “아악! 누가 네 부인이야!” 나는 문제의 호칭이 나오자마자 소름이 끼쳐서 얼른 귀를 두 손으로 막아버렸다. 그런데 손바닥이 별로 소용이 없는지 귀를 다 막아버렸는데도 퇴폐미남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부인께서 그렇게 부인이라는 호칭을 싫어하신다니 심히 안타깝군요. 20년이나 됐다면 이제 익숙해지실 법도 한데.” “갑자기 존댓말 하지 마! 나 그리고 아직 결혼 안 했어!” 내가 버럭 소리 질렀다. 퇴폐미남은 하하하, 진심으로 소리를 내서 즐거운 듯 웃었다. 반면 나는 온몸에 돋은 소름을 진정시키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아니라곤 안 하네.” 아직도 입가에서 웃음기를 조금 흘리고 있던 퇴폐미남이 거의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뭘?” 내가 물었다. 그러자 퇴폐미남은 진위를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 “…….” 멀뚱멀뚱 우린 서로를 쳐다봤다. “왜? 뭔데?” 내가 다시 물었다. “너, 아니라곤 안 했잖아.” 퇴폐미남이 또 같은 말을 했다. 나는 또 가슴 한쪽이 답답해져 왔다. “이 싸바야, 속 시원히 얘길 해! 뭔데? 내가 뭘 아니라곤 안 했는데?!” 그윽한 얼굴로 날 쳐다보던 퇴폐미남이 마침내 선심 쓰듯 알려주었다. “내가 웬 이상한 ‘여자’랑 결혼 생활을 했다고 했는데. 넌 이상한 게 누구냐고만 했잖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허 참…….” 나는 황당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그럼 내가 하지도 않은 결혼 생활에 대해서 물어보겠냐? 쯧쯧, 아무래도 퇴폐미남 넌 너무 잘생기고 돈 많은 귀족으로만 살아서 상식이 좀 없는가 보다.” 나는 혀를 끌끌 차면서 퇴폐미남의 몰상식을 걱정해줬다. “그렇게 퇴폐미만 철철 뿌려대지 말고, 나처럼 패가망신한 뒤에 차가운 길바닥을 전전하다 어딘가로 승천해보면 금방 깨달았을 텐데. 이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 퇴폐미남은 물끄러미 날 쳐다보더니, 무언가 다시 설명하려다가 그냥 포기했다.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하겠다면 그냥 계속 그렇게 생각해라…….” 이러한 자포자기의 과정을 통해 퇴폐미남은 마치 인생무상을 깨달은 신선처럼 득도하고 있었다. 48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그때,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좀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서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엔. “대체 무슨 일이에요? 공자님들? 왜 뿔피리를 분 거예요? 오늘 중간 평가가 있는 날일 텐데? 뭐야? 뭐야?” 어스아이가 한 열 마리쯤 우르르 몰려와서는 공자들을 취조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엥? 어스아이들이 갑자기 어디서…… 아하!” 나는 그제야 한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확성 뿔피리 때문이구나. 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학교까지 들렸나 봐. 그래서 숲속 담당 어스아이들이 여기까지 달려온 게로군.” 어스아이들의 등장은 이번 루프에서 처음 벌어지는 일이었다. 확성 뿔피리를 분 게 이번 루프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도른 공자가 용족을 봤다던데……. 그래서 교수님들이 뿔피리를 불으셨대.” 공자들이 일제히 이번 사태의 범인으로 나를 지목하자, 열 마리의 어스아이들이 일제히 홱, 하고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도른 공자님이?” “용족을 봤다고요?” “오잉? 사실일까?” 어스아이들 중에 제일 앙증맞게 생긴 녀석이 휙 결계를 뛰어넘어 내게로 다가왔다. 다른 아홉 마리의 어스아이들은 결계를 넘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독 앙증맞은 어스아이가 내 앞에 서더니 말없이 빤히 날 올려다봤다. “커헉…….” 귀여워. 나는 그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곧장 눈앞의 녀석을 ‘앙증이’라고 속으로 별명을 붙였다. 당장 앙증이의 그 앙증맞고 보들보들한 이마를 어루만져 주고 싶어서 손을 뻗으려는데. “도른 공자님. 저는 이 숲의 울타리 보수를 책임지고 있는 어스아이랍니다. 이쪽 울타리 판자 전부 제가 덧댄 거랍니다. 정말 용족을 보셨어요?” “어어, 봤어.” 나는 앙증이의 진지하고 사무적인 말투에 나도 모르게 일단 손을 거뒀다. “그래요? 어떻게 그런 일이.” 앙증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코를 킁, 킁, 거리며 허공의 냄새를 맡았다. “음…….” 코를 킁킁거리는 앙증이의 표정이 너무 귀여운 바람에 나는 그만 당장 달려들어 꼭 끌어안을 뻔했다. 그러나 초면에 예의 없이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꾹 참았다. 반면 내 옆에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4번 퇴폐미남은 앙증이의 귀여움에 아무 감동도 받지 않은 무심한 표정이었다. “진짜네. 용사 냄새가 나. 용사가 다시 살아났을 리도 없고. 설마 누가 유골이라도 갖다 뿌렸나?” 앙증이가 냄새를 다 맡고는 완전히 정곡을 찌르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아닌가! “……!!” 놀란 내가 토끼 눈을 떴다. “아니 네가 그걸 어떻게…….” 무심코 튀어나온 내 말에 앙증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번에는 날 빤히 응시했다. “용사라니……? 유골? 이건 무슨 말이지?” 옆에서 사정을 모르던 퇴폐미남도 눈을 치켜뜨며 끼어들었다. “아스테시아의 가디언으로서 강력하게 경고할게요. 어서 결계 밖으로 나가세요. 다른 학생들도 전부 돌아왔네요.” 앙증이는 퇴폐미남의 질문을 무시하면서 휙 뒤돌더니, 토다닥 결계 밖으로 귀여운 모습으로 뛰어갔다. 공자들 쪽을 보니 그사이에 모든 팀이 다 돌아와 있었다. 결계 밖으로 도로 나간 앙증이는 다른 아홉 마리의 어스아이들과 옹기종기 모여 속삭거리며 무언가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젠 나가는 것이 좋겠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군.” 퇴폐미남이 미간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용사니 유골이니 하는 말을 듣긴 들었으니, 그도 무언가 짐작이 가긴 하겠지. 물론 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너 먼저 가. 난 고수들 좀 만나봐야 해서. 아, 마침 저기 오네.” 내가 하늘을 보며 말했다. 하늘에서 익숙한 열기구의 모습이 이쪽으로 빠르게 날아오더니 착륙했다. 나는 당장 무림 고수와 술주정뱅이에게로 달려갔다. “학생들은 다들 도착했나?” 고수들은 비행 장치에서 바람을 빼고 몸에서 버클을 풀었다. 어떤 줄을 두어 번 잡아당기자 비행 장치가 쏙 하고 자동으로 가방 모양처럼 접혔다. “네. 다 돌아왔습니다.” 결계 밖으로 나가긴커녕 이상하게도 내 뒤를 졸졸 따라온 제라드가 옆에서 대답했다. “다행이군. 마침 어스아이들도 왔군그래.” 무림 고수가 말을 마치자마자 앙증이가 다시 결계 안으로 토다닥 뛰어 들어오더니, 고수들 가까이로 왔다. “용족이 나타났다면서요? 진짜예요, 교수님?” 앙증이가 귀엽게 눈을 동그랗게 만들면서 꼬리를 살랑거리고 물었다. “그렇네. 공중에서 낮게 배회해 보니, 정말로 용족들이 보였어. 지금은 죄다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지.” 무림 고수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유골의 냄새를 따라 용족들이 이쪽으로 올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나는 다시 심장이 쪼들리기 시작했다. “자, 어서 결계 밖으로 나가세.” 고수들이 재촉하며 걸음을 떼려고 했지만 내가 재빨리 막아섰다. “……?” 퇴폐미남을 비롯해 고수들과 앙증이까지 그런 날 잠시 의아하게 쳐다봤다. 그들이야 울타리만 넘으면 되니 아무 문제 없지만, 나는 당장 내 목숨이 급했다. 빨리 용건을 꺼냈다. “무림 고수님. 그 비행 장치 좀 내놔봐요.” “음?” “빨리 내놓아보라고요.” 나는 당장에 무림 고수 손에 고스란히 들려있던 커다란 가방을 휙 낚아채고는,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무림 고수조차 미처 날 막지 못했다. 그저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을 뿐이다. “이 와중에 지금 무슨 짓인가!” 술주정뱅이가 얼굴이 벌게져서 나한테 고함을 쳤다. “아니 이게…… 알렉시스 공자. 대체 이게 무슨…….” 얼빠진 무림 고수가 말을 더듬거렸다. “어머. 뭐 하는 거예요, 도른 공자님?” 앙증이가 완전히 토끼 눈을 뜨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퇴폐미남은 아무 말도 없었지만 표정만은 의아함으로 가득했다. 내가 아까부터 비행 장치에 눈독 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처음 덩치한테 신호탄을 빼앗아 쐈을 때부터 이미 고수들한테서도 비행 장치를 빼앗아 타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고수들과 실랑이가 길어지면 모든 일이 파투 날까 봐 하지 않았었다. “지금 저 또라이가 교수님 비행 장치를 빼앗은 거 같은데요?” 결계 밖에 모인 공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진짜예요?” “세상에. 진짜잖아.” “아까는 글쎄, 자기네 팀장을 협박해서 신호탄을 빼앗아서 쏘았다지 뭐예요.” “사실이에요! 그게 우리 팀이라고! 참나 용족을 봤다고 거짓말까지 하더라니까.” “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교수님들이 아무 이유 없이 뿔피리를 불으셨을까요?” “교수님들이 좀 순진하시잖아. 저거 봐. 비행 장치 뺏긴 거. 도른 공자한테 깜빡 속은 거라니까.” 맹비난이 퍼부어지는 사이, 나는 얼른 가방에 있는 줄을 열심히 더듬거리며 찾았다. 비행 장치부터 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줄이 좀 많이 달려 있어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몸통에 매는 줄, 열기구를 펴는 줄, 열기구의 방향을 조절하는 줄, 풍선 다시 도로 줄어들게 하는 줄 등등. 분명히 이 중에서 단 하나만이 잡아당겼을 때 풍선이 펴진다.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줄을 휙 잡아당겼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된장.” 나는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하자 용족이 오는 발걸음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서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그거 다시 내놓게!!” 멍한 낯으로 내가 하는 짓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린 술주정뱅이가 내게로 달려들었다. 나는 식겁해서 후다다닥 더욱더 뒤로 물러났다. 품에는 비행 장치를 꽉 안고 놓치지 않았다. “안 돼! 지금 중요한 일이란 말이에요!” 난 그들과 약간의 거리를 벌린 채로 소리쳤다. 여기서 이걸 뺏기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알렉시스 공자, 비행 장치를 타보고 싶으면 결계 밖으로 나가서 타보도록 하지……. 지금은 위험하니까. 일단은 그거 내놓고 여기서 나가세나.” 무림 고수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나를 타일렀다. “도른 공자 저 미친놈이.” “그냥 교수님께 빨리 드려요!” “그런 걸 빼앗으면 어떡해요! 강제로 훔치는 건 도둑질이야!” 결계 밖에서 공자들이 소리 질렀다. 아무 말도 없이 다소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서 있는 사람은 다니엘과 어깨춤뿐이었다. “거참 시끄럽게들 쫑알거리기는. 다들 나 때문에 목숨 건진 줄도 모르고.” 내가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들은 루프에 대한 아무 기억이 없으므로, 딱히 뭐라 하기도 좀 그랬다. “…….” 앙증이만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날 응시했다. 결계 밖의 어스아이들도 눈을 동글동글하게 뜬 채로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궁금하다는 것처럼. 퇴폐미남도 미간을 구긴 채 아무 말 없이 그런 날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이런, 용족이다!” 술주정뱅이가 퍼뜩 고개를 들며 저쪽 어딘가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취권을 하다 보면 귀가 밝아지나? 쿵. 이윽고 익숙한 그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후. 용족만 생각하면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네. 용족과 사랑에라도 빠진 걸까?” 나는 잠깐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의심했으나, 그럴 리가 없었다. 어쨌든 용족들이 오기 전에 빨리 비행 장치를 펴야 했다. 서둘러 가방의 줄을 찾아 다시 또 잡아당겼다. “알렉시스, 일단 나가서 해결하자.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돼.” 퇴폐미남이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지만 나는 가방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소용없어! 난 결계 밖으로 못 나가. 나한텐 신경 쓰고 너나 빨리 나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지금 이 상황에서 꼭 이래야겠나?” 사정을 모르는 퇴폐미남이 미간을 찌푸렸다. “흐응.” 앙증이가 무슨 의미인지 모를 귀여운 숨소리를 냈다. 한편 뒤에서 용족이, 아니 용족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쿵. 쿵. 쿵. 한 마리가 아니었다. 주변의 나무 잎사귀들이 파르르르 진동하기 시작했다. 49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뭐야, 이 소리.” “지진인가?” “아, 아니. 마, 마물인 것 같은데.” 결계 밖의 공자들도 용족이 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는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진짜 용족이 있다는 거예요?” “에이 설마……. 지금 도른 공자 말을 믿는 거냐?” 쿵. 쿵. 쿵, 쿵, 쿵. 지진이 온 것처럼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가세! 용족한테 죽고 싶지 않으면 네놈도 빨리 나와!” 더는 안 되겠는지 술주정뱅이가 날 보고는 소리치며, 무림 고수를 잡고 결계 쪽으로 당기면서 자기도 피신했다. 그런데 앙증이는 고수들을 안 따라가고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 이것도 아니고.” 나는 다른 줄을 마구 잡아당겼지만 또 허탕을 쳤다. 가만 보니깐 아까 잡아당겼다가 실패한 줄이었다. 동시에 내 심장도 속절없이 방망이질 쳤다. “가자고! 빨리.” 내가 방심한 사이 순식간에 퇴폐미남이 다가왔고, 와락 내 팔을 확 잡고는 끌고 갔다. “안 돼! 이거 놔봐 좀!” 제라드가 날 마구 잡아끌고 울타리로 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품에 안고 있던 비행 장치를 놓칠 뻔했다. 그러나 줄을 찾아 잡아당기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에 거기에 신경 쓰느라고, 속절없이 몸은 놈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자 앙증이도 그제야 말없이 뒤따라왔다. “제라드군, 잘했네. 빨리 오게나!” 무림 고수가 울타리 밖에서 퇴폐미남을 응원했다. “역시 말 안 듣는 놈은 그냥 무작정 힘으로 끌고 오는 수밖에!” 술주정뱅이는 자신의 교육 철학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어휴 맨날 사고만 치는 놈. 빨리 와!” 다니엘도 날 보고 소리쳤으나, 그래도 왠지 안심한 목소리였다. 기억상실증은 다 나은 건가? “빨리 넘어가!” 마침내 울타리 앞에 성큼성큼 도달한 퇴폐미남이 날 울타리 쪽으로 밀어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투웅! 마치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에 부딪힌 것처럼 공허한 소리가 나면서, 내 몸이 도로 튕겨 나왔다. “……!” “……!” 일순 모두가 침묵에 휩싸였다. 결계 밖의 고수들과 학생들까지, 죄다 입을 쩍 벌리고 동작을 멈췄다. 퇴폐미남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간 내 말을 안 믿던 덩치를 비롯한 우리 팀원들도 전부 다 마찬가지였다. 앙증이와 어스아이들도 두 귀를 쫑긋 위로 세운 채로 두 눈을 벌렸다. “뭐, 뭐, 뭐야?” “대체 왜……?”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말도 안 돼!” 술주정뱅이가 두 눈을 비비며 고함을 쳤다. 퇴폐미남은 정말 결계가 안 먹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결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당연히 그의 손은 아무 문제 없이 잘 통과했다. 웅성거리는 이들을 싹 무시한 채 나는 다시 한번 줄을 더듬거렸다. “공자님! 이 줄을 당겨요!” 난데없이 보드라운 찹쌀떡이 은근슬쩍 내게 열기구 줄 하나를 집어서 건넸다. 끝에 하늘색 고리가 달린 줄이었다. 찹쌀떡의 주인공을 쳐다보니 앙증이였다. “…….” 난 줄을 받아 시키는 대로 쫙 당겼다. 그러자 마침내. 퍼엉! 열기구에 공기가 들어가면서 팽팽하게 풍선처럼 퍼졌다. 나는 그걸 얼른 머리 위에 들어 올렸다. 그러자 풍선이 위로 떴다. 「살해자에게 응징을!」 쿵, 쿵, 소리가 요란해지더니 저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들려왔다. “요, 요, 용족이다!” “맙소사! 진짜야!” 마침내 멀리서 다가오는 용족의 모습을 발견한 공자들이 경악했다. “와우!” 어스아이들이 일제히 감탄사를 뱉었다. 공포가 아니라, 호기심의 대상을 마침내 눈앞에서 보는 흥분이었다. 난 서둘러 조종대를 펴고 몸에 버클을 채웠다. “하늘로 올라가고 나서는, 어떡할 작정인가?” 퇴폐미남이 옆에서 다소 우려하는 얼굴로 급히 물었다. 그래서 대답했다. “저번에 퇴폐미남 네가 그랬잖아. 이 결계가 하늘 쪽은 뚫려있는지도 모른다고!” “내가?” 퇴폐미남은 자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간의 일을 설명할 시간은 부족했다. 그는 지난번에 내게 비행 장치를 타고 하늘 쪽으로 결계를 넘어와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었다. 만일 결계가 돔 형태로 씌워진 게 아니고 벽처럼 세워진 거라면, 하늘을 아주 높이 높이 올라갔다 넘어오면 결계를 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넌 신경 꺼. 너도 이번 루프 땐 편히 쉬어야지.” 내가 말했다. 퇴폐미남은 입매를 굳히고 날 가만히 쳐다보았다. 쿵. 쿵 쿵. 용족들이 진짜로 가까워지자 결계 밖의 공자들은 다들 겁을 집어먹고 우르르 몇 걸음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용족들은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데 말이다. “꾸물거리지 말게! 빨리 하늘로 올라가야 해, 알렉시스 공자!” 사태를 보고 있던 무림 고수가 태도를 바꾸어내게 재촉했다. 어차피 내가 결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게 기정사실이라면, 비행 장치를 타는 것이 가장 안전했으니까. 난 재빨리 점화 장치의 레버를 내렸다. 달깍, 하는 소리가 나더니 불이 붙고, 머리 위의 풍선이 갑자기 위로 솟구치는 힘이 느껴졌다. “제라드 공자, 자네도 어서 이쪽으로 넘어오도록!” 술주정뱅이도 조마조마한 듯이 옆에서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퇴폐미남은 갑자기 내 옆에서 열기구의 조종대에 달린 줄을 붙잡았다. 그 줄만 당기면 위로 떠오르는 거였다. 난 녀석이 날 막으려 드는 줄 알고 얼른 줄을 도로 낚아채며 뒤로 후다닥 피했다. “너 열기구 조종하는 법 모르잖아. 나도 같이 타자.” 퇴폐미남이 뜬금없이 열기구를 욕심냈다. “전에 이거 타봤어?” 내가 물었다. “그래, 타봤다.” 퇴폐미남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타본 거야. “잠깐만. 그렇다면 네놈은 지금까지 내가 열기구 당기는 줄을 찾고 있었는데도 모른 척하면서 안 가르쳐 준 거냐?”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배신감이 들었다. 난 대답도 듣지 않고 줄을 꽉 쥔 후 눈을 홉떴다. “됐거든? 나 혼자 탈 거야!” “맞아요. 혼자 타세요.” 잠시 까맣게 잊고 있던 앙증이의 목소리가 난데없이 끼어들었다. “……?” “……?” 나와 퇴폐미남은 동시에 앙증이에게로 시선을 홱 돌렸다. “하늘도 결계로 막혀 있어서 소용은 없지만, 열심히 해보세요. 노스브리치의 마력으로도 일곱 번째 삶이 끝나면 더는 반복하지 못하니까 유념하시고요!” 앙증이가 생글거리고 웃으면서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뭐? 다시 말해 봐…… 어억!” 내가 자세히 묻기도 전에 앙증이가 그 솜방망이로 내가 잡고 있던 줄을 앙증맞게 확 잡아당겼다. 이미 팽팽해져 날아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열기구는 줄이 당겨지자마자,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제길! 무슨 짓이야!” 아직 타지 못한 퇴폐미남이 앙증이에게 소리 질렀으나 이미 늦었다. 두둥실. 나 혼자만 둥둥 하늘 위로 떠올랐고 내 로브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도른 공자님! 반복이 시작되는 곳에 벗어날 실마리가 있을 테니까 잘 찾아보세요!” 열기구를 향해 외치는 앙증이의 즐거움 가득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놈이 말하는 ‘반복’이야 분명 루프를 말하는 걸 텐데. 내가 루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앙증이가 알고 있다? “이봐, 너 때문에 놓쳤잖아!” 한편 퇴폐미남은 앙증이의 멱살을 잡고 으르렁거렸다. “어차피 제라드 공자님이 같이 가봤자 도움 안 돼요.” 앙증이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멱살을 솜방망이로 톡톡 쳤다. 멱살 놓으라는 듯이. 퇴폐미남은 잠시 앙증이를 노려보고 있다가 결국 손에 힘을 풀고 놓아줬다. “알렉시스 공자님은 노스브리치 열매를 먹은 거니까요.” “……뭐라고?” “……죽으면…… 반복을…… 할 테니까…….” 앙증이가 뭐라고 뭐라고 퇴폐미남한테 얘기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내가 탄 열기구가 계속 떠오르고 있어서 대화가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난 밑을 보고 앙증이를 향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야! 너! 지금 무슨 얘기하고 있어! 나한테 얘기해! 큰 목소리로 얘기해보라고! 뭔데! 너 뭔가 알고 있지?” 내가 고래고래 소리 질렀더니, 앙증이와 퇴폐미남이 서로 간의 대화를 멈추고 위를 올려다봤다. 퇴폐미남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앙증이는 마치 재밌는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씩 웃는 것이 아닌가. “……저 앙증맞은 녀석 같으니. 다시 만나기만 해봐라. 아주 탈탈 털어줄 테다.” 내가 다짐했다. 앙증이가 다시 뭐라고 한두 마디 더 하자, 이윽고 무언가를 납득했는지 퇴폐미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앙증이를 따라 결계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쿵. 쿵. 용족들이 무서운 모습으로 달려왔다. 「살해자들에게 응징을!」 “히이이익!” 학생들이 비명을 질렀고 일부는 공포에 질려 서로 끌어안기까지 했다. 주변의 진동도 더욱 심해졌다. 크르르르르!! 크아아아아아!! 결계 쪽으로 달려온 용족들이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화염을 내뿜었다. 그러나, 투명한 결계 막이 용족의 화염을 막아버렸다. 애꿎은 결계 안쪽의 풀과 나무들만 불에 타서 까맣게 재가 되어버렸다. 용족 화염의 특징이라면 불씨가 남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래서 나무들은 타서 재가 되었을망정, 주변으로 번져 산불이 일지는 않았다. 「살해자에게……」 「응징을!」 그렇게 외쳤으나, 눈앞의 인간들을 응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용족들이었다. 그저 결계 근처에서 쿵쿵거리고 분에 겨워 서성거렸다. 때로는 결계 밖에 선 공자들을 향해 괴성을 지르기도 했다. “꺄아아!” 어스아이들이 서로 끌어안으며 소리 질렀지만 공포의 비명이 아니었다. 호기심과 즐거움이 가득 담긴 함성으로, 꼭 놀이공원에 놀러 와서 롤러코스터를 즐기는 아이들 같았다. 문득, 용족 중 한 놈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두둥실 하늘로 떠오르는 나와 눈이 똑바로 마주쳤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 태양처럼 새빨갛다는 피부. “저놈이 우두머리구만.” 50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물론, 놈과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었다. 우두머리 용족이 날 올려다보자, 그제야 다른 용족 세 마리도 쿵쿵거림을 멈추더니 하늘 위로 고개를 들었다. 여덟 개의 새빨간 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흥! 나도 이제 여기서 떠난다! 네놈들이랑은 이제 안녕이야!” 절대 용족의 눈앞에서는 못 할 말도, 이 안전한 하늘 위에서는 마음껏 씨불일 수가 있었다. “뭘 꼬나보냐! 이 못생긴 파충류 놈들! 네놈들처럼 못생긴 마물은 처음이다! 눈도 새빨개 가지고! 소름 끼치네! 그만 쳐다보지 못하겠느냐?” 나는 여덟 개의 새빨간 뱀 눈동자를 향해서 도발했다. 목소리가 하도 쩌렁쩌렁 울려 퍼졌는지, 용족은 물론이거니와 결계 밖에서 덩달아 날 올려다보던 공자들도 다 들었다. “와, 도른 공자. 제정신은 아니지만 깡 하나는 인정해야겠어요.” “정말 장난 아니군. 용족을 저렇게 도발하다니.” “무섭지도 않은가 봐요.” 공자들이 감탄하며 웅성거렸다. 나는 결계를 벗어나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열기구의 방향을 조절하는 줄을 잡아당겼다. 휙, 열기구는 움직였지만. 투웅! 내 몸은 이 높은 하늘 위에서도 투명한 막에 부닥쳐서 결계 밖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열기구는 넘어가려고 했지만 내 몸이 넘어가질 않았다. 비행 장치를 타면 결계를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아! 왜! 마물은 땅 짐승들뿐이라며! 왜 결계를 하늘에도 쳤는데!” 나는 결계를 쳐놓은 먼 옛날의 누군가를 향해 한탄했다. 화가 난 나는 다시 한번 해보기 위해, 열기구의 방향을 조절하는 줄을 확 잡아당겼다. “어어? 어? 어어어??” 이런 된장. 줄을 잘못 당겼다. 분명히 방향을 조절하는 줄인 줄 알았는데 딴 거였다. 달칵하는 소리가 나더니 점화 장치의 불이 꺼졌다. “아악! 안 돼!!” 푸쉬시시식 하는 소리가 나더니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아악!” 열기구가 그 자리에서 속절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람 때문인지 그냥 수직으로 추락하는 게 아니고 횡으로 길게 움직였다. 여덟 개의 새빨간 눈동자들이 그걸 보고는 빠른 속도로 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 어떡…….” 저 멀리서 학생들이 안타깝게 외치는 소리와 소란이 들렸으나 내게서 빠른 속도로 멀어져갔다. 바람 빠진 풍선이 길게 횡으로 움직이며 나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숲 한복판에서 마지막 기력을 다하며 떨어졌다. 나는 온갖 나뭇가지에 부닥치면서 거칠게 바닥으로 추락했다. “윽! 악! 아악! 아악!!” 퍽, 퍽,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요란하게 바닥에 착지했다. 온몸에 상처가 나고 한쪽 다리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열기구는 완전히 망가져서 바닥에 길게 널브러졌다. “으아아아. 아파!!” 나는 부러진 오른쪽 다리를 잡고 울부짖었다. 여기저기서 피가 철철 나고 있었다. “으허어어엉…….” 난 엉엉 울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부러진 다리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고통을 없애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절벽으로 가서 죽는 거였다. 하지만 다리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으니, 진퇴양난이었다. 쿵. 쿵. 쿵. 용족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살해자에게 응징을!」 나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꿈틀거리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아프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쿵. 진동이 멈추고 나는 힐끗 용족들을 올려다봤다. 새빨간 눈을 가진 놈들이 총 네 마리였다. “이것들이 정말……. 나도 용족이야. 늬들이랑 동족이라고 동족.” 겁에 질린 내가 마지막으로 마구 지껄였다. “물론 아직 백 퍼센트 용족이라곤 할 수 없지만 말이야. 그래도 반반은 된다 이거야. 그 정도는 봐주라고. 어? 내 말 알아들어? 이 파충류들아.” 그러자 우두머리 녀석이 내 앞으로 오더니 그르렁거리면서 날 내려다봤다. “우리 얘기 좀 해보자고. 어때?” 나는 별 기대는 없었기에 그냥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제안했다. 「…….」 당장 용족의 발이 콰직 날 밟아버릴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한쪽 눈을 가만히 실눈을 떴다. 「동족인가.」 우두머리가 얼굴을 내 낯짝에 가까이 들이밀고는, 태양처럼 새빨간 두 눈으로 내 눈을 응시하면서 물었다. “맞아! 그래! 나 동족이야! 봐. 우리끼리 말도 통하잖아?” 내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르르르. 우두머리가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 소리를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듣고 있으려니 소름이 쫙쫙 끼쳤다. 「인간 꼴을 하고 있으면서. 노스브리치 열매를 먹은 모양이군.」 “…….” 나는 멍하니 입만 벌렸다. 「반복을 하고 있나.」 용족 우두머리가 질문인 듯 아닌 듯 중얼거렸다. 용족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내가 루프를 하고 있다는 걸.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용족 우두머리가 꾸욱 하고 앞발로 내 몸통을 눌렀다. “으윽…….” 녀석이 좀만 더 힘을 줘도 내 몸이 완전히 납작하게 짜부라질 것만 같았다. 용족 우두머리가 콧김을 내뿜자 내 낯짝 위로 유황 냄새가 담긴 바람이 불었다. 그르르르. 용족 우두머리가 킁킁대듯이 내 얼굴의 냄새를 맡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냄새는 왜 맡아? 변태같이. 「깨끗하군.」 한참이나 킁킁대며 내 냄새를 맡아보던 용족 우두머리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와 진짜 변……” 변태 같다는 말은 목 뒤로 삼켰다. 혹시 우두머리 녀석이 기분이 상해서 날 그대로 꽉 밟아버릴까 봐. 깨끗하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도 기분이 썩 별로였다. 달리기도 많이 하고 조금 전에 만신창이가 되어 착륙까지 하는 바람에, 내 상태가 그렇게 깨끗하지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운 좋은 줄 알거라.」 용족 우두머리의 새빨간 두 눈이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놈의 뒤에서 다른 용족 세 마리가 불만스레 그르렁거렸다. 「네 피가 더러웠다면, 자비를 베풀지 않았을 테니.」 “자비? 그럼 살려주는 거야?” 내 귀가 자비라는 말만 알아듣고 번쩍 뜨였다. 얼굴에 절로 화색이 돌았을 것이다. 그르르르르! 용족 우두머리는 그런 내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는지 내 몸을 더욱 꽉 내리눌렀다. 나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크헉…….” 「죽이기 전에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지.」 뭐야 그게! 죽이긴 죽이겠다는 거잖아? 「운이 좋다면 일곱 번째 삶이 끝나기 전에 답을 알아낼 수 있겠지. 그렇지 않으면, 네놈은 죽어서 세상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컥…….” 알겠는데 앞발 조금만 위로 들어줘. 숨을 못 쉬겠어. 「들어라. 이 숲은 용의 것이니……. 용의 피가 흐르는 이곳에서 제물을 바치는 순간, 그대 육체에 잠든 용의 마력이 깨어나리라……. 이를 원치 않는 자여, 제물의 피를 보지 말라.」 잠깐만, 천천히 얘기해. 그게 뭔 수수께끼 같은 소리야……! 커다란 용족 우두머리의 발이 잠시 위로 들리는가 싶더니, 내 몸을 콰직, 밟아버렸다. 순간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퇴폐미남아, 거봐, 내가 안 된댔지. 용족이랑 무슨 대화야 대화가. 저런 무식한 놈들이랑. 우두머리라고 다를 것도 없잖아. *** 쏴아아. 어딘가에서 세찬 물소리가 들렸다. 눈앞의 어둠이 가시면서 순식간에 무지개색 강물이 펼쳐졌다. “아…….” 꼭 절벽에서 떨어져야 하는 건 아니었구나. 마력이 흐르는 이 숲속 안에서만 목숨이 끊긴다면, 다시 루프할 수 있는 거였다. 절벽에서 죽든, 숲속에서 죽든. 강물이 마치 폭포처럼 내게 쏟아져 내리면서 날 휘감았다. “이 숲은 용의 것이니…….” 나는 용족이 준 수수께끼 같은 힌트를 곱씹으며 무지갯빛 강물에 몸을 맡겼다. “용의 피가 흐르는 이곳에서 제물을 바치는 순간, 그대 육체에 잠든 용의 마력이 깨어나리라…….” 몇 번 루프를 하다 보니 나도 본능적으로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 강물을 만나고 항상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루프하는 시점으로 되돌아갔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부러 눈을 감지 않고 뜨고 있었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아예 깜박이지조차 않았다. 그러자 무지갯빛 강물은 날 휘감아버렸을 뿐, 내 몸은 아직 루프를 하지 않았다. 삶도 죽음도 아닌 공간에서 나는 부유하고 있었다. 물론 이게 영원히 지속될 순 없었다.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은가……. 어쨌든 난 물속에 잠긴 채 뜬눈으로 오로지 용족의 마지막 말만을 생각했다. “이를 원치 않는 자여, 제물의 피를 보지 말라…….” 제물의 피를 보지 말라……. 해답은 처음에는 알 듯 말 듯 잡히지 않았지만, 마침내 어느 순간 마치 번개가 치듯 뇌리를 때렸다. “그 우두머리 녀석이 정말로 자비를 베푼 거였구나?” 루프를 끝내고 나갈 방도를 알려줬으니 자비였다. 해답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결계를 뚫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비로소 눈을 꽉 감았다. *** 눈을 떴을 때는 다시 숲속이었다. 풀숲이 흔들흔들하다가, 지금까지 몇 번이고 봤던 토끼 마물이 튀어나왔다. “흐이이익!”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어깨춤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스릉, 나는 검을 뽑았다. 바로 그때. 슈욱―!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우리 팀의 덩치가 토끼 마물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과가 달랐다. 휙, 내가 가볍게 검을 휘둘러서 날아온 화살을 쳐내버린 것이다. 화살은 토끼 마물을 맞추는 게 아니라 근처 바닥에 떨어졌다. “……!” “……!” 내가 검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는 기행을 펼치자 팀원들이 전부 입을 쩍 벌렸다. 지난번 루프에서도 나는 검으로 화살을 쳐냈지만, 당연히 이 녀석들은 기억을 전연 하지 못해서 이게 첫 목격이었다. 그사이에 토끼 마물은 껑충껑충 뛰어 자리에서 도망갔다. 51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우와, 검으로 화살을 쳐서 막다니. 도른 공자, 정말 대단해요!” 어깨춤이 가장 먼저 나를 우러러보며 감탄했다. “미리 손 좀 풀어야 하는데. 굳이 왜 막고 그럽니까?” 화살을 쐈던 덩치가 인상을 쓰면서 내게 불만을 토했다. “제물을 바치면 안 되거든.”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즉 살생을 한다는 뜻. 특히 ‘용의 마력이 흐르는 이곳’에서 제물을 바치면 내 몸에 잠든 용의 마력이 깨어난다고 했으니…… 나는 적어도 이 숲속에서는 살생을 해선 안 되었다. 다행히 숲에 들어온 후 아무것도 죽이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용족의 우두머리도 날 보고 ‘깨끗하다’고 여겨 답을 알려준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살생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제물의 피를 보지 말라.’ 즉, 다른 이가 살생한 동물의 피를 봐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나는 우리 팀이 죽인 토끼의 피를 보는 순간부터, 내 몸속에 잠들어 있는 용족의 마력을 깨운 셈이었다. 덕분에 용족으로 인식되어 결계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용족은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속설과 비슷하게, 일곱 번째 삶을 맞기까지는 용의 마력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처음으로 제물을 바쳐 마력을 깨우는 그 시점으로 되돌아가면서……. 적어도 용의 피, 즉 무지갯빛 강물이 흐르는 이 기묘한 숲속에서는 말이다. “신호탄이나 내놔.” 내가 여유롭게 씩 웃으면서 검을 덩치의 목에 겨눴다. 육박전이 아니라 검을 들고 달려들어서인지 이번에는 덩치가 더 빨리 신호탄을 포기하고 내놨다. 그 이후는 모든 과정이 지난번 루프 때와 같았다. 고수들이 오자 용족을 봤다는 거짓말을 하고 확성 뿔피리를 불게 만든 것까지. 이후에 나도 팀원들과 함께 결계로 빨리 되돌아갔다. “후후후! 후후. 하하하!” 결계를 향해 달려가면서 나는 그저 즐거운 웃음만 계속해서 터트렸다.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웃자 팀원들이 두려워했다. “와, 우리가 제일 빠를 줄 알았는데! 벌써 세 팀이나 와 있구나!” 결계에 도착한 어깨춤이 지난번과 똑같은 대사를 쳤다. 이번에도 다른 팀 셋이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으며, 그것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다만 이상한 점은. “앙증이?” 결계 앞에 다른 누구도 아닌 어스아이 한 마리가 떡 하고 서 있질 않은가. 분명히 지난번 루프에서 앙증이와 어스아이들은 나중에 도착을 했는데……. 그것도 무려 퇴폐미남이 결계에 도착하고 난 뒤였는데.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다니? 게다가 다른 어스아이들은 없었다. 앙증이 혼자였다. “도른 공자님! 지난번엔 용족한테 밟혀 죽으신 것 같던데. 용족이 실마리를 알려줬나요? 답은 알아냈어요?” 앙증이가 날 보더니 앙증맞게 결계 안으로 뛰어 들어와서는 귀엽게 물었다. “…….” 다른 팀원들이 울타리를 뛰어넘는 동안, 나는 우두커니 서서 이 조그마한 어스아이를 진짜 뚫어져라 쳐다봤다. 앙증이는 귀만 쫑긋 세우고 호기심이 가득 담긴 낯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응, 푼 거 같긴 한데.” 내가 결계 쪽으로 다가가서 손을 뻗어서 흔들어봤다. 이번에는 나와 울타리 사이를 가로막는 투명한 막이 없었다. 즉, 이제는 나도 결계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루프도 끝이었다! 무지갯빛 강물은 안녕이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기억하는 거지? 루프를 하면 시간을 되돌아가니까, 다른 사람들의 기억은 전부 없어졌는데.” 앙증이가 지난 루프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용족이 낸 수수께끼보다도 더 풀기 힘든 수수께끼였다. 그런데 답이 간단했다. “저는 울타리 보수 담당이잖아요? 이 정도는 기본이죠.” 앙증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싱글거리고 웃으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앙증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현재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아 됐고 빨리 넘어갈래.” 그저 여길 벗어나는 것뿐이다. 이 숲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나는 잠시 울타리를 노려봤다가, 훌쩍, 뛰어넘었다. “이렇게 쉽다니! 이렇게 쉬운 거였다니!” 결계 밖으로 나온 내가 마침내 허공에 대고 울부짖었다. “결계를 넘는 게 이렇게 쉽다니! 너무 쉬워서 미칠 것 같아! 진짜 미칠 거 같다고!” 다른 공자들이 놀라서 그런 날 힐끔거렸다. 그들은 내가 왜 감격을 하는지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한편, 앙증이도 날 따라 깡총 울타리를 뛰어넘곤 꼬리를 흔들었다. 생글거리면서 날 올려다보는 얼굴이 뭐 재미난 일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도른 공자님, 그래도 다행히 해답을 잘 찾으셨네요. 일곱 번 죽기 전까지 못 찾을까 봐 걱정했답니다.” “걱정은 무슨. 전혀 안 한 거 같은데.” “그건 그래요. 전 평생 걱정 따위 해본 적이 없답니다.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 생긴 거는 참 귀여운데 이마를 콩 쥐어박아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도 제가 알려드렸잖아요. 반복이 시작되는 시점에 실마리가 있을 테니까 잘 찾아보라구요. 제 말이 도움이 됐죠? 저한테 고맙죠……?” “고맙긴. 답을 알고 있었으면 그냥 말을 해줬으면 됐잖아!” 나는 신경질을 냈다. 지난 루프에서 그냥 아무것도 죽이지 말라고 답부터 알려줬더라면! “그럼 용족한테 잔혹하게 밟혀 죽지 않고, 덜 아픈 방식으로 죽었을 텐데! 네가 뚝배기가 박살 나는 기분을 알아?” 차라리 절벽에서 떨어지는 게 낫지, 밟혀 죽는 게 가장 기분이 별로였다. 게다가 한 번만 더 죽었어도 모든 게 끝장이었다. 난 지금까지 6번 죽었고, 지금이 7번째 생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다시 살아날 기회가 없는 것이다. “그치만 저도 반복은 안 해봐서 답을 모르는걸요. 지금도 모르고요. 그냥 실마리가 그 시점에 있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죠.” 앙증이가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눈을 접고 웃었다. “반복을 할 때, 하필 거기로 돌아간다는 건 당연히 뭔가 이유가 있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그게 뭔진 몰라도.” “…….” 루프 시작점은 언제나 토끼를 죽여 첫 제물을 바치게 되는 시점이었다. 날 회귀시키던 용족의 마력은 항상 그 마력이 처음 깨어나는 시점으로 날 돌려보냈던 것이다. 그때, 전방에서 1번 다니엘 팀이 나타나는 바람에 나는 앙증이에 대해서는 곧바로 잊어버렸다. “멍뭉아! 빨리 와!” 내가 초절정 절세 미남을 보자마자 반색했다. “……누가 멍뭉이야? 주위에 개새끼 한 마리 안 보이는구만.” 대형견이 지난번과 똑같은 대사를 던지면서 울타리를 뛰어넘어왔다. “우리 강아지. 용족 안 만나서 멘탈 붕괴 안 하니까 욕도 안 하고 얼마나 좋아. 욕쟁이 된 줄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고.” 내가 다가가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팀원들이 용족한테 죽고 혼자 살아남았을 때, 다니엘이 식빵을 찾으며 욕쟁이가 되어버린 기억이 내 머릿속에 너무 선명하게 남은 탓이었다. “또 무슨 헛소리냐. 난 너 모르니까 아는 척 좀 하지 말라고.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날 못 알아보는 걸 보니, 대형견의 기억상실증이 또 도진 듯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은 넌데, 왜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해?” 내가 순진한 목소리와 얼굴 표정을 지어주며 반박했다. “그건, 기억상실증보다 더 심한 병에 걸린 게 바로 너니까.” 다니엘이 대꾸했다. “더 심한 병? 그게 뭔데?” “정신상실증이라는 거다.” 대형견은 난데없이 그 자리에서 새로운 병명을 지어내서 내게 붙이며,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두 번 톡톡 건드렸다. 그러더니 혀를 끌끌 차면서 내 곁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팡. 팡. 뭔가 귀여운 소리가 들려서 난 휘휘 주변을 둘러보았다. “음?” 앙증이가 어느샌가 어깨춤 공자 뒤에 가 있었다. 팡. 팡. 다시금 앞발로 어깨춤의 청색 로브에 펀치를 날린 앙증이. 어깨춤이 누가 자길 두들기나 보려고 뒤를 돌았다. 그러자 앙증이가 웃으며 말했다. “아, 엄청나게 큰 모기가 앉아 가지고요, 공자님.” “히익! 엄청 큰 모기?” 어깨춤은 모기가 상당히 싫은지 놀라서 두리번거렸다. “벌써 날아갔어요.” 앙증이가 생긋 웃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휙 뒤돌았다. 뒤돌자마자 앙증이의 표정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보송보송한 앞발을 천천히 눈앞에 들어 올리고 빤히 쳐다보더니 파란 가루를 탁탁 털어냈다. “흥. 역시 용사의 유골이었구나. 감히 내 구역에서 이런 깜찍한 짓을 하다니. 어떤 새낄까? 빨리 알아봐야징. 후후후……!” 음? 방금 귀여운 앙증이 입에서 험악한 단어 하나가 나온 것 같았는데? 잘못 들었나? 잠깐 내 귀를 의심하고 있는 사이. 앙증이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글생글거리더니, 확성 뿔피리 소리를 듣고 뒤늦게 달려오는 아홉 마리의 어스아이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옹기종기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소곤거리며 뭐라고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알렉시스! 먼저 왔구나.” 마침 결계로 달려온 퇴폐미남이 이번에도 내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달려오느라 숨을 거칠게 쉬는 그의 모습이 퇴폐미를 다시 한번 폭발시키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제라드가 훌쩍 울타리를 넘었다. “……?” 울타리를 넘어서자마자, 퇴폐미남이 그 자리에서 의아한 표정으로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갑자기 헉, 하고 거친 숨을 한 번 뱉더니. 인상을 찡그리며, 그가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퇴폐미남이 몇 번 더 고통스러운 듯 숨을 뱉어냈다. “야, 왜 그래? 어디 아파?” 퇴폐미남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나는 얼른 다가가 녀석의 낯빛을 살폈다. “어……?” 마른침을 삼킨 그가 정신이 든 것처럼 날 빤히 바라보았다. “……아. 괜찮아.” 퇴폐미남이 대답했다. 그러더니 별말 없이 한참이나 날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이상하게도 그 시선이 평소보다 더 집요하게 느껴졌다. 52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냐?” 하도 빤히 쳐다보길래 내 낯짝을 더듬거려봤다.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퇴폐미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퇴폐미남이 살짝 고개를 숙여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퇴폐미가 절절 흐르는 화려한 얼굴 위에 왠지 안도하는 표정이 서렸다. “고생 많았다.”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한 번 툭 쓰다듬은 그가 담담한 어조로 뒤이어 덧붙였다. “보답으로, 이제 해줄까?” “뭘……?” 뜬금없이 뭔 소리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여긴 사람이 많아서 곤란하겠군. 그럼 나중에 단둘이 있을 때 해줄게. 물론, 네가 원한다면 말이지.” “그러니까 뭘?” 대체 뭘 해주겠단 건데? 하지만 퇴폐미남은 대답할 생각은 않고 결계 너머 저쪽을 바라보았다. “용족이 깨어난 모양이군.” 이상하네? 아무도 아직 말해주지 않았는데. 퇴폐미남 녀석은 무슨 독심술이라도 쓴 듯 원인을 알아냈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용족의 발걸음 소리가 귀에 들렸을 리는 없고……. 다른 공자들이 옆에서 웅성거리는 대화가 들린 걸까? 하긴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용족 깨어난 거 맞아! 내가 봤거든!” 내가 활짝 웃으면서 외쳤다. 용족이 깨어났는데도 나는 이렇게 결계 밖에서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닫자 내 기분이 최고조로 단번에 올라갔다. “용족이 깨어나다니 엄청 신나지 않아? 진짜 너무 좋아 미칠 지경이라니깐. 캴캴캴캴!” 내가 마녀처럼 웃으며 그 자리에서 몇 바퀴 돌면서 가볍게 춤까지 추었다. 용족들이 나 없는 데서 깨어난 건, 아주 신나는 일이니까! 내가 죽을 일이 없다는 뜻이거든! “…….” 무척이나 좋아하는 내 모습을 가만히 보던 퇴폐미남이 피식 웃었다. “그래. 축하한다. 네가 기쁘다면 좋은 거지.” 이윽고, 비행 장치를 타고 고수들이 내려와서 결계 밖으로 나왔다. 고수들은 하늘을 나는 동안 정말로 용족을 봤음을 알렸다. 공자들은 내가 용족을 봤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자 깜짝 놀랐다. “금일 취소된 중간 평가는 다음 시간에 연무장에서 다른 방식으로 대체하기로 하겠네.” “그럼 오늘은 해산!” 고수들이 말했으나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쿵. 멀리서 용족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다들 공포에 질렸으면서도, 동시에 용족을 구경하기 위해서 결계 안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쿵. 쿵. 쿵. 마침내 용족이 드러났다. 화르르르르르! 화염이 터져 나오자 공자들이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났다. “꺄아아아!” 어스아이들이 서로 비명을 지르며 끌어안았다. 하지만 왠지 좋아하는 것 같은 얼굴들. 크르르르르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쿵, 하고 결계 앞에서 용족들이 멈췄다. 그중에서 태양처럼 새빨간 우두머리가 앞으로 쿵, 쿵, 걸어 나왔다. 그 새빨간 두 눈이 학생들 중에서 유독 내게 꽂혔다. 「…….」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내 눈을 응시하는 새빨간 두 눈. 나는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멍하니 그 눈을 바라보았다. 「용의 마력이 깃든 인간이여.」 용족의 우두머리가 건네는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들려왔다. 「인간으로 살고 싶거든, 다시는 결계 안으로 돌아오지 말라. 결계 밖에서 족히 인간의 삶을 누리리.」 번뜩이는 용족들의 눈빛으로 봐서는 그냥 다시 오면 쳐 죽이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어, 안 와. 안 올게, 다시는.” 난 빠르게 대답했다. 나도 용족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용족의 우두머리는 내게서 태양처럼 새빨간 두 눈을 거두었다. 먼 옛날부터 아스테시아 숲을 지켜온 용의 후손이자, 이제는 감옥과도 같은 결계 속에 갇힌 초월종. 용족들이 우리의 눈앞에서 떠나갔다. *** 검술 수업 시간에 용족이 깨어났다는 소문은, 아스테시아 안에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하지만 검술 수업 학생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무사히 대피했기에, 결국은 해프닝쯤으로 남게 되었다. 학교까지 요란하게 확성 뿔피리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어스아이들이 빠르게 뒷문을 봉쇄하고 학생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바람에, 일부 무모한 이들도 숲까지 달려가진 못했다. [숲으로의 통행은 추후 새로 공지가 있을 때까지 완전히 금지합니다.] 기숙관을 비롯한 학교 여기저기에 이런 내용의 공지문이 붙었다. “이번에는 도른 공자가 한 건 했다더라구요.” “용족을 처음에 멀리서 발견하고 교수님들한테 알린 게 도른 공자래요.” “다행이네, 늦게 봤으면 다 죽을 뻔했겠어.” 학교 안에서의 나의 유명세는 아예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현재 모든 이들이 기억하는 것은 내 마지막 루프뿐으로, 그 이전의 루프에 대해선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즉 현재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날의 정황은 무척 단순했다. 알렉시스 도른이 일부러 신호탄을 터트려서 교수들을 불렀고, 용족을 봤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를 들은 두 교수가 뿔피리를 불어 다들 무사히 대피를 했다는 것이다. “아아, 여기서 더 치솟을 유명세라는 것은 과연 있을 것인가?” 다음날 나는 머리에 꽃을 꽂고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뒤, 하늘을 아련하게 바라보면서 나의 유명세에 스스로 탄복했다. 광장 한복판에서 그런 자세로 있었지만 지나가는 학생들도 이젠 그냥 그러려니 했다. “황제가… 승하……” “장례식을……” 이상하게 하루 만에 내 유명세가 감쪽같이 사라졌는지, 오히려 대부분의 공자들은 다른 주제에 정신이 팔린 듯이 보였다. 어쨌든 한참이나 그렇게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아련하게 바라보다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출하네. 식도락 클럽이나 가봐야겠다.” 식량을 구하러 다니는 고대의 수렵 채집인들처럼 어슬렁거리며, 나는 곧바로 남쪽 성으로 직행했다. “어? 내가 잘못 왔나?” 식도락 클럽 문을 벌컥 열자마자 나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 눈이 부신 병약미를 뽐내며 2번 피터가 테이블 앞에 앉아있다가 홱 고개를 돌려 날 봤기 때문이다. 나는 도로 문을 쾅 닫고, 방문 앞에 걸려 있는 명패를 확인했다. [식도락클럽] “이상하다? 맞는데?” 나는 다시금 식도락 클럽의 문을 벌컥 열었다. “병약미남! 네가 왜 여깄어?” 아무리 눈을 씻고 다시 봐도 2번 피터였다. 수증기가 오르는 따끈한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있는. 내가 무척 반가운지, 떨떠름한 낯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절세 미남이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내가 마침내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아! 그렇구나! 이제야 너도 식도락 클럽 가입한 거구나? 하하하!” 나는 기뻐하며 당장 피터한테로 뛰어갔다. “진정해라. 내가 왜 여길 가입하냐?” 광분해서 뛰어오는 내 모습을 보고 병약미남이 눈가를 움찔하며 말했다. “아니야? 그럼 왜 왔어? 배고파서 온 거야? 사실 나도 그런데. 뭐 먹을 거 없나? 왜 차만 마시고 있어? 무슨 차야?” “후…….” 피터는 대답은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갑자기 앞에 앉아있던 누군가한테 인사를 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예. 안녕히 가세요.” 그제야 나는 피터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상대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워낙 피터의 눈부신 병약미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여서 이제껏 시야에 들어오질 않았던 것이다. 거기 앉아있는 건 식도락 클럽 회장인 포동포동 귀여운 너구리였다. “아, 너구리 공자도 있었구나. 그럼 이거 혹시 회장들끼리의 정기 회담 같은 거예요?” 퀴즈 클럽 회장과 식도락 클럽 회장과의 접선. 정기 회담이 아니라면 병약미남과 너구리가 단둘이 앉아 무슨 얘길 나눈단 말인가. 치킨을 뜯는 것도 아니고 고작 차 한 잔을 마시면서. “너 때문이잖아. 이 망할 녀석아.” 갑자기 피터가 나한테 가까이로 와서 이를 으드득 갈며 아름다운 두 눈을 부라렸다. 가까이서 보니 속눈썹이 참 길고 예뻤다. “뭬야? 내가 뭐?” 나는 뜬금없는 병약미남의 반응에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네가 그놈의 미친…… 전단지를 뿌리는 바람에…….” “음?” 전단지가 왜? 스스로 개인정보 희생해서 남장 여자가 있다고 퀴즈를 내버렸던 전단지. “덕분에 퀴즈 클럽은 물론이고 식도락 클럽에도 가입자가 넘쳐났구만? 이제 와서 뭐가 불만이야?” “됐다 됐어. 후……. 아무튼 그럼 전 이만.” 피터는 나한테만 으르렁거리고, 너구리한테는 엄청 예의 바르게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식도락 클럽을 낭창낭창한 발걸음으로 나가버렸다. “저 자식이 갑자기 왜 저래? 내가 어제 숲속에서 겪은 개고생 얘기를 엄청나게 과장해서 들려주려고 했는데.” 어리둥절해진 내가 고개를 홱 돌렸다. “너구리 공자, 병약미남하고 무슨 얘기 했어요?” “……음.” 힐끔 날 쳐다본 너구리가 차 한 모금을 더 꿀꺽했다. 그리고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회장들의 회의 내용은 일급 비밀이라서 함부로 발설할 수가 없네요.” “비공개라고요?” “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렇구만. 비밀 얘기라는 거구만. 후후후.” 내가 마녀처럼 음흉하게 웃었다. “그럼 제가 우리 식도락 클럽의 차기 회장이 되고 말겠어요!” 나는 새로운 목표를 다지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차피 퀴즈 클럽에 들어가는 것은 글러 먹었으니까! 차라리 식도락 클럽 회장이 되어서! 병약미남하고 꾸준한 정기 미팅……, 아니 정기 데이트를 하고야 말겠어!” 식도락 클럽 회장이라는 본인의 자리를 위협하는 날 보며, 너구리는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알렉시스 공자! 열렬히 응원할게요!” 너구리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물개 박수를 짝짝짝 쳤다. “그동안 아무도 식도락 클럽 회장이 되려는 분이 없었는데 마침내……!” 너구리가 감격했는지 그만 울컥했다. 회원들이 죄다 먹기만 바쁜 냠냠신선들이었으니까. 신선들은 무릉도원을 가꾸기만 해도 시간이 없으니, 회장이라는 명예 따위는 개나 주었던 것이다. “아! 차기 회장이 되더라도 절대 떡볶이는 만들면 안 돼요!” 감격한 와중에서도 너구리는 차후 식도락 클럽의 존폐가 걸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53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식도락 클럽 회원들이 가져온 맛난 홍합찜과 고구마구이를 열심히 해치우자 배가 몹시 빵빵해졌다. “후. 이러다 언젠가는 진짜로 배가 터지고 말겠어.” 그렇게 죽으면, 그래도 참 여한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병약미남이 안타깝게도 차만 마시고 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는, 약간의 음식을 챙겨 옆방 퀴즈 클럽에 쳐들어갔다. “거봐. 사람 많잖아.” 후후후. 맨날 텅텅 비어있던 퀴즈 클럽에는 피터를 제외하고도 무려. “이제 2명이나 더 있잖아!” 내가 전단지를 돌렸을 때 터져나갈 듯이 북적거렸던 퀴즈 클럽은…… 마치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그 많은 인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였다. 그래도 두 명은 남아있게 되었으니 정말 커다란 진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마주 앉아 체스 게임을 하고 있던 신입 회원 두 명은 내가 나타나자 힐끔 쳐다봤지만. 이내 별 관심 없이 다시 체스판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런. 이쪽 신입들도 옆방과 마찬가지로군. 세상사에 딱히 별 관심 없는 신선들이란 말씀이야.” 내가 혀를 찼다. 이들마저 무릉도원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니. 당장 눈앞에 놓인 체스 게임이 아니면 아무런 관심도 없는 덕후의 모습들. “이런 신선들이 왜 이제서야 퀴즈 클럽에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의아할 지경이군.” 난 그 답을 고민해보았다. “어쩌면 내가 전단지를 뿌리기 전까지는, 홀로 무릉도원을 거니느라고 퀴즈 클럽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던 건지도……. 역시 내 전단지가 최고였어. 음하핳.” 내가 멋대로 결론을 내리며, 다시 한번 내가 뿌린 전단지의 위력에 탄복하고 있는데. “이 공자들은 네가 뿌린 전단지가 아니고, 내가 뿌린 아주 정상적인 전단지를 보고 온 거거든? 착각 좀 그만해라.” 불쑥 내게 딴지를 거는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 병약미남이 여리여리하고 우아한 꽃미남스러운 자태로 열린 창가에 서 있었다. 창밖 너머로 그의 시야가 머무르던 곳에는 누군가의 죽음을 추모하는 조기가 걸려 펄럭거리는 것이 보였다. “근데 넌 우리 클럽 회원도 아니면서 왜 자꾸 쳐들어와?” 피터가 날 향해 쏘아붙였다. “내심 반가우면서 아닌 척하기는.” “아닌 척은 뭐가 아닌 척이야!” “푸딩 먹어.” “……응.” 피터는 내가 내민 조그만 푸딩 그릇 앞에서 순식간에 온순해져서는, 근처 소파로 가서 앉았다. 체스 게임을 하고 있는 다른 회원들에게도 파이를 갖다줬지만, 그들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병약미남. 있잖아. 내가 어제……” 내가 막 피터 앞에 자리를 잡아 앉고는 용족들 때문에 개고생한 얘길 시작하려고 하는데. 눈치 빠른 피터가 먼저 잘라 말했다. “그래, 용족이 갑자기 깨어났다면서. 학교 안에 소문이 자자하더라. 혹시 네가 깨웠냐?” 난데없는 모함이었다. “내가 용족을 왜 깨워? 미쳤어? 그놈의 용족 때문에 내가 완전 죽을 뻔했는데!” 숲속에서의 개고생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르자 발끈한 내가 두 눈을 치켜떴다. 내 목소리가 좀 컸는지, 체스 게임에 골몰하던 회원 둘도 살짝 고개를 들고 내 쪽을 쳐다봤다. 물론, 신선들은 속세는 관심 끊고 금세 다시 체스판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거야 갑자기 용족이 깨어났다니까, 혹시 누가 일부러 깨웠나 했지. 그렇지 않고서야 깨어날 이유가 없으니.” 병약미남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니 누가 깨운 건 맞는데. 왜 그 첫 번째 용의자가 나냐고?” 내가 분개했다. 병약미남의 머릿속에서 대체 나는 어떤 이미지란 말인가! “그야 하필 네가 그 숲에 있었으니 내가 의심을 안 할 수가 있나. 그런 미친 짓을 할 작자가 너밖에는 생각이 안 나는걸.” 병약미남은 먹고 있던 푸딩을 내려놓고 단안경을 고쳐 썼다. “아 글쎄 내가 깨운 거 아니라니깐? 그리고 파이도 먹어.” “응.” 나는 종이에 정성스레 싼 파이를 그에게 건넸다. 병약미남은 아무런 반항 없이 받아서 한입 베어 물었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병약한 2번이 언제쯤 너구리처럼 살이 토실토실하게 찔지……. 아 빨리 쪄야 하는데…….” 나는 토실토실한 피터를 상상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 피터가 내 말에 뚝 하고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먹던 파이를 탁자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아놔. 못 먹겠네.” 병약미남이 삽시간에 입맛을 잃었다. “갑자기 왜? 빨리 처먹어! 그래야 살이 찌지!” 2번의 병약미를 무척이나 안타까워한 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너무 무서워. 조금 전에 네 눈빛이…… 일부러 애들 살찌워서 잡아먹는 마녀가 나오는 동화 있지? 꼭 거기 나오는 마녀의 눈빛이었어.” 피터가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는 듯이 부르르 떨며 몸서리를 쳤다. “그래? 후후. 그렇단 말이지. 나처럼 세상에서 제일 잘나고 존재감 넘치는 마녀한테 잡아먹히는 컨셉이란 말이지?” 내가 좋아하며 앞서나갔다. 역시. 이 소설은 19금? 이렇게 저렇게 잘 잡아 먹어줄 수 있는데? “아니. 그거 절대 아니고.” 병약미남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모자라 뭘 상상한 건지 몸서리를 한 번 더 쳤다. 물론 나는 신경 안 썼다. “병약미남, 너는 좀 많이 먹고 토실토실해져야 해. 언젠가 그런 날이 오면, 그땐 네 별명을 병약미남에서 토실토실 곰돌이로 바꿔주지.” “그딴 별명을 왜 지어?!” 예비 토실토실 곰돌이는 자신의 예비 별명에 경기를 일으켰다. “왜? 귀엽기만 한데.” “…….” 귀엽다는 말은 처음 들어봤는지 병약미남이 잠깐 멈칫했다. “정말 이상하군. 분명히 좋은 의미의 말인데, 너한테서 들으니까 기분이 몹시 더러워.” 병약미남은 미간을 찡그린 후 소파 뒤에 편히 등을 기대었다. 그때 저쪽에서 체스 말들을 회수하는 달각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신선 두 분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스 게임이 끝나고 비로소 무릉도원에서 사바세계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신입들은 회장인 피터에게 짧은 인사를 한 다음 방을 나섰고, 곧 방문이 닫혔다. 이제 나와 병약미남 둘뿐이었다. “어디 네가 하려던 얘기나 해봐. 숲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피터가 그제야 본격적으로 물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하게 숲에서 있었던 일을 병약미남한테 늘어놓았다. 중간에 퇴폐미남을 한 번 끌어안았다는 사실은 생략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피터는 내내 심각한 표정을 지었고, 가끔 고개를 갸웃하다가, 때론 기겁했다. “야! 내가 왜 너의 절친이야? 왜 그런 망발을 아무한테나 퍼트리고 다녀?” 퇴폐미남에게 널 절친이라고 자랑했다고 말한 순간,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면서 나한테 따지는 거였다. 아무튼 나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절친이 되어버린 화를 삭인 채 내 말을 듣던 병약미남은 마침내 날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게 되었다. “뭐야 너. 표정이 왜 그래? 그 측은해하는 표정은 뭐지?” 이야기를 다 마치고 동정심 따위는 원치 않는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남들은 포션 먹으면 이득만 보는데, 넌 어떻게 된 게 괜히 포션은 먹어 가지고 그 개고생을 하는지……. 불쌍하기 짝이 없군. 어째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어요.” 병약미남은 날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 혀만 차지 말고 유골 뿌린 범인이나 말해줘 봐. 지금쯤이면 넌 눈치챘을 거 아냐.” 내가 당당히 요구했다. “어이없네. 지금 그 얘기만 듣고 내가 어떻게 아냐?” 피터가 남은 파이를 베어 물고는 오물거렸다. 내 지인들 중 가장 똑똑한 병약미남이 범인을 모른다는 사실에 잠깐 실망했지만, 난 다시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일주일 줄게. 좀 알아내 줘.” “우리 길드에 의뢰하는 거야? 돈 내.” 대륙에서 제일 큰 정보 길드 파라야의 부단장인 피터 레이는 냉정했다. “돈 없는데. 너도 알잖아, 나 찢어지게 가난한 근로장학생인 거!” 내가 방실방실 웃으며 대꾸하자 피터가 움찔하더니 한층 더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네. 그러고 보니까 넌 돈도 없고 찢어지게 가난하구나. 불쌍한 게 한둘이 아니네. 아무리 불쌍해도 우리 클럽 가입은 안 되지만.” “누가 가입한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 목표는 식도락 클럽 회장으로 바뀐 지 오래라고!” “오늘 아침에도 우리 클럽에 가입 신청서를 보내놓고는 뭔 소리야?” “아! 그건. 그냥 아침에 잠깐 한번 긁어주는 복권 같은 것일 뿐이야……. 운 좋으면 가입될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말고. 눈뜨자마자 퀴즈 클럽 입부 신청서를 한 장 작성해서 우체통에 넣으면, 마치 복권방에 출근 도장이라도 찍은 것만 같이 기분이 뿌듯하지.” “……역시 제정신이 아니군.” 뿌듯해하던 나와 달리, 병약미남은 왠지 착잡한 표정이었다. 퀴즈 클럽을 복권방으로 착각하고 있는 나를 안타깝게 여기는 감정도 더욱 깊어졌다. “병약미남, 정보 길드의 차기 두목으로서 넌 지금까지 내 얘기를 다 듣고도 범인이 누군지 안 궁금하냐? 내 의뢰가 없어도 혼자 알아내 보고 싶은 기분이 마구 샘솟지 않냐고?” “궁금하긴. 보나 마나 황자들 중 하나잖아.” 병약미남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뜸 내뱉었다. “애초에 황족이 아니면, 용사의 유골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걸. 유골함이 비치됐던 곳은 황실의 보물 금고니까.” “그건 나도 아는데 그 황자들한테서 명을 받고 이런 짓을 저지른 우리 학교의 그 졸개 새끼가 누구냐 이거야.” 내가 흥분해서 탁자를 탕탕 두들겼다. “황자들이야 애초에 또라이들이니 원래 그렇다 쳐도, 우리 학교 안에 그런 범죄에 가담한 놈이 있단 얘기잖아! 당장 그 범죄자를 잡아내서 몽둥이찜질을 해주고 말겠어!” “범죄자는 무슨. 황자의 명으로 한 일인데. 관점에 따라서는 충성심 깊은 신하일 수도 있는 거지.” 피터가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나는 입매를 비틀었다. “오호라, 넌 참 나랑 사고방식이 매우 다르구나. 역시 용족한테 안 당해봐서 그런가? 지금 당장 숲속에 한 번 들어가 볼래?” “됐다. 사양할게.” 미꾸라지 같은 병약미남을 보자, 나는 지금이라도 녀석의 멱살을 잡고 숲속에 끌고 가 던져 버릴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54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어쨌거나 이 사건의 배후가 황족인 건 분명한데, 병석에서 다 죽어갔던 황제일 리는 없고, 그렇다면 남은 2황자 아니면 5황자였다. 가루가 들어있는 작은 상자 하나쯤은 학교 안에 있는 자신의 부하에게 소포로 보내버리면 그만이었을 테다. “……그런데, 왜 굳이 용족을 깨우려고 했을까? 너무 과하잖아. 검술 수업 듣는 그 많은 공자들이 다 죽을 뻔했는데……. 그 공자들을 다 죽여서 뭐에 쓰려고?” 내가 중얼거렸다. 아스테시아의 학생들은 대부분 명망 있는 귀족가의 자제들인데, 그들을 그렇게나 떼거리로 죽여서 무슨 이득을 보려고 했던 걸까. “게다가, 만약 자제들이 그렇게 죽어버리면, 그들의 부모들도 가만 안 있을 거고, 황족이 배후라는 건 결국 어떻게든 짐작하게 될 텐데……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한 거지?” “간단하지. 이미 죽어버린 다른 황자가 저지른 일이라고 뒤집어씌우면 그만이지.” 피터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아스테시아의 공자들을 다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 그중 한 명을 특별히 죽이고 싶었던 거야. 다른 방법으론 좀 죽이기가 힘들어서, 용족을 깨운다는 무리수를 둔 거지.” 그렇게 말하며 피터는 날 빤히 바라보았다. “제국의 9황녀가 아스테시아로 도망쳐서 숨어들어왔으니까.” 단안경 너머로 보이는 병약미남의 의미심장한 시선.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뇌리에 떠오른 대답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침묵이 내려앉고, 벽난로의 장작이 타닥거리는 소리만이 귓가에 들려왔다. 멀뚱히 병약미남을 쳐다보던 나는 그만 끙, 하고 소리를 냈다. 뭐야, 이 녀석도 이미 알고 있었잖아. 대체 어떻게 알았지? 성도 ‘도레’에서 ‘도렌’으로 감쪽같이 바꿨는데. 혹시 황가의 표식이 있는 왼쪽 쇄골 아래쪽을 병약미남이 본 일이 있던가? 옷으로 잘 가리고 다녔는데. 아니면 역시 나를 몰래 짝사랑해서 따로 뒷조사를……? “숨은 9황녀를 죽이는 건 다른 황자들로서도 까다로운 일이 됐지. 아스테시아는 황궁 불가침 구역이고 고대 마법도 걸린 장소이다 보니, 직접 자객을 보내기가 어려워.” “뭬야?” “그래도 이미 학교 안에 있는 사람에게 명을 내리면 간단해. 서신 한 통만으로도 가능하지. 오히려 문제는 9황녀의 특출난 검술 실력이었겠지. 황자의 부하가 누구든지 간에, 9황녀를 물리적인 힘으로 직접 죽이기는 불가능했을 거야.” “뭬야?” “아마 먼저 독살을 시도했을 텐데, 방금 얘길 들어보니까 하필 그 9황녀가 먹은 노스브리치 열매가 해독 포션이었던 모양이네. 웃기게도.” 병약미남은 이렇게 일이 꼬인 게 정말 흥미롭다는 듯이 낮게 웃었다. 나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병약미남을 바라보았다. “이미 나한테 독살 시도가 있었을 거라고?” 정말 꿈에도 몰랐다. 가만 생각해 보면, 원작의 여주는 독을 상당히 조심했다. 황궁에서도 몰래 밤에 빠져나가 식료품 창고나 텃밭에서 서리해오는 등, 제 손으로 구한 것만 먹었다. 아스테시아에 오고 난 뒤에도 만찬장에서 어스아이가 직접 앞에 놓아준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 물론 차기 식도락 클럽 회장으로 예정된 나는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동안 아무거나 처먹었지만. “너도 기억나지? 전에 만찬장에서 쓰러져서 갑자기 사망한 공자 있었잖아. 브랜든 공자라고, 너랑 같은 근로장학생이었을 텐데.” “아……. 어, 그랬지. 그런 일이 있었었지, 참.” 그 공자가 갑자기 쓰러져 죽었을 때 나도 제라드와 함께 만찬장에 있었으므로, 당시 상황은 기억하고 있었다. “유가족의 요청 때문에 부검을 하지 못한 채 심장마비로 결론 내렸지만, 우리 길드에선 독살로 추정하고 있어.” “…….” “아마 너한테 먹인 독이 아무 반응이 없자, 독의 효과를 제대로 확인해보기 위해 다른 공자에게 먹여본 게 아닐까 싶어.” 사실이라면 정말 소름 끼치는 일이었기에, 나는 팔을 마구 문질렀다. 내 반응과 상관없이 피터는 말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황자의 부하 녀석은 9황녀가 실전 검술 과목을 듣는다는 사실을 인지했겠지. 지난 수십 년 동안 아스테시아 숲속, 결계 안에서 평가를 해왔던 과목을 말이야.” “뭬야?” “하필 용족이 잠들어 있는 곳이지. 평소대로라면 깨어날 일이 없지만, 공교롭게도 9황녀가 그곳에 있을 때 용족이 깨어난다면 어떨까?” “뭬야?” “황자에겐 용족을 깨우는 방법도 간단해. 지금까지 굳이 시도할 이유가 없었을 뿐……. 황궁의 보물 금고에 있는 유골함을 그냥 꺼내오기만 하면 되니까.” “아마 2황자 자식일 거 같은데.” 내가 생각에 잠겨 대꾸했다. 황자들의 성격 및 과거 일화들이, 갑자기 구름처럼 내 머릿속에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옛날부터 그 성격 더러운 자식이 집요하게 괴롭혔거든. 이번에도 똑같이 그 집요한 냄새가 나.” 비록 9황녀가 근래에는 하인 변장을 하고 몸을 숨겨서 황자들의 괴롭힘을 피했지만, 더 순진했던 어린 시절에는 고스란히 괴롭힘을 당했다. 개중에서도 특히 2황자의 괴롭힘이 유독 잔인하면서도 끈질겼다. 반면에 냉담한 성격의 5황자 녀석은 황위 다툼도 포기하고 멀리 도망간 황녀까지 쫓아다닐 정도로 집요하진 않았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당사자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 병약미남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나는 불현듯 어떤 의문이 떠올라서 두 눈을 치켜뜨면서 2번을 쳐다보았다. “혹시 너 아냐?” “뭐가?” “황자의 사주를 받은 범인.” “…….” “아니야?” “아닌데.” “넌 이미 내 정체를 알고 있었잖아. 그렇지?” “티가 팍팍 나니까.” “그러니까 네가 지금 제일 유력한 용의자지! 너 말고 내 정체를 아는 놈이 여기 누가 있냐고. 황자한테 몰래 받은 유골이나 몰래 숨기고 다니면서 학생들 사이에 뿌리고 다녔던 거 아니야?” “흠. 만약 그랬다면, 난 네가 9황녀라는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암시조차 하지 않았겠지.” “…….” 음. 그런가. 듣고 보니 또 그럴싸했다. “좋아. 그럼 널 믿고 의뢰를 맡기겠어.” 난 아주 쉽게 병약미남에 대한 믿음을 회복했다. “우리 학교에서 황자의 사주를 받고 날 죽이려는 부하 녀석이 누군지 좀 알아봐 줬으면 해!” “의뢰는 돈을 내.” 날 측은하게 쳐다보면서도 병약미남은 끝까지 냉정을 유지했다. “돈은 없고 떡볶이를 만들어주겠다.” 내가 선언했다. “그건 또 뭐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요리지.” “사양하겠어. 분명히 정상적인 음식이 나올 리 없으니까. 넌 무조건 돈으로 내라.” “음…….” 나는 반사적으로 내게 남은 유일한 패물인 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이거라도 팔아야 하나? 아냐. 안 되지. 고작 황자의 졸개 녀석이나 잡아내려고 내게 남은 전 재산을 판다는 건 미친 짓. 팔 생각이 없으면서도 딱히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막연히 반지를 문지르고 있는데. 그런 내 모습을 빤히 응시하던 병약미남이 왠지 죄책감이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하아…….” 탄식을 길게 뱉은 그가 측은함이 담긴 목소리로 결국 한마디 했다. “됐어. 그냥 알아봐 줄 테니까, 너희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까지 줄 필요는 없어.” 나는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확 소름이 끼쳐서 그만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맙소사, 이 자식이 이 반지가 유품인 건 또 어떻게 알았대?!” “도레 가문 인장 반지잖아.”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것처럼 병약미남이 대꾸했다. “……!” 피터의 설명으로는, 9황녀의 어머니가 도레 가문의 마지막 핏줄이어서 인장 반지를 끝까지 소유하고 있었고, 그걸 딸에게 넘겨주었을 거라는 것이다. “사실은 처음에 네 정체를 알아본 결정적인 계기도 그 반지 때문이긴 했어.” 병약미남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난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시켜서 대륙에 있는 모든 가문의 인장을 다 외워야 했으니까.” 나는 이 엄청난 발언에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물어봤다. “망해서 없어진 가문들까지도?” “망해서 없어진 가문들까지도.” 정적과 함께, 우리 사이에는 도무지 건널 수 없는 넓고 긴 강이 흘렀다. “미친놈…….” 그딴 걸 다 외우다니, 나보다 더한 미친놈이 또 있었단 말인가! 아무리 아버지가 시켰다고는 해도! 아버지도 미친 분이셔! “후……. 알렉시스 너같이 미친 애한테서 미친놈이라는 말을 듣다니, 결국 난 정상이란 얘기군.” 병약미남은 웃지도 않은 채 참으로 묘하고 설득력 있는 결론에 도달했다. “잠깐. 그런데 이상하네. 피터 넌 이 반지를 보고 내 정체를 알았다 치고, 황자 쪽에선 내가 아스테시아로 온 걸 어떻게 안 거지?” 내 머릿속에 의문이 샘솟았다. 아스테시아로 간다는 건 황궁 안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또한 황궁을 빠져나온 후 남장도 했고, 이름도 바꿨지. 2황자 쪽이건 5황자 쪽이건, 내가 여깄는 걸 어떻게 알았지? “병약미남. 혹시 네가 말했냐?” 나는 다시금 2번 피터를 향해 의혹의 눈초리를 던졌다. “너희 정보 길드에서 황자들의 의뢰를 받고 내 정보를 팔아넘긴 거냐고. 나 여깄다는 거 혹시 동네방네 퍼트렸어?” “생사람 잡지 마. 난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정신 나간 9황녀가 휘두른 칼에 맞아 죽고 싶진 않으니까.” “누가 정신이 나갔다는 거야?” “누구긴 누구야. 평생 혼자 탑 속에만 처박혀 살아서 맛이 간 작자지.” 아, 병약미남은 바로 그런 이유로 내가 맛이 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다시금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날 응시했다. “처박히긴 누가 처박혀.” 엉터리 보약을 사기당해 사 먹고 패가망신해서 승천하긴 했지만 어디 처박힌 적은 없었다. 둘 중에 그나마 뭐가 더 나은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55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우리 길드에도 따로 의뢰가 들어온 것은 없었어. 황자들이 너의 향방에 대해선 자체적으로 알아냈다는 얘기지.” 그러더니 병약미남은 한심스럽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게 이름을 바꿀 거면 좀 티가 안 나게 바꾸던가. 도레에서 도렌이 뭐냐? 황자의 명으로 널 죽이려던 측근이라면, 황녀가 도레 가문 이름으로 신분 증서를 받아 갔다는 정보쯤은 받았을 텐데. 당연히 눈에 띄었겠지.” “뭬야?” “또 제라드 공자랑 결투는 왜 해? 이름도 도레랑 비슷한 애가 뜬금없이 나타나서 로스트베인의 후계자를 이겼는데 티가 안 나냐? 물론 누가 봐도 제라드가 져준 거였지만.” “뭬야?” 참나. 져주긴 누가 져줘? “설마 너처럼 미친 애가 황녀일 거라곤 대부분은 상상조차 못 하니까 망정이지……. 황자의 측근이야 당연히 널 의심했겠지. 등장 타이밍이 그렇게 기가 막힌데. 나 9황녀다 만천하에 광고할 일 있냐고?” “뭬야?” “정체를 숨기고 들어온 거면 안 튀게 좀 가만히 있든가……. 하루가 멀다 하고 학교 안에 악명을 날리는데 당연히 눈에 띄지 않겠냐고? 게다가 그놈의 전단지……. 후…….” 전단지를 떠올리자 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는지 병약미남이 천장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 전단지 덕에 신입 회원이 둘이나 더 들어왔구만, 왜 저러는 거야. “어쩐지 뱃속이 차갑더라니……. 역시 미친 짓이었어. 알고 싶지 않은 비밀이나 알게 되고 말이야. 왜 내가 남의 비밀들을 이렇게 숨겨줘야 하는데? 나의 스트레스는 누가 책임질 거야?” “뭬야? 잠깐, 무슨 비밀을 알게 됐다고?” “아무튼, 황자의 측근 녀석도 네 인상착의 그림을 받아서 갖고 있었을 테니, 얼굴도 비교는 해봤겠지. 황녀가 학교로 들어왔다는 것만 알면, 널 특정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거야.” “……아니야. 그 인상착의 그림으로 찾은 건 절대 아니야. 확실해.” 황궁에서 도망칠 때, 여관에서 마주친 암살자가 내게 용모파기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미친 마녀의 형상이었단 말이다. 난 학교 안에 있는 황자의 부하 녀석이 그런 마녀 그림으로 날 찾았을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어쨌든 나라도 널 가장 의심했을 거야, 알렉시스.” 병약미남이 단언했다. “웃긴 건 하늘이 네게 돌아버린 정신을 주고 천운을 같이 내렸다는 거지. 노스브리치 열매를 먹지 않았다면 진즉에 죽고 지금쯤 시체가 되어 있었을 텐데…….” 그렇게까지 말하고 병약미남은 두 눈을 크게 뜨면서 순간 멈칫했다. “설마 저런 천운으로…… 황위까지 오르는 건 아니겠지……?” 단안경을 낀 꽃미남은 불안한 목소리로 혼자 나지막이 중얼대더니.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고개를 마구 흔들면서, 왠지 소름이 돋았는지 몸서리를 쳤다.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황제.” 병약미남은 9황녀의 손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그런 가능성까지 점쳤다. 이 대륙을 공포와 혼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피터가 범인을 알아봐 준다고 했기 때문에 아주 마음이 가뿐해졌다. “절친아! 내가 의뢰 비용으로 포옹해줄까?” 병약미남만 원한다면 흔쾌히 프리허그를 해주려고 했지만. “누가 절친이라는 거야! 남한테 억지로 황제나 시키는 주제에!” 병약미남이 노발대발하면서 황위를 진심으로 거부했다. *** “아! 참. 까먹을 뻔했네. 황제가 승하한 사실은 알고 있냐?” “당연하지.” 퀴즈 클럽을 나오려는데 병약미남이 대뜸 묻기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하루 만에 내 유명세가 꺾여버렸는데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지나가는 공자들이 죄다 황제 승하 운운하고, 성문 앞에는 커다랗게 추모 깃발까지 걸렸는데 말이다. 원작에서도 이 시점에 황제가 죽었다. 그러나 원작은 아스테시아에서 벌어지는 여주와 절세 미남들 간의 알콩달콩한 에피소드들 위주로 그려지면서, 저 멀리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황위 다툼 같은 것은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았다. 물론, 그래도 한 줄 나오긴 한다. “이제 2황자가 황위에 오르겠네.” 내가 소설 속 내용을 더듬으며 예언했다. 원작에서는 나중에 2황자가 황위에 올랐다고 간단히 언급됐다. 안타깝지만, 그나마 괜찮은 5황자가 죽어버리고 성질 포악한 놈이 황위에 오른다.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아직 모르지.” 피터가 대답했다. “제국의 역대 황제들이 모두 그러했듯, 죽은 선황도 후계를 지명하지 않았어. 즉, 그 자식들 중에 살아남은 이가 황위에 오르게 되어 있지. 추모 기간이 끝나면, 관례에 따라 결투에서 이기는 황자가 황위에 오를 거야.” “결투라고?” 나는 혀를 끌끌 찼다. “거참 야만적이네.” “어떻게 보면, 동등한 기회라고도 할 수 있지.” “굳이 목숨 내놓고 말이지?” “너희 집안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뭐. 남들이 말릴 수 있나.” “하긴, 좀 콩가루이긴 하지.” “너도 자격 있을 텐데. 결투.” “…….” “…….”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피터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 말이 헛나갔군. 넌 절대 하면 안 된다. 맙소사. 내가 방금 무슨 헛소리를 한 거지? 잊어버려. 알았지?” “뭬야?” “하지 말라고! 젠장, 이 세상을 내가 악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뻔했군. 절대 하지 말아라. 아예 생각도 하지 마.” “뭘?” “결…… 아니다. 모르면 됐어. 잘 가라.” 피터는 더 이상 말도 꺼내면 안 되겠다는 듯이 그냥 문을 쾅 닫아버렸다. 나도 그래서 잊어버렸다. *** 고대어와 약초학 수업에서도 중간 평가 시험을 봤다. “문제는 알겠는데 답을 모르겠잖아?” 내가 시험지를 받자마자 황당해서 웅얼거렸다. 분명 문제는 잘 읽을 수 있었다. 고대어로 된 문제도 술술 읽혔다. 그러나 답으로 무엇을 적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지난 반 학기를 그냥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날로 먹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다 진짜 세 과목 다 낙제하는 거 아냐?” 덜컥 걱정이 들었다. 그나마 믿을만했던 검술 실전 수업도, 용족이 나오는 등 평가 난이도가 완전 극악이었지 않았던가? 만일 세 과목을 낙제해서 퇴학당하면 나는 갈 데가 없었다. “흠, 그러고 보니 퇴폐미남이 갈 데 없으면 자기네 영지로 오라고 하긴 했었지.” 불쑥 그 제안이 구미가 당기기 시작했지만. “안 돼. 거기 갔다간 퇴폐미 공격에 절여져서 파김치가 되고 말 거야.” 아무래도 너무 피곤할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 문제도 있었다.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퇴폐미남이 소원에 대해 잊어버린 것 같았지만 말이다. 내가 지난번에 내기에서 져서 녀석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했는데……. 이상하게 녀석이 그 이후로 별말이 없었다. 어쩌면 이대로 입 다물고 가만있으면 어물쩍 넘어갈 수 있을지도. 그러니 내가 굳이 그놈 영지에 쫄래쫄래 따라갔다가 퇴폐미남이 소원에 대한 기억을 되찾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싸바가 아니더라도 다른 절4들이 있잖아. 뭣보다 1번 대형견이 자기 개집에 날 흔쾌히 초대해 주겠지.” 나는 다니엘이 꼬리를 흔들며 자신의 개집에 날 반기는 모습을 상상했다. 참 듬직하고 귀여울 것 같았다. 개집이라니, 그것도 참 인간으로서 이제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신박한 거주 형태가 아닌가? “또 2번 병약미남도 있고. 기침을 하면서 골골거리는 우아한 꽃미남을 내가 병간호하면서 지내는 거지! 병간호를 해주겠다는데 설마 날 마다하겠어?” 나는 아름답고 연약한 병약미남이 침대에 아련하게 누워 있고, 내가 옆에서 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는 모습을 상상했다. 참 우아하고 청순할 것 같았다. “3번 금욕미남도 빼놓을 수 없군! 상단을 소유한 제일 부잣집 도련님이니까 집도 으리으리하겠지. 내게 온갖 보물과 드레스를 사주고 제발 자기 집에 있어 달라고 부탁할 거야!” 그러면서도 내게 그런 제안을 했다는 사실을 자책하며 아침마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금욕미남. 그런 카일에게 다가가 하트와 윙크를 날려주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참 성스럽고 고결할 것 같았다. 쓸데없는 몽상에 정신이 팔린 나는 고대어와 약초학 중간 평가 시험지는 그냥 아무렇게나 갈겨서 제출했다. “와! 시험 끝!! 다음 주는 축제다!” 난 돌아서자마자 뭔가 시험지에 적었다는 사실조차 깡그리 잊어버렸다. 곧 다가올 축제는 제국 전역에서 과거 용사의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였다. “무조건 퀴즈 대회에 참가해야지! 원작에서도 그랬으니까! 히힛!” 본격적으로 2번 병약미남이 여주를 좋아하게 되었던 계기는 다름 아닌 퀴즈 대회였다. 퀴즈 대회는 축제 기간에 아스테시아에서 가장 가까운 영지인 브레테에서 열리는 각종 대회들 중에 하나였다. 아무래도 ‘천하제일 검술 대회’에 밀려 인기는 전혀 없지만……. 나름대로 전국의 퀴즈 덕후들을 소소하게 불러 모으는 대회라고나 할까. “절친 병약미남을 내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만들어 타락시킨다는 것이 약간 죄책감이 들긴 하지만…….” 말로만 그렇고 사실은 전혀 죄책감 따위 들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성공해서 원작의 여주와 똑같은 대접을 받고 말겠어!” 나는 그렇게 굳게 다짐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원작의 여주한테는 항상 상냥하고 친절하기만 했던 병약미남. 그런데 웬일인지 나만 보면 혀를 끌끌 찬다든지, 또 무슨 짓을 저질렀냐고 매번 추궁하는 게 은근히 기분이 별로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2번 병약미남만 그런 게 아니었다. 1번 다니엘도 날 좀 무서워하는 것 같고……. 원작 여주를 엄청나게 챙겨줬던 3번도 아직 전혀 날 챙겨줄 기미가 없었다. “분명 내 겉모습은 원작 여주와 똑같은데 말이야. 왜 절4들이 날 걔랑은 완전 다르게 대하는 거지?” 정말이지 답이 미궁이었다. 원작 여주보다 못한 게 대체 뭐가 있다고? “성격도 내가 훨씬 더 좋은데…….” 56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선황 추모 기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 원작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2황자가 황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렸다. “5황자 전하가 결투에서 졌군요.” “하긴, 2황자 전하… 아니 황제 폐하께선 상당히 강하시니까.” 공자들이 서로 소곤거렸다. 포악한 성질만큼 온몸이 근육이고 무력이 좋은 2황자가 손쉽게 승리했던 듯했다. “어쨌거나 이제 황제도 결정됐으니까, 난 조용히 살 수 있겠지.” 황위 다툼이 벌어지고 있을 때야 날 죽이려고 했을지 몰라도…… 이미 황위를 본인이 차지한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다 끝나버린 게임인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생각은 나와 달랐던 모양이었다. “잠깐, 그런데 9황녀 저하가 아직 살아있지 않아?” 날씨 꾸리꾸리한 주말, 룰루랄라 온실로 향하던 도중,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리길래 우뚝 걸음을 멈췄다. “에이, 옛날에 도망가서 생사 불명이라던데 뭘.” 휙 돌아보니, 우르르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공자들 대여섯 명이 서로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도망을 갔다고? 탑에 처박혀 있다가 자결한 시체가 나왔다고 들었는데?” “그런 헛소문을 믿나? 9황녀 저하가 정말 자결했다면 황궁에서 공식으로 발표했을 거야. 굳이 숨길 이유도 없으니.” “내가 알기로도 9황녀 저하가 도망간 건 기정사실이에요.” “몇 달 전 황제궁 시녀들한테서 퍼진 얘기로는, 9황녀가 신분 증서까지 받아서 멀쩡히 황궁을 걸어 나갔다더라고.” 아냐, 걸어 나간 게 아니고 말 타고 나갔어. “아직까지 살아있을 리는 없을걸요. 분명 암살자의 비수에 맞아 길거리 어딘가에서 비명횡사했겠죠.” “하긴. 이미 죽은 게 아니라면 2황… 황제 폐하께서 곤란하지. 어딘가에 황위 후보가 하나 더 남아있는 거니까.” “곤란하긴 무슨. 폐하께선 황위에 오르시자마자 쉴드 포션을 드셨을 텐데. 이젠 9황녀가 돌아와서 폐하를 시해하려고 해도 힘들 거라고.”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가 바로 9황녀다! 지금 그 화제의 중심이 바로 나다! 새 황제를 시해할 생각은 없지만!’ 하고 소리를 지르며 관심을 끌어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지금은 근로 장학을 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공자들 무리와 자연스레 거리가 멀어진 나는 곧 인적이 드문 정원으로 길을 꺾어 들어갔다. 머리 위에서 길게 새가 우는 소리가 나길래,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봤다. 칙칙한 하늘 위에 아주 멋들어지게 생긴 매 한 마리가 유영하며 울고 있었다. 피이익―! 순간 근처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났다. 그게 신호였는지, 매는 휘파람 소리가 난 곳으로 훅 떨어지다시피 하강했다. “아, 저게 말로만 듣던 전서응?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전서구밖에 못 봤는데.” 아스테시아로는 소포나 편지가 많이 오가는데, 대부분 우편 마차가 이용됐다. 직접 전서구를 사용하는 가문은 몇몇 있었지만, 매를 이용한 전서응은 아주 드물었다. “음?” 잠시 후 전서응의 주인을 발견한 내 눈이 대뜸 트였다. 매는 아주 얌전한 모습으로 절4 멤버의 쭉 뻗어진 오른쪽 팔 위에 앉아있었다. 그가 왼손으로 매의 다리에 묶인 편지를 풀었다. “카ㅇ……” 3번 금욕미남의 이름을 부르며 당장 뛰쳐나가려다가, 편지를 읽는 그의 표정을 본 순간 나는 멈췄다. 나무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서 그는 아직 날 보지 못하는 상태였다. “…….” 카일이 휙 고개를 든 순간, 나도 모르게 후다닥, 본능적으로 앞에 있던 나무에 딱 붙어서 몸을 숨겼다. “이상하다. 내가 왜 숨었지?” 그것도 절4 앞에서……? 그냥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본능적인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나무 옆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고 금욕미남을 훔쳐보았다. 매는 한 번 푸드득 살짝 날아올랐다가 3번의 어깨 위에 도로 내려앉았다. 아무도 없는 정원 한쪽에 선 채로, 카일은 편지 내용을 거의 외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뚫어져라 읽었다. “…….”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 내 튼튼한 뱃속까지 울렁거리게 할 정도로 싸늘하고 차가운 낯빛이었다. “짜증 나게.” 편지를 구긴 카일은 불을 붙여, 편지를 그 자리에서 태워버렸다. 이런 일이 익숙하기라도 한 듯 몹시 자연스러웠다. 불타오르는 편지를 바닥에 떨어트린 그는, 타고 남은 재를 풀숲 아래에다 흙으로 덮어버렸다. “불사신이야 뭐야.” 발로 대충 재를 파묻은 금욕미남이 인상을 찌푸리며 뇌까렸다. 나는 지금이라도 나가서 아는 척을 할까 했지만 왠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카일의 본판이야 뭐 당연히 금욕적이었지만, 찌푸린 얼굴은 훨씬 더 성스럽고 금욕적으로 보여서 범접하기 어려웠다. “…….” 금욕미남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로 서 있더니, 품속에서 곧바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 위에 대충 짧게 휘갈긴 그는 그 종이를 매의 다리에 묶어서 도로 날려 보냈다. 그 후에 카일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발길을 돌렸다. “후……. 오늘은 카일님이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카일이 시야에서 아예 사라진 뒤에야, 나는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그 성격 좋은 금욕미남을 저런 표정으로 만들어버리다니. “퇴폐미남 말로는 집에서 버려진 자식이라더니, 설마 밀리안 백작이 분을 못 이기고 편지에 쌍욕이라도 써서 보냈나?” 쯧쯧. 자식이면 좀 감싸주지 않고. 아들내미가 저렇게 잘생겼는데 말이야. 나는 알지도 못하는 3번의 부친이자 거부 상단주를 떠올리며, 무조건 잘못은 카일이 아닌 그 백작에게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이럴 때일수록 내가 우리 카일님에게 다가가서 위로해줬어야 하는 건데. 왜 멍하니 손 놓고 그냥 가만있었담?” 평소와 확연히 다른 금욕미남의 분위기에 왠지 다가갈 수가 없었던 게 뒤늦게 아쉬워졌다. “아직 늦지 않았어. 빨리 가서 위로를 해보자.” 나는 카일을 잡으려고 뒤쫓아갔다. “카일님! 카일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며 총알처럼 달려가 봤지만. 원래 집합 장소였던 온실 앞에서야 겨우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어스아이들도 옹기종기 온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단둘이 카일을 위로해줄 분위기는 나가리가 되고 말았다. “카일님! 제 위로를 받으세요!” 나는 카일을 보자마자 굴하지 않고 한쪽 눈을 찡긋하며 윙크를 날렸다. “…….” 내게 인사를 건네려던 카일이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이건 또 뭔가 하는 표정으로 말없이 빤히 날 쳐다봤다. 미온적인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나는 이번에는 손으로 하트까지 만들어서 날렸다. “힘내시라구요! 화이팅! 세상은 아직 밝고 카일님은 무려 절4니깐!” “……어, 네.” 카일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어스아이들이 오히려 더 난리였다. “꺅! 윙크랑 하트다!” “어떡하면 좋아! 내 눈이 썩는 것 같아!” “힘내라고 화이팅이라니! 너무 쓰잘데기 없는 위로잖아!” 어스아이의 반응이 왠지 무척 거슬렸지만 나는 여전히 굴하지 않았다. “늬들도 당해봐랏! 윙크랑 하트닷!” 나는 어스아이들에게도 윙크와 하트를 뿅뿅 날려주었다. 꺄르르르르, 어스아이들이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모를 격한 반응을 보이면서 마구 웃어댔다. 주변의 소란에 잠시 당황한 얼굴을 한 3번 금욕미남이었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표정을 가라앉혔다. 다시금 거룩하고 숭고한 얼굴로 바뀐 절세미남이 날 바라보자 또 태양이 폭발이라도 한 것처럼 세상이 환해졌다. “아아! 역시 아버지가 보낸 쌍욕 편지 정도로는 그의 미모에 흠집을 낼 수 없구나!” 절4의 외모 회복력은 정말이지 엄청났다. 나는 거룩함마저 느꼈다. “자자! 그럼 이 노예들… 아니 공자님들아! 이제 일합시다!” 한바탕 꺄르르 웃고 난 어스아이들이 어느샌가 돌변해서 두 눈을 치켜뜨면서 외쳤다. “후……. 또다시 시작이군.” 역시 어스아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니까. 우릴 둘러싸고 우르르 어딘가로 데려가는 어스아이들 사이에서 난 다시 한번 공포에 질렸다. “온종일 뼈 빠지게 뜯읍시다!” 허공에 웬 보송한 앞발이 나타나더니 어느샌가 나와 카일의 품에는 나란히 커다란 채소용 바구니가 안겨졌다. “다 공자님들 요리로 올라갈 거니까, 잘 처먹고 싶으면 열심히 뜯으라구요! 가시가 난 잡초가 있으니 손가락 찔리지 않게 조심하구요!” “으으으…….”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 무성한 채소밭 앞에서 나는 바구니를 껴안고 절로 그만 앓는 소리를 냈다. “정글이네 정글. 이걸 언제 다 뜯어?”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따라 기분이 저조한 금욕미남이 처음으로 내 말에 제대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날 보는 게 아니라 그저 넓디넓은 밭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작 안 하고 뭘 그렇게 꾸물거려요! 빨리 밭으로 들어갑시다! 빨리빨리!” 솜방망이 같은 앞발 여러 개가 우리들의 등을 툭툭 치면서, 의욕을 북돋아 주었다. “알았다니까 그러네.” 나와 카일은 어스아이들과 함께 밭에 들어가 노동을 시작했다. 그나마 이 근로 장학에서 장점이랄 것이 있다면 숭고한 3번과 일한다는 것뿐. 특히 오늘은 일하는 구역이 같으니까 나는 금세 기운을 차렸다. 후후. 이렇게 차린 기운을 절4에게 나눠줘야겠지. “상심하지 마세요, 카일님.” 나는 일부러 카일 곁에 다가가서 아무렇게나 채소를 뜯으며 말했다. “……네? 왜 갑자기.” 금욕미남이 채소를 뜯다가 힐끗 날 쳐다보았다. “가족끼리는 원래 다 쌍욕 하고 그러는 거거든요. 난 가족이 없으니까 모르겠지만요.” 나는 좀 전에 금욕미남의 기분을 언짢게 만든, 그의 부친이 보냈다고 내 멋대로 추정한 편지를 염두에 둔 채 말했다. 그러나 그가 편지를 확인하는 광경을 내가 봤다는 걸 정작 카일은 알지 못했다. 즉 가족은 원래 다 쌍욕 하는 거라는 나의 말이, 카일에게는 전혀 개연성이 없어 보일 것이라는 사실을 난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알렉시스 공자.” 금욕미남은 덤덤한 말투로 대답하면서 수확을 계속했다. “괜찮아요. 살다 보니 워낙 제 말은 이해 못 하는 이들이 많아서 저도 개의치 않는답니다.” 난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어쨌든 대화를 하면서도 우리는 어스아이들한테 불호령을 듣지 않기 위해서 양손만큼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57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다음 주 주말은 축제 기간이라, 근로 장학도 쉬는 것은 알고 있겠지요? 그때는 일하러 올 필요 없습니다.” 문득 금욕미남이 근로장학생 대표로서 몹시 중요한 사실을 공지해 주었다. “옷, 그래요? 휴! 이제야 알다니 큰일 날 뻔했네……. 축제니까 어차피 안 왔겠지만. 알겠습니다! 차렷! 경례!” 나는 채소 바구니 때문에 손은 경례를 못 했지만, 입으로만 그리 외치며 열심히 채소를 땄다. “으음……. 알렉시스 공자도 축제 기간에 브레테 시로 나갈 생각이겠죠? 올해는 4년마다 열리는 천하제일 검술 대회도 있으니까요. 그걸 구경하러 갈 건가요?” 금욕미남이 계속 대화를 이으려는 듯 먼저 물었다. “에이, 검술 대회라뇨. 저는 칼질하는 것 따윈 관심 없답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이번 축제를 화려하게 장식할 천하제일 검술 대회는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이벤트이긴 했다. 대대로 황궁 기사단장도 많이 배출되었고, 우승자들은 엄청난 명예를 얻곤 했다. 물론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전 계획이 다 있죠! 바로 퀴즈 대회에 나갈 거거든요!” 내가 외쳤다. 물론, 퀴즈 대회에 내가 나간다는 사실을…… 정작 퀴즈 클럽 회장인 2번은 현재 꿈에도 상상치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어……. 퀴…즈 대회 말입니까? 검술 대회가 아니고요?” 내 말이 몹시 의외였던 듯 금욕미남이 기계적으로 채소를 수확하던 동작까지 잠시 멈추고 날 빤히 쳐다보았다. “으음? 왜 놀라시죠? 제가 이래 봬도 퀴즈 천재랍니다. 후후하하햣.” 내가 웃어젖혔다. 카일은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상냥하게 대꾸했다. “……그러시군요.” “넵.” 나는 흥분해서 말을 계속했다. “사실은 현재 퀴즈 클럽의 인원이 말이죠, 피터 레이를 포함해서 딱 3명이거든요. 하지만 퀴즈 대회에는 반드시 4명이 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요, 케케케켈.” 내가 음흉하게 웃음 지었다. “즉, 피터는 누군가에게 네 번째 빈자리를 맡겨야 한다는 거예요. 물론 그게 바로 제가 될 예정이죠.” 원작에서는 별문제가 아니었다. 원래는 여주도 퀴즈 클럽 회원이었으니까. 다른 신입 둘도 원작에서도 전단지를 돌리면 들어오기로 되어 있던 공자들인지라, 퀴즈 클럽의 인원도 그녀를 포함해 정확히 네 명이었다. 그래서 병약미남이 따로 보충 인원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인원이 한 명 모자라므로, 당연히 내가 들어가면 되었다. 원작에서 그랬듯 원래부터 내가 들어갈 자리였기도 하다. “그래서, 미리미리 제가 다 알아서 퀴즈 대회 신청서를 작성하여 주최 측에 보내놨답니다. 물론, 제 이름을 출전자 명단에 큼지막이 적어놓았고요.” “……피터 공자 몰래 말인가요? 그래도 되는 겁니까?” 퀴즈 클럽 회장이 이 사실을 알고도 과연 가만있을까? 하는 표정으로 금욕미남이 날 힐끗 보고 있었다. “물론이죠. 저는 피터의 절친이니까 상관없어요!” 나는 하늘에 한 점 부끄럼도 없이 2번과 절친이라고 확신했다. “피터도 나중에 이미 신청서가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 깜짝 놀랄 거예요. 참 즐거운 서프라이즈라고나 할까요? 절친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죠. 후훗훗훗!” “…….” 금욕미남이 잠시 아무 말도 없이 그런 날 보고 있다가 이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까 백작의 쌍욕 편지로 추정되는 그 편지를 보고 구겨졌던 마음을 이젠 다리미로 잘 다린 것만 같았다. “그렇군요. 퀴즈 대회에서 꼭 우승까지 하길 바랍니다, 알렉시스 공자. 저도 응원해 드리겠습니다.” “엇? 설마. 그 말은 혹시 퀴즈 대회를 보러 오신단 말씀인가요? 카일님?” 나는 두 손을 간절히 모으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3번을 바라보았다. “음……. 뭐, 시간이 되면 가도록 하지요.” 카일이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했지만 난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꺄아아아악!!” 내가 너무 좋아서 단번에 괴성을 지르자 금욕미남이 흠칫했다. “좋아요! 꼭 오셔야 해요! 반드시! 제가 우승할 테니까! 카일님께 우승컵을 바치겠어요! 차렷! 경례!” 미친 듯이 흥분한 나는 채소 바구니까지 잠깐 바닥에 내려놓고 오랜만에 착착 두 발을 나란히 붙인 다음에 각 잡고 경례를 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퀴즈 대회는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이벤트로 등극했다. 카일님께서 나의 명석함에 감탄하여 물개 박수를 치며 나와 사랑에 빠지는 날이 될 테니까……!! 그런 상상을 홀로 머릿속에 그리며 으흐흐흐, 하고 미친 사람처럼 음침하게 웃고 있는데. “거기! 이 노ㅇ… 공자님들아! 설마 농땡이 부리는 거예용?” 주변의 어스아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는 하악거리며 우리 쪽을 홱 노려봤다. 난 심장이 뜨끔했다. “어휴, 얘들아. 눈 좀 그렇게 뜨지 마. 하마터면 전설에 나오는 대왕 여우로 변신하는 줄 알았잖아.” 먼 고대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스테시아를 수호했다던 그 대왕 여우 말이다. “저렇게 조그만데도 무서워 죽겠는데……. 초대형으로 변신한다면 그 공포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하겠지……?” 겁을 먹은 나는 소심하게 중얼거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옆에서 금욕미남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수확을 계속했다. 그러자 어스아이들의 날카로운 눈길은 내게만 집요하게 꽂혔다. “농땡이 아니야. 지금 내 손 안 보여? 일하고 있는 거?” 난 이마의 식은땀을 닦고 얼른 바구니를 다시 들고 부지런히 채소를 똑, 똑, 뜯었다. 그런데 보지도 않고 손을 놀렸더니 그만, 무언가를 잘못 건드렸다. “앗.” 손가락 끝이 따가워서 얼른 손을 들어 확인했다. 채소밭에 섞인, 이름 모를 이세계 잡초에 붙어 있던 날카로운 가시에 손가락 끝을 찔린 것이다. 피 한 방울이 나길래, 나는 얼른 손가락을 입으로 쪽 빨았다. 잠시 후, 일을 계속했다. *** 용족 때문에 잠정 중단됐던 검술 중간 평가가 축제 전 마지막으로 남아있었다. 용족은 아직도 동면에 들지 않고 멀쩡히 돌아다니는 모양으로, 여전히 숲은 출입 금지였다. 그래서 연무장에서 간단히 1반과 2반이 대련하기로 했다. 연무장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대형견을 발견하고는,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 멍뭉아!” 다니엘이 ‘멍뭉이’의 ‘멍’자가 들리자마자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날 돌아보며 움찔했다. 한편 다니엘의 친구들은 다들 입을 다물고 날 쳐다봤다. “어, 그래. 왔어?” 그나마 지난번 수업에서 내 덕에 용족한테서 대피했기 때문에, 다니엘도 이번에는 기억상실증 흉내는 집어던지고 내게 그나마 친절히 아는 척을 했다. 순간 내 머릿속에 루프 중에 다니엘과 나눴던 대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우리 불쌍한 멍뭉이, 넌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구나! 괜찮아, 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특히, 바로 나도 개자식이라는 사실을!” 내가 미소를 지으면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입 다물고 날 쳐다보고 있는 바람에 나의 목소리만이 유독 도드라졌다. 특히 이곳은 광장이라서 사방팔방으로 메아리가 치는 것 같았다. ‘나도 개자식이라는 사실을!’ ‘나도 개자식이라는 사실을!’ ‘나도 개……자……식……!’ 그러자 다니엘은 순간 멈칫하며 영문 모를 얼굴을 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 그가 실눈을 뜨고 날 쳐다봤다. 갑자기 내가 개라고 주장하며 종족을 바꿔버리자,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개의치 않고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도 ‘우리 강아지’라고 불러줘!” 내 본론은 그거였다. 절4의 입에서 다정다감한 ‘우리 강아지’라는 말을 나도 듣고 싶었던 것이다. 미간을 찌푸린 대형견이 갑자기 표정을 폈다. 그러더니 날 향해 외려 활짝 미소까지 짓는 것이 아닌가. “아아! 이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대형견의 미소란 말인가!” 감탄한 내가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며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렇구나. 우리 개자식으로 불러 달라고? 알았어. 앞으로 그렇게 불러줄게.” “응?” 이상하네. 다정다감한 ‘우리 강아지’하고 좀 느낌이 많이 다른데? 나는 얼핏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우리 강아지’나 ‘우리 개자식’이나 뜻은 동일하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혼자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사실 나도 너한테 아주 심각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다니엘이 강아지다운 순둥순둥한 낯으로 다시 입을 떼었다. “어? 정말? 뭔데?” 우리 대형견이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뭘까? 뭘까? 나는 고개를 쑥 쳐올리고 두 눈을 반짝거리며 다니엘을 바라봤다. “난 개가 아니야.” 개가 말했다. “…….” 나는 충격을 받아 멍하니 개를 쳐다보았다. 1번 다니엘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개소리를 지껄였다. “난 분명 개가 아닌데 왜 자꾸 나한테 개새…… 아니, 강아지라고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더라. 그러니 앞으로 나한테 개가 들어가는 용어는 절, 대, 사용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개가 아닌데 자꾸 개라고 부르는 건 무례잖아?” 다니엘은 그렇게 말을 뱉고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날카로운 눈으로 살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봐도 개새낀데…….” 내가 중얼거렸다. 다니엘의 표정에 살짝 금이 갔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녀석이 웃었다. “개 아니라니까.” 다니엘이 이를 악물었다. “아, 니, 라, 고.” “…….” “…….” 개가 아니라니……. 나는 충격을 받아 온몸이 휘청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붙잡아 주는 이 없었다. 이상하다. 원작에서는 분명 대형견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런데 주변의 공자들이 다니엘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잘했다고 난데없이 격려를 하는 것이 아닌가. 격려까지 필요한 일은 아닐 텐데……. 58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개가 아니면 그럼 뭐야? 생긴 건 꼭 개새끼처럼 생겨 가지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내가 물었다. “…….” 다니엘을 비롯한 주변 공자들이 전부 날 바라보았다. 짧은 침묵이 흐른 후 공자들이 어쩐지 하나둘 넌지시 의견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토끼?” “개구리?” “하마?” “원숭이?” “뱀?” “호랑이?” 누군가 한 번쯤은 동물이 아닌 ‘사람’이라는 의견을 제시할 만도 한데 아무도 미처 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랑이까지 마구잡이로 던져졌을 때 다니엘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아! 호랑이. 나 호랑이 할래.” 앞서 나온 토끼, 개구리, 하마, 원숭이, 뱀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개중에 나은 것이 호랑이였던 것이다. “…….” 나는 빤히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니엘뿐만 아니라 다른 공자들까지 전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왠지 초조한 얼굴로 내 반응을 기다렸다. “아무리 봐도 호랑이 관상은 아니지만, 본인이 그렇다면야 할 수 없지.” 결국 내가 인정했다. 휴, 다니엘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주변의 공자들도 낯빛이 환해져서는 다니엘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호랑이였는데 개 취급을 받느라고 그동안 힘들었겠구나.” 난 새삼스레 다니엘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침내 자신의 진짜 정체를 자각한 하나뿐인 자식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나는 혼자 감격했다. “우리 커다란 대형 냐옹이!” 그런데, 내 입에서 튀어나온 ‘대형 냐옹이’란 단어에 이상하게도 다니엘이 흠칫했다. 다른 공자들도 동작을 멈췄다. 나는 눈으로 윙크를 날리면서 손가락으로는 하트도 만들어서 날렸다. “우리 냐옹이, 앞으로 내가 궁디 팡팡 많이 해줄게……!” 그러자 연무장 사방팔방에 또다시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궁디 팡팡 많이 해줄게!’ ‘궁디 팡팡 많이 해줄게!’ ‘궁……디…… 팡……팡……!!’ 대형 고양이가 그대로 석상이 되었다. “…….” 주변의 다른 학생들조차 모두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양이에겐 역시 궁디 팡팡이지!” 나는 활짝 웃었다.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라니까!” 다니엘이 벌컥 화를 내면서 정정했다. “그게 그거 아닌가? 호랑이는 고양잇과 동물이잖아.” 내가 우겼다. “됐어! 난 그딴 거 정말 싫어! 궁…… 아무튼 그거!” “아 진짜? 궁디 팡팡이 싫다고? 고양이들은 다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나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싫어! 싫다고!” 대형 냐옹이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맞아. 싫어하는 고양이들 있어요.” “우리 집 고양이도 싫어해요.” “하려고 하면 도망가더라고.” 한결같이 다들 짜기라도 했는지, 주변의 공자들이 전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대형냥의 말을 긍정하는 거였다. 무척이나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다니엘을 둘러싸고 도와주고 있었다. “아…… 그래? 고양이를 길러본 적이 없어서 몰랐네.”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라니까?” 다니엘이 절규했다. 아무튼, 난 궁디 팡팡할 기회를 놓쳐버린 아쉬움에 어깨가 축 늘어졌다. 잠시 난 깊이 생각에 잠겼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대형냥과 주변인들이 왠지 서로 묘한 시선을 교환하며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대체로 내가 무언가 깊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마음을 몹시 어지럽히는 결과가 도출되기 때문일 테지. “음……. 그래도 츄르는 좋아하겠지?” 한참이나 고민하던 내가 조심스럽게 주둥아리를 열었다. “츄, 츄르? 그게 뭔데?” 츄르가 뭔지 모르는 대형냥이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대형냥뿐만이 아니고 주변의 공자들까지 전부 불안해하는 얼굴이었다. “츄르 몰라?” 하긴, 이세계니까 모를 수도 있겠구나. “쯧쯧. 이런 불쌍한 고양이 같으니라고.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모양이네? 츄르는 고양이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야!” 내 말을 듣자마자 주변의 공자들이 전부 제 귀를 의심하며 술렁거렸다. “간식?” “먹을 거라고?” 대형냥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뭇해진 나는 마치 퀴즈 대회에서 우승이라도 한 사람처럼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당당하게 외쳤다. “이제는 나도 개 주인이 아니라 집사니까! 우리 냐옹이한테 틈만 나면 츄르를 조공하겠다! 핰케케켘케!” “……!” 내 선언을 예상치 못한 대형냥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진짜일까? 간식을 준다니?” “그냥 주는 것도 아니고, 조공이라는 단어를 들은 거 같은데.” “분명 자기가 집사라고 했어요.” 나는 주변이 너무 심하게 술렁거리길래 불안해졌다. “왜? 츄르도 싫어해?” 이번에도 안되나 싶어 조마조마하면서 눈치를 보며 물어봤다. 연무장 위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 아냐. 츄르 좋지.” 대형냥이 얼른 대답했다. “그렇지. 츄르 싫어하는 고양이는 없어요.” “츄르가 최고죠.” “츄르릅 먹는다고 츄르인갑네.” “집사라면 역시 조공을 해야 진정한 집사지.” “이것은 한 명의 집사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냥이에게는 위대한 도약이야.” 대형냥을 둘러싼 주변인들이 또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한결같이 맞장구를 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더니 다들 싱글벙글거리면서 대형냥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잘됐다고 또 격려했다. “음, 문제는 츄르는 이쪽 세계에선 구할 수가 없다는 건데…….” 난 고민에 잠겼지만 금방 곤경에서 벗어나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우는 거지. 아무거나 먹이자. 좋아. 첫 조공은 떡볶이다.” 내가 만드는 환상적인 떡볶이의 맛을 전혀 알지 못하는 대형냥은 마침내 진심으로 마음을 놨는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가 평범하고 일반적인 보통 음식을 만들어줄 걸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보통 음식’이 아닌데. 평범한 음식이 아니고 바로 내가 만드는 환상적인 떡볶이란 말씀. 어쨌든 먹어보면 알게 되겠지. 긴말이 필요 없었다. “어쨌든 개는 아니니까 다행이에요, 다니엘 공자.” 그사이 여기저기서 다니엘을 향한 축하의 말이 쏟아졌다. 호랑이면서도 졸지에 고양이 취급을 받아버리긴 했어도, 그래도 개보다는 나았다. 수업 종이 쳤고, 난 얼른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우리 반 학생들이 있는 곳으로 합류했다. “설마 식도락 클럽에서 그 악명이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는 떡볶이란 요리를 다니엘 공자한테 만들어줄 생각인가?”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퇴폐미남이 팔짱을 끼고 나른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퇴폐미가 철철 흐르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건네는데 정말이지 감당하기 힘든 퇴폐미 공격이었다. “뭬야? 내 떡볶이가 우리 식도락 클럽에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또 유명세를 타고 있었나 보지?” 나는 새로 알게 된 사실에 의기양양한 태도로 태권도 방어 자세를 취했다. “어쨌거나 내 떡볶이를 먹어보지 않은 자는 논할 자격이 없지. 퇴폐미남, 너는 그 입을 다물라.” 나는 허공에서 팔로 찌르기를 두 번 하면서 퇴폐미 공격을 성공적으로 쳐냈다. “나도 만들어줘, 그럼.” 퇴폐미남이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먹어보고 한번 논해보게.” 호기심과 미소가 동시에 어린 그 표정만 보면, 진심으로 내가 만든 떡볶이를 먹어보고 싶어 하는 얼굴이긴 했지만. “흥. 내 떡볶이가 두렵지 않은가 보지?” 다시 허공에다 찌르기를 휙휙 날렸다. 퇴폐미 공격이 또 튕겨 나갔다. “아니 두렵긴 한데.” 퇴폐미남은 태연한 태도로 인정했다. “그래도 호기심이 더 크달까.”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이는 법인데. 설마. 혹시 너도 고양이야? 고양이 두 마리 조공은 좀 부담스러운데…….” 하루아침에 두 마리의 집사라니 내 어깨에 얹어진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아니. 조공은 받고 싶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고양이는 아니다.” 퇴폐미남이 답했다. “고양이가 아니면 뭔데, 넌?” “절세미인.” “……?” “…….” 뭔 엉뚱한 농담을 하는가 싶어 멀뚱히 녀석을 쳐다보고 있던 나는 퍼뜩 무언가 싸한 느낌을 받았다. ……절세미인. 무척 공교로운 느낌이 들었다. ‘절세미인’은 바로 언젠가 그에게 말한 나의 이상형이었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난 퇴폐미남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날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4번 퇴폐미남이 그 대화를 기억할 리가 없었다. 숲에서 용족 때문에 루프를 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즉, 지금쯤 퇴폐미남의 머릿속에서는 지워져 있어야 정상인 기억인 것이다. 뭐, 물어보면 알겠지. “너, 기억나냐?” 내가 돌직구를 날렸다. “어. 난다.” 퇴폐미남이 웃으며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 머릿속은 요동을 치며 돌아갔다. 그사이에 1반과 2반의 대련이 시작되었지만, 우리 둘 다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때 숲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의 기억은 전부 다 사라졌는데! 왜 너만 기억한다는 거야? 그리고 정작 숲에 있을 적에는 기억 못 했으면서 왜 지금은 기억이 난다는 거지?” 내가 흥분해서 다다다다 물었다. “나도 3대 포션 중 하나를 먹었으니까.” 퇴폐미남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3대 포션? 이게 그거랑 연관 있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3대 포션이란 고대에 존재한 3마리의 용과 각기 관련이 있거든. 각기 금룡, 흑룡, 적룡이지.” 퇴폐미남이 천천히 설명했다. “우리 가문의 힐링 포션은 금룡과 관련이 있었고……. 황실에서 갖고 있는 쉴드 포션은 흑룡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포션은 아스테시아 숲의 주인이었던 적룡과 연관이 있었지.” “음.” “3대 포션 모두 용의 힘을 공통적으로 나누고 있으니 통하는 점이 많아. 내가 먹은 첫 번째 포션이 비록 노스브리치 열매는 아니지만, 적룡의 힘과 비등한 금룡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억을 잃지 않은 거야.” “하지만 숲속에서 루프할 때는 넌 아무것도 기억 못 했잖아!” 59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시간을 되돌아갈 때마다 퇴폐미남은 이전 루프에 대해서는 기억을 못 했다. 그래서 얼마나 힘들었던가. 매번 붙잡고 구구절절 설명하느라고! “그건…… 결계 안이 죽은 적룡의 기운이 너무 강한 곳이어서 그랬을 거다. 그래서인지 결계 밖으로 나왔을 때에야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기억이 났어.” 퇴폐미남이 대답했다. “잠깐, 그러면……” 나는 열심히 머릿속을 팽팽 굴렸다. “앙증이도 3대 포션 중 하나를 먹어서 루프 후에도 기억을 한다는 건가?” 그래야 앞뒤가 맞았다. 앙증이는 나와 퇴폐미남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루프를 기억하고 있는 존재였다. “참으로 기특하군. 너도 아주 돌머리는 아니었어.” 퇴폐미남은 앙증이가 누군지도 바로 알아들었을 뿐 아니라, 아주 흐뭇한 듯한 얼굴로 내게 찬사를 날렸다. “앙증이는 울타리 보수 담당 어스아이니까……. 음. 그래서 그랬구나.” 한편 나는 혼자 생각에 빠져 고개를 주억거렸다. 숲속 울타리 보수 담당이라면, 어스아이들 중에서도 아스테시아 숲에 대해 가장 속속들이 알고 있을 존재. 지금까지 노스브리치 나무 꼭대기에 올라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내가 올라갔으니 다른 누군가도 충분히 올라갔을 가능성이 있었다. 특히, 아스테시아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어스아이라는 날렵한 종족이라면…… 그 커다랗고 유명한 나무에 분명 올라가 보려고 시도를 했으리라. 울타리 보수 담당처럼 할 일이 딱히 없어 시간이 널널한 어스아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여우족은 인간과 달라서 동네방네 소문을 내지 않을 뿐……. *** 한편, 검술 수업 1반과 2반의 대련 평가는 계속 진행 중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고양이하고는 전투를 치러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1번 대형냥과 대련하고 싶었지만. 이번 중간 평가에서는 대련 상대가 제비뽑기로 정해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복불복. 대형냥은 안타깝게도 내가 아니라 어깨춤 공자와 맞붙고 말았다. 물론 다니엘은 어깨춤 공자를 상대로 수월하게 승리했다. 원래도 그의 검술 실력은 훌륭한 편이었지만, 그간 더 열심히 수련했는지 어째 더 실력이 늘어난 것 같았다. 반면, 대련에서 진 어깨춤 공자는 시무룩하게 어깨가 축 늘어졌다. “힘내요! 어깨춤 공자. 저 대형 고양이는 원래 센 녀석이니 주눅들 거 없어요!” 자리로 돌아오는 어깨춤 공자에게 나는 친절하게 위로의 말을 던졌다. 그러나 어깨춤 공자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내가 급작스레 자길 위로하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어, 어……. 네.” 어깨춤 공자는 나와 겪었던 루프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으므로, 갑자기 날 친하게 느낄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나와 퇴폐미남도 제비뽑기에 뽑혀 2반 학생들과 대련을 마쳤다. 퇴폐미남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또 내게 귀찮게 굴었다. “알렉시스, 축제 때 너도 브레테에 갈 거지? 나하고 만나서 같이 가는 게 어때.” “내가 왜 너랑 축제를 같이 가냐? 나도 바쁜 사람이라고.” 누가 뭐래도 올해 퀴즈 대회의 에이스는 바로 나란 말씀. 퀴즈를 팍팍 맞춰서 피터도 놀라게 해주고, 우승도 하게 해주고, 관객석에 있을 카일님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줄 예정이라는 말씀. “왜. 피터 레이랑 같이 갈 생각인가?” 뜬금없이 퇴폐미남이 2번을 걸고넘어졌다. 그러나 피터에 대해서는 제라드도 딱히 별 감정은 없는 듯,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하긴 네가 퀴즈 대회에 나간다면 레이 공자도 목적지가 같겠군. 뭐…… 그 녀석이라면 괜찮다. 그럼 레이 공자도 같이 다니는 걸로 하지.” “잠깐만. 이상하네. 내가 퀴즈 대회 나가는 건 대체 어떻게 알았어?” 분명 퇴폐미남한테는 퀴즈 대회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한 적이 없는데? “맨날 식도락 클럽에 와서 광고했으면서 기억 안 나는가 보군. 네 손으로 직접 광고장까지 만들어서 돌렸잖아?” “…….” 이런! 그놈의 광고장이 퇴폐미남의 손아귀까지 들어가 버리다니! 일부러 퇴폐미남이 없을 때 돌렸는데 소용이 없었구나! 참으로 입맛이 썼다. “그럼 같이 가는 걸로 알겠다. 나도 어차피 퀴즈 대회에 갈 거니까 말이야.” 제라드가 말했다. “퇴폐미남 네가? 퀴즈 대회에?” 설마 얘도 나처럼 주최 측에 몰래 참가 신청서를 보내놨나? 제라드 같은 화려한 검술 천재에게, 두뇌형 덕후들이 모이는 퀴즈 대회라니? 정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물과 기름과도 같은 조합이 아닌가. 나는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로 4번을 쳐다보았지만. “네가 오라고 했잖아.” “뭐? 내가 언제?” 그러자 퇴폐미남이 품속에서 낯익은 카드 하나를 슥 꺼내더니, 내 눈앞에 대고 활짝 펴서 보여줬다. “여기 쓰여 있군. <이 세상의 주인공인 저, 식도락 클럽의 귀염둥이가 퀴즈 대회에 출전합니다. 우승은 떼놓은 당상이니까 구경 오세요. 꼭 오세요! 아시겠죠?> 라고.” “…….” 나는 그만 할 말이 없어져서 입을 꾹 다물었다. 식도락 클럽에 뿌렸던 광고장에 하필이면 꼭 구경 오라는 문구를 집어넣었을 줄이야. 옆에서 퇴폐미남이 카드에 적힌 내용을 굳이 다시 한번 더 읽어보며, 킥킥거리고 낮게 웃었다. 그러더니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카드를 도로 품속에 집어넣었다. “자칭 ‘식도락 클럽의 귀염둥이’께서 이렇게까지 초대를 하는데 당연히 가야지. 관객으로 구경하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체 네가 뭘 어떻게 하나 꼭 내 눈으로 봐야겠거든.” 퇴폐미남은 마치 무슨 웃기는 구경거리라도 기대하는 것 같았다. 난 진짜 심각하고 진지하게, 퀴즈 대회 우승하려고 가는 건데 말이다. “흥. 퇴폐미 네놈이 날 무시하나 본데, 어디 본때를 보여주마. 날 반드시 졸졸 따라다니며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라고.”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퇴폐미남에게 경고했다. “내가 퀴즈 대회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광경을 말이야. 그때 넌 관객석에서 열심히 손뼉이나 쳐! 박수 소리가 작으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우승에 대한 열의로 내 활활 타오르는 두 눈을 보면서, 퇴폐미남이 즐거운 표정으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알았다. 졸졸 따라다니면서 박수 많이 치지. 아, 그리고 내 소원 남은 거 잊지 않았겠지? 축제가 끝나면 빌지도 모르니까 마음의 준비 잘하고 있으라고.” “…….” 이 얄미운 자식이……. 퇴폐미남이 다시 한번 얄밉남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야! 너! 빨리 소원 빌지 못해? 빨리 빌어서 끝내버리라고! 네놈이 무슨 소원 빌지 고민하면서 내가 얼마나 전전긍긍하는지 알아? 대체 언제 말할 거야! 그놈의 소원!!” 나의 두 눈이 희번덕거렸지만, 이미 이런 눈깔에 익숙해져 버린 얄밉남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담담히 넘겼다. “그동안 맨날 내가 무슨 소원 빌지 궁금해하고 있었나 보군. 그간 내 생각 많이 했나 보지?” “당연하지! 밤에도 네놈 얼굴이 떠올라서 내가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내가 외쳤다. 그 순간,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지고 공자들의 고개가 일제히 우리를 향해 홱 돌아갔다. 연무장 위에서 서로 대련하던 두 공자들까지 전부 멈춰서서 날 빤히 쳐다봤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놈의 소원이 뭘지 하도 무서워서 불면증에 걸릴 지경이란 말이야!” 물론 거짓말이었다. 나는 본래 불면증 따위는 구경조차 못 해봤으며, 베개에 머리만 대면 곧바로 곯아떨어지는 인간이었다. 심지어 전생에서도 노숙자가 된 후 차갑고 싸늘한 길바닥에서조차 잠은 잘 잤다. 어쨌거나 내가 4번이 예약한 소원 때문에 불면증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우리의 사이를 의심하던 다른 공자들은 그렇구나 하며 대련에 다시 집중했다. “그렇군. 한밤중에도 내 생각을 했단 말이지.” 얄밉남은 묘하게도 내 말에 기분이 무척 좋아진 것처럼 눈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화려한 미남이 눈웃음을 치자 온 사방에 퇴폐미가 물씬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안하군. 아직 빌 소원이 없는데. 뭐라도 생각이 나야 말을 할 텐데. 언젠가는 말할 테니까 염려 마라.” “대체 그게 언젠데!” “나도 모르지.” 퇴폐미남이 어깨를 으쓱했다. “안됐지만 그때까지는 내 생각 많이 해라. 잠까지 설치지는 말고.” “하. 이런 된장!” 나는 가슴을 조여오는 답답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척 하고 태권도 방어 자세를 시전했다. 사방에 물씬거리는 퇴폐미를 찌르기와 발차기로 여기저기로 쳐냈다. “된장하니까 된장찌개 먹고 싶어!” 결론은 그거였다. *** 마침내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축제 첫날. 노는 날을 맞아서, 어스아이들도 축제 기간만큼은 일을 하지 않았다. 무려 아침부터 술에 취해 늘어져 있는 어스아이 하나를 붙잡고, 메주 쑤는 법과 된장찌개의 오묘한 맛에 대해 하소연을 한 뒤. 날 졸래졸래 따라다니기로 예정되어있는 퇴폐미남이 귀가 마르고 닳도록 정문 앞에서 보자고 당부했었기 때문에, 나는 정문으로 나갔다. “원래는 이렇게 축제 기간에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건, 4번이 아니라 1번 대형냥이었는데.” 원작에서는 다니엘이 여주를 따라다니면서 퀴즈 대회 예선전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구경하고 응원했다. 심지어 천하제일 검술 대회에 출전하려고 했던 본인의 원래 계획까지 포기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젠 1번 다니엘이 날 대하는 모습이 원작과 너무 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건 기대할 수 없었다. “쯧쯧. 뜬금없이 고양이로 변신하다니 안타까운지고. 그래도 고양이 가족에게는 참 다행인 일이지.” 기실 원작에선 다니엘의 어머니와 누이도 이 시점에 엑스트라로 등장했다. 그들은 검술 대회에 출전할 다니엘을 응원도 하고, 축제도 같이 보내기 위해서 브레테까지 마실을 왔던 것이다. 다니엘의 아버지인 황궁 기사단장은 휴가를 받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못 왔지만. 그런데 원작에서는 다니엘이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여주만 졸졸 따라다니느라고, 어머니와 누이하고는 시간도 제대로 보내지 않았다. “이번에는 우리 고양이가 원작과 달리 오붓하게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니 참 다행이군……. 다 내가 이 한 몸 희생해서 개 주인이 아닌 집사가 되어버린 대가야.” 좋은 일은 무조건 다 내 덕분이었다. 60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정문 근처에는 브레테 시로 떠나려는 학생들로 북새통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마구간에서 말을 끌고 와 타고 나가 버렸다. “알렉시스! 마차 기다린다. 가자.” 퇴폐미남이 날 보고는 온 사방에 화려한 퇴폐미를 뿌려대면서 다가왔다. 제라드의 뒤로 아주 휘황찬란한 로스트베인 가문의 마차가 떡하니 서 있었다. 물론, 가문에서 직접 딸려 보낸 것 같은 마부까지 같이 딸려 있었다. “네 절친도 벌써 마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제라드가 말했다. “……내 절친? 그게 누구더라?” 문득 어디선가 아련하게 떠오르는 병약한 미모……. 아……? 그렇다면? 나는 당장에 마차로 돌격했다. “좋아! 이제까지 한 번도 안 타봤으니까 오늘은 마차다!” 마차 안에 병약미남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타는 것뿐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일은 말을 탈 거라구! 싸바가 제공해주는 마차는 오늘만 탈 거야!” 나는 퇴폐미남한테 신세 지는 게 기분 나빠서 그렇게 덧붙였다. 금세 나는 4번의 휘황찬란한 고급 마차에 올랐다. “병약아!” 마차 안에 오르자마자 내가 낯익은 얼굴을 향해 외쳤다. 이젠 ‘병약미남아!’도 너무 길고 귀찮아서 그냥 ‘병약아!’라고만 입에서 나왔다. 역시나 피터가 병약미를 뽐내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병아리는 또 뭐야.” 제 별명인 ‘병약이’를 못 알아듣고 피터가 한심해하면서 중얼댔다. “엥? 병아리? 그것도 괜찮은데?” 나는 갑자기 터져 나온 새로운 별명에, 온몸에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병약이보다 더 마음에 드는걸?” 게다가 피터는 금발이었기 때문에 머리 색도 꼭 병아리 같았다. “좋아! 2번아! 넌 앞으로 병아리다!” “…….” 흥분한 나와는 달리, 2번은 자신의 새로운 별명 따위 관심도 없는지 날 무시했다. 내가 맞은편에 앉자마자 곧바로 4번 퇴폐미남이 마차에 타서 내 옆에 앉았다. 마차가 출발했다. “알렉시스 공자, 오늘은 어떤 음식을 드실 건가요?” 마차 안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대뜸 내게 물었다. 병아리도, 퇴폐미남도 아닌 제삼자의 목소리였다. “음? 뭐야? 어디서 목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혹시 귀신 목소리인가 싶어 놀라서 휘휘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 앞에 두고 뭐하냐? 정신 좀 차려라.” 병아리가 한심하다는 듯이 날 꾸짖었다. 그제야 눈을 비비고 자세히 살펴보니까, 마차를 가득 채운 2번과 4번의 절세 미모 때문에 눈에 전혀 띄지 않던 인물이 병아리의 옆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너구리 공자?” 나는 예상 밖의 인물을 마주하자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퇴폐미남의 마차에, 병아리는 그렇다 치고, 너구리까지 합승을……?” 이 뜬금없는 조합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잘 생각해 보면 현재 마차 안에 식도락 클럽 회원이 무려 셋. “이것은 혹시 맛집 탐방 마차……?” 내가 중얼거리자. “맛집 탐방? 좋죠. 어디로 갈까요? 혹시 생각해둔 데라도?” 너구리가 화색이 돌면서 제일 먼저 대꾸했고. “맛집 탐방 아니거든. 우린 지금 퀴즈 대회에 가는 거라고.” 병아리가 부인을 했으며. “그래도 맛집은 가야지.” 4번 퇴폐미남이 막판에 의외로 너구리 편을 들었다. “…….” “…….” “…….” 왠지 퇴폐미남의 마지막 발언이 임팩트가 커서 우리는 모두 입 다물고 그의 말을 음미했다. “그래, 맛집은 가야지.” 마침내 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그것도 그렇군. 퀴즈 대회도 식후경이긴 하지.” 심지어 병아리도 고심 끝에 그렇게 동의했다. “근데 너구리 공자는 어쩌다 이 마차에 타게 된 거예요?” 내가 물었다. 원래 4번 퇴폐미남은 나를 졸졸 따라다니기로 했으니 그렇다 치고. 2번 병아리는 같이 퀴즈 대회에 나가야 하니까 그렇다 치지만. 대체 너구리는 왜 이곳에? “아, 그건. 퀴즈 대회에 같이 출전해달라고 내가 부탁했거든.” 너구리가 아닌 병아리가 옆에서 대답을 먼저 해버렸다. “우리 클럽의 다른 두 회원들은 따로 오겠다고 했고. 그런데 마침 제라드 공자가 퀴즈 대회에 데려다준다길래, 마차에 동승하기로 한 거지.” “…….” 나는 완전히 얼이 빠진 채로 병아리를 바라보았다. “잠깐만. 누구? 누굴 어디에 출전시킨다고?” 이번에는 너구리가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요, 퀴즈 대회에 출전하려면 4명이 한 팀이어야 한대요. 그런데 퀴즈클럽의 인원이 세 명뿐이라서 한 명이 모자란다더군요. 그래서 자리만 채워달라고 하길래 제가.” “아니 내가 있는데! 왜 너구리한테!” 배신감에 휩싸인 내가 광기로 뒤집힌 눈으로 외쳤다. 옆에서 4번 퇴폐미남은 킬킬거리며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 삐약이야! 어떻게 나의 절친이 그럴 수가 있어?” 이 와중에 2번 피터의 별명이 ‘병아리’에서 ‘삐약이’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피터가 내 마음에 들 때는 병아리, 마음에 안 들 때는 삐약이였다.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옆방 회장에게 부탁을 한 거냐고? 당연히 내가 퀴즈 대회 땜빵이어야지!” “알렉시스.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금단 증상으로 벌벌 떨리는 네 손으로는 퀴즈 대회의 벨을 미친 듯이 눌러버릴 거라니까! 절대로 안 돼!” 삐약이가 완강히 맞섰다. “아무리 내 앞발이 좀 떨려도 그렇지! 그리고 금단 증상이 아니라 보약을 잘못 먹은 후유증이라고! 또 이미 내가 주최 측에……” 주최 측에 명단을 이미 내버렸다고 말하려다 난 입을 꽉 다물었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내 멋대로 신청서를 내버린 걸 삐약이가 알게 된다면 반응이 어떨지 참 흥미진진할 거 같아서였다. 미리 초를 칠 필요는 없었다. 이따가 깜짝 놀랄 테니까. “주최 측에 뭐!” 하지만 눈치 빠르기로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삐약이가 곧바로 눈을 치켜뜨면서 삐약삐약거렸다. “너 뭔 짓 했지? 이미 뭔가 저지른 거 같은데? 주최 측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무, 무슨 짓이라니. 흥. 사람을 뭘로 보고?” “설마 주최 측에 네 이름이 적힌 신청서 명단을 접수해버린 건 아니겠지?” 어우, 하여간 귀신 같은 자식. 뭘 숨길 수가 없다니까. 나는 어떻게 맞췄는지 궁금해하며 삐약이의 병약하고도 우아하며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 내 뻔뻔스러운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었는지 삐약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한 낯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다행이군. 그 정도면 충분히 내 예상 범주 안이야.” “음?” 나뿐만 아니라, 다른 두 사람도 이 반응은 예상치 못했는지 휙 피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명단 보낸 게 다야? 뭐 다른 짓 한 것은 없고?” 오히려 2번은 내가 행여나 딴짓을 하진 않았는지 걱정했다. “어, 없는데?” 설마 내가 더 교활한 짓을 했어야 했던 걸까? 주최 측에 대체 무슨 짓을 했어야만 삐약이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있었을까? 난 그것이 진심으로 궁금했다. “문제없어. 명단이 뭐 별건가. 주최 측에 다시 말하면 되지. 원래 멤버는 사정이 생겨서 못 왔고, 멤버가 바뀌었다고……. 이름표야 금방 다시 만들어 줄 거야.” “…….” 그러니까 주최 측에 명단까지 보내버린 이 열정적인 후보 대신에, 굳이 꼭 너구리를 퀴즈 대회에 내보내겠다는 거야? “하지만 나도 나가고 싶어! 제발! 퀴즈 대회 나가서 우승해야 한단 말이야! 그래야 이 퇴폐미남 자식이 날 우러러보며 손뼉을 칠 거 아냐!” 내가 병아리 앞에 대놓고 꿇어앉으면서 간절하게 애원했다. “알렉시스. 끼어들어 미안한데 나는 네가 우승을 해도 우러러보진 못할 것 같다. 그냥 손뼉만 쳐줄게.” 뜬금포로 퇴폐미남이 내 말을 굳이 정확하게 정정했다. 특히 날 우러러볼 일은 없다는 사실을 굳이 사방에 알렸다. “봐봐! 퇴폐미남 이 자식이 날 우러러보지 않는걸! 그런데도 내가 퀴즈 대회에 나가면 안 된다고? 지금 여기서 퀴즈 대회 우승을 가장 절실히 원하는 인간이 있다면 바로 나야!” 내가 다시 한번 2번에게 애타게 애원하며 열변을 토했다. 그런 날 잠시 불쌍하게 쳐다봤던 병아리가 냉정하게 고갤 돌렸다. “안 돼.” “쳇.” 나는 곧바로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도로 좌석에 앉았다. 마차가 덜컹거렸다. “흥미로운 일이군. 피터 공자, 그러니까 자네는 알렉시스의 행동 범주를 어느 정도 예측했단 말이지?” 4번 퇴폐미남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라는 듯한 말투로 병아리를 바라보았다. “대체 어느 정도까지 예측 가능한지 궁금하군그래.” “뭐,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네. 알렉시스가 대체 무슨 짓을 할지는 한 치 앞도 보이지가 않거든.” 병아리는 제라드에게 사뭇 편안한 말투로 대꾸했다. 원작에서도 이 두 절4 멤버는 사이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특히 병아리의 가문이 큰 정보 길드를 운영하는 만큼, 로스트베인 공작가와는 평소 비즈니스적인 교류를 많이 하는 사이였다. “그래도 이 도른 녀석이 주최 측에 신청서를 보냈으리라고 짐작한 이유는 간단해.” 병아리가 삐약거렸다. “일단 자기가 퀴즈 대회에 나갈 거라고 맨날 노래를 불러댔고. 특히 신청서라는 것에 무슨 한이라도 맺혔는지,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클럽에 가입 신청서를 보내거든.” 그렇게 말하며 삐약이가 날 흘겨봤고, 퇴폐미남도 날 힐끔 봤다. 하지만. 부스럭. 아작. 우물우물. 작지만 몹시나 부산한 소리에 둘의 시선이 일제히 다른 누군가에게로 옮겨졌다. 내 눈길도 자연스레 그쪽을 향했다. 잠시 잊고 있던 너구리 종족 한 마리. 이 와중에 혼자 조몰락거리면서 땅콩을 까먹고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쓸데없이 실랑이를 펼치는 사이, 너구리는 잠시도 먹을 걸 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 너구리족은 인간들한텐 정말이지 하등의 관심도 없었다. “…….” “…….” 신선이 되어가고 있는 너구리 족에 대한 존경심이 어느샌가 마차 안을 휩쌌다. “도착했습니다!” 마침내 마차가 브레테 영지의 가장 번화한 중심가에 멈춰서고 마부가 외쳤다. “야호!” 나는 당장 문을 벌컥 열고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61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눈 앞에 펼쳐진 넓은 광장과 길거리 곳곳은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있었다. 축제를 즐기러 나온 브레테의 시민들뿐만 아니라, 제국 각지에서 찾아온 여행객들로 무척이나 활기찼다. 황도에서 브레테 영지까지는 마차로 나흘밖에 안 걸리기 때문에, 이쪽 세계 기준으로는 그리 긴 거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황도에서 온 귀족들도 많이 보였다. “……?” 그런데 순간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마차에서 우리 일행이 내리자마자, 중심가에 있던 여인들이 일제히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입을 쩍 벌리고는 전부 다 동작을 멈췄다. “어어어어머머머머, 저 초초초초미남들은 누누누누누굴까요?” “헉. 저분은 로스트베인 공자님이야! 작년에 황궁 무도회에서 봤어!” “역시 세계 최고 미남이라더니 그 말이 한 치도 틀림이 없네요!” “맙소사. 옆에 피터 레이 공자님도 있는데요?!” “역시 여기까지 여행 오길 잘했어!” “꺅! 어떡해! 지금 나 쳐다본 거 맞죠?” 마침 분수대 앞에 모여 양산을 펴고 하녀들의 부채질을 받고 있던, 대여섯 명 정도의 젊은 귀족 영애들이 일제히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보호자인 귀부인들과 호위 기사들까지 같이 있었으므로 상당히 눈에 띄는 무리였다. 흥분을 숨기지 않는 것은 젊은 영애들뿐만이 아니었다. “아아! 내가 10년만 더 젊었어도…….” “10년은 무슨. 30년이 더 젊었어도 안 될걸요?” “어머, 로스트베인 공자는 아무리 봐도 너무 멋있다니까. 우리 딸이랑 혼인을 시켜야 하는데.” “로스트베인 공자가 그 댁이랑 왜 혼인을 합니까? 당연히 우리 딸이…….” “둘 다 한참 모자라니까 조용히들 하세요. 저희는 이미 청혼장을 보내놨답니다.” “보내면 뭐 한담? 청혼장이야 우리 가문에서도 옛날에 다 보내놨어요. 대답이 없잖아요? 그쪽도 그렇죠?” “차라리 레이 가문 쪽이 더 가망 있겠어요. 그쪽은 제국 출신이 아니니까. 그나마 덜 까다로울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무려 파라야 정보 길드의 주인인데.” “길드고 나발이고 저 아름다운 인물 좀 봐요. 어느 영애가 낚아챌지 모르겠네. 아유, 궁금해라.” 나이가 지긋한 귀부인들까지 지지 않고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었다. 모든 여인들의 시선과 관심이 죄다 두 절4 멤버들에게 집중되자, 근처에 있던 주변 인파들까지 전부 멈춰서서 우리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일단 간식부터 먹을까요?” 이 와중에도 먹을 생각밖에 없는 너구리가 가장 먼저 활기차게 운을 떼었다. 인파의 시선 따위는 냠냠신선에게는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그럴까.” 제라드가 무심히 대답해주자 인파 속에서 여인들이 일제히 하아아, 하고 탄식을 뱉었다. “목소리까지 끝내주네요.” “아, 녹아버릴 것 같아…….” “제발 저 목소리로 내 이름 한 번만 불러줬으면.” 난 어이가 없었다. 고작 ‘그럴까’라고 한마디 한 것뿐이라고……! 그런데 주변에서 모든 여인들이 열이 오르는지 손으로 부채질을 하는 게 아닌가. 정작 이 사태의 주범인 절세 미남 2번과 4번은 사방에서 무슨 일이 있든지 말든지, 일체 아무 관심도 없는 얼굴이었다. 자고로 절4들에겐 이런 반응이 무척 익숙한지라, 간식거리를 찾고 있는 너구리의 뒤를 무심히 뒤따라갈 뿐이었다. 반면, 길거리를 지나갈 때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여인들의 탄식 때문에 나는 혼이 쏙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시커먼 남자들만 가득한 아스테시아에만 있다가, 새처럼 조잘거리는 귀족 영애들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기도 했다. 아무튼, 우리 일행이 움직일 때마다 인파도 우리 뒤를 따라 같이 움직였다. 사람들의 발길이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우리를 뒤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라. 가만 보니까…… 옆에 있는 다른 공자도 넘 귀여운걸요?” 젊은 영애들의 관심이 뜻밖에도 살짝 옮겨지고 있었다. “저 말랑말랑하고 빵빵한 볼때기 좀 봐. 꼬집어 주고 싶어!” “토실토실한 너구리 같기도 하고…….” “어느 가문 공자냐고 가서 물어볼까요?” 영애들 몇몇은 귀여운 너구리 공자도 눈에 들어오는지, 서로 꺄르르 거리면서 좋아했다. 지나치게 절세 미남인 제라드나 피터는 다가가기가 좀 부담스럽지만, 너구리 공자는 이미지가 친근감이 있어서 다가가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너구리 신선은 속세 일에는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매서운 두 눈이 길거리에 음식을 팔며 서 있는 노점상들을 꿰뚫듯이 훑어보고 있었다. 축제의 첫 음식으로는 무엇을 먹으면 좋을지, 매우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이다. “앗. 그런데 마지막 저 공자님은……” 젊은 영애들의 기류가 또 살짝 달라지는 기미가 느껴졌다. 바로 나를 향해서였다. 뼛속까지 관종인 나는 저절로 속에서 막 불길이 끓어오르기 시작하면서, 일단 귀를 쫑긋 세우고 콧대를 높였다. “외모는 정말 미소년인데…….” “그러게요……. 그렇긴 한데…….” “눈빛이 좀…….” “왠지 범접하기가 어렵다고나 할까?” “…….” 뭐? 범접하기가 어렵다고? 아냐 나 쉬운 여자야. 나는 당장 내가 쉬운 여자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 유명인사다운 포즈로 관중의 환호에 보답하고자 했다. 그래서 미소를 살짝 지어주면서 신사임당 같은 인자한 모습으로 관중을 똑바로 쳐다본 순간. “히익!” “옴마! 깜짝아!” 영애들이 눈길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는 것이 아닌가. “꺄아악!” “헉! 큽…… 컥!” 영애들뿐만 아니라 노련한 귀부인들까지 갑자기 비명을 질렀고, 하녀들은 낯빛이 하얗게 질려서 딸꾹질을 했다. 심지어 호위 기사들까지 숨을 크게 들이켜면서 몸을 움찔했다. 인파 속의 다른 이들도 내 눈을 보더니 흠칫하고 시선을 피하면서, 서둘러 가던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음음, 빠, 빨리, 검술 대회장에 가서 자리나 잡죠.” “그, 그래요. 어서 갑시다.” 귀족 여인들은 허둥지둥하면서, 하녀들과 기사들을 대동하고 순식간에 무리 지어 자리를 떠나버렸다. “음? 다들 왜 저러지?” 내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인파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간 인파들은 절4 멤버들을 우러러보는 것도 모자라, 대놓고 뒤를 쫓아오기까지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내가 쳐다보자마자 뿔뿔이 흩어져서 다 제 갈 길을 가버리고 말다니? “대단하군. 정말 놀라워.” 퇴폐미남은 정말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날 추켜세웠다. “우리 가문 기사단조차 막아내지 못한 일을 혼자서 해내다니. 노려보는 눈빛 하나만으로 모두를 물리칠 줄이야.” “……??” 난 당최 이게 무슨 말인지 영문을 알지 못했다. 누가 누구를 물리쳐? “이건 진짜 태어난 이후로 네 인생 최대의 업적이야, 알렉시스!” 2번 병아리마저도 감탄해 마지않으면서 내 어깨를 툭툭 도닥이며 잘했다는 듯이 추켜세워 주었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너의 그 눈알이 이토록 쓸모가 있을 줄이야? 우리 길드의 경호원들조차 포기한 난공불락의 요새를 평정해 버렸군.” “……??”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무언가 엄청난 일을 해낸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절4 멤버 두 명은 상당히 만족하는 눈치였다. 이 절세 미남들이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하긴 한데. 대체 내가 뭘 해냈다는 걸까? “알렉시스 공자. 앞으로 사람이 벌떼같이 몰려 다투고 있는 노점상에 가야 할 때는, 꼭 저랑 같이 다녀요.” 갑자기 너구리마저도 그 특유의 덤덤한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날 추켜세웠다. “알렉시스 공자가 째려보기만 하면 사람들이 옆으로 쫙 비킬 테니까. 뭐든지 제일 먼저 사 먹을 수 있겠어요.” “…….” 너구리의 말까지 듣고 나서야 내 머릿속에서 뿅 하고 전구가 켜졌다. “음하하하! 역시 그런 거였구나! 이 세상은 나의 터질 듯한 존재감을 견딜 수가 없는 거였어! 그래서 다들 피한 거야!” 마침내 모든 걸 이해한 내가 허리에 양손을 올린 뒤 거리 한복판에서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음하하하하카캇! 내가 최고다 역시!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 “…….” “…….” 일순 날 쳐다보던 일행들이었으나, 이젠 다들 그냥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었다. 비록 리 자로 끝나는 두 동물인 병아리와 너구리는, 주인공인 나의 존재가 약간 부담스러웠는지 슬쩍 뒤로 몇 발자국 떨어지긴 했지만. 잠시 후 나의 광포한 웃음이 그친 후에야, 퇴폐미남이 가까이 다가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다 웃었나?” “응. 아주 시원하네.” 난 뻔뻔스레 높아진 콧대를 하늘로 치켜세웠다. “그래, 잘했다.” 퇴폐미남이 피식 웃으면서 또다시 날 칭찬했다. 하, 참나. 잘하긴 뭘 또 잘해. 난 그냥 나의 주체할 수 없는 존재감을 그냥 스스로 찬양한 것뿐인데. “그렇게 어딜 가든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니까 마음이 놓이는군. 넌 어디 가서 잃어버려도 금방 다시 찾을 수 있겠어.” “…….” 거참, 날 졸졸 따라다니겠다더니 정말 작정을 했구나. 날 잃어버리면 찾을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이야! 나는 손뼉을 짝짝 쳐주었다. “아주 훌륭해! 졸졸 따라다니려면 결심이 그 정도는 되어야지. 사람이 칼을 뺐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잖아?” “뭘 썰어?” 퇴폐미남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세계에는 없는 표현인지, 처음 듣는 모양이었다. “아, 여기선 무가 아닌가? 그럼 배추를 썰어? 배추 도사 무 도사?” 내가 대충 찍어보았다. 여러 채소 중에서도 역시 무의 친구라면 배추가 아니겠는가. “…….” 퇴폐미남은 물론이고, 옆에서 지켜보던 병아리조차 내 말이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만 기울였다. 오로지 너구리만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저는 배추로 하겠어요.” 아니 뭘?? 뭘 하겠다는 건데? 나도 몰라서 두 눈만 껌벅거렸다. 절세 미남들도 너구리한테 시선을 고정한 채 다음 말만 기다리고 있었다. “칼로 자른다면서요? 요리를 하겠다는 거 아니에요?” “어어. 맞아요. 그렇지. 그러네요.” 내가 대꾸했다. 그 속담이 그 뜻이 아닌 거 같은데. 62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어떻게 하다 보니 얘기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배추 얘길 하니까 김치 생각나네. 김치전 먹고 싶다.” 난 어릴 때부터 김치를 생으로 먹는 것보다는 항상 김치전을 더 좋아했었다. 그러나 여기선 직접 담그지 않으면 김치 들어간 음식을 먹을 도리가 없었다. 아련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자, 너구리가 아주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김치전? 그건 또 뭐죠?” 이 기회에 나는 너구리 옆에 찰싹 붙어서 김치가 무슨 음식이고 그걸로 전을 해 먹으면 기막히게 맛있다는 개인적인 취향을 열심히 나불나불댔다. 너구리가 아주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고는 말했다. “음, 생소한 음식이군요. 일단 김치라는 것부터 난이도가 상당할 것 같은데……. 그래도 내가 앞으로 식도락 클럽 모임에서 김치전을 목표로 한번 만들어 보겠어요.” “오호. 굿!” 나는 엄지를 쌍으로 척 날려주었다. 너구리도 내게 쌍으로 엄지를 척 날렸다. “이게 성공하면 1번 고양이에게 조공해야 할 간식은 대충 때울 수 있겠군.” 간식이라기엔 좀 결이 다르지만 먹을 것이기만 하면 되겠지. 너구리가 만들 김치전의 맛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오이 피클로 만든 튀김 맛이 아닐까? 애초에 김치를 한 번도 먹어보지도 못한 이세계인이 완벽한 김치는 물론이고, 김치전까지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냥 고양이에게 무언가 먹이기만 하면 되므로 나는 얍삽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아스테시아에는 토실한 너구리뿐만 아니라 고양이와 병아리도 있고, 심지어 어스아이라는 여우족까지 있으니……. 원작소설 <아카데미의 절세 미남들>은 사실은 <아카데미의 반려동물들>이었던 게 아닐까?” 혼자 그런 상념에 잠긴 사이. 길거리 주변은 각종 묘기를 선보이며 음악 연주를 하는 공연단이 흥을 북돋고 있었다. “저기 핫도그가 맛있을 거 같지 않아요? 하나씩 드실래요?” 마침내 너구리가 먹고 싶은 메뉴를 정했는지 노점상 하나를 가리켰다. “좋았어! 돌격!” 내가 먼저 크게 외치며 노점으로 당장 달려갔다. 주인에게 막 핫도그를 달라고 외치려다가, 곧바로 멈칫했다. “아 참. 나 돈 없지.” 이런! 내가 가진 재산이라곤 손에 낀 인장 반지밖에 없었다. 곧바로 시무룩해졌지만, 뜻밖에도 옆까지 재빨리 쫓아온 너구리가 노점 상인에게 시원하게 말했다. “핫도그 네 개 주세요! 피터 공자랑 제라드 공자도 드실 거죠?” 그러더니 너구리는 우리의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 4개분의 값을 상인에게 치렀다. “잠깐만, 너구리 공자. 너구리 공자도 근로장학생이잖아요! 이런 걸 저 부잣집 절세 미남 도련님들한테 사주다니! 그러면 안 돼요! 공자 완전 거지잖아요!” 내가 말렸다. 나랑 똑같이 핫도그 하나 사 먹기 힘든 처지에, 핫도그를 네 개나 사다니! 벼룩의 간을 빼먹지. 같은 근로장학생한테 어떻게 얻어먹는단 말인가? 그러나 너구리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핫도그 앞에서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철판 위에 상인이 올려놓은 핫도그 하나를 냉큼 집어 들었다. 대답은 너구리가 아닌 뒤에서 들려왔다. “야, 누구더러 거지라는 거야. 너구리 공자는 우리나라 공…… 아무튼 부자야. 안심하고 먹어라.” 병아리가 다가와 삐약거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너구리가 계산한 핫도그를 집어 들었다. 음……. 너구리 신선이 부자라고? 게다가 피터도 이젠 ‘너구리’라는 별명을 어느 틈엔가 사용하고 있었는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랑 같은 거지인 줄 알고 혼자 동병상련 느꼈는데……. 부자였어요? 너구리 공자. 그럼 근로 장학은 왜 하는 거예요?” 나는 일단 핫도그를 손에 하나 집어 들고서 물었다. 혹시 너구리가 부자가 아닐 경우를 대비해 입에 아직 넣진 않았다. “그게요, 저는 수중에 돈만 생기면 죄다 먹는 데다 쓰는 바람에……” 너구리는 핫도그를 한입 우물거리고 다 삼키고 나서야, 내 질문이 귓구멍에 들어왔는지 대답했다. “부모님이 절 아스테시아에 보내면서 일부러 용돈을 안 주고 딱 학비만 주셨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학비로 홀랑 다 내버리면 전 맛집 탐방 다닐 돈이 없잖아요?” “…….” “그래서 몰래 근로 장학을 해서 학비를 면제받은 거예요. 대신에, 부모님이 학비로 쓰라고 준 돈으로는 맛있는 걸 실컷 사 먹는 거죠. 즉, 저는 돈이 부족해서 근로 장학을 하는 건 아니랍니다.” 너구리는 친절히 설명하고는 다시 핫도그를 덥석 베어 물고는 다시금 혼자 무릉도원으로 입문했다. “신기하군. 단순히 먹을 걸 더 먹겠다는 이유만으로 근로 장학을 하다니. 누가 보면 학교에서 굶기는 줄 알겠어.” 뒤에서 듣고 있던 퇴폐미남이 재밌어하며 중얼거렸다. 평생 노동과는 거리가 먼 귀족가의 자제들이 다니는 아스테시아에서, 타의도 아닌 자의로 근로 장학을 선택했다는 건 그만큼 독특한 일이었다. 특히 어스아이 요리사들이 만든 최고급 요리가 매일같이 만찬장에 제공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언가를 더 먹겠다는 이유만으로 굳이 노동을 자처하다니! 대부분의 귀족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분명했다. “음. 어쨌든 전부 다 내 착각이었구나? 너구리 공자가 거지가 아니라니 참 다행이네요. 하하하, 그럼 편하게 얻어먹어야지.” 비로소 신이 난 나는 핫도그를 한입 앙 베어 물려다가. 너구리가 이미 값을 지불했는데도 내내 팔짱만 낀 채로 뒤에 서 있는, 핫도그엔 하등의 관심도 없는 퇴폐미남이 갑자기 신경 쓰였다. “넌 안 먹어? 벌써 돈 냈는데 먹어야지! 안 먹으면 아깝잖아. 자.” 내가 4번을 향해 들고 있던 핫도그를 쑥 내밀었다. 맨날 고급스러운 요리만 먹어봤을 퇴폐미남 같은 귀공자가 이런 길거리 음식을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 고맙다.” 퇴폐미남은 내가 핫도그를 직접 건네주자 머뭇거림 없이 팔짱을 풀고 받아들었다. 나는 곧바로 내 몫의 핫도그를 집어 들고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퇴폐미남도 정작 주니까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잘 먹었다. 역시 이럴 때는 식도락 클럽 신입 회원다웠다. “그런데 저게 용사인가?” 우리가 서 있는 핫도그 노점상 앞, 동그란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커다란 돌덩어리를 보며 내가 두 눈을 치켜떴다. 먼 옛날 용을 죽인, 용사의 용맹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용사가 꽤 미남이었군. 후세의 조각가가 미화한 거겠지만.” 심각하게 병적인 외모 중심주의자인 내게는 돌덩이의 용모부터 눈에 띄었다. 동상인데도 불구하고 고대의 용사는 절4는 아니더라도 절10 정도에는 들어갈 만했다. “미화가 아니고 기록에 의하면 원래 저런 얼굴이야. 고대 황제가 남긴 용사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만든 거거든.” 옆에서 병아리가 알은체를 했다. “용을 죽일 때 같이 사라졌다던 스타셰이드의 명검까지 묘사했군.” 퇴폐미남은 이 와중에 용사가 들고 있는 검만 눈에 띄는지 뜬금없는 소릴 했다. 우리 넷은 나란히 서서 핫도그를 먹으며, 일제히 동상 쪽을 응시했다. 엄청 큰 장검을 쥐고 역동적으로 달려가는 모습의 거인 용사. “그런데 왜 누드지? 설마 발가벗고 용이랑 싸웠나?” 내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 “…….” “…….” 다들 내 말에 깊은 사색에 잠긴 채, 광장 한복판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용사의 알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 그럼 슬슬 퀴즈 대회 예선을 치르러 가볼까?” 핫도그를 다 먹은 병아리가 제일 먼저 느긋한 태도로 시계탑의 시각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지만. “난 안 가.” 내가 거절했다. 어차피 나 대신 너구리 공자가 출전하는 퀴즈 대회 따위. 내가 왜 가겠는가? 우승컵을 들 수도, 동네방네 자랑할 수도 없게 되었는데 말이다. “그럼 그러든가.” 한 번쯤은 붙잡을 줄 알았으나, 병아리는 아무런 미련도 없는 태도로 휙 뒤돌더니 성큼성큼 퀴즈 대회장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뗐다. 그러나 한순간 걸음을 멈추고 뒤를 휙 돌아보았다. 역시, 미련이 남아서 나한테 다시 퀴즈 대회 마지막 멤버로 참가하지 않겠냐고 물어보려는 건가? “너구리 공자, 빨리 따라오세요. 길 모르잖아요.” 병아리가 내 옆에 있는 동물에게 재촉했다. 너구리가 마지막 남은 핫도그 한입을 꿀꺽 삼키고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이 가봐야겠네요.” 퀴즈 대회의 새로운 출전자인 너구리는 우리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날리고는 병아리를 따라 가버렸다. 그 멀어지는 두 마리 동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난 회한에 잠겼다. “후……. 다시 한 번만 날 붙잡았다면, 원작에 나왔던 결승전 마지막 문제의 답을 당당히 맞혀주려고 했는데……. 쳇!” 원작처럼 똑같이 해줄 자신이 있었는데. 무려 피터조차 알지 못한 마지막 문제의 정답을 맞히며 여주가 영웅 대접을 받는 내용이 원작에 나왔었다. 그러나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던가. 나 대신 너구리가 참가하게 된 퀴즈 대회에서 뜻밖의 사건이 벌어질 줄, 누군들 알았겠는가. *** “우리 냐옹이! 화이팅!” 잠시 후, 나는 관중이 꽉 들어찬 천하제일 검술 대회에서 열심히 1번 대형냥을 응원하고 있었다. 단순한 응원으로도 모자라, 관객석 앞에 나가서 목청이 떠나가라 외치며 로브를 벗고 춤까지 추었다. “저 공자는 뭐야?” 다른 관중들은 아무리 봐도 아스테시아에 다니는 귀족 자제인 내가 아무 스스럼없이 그러고 있자 신기한 듯이 쳐다봤고, 특히 어린아이들은 같이 신이 났다. “하아……. 쟨 또 여긴 왜 왔어…….” 마침 대회장 위에 나온 다니엘만이 얼굴을 손으로 짚은 채로 망연자실해했다. 63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그만큼 나의 존재감은 관중석을 떠나 경기장 위에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안 돼. 정신 차리자……. 정신!” 다니엘이 갑자기 혼자 소리를 꽥 지르더니 검을 꽉 쥐었다. 관중석에 있는 나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태도로 상대와 마주 보았다. 경기 상대는 낯짝에 칼자국이 있는 험상궂은 무사였다. 나도 절로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흥! 우리 냐옹이에 비하면 칼자국 따위 아무것도 아니지! 오늘 냐옹이가 우승하면 내가 캔 따준다!” “냐옹이?” “캔?” 내 우렁찬 목소리를 들은 관중들이 모두 의아해했다. 다행스럽게도 다니엘은 그간의 수행으로 귓구멍을 닫아버렸는지 진지한 자세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경기 상대인 칼자국이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흐트러졌다. “경기 시작!” 심판이 외치자마자, 다니엘이 곧바로 칼자국에게 달려들었다. 절세 미남이 칼을 들고 달려가는 그 멋있는 광경을 보고 내가 다시 한번 함성을 지르려는데. “이봐, 다니엘 공자 방해 그만하고 자리에 좀 앉아라.” 내 덕분에 졸지에 검술 대회를 보러 오게 된 퇴폐미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날 끌어당긴 뒤에 억지로 제 옆자리에 앉혔다. “누가 방해를 했다 그래?”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퇴폐미남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넌 존재 자체가 방해다.” “…….”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난 부정할 수 없었다. 챙! 챙! 경기장 위에서는 한참 칼싸움이 현란하게 벌어졌다. 천하제일 검술 대회라 봤자 참가자들 수준이 자기보다 떨어진다며 시큰둥하던 퇴폐미남은, 정작 경기가 시작되자 유심히 경기장 위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라드 공자님, 여기 계셨습니까.” “이번 축제엔 어쩐 일로 검술 대회를 다 보러오셨습니까? 혹시 눈여겨보시는 참가자라도 있어서 오신 겁니까?” 두 중년 귀족들이 가까이 같이 와서 제라드에게 알은체를 하며 말을 걸었다. 둘은 마치 형제처럼 외모가 닮은꼴이었다. 바로, 검술 대회를 구경하러 온 로스트베인 공작가의 가신들이었다. 제라드가 흘끗 그들과 눈을 마주쳤지만. “아, 지금은 데이트 중이니까 나중에 얘기……” 퇴폐미남이 입을 떼자마자. “와아아아아!” 주위 관중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길래, 난 퇴폐미남이 뭐라고 했는지를 못 듣고 얼결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대련 결과를 목격했다. 칼자국 선수가 검을 손에서 놓친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우리 고양이 이겼다! 오예! 이따가 캔이다! 이세계도 통조림은 있겠지?” 신이 난 내가 환호성을 질렀다. “제라드 공자님. 좀 전에 뭐라고……?” 한편 제라드의 대꾸를 듣지 못한 두 가신들은 함성이 잦아들자 다시 물었지만. “……됐네. 노친네는 잘 있나?” 제라드는 별로 궁금하지 않지만 예의상 물어보는 듯한 태도로 물었다. 제 아버지를 노친네라고 부르는 걸 보면 의외로 만만한 걸까. 친근한 부자 사이는 아니겠지만. 참고로 공작은 늦은 나이에 자식을 봐서 나이가 많은 편이다. “물론입니다. 공자님께 아주 불만이 태산이시죠. 대체 가주직은 언제 받으실 거냐고 매일 성화십니다.” 두 귀족들이 넉살 좋게 웃었다. 반면에 나는 제라드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잠깐만. 너희 아버지가 벌써 가주직을 넘겨준다 했다고?” “응, 그렇지.” 제라드가 날 보며 대답했다. 그 순간 두 가신의 시선이 똑바로 내게 박혔다. 내가 제라드의 일행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눈치챈 얼굴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그러셨는데?” “5년 전부터.” “…….” 자고로 검술 가문인 로스트베인 공작가는 후계자가 가주를 상대로 승리했을 때 작위를 넘겼다. 후계자의 실력이 약하면 가주가 죽고 나서야 넘겨받는 경우도 있었다. 즉, 5년 전부터 가주직을 넘겨주려고 성화라는 이야기는…… 이미 5년 전에 퇴폐미남이 아버지를 상대로 승리하였으며 공작의 검술 실력도 뛰어넘었다는 이야기였다. 본인이 공작 작위를 이어받지 않고 거절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흠흠. 공자님, 여기서 이렇게 구경하시지 말고 특별석으로 오시지요.” “그러시지요. 자리를 마련하라 이르겠습니다.” 가신들의 제안에, 제라드가 날 돌아보며 물었다. “갈래? 특별석?” “특별석 가면 뭐 맛있는 거 줘?” 내가 되물었다. “……주나?” 제라드도 답을 모르는지 두 가신들을 향해 물었다. “어……. 예. 아마도. 줍니다.” “구석에 놓여있는 거 봤습니다.” 두 가신들이 기억을 더듬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가자!” 나는 신이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제라드도 피식 웃으면서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라드의 얼굴에 스친 웃음을 보자마자, 두 가신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심장을 부여잡았다. “우리 공자님이 웃으시다니…….” “믿을 수 없어…….” 우리는 함께 특별석으로 이동했다. “흠흠. 공자. 처음 보는 안면이로군. 자넨 어느 가문의 공자인가?” “우리 제라드 공자님하고는 어떻게 같이 오게 되었지? 학교에서 친한 편인가?” 특히 가신들이 나의 존재에 아주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물어보았다. 난 내 이름이 알렉시스 도렌이며, 현재 퇴폐미남이 날 졸졸 따라다니는 중이라서 경기장에 같이 온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허허. 농담도 잘하는군.” “우리 공자님이 누굴 졸졸 따라다닌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두 가신들 모두 제라드가 날 따라다닌다는 설명을 전혀 믿지 않았다. 특별석 구역은 경기장 2층으로, 따로 휘장이 쳐있었다. 그리고 핑거푸드가 놓인 테이블이 구역 안쪽에 놓여있었다. 경기장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몇몇 귀족들이 특별석 구역에 앉아 있다가, 제라드가 나타나자마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와 인사를 하느라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얼른 핑거푸드를 잔뜩 접시에 담아 자리에 와서 먹기 시작했다. 나름 예의 있게 인사를 다 받아준 제라드가 시큰둥한 얼굴로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나는 같은 식도락 클럽 회원에게 핑거푸드 몇 개를 건네주었다. 사이좋게 음식을 먹는 우리를 보고는 두 가신들이 뒤에서 감격해하며 중얼거렸다. “제라드 공자님이 친구와 무려 음식까지 같이 먹다니…….” “검술 경기도 같이 보시고…….” “어린 시절 그날 이후로는 처음이신 것 같은데?” “역시 그렇지……? 친구를 사귀신 게.” *** 대형 고양이는 상당히 좋은 경기력을 보이면서 무려 4강에 진출했다. 결승전을 비롯한 나머지 경기는 내일 열리므로, 검술 대회의 오늘 경기는 이걸로 마지막이었다. 다만 칼 군무를 추는 공연단이 나와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공연을 할 예정이었기에, 모두들 자리에 착석해 있었다. 나는 학교에 가서 고양이를 만나면 실컷 축하를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잠시 후, 다니엘이 특별석 구역으로 보란 듯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난 녀석이 당연히 집사인 나를 보러 올라온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어머니!” 다니엘이 곧바로 어느 귀부인을 향해 달려갔다. “아이고. 잘했다. 고생했어.” 인자하게 생긴 어느 귀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니엘과 끌어안았다. 정말 사이가 좋아 보이는 모자였다. “행여 다칠까 봐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했는지 아니? 어디 안 다치고 경기 마쳐서 참 다행이구나.” “오라버니, 정말 대단해! 아버지도 자랑스러워하실 거야!” 옆에 있던 아리따운 영애도 다니엘과 연이어 포옹하며 말했다. 무려 자신의 친오빠인데 ‘오빠 새끼’가 아니라 저런 다정한 말투라니……. 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보기만 해도 정말 그림같이 아름다운 가족의 모습이었다. “식은땀이 날 정도로 훈훈하군. 나 같은 하찮은 집사 따윈 끼어들 수가 없어. 후후후.” 난 떨어진 자리에서 음침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원작과 달리, 이번엔 다니엘의 어머니와 누이가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연출하게 되어서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4강까지 오른 다니엘의 표정은 밝았다. 이 넓고 넓은 대륙에서 엄청난 실력의 기사들과 낭인들이 전부 몰려든 천하제일 검술 대회에서 4강에 들었으니, 상당한 성적이었다. 원한다면 그의 아버지가 있는 황궁 기사단에도 입단할 수 있었다. 이윽고, 가족들과 같이 마지막 칼 군무 공연을 지켜보기로 했는지 고양이가 자리에 착석했다. 그런데, 문득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내 쪽으로 힐끗 고개를 돌렸다. “…….” 그제야 나와 눈이 마주친 고양이가 몸을 굳혔다. ‘아, 는, 척, 하, 지, 마, 라.’ 고양이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말했다. 주둥아리를 열지 않고도 참 용케도 눈으로 말하는 재주가 있다니. 신기했다. 하도 신기해서, 나는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고양이가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다시 어머니와 누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군무까지 다 본 후, 검술 대회장을 나왔을 무렵에는 이미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비록 특별석에서 간식을 먹긴 했지만 여전히 아쉬운 눈길로 노점상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뜻밖에도 퇴폐미남네 가신들이 앞다투어 내게 먹을 것을 사줬다. “이거 먹고 내일도 우리 제라드 공자님하고 놀러 나오게. 지금처럼 계속 부디 친구로 있어 주게나.” “대체 어쩌다가 우리 공자님과 어울리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싸가지는 없어도 알고 보면 괜찮은 분이라네.” 가신들의 다른 말은 다 놓쳤지만, 마지막 문장의 ‘싸가지’라는 단어만은 명확히 귀에 들어왔다. “그쵸? 싸가지죠? 역시. 그래서 별명이 ‘싸바’였어요.” 내가 독자들 사이에 익히 잘 알려진 별명을 알려주었다. “음?” “음?” “하긴. 첨 들어보시겠구나. 싸가지 바가지의 줄임말인데.” “……아.” “……아.” 정말이지 너무나도 찰떡같은 별명이었는지 두 가신들이 멍한 낯으로 침묵했다. 퇴폐미남은 그런 그들의 반응을 보며 피식 웃었다. 퇴폐미남이 웃자 가신들이 다시 한번 움찔하며 놀랐다. 어쨌거나 가신들이 사준 몇 가지 튀김 요리와 과일 꼬치를 먹으며, 난 룰루랄라 제라드의 마차로 향했다. 64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학교에 도착하면 불꽃놀이를 볼 생각이겠지?” 가신들과 헤어진 후, 나와 함께 마차에 오른 제라드가 물었다. “당연하지. 오늘 밤의 하이라이트인데 당연히 봐야지.” 내가 열정적으로 튀김을 입에 쑤셔 넣으면서 대답했다. “아스테시아에서 쏘아 올리는 불꽃놀이가 최고잖아!” 원작에 언급되는 바에 의하면 시내에서도 불꽃놀이를 하긴 하지만, 아스테시아의 폭죽을 따라올 순 없었다. 덕분에 축젯날 밤에는, 성 앞 들판에 마차들이 빼꼭하게 들어찬다. 학교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귀족들이 마차를 세워놓고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가는 것이다. 마치 드라이브인처럼. 물론 학교 안으로 언제든지 출입 가능한 원작의 여주는, 절4 멤버들과 성안의 어느 탑 꼭대기에서 같이 밤하늘을 구경했다. “이번엔 교장이 또 무슨 엄청난 폭죽을 쏘아 올릴지 기대되는군.” 제라드가 말했다. “교장……?” 그 누구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교장. “그래. 폭죽광이거든.” 퇴폐미남의 말투는 마치 그 교장을 좀 알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교장이 누구냐고,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작년에는 폭죽으로 용까지 만들었지. 올해도 성대할 거다. 포도주나 마시면서 같이 구경하자고.” 제라드가 씩 웃으면서 여느 때처럼 퇴폐미 공격을 날렸고, 나는 자동으로 척, 손을 들어 태권도 방어 자세를 취했다. 마차가 출발했다. 그리고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만찬장으로 직행해서 포도주부터 확보했다. 그 후 불꽃놀이를 어디서 볼까 하는 문제로 잠깐 의견 교환을 나눴다. “네 방으로 가자고? 흠……. 설마 날 유인해서 독약이라도 먹일 속셈은 아니겠지?” 제 방으로 초대하는 제라드에게 내가 의심의 눈초리를 날렸다. 황자의 숨은 졸개 녀석이 내게 독살을 시도했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병아리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조심해서 나쁠 것 없었다. “알렉시스, 장담하건대 독약도 너 같은 특이 체질한테는 안 듣는다. 그저 내 방 창가에서 불꽃놀이가 더 잘 보일 뿐이야.” 퇴폐미남이 대답했다. “글쎄? 불꽃놀이가 중앙성 꼭대기에서 터지는 거면 내 방에서도 잘 보일 텐데? 꼭 네 방에서 봐야 할 이유는 없지.” “아, 그럼 네 방으로 초대하는 건가? 초대받는 건 처음인데. 어디지? 빨리 가자.” 제라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싱긋 웃으면서 날 재촉했다. 나는 왠지 말린 기분이 들었지만 포도주병을 들고 앞장섰다. 술 먹고 여기저기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여우족들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마침내 기숙관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내 방문을 벌컥 열었다. “평소에 문을 안 잠그나 보지? 열쇠 같은 것 없어?” 마치 편의점처럼 24시간 열려있는 내 방문을 보며 제라드가 황당해하며 물었지만. 난 대답할 수가 없었다. “헉, 뭐야.” 방 안을 본 순간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몸이 고장 났기 때문이다. “…….” 내 뒤에서 방 안을 넘겨다 본 퇴폐미남도 멈칫했다. “이 쑥대밭은 대체 뭐냐고!!!”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내가 과장된 몸짓으로 절규했다. 방은 한마디로 엉망진창으로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내 방을 샅샅이 뒤지기라도 한 듯했다. 당해보니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알렉시스, 정신 차리고 잘 살펴봐. 혹시 뭐 없어진 거라도 있는지.” 퇴폐미남이 방 안에 들어와 유심히 주위를 둘러보면서 내게 말했다. “그런 게 어딨어. 나 같은 거지한테.” 침대와 테이블도 뒤집어놓고, 이불이고 베개고 속까지 다 뜯어서 난장판을 만들어놓긴 했지만……. 나는 애초에 가진 물건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즉 난장판이 된 것에 비해서는 침입자의 소득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좀 소중한 것이라든지. 중요한 물건 없나? 저런 허접한 단검 말고.” 제라드는 이런 와중에도 유독 내가 테이블 위에 대충 던져 놓은 허접한 단검이 눈에 거슬리는 것 같았다. 심지어 침입자도 그건 안 가져갔다. “그런 소중한 물건이 있었으면 애초부터 나도 문을 잠그고 다녔겠지.” 난 은근슬쩍 내 소중한 단검을 챙겨 품속에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펑! 펑! 창문 바깥에서는 마침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는지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분명 환상적이고 아름다우며 끝내주는 불꽃놀이겠지만, 나는 지금 그것을 구경할 마음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때, 불현듯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난 꺼져 있는 벽난로 쪽으로 다가가서 힐끗 다 타고 남은 재를 내려다보았다. “…….” 역시, 이미 불에 다 탔는지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왜 그래?” 벽난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날 보고는, 퇴폐미남이 다가와서 같이 내려다봤다. 하지만 타고 남은 재밖에 없었다. “아냐, 아무것도.” 이미 불에 타버린 물건을 도둑이 훔쳐 갈 수는 없었을 테니 난 설명을 생략했다. 그 물건은 황궁에서 가져온 것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퇴폐미남에겐 설명하기가 곤란했다. 그걸 얘기하려면 내 진짜 신분도 얘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황궁을 떠나기 전, 선황이 억지로 건네줬던 작은 약병. 지난밤 내 방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던 벽난로 속에 그걸 집어던진 것이 바로 오늘 아침, 축제에 놀러 나가기 직전이었다. 만약 도둑이 그걸 찾고 있었다면 간발의 차이로 늦은 것이다. “알렉시스!” 누군가 헐레벌떡 내 이름을 부르며 뛰쳐 들어오길래 나는 휙 고개를 돌렸다. 제라드가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가, 금세 다시 떼었다. “피터 레이?” “병아리?” 제라드와 내가 동시에 말했다. 2번 병약미남이 이 시간에 여기 웬일이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침착함은 애초부터 온데간데없고, 헐레벌떡 뛰어와서 얼굴과 머리가 땀으로 엉망이었다. “야, 넌 오늘 브레테 시에서 자고 오는 거 아니었어? 퀴즈 대회장 근처에 숙소도 잡아놨다고 했잖아.”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우리 삐약이가 왜 갑자기 학교로 돌아왔을까? “헉… 헉.” 평소 운동 부족인 병약한 꽃미남은 아직도 숨을 고르지 못하고 헐떡거렸다. “알, 렉시스, 너는… 괜찮구나. 헉, 헉.” 마치 나한테 아무 일 없는지 확인하러 온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병아리의 눈길이 내 방 안으로 향했고, 쑥대밭이 된 공간을 보자마자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병아리는 무언가 안 좋은 사실을 깨달은 사람처럼 작게 뇌까렸다. “피터 레이. 대체 무슨 일인가?” 옆에서 퇴폐미남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병약미남은 숨을 고른 후 한 손으로 문가를 짚고는 자세를 곧추세우며 말했다. “큰일 났어. 너구리 공자가 납치됐어.” *** 병아리의 발언을 이해할 몇 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너구리 공자의 둥글둥글한 얼굴을 떠올리자니 ‘납치’ 같은 범죄와는 너무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그래서 난 말했다. “감히 신선을 납치했다고? 그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야? 납치 확실해? 혹시 너구리 신선님이 스스로 구름을 타고 무릉도원으로 사라진 건 아니고?” 너구리 공자라면 먹을 것에 홀려서 하늘로 승천하고도 남았다. “무슨 소리야. 나랑 같이 마차 타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습격당했어.” 피터는 헐떡거리는 숨을 고르며 이마의 땀을 소매로 훔쳤다. “퀴즈 대회 예선이 끝나고, 나머지 회원들하곤 헤어진 후에 같이 마차를 탔거든. 근데…… 왠지 속이 좀 싸해서…… 일부러 우리 길드의 브레테 지부까지 가서 마차를 탔어. 길드원들을 호위로 대동하고 싶었거든.” 병아리가 설명했다. “마침 길드원 둘이 놀고 있어서 마차를 몰게 했지. 우리 길드원들은 다 기본적으로 검을 쓸 줄 아니까, 어느 정도 안심했어. 그런데 마차를 습격한 자들이 실력이 월등한 데다가 숫자도 더 많더군.” 병아리가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르는 사이, 제라드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그런데 피터, 자넬 납치한 게 아니라, 너구리 공자를 납치해갔단 말이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심지어 제라드조차 너구리 공자를 아주 자연스레 너구리라고 부르고 있었다. 2번 병아리는 퇴폐미남을 바라보며 단안경을 고쳐 썼다. “맞아, 납치범들이 내겐 관심이 없었네. 너구리 공자만 잡아갔어.” 그때 나는 피터를 향해 물었다. “어떤 놈들이었는데? 납치범들 얼굴 봤어? 피터 너라면 냄새만 맡아도 정체를 알 것 아니야?” “하아…….” 병아리는 내 질문에 갑자기 하늘이 무너져라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근심 어린 그의 모습을 보니, 납치범에 대해 짐작 가는 데가 있나 보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병아리가 삐약거렸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마차를 습격한 녀석들의 검술 스타일을 봤을 때는…… 뭐랄까, 알렉시스 네 검술과 비슷한 느낌이었어.” “나랑 비슷했다고?” “응.” 피터는 고개를 끄덕인 후 물끄러미 날 쳐다보았다. “…….” 옆에서 제라드는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그런 피터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알렉시스와 비슷한 느낌이라면, 그곳뿐일 텐데.” “……그렇지.” 피터도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너희들이 생각하는 거기가 바로 내가 생각하는 거긴가?” 궁금해진 내가 물었지만, 한창 생각에 빠진 두 절세 미남들은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와 비슷한 검술이라면, 정식으로 기사 수련을 받은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검술을 말하는 것이다. 즉, 암살자들이란 얘기였다. 또 한 명이 아니라 여럿이 움직였다는 점으로 볼 때, 암살단 소속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죽이지 않고 납치만 하다니, 그놈들답지 않은데.” 퇴폐미남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게다가 정보 길드의 핵심 인물인 자네라면 납치할 가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왜 고작 식도락 클럽 회장일 뿐인 너구리 공자를 납치했는지 의문이다.” “아, 그건……” 피터가 괴로운 표정으로 입을 뗐다. “그들이 사람을 착각한 것 같아.” 65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착각?” “그래. 우리가 퀴즈 대회장에 갔을 때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거든. 나는 주최 측에 분명히 알렉시스 대신 너구리 공자의 이름을 출전자로 올려달라고 했는데……, 정작 퀴즈 대회가 시작되고 보니 너구리 공자의 이름표가 알렉시스 도른으로 되어 있었어.” “…….” “대회 주최 측에서 정신이 없고 바빠서였는지, 아니면 귀찮아서였는지…… 원래 명단에 등록된 멤버 이름을 고치지 않았던 거지.” 이 말을 듣던 퇴폐미남은 다소 의아한 얼굴로 내게로 고갤 돌렸다. 난 피터의 말을 들으며 너구리 공자가 왜 납치되었는지 바로 알아챘다. “그러니깐, 너구리 공자가 졸지에 오늘 퀴즈 대회에서 내 이름으로 출전했다는 거구나? 그래서 납치범들이 나인 줄 착각하고 너구리 공자를…….” “그럴 소지가 다분해.” 병아리는 다시 한번 내 방 안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특히 지금 네 방 꼬라지를 보니까…… 여기도 누군가 침입했나 본데. 그렇지?” “어, 그렇지 참.” 너구리가 납치됐다는 말에 잠시 잊고 있었다. 내 방에 몰래 들어와 쑥대밭을 만든 침입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너는 뭘 잊어버렸는데? 침입자가 뭘 가져갔지?” 피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없어. 아무것도 안 훔쳐 갔어.” 도둑은 약병을 찾았던 것 같지만, 그건 불에 타서 없어졌거든. “…….” 병아리는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곧 입을 뗐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타이밍이 묘하군. 하필 지금 네 방이 이런 꼴이 되어 있는 걸 보면……. 너를 납치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찾고 있는 모양인데.” “이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어째서 납치범들이 알렉시스를 노리고 있었다는 건가? 대체 알렉시스가 무슨 상관인가?” 눈살을 찌푸린 채로 듣기만 하던 퇴폐미남이 그제서야 심각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하긴 제라드는 현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특히, 내가 9황녀라는 사실을. 퇴폐미남에겐 날 뒤쫓는 암살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전혀 이해되지 않으리라. “하! 그러니까! 정말 그러게 말이야. 진짜 어이없는 일이네. 납치범 주제에 납치할 사람 낯짝도 확인하지 않다니! 바보들인가 봐?” 굳이 나의 정체를 밝히고 싶진 않았던 내가 어색하게 말을 돌리며 외쳤다. “하지만 그 일이 이미 일어났어. 납치는 벌어져 버렸다고.” 병아리가 곧이곧대로 들으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몹시나도 병약하고 피곤해 보였지만, 그 피로함조차 절4 멤버의 꽃미모를 가리지는 못했다. “만약 정말 납치범들이 암살단이라면…… 너구리를 죽일지도 몰라. 죽으면 정말 큰일이라고……. 자칫하면 진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피터는 우수에 젖은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면서 초조하게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정말이지 처음 보는 모습이다. 얼마나 걱정이 되었으면 그럴까. 항상 냉철하기만 한 모습에 익숙했던 나는 평소와 다른 병아리를 보자 절로 측은지심이 들었다. 그래서 병아리에게 다가가서 턱, 하고 손을 어깨에 올리며 위로했다. “죽이지 않고 납치한 걸 보면, 당분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최대한 빨리 가서 구출하면 돼. 나 믿지? 내가 가서 아주 그냥 깡그리 소탕해버릴 테니까.” “정말이지? 알렉시스. 도와주는 거지?” 병약미남이 처음으로 날 간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2번이 헐레벌떡 여기까지 날 찾아온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일단 납치범들의 원래 목표인 내가 멀쩡한지 확인하려는 것과, 멀쩡하다면 내 도움을 받으려는 것. 나야말로 퇴폐미남을 능가하는 이세계 검술 천재니까 말이다! “당연하지!” 고민할 틈도 없이 내가 곧바로 외쳤다. 절4의 간절한 표정 앞에서 난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로 치켜들었다. “식도락 클럽 회장이 위기에 빠졌다는데 가만있을 수 없지. 어디야? 너구리 지금 어디 있대? 너희 길드 애들이 지금 찾고 있는 거야? 빨리빨리 추적해서 놈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야 할 텐데?” 내가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자세를 하며 소리쳤다. “……고마워.” 피터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처음으로 내게 다가와서 부드럽게 날 끌어안았다. “…….”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떨어지지?” 퇴폐미남이 살벌한 목소리로 뱉었다. “어, 그래. 난 그냥 고마워서.” 병아리가 얼른 날 놔주었다. 한편, 나는 눈앞이 멍해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방금 날 끌어안았다? 방금 누군가가 날 끌어안았는데? 이게 누구야? 세상에, 절세 미남이 아닌가? 꽃미남 병아리다? 2번 병아리가 날 끌어안았다? “피터, 너 방금 나 끌어안은 거 맞지?” 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굳이 꺼내서 확인해보려고 했다. “정신 좀 차려.” 피터가 손가락을 맞부딪혀서 딱, 딱 소리를 내며 내 귓가에 대고 울렸다. 난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병아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작 피터는 내가 아닌 제라드를 힐끔 쳐다보더니 마치 변명하듯이 덧붙였다. “진짜 친구로서 고마워서 그런 거지 다른 의미는 없네. 오해하지 말라고.” “알고 있다.” 제라드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여전히 멍한 정신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알렉시스도 간다면, 제라드 자네도 가는 거겠지?” 피터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처럼 퇴폐미남에게 물었다. “그러지.” 제라드가 대답했다. “정말 고맙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어.” “포옹은 사양하지.” “……그래.” 난 그때쯤 정신을 차리고 둘을 바라보았다. 절세 미남 둘이 포옹하는 훈훈한 광경은 안타깝게도 벌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퇴폐미남까지 있다면 암살단 하나쯤 소탕하는 건 별것 아니리라. “암살단을 상대해야 한다면, 현재 이 근처에 있는 우리 길드의 전력만으로는 무리야.” 병아리가 초조한 와중에서도 최대한 빨리 상황을 설명했다. “본부에 도움을 요청해놨지만, 전력이 도착하려면 적어도 하루는 족히 걸려. 그 사이에 너구리 공자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바로 그때, 창밖 저쪽 어딘가에서 푸덕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났다. 병아리는 황급히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와서는 창가로 달려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새하얀 비둘기가 날렵하게 병아리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다리에 정보 길드가 보낸 쪽지가 매달려 있었다. “너구리 공자의 소재를 찾았나 봐.” 피터가 서둘러 전서구의 다리에 매달린 쪽지를 펴서 읽었다. “여기서 한 시간쯤 걸리는 어느 별장으로 데려갔군. 다행히 아직 죽이지는 않았어.” ‘아직 죽이지는 않았어.’라고 할 때 병아리의 목소리에는 몹시 깊은 안도감이 어렸다. *** 너구리 구출 작전에선 내 허접한 단검보다는 장검이 필요할 것 같아 연무장에 들러 하나 생겼다. 서둘러 성 밖으로 나와보니, 들판에 진을 친 마차들과 간이 천막들이 보였다. 아스테시아 성에서 쏘아지는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펑, 펑, 폭죽은 계속 터지고 있었고 사람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잠깐만.” 한시가 바쁜 와중인데 퇴폐미남이 문득 어떤 마차를 발견하더니 우릴 기다리게 한 뒤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마차 안에 있던 누군가와 창문 사이로 대화를 나눴다. 이윽고, 그 누군가가 마차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함께 마차 안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있었던, 그의 어머니와 누이가 창문 너머로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후 그 미지의 인물이 퇴폐미남을 따라왔다. “엥? 우리 고양이잖아? 갑자기 고양이는 왜 데리고 왔어?”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두 사람을 향해 묻자마자. “패싸움하러 간다며?” 신난 표정을 한 다니엘이 대답했다. “응? 패싸움?” 나는 두 눈을 멍청하게 깜박거렸다. 오늘 들어 처음 듣는 단어였다. “그래. 패싸움에 좀 거들어 달라면서?” 다니엘의 말을 듣자마자, 난 퇴폐미남을 홱 쳐다보았다. 퇴폐미남은 그냥 평소 같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마침 펠트 자작가의 인장이 그려진 마차가 보이길래, 다니엘 공자 정도면 패싸움에 도움이 되겠지 싶더군.” 그야 천하제일 검술 대회에서 무려 4강에 오른 실력이니 도움이 되기야 하겠지만……. “하지만 다니엘 공자, 자네는 내일 천하제일 검술 대회에 경기가 남아 있잖아. 정말 패싸움에 참여해도 괜찮겠나?” 2번 병아리마저 패싸움은 기정사실로 하고 다니엘에게 물었다. “물론이지. 아무 때나 오는 패싸움이 아닌데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대형고양이가 대답하며 눈을 번뜩거렸다. 이대로 상대를 만나면 하악거릴 기세였다. 너구리가 납치된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의 잠정 패싸움 상대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어쨌거나 현재 다니엘에게까지 다시 처음부터 상황을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그럼 빨리 가지.” 병아리는 성 앞에 대기된 말 위에 올랐고, 우리도 뒤따랐다. “근데 알렉시스, 어떤 패싸움이든지 간에 너랑 제라드 공자라는 미친 조합이면 어디든 쑥대밭으로 만들기에 충분할 텐데, 왜 나까지……. 대체 어디랑 붙는 건데? 그렇게 상대가 세?” 말에 오르면서 대형 고양이가 뒤늦게 궁금증을 보였다. 어디랑 싸우는지도 모르고 냉큼 따라 나오다니. “냐옹아, 원래 패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냐?” 정말 궁금해서 1번에게 되물었다. “그건 아니고. 어떤 건지 궁금해서. 한 번도 해볼 기회 없었거든.” “이런, 정말 개가 아니라 고양이가 확실했군. 진정으로 고양이다운 대답이었어.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고 하잖아.” 패싸움이 뭔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암살단과 싸우러 가는 길에 나서다니……. “뭐야? 그 소린. 나 죽으러 가는 거야?” 다니엘이 내 말을 농담인 줄 알고 하하, 하고 웃었다. 난 그저 오늘 밤엔 고양이가 죽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66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우리 일행은 너구리가 잡혀 있다는 문제의 별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말을 세웠다. 이미 도착해 있던 파라야 정보 길드원들이 마차 세 대를 세워놓은 곳이었다. “저기요, 마차는 왜 세 대나 몰고 왔어요? 그쪽은 다섯 명밖에 안 되면서.” 내가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브레테 지부의 길드원은 다섯 명뿐으로, 소수정예라고 했다. 인원이야 적지만 정보 수집에는 도가 튼 전문가들이리라. 어쨌든, 말보다 마차가 더 크고 소란스러운 탈것인데, 고작 다섯 명이 세 대나 몰고 온 게 이상했다. “마차는 다다익마입니다, 도렌 공자님.” 내게 붙잡힌 정보 길드원 하나가 친절하게 대답했다. 무려 내 이름을 ‘도렌’이라고 정확하게 발음한 희귀한 이세계인이었다! “다다익마?” 그나저나 처음 들어보는 용어였다. 마차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네. 일단 마차 한 대는 우리가 구출해야 하는 분이 의식을 잃었거나 거동을 할 수 없다면 눕혀서 이동해야 하니 필수지요. 치료 도구와 약도 마차 안에 모두 구비되어 있습니다.” 즉, 한 대는 응급차라는 이야기였다. “또, 혹시 우리가 구출해야 하는 분이 응급 마차의 약 냄새를 싫어하실 경우를 대비해, 나름대로 고급 마차를 하나 더 준비해야 했습니다.” “……아, 이 바쁜 와중에?” “물론입니다.” 익명의 길드원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쩐지 마차 셋 중에서 하나는 훨씬 상태가 좋아 보였다. “마지막으로는, 납치범들을 포박해서 호송해야 할 마차 한 대가 더 필요하죠. 범죄자들이 도주할 수 없도록 외부 전체가 철판으로 덧대어져 있습니다. 창문도 없고, 문에도 쇠로 된 튼튼한 잠금장치를 걸어놓았죠.” 한마디로 마지막 마차는 호송차라는 이야기였다. “에이, 그딴 범죄자들을 마차에 태울 것 뭐가 있어요? 그냥 말에 매달고 이리저리 끌고 가면 될 텐데. 가는 길에 고통스럽게 죽게.” 내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하자, “…….” 길드원은 약간 겁먹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더니 천천히 내 곁에서 떨어졌다. 아무튼 납치범들이 우리의 인기척을 알아채선 안 되기 때문에, 다들 직접 두 발로 별장을 향해 걸었다. 이윽고, 근거리에 나타난 별장의 불은 꺼져 있었다. 사위가 어두웠다. “쥐 죽은 듯 조용하군. 별장의 소유주는 누구지?” 피터는 옆에 있던, 자기 길드의 브레테 지부장에게 물었다. 꽤나 단단한 몸집에 다른 길드원 네 명을 통솔해서 데려온 이 중년의 지부장은 곧바로 대답했다. “소유주는 피니어스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가짜입니다. 진짜 정체는 솔스비 녀석들입니다.” 여기서 ‘솔스비’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암살단의 이름이었다.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는 암살단의 특성상 그 존재가 대중에게 알려져 있진 않으나, 고위 귀족들 사이에선 암암리에 악명을 떨치고 있는 정예의 암살단이었다. “이 별장도 솔스비 녀석들이 아지트로 쓰기 위해 매입한 걸로 추정됩니다.” 지부장의 말에, 피터가 심각한 표정으로 외알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런데 엉뚱하게 딴 데서 반응이 먼저 튀어나왔다. “솔스비? 처음 듣는 가문인데?” 대화를 듣던 다니엘이 무척 진지하게 물었다. “그냥 술 이름 같기도 하고. 혹시 술집 운영하는 가문하고 싸웠어? 그래서 지금 복수하러 가는 거야?” 이 고양이 한 마리는 ‘솔스비’가 암살단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현재 그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줄 정신적 여유를 가진 인물은 이곳에 없었다. “별장에 있는 놈들은 총 몇 명인가?” 피터가 고개를 돌려 다시 자기 길드원들에게 물었다. “총 열두 명입니다.” “그중에 핵심 멤버는 별장 안 지하실에 있는 세 명이며, 그곳에 납치된 분도 같이 잡혀계신 걸로 보입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별장 밖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길드원들이 연달아 대답했다. “음, 그 정도면 아까 내 마차를 습격한 놈들의 수와 같군. 그게 녀석들 전력의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지부장이 대답했고 다른 넷의 길드원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실이라. 거기 너구리가 붙잡혀 있다 이거지.” 나는 깜깜한 별장을 바라보며 목적지를 되새겼다. 현재 명심해야 할 것은 별장에 있는 납치범들을 족치는 게 아니라, 일단은 너구리를 구하는 거니까. 놈들을 족치는 건 그다음에 해도 되었다. “아, 너구리가 붙잡힌 거야?” 다니엘은 이제야 그걸 알고 내게 반문했다. “대체 언제부터 몰래 너구리를 길렀어? 혹시 알렉시스, 네 방에서 길렀냐?” 이렇게 묻는 걸 보니, 어쩌면 진짜 동물 너구리로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 그럼 전략을 설명할게.” 시간이 없었으므로 병아리가 우리 앞에서 빠르게 삐약거렸다. “나와 길드원들이 먼저 별장 주위로 흩어진 후에 불을 피워서 녀석들의 시선을 끌게. 우리 인원이 좀 많아 보이게 하는 거지. 그사이에 알렉시스랑 다니엘 공자는……” 피터가 열심히 자기가 구상한 전략을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에이, 뭘 그런 복잡하고 귀찮은 짓을 해? 인생 뭐 있나? 당장 쳐들어가자고!” 병아리의 말을 끊어버리며 내가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살다 살다 도른 놈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는 소리를 하네. 뭘 망설여? 갑시다!” 아무것도 모르는 대형냥 다니엘이 맞장구를 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며. “피터 레이, 그리고 나머지 길드원들은 뒤에서 따라오기만 해라.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소탕은 우리가 할 테니.” 퇴폐미남은 대체 언제 일어났는지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채로 말했다. “어……, 아니 그래도…….” 피터는 자신의 완벽한 전략이 몽땅 폐기될 상황에 처하자 어버버했지만. “가자!!” “가자고!!” “간다.” 나, 다니엘, 퇴폐미남이 동시에 말하면서 별장을 향해 뛰쳐나갔다. *** 적들의 행동반경에 진입한 이후부터, 우리는 일절 소리치지 않고 조용히 상대들을 처리했다. 주요 전력인 나와 다니엘, 제라드는 마치 서로 합의라도 한 듯이 별장 건물 주위로 갈라졌다. 별장 밖에서 경계를 서던 아홉 명의 암살단원들이 어둠 속에서 하나씩 차례대로 쓰러져 나갔다. 솔스비 암살단도 보통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하나하나 실력이 제법 강했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황궁에 있을 적에 탑으로 찾아오던 암살자들과 비슷한 실력이랄까? 즉, 그쪽 업계에서는 나름 일류라고 할 수 있었다. 만일 녀석들이 떼로 움직여서 나와 싸웠다면 그들에게도 충분히 가망이 있었을지 몰랐다. 그러나 이번엔 경계를 서느라 따로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씩 처치하면 그만이었다. “알렉시스, 넌 몇 명 해치웠어?” 별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정문 앞에서 마주쳤을 때 다니엘이 물었다. 대형 고양이도 무려 암살단의 살수를 상대한 건데 별 상처 없이 멀쩡한 것을 보니, 검술 실력은 의심할 수 없었다. 난 잠깐 내가 해치운 녀석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며 대답했다. “세 명.” “난 둘인데. 그럼 제라드 공자가 나머지 네 명을 해치웠나?” 그때 마침 우리 앞에 나타난 제라드가 검을 들고 있는 채로 대꾸했다. “나도 셋이다.” “…….” “…….” 나는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우리 셋이서 각각 적들 세 명, 두 명, 세 명을 해치웠다면. 모두 여덟 명을 해치운 셈이다. 그러나 파라야 길드의 정보로는 총 아홉 명이 별장 경계를 서고 있다고 했는데. “뭐야, 한 놈이 비잖아.” 내가 중얼거리자. “화장실 갔나 보지.” 고양이가 대답했다. “…….” 퇴폐미남은 아무 말 없이 그 문제의 암살단원이 정말 화장실에 간 걸까 심사숙고하는 눈치였다. “나머지 하나는 저희가 처리했습니다.”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건 굵직한 목소리였다. 우리가 모두 뒤돌아봤을 때 피 묻은 검을 들고 있는 길드 지부장이 보였다. 그 뒤에는 마찬가지로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는 병약미남과 다른 정보 길드원들이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즉 6명의 정보 길드원들이 1명의 암살자를 처리한 것이다. 비록 6대 1이지만 상대가 암살단원임을 고려하면 활약이라고 해도 되었다. “파라야도 쓸모가 있었군.” 퇴폐미남이 한쪽 눈썹을 위로 들어 올리며,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우리도 다들 기본은 해…….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그렇게 대답하며 피 묻은 검을 바라보는 병아리의 얼굴은 살짝 거북스러워 보였다. 싸움 같은 것은 익숙지 않은 꽃미남이었다. 이제 별장 안에 남은 납치범은 셋이었다. 나와 다니엘, 퇴폐미남이 곧바로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잠깐만. 혹시라도 납치범들 중에서 도망쳐 나오는 놈이 있을지 모르잖아!” 병아리가 다급히 말했다. “너희 셋 중 한 명은 우리 길드원들과 같이 별장 주위를 감시하는 게 어떨까? 누가 튀어나오면 바로 잡을 수 있게.” “에이, 누가 도망을 나와! 그럴 일 없어! 주인공인 내가 있는데! 놈들이 도망치기도 전에 내가 다 해치워버릴 거라고!” 내가 당당히 대꾸했다. “살다 살다 도른 녀석이 계속 맞는 말만 하다니! 당연히 도망은 꿈도 못 꾸지! 우리가 그전에 다 해치울 테니까!” 고양이 한 마리가 의기양양하게 맞장구를 쳤다. “글쎄, 자네 말도 일리는 있지만 나는 주변이나 감시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다. 뭐, 너희 길드가 정 주위를 감시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도록.” 퇴폐미남은 알아서 하라는 투로 뱉더니 안으로 쓱 들어가 버렸다. 나와 다니엘까지 별장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병아리도 별도리가 없었다. 피터가 손짓하자 길드원들이 별장 주위를 감시하기 위해서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이후 피터도 우리를 따라 별장 안으로 서둘러 쫓아왔다. 67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우리는 발걸음 소리를 죽인 채, 먼지가 제법 쌓여있는 응접실과 복도를 지나,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흐릿한 불빛이 지하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착착 지하실 문의 양옆에 섰다. 다니엘은 퇴폐미남의 옆에, 병아리는 얼결에 내 옆으로 와서 섰다. 지하실 안에서는 희미한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소리가 작아서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무튼 검을 든 채로 나는 퇴폐미남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문은 내가 먼저 부수겠다.’ 그가 먼저 눈으로 말했다. ‘아냐. 내가 먼저 부술 건데.’ 내가 눈으로 대답했다. ‘어쩌면 그냥 열려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내가 한번 손잡이를 돌려볼까?’ ‘좋은 생각이다. 문 열어보고 안 열리면, 그때 내가 부수겠다.’ ‘무슨 소리야, 부수는 건 내가 할 거라니까.’ ‘좋아. 네 맘대로 해라.’ 퇴폐미남과 나는 말없이 눈길만으로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니 적어도 난 그렇다고 믿었다. 그래서, 슬쩍 문 앞으로 다가가 손잡이에 손을 뻗었고, 옆으로 돌렸다. 잠겨 있었다. 그러나 손잡이를 돌린 달각, 하는 소리에 문 안쪽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던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뚝 그쳤다. “…….”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안에서 누군가 뚜벅뚜벅,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예상 밖의 상황에 살짝 당황했다. “이런, 내가 문을 부숴야 하는데. 안에서 납치범 녀석이 먼저 열라고 하는데?” “문을 부수긴 왜 부숴?” 퇴폐미남이 뜬금없다는 듯이 뱉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문 부수기로 했잖아.” 내가 말했다. “뭐? 우리가 언제 그런 얘길 했어?” “눈빛으로 너랑 대화했잖아. 못 들었어?” “…….” “…….” 퇴폐미남뿐만 아니라 옆에서 듣던 다니엘과 피터까지 황당해하며 날 쳐다봤다. 아직 문을 부술지 말지 결정하지 못했는데, 안쪽에서 뚜벅뚜벅 다가오던 그 발소리가 뚝 멈췄다.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을 테니까. “뭐해! 당장 부숴!” 퇴폐미남이 소리쳤다. “그치? 내가 부수는 거지? 그럼 부순다!” 내가 말함과 동시에 문을 발로 찼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문이 부서지지 않았다. 잠시 당황했지만, 퇴폐미남과 다니엘, 피터가 동시에 몸을 날려 문을 부숴버렸기 때문에 난 편하게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문이 부서지면서 파편이 바닥에 떨어지고 먼지를 풀풀 날렸다. 먼지 덕에 가려진 시야 때문에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먼지 속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적의 칼날이 내 눈앞으로 날아 들어왔다. 챙! 나는 황급히 검을 들어서 그걸 막았고, 칼날이 부딪혔다. 먼지가 가라앉으면서 복면을 쓴 상대가 보였다. 단번에 내가 놈의 목을 그었고 상대가 쓰러졌다. “끝냈나?” 퇴폐미남의 목소리가 묻기에, 난 휙 고개를 돌려 방 안을 확인했다. 퇴폐미남 앞에는 이미 납치범 하나가 쓰러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여유로운 태도로 날 바라보는 제라드를 보자 저절로 콧방귀가 나왔다. “잘난 체하기는. 지금 네가 나보다 한 0.1초쯤 더 빨리 적을 해치웠다 이거냐?” “0.1초가 아닌 것 같은데.” 퇴폐미남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흥, 내가 상대한 놈이 더 셌다고. 그래서 0.1초 더 걸린 거야.” 나는 아랑곳 않고 우겼다. “그래, 그런 걸로 해라.” 퇴폐미남은 예상보다 경쟁심이 부족했다. 언제는 내가 라이벌이라더니. “잠깐만. 근데 왜 납치범이 둘밖에 없지? 셋이라면서? 남은 한 명은? 내가 처리해야 할 놈은 어딨어?” 다니엘이 적을 찾아 눈을 부라린 채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물었다. 같은 사실을 이미 한참 전에 인식한 피터는 어느샌가 유심히 방 안을 관찰하고 있었다. 곧 피터는 무언가를 알아낸 것처럼 황급히 지하실 구석으로 달려갔다. “비밀 통로가 있어!” 그냥 보면 나무 바닥처럼 보이는데 도대체 어떻게 눈썰미 좋게 찾아낸 건지, 피터가 구석 바닥에 있는 나무판자를 뜯어서 들어 올렸다. 그러자 더 캄캄한 지하실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나왔다. “읍! 읍!” 그 지하 2층에서는 누군가의 웅얼거리는 듯한 신음 소리가 났다. 가만 보니까 어둠 속에 누군가가 밧줄에 묶여 있었다. “공주님!” 피터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엥?” “어?” “흠?” 난데없는 외침에 나와 다니엘, 퇴폐미남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떠올리면서 굳어버렸다. 잠시 후에 내가 손으로 이마를 탁 치면서 말했다. “아! 여기에 납치된 사람이 또 있나 봐? 어느 나라 공주님인가 보지?” 하지만, 내 말과는 달리 아무리 2층 지하실을 내려다봐도 보이는 건 토실토실한 너구리밖에 없었다. 덕분에 난 혼란스러워졌다. “읍! 읍! 읍!” 한편, 너구리는 입에 재갈이 물려 말을 못 하는 상태였다. 너구리는 2층 지하실에 밧줄로 곱게 묶인 채로, 우리 쪽을 향해 위를 올려다보며 빨리 와서 이거나 풀라는 듯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피터가 너구리가 살아있는 것을 보고는 눈에 띄게 안도하면서 먼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그 뒤를 따라 어리둥절한 나와 다니엘이 내려갔지만, 퇴폐미남은 따라오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크리스티나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병아리가 서둘러 너구리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며 물었다. “…….” “…….” “…….” 역시 아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우리들은 모두 빤히 피터를 바라보았다. “크, 리, 스, 티, 나?” 일단 다니엘은 그 이름에 먼저 놀랐다. “공, 주, 님?” 그리고 퇴폐미남은 그 신분을 확인했다. “너구리가 지금 여자라는 거야? 아스테시아에 나 말고 남, 장, 여, 자, 가 또 있었어?” 난 이 숨겨진 비밀에 마지막으로 흥분했다. “……?” “……?” “……?” 모두의 시선이 홱 나에게로 돌아왔고, 심지어 너구리의 시선까지 힐끗 내게 향했다. “뭐라고? 너도 여자라고???” 다니엘이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날 향해 빽 소리를 질렀으며. “아 비밀인데. 된장. 말해버렸네?” 나는 너무 싼 내 주둥이에 새삼 놀랐으며. “난 이미 알고 있었다.” 퇴폐미남의 마지막 발언에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다만, 피터만큼은 이미 퇴폐미남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던 눈치로, 열심히 너구리의 밧줄을 풀 뿐이었다. “그간 모르는 척하느라 곤욕이었는데 차라리 본인이 먼저 밝혀버리니 속 시원하군.” 퇴폐미남이 갑자기 후련해했다. “이게 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이야?” 다니엘은 주변인들의 연속적인 폭로에 그만 어안이 벙벙해서 넋을 잃은 상태였다. “……아무튼 저는 괜찮아요.” 이제야 너구리가 입을 뗐다. 대체 아직까지도 그 정체를 모르겠는 이 ‘크리스티나 공주’는 이제야 살았다는 듯이 고마워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아스테시아에서 단 한 번도 불려본 적이 없는 너구리 공자의 이름은 ‘크리스티안’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크리스티나’라고 불린 것을 볼 때, 나처럼 이름을 포함해 신분을 위조했음이 분명했다. “너구리 공자, 진짜 공주님이에요?” 참다못한 내가 끼어들며 일단 그것부터 물었다. “네, 근데 신경 쓰지 마세요.” 너구리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여전히 토실토실하지만, 납치로 인해 나름대로 피폐해져 더 자세히 말해줄 기운은 나지 않는 듯했다. “아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다니엘이 심각한 고뇌에 빠져 소리쳤다. “별거 아녜요. 우리 케아르 왕국은 제국과 비교하면 그저 작은 영지나 다름없으니까요. 공주래 봤자 제국 영애들과 별 차이도 없답니다. 아까 납치범들 하는 얘길 들어보니까 차라리 알렉시스 공자 쪽이……” 너구리가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나는 어쩐지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은 ‘크리스티나 공주’의 말을 황급히 끊어버렸다. “잠깐! 마지막 납치범은 그럼 어딨는 거야? 정말 도망친 건가?” 내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말하자, 모든 사람이 사라진 마지막 납치범의 존재를 떠올렸다. “참, 절 납치한 사람 말이에요, 그게 누구였냐 하면……” 그제야 생각났는지 너구리가 말을 뗐다. 폭로는 이제 끝인 줄 알았는데 아직 마지막 한 방이 남은 거니? 하지만 그와 동시에 지하실로 달려오는 몇 명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기에, 우리는 모두 사다리 위쪽을 바라보았다. 제라드도 고개를 홱 돌려 지하실 입구를 바라보았다. “한 놈이 뒷문으로 도망쳐 나오길래 붙잡았습니다.” 길드 지부장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그에 손에 의해 쿵, 하고 마지막 납치범이 지하실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독침을 쏘는 놈입니다. 길드원 중 하나가 당해서 응급 마차로 치료하러 보냈고, 이놈이 가진 나머지 독침은 전부 수거하였습니다.” 이제 정보 길드원들은 지부장을 포함해 셋뿐이었다. 하나는 독침에 당했고, 다른 하나가 그를 부축해서 같이 응급 마차로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퇴폐미남은 마지막으로 잡혀 온 납치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카일 밀리안.” *** “엥? 카일님이 왜 여기 계세요?” 황급히 사다리 위로 올라간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3번 금욕미남을 발견하고는, 토끼 눈을 뜨고 물었다. “등신 같은 새끼. 넌 눈치도 없냐?” 카일이 짜증 난다는 듯 대꾸하며, 일어나려고 몸을 추슬렀다. “엥?” 평소와 딴판인 반응을 하는 3번을 마주하자 난 당황스러웠다. 항상 예의 바르고 친절한 캐릭터가 바로 금욕미남인데? 원작에서도 독자들의 응원을 한 몸에 받던 남주 후보였는데? “사돈 남 말 하는군. 눈치가 없는 건 너겠지.” 제라드가 냉소하며, 일어나려던 카일의 무릎을 발로 차서 쓰러트렸다. 악, 낮은 비명을 뱉으면서 카일이 일어나지 못한 채 도로 쓰러졌다. “납치 살인범 주제에 말이 많아.” 퇴폐미남이 쏘아붙이자, 카일이 고개를 치켜들며 그를 노려보았다. “납치는 알겠는데, 살인범으로 몰다니 너무하군그래. 죄 없는 사람을 살인범으로 모함해도 되는 거야?” “만찬장에서 브랜든 공자를 독살한 게 너 아닌가? 굳이 부인할 필요 없을 텐데.” “…….” 68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브랜든 공자라면……. 나는 기억을 더듬어 왠지 귀에 익은 그 이름을 열심히 떠올렸다. 그는 바로, 한두 달 전에 만찬장에서 갑자기 쓰러져 심장마비로 죽은 학생이었다. 킥킥킥, 카일이 갑자기 혼자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그 모습이 살짝 소름 돋아서 나는 팔을 손으로 파박 문질렀다. “내가 범인이라고? 그럼 왜 입 닥치고 가만있었지? 하긴, 증거가 없겠지.” 기괴하게 킬킬거리는 카일의 목소리가 지하실에 울렸다. 금욕미남의 변화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난 멍하니 입만 벌렸다. “…….” “…….” 다니엘도 놀란 듯이 내 옆에서 눈만 크게 뜨고 있었고, 길드원들조차 흥미진진한 표정을 감춘 채 사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오로지 피터만이 별 놀란 기색이 없었으며, 오히려 지친 너구리에게 물병을 건네주고 앉을 자리도 권하는 등 신경을 쓰고 있었다. “설마 정말 카일이? 3번 카일? 카일 밀리안? 금욕미남이었다고? 납치범이? 살인범이?” 내가 어이가 없어서 따다다다 따발총처럼 뱉어냈다. “에이 아닐 거야. 아니겠지. 카일이 왜? 설마 카일이 그간 몰래 황자의 명을 받고……?” 도무지 믿고 싶지 않지만, 나는 말을 하는 도중 깨달았다. 카일이 내내 날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뒷맛이 약간 텁텁하네요. 아직 덜 익은 사과로 만들었나?” 언젠가 카일과 같이 근로 장학 날에 잔디밭에서 점심을 먹었을 때, 사과 주스 맛이 이상했었다. “그렇습니까?” 그때 카일은 내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당시 사과 주스는 내 컵에 먹은 것만 맛이 이상했다. 즉, 그가 건네준 내 컵에 독이 발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있었다. “짜증 나게.” “불사신이야 뭐야.” 카일은 정원에서 누군가에게서 전서응을 통한 메시지를 받고는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바로 내가 용족에게서 살아남은 직후였다. 그것은 카일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욕 편지가 아니라, 황자와 주고받던 전갈이 아니었을까? “퀴…즈 대회 말입니까? 검술 대회가 아니고요?” 또, 내가 퀴즈 대회 출전할 거라고 말했을 때, 카일은 크게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카일은 내가 퀴즈 대회에 출전할 거라고 지금까지 믿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피터가 부탁해서 너구리 공자가 대신 대회에 나갔다는 걸 몰랐고, 결국 나 말고 너구리가 납치되었던 것이다. “다 네놈이 저지른 짓이었다고?” 난 어이가 없었다. “내가 심지어 카일님이라고까지 불러줬는데? 차렷 경례도 하며 충성을 바쳤는데?” “지랄하고 자빠졌네.” 카일이 코웃음을 치자, 나는 곧바로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고함을 쩌렁쩌렁 외쳤다. “이 나쁜 놈!” 난 도무지 이 배신감을 견딜 수가 없어서 입에서 불을 뿜었다. “나한테 독도 먹이고, 용족도 풀었지? 그때 자칫하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공자들까지 전부 죽을 뻔했어!” “알아. 기왕이면 제라드 녀석도 겸사겸사 같이 처리하려고 한 거니까.” 붙잡혀서 바닥에 형편없이 쓰러져 있는 주제에 카일은 실실 웃었다. 어차피 붙잡힌 거, 자포자기를 했는지 약간 정신줄을 놓은 것 같기도 했다. “어…… 잠깐만, 그럼 그때 용족을 푼 게 카일 공자란 말이야?” 같은 검술 수업 때문에 숲에 있었던 다니엘이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을 재확인했다. 카일이 낄낄대고 웃었다. 그 반응을 보자 대답을 알게 된 다니엘은, 갑자기 낯빛이 시뻘게지며 분노했다. “이 자식이 미쳤나! 그딴 짓을 대체 왜 해!” “이것 참 웃기는군. 다니엘 공자, 자네는 여기 왜 있는 거지?” 카일은 낄낄거리다 갑자기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면서 다니엘을 보며 되물었다. “뭐라고?” “자네 아버지는 황궁 기사단장이잖아. 이전에는 선황제를 모셨고, 지금은 현 황제 폐하를 모시고 있지. 그게 자네 아버지의 의무니까 말이야.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행동한 것뿐이라고.”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황제 폐하께서 여기서 왜 나와?” 뜬금없이 현 황제가 언급되자, 배경 상황을 전혀 모르는 다니엘은 당황해했다. “다니엘 공자, 그럼 내가 이 모든 짓을 내 마음대로 혼자 한 것 같아? 하늘에 맹세컨대, 난 황제 폐하의 명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모든 건 그분의 뜻이라고.” “…….” 뭐야? 진짜야? 하는 혼란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다니엘이 빤히 카일을 쳐다보았다. “잘 생각해 보라고. 그대 아버지인 펠트 자작과 나의 차이가 뭐지? 없어. 그저 충실한 폐하의 신하라는 것밖에는…….” 카일이 다니엘의 멍한 반응을 즐기며 말을 계속했다. “다니엘 공자, 자네야말로 황제 폐하께 충성한다면, 지금 여기서 얘네들하고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지금이라도 검을 들고 저놈들과 대적해서 날 구해야 하는 거라고.” “……알렉시스, 네가 말해봐. 이게 지금 무슨 일이야?” 다니엘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갑자기 홱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며 의문을 뱉어냈다. 퍽―! 나는 다니엘의 등을 손으로 한 대 세게 치며,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냐옹아, 내 말 똑바로 잘 들어라.” “어?” 졸지에 등을 얻어맞은 다니엘이 두 눈을 멍하니 깜박였다. “카일 이 자식, 암살단 소속이야. 솔스비 암살단.” 내가 씩 웃었다. 그리고 달려들어 카일의 셔츠를 확 들어 올렸다. 그의 옆구리에 새겨진 문신이 드러났다. 암살단 소속임을 뜻하는 박쥐 모습의 검은 문신. “무슨 짓이야!” 카일이 화를 내며 버둥거리며 문신을 가리려고 했지만, 막무가내인 내 힘을 당할 순 없었다. 내가 이 문신에 대해 알게 된 건, 황궁에서 암살자들을 처리할 때였다. 그리고 아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이 문신에 대해 알 것이었다. “…….” “…….” “…….”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니엘의 표정이 순식간에 살벌하게 굳었기 때문이었다. “암살단?” 한마디로, 기사들의 적. 특히 기사도를 충실히 따르는 모범적인 기사들에게 있어서, 암살단의 존재는, 이 세상에서 멸종시켜야 할 그야말로 쓰레기 그 자체일 뿐이었다. “……암, 살, 단?” 다니엘이 다시 한번 한자씩 또박또박 씹어 뱉으면서 카일을 노려보자, 카일마저도 잠깐이나마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맞아, 암살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방구석에서 2번 병아리가 대뜸 맞장구를 치며 거들었다. “예, 그럼요. 암살단이죠.” “솔스비라고 합니다. 솔스비.” “아주 악명 자자한 애들이죠.” 정보 길드원들도 피터가 운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순간 다니엘은 분노가 어린 얼굴로 카일을 경멸하듯 내려보다가 갑자기 퍽, 하고 발길질을 했다. “카일 너 이 자식! 어디서 헛수작이야!” “억!” 복부를 얻어맞은 카일이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다니엘이 발길질을 계속했다. “감히!” “억!” “황제 폐하께서!” “억!” “더러운 암살단 녀석들과!” “억!” “결탁하셨을 리가 없잖아!” “억!” “어디서 거짓말을 지어내?” “억!” 다니엘이 씩씩거리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퍽, 하고 찼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이 쓰레기 같은 암살단 새끼 같으니라고!” “억!” 카일이 고통에 겨운 눈물까지 흘리면서 복부를 손으로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 “…….” “…….” 너무 성정이 바른 다니엘은 정말이지 추호도 현 황제가 암살단과 결탁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즉, 그에게 있어 카일의 회유는 죄다 거짓말이자 헛소리가 되어버렸다. 반면 진실을 아는 우리로서는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 길드원들도 모른 척 입을 다물고 눈알을 굴렸다. “룰루룰루루~~” 다니엘로 하여금 이런 오해를 일으키게 된 나는 괜히 허공이나 보면서 모른 척 휘파람이나 불었다. 한편, 다니엘은 마지막으로 카일을 내려다보면서 차갑게 쏘아붙였다. “게다가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우리 아버지에 대해 운운해? 어디서 너 같은 새끼랑 우리 아버지를 비교해? 한 번만 더 입에 올리면 그땐 진짜 죽여버린다.” “……컥, 재밌군.” 고통으로 기침을 한 카일이 갑자기 실성한 듯 실실 웃었다. “앞뒤가 꽉 막힌 게, 그 아비에 그 자식이야.” “내가 경고했지! 우리 아버지 입에 올리지 말라고!” 퍽, 하고 다니엘이 다시 한번 카일의 복부를 발길질했다. 커억, 카일이 다시 한번 고통에 몸부림쳤다. 고양이도 화나면 무서웠다. “시발, 다들 고상한 체하기는……. 이게 다 제라드 너 때문이야, 이 새끼야.” 카일은 퉤, 하고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뱉고는 갑자기 뜬금없이 퇴폐미남을 노려보았다. “그깟 별 볼 일 없는 하녀 하나 죽은 거 가지고 지랄은.” 카일이 갑자기 분노를 표출했다. “날 의심하면서 우리 가문과 연을 끊는 바람에 내가 우리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당한 줄 알아?” 반면, 퇴폐미남은 대꾸도 없이 냉랭한 눈으로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아버지도 날 없는 자식처럼 취급하고, 동생한테만 작위를 물려주었어! 너만 아니었으면, 난 가문에서 쫓겨날 일도 없었고! 암살단에 들어갈 일도 없었다고!” 우린 처음 드러나는 3번과 4번의 배경 스토리에 흥미를 갖고 귀를 기울였다. “웃기는군. 너희 집안일까지 내가 알아야 하나? 그리고, 가문에서 쫓겨났으면 학교나 잘 다닐 일이지, 암살단에 들어간 것까지 내 책임인가?” 퇴폐미남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그 하고많은 단체와 길드 중에 암살단을 선택한 것만 봐도 뻔하지. 설마 낸시를 죽인 게 네놈이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 그런 퇴폐미남의 냉랭한 태도가 더욱 분노를 일으켰는지 카일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시발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난 열두 살이었다고! 누가 열두 살짜리를 하녀 살인범으로 의심해?” “글쎄, 당시에 나 역시 충분히 다른 자를 죽일 능력이 있었으니, 같은 나이인 네놈이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지. 다만, 너와는 달리 난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 “…….” “…….” 다들 퇴폐미남의 어린 시절은 대체 어떤 것이었는지 상상하며 뭐라 할 말을 잊은 찰나. “근데…… 둘이 어린 시절에 친구였어? 집에 놀러 갈 정도로?” 난 그 사실을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69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친구는 무슨!” 카일이 먼저 부정했다. “그저 가문끼리 조금 알던 사이일 뿐,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제라드도 부정했다. “밀리안 상단은 우리 가문과 오래 거래를 해왔기 때문에 평소에 교류가 좀 있는 편이었지. 여름만 되면 항상 다른 귀족들이 보낸 자제들이 우리 별장에 놀러 오곤 했는데, 나랑 친하게 지내면 나중에 이득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겠지. 카일 저 자식도 그런 애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제길, 너 같은 성격 더러운 새끼를 누가 좋아해서 갔을까. 억지로 간 거지! 네놈 비위 맞춰주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카일이 제라드를 쏘아보며 새삼 과거의 고충을 토로했으나, 제라드는 콧방귀만 뀌었다. “그런 공자들을 친구로 여기기엔,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아부하는 태도가 거부감 느껴졌지. 결국 난 친구 없었다.” “참 자랑이네.” 내가 쯧쯧, 혀를 찼다. 분명 개중엔 알고 보면 괜찮은 공자들도 있었을 텐데, 싸바의 성격 탓에 친구로 남지 못한 것이리라. “카일 밀리안. 어차피 공소시효도 지났고, 암살단원이라 것도 밝혀진 마당에 그냥 솔직히 말하지 그래.” 제라드가 문득 카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말했다. “낸시가 따온 채소 바구니에 네가 독초를 넣었지? 다들 그녀가 운이 나빠 죽었다고 믿었지만. 그녀가 채소를 딸 때 우연히 독초가 섞였고, 실수로 그걸 먹었다고 말이지.” “…….” 카일은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난 봤어. 죽은 낸시의 시신 앞에서 네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퇴폐미남이 목소리가 지하실 안에 건조하게 울려 퍼졌다. “그런 들뜬 표정은 처음 봤지. 물론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감쪽같이 사라졌지만.” “…….” “낸시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항상 상냥하고 친절했지. 심지어 나나 너 같은 재수 없는 자식들한테도 말이야. 그런데 넌 그냥 심심풀이로 죽인 거야.” “…….” “그러고 보니, 아까 정보 길드원에게 독침을 쐈다고? 열두 살에도 독초를 썼으니 독이 네 주 종목인가 보군. 대체 솔스비 암살단이 뭘 보고 약해빠진 널 받아주었는지 알겠어.” 방 안의 사람들은 굳은 채로 말없이 카일을 응시하고 있었다. 금욕미남은 킥, 킥킥, 하고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킥킥거리던 카일은 눈에 핏대를 세우며 제라드를 올려다봤다. “그래서 내가 두려웠나, 제라드? 날 곁에도 못 오게 한 걸 보면? 내가 네 음식에 독이라도 넣을까 봐?” “착각하지 마라.” 제라드가 차갑게 대꾸했다. “우리 가문의 훈련을 우습게 보는군. 난 어린 시절부터 독에 내성을 길렀다. 네놈의 수법은 소용없어. 그저 네 낯짝만 보면 그때 너의 들뜬 표정이 떠올라서 기분이 더러웠을 뿐이다.” 크, 크크큭, 카일이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홱 날 쳐다보고 쏘아붙였다. “알렉시스, 너도 어릴 때부터 독 처먹으면서 내성 길렀냐? 그래서 안 통한 거야?” “…….” 카일이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 자체가 날 독살하려 했다는 걸 자인하는 셈이었기에, 난 당황스러웠다. “분명 절4 멤버가 맞는데.” 난 조용히 웅얼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말 미남으로 보였는데, 이상하게 더는 미남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카일의 얼굴은 기분 나쁘게 일그러져 있었다. “독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나, 무모하게 용족을 풀지를 않나……. 사람 낯짝도 못 알아보고 애꿎은 사람이나 납치하는 머저리가 누군가 했더니, 설마 3번이었다니…….” 이렇게 추한 모습으로 변할 줄이야. 난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왠지 볼품없어져 버린 카일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내 말을 도발로 받아들였는지, 카일은 벌컥 역정을 냈다. “누가 머저리라는 거냐. 나야 네 얼굴을 뻔히 아는데, 제대로 널 납치했겠지!” 음…… 하지만 머저리가 맞는걸? 납치할 게 아니라 그냥 카일이 여기서 만나자고 꼬드겼으면 난 제 발로 알아서 좋다쿠나 하고 왔을 텐데……. 뭘 힘들게 납치를 하고 앉았어. 그런 내 속마음과 달리 카일은 계속 분노했다. “멍청한 암살단원들과 나를 똑같이 엮지 마라! 나는 명을 내린 후 이곳에서 줄곧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니까!” 아직도 자존심은 센지 자길 머저리라고 한 건 용납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감히 해서는 안 될 말을 입에 올리고 말았다. “놈들이 엉뚱한 돼지 새끼를 데려올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 “…….” “…….” 아무도 말이 없었고, 이상하게 내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왜일까? 방 안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치 먹구름이라도 낀 것 같았다. 어디선가 어둠의 오오라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이라도 이 방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지만, 완전히 겁에 질린 내 발은 마치 호랑이 앞에서 공포로 마비된 사슴처럼 꿈쩍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이들도 전부 마찬가지인지, 아무도 미동도 없었다. 마치 태풍의 눈 안에 들어온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돼, 지, 새, 끼……?” 마침내 그분께서 입을 열었다. 2층 지하실에 묶여 있다 구출되어 1층 지하실로 올라온 뒤로, 한마디도 없이 그냥 구석에서 편히 쉬고만 있었던 바로 그분이었다. “방금…… 누가…… 날 보고…… 돼지 새끼라고 한 것 같은데……?” 너구리의 동그란 볼이 움찔거렸다. 그분께서 검은 오오라를 풍기며 자리에서 토실토실한 몸체를 일으키자, 다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오로지 카일만이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눈치였다. 다니엘에게 아까 너무 많이 얻어맞아서 정신이 온전치 않아서 그런가? 한편 ‘크리스티나 공주님’은 장엄한 모습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 발걸음이 떨어질 때마다 다들 공포로 몸을 떨었다. 난 확신했다. 이세계의 최강자는 나도 아니고, 퇴폐미남도 아니며, 황제도 아니고…… 바로 너구리라는 사실을. 적어도 비공식적으로는. “너야?” 너구리가 걸음을 멈추고 다니엘을 보며 묻자, 다니엘이 식겁했다. “아니요!”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너구리의 공포스러운 두 눈동자가 다니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떨어졌다. “그럼 너냐?” 너구리가 정보 길드의 지부장을 향해 묻자, 그 건장하고 굳건하던 지부장은 거의 오금을 지릴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아닙니다!” 너구리의 눈길이 곧바로 정보 길드원들에게로 향하자, 그들은 공포에 질려서 동시에 손가락을 들어 3번 카일을 가리켰다. “저놈입니다!” 그러자 너구리의 두 눈이 곧바로 카일에게로 확 꽂혔다. 그 눈빛이 너무나 무서워서 우리는 심지어 카일에게 동정심마저 느낄 정도였다. “시발 이건 또 뭐야. 이젠 개나 소나 다 튀어나오네.” 아직 정신 못 차린 카일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지만. “네놈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너구리가 싸늘하게 뱉었다. “감히…… 돼지 새끼라고 했겠다. 도무지 인간이라면 절대 입 밖으로 뱉어서는 안 되는 최악의 쌍욕을 뱉어?” 내가 알기로 냠냠신선에게 이보다 심한 막말은 없었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것 같은 한기가 몰려와서 나는 절로 어깨를 움츠렸다. 나뿐만 아니라 다들 몸을 움츠렸다. “그럼 돼지 새끼를 돼지 새끼라고 하지, 뭐라고 하냐?” 아직 상황 파악 안 된 카일만이 콧방귀를 뀌면서 무모한 말을 씨불였다. 너구리가 표정을 일그러뜨렸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질렸다. 당장이라도 천둥과 번개가 치고 땅이 무너지고 여기저기에서 화산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던 바로 그때. “돼지가 아니고 너구리라니까.” 보다 못한 내가 끼어들었다. “…….” “…….” “…….”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지면서, 모든 이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꽂혔다. 심지어 너구리 공주마저 이건 뭐지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너구린데 왜 자꾸 돼지래.”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낀 내가 다시 한번 그렇게 덧붙였다. “시발,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야. 돼지 새끼면 어떻고 너구리 새끼면 어떤데. 지금 이 상황에 그딴 게 중요해?” 카일이 나와 너구리를 노려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는 헉, 하고 숨을 다시 들이켰다. 카일이 다시 한번 ‘돼지 새끼’를 입에 담은 것이다! 이번이 무려 세 번째였다! “하…….”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흘러나오는 것만 같은 탄식이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천천히 쏠렸다. 너구리 공주는 카일 앞에 우뚝 선 채로,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두 눈으로 마치 벌레라도 보듯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를 아드득 갈며 말했다. “감히…… 식도락 클럽 회장 앞에서…… 돼지 새끼를 운운하다니…….” “뭐?” “이 자식이…… 뚫린 입으로 말이면 다인 줄 알아……?” 너구리는 평소의 신선다운 무덤덤함은 다 어디로 갔는지 분노로 눈이 뒤집혀서 퍽! 하고 금욕미남의 면상에다 주먹을 날렸다. 억, 하고 카일이 얼굴을 움켜쥐었지만, 너구리의 주먹질은 끝나지 않았다. 퍽! “억!” 퍽! “억!” 퍽! “억!” 도무지 피할 수도 없는지, 카일은 계속해서 그 잘생긴 얼굴을 얻어맞았다. 몇 번 얻어맞자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카일의 눈빛에 공포가 서리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말해봐.” 너구리가 멱살을 잡고 으르렁거렸다. 난 너구리가 아니라 호랑이인 줄 알았다. 70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얻어맞으면서 너구리가 최강자임을 눈치챈 카일은, 비록 좀 늦었지만 어떻게든 살길을 도모하려고 했다. “아! 이봐, 그, 그건, 그냥 실수였어! 말이 잘못 나간 거야. 내가 살인도 하고 납치도 하고 암살단에도 속해 있지만, 남을 돼지 새끼라고 부르는 쓰레기는 아니라고!” 헉, 하고 우리는 또다시 숨을 들이켰으며, 카일도 아차 싶어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카일이 하필이면 또 ‘돼지 새끼’를 입에 담은 것이다! “이 자식이!” 너구리가 분노했다. 퍽! “억!” 퍽! “억!” “잠깐만. 그러다 진짜 죽겠는데. 그전에 알렉시스 방에서 녀석이 뭘 찾으려 했는지 물어봐야……” 퇴폐미남이 침착하게 말을 건네 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너구리는 마치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듯, 집중해서 다시 주먹을 날렸다. 퍼억! “어억!” 너구리의 토실토실한 주먹은 생각보다 묵직했다. 냠냠신선이 화나면 정말 세계 최고로 무섭구나. 고양이도 이에 비할 순 없었다. 난 그냥 이 별장에 널브러져 있는 다른 솔스비 암살단원처럼, 카일도 그냥 부상을 입고 기절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랬다면 녀석도 이런 공포는 느끼지 않았을 테니까. “죄, 죄송합니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오늘 들어 처음으로 카일이 빌었다. 그러나 이미 낯짝은 피떡이 된 후였다. “죄송할 거면 애초부터 그 말을 입에 올리지 말았어야지!” 오히려 카일의 사과가 너구리의 분노를 더 일으켰는지, 다시 주먹질이 날아갔다. 퍽! “억!” 길드원들은 차마 보지 못하고 모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킨 채 두려움에 가득 차서 간신히 실눈을 뜨고 너구리를 힐끔 보았다. “아 무서워…….” 다니엘은 소름이 돋는다는 듯이 손으로 자기 팔을 문질렀다. “난 절대 돼지 새끼라고 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옆에서 병약미남이 다짐했다. “어? 이상하다? 방금 누가 또 돼지 새끼라고 한 거 같은데……?” 너구리가 귀를 쫑긋거렸다. 병아리의 낯빛이 일순 파리해졌다. “카일 이 새끼가 또!! 감히 또 돼지 새끼라고 해?” 나는 내 눈앞에서 얻어터지고 있는 카일에게 일부러 고함을 질렀다. 내 절친인 피터를 얻어맞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조건 카일의 범행으로 돌려야 했다. “크헉……. 아…니… 이번엔 나 아니……” 금욕미남이 극구 부인을 하면서 고개를 마구 가로저으려고 했다. 물론 너구리가 이미 멱살을 잡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쉽지 않았다. “내가 그 말 하지 말랬지……!” 분노에 찬 주먹이 또다시 녀석의 얼굴로 날아갔다. “꽤 흥미롭군그래.” 퇴폐미남이 여전히 팔짱을 낀 상태로 중얼거렸다. “항상 평온하던 너구리 공자였는데 말이야. 심지어 자길 납치했던 카일을 앞에 두고도 내내 조용했었지. 그런데 결국은 돼, 지, 새, 끼, 라고 한 게 제일 큰 문제란 말인가.” 혹시 이 싸바 녀석. 일부러 그런 건가. “어? 이상하다? 방금 또 누가 돼지 새끼라고 한 것 같은데……?” 너구리가 스산한 모습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귀를 또 쫑긋 세웠다. “이런 식빵! 카일 또 너냐! 내가 그만하랬지! 그 돼……라는 말!” 내가 분노의 포효를 터트리자, 너구리가 살벌한 눈빛으로 카일을 도로 노려보았다. “아이씨…… 나 아니라고…….” 카일도 열 받았는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너구리가 멱살을 잡고 경멸 어린 시선으로 노려봤기에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차라리 거지새끼는 괜찮아.” 너구리는 카일의 억울함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일러주었다. “하지만 돼지 새끼? 그건 모욕이지. 차라리 피글렛이라고 하든지. 그건 귀여우니까……!” 너구리가 그렇게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대 퍽! 주먹을 날렸을 때. “크헉…….” 카일 녀석의 두 눈이 풀리는 것 같더니 급기야 그의 얼굴이 옆으로 쓰러졌다. 금욕미남의 몸에서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늘어져 버렸다. “…….” “…….” “…….” 긴 정적이 흐른 후. “죽은 거야?” “죽었어?” “죽었나요?” 다니엘과 피터, 길드원들이 차례대로 고개를 빼고 물었다. “후…….” 너구리는 마침내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터벅터벅 구석에 가서 다시 앉았다. 어느샌가 먹구름은 걷히고 검은 기운도 사라져 있었다. 너구리도 공포의 대상은커녕 이젠 그냥 토실토실하고 귀여운 식도락 클럽 회장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죽진 않았어.” 쓰러진 카일의 상태를 확인하러 다가갔던 내가 말했다. 카일은 혼절했을 뿐이지 아직 살아 있었다. 토실한 너구리의 주먹질 몇 번에 사람이 죽을 리는 없었다. 그러자 퇴폐미남이 심드렁한 얼굴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럼, 이제 죽일까?” *** 우리는 기절한 카일과 암살단원들을 포박한 후, 별장을 빠져나와 마차들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카일의 독침에 당했던 정보 길드원은 다행히 응급 마차에 비치되어 있던 비상 해독제를 먹고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알렉시스, 진짜 안 죽일 건가? 카일 이 자식…… 널 죽이려고 했잖아. 아직 기회가 있으니 지금이라도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지 그래.” 기절한 카일의 목깃을 우악스럽게 쥔 채로 퇴폐미남이 내게 말했다. 우리는 널브러진 암살단원들을 호송 마차 안에 쑤셔 넣던 중이었다. “너구리 공자가 죽이지 말라잖아.” 나는 중얼거리며 너구리의 눈치를 보았다. ‘크리스티나 공주님’은 비록 현재 토실토실한 너구리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이세계의 최강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봐, 너구리 공자.” 퇴폐미남은 두렵지도 않은 듯 스스럼없이 너구리에게 다가갔다. “이 녀석들 그냥 지금 죽여서 파묻어버리면 간단한데. 굳이 호송할 것까지 있나? 살려둬서 어쩔 작정이지?” 마침 꿀꺽꿀꺽 물통의 물을 비운 너구리가 입가를 슥 닦은 후 대답했다. “공주를 납치한 죄가 있으니 재판을 치러야죠. 우리 케아르 왕국으로 끌고 가서 정당하게 재판장에 세울 거예요.” “……흠. 그 재판의 판결은 대개 어떤 식이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사형시켜서 어딘가에 파묻어버리지 않을까요?” “…….” “…….” 결국 지금 죽여서 파묻으나, 재판 후에 죽여서 파묻으나 똑같은 결과라는 이야기였다. “어쨌든 절차는 중요하니까요.” 너구리가 말했다. 그녀는 공정한 사람답게 재판을 원하는 것 같았고, 우리는 모두 비공식적 이세계 최강자의 뜻에 따랐다. 좁은 호송 마차에 암살자들 열두 명을 쑤셔 넣느라고 그들의 몸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졌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너구리는 방학이 되면 본국으로 돌아가 이 납치 사건에 대한 증언을 할 것이고, 재판도 그때 열릴 거라고 했다. 그때까지는 카일을 비롯한 이 암살단원들도 차갑고 어두침침한 감옥에서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할 것이다. “내일이면 길드 본부에 요청한 지원군이 도착할 겁니다, 공주님. 호송 마차에 가둬놓은 죄인들은 그들로 하여금 확실하게 본국까지 호송하도록 하겠습니다.” 피터가 공손한 말투로 너구리에게 말했다. 너구리는 알겠다는 듯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날 구하러 와줘서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피터 공자. 다른 공자들을 설득해 데려온 사람도 공자인 것 같군요.” 그러자 피터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퀴즈 대회 출전이 이렇게까지 비화할 줄은 몰랐습니다. 굳이 공주님께 쓸데없는 부탁을 드려서 하필 이런 일이…….” “괜찮아요. 이름표가 알렉시스 도른으로 되어 있었던 건 주최 측의 실수였을 뿐이니까. 그들도 일이 이렇게 될 줄 상상도 못 했을 거고. 피터 공자의 잘못은 아니에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님.” 병아리가 너구리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나저나 아빠가 오늘 일을 알면 또 길길이 날뛰실 텐데……. 아스테시아에 올 때도 제게 경호원을 붙여줘야 한다며 난리를 치셨거든요. 경호원은 학교에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말이야. 후…… 한바탕 또 난리 나게 생겼네요.” 너구리 공주는 딸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아버지를 걱정하며 살짝 근심에 잠겼다. 자기 같은 비공식적 이세계 최강자에겐 경호원 따위는 필요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납득시킬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염려 마십시오, 공주님. 저희 길드에서 앞으로 공주님을 경호하겠다고 전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피터가 말을 건넸다. 그는 여전히 너구리가 납치된 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자기네 나라 공주님이니, 팔도 안으로 기운다고 더 신경이 쓰일 것이다. “음…… 그래 주겠어요? 고마워요. 물론, 진짜로 경호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우리 아빠한테 말만 해주면 돼요.” 역시 비공식적 이세계 최강자다운 대답이었다. “그리하겠습니다.” 피터는 고분고분했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너구리에게는 아무런 보호도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아, 참. 그런데 너구리 공주님, 여전히 퀴즈 대회의 마지막 멤버이신데, 내일 결승전에는 참가하실 건가요?” 피터가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물었다.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너구리 공주님’이라고 했지만 아무도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킥, 너구리가 작게 웃었다. 토실토실 너구리가 웃으니까 심지어 내 눈에도 귀여워 보였다. “물론이죠. 일이 이렇게 됐으니 내일 퀴즈 대회에서 꼭 우승해야겠네요.” 이 훈훈한 대화를 듣던 나는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 알아! 퀴즈 대회 결승전의 마지막 문제의 정답을! 원작에서 봤거든!” 내가 뛰쳐나가면서 외치는 바람에, 피터와 너구리가 깜짝 놀랐다. 다니엘과 제라드는 내가 무슨 개소리를 하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사실은 내가 퀴즈 대회 마지막 멤버가 못 돼서 안 알려주려고 했는데. 그래 뭐, 선심 썼다. 확 알려주지 뭐! 정답이 뭐냐면 꼴ㄸ……!” “아, 알렉시스 공자도 절 구하러 와주셔서 고마워요.” 너구리는 난데없이 아주 인자한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음? 네. 아, 뭘요. 하하하.” 갑자기 감사의 말을 듣게 되자 난 결승전 정답도 잠깐 잊어버리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71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다니엘 공자, 제라드 공자. 모두 감사합니다. 제가 나중에 맛집에서 한턱낼게요.” 너구리가 다른 두 절세 미남들에게도 친절하게 말했다. 두 절세 미남들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한턱’이라는 말을 듣고 생각나는 게 있어서 내가 불쑥 끼어들었다. “너구리 공자. 김치전 진짜 만들 거죠?” “아? 그럼요. 물론이죠.” 너구리는 갑자기 대화의 화제가 음식으로 옮겨갔음에도, 식도락 클럽 회장답게 당황하지 않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요리는 식도락 클럽 회장이라면 무조건 시도하고 봐야 했다. 그래서 난 홱 다니엘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잘됐다. 냐옹아! 너구리 공주님이 네 츄르 만들어준대!” 난 이렇게 냐옹이 간식 문제를 공식적으로 해결했다. 김치전이 어떤 해괴한 모습으로 만들어지든 내 알 바 아니었다. “어……. 그, 그래? 가, 감사합니다.” 다니엘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으나, 눈치껏 알아서 대답했다. 심지어 공주님이 만들어준다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이윽고 너구리가 덤덤한 얼굴로 고급 마차에 올랐고, 피터도 그 뒤를 따랐다. 너구리는 오늘은 학교가 아닌, 브레테 시의 고급 여관으로 가서 쉰다고 했다. 그리고 피터는 오늘 사건의 뒤처리를 위해 브레테 지부로 갈 예정이라, 너구리와 같은 방향이었다. 그들을 태운 고급 마차와 함께 호송 마차도 현장을 떠났다. 나와 제라드, 다니엘 앞에는 마지막 마차만이 한 대 남았다. 바로 응급 마차였다. “공자님들! 타십시오. 피곤하실 텐데, 아스테시아까지 태워드리겠습니다.” 마부석에 앉은 정보 길드원이 우리에게 외쳤다. 그는 친절하게도 우리가 타고 왔던 말들도 학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우리 셋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차례대로 마차에 올랐다. “패싸움이란 건 원래 이런 건가?” 다니엘이 자리에 착석하며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혼돈만이 가득한 거냐고?” 첫 패싸움의 추억이었다. *** 학교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다니엘은 피곤한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낮에는 검술 대회에 출전했고, 밤에는 납치범들을 잡으러 다녔으니, 피곤하기도 할 것이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잠겼다. “너구리가 공주님이었을 줄이야. 이렇게 되면 정말로…… 나랑 영혼의 쌍둥이?” 그렇지 않은가. 똑같이 남장 여자. 똑같이 신분 위조. 똑같이 아스테시아 잠입. 똑같이 한 나라의 왕족, 황족. 똑같이 식도락 클럽 회원. 어쩌면 나는 이세계에서 절세 미남이 아닌 반려동물을 기를 운명인 것은 아닐까? “나, 소원 있다.” 문득 옆에서 퇴폐미를 풀풀 풍기면서 제라드가 끼어들어서, 나는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음? 소원?” 난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별다른 표정 없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 참, 그렇지. 그놈의 소원. 그게 있었지. 이제 말하려고? 뭔데?” 그간 퇴폐미남은 내 꿈속에도 나타나서 날 괴롭힐 기세더니, 드디어 소원을 말할 작정인 모양이었다. “…….” 하지만 잠시 퇴폐미남은 말을 고르는 것처럼 조용했다. “뭐야? 뭐냐고?” 내가 재촉했다. “……네 입으로 진짜 네 정체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 날 가만히 응시하며 퇴폐미남이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뭐? 진짜 내 정체?” “그래. 네가 여자라는 거, 그간 모른 척하려니 곤욕이었다고 내가 아까 말했지? 난 네가 나한테 숨기는 게 없었으면 좋겠다. 비밀이 없는 것, 그게 소원이다.” “……뭬야?” “아까 보니 심지어 너구리마저도 너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더군. 피터 레이도 마찬가지고……. 나보다 다른 자들이 너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게 화가 난다.” “……뭬야?” “물론 짐작 가는 게 없진 않아. 하지만 네가 확실히 말해주기 전까지는 그냥 짐작에 불과할 뿐이지. 뒷조사를 시키려면 나도 할 순 있지만,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너도 아마 그런 건 원하지 않겠지.” 아니? 난 뒷조사 괜찮은데? 한번 뒷조사라는 걸 당해보고 싶은데? 그러나 내 비밀스러운 욕망에도 불구하고 제라드는 말했다. “그냥 터놓고 말해버리면 너한테도 편하잖아. 비밀이 있으면 듣고 싶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어떤가?” “…….” 마차가 덜컹거렸다. 다니엘은 여전히 헤드뱅잉을 하면서 졸고 있고, 나와 제라드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고작 그게 소원이라고? 나중에 무르기 없기다. 더 큰 소원 빌면 안 돼!” 잠시 후 나는 씨익 웃었다. 제라드도 씨익 웃었다. “그러지.” 퇴폐미남이 대답하자마자 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말했다. “내 이름은 알렉시스 도레. 이 시라이드 제국의 9황녀다.” 스스로 비밀을 폭로했더니 참 시원했다. 그래서인가, 그동안 기회만 되면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퇴폐미 네 이놈! 천한 것이 어디서 감히 황족을 빤히 쳐다보는고!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할까!” *** 퇴폐미남은 푸흡, 하고 연신 호흡곤란을 일으키더니, 결국에는 마구 킥킥거리면서 마차에서 내렸다. 아스테시아에 도착했을 땐 동이 트려는 새벽녘이었다. 밤새 불꽃놀이를 구경한 성 앞의 마차 행렬은 하나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야, 왜 무릎 안 꿇어? 내가 만만해 보여? 지금 나 무시하냐? 그리고 왜 자꾸 웃는데?” 난 정말 어리둥절해서 물어봤다. 사실 아까 마차 안에서부터 계속 물어봤는데 퇴폐미남은 웃느라고 대답을 못 했었다. “아주 신선해서. 나더러 ‘천한 것’이라고 부른 사람은 난생처음이다.” 퇴폐미남은 그 단어가 자길 지칭했다는 사실이 다시 생각해도 웃긴지 또다시 킬킬거렸다. 잠시 후, 그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미안한데, 무릎은 나중에 꿇겠다.” “어?” 난데없는 퇴폐미남의 약속에 나는 당황했다. “뭐야, 꿇으려면 지금 꿇지? 난 지금 보고 싶은데…….” 내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퇴폐미남은 얼굴에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채 말했다. “나중에 청혼할 때 꿇을게. 맨날 시도 때도 없이 꿇으면 정작 그때 가서 강렬함이 없겠지. 그때까지는 좀 기다려라.” “엉?” 뭐라?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난 내 귀를 손가락으로 미친 듯이 후볐다. “뭘 할 때? 뭘 한다고? 뭘 할 때 꿇는다고?” 내가 연달아 다다다다 따발총처럼 물어봤지만, 퇴폐미남은 씩 웃기만 할 뿐 다시 말해주지 않았다. “청혼이라잖아.” 보다 못한 누군가가 옆에서 대신 말해주었다. 고개를 휙 돌려보니 다니엘이 우리 둘을 한심한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 마차에서 내린 뒤부터 우리를 계속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고양이 한 마리. 그리고 마차에서 내린 뒤부터 대화를 들어서 내가 황녀라는 사실은 아직 모른다. “청혼이라……. 평상시였으면 정말 깜짝 놀랐을 텐데, 오늘 하도 별별 얘길 다 들어서 그런가, 이제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네.” 다니엘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모든 것에 해탈한 듯한 저 태도……. 우리 냐옹이가 점점 도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러다 냐옹신선이 될 기세였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제라드 공자, 정신 좀 차리는 것이 어때. 혹시 아까 싸우다가 머리를 다친 건 아니겠지?” 다니엘이 무척이나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난 괜찮은데. 멀쩡하다.” 질문을 곧이곧대로 알아들은 제라드가 또 순순히 대답을 했다. “정말인가? 그런데도 알렉시스한테 청혼할 마음이 있다고?” “물론이지.” “맙소사…….” 다니엘은 진심으로 탄식했다. “물론 너희 둘 다 정상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알렉시스 쪽이 훨씬 심한데…….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역시 말세인가……?” 그때 황당함을 금치 못한 내가 끼어들었다. “잠깐만. 청혼을 하면 내가 언제 받아준대? 어이가 없네. 왜 내 의견은 안 물어봐?” “알렉시스, 그럼 안 받을 거야?” 다니엘이 되물었다. “음?” “제라드 공자가 청혼하면, 안 받을 거냐고?” 다니엘이 다시 한번 물어봤다. 퇴폐미남이 크게 흥미를 보이면서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 글쎄?” 난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주제였기에 공포에 사로잡혔다. “연애도 안 한 와중에 갑자기 결혼이라니. 너무 빠르잖아?” 내가 말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생에서도 전생에서도 연애 한 번 못 해본 모쏠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결혼이라니? “맙소사. 누가 연애 같은 걸 한 뒤에 결혼을 해?” 고양이 한 마리가 어이없어했다. “청혼서 받으면 바로 결혼 결정하는 거지. 연애 같은 건, 결혼한 뒤에 하는 거고.” “……뭬야? 그, 그런 거야?” 이세계 귀족들은 이런 식인가! 연애 후에 결혼한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마음에 들면 연애 따위 생략 후 청혼하고 바로 결혼하는 것이다. 원작에서 여주는 절4 멤버들을 데리고 어장 관리하면서 잘만 연애하더니만……. “알렉시스, 네가 연애부터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제라드는 충격에 잠긴 날 보며 선뜻 내게 말했다. “청혼은 그럼 언제쯤 할까? 연애를 시작하고 석 달쯤 후에 하면 되겠나? 그럼 정확히 언제 어디서 며칠까지 연애를……” “아니 왜 그딴 걸 전부 다 미리 계획표 짜놓고 해?!” 난 더욱 혼란스러워졌으나, 나의 혼란은 무시되었다. 다니엘이 홱 퇴폐미남을 쳐다보았다. “제라드 공자, 얘 좀 자세히 봐. 무려 제정신이 아닌 것도 모자라서 상식도 없는 이런 무지렁이인데도 진짜로 청혼할 작정인가? 대체 얘가 어디가 좋아서……?” 잠깐 정적이 흘렀다. 나도 궁금했기에, 다니엘과 같이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퇴폐미남은 날 바라보더니,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눈빛이 맘에 든다.” 72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 “…….” 바닥에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한 정적이 내려앉은 후. “뭐! 뭐어?” 어디서 벼락이라도 맞았는지 다니엘이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저 눈깔이 맘에 든다고? 저 눈깔이???” 마침 우리는 마차에서 내린 뒤 성문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다니엘이 소리를 지르자 벽을 타고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맘에 든다고? 저 눈깔이???’ ‘맘에 든다고? 저 눈깔이???’ ‘맘에 든다고? 저 눈깔이???’ “…….” “…….” “…….” 우리는 눈깔의 메아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면서 침묵했다. 다시 평소와 같은 고요함이 찾아오자, 제라드가 이어 말했다. “그렇다. 뭐랄까……, 내 동류인 것 같다고나 할까?” “이런 미친…….” 다니엘은 더는 견딜 수가 없는지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역시나. 말세였구나. 말세였어……!” *** 밤을 꼴딱 새웠기 때문에 무척 고단하여, 난 쑥대밭이 되어버린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로 쓰러졌다. 내가 축제를 틈타 자리를 비운 사이, 범인이 무언가를 뒤지느라고 엉망이 되어버렸던 내 방. 제라드는 원한다면 자기네 방에 와서 자도 된다고 했지만, 난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 다니엘에게 그의 방에 가서 자도 되냐고 물어봤는데, 냐옹이는 미친 듯이 경기를 일으키면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맙소사, 그런 끔찍한 개소릴! 감히 누구 방에 발을 디딘다는 거야! 내 방에 들어오기만 해봐! 진짜 불살라 버릴 거야!” 대체 뭘 불사르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도면 아주 정중하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답게 발톱을 세우며 하악거리는 수준이면 아주 양호한 것 아니겠는가. 어쨌든, 나는 엉망이 된 침대 위에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참으로 길었던 지난 하루가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상하네.” 내가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일이 아까 너구리 공주한테서 피떡이 될 때까지 얻어맞기 전, 분명 나를 향해서 이렇게 악을 썼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야 네 얼굴을 뻔히 아는데, 제대로 널 납치했겠지! 멍청한 암살단원들과 나를 똑같이 엮지 마라! 나는 명을 내린 후 이곳에서 줄곧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니까!” 금욕미남은 줄곧 별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나는 실눈을 뜨고 내 방 꼬라지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럼 내 방은 대체 누가 뒤진 거야?” 물론, 답은 알 수 없었다. 눈꺼풀이 감겨오고 잠이 몰려왔으므로, 나는 모든 생각을 잊고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공자님! 일어나요!” 누군가가 날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난 졸린 눈을 비볐다. 이 귀여운 목소리는…… 전에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 난 천근만근 내려오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면서 실눈을 뜨고 허공을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털 뭉치 두 개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털 뭉치가 눈앞에 아른거리다니. 내가 지금 추위를 타서 이러나?” 난 착각에 빠져 웅얼거렸다. “무슨 소리예요! 정신 차려요!” 그 털 뭉치가 내 낯짝을 후려친 순간에 난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시야의 초점이 맞으면서 털 뭉치의 주인공이 눈앞에 보였다. 자세히 보니 털 뭉치가 아니라 웬 여우족의 앞발이었다. “……앙증이?” *** 앙증이가 말없이 날 어디론가 끌고 가길래 난 비틀거리며 따라나섰다. 기숙관에서 나와보니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부드러운 앞발을 붙잡고 이끄는 대로 가보니 성의 정문 쪽이었다. “무슨 구경거리라도 났어? 여기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모였담?” 난 고개를 갸웃했다. 학교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전부 다 튀어나왔는지 정문 근처에는 바글바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날 보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파도처럼 길을 비켰고, 난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없이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인파를 헤친 후에 앙증이가 이끄는 대로 성곽의 위로 올라갔다. 성 밖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곽 위에도 바글바글 인파가 모여 있었으며, 그중 절반은 어스아이들이었다. “알렉시스! 일어났어?” 이미 와 있던 퇴폐미남이 나를 반겼다. 그의 퇴폐미는 여전히 사방에 물씬 풍기고 있었고, 얼굴도 수면 부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나는 대충 손을 흔들어 주고는 곧바로 들판 쪽을 쳐다보았다. “음? 저게 다 뭐야?” 들판을 뒤덮은 사람들을 본 나는 다시 한번 눈을 비볐다. “불꽃놀이는 어젯밤에 끝났잖아. 이상하네. 혹시 오늘 밤에도 불꽃놀이가 예정되어 있는 거야? 그럼 저들은 대낮부터 자리 선점하러 온 건가?” “그럴 리가 있나. 두 눈 좀 똑바로 뜨고 제대로 봐라.” 퇴폐미남이 내 말에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군대가 쳐들어온 거다.” 부우우우우―! 아니나 다를까, 마치 전쟁터에서 전투의 신호를 알리는 것만 같은 고동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나를 비롯한 성곽 위의 사람들은 일제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기에는 고동을 불고 있는 근엄한 표정의 기사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도열한 스무 명의 기사들. 또 그 기사들의 뒤에는 수백의 병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때, 주변에서 몹시 귀여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흥! 대체 어떤 미친 작자가 군대를 끌고 아스테시아에 와?” “감히 우리를 물로 보다니?” “이러다가 무려 대왕 여우로 변신하는 수가 있는데 말이야!” 어스아이들이 전부 분개한 표정으로 꼬리를 바짝 세우며 외치고 있었다. “저 자식이 대빵인가?” 한편, 나는 군대의 맨 앞에 선 사내를 무심코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은색 갑옷을 입고 적마를 탄, 어쩐지 상당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는 중년 사내. “오, 왠지 낯이 익은데…….” 이미 공자들 중 상당수는 은색 갑옷 남자의 정체를 알아채고는 놀란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다만 그가 왜 기사들과 군대까지 이끌고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두에게 미스터리였다. 뿌우우―! 고동 소리가 멈추자, 기사단의 맨 앞줄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황금 사자가 그려진 깃발을 척 들어 올렸다. “황궁 기사단이다!” “황제 폐하의 군대야!” 마침내 정체를 드러낸 기사단과 군대 앞에서 공자들은 수선을 떨었다. 은색 갑옷의 중년 사내는 마침내 성 위를 올려다보았다. 한때는 수많은 여인들을 울렸을 것만 같은 뛰어난 용모의 미중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당연히 내겐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폐하의 군대가 왜 여기까지 온 걸까요?” “그러게 말이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많은 공자들이 처음의 놀라움을 가라앉힌 후로는 불안해했다. 황제의 군대가 아무런 이유 없이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명하노라!” 마침내 은색 갑옷의 사내가 우렁찬 목소리로 성 위에 대고 외쳤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는지 확성기조차 없는데도 목소리가 사방팔방에 울려 퍼졌다. 목청이 저 정도는 되어야 이 정도의 기사단과 군대를 통솔할 수 있는가 보다. “황명이다!” “꿇어요! 얼른!” 황명이라는 말에, 성곽 위에 모여 있던 공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동으로 우르르, 자리에서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까지 조아렸다.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은 나, 그리고 여유롭게 팔짱까지 끼고 있는 퇴폐미남, 꼬리를 빳빳이 세우고 성 아래를 내려다보는 어스아이들뿐이었다. “아스테시아 성에 숨어 있는 죄인, 알렉시스 도레를 체포하겠다! 아스테시아는 죄인을 순순히 내보낼 것을 명한다!” 은색 갑옷 사내의 외침에, 성 위에 모여 있던 인파들은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하나둘 들었다. 다들 여전히 한쪽 무릎은 꿇은 채였다. “왜 기사단과 군대가 여기까지 왔나 했더니. 죄인을 잡으러 온 거라고?” “범죄자가 우리 학교에 숨어 있다는 거예요?” “알렉시스 도레? 왠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 같은데요?” “어라? 나도 그런데? 누구지?” 다들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서로 수군거렸다. 하지만 다들 나를 ‘도른’ 공자로 알고 있는 바람에 ‘도레’와 연관시키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관중들은 이제 미어캣들처럼 고개를 빼 들고 성 밖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은색 갑옷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성문 쪽을 향해 힐끗 눈길을 던졌다. 성문은 현재 굳게 닫혀있었다. 원래는 언제나 활짝 열려있는 게 정상이나, 군대가 나타나자 발 빠른 어스아이들이 닫아버린 것이다. 닫힌 성문을 바라보던 은색 갑옷의 사내는, 다시 고개를 들고 외쳤다. “죄인의 인도를 거부하고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한다면, 아스테시아의 역사는 오늘로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이러한 경고에, 무릎 꿇은 사람들은 다시금 혼란해 하며 웅성거렸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슬슬 공포가 휩쓸고 지나가고 있었다. “황제 폐하야말로 고대의 약조를 지키십시오!” 어디선가 튀어나온 귀여운 목소리에 다들 홱 고개를 돌렸다. 무려 그 소리가 들려온 곳은 바로 내 옆이었다. 앙증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가서는, 대체 어디서 났는지 알록달록 무지개색 확성기에 대고 외치고 있었다. “아스테시아는 고대의 약조에 따라 치외법권 지역임을 잊었나요? 아스테시아 성안에 누가 있든 황제 폐하께선 체포할 권리가 없다구요!” 앙증이의 뒤로, 갑자기 어스아이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더니 성 아래의 군대를 향해 하악거리며 눈을 치켜떴다. 정말이지 무서운 광경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은색 갑옷 사내는 물론이고 성 밖의 기사단과 군대는 아무렇지 않은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경악한 이들은 오로지 성안의 다른 공자들이었다. “저놈의 멍청한 여우들이 대체 무슨 짓이야?” “황명을 거부하다니! 단체로 초상 치를 일 있어?” “어서 성문을 열고 죄인을 찾아 내보내지는 못할망정!” 공자들은 어스아이들에게 항의라도 하려는 것처럼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사실은, 한쪽 무릎을 꿇고 오래 앉아있으려니 다들 다리가 저렸던 것이다. 73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사태가 심각한데.” 퇴폐미남이 전혀 근심스럽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편 은색 갑옷 사내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앙증이를 바라보며 외쳤다. “그대가 아스테시아의 교장인가?” “그런데요!” 앙증이가 귀를 쫑긋하고 곧바로 대답했다. 그러자 주변의 공자들이 죄다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스테시아의 교장이…… 어스아이였어?” “당연히 늙다리 교수님들 중 한 분인 줄 알았는데!” “엄청 앙증맞게 생겼는걸?” “귀엽네.” 공자들의 충격과는 달리, 은색 갑옷의 사내는 앙증이의 정체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그대는 유명무실한 고대의 약조 따위에 아스테시아의 명운을 걸지 마시오! 폐하께서는 군사 행동을 원치 않으시니……. 순순히 죄인 하나만 성 밖으로 내보낸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오!” 순간 난 앙증이한테서 확성기를 확 빼앗은 다음에 쏘아붙였다. “웃기시네. 내가 왜 죄인인데? 난 그것부터 이해를 못 하겠는데요?” 그러자 모든 인파와 성 밖의 군대까지 죄다 날 쳐다보았다. 마침내 은색 갑옷 사내의 시선도 똑바로 내 쪽을 향해 고정되었다. “그럼 그렇지. 그냥 가만있을 네가 아니지.” 퇴폐미남이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 사태가 퍽이나 재밌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한편 내 목소리는 이미 확성기를 타고 사방팔방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난 당한 것밖에 없는데? 허구한 날 암살자를 보내질 않나, 용족을 풀지를 않나, 나의 소울메이트인 너구리까지 납치하질 않나?” 그렇게 나의 소울메이트는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졸지에 너구리로 공표되고 말았다. 너구리 공주는 현재 학교에 있는 게 아니라 브레테 시의 고급 여관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낮잠을 자고 있을 것이므로, 다행히 나의 주장은 들킬 염려가 없었다. 흥분한 내가 마구 더 따져보려 하는데 앙증이가 확성기를 중간에 확 다시 뺏어버렸다. “아이참, 알렉시스 공자님. 좀 끼어들지 말고 조용히 좀 하세요. 이러니깐 공자님이 9황녀인 걸 다들 알아버리잖아요!” 앙증이가 하필 확성기를 다시 안 뺏기려고 마구 휘두르면서 그렇게 말해버리는 바람에, 사방팔방에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공자님이 9황녀인 걸 다들 알아버리잖아요!’ ‘공자님이 9황녀인 걸 다들 알아버리잖아요!’ ‘공자님이 9황녀인 걸 다들 알아버리잖아요!’ “…….” “…….” “…….” 모든 이의 시선이 완전히 똑바로 꽂힌 가운데 정적만이 흘렀다. 심지어 은색 갑옷 사내를 비롯한 기사와 병사들조차 뜻밖의 상황에 멈칫한 상태였다. 이 사태를 보고 있던 퇴폐미남은 그만 피식 웃었다. “어스아이 교장, 일부러 그런 건가? 불꽃놀이를 좋아하더니, 혹시 뭐든지 막 터트리는 거 좋아하나?” 퇴폐미남이 앙증이의 뒤에서 대놓고 물어봤지만, 앙증이는 못 들은 체하면서 슬쩍 외면했다. 그걸 보고 난 앙증이가 터트리는 걸 좋아한다고 확신했다. 잠깐, 그런데 앙증이는 내가 9황녀라는 사실을 또 언제부터 알고 있었담……? 바로 그때,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족이라고?” “저 또라이가?” “설마 아닐 거야.” “그래, 그럴 리가 없어요.” “황족의 행동거지가 저런 수준이라니?” 놀랍게도 이 아스테시아의 수많은 공자들은 아무도 이 진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 ‘9황녀’라는 단어에는 내가 황족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여자라는 사실까지 포함되어 있었기에 난 외쳤다. “나 여자라고! 왜 내가 여자인 건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건데!” 내가 다시 확성기를 빼앗아 사방팔방에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공자들은 나의 공허한 메아리를 듣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한마디씩 했다. “그건 그냥 그럴법해.” “맞아, 남장쯤은 아무것도 아니죠.” “도른 공자라면 뭐 그러고도 남아요.” “너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걸.” 내가 여자인 사실은 전혀 아무런 문제도, 화제도 되지 않고 묻혀가고 있었다. 다들 고개만 끄덕거리면서 오히려 알아서 이해하는 눈치였다. “다른 황자들이 죽이려고 하는데 도망갈 곳이 마땅치 않았나 보군.” “하긴, 암살자들한테 엄청 쫓겼겠죠.” “용케 우리 학교까지 들어왔군요.” “생각해 보니 좀 불쌍하네.” 그러나 나에 대한 동정심은 그저 찰나에 불과했다. “다들 정신 차립시다. 도른 공자의 저 홱 돌은 눈깔을 좀 봐요. 저게 불쌍한가.” “아암. 사막에 갖다 놓아도 분명 멀쩡히 살아 돌아올 관상이야.” “암살자들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고.” “도른 공자와 하필이면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된 우리 신세나 걱정합시다.” “오죽하면 황명으로 군대까지 쳐들어오게 만들었겠어요?” 공자들은 두런두런 모여 내 걱정이 아니라 자기네들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죄인은 제 발로 성 밖으로 나오시오! 그러면 아스테시아에는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은색 갑옷 사내는 내 얼굴을 똑바로 보며 외쳤다. 하지만 옆에서 앙증이가 꼬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누누이 말했듯 여긴 치외법권 지역이에요! 당장 군대를 물리지 않으면 아스테시아 가디언들의 응징이 있을 거예요!” 이렇게 둘의 공방이 시작되었다. 어느 한쪽도 쉽게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공방이 오래 지속될 기미였다. 어스아이들도 앙증이에게 합세하여 옆에서 마구 하악거렸다. “아, 가슴이 막 두근두근거려. 대체 쟤들이 언제 대왕 여우로 변신할까?” 내가 손에 땀을 쥐었다. “……설마 그런 미신을 믿는 거냐?” 퇴폐미남은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진 무지한 중생을 보는 눈빛으로, 날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당연하지. 용족도 있는 판에 대왕 여우라고 없으란 법 있어?” “…….” 내 말이 너무 정곡을 찔렀는지 퇴폐미남도 대답이 없었다. 전설에 의하면, 어스아이들은 아스테시아 성으로 무단으로 들어오려는 침입자를 성의 입구에서 화염에 불태워 재로 돌려보낸다고 한다. 이세계에 널리 퍼진 그 믿음은 무척 견고해서, 황제의 군대도 아직 군사 행동을 하지는 않고 있었다. 아마 군대를 끌고 온 것도 실제로 싸우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저 겁을 주기 위해서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미친……! 네가? 네가 황녀라고? 너 진짜 황녀야?” 마침내 뒤에서 힘겹게 인파를 뚫고 나타난 익숙한 얼굴이, 내 앞에 오자마자 낮은 목소리로 따지듯이 물었다. 1번 다니엘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아직은 수면 부족인 얼굴. 떠들썩한 바깥 소란에 이제야 겨우 일어나 나와본 모양이었다. 이렇게 게으른 고양이마저 튀어나오게 하다니……. 하긴, 아스테시아 역사상 황제의 명으로 군대가 나타난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어쨌거나 난 고양이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자주 보는구나, 우리 냐옹이. 근데 오늘 검술 대회 출전하러 간 거 아니었니?” 분명 오늘은 결승전이 있는 날인데, 얘가 왜 아직 학교에 있지? “그건 오후에 시작해서 아직 시간 많아……. 아니, 그건 그렇고.” 다니엘이 후다닥 정신을 차리면서 내게 다시 속삭이듯이 물었다. “너 진짜 9황녀야? 진짜로?” “그렇다. 다니엘 펠트 공자, 당장 내 앞에서 무릎을 꿇어라.” 내가 황녀답게 무릎 꿇길 요구했지만, 다니엘은 들은 척도 안 하고 그저 허리에 양손을 짚은 채로 날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 아니, 믿고 싶지 않다는 얼굴. 그러더니 그는 무언가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렸는지, 성 아래의 군대 쪽으로 불쑥 눈길을 돌렸다. “음?” 앙증이와 헛된 공방을 계속하고 있던 은색 갑옷 사내를 발견한 다니엘의 두 눈이 약간 커졌다. “……아, 아버지?” 다니엘의 목소리가 튀어 나간 순간, 갑자기 공방이 뚝, 멈췄다. 홱, 은색 갑옷 사내의 시선이 다니엘에게로 꽂혔다. 인기척을 탐지하는 데에 능한 황궁 기사단장의 귀에는, 다른 이와 말싸움을 하는 이 와중에도 다니엘이 부르는 목소리가 정확히 들어간 것이다. 공방이 멈추자 모든 이들이 고개를 들고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기사단장은 잠깐 멈칫한 상태로 다니엘을 쳐다보았지만. “…….” 낯빛이 해쓱해진 다니엘의 존재는 모른 체하면서, 곧바로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황명으로 명하노니, 죄인은 제 발로 성 밖으로 나와 체포에 응하십시오! 체포에 협조적이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하라는 폐하의 명이 계셨으니! 정말 이대로 아스테시아를 위험에 빠뜨릴 생각입니까!” 은색 갑옷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외치자마자. “어머! 우리 사랑스러운 고양이 다니엘의 아버님. 제가 그만 정신이 없어서 인사드리는 걸 깜박했지 뭐예요. 아버님, 안녕하세요?” 내가 확성기를 앙증이에게서 확 빼앗은 뒤, 갑자기 돌변하여 몹시 예의 바른 태도로 황궁 기사단장 쪽으로 배꼽 인사를 했다. 분위기가 좀 그렇긴 하지만 지금 인사하지 않으면 언제 얼굴도장을 찍어 두겠는가. 기실 9황녀로서 황궁에 있을 적엔 탑에만 처박혀 있느라고 황궁 기사단장 얼굴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 기사단장뿐만 아니라 심지어 앙증이와 어스아이들마저도 나의 돌변에 잠시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퇴폐미남만이 웃음이 비죽 튀어나오려는 듯했지만 애써 참고 있었다. “…….” 아들인 다니엘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기사단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황궁 기사단장이었다. 황명이 내려진 이상,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그는 자신을 창백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아들을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74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죄인은 장난질을 그만하고 당장 밖으로 나오십시오! 언제까지 겁쟁이처럼 숨어 있을 작정입니까?” 황궁 기사단장이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다들 침묵 속에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스아이들마저 숨을 죽이고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날 보았다. “누가 숨어 있었다고 그래요?” 숨어 있었던 것 맞았다. “그리고 아들내미 친구가 인사를 했으면 좀 받아주지 그러세요? 왜 안 받아주시는 거죠? 제 인사가 마음에 안 들었어요? 아, 혹시 황명 때문에 그런가요? 황제가 되면 그런 것도 막는 거예요?” “……폐하에 대한 삿된 발언은 삼가십시오.” 내 예의 밥 말아 먹은 말투 앞에서도 황궁 기사단장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나와 다니엘이 친구라는 사실은 정확히 인지해서 얼굴은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황궁 기사단장은 이 사태에 어쩔 줄 모른 채 서 있는 자신의 아들을 향해 다시 한번 힐끔 시선을 던졌다. 부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 “…….” 다니엘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기사단장도 굳은 표정으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황궁 기사단장으로서 황제의 명으로 기사와 군대를 끌고 여기까지 왔지만, 아들과 이런 식으로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알렉시스, 이제 어떡할 건가? 체포에 응할 생각인가?” 퇴폐미남이 옆에서 내 계획을 물었다. “그냥 버티지 뭐. 설마 진짜 쳐들어오겠어? 우리에겐 대왕 여우도 있는걸.” 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가볍게 대충 손사래를 쳤다. 황명이래 봐야, 내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 2황자가 황제로 등극했다고는 하나 내게는 ‘오빠 새끼’에 불과했으므로, 하나도 무섭지 않았던 것이다. 퇴폐미남이 내 대답을 듣고는 씩 웃었다. “좋아, 만약에 정말 저들이 쳐들어온다면, 나도 힘을 보태주지.” 즉, 또 패싸움이 나면 신나게 합류하겠다, 뭐 그런 뜻이었다. 나도 은근히 패싸움을 기대하던 그때. “……그자를 데려오너라.” 굳은 표정의 황궁 기사단장은 문득 주변에 명을 내렸다. “예!” 옆에서 병사들이 얼굴을 거적으로 뒤집어씌운 누군가를 앞으로 끌고 왔다. 거적을 쓴 자를 내려다보며 기사단장은 돌처럼 표정이 굳어 있었다. 얼핏 일말의 갈등이 스쳐 지나간 듯이 보였으나, 이내 갈무리되었다. “……뭐지?” 한편, 모든 이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자는……” 끌려온 자의 얼굴은 거적에 싸여있어 보이지 않지만, 퇴폐미남은 상대의 정체를 알았는지 낮게 침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그자는 왠지 내가 어젯밤에 많이 본 듯한 익숙한 의복을 입고 있었다. 곧 황궁 기사단장이 검집에서 검을 빼내더니 명을 내렸다. “벗겨라!” 그러자 남자의 얼굴에 씌워진 거적을 병사들이 뒤로 확 벗겼다. 누가 봐도 참으로 아름다운 용모가 거적 아래에서 드러났다. 그가 항상 하고 다니던 단안경은 어디로 갔는지 없어진 상태였다. 날카롭고 지적이었던 두 눈은, 갑자기 쏟아진 부신 햇살에 약간 찡그려졌다. “……피터.”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황궁 기사단장은 말에서 내린 후, 직접 자신의 검으로 피터의 목을 겨눴다. 검날이 피터의 목에 살짝 더 깊이 들어가면서 붉은 피가 한줄기 새어 나왔고, 나는 숨을 들이켰다. 피터는 질끈 눈을 감았다. “폐하의 명이오! 만일 서른을 셀 때까지 죄인이 성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이 자를 죽이라 하셨소!” 황궁 기사단장이 경고했다. “…….” “…….” “…….” 아스테시아의 모든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앞의 광경만 바라보았다. “아버지! 안 돼요!” 하지만 마침내 다니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기사단장의 눈썹이 움찔했다. “아버지! 피터 공자는 제 동료예요! 죽이면 안 돼요!” 지난밤 너구리 구출 작전을 하면서 피터와 잠시나마 동료애를 다진 다니엘이 애타게 외쳤다. 사실 피터와의 우정이 깊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는 사람을 죽이는 광경을 차마 볼 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그의 얼굴은 자기 아버지와 피터 사이에서 공포와 갈등과 번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황궁 기사단장으로서, 폐하의 명을 따를 뿐이다.” 기사단장은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대답했다. 황궁 기사단장 펠트 자작.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황궁 기사단장은 언제나 황위에 오른 자를 모신다. 그 황위에 어떤 사람이 앉아있는지는 그가 관여할 사항이 아니다. 황위 다툼 중에 아무리 다른 황자들이 회유하려 했어도, 펠트 자작은 그 누구에게도 응하지 않았다. 그가 충성하는 사람은 황위에 오른 사람, 즉 황제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황은 얼마 전에 죽고 새로운 이가 황제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새 황제의 명에 따를 뿐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아버지! 피터 공자에겐 아무 죄도 없잖아요……!” 거의 울부짖다시피 하는 다니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하나!” 황궁 기사단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숫자를 크게 세기 시작했다. “둘!” 모든 이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나와 기사단장을 보고 있었다. “이봐, 펠트 자작.” 갑자기 옆에서 퇴폐미남이 나서서는 말했다. 대체 어느샌가 그의 손에는 자연스럽게 확성기가 들려 있었다. 뜬금없이 나선 로스트베인 공작가의 후계자를 보고는, 병사들은 물론, 기사단장조차 숫자 세기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대가 지금 인질로 붙잡고 있는 피터 레이는 우리 제국 출신이 아닌, 케아르 왕국의 귀족이다. 또한 파라야 정보 길드의 차기 주인이지. 그를 죽였을 때의 후폭풍에 대해서 황제 폐하께서 알고 계신가?” “……물론이오.” 황궁 기사단장이 대답했다. “알고 있는데도 죽이라고 했다고? 케아르 왕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대륙에서 제일 큰 정보 길드를 적으로 돌리는데도?” 퇴폐미남이 미간을 구겼다. 현 황제의 이러한 명은 누가 봐도 이성적이지 않은 결정이었다.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명입니다. 죄인을 체포하여 정당한 벌을 내리려는 것이 폐하의 유일한 뜻이오.” 기사단장이 대답했다. 그러고는 멈췄던 숫자 세기를 재개했다. “셋!” 그러자 퇴폐미남은 조금 우려 섞인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큰일이군. 상식이 통하질 않아. 황제가 모든 불이익을 무릅쓰고서라도 그저 널 사로잡는 데에만 혈안인 모양이야.” “넷!” 난 잠시 고민에 잠겼다. 어제의 납치 사건도 그렇고, 황제는 날 죽이려는 게 아니라, 굳이 사로잡으려고 하고 있다. 예전에 용족을 풀어 죽이려고 할 때는 언제고……. 왜 황제는 그사이에 날 사로잡는 쪽으로 마음이 바뀐 걸까? “다섯!” “아오! 저놈의 숫자 세는 소리 진짜 신경 거슬리네!” 내가 소리 질렀다. “고양이 아버지를 죽일 수도 없고……. 하…….” 당장 품속의 단검을 집어던져 기사단장의 목에 꽂아버릴까 하다가 난 참았다. 내가 황궁 기사단장을 죽여버리면, 대형 고양이의 집사 노릇도 그걸로 끝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니엘이 제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용서하긴 힘들 테니까……. 다니엘은 이제 그저 안절부절못하면서 눈가에 눈물만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여섯!” 기사단장은 계속 수를 세고 있었다. “일곱!” 설령 내가 황궁 기사단장을 처치한다고 해도, 저 수많은 기사들과 군대가 있으니 피터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그 누구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될 확률이 더 컸다. “여덟!” 아아, 난 그저 어스아이들이 변신한 대왕 여우를 보고 싶었을 뿐인데. 결국 일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알렉시스.” 퇴폐미남이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날 붙잡으려 했지만 나는 뿌리쳤다. “…….” 사태를 지켜보던 이들이 전부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았다. 다니엘도 멍한 표정으로 그런 날 지켜보았다. “아홉!” 나는 인파를 헤치고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사람들은 내가 길을 갈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파도처럼 옆으로 비켰다. 그런데 평소처럼 기겁하며 피하는 표정이 아니라, 왠지 안타까워하는 얼굴들이었다. 어스아이들도 귀를 쫑긋거리면서 날 응시하다가 옆으로 비켜섰다. 앙증이도 말이 없었다. “열!” 나는 계단을 다 내려와서, 굳게 닫힌 정문 앞에 섰다. “문 열어.” 나는 문 앞을 지키듯이 서 있던 어스아이들에게 말했다. 어스아이들은 한번 말없이 서로 쳐다보다가, 문 앞으로 다가가 문에 걸린 빗장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삐이억― 소리와 함께 빗장이 풀리고, 문이 서서히 열렸다. 문이 열리자, 밖에서 기사단장이 숫자를 세던 소리가 멈추었다. 마침내 성문을 사이로, 나와 황궁 기사단장, 그리고 수많은 병사들이 마주 보았다. “알렉시스, 조만간 보자.” 뒤에서 퇴폐미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돌아보았다. 조만간 보자는 건, 날 따라올 작정인가. 퇴폐미남은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몹시 자연스러운 태도로 내 이마에 쪽, 하고 가볍게 키스를 했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제라드가 보인 뜻밖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난 난생처음으로 부끄러워져서 이마를 손으로 마구 비볐다. “이 와중에 이마 키스라니. 기왕이면 좀 분위기 괜찮을 때 하지…….” “죽지만 말고 살아 있어라. 알았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꺼내줄게.” 퇴폐미남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마치 일부러 날 안심시키려는 것 같은 미소였다. “걱정 마라, 우리 싸바. 난 안 죽어. 난 이 세계의 주인공이거든!” 내가 씩 웃었다. 그리고, 팔을 벌려 퇴폐미남을 와락 끌어안았다. “……!” 나의 거침없는 애정 표현에 퇴폐미남의 두 눈이 커졌다. 우릴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넋을 잃은 얼굴이었다. 퇴폐미남은 이내 싱긋 웃으면서, 나를 품속에 쏙 끌어안았다. “넌 영원한 나의 주인공이야, 알렉시스.” 75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사람들의 경악은 뒤로 하고, 퇴폐미남이랑 기분 좋게 막 끌어안고 있는데. “반지 좀 줘 봐.” 그가 내 귓가에 대고 다른 사람은 못 듣게 속삭였다. “뭐라고?” “네 반지.” “내 반지? 이 와중에 그건 왜?” 난 고개를 갸웃하며 퇴폐미남을 힐끗 올려다봤다. 지난 새벽에 패싸움을 끝내고 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난 마차에서 내 정체가 황녀인 걸 그에게 알려줬었다. 그때, 난 이 반지가 어머니의 유품이고 도레 가문의 인장 반지라는 것도 알려줬다. 즉, 남의 가문의 인장 반지인 걸 알면서도 달라고 하는 건 무척 이상한 일이었다. 제라드는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 줘.” 얘가 왜 이러지? 그러나 나는 퇴폐미에 홀렸는지, 순순히 내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서 몰래 건넸다. 퇴폐미남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왠지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반지를 자연스럽게 손안에 숨기고는 날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 성 밖에서 황궁 기사단장이 날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 끌지 말고, 죄인은 어서 밖으로 나오시오!” “간다고, 가! 우리 병아리나 건드리지 마!” 내가 버럭 소릴 지르며, 퇴폐미남의 품에서 떨어졌다. 잠깐 그 퇴폐미가 가득한 품속을 아쉬워하는 찰나. “주, 죽지 마. 으흐흑…….” 갑자기 눈물 콧물을 짜면서 내게 달려드는 인물이 하나 있었기에. 난 옆으로 쓱 피했다. “냐옹이? 갑자기 왜 울어?” 자세히 보니까 바로 다니엘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사인 나를 체포하기 위해서 자신의 학우인 피터를 죽이려는 자기 아버지 때문에, 지금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주, 죽지 말라고……. 네가 눈깔이 좀 이상하긴 해도……. 그래도…….” 다니엘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황제에게 잡혀가면 내가 죽을 거라 확신하는지,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한테도 내가 다시 잘 말씀드려볼게……. 그럼 널 죽이지는 않으실 거야. 아무리 폐하 명이라곤 해도…….” 하지만 본인이 말하면서도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아는지, 다니엘은 다시 눈물을 터트렸다. 다니엘의 아버지가 황제의 명을 무슨 수로 거역하겠는가. 자칫하면 다니엘의 가족이 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 “난 괜찮아. 나 말고 네 아버지 걱정이나 해라.” “……응? 어?” 정작 아버지 걱정이나 하라고 하니, 다니엘은 더욱 불안한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더욱 볼썽사나워졌다. “그런 게 있어.” 내가 황궁에 도착하기 전에 탈출해 버리면, 너희 아버지도 황제한테 죽은 목숨일지 모른다는 말을 해주지는 않았다. 말해주면 다니엘이 또 슬픔에 잠길 것이 아니겠는가. “죽이진 않을 테니 걱정 말고. 설마 내가 네 아버질 죽이겠니?” 즉, 너희 아버지를 봐서 지금 당장 탈출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나중에 마음 바뀌어도 물론 난 모르지만. “뭐, 뭐라고?” 다니엘은 무슨 의미로 받아들였는진 몰라도 그대로 얼어붙었다. 눈물도 그친 채로 그냥 멍청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못 들었으면 됐어. 집사가 돌아올 때까지 고양이는 잠이나 푹 자고 있으렴.” 나는 멍한 표정으로 아무 반응도 못 하는 다니엘을 뒤로 하고, 위풍당당하게 정문 사이를 걸어 나갔다. 이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난 주인공이므로 죽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황제 녀석을 만나보면, 뭐 어떻게든 수가 생기겠지……. 퇴폐미남과 다니엘, 아스테시아의 다른 공자들은 모두 그런 내 모습을 뒤에 남아 황망히 지켜보았다. 그동안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던 황궁 기사단장이 마침내 피터의 목을 겨누고 있던 검을 밑으로 내렸다. “알, 알렉시스……!” 피터가 날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순순히 체포될 테니까, 우리 병아리는 놓아줘!” 내가 외쳤다. “체포하거라!” 황궁 기사단장이 명을 내리자, 병사들이 달려와 나를 꿇어 앉혔다. “무기를 갖고 있군. 단검인가.” 황궁 기사단장의 눈썰미는 엄청났다. 품속에서 튀어나와 있는 모양만으로도 눈치챈 것 같았다. 난 할 수 없이 품속의 단검을 꺼내 바닥으로 던졌다. “남은 무기가 있는지 확인해라.” 황궁 기사단장이 눈짓하며 명하자, 곁에 있던 여기사 하나가 곧바로 다가와서 몸수색을 했다. “없습니다.” 이윽고 여기사가 말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내 손과 온몸을 밧줄로 꽁꽁 동여맸다. 나는 얌전히 그들이 날 다 묶을 때까지 기다렸다. “피터는 풀어 줘야지!” 이윽고 내가 다시 외쳤다. “죄인이 무사히 궁에 당도하여 폐하 앞에 끌려가기 전까지는 곤란하오!” 황궁 기사단장은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제 발로 나왔잖아! 그럼 병아리는 풀어줘야지! 지금 약속을 어기겠다는 거야?” “피터 공자를 풀어주겠다는 약속은 한 적 없소. 그대가 제 발로 나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만 했지.” “……이익!” 내가 짜증이 나서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온몸이 다 꽁꽁 묶여버린 뒤였다. “염려하지 마시오. 궁에 도착하면 피터 레이 공자는 무사히 풀려날 것이니……. 그대만 얌전히 호송에 협조해준다면 피터 공자에겐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황궁 기사단장이 눈짓하자, 병사들이 날 끌고 호송 마차로 다가갔다. 근데 가만 보니까 왠지 눈에 익숙한 마차였다. “이건…… 파라야 정보 길드의 호송 마차였는데……?” 전날 우리가 솔스비 암살단원들을 때려눕혀서 쑤셔 넣었던 바로 그 호송 마차였다. 창문도 없고, 사방이 철판으로 덧대어져 있으며, 문도 쇠로 만든 잠금장치로 되어 있는. “나더러 숨이 콱콱 막히게 이걸 타라고?” 벌써부터 가슴 한쪽이 답답해졌다. 황궁 기사단이 피터를 붙잡아왔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피터는 분명 전날 학교로 돌아오지 않고 정보 길드의 브레테 지부에 머물렀다. 그런데 지금 여기 잡혀 왔다는 이야기는…… 즉, 황궁 기사단이 브레테 지부까지 쳐들어가서 접수해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잠깐. 그렇다면 우리가 잡아놨던 카일이랑 암살단원들은 어떻게 됐지?” 그들은 바로 이 호송 마차에 쑤셔 넣어진 채로 브레테 지부에 잡혀 있었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에, 병사들이 철컹, 쇠로 된 잠금장치를 당기고는 호송 마차의 문을 벌컥 열었다. “……카일?” 금욕미남이 나처럼 꽁꽁 묶인 채로 여전히 처박혀져 있었다. *** 황궁 기사단장은 죄인이 아니라 임시로 인질로 잡아놓았을 뿐인 피터에겐 더 호사스러운 대접을 해주었다. 즉, 호송 마차에 처넣지 않고, 깔끔하고 제대로 된 고급 마차 안에 집어넣었다는 말이다. 손의 결박도 풀어주었다. 다른 기사 둘로 하여금 같이 마차에 올라 감시를 하게 하긴 했지만. 반면 나는. “내가 왜 카일 이 또라이랑 같이 마차를 타야 하는데!” 발버둥을 치면서 호송 마차 안에 타지 않으려고 했지만, 병사들이 몰려들어 날 억지로 쑤셔 넣어버렸다. “흥.” 어젯밤 너구리한테 얻어맞아 여전히 얼굴이 엉망진창인 카일이 그런 날 비웃었다. 온몸과 손발이 꽁꽁 묶인 것을 보니 그의 처지도 나보다 더 좋을 것은 없었는데 말이다. 철컹! 호송 마차의 문이 닫히고, 잠금장치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잠겼다. “폐하께서 기다리시니 호송 마차는 최대한 전속력으로 황궁으로 향한다! 황궁 기사단은 모두 말에 오르도록 해라! 마차를 호송한다!” 밖에서 황궁 기사단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부대장! 그대는 병사들을 이끌고 알아서 복귀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굵직한 목소리가 대답했고, 병사들이 우르르 이동하는 발걸음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출발!” 황궁 기사단장이 외쳤고, 동시에 말들을 때리는 채찍 소리가 났다. 키히히히잉― 마차를 이끄는 네 마리의 말들이 박차를 가하자, 마차가 덜컹거리더니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사이 정이 많이 들었던 아스테시아를 떠나, 황궁으로……. 창문도 없는 마차 안은 무척 답답했다. 일반적인 마차와는 달리, 푹신한 좌석 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딱딱한 바닥이었다. 마차 안은 어두운 편이었으며, 철판으로 덧대어진 마차 벽의 틈 사이로 아주 가느다란 햇빛이 들어올 뿐이었다. 그나마 이 가느다란 햇빛 때문에 나는 카일의 얼굴이 보였다. “카일, 넌 왜 이런 꼴로 잡혀 있냐? 넌 현 황제랑 같은 편이잖아? 왜 황궁 기사단장이 안 풀어줬어?” 카일은 분명 현 황제의 명을 받들던 부하였는데. 황궁 기사단이 정보 길드까지 쳐들어갔다면 같은 편인 그를 풀어줘야 정상 아닌가. “저 무식한 펠트 자작이 뭘 알겠냐?” 카일이 조소했다. “저 인간이 황제에게서 받은 명령은 그저 축제를 틈타 학교 밖으로 나온 피터를 인질로 잡아서 널 체포하라는 것뿐이야.” 카일이 한번 퉤, 하고 피가 약간 섞인 침을 뱉었다. “그래서 브레테 지부에 쳐들어온 거고, 우연찮게 우리들이 잡혀 있었던 거지. 내가 아무리 황제 편이라 말해도 소용이 없었지, 믿질 않아.” “하긴, 암살단원 표식이 있는데 너 같으면 믿겠냐?” 내가 쏘아붙였다. 난 근래 들어 암살단에게 악감정이 많아졌다. “뭐, 그래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어 너랑 같이 끌려가는 거지. 저 무식한 기사단장도 내가 황제를 안다고 주장하니까, 암살단원인 걸 알고도 날 바로 죽일 순 없는 거고.” “다른 솔스비 놈들은? 왜 너만 있어?” 전날 밤, 이 마차 안에 쑤셔 박아놨던 다른 암살단원들은 다 사라지고, 카일만 남아있는 게 이상했다.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오늘 아침 황궁 기사단이 정보 길드로 쳐들어왔을 때.” “…….” 76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살아있어봤자,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만이 남아있을 테니.” “뭔 개소리야?”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같은 편이니까 황궁에 가면 황제가 알아서 다 풀어줄 텐데……. “황제 그 무자비한 놈이 사냥에 실패한 사냥개를 곱게 풀어줄 리가 있겠어? 게다가 지나치게 아는 것이 많아졌으니 나를 살려둘 것 같나. 황궁에 도착하면 너나 나나 같이 죽은 목숨이야.” 카일은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동안 수족으로 썼는데 돌아가면 황제가 살려둘 리 없다니. 암살단원들은 너구리가 케아르 왕국으로 호송한다고 했을 때도 목숨을 버리진 않았는데, 현 황제가 그렇게 무서웠던 걸까. “근데 카일 넌 왜 안 죽었냐? 그렇게 날 죽이려고 난리 부르스를 추더니. 정작 본인은 죽긴 싫었나 보지?” 내가 씁쓸하게 비아냥거렸다. 한때 거룩하다 칭송했던 3번 금욕미남과의 대화가 이리도 차가워질 수 있다니……. 카일은 입매를 비틀었다. “인생은 끝까지 가봐야 아는 거니까. 진짜 죽을 때까지는 죽은 게 아니잖아?” “…….” *** 황궁으로 가는 길은 지리멸렬했다. 창문이 없어 바깥 구경조차 할 수 없었으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누가 나 구하러 안 오나?” 나는 몽롱하게 헛된 꿈을 꾸어보았다. 영화나 소설에 보면 이런 때에 동료들이 마차를 습격해서 사람들이 탈출하던데……. “혹시 1번 대형 냐옹이가 갈림길에서 몰래 숨어 있다가 마차를 습격하진 않을까? 츄르를 조공하는 집사를 구하려고…….” “좀 닥쳐.” 카일이 날 노려보며 내뱉었다. 난 무시했다. 사실 1번 다니엘이 이 마차를 가로질러서 앞에서 미리 기다릴 확률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 마차는 쉬는 시간도 없이 현재 전속력으로 황궁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보다 뒤에 남겨졌던 사람들이 이 마차를 앞설 가능성은 없었다. 또, 아버지인 황궁 기사단장이 이 호송의 책임자인데, 아버지를 곤경에 빠뜨릴 짓을 할 수 있는 다니엘이 아니었다. 비록 검술 대회에서 4강에 오르긴 했으나, 어차피 아버지를 이길 수 있는 실력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다른 마차에 타고 있는 2번 병아리가…… 그 똑똑한 머리를 굴려서 탈출 계획을 지금쯤 다 짰을지도 모르지. 자신의 최고 절친인 나를 구하려고…….” “좀 닥치라고.” 카일이 내게 다시 쏘아붙였다. 난 무시했다. 2번 병약미남의 계획이라면 왠지 그럴듯할 것이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물론, 뾰족한 계획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4번 퇴폐미남도 있었지. 그 무식한 놈은 계획 같은 거 세울 줄 모르니까 무작정 황도로 달려오고 있겠지.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달려들어 자신의 청혼 상대인 날 구하려고…….” “뭐? 청혼 상대?” 카일이 놀랐는지 이번엔 전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너희 둘이 결혼하냐?” “글쎄? 아직 생각 중인데. 그래도 연애부터 해보고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난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므로 그렇게 대답했다. 연애도 안 해봤는데 결혼 여부를 결정하는 건 역시 영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결혼이라. 별꼴이군. 둘이 쌍으로 아주 참 잘도 놀아.” 뜻밖에 카일이 훈훈한 덕담을 날렸다. 비록 그의 입꼬리는 비틀어져 있었지만,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고마워, 네가 참 그런 축하의 말도 다 건네고. 웬일이냐? 아직 저 깊은 가슴 한구석에는 일말의 선한 마음이 남아있었나 보지?” “지랄하네.” 카일이 일갈했다. 그렇게 그의 깊은 가슴 한구석에는 선한 마음 따윈 없는 걸로 결정되었다. “그나저나 어떡할 거야? 정말 이대로 잡혀가서 황제한테 죽을 거냐?” 카일이 날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황당하네. 죽긴 왜 죽어? 난 주인공인데.” 내가 대꾸했다. 주인공이라고 몇 번을 말해요. “하. 그딴 허황된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이 마차는 대체 언제 박차고 나갈 거냐고?” 카일이 다시 물었다. 마치 그런 행동을 기대하고 있는 듯한 의미심장한 표정. “……뭐? 내가 어떻게 이 마차를 박차고 나가?” 나는 마차 벽을 꽝꽝 두들기면서 말했다. “다 철판으로 덧대어져 있는데 무슨 수로 이걸 부수냐고?” “흠……. 그런 괴력까진 없는 건가?” 카일 녀석은 난데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는 것이 아닌가. 마치 정말 내가 마차를 박차고 나가길 믿었다는 것처럼. “순순히 피터 레이를 구하려고 나서길래, 호송 중에 무슨 미친 짓이라도 벌일 줄 알았는데. 아직은 아닌 모양이지?” “뭔 개소리야? 내가 미친 짓을 왜 해?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미친 짓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보약을 잘못 먹은 적이 있긴 하지만.” 내가 금욕미남의 ‘미친 짓이라도 벌일 줄 알았는데’라는 발언에 거부감을 보였다. 카일은 입가에 조소도 지운 채로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다, 여유로운 태도로 벽에 등을 기댔다. “하긴, 미친놈이 자기 입으로 미쳤다고 하는 법은 없지.” “…….” 난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야! 지금 이 마차 안에 정신줄 이상한 싸이코가 있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바로 카일 네놈이거든?”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는 잠시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그것도 제법 옳은 말이군.” 뜻밖에도 카일이 고심하다 수긍했다. 그는 나와의 심도 깊은 대화 덕분에 몹시나 피곤해졌는지, 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괴력 써서 탈출할 때, 나 깨워라.” “…….” ***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깐 잠이 들었는지, 깨고 나서야 잠이 들었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여전히 마차 안이었다. 이제 햇빛은 틈 사이로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바깥에도 해가 진 것 같았다. 나는 마차의 벽을 사정없이 발로 차면서 마구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문 열어! 펠트 자작! 고양이 아빠! 마차 세워! 숨이 막혀! 숨이 막힌다고! 내가 질식해 죽으면 책임질 거야?” 잠자던 카일도 눈을 뜨고 내 광란을 지켜보았다. 그는 내가 탈출하려는 꿍꿍이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답답해서 그러는 건지를 가늠하려는 듯이,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마차가 자리에서 멈췄다. 그러더니 밖에서 황궁 기사단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멈춘다! 식사 시간은 따로 없으니 지금 각자 알아서 요기해라. 식사 후엔 다시 움직이겠다!” 그때, 철컹, 쇠로 된 잠금장치가 당겨지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둘 다 끌어내라.” 황궁 기사단장이 말했고, 기사 몇몇이 우리를 같이 끌어냈다. 밖으로 나오자 쌀쌀한 저녁 공기가 느껴졌다. 해는 이미 진 상태였다. 우리가 멈춘 곳은 주위가 나무로 가득한 숲속 공터였다. 스무 명쯤 되는 대부분의 황궁 기사단 인원은 아무 데나 앉아서 말린 육포나 비스킷 등을 씹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들의 저녁 식사인 것이다. 그 외에 대여섯 명 정도의 측근 기사들만 펠트 자작 곁에 남아 있었다. 황궁에도 남아있는 기사단 인원이 있을 테니 이들이 기사단 인원의 전부는 아니다. “잠깐 쉬는 것뿐이니 지금 이 자리에서 실컷 바람 쐬시오.” 황궁 기사단장이 감시의 시선을 거두지 않으면서 나와 카일에게 말했다. “저기요, 다니엘 아버님. 저도 육포 좀 주지 그래요? 배고픈데.” 나는 다시 호송 마차 안에 들어가기 전에 뭐라도 먹을 작정으로 요구했다. “……주거라.” 황궁 기사단장이 허락했고, 옆에 있던 기사들이 나와 카일에게 육포를 건넸다. 그러나 손이 밧줄에 꽁꽁 묶여 있었으므로 받은 것을 입가에 올려서 넣을 수가 없었다. “진짜 너무하네. 애기처럼 받아먹으라는 거야? 뭘 먹으려면 밧줄은 풀어줘야지. 이렇게 손이랑 온몸을 꽁꽁 묶어놓고. 어떻게 하라고?” 나는 도끼 눈을 뜨고 꽥 소리를 쳤다. “풀어 주어라.” 황궁 기사단장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명하자, 옆에 있던 기사들이 카일과 내 손에 묶인 밧줄을 풀어 주었다. 그와 동시에 여성 기사가 무려 다섯이나 내 양옆에 검을 빼 들고 섰다. 카일 곁에는 남성 기사 둘이 검을 들고 가까이 붙었다. “특히 9황…… 이 죄인은 검술에 뛰어나다고 폐하께서 말씀하셨다. 한시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기사들에게 경고한 황궁 기사단장은 딱딱한 표정을 했다. “거참 육포 한번 먹는 것뿐인데 별걱정을 다 하네.” 내가 육포를 입에 가져가 넣고 질겅거리면서 말했다. 카일도 두 손이 풀려서 육포를 먹기 시작했다. “명심하시오. 그대가 도망가는 순간 피터 공자는 죽을 것이오.” 황궁 기사단장이 경고했다. 그러면서 그가 힐끔 어딘가를 눈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 시선을 따라, 약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마차를 쳐다보았다. 마차 문은 활짝 열려 있었는데, 피터가 다소 피곤에 지친 표정으로 물끄러미 내 쪽을 바라본 채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날 보고 있었을까? 그런 피터의 곁에는 검을 든 기사 둘이 서 있었고, 그들이 피터에게 육포와 비스킷을 건넸다. 하지만 피터는 내 쪽만 쳐다보고 있었고, 먹을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피터가 쳐다보지도 않자 기사들은 멋쩍게 손을 거뒀다. “우리 병아리! 괜찮니? 어디 아픈 덴 없고?” 내가 소리치면서 난 절친의 안부를 걱정했다. “이 멍청한 자식!” 피터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날 향해 냅다 소릴 질렀다. 참 너무나도 예상 밖이었다. “네 걱정이나 해!” “……?” 음? 이건 뭐지? 피터는 과연 화가 난 건가, 안 난 건가? 난 가늠할 수가 없었다. 표정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근심이 어린 것 같아 보이는데……. 모르겠다. 어쨌든 병약미남의 말은 무조건 옳기에, 나는 내 걱정이나 하기로 했다. “이거 봐! 나 육포 먹는다!” 난 대뜸 손에 든 육포를 냅다 흔들면서 저쪽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무슨 네 유모냐! 그런 건 일일이 보고 안 해도 돼!” 피터가 또 소리를 질렀다. “아 그래?” 난 또 깨달음을 얻었다. 피터한테 일일이 다 보고할 필요는 없구나. 그동안 뭔 일만 생기면 퀴즈 클럽에 쳐들어가서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77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조용히 자리에 서서 질겅질겅 육포를 씹을 때마다, 모든 기사들의 눈길이 힐끔힐끔 나를 향했다. 어쨌거나 나는 요주의 인물. 무사히 황궁까지 호송해야만 하는 인물인 것이다. 피터 레이야 없어도 되지만, 나는 반드시 호송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황궁 기사단장도 내게서 단 1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배도 안 고픈지 아무것도 먹고 있지 않았다. “저기요, 다니엘 아버님.” 내가 육포를 질겅거리며 입을 뗐다. “죄인은 우리 아들 이름은 그만 입에 올리시오.” 황궁 기사단장이 딱딱한 얼굴로 대꾸했다. “에이, 왜 그러세요. 제가 다니엘하고 얼마나 친한데.” 내가 너스레를 떨었다. “…….” 기사단장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지만, 그의 불편한 감정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다 느꼈을 것이다. 비록 황제의 명이니 어쩔 수 없지만, 아들의 친구를 사지로 끌고 가고 있는 형편에 마음이 편할 리 없으리라. 나도 마음 같아서는 펠트 자작에게 위로를 건네며 어깨라도 두들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아이참, 다니엘 아버님, 육포만 주시면 어떡해요. 목마른데 물도 주셔야죠.” “……주거라.” 황궁 기사단장이 딱딱하게 명령을 내렸다. 옆에서 기사들이 건네주는 물병을 꿀꺽꿀꺽 비운 후, 나는 캬아, 하면서 술주정뱅이 아저씨 같은 추임새도 곁들었다. 내가 이렇게 나선 덕분에 카일은 굳이 말 안 해도 육포에 물까지 얻어먹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카일은 내가 뭔 헛소리를 할까 기대하는 표정으로 유심히 날 관찰했다. “근데요, 다니엘 아버님.” 내가 또 주둥아리를 열었다. “내 아들 이름은 입에 올리지 말……. 후. 됐소. 또 뭐요?” 황궁 기사단장도 이젠 포기하기로 한 것 같았다. 내 입에서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안 나오게 할 방법은 없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고 있던 참일 것이다. “나 호송 마차 안 탈래요.” 내가 선언했다. “좌석이 없으니까 허리도 아프고, 창문도 없어서 답답하단 말이에요. 9황녀로서의 명이에요, 펠트 자작.” “…….” 사위가 조용했다. 저쪽에서 피터도 미동조차 없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내 옆의 카일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황궁 기사단장이 입을 뗐다. “불가하오. 일반 마차엔 잠금 장치가 없어서 더 도망가기 쉽소. 황제 폐하의 명을 받은 황궁 기사단장으로서, 죄인 호송에 행여라도 지장이 갈 일은 할 수 없소.” 나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 마신 물병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황궁 기사단장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외쳤다. “난 아직 재판을 치르지 않았어. 즉 아직은 그대가 말하는 ‘죄인’이 아니야!” “……!” “펠트 자작, 그대는 감히 9황녀를 죄인 취급하는 것인가! 그러고도 그대가 살아남길 바라시오?” ***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황궁 기사단장, 카일, 피터, 주위의 기사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 황궁 기사단장은 내 얼굴을 뚫어져라 빤히 응시했다. 그의 머릿속엔 지금쯤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겠지만, 9황녀가 던진 말의 무게를 인지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 재판을 하지 않았으니 죄인이 아니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으므로, 난 당당하게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 한참 후. 펠트 자작은 결정을 내렸다. 그는 기사단을 이끄는 기사단장이었기에, 한 번 결정을 내리면 행동도 빨랐다. 황궁 기사단장은 고개를 숙이며 내게 예를 갖춰 보였다. “송구합니다. 9황녀 저하.” 황궁 기사단장의 목소리는 평상시와 같았으며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신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말귀를 알아먹다니 다행이네요, 다니엘 아버님.” 나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남은 육포를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 아무도 아무 말이 없는 가운데, 카일이 옆에서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무데뽀로군. 대단하긴 하네.” 물론이다. 난 언제나 대단했다. 뭘 또 새삼스레……. “그럼 이제부터는 황녀의 직위에 걸맞는 호송을 해주길 바라요, 다니엘 아버님. 즉 이딴 호송 마차는 사양하겠어요.” 내가 문제의 호송 마차를 발로 걷어차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는 피터 공자와 함께 마차에 타십시오.” 펠트 자작이 대답했다. 다행히 내가 호송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기사단은 안심했다. 피터가 탄 마차는 상태가 꽤 좋은 고급 마차였기에, 나에 대한 대우는 단번에 좋아진 것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피터 레이는 풀어 주는 게 어때요? 9황녀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난 도망 안 갈 거니까.” 안 될 줄 알지만 혹시 모르니까 한번 말해보았다. 피터는 여전히 멀찍이서 마차 안에 앉은 채로 그런 날 지켜보고 있었다. 피터를 풀어 주라는 내 요구에 황궁 기사단장은 몹시 곤란한 낯으로 대답했다. “그건 안 됩니다. 피터 공자도 데려오라는 폐하의 명입니다.” “음. 알겠어요.”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9황녀의 명보다 우선하는 것은 황제의 명이니까. “그래도 카일 이 자식은 계속 호송 마차에 태우세요.” 난 내 옆에 서 있는 카일을 향해 비웃음을 날려주며 말했다. 카일은 기대도 안 했다는 듯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물었다. “옛정은 없는 거냐? 한때는 날 좋아했던 것 같은데.” “응, 없어. 날 틈만 나면 죽이려던 살인 미수자에겐.” “……그건 뭐, 너한테 개인적 감정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카일은 쓴웃음을 보였다. “난 그냥 황제의 충실한 개였을 뿐이지.” 잠깐. 그렇다면 대형 갯과는 1번이 아니라 내내 3번이었단 말인가? 잠시 내가 그 점에 대해 고찰하는 사이, 카일은 다시금 호송 마차 안에 처박혔다. 기사들이 호송 마차의 문을 닫기 전에, 내가 잠시 그들을 막아선 후 카일을 쳐다봤다. 그리고 전부터 확인하고 싶던 문제를 물어 보았다. “카일. 어제 내 방 뒤진 거, 너냐?” “뭐?” 마차 안에 처박힌 카일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했다. “네 방을 뭐하러 뒤져?” “……아님 말고.” 나는 뒤로 물러났다. 기사들은 호송 마차의 문을 닫았다. 쇠로 된 잠금장치가 철컥, 굳게 잠겼다. *** “피터! 나의 절친! 만나서 반갑지?” 나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병약한 꽃미남을 껴안으려고 했다. “어어! 안 됩니다!” 기사들이 기겁을 하면서 나를 피터에게서 떼어놓았다. 그런데, 기사들은 그렇다 치고…… 피터 넌 왜 그런 기겁하는 얼굴로 뒤로 피한 거니?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뭘 또 만나서 반갑냐?” 병아리 한 마리는 혹시라도 내가 다시 달려들까 봐 불안한 표정으로 뱉었다. 그에겐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같이 마차에 오른 두 명의 기사들이 날 잡아당기며 철저히 접촉을 막고 있었다. “에이, 그건 멀리서 본 거니까 무효지. 지금처럼 같은 마차 안에서 가까이서 보니까 엄청 반갑지?” “……후. 그래. 그렇다고 치자.” 병아리는 단념하며 말했다. 단안경이 사라져서 왠지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없어진 느낌이었지만……. 애초에 한쪽 눈에만 안경을 쓰고 있었다는 건 다른 눈은 시력이 괜찮다는 뜻이었으니, 절친인 나의 포옹 시도를 보고 회피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너희 정보 길드원들은 괜찮아? 이 무, 식, 한, 황궁 기사단 놈들이 너희 지부에 무, 식, 하, 게, 쳐들어갔을 때 다친 사람 없고?” 난 기사들이 잡아당기는 대로 얌전하게 자리에 착석하면서 피터에게 물었다. 지난밤 너구리 공주를 구출할 때 안면을 익혔던 정보 길드원들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이 무, 식, 한, 황궁 기사단 놈들’이라는 말에 날 잡아당기던 기사들의 얼굴에 금이 갔지만, 기사답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괜찮을 거야.” 피터는 그리 대답하면서도, 약간 침울한 표정이었다. “브레테 지부장이 날 구하려다 어깨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래도 빨리 응급 처치를 해서 문제는 없을 거야. 다른 길드원들도 여기저기 다치긴 했지만 가벼운 부상이었고…….” “나빴네! 죄 없는 정보 길드원들을 다치게 하고! 이 무, 식, 한, 황궁 기사단 놈들이!” 난 또 옆에 있는 기사들더러 들으라는 듯이 목청을 높였다. “…….” 기사들은 내 몸에 아직 칭칭 감겨 있는 밧줄을 다소 꽉 쥐었지만, 역시 프로답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근데 황제 이 새끼가 말야. 네가 내 절친이라는 건 알고 있나 봐.” 내가 무심하게 말했다. 굳이 기사단을 시켜 브레테 지부를 접수하고 피터를 인질로 삼았다는 건, 우리가 절친이라는 사실을 황제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피터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면, 내가 제 발로 나올 것이라는 걸 짐작했겠지. 그리고 지금까지 황제의 계획대로 모든 게 잘 진행되고 있었다. “9황녀 저하, 발언을 조심해 주십시오.” 문득, 옆에서 기사들 중 하나가 다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간단히 기사1이라고 하자. “아니 내가 뭘? 무슨 발언을 조심해요?” 난 내가 한 말이 기억나지 않아서 토끼 눈을 떴다. “조금 전에 분명 황제 이 새……, 라고 하셨잖습니까.” “뭐라고? 내가 뭐라고 했다고?” “황제 이 새……” 기사1은 입술을 깨물었다. 괜히 말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그는 헛기침을 했다. “아, 아무튼 조심해 주십시오.” “아니 내가 뭐라고 했길래 조심히 해? 내가 뭐라고 했냐니까?” 내가 두 눈만 멀뚱멀뚱 굴리면서 기사1을 재촉했다. “……모르시면 됐습니다.” 차마 자기 입으로 말을 할 수는 없었던 기사1은, 그냥 여기서 문제의 발언을 덮기로 했다. 물론 난 멈출 생각 없었다. “친오빠한테 새, 끼, 라고도 못해? 다들 하는데 왜 나만?” 내가 어이없어했다. “…….” “…….” 기사들은 입만 꾹 다물었다. 78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마차 안에는 숨 막히는 침묵이 가득했다. 그리고 한참 후. “제 동생은 저한테 오빠 새끼라고 안 하는데요.”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난 듯한 기사2가 날 보며 말해주었다. 앞서 본전도 못 찾은 기사가 아니라 이제까지 말이 없던 다른 기사였다. “그래요? 하긴 뭐, 세상엔 이런저런 가정이 있는 거겠지. 동생이랑 사이가 좋군요?” 친화력이 높은 내가 맞장구를 쳐줬다. “네, 좋은 편입니다. 감히 제 동생을 울리는 녀석이 있으면 완전 죽여버릴 겁니다.” 기사2는 또 냉큼 대답을 했다. 생각보다 말의 내용도 살벌했다. 아무래도 동생 바보인 것 같았다. “나랑은 다르구나. 이미 제국 전 백성이 다 알고 있겠지만 우리 집은 아주 콩가루거든요. 오빠 새, 끼, 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날 죽이려고 드는데 하…….” 내가 한탄했다. “특히 황제 그 새, 끼, 는 겉으로는 멀쩡한데 아주 틈만 나면 날 몰래 죽이려고 난리였다지 뭐야. 하여간 바람 잘 날이 없어요. 그런 새, 끼, 가 하필 황위에 오를 건 뭐람?” “…….” “…….” 마차 안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기사들은 내 말을 못 들은 체하기로 작정했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지만, 왠지 약간은 안쓰러운 듯한 표정으로 날 힐끗 보았다. 내내 암살 시도에 시달리다 도망쳤지만, 다시 잡혀서 오빠 손에 죽으러 가는 동생. 그게 바로 나였다. 피터도 평소처럼 연민 어린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 이상할 정도로 여유로운 내 태도에서 오히려 병아리는 안심을 한 것 같았다. 주인공인 내가 죽을 리는 없다는 걸 피터도 이제는 내심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병아리는 처음으로 약간 긴장을 풀면서, 좌석에 등을 편하게 기댔다. “퀴즈 대회는 물 건너갔네…….” 한참 후에야, 병아리가 멍하니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퀴즈 대회는 지금쯤이면 다 끝나버렸을 시각이었다. 안타깝지만 우승은커녕 결승전 참가도 하지 못한 것이다. 원작과는 다르게. “삐약아, 그건 다 네가 날 퀴즈 대회 마지막 멤버로 집어넣질 않았기 때문이야. 결승전 마지막 문제 정답도 내가 알고 있었는데.” 내가 그럼 그렇지 하는 잘난 체하는 태도로 말을 건넸다. 이 세상의 주인공인 날 푸대접하면 다 그런 일이 생기는 법이다. 내가 퀴즈 대회 마지막 멤버가 되지 않는 바람에 너구리가 대신 나갔고, 그래서 너구리가 납치되었으며, 너구리를 구출한 뒤 뒷수습을 하느라고 피터는 학교가 아닌 브레테 지부로 갔고, 덕분에 황궁 기사단한테 붙잡힌 것이 아닌가! “후…….” 병아리는 깊은 한숨만 쉴 뿐 내 말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 지난밤부터 계속 묻고 싶었는데……. 너 완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너구리 공자가 사실은…… 공주님이라는 사실을?” 내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너구리 공주의 정체는 그만큼 나에게 예상 밖이었던 것이다. “너구리?” “공주?” 우리 곁의 기사들조차 내막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관심을 보였다. “아니. 처음부터 알았던 것은 아니고, 너 때문에 우연히 알게 됐지.” 피터가 대답했다. “나 때문에 알게 됐다고?” 정작 난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래. 네가 퀴즈 클럽 홍보 전단지를 돌렸을 때 알게 됐어.” 병아리가 차분히 기억을 더듬었다. “당시 너구리 공자가 날 식도락 클럽에 초대해서 차를 마시면서, 혹시 전단지의 답이 본인이냐고 묻더라고……. 아마 학교 안의 누군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는지 염려가 되었던 모양이야.” 병아리는 마치 습관처럼 단안경을 고쳐 쓸 것처럼 손가락을 올렸다가, 단안경이 없다는 걸 알고 다시 손을 내렸다. “그런데…… 정작 너구리 공자가 여자인 걸 알고 보니까 그제야…… 얼굴도 낯이 익은 거야. 심지어 예전에 무도회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길드의 여러 자료에서도 익히 본 얼굴이지 뭐야. 그때 알았지. 내 고향인 케아르 왕국의 공주님이라는 걸.” “오오!” 기사1이 옆에서 놀라워했다. 케아르 왕국의 공주 이야기였다니, 흥미진진했던 것이다. 기사2도 말은 없지만 무척이나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공주 이야기는 참 어딜 가든 흥미를 끄는 법이다. “말도 안 돼.” 난 피터의 말을 믿지 못했다. “너처럼 눈썰미 좋은 녀석이 그걸 그제야 알았다고? 내가 남장 여자인 건 첫눈에 바로 알아봤잖아. 어떻게 자기네 나라 공주님 얼굴을 몰라볼 수가 있어?” 기사 두 명도 어느샌가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관객처럼 병아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피터는 재밌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진짜 생판 다르거든.” “음?” “궁에서 봤을 때랑은 완전 달라. 진짜 천지 차이라서 나도 못 알아봤어. 화장이랑 머리 때문인가? 아마 먼저 공주님이 말 안 했으면 난 끝까지 몰랐을 거야.” 너구리 공자의 그 통통한 얼굴이 생판 달라져서 아예 못 알아본다고? 도무지 상상은 할 수 없었지만, 피터가 굳이 거짓말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그 케아르 왕국의 공주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기사1이 참을성 없이 끼어들었다. “아직도 남장을 하고 계속 학교에 다니시는 겁니까?” 이번에는 기사2도 견딜 수 없는지 같이 끼어들었다. “그렇죠. 맛집 탐방을 계속할 수 있는 한.” 병아리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대답했다. *** 황도까지는 원래 나흘 정도 걸리지만, 쉬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어서 이삼일이면 도착할 것 같았다. 간혹 쉬는 시간이 있었지만 언제나 무척 짧았다. 밤에도 기사들은 고작 세 시간 정도만 잠을 잤을 뿐, 그 외에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래서 어떡할 거야? 알렉시스.” 잠시 마차에서 내려 쉴 때, 병아리가 남들 귀에 안 들리게 속삭이듯이 물었다. “가만히 앉아서 얌전히 죽을 네가 아닐 텐데?” 그 말을 하며 날 바라보는 병아리는 마치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건…… 카일이 호송 마차 안에서 내게 물어봤을 때랑 똑같은 표정이었다. 즉, 얘네들은 내가 무언가 일을 저지를 거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떡할 거냐고? 가만히 앉아서 얌전히 죽을 내가 아니지 않냐고? 야, 그걸 너 같으면 황궁 기사단이 감시하고 있는데 말을 하겠니?” 난 사방팔방에 들으란 듯이 크게 대답했다. “…….” 어휴, 하고 피터가 혀를 찼다. 황궁 기사단장과 기사들도 모두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날 쳐다봤지만, 별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잠시 호송 마차에서 내렸던 카일은 멀찍이서 내 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우리의 머리 위로 왠지 낯익은 새 한 마리가 비행하자, 몇몇 기사단 인원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고작 새라는 걸 발견하고는 그들 대부분은 곧바로 관심을 끊었지만. 피터만이 예리한 두 눈을 그 하얀 비둘기에게 고정했다. 휘리익―! 피터는 능숙하게 손가락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크게 불었다. 하얀 비둘기가 곧바로 하강해서 그의 팔 위로 내려앉았다. “안녕?” 내가 인사했다. 구구구구구. 노아의 방주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하얀 비둘기도 내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퀴즈 클럽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구면이었다. 적어도 난 그렇다고 믿고 비둘기와 내적 친분을 쌓고 있었다. 물론, 이 비둘기가 그 비둘기인지는 사실 정확치 않다. 어쨌든 피터는 비둘기 다리에 묶여있는 서찰을 풀어 읽었다. 피터는 엄밀히 말하면 죄인으로 호송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황궁 기사단장과 기사들도 서찰 연락을 굳이 막으려 들지 않았다. “뭐야? 암호네. 못 알아보겠잖아.” 내가 고개를 빼꼼히 들이밀고 서찰의 내용을 훔쳐봤지만, 파라야 정보 길드에서 사용하는 암호였기에 내용을 알아보는 건 불가능했다. 피터는 그런 나의 무지를 알면서도 휙 서찰을 내 눈앞에서 치웠다. “너희 정보 길드에서 보낸 거구나? 뭐래? 널 구하려고 쫓아오고 있대? 어디까지 왔대? 어떤 식으로 구할 거래?” 내가 기대감을 잔뜩 품고 병아리에게 속사포처럼 다다다 물었다. “알 것 없어.” 정보 길드의 차기 주인은 깨끗이 내 질문을 무시한 뒤, 서찰을 구겨버린 뒤 잘게 잘게 찢고는 풀숲에 가서 버린 후 흙으로 덮어버리기까지 했다. 암호라서 어차피 아무도 못 알아볼 텐데 말이다. 역시 내 절친은 참으로 철저한 성격이었다. 곧, 우리는 다시 기사단의 감시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달리고, 달리고, 계속 달렸다. “……황도가 보이는군.” 창밖을 보고 있던 병아리가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저 멀리에 흐릿하게 황도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마차는 계속 덜컹거렸다. “오랜만이네. 다신 안 올 줄 알았는데.” 내가 중얼거렸다. 나의 재판과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서, 그간 정이 약간 든 기사1과 2도 딱딱한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황도로 향하는 도로를 활주했다. “황도에 살고 계신 여러분! 제가 돌아갑니다! 다들 오매불망 절 기다리느라 지금쯤 미칠 지경이겠죠? 저는 이제 식도락 클럽 회원이랍니다! 부럽죠! 부러우면 여러분도 맛있는 걸 많이 드세요!” 아직 황도 바깥이라서 주변에 사람은커녕 건물도 없고, 그저 도로를 둘러싼 나무들뿐이었지만 창밖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주인공이라면 자고로 어느 때나 팬 서비스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끼이이잉―! 마차를 몰던 말들이 일제히 앞발을 들어 올리며 놀라서 자리에서 멈추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르르 몰려오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외쳤다. “전원 공격!” 79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순식간에 몰려들어 앞을 가로막은 습격자들 덕분에 마차가 거의 뒤집힐 정도로 흔들리더니 비스듬히 멈췄다. “누구냐!” 저 앞에서 황궁 기사단장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분노했다. 물론 대답하는 자는 없었고, 이미 공격은 시작된 뒤였다. 스물 남짓의 황궁 기사들이 습격자들과 검을 주고받으며 난전이 펼쳐졌다. 난 재빨리 마차 창밖을 내다봤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기사1과 2는 내가 도망갈 게 우려스러웠는지,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게 잡아당겼다. 그들은 동시에 검을 빼어 든 채로 마차 밖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들은 마차 밖으로 나가지 않고, 황녀인 나를 끝까지 감시했다. 어쨌거나 그들의 임무는 바로 내가 도망가지 않도록 하는 거였다. 밖은 챙! 챙! 하는 칼날 부딪히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로 온통 정신이 없었다. “습격자들을 전부 사살하라!” 황궁 기사단장이 크게 외치는 소리. “으악!” “컥……!” 마차 밖에서 사람들이 쓰러지는 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어느 쪽이 쓰러지고 있는 걸까. 바깥은 워낙 혼란해서 어디가 우세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피터! 괜찮아?” 내 맞은편에 앉은 병아리가 몹시 겁을 먹은 것 같아서 내가 말을 건넸다. “어, 응. 괘, 괜찮아.” 병아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다시 창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기사1이 잡아당기는 통에 밖으로 고개는 내밀지 못해도, 힐끗 상황이 보이기는 했다. 황궁 기사단은 복면한 습격자들을 막아가며 분전하고 있었지만…… 습격자들의 인원이 거의 두 배였다. 최대한 황도로 빨리 이동하기 위해서 황궁 기사단 일부만 마차를 호송하게 한 것은 황제의 패착이었던 것이다. 기사단에겐 애초에 같이 왔던 몇백의 군사가 있었는데, 자진해서 뒤에 두고 오지 않았나. “네놈은……!” 황궁 기사단장이 외치는 소리. 다시 힐끗 창밖을 보니, 복면을 쓴 흑발의 남자가 황궁 기사단장을 상대하고 있었다. 챙! 챙! 검날이 여러 번 부딪혔지만, 뜻밖에도 황궁 기사단장은 복면한 상대 앞에서 곤란을 겪고 있었다. 황궁 기사단장은 제국의 세 번째 강자에 드는 사람인데, 그가 쉽사리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다니? 그때, 내가 타고 있던 마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헉!” 피터가 갑자기 문이 열려 놀랐는지 숨을 들이켰다. 문 앞에 있는 건 복면을 쓰고 장검을 든 습격자였다. 문을 연 건 한 명이었지만, 뒤로 대여섯 명의 복면인들이 검을 들고 공격 자세를 한 채 서 있었다. 즉, 마차를 에워싸고 있었던 기사단들은 이들을 막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습격자들을 보자마자 내 옆에 있던 기사1과 2가 동시에 마차 문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나 예상된 공격이었기에, 마차 문을 열었던 습격자가 받아쳤다. 그 뒤에 있던 다른 복면인들이 기사1과 2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죽인 것 같진 않아.” 나는 마차 안에서 멀뚱멀뚱 문밖만 구경하다가 말했다. “뭐, 뭐?” 피터가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저기 바닥에 쓰러져서 기절한 기사단 애들 말이야. 습격자들이 급소를 피해 공격해서 죽진 않았어.” 습격자들과 황궁 기사단의 실력은 비슷했지만, 습격자들의 숫자가 거의 2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2대1로 싸우니, 상대의 급소를 피해 공격하고도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습격자들은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제국에서 황궁 기사단과 비등한 실력을 가졌거나 어쩌면 조금 더 우위인 곳은 현재 단 하나뿐이었다. 비록 황궁 기사단장이 혼자 미지의 흑발남과 잘 싸우고 있지만, 그것도 흑발남이 상대를 죽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대등해 보이는 것일 뿐이었다. “나가자, 피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밖에서 싸우고 있잖아. 다 끝나면 나가자.” 피터가 또 겁먹은 낯으로 말했다. “그럼 넌 여기서 기다려. 저기 바닥에 널브러진 검들이 많으니깐 나도 하나 주워서 좀 도와주고 올 테니까. 그래야 빨리 끝나지.” 내가 말하면서 마차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피터가 얼른 날 붙잡았다. “설마 기사단을 도와줄 건 아니겠지?” 내가 평소에 하도 미친 짓을 하고 다니니 피터가 확인했다. 물론 대답은 간단했다. “절세미인을 도와줘야지.” 그러나 마차 밖으로 나왔을 때 그다지 도와줄 게 없다는 걸 알았다. 기사1과 2는 부상을 입고 이미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딴에는 열심히 노력한 것 같지만, 복면인의 집단 공격을 이길 재간은 없었을 것이다. “…….” 복면인들 중 한 명이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모시겠습니다, 9황녀 저하. 일단 말에 오르시지요.” “쟤 좀 먼저 도와주고요.” 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기사1의 검을 집어 들고는 흑발남 쪽을 눈짓하며 말했다. “음……. 저분은 도움이 필요 없을 텐데요. 어차피 금방 끝날 거 같기도 하고, 차라리 저희들이 여기서 빨리 떠날 준비를 하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복면인의 어조에는 흑발남에 대한 믿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런가?” 하긴 그것도 그렇다. 어차피 이들의 목표는 바로 나. “알았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마차 안에서 날 힐끔거리며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피터에게 말했다. “삐약아! 가자!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나와! 절세미인이랑 같이 가야 한대!” 혼란한 와중이라 그런가 아무도 그 절세미인이 누군지 묻지 않았다. “으, 응.” 피터가 쭈뼛거리며 얼른 마차에서 나왔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기사들의 피를 보고는 병아리의 낯빛이 해쓱해졌다. “얘네들 안 죽었다니까. 걱정 마.” 내가 다시 안심시켰다. “걱정 안 했어.” 피터가 대답했다. “타십시오.” 복면인들이 말을 대령했길래, 난 일단 피터부터 안전히 말 위에 올렸다. “감히 황궁 기사단을 공격하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 저쪽에서 아주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와서 전부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아, 마침 끝났네.” 내가 중얼거렸다. 복면한 흑발남이 황궁 기사단장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황궁 기사단장의 검은 저 멀리에 날아가 떨어져 있었다. 승부가 나 버린 것이다. 흑발남은 잠깐 황궁 기사단장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기사단장의 양팔을 세로로 쫙 그었다. “……!” 펠트 자작은 으음, 하고 신음을 삼켰다. 그의 팔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당분간 검을 잡을 때 불편할 테니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황궁 기사단장은 끌고 간다. 묶어라.” 흑발남이 명하자, 복면인들이 황궁 기사단장에 달려들어 밧줄로 손과 몸을 묶었다. 이제 펠트 자작은 나와 처지가 거꾸로 된 것이었다. “호송 마차 안에는 누가 있지?” 흑발남이 아직도 문이 잠겨 있는 호송 마차 앞을 지나치다 물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 난리가 난 와중에도 3번 카일은 꼼짝없이 안에 갇혀 있었다. “카일 밀리안입니다.” 복면인 하나가 대답했다. 호송 마차 문도 안 열어봤는데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정보 길드원이라도 되나? “…….” 흑발남이 서서 잠깐 고민했다. 카일을 여기서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너구리가 자기 나라로 호송하길 원했으니 일단 끌고 가지. 꺼내라.” 마침내 결정을 내린 흑발남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복면인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도대체 그 ‘너구리’가 누군지는 궁금하지도 않은지 묻지도 않았다. 일사불란하게 복면인들이 호송 마차의 문을 열었고, 카일을 밖으로 끌어냈다. 카일은 갑자기 밖으로 나와서 눈이 부신지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 더 얼굴이 초췌해져 있었다. “…….” “…….” 미간을 구긴 카일과 흑발남이 잠깐 서로를 응시했다. “아직까지 죽지도 않고 살아있었군.” 흑발남이 제법이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는 척하지 마, 재수 없는 새끼.” 카일은 초췌한 와중에도 독기 어린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흑발남의 목소리뿐 아니라 눈빛,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세를 보면 녀석의 정체를 모르기는 힘들었다. 잠시 벌레 보듯 카일을 내려다보던 흑발남은 검을 들었다. “히익……!” 놀란 카일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푹, 흑발남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찔러넣었다. “끄헉……!” 카일이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그대로 엎어졌다. 흑발남의 검이 카일의 한쪽 다리를 꿰뚫은 상태였다. 푹, 다시 검을 거두자 피가 분수처럼 카일의 다리에서 쏟아져나왔다. “으헉, 악…… 흐윽……” 다리를 붙잡고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카일의 고통스런 신음이 들려왔다. 그 광경을 멀리서 보고 있던 피터가 속이 거북한지 시선을 돌렸다. “죽지만 않게 해라.” 흑발남이 명했다. “예.” 복면인이 대답하며, 카일에게 다가가 다리를 묶어줬다. 흑발남은 그런 카일에게서 시선을 떼고, 이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와 두 눈이 마주친 순간. 복면으로 가리고 있어 눈밖에 안 보였지만, 순간 그가 씩 웃는 걸 알 수 있었다. 눈웃음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알렉시스.”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그야말로 퇴폐미가 절절 흘렀다. 흑발남은 내게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피 묻은 장검을 손에 든 그는 왠지 평소와 다른 위압감이 느껴졌다. 뭐야? 나 왜 가슴이 두근거리지? 그가 다가오더니 내 앞에 섰다. 그리고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보고 싶었어.” 흑발남이 부드럽게 날 끌어안았다. 그 광경을 본 주변의 복면인들이 전부 다 놀랐는지 흠칫했다. 말 위에 앉아 있던 피터만이 이미 예상한 듯한 얼굴이었다. 80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는 포옹을 굳이 거절하지 않고 꼭 달라붙으면서 다짜고짜 질문부터 뱉었다. “황궁 기사단은 쉴 새 없이 마차를 타고 달려왔는데…… 어떻게 네가 우리보다 더 빨리 여기 와서 기다리고 있냐고? 분명 출발할 때 넌 우리 뒤에 있었잖아.” 마침 밧줄에 묶여 옆으로 끌려온 황궁 기사단장도 이것이 궁금하긴 했는지, 고개를 치켜들고 제라드의 얼굴을 봤다. “교장한테 비행 장치를 빌렸지.” 퇴폐미남은 다시 복면 뒤로 눈웃음을 지으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 그런 방법이?” 중간 평가 기간에 무림 고수와 술주정뱅이가 사용했던 비행 장치의 속도는 웬만한 마차보다 적어도 세 배는 빨랐다. “덕분에 황도까지 오는 데는 하루밖에 안 걸렸다. 그 후엔 널 구할 준비를 하면서 기다렸지.” 제라드가 말했다. 난 묵묵히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정말 예상치도 못했는데 퇴폐미남을 다시 마주하니…… “거참 이상하게 반갑네. 내가 왜 이러지?”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싸바한테 반가움을 느끼다니. 드디어 내가 맛이 간 건가?” “넌 원래 맛이 간 상태였어. 알렉시스.” 굳이 또 뒤에서 말 위에 타 있는 피터가 한마디를 거들었다. 나와 퇴폐미남이 끌어안은 채 붙어 있는 모양새가 참으로 눈꼴 시리다는 듯한 얼굴. 난 헛기침을 하며 제라드의 품에서 슬쩍 빠져나왔다. “가자, 비밀 안가로.” 퇴폐미남이 말 위에 올라타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 상태가 안 좋은 카일과 황궁 기사단장은 일반 마차에 집어넣고, 밖에서 빗장을 걸어 문을 잠갔다. 호송 마차는 외형이 너무 눈에 띈다는 이유로 현장에 버려졌다. 나는 졸지에 퇴폐미남과 함께 말에 탄 채, 복면인들과 함께 달렸다. 가던 중간에 대부분의 복면인들과 약속한 것처럼 찢어졌다. 마흔 명이 무리 지어 다니면 눈에 더 띄기 때문이겠지. 결국 남은 일행은 나와 퇴폐미남, 피터, 그리고 카일과 황궁 기사단장을 태운 마차, 복면인 열 명 정도뿐이었다. 이윽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황도 안에 있는 어느 저택이었다. “나중에 공작가로 정식 초대할게. 지금은 여기 있어야 할 거다. 잠시 숨어 있기에는 좋은 장소지.” 제라드가 말에서 내리며 복면을 벗고 내게 말했다. 저택 안에서 몇 안 되는 소수의 고용인들이 튀어나와서 착착착 정렬했다. 정말이지 엄청난 속도였다. 물론 원래 공작가에는 훨씬 많은 고용인들이 있겠지만, 여긴 비밀 안가이므로 소수정예가 더 안전하다. “들어가자. 필요한 건 다 준비되어 있을 거야. 배고프면 식사부터 같이할까?” “……알렉시스, 나 배고파. 빨리 들어가자.”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뒤에서 말에서 내린 병아리 한 마리가 뜻밖에 먼저 재촉했다. 심지어 밥 주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제라드인데 날 재촉하는 것이다. 하긴 우리가 호송 중에 먹은 건 육포랑 말린 과일, 비스킷 쪼가리 외엔 없었다. “우리 병아리! 마침내 식도락 클럽에 가입하려는 거구나? 그래! 빨리 밥 먹자! 많이 먹고 얼른 토실토실 곰돌이가 되어야지!” 난 피터가 토실토실 곰돌이가 되면 단숨에 잡아먹을 것만 같은 시선으로 눈에 불을 켜며 활짝 웃었다. 피터는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졌는지 그런 내 눈깔을 보고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얼굴이었다. “누가 식도락 클럽에 가입한다는 거야.” 그저 배고프고 피곤한 와중에도 끝까지 부인하는 병아리 한 마리. “왜? 벌써 거의 명예 회장 수준인데 뭘.” “…….” 하긴, 왠지 식도락 클럽 회원들과 너무 자주 엮이는 피터였다. 게다가 내가 맨날 식도락 클럽에서 갖다주던 음식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조련되어버리지 않았던가. 덕분에 피터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생각에 잠긴 얼굴을 보니, 어쩌면 자신의 정체성이 퀴즈 클럽에 있는 게 확실한지 의심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황궁 기사단장과 카일 밀리안은 어떻게 할까요?” 우리를 마지막까지 따라온 복면인들 중에서 대장처럼 보이는 사내가 퇴폐미남에게 물었다. 이 복면인들의 본 정체는 로스트베인 공작가 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 기사들에 의해 마차에서 끌려 나온 카일은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다리 한쪽이 검에 꿰뚫렸는데 천으로 묶은 것밖엔 아무 조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에 몸부림치다 혼절한 것이다. 반면에 황궁 기사단장은 팔을 그은 정도였기에 정신은 멀쩡했고, 고개를 들어 우리 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펠트 자작은 저택의 꼭대기 방에 가두고 감시해라. 카일 새끼는 창고 지하실에 가둬놔.” 퇴폐미남이 명하고 휙 몸을 돌렸다. 황궁 기사단장에게는 그래도 창고 지하실에 가둬질 카일보다는 훨씬 나은 처사였다. 공작가 기사단이 곧바로 명을 이행하려고 두 사람을 데려가려고 할 때였다. “제라드 공자. 이런 무모한 짓을 하다니 후환이 두렵지 않소?” 불쑥 황궁 기사단장이 제라드를 향해 큰 목소리로 물었다. “황궁 기사단을 공격하고 황제 폐하께서 데려오라 명한 자를 빼돌리다니,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군. 황제 폐하를 적으로 돌릴 작정인가 말이오.” 생각보다 침착한 목소리였다. 따지려는 게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번 일은 로스트베인 공작이 승인한 일이오? 아니면 자네의 독단인가?” 제라드는 빤히 황궁 기사단장을 응시하다가, 뚜벅뚜벅 그의 앞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은 평이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친네의 승인은 필요 없다. 지금은 내가 로스트베인 공작이니까.” “……!” 황궁 기사단장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러나 피터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는지 전혀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그대가 공작이라고? 대체 언제부터 말이오? 그럼 로스트베인 공작을 그대가…….” 황궁 기사단장이 뒷말을 흐렸다. 로스트베인 가에서는 후계자가 가주를 이겼을 때 가주직을 넘긴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사흘 전 내가 황도에 도착하자마자 작위를 넘겼다. 이미 5년 전에 대련에서 내가 아버지를 이겼고, 그 후로는 내게 가주직을 넘기겠다며 계속 성화였지.” 제라드가 말했다. “황궁 기사단장. 그대가 9황녀를 비열한 방법으로 잡아가고 난 뒤, 내 당연한 권리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제라드가 가주가 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내가 잡혀간 게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다. 아마도 날 구출할 때 기사단을 마음대로 움직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후계자였을 때도 공작가 기사단은 분명 그에게 충성하겠지만, 가주가 되면 더 권력 행사가 분명해지니까. “그럼 너 이제 공작이야? 앞으로 각하라고 불러야 돼?” 내가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퇴폐미남이 날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씩 웃었다. “넌 황녀니까 아무렇게나 불러.” “아, 그래? 그럼 천한 것이라고 불러도 돼?” “…….” “…….” 피터, 황궁 기사단장, 공작가 기사단, 대기하고 선 시종들까지 순간 입을 꽉 다물었다. 푸흡―! 제라드만이 혼자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킥킥거리자, 경악의 물결이 기사들과 사용인들 사이를 덮쳤다. 그들은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자신의 주군을 보고 있었다. 오로지 피터만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제라드가 아닌 날 봤다. “왜 그래? 왜 웃어?” 난 진짜 왜 웃는지 몰라서 두 눈만 깜박거리며 퇴폐미남한테 물었다. “아니다, 아무것도.” 제라드가 웃음기를 억지로 참으면서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날 보며 덧붙였다. “네 마음대로 해, 알렉시스. 원한다면 그렇게 불러.” “그래, 이 천한 것아. 그럼 들어가서 빨리 밥 먹자.” 쿠흡―! 퇴폐미남은 또 뭐가 웃긴지 소리 내서 웃음을 터트렸다. 심지어 어깨춤도 출 기세였다. 얘가 갑자기 미쳤나. 왜 이래? *** “너희 집 음식이 아주 훌륭하군. 식도락 클럽 회원으로서 만점을 주겠다.” 내가 열심히 식탁 위의 요리들을 집어 먹으면서 엄지를 척 날렸다. 아낌없는 칭찬에 식탁 주위에 서 있던 두 명의 시종들이 왠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퇴폐미남 같은 싸바 녀석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었으니, 음식 칭찬 따위는 아마도 처음 들어 봤으리라. “맛있나? 나중에 우리 공작가에서 같이 살면 이런 건 매일 먹을 수 있는데. 그냥 나랑 같이 살래?” 제라드가 씩 웃으며 내게 물었다. 맞은편에서 아무 말 없이 우아한 자태로 꾸준히 음식을 들고 있던 피터가 푸헉, 하고 그만 먹던 걸 뱉고 말았다. 퇴폐미남의 다정한 말투는 물론, 그 말의 내용까지 병아리 같은 연약한 생명체에게는 너무나도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피터에게만 벅찬 건 아니었는지, 시종들도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맙소사. 제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소리 좀 하지 말게, 제라드 공.” 병아리가 진저리를 쳤다. 제라드의 호칭을 더 이상 ‘공자’가 아니라 ‘공’으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그 다른 누구도 아닌 저 도른 녀석한테……! 소름 돋는 말을 하려면 단둘이 있을 때나 하라고!” 하지만 퇴폐미남은 싸바답게 병아리 한 마리가 삐약거리는 소리는 개의치 않았다. “어때? 알렉시스. 나랑 같이 살면 맛있는 거 매일 먹을 수 있는데.” “음…….” 난 잠깐 고민했다. 맛있는 음식의 유혹이 너무나도 커서 난 그만. “그래, 그러자.” 나도 모르게 오케이를 해버리고 말았다. “……!!” “……!!” 피터가 고개를 홱 들었고, 제라드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퇴폐미남은 심지어 자기가 제안해놓고도 내가 진짜 수락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했다. 두 시종들은 눈을 꼿꼿이 뜨고 초집중하여 사태를 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정말 같이 살 거지?” 처음엔 놀랐던 퇴폐미남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면서, 식탁 위에 놓여 있던 내 한 손을 덥썩 잡았다. “어? 어. 그, 그래.”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기에,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밥 먹는 거에 웬 난리람? “…….” 제라드는 나만 빤히 바라보며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다. 저건…… 설마 감격한 건가? 81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축하하네, 제라드 공.” 불쑥 피터가 퇴폐미남에게 말했다. 그런데 농담 섞인 어조도 아니고, 정말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뭘 축하한다는 건지 난 모를 노릇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된 사람은 난데? “그럼 결혼 날짜는 석 달 뒤로 잡지. 네가 연애 석 달 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갑자기 퇴폐미남이 기쁜 목소리로 결혼을 기정사실화해버렸다. “어? 으응. 그, 그랬나?” 연애 석 달 하고 싶다고 내가 그랬나? 언제 그랬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난 사흘간은 우리 못 만났으니까 치지 말고, 오늘부터 연애 첫날인 걸로 할까?” 퇴폐미남의 쉴 새 없는 제안에, 나도 거리낌 없이 대답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그러지 뭐!” 제라드가 내 대답에 또 활짝 웃었다. 심지어 하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싸바 녀석이 저렇게 햇살처럼 웃으니까 하도 특이한 광경이라서 내가 그를 빤히 봤다. 새삼스럽지만 절4는 절4네. 퇴폐미가 이 와중에 넘실넘실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한참을 그리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알렉시스, 왜 그렇게 날 계속 보고 있어? 혹시 내가 완벽한 너의 이상형이라도 되나?” 퇴폐미남이 여전히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내게 물었다. “그래, 잘생기긴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진실을 대답했다. “후……. 내가 여길 오는 게 아니었어.” 피터가 밥 먹다 말고 혼자 탄식했다. “…….” “…….” 시종들이 말없이 무척 심각하게 동감의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피터와 달리 공작가에 매인 몸이라서 여차하면 대피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 결혼 약속이 왠지 얼떨결에 이뤄지는 바람에 그들로서는 이것이 진정 농담인지 아닌지조차 분간할 수 없으리라. “그런데 이제 어떡할 거야?” 내가 라따뚜이 비슷한 요리를 입속에 집어넣으며 제라드에게 물었다. “황궁 기사단이 습격당했으니 분명 황궁에서 추적해 올 텐데. 공작가 짓인 걸 알아내면 어떡해?” “습격 소식을 듣자마자 우리 짓인 걸 바로 의심할걸. 애초에 황궁 기사단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건 전 제국에 우리 기사단밖에 없으니까.” 퇴폐미남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내 얼굴을 본 것도 아니고 증거가 없으니, 황제가 따져도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다.” “…….” 한마디로 그냥 모르쇠로 우기기 작전이라는 얘기였다. 근데 싸바가 얘기하니까 왠지 그럴싸한 게 진짜 통할 것 같았다. 게다가 우리는 대다수의 습격단과 따로 떨어져서 비밀 안가로 왔기 때문에, 황제의 추적도 쉽진 않아 보였다. “그리고 황제 쪽도 아마 지금 다른 문제로 고민 중일 거야.” 제라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무슨 문제?” 나도 그렇고 병아리도 음식을 들다 말고 4번을 쳐다봤다. 퇴폐미남은 품속에서 마치 청첩장처럼 생긴 화려한 모양의 카드를 꺼내더니, 내 앞으로 던졌다. 나는 얼른 카드를 주워서 펼쳤다. 병아리의 눈길이 내게 집중되는 것을 느끼곤, 나는 녀석을 위해 카드에 적힌 내용을 소리 내어 읽었다. <대신전과 전 제국민에게 알린다.> 나 9황녀 알렉시스 도레는 황위에 도전하여 현 황제에게 결투를 신청하노라. 본인은 지난 결투에서 초대를 받지 못했으니, 2황자의 황위 즉위는 무효임을 주장하는 바이다. 고대부터 내려오는 황실의 법도에 따라, 모든 황족은 결투를 통하여 황위에 도전할 권리가 있음이다. 대신전은 결투 날짜를 조속히 공고하길 바라며, 본 제국의 모든 귀족들은 자유롭게 관전이 허락될 것이다. 9황녀 알렉시스 도레. 나는 마지막 내 이름 옆에 찍혀 있는 도레 가문의 직인을 빤히 쳐다봤다. “이 천한 것아, 이것 때문에 내 반지 달라고 한 거야?” ‘천한 것’이 또 나오자 퇴폐미남이 그만 또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그 단어가 이 녀석의 웃음 트리거인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며 따졌다. “내가 동의하지도 않은 결투 도전장을 전 제국에 쫙 돌리느라고 내 어머니 가문의 인장 반지를 달라고 한 거냐고? 어?” “그럼, 네가 잡혀가서 죽을 판인데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까?” 웃음기를 거둔 퇴폐미남이 되물었다. “아니. 잘했다고.” 내가 히죽 웃으며 칭찬했다. 왠지 현 황제 앞에 잡혀갔어도 이 세계의 주인공인 내가 쉽게 죽었을 거 같진 않지만, 당연히 뭐라도 하는 쪽이 낫겠지. “평생 이렇게 숨어다닐 순 없으니까. 황제가 날 가만 놔둔다면 모를까,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고. 나 때문에 피터도 거의 죽을 뻔했잖아.” 피터가 인질로 잡혔던 일은 내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대로 가만있으면 나중에 더한 문제가 생길 것 같은 불안감이 생겼달까.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결판내는 게 낫겠어.” 내가 결심했다. 결투는 생각지도 못한 일인데 퇴폐미남이 알아서 멍석을 깔아주다니, 차라리 잘됐다. “반지는 돌려줄게.” 제라드가 내 손 위에 도레 가문의 인장 반지를 건네주었다. 난 손가락에 반지를 꼈다. 이세계에 빙의한 후로 내내 끼고 있었더니 이젠 없으면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결투 도전장에 내 신분을 증명하는 가문의 직인이 없었다면 도전장의 진위가 의심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직인뿐 아니라, 결투 도전장 뒷장에는 9황녀가 현재 도레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은 마지막 생존자라는 재상부의 증명 서류까지 붙어 있었다. 도대체 재상부에서 이걸 어떻게 떼어왔는지는 미스터리였다. “그나저나 우리 아버지와 손을 잡았다지? 덕분에 우리 길드 녀석들이 무척 바쁜 것 같던데.” 병아리가 뜻밖에도 퇴폐미남을 향해 말을 건넸다. 마치 이 모든 걸 벌써 알고 있었다는 듯한 저 태도. “잠깐.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끼어들었다. “이놈의 삐약이! 넌 알고 있었던 거야? 오는 길에 노아의 비둘기한테 받은 서찰에 적힌 내용이 이거였구나? 그런데도 나한테는 모른 척을 하다니!” 내가 언성을 높였다. “진정해. 너한테 얘기하면 모든 계획이 황궁 기사단장한테 드러날까 봐 어쩔 수 없었어.” 삐약이가 차분하게 말했다. “왜 들통이 나? 나 입 무거워!” “양심에 손 좀 얹어라.” 삐약이는 냉정했다. 정말이지 나에 대한 신뢰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들이 인질로 잡혀 같이 호송된 것을 알았는데 파라야 길드장이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지.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다.” 제라드가 말했다. 파라야 정보 길드장, 케아르 왕국의 레이 남작이 직접 나섰다면, 일사천리가 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밑에 길드원들을 들들 볶아서 총동원했을 테니까. “하루아침에 결투 도전장을 귀족들에게 전부 발송하고, 제국의 모든 길거리에 전단을 붙이더군. 적어도 사흘은 걸릴 줄 알았는데.” 퇴폐미남이 나름 감탄했다는 듯 말했지만, 삐약이는 그 정도쯤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심드렁한 얼굴로 다시 음식을 들었다. 어쨌든 정보 길드의 추진력 덕분에 이번 결투에 대해서는 이제 제국민 전체가 다 알고 있을 거 같았다. “그런데 현 황제가 결투에 응할까? 거절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내가 의문을 제시했다. 그러자 제라드와 병아리 모두 날 일제히 바라보았다. “거절할 리는 없다.” “분명 결투에 나올 거야.” 제라드와 병아리가 동시에 대답했다. “왜 그렇게 확신하는데? 현 황제는 내 검술 실력을 잘 알아. 내가 걔가 보낸 암살자들을 얼마나 많이 처치했다고.” 내가 설명했다. “직접 결투를 하게 되면 현 황제의 검술 실력으로는 날 이길 수 없단 말이야. 그런데 결투 도전에 응할 거라고?” “이 멍청아. 모르겠냐? 세상 사람 다 아는 사실을?” 병아리가 불쑥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꼽줬다. “그래! 모른다! 왜!” 난 나만 또 뭘 모르나 싶어서 신경질이 났다. 분명 원작을 읽은 건 난데, 왜 맨날 나만 뭘 모르는 것인가! “황제는 쉴드 포션을 먹었잖아!” 삐약이가 즉시 답을 알려줬다. “황위에 즉위하자마자 그것부터 먹었겠지. 몸을 벨 수도, 찌를 수도 없다고. 상처가 나서 죽지도 않겠지. 황제는 포션을 먹었고 넌 아니니까 당연히 네가 불리해. 그리고 황제는 힘도 세잖아.” “동의한다. 그리고, 대대로 황족들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라면 과할 정도로 집착하는 편이잖아. 이번에도 절대 결투를 거부하거나 물러서지 않을 거다.” 퇴폐미남이 덧붙였다. 그러자 옆에서 병아리가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 “옳은 소리로군. 과하다 못해 그 집착은 소름이 끼칠 지경이라고.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지. 황가는 저주받은 거야.” “……무슨 소리야? 저주라니.” 난 약간 어리둥절해서 병아리를 바라보았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대대로 모든 황족은 반드시 자기 형제들을 전부 몰살시켰잖아. 어느 한 세대도 남김없이 전부 다. 그게 저주가 아니면 뭐겠냐?” 병아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대꾸했다. “애초에 결투로 황위를 가린다는 것도 비상식적인데, 오랜 전통이잖아. 대신전에는 버젓이 황족들을 위한 결투장이 있고, 심지어 결투를 위한 고대 마법까지 걸려 있고.” “황가는 역사적으로 항상 그래왔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을 뿐이다.” 제라드도 거들었다. “황가의 핏줄에 살기가 흐른다는 건 누구나 다 알지. 황자들이 널 죽이려고 기를 썼던 것도 그런 연유겠지. 지금까지 그 어떤 황족도 결투를 거부한 적 없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다.” “…….” “…….” 다시 침묵이 흐르고, 두 절세 미남이 빤히 날 봤다. “근데 얜 왜 이러지?” 병아리가 먼저 중얼댔다. “황위 쟁탈은커녕 황궁에서 도망 나왔잖아. 그런 검술 실력을 가지고도.” 82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정신 상태가 워낙 특이해서가 아닐까. 대대로 이어져 온 황족의 살기가 다른 쪽으로 발현되었나 보지.” 제라드가 싸바답게 대꾸했다. 면전에 당사자가 있는데도 정신 상태를 대놓고 운운하는 간 큰 놈이었다. 그러나 원작 여주도 아스테시아로 도망갔기 때문에, 이 일은 내 정신 상태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잠깐. 퇴폐미남, 현 황제가 쉴드 포션을 먹어서 유리하다면, 너는 왜 굳이 결투 도전장을 먼저 내민 거야?” 내가 의문을 제기했다. 불리한 싸움을 왜 먼저 시작했지? “어떤 식으로든 끝을 내지 않으면 황제는 널 죽일 때까지 쫓아다닐 거니까. 물론,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결투장엔 안 가면 그만이다.” 제라드가 대답했다. “그리고 황제가 유리한 건 맞지만 이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이길 방법? 예를 들면?” 병아리가 극도의 관심을 보이며 머리를 앞으로 기울였다. 나도 퇴폐미남에게 집중했다. “방법이야 많지. 예를 들면, 먼저 때려눕히고 목구멍에 독약을 붓는다든가.” 참 단순하면서도 싸바스러운 방법이었다. 그리고 묘하게 싸바가 얘기하니까 설득력이 있었다. “하긴. 황제도 독에는 면역이 없어.” 병아리도 납득했다. “제라드 공처럼 어린 시절부터 독에 내성을 길렀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야. 독의 내성을 기른다는 건 말은 쉽지, 실제로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그렇다. 우리 가문에서도 대대로 독에 내성을 기른다는 명목하에 죽어 나간 인간이 부지기수다.” 미친 가문……. 난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알기로도 황족들은 독에 내성을 기르기보다는, 주로 독을 식별할 수 있는 도구나 감별법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었다. 기미를 하는 시종을 항상 곁에 두기도 했다. 9황녀에겐 없었지만. “그런데 너희 둘, 오늘 보니까 진짜 죽이 잘 맞는다?” 나는 제라드와 피터를 번갈아 보고는 주둥아리를 열었다. “거의 뭐 제국을 통째로 둘이 어디 가서 새로 세워도 되겠어.” 그만큼 두 절세 미남은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짝짜꿍해서 마음만 먹으면 정말 나라를 건국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두 절세 미남은 무시하며 음식을 드는 게, 딱히 내 말을 부정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잠깐. 그나저나 결투를 하게 될 당사자는 바로 나인데 말이지. 진짜 결투해야 되는 거야? 그러다 진짜로 목구멍에 독약 붓고 이기면 어떡하지? 그럼 황제 되어야 하잖아. 난 황제는 되기 싫은데.” 내가 목구멍에 남은 음식을 집어넣으면서 중얼댔다. “사실은 나도 그게 걱정되긴 해.” 삐약이가 진심으로 근심 어린 목소리로 반응했다. “알렉시스, 네가 진짜로 황제 되면 어떡하냐?” “…….” “…….” 정적이 흘렀다. 아니 왜 그걸 나한테 물어. “삐약아, 그게 걱정이 됐으면 진작에 퇴폐미남을 말렸어야지. 지금까지 맞장구 잘 쳐놓고 이제 와서 그런 걱정을 하면 어떡해?” 내가 지적했다. “하필이면 나도 너랑 같이 붙잡혀서 호송되고 있었으니 말릴 새가 없었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 아버지가 제라드 공의 계획에 동참해버렸는데 그럼 어떡해? 이미 엎지른 물인걸.” 삐약이가 억울해했다. “난 네가 진짜로 황제가 될까 봐 정말이지 걱정이 태산이야!” 쉬지 않고 삐약이가 더욱 언성을 높여 삐약거렸다. “자칫하면 전 세계를 절망과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고 갈까 봐 무서워 죽겠다고!” “…….” “…….” 다시 차가운 정적이 흐르고. “그래도 현 황제 앞에 끌려가서 죽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피터 공자.” 뜻밖에도 제라드가 중재했다. “세상이야 절망과 고통의 구렁텅이가 되든지 말든지. 안 그런가?” “…….” “…….” 진정으로 싸바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리여서 한 치도 위화감이 안 들었다. “그리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피터 자네가 재상이 되어 구렁텅이에서 세상을 구하면 될 것 같은데.” 퇴폐미남이 덧붙인 말에, 난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내심 생각했지만. 삐약이는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 “제라드 공! 악담이 너무 심하잖은가! 나더러 저 무지렁이가 황제가 되면 뒤치다꺼리를 하란 말이야? 혹시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건가!” 격하게 삐약거리는 병아리 한 마리. 소설 속에서는 이상하게 저렇게 격하게 무언가를 부정하면, 꼭 나중에 그렇게 되던데……. “진정하게, 피터 공자. 그냥 한번 해본 소리였다.” 퇴폐미남이 씩 웃으면서 안심시켰다. “자넨 당연히 우리 제국민이 아니니 재상이 되는 건 불가능하겠지. 국적이 다른걸. 정보 길드도 물려받아야 할 테고.” “아, 아까워.” 난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내가 황제가 되거나 말거나와는 무관하게, 피터는 정말 재상에 잘 어울리는 비주얼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저 단안경을 끼고 예리한 시선으로 귀족 회의에서 정책을 발표하는 그의 모습만 상상해도 소름이 쫙 끼쳤다. 후, 이 녀석이 케아르 왕국 출신만 아니었어도……. “그렇지. 내가 제국에 귀화할 가능성은 없으니 재상이 될 리 없지. 후……. 다행이다.” 삐약이는 재상까지 제 발로 걷어차고는 앞길 탄탄하지 않은 자신의 미래를 떠올리며 무척 편안해진 얼굴을 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디저트를 들려는 찰나 다이닝 룸의 문이 벌컥 열렸다. 우리는 일제히 문 쪽을 바라보았다. 서찰이 놓인 트레이를 손에 들고 시종장이 들어와서 퇴폐미남 곁으로 다가왔다. “각하, 대신전에서 막 도착한 서찰입니다.” 시종장이 공손하게 트레이에서 서찰을 들어 건네자, 제라드가 그 자리에서 펼쳤다. 잠깐 내용을 읽은 퇴폐미남이 서찰을 우리 앞에 놓았다. 그리고 날 바라본 채로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황제도 승인했다. 결투 날짜가 정해졌군. 일주일 뒤다.” *** 나는 결투를 기다리며 실컷 맛있는 것 먹고, 뜨근한 물에 목욕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빈둥거렸다. “알렉시스. 결투가 코앞인데 검술 연습 안 할 건가? 내가 상대해 주겠다.” 퇴폐미남이 시도 때도 없이 날 들들 볶았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나 혼자 많이 해라.” 황제가 쉴드 포션을 먹었다면 검으로 베고 찌르는 건 듣지도 않을 텐데 무슨 검술 연습이란 말인가. 때려눕히는 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나와의 대련을 갈구하던 퇴폐미남은 단호한 거절에 무척 아쉬워하는 기색이었다. 학기 초에 한 번 결투한 이후로는 나와 검을 맞대어 본 일이 없으니까. 어쨌든 그건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연애를 시작한 것치곤 심심한데…… 뭐 없어?” 내가 넌지시 물었다. “음? 뭐 말인가?” 제라드가 멈칫했다. 이 녀석. 얼굴만 초미남이지 연애가 처음이라 아무것도 모른다. 자리에 우뚝 선 채로 날 빤히 쳐다보는 저 얼굴. “됐다, 됐어.” 싸바한테 뭘 바라겠는가. 장미랑 초콜릿, 포옹이랑 키스, 뭐 이것저것. 그런 걸 좀 달라고 어떻게 내 입으로 대놓고 말하겠는가! 연애를 하잘 때는 언제고, 검술 연습 안 하냐고 묻기나 하고? 어제 선물이랍시고 준 게 바로 자기가 갖고 있던 여분의 검이었다! 나중에 같이 영지에 가면 더 좋은 최고의 명검으로 사주겠다면서 미안해하기까지! 그딴 것 다 필요 없는데! “삐약아! 카드 게임이나 하자!” 열받은 내가 소리 질렀다. 혹시 모를 현 황제의 마수를 피하기 위해 여전히 공작가에 나랑 같이 머물고 있는 피터를 꼬드겨 브리지 카드 게임을 시작했다. 몇 판을 내리 했는데 이상하게 내가 계속 졌다. 내 얼굴에 패가 다 보인다나 뭐라나……. “아까 창고 지하실에 가보니 카일 녀석 상태가 안 좋아 보이던데. 저러다 다리를 잘라야 할지도 모르겠더라.” 브리지 게임 중에 피터가 별 감정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난 열심히 카드를 보다가 내밀었다. 피터가 별 새로울 것도 없다는 듯 자기 카드를 내더니 둘 다 가져갔다. “이번에도 내가 이겼군.” “후…….” 난 왜 맨날 지는 거야! 이건 내 문제가 아니라, 피터가 너무 카드 게임에 출중해서 생긴 문제가 분명했다.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내게도 승리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난 다시 열심히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카일한테 동정심 갖고 싶지 않으니까 그 녀석 얘기는 꺼내지 마.” 내가 병아리에게 말했다. “그래. 그렇지.” 피터는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단안경을 고쳐 썼다. 그의 단안경은 황궁 기사단에게 인질로 잡혔을 때 잃었지만, 비밀 안가에 도착한 첫날에 파라야 정보 길드원 하나가 몰래 나타나서 약간의 옷가지와 함께 새로 갖다줬다. 우리는 다시 카드 게임을 시작했다. 둘이 계속 그러고 있으려니까 마침내 제라드가 나타났다. 연무장에 가서 또 한창 기사단과 검술 대련을 하고 왔을 게 뻔했다. “브리지인가? 나도 같이해도 되겠지?” 자리까지 잡고 앉은 게 정말 카드 게임에 참여할 작정으로 보였다. “셋이면 짝이 안 맞잖아. 아무나 한 명 더 데리고 와.” 내가 말했다. 브리지는 자고로 넷이서 해야 재밌었다. 그러자 제라드가 시종을 하나 부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꼭대기 층에 가서 펠트 자작을 데려오도록.” 나와 피터가 동시에 동작을 뚝 멈췄다. “…….” “…….” 아니 왜 굳이 그분을……. *** “앉으시지.” 제라드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기사 네 명에게 이끌려 자리에 나타난 황궁 기사단장은, 카드 게임을 같이 하자는 뜬금없는 제안에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앉지 않고 계속 서 있자. “할 줄 모르는가?” 퇴폐미남이 물었다. “……물론 할 줄은 아오.” 황궁 기사단장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더니 자리에 착석했다. 제라드는 기사단장을 데려온 기사 네 명에게 그만 나가보라는 듯 손짓했고, 그들은 명에 따랐다. 자리에 앉은 위치상, 나와 제라드가 한 팀, 피터와 황궁 기사단장이 엉겁결에 한 팀이 되었다. 나는 열심히 카드를 섞고는 착착착 나눠주었다. “얼마 전에 파라야 길드에서 묘한 정보를 보내왔더군.” 손에 든 카드 패를 정리하며 제라드가 말을 꺼냈다. 83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딱히 누굴 향해 말한 건 아니었지만 ‘파라야 길드’라는 말에 피터가 고개를 슬쩍 들었다. 병아리는 공작가에 나랑 같이 숨어 있느라고, 현재 정보 길드로부터 일부러 전서구를 받지 않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비둘기가 오면 공작가에서 먼저 열어보기 때문이다. 공작가에서 정보 길드의 암호를 어떻게 해독할 수 있는진 모르겠지만……. 한편, 황궁 기사단장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로 카드를 집어 들었다. “펠트 자작, 경의 아들이 며칠 전부터 돌연 실종되었다더군.” 제라드가 무심하게 폭탄을 터트렸다. “파라야 길드에서는 경의 아들로 의심되는 사체를 발견해서 조사 중이야.” “……!!” “……!!” “……!!” 나와 피터, 황궁 기사단장이 전부 기함했다. “뭐? 다니엘이?” 내가 먼저 소리 질렀다. “거짓말이오!” 황궁 기사단장이 카드를 저도 모르게 떨어트리고는 소리 질렀다. “설마 그럴 리가…….” 피터도 깜짝 놀라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황도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오겠다면서 학교를 나갔다더군. 그전까지는 흔적이 있는데 황도에 도착하자마자 종적이 묘연해졌어. 아직 경의 다른 가족들은 공자가 사라진 사실을 몰라.” 퇴폐미남은 황궁 기사단장을 향해 건조하게 말했다. 황궁 기사단장이 테이블을 박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눈을 부릅뜨고 제라드를 쏘아보다시피 했다. 동시에 거의 그 자리에서 졸도할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 “…….” “…….”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럴 리가 없어! 다니엘이 죽었을 리가 없어! 다니엘의 사체라니! 절대 아니야!” 나는 카드 따위는 집어 던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상상만 해도 정말 끔찍한 일이었기에 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진정해, 알렉시스.” 퇴폐미남이 대꾸했다. “나도 아닐 거라고 생각하니까. 파라야 길드가 발견한 사체는 그저 다니엘 공자와 체구와 의복이 비슷했을 뿐이다. 사체는 얼굴이 망가져서 알아볼 수 없었어.” “……!” 자세히 듣고 보니 더욱 끔찍한 얘기였다. 황궁 기사단장의 낯빛이 파래졌다가 하얘졌다가 했다. 그는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듯이, 목소리를 쥐어짰다. “우리 아이는 검술 대회에서 4강에 든 실력이오. 그 정도면 황궁 기사단에서도 우리 아이를 이길 기사가 그렇게 많진 않소. 그리 쉽게 죽을 아이가 아니란 말이오.” “이미 말했듯이, 나도 다니엘 공자가 죽었다고 생각지 않아.” 퇴폐미남이 다시 말했다. “다니엘 공자는 성격도 무난한 편이고 누구한테 원한 살 일도 없었지.” “그럼 어떻게 된 거요?” 황궁 기사단장은 마치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간절히 퇴폐미남을 바라봤다. “그 애가 실종되다니……. 말도 안 되는…… 대체 어떻게 된…….” 펠트 자작이 입술을 짓씹었다. “파라야 길드에서 그 정보를 받은 뒤에 나도 나름대로 추적을 해봤지.” 제라드가 대꾸했다. “결론만 얘기하자면, 황제가 납치해 갔다고 추정된다.” “……!” 나와 피터, 황궁 기사단장의 두 눈이 동시에 화등잔만 해졌다. 황궁 기사단장의 충격은 물론 나와 피터보다 훨씬 컸다. “펠트 자작, 경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조만간 황제와 9황녀의 결투가 있을 거다.” 이 와중에 너무나도 침착한 목소리로 퇴폐미남이 말을 이었다. “본디 양측에서 결투 입회인으로 각각 다섯 명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입회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피터도 짐작 가는 게 있었는지 표정이 달라졌다. “과거 황족의 결투에선, 이 입회인들 중에 결투 상대를 협박하기 위한 인질들이 섞여 있던 경우가 있었다.” 퇴폐미남의 말이 내 귓가를 때렸다. 즉, 이번엔 황제가 결투에 다니엘을 인질로 데려올 거라는 의미였다. “하…… 그 새끼가 또 이런 수법을?” 나는 새삼 분개했다. 피터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다니엘까지. 이미 포션을 먹었다면 본인이 더 유리한 상황인데, 인질까지 잡다니. 정말 저주라도 받은 핏줄인 걸까. “황궁 기사단장의 자식을 건드리다니 위험한 발상이군. 기사단에서 알면 반발이 심했을 텐데.” 병아리가 생각에 잠긴 채로 중얼거렸다. “기사단 쪽에선 알지 못해. 납치 건은 황제가 자신의 비밀 정예 호위를 이용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어.” 제라드가 대꾸했다. 황궁 기사단장의 얼굴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평생 황궁에 충성을 바쳐온 내게 어떻게 이런 짓을……. 어떻게 우리 다니엘을.” 그가 이를 악물었다. 황궁 기사단장에게 더 이상 평상시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자리엔 오로지 분노와 배신감에 찬 남자만 남아 있었다. “감히 우리 아이를 건드리다니……. 이……!” 펠트 자작이 지금 어딘가에 있을 현 황제를 향해 이를 아득 갈며 테이블을 내려쳤다. 당장이라도 현 황제를 만나면 달려들어 죽일 기세였다. “이건 좀 어이가 없네.” 그 광경을 본 내가 코웃음을 치면서 툭 내뱉었다. 피터, 제라드, 황궁 기사단장이 일제히 날 돌아보았다. 난 차가운 표정으로 펠트 자작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경은 피터를 인질로 잡아서 내가 아스테시아 안에서 나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했어. 그런데 이제 자기 가족이 인질로 잡혔다니 화가 난다는 거예요?” “…….” 황궁 기사단장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당시 인질로 잡혔던 피터는 비록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펠트 자작과 같이 앉아 있는 지금 그의 속이 편하지만은 않으리라. 게다가 브리지 게임에서 두 사람은 하필이면 같은 팀이었다. “대답해 보세요, 펠트 자작. 내가 성안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정말 피터를 죽일 생각이었나요?” 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 황궁 기사단장은 석상처럼 굳어서 입을 열지 못했다. “말 안 해요? 이 자리에서 죽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대답하시죠.” 내가 목소리를 깔자 생각보다 엄청난 협박처럼 들렸다. 호송 당시에는 항상 목석같기만 하던 황궁 기사단장인데, 지금은 표정이 복잡한 감정으로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 있었다. “…….” “…….” “…….” 무척이나 긴 침묵이 흘렀다. 사방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마침내 황궁 기사단장은 머리를 감싸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황녀 전하.” “…….” “황녀 전하께서 나오지 않으실 경우에 대해선,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저 반드시 나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때 숫자를 다 셌을 때까지 황녀 전하께서 나오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했을지는 정말로 저도 모릅니다.” 황궁 기사단장은 아까 터트린 현 황제에 대한 분노까지 이젠 전부 사그라들어버린 것 같았다. 죄책감과 자책이 어린 표정으로, 펠트 자작은 갑자기 그 자리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오, 피터 공자.” 황궁 기사단장이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러나 피터의 얼굴을 쳐다보기가 힘든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병아리는 물끄러미 황궁 기사단장을 쳐다보고 있다가, 냉랭하게 뱉었다. “미안하지만 난 사과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경이 그날 내 목에 겨눈 칼날의 그 소름 끼치는 느낌은 결코 잊을 수가 없을 테니까.” 병아리의 말에, 펠트 자작은 더욱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그렇겠지. 다시 한번 사죄하겠소.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검을 들어 날 찔러도 좋소. 원하는 대로 하시오.” 난 진심인가 싶어 펠트 자작을 쳐다봤다. 그런데 정말 진심인 것 같았다. 마치 처분을 기다리듯이 꿋꿋하게 앉아 있는 펠트 자작을 노려보던 피터는, 후, 하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글쎄, 폭력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병아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나마 양심은 있는 것 같으니 한 가지만 약속하면 용서해 드리죠. 즉시 황궁 기사단장직을 내려놓고, 다시는 기사가 되지 않겠다고 약속하십시오.” “……!” 펠트 자작은 고개를 번쩍 들고 피터를 올려다봤다. “평생 기사로 살아온 내게…… 기사를 포기하라는 건가?” “물론입니다. 경 같은 사람이야말로 결코 기사가 되어선 안 되니까.” 피터가 차갑게 대꾸했다. “아무리 황제가 명했다 한들 죄 없는 사람의 목에 검을 겨누다니. 진정한 기사라면 황제에게 항명하였겠지. 그게 아니면 차라리 사직을 하든가. 안 그렇습니까?” “…….” 펠트 자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동공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피터의 말대로, 황제에게 항명은 못하더라도 사직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깊게 고심하던 그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정을 단숨에 내려야 했던 사람답게 결단을 내렸다. “……알겠소. 그러리다. 앞으로 다시는 기사로 살지 않겠소.” 펠트 자작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용서를 받지 않으면, 다니엘을 구하는 데에 우리의 협조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는 하나뿐인 아들의 안위 앞에서 모든 걸 내려놓았다. 뒤이어 복잡한 감정이 기사단장의 얼굴 위를 스쳤다. “……고맙소.” 이렇게 브리지 게임은 완전히 물 건너가 버리고 말았다. 펠트 자작은 여전히 근심에 휩싸인 낯으로 무릎을 펴고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알렉시스, 다니엘이 인질로 잡혀있어도 결투를 제대로 할 수 있겠어?” 병아리가 심오한 화두를 내게 던졌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인질의 목숨을 포기하면 간단해.” 퇴폐미남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 “…….” “이 싸바…….” 난 진정으로 감탄했다. 어쨌든 너무 싸바스러웠는지 다들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9황녀 저하.” 불쑥 펠트 자작이 말을 떼기에, 우리 모두 그를 바라봤다. “우리 아이와 친구라고 하셨지요. 정말 결투에서 다니엘이 인질로 나온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펠트 자작은 살짝 붉어진 눈시울을 한 채로 날 응시했다. “설마, 죽게 냅두시진 않겠지요……?” “…….” 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세 남자의 시선이 모두 내게 꽂혔다. “뭘 모르나 본데, 진정한 집사는 자기 고양이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는 법이지.” 내가 선언했다. “집에 불이 나면 일단 고양이부터 안고 뛰어나가야 되는 거야. 나머지는 다 잃어버려도 아무 상관 없으니까. 다니엘은 걱정 말라고.” “……?” “……?” “……?” 아무도 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 못 한 눈치였다. 어차피 구구절절 설명해봤자 이해 못 할 것이다. 나는 곧바로 뚜벅뚜벅 저택 밖으로 나가서는, 창고 지하실로 돌진했다. 카일을 만나러. 84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그 새끼랑 무슨 얘기 했는지 정말 말 안 해줄 건가?” 퇴폐미남이 막 방으로 들어가서 잠을 청하려는 날 붙잡고는 추궁했다. 이 와중에도 퇴폐미가 막 절절 풍겨서 난 절로 태권도 방어 자세를 취할 뻔했다. 어쨌건, 내가 지하실 창고에 혼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얘기했기 때문에, 퇴폐미남과 병아리는 대화 내용을 알지 못했다. 피터는 그래도 대충 짐작이 갔는지 그냥 한번 물어보고 말던데. 4번은 집요한 데가 있었다. 분명히 짐작 가는 내용일 텐데 굳이 계속 묻는 걸 보면. “알면서 뭘 그래. 나중에 얘기해줄게. 싸이코랑 면담하느라고 피곤하단 말이야.” 내가 대충 넘기고 방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하는데, 퇴폐미남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내 팔을 잡았다. “잊었나? 우리 사이에 비밀 없기로 했잖아. 내가 지난번에 쓴 소원 기억 안 나?” “…….” 참, 그게 있었지. 앞으로 비밀 없이 다 오픈해 달라는 소원을 이 녀석이 쓴 적이 있었지. 그 약속을 안 지켜서 기분이 상했던 걸까. “후…… 알았어. 귓가 대 봐.” 굳이 비밀 얘기도 아닌데 나는 왠지 귓속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까치발을 들고 최대한 녀석의 얼굴 가까이로 입술을 쓱 들어 올렸다. “…….” 퇴폐미남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다가, 특히 가까이 다가온 내 입술에 빤히 시선을 고정했다. 이상하게도 그는 자기 귓가를 내게 내어주는 게 아니라, 불쑥 고개를 숙였다. 쪽. “…….” “…….” 어? 어? 어? “어? 어? 어?” 나는 당황한 속마음이 그대로 ‘어?’ 세 번으로 입으로 나왔다. “너, 너, 너 지금!” 내 입술에 뽀뽀한 거야? 이제까지는 이마에만 했는데……. “…….” 제라드는 내 반응을 관찰하며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도 질세라 빤히 퇴폐미남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뱃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스멀스멀 치솟았다. 결심했다. 난 고개를 더 들었다! 그리고 퇴폐미남의 입술을 내 입술로 덮으면서 쪽, 하고 키스했다. “…….” 입술을 뗀 순간 퇴폐미남이 굳은 표정이 보였다. 귓불이 발갰다. 당황했나? 내가 너무 앞서갔나? “헉…!”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퇴폐미남이 갑자기 제 입으로 내 입을 틀어막으면서 키스를 퍼부었던 것이다. 귓가에 격한 남자의 숨소리가 들려오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으응…….” 너무 좋아서 내 입에서 그만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 제라드가 놀랐는지 입을 뗐다. 황홀감에 빠져 있는 내 멍한 표정을 보더니, 퇴폐미남이 싱긋 웃었다. “좋아? 더 할까?” “응…….” 내가 팔을 뻗어서 퇴폐미남의 목을 감싸 안았다. 제라드가 그렇게 행복해하는 표정은 처음 봤다. 다시 키스하며 퇴폐미남이 손으로 내 허리를 단단히 휘감았다. 벌컥―! 그때 마침, 내 방 맞은편에 있던 피터의 방문이 활짝 열렸다. “…….” “…….” “…….” 멍청하게 문고리를 잡고 서 있는 피터. 그리고 요사스럽게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고 있던 제라드와 나. “어, 계, 계속해. 나, 난 신경 쓰지 말고.” 쾅! 피터가 도로 문을 닫았다. “…….” 제라드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고, 녀석이 피식 웃었다. 킥, 킥, 나도 웃음이 나왔다. 퇴폐미남이 다시 내 입술을 베어 물으며, 날 끌어안은 채 내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도 밀어붙이는 바람에, 여기저기 서랍인지 테이블인지에 부딪혀서 물건들이 마구 주위로 떨어졌다. 나는 제라드에게 안긴 채로 발을 뻗어서 방문을 밀어서 닫았다. *** 마침내 결투일이 밝았다. 나와 제라드, 피터는 다이닝 룸에서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현 황제가 즉위했을 당시에 우리 길드에 들어왔던 정보가 하나 있는데.” 조용히 빵을 먹던 병아리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문득 말문을 열었다. “그가 즉위 후에 선황의 물건을 많이 뒤지고 다녔다고 해. 무언가를 찾듯이 말이야. 황제궁의 시중인들이 훔친 물건이 없는지 취조를 하기도 했고.” 나는 베이컨을 입안에서 오물거리면서 말없이 피터를 쳐다봤다. “또 현 황제가 유리컵을 한 번 실수로 떨어트린 적이 있는데, 손가락을 찔려 핏방울이 난 것 같다는 증언이 있어.” “뭐? 쉴드 포션을 먹었으면 피가 날 리가 없을 텐데?” 내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니까. 그런데 금방 손수건으로 닦아버려서 확실치는 않았다더라고.” “…….” “…….” “흠. 황제가 포션을 먹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말인가.” 제라드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황위에 즉위하면 바로 비밀 금고로 가서 그것부터 먹었을 텐데. “결투에 응한 걸 보면 이제는 찾아서 먹은 것 같아. 물론…… 안 먹었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병아리가 과일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나를 향해 말했다. “만에 하나 황제가 포션을 안 먹었으면 칼 한 방에 죽을 수도 있단 얘긴데. 알렉시스. 그런 건 간단하지? 네 전문 분야잖아?” “…….” 난 이걸 대답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음. 그, 그렇지. 카, 칼빵은 내 전, 전문 분야지.” 말하면서도 약간 부끄러웠다. 내 전문 분야가 고작 칼빵 같은 것이라는 사실에. 원작 여주처럼 약초학 수업이라도 열심히 들어둘 걸 그랬나? “간단하네. 만약의 경우라면 그냥 칼 한 방 놓으면 되겠어.” 아스테시아 수석인 병아리 한 마리가 완벽한 복안을 발표했다. “훌륭하군. 그렇게 해라.” 퇴폐미남도 고개를 끄덕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전에 내가 했던 말 취소할게. 너희 둘이 짝짜꿍 먹으면 어디 가서 제국이라도 세우겠다는 말. 아무래도 그건 안 되겠어.” 내가 말했다. 단언하건대 이 둘이 제국을 세우면 삼 일 만에 다시 무너질 것 같았다. “칼빵 놓는 게 뭐 그리 쉬운 줄 알아?” “그게 뭐 대수라고. 네가 하기 싫으면, 대신 내가 놓지.” 퇴폐미남이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다. “이 미친놈이……. 진짜 놓을 거야?” 나는 귀가 솔깃해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물었다. 물론 장난으로 하는 얘기긴 하지만, 만약 퇴폐미남이 나 대신 현 황제에게 칼빵을 놔준다면 한시름 덜겠지. 퇴폐미남이 씩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대신, 반역죄와 시해죄는 네가 사면해줘야 해.” “그래,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해줄게. 사면이 뭐야, 개국공신으로 만들어줄게.” “개국공신은 그런 데 쓰는 말이 아니다.” 퇴폐미남이 대꾸하면서, 약속하라는 듯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래서 나도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도 같이 찍었다. “…….” “…….” 거참 오묘한 광경이라는 듯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병아리. 우린 장난스럽게 킥킥 웃고는 아침 식사를 마저 마쳤다. *** “알렉시스, 확실한가? 정말 저 자식 데려갈 거야? 지금이라도 마음 바꾸는 게 어때.” 퇴폐미남이 여전히 내 결정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데려갈 거라니까.” 저 뒤에서 기사들이 카일을 대신전으로 가는 마차에 태우고 있었다. 이틀 전, 나는 공작가 주치의를 데려오라고 해서 카일의 다리도 봐주었다. “제대로 치료는 해놓았으니 다리는 절단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도 꼼짝없이 잘라야 했을 겁니다.” 당시 의사가 했던 말에, 이상하게도 카일은 내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지하실에서 단독 면담을 할 때만 해도 내게 그리 욕설을 퍼붓더니만, 다리를 봐주고 나니까 적어도 욕은 멈췄다. 내 덕분에 다리를 고쳤다는 걸 자기도 깨달았을 테니까. 지금 카일은 깁스를 하고 한쪽 목발을 짚은 상태였다. “…….” 퇴폐미남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곧바로 카일이 탄 마차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더니 마차 문 너머로 카일을 쏘아보며 경고했다. “약속 지켜라. 안 그러면 그 자리에서 목을 비틀어 죽여버릴 테니까.” 초췌한 얼굴의 카일은 충혈된 눈으로 제라드를 노려봤다. 퇴폐미남도 놈을 마치 무슨 버러지라도 보듯 쏘아보고는 휙 몸을 돌렸다. 나는 카일에게 다가가서 반가면을 건넸다. “이거나 써. 황제가 네 면상을 알아보면 일 그르치니까.” 카일은 불퉁한 얼굴로 반가면을 건네받더니 착용했다. 얼굴의 상단을 가리며 입가만 드러났다. 이윽고, 펠트 자작도 기사들에게 끌려와서 모습을 드러냈다. “제라드 공, 동행시켜주어 감사하오.” 펠트 자작이 카일과 같은 마차에 오르기 전에 퇴폐미남을 향해 말했다. “알렉시스한테 감사해. 난 경을 데려가는 것도 반대였으니까.” 제라드가 퉁명스레 뱉었다. 원래 퇴폐미남은 결투가 끝날 때까지 펠트 자작을 공작가에 잡아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발 아들이 무사한 모습을 봐야 한다며 체면도 버리고 간절히 애원하길래, 내가 부탁해서 허락해줬다. “어차피 이젠 황제랑 척졌는데 우리 앞길을 막을 가능성은 없잖아. 이제 황궁 기사단장도 그만둘 거고.” 나의 말에, 제라드는 미간을 구겼었다. “사람 속은 모르지. 겉으로만 저렇게 행동할 뿐이지 내심 아직도 황제에게 충성할 수도 있어.” “무슨 망발을! 내 가족에게 손을 댄 자에게 충성한다면, 내가 사람이 아니라 개요!” 펠트 자작은 노발대발하면서 소리쳤었다. 원작의 대형견이었던 다니엘의 아버지라서 그런가? 개일 가능성을 심지어 본인이 언급한 것이다. 물론, 난 고양이의 아버지는 개일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개한테서는 개 새끼가 나올 수 있지만, 개한테서 고양이 새끼가 나올 순 없으니까. “제기랄, 이 무식한 기사단장이랑 꼭 같이 타야 해?” 마차 안에서 카일이 불쑥 신경질을 냈다. “불만 있나?” 마차에 오른 황궁 기사단장이 자리를 잡으며 차갑게 물었다. 그러자 카일이 코웃음을 쳤다. “고작 며칠 전에 그 소름 끼치는 호송 마차에 저 도른 놈이랑 같이 가둬놓은 주제에. 뭐? 불만 있냐고?” 아, 나랑 그때 같이 잠깐 마차에 갇혀 있었다고 화가 난 거야? “둘 다 닥쳐라.” 퇴폐미남이 저쪽에서 싸늘하게 일갈했다. 다행히 마차 안은 조용해졌다. “또 동물 한 마리가 등장하는군.” 마지막으로 병아리가 저택에서 병약 미모를 뽐내며 나오는 걸 보고 내가 중얼거렸다. 85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역시 원작의 제목은 <아카데미의 반려동물들>이 더 잘 어울려.” 주변에 동물이 너무 많았다. 피터는 마차에 탑승하기 전, 날 보고는 우뚝 멈췄다. “드레스 입은 건 처음 보네. 진짜 황녀라도 해도 믿겠어.” “야, 내가 황녀 맞거든?” 난 발끈해서 대꾸했다. 심지어 나는 현재 쇄골 부근에 있는 황가의 표식이 잘 보이게 하려고 목이 꽤 파인 드레스를 입고 있는 상태였다. 과연 결투에 적합한 의복인가 하는 점은 내게 중요치 않았다. “후……. 그래. 제국에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네가 황녀지.” 삐약이가 장탄식을 뱉었다. 아니 대체 뭐가 안타까운데? 제대로 따져보기도 전에, 삐약이가 마차에 올랐다. “또 머리에 꽂으려고?” 정원 한구석에서 꽃 한 송이를 꺾고 있는 날 보며 제라드가 물었다. “예쁘지?” 난 머리에 꽃을 꽂고 뱅글뱅글 자리에서 돌며 예쁜 척을 했다. “……그래. 예쁘다.” 제라드가 피식 웃었다. 예쁜 ‘척’만 할려고 했는데, 진짜 예쁘다는 소릴 들으니 황당했다. 어쨌든 나는 머리에 꽃을 꽂고 제라드와 함께 말에 올랐다. *** 대신전은 마치 고대 그리스 스타일의 건축물로, 크기는 훨씬 더 컸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대신전 주변은 인산인해였다. 결투를 참관하러 온 귀족들이 속속들이 마차를 타고 도착하고 있었다. “황제도 벌써 왔나 보군.” 황제를 호위하는 수십 명의 황궁 기사단이 대신전 앞에 집결해 있는 걸 보니, 무슨 전투라도 앞둔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우리는 같이 온 공작가 기사단을 그들 곁에 대기시켰다. 졸지에 같이 서게 되자 황궁 기사단과 공작가 기사단 사이에 보이지 않는 묘한 신경전이 흘렀다. 우리는 공작가 기사들 중 단 한 명만 데리고 대신전의 계단을 올랐다. “어머! 호호호. 다들 안녕하세요?” 나는 유명 인사답게 옆을 지나가는 귀족들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누구예요?” “모르겠는데요.” “쳐다보지 마. 머리에 꽃이…….” 그렇게 날 못 알아보는 인파를 지나쳐서 대신전의 계단을 올라갔다. 기다리듯 서 있던 사제들이 제라드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로스트베인 공작 각하, 오셨습니까. 9황녀 저하를 모시고 오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제법 짬밥이 있어 보이고 대머리인 사제가 말을 건네며 우릴 둘러보았다. 퇴폐미남이 공작 작위를 넘겨받았다는 사실을 며칠 전에 공작가에서 공식 발표했기 때문에, 대머리 사제도 제라드를 각하라고 불렀다. “아…… 이쪽이 9황녀 저하시군요.” 대머리 사제가 바로 날 알아보며 눈을 마주쳤다. 내 목 아래 황가의 표식이 선명했기 때문에, 누구든 내 정체를 알아보긴 쉬웠다. 그나저나 초면인데도 내 눈깔을 똑바로 마주치고 내 머리에 있는 꽃도 무시하다니, 정말 수행을 굉장히 많이 한 것 같았다. 혹시 수행을 많이 해서 승려들처럼 머리숱이 없는 건가?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수행을 많이 했을 뿐 아니라 예의도 바른 사람이었는지, 대머리 사제가 정식으로 인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뒤에서 다른 사제들도 덩달아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반가워요! 여러분! 저는 아스테시아의 유명 인사 알렉시스라고 합니다!” 내가 활짝 웃으며 윙크를 찡긋 날렸다. 사제들이 한 명이 아니기 때문에, 일일이 한 번씩 찡긋, 찡긋, 또 찡긋 날려주느라고 시간이 좀 걸렸다. “…….” 사제들이 내 정성스러운 윙크를 받곤 눈에 띄게 동요하며 시선을 피했다. “하아.” 목발을 짚고 우리와 함께 서 있던 카일이 유독 못 볼 꼴이라도 본 양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사제들한테 웬 윙크야. 하지 마라.” 제라드도 다소 퉁명스레 말했다. 설마, 내가 다른 남자들한테 윙크해서 질투하나? 하긴. 퇴폐미남이 다른 여자들에게 윙크하고 다니면 나도 기분 나쁘겠지? 난 그제야 인지상정을 깨닫고는, 얼른 수습했다. “후후. 죄송해요, 사제님들. 제 윙크가 너무 유혹적이었죠? 그래도 하트는 안 날렸잖아요.” 내가 당당히 말했다. 윙크는 몰라도 하트는 오로지 절세 미남들을 위한 것이다. “전 쉽지 않은 여자거든요.” “…….” 사제들은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다. 몇 명은 내 머리에 달린 꽃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때 어디선가 짧은 헛웃음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까 피터였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네 눈깔을 하고 윙크하면…… 유혹이 아니라 공포거든? 꿈에 나올까 봐 무서우니까 하지 말라는 거야, 이 바보야.” 이놈의 삐약이는 내가 9황녀이건 말건 서슴없이 바보라고 부르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데 사제들이 공감했는지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게 아닌가. “…….” “곧 결투가 시작될 겁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약간의 침묵 후에, 수행을 많이 해서 머리숱이 없는 사제가 우리에게 말하면서 길을 안내했다. “그럼 오랜만에 오빠 새끼 낯짝이나 한번 볼까?” 내가 발랄하게 외쳤다. *** 결투장은 그냥 대리석이 쫙 깔린 넓은 홀이었다. 결투 인기가 워낙 많아서 안에 들어가지도 못한 귀족들이 밖에 무리를 지어 서 있을 정도였다. 아직 황제는 결투장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는지 없었다. 결투장 양옆으로는 커다란 관객석이 있어서 약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고, 자리는 몇백 명이나 되는 귀족들로 꽉 차 있었다. 매의 눈으로 살펴봤지만, 축제 때 잠깐 얼굴을 봤던 다니엘의 어머니와 누이는 오지 않은 듯했다. 아들이 실종된 줄도 모른다더니, 아스테시아에서 학교를 잘 다니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면 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인기에 밀려 결투장 안에 못 들어온 무리 속에 있거나. “오오, 저분이 9황녀 저하시구나.” “멀리서 봐도 눈빛이 장난 아닌걸.” “엇? 아까 본 그 머리에 꽃 꽂은 미……” 관객석에 앉아 있던 귀족들이 나의 등장에 웅성거렸다. 다행히 마지막 누군가의 말은 웅성거림 속에서 흩어졌다. 앞에 사제들도 일렬로 착석해 있었고, 황궁 관리도 세 명 보였다. 황궁 관리들은 커다란 종이 위에 펜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으며, 결투 내용을 기록하기 위한 기록관 같았다. 난 유명 인사답게 객석을 향해 또 손을 한 번 크게 흔들어 주었다. “입회인은 다섯 명까지 결투장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심판 사제가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입회인의 수를 헤아렸다. 심판 사제는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게, 사제가 되기 전에는 기사였던 것 같았다. 우리 측 입회인은 퇴폐미남, 병아리, 카일, 펠트 자작. 그리고 머릿수를 맞추기 위해 데려온 공작가 기사 한 명. “이 입회인은 왜 얼굴을 가리셨습니까?” 심판 사제가 반가면을 쓴 카일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내 기사들 중 하나다. 얼마 전 큰 사고가 나서 얼굴에도 흉한 상처를 입어 가린 것이다. 신분은 내가 보장해.” 퇴폐미남이 건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심판 사제는 딱히 관심은 없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대신전의 결투장은 고대 마법이 걸려 있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하여, 대대로 황족의 결투가 열리는 곳이지요.” 고대 마법이라. 듣고 보니 결투장 자체가 좀 신비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기분 탓인가? “결투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결투에 개입하는 행위는 마법으로 자동 차단됩니다. 또한 저희 대신전에서도 결투에 관련하여 일절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대신전은 절대 안 끼어들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는 거였다. “그럼, 9황녀 저하. 정식으로 결투에 참가하시겠습니까?” 심판 사제가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하는 듯한 동작을 취하며 물었다. “네!” 내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러자 내 몸 주변으로 마치 날 보호하듯이 투명한 노란색의 엷은 막이 세워지는 것이 보였다. “신기하다. 이 막은 뭐지?” 내가 손을 휘휘 저어서 막을 건드려보았다. 그냥 손이 잘 통과했다. “무슨 막?” 제라드가 날 빤히 쳐다봤다. “……?” 얘한텐 안 보이나?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막이 쳐져 있지 않았다. 이게 아까 말한 그 고대 마법인 듯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오셨다!” “황제 폐하시다.” 객석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려보니, 결투 무대 맞은편에 있는 뚫린 입구에서 누군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안내를 맡은 사제의 뒤로, 한 청년이 요란한 황금색 로브를 걸친 채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뒤로 우르르 나타난 황제 측 다섯 명의 입회인들. 넷은 우락부락한 사내들이었는데, 황제의 정예 비밀 호위였다. 나는 열심히 다니엘을 찾았지만, 우락부락이들의 몸에 가려서 안 보였다. 그래도 얼핏 갈색 머리가 보인 것 같기도 한데……. 분명 다니엘이렷다? 심판 사제가 먼저 황제에게 다가가서, 똑같이 주의사항을 알려주고 결투에 참가할 것이냐고 물었다. 황제가 그러겠다고 하자, 그의 주변에도 나랑 똑같은 노란색의 투명한 막이 생기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후. “오랜만이구나.” 황제는 비죽 웃으며 결투 무대로 와서 서서는, 날 향해 말했다. 그가 움직이자 그의 몸을 에워싼 투명한 막도 같이 움직였다. 아무래도 이 고대 마법은 결투에 참가하겠다고 맹세한 시점부터 오로지 결투 당사자인 둘에게만 적용되는 것 같았다. 86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황제는 20대 후반의 청년으로, 무력이 세다더니 역시 덩치가 크고 근육질이었다. 그간 나를 죽이려고 암살자를 보내고, 용족을 풀고, 날 독살하거나 납치하려던 놈이다. 다 실패하고 말았으니 두뇌도 근육으로 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린 시절 모습하곤 좀 다르구나.” 황제가 날 유심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어릴 땐 좀 눈빛이 유순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나는 눈깔을 치켜뜨고는 황제를 쏘아보았다. “지금은 뭐!” “……흠.” 황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 눈깔을 직통으로 받으면 다들 시선을 피하던데, 제법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9황녀를 괴롭히던 놈이니, 내가 좀 사람이 변했다곤 해도 날 만만하게 볼 수밖에 없겠지. “이봐요! 사제님.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솔직히 말해봐요. 내 눈깔 괜찮잖아?” 내가 홱 옆에 있는 대머리 사제를 돌아보면서 눈을 부라렸다. “아, 아니…… 전혀…….” 수행을 많이 한 사제가 얼결에 솔직히 말해버렸다. 관객석의 귀족들 사이에서조차 싸한 정적이 흘렀다. “수행을 많이 하셔서 그런가. 거짓말이 좀 능숙하시네.” 난 그냥 대머리 사제의 거짓말이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황제는 냉랭한 조소를 머금었다. “됐다. 9황녀, 감히 황위에 도전하다니 미친 게로구나. 무릎 꿇고 죄를 빌면 그나마 고통 없이 죽여줄 수도 있는데, 어쩔 테냐?” “웃기시네! 너나 목숨 간수 해야 할 거다! 오늘이 네 제삿날이니까!” 난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관객석의 귀족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우리의 말싸움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앞에 팝콘만 있었어도 각자 한 통씩 냠냠할 것 같았다. 팝콘신선들이라고나 할까. “도둑놈 주제에 말이 많구나.” 황제가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결투 무대에 서서 자신의 검을 빼어 들었다. 누가 봐도 화려한 모양의 명검. “무릎 꿇려라.” 황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명했다. 그러자 우락부락이들이 그들 사이에 붙잡고 있던 누군가를 앞으로 끌어내고는 바닥에 억지로 꿇렸다. “다니엘……!” 내 뒤에서 펠트 자작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펠트 자작이 마치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것 같자, 옆에 있던 공작가 기사가 얼른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밧줄에 포박된 다니엘이 무릎 꿇린 채로 앉혀졌다. “불쌍한 우리 냐옹이…….” 꼭 비 맞은 강아지처럼 생긴 고양이 한 마리가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퉁퉁 부어있는 다니엘은 물끄러미 제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뒤이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여전히 그의 눈시울이 붉었다. “황제 폐하! 어찌 이러실 수 있단 말입니까! 제 아들입니다! 폐하께 충성을 바친 저의 가족이란 말입니다!” 분노한 펠트 자작이 갈라진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닥쳐라!” 황제는 짜증을 내며 펠트 자작을 노려보았다. “9황녀에게 회유되어 입회인으로 나온 주제에 말이 많구나!” “……폐하께서 그 아이를 납치하지만 않으셨어도 제가 여기 올 일은 없었습니다!” 펠트 자작은 절규하다시피 했다. 한편, 다니엘의 정체를 몰랐던 객석의 귀족들은 이제야 황궁 기사단장의 아들인 것을 알고 놀라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도 워낙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곤 했던 황족의 결투다 보니, 몇몇은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침울한 낯으로 고개를 떨군 고양이를 보고, 가슴이 그만 찢어지는 것 같았다. “감히 우리 고양이를 학대하다니! 된장! 어떤 놈이야!” 속에서 천불이 치솟았다. “황제 이 새끼! 너지!” 난 여전히 조소를 머금고 있는 황제를 향해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너 오늘 진짜 칼빵 맞을 줄…… 어?” 무언가를 보고 난 일순 멈칫했다. “어어?” 나의 눈길은 어느새 무럭무럭 크기를 키우는 그것을 따라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올라가고,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그러다 멈췄다. 맞은편 상단을 내가 쳐다본 채 굳어 있자, 우리 편 일행도 그쪽으로 곧장 시선을 던졌다. 관객석의 귀족들과 우락부락이들도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침내…… 황제조차도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왜 저러지?” “뭐가 있어요?” “9황녀 저하가 뭘 쳐다보는 거요?” 관객석에서 귀족들이 웅성거리면서 서로 궁금해했다. 그러고 보니, 황제 측 입회인의 수가…… 6명이었다. “흥, 내 주의를 흩트리려고 별짓을 다 하는구나. 한심하도다, 누이야.” 황제가 비웃으면서 다시 눈길을 바로 했다. 다른 모든 이들도 죄다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았다. “……?” 난 고개를 갸웃했다. 다들 너무 평화롭게 저걸 무시하고 있는 것이 내겐 놀라울 따름이었다. 뭐야……. 다들, 저게 안 보여? *** 난 일단 시선을 거둔 다음에 내게 닥친 결투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나 약간 넋이 나간 것은 맞다. “어, 음. 그렇지. 이제 결투를 해야 한다고? 맞아.” 난 힐끔힐끔 ‘그놈’을 바라보면서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래. ‘저놈’은 애초에 황제 측 입회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쩐지 옷도 처음부터 다르게 입고 있더라니. “그, 음. 어. 뭐였더라? 오늘 계획이? 일단 다니엘부터 때려눕히고. 그 담에.” 생각이 잘 나지 않아서 내가 홀로 웅얼웅얼거렸다. 심지어 다니엘이 아니라 황제를 때려눕혀야 하는 건데 말이 헛나왔다. “칼빵을 먹는 거였나? 빵 중의 빵은 역시 칼빵? 난 소시지 빵을 좋아하는데.” 사람들이 전부 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런 날 보고 있었다. 황제는 여전히 쟤가 무슨 노림수인가 궁리하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하는 짓이냐. 짐이 무서워서 정신이라도 나간 게냐?” 황제가 뜻밖에 내 걱정을 해줬다. “어, 어. 그, 그렇지. 무서운 소시지 빵은 맛집 탐방할 때 먹어야지.” 난 또 힐끔 ‘그놈’을 봤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니까 더 보게 되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어? 다니엘! 거기 있었구나? 언제 왔어?” 정신이 나간 내가 갑자기 다니엘을 처음 본 사람처럼 굴었다. “천하제일 검술 대회는 어떻게 됐어? 결승전은 진출한 거야?” 그 와중에 궁금증이 생겨서 막간을 이용해 물어보기까지 했다. 다니엘은 4강까지 올라갔었기 때문에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 다니엘이 멍한 표정으로 날 빤히 쳐다보더니 오늘 들어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넌 이 와중에 그게 중요해?” 다니엘뿐 아니라 심지어 황제와 객석의 귀족들까지 다들 똑같은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어, 어. 당연하지.” 난 또 힐끔 ‘그놈’을 봤다가 모른 척하며 대답했다. “우리 냐옹이 우승하는 순간에 내가 윙크랑 하트 날려줘야 하는데. 집사인 내가 구경을 못 가는 바람에 속상했단 말이야.” “…….” “…….” 이 와중에 인질로 잡힌 아들 때문에 가장 정신없을 펠트 자작까지 날 마치 광인이라도 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4강전에는 가지도 못했으니까 아마 기권패 됐겠지.” 잠시 침묵하던 다니엘이 대답해줬다. 그러나 그에겐 4강전을 놓친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아 보였다. 우락부락이들이 검을 들고 옆을 지키고 있고 황족의 결투에 인질로 끌려온 판인데 지금 그딴 게 대수겠는가. “응, 응. 그래. 우리 방학 때 맛집 탐방 가서 기권패 같이 먹을래? 너구리가 만들 김치전도 곁들여서?” 내가 또 횡설수설하며 자리를 서성거렸다. 다들 도대체 맛집 탐방과 기권패가 무슨 상관인지, 그리고 김치전이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정해진 위치에 서시겠습니까, 9황녀 저하.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심판 사제가 마구 서성거리는 나를 말리듯이 말했다. “아, 그래요. 사제님은 얼굴에 소시지 빵이 있네요? 빵을 잘 구우시나 봐.” 나는 이 와중에 감탄했다. “네?” 얼굴에 칼빵 자국이 있는 심판 사제는 내 말을 못 알아들었다. 심판 사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아무도 못 알아들었는데, 뒤에서 퇴폐미남 혼자만 킥킥거리는 소리가 났다. “정신 못 차렸군.” 불현듯 황제가 날 비웃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9황녀. 지금이라도 항복하고 당장 이 자리에서 자결하면, 다니엘 펠트의 목숨은 살려주마.” “……!” 그제야 난 서성거리던 두 다리를 우뚝 멈추고, 황제를 똑바로 쳐다봤다. “어찌하겠느냐?” “어찌하긴 뭘 어찌해. 너야말로 오늘 죽은 목숨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그러하냐?” 황제는 입매를 이죽거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우락부락이들에게 명했다. “깔끔하게 죽이고 시작하는 편이 좋겠군. 목을 베어라.” 객석의 귀족들이 동시에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기겁했다. “으흑……!” 벼락처럼 떨어진 처결 명령에 다니엘이 급기야 눈물을 터트렸다. “안 돼!” 펠트 자작이 외쳤다. 옆에 서 있던 우락부락이들 중 하나가 냉정하게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야 이 자식아! 빨리 안 해?” 나는 대뜸 뒤를 돌아보고 소리 질렀다. 쉭―! 무언가가 허공을 가로지르고 날아가더니, 다니엘을 베려던 우락부락이가 검을 들고 있던 자세 그대로 돌처럼 굳었다. 그의 목에 침 하나가 꽂혀 있었다. “……!” 황제가 눈을 부릅뜨며 홱 금욕미남 쪽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카일은 입가만 드러낸 반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까지 황제가 정체를 알지 못했었다. 그런 카일의 입에는 작은 나무 막대가 물려 있었다. “카일 밀리안……!” 황제가 녀석의 정체를 깨닫고 분노해서 외쳤다. 결투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결투에 개입하면 마법으로 자동 차단된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입회인들끼리 싸우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쿵! 독침을 맞고 온몸이 돌처럼 굳어 있던 우락부락이가 제일 먼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꺄아악!” 87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객석에서 일부 귀족들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아 빨리 피해 있어야지.” 내 뒤쪽에서 병아리가 눈치 빠르게 구석으로 안전하게 몸을 숨기러 갔다. 그러자 대머리 사제도 덩달아 얼른 따랐다. “제일 먼저 죽여주겠다! 이 배신자 새끼!” 분노한 황제가 검을 휘두르며 카일에게 달려들려고 하길래, 내가 얼른 그 앞을 가로막았다. “네 상대는 나라고!” 챙! 우리 둘의 칼날이 맞부닥쳤다. 그사이에 금욕미남은 다시 한번 작은 나무 막대에 독침을 장전하고는 입가에 물고 훅, 하고 불었다. 쉭―! 독침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갔다. “독침이다! 방어해라!” 황제의 정예 호위라는 우락부락이들도 상당한 실력자인지, 이번에는 가까스로 고개를 옆으로 젖혀서 독침을 피했다. 두 번째 독침은 아무에게도 맞지 않고 허무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일이 아깝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히익…….” 관객석의 귀족들은 기겁한 채로 허둥지둥 좌석 사이에 몸을 숨기고 고개만 내밀며 보고 있었다. 자칫하면 독침이라도 맞을까 무서워서일 것이다. 바로 그때 퇴폐미남이 갑자기 벼락처럼 단검을 어딘가로 날렸다. “악!” 불시에 단검에 맞은 우락부락이 하나가 더 바닥에 고꾸라졌다. 곧장 퇴폐미남이 장검을 빼어 들고 결투 무대 위로 뛰쳐나왔다. “로스트베인 공작……! 네놈이……!” 나와 검을 맞대고 있던 황제의 두 눈에 핏대가 섰다. 그러나 결투에 개입하는 행위는 어차피 마법으로 차단되므로, 제라드는 나와 황제 사이에 끼어들지 않고 맹렬히 지나쳤다. 제라드가 튀어 나가자, 우리 쪽 입회인이었던 공작가의 기사도 주인을 따라 검을 들고 달려 나갔다. “다니엘!” 펠트 자작 또한 아들의 이름을 외치면서 달려갔다. “그래! 이게 바로 패싸움이지! 음하하하하하!” 나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결투고 뭐고 자시고, 주변이 난장판이었다. “시발 이게 뭐……!” 나와 검을 맞대고 있던 황제가 당황하면서 다시 검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내가 먼저 태권도 발차기로 그의 낭심을 걷어찼다. “끄…억……!” 쉴드 포션을 먹어서 검으로는 베지 못해도, 맞을 때는 아픈 것. 고통스러운지 중심을 손으로 잡으면서 황제가 바닥에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화려한 명검도 바닥을 굴렀다. 누가 그랬더라? 황제는 쉴드 포션을 먹은 데다가 힘이 세서 유리하다고……? 그건 황제가 나한테 걷어차일 낭심이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감히 우리 고양이를 학대하다니! 어디 한번 너도 학대당해 봐라!” 나는 바닥에 쓰러진 황제에게 마구 발길질을 했다. 그 와중에 혹시 몰라서 검으로 푹, 하고 놈을 찔러보았다. “……와, 신기하네.” 마치 철강으로 된 딱딱한 표면을 찌르기라도 한 것처럼, 외려 검 끝이 튕겨 나왔다. 이게 쉴드 포션의 효과라는 것인가. 이놈이 포션을 먹긴 먹은 게 분명했다. “치워!” 황제가 용케도 바닥에 떨어진 검을 한 손으로 집더니 휘둘러서 내 검을 쳐내려고 했다. 난 슬쩍 검을 옆으로 당겨서 피했고, 다시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는 황제를 발로 눌렀다. “이 자식이! 어디서 일어나! 잠잘 시간인 거 몰라?” 나는 또 미친 듯이 발길질을 퍼부었다. 한편. “조심해라! 아직 독침이 있다……!” 남아 있던 우락부락이 둘 중에 하나가 외쳤다. 두 사람은 자기들 쪽으로 달려오는 퇴폐미남을 보며 검을 들고 방어진을 취했다. 사실 독침은 2개뿐이었는지라 더 없었다. 카일은 독침이 다 떨어진 빈 나무 막대를 주머니에 집어넣는 중이었다. 카일은 슥슥 주변을 둘러보더니,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걸 알고는 유유히 대신전에서 빠져나갔다. 목발을 짚은 채 절뚝거리며. “제기랄……!” 난리 법석인 이 와중에, 아직도 우락부락이들 앞에 무릎 꿇고 있던 다니엘이 몸을 버둥거렸다. 밧줄에 포박되어 있고, 아직 우락부락이 둘이 그의 옆에서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어서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슬금슬금 무릎으로 기어서 우락부락이들 사이에서 조심스레 떨어졌다. 곁에 있다가 무슨 피해를 볼지 몰랐다. “공작! 이런 행위는 반역이오……!” 무섭게 쇄도하는 퇴폐미남을 보고 우락부락이 중 하나가 외쳤다. 스륵! 푹! 퇴폐미남이 검을 휘두르고 찌르자, 우락부락이 하나가 그대로 쓰러졌다. 제라드가 다시 검을 휘둘렀을 때, 나머지 우락부락이의 방어 자세가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러나 마지막 우락부락이는 생각보다 강한 상태였다. 푹! 푹! 제라드가 검을 두 번이나 휘둘러야 했으니까 말이다. “으윽……!” 몸이 두 번 찔리는 소리, 비명 소리. 황제의 정예 호위라는 그들의 실력도 퇴폐미남 앞에서는 퇴색했다. 공작가 기사가 뒤이어 다가왔을 땐 이미 퇴폐미남이 전부 쓰러뜨린 후였다. “……다니엘!” 펠트 자작이 곧바로 자신의 아들을 향해 달려갔다. 널브러진 우락부락이들을 피해서 비틀거리며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난 다니엘은 문득 아버지를 봤다. “어흐으으윽!” 다니엘이 울음을 터트렸다. “시발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 욕쟁이답게 욕을 자연스레 뱉어주고는 볼썽사납게 울며 마구 달려가서 펠트 자작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직도 몸이 포박되어 있어서 팔을 들 수는 없었다. 대신에 펠트 자작이 다니엘을 끌어안고 감동적인 부자 상봉을 했다. 둘이 그렇게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자. “아 너무 슬퍼요!” “눈물이 다 나네요.” “감동적인 상봉이야.” 객석의 귀족들이 슬금슬금 좌석 사이에서 고개를 치켜들더니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를 찍기 시작했다. 정작 펠트 자작을 비롯해서 아무도 다니엘의 포박을 풀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한바탕 난장판이 휩쓸고 간 결투장에 서 있던 제라드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려 날 보았다. “큭큭큭. 이렇게 찔러볼까? 아니면 저렇게? 킥킥킥.” 나는 결투 무대 위에서 검으로 푹푹 황제를 찔러보고 있었다. “혹시 여러 번 찌르면 상처가 나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황제야?” 바닥에 나뒹군 채 속절없이 내게 찔림과 발길질을 동시에 당하고 있던 황제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걸 보니 아직도 낭심이 아픈 게 분명했다. “그만하지 못하겠느냐!” “아직도 그 사극 말투를 못 버렸군. 그만하긴 뭘 그만해. 이제 목구멍에 독약 부어야 하는데. 입이나 벌려.” 내가 발로 놈을 한 번 더 걷어차면서 싸늘하게 말했다. 그리고 품속에서 독약이 든 작은 병을 꺼냈다. “……!” 황제는 얼굴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날 죽일 듯이 노려봤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그놈’이 움직였다. *** 아차. 잊고 있었다. 패싸움에 신이 나서 그만, ‘그놈’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난 독약 병을 손에 든 채로 시선을 홱 들어 올렸다. 내내 뒤돌아 있어서 등밖에 안 보이던 ‘그놈’이 갑자기 몸을 앞으로 돌린 것이다. ‘그놈’이 이제는 내가 있는 방향을 보고 자리에서 멈춰 섰다. 이제야 ‘그놈’의 얼굴이 보였다. 잠시 쳐다봤지만 ‘그놈’이 다시 움직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주변 일에는 하등 아무 관심도 없는 것처럼 그저 지그시 눈을 감은 ‘그놈’. “…….” 내가 그렇게 ‘그놈’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퇴폐미남이 힐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래?” 주섬주섬 좌석 사이에서 일어나던 귀족들도 전부 나의 시선을 따라 그쪽을 바라봤다. 그렇게 모두가 ‘그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 명만 빼고. 챙! 부지불식간에 내 양손에 들려 있던 독약 병과 검이 동시에 저쪽으로 떨어졌다. 독약 병은 팍, 그 자리에서 깨져버렸다. 챙그랑, 검 떨어지는 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다시 내 쪽으로 향했다. “어?” 바닥에서 뒹굴고 있던 황제가 어느샌가 제 검을 집어서 내 검을 쳐낸 것이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성공했다. 황제가 검을 들고 그대로 나의 복부를 푹 찔렀다. “헉!” 그 광경을 본 모든 사람이 숨을 들이켰다. “알렉시……!” 퇴폐미남이 놀라서 소리치며 내게 달려오려다가, 우뚝 섰다. “어?”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황제의 검을 내려다봤다. 황제의 검 끝은 내 복부 위에서 마치 방패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튕겨 나가고 있었다. 칼날에 피부가 뚫리거나 피가 나지도 않았다. 마치 나뭇가지로 한 번 쿡 찔림을 당한 것 같은 통각이 느껴졌을 뿐이다. “역시.” 황제의 얼굴에는 뜻밖에도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이 어렸다. 혹시나 하던 마음에서, 확신으로 바뀌는 얼굴이었다. “너도 그걸 먹었구나.” 모든 이의 눈길이 그대로 내게 꽂혀 있었다. 한참이나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관객석의 귀족들이 숨을 죽인 듯한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그럼 9황녀 저하도……” “황실의 포션을 먹었나 본데요.” “하지만 어떻게……?” “쉴드 포션은 황제 폐하만 드실 수 있을 텐데.”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황제가 실험이라도 해보듯이 다시 한번 나를 검으로 찔러보았다. 물론 이번에도 그냥 검 끝이 작게 물결을 치며 팅, 하고 방패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튕겨 나갔다. “이 정도야 예상했지.” 황제가 중얼거렸다. “조심해!” 퇴폐미남이 소리쳤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멀리서 피터가 외쳤다. “……죽어라!” 황제가 검을 멀리로 집어던지면서 내게 와락 달려들었다. 커헉―! 난 거구의 남자가 두 손으로 목을 죄며 밀어붙이자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위에서 황제가 내 목을 조르면서 밑으로 꽉 내리눌렀다. 컥, 컥, 난 숨을 쉴 수 없었다. “알렉시스!” 퇴폐미남이 달려왔지만, 놀랍게도 심판 사제가 곧바로 막아섰다.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아직 결투 중입니다!” “비켜!” 퇴폐미남이 검을 빼어 들었다. 88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객석의 귀족들이 전부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용없어요, 제라드 공!” 심판 사제가 아랑곳 않고 다시 말렸다. “이 결투장에는 고대 마법이 걸려 있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어차피 접근 못 합니다!” 퇴폐미남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심판 사제를 밀치고 황제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텅―! 아스테시아 숲에 있던 결계와 같이, 보이지 않는 벽이 그를 막아섰다. 바로 눈앞인데, 황제와 나 주위로는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제기랄!” 제라드가 고함을 치며 이번에는 검을 휘둘러 보았다. 텅―! 텅―! 공허한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사람뿐만 아니라 무기도 결계를 뚫을 수 없었다. 내 눈에는 황제와 내 주위로만 세워져 있는 노란색의 투명한 결계가 보였다. “컥…… 크헉…… 숨… 못……” 나는 바닥에 깔린 채로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무력이 센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내 목을 조르는 커다란 두 손에 더 세게 힘을 주면서 웃었다. “포션을 먹어서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목이 막혀 숨을 못 쉬면 아무 소용없느니라.” “컥…… 컥……!” “그것도 아니면, 로스트베인 공작을 아군으로 데려오면 이길 거라 생각했느냐? 어리석구나. 결투는 오로지 너와 나. 단둘이 하는 것이다.” “끄헉…….” 난 주인공인데. 제발. 난 주인공인데……. 이대로 죽는 건 아닐 거야. “내 정예 호위를 다 죽이다니, 참 재밌는 짓이었다. 어차피 나만 이기면 그만이라는 걸 잊었나 보지?” “된……장…….” 아직 된장찌개도 못 먹어 봤는데……. 이런 꽃 같은 일이……. 내 머리에 꽂아놨던 꽃 한 송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목을 조르는 황제의 두 손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내 손에서는, 어느덧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오만한 녀석 같으니. 네가 포션을 먹은 건 예상하고 있었다. 내 측근이 너의 거처를 뒤져 찾아낸 약병이 비어 있었으니까.” 카일은 내 방을 뒤진 적이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황제의 명을 받던 부하가 학교에 더 있었던 걸까……. 내가 축제 날 아침 내용물을 먹고 나서 벽난로 속에 집어 던졌던 그 약병이, 타지 않고 남아 있었구나. 쉽게 불에 타는 물건이 아니었던 걸까. 하긴, 이제 와선 아무 상관 없었다. “황위에 오르고 나서야 네가 선황한테서 포션을 받아 갔다는 걸 알았지. 널 사로잡아 피라도 뽑아 마실 작정이었는데, 정작 약병을 허술하게 처리할 줄이야. 어리석은 것……. 저승에서 네 무지를 탓하여라.” 나는 점점 두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안 돼!!” 퇴폐미남이 절규했다. 텅―! 텅―! 결계를 두드리는 그의 모습이 흐릿하게 황제 뒤편에서 보였다. 그리고, 그런 퇴폐미남의 뒤로 보이는 누군가의 실루엣. “사, 살…려……줘…….” 내가 지금 이런 꼴이 된 데에는 사실 네 지분도 좀 있다고 여겨지는데. 네가 여기 있는 걸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처음엔 우락부락이들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아까 막 네가 풍선처럼 커지는 거 보고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지금도 하필 네가 움직이는 바람에 나도 널 빤히 보게 된 거고 그 틈에 이 황제 녀석한테 기습당한 거잖아. 물론, 내가 넋을 놓고 방심한 것은 맞아. 그건 내 잘못이지. 하지만 넋을 놓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겠어? 있어서는 안 될 놈이 멀쩡히 보이는데? 지금 내 목을 조르는 이 황제 녀석도, 나처럼 네가 보였다면 분명히 넋을 놨을걸? 그러게 왜 여기 있냐고? “용……사……야…….” 그러니까 나 좀 살려달라고. 난 ‘그놈’에게 빌었다. *** 「누가 날 불렀는가.」 그놈이 놀란 표정으로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용사는 일반 사람의 세 배나 되는 체구를 가진 거인이라더니. 사실이었다. 키도 세 배라서 얼굴이 무척이나 높은 곳에 있는 바람에, 쳐다보려면 고개를 한참 위로 들어야 된다. 덩치도 덩치지만, 내가 이놈이 용사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축제 때 브레테 시의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용사의 동상을 본 적이 있어서였다. 「누가 나를 부른 것이냐. 누가 나를 용사라고 불렀느냐.」 내가! 내가! 내가 불렀어! 불렀다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지만, 용……사……야……! 라고 불렀다고! 이제 나 좀 도와줄 거야? 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속으로 얘길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용사가 알아들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게 텔레파시라는 건가? 「정말 내가 보이는가 보군. 내 목소리도 들리는가.」 아이고, 들리니까 대꾸를 하지! 그것도 몰라? 덩치만 크지 바보네! 빨리 도와줘! 나 지금 급해! 「…….」 그놈이 말없이 날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껄, 껄, 껄, 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으윽……. 저놈의 웃음소리가 너무 커서 귀청이 떠나갈 것만 같았다. 하긴 덩치가 크니 목청도 크고, 웃음소리도 크기 마련이겠지. 난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소용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난 지금 황제한테 목이 졸리는 중…… 어라? 갑자기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황제가 멈춰 있었다. 절세미남들도, 귀족들도, 사제들도 모두 멈춰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목이 졸리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슬쩍 뒤로 몸을 뺐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온 것처럼, 내 육체의 뒤통수가 보였다. 히익! 난 놀라서 후다다다닥 뒷걸음질을 쳤고, 덕분에 완전히 몸에서 빠져나와 버렸다. 나 자신을 내려다보자 형태가 연기처럼 흐릿했다. 시간이 멈춰서인가, 사방은 적막했다. 「드디어 만났구나, 세 용의 마력을 모두 가진 자여.」 껄, 껄, 껄, 용사가 다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래. 실컷 웃어라. 날 만나서 그렇게 반가운가 봐? 기분 좋아 보이네. 「물론이다. 나는 이 순간만을 무척 오랫동안 기다려왔어.」 그래? 날 그렇게 보고 싶었어? 내가 아스테시아에선 좀 유명 인사인데, 그새 여기까지 소문이 났나? 「세 용의 마력을 가진 자여, 부디 나를 해방시켜다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미안한데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 그리고 난 지금 널 구할 처지가 아냐. 저거 안 보여? 황제가 내 목 조르고 있잖아. 내 목숨도 간당간당하단 말이야. 「목숨을 구해주길 원하나? 도와줄 수는 있다. 대신 날 해방시켜 주겠는가?」 그래! 그래! 그래! 살려 주면 뭐든지 다 해줄게! 난 이 세상의 주인공이야! 아직 죽으면 안 된다고! 역하렘은 포기했지만, 절세 미남 4번하고…… 그러니까, 그, 좀 더 연애도 하고 싶고……. 「연애?」 아직 석 달 남았어. 연애 기간. 그거 채우면 결혼도 할 예정이고…… 애는 한 세 명……? 「꿈이 야무진 아이로구나.」 내가 좀 그래. 황도는 싫고 공작가 영지에 내려가서 살 거야……. 나는 예전에 도시 길바닥에서 신문지 깔고 자다가 승천한 경력이 있어서, 도시는 싫거든. 「말이 무척 많은 아이로구나.」 좀 그렇지? 영지에 내려가면 제라드가 검도 새로 사준댔어. 난 돈이 없고 가난한데, 넙죽 받으면 좀 자존심 상해서 첨엔 싫다고 했거든. 근데 사실 속으론 좋았어. 검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누군가 나한테 선물을 주겠다는 게. 「네 연애 및 결혼 상대가 저 자인가?」 응……. 잘생겼지? 이쪽 세계에는 4명의 절세 미남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잘생겼어. 성격은 안 좋은데, 나한텐 너무 좋아. 엄청 잘해주고, 다정하고, 내 걱정도 많이 해줘. 이제까지 살면서 나한테 잘해준 사람, 저 사람이 처음이야. 여기서 살아 돌아가면 나도 잘해주고 싶은데……. 「많이 좋아하나 보군.」 응. 「널 구하려고 저리 안간힘인 걸 보면, 저자도 너를 좋아하는가 보군.」 정말? 좀 그런 거 같긴 해. 하지만 아직 저 사람은 나한테 좋아한다고 직접 말한 적은 없어. 「꼭 말을 해야 아는 것은 아니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살아 돌아가면, 난 꼭 말할 거야. 나도 아직까지 말 못 했단 말이야. 나도 말해주고 싶은데. 좋아한다고. 「그만 울어라.」 ……. 「…….」 ……. 「정말 눈물이 많은 아이로구나.」 좀 그런 편이야. 힘들면 혼자서 많이 울어. 다들 내가 밝아 보인다고 하지만. 「앞으로는 혼자 울지 말거라.」 그래, 살아 돌아가면 저 사람 앞에서 펑펑 울 거야. 그럼 저 사람이 날 안아줄 거야. 내 등을 토닥여 줄 거야. 울지 말라고 날 위로해줄 거야. 그럼 난 기뻐서 눈물이 또 날 거야. 저 사람이 날 위로해줘서, 마음이 따뜻해져서, 날 안아주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너를 꼭 도와줘야겠구나.」 부탁할게. 내가 죽으면 저 사람이 무척 슬퍼할 것 같단 말이야. 저 사람, 왠지 많이 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난 저 사람하고 조금만 더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같이 맛있는 거 먹고, 놀러 다니고, 소풍 가고, 손도 잡고, 입도 맞추고, 또……. 「결혼도 하고, 아이를 셋을 낳고, 영지에 내려가서 검을 맞추고.」 맞아, 그리고…… 「저자에게 잘해주고, 저 자에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저자 앞에서 펑펑 울고.」 그래……. 어떡하지? 저 사람이 너무 좋아. 여기서 헤어지고 싶지 않아. 제발 나 좀 살려주겠어? 「생사는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것. 그러나 도와줄 수는 있다. 네가 과연 살지는 저자의 손에 달린 것 같군.」 그럼 다행이다. 난 저 사람을 믿어. 「약속하여라. 살아나면 반드시 날 해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할게. 그런데…… 날 어떻게 도와주려고? 「일개 마법사가 걸어놓은 마법은 내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날 구속하는 것은 용의 마력뿐.」 불현듯 용사가 가까이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결계를 두 손으로 우악스럽게 찢어발겼다. 89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쫘아아악! 갑자기 노란색의 투명한 결계가 종이 찢어지듯이 사선으로 찢어지더니 팍 사라졌다. “알렉시스!” 동시에 제라드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깨진 결계를 뚫고 나타났다. “으윽…….” 한편으론 내 두 눈이 감기고 손이 힘없이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듯한 눈을 한 황제는 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고 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제라드가 황제에게 곧바로 달려들었다. “끄헉……!” 제라드에게 목이 잡힌 황제가 순간이나마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내 목을 조르고 있던 황제의 두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콰직― 제라드가 무자비한 속도로 황제의 목을 두 손으로 비틀어 죽였다. “……!” “……!” “……!” 객석의 모든 이들이 경악했다. 황제는 목이 비틀어진 채로 그대로 바닥에 쿵, 쓰러졌다. 명백하고 깔끔하며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죽음. “폐…하가……” “죽……” 객석에서 미처 끝마치지 못한 멍한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결투장에 왔으니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죽을 것임을 이미 다 알고 있었을 텐데도 충격이 있는 듯했다. 황제를 죽인 사람이 내가 아닌 제라드여서일까? “알렉시스! 괜찮아?” 제라드는 급히 내게 달려와서 늘어져 있던 나의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절박한 표정으로, 정신을 거의 잃은 내 뺨을 손으로 마구 두들겼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알렉시스!” “켁…… 켁!” 나는 거친 숨을 토해내면서 간신히 눈을 떴다. 제라드가 그제야 안도해하면서 날 꼭 끌어안았다. “바보야,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 “…….” 나도 힘없는 팔을 위로 올려서 제라드를 꼭 끌어안았다. 그의 품속은 따뜻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목이 엄청나게 아팠다.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져나왔다. “흐어어엉!” 내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하자, 제라드가 당황했는지 얼른 내 얼굴을 봤다. “…….” 어쩔 줄을 모르던 제라드는 내 눈에서 쉼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손으로 열심히 닦아주기 시작했다. “울지 마. 응?” “제라드…….” 난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그대로 굳었다. “좋……아해…….” 일단 고백부터 하고 잠깐 훌쩍거리다가, 멍하니 있는 제라드를 보곤 난 다시 울음을 펑펑 터트렸다. 제라드는 그런 내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손으로 열심히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도 좋아해.” 제라드가 고개를 숙이고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러더니 날 꼭 다시 끌어안고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처음부터 좋아했어. 처음 우리가 만나서 결투했을 때부터…….” 이상하게 그 말을 듣고 나니 더 눈물이 쏟아졌다. 엉엉, 나는 또 한없이 울었다. 내 등을 토닥이는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자니 왠지 더욱 눈물이 났다. “네가 우니까 진짜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 제라드가 손으로 내 눈물을 다시 마구 닦아줬다. 당황한 채로, 어쩔 줄을 모르는 채로, 그는 입술로 내 뺨 여러 곳에 눈물을 닦아줄 것처럼 입을 맞췄다. 난 제라드를 끌어안은 채로 서서히 울음을 그쳤다. 마침내 내가 훌쩍거리면서 고개를 들자, 제라드가 싱긋 웃었다. “울어도 예쁘네.” “…….” 정말이지 싸바 입에서 절대로 나올 것 같지 않은 말이 분명했다. 이 세계가 견디지 못하고 잠시 후 그대로 폭파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도 배시시 웃었다. “…….” “…….” 한편 우리의 애정 행각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던 귀족들은 다들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라드의 부축을 받으며 내가 몸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괜찮냐? 너처럼 천하무적인 애가 진짜 죽을 뻔하다니. 놀랐잖아.” 우리 곁으로 다가온 피터였다. “천하무적이 아니고, 주인공.” 내가 정정했다. 정상으로 돌아온 나는 객석을 향해 아무 걱정 말라는 것처럼 일부러 윙크를 찡긋 날려주었다. 물론, 날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쉴드 포션은 언제 먹었냐?” 피터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가장 먼저 물었다. “그것도 그렇군. 쉴드 포션을 먹었으면 진즉에 말을 하지 그랬어.” 내 팔을 잡아주던 퇴폐미남도 섭섭해하는 기색으로 덧붙였다. “우리 사이에 비밀 없기로 했으면서. 왜 숨긴 거지?” “…….” 약간 시무룩한 얼굴의 퇴폐미남을 보자니 나는 왠지 당장 위로를 해줘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일었다. “나도 몰랐어! 나도 지금 안 거야! 난 그게 쉴드 포션인지도 몰랐다고! 난 솔직히 그게 독약인 줄 알았어!” 내가 부리나케 해명했다. “뭐? 독약인지 알았다고?” 제라드의 두 눈이 벌어졌다. “뭔 개소리야! 독약인 줄 알았으면 그걸 왜 먹었어!” 피터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와 동시에 병약한 병아리는, 흐이익, 하고 바닥에 있는 황제의 시체를 보곤 얼른 피했다. “그 포션이 색깔이 아리까리한 게 꼭 독약처럼 생겼었거든. 그래서 선황제한테서 받긴 했어도 버리지도 못하고 그냥 행낭에 처박아 놨었지. 근데 피터, 네가 그랬잖아.” “내가 뭘?” 병아리는 자기가 뭘 잘못 말했나 싶어 마른침을 삼켰다. “내 몸에는 독이 먹히질 않는다고 했잖아! 그래서 나는 결국 그 문제의 독약을 깔끔하게 먹어서 해치워버리기로 한 거지. 실수로 어디 흘렸다가 누가 우연히 먹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니까! 안 그래?” “……응, 안 그래.” 퇴폐미남이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대꾸했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내가 만독불침이라는 사실은, 나도 최근에 안 사실이었으니까 먹은 건 아주 최근이야.” “하아……” 병아리가 긴 탄식을 뱉었다. “쉴드 포션까지 참으로 기가 막힌 타이밍에 처먹었군. 이런 망나니 같은 애에게 하필 천운까지 있을 줄이야…….” 잠시 주위가 고요했다. “알렉시스, 해독 포션을 먹었다는 사실만 믿고 앞으로 독약 같은 거 심심풀이로 막 주워 먹으면 안 된다.” 제라드가 내게 신신당부했다. “이번에야 운 좋게 황실의 포션이었다지만, 그러다가 재수 없이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라고. 네가 잘못되면 난 앞으로 어떻게 살아.” 이 말을 들은 병아리는 거북해서 구토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퇴폐미남은 무척 진지하고 걱정하는 낯빛이어서 나는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았어, 조심할게. 앞으로는 독 안 주워 먹을게.” 식도락 클럽 회원이라면 더욱더 음식을 가려야 하는 법이겠지. 앞으로는 맛있거나 건강한 것만 먹고 살자. “알렉시스.” 그때 또 다른 절세 미남이 날 부르면서 곁으로 다가왔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리고…… 살려줘서 고마워.” 이산가족 상봉을 하느라 눈물범벅이었던 다니엘이 이제는 눈물을 그친 채였다. 밧줄도 펠트 자작이 풀어주었는지 그의 몸은 자유였다. 다니엘은 내가 먹은 게 포션인지 독약인지 따위에는 아무 관심 없었다. 살아남았으니 된 거다. “다 네 덕분이야.” 다니엘이 불쑥 나를 끌어안았다. 아, 혹시 이렇게 역하렘의 꿈은 이루어지는 건가? 아아, 아직 늦지 않은 걸까? 난 눈을 감고 다니엘을 같이 꼭 안아주었다. “적당히 해라.” 퇴폐미남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리자 다니엘이 웃으면서 얼른 떨어졌다. 고양이 한 마리는 세상이 환해지는 미소를 날리면서 퇴폐미남에게 말했다. “제라드 공, 자네한테도 너무 고마운데 우리도 한번……” 끌어안을까? 라는 듯이 다니엘이 팔을 쫙 펴고 포옹하는 시늉을 해보았지만. 미간을 인정사정없이 구긴 제라드는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싫으면 할 수 없지.” 다니엘은 어차피 농담이었는지 웃으면서 얼른 팔을 내렸다. “알렉시스하고 아예 결혼 날짜를 잡았다면서? 저런 눈깔이 좋다는데 어쩔 수가 없네. 축하해.” 잠깐. 황제한테 내내 포로로 잡혀 있었던 고양이가 알 정도면, 도대체 이 결혼 소문은 얼마나 빨리 퍼지고 있는 것인가……? “어? 절세 미남이 왜 셋뿐이지? 카일이 없는데?” 난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 오늘 중요한 활약을 한 카일을 찾아봤다. “그 새끼는 진즉에 도망갔다.” 제라드가 먼저 대답했다. “아까 조용히 빠져나가더라고.” 병아리도 덧붙였다. “아, 그랬구나.” 정신이 없어서 아무도 카일을 붙잡을 생각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일의 속내야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는 오늘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일이 우리의 계획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을 경우, 퇴폐미남이 놈을 옆에서 죽여버렸을 테니까. 그러나 전에 나랑 같이 황제에게 호송되어 잡혀갈 때 자기도 죽을 거라고 한 걸로 봐서는, 황제에 대한 감정이 좋진 않았을 것이다. “추적해서 붙잡을 생각이야?” 난 퇴폐미남을 향해 물었다. “내가 그 새끼 잡아서 뭐 해. 케아르 왕국에 달린 일 같은데.” 제라드가 무관심한 표정으로 병아리 쪽을 바라보았다. “너구리 공주님을 납치한 죄로 아마 우리 왕국에서 수배를 내릴 것 같아. 그 외의 범죄에 대해서는 입증이 어렵고.” 병아리가 대꾸했다. 난 카일이 케아르 왕국의 수사망을 피해 얼마나 도망 다닐 수 있을지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카일이라면 어쩌면 평생 무사히 도망 다닐 수 있을 것 같지만, 적어도 도망자의 삶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으리라. 불쑥 나는 중요한 용건이 생각나서 쓰러진 황제 쪽으로 다가갔다. 황제의 주머니를 뒤져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여긴 없는데?” 내가 아직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용사 쪽을 향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용사는 내 눈에는 전혀 영혼체처럼 보이지 않았다. 진짜 건드리면 잡힐 것 같은 실물처럼 느껴졌다. 실제론 그럴 수 없겠지만. 「황제의 검이다. 검 손잡이에 들어있을 것이다.」 용사가 대답했다. 난 저쪽에 뎅그러니 떨어져 있던 황제의 검을 가서 집어 들었다. 「대대로 황제가 소유하며 포션을 숨겨오던 보검이지.」 “오!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일단 검을 허리에 찼다. 그리고 용사를 향해서 엄지를 척 치켜들면서 말했다. “지금은 보는 눈이 많으니까 이따가 황궁 가서 열어볼게!” 「알았다.」 90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 “…….” 그런데 묘한 침묵이 결투장 안에 감돌고 있었다. 내가 결투장 맞은편 허공 어딘가를 보고 계속 말을 주고받아서일까. 객석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고양이와 병아리까지 다들 내가 진짜로 맛이 갔나 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퇴폐미남만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매우 진지한 태도로 내게 물었다. “누구한테 말한 거지? 정말 뭐가 보이나?” 그는 뚫어져라 날 바라보았다. 내가 말해주는 대답을 그대로 믿을 태세였다. “너도 안 보이냐?”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제라드도 3대 포션 중 하나를 먹었는데, 왜 못 볼까? 포션을 먹은 사람한테 보이는 게 아니란 말인가? 「용의 마력이 담긴 세 가지 포션을 모두 먹어야 내가 보인다.」 내 생각이 텔레파시처럼 들렸는지, 용사가 말해주었다. “세 가지 포션? 하지만 난 두 개밖에 안 먹었을 텐데?” 내가 이제까지 먹은 포션은 두 개였다. 하나는 노스브리치 나무 꼭대기에서 먹은 복숭아였던 해독 포션. 그리고 황궁을 떠나기 전 선대 황제를 알현하러 갔을 때 억지로 받았던 쉴드 포션. 로스트베인 공작가가 가지고 있는 힐링 포션은 먹어 본 적이 없…… 어라? 그러고 보니까. “먹어.” “역겨워…….” “먹어야 낫지. 먹어.” 언제였더라. 내 입속에 짭짤하며 비릿한 액체가 흘러들어와서……. “난 왜 이렇게 빨리 나은 거야? 이상하네. 나 분명 뭐 먹은 것 같은데?” “내 피를 먹였어. 내 피는 남한테 먹이면 일시적으로 회복 효과가 있거든.” 결투장 위에 멍하니 선 나는 말없이 제라드를 다시 쳐다보았다. “알렉시스, 괜찮아……?” 제라드가 약간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까 황제한테 목이 졸린 것 때문에 내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걸까 걱정하는 듯했다. “응. 괜찮아.” 내가 제라드를 안심시키며 웃었다. 노스브리치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 제라드는 내 상처를 고쳐주려고 자신의 피를 먹인 적이 있었다. 무척 미약하겠지만, 그의 피에는 분명 첫 번째 포션의 힘이 들어있었다. 덕분에, 나는 세 가지 포션을 나름대로 모두 먹은 셈이었다. 「저자의 피는 어쩌다 얻어먹은 것이냐.」 텔레파시로 내 생각을 엿들었는지, 용사가 내막을 궁금해했다. 할 말이 없었다. *** “본 결투는…… 9황녀 저하의 승리로 끝났음을 선언합니다.” 결투장이 정리된 후, 심판 사제가 공식적인 선언을 했다. 비록 황족다운 고결한 결투는 없었으며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개판이었던 패싸움. 마지막엔 심지어 내가 황제를 죽인 것도 아니고 제라드가 죽였지만…… 어쨌든 황제가 죽었으니 승리자는 바로 나였다. 귀족들은 대부분은 왠지 근심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야 원.” “좀 걱정되는걸요.” “이제 9황녀 저하가 황위를 물려받는다는 거잖아.” “헛것도 보는 듯한데…… 괜찮을까요?” 다들 웅성거렸다. 왜 걱정하는지는 나도 이해하지만, 헛것을 본다는 건 사실이 아니었다. 용사는 아직도 버젓이 결투장 안에 서 있었으니까. 나는 귀족들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서는 멈춰 섰다. 그리고 턱을 최대한 거만하게 치켜세우고 선언했다. “나 9황녀는 오늘부로 유일한 황족이니라!” 유치찬란하기 그지없는 대사가 내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왔다. 시라이드 제국의 황족들은 서로 죽고 죽인 후, 마지막 남은 이가 황위에 오른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바로 나. 9황녀뿐이었다. “그대들은 다들 예를 갖춰 무릎을 꿇어라!” “…….” 나의 유치찬란한 요구에 다들 고요한 정적에 잠겼다. 하지만 나는 뻔뻔한 낯짝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솔직히 말해 나도 아스테시아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어쩌겠는가. “…….”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귀족들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미래의 황제 폐하께, 신의 충정을 바칩니다. 황녀 저하 만세.” 펠트 자작이 내 옆에서 가장 먼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보였다. 다니엘이 그 뒤를 이은 것을 시작으로, 하나둘, 귀족들이 차차 한쪽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심지어 퇴폐미남도 한쪽 무릎을 꿇는 것이 보였다. 그가 날 보고 씩 웃었다. 난 다시 앞을 보고는 선동했다.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 “…….” “…….” 알아서 내 입으로 만세를 여러 번 외쳤더니 정작 아무도 따라하질 않았다. 갑자기 나에 못지않은 선동가인 술주정뱅이 교수가 그리웠다. *** 뒷수습을 마치고 일행과 함께 대신전 앞으로 나왔을 때 곧장 한 귀족 무리가 내게 다가왔다. 대부분 결투장 관중석에서 구경했던 자들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안에서 결투 내용을 기록했던 황궁 관리들도 이들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눈빛이 예리해 보이는 중년 남자가 대표로 나서서 입을 뗐다. “9황녀 저하께 인사 올립니다. 재상 호레이스 후작이라고 합니다.” “어, 반가워요.” 난 턱을 살짝 끄덕했다. 재상인 호레이스 후작은 그 날카로운 눈빛 때문에 왠지 병아리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저하, 송구합니다만 그동안 밀려있던 각종 사안들이 많아 긴히 논의할 내용이 쌓여 있습니다. 일단 황궁으로 돌아가서 곧바로 일을 시작하실까요?” 호레이스 후작은 급작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어…… 벌써 일을 시작해요?” 난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직 대관식도 안 했는데. 더구나 정치 사안이라니? 내가 뭘 안다고? “금일 돌아가신 황제 폐하께서는 즉위 후에도 정사가 뒷전이셨는지라, 결재받을 일이 산더미 같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사… 사, 산더미 같이 일이 쌓여있다고?” 움찔한 내가 말을 더듬거렸다. 뒤에서 큭큭, 절세 미남들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난 홱 뒤를 돌아보며 쏘아보았고, 세 미남들이 웃음기를 참으며 곧바로 표정 관리를 했다. 고개를 앞으로 돌렸을 때 호레이스 후작이 계속해서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예, 그뿐 아니라 황제 폐하가 돌아가셨으니 장례식 준비도 해야 하고, 조만간 있을 대관식과 황위 계승에 대해서도 논의해야 합니다. 당분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실 겁니다. 얼른 가시죠.” 재상을 비롯한 귀족들 무리와 관리가 우르르 내게로 몰려들었다. “아니! 안 돼! 난 오늘 일 못 해요! 결투해서 피곤하니까!” 기겁한 내가 꽥 고함을 질렀다. 그 말을 듣고 호레이스 후작과 귀족들 무리가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그…… 산더미처럼 처리해야 할 수많은 일은 그러니까, 내일부터! 내일부터 처리하기로 하죠! 하하하!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일은 반드시 미뤄라, 라는 말도 있잖아요?” 내가 좌중을 둘러보며 억지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하시지요, 호레이스 후작.” 옆에서 제라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서 나를 거들어 주었다. “근래 9황녀 저하께서도 결투 준비로 피로가 많이 쌓였으니, 본격적인 논의는 내일부터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으음.” 호레이스 후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알겠습니다. 제가 너무 서둘렀군요……. 처리할 일이 너무 많다 보니 마음이 급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9황녀 저하.” 호레이스 후작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뒤에 다른 귀족들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아, 괜찮아요.” 내가 안도하며 대꾸하자마자. “그러면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 새벽 5시부터 일을 처리해볼까요?” 호레이스 후작은 한술 더 떴다. “……새, 새벽 5시?” “아! 역시! 너무 늦은 시각인가요? 그렇다면 새벽 4시경이 어떻습니까?” “…….” 이 미친 호레이스 후작은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것인가. “아…… 아홉 시. 아침 아홉 시 이전엔 곤란해요.” 내가 맥아리가 빠져서 힘없이 말했다. “……후. 하는 수 없지요. 알겠습니다.” 호레이스 후작도 새벽 4시가 물거품이 되었다는 사실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왠지 내일부터 야근이 확정된 듯한 불길한 예감에 나는 몸서리를 쳤다. 황제…… 역시 내가 하기엔 무리 같은데……. 아무튼 일행과 함께 난 유유히 대신전 계단을 내려왔다. 대신전 앞에 대기하고 있던 황궁 기사단이 일제히 날 바라보았다. 대신전에서 이미 내 승리를 확성기를 통해 대중에게 발표했기 때문에 그들도 모두 결투 결과를 알고 있다. 어차피 황족의 결투에서 한쪽은 지고 한쪽은 이기게 되어 있는 것. 9황녀가 이길 가능성도 이미 다들 마음속에서 가늠해보고 있었을 테니 기사단 사이에 파동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기사들 대부분은 내 뒤를 따라오는 펠트 자작에게 부지불식간에 시선을 힐끔힐끔 던졌다. 아직까지는, 그들의 기사단장이기 때문이다. “황녀 저하 만세!” 이윽고 부기사단장의 신호에 맞춰서 기사들이 전부 예를 표하면서 일제히 외치며 검을 왼쪽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이제는 나의 명에 움직일, 나의 기사단이 된 것이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그리고 기사들도 그걸 당연히 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제국은 이런 나라였다. “저하, 마차에 오르시지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황궁 부기사단장이 다가와 대기하고 있던 황금 마차의 문을 열었다. 나는 냉큼 마차에 올라탔다. “그럼 내일 아침에 황궁에서 뵙겠습니다.” 날 따라왔던 호레이스 후작과 귀족들, 황궁 관리들까지 인사를 하고는 각자 자신들의 마차를 향해 이동했다. “제라드! 피터! 다니엘! 얼른 타. 황궁에 가서 같이 차나 한잔해.” 난 나를 따라왔던 일행을 돌아보면서 절세 미남들을 황궁에 초대했다. 제라드는 대기하고 있던 공작가 기사들에게 알아서 복귀하라는 명을 내리고, 망설임 없이 황궁 마차에 올라탔다. 91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음…… 오늘은 가족들이랑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다니엘은 잠시 망설였다. “가보거라. 가서 황녀 저하와 오붓하게 차 마시고, 우리하고는 이따가 저녁에 같이 식사나 하자꾸나.” 펠트 자작이 다니엘을 향해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펠트 자작! 인수인계는 하고 그만둬야 하니까 사직서는 보름 뒤에 받아줄게요!” 내가 막간에 끼어들어 외쳤다. “사직서라니……? 아버지! 무슨 소리예요?” 다니엘이 충격받은 얼굴로 펠트 자작을 향해 돌아보면서 물었다. 내가 제라드랑 결혼 약속을 잡았다는 소식은 기가 막히게 주워듣더니만. 펠트 자작이 황궁 기사단장을 그만두기로 한 사실은 금시초문인 듯하다. “음. 기사단장직은 내려놓기로 했단다. 이젠 그만둘 때가 된 것 같구나.” 펠트 자작이 미소 지었다. 뜻밖에도 약간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 다니엘은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우두커니 선 채로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했다. 펠트 자작이 무슨 연유로 기사단장을 그만뒀는지 나름대로 짐작한 것 같았다. 그동안 황궁 기사단장으로서 받은 봉급과 영지만으로도 자작가는 3대는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할 테니, 난 고양이네 집은 걱정하지 않았다. 다니엘이 마차에 올랐다. “피터! 왜 안 타! 너도 와야지!” 나는 아직도 황궁 마차에 같이 타지 않은 병아리를 향해 재촉했다. “오랜만에 길드에 가보려고 했는데…….” 피터는 잠시 고민하면서 중얼거렸지만, 곧바로 마음을 바꿔서 마차로 다가왔다. “그래도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같이 가는 게 좋겠지?” 혹시 모를 주요 정보가 있을지 모르는 곳을 하이에나처럼 찾아다니는 차기 정보 길드장다운 태도였다. 병아리가 마차에 올랐을 때 내가 물었다. “참, 그러고 보니 너희 아버지는 오늘 결투 구경하러 안 오셨어?” 납치됐다가 비밀 안가에 숨어 있던 아들이 입회인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피터의 아버지가 몰랐을 리 없는데. 게다가 그자는 파라야의 정보 길드장. 결투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보러 왔을 것 같았는데. “우리 아버지? 아까 관객석에 앉아 있던데? 결투 다 보고 홀연히 사라졌지, 뭐. 항상 그렇듯이.” 병아리는 별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면서 착석했다. 마차가 출발했다. 황궁 기사단이 내 마차를 호위하며 말을 달렸다. *** 마차 창밖을 내다보니 용사의 흔들거리는 옷자락이 보였다. 그 이유는 용사가 현재 마차 지붕 위에 올라있기 때문이다. 브레테 시 광장에 서 있던 용사의 동상은 알몸이었지만, 실제의 용사는 토가 같은 것을 몸에 걸치고 있어서 옷자락이 날렸다. 용사는 영혼체라 그런지 자기 마음대로 크기 조절이 가능해서, 이제는 평범한 인간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결투장에서 내가 처음 놀랐던 것도, 우락부락이들처럼 서 있던 용사가 갑자기 무럭무럭 커져서 원래대로 거인의 크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영혼이라 무게는 없어서, 마차 지붕이 부서질 일은 없었다. 세 절세 미남들도 각자 창밖을 내다봤지만, 그들은 용사의 옷자락을 볼 수 없기에 거슬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깐. 그런데 황제가 되면 황도에서 살아야 하잖아? 난 공작가 영지에 내려가서 살려고 했는데.” 마차 밖을 내다보길 포기한 내가 조금 고민스레 중얼거렸다. 내 신혼집 계획에 절세 미남들이 동시에 날 홱 쳐다보았다. “진심인가?” 옆에 앉아 있던 제라드가 기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정말 우리 영지에 내려와서 살고 싶어?” “응.” 내가 녀석의 손안에서 내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대답했다. “결혼하면 영지에서 살면서 너랑 여기저기 소풍도 가고 놀러 다니고 싶어.” “…….” 제라드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피터와 다니엘은 이 무슨 낯간지러운 행태인가 하고 우릴 구경했다. 나는 아랑곳 않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비 오는 날에는 같이 브리지를 하고, 맑은 날에는 말 타고. 심심하면 칼싸움도 하고…… 같이 검도 맞추러 가고. 애도 셋 낳고. 오손도손 같이 살고 싶어.” 마차 안에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 제라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날 가만히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내 손을 더욱 꽉 쥐었다. “나도 너랑 꼭 그러고 싶다. 아니 반드시 그럴 거야.” 제라드가 결심한 듯이 말했다. “차기 황제 폐하가 우리 영지에서 살겠다니까, 이렇게 된 거 차라리 황도 이전을 하는 게 좋겠군.” “…….” 결론이 왜 그렇게 되는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제라드 공. 저 도른 녀석 하나 때문에 난데없이 무슨 천도를 해?” 우리를 억지로 참고 보고 있었던 삐약이가 어이없어했다. “알렉시스는 나 구해줬으니까 난 무조건 알렉시스 편이야. 황도 옮기는 것도 찬성.” 갑자기 고양이가 강아지스러운 면모를 보이며 내 편을 들었다. 뜬금없는 황도 이전까지 받아들였다. “왜 황도에서 살기 싫은데? 어디 한번 이유나 들어보자.” 삐약이가 날 보면서 물었다. “물론 공작가 영지가 살기 좋은 건 사실이지만, 황도에 있는 공작가 저택도 궁궐에 못지않아. 부지도 넓고. 그리고 꼭 공작가를 고집하는 게 아니라면, 제라드 공이 부군으로 황궁에 들어가서 살 수도 있어.” 여기까지 주절거리다가 피터가 주둥아리를 다물었다. 그러더니 날 잠시 쳐다보다 물었다. “혹시 탑에 처박혀서 살았던 기억 때문에 황궁이 싫은 거냐?” 그 말을 들은 퇴폐미남은 정말 그런가 하고 조심스럽게 날 쳐다보았다. “응? 아니?” 내가 부인했다. “그게 아니고, 난 노숙자가 되어 도시의 차가운 길바닥에서 승천한 적이 있어서 황도가 그냥 그래.” 아무도 말이 없는 사이, 마차는 덜컹거리고 용사의 옷자락이 창밖에 휘날렸다. “아무리 내가 알렉시스 네 편이지만 이건 아니로군. 평생 황궁에서 산 황녀 주제에 대체 언제 노숙자였다는 거야!” 고양이가 금세 태도를 바꿔 제일 먼저 반격했다. “노숙자 경력은 그렇다 치고 대체 무슨 길바닥에서 승천을 했다는 거냐? 이렇게 멀쩡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으면서!” 삐약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다 내가 주인공이라서 그렇단다.” 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간단히 결론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아무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런 애가 황제가 될 거라니 믿을 수가 없구만…….” 삐약이가 탄식을 내뱉었다. “사실 별로 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어쩌다 보니 그냥 이렇게 된 거지.” 내가 솔직히 고백했다. 아까 호레이스 재상의 태도를 보아하니 황제가 되어봤자 일 더미에 파묻힐 것이라서 그것도 끔찍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항상 생각해온 건데, 내가 황제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면 어떤 식으로든 결국 망할 게 불 보듯 뻔하지 않겠어?” “…….” “…….” “…….” 이번에는 절세 미남 셋 모두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안타깝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로군. 알렉시스가 황위를 포기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포기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제라드가 먼저 말했다. “황위를 이어받을 사람이 필요한데, 남은 황족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대혼란이 벌어지겠지. 즉, 알렉시스가 황위 포기 의사를 밝혀도 대신전과 귀족 회의에서도 인정 안 할 확률이 몹시 커.” 병아리가 고심하며 대꾸했다. “그럼 어떡하지? 난 언제나 알렉시스 편이긴 하지만, 제국이 망해버릴까 봐 무서워서 황제는 안 했으면 좋겠는데.” 고양이는 내 편이라면서 내 걱정이 아니라 열심히 나라 걱정을 했다. “세계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처넣고 싶지 않으면 반드시 성공적으로 황위를 포기할 방법을 찾아야만 해.” 삐약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떻게든 날 황제로 만들지 않으려는 굳은 의지였다. 「……방법이 있긴 있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창밖으로 고개를 홱 돌렸지만, 이제는 용사의 옷자락이 안 보였다. 창밖으로 아예 상체를 내밀고 힐끗 올려다보니까 용사는 이제 마차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상태였다. 그래서 옷자락이 얌전하게 다리 밑에 깔려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은 게, 마치 명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결투장에서도 내내 눈을 감고 있었던 걸 보면 저게 기본자세인 것 같았다. “알렉시스, 그렇게 마차 밖으로 몸을 막 빼고 있으면 위험하다.” 제라드가 내 걱정을 하면서 옆에서 나를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난 다시 자리에 정상적으로 착석했다. 하지만, 마차 천장을 쳐다보면서 용사를 향해 아주 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방법인데?” 그러자 마차 안에 있는 세 절세 미남들이 날 빤히 쳐다보았다. 그들은 내가 누구에게 말하는지 여전히 모르기 때문이다. “정말 아까부터 누구한테 말하는 건가?” 제라드가 진심으로 궁금한 듯이 내게 물었다. “용사.” 내가 속삭였다. “…….” 제라드는 잠깐 멈칫했다. “용사가 그러는데, 내가 황제가 되지 않을 방법이 있긴 있다는데?” 내가 비밀 얘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렇군.” 제라드는 용사의 존재를 순순히 믿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함께 아스테시아 숲속에서 용족에 쫓기며 루프하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그는 아무리 허황되어 보이는 내용이라도 내 말에 믿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피터와 다니엘은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방법이 뭐라던가?” 제라드가 궁금해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날 공작가 영지로 데려오기 위해서 황도 천도까지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마차 천장 쪽을 홱 쳐다보자, 용사가 마치 그런 내 모습이 보이기라도 한 것처럼 대답했다. 「과거에 살아남아 황궁에서 빠져나간 황족이 하나 있다.」 “뭐? 진짜야?” 내가 토끼 눈을 떴다. 92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다 죽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무슨 소릴까. 그런 내 반응을, 용사의 말을 듣지 못한 나머지 세 절세 미남들이 궁금한 듯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 엄밀히 말하면 조금 다르군. 황족의 아이를 배고 궁에서 나간 여자가 있었다고 해야겠군.」 용사가 느릿한 말투로 사실을 정정했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너무 오래전 일이라면 이제는 그쪽 방계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흐음…… 네 할아버지 대에서 벌어진 일이다. 네 할아버지의 형…… 그가 동침했던 여인이야. 그리 오래전 일은 아니지.」 용사가 기억을 더듬다가 말했다. 인간인 내겐 오래전 일이지만, 용사 입장에서는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용사의 말에서 추측건대. 족보상으로 9황녀의 큰할아버지이기도 한 당시 황족이 어느 여인과 동침을 하였다. 그 황족은 아마 9황녀의 할아버지인 선선황의 손에 곧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선선황은 대대로 황제들이 다 그러하였듯이 자신의 형제들을 다 죽였으니까. 만약 그 형제들 중 누군가 이미 자식을 낳은 상태였다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그 자식들까지 다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배고 궁을 빠져나간 그 여인을 놓친 모양이었다. 「불행히도 나처럼 황가의 약병에 종속되어 있다 보면, 황제를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알게 되지.」 용사가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는 것처럼 씁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여인은 정식으로 혼인한 황자비가 아니었고 그저 우연히 한 번 눈이 맞은 시녀였어. 황자와 동침한 사실도 주변에 알리지 않은 상태라서 퇴궁이 어렵지 않았지. 당시 황제가 된 네 조부도 미처 몰랐던 모양이더군.」 “……그 후에 궁을 나가 출산을 했다는 거구나.” 나는 덜컥 임신해서 황궁을 탈출해 몰래 아이를 낳은 어느 시녀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아마도 그 여인은 뒤늦게 임신한 사실을 깨달았겠지만 정작 아이 아버지가 죽은 상태였을 것이다. 궁에서 아이를 낳으면 아이도 살해될 거라는 사실을 익히 알았겠지. 그래서 임신 사실을 숨기고 궁에서 나간 것이다. 「아주 먼 훗날에야 황제는 최정예 정보 요원의 보고를 받고 그 아이의 출생에 관해 인지했어. 하지만 굳이 손을 쓰지 않았지. 뜻밖에도 이 정보를 영원히 함구하라는 명을 비밀 정보 요원에게 남긴 채.」 용사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실소가 담겨 있었다. 「황가에 걸린 살해 저주는 엄밀히 말하면 오로지 형제에게만 적용되는 것이거든.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조카들이 있을 경우 죽이지만……. 본인도 죽음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오래전 우연히 살아남은 조카까지 죽일 의지가 생기지는 않았나 보더군.」 용사는 마치 당시의 상황이 눈앞에 훤히 그려지기라도 하듯 말했다. 황가의 걸린 살해 저주라는 것에 대해 난 자세하겐 모르겠으나, 형제지간이 아니면 굳이 살해 의지가 들지 않는다는 것 같았다. 「당시 보고에 의하면, 그 여인은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오라비의 집으로 가서 몰래 출산을 했다고 해.」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듯 잠시 말을 멈춘 용사는, 이윽고 다시 말을 이었다. 「무사히 태어난 아이는 오라비의 자식으로 입적시켰다고 하더군. 그 오라비는 평생 자식이 없어서 어차피 양자라도 들일 참이었거든.」 “혹시 그 시녀의 이름이라든가, 가문이라든가. 그런 건 뭐 기억나는 게 있어?” 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용사가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다면 훨씬 방계를 찾기 쉬워진다. 황위를 아무런 잡음 없이 물려줄 상대로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이름 같은 것까진 기억하지 못해.」 “음……” 나는 고민에 사로잡혔다. 당시에 선선황에게 이 정보를 보고했던, 황궁 최정예 정보 요원에게도 선선황이 함구를 시켰다고 했다. 설령 이제 와서 그 요원을 찾아봐도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서 죽었을 것이고……. “그래서, 용사하고 무슨 얘기 했나?” 제라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가 내 손을 잡은 채로 물끄러미 기다리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피터와 다니엘은 천장에 대고 대화하고 있던 날 빤히 쳐다보고 있는 상태였다. 끼어들기도 그렇고, 정상은 아닌 것 같고. 그런 어정쩡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던 피터와 다니엘. 나는 용사가 해준 이야기를 세 명의 절세 미남에게 그대로 전달해주었다. “…….” 뜻밖에도 황족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에 절4들도 놀란 눈치였다. “사실일까? 이건 우리 길드에서도 전혀 모르던 정보인데.” 병아리가 의문을 가진 채 중얼댔다. 파라야 정보 길드에서도 모른다는 것은 그 황족의 출생이 얼마나 비밀리에 감춰졌는지를 증명했다. 물론 아직은 용사의 말일 뿐이므로, 이 정보의 진실 여부는 확실히 확인해봐야 할 문제지만 말이다. “만일 그 황족의 핏줄이 정말 있다면, 설마 알렉시스보다 더 미친 성격을 가지고 있진 않겠지?” 다니엘이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그럴 리가.” 제라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니 그럴 수도 있지, 왜 그렇게 부정하는 거냐. “이른 시일에 찾긴 힘들 거 같으니 알렉시스가 진짜 황제를 하는 수밖에 없군. 하, 내가 영원히 알렉시스 편이긴 하지만 진심으로 걱정된다.” 다니엘이 또 나라 걱정을 했다. “당분간 기한을 두고 재상에게 섭정을 맡기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퇴폐미남이 보완책을 제시했다. 재상은 귀족 회의에서 대표로 뽑히는 자가 맡는 직책이어서 뒷말이 나올 확률도 적었다. 호레이스 후작도 워낙 일에 열정적인 듯하니 적격이었다. “그거 괜찮은데?” 내가 퇴폐미남의 의견에 반색했다. 일단 그냥 내가 일 더미에 파묻히지만 않으면 아무래도 좋았다. 난 재상이 황제를 대신해서 실질적인 국가 지도자가 되는 가능성을 잠시 생각해 본 다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황실이 내각에 권력을 상당 부분 이양한다는 서약서를 만들어볼까?” 오랜 기간 황족들은 피를 쏟아가며 죽이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정작 국정을 등한시한 황제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아직까진 제국이 그런대로 굴러갔지만, 황실 자체가 콩가루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차라리 귀족 회의에서 재상의 주재로 국정을 운영하고, 황위는 영국 왕실처럼 명예직 비스무리하게 되면 어떨까. “……?” “……?” “……?” 그런데, 세 절세 미남들이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일제히 머리 위에 물음표를 떠올리는 광경이 보였다. “음, 아직은 아닌가?” 아직 이세계는 전제군주제 이외의 정치 체제가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런 중요한 일을 내 멋대로 했다가 무슨 후폭풍이 올지 모르는 일이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앞서 나간 것 같다. 어차피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 모를 오촌 당숙만 찾아서 황위 계승을 해주면 되니까,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 그런데 병아리만은 한참이나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단안경을 고쳐 쓰면서 날 날카롭게 쳐다봤다. “처음으로 네 입에서 신박한 얘길 다 듣는군. 진짜로 할 의향 있어?” “음? 뭘? 무슨 의향?” 이미 앞서 내가 한 말을 다 잊어버린 내가 멍청하게 반문했다. 난 다 잊고 창밖을 보던 참이었다. “…….” 병아리는 멍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잊은 듯했다. 후, 하고 짧은 숨을 뱉은 그는 됐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그쪽 방계를 찾을 수가 있을까. 무슨 실마리라도 없는 거야?” 다니엘이 질문했다. 「다른 건 모르지만 하나 기억나는 게 있군. 그 여인은 케아르 왕국으로 도망갔었다.」 마치 다니엘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불쑥 마차 위에서 용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다니엘이 들었을 리 없었다. 나만 고개를 천장으로 치켜들었을 뿐. 「가문의 이름까진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의 오라비가 훗날 집안을 일으켜서 그곳에서 상당한 거물이 되었다고 하던데.」 “엇. 그래?” 난 홱 피터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피터는 정보 길드의 요직에 있는 인물 아닌가. 게다가 케아르 왕국 출신. 정식으로 의뢰를 맡기면 생각보다 빨리 찾아낼지도? “뭐? 그 여인이 케아르 왕국 출신이라고?” 내 입에서 용사의 말을 전해 들은 병아리가 왠지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리고 그녀의 아이를 입적시킨 오라비가 나중에 그 나라에서 거물이 되었……” 거기까지 말하고 난 입을 딱 멈췄다. 제라드, 다니엘도 동시에 동작을 딱 멈췄다. 그들의 눈길이 일제히 피터에게로 홱 쏟아졌다. “……설마.” 내가 멍하니 뇌까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케아르 왕국의 거물은 단 하나뿐이었다. 피터의 아버지. 파라야 정보 길드의 주인. 오래전에 황궁에서 도망쳤던 여인이 몰래 낳았다던 아이가…… 혹시 그는 아닐까? 왜냐하면 그자의 아버지, 즉 피터의 할아버지는 망해가던 변방의 작은 길드였을 뿐이었던 파라야 정보 길드를, 훗날 세계 최고의 길드로 일으켜 세운 입지전적 인물. 그렇다면……? “왜?” 모든 이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병아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야! 너 쇄골 좀 보자!” 내가 갑자기 두 눈에 불을 켜고 와락 피터에게로 달려들었다. “야이 씨! 지금 뭐 하는 거야!!” 병아리는 당황해서 몸을 뒤로 최대한 빼고 나를 밀어내려고 했다. “너 있지! 그거 있지! 황가의 표식 있지!” “뭔 개소리야!” 병아리가 고함을 질렀다. 내가 놈의 앞섶을 풀어헤치려고 달려들었지만, 뜻밖에도 제라드나 다니엘은 막으려 들지 않았다. 그들도 궁금한 것이다. “없다니까! 그딴 표식!” 병아리답지 않은 괴력을 뽐내면서 나를 밀어내는 피터. “진짜 없어?” 내가 멈칫하고 물었다. “그래! 없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거야! 설마 너희들, 내가 황족이라고 생각하기라도……” 그런데 병아리의 몸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93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그의 얼굴에 아주 잠깐이지만 설핏 의혹이 떠올랐다. “진짜 없어? 표식?” 내가 다시 확인했다. 당장이라도 앞섶을 우두득 잡아당겨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병아리가 하도 방어에 굳건해서 꾹 참았다. “없다니까 그러네.” 병아리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더니, 마치 직접 확인을 시켜주겠다는 듯이 자기 손으로 앞섶 버튼을 풀어 쇄골 부분을 보여주었다. “봐, 없잖아.” 나와 제라드, 다니엘이 시선이 일제히 피터의 우아한 쇄골에 향했다. “…….” 묘한 침묵이 흐른 뒤. “근데 그 화상 자국 같은 건 뭐야?” 내가 물었다. 조금 울퉁불퉁한 화상 자국이 공교롭게도 왼쪽 쇄골 아랫부분에 작게 나 있었던 것이다. “내가 갓난아기 때 유모가 촛불을 옮기다가 떨어트려서 다친 거야.” 병아리가 앞섶을 다시 제대로 가리면서 대답했다. 어쨌거나 황가의 표식은 아니라는 뜻이다. 난 조금 떨떠름하지만 뒤로 물러났고, 병아리도 안심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라드와 다니엘의 표정이 묘했다. “그럼 너네 길드에 의뢰 좀 해야겠어. 그 황족 좀 찾아줘. 의뢰비는 거액으로 지불할 테니까.” 내가 말했다. 찾을 수만 있다면, 그 황족은 나하고는 5촌 지간이었다. 용사의 말로 추정하자면 황족은 3촌 지간에는 살해 의지가 들지 않는 모양이니, 다행히 5촌이면 아예 그럴 의지가 없을 것이다. 찾는다 해도 상대가 황위를 반길지 아닐지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일단 찾고 봐야 했다. “……알았어.” 병아리가 의뢰를 받아들이면서 선선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피터 레이. 그대의 부친에게 그 표식이 없는 게 확실한가?” 제라드가 불쑥 말을 던졌다. “뭐야, 아직도 의심하는 거야?” 병아리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대꾸했지만. “사실은 나도 의심스러워. 그 화상 자국 말이야. 딱 그 자리잖아. 황가의 표식이 있는 자리.” 다니엘도 끼어들었다. “동의한다. 갓난아기 때 촛불이 떨어져서 난 화상이 아니라, 일부러 표식을 지우려고 한 게 아닐까?” 제라드가 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내 생각도 그래. 황가의 표식을 갖고 살기에는 아무래도 위험이 크니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 때 일부러 조치한 건지도 몰라.” 다니엘이 맞장구를 쳤다. “…….” 병아리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입을 헤 벌리고 듣고 있던 내 머리도 약간 돌아갔다. 「혹시 쌍둥이로 태어났었는지 물어보도록.」 불현듯 용사가 내게 말했다. 쌍둥이? 하지만 피터는 외동아들인데. 그래도 시켰으니까 일단 물어봤다. “병아리야, 너 혹시 쌍둥이로 태어났어?” “……뭐?” 병아리는 눈썹을 치켜올린 채로 날 빤히 응시했다. 한참이나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마차의 지붕 위에서 용사의 목소리만 내 머릿속에 들려올 뿐이었다. 「황족이라면 첫째 아이를 무조건 쌍둥이로 낳는다. 하지만 쌍둥이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서 태어나지. 오래전 황궁에서 도망친 그 시녀도 쌍둥이를 낳았지만 하나는 죽었다고 들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병아리가 의문을 숨기지 못한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맙소사. 사실이야?” 내가 놀라서 두 눈을 깜빡였다. “……태어날 때 다른 아이는 유산된 채로 태어났댔어. 그게 왜?” 피터의 목소리가 조금 불안정하게 떨렸다. 나는 입을 멍청하게 벌렸다. 쇄골 자리에 난 화상 자국도 그렇고, 용사의 추측대로 쌍둥이. 이런 우연이 두 번 있을 수는 없었다. 난 확신했다. 피터와 나는 6촌 지간의 친척이라는 사실을. 피터는 태어날 때 죽은 쌍둥이 형제 외에 다른 형제가 없었으므로, 황가의 핏줄을 이어받았다고 해도 형제 살해의 저주를 치를 상대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황가의 표식을 일부러 지우고 부모가 숨겼다면 지금까지 본인도 몰랐을 가능성이 있었다. “…….” 병아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난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른 채로 머뭇거렸다. 넌 쌍둥이였으니까 내 육촌이다? 너도 형제 살해의 저주를 받아서 그 쌍둥이가 죽어서 태어난 거다? “……아, 아냐, 아무것도.” 병아리에게 다소 충격일지 모를 일이라서, 일단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하고 얼버무렸다. 병아리는 날 여전히 의심스레 쳐다봤지만, 그 역시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이나 고민에 잠겼다. 우리가 제기한 의문들이 이제 그의 머릿속에 배회하고 있으리라. 지금까지는 설마 자신이 황족일 가능성에 대해 정말이지 추호도 상상해본 적이 없을 테지만, 의문이 제기된 후엔 다르다. 제라드와 다니엘은 심각한 분위기에 가만히 입을 다문 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에게……” 마침내 병아리가 진중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표식이 있는지는 확인해 볼게. 혹은 같은 자리에 나와 같은 화상이 있는지도.” 그렇게 말한 뒤, 병아리는 잠시 생각했다가 말했다. “차라리 그냥 아버지에게 대놓고 물어보는 게 간단하겠군.” 레이 남작가에 조만간 폭탄이 터질 예정이었다. *** 황궁 안의 모든 시중인들은 마치 내가 벌써 황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극진한 자세로 날 맞이했다. 그러나 아직 정식으로 대관식을 올리고 황위에 오른 것은 아니기에 호칭은 여전히 9황녀 저하였다. “9황녀 저하, 차를 대령하겠습니다.” 절세 미남들과 함께 황제궁 접견실에 앉자마자 시녀들이 알아서 착착 다기를 가져왔다. 그렇게 잠깐 심신을 쉬면서 시녀들이 내오는 차를 마시려고 했지만……. 「빨리 약병이나 꺼내라. 어서.」 용사가 더는 못 참겠는지 조바심을 내면서 나를 들들 볶기 시작했다. 마차 지붕에 오를 때는 알아서 인간 크기로 변했던 용사는, 황궁에 들어온 뒤부터는 다시 원래대로 거인의 몸집으로 바꾸었다. 다행스럽게도 접견실이 워낙 크고 높아서 그의 머리가 천장에 닿지 않았다. “후, 알았어.” 나는 앉은 자리에서 검집을 뺐다. 그리고 안에서 검을 꺼냈다. 검 손잡이를 자세히 보니 과연 일반적인 검의 손잡이 같지 않았다. 나는 용사가 일러주는 대로 손잡이를 몇 회 정해진 경로로 당기고 비틀었다. 이 순서대로 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곧 달각, 하는 소리가 나면서 무언가가 툭 튀어나왔다. 내게도 익숙한 모양의 나무토막처럼 생긴 것이 나왔다. 검 손잡이에 교묘하게 장착되어 있던 것으로, 약병이 튀어나오고 나니 손잡이가 감쪽같이 다시 닫혔다. 선황이 죽기 전에 내게 하사했던 물건. 불길하다고 여겼던 푸른색 액체가 들어있던 작은 목재 약병이었다. 용사의 설명에 의하면, 그 푸른 액체는 실제로는 그냥 평범한 물이었으나 약병에 담기고 나서야 포션으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즉, 이 약병은 어떤 액체든 담으면 쉴드 포션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이 작은 약병 하나만 가지고도 대대손손 황제들이 포션을 먹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아스테시아에 있던 누군가를 시켜 내 방을 뒤져 약병을 가져간 황제도 덕분에 쉴드 포션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약병은 유독 황족의 마음을 휘어잡는 묘한 저주를 가지고 있지. 그리하여 그 약병을 한 번 손에 잡은 황족은 반드시 곁에 두려고 하는 습성이 생긴다.」 용사가 말했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제국의 황제들은 이 화려한 명검 속에 비밀리에 보물을 간직해서 곁에 소지했던 것이다. 황궁 비밀 금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은 그저 소문이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너는 오랫동안 그것을 그냥 가방에 넣어두고 방구석에 처박아놓더군. 저주가 통하지 않는 건가 싶어서 혹시나 날 알아볼까 했는데, 아무리 불러봐도 답이 없길래 포기했었지.」 용사는 왠지 입가에 미소를 보였다. 그랬나. 아스테시아에 있던 내내 나를 불렀다는 말인가. 용사의 말대로 난 오랫동안 이것을 그냥 행낭 속에 처박아놓고 잊어버렸다. 딱히 언제나 소지하고 싶은 충동이나 날 휘어잡는 묘한 마력 같은 걸 느끼지는 못했었던 것이다. “잠깐. 그럼 너, 그동안 계속 아스테시아 기숙관에서 날 보고 있었던 거야?” 문득 약간 소름이 돋은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나는 인간들을 구경하는 것이 지겹다. 그래서 항상 눈을 감고 있는 편이지. 게다가, 불러도 대답 없는 자를 굳이 봐서 무엇하겠는가.」 용사가 흥얼거리듯이 대답했다. 「나는 인간보다 더 작은 고양이만 한 크기로 변하여, 네 방 창가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지. 그게 아니면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창밖의 별을 보곤 했다.」 “음.” 생각보다 서정적인 녀석이었나보다. 나는 세 번째 포션을 마시기 전까지는 고양이 크기로 변한 용사가 내 방에 있었어도 볼 수 없었다. 그러던 내가 세 번째 포션을 먹은 건 축제 첫날로, 먹자마자 벽난로에 약병은 던져 버리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방을 나왔다. 그때 한 번이라도 뒤돌아봤다면, 고양이 크기를 한 용사가 창가에 앉아있는 모습을 봤을지도 모른다……. 방을 떠난 나와 달리 약병은 벽난로 속에 남아있었으니, 용사도 그 곁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날 내 방에 도둑이 들어와 약병을 훔쳐갔고, 그것이 황제에게 보내지면서 용사도 같이 떠났다. 덕분에 내가 처음으로 용사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오늘. 황제가 약병을 검 속에 소지한 채로 대신전에 왔기에, 용사도 할 수 없이 따라와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아스테시아에서 내 방을 뒤져서 벽난로에서 약병을 주워간 놈 얼굴은 봤겠지?” 아무리 용사가 평상시 눈을 감고 있는 게 버릇이라지만, 약병이 도둑맞은 날은 위치가 크게 움직인 날이었다. 즉 분명 용사도 범인을 보았을 것이다. 94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앗.” 그때 옆에서 시녀 하나가 실수로 찻물을 조금 흘리며 아차 하는 소리를 내기에, 난 힐끗 눈길을 던졌다. 용사가 보이지 않을, 차를 따르는 다른 시녀들이 죄다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상태였다. 내가 허공에 대고 말하는 걸로 보였을 테니까. “됐어요, 나가 봐요.” 난 조금 흘린 찻물을 닦으려는 시녀를 말리고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시녀들이 꾸벅 고개를 숙인 후에 다급히 응접실에서 나갔다. 반면 테이블에 앉아있던 세 절세 미남들은 그새 내 모습이 익숙해졌는지, 태연하게 날 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내 방을 뒤지고 약병을 훔쳐 간 도둑놈의 정체에 관해 용사에게 물어보자, 다들 약간 호기심이 어린 표정을 하고 있긴 했지만. 「그자의 얼굴은 봤지만, 이름은 모른다. 늙은 인간 사내였어.」 용사가 대답했다. “늙은 인간 사내라고?” 내가 미간을 좁히며 대꾸했다. 절세 미남 셋도 다소 의외였는지 잠깐 동작을 멈췄다. “……그럼 범인이 교수라는 이야긴데.” 제라드가 차를 한 모금 삼킨 후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일단 ‘인간’ 사내라고 한 것을 보면, 어스아이는 범인이 아니다. 그리고 아스테시아에 있는 학생들은 나이가 젊은 청년들이었다. 비록 이쪽 세계가 나이를 크게 따지는 문화가 아니긴 하지만, 아스테시아에서는 16세에서 25세 사이의 귀족만 입학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교수뿐.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내가 인상착의를 물었지만, 용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은 다 똑같이 생겼잖은가. 똑같이 아주 평범하게 생긴 자였다.」 “…….”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몇몇 교수들의 얼굴을 떠올려 봤지만 딱히 의심스러운 사람은 없었다. 아스테시아에는 수많은 과목의 교수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아예 모르는 사람이 범인일 수도 있었다. 용사는 생각에 잠긴 날 보더니 그날의 일을 더 설명했다. 「그 늙은 사내는 텅 빈 방에 들어와서 벽난로에 버려진 약병을 주웠지. 그리고 ‘이것밖에 찾지 못해 송구하다’는 쪽지와 함께 전서응에 매달아 황제에게 보냈어. 약병의 효과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 눈치였다.」 약병의 마력은 오로지 황족만을 끌어당기므로, 황족이 아닌 범인은 약병을 손에 쥐었음에도 아무 저항 없이 황제에게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약병은 속이 텅 빈 채로 벽난로에 버려져 있었으니까…… 중요한 내용물은 사라지고 쓸모없는 껍데기만 남았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래서 황제에게 송구하다는 쪽지와 함께 약병을 순순히 보냈다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건 그 약병이었는데 말이다. 「아마 그 약병의 효과를 알았다면 본인도 물을 담아서 마셔봤을 거야. 그자도 명검을 가지고 있었고, 손과 육체만 봐도 검을 쓰는 자가 분명했으니까. 검사라면 분명 쉴드 포션의 효과가 탐났을 테지.」 “…….” 검을 쓰는 교수? 내 머릿속에 두 명의 고수들이 즉각 떠올랐다. 아는 사람이 그 둘뿐이라서 그랬다. 하지만…… 검술과 교수는 아스테시아에는 한둘이 아니고 적어도 열 명이 넘었다. 다른 과목에 비해 인기가 많아서 교수진이 두텁기 때문이다. “황제도 죽어버렸으니 이젠 알 도리가 없네.”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살아 돌아와 말해줄 수도 없고, 도둑놈이 제 발로 자수할 확률도 없을 테니까. 내 방을 뒤진 범인은 이렇게 묻혀버리고 말았다. 「더 할 말이 남지 않았다면 이제 그것을 없애다오. 내겐 더 낭비할 시간이 없다.」 용사는 내 눈이 아니라, 내 손에 들린 약병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약속대로 날 해방시켜다오.」 “……어떻게 없애면 돼? 불에는 타지도 않는 것 같던데.” 분명 불타는 벽난로 안에 집어넣었는데도 탄 흔적조차 남지 않은 상태였다. 「세 용의 마력을 모두 가진 자여. 마력이 담긴 네 손으로 부러뜨려다오.」 용사의 메마른 목소리가 조용한 접견실 안에 웅웅거리듯이 울려 퍼졌다. 「그동안 어느 누구도 부러뜨리지 못하였으나, 오늘 네 손에서는 부러질 것이다. 마치 햇빛이 어둠을 베듯이, 가벼이 부러지리라.」 용사가 한 발자국 더 내게로 가까이 성큼 다가와서 멈추었다. 「그리하면 모든 저주가 풀리리라. 황가에 내려진 저주가 끊어지리라. 용사에게 내려진 저주가 모두 날아가리라.」 나는 용사의 말을 들으면서 손으로 천천히 약병을 매만져 보았다. 상당히 단단한 나무토막처럼 보였고, 쉽게 부러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내가 검은 잘 쓰지만 괴력이 있는 것은 아닌데, 이게 그렇게 쉽게 부러진다고? 「…….」 용사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간곡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세 절세 미남들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찻잔을 내려놓고 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부순다!” 나는 기합을 외치며 약병의 양 끝을 양손으로 잡았다. 과연 부러질까? 내심 약간의 의심을 가지면서, 손에 콱 힘을 주었다. 콰직― 나무토막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약병이 두 갈래로 쪼개졌다. 「하, 하, 하하하……!」 그 광경을 본 용사가 소리높여 크게 웃었다. 용사의 웃음소리, 아니 굉음에 온 사방이 마치 진동하듯이 떨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이 진동을 느꼈는지 절세 미남들도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부러진 약병이 갑자기 내 손에서 모래처럼 변하여 사르르르 흘러내리더니, 급기야는 연기로 화하여 허공으로 천천히 피어올랐다. 그 광경을 세 절세 미남들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떠나리라……. 해방되리라. 자유로워지리라. 저 너머로…… 멀리멀리 떠나…… 돌아오지 않으리라…….」 약병이 흔적도 없이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림과 동시에, 거인 같던 용사의 몸이 서서히 푸른 연기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절세 미남들이 모두 우두커니 그 광경을 보았다. 비록 절세 미남들 눈에 용사는 보이지 않지만, 불현듯 황제궁의 접견실을 가득 채운 푸른 연기는 똑똑히 보였던 것이다. 스르르 허공으로 피어오르다 흩어지는 푸른 연기와 함께, 용사는 마침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아주 멀고 먼 옛날, 거인에게는 마법사인 친구가 하나 있었다. 마법사 친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세 마리의 용을 모두 죽이고, 인간의 세계를 열어야 한다고 거인을 설득하였다. 용의 심장에 검을 꽂으려면 거인의 힘이 꼭 필요하다는 간절한 청과 함께. 비록 세 마리의 용들은 인간 세계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지만, 50년 만에 한 번씩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땅을 요동시켜서 지진을 일으키곤 했다. 용들이 아직 잠들어있는 시기가 죽일 기회였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힘을 합쳐 용들을 죽이기로 하고 모험을 떠났다. 마침내 마법사와 거인은 그들의 강한 마법과 무시무시한 힘을 합쳐서, 금룡과 적룡을 처치하는 데에 성공했다. 금룡과 적룡 모두 동면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마법 검을 심장에 꽂는 일은 수월했다. 이제 살아있는 마지막 용은, 용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흑룡. 두 사람이 그 흑룡을 찾아가서 마법 검을 심장에 깊숙이 꽂았을 때, 하필이면 용이 깨어나고 말았다. 흑룡은 자신의 심장에 꽂힌 검을 보았으며, 동시에 마법사와 거인의 몸에 짙게 배어있는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흑룡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이 하잘것없는 족속이 감히 내 형제를 모조리 죽이다니……!” 자신이 심장에 검이 꽂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보다도, 피를 나눈 두 형제를 잃었다는 것에 용은 더욱 분노하였다. 흑룡은 두 눈을 마법사와 용사에게 꽂은 채로 강력한 저주를 내렸다. “마법사여! 내 형제를 죽인 대가를 치르리로다. 네 핏줄은 앞으로 끝없이 형제를 제 손으로 모두 죽이리! 영원히 끊이지 않는, 지옥 같은 수렁에 살리라!” “거인이여! 오래전에 홀로 되어 형제가 없는 자여! 마법사의 핏줄이 끝없이 형제를 제 손으로 죽일 때까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지옥을 지켜보리라!” 저주를 마친 흑룡은 숨이 꺼지고 절명하기 전에, 이 세상에 퍼져 있던 자신의 힘을 일시에 거둬들였다. “인간들이여, 이제 너희들에겐 더 이상 마법사가 태어나지 않으리로다!” 마법사와 거인은 용을 모두 처치하였다는 기쁨에 사로잡혀, 그 저주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알지 못했다. 마법사는 승리를 기념하며 흑룡의 심장을 꺼내었다. 심장은 꺼내자마자 차게 식어 나무껍질처럼 변해버렸으며, 검에 찔린 자리를 따라 좁은 틈이 생겼다. 마법사는 그 좁은 틈 사이에 연못의 물을 담았다. 평범했던 연못 물은 흑룡의 심장에 닿자마자 기묘한 푸른 빛으로 일렁거렸다. 마법사가 그 물을 마셨더니 놀랍게도 검에 베여도 잘리지 않는 피부를 얻었으며, 쇄골 아래쪽에 기묘한 표식이 생겼다. 마법사는 흑룡의 심장을 손에 쥐기 좋은 모양으로 검으로 깎았으며 그것을 자식에게 물려주기로 작정했다.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마법사와 거인은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마법사는 커다란 제국을 세워서 초대 황제라는 호칭을 얻었으며, 거인은 어느샌가 용사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런데 황궁을 세우자마자 황제는 갑작스런 살심을 일으켜 어린 동생들을 전부 죽여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주위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으며 황제는 자신이 저지른 짓에 두려워하며 이를 덮었다. 황제는 자신만의 가정을 이루고 싶어 하였고 자식들이 태어났으나, 그 자식들 또한 지워지지 않는 기묘한 표식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순간 황제의 자식들은 전부 서로에 대한 살심을 일으켜 서로 죽였다. 특히 가장 사랑하던 막내딸이 무참히 죽었을 때 초대 황제의 부인이었던 황후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홀로 살아남은 아들이 여인을 얻고 새로운 자식들을 낳았으나, 그 자식들 또한 언젠가부터 서로 죽이기 시작하였다. 이 광경을 본 초대 황제는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 거라며 자조했다. 95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백주 대낮에도 황궁을 피로 물들이는 아이들을 말리다가 그들의 어미들도 휘말려서 죽고, 신하들도 죽어나가곤 했다. 황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차라리 대신전에 결투장을 마련하라는 명을 내리고, 자신이 직접 대신전에 마법까지 걸어 피해를 줄이려 했다. 마법사는 본래 보통 인간들보다 수명이 길었으므로, 황제는 오래 살았다. 그리하여 자식의 자식의 자식들까지 모조리 서로 죽이는 광경을 끝까지 목도한 뒤에야 초대 황제는 말라붙듯이 숨을 거뒀다. 황제가 갖고 있던 흑룡의 심장을 아들이 물려받으니, 그 심장에 물을 담아 마신 아들도 아비와 마찬가지로 검에 베여도 잘리지 않는 피부를 얻었다. 그러나 저주는 끝나지 않았다. 끝도 없이 황족들은 서로에 대한 살심을 일으켰다. 불길한 황가의 표식 때문이라고 여긴 누군가는 그것을 불에 지져보기도 했지만, 표식은 뭉개졌을지라도 저주가 사라지진 않았다. 급기야 어느 황제는 적어도 자식들의 대에서만이라도 이를 막기 위하여 후손을 하나만 낳기로 결심하였다. 단 한 번만 여인과 동침한 후 아이를 출산하였으나, 하필이면 쌍둥이였다. 공교롭게도 쌍둥이 중 하나가 다른 아이의 목을 졸라 죽인 채로 태어났다. 그 후로도 황가의 첫째는 반드시 쌍둥이가 났으며, 그중 하나는 다른 아이에게 죽은 채로 태어났다. 한편, 흑룡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이, 인간 세계에세는 더 이상 마법사가 새로이 태어나지 않았다. 기존의 마법사들은 차차 노쇠하여 죽어서 사라졌다. 그들이 세계 이곳저곳에 걸어놓은 마법들도 힘이 약해져 자연적으로 소멸해갔다. 다른 마법사들이 다 죽고 나서 가장 최후에 남은 이세계의 마지막 마법사는, 흑룡이 숨을 거두기 직전에 태어난 자였다. 마치 온 세상의 남은 마법 능력을 빨아들이고 태어난 사람처럼 마지막 마법사의 능력은 과거의 그 어떤 마법사보다도 강력했다. 그녀의 정확한 이름은 아무도 몰랐으나 ‘도레’라는 성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마법사는 삶의 대부분을 아스테시아라는 지역에서 머물렀으며, 특이하게도 그곳에서만 태어나서 살아가는 ‘어스아이’라는 소수 종족과 주로 어울렸다. 그녀는 이 선량하고 호기심 많은 여우족이 한때 근처에 살았던 적룡의 마력에 강하게 영향을 받아 진화한 종족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마지막 마법사는 어스아이에게 마법을 가르쳐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대신에 인간의 말과 글, 요리, 그리고 온갖 쓰잘머리 없는 것들을 가르쳤다. 무언가를 배우는 어스아이들이 늘자 따로 시간을 정해서 가르쳐 주었는데, 이렇게 배운 어스아이들이 더 어린 어스아이들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또 소문을 듣고는 그녀에게 배움을 청하는 인간들도 몇몇이 찾아와서, 저절로 작은 학교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간혹 아스테시아 숲 깊은 곳에서만 출몰하는 마물이 방향을 잃고 숲 바깥쪽으로 나와서, 어스아이나 인간을 해치는 경우가 생기곤 했다. 마지막 마법사는 이를 막기 위해 숲 중심부를 둘러싸고 결계를 치고, 울타리를 세웠다. 마물들에 대한 지식은 따로 도감으로 남기기도 했으며, 특히 용족의 경우는 방 안 흔들의자에 앉아서 천리안으로 관찰했다. 또 그녀는 노년에 아주 강한 마법을 펼쳐 아스테시아에 높은 성곽을 세워, 아스테시아를 향한 외부의 위협을 방지하려고 했다. 하루아침에 성곽이 세워지자 어스아이들은 무척이나 기뻐하며, 자신들을 대왕 여우로 변신시켜주는 마법을 걸어달라고 성화였다. 마지막 마법사는 크게 웃으면서, 대왕 여우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깨지지 않을 보호 마법을 걸었다. 그녀가 주문을 말하였다. “오로지 학문을 닦는 자들만이 아스테시아 성에 들어올 수 있으리라. 불의의 침입자들에게는 화염이 내리리니…….” 마지막 마법사가 주문을 말함과 동시에, 성문 위에 경고가 쓰였다. 훗날, 어스아이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려던 어느 상단이 성으로 침입하려다 난데없이 모두 활활 불에 붙었으며, 그 자리에서 까맣게 타버려 죽어버렸다. 이를 보고 들은 자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아스테시아에 감히 침입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용사는 어떻게 되었는가. 본디 그에겐 다른 가족이나 형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즉 모든 형제를 죽여야 하는 지옥도가 용사의 손에서 펼쳐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법사가 동생들과 그 자식들까지 모두 죽이는 것을 본 용사는 뜻 모를 두려움을 느끼고 그 길로 황궁을 떠났다. 용사는 브레테 시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하여 평생 혼자 살다가 혼자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영웅의 시신을 불에 태워 화장하였고, 황제는 그 유골을 거두어 황궁의 비밀 장소에 안장했다. 그런데…… 용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의 혼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흑룡의 심장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흑룡의 심장, 즉 이제는 평범하게 생긴 작은 물건이 되어버린 그것이 황제의 자손들에게 대대손손 내려갈 때마다, 용사도 속절없이 그것을 매여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용사를 보지 못했고, 용사의 말을 듣지 못했다. 용사는 흑룡의 심장에 붙어 있으며 지옥도를 목격했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지옥도를 목격하고, 또 목격하고, 또 목격하고, 또 목격하였다.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어서 용사는 결국에 눈을 감았다. 눈을 지그시 감으면 아무것도 보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비명이 들리고, 또 들리고, 또 들리고, 또 들려왔다. 대체 언제 끝날 것인가. 용사는 하늘에 대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제발 끝내게 해주십시오. 제발. 용을 죽이는 게 아니었어. 용처럼 신적인 존재에 검을 꽂는다는 것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일이었던 거야. 용은 인간을 해치거나 세상사에 관여한 적도 없었는데. 동면에서 깨어날 때마다 근처의 땅이 흔들렸을 뿐, 먼 곳으로 피신해 있으면 인간들에겐 아무런 해도 없었다. 그저 신적인 존재를 죽여서 힘을 과시하고 명성을 날리겠다는 허망한 욕심 때문에 결국 이렇게 된 거야. 그러나 후회해도 이제 늦었다. 차라리 초대 황제처럼 죽어서 떠나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왜 죽은 후에도 나는 여기 남아있는가. 왜 흑룡은 초대 황제가 아닌 내게 더 큰 저주를 내렸나! 왜 나만 흑룡의 심장에 들러붙어서 이 지옥도를 끝없이 목격해야 하는가? 용사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평범한 검에 마법을 둘러 마법 검을 만든 것은 마법사였던 초대 황제였지만. 그 검을 직접 흑룡의 심장에 꽂은 것은 바로 용사였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는 용의 심장에 검을 꽂을 수 없다. 용사의 거대한 체구와 무시무시한 힘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리하여, 한때 용사가 검을 박았던 흑룡의 심장은…… 싸늘하게 식은 뒤에도 죽은 용사를 놓아주지 않았다. 용사는 흑룡의 심장에 대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제발. 이제 그만 떠나게 해주시오. 날 해방시켜 주시오. 흑룡이여. 그러던 어느 날.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마법사가,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되어서 처음으로 황궁을 찾아왔다. 나이가 정확히 몇인지는 모르나, 다른 인간의 두 배쯤은 살아온 것 같았다. 그녀는 부디 황가에 내려오는 흑룡의 저주를 풀어달라는 당시 황제의 간곡한 청을 받고서, 흑룡의 심장을 보러 온 것이다. 한 아이만을 낳겠다 결심하였지만 결국 쌍둥이를 보고 말았던 당시의 황제는, 흑룡의 심장이 황가에 내려오는 저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여 부단히 없애려 하였지만 실패한 후였다. 흑룡의 심장은 불에 타지도, 검에 잘리지도, 도끼에 부서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묘하게도 소유자의 욕망을 불러일으켜서 황제는 시간이 갈수록 그것을 곁에서 떼어놓기도 힘들어졌다. 황제가 마지막 이성의 끈을 유지하여 이 세상의 마지막 마법사에게 흑룡의 심장을 보여주었을 때……. ‘도레’라는 가문에서 나온 그 마지막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일개 인간의 마법으로는 없앨 수 없는 흑룡의 저주라고 했다. 황제도 실망하였고, 용사도 실망하였다. 그리도 휼륭한 마법사라던 이 세상의 마지막 마법사조차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용사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흑룡의 심장을 만져본 그녀는 용사의 존재를 느끼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용사여.” 「마법사여. 내 말이 들리는가.」 용사는 절박하게 물어보았으나. “…….” 안타깝게도 마지막 마법사는 용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마법사여. 부디 알려다오.」 용사는 제 말이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것임을 알고서도 간절하게 물었다. 「제발. 어떻게 해야 이 지옥에서 해방되겠는가.」 “…….” 흑룡의 심장을 쥔 채 한참이나 말이 없던 마지막 마법사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세 용의 힘을 전부 얻은 자가 나타나면, 흑룡의 심장을 부술 수 있습니다. 그때에 모든 저주가 풀릴 것입니다.” 「정말이냐.」 저주받은 자에게 순간 한 줄기 빛이 내려졌다. 아주 가늘고 약하지만, 분명히 빛이었다. 어둠을 베는 빛이었다. “흑룡의 저주는 형제들의 죽음에 분노하여 내려진 것이니, 금룡과 적룡의 힘까지 모두 모은다면 흑룡의 분노도 풀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마법사는 흑룡의 심장을 뒤로 하고 다시 아스테시아로 돌아갔다. 그녀는 자신을 잘 따르던 무척 앙증맞고 폭죽을 유독 좋아하는 작은 어스아이 하나에게 말했다. “언젠가 내 가문인 도레의 후손이 황가와 연을 맺어 자식을 낳게 된다면, 그 아이에게는 황가에 내려진 흑룡의 저주가 비껴가겠구나.” 그녀는 그 아이만큼은 다른 황족과 달리, 형제 살해의 저주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작게 덧붙였다. 96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왜냐하면 도레 가문은 오랫동안 흑룡을 모셔온 가문이거든. 그 보답으로 먼 옛날 흑룡의 축복을 받았으니, 흑룡의 저주를 무사히 피할 것이란다.” 앙증맞은 어스아이는 그녀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지 귀를 쫑긋거렸다. “비록 내 형제자매들이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도레 가문의 후손이 몇 남지 않았지만, 언젠가 아주 먼 훗날 황가와 연이 닿을지도 모르지.” 마지막 마법사는 미소를 지으며 그 앙증맞은 어스아이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태어난 아이는 어쩌면 형제들을 피해 이곳 아스테시아까지 먼 길을 달려올지도 모르겠구나.” 마지막 마법사는 마치 먼 미래를 눈앞에 고스란히 그리기라도 하듯이 시선을 허공에 향했다. “그때는 너와 네 종족들이 그 아이를 따뜻하게 받아주려무나.” “네!” 앙증맞은 어스아이가 꼬리를 말고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도레 가문의 마법사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면서, 마침내 세상에서 마법사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 나와 세 절세 미남들은 용사가 사라지고 난 뒤, 말없이 테이블 앞에 다시 앉았다. 따뜻한 찻잔이 앞에 놓여있었지만, 병아리는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나와 다니엘은 그저 물 마시듯 목을 축였을 뿐이므로, 차의 풍미를 음미하며 마시는 사람은 실질적으로 제라드뿐이었다. “다니엘 공자는 검술 대회에 4강까지 올라가 놓고, 아깝겠어.” 병아리가 화제를 돌리려는 듯 입을 열자, 다니엘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4강에 든 것만으로 충분해. 실력은 인정받은 거잖아. 이제 어느 기사단이든 들어갈 수 있거든.” “아? 그렇구나! 아무 기사단이나 갈 수 있구나! 좋은 생각 났다!” 갑자기 내가 찻잔을 쾅 내려놓으며 흥분해서 소리쳤다. “냐옹아! 황궁 기사단에 들어와! 그럼 나랑 매일매일 볼 수 있잖아! 내가 당분간은 황제나 마찬가지니까!” “…….” 다니엘의 얼굴이 팍삭 일그러졌다. 그는 내 시선을 요리조리 피했다. “음, 그게, 난 황궁 기사단은 별로야.” “어? 왜?” 난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궁 기사단을 마다하는 기사도 있다니? 이상하게도 옆에서 퇴폐미남과 병아리는 애써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다니엘만 말을 더듬거리면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게, 그, 음…… 그러니깐, 아버지도 계시고…….” “아버지? 아까 못 들었어? 펠트 자작은 황궁 기사단장 그만둘 예정이잖아! 인수인계만 하고 사직서 내기로 했는데?” “어? 아, 그랬나? 맞다, 그랬지. 어……. 꼭 아버지가 아니어도, 아, 아버지하고 아는 사람도 많으니까 난 좀…….” 다니엘은 말도 더듬거리면서 이상하게 쩔쩔맸다. “우리 냐옹이. 설마…… 아버지랑 사이 안 좋니?” 난 진지하게 걱정되어 물었다. “음? 어! 안 좋아! 맞아! 그래. 그거야! 아버지랑 몹시 어색하고 사이가 아주 안 좋아! 아버지 지인들이나 부하들하고도 일절 알고 싶지 않고! 아주 불편해!” 갑자기 다니엘의 낯빛에 화색이 돌았다. 왜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다는데 얼굴은 화색이 도는 건지는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까 결투장에서 막 부둥켜안고 울고불고하던 건 그럼 뭘까? “그래? 아쉽지만 할 수 없지. 황궁 기사단에 들어오면 내가 맨날 같이 놀아줄 수 있는데……. 펠트 자작을 볼 때마다 아들이랑 잘 지내라고 협박을 해야겠구나.” “협박? 안 돼! 아버지 잘못은 절대로 없어! 그냥 내가 못난 아들인 거야! 내가 불효자야! 집에선 아주 썩을 놈이지! 내가 성격이 아주 나빠! 더러워! 우리 아버지 협박하지 마!!” “아 그래?” “그렇지!” 졸지에 다니엘은 불효자에 썩을 놈에 성격이 아주 나쁘고 더러운 놈이 되었지만,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다니엘 공자, 그럼 로스트베인 기사단에 들어오는 건 어떤가.” 옆에서 퇴폐미남이 대형 고양이에게 제안했다. 다니엘의 두 눈이 커졌다. “……정말인가, 제라드 공자?” “물론이지.” 로스트베인 공작가 기사단은 제국에서 황궁 기사단을 능가하는 유일한 기사단. 다니엘은 무척이나 흥분한 안색으로 기쁨에 가득 차서 외쳤다. “좋았어! 집에 가자마자 아빠한테 자랑……” 순간 다니엘이 아차 싶었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얼버무렸다. “……하지 말아야지. 내 불효를 아시면 또 몹시 실망하실 테니까!” “…….” 내가 실눈을 뜨고 다니엘을 쳐다보자, 그는 또 내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한편 그런 우리의 모습이 그나마 병아리의 활기를 돋구었는지, 처음으로 은은한 미소를 띠면서 차를 들기 시작했다. 본인은 아직 긴가민가하는 눈치지만, 미래의 황제를 보고 있자니 난 왠지 마음이 든든해졌다. 제국의 미래가 아주 밝았다. 난 여전히 퇴폐미를 절절히 발산하고 있는 옆 녀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제라드, 이제 다시 아스테시아로 돌아갈 거야? 난 꼼짝없이 황궁에서 일 더미에 파묻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아마도 날 들들 볶을 호레이스 재상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잠깐 쳤다. 퇴폐미남이 씩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네가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딜 가. 곁에 있어야지.” “…….” 제라드의 말에 옆에서 닭살이 돋았는지 다니엘이 팔을 무지막지하게 문질러댔다. “나도 가주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가문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좀 남아있다. 어차피 황도에 있어야 할 테니, 황궁에도 너 만나러 매일 올게.” 제라드가 내 손을 살짝 잡으면서 말했다. 나도 퇴폐미남의 얼굴을 마주 보며 생긋 웃어주었다. 산더미처럼 예정된 일거리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퇴폐미남이 옆에 있어 준다니까 기분이 백배 나아졌다. “그러지 말고 그냥 차라리 황궁에서 나랑 같이 지내면 안 돼?” 내가 퇴폐미남에게 제안했다. 푸학, 다니엘과 피터가 동시에 찻물을 뱉어냈다. 난 아랑곳 하지 않았다. “여기서 공작가 저택 별로 안 멀지? 그냥 황궁에서 머물면서 왔다 갔다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래. 그럴게.” 제라드는 빙그레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 잘생긴 얼굴을 보고 내가 헤헤, 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웃는 사이. “내가 비록 언제나 알렉시스 편이기는 하지만 진짜로 이런 무지렁이랑 대놓고 살림을 차릴 모양이군. 대단하다, 대단해.” 다니엘이 존경심 어린 눈빛으로 퇴폐미남을 바라보았다. “아직 결혼식은 안 했으니 탈출 기회가 남아 있는데…… 그 강을 정말 건널 작정이야, 제라드 공?” 이번에는 병아리가 물었다. 가만, 왜 다들 제라드 걱정을 하는 거지? “석 달은 연애하기로 약속했으니까 최대한 알렉시스 옆에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얼굴 볼 시간도 없을지 모른다.” 제라드가 대꾸했다. “결국 그 강을 건너겠다는 말이네. 무운을 빌겠네.” 병아리가 덕담을 던졌다. 무운이라니. 누가 어디 전쟁터에라도 나가나? “무슨 일이 있어도 웬만하면 공이 참아. 황궁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싶지 않으면.” 다니엘도 예상 밖의 조언을 날렸다. 진짜 어디에 전쟁이라도 나나?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데 다니엘이 곧바로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난 바로 아스테시아로 돌아갈 거야.” “……나도 곧 아스테시아로 돌아갈 거다.” 병아리가 음울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물론 그전에 길드 본부에 들러서 아버지와 대화부터 해봐야겠지만.”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피터를 바라보았다. “우리 병아리, 유독 안색이 초췌해 보이는데 괜찮아?” 내가 걱정했다. “괜찮냐고……?” 삐약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크게 쳤다. “하. 다 너희들 때문이잖아! 괜히 내가 황족일 수도 있다느니 뭐니 괴상한 소리나 해대서!” 울컥했는지 갑자기 화를 내는 삐약이. 그동안 열심히 속으로 삭이고 있었지만, 역시 본인도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설마 내가 황족이라는 주옥같은 일이 벌어지진 않겠지? 어쩐지 아버지가 좀 의심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아니 사실은 어마무시하게 의심스러워!” 삐약이는 참았던 것이 결국 터졌는지 봇물 터지듯이 언성을 높였다. “황족이라면 정말 큰일이잖아! 이런 도른 녀석에게 국정을 맡길 순 없으니. 재수 없으면 우리 아버지가 나라를 책임져야 할 판인데……! 하필 그다음엔 내 차례……!” 차기 황제로 유력시되는 압박감이 엄청난 모양인지 병아리가 벌컥 화를 내다가. 나와 두 눈이 마주친 순간, 갑자기 말을 뚝 그쳤다. “…….” 병아리는 물끄러미 날 쳐다보다가 어쩐지 길고 긴 숨을 내뱉었다. 그는 이윽고,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전에 너, 인질로 잡힌 날 구하려고 제 발로 아스테시아에서 포로로 잡히려고 나왔었지, 알렉시스.” 아무래도 피터는 그때의 일로 내게 마음의 빚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간 표현은 안 했지만. “고마웠어, 그 일.” 병아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어느새 침착을 되찾은 채로 두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병아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를 한 모음 음미한 다음에 다시 날 보았다. “나도 다니엘 공자처럼 무조건 네 편이야. 네가 예정대로 황위에 올라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무조건 도와줄 거야. 나도 그렇지만, 제라드 공도 분명 도와줄 거고…….” “…….”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황족이 아니어서 네가 아무에게도 황위를 넘겨주지 못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라.” 병아리는 마치 날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물론 나는 우리 아버지가 황족이 아니길 바라기는 해. 하지만 황족이든 아니든, 어떤 식으로든 내가 무조건 널 도와줄 거라는 건 변함없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덜컥 얻게 된 황위에 대한 나의 부담감을 피터는 이해한 걸까. 난 어쩌면 나와는 친척일지도 모르는 두 번째 절세미남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두 사람은 똑같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97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이튿날부터 나는 호레이스 재상에게 들들 볶이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화려하기만 한 황궁 생활은 그저 허황된 꿈일 뿐. 그저 산더미처럼 쌓인 일복에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결투에서 나랑 싸우다 죽은 선황제의 장례식도 치르고, 명목상의 추모 기간도 가졌다. 매일같이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차리고 나면 어느새 창밖이 깜깜한 밤이곤 했다. 제라드는 나와 같이 황궁에 머물다가, 아침이면 공작가 저택으로 가서 일을 처리하고 오후에 황궁으로 돌아오곤 했다. 내가 국정 업무를 본지 첫 한 달 동안은 퇴폐미남과 별다른 애정 행각을 벌일 수가 없었다. 그와 나는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자긴 했지만 아무 일이 없었다. 제라드는 과중한 업무로 피곤해하는 날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다. 밤이 되면 대개 야근에 시달린 내가 곧바로 제라드의 품에 쓰러져 기절하듯 잠이 들곤 했을 뿐이다. 그렇게 약 한 달쯤 지나고 나서는 한결 일이 줄어들어 야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급한 사안들은 앞서 처리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저녁 만찬 전에 일을 마친 날, 나는 한결 후련한 기분이었다. 호레이스 후작 및 다른 몇몇 귀족들과 화기애애하게 저녁 만찬까지 하고서 난 처소가 있는 별궁으로 돌아왔다. 황제궁은 왠지 쓰고 싶지 않아서 나는 별궁을 사용했다. 아직 공식적으로 황제도 아니었으니 황제궁을 차지할 이유도 없었다. “제라드 공은 아직 안 왔어요?” 처소 앞에 도착하자마자 시녀장에게 물었다. 제라드는 내가 알기로 공작가 저택에 간 상태였다. 대부분 공작가에 가더라도 저녁 만찬 전에는 돌아왔는데, 오늘은 만찬 자리에 나오지 않은 걸 보면 늦는 걸까. 시녀장이 미소를 지으며 뭐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알렉시스.” 안쪽에서 직접 제라드가 방문을 열고서 나를 맞이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방 안쪽으로 잡아당겼고, 나는 절로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그대로 끌려들어 갔다. 시녀장에게 윙크를 했더니 그녀가 눈치 빠르게 알아서 문을 닫았다. “보고 싶었다. 그리웠어.”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제라드는 날 뒤에서 부드럽게 끌어안으면서 갑자기 고백했다. 지난 한 달 동안 항상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었음에도, 그는 내가 그리웠다고 했다. “나도.” 미소를 지으며 내가 대답했다. 뒤에서 날 끌어안은 제라드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나는 몸이 간지러웠다. 뒤에서 물씬 풍기는 퇴폐미를 느끼고 있자니 정신이 나른해지면서 동시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태권도 방어 자세를 한 지도 이젠 한참 된 것 같다. 이 녀석에게 넘어가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는데……. 제라드가 내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처음에는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내 고개를 한 손으로 고정하고 부드럽게 뺨에 입을 맞추다가, 점점 입술로 다가와서 자신의 입을 포갰다. 눈을 감고 달콤하고 말랑거리는 입맞춤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제라드가 잠시 살짝 입술을 떼었다. 시선을 들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깊고 검은 두 눈동자가 날 바라보다가 눈꼬리가 살짝 휘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면서, 이런 순간을 누릴 수 있음에 행복했다. 그래서 나는 명령했다. “언제까지 껴안고 뽀뽀만 할 거야. 빨리 벗기라고, 이 천한 것아.” 빨리 19금을 하고 싶단 말이야. 풋, 불현듯 퇴폐미남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터졌다. 내 허리를 껴안은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벗기라니까 뭐해?” 녀석은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로 부들부들 떨며 오열했다. 그러더니 아하하, 급기야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난 어리둥절해서 내 남자를 쳐다봤다. 온 세상의 절세미남들 중에서도 가장 잘생긴 내 남자는 웃음을 애써 가라앉히고는 나를 다시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거칠게 입을 맞췄다. 그는 내 명령을 그대로 이행했다. 묘한 열기를 느끼며 나는 몽롱한 낯으로 다시 명령했다. “너도 벗어야지, 이 천한 것아.” 아직 완전히 벗겨지지 않아서 약간 걸쳐진 드레스 사이로 훤히 드러난 내 몸을 바라보던 퇴폐미남은, 이번엔 웃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남자는 즉시 자신의 상의를 벗어 던지고 내게 달려들었다. 우리는 그대로 끌어안고 격한 입맞춤을 하면서 침대로 직행했다. *** 며칠 뒤에 나는 파라야 길드장의 방문을 받았다. 기실 그동안 피터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길래, 내가 먼저 파라야 길드장과 피터에게 서찰을 보내어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 거냐고 닦달을 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접견 신청이 와서 이제야 그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약속 시간에 황제궁 앞에 도착하자마자 막 들어서려는 그들을 발견했다. “병아리야! 도대체 어떻게 한 달씩이나 감감무소식이었어?” 낯이 익숙한 병아리를 보고 먼저 정겹게 인사를 건넸다. 피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히 아스테시아에 돌아가 있었지. 남은 수업이 있으니까.” “뭐어?” 난 멈칫했다. 그럼 피터는 지금 아스테시아에서 온 거란 말인가. “나 몰래 학업을 계속하고 있었다니. 이런 천하의 모범생 같으니라고……. 그러고 보니 너, 아스테시아의 수석이었지.” 수석은 역시 다른 모양이었다. 나는 불쑥 모범생인 피터와 나 사이에 까마득한 괴리감을 느끼며 수심에 잠겼다. 그때, 피터 곁에 서 있던 중년 사내가 한 발자국 나서서 날 향해 고개를 숙였다. “9황녀 저하를 뵙습니다. 신은 케아르 왕국의 데미안 레이 남작이라고 합니다.” 나이만 조금 들었을 뿐, 피터와 완전히 꼭 닮은꼴. 예리하고 이지적인 인상이었다. 이 자가 바로 파라야 길드의 주인. “저희 아들 녀석이 그간 신세를 많이 졌다고 들었습니다, 저하.” 데미안 레이는 무척 분위기 있는 저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세도 그에 걸맞게 아주 정중했다. “아뇨, 오히려 제가 피터한테 매번 신세를 졌습니다.” 나는 아주 공손하게 대꾸했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이 사람은 나와는 5촌 지간일 확률이 있었다. 데미안 남작은 날 예리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일전에 저하께서 보내주신 서찰을 받고, 직접 답을 드려야 할 것 같아 찾아왔습니다. 저도 그간 고민을 좀 하느라……. 늦게 알현을 청한 점 송구스럽습니다.” 두 부자가 굳이 황궁까지 날 찾아왔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중요한 얘기가 아니라면 그저 서찰 한 통으로 대답을 했을 테니까. “그렇군요.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할까요?” 나는 귀빈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그를 안내했다. 피터도 별말 없이 옆에서 따라왔다. 내가 뒤를 돌아보며 그에게 윙크를 한 번 했지만, 피터는 미간을 찡그리며 거북스럽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나는 킥킥 웃었다. 접견실에 들어선 우리는 자리에 착석했다. 나는 시녀들이 다과를 올릴 때까지 잠시 기다린 후에, 그들을 전부 밖으로 물렀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물을게요. 제국의 황족이십니까?” 고요해진 접견실 안에서, 나는 데미안 레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는 피터와 똑 닮은 두 눈으로 날 주시하며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사위가 정적에 잠겼다. “보여주실 수 있나요?” 나는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두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데미안 레이 남작은 아무렇지 않게 그 자리에서 셔츠 앞섶을 조금 내려 보였다. 목 아래에 선명하게 나타난 황가의 표식. 물, 불, 흙을 의미하는 3개의 무늬가 그려진 붉은 자국이었다. 내게도 같은 문신이 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데미안 레이는 앞섶을 바로 한 채 다시 날 응시했다. “신이 황족임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황위를 물려받을 의향이 없습니다, 저하.” 나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데미안 레이는 아들에게서 이미 다 이야기를 들었는지, 내가 황위를 떠넘길 작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차분한 말투로 말을 계속했다. “제국의 황위에 오르면, 제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일은 전부 내려놓아야겠지요. 하지만 전 파라야 길드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 길드를 세계 최고의 길드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저의 사명이니까요.” “경이 황위에 오른다고 파라야 길드가 무너지는 건 아닐 텐데요? 오히려 더 잘된 일 아닌가요? 그리고 누가 뭐래도 이미 파라야 길드는 이미 세계 최고의 정보 길드예요.” 내 말에 데미안 레이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동시에 조금 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길드의 주인인 제가 황위에 오르면, 파라야 길드도 그저 황궁의 정보 조직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말입니다.” “……으음.” 난 고민했다. 황제가 소유한 정보 길드에 과연 다른 귀족들이 정보 의뢰를 맡길 것인가? 답은 부정적이었다. 설령 의뢰를 하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그 정보는 모두 황제의 귀로 들어가게 된다. 피터가 훗날 황위에 오른다면 그가 길드를 물려받아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 아무도 의뢰를 하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황제를 위한 정보 조직처럼 되어버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정보 길드의 몰락을 의미했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는 길드를 아예 남의 손에 넘겨야 하겠지만, 그건 불가합니다. 저는 절 입적시켜주신 큰아버지의 가업을 도무지 남의 손에 넘길 수가 없어요. 파라야 길드만큼은 반드시 레이 남작 가문에서 이어야 합니다.” 난 말없이 앉아있는 피터 쪽을 곁눈질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왜 황족임을 밝히러 여기까지 온 거죠?” 내가 데미안 레이에게 물었다. “경이 황족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어도 난 증명할 방법이 없었는데요. 여기까지 온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거 아닌가요?” 98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맞습니다.” 데미안 레이가 대답했다. “일단 제가 황족임을 이실직고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황녀 저하께서 저희 아들을 구하려고 나서주신 적이 있는데, 제가 어찌 그런 분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 “그뿐 아니라 로스트베인 공작과 펠트 자작의 공자도 제 정체를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라 들었습니다. 무작정 정체를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지요.” “그렇군요.” 데미안 레이는 시원시원하고 담대한 기질이 있어 보였다. 하긴 그러니까 파라야 정보 길드 같은 큰 조직을 이끌어온 거겠지. 황위에 올라도 아주 잘할 것 같은데. 멀쩡하게 황가의 표식도 가지고 있으니 본인만 허락하면 되는데. 아쉬웠다. 그때 데미안 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파라야 길드를 세계 최고의 길드로 만들겠다는 것은 저의 사명입니다. 제 아들의 사명이 아니구요.” “……?” “또 우리 레이 남작 가에서만 길드를 물려주겠다는 것도 저의 결심이고, 제 아들의 결심은 아니죠. 피터는 저와는 달리 파라야 길드에 대한 애정이 크지 않습니다.” 난 말을 거기까지 들은 순간 곧바로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짐작했다. 슬슬 입꼬리가 올라가고 입술 사이로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제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피터는 능력이 뛰어난 아이입니다. 고작 정보 길드의 주인으로 살아가기에는 아쉽지요.” 데미안 레이가 어깨를 편 채로 조금 자랑스레 말했다. “그렇죠. 피터 정도 되면 한 나라를 다스려도 충분하죠.” 내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데미안 레이도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형적인 팔불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옆에 가만 앉아있는 피터만 얼굴이 썩어가고 있었다. “다만 피터도 황위를 물려받기는 싫은 기색이더군요.” 데미안 레이가 웃는 낯으로 덧붙인 말에, 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급격히 굳었다. 아 거참. 그래서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속이 답답했다. 나는 옆에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피터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데미안 레이도 피터에게 오늘 들어 처음으로 말을 건넸다. “직접 말씀드리거라.” “후…….” 마침내 피터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든 피터와 나의 시선이 얽혔다. 그는 왠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케아르 왕국의 레이 남작으로 계속 남아있길 원하십니다. 즉, 황녀 저하께서 제국의 황위를 누군가에게 양위하고자 하신다면 제게 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평소와 달리 예의를 갖춘 채 내게 공대하는 피터의 모습은 너무나도 낯설었다. “황녀 저하가 원하신다면…… 아니 오로지 황녀 저하께서 원하시는 경우에만, 신이 황위를 양위 받겠습니다.” 그가 말을 마쳤다. 방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체념한 표정의 피터를 말없이 한참이 응시했다. 누가 봐도 나보다 훨씬 황위에 잘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난 씩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데미안 레이 남작을 향해 물었다. “파라야 정보 길드는 경이 계속 운영할 작정이군요. 피터는 앞으로 바빠서 길드를 이어받지 못하게 될 듯한데, 그 후에는 어떻게 할 건가요?” 잠시 무어라고 대답할지 생각하던 데미안 레이는 곧 이렇게 운을 뗐다. “……저는 황가에 서렸던 저주가 두려워 이제까지 아이를 딱 한 번만 낳았습니다. 그게 피터였습니다.” 죽은 쌍둥이 아이가 있긴 하지만, 그 말은 아무도 뱉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전에 황녀 저하께서 저주를 소멸시켰다고 들었습니다. 이젠 가업을 물려줄 아이를 하나 더 낳아도 될 것 같군요.” 데미안 레이 남작은 아직 부인과 금실이 좋은 모양이었다. 일찍 결혼해서 대부분 20대 초반이면 아이를 낳는 세계라 그런지, 피터처럼 스무 살의 장성한 자식이 있는데도 데미안 레이는 40대 초반이었다. 남작 부인도 그와 비슷하리라 추정한다면, 원한다면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입양을 해도 좋고. “온 제국에 새로운 황족의 등장을 발표하고 조속히 대관식을 치러야겠네요. 저는 9황녀로서 새로 황위에 오를 피터의 대관식 준비를 차질없이 하라 이르겠습니다.” 내가 싱긋 웃으며 미리 준비했던 계획을 말했다. 이로써 난 황위에 아예 오를 필요조차 없어졌다. 피터가 황족임을 공식적으로 인정시키고 곧바로 그의 대관식을 치르면 된다. 피터는 황가의 표식이 지워진 상태이긴 하지만, 그의 아버지인 데미안 레이는 멀쩡히 표식을 가지고 있으니 황족 확인 절차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럼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신은 파라야 길드 본부에 가 있을 테니 언제든지 필요할 때 부르십시오.” 데미안 레이는 거침없이 말하며 속이 시원해 보이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조만간 초고속으로 황위를 이어받을 차기 황제 피터는 별다른 표정도 없이 뒤따라 일어났다. “넌 가지 말고 황궁에 남아야지.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잖아.” 내가 가려는 피터의 팔을 붙잡았다. “……음. 그렇지.” 마치 지금에서야 깨달은 얼굴로 피터가 대답했다. 이제야 정말 황위가 눈앞에 닥쳤다는 걸 실감한 것 같기도 했다. “피터. 넌 잘할 거야.” 나는 그대로 피터에게 다가가서 그를 꼭 안아주었다. “너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성군이 되리라고 난 믿어 의심치 않아.” 피터를 안아주는 나의 행동을 보곤 데미안 남작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후, 피터만이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할 수 없지. 이것도 운명인가 봐.”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세상을 절망과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구하기 위하여. *** 황위 계승자 1순위였던 내가 황위를 포기하고, 황가의 표식을 대신전에서 공인 받은 데미안 레이도 황위를 포기했다. 그 결과로, 그의 하나뿐인 아들인 피터 레이가 정식으로 황위 계승자로 정해졌다. 피터 레이는 대관식을 미룬 뒤에 국정 업무를 호레이스 재상에게 잠시 일임했다. 그리고 아스테시아로 돌아가서 학업을 마치기로 결정했다. 그간 성실한 학업의 결과로 조기 졸업 요건을 충족해서, 피터에겐 이번이 마지막 학기였기 때문이다. 또 이번 학기가 얼마 남지 않아서 며칠만 더 다니며 기말 평가를 통과하면, 완전히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반면에 국정에서 해방되자마자 자유를 만끽하며 퇴폐미남과 함께 아스테시아로 돌아간 나는……. “안타깝지만 알렉시스 공자는…… 퇴학이에요. 제라드 공자는 괜찮으니 계속 다녀도 좋습니다.” 성문 앞에서 곧바로 어스아이들의 안내를 받으며 교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앙증이가 우리에게 선고를 날렸다. 앙증이는 커다란 떡갈나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는데 제법 교장 선생님 티가 났다. 제라드가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내가 먼저 핏대를 세우며 발악했다. “뭐? 나만 퇴학이라고? 왜! 황족은 학교 다니면 안 돼?” “황족인 게 문제가 아닌데요.” 앙증이가 두 눈과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럼 왜! 내가 여자라서? 아스테시아는 전통적인 남학교라서 여성은 안 된다는 거야? 그래서 날 내치는 거야?” “아뇨, 아스테시아에서는 여성의 재학을 이제까지 전혀 막은 적이 없어요.” 앙증이가 그 앙증맞은 입에서 놀라운 얘길 꺼냈다. “과거에 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그런 법을 제정한 적은 있지만,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고요. 아시다시피 아스테시아는 치외법권 지대라서 어느 나라의 법과도 무관한 곳이잖아요. 우리는 막은 적이 없어요.” “정말이야?” 미처 몰랐던 정보에 나는 두 눈만 멍하니 깜박거렸다. 제라드도 이 사실은 알지 못했는지 옆에서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이죠. 그게 아니었다면, 입학할 때 성문 앞에서 알렉시스 공자와 크리스티나 공주를 막았을 거예요.” “…….” “아무튼 알렉시스 공자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요. 알렉시스 공자가 수강한 세 과목 전부 낙제라서 퇴학이에요.” “…….”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 뭐?” 난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제라드도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앙증이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기말 평가는 다음 주부터라서 아직 시작을 하지 않았을 텐데. 평가 점수가 나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알렉시스만 벌써 낙제란 말이지?” “다섯 번 출석 안 하면 자동으로 낙제 처리되는 거 모르시나요?” 앙증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와 제라드를 번갈아 쳐다보며 되물었다. “…….” “…….” 나와 제라드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모, 몰, 몰랐는데.” 나는 다시 앙증이를 보며 말을 더듬었다. “생각해보니 전에 들은 적이 있다.” 제라드는 뜻밖에 나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이제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듯한 태도. “그런데 나도 알렉시스와 그간 똑같이 황도에서 머물렀으니 모든 과목에서 같이 결석 처리가 되어야 정상일 텐데. 왜 나는 퇴학이 아니지?” 제라드가 의아해했다. 그러자 앙증이가 커다란 떡갈나무 책상에서 서류를 뒤적뒤적거리더니, 몇 가지 종이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뭐야. 결석 사유서……?” 내가 종이를 내려다본 후 중얼거렸다. 엄청나게 화려한 금실이 박힌 휘황찬란한 종이 위에는 어이없게도 ‘결석 사유서’라는 글자가 멋들어지게 적혀 있었다. 로스트베인 공작가에서 보낸 것이었다. 공작 작위를 받게 되면서 이러저러한 사안 때문에 출석이 어려우니, 모쪼록 출석으로 인정해달라는 사유서였다. 그 밑에는 담당 교수들이 출석을 인정하는 확인 도장이 찍혀 있었다. 제라드는 나처럼 그 종이들을 내려다보더니, 이제야 생각난 듯 피식 웃었다. “아, 우리 집사가 보내 놓았던 모양이군. 그러고 보니 사소한 일은 알아서 처리해 두라고 했는데.” “…….” 나는 알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며 멍하니 퇴폐미남을 쳐다보았다. 99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어떻게 나만 빼고…… 너 혼자만 결석 사유서를…….” “나도 몰랐다니까.” 퇴폐미남이 킥킥거리면서 한 손으로 내 허리를 끌어안았지만, 나는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그리고 도무지 현실을 믿을 수 없어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럴 수가. 퇴폐미남마저 구제됐는데 나만…… 나만 퇴학인 거야? 왜 황궁 시종장은 이딴 결석 사유서를 나 대신 알아서 안 보내놨지?” 나는 애꿎은 황궁 시종장을 탓했다. 물론, 황궁에 있는 시종장이 나의 아스테시아 결석 사유서 따위가 뭔지 알 턱이 없었다. 퇴폐미남은 나의 허탈한 표정과 머리를 쥐어뜯은 자세가 재밌었는지 작게 키득대고 있었다. “앙증아, 한 번만 봐줘. 나 진짜 못 들었어. 다섯 번 결석하면 낙제라는 거 못 들었다고. 대체 언제부터 그랬는데?” “아스테시아가 고대에 설립되고 나서부터 쭉이요.” 앙증이가 귀엽게 앞발을 모으면서 종이를 거둬가며 대답했다. “…….” 난 할 말을 잃은 채로 앙증이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한번 귀여운 앙증이의 두 앞발이 책상 위에 있던 다른 서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 앞으로 휙 던졌다. “자. 퇴학 서류에 서명하세요.” “……앙증이 넌 나한테 아무런 애정이 없니? 그동안 쌓인 정이 없냐고! 날 퇴학시키고도 이 학교가 멀쩡할 것 같아? 난 황녀야, 황녀라고! 심지어 자칫하면 황제가 될 뻔했던 황녀!” “서명이나 빨리하세요. 저 바빠요. 학기 끝나면 종업식 파티에서 또 폭죽을 터트려야 한단 말이에요. 폭죽 점검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어요.” 앙증이가 서둘렀다. “됐어! 된장! 나도 안 다녀! 이딴 학교! 난 된장찌개나 먹고 싶을 뿐이라고!” 내가 소리 지르면서 휘리릭 서류 위에 대충 서명을 날려버렸다. “퇴학 처리는 완료되었으니 다음 학기부터는 오지 마세요. 기말 평가도 보실 필요 없구요. 짐은 학기 말까지 빼면 돼요.” “하…….” 난 아쉬워했다. 그동안 추억이 쌓인 이곳을 왠지 떠나기 싫었던 것이다. 적어도 1년은 무사히 다니고 싶었는데……. 한 학기도 안 돼서 짤리다니. “진짜로 내 예언대로 되었군. 내가 전에 너 퇴학 당할 거라고 했잖아.” 퇴폐미남이 날 향해 씩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데 왠지 기분이 잡쳤다. “어허! 무엄한지고! 감히 황제가 될 뻔한 황녀 앞에서 퇴학을 입에 놀려? 이 천하디천한 것이!” 내가 버럭 화를 냈다. 크흡, 입술을 꽉 깨문 퇴폐미남이 나를 살살 달래듯이 말했다. “놀린 거 아니다. 잘됐다는 거지. 어차피 넌 학업에 관심도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관심 없는 건 사실이었다. 원작 여주와 달리 나는 아직까지도 약초학에 대해서도 일절 머리에 집어넣은 것이 없었다. “우리 아직 연애 기간도 약간 남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공작가 영지에 내려가서 살아야 하잖아. 아스테시아에 다닐 시간이 없지 뭘. 그리고 넌 어차피 세, 기, 의, 검, 술, 천, 재, 잖아?” 제라드가 계속해서 날 달랬다. “……음. 세기의 검술 천재. 그렇지. 맞아. 오늘따라 너 맞는 말을 잘하는구나.” 나는 제라드에게 설득당해서 왠지 기분이 슬슬 좋아졌다. 그런 날 보고 제라드는 작전이 성공한 듯 싱긋 웃었다. “참, 알렉시스 공자. 그 된장찌갠지 뭔지 하는 요리가 먹고 싶다고요? 요리실의 어스아이들이 한번 만들어봤다고 하니까 먹고 가요. 내 입맛에는 안 맞았지만.” 우리 둘을 무관심한 얼굴로 쳐다보던 앙증이가 끼어들었다. “어? 엇?”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된장찌개를 만들었다고?” “그게 무슨 음식이지?” 옆에서 퇴폐미남도 살짝 관심을 보였다. 그도 따지고 보면, 영락없는 식도락 클럽 회원이 아니겠는가. “으음…… 오묘한 요리던데요.” 앙증이가 먼 하늘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그 후에 날 보고 말했다. “알렉시스 공자, 예전에 어스아이 하나 붙잡고 메주가 뭔지부터 시작해서, 된장찌개의 오묘한 맛까지 열심히 설명하고는 먹고 싶다고 하소연했죠? 덕분에 요리실 담당들이 콩으로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렇다고 그걸 진짜로 만들었다고?” 된장이란 게 어설픈 설명만 듣고 만들 수 있는 그런 부류가 아닐 텐데? 그리고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되는 거 맞아? 좀 이상했지만 어쨌든 난 이 희소식에 당장 일어나서, 퇴폐미남까지 내팽개치고 만찬장으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벌컥, 문을 박차고 만찬장에 들어서자마자 큰 목소리로 외쳤다. “된장찌개랑 밥 한 그릇 주세요!” 퇴폐미남은 도대체 내가 왜 이러나 하는 얼굴로 서둘러 날 뒤따라 들어왔다. 이윽고, 나는 어스아이 하나가 가져다준 은색 쟁반을 째려보았다. 그리고 쟁반 위에 놓인 동그란 사기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이럴 수가. 진짜 된장찌개였다. 적어도 모양은 완벽했다. 난 긴장감에 손을 달달 떨면서, 당장 한 모금 숟가락을 떠서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퉤!” 곧바로 뻥튀기가 튀겨졌다. 제라드는 한 입 맛을 보려다가, 곧바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 비록 퇴학은 확정되었지만 학기 말까지 짐을 빼면 된다고 하였으므로, 머물 수 있는 기간이 약간 있었다. 내가 퇴폐미남을 따라 처음으로 간 곳은 실전 검술 수업. 오늘이 하필이면 기말 평가 날이라고 했다. “여러분! 나 다시 보니까 반갑죠? 안녕?” 내가 유명인사답게 과거의 학우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어댔다. 그러자 무림 고수를 비롯한 학생들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일순 뜻밖의 반응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공자들이 뜻밖에도 정말 내가 반가웠는지 미소를 지었고, 누군가는 ‘황녀님, 황궁에서 잘 지내셨어요?’하고 큰 소리로 묻기도 했다. 검술 수업에서 이토록 나를 중심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던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잠깐 당황했다. 급기야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나는 흥분하여 선동을 시작했다. “동지 여러분! 실전 검술 2반을 물리칠 각오는 되었는가! 오늘이야말로 마지막 기회! 시체를 밟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오늘이야말로 놈들의 콧대를 눌러주자고!” 정작 오늘은 합동 수업이 아니라서 다니엘이 속한 2반은 나오지도 않은 상태였다. 나름 괜찮았던 주변 분위기가 싸늘하게 굳……은 게 아니라 예상 밖으로 공자들이 와르르 웃기 시작했다. “황녀님은 아직도 저러시네!” “변함없으시군요.” “보니까 진짜 반갑기도 해.” 오랜만에 보는 어깨춤 공자도,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무리 안에서 웃고 있었다. 뭐, 다들 웃으면 된 거지. 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의기양양해졌다. 그런 날 보고 제라드 역시 기분이 괜찮은지 웃고 있었다. “자, 이제 수업을 시작해야지.” 무림 고수가 부드럽게 말하며 나서자, 공자들도 집중했다. “알렉시스 공자. 자넨 이미 낙제했지 않은가. 학생인 양 수업 듣는 척하지 말고 이리로 나오게.” 무림 고수가 대번에 날 지적하며 연무장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제라드가 웃었고, 난 여전히 실실거리면서 연무장 밖으로 나갔다. “일전에 공지했다시피 오늘은 마지막 기말 평가를 하는 날일세.” 무림 고수가 공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각자 그동안 수련한 솜씨를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자유 검무로 평가를 하겠네. 시간은 각 5분 내외로 한정하기로 하고.” 자유 검무에서는 무엇이든 자신의 검술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면 되었다. 공자들이 연무장 가장자리로 물러선 가운데, 무림 고수가 출석부의 이름을 부르자 한 명씩 중앙으로 나와서 선을 보였다. 공자들에게 비록 대련 상대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 마치 보이지 않는 적이 있는 것처럼 검을 휘둘렀다. 나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제라드 로스트베인 공자. 나오게.” 마침내 무림 고수가 퇴폐미남의 이름을 불렀다. 제라드가 중앙으로 나오자,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이고 쳐다봤다. 제국 검술 최강자의 검무를 볼 기회는 그들에게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퇴폐미남은 나를 한번 일별했다가 씩 웃으면서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고대의 명인인 스타셰이드가 만들었다던 명검이 아름답고도 서늘한 자태를 드러내며 뽑혀 나왔다. 휙, 퇴폐미남이 몇 번 검을 휘두르며 연무장 위에서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사위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가운데,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남자가 검을 들고 궤적을 그렸다. 모든 이의 두 눈이 홀린 듯이 제라드에게 꽂혀 있었다. 툭, 퇴폐미남이 마지막 동작을 마치고 검 끝을 물 흐르듯이 검집 속에 납검한 순간. “와…….” “하…….” 공자들이 일제히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이 탄성을 뱉었다. 그림같이 아름다웠던 검무를 마치고 제라드가 나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멋지다. 진짜 너무 멋지다. 최고야. 이렇게 멋있을 수가.” 나는 그저 입을 헤 벌린 채 감탄한 얼굴로 연달아 중얼댔다. 완전히 넋이 나간 듯한 내 반응을 보고는 제라드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기분이 썩 좋은 모양이었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미소를 지은 채로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제라드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나의 심장이 콩콩대며 뛰었다. “어땠나?” 내 칭찬하는 말이 다시 듣고 싶은지, 제라드는 곁에 다가와서 물었다. 내가 뭐라고 할지 이미 알면서도. “진짜 최고였어, 제라드. 그렇게 멋있는 건 처음 봤어. 난 진짜로 완전히 반한 것 같아.” “…….” 반했다는 내 말에 제라드가 잠시 그대로 굳은가 싶더니, 눈가가 부드럽게 휘면서 활짝 웃었다. 눈앞에서 태양이 뜬 줄 알았다. 주위가 저절로 환해졌다. 퇴폐미조차 일거에 소멸되고 자리에 남은 건…… 대형견 같은 순수한 미소가 가득한 남자였다. “난 너한테 이미 옛날에 반했는걸.” 제라드가 그리 말하며 내 어깨를 손으로 끌어안았다. 난 힐끗 뒤를 확인했다. 혹시나 흔들리는 꼬리가 보일까 해서.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4번이 대형견으로 바뀌었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그 사이에 무림 고수가 다른 공자들을 더 호명하면서 검무가 계속되었다. 제라드가 하고 나서 그런지, 왠지 다른 검무는 시들해 보였다. 100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다들 한 학기 동안 모두 수고 많았네. 이걸로 이번 학기 수업은 마치기로 하겠네.” 마침내 무림 고수가 출석부를 덮으면서 말했다. 야호! 공자들이 환호했다. 무림 고수도 허허허, 하고 속이 시원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 “무림 고수님도 수고하셨어요!” 내가 큰 목소리로 외치자, 무림 고수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는 미소 짓는 인자한 얼굴로 내게 마치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걸어왔다. 그러더니 내 어깨를 두 번 토닥여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알렉시스 공자도 한 학기 동안 고생했는데 낙제를 준 건 나도 안타깝군. 결석 다섯 번이면 낙제인 것은 학칙이라서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네.” “아, 괜찮아요.” 내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손을 휘저었다. 무림 고수는 미소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덕담을 해주었다. “그래, 학교란 것은 별것 아닐세. 배울 것이 없다면 다니지 않아도 상관없지. 아스테시아에서 나가더라도 자네 앞에 언제나 행운이 있길 빌겠네.” “예. 고맙습니다. 고수님도 만수무강하시길 바랄게요.” 오는 말이 고우니 나도 가는 말이 고와졌다. “그래. 그리고 방을 어지른 것은 내가 미안하게 되었네.” “네?” 흠칫한 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사이에, 무림 고수는 하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뒤돌아서 가버렸다. “…….” 방금 엄청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뭐지? 나만 놀랐나 싶어서 고개를 천천히 돌려서 옆에 있던 제라드를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퇴폐미남도 눈썹을 들어 올린 채로 무림 고수의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방 벽난로에서 쉴드 포션 약병을 주워서 죽은 선황제에게 보낸 범인이…… 무림 고수였다고? 사람 겉만 봐선 모른다더니……. 그런데 뜻밖에도 별로 화는 나지 않아서 난 곧바로 털어버렸다. 카일처럼 날 죽이거나 해치려는 시도를 한 게 아니라, 그저 물건 하나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라서 그런가. 언젠가 우연히 다시 만나더라도 편하게 인사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제라드! 나 배고파.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나는 난 곧바로 퇴폐미남의 팔짱을 꼈다. 그가 피식 웃으며 날 내려다봤고, 나도 마주 싱긋 웃었다. *** 제라드와 함께 당도한 식도락 클럽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을 때. “어?” 난 두 눈을 손으로 비비고, 다시 방 안을 확인했다. “다니엘?” 내가 먼저 읊조렸다. “자넨 여기서 뭐 하나?” 퇴폐미남이 물었다. 우물거리며 열심히 무언가를 먹고 있던 다니엘이 우릴 보고는 꿀꺽 음식을 삼켰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너구리 공자와 다른 회원들이 만든 요리를 먹고 있었지. 이것저것 많아. 너희들도 빨리 와서 먹어.” 아니나 다를까 테이블 위에는 온갖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었다. 그제야 내 시야에 다니엘 외에 다른 인물들이 보였다. “너구리 공자, 그동안 잘 먹었어요?”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식도락 클럽에서는 오랜만에 만났을 때 하는 인사가 ‘그동안 잘 지냈어요?’가 아니었다. 바로 ‘그동안 잘 먹었어요?’였다. “그럼요. 매일같이 잘 먹고 있었답니다.” 너구리가 대답했다. 나와 퇴폐미남은 자연스럽게 자리에 착석했다. “냠냠신선님들도 그동안 잘 드셨죠?” 내가 주변을 향해 물었지만. 탁자에 앉아있는 대여섯 명의 냠냠신선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먹기에 여념이 없어서 내 말이 아예 귓등으로도 안 들리는 것 같았다. 음. 이게 정상이었다. 너무나도 평화로운 식도락 클럽이어서 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식탁 위는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이 가득해서 나는 질세라 포크질을 시작했다. “아, 참. 깜박 잊고 있었네요. 알렉시스 공자가 떠난 직후에, 제가 김치를 담갔었거든요. 그리고 마침 오늘 아침에 그 김치를 꺼내서 김치전을 만들어 봤어요.” 너구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아?” 김치전. 그게 있었지. 물론 나는 아무 기대가 없었다. 심지어 요리 담당 어스아이들조차 실패한 된장찌개를 맛보고 난 후인 지금은 더욱더. 너구리 공자는 뒤쪽에서 둥그렇고 널따란 트레이를 들고 왔다. 뚜껑을 열고 새로운 음식이 나타나자 순간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너구리가 김치전을 마치 피자 자르듯이 나이프로 잘라서 내 접시 위에 인가라도 받으려는 양 올렸다. “…….” 내겐 무척 익숙한 비주얼. 기대하면 안 될 줄 알면서도 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된장찌개의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겉모습만 진짜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비장함을 감추지 못하고 포크를 들어 김치전을 찍고 입으로 가져갔다. “맙소사…….” 내 입에서 뻥튀기가 터지지 않자, 퇴폐미남도 관심을 보였다. “맛있어. 진짜 김치전이잖아?” 이세계 비공식적 최강자가 요리까지 잘하다니. 어떻게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맛있다니 잘됐네요.” 너구리가 내 반응을 보고는 덤덤하게 한마디 했다. 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너구리에게서 김치전을 더 하사받은 다음에, 곧바로 접시에 코를 박고 흡입하기 시작했다. 행복했다. 그런 날 보고 다니엘뿐만 아니라 퇴폐미남, 다른 공자들까지 김치전을 각자 하사받고 한입씩 시식했다. “음…….” 퇴폐미남도 나쁘지 않은 표정이었다. “좀 맵긴 하지만 괜찮네.” 다니엘은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너무 맛있는데요?” “그러게. 정말 맛있어요.” “왠지 손이 자꾸 가네요.” 무려 내가 만든 떡볶이라는 괴식을 먹어봤던 냠냠신선들은 만장일치로 좋아했다. 다행히 김치전을 줘서 망정이지, 생김치를 밥도 없이 먹였다면 반응이 무척 달랐으리라고 나는 확신했다. 아무튼 이렇게 오손도손 식사를 하고 있자니, 온 가족이 모여서 명절 음식이라도 먹는 것 같은 분위기가 났다. “다니엘, 그럼 너도 이제 정식으로 식도락 클럽 회원인 거야?” 배부르게 여러 가지 음식을 처먹은 내가 빵빵해진 배를 두들기며 물었다. “응. 이런 데가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가입할 걸 그랬어. 방학 때 맛집 탐방도 같이 가기로 했어.” 다니엘이 입가심으로 사과주를 마시면서 대꾸했다. “맞다. 나도 갈래, 맛집 탐방!” 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손을 번쩍 들지 않으면 날 안 뽑아 줄 것 같았다. 누가 뽑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 아, 그럼 난 안 갈래.” 다니엘이 태도를 삽시간에 바꿨다. 쿡쿡거리면서 퇴폐미남이 옆에서 웃기 시작했다. 퇴폐미남뿐 아니라 옆에서 사과주를 마시던 다른 냠냠신선들까지 웃기 시작했다. “……?” 나만 모르나? 이들이 왜 웃는지? 너구리조차 작게 소리를 내어 웃더니, 나와 다니엘을 향해서 말했다. “두 사람 다 같이 가요.” 이세계 비공식적 최강자의 입에서 ‘같이 가자’는 말이 나왔다. 이건 누구도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다니엘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음. 알, 알겠습니다. 같이 가, 가죠. 너구리 공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다니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맛집 탐방에 복귀했다. 공포스러운 너구리의 모습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으리라. “제라드 공도 갈 거죠?” 너구리가 거절할 수 없는 언령을 자꾸만 내뱉었다. “알렉시스가 간다면 물론 나도 가야지.” 제라드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방학 때도 실컷 먹으러 다니자고!” 내가 소리쳤다. 더욱더 기합을 실어서 선동하듯이 연이어 외쳤다. “아스테시아의 무릉도원 식도락 클럽! 신선들의 집합소! 득도를 하려면 무조건 식도락 클럽으로! 맛집 탐방은 득도의 첫걸음! 맛집 탐방이여, 영원하라!” “…….” 침묵 속에서 후르릅, 여기저기서 사과주 마시는 소리만 짧게 들려왔다. *** 음식을 싸 들고 식도락 클럽을 나오자마자 나와 제라드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곧바로 옆방인 퀴즈 클럽의 문을 열었다. “피터! 우리가 먹을 거 가지고 왔……”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피터가 존재하지 않았다. 항상 있어야 할 자리에. 퀴즈 클럽 안에는 전에 가입했던 신입 회원 두 명만이 체스판을 앞에 두고 앉아있다가 소리가 난 우리 쪽을 보았다. “아, 황녀 저하시네.” “피터 공자를 찾으러 오셨나 봐요?” 체스를 두고 있던 신선 둘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네. 피터는 자리에 없어요?” 내가 물었다. “근래에는 이곳에 거의 안 오셨어요.” “도서관에 틀어박혀 연구 논문 쓰느라고 무척 바쁘세요.” 체스신선 둘이 나란히 대답했다. “연구 논문……?” 제라드가 처음 듣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논문이라니, 정말이지 나와는 괴리감이 거하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졸업하려면 그런 것도 써야 했어요?” 내가 영혼이 빠져나간 채로 물었다. 이렇게 되자 차라리 퇴학당한 게 잘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치솟았다. “아니요, 연구 논문까지 쓰는 학생은 거의 없는데요. 그런 거 안 해도 졸업 가능해요.” “피터 공자는 그냥 자기 이론을 발표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논문을 써서 교수 세 명에게 인가받으면 곧바로 교수도 될 수 있죠.” 체스 신선들이 대답했다. 내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피터가…… 교수 레벨이었다고? 쫘자작, 어디선가 지진 나는 소리가 들리면서 피터와 나 사이에 이제는 협곡 하나가 생기고 말았다. 101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논문 집필은 그동안 꾸준히 해오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지금은 마지막 마무리만 앞두고 있다고 들었어요.” “초고를 강의 시간에 공개했는데 내용도 깊고 획기적이에요. 피터 공자는 심지어 조기 졸업까지 하니까 정말 대단하죠.” 체스 신선들이 퀴즈 클럽 회장을 동동 하늘에 띄우면서 안면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논문 집필, 이론 발표, 조기 졸업, 곧바로 교수……. 나의 머리를 어지럽히는 단어들. 이 괴리감 정말 어쩔 거야. “어……. 그, 그렇구나. 하하하. 진짜 대단하네.” 그렇게 말한 뒤, 나는 식도락클럽에서 싸 온 음식을 체스신선들의 품에 억지로 떠넘기듯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대로 빙그르르르 돌아 퀴즈 클럽에서 로봇처럼 삐걱삐걱 팔다리를 움직여 빠져나왔다. 안녕히 가세요, 음식 감사합니다, 라는 체스 신선들의 인사말이 들려오길래, 뒤는 안 돌아봤어도 손까지 흔들어줬다. 제라드가 문을 닫고 뒤따라오더니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이제 도서관에 피터 공자 만나러 갈까?” “아, 아냐. 논문 쓰느라 바쁘대잖아. 불쌍한 녀석 같으니라고.” 내가 대꾸했다. 그사이에 나는 피터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협곡을 혼자 속으로 메꾸는 중이었다. “나도 궁금해지는군. 피터 공자하고 이렇게 다른데, 둘이 어떻게 절친이 되었을까.” “…….”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제라드는 웃고 있었다. 나 역시 입가에 비직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그치. 피터는 내 절친이지. 이제야 너도 인정하는구나?” 피터는 내가 가장 아끼는 친구였다. 심지어 싸바 녀석까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친구. “가자고! 도서관에!” 급격히 태세를 전환해서 돌격하는 나를 보고 제라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 도서관에선 피터가 꽃미모를 뽐내면서 책 속에 파묻혀 있었다. 아스테시아의 도서관은 상상 초월하는 규모로 무려 10층이 넘고 그만큼 복잡했지만, 피터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워낙 절세미남이라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존재여서, 다른 공자들에게 피터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니 다들 그의 위치를 알고 있어서 금세 찾을 수 있었다. 피터를 발견한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은근슬쩍 다가가서 그가 집필하고 있는 논문 제목을 훔쳐보았다. [미댜르 법칙에 관한 베라윌과 융커메 특성 비교에 대한 연구] 아. ……외계어였다. 머리가 어질해진 나는 곧바로 뒤로 엉거주춤 물러섰다. 논문 내용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알고 싶은 의지가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나저나 피터는 전공이 뭘까?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거기, 둘. 미안하지만 내가 좀 시간이 없어 그러는데, 이 책들 좀 찾아서 갖다주겠어?” 조용한 가운데 피터가 불쑥 입을 떼며 종이 여러 장을 한 손에 들고 흔들길래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심지어 병아리는 우리를 향해 고개조차 들지 않은 상태였다. “우, 우리한테 말한 거야?” 내가 웅얼거리듯 물었다. “그럼 너희들 말고 누가 있어?” 피터가 여전히 책에 집중한 채로 대꾸했다. 난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의 말대로 근처에는 나와 제라드밖에 없었다. 뭘까. 연구 논문을 집필할 때는 기척을 인지하는 초능력이라도 발달하는 걸까. “갖다줄 거야, 말 거야? 안 갖다줄 거면 방해되니까 좀 나가고.” 병아리가 다시 한 손에 쥔 종이들을 흔들어대며 우릴 귀찮아하듯 말했다. 본디 만나면 인사는 잘하던 앤데…… 반갑다는 인사조차 생략이었다. 연구 논문을 집필할 때는 성격도 변하는 걸까. “책 말인가.” 뜻밖에도 제라드가 다가가서 순순히 종이 여러 장을 받아들었다. 이렇게 나와 제라드는 졸지에 같이 책 심부름꾼이 되어버렸다. “그 리스트에 적힌 거, 다. 좀 갖다줘.” 피터는 여전히 우리를 보지도 않고 덧붙였다. 종이를 꽉꽉 채운 책 제목들. 심지어 분류 기호 따위 없었다. 그냥 노가다로 찾아야 하는 것. “…….” “…….” 막막함이 우리 둘을 덮쳤다. “뭐해? 안 가고?” 병아리는 우리가 가만히 서 있는 게 거슬리는지 재촉했다. “아, 알았어.” 그날 나와 제라드는 하루 종일 도서관을 돌아다니면서 책을 날라주었다. 싸바는 옛날 같으면 코웃음을 치면서 이런 일은 손도 까딱 안 할 텐데, 의외로 군말 않고 나와 같이 도서관을 수색했다. 이런 걸 보면 이 녀석도 좀 변한 건가? 그렇게 책을 찾으러 다니다가,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곳에서 불현듯 제라드가 날 붙잡고 몰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달다.” 내가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음?” “달다고. 네 입술.” “…….” 제라드는 입가에 미소를 올리면서도 왠지 귓불을 붉혔다. 그다음에는, 다른 조용한 구석에서 내가 먼저 제라드를 붙잡고 까치발을 들고서는 입을 맞췄다. 여전히 그의 입술은 달았다. 사람 없는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며 몇 번이나 그런 짓을 반복했다. 사이사이에 한아름 책도 찾아서 피터에게 갖다주었다. 종이에 적힌 책을 전부 다 갖다주었을 때, 마침내 피터가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피터가 우리를 한번 쳐다보곤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단안경을 고쳐 쓴 뒤 책 속에 고개를 파묻으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앞으로 도서관에서 몰래 키스는 그만해.” “…….” “…….” 뜨끔. 나와 제라드가 서로를 쳐다봤다. 얼굴을 보자마자 어쩐지 실실 웃음이 나와서 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라드가 손으로 입을 막고 어깨를 떨면서 날 끌고 나갔다. 우리는 바람처럼 도서관을 미친 듯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바깥 공기를 맡자마자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 종업식 전야제에서는 언제나 대대적인 파티가 열린다. 이를 위해서 며칠 전부터 학교 안으로 줄줄이 소포들이 좌자작 들어왔다. 때로는 하인들이 직접 마차를 타고 학교 앞까지 짐을 갖고 오기도 했다. 그 소포와 짐들이 전부 무엇인가 하면, 바로 파티에서 공자들이 착용할 의상이었다. “마치 핼러윈처럼, 종업식 축하 파티에는 특이한 변장을 하는 게 아스테시아의 전통이라 이거지.” 제라드에게 부탁하면 간단히 의상을 구할 수 있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손으로 알아서 만들어보고 싶었다. 물론 난 이미 아스테시아에서 퇴학 처분된 상태지만. 파티에 간다는데 누가 날 막을 것인가? 참고로, 퇴폐미남과 나는 각자 무엇으로 변장할 건지를 서로에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야 만났을 때 놀랄 게 아닌가. “후후.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고 미라가 되어보자. 간단하네.” 붕대는 예전에 남장을 할 때 쓰려고 내 방에다 많이 쟁여놨기 때문에 재료는 문제없었다. 변장도 간단했다. 나는 온몸과 얼굴을 붕대로 돌돌 말고, 두 눈만 밖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밖은 해가 질 무렵으로 어둑어둑해질 시간. 제라드를 만나러 가려고 기숙관 밖으로 나와서 룰루랄라 걷고 있는데. “흐이익!!” 근처를 지나가던 어느 공자가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나자빠졌다. “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넘어진 공자를 바라보았다. 공자는 고양이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난 상대가 누군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녀석이 벌벌 떨며 무서워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었다. “비명 소리가 왠지 귀에 익은데? 게다가 고양이 가면이라? 혹시 1번 대형냥? 너니?” “야이씨!” 공포에 떨고 있던 다니엘은 익숙한 내 목소리를 알아듣자마자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렉시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어? 내 미라 변장이 그 정도였어?” 이상하네? 이게 그렇게 무섭다고? 너무 허술하게 붕대를 둘러서 누가 봐도 미라 같지 않은데……. “미라고 뭐고 야 인마. 붕대로 얼굴까지 다 가리고 그놈의 두 눈깔만 보이게 하면 어떡해!” 대형냥이 이를 드러내며 하악거렸다. “제일 소름 끼치고 결정적인 부분만 허공에 동동 떠다니게 하면 어떡하냐고!” “…….” 이 냥아치 녀석이 말하는 본새하고는……. “참나. 뭐가 소름 끼친다는 거야! 내 눈깔이 뭐가 어때서!” 내가 두 눈을 부라리면서 다그치자. “으아악! 제발 눈 부릅뜨지 마!” 고양이 가면을 쓴 1번 대형냥이 손을 휘저으며 마구 발톱을 세웠다. “아무리 내가 영원한 네 편이라도 정말 이건 아니야!” 다니엘의 목소리에 실린 공포의 감정이 참으로 절절했다. 난 살짝 미안해졌다. “아이고. 집사 주제에 우리 냐옹이를 학대한 기분이군. 알았어. 눈 부릅 안 뜰게.” 난 순순히 말하며, 일단 눈을 허공에 동동 띄우지 않으려는 조치에 들어갔다. 눈을 강조하지 않기 위해서 그냥 낯짝을 다 드러내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얼굴에 칭칭 감은 붕대를 열심히 풀기 시작했다. 몸에 감은 것까지 풀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중간에 붕대가 엉켜서 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열심히 그걸 풀었다. “냐옹아, 제라드도 곧 만나기로 했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랑 같이 놀……?” 마침내 꼬인 붕대를 다 풀고서 고개를 들었지만. “…….” 앞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대형냥은 저 멀리 어딘가로 조용히 도망가버린 뒤였다. “후. 역시 고양이군. 발걸음 소리도 나지 않는구나. 아주 사뿐사뿐해.” 나는 감탄하여 손뼉을 짝짝 쳤다. 1번이 개에서 고양이로 전직한 후 완벽하게 적응했다는 뜻이었다. 전부 다 내 덕분이었다. 102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광장에서 만난 퇴폐미남은, 다른 공자들과는 달리 별 변장 없이 평소 모습대로 나온 상태였다. “대체 넌 뭘로 변장한 거야?” 아무리 봐도 퇴폐미남이 뭘로 변장한 건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미라, 다니엘은 고양이. 퇴폐미남은 그냥 평소보다 조금 더 좋아 보이는 옷을 입고 나온 게 전부였다. “절세미인.” “……?” 난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절, 세, 미, 인.” 퇴폐미남은 씩 웃으며 또박또박 한 글자씩 끊어서 대답해주었다. 난 그만 말문이 꽉 막혀버렸다. 절세미인이 맞기는 한데……. 아니 그렇다고 그걸로 변신을……. “사실 변장할 것이 없더군. 그냥 평소 모습 그대로 나오면 되니까.” 안타깝게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내 얼빠진 표정을 보더니 퇴폐미남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바로 그때. [노스브리치 나무 올라가기 대회! 지금 바로 숲으로 가세요!] 어느 공자들 두 명이 이렇게 적인 커다란 나무 팻말을 들고 광장을 돌아다니는 게 아닌가. “노스브리치 나무 올라가기 대회?” 어디서 많이 들어본……. 그러고 보니, 피터가 이런 대회가 종업식 전야제에서 열린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지. 나와 퇴폐미남은 잠깐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가, 곧바로 동일한 방향으로 걸음을 뗐다. 아스테시아 뒷문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공자들도 팻말을 보고는 마찬가지였는지 우르르 숲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무 앞에 도착해보니까, 해 질 무렵이지만 횃불이 여기저기 밝히고 있어서 밝았다. “피터, 여기 있었구나.” 절친이 보여서 얼른 다가갔다. 그도 우리를 발견했다. “나인지 어떻게 알았지? 티 나?” 피터가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그는 얼굴을 검은색 반가면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난 그를 몰라볼 수가 없었다. “단안경을 뺐어야지, 어리숙하긴.” 피터의 검은색 반가면은 한쪽 눈에 단안경이 부착되어 있는 디자인이었다. 나름 세련되고 예뻐 보였지만, 피터의 정체는 그대로 발각이었다. “단안경을 쓴 공자들이 우리 학교에 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만으로 날 알아봤다고?” “그래. 단안경은 소품일 뿐이고 네 병약미는 멀리서도 숨길 수가 없거든.” “…….” 피터는 그냥 무감한 듯 그런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해골이 그려진 모자와 후크가 달린 장갑을 끼고 있었으며 선원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었다. 해적으로 변장한 것이었다. “논문은 완성했나?” 제라드가 말을 건넸다. “어. 고생 좀 했지. 그날 책 찾아준 건 다시 한번 고맙네.” 피터가 말하자 제라드도 고개를 끄덕했다. 우리 세 사람은 나란히 서서 노스브리치 나무 위를 응시했다. 우리 말고도 많은 구경꾼들이 주위에 있었으며 다들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노스브리치 나무 올라가기 대회를 시작합니다! 첫 도전자는! 두구두구두구! 브루스 라일리!” 그렇게 공자의 이름이 불리었다. 첫 번째 도전자가 나무 앞에 서더니, 본인이 어디선가 가져온 밀가루 같은 하얀 가루까지 손에 묻혔다. “반드시 올라간다! 꼭대기까지! 아자!” 도전자가 기합을 넣으면서 곧바로 나무에 날렵하게 달라붙었다. 나름대로 경험이 많은 공자였는지, 크게 힘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슥, 슥, 슥, 올라가는 모양이 제법이었다. “궁금하지 않아?” 불쑥 피터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나무가 아직도 환각으로 도전자를 떨어뜨릴 만큼 마력을 가지고 있을지. 딱 하나 남은 열매는 전에 어떤 도른 공자가 먹어버렸는데.” “…….” “…….” 우린 여전히 나무 위를 보고 있었다. 나도 궁금했다. 내가 알기로 노스브리치 복숭아를 먹은 사람은 나와 앙증이 둘이었다. 그러나 과거에 어스아이들 몇 명이 더 먹었을 수도 있었다. 앙증이가 먹었다는 건, 다른 어스아이들도 환각을 보지 않고 이 나무를 올라가는 게 가능하다는 추측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복숭아를 다 따먹고 딱 하나 남은 걸 내가 먹은 거라면? 그 열매가 노스브리치의 마력이 마지막으로 집약되어 있었던 것이라면? 과연 노스브리치 나무는 아직도 나무를 오르는 도전자에게 환각을 보여줄 만큼 마력을 가지고 있을까? 뜻밖에도 첫 번째 도전자가 선전하고 있는지,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 “오오오오오! 내 손에서 거미줄이……! 나는 이제 초능력을 가진 거미 인간이다아아아악!” 첫 번째 도전자가 괴성을 지르며 두 팔을 미친 듯이 휘두르면서 떨어지고 있었다. 나무 아래에 설치된 커다란 그물 위로 도전자가 내리꽂혔다. 반동 때문에 트램펄린에 오른 것처럼 몸이 통, 통, 하고 튀어 오르다가 멈췄다. 사람들이 서둘러 도전자를 그물에서 끌어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몽롱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향해서 촥, 촥, 손목에서 거미줄을 내뿜는 시늉을 하고 있는 도전자. “날아다닌다! 나는 날아다닌다!” 주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웃긴지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스파이더맨인가…….” 내가 중얼거렸고. “환각은 여전하군.” 제라드는 무심했으며. “나무의 마력은 변함없네.” 피터가 결론을 내렸다. 이후 스물이 넘는 도전자가 더 도전했지만, 아무도 꼭대기까지 오르지 못했다. 환각에 빠져 정신 못 차리고 허우적대는 바람에 구경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을 뿐이다. *** 종업식 축하 파티는 중앙홀에서 열렸다. 입장을 하고 보니 음악 클럽 멤버들로 이루어진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발을 구르는 탭댄스 비슷한 춤을 단체로 추고 있는 공자들이 분위기를 달구는 중이었다. 갖가지 독특한 분장을 한 여러 공자들이 술과 디저트 등을 들면서 서로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알렉시스 공자! 포도주 좀 마셔보세요. 맛있어요.” 뜬금없이 웬 천사처럼 아름다운 절세 미녀가 다가와서는 내게 말을 건네는 게 아닌가? “……네? 누, 누구세요?” 나는 넋이 나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어안이 벙벙해서 상대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다들 변장을 하는 날이었으므로, 개중에는 여장을 한 공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런데 내게 말을 건 공자는 아무리 여장을 했다고는 하나 정말 지나치게 아름다운 미녀였다. 너무 눈이 부셔서 눈을 똑바로 맞추기 힘들 지경이었다. 게다가 이 화려한 드레스. 변장 콘셉트를 보아하니 역시 천사로 변신한 것 같았다. “누구라뇨? 저 모르시겠어요?” 천사처럼 아름다운 그 미녀가 왠지 섭섭해하는 기색으로 되물었다. “어…….” 나는 당황해서 도움을 바라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제라드도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원래대로 입고 계시면 변장이 아니잖아요.” 피터는 상대의 정체를 아는지 이렇게 말했다. “……어?” “……흠.” 나와 제라드는 순간 절세 미녀의 정체를 짐작하고는 놀라서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래도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아스테시아에서 드레스를 입어 보겠어요?” 천사 같은 절세 미녀가 대꾸했다.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니까 왠지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했다. 자세히 보니 탐스럽고 시원해 보이는 이목구비에도 오밀조밀 귀여운 구석이 있었으며, 건강하게 통통한 체구에는 감히 넘볼 수 없는 당당함이 넘쳐흘렀다. 게다가 특유의 무덤덤한 말투와 목소리. “너……구리 공주님?” 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읊조렸다. 그러자 하늘에서 강림한 천사 같은 절세 미녀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이제야 알아보네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다들 나를 못 알아보지?” 너구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을 들이켰다. “마셔보세요, 이거. 진짜 맛있어요. 저쪽에 많아요.” 어쨌든 본론은 맛있는 포도주를 먹으라는 친절한 제안이었다. 겉모습은 절세 미녀일지라도 속마음은 식도락 클럽 회장이었던 것이다. “아. 그럴게요. 고마워요.” 내가 말하자, 너구리는 고개만 살짝 끄덕여주더니 냉큼 핑거푸드가 있는 테이블 쪽으로 가버렸다. “이래서 자네도 처음에 남장한 공주를 못 알아봤던 거였군, 피터 공자.” 제라드도 새삼 세상의 이치에 탄복을 하면서 피터에게 말을 건넸다. “그랬지. 나도 처음엔 얼마나 놀랐는지.” 피터가 하하, 하고 작게 웃더니, 마치 우리 둘은 알아서 좋은 시간 보내라는 듯이 빠져주었다. 그가 너구리 공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핑거푸드를 집어 드는 것이 보였다. 나와 제라드는 식도락클럽 회장이 추천한 포도주가 놓인 테이블 쪽으로 가서 각자 한 잔씩 손에 들었다. 한 모금 음미해보니 과연 맛이 무척 깊었다. “알렉시스, 너 요즘 눈빛이 좀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아.” 나와 포도주를 들이켜던 제라드가 불쑥 말을 꺼냈다. “음?” 내가 두 눈을 멍하니 깜박였다. 그런 날 바라보며 제라드가 진지하게 추가했다. “손도 이제 안 떨잖아. 예전에는 시도 때도 없이 달달 떨었는데 말이지. 처음에 나는 네가 진짜 무슨 금단 증상에라도 시달리는 줄 알았거든.” “……어?” 나는 내 손을 홱 내려다보았다. 포도주 잔을 꽉 잡고 있는 손. 전혀 떨지 않고 있었다. “…….” 뭐지? 보약을 잘못 먹은 후유증은 어디로 간 것인가? 내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어느덧 감쪽같이 치료되어 있었나? 103 미친 여주는 엔딩을 모른다 “거울 어딨어? 나 눈깔 좀 봐야겠어.” 나는 파티장에 있지도 않은 거울을 찾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울은 없었지만 나는 대용품으로 와인 잔들이 놓여있던 트레이를 발견했다. 그 위에 놓인 와인 잔들을 서둘러 다른 트레이에 옮겨놓은 후, 빈 트레이를 집어 들고 내 얼굴을 비쳐 보았다. “……내 눈빛이…… 아직도 정상이 아니잖아! 그대로인데 뭘.” 실망한 내가 제라드를 보며 투덜댔다. 하긴 오늘도 밖에서 내 눈깔을 보고 다니엘이 기겁을 하면서 나자빠졌는데, 그 사이에 눈깔이 정상이 됐을 리 없지! “아냐, 진짜다. 진짜 약간 바뀌었다.” 제라드는 웃지도 않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예전에는 ‘도무지’ 범접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살짝’ 범접할 수 없는 눈빛이 되었지.” “…….” 그게 그거라는 얘기였다. 나는 트레이를 도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어떤 눈빛이든 나는 괜찮다. 설령 정상으로 되돌아와도, 네가 내 동류라는 건 숨길 수가 없으니까.” “……아, 그러셔?” 내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언젠가 이 녀석은 내가 자기 동류 같아서 내 눈깔이 좋다는 망발을 내뱉은 적이 있었다. “그래. 난 절세미인이잖아.” 제라드가 쿡 하고 웃었다. “네가 나와 동류 같다는 말은, 그러니까…… 너라면 무조건 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쁘다는 말이야.” 제라드의 입에서 낯뜨거운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왔다. 그의 시선이 내게 부드럽게 와서 닿았다. 나는 귓가가 왠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헛기침을 했다. “그, 그래?” “응.” 제라드가 고개를 끄덕했다. 그가 포도주를 나른하게 삼키자, 사방에 퇴폐미가 절절 흘렀다. 퇴폐미 공격을 받았지만 나도 이 정도는 이제 익숙해졌기 때문에 태권도 방어 자세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춤출까?” 제라드가 빈 포도주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에 내게 제안했다. 우리는 홀 중앙으로 나갔다. 제라드가 신사다운 제스처로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왠지 로맨틱한 분위기가 흐르고……. 우리는 우아한 자세로 손을 맞잡고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저런 흥겨운 탭댄스 음악에도 용케 저런 눈꼴 시린 춤을 추네.” 다니엘이 저쪽에서 대단하다는 듯이 우릴 바라보며 중얼댔다. 우리 주변에는 아스테시아의 다른 공자들이 온갖 변장을 한 상태로 미친 듯이 탭댄스를 추고 있었다. 탁! 탁! 타타탁! 탁탁! 탁탁! 구둣발이 홀을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아주 경쾌한 와중이었다. 나와 제라드는 마치 귓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들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채로, 손을 맞잡고 부드럽게 왈츠춤을 계속했다. “장난 아니네요, 제라드 공자도.” 마침 다니엘 옆에서 열심히 핑거푸드를 먹고 있던 너구리가 입을 열었다. “네,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저 도른 놈을 아무렇지도 않게 꼬드기다니……. 훗날이 무섭지도 않은지.” 마침 너구리 옆에서 같이 서 있던 병아리도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맞장구를 쳤다. “식도락 클럽에서도 항상 저랬잖아요. 서로 아주 장단이 잘 맞았죠.” 갑자기 그 옆에 있던 냠냠신선1이 포크 파이를 우물거리면서 끼어들었다. “아무리 장단이 잘 맞았기로서니 두 사람이 이렇게 될 줄은 솔직히 몰랐어요. 하긴, 알렉시스 공자가 여자인 줄은 몰랐으니까.” 마침 다가온 냠냠신선2가 치즈스틱을 집어 들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정말 멀리서 봐도 아주 무시무시한 커플이네요.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분위기에서 분위기를 잡을 수 있는지.” 어느새 냠냠신선3이 나타나 포도를 집어 앙 베어 물었다. “내가 영원히 알렉시스 편이기는 하지만, 둘 다 정상은 아닌 놈들이니까요.” 다니엘이 무심히 대꾸했다. 온갖 변장을 한 탭댄스 공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분위기 잡으며 스텝을 밟고 있는 나와 제라드를 모두들 지켜보았다. “그나저나 피터 공자, 요즘 얼굴이 유독 말이 아니네요? 연구 논문을 마쳐서 그런가. 그럴수록 잘 먹어야죠.” 너구리가 특유의 무덤덤한 낯으로 말을 건넸다. “마침 우리 식도락 클럽에서 방학 때 맛집 투어를 가는데 같이 갈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혹시, 알렉시스도 가나요?” 피터가 머뭇거리면서 되물었다. “네.” 너구리가 대답했다. “그럼 안 가겠습니다. 어차피 황위에 오르면 시간도 없을 테니까요. 아쉽지만 할 수 없네요.” 피터가 유유히 마수에서 빠져나갔다. “아, 좋겠다.” 다니엘이 부러워했다. 그는 일전에 너구리 공자의 제안으로 울며 겨자 먹다시피 해서 맛집 탐방에 동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다니엘 공자, 심심하면 누이도 맛집 탐방에 데리고 오세요. 저희 맛집 탐방은 누구나 환영이랍니다.” 너구리 공자가 무덤덤한 말투로 다니엘에게 제안했다. 그러자. “……저, 그런데. 아까부터 누구세요?” 다니엘은 절세 미녀의 정체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푸흡―! 피터는 그게 웃겼는지 갑자기 어깨춤을 추면서 몸을 들썩거렸다. 마침 근처에 다가온 원조 어깨춤 공자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를 잠깐 누군가에게 빼앗긴 줄도 모르고 아무렇지 않게 핑거푸드를 집어 들고 가버렸다. 무릉도원에 가느라 정신없는 냠냠신선님들도 절세 미녀의 정체는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알아보지 못했을 게 분명한데, 아무도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이 와중에도 먹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웃음기를 그친 피터가 다니엘에게 절세 미녀의 정체를 알려주자, 다니엘은 세상의 미스터리에 관하여 고찰하는 묵념의 시간을 잠시 홀로 가졌다. 흥겨운 음악과, 탭댄스의 우렁찬 발소리가 아스테시아의 홀 안을 가득 메웠다. “바람 쐬러 테라스에 갈까.” 실컷 왈츠를 춘 후, 숨을 고르던 내가 제라드의 손을 잡아끌었다. 파티장에는 각 테라스로 연결된 몇 개의 문이 있었고, 우리는 그중 하나로 나갔다. 테라스에는 아무도 없었다. 홀 안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귓가에 아련히 들려왔다. 우리는 어둑어둑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테라스 난간에 기대었다. 제라드가 날 끌어안고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날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서로의 빛나는 눈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제라드가 몸을 숙이더니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 이건……. 어디선가 많이 본 자세에 나는 일순 넋이 살짝 나갔다. 제라드가 품속에서 아주 작은 반지 케이스를 꺼내어, 뚜껑을 열고 내게로 내밀며 미소 지었다. “알렉시스. 나랑 결혼해 줄래?” 잠시 사위가 정적에 잠긴 기분이었다. 테라스 너머 정원에서 풀벌레 소리와, 나뭇잎이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홀 안에서는 약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 영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은 찰나의 시간 속에서 나는 제라드를 바라봤다. 누군가는 너무 전형적인 프로포즈라고 할지 모르지만, 제라드의 얼굴에 떠오른 간절한 표정을 바라봤을 때 나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속에서 불꽃처럼 행복이 솟아나고 있었다. “응.” 나는 목소리를 쥐어짜듯이 간신히 짧은 대답을 뱉었다. 순간, 간절했던 제라드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피어나갔다. 그는 반지를 케이스에서 빼내어 내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를 두 팔에 가두듯이 끌어안고 거의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이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반지가 끼워진 내 손이 정신없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펑! 펑……! 그때 이상하게도 내 귓가에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청혼을 받으면 이런가? 이런 소리가 들리고, 저런 불꽃이 하늘에……? 나와 제라드는 입맞춤을 그친 채 밤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불꽃을 올려다봤다. 하하하, 나는 마치 그 불꽃이 우리의 앞날을 축복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소리를 내어 웃었다.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제라드도 나와 마찬가지로 웃고 있었다. 홀 밖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에, 파티장 안에 있던 공자들과 음식을 나르던 어스아이들이 우르르 테라스 쪽으로 몰려나왔다. 다니엘과 피터도 이 구경을 놓치긴 싫었는지 테라스로 나왔고, 나와 제라드를 보더니 곁으로 알아서 다가왔다. 펑! 펑……!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은 참 아름다워서 모두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꺄하하하!” 테라스 너머 근처에 보이는 작은 탑 위에서 유독 특이한 웃음소리가 들려와 공자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되었다. 멀리서 실루엣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앙증이였다. 그 작은 어스아이는 몹시 즐거운 웃음소리와 함께 깡총깡총 뛰어다니며, 폭죽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우히히히힛!” 방정맞게 탑 위에서 뛰어다니는 앙증이의 실루엣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가 나도 모르게 한마디 했다. “가만 보면, 우리 학교에선 교장이 제일 미친 것 같아.” “…….” “…….” “…….” 주위에 있던 절세 미남들의 고개가 휙 하고 일제히 내게 꽂혔으며, 과연 그럴까 하는 표정으로 날 빤히 쳐다봤지만. 펑! 펑! 불꽃놀이가 무척 화려하고 장관이었으므로, 그들의 시선은 도로 하늘로 향했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끝>